자본론을 읽자[자본론 강독]-①

자본론을 읽자[자본론 강독]-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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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미나 참석 : 이재유, 김선이, 김성심, 나태영, 박종호, 신재길, 신준하, 윤지미, 최혜진

정리 : 신재길(2012교육강좌 수료, 한철연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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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년도 교육강좌 후속 세미나로 [자본]을 읽고 있습니다. 세미나 팀에서 매번 정리하여 웹진에 연재하기로 하였습니다.

 

‘자본론’은 유럽사회의 변화에 영향력을 가장 많이 끼친 책으로 성경 다음 자리를 차지한다고 한다.

그러나 구소련이 몰락하자 사람들은 자본론이 틀렸다고 생각했으며 자본론은 사람들의 관심에서 점차 멀어졌다. 맑스의 자본주의 이론이 틀렸다는 생각이 거의 상식화 되었을 때, 1997년 우리나라에서는 외환위기가 몰아쳤고, 2008년 세계적 금융위기가 터졌다. 이러한 세계적 경제위기는 단순한 경기순환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구조적 문제에서 기인한다는 인식이 분명해지자 자본론은 다시 주목받게 되었다.

 

나 자신의 경우에도 2008년 이후에 자본론을 읽어 보고자 했으나, 혼자는 어려워 하지 못하다가 한국철학사상연구회에서 자본론 읽기 모임이 만들어져 참여하게 되었고 이 지면을 빌려 자본론을 정리해 보려고 한다.

대체로 개념 정리를 기본으로 하고 자본론 읽기 모임의 후기로 간추려보고자 하나, 철학과 경제를 아울러 일반 경제관련 책들에 비해 어려운 자본론을 제대로 정리할 수 있을지 두려움이 의욕을 앞선다. 맑스는 자본론이 노동자들에게 많이 읽혀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무기가 되기를 염원했지만, 나 자신만이라도 새롭게 변할 수 있기를 기대하며 정리하고자 한다.

 

제 1 편 상품과 화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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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 장 상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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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 절 상품의 두 요소: 사용가치와 가치(가치실체, 가치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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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본론의 연구 대상과 방법 ]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부는 하나의 ‘거대한 상품집적’으로 나타나고, 하나하나의 상품은 이러한 부의 기본형태로 나타난다. 그래서 우리의 연구는 상품의 분석부터 시작한다.”(자본 1권, 강신준 옮김, 도서출판 길, p87)

 

이 문장은 자본론 본문의 첫 시작 문장이며, 가장 핵심적인 문장이다.

그러나 바로 이 첫 문장부터 어려움에 봉착한다. 먼저 ‘자본주의 생산양식’이라는 낯선 용어가 앞길을 막아선다. 아마도 맑스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구조와 원리를 밝히는 것을 자본론의 최종 목표로 삼았을 것이다. 우리 또한 맑스의 이야기를 따라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구조와 원리에 차차 접근해보도록 하자.

다음으로 경제학의 연구대상인 ‘부’에 대해서 보자. 경제학은 예술도 아니고 정치도 아닌 ‘부’가 그 연구대상이 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의 ‘부’는 무엇을 말하는가? 우리는 보통 ‘부’하면 돈을 생각하지만 맑스는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부는 ‘상품’이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돈을 ‘부’로 보는 우리의 생각이나 상품을 ‘부’로 보는 맑스의 생각은 다른 것인가? 다르지 않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돈이란 상품의 특수한 형태이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는 상품관계 속에서 살아간다. 우리의 삶은 상품을 생산하고 교환하고 소비하는 과정이다. 이런 과정을 떠나서는 살아갈 수 없다. 돈은 우리 삶을 사는데 꼭 필요한 상품을 살 수 있게 해 준다. 그래서 우리는 돈에 집착한다. 해고되거나 취직할 수 없으면 생존자체가 위협받게 되어 우리는 돈을 얻기 위해 우리자신도 상품으로 판다. 모든 것은 상품이 되지 않으면 생존할 수가 없다. 상품은 우리의 삶의 현실을 대표한다. 맑스는 이런 상품이 무엇인가 묻고 그 답을 찾아 여행을 떠난다.

 

맑스는 ‘상품’에서 출발하여 어느 곳에 도달할 것인가?

 

하비는 자본론에서 ‘나타나다’에 주목한다. 영어의 appear, 독일어의 erscheinen 는 그 명사형들이 철학용어로 ‘현상’을 뜻한다. 현상이란 “감각, 직관, 직접적 경험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사물, 과정 등의 외적인 성질의 총체”라 한다(철학대사전, 동녘). 현상은 본질적인 징표뿐만 아니라 비본질적인 징표도 나타낸다고 한다. 학문은 바로 사물의 현상에서 출발해서 사물의 본질을 해명하는 것이다. 맑스는 자본주의라는 주어진 현실에서 상품이라는 현상을 포착한다. 상품을 현상으로 본다는 것은 상품의 외적인 성질에서는 드러나지 않은 자본주의의 본질이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럼으로서 이 상품이라는 현상을 통해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본질에 도달할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 길을 갈 것인가? 맑스는 상품의 ‘분석’으로 간다고 한다. 분석이란 “전체를 그것의 부분들로, 한 체계를 그것의 요소들로, 사유에 의해서나 또는 실제로 분해, 해체, 해부하는 것을 본질로 삼는 인식 절차”이다(철학소사전, 동녘). 분석이란 말 그대로 나눈다는 것이다. 나눈다는 것은 단순화시킨다는 의미다. 어떤 문제가 복잡해서 잘 풀리지 않을 때 사람들은 충고 한다. 문제를 단순화시키라고. 바로 그런 의미에서의 단순화가 ‘분석’의 핵심이다. 문제가 복잡하면 그 문제를 여러 단계나 작은 문제들로 나누어 그 중에서 중요한 것을 끄집어내어 풀어가면 명확하게 문제가 드러나고 그에 대한 해결의 대안도 보인다. 그래서 맑스는 ‘분석’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맑스는 단순히 ‘분석’의 도구만을 사용하지는 않았다. 맑스의 ‘분석’은 ‘추상’을 위한 ‘분석’이라고 할 수 있다. 맑스는 상품을 ‘분석’하여 상품의 본질을 추상화 한다. 자본론 전체를 아울러 맑스는 반복적으로 대상을 ‘분석’하고 ‘추상’하여 다시 그 추상화된 대상물을 ‘분석’한다. 마치 한 고비 넘어가면 새로운 지형(=추상)이 나타나고 그 곳의 길(=분석)을 찾아 올라가면 또 다른 지형이 나타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방법은 공리체계(이진경의 ‘자본을 넘어 자본’ 참조)와는 완전히 다르다. 공리란 어떤 이론체계의 기본명제 내지 근본명제로 이로부터 새로운 정리들이 연역된다. 따라서 공리는 보통 증명 없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명제로 출발하고 무모순성이라는 조건을 충족시켜야 하는 체계이다. 즉 공리체계는 모든 추론이 전적으로 논리적 연역의 결과일 것이 요구된다. 이는 현실의 경험이나 분석을 배제하는 것을 의미하게 된다. 하지만 맑스는 상품이라는 현실을 ‘분석’하여 노동가치를 도출해 낼 때, 맑스의 ‘분석’은 무모순성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모순을 드러내고자 한 것이다.

 

 

웹진이 페이지를 옮겨 이사를 하는 도중입니다〈ⓔ시대와 철학 알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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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대한 빠른 시간 안에 이사를 마치고 정상적 가동이 되어야 했지만 악성코드로 인해 몇 번 작업을 다시 하는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현재 4백건이 넘는 기사들을 일일이 수작업을 통해 복사 뜨기를 해서 메모장에 옮긴후 다시 그것을 웹진에 넣는 지루한 작업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악성코드로 인해 또 다시 문제가 발생할 소지가 많습니다. 중요한 시기에 웹진이 제 목소리를 내지 못했던 점 회원 및 독자 여러분께 깊이 사과드립니다.

이사작업을 최대한 빨리 마치고 다시 정상화 할 수 있도록 편집위원회는 노력하겠습니다.

 

 

文-安 단일화, 민주주의 살릴 주문인가?[철학자의 서재]

文-安 단일화, 민주주의 살릴 주문인가?[철학자의 서재]

 

지젝·아감벤 등의 <민주주의는 죽었는가?>

조은평 (건국대학교 강사)

※<프레시안>의 기사를 재게재함을 알려드립니다.

민주주의라는 신은 죽었는가?

대학 시절, “신은 죽었다”는 니체의 말을설명해 보라는 시험 문제를 접한 적이 있다. 지금도 여전히 그 의미는 잘 모르겠지만 당시 니체의 그 유명한 선언을 두고 힐난하듯 농담하던 기억은 남아있다. ‘원래 있지도 않았던 신이 어떻게 죽을 수 있단 거지?’ 혹시 니체는 ‘우리가 꿈꾸며 기대하던 그런 과거의 신이 죽었다고 말한 게 아닐까? 그래서 이제는 전혀 다른 새로운 신이 필요하다는 요청이었던 건 아닐까?’ 뭐 이런 식의 생각들을 술자리에서 주고받던 기억 말이다.

사실 <민주주의는 죽었는가? : 새로운 논쟁을 위하여>(난장 펴냄)라는 책을 접했을 때, 불현듯 먼저 머릿속에 스치던 생각도 바로 이런 거였다. ‘민주주의는 죽었는가?’ 하는 질문에도 역시 두 가지 방식의 답변이 가능하지 않을까? ‘원래 민주주의는 존재하지도 않았는데 죽긴 뭘 죽냐?’, 아니면 ‘우리가 꿈꾸며 투쟁해 왔던 민주주의는 이제 죽어버렸다. 따라서 새로운 민주주의를 발명해야 한다’는 답변 말이다.

물론 이 책의 원제목은 <민주주의는 어떤 상태에?>이다. 현재 세계 곳곳에서 회자되고 현실화되어 있는 민주주의의 모습을 진단하려는 취지다. 이에 비해 번역서가 새로 설정한 제목은 다소 자극적으로 들릴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내 생각엔 오히려 더 적절해 보인다. 원래의 책 제목에 응답한 여덟 명의 사상가들(조르조 아감벤, 알랭 바디우, 다니엘 벤사이드, 웬디 브라운, 장뤼크 낭시, 자크 랑시에르, 크리스틴 로스, 슬로보예 지젝)이 제기한 문제의식도 단순히 민주주의의 현 상태를 진단한다기보다는 그 단계를 훨씬 더 뛰어넘어 ‘민주주의’라는 용어와 ‘민주주의 사회’ 자체에 대해 도발적인 질문들을 던지고 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라는 텅 빈 기표


어떤 사상가들은 원래 ‘민주주의’가 한 번도 제대로 실현된 적이 없거나 단지 사건이나 운동으로서만 의미를 지닐 뿐 구체적인 실체가 없었다고 보기 때문에, ‘민주주의’는 원래 없었기에 죽었다고 할 수도 없다고 본다. 또 다른 사상가들은 우리가 꿈꾸며 목도하고 있는 현실의 ‘민주주의’는 그저 텅 빈 기표이거나 완전히 변질돼서 소수가 이끌어가는 과두제에 불과하기 때문에, 새로운 민주주의를 재발명해야 한다고 본다.

그럼에도 어쨌든 오늘날 우리는 누구나 민주주의자를 자처한다. 민주주의는 “누구나 모두가 자신의 꿈과 희망을 싣는 텅 빈 기표”(85쪽)인 셈이다. 더구나 이제는 이념의 갈등과 현실의 냉전으로 대표되던 20세기는 지나갔기에, 더 이상 이데올로기를 이용해 사람들을 동원하지 않는 탈-이데올로기의 시대라고도 자처한다. 하지만 바로 ‘탈-이데올로기 시대라고 자처하면서 우리는 모두 민주주의자다’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이미 또 다른 이데올로기인 것은 아닐까?

▲(조르조 아감벤 등 지음, 김상운·홍철기·양창렬 옮김, 난장 펴냄). ⓒ난장

대체 ‘민주주의’란 무엇일까? 또 우리 스스로가 ‘민주주의자’라고 자처할 때, 대체 ‘민주주의자’란 뭘 뜻하는 것일까? 자유 민주주의, 인민 민주주의, 참여 민주주의, 공화 민주주의, 사회주의적 민주주의라는 식으로 수많은 수식어를 통해 각자 자신들의 민주주의를 구분하려 하지만, 대체 이러한 수많은 ‘민주주의들’을 민주주의라고 부를 수 있게 해주는 공통 분모는 뭘까?

이 책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사상가들은 ‘민주주의’의 본뜻에 주목한다. ‘인민(demos)의 통치(cratie)’라는 뜻을 지닌 ‘데모크라시(democracy)’라는 단어에. 하지만 고대 그리스에서 유래한 이 ‘민주주의’라는 용어는 귀족정, 과두정, 참주정처럼 특정한 정체(통치 형태)와 통치 원리를 뜻하는 용어들과는 전혀 다르다. 민주주의라는 용어는 “순전히 정치적인 주장, 즉 인민이 자기 자신을 통치하며, 일부나 어떤 대타자가 아니라 전부가 정치적으로 주권자라는 주장만을 담고”(87쪽) 있을 뿐이다. 말하자면 ‘인민의 자기 통치’를 뜻하는 민주주의라는 용어는 구체적으로 인민이 어떻게 자기 자신을 지배해야 하는지, 또 자신들의 주권을 어떤 방식으로 실현해야 하는지에 대해 전혀 알려주는 바가 없다.

현실에서도 마찬가지다. 모든 나라가 대부분 민주주의라고 자처하지만, 그저 대의 민주주의, 입헌 정치, 정당 정치, 자유와 평등을 보장하는 정치 체제, 아울러 자유로운 시장을 기반으로 공정한 경쟁을 보장하는 정치 체제야말로 민주주의라고 서로 내세울 뿐이다. 하지만 그러한 구체적인 통치 형태가 정말로 ‘인민의 통치’를 보장해 주는가라고 묻는다면, 대답은 회의적일 수밖에 없다. 한편에서는 전 지구적인 자본이 ‘신자유주의적 합리성’이라는 이름으로 전 세계의 경제 질서뿐 아니라 한 국가의 경제 정책도 좌우하며, 다른 한편에서는 자본의 힘과 결탁한 전문 정치인들이 국민의 안전과 번영을 위한다는 명분 아래 인민의 통치를 대신해 준다고 떠벌려 댄다.

인민의 통치’를 봉합해온 민주주의(?)


단지 우리 시대의 ‘민주주의’만 이랬던 것은 아니다. 원래부터 근대 민주주의는 자본주의라는 쌍둥이 형제와 결합해 자본주의의 또 하나의 날개로, 여러 가지 배제를 통해 자신을 구성해 왔는지도 모른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여러 가지 ‘인민 통치’의 사건들과 기억들을 억압하고 봉합하면서 대의 민주주의나 공화정이라는 상징으로 정착되어 온 것이 바로 우리들이 생각하는 민주주의인지도 모르겠다.

우선 브라운의 지적처럼, 자본과 신자유주의적 합리성만이 소위 자유 민주주의적 제도의 기반처럼 강조되면서 “국가는 공공연히 인민의 지배가 아니라 경영 관리 운용의 구현체로 탈바꿈”(90쪽)해 버렸다. 또 고대 그리스 민주주의가 노예와 여성을 배제했던 것처럼 근대 민주주의도 경쟁에서 도태당한 빈민을 배제하면서 성장해 왔고, 여전히 오늘날에도 서구 민주주의는 불법 거주자나 이주 노동자를, 또는 가장 위험한 적이라고 가정된 ‘이슬람 근본주의자’들 배제하면서 자신들의 성역을 보호하려 한다.

더구나 역사적으로도 ‘민주주의’는 정말로 ‘인민의 통치’를 실현하려던 사건들과 운동들을 억압하고 그 기억들을 봉합하면서 오늘날의 온건한 ‘대의 민주주의’로, 또는 ‘공화정’이라는 이름으로 정착되었다. 로스가 ‘민주주의’라는 랭보의 시를 언급하면서 강조했던 1871년 5월 파리 코뮌의 몰락이 대표적인 사례다. 물론 당시 “파리 코뮌의 전사들은 스스로를 민주주의자라고 부르지 않았지만 (…) 이들은 그동안 견고히 존재해온 위계적, 관료적 구조 대신에 모든 차원에서 민주주의적인 조직 형태와 절차를 도입했다.”(153쪽)

이런 면에서 파리 코뮌은 가장 민주주의적인 사건이자 소규모로 코뮌을 실현했던 역사였다. 그럼에도 파리 코뮌은 당시 ‘민주주의’라는 이름을 참칭한 부르주아-공화주의 정부에 의해 무참하게 진압되었다. 게다가 가장 민주주의적인 사건의 패배를 가져온 이 대학살은 역설적이게도 프랑스 제3공화국을 탄생시켰다. 결국 랭보의 ‘민주주의’라는 시는 당시 파리 코뮌이라는 민주주의 실험이 어떻게 봉합되었는지, 또 ‘민주주의’라는 용어가 어떤 식으로 ‘문명화된 나라(프랑스)’의 식민지 정책을 정당화하는 데 사용되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셈이다.
로스의 말대로, “실제로 서구의 정부들은 ‘민주주의’라는 단어 자체를 완전히 통제하게 됐다. 그 단어가 예전에 간직했던 해방의 울림을 완전히 제거한 채 말이다. 사실상 민주주의는 극소수 사람들만의 통치, 그리고 말하자면 인민 없는 통치만을 허용하는 체제를 정당화하는 계급적 이데올로기가 되어버렸다.”(161~162쪽) 과연 우리는 이런 비극적인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인민의 통치’를 실현하려던 파리 코뮌이라는 민주주의적인 실험이 왜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억압되고 봉합된 것일까? 또 인민의 통치를 의미하는 민주주의가 왜 역설적으로 ‘인민 없는 통치’가 된 것일까?

인민’은 정말 자기 통치를 원하는가?


물론 지배 세력이 ‘민주주의’라는 이름을 상징적으로 전유해 온 탓이 가장 큰 이유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른 측면도 있지 않을까? 아마도 이 책에서 제기하는 가장 도발적인 질문은 바로 이 측면과 관련이 있을 것 같다. 곧 ‘인민은 정말 자기 통치를 원하는 걸까?’ 만일 그렇다면, “사회는 무슨 수로 자기-제도화하며, 제도화된 것의 자동 보존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66쪽) 다시 말해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자기-제도화된 현재의 역설적인 ‘인민 없는 통치’의 상황에서 사회는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결국 첫 번째 질문은 ‘민주주의’가 주체에 미치는 영향력에 대해 고민하게 한다. 바디우가 민주정에 대한 플라톤의 비판을 재해석하면서 비판하는 지점 말이다. “민주주의라는 상징이 사람들에게 끼치는 해로운 힘은 그것이 만들어내는 주체의 유형에 집중된다. 그런 유형의 핵심적인 성격은 한마디로 말해 이기주의, 하찮은 향락을 추구하는 욕망이다.” (31쪽)

바디우에 따르면, 민주주의적 주체는 젊은 시절에는 ‘구속받지 말로 즐겨라’는 식으로 “자유로워지기를 상상하는 헤픈 탐욕”을 누리다가 늙어서는 “예산을 따지고 안전을 추구하는 구두쇠”로 변모한다(34쪽). 따라서 현재의 민주주의가 이처럼 끊임없이 이기적인 욕망만을 추구하고 자본주의 체제 자체의 안전만을 추구하는 주체를 양산한다면, 이런 식의 순환의 질서에서 빠져나오게 하는 것이야말로 제대로 된 정치다.

따라서 지금처럼 상징화된 “‘민주주의’라는 단어의 모든 권위를 중지시키면서 플라톤의 비판을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연습을 하고난 뒤에야 우리는 결국 그 단어를 본래 의미대로 복원할 수 있다. 민주주의란 인민들이 스스로에 대해 권력을 갖는 것으로 간주된 실존이다. 민주주의란 국가를 고사시키는 열린 과정, 인민에 내재적인 정치이다.”(41쪽)

또한 두 번째 질문도 마찬가지로 현재의 상황을 극복해 나갈 수 있는 주체나 운동의 가능성에 대해 고민하게 한다. 아마도 이 지점은 ‘민주주의’라는 단어를 재점유하는 투쟁과도 관련이 있을 것 같다. 랑시에르의 말대로 “정치적 투쟁들은 단어들을 전유하기 위한 투쟁”(131쪽)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내 생각에는 현재의 ‘민주주의’에서 껍데기들을 걸러내는 체가 필요할 것 같다. 사실 민주주의적인 권력이란 바로 “평범한 사람들이 공통 관심사를 실현할 행동 양식을 발견할 수 있는 능력이다.”(150쪽) 말하자면 그 누구든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는 평등의 전제를 놓치지 않는 것! 그렇기에 “집단적인 의사 결정에 참여할 능력을 지녔다고 규정된 사람들(전문가, 정치인, 혁신적인 자본가)과 그런 능력이 없다고 말해지는 사람들”(150쪽)로 끊임없이 사회의 위계를 구분하는 삶을 거부하는 것이야말로 ‘민주주의’의 핵심일 것이다.

바야흐로 대선 정국이다. 민주주의를 후퇴시킨 기존 정권을 교체해야 한다는 명분 속에서 문재인과 안철수의 단일화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왜 정권 교체를 원하는가? 민주주의 실현을 위해서? 정말? 혹시 우리는 어려운 나의 살림살이가 좀 더 나아지기만을 바라는 이기적인 욕망 때문에 누군가를 욕망하는 것은 아닐까?

사실 우리는 노무현 정부에 대한 분노와 불만 때문에, 새로운 대한민국을 꿈꾸며 이명박 대통령을 욕망하지 않았던가? 더구나 이명박 대통령이 CEO의 마인드로 경쟁력 있고 살기 좋은 민주주의 대한민국을 만들어 주리라 기대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그런 욕망의 대가가 어떤 것이었는지를 잘 알게 됐고, 그 때문에 절실히 후회하면서 절망에 빠져봤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무엇을 욕망해야 할까? 좀 더 국민을 배려하고 함께 잘사는 사회를 이루어줄 수 있는 또 다른 지도자를? 제발! 이제는 어떤 지도자를 꿈꾸고 욕망하기보다는 시스템과 체제 자체를 바꿀 수 있기를 기대해야 하지 않을까? 좀 더 ‘인민의 자기 통치’가 현실화될 수 있는 ‘민주주의’를 말이다.

한편에서는 문재인이든 안철수든, 박정희의 유산을 이어받은 박근혜를 막기 위해서 지지해야 한다고들 말한다. 나도 그럴지 모르겠다. 하지만 딱 그 이유 말고는 아직 다른 이유를 찾지 못하겠다. 그리고 별로 기대하지도 않는다. 박근혜를 막아내고 이명박 정권을 심판한다고 해서, 새로운 대통령이 ‘민주주의’를 실현해 주리라고는. 왜냐하면 민주주의는 바로 스스로 해방된 자들이 될 수 있는 우리 인민들이 스스로를 통치하는 체제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 누구를 대통령으로 뽑든 그 지도자가 민주주의를 실현해 주리라고는 기대하지 말자. 그런 기대는 이미 ‘민주주의’에 대한 배반일지도 모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