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보씨 다시 뱀파이어를 생각하다[철학자 구보씨의 세상생각]

문성원(부산대)

Y가 비아냥거린 대로 구보씨가 말이 많아진 걸까? 아니, 그럴 리 없어, 하고 구보씨는 고개를 젓는다. 하루 종일 말 한 마디 없이 지낼 때도 있는 걸. 그래도 별로 불편한 줄 모르겠던데…어쨌든 나는 쓸데없이 떠들어 대는 그런 부류는 아니라구. 오히려 어쩔 수 없어서 한 동안 말을 계속하고 나면 금세 목이 쉬거나 잠겨 버린다니까. Y야말로 말이 많지. 아무 때나 끼어들어 말을 시키고 말이야.

그런 주제에 나보고 말꼼수라구? 쳇… 이 구보를 어떻게 보고 하는 소린가. 난 꼼수라는 걸 생각해 본 적도 없어. 꼼수 아닌 수를 생각하기에도 벅차고 힘든 처진데 말이야. 게다가 생각해보지도 않은 걸 무슨 수로 말하느냔 말이지. 하긴, 철학자들은 예로부터 그런 오해를 받아왔잖아. 기껏 생각한 것을 풀어놓으면, 생각하기 싫어하는 치들은 그걸 궤변이나 꼼수로 여긴다니까. 근데 내가 이런 말을 할라치면, Y는 이것도 또 꼼수라고 할 거 아냐. 그게 아니라고 변명을 시작하면, 그것도 또 꼼수에 대한 꼼수라고 할 거고. 그런데 어떻게 말을 하냐. 야, 안 돼!

그리고 말을 하는 것과 꼼수 부리는 것은 구별해야 한다구. <나는 꼼수다>의 ‘나’는 어디까지나 가카지, <나는 꼼수다>의 멤버들이 아니거든. <복수는 나의 것이다>에서 ‘나’는 구약의 여호와지, 그 영화에 나오는 인물들이 아닌 것처럼. 그러고 보니, <나는 꼼수다>의 박찬욱 버전은 <꼼수는 나의 것이다>가 되겠군. 꼼수는 나만의 것이니 너희 어린 백성들은 감히 꼼수를 부릴 생각은 말아라, 이렇게 가카께서 하교(下敎)하신다는 말이 될 테니까.

여기까지 혼자 너스레를 떨다 구보씨는 아차 하고 생각을 가다듬었다. 철학자 구보씨가 이렇게 경망하게 굴어서 되겠는가 싶어서였다. 어쩌면 이게 다 Y에게 전염된 탓인지 몰라. Y는 내가 옆에 있을 때에도 가끔 <개그 콘서트>를 보면서 깔깔대고 웃거나, <나꼼수>를 듣다가 키득거리기도 하니까 말이야. 매스 미디어의 전염성, 이것이야말로 수평적으로 확산하는 뱀파이어적 전염의 한 전형이 아닐까. 그러고 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Y에게 목덜미를 여기저기 가볍게 물린 것일 수도 있어.

하여튼 대중적 전염의 문제는 그 수평성이 자칫 초래할 수 있는 일차원성에 있지, 하고 구보씨는 목덜미를 한 손으로 쓸어내리며 생각해 본다. 그것을 극복하여 운동의 평면에 굴곡과 회절(回折)을 도입하고, 나아가 도약과 초월을 받아들이는 것이야말로 우리 삶의 진정성에 어울리는 일일 것이다. 물론 이런 모습을 발견하기는 쉽지 않다. 그것은 짐짓 고투(苦鬪)를 수반하는 까닭이다. 그것도 어떤 승리나 구원이 보장되어 있지 않은 고투를.

고투라니…장난스럽게 말을 시작해서 갑자기 너무 심각하고 비장(悲壯)해지는 것 아닐까. 하지만 우리 삶이 원래 그렇지 않은가. 삶의 다양성이란 유형(類型)의 평면적 수다성(數多性)만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여러 차원을 넘나드는 깊이의 요동(搖動)과 착종(錯綜)을 뜻하기도 하는 것이다. 제대로 된 문화적 고안물은 이런 점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뱀파이어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아니, 뱀파이어야말로 그런 점을 잘 보여줄 수 있기에 주목할 만한 것이 아닌가.

이런 점에서 구보씨는 박찬욱의 <박쥐>가 뛰어난 영화라고 여긴다. 알려진 대로 <박쥐>는 에밀 졸라의 소설 <테레즈 라캥>을 토대로 했다. 줄거리와 사건뿐 아니라 인물의 이름까지 빌려왔다. 김옥빈이 연기한 태주는 테레즈, 신하균이 맡은 병약한 남편인 강우는 까미유, 눈동자 연기가 인상적인 김해숙의 라여사는 라캥 ? 이렇게 노골적으로 차음(借音)을 할 정도로 원작에 진 신세를 분명히 한다. 그러나 정작 <박쥐>의 강점은 다른 데 있다.

에밀 졸라는 27살이던 1867년에 이 소설을 내놓았고, 그 때문에 도덕적인 논란도 겪었다. 당시로서는 치정 살인을 살인자의 견지에서 묘사한 소설을 받아들이는 것이 자못 껄끄러운 일이었나 보다. 그래서 작가는 이 소설을 도덕적이거나 윤리적인 잣대에서 읽지 말고 인간에 대한 ‘자연주의적’ 탐구로 읽으라고 당부한다. 하지만 오늘날의 견지에서 이 소설은 그다지 충격적이지도 신선하지도 않다. 졸라 식의 자연주의적 평면은 이미 진부해져서일까.

영화 <박쥐>가 <테레즈 라캥>을 빌려와서 거둔 눈에 띄는 성과는 아마 칸느에서 얻은 점수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우리라 하더라도 외국감독이 예를 들어 <장화홍련전>을 차용해서 만든 영화를 들고 온다면 아무래도 점수를 더 주게 되지 않겠는가. 하지만 그 경우에조차 차용을 빛나게 하는 것은 단순한 차용 자체일 수 없다. 빌려오지 않은 요소가 빌려옴에 생명력을 준다. <박쥐>에서 그것은 뱀파이어 신부의 설정이다.

사실 <테레즈 라캥>과 <박쥐>에서 현저하게 큰 차이를 보이는 인물은 송강호가 분(扮)한 상현이다. 졸라의 소설에서는 테레즈와 애정 행각을 벌이고 그 남편 까미유를 살해하는 로랑이 지극히 세속적이고 자기 욕망에 충실한 인물로 그려진다. 반면에 <박쥐>에서 상현은 그것과 정반대의 캐릭터라고 할 만하다. (이름도 전혀 다르다. 로랑과 상현, 두 이름엔 유사성이 없다.)

상현은 자신의 목숨마저 희생하여 구원을 찾으려는 젊은 사제다. 그가 읊조리는 기도 말은 기복적(祈福的) 자기중심성의 반대 극으로 비친다. 너무 극단적이어서 섬뜩할 정도다. 이 기도는 배경으로 깔리는 바흐의 칸타타 <이히 하베 게누크>(저는 만족하나이다)의 선율과 어울려 비현실적인 종교적 분위기를 자아낸다.

박찬욱 감독은 이 영화에 코멘트를 달면서 그러한 희생과 자기 파괴를 추구하는 것 자체가 또 하나의 오만함이라고 말한다. 인간으로서는 이룰 수 없는 경지를 희구하는 것, 일종의 비상을 꿈꾸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세계는 나의 것이 아니다. 희생은 고통스럽고 회피하기 어려운 선택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지, 자기 파괴로 살 수 있는 피안(彼岸)의 입장권 같은 것이 아니다. 우리가 가질 수 없는 것을 가지려면, 우리는 우리가 아니어야 한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그러려고 하는 존재다.

뱀파이어는 가질 수 없는 것의 한 귀퉁이를 훔친 괴물의 모습, 말하자면 욕망과 초월의 키메라다. 영화 <박쥐>에서는 오만함의 대가다. 우리가 살아있는 한, 욕망을 떠날 수가 없음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장치다. 죽음을 무릅쓴 희생이 꼭 성자(聖者)를 낳는 것은 아니다. 성자의 외양(外樣) 속에도 욕망이 숨어 있을 수 있고, 그것은 이렇게도 저렇게도 비틀릴 수 있다. 그 비틀림을 증폭시켜 보여주는 것이 뱀파이어의 힘, 뱀파이어가 가진 초능력이다. 욕망에 갇혀 타락한 초월의 열망, 상승의 반대급부인 추락의 깊이.

뱀파이어가 된 상현은 욕망에 휘둘리면서도 초월을 향한 열망을 버리지 못한다. 그는 욕망을 제어하고자 하며, 착한 뱀파이어가 되고자 한다. 착한 뱀파이어, 타인을 배려하는 흡혈? 전에도 말한 것처럼 이것이 이 영화를 코미디로 만드는 아이러니의 기본 구조다. 모두가 욕망을 쫓아 뱀파이어의 힘을 탐하는 세상에서 상현은 선과 악의 구분을 놓지 않는다. 그것이 태주와 함께 욕망을 쫓던 상현을 다시 파멸로 이끈다. 또 그것이 상현을 단순한 코미디의 대상이 아니라 비극의 주인공이 되게 한다. 헤겔의 말처럼, 가치로운 것의 몰락이 비극을 이룬다.

“태주씨랑 오래오래 살고 싶었는데… 지옥에서 만나요.”

“죽으면 끝. 그 동안 즐거웠어요, 신부님.”

상현과 태주의 생각은 파멸의 순간에서도 다르다. 욕망이 지배하는 수평적 공간이 태주의 세계라면, 가치가 만드는 상승과 하강의 깊이가 상현의 무대다. 내재(內在)와 초월(超越)은 부딪혀 얽히지만, 끝내 하나가 되지 못하고 발산(發散)한다. 어느 것이 좋고 어느 것이 나쁜가의 문제는 아니다. 카르페 디엠(carpe diem)의 쾌락과 영원성의 약속 가운데 어떤 것을 택할 것인가. 욕망의 허망함과 이데올로기의 속박 가운데 어떤 것을 택할 것인가.

박찬욱이 내놓는 답은 진부할지 모르지만 여전히 아름답다. 그것은 낡은 구두의 이미지로 잘 드러나는 사랑이다. 질식할 것 같은 답답함을 못 이겨 ‘행복 의상실’ 앞 밤거리를 속옷 바람으로 달리던 맨발의 태주에게 벗어준 상현의 구두, 그 구두를 태주는 마지막 순간에 꺼내 신는다. 동트는 햇빛에 까맣게 타버린 두 몸뚱이는 재로 부서지고, 그렇게 얽혔던 사랑의 자취가 떨어져 남는다. 달리 어찌 하겠는가.

알겠지만, 이 사랑은 문제를 없애거나 해결해주지 못한다. 그러나 또한 이 사랑은 내재의 허망함으로 녹아 버리지도 않고 초월의 기만으로 휘발해 버리지도 않는다. 사랑은 이 둘의 얽힘 속에서 태어나고 사라지며 그렇게 끊어지듯 지속한다. 사랑은 고투(苦鬪)하고, 또 고투한다.

물론 이런 고투에는 여러 버전이 있다. 박찬욱의 <박쥐>가 초월에 대한 열망의 과도함을 냉소(冷笑)하면서도 그 열망을 떨쳐내지 못하고 짐짓 거기에 굴복하는 모습을 보여준다면, 또 하나 주목할 만한 뱀파이어 영화인 <렛미인>은 현실의 제약을 뛰어넘는 강렬한 사랑을 제시하는 듯하지만 그 이면에서 작용하는 거래의 세속적 효과를 놓치지 않는다.

그러나 이번엔 이 정도로 하자. 구보씨가 속절없이 또 이렇게 많은 말을 늘어놓게 된 것은 지난번에 Y가 느닷없이 말을 자른 데다가 말꼼수 운운하고 끝났던 여운이 영 개운치 않았기 때문이다. 개운치 않다는 건 뭔가 켕기는 게 있다는 뜻 아니니? Y라면 틀림없이 또 이렇게 물고 늘어졌을 것이다. 사실, 그녀는 나이에 비해 이가 튼튼한 편이다. 다른 건 몰라도 구보씨를 비웃을 때조차 살짝 드러나는 그녀의 가지런하고 하얀 이는 매력적이다. 그건 아름다움과 선함이 합치하지는 않는다는 유력한 증거다.

오늘 세상을 뒤덮은 하얀 눈과 같은 차가운 아름다움, 그것은 이면의 온갖 것들을 가린다. 그 미봉적(彌縫的) 차폐(遮蔽)가 아름다운 것은 아마 그것 또한 세상이 우리를 유혹하는 방식이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누구라서 그러한 아름다움을 겉치레고 허식이라며 마다할 것인가. 하얗게 내려 쌓이는 눈, 그것이 주는 모든 불편에도 불구하고 또 그것이 숨기는 모든 지저분함과 위험에도 불구하고, 눈은 여전히 아름답다. 그리고 모든 아름다움은 삶의 유혹이다. 그러한 한, 뱀파이어는 이곳에도 파고든다. 순백의 눈 위로 스미는 혈흔, 그 뚜렷한 색채의 대비?<렛미인>(2008)을 보라.

신입회원 교육강좌를 시작합니다[ⓔ시대와 철학 알림]

<ⓔ 시대와 철학 > 알림

한국철학사상연구회에서는 신입회원 재생산을 위한 교육강좌를 3월 25일 시작한다. 학회 설립 이래 대학원생만을 대상으로 하던 신입회원 교육강좌가 일반인을 포함한 공개강좌로 전환되고 3번째를 맞는다. 진보적 삶에 관심이 있는 시민이라면 누구나 교육강좌를 이수하고 소정의 절차를 거쳐 학회의 회원이 될 수 있다. 이번 교육강좌는 동양과 서양, 고전과 현대, 여성과 문화를 아우르며 한국사회에서 필요한 가치가 무엇이며 무엇이어야 하는지 함께 고민하는 장이 될 것이다. 6월 17일까지 매주 일요일 개최되는 교육강좌는 참가자 모두에게 뜻깊은 자리가 될 것이다.

 

안녕하십니까?

2012년 한철연 교육부 철학강좌를 안내해드립니다.

철학에 관심있는 시민, 전공자 그리고 한철연 회원들의 많은 성원 바랍니다.

2012년 (사)한국철학사상연구회 철학 강좌

열세 번의 데이트; 길가에 선 철학
한국 사회의 진보적 가치의 정착을 위해 성찰해 온 (사)한국철학사상연구회(한철연)에서 2012년 철학 강좌를 엽니다. 이번 강좌는 일상에서 부딪히는 구체적 문제들을 철학적 관점에서 다루는 시간으로 준비했습니다. 이론과 지식을 전달하는 강좌는 많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일상 속에서 어떻게 접점을 이룰 수 있는지 고민하게 해주는 강의는 적었습니다. 한철연은 이러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책상 위 철학’을 ‘한반도의 길거리’로 불러내보고자 합니다. 함께 열세 번의 데이트를 즐겨볼 분 어디 없습니까?

1강 (3/25) 들뢰즈의 행복론; 행복한 인생의 조건(강사: 이성백 서울시립대 교수)

2강 (4/01) 착취의 공범; 돈벌이가 시원치 않은 마르크스(강사: 이재유 건국대 외래교수)

3강 (4/08) 안산의 헤겔; 이방인과 소통, 이해, 그리고 연대(강사: 이정은 연세대 외래교수)

4강 (4/15) 안산의 공맹(孔孟); 친친(親親)의 역설을 통한 이방인과의 소통, 이해 그리고 연대

(강사: 김세서리아 성신여대 연구교수)

5강 (4/22) 요가하는 노장; ‘폼 나는’ 생태적 삶을 넘어서(강사: 송종서 전 민족의학연구원 상임연구원)

6강 (4/29) ‘간지 쩌는’ 푸코; 자기의 테크놀로지와 정치적 실천(강사: 김성우 상지대 겸임교수)

7강 (5/06) 복지제도의 철학적 정당화; 가난뱅이만 얻어먹기?(강사: 곽노완 서울시립대 HK교수)

8강 (5/13) 판문점에 선 철학; 상처와 화해의 철학(강사: 이병수 건국대 HK교수)

9강 (5/20) 여성주의적 근본주의를 넘어서(강사: 강지은 건국대 외래교수)

10강 (5/27) 신성한 사적 소유?; 사적 소유의 마법에서 깨어나기(강사: 박종성 방송대 외래교수)

11강 (6/03) 골치 아픈 현대미술; 근대 이후의 아름다움(강사: 이병창 전 동아대 교수)

12강 (6/10) 스마트하게 혁명을?; 6월 항쟁과 촛불에 대한 철학적 성찰(강사: 박영균 건국대 HK교수)

13강 (6/17) 연대의 철학을 위하여(강사: 서유석 호원대 교수)

일정 : 3/25(일)~6/17(일) 매주 일요일 2시(첫 날은 오리엔테이션 때문에 30분 일찍 시작)

장소: 서울 마포구 서교동 481-2 태복빌딩 202호 강당(문턱 없는 밥집 2층)

대상: 진보적 삶의 가치에 관심 있는 시민, 대학생 이상(선착순 50명)

수강료: 경제적 약자 6만원, 그 외 12만원 (한철연 회원 무료)

※ 상상마당 아카데미 강좌 수강생은 50% 할인

문의: 02-332-4301, hanphil@jinbo.net, 010-2205-9434(교육부장: 한길석)

접수: 메일(hanphil@jinbo.net) 로 성함과 연락처를 보내주시면 됩니다.

오시는 길
지하철 2호선 합정역 2번 출구로 나와 뒤돌아보면 빵집과 자동차 정비센터 사이로 샛길이 있습니다.
그 길로 8분 정도 걸어오면 왕복 4차선 도로가 나옵니다.
거기서 오른쪽으로 30미터 지점에 태복빌딩(1층 ‘기분 좋은 가게’ ‘문턱 없는 밥집’)이 있습니다.
그 건물 2층입니다. 주차공간이 부족하므로 가급적 대중교통을 이용해주십시오.

지하철 6호선 망원역 1번 출구에서 왼쪽으로 3분 정도 직진해서
건널목을 건넌 후 좌측으로 4분 정도 직진하면 ‘기분 좋은 가게’ 건물이 나옵니다.
그 건물 2층입니다.

추운 계절의 끝에서 [치유시학]

 

김성리 (인제대 인문의학연구소 연구교수)

 

치유될 수 없는 과거

‘세월이 약’이라는 말이 있다. 아무리 힘들고 아픈 상처일지라도 시간이 지나면 나아질 수 있다는 뜻이다. 이 말은 사람의 힘으로는 치유될 수 없는 상처가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할머니에게 아들과의 이별은 시간이 지날수록 깊은 상처가 되었다. 그 어느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상처는 가슴 깊이 커다란 웅덩이를 파고 들어 앉았다.

속아서 결혼했다는 생각으로 남편에 대한 원망과 야속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6살이 많았던 남편은 어린 아내를 지극히 사랑했지만, 20살의 아내는 남편의 정성마저도 싫었다. “진짜 정 안 주어지더라. 내 때문에 저거 아버지도 참말로 죽고 싶다했다. 내내 울고, 달래도 울고, 아침 저녁으로 내내 울었다.” 먹지도 않고 제대로 지자도 않으면서 울기만 하는 아내를 달랠 방법이 없었다.

“내 간다 이러면, 보따리 싸가 간다, 그리 하면” “아이고 가보지 어디가 몇 발 못가가 붙잡히지. 이 안에 법이 없는 줄 아냐, 당신 마음대로 하냐, 가 봐라.” 남편이 할 수 있는 일은 가겠다는 아내의 말에 아랑 곳 없이 그 곁을 지키는 것뿐이었다. 남편이 하루 종일 옆을 지키면서 달래고 또 달래도 스스로에 대한 서러움과 속았다는 분노는 다스려지지 않았다.

할머니가 머물러야 할 곳은 울산 바닷가였다. 울산에서 태어나 자랐지만, 그 곳이 어디인지 어떻게 나갈 수 있는지 감조차 잡을 수 없었다. 바닷가 넓은 바위 위에 앉아서 매일 죽음을 생각했다. 앞이 보이지 않는 절망과 분노 속에서 할머니는 집단촌에서 주는 약을 거부했다. 약을 먹지 않는 상태에서 끼니마저 거르자 병의 속도는 빨라졌다.

“한 번은 저 바닷물에 빠져 죽을라 했다. 그것도 그만 들켜서 안 됐제. 근데 헤엄을 치몬 도망 갈 수 있겠는 기라. 그리 생각하니까 사람들이 쫓아 올낀데 가다 잡혀서 두들겨 맞으모 우야노, 몽디 갖꼬 두들겨 맞으면 우야노, 겁이 나 얼마나 벌벌 떨어댄 줄 아나.” 그래도 그렇게 살 수는 없었다.

할머니는 허허로운 웃음소리를 내며 말을 이었다. “그 당시 공부도 좀 했다 쿠고, 공부 많이 한 처자가 저기 있다 소문이 어디까지 나가지고, 영감한테까지 오게 된 기라. 영감도 공부는 좀 했더라꼬.” 남편은 일본에서 공부를 하던 중 한센병에 걸린 것을 알고 고향으로 돌아 온 것이다.

부친이 일찍 세상을 떠난 고향에는 형과 누나가 있었지만, 도움을 받을 수 없었다. 일본에서 배운 학식으로 한센인 집단촌의 행정적인 일들을 도와주고 있었다. 할머니 기억 속의 젊은 남편은 미남이었다. “얼굴도 뽀얗고 모리고 보면 진짜 의사 같앴다. 인상도 참 괜찮았다. 마음도 좋았제. 얼매나 착한 사람이었다고.”

그러나 20살 할머니의 눈에 그런 남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죽는 게 낫다는 절망감뿐이었다. 그 절망감은 20살의 할머니를 죽음으로 이끌었다. “한번은 약 묵고 죽을라꼬 치료약을 한 서른 개 묵었다. 서른 개 먹으니 죽지는 안 하고 토하기만 토하고 얼굴이 새파래지고 굿이 났지. 그거 묵고 나니 잠이 안 오데. 밤낮으로 잠이 안 오데. 그래 가지고 어떤 사람은 죽게 놔두라 하고, 간 크게 어디 약을 그리 지 마음대로 먹노 하는 사람도 있고, 약병을 단디 안 놔놓고 뭐했노 하는 사람도 있고, 아이고 동네 굿이 안 났더나.”

 

새로운 탄생

몇 날 며칠을 밤낮없이 뜬 눈으로 보내고 난 후, 할머니는 운명에 순응했다. 삶은 팍팍했다. 일자리를 얻을 수가 없었으므로 동냥을 다녔다. 운이 좋으면 쌀도 얻고 이삼일 지낼 수 있는 반찬거리도 얻었지만, 쫓겨 다니기도 수 없이 했다. 지금 생각하면 남편이 있었기에 그 어려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으리라 싶지만, 그 당시에는 아무 생각 없이 해 뜨면 일어나고 어두워지면 잤다.

“이 사람이 현재 내캉 이렇게 사는 사람이라고 맘속으로 자꾸 다짐했제. 안 그래야 될 낀데 자꾸 지난 기 생각나는 기라.” 그래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때 되면 밥 먹고 양식이 떨어지면 동냥을 다녔다. 그러다 집단촌에 배급이 시작되었다. “땡보리가 나오더라고. 쌀은 없었어.” 그 중에서도 좋은 것은 위에서 가로채 갔다. 나머지 힘 없는 사람들은 맷돌로 갈아서 보리 수제비를 해먹었다. 거친 보리 수제비지만 동냥을 다니지 않아도 굶지 않는다는 사실이 고마웠다.

세월은 무심하게 흘러갔다. 그 동안 몇 번의 강제 이주가 있었다. 어느 날 사람들이 와서 떠나라고 난리를 치면 입은 옷 그대로 보따리만 들고 떠나야 했다. 집단촌은 울산을 떠나 부산으로 옮겨졌다. 세월의 무심함이 사람을 변하게 하는 건지 아니면 사람이 변해서 세월이 무심해 보이는 건지 알 수 없는 나날들이었다.

결혼하고 만 3년이 지나 24살 때 딸을 낳았다. 30살에 아이를 본 남편은 좋아서 어쩔 줄 몰랐지만, 할머니의 슬픔은 방긋거리는 딸을 볼 때마다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커져 갔다. 어디를 가든지 정부에서 나오는 배급품은 한센인들에게 제대로 보급되지 않았다. 좋은 것은 전부 힘 있는 관리나 하다못해 집단촌 이장까지 팔아서 이익을 챙겼기 때문이다. 생활은 항상 궁핍했지만, 딸은 젖을 먹여 키울 수 있었다.

할머니와 마주 앉은 방안은 서늘했다. 낡은 집의 창틈으로 찬 바람이 계속 들어오고 있었다. “이리 추워서, 겨울이 되니까 영감에 대한 시를 하나 지어 볼라꼬 아무리 생각해도 시가 생각이 안 나.” “추운데 왜 할아버지 생각이 나세요?” “내가 겨울에 영감을 만났거든. 참 마이 추웠다. 눈도 마이 오고……. 하아얗게 쌓여 있었다.”

할머니의 감기 기운은 낫는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미열도 더 이상 내리지 않고 할머니를 괴롭히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몇 년 전부터 감기가 자꾸 걸리는 기라.” 할머니는 혀를 찼다. 깊은 산 속에서 서서히 시들어 가는 고목의 모습이 눈앞을 스쳐갔다. 할머니에게서는 하나 둘 나뭇잎을 떨어뜨리는 고목의 무상함이 느껴졌다.

 

텅 빈 삶

딸아이가 젖을 뗄 무렵, 삶의 고통을 이기지 못한 할머니는 다시 약을 먹었다. 이번에는 예전보다 더 많은 양의 약을 먹었다. 가물거리는 의식 속에서 들려오는 아이의 울음소리가 딸의 울음인지 승팔이의 울음인지 알 수 없었다. 단지 아이의 울음소리를 들으면서 ‘이제 됐다. 이제는 됐다.’라는 안도의 물결만이 밀려왔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웅성거리는 소리와 함께 남편의 분노에 찬 목소리가 들려 왔다. “참말로 징하다. 어찌 그리 독하노. 니 같은 독종은 살다 살다 처음 본다.” 세상의 모든 것이 무너져 버린 듯한 목소리에는 분노와 허무함이 묻어났다. 아내에 대한 서운함과 자신에 대한 자괴감에 남편은 한 동안 말문을 닫았다.

“밥 먹자 하면 먹고, 일하러 가자 하면 가고, 이거 하자 하면 이거 하고, 저거 하자 하면 저거 하고, 별 그거 없고 그래 지내는 사람인데 내 영감은… 이거는 만나 놓으면 어렵거든. 법적으로 이래 이렇게 그거는 없고” 할머니는 띄엄띄엄 간격을 두며 먼저 가신 남편에 대한 미안함을 드러냈다.

남편의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텅 빈 듯한 마음을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어린 딸은 어떻게 하라고 그러셨어요?” 나의 바보 같은 질문에 할머니는 담담하게 말을 이어 갔다. “죄를 짓는 것 같아서, 다, 딸도 승팔이도, 영감도, 아무 죄 없는 기라. 죄는 나한테 있는 기라. 그러니 죽을 수밖에.”

사는 것이 죄를 짓는 일이고 죽는 것이 속죄하는 일이라면 삶과 죽음의 차이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우리는 왜 태어나야 하는 것일까? 이 세상에 태어나서 사는 동안 내가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게 무엇일까? 태어나서 병들어 사는 것이 죄라면 진실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나는 혼란스러웠다.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죄’라는 단어에서 헤어날 수 없었다. 한 사람의 삶이 저렇게 고독하고 고통스러운데, 그 삶이 죄가 된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 나의 죄는 무엇일까. 할아버지와 딸에 대한 시를 짓고 싶지만, 도저히 떠오르지 않는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한 편의 시가 떠 올랐다.

 

나무들이 요란히 흔들리는 가운데 겨운 햇빛은 떨어지며 너를 불러들인다. 얼은 들판을 바라보고 앉아 있는 나에게로. 잘 왔다. 친구여, 내 알려줄 것이 있다. 저 캄캄해오는 들판을 바라보라. 들판을 바라보는 그대로 너를 나에게 오게 하는 법을 배웠느니라.

이제 무엇을 말하겠는가. 혹은 다시 보겠는가. 네 허전히 보낸 나날의 표정 있는 얼굴을. 네 그처럼 처음을 사랑했던 꿈들을.

보여라, 살고 싶은 얼굴을. 보아라, 어지러운 꿈의 마지막을. 내려서라, 들판으로, 저 바람 받는 지평으로.

황동규 < 이것은 괴로움인가 기쁨인가> 부분

 

할머니가 자신의 삶을 온전하게 받아들이는 방법은 죽음이었다. 찬 바람 부는 언 들판 같은 삶을 살아가야 할 이에게 괴로움과 기쁨은 명확하게 구분되는 대상이 아닐 것이다. 스스로 바라보는 삶은 어둠이 내려앉은 캄캄한 들판과 다를 바 없었을 게다. 그런 사람에게 ‘왜 죽음을 선택하는가’라는 질문만큼 어리석은 것은 없으리라.

 

계절의 끝에서

보통의 사람들에게는 큰 기쁨으로 모두에게 외치는 한 생명의 탄생이 어떤 이에게는 살아보기 위해 애써 누르며 외면하고자 했던 상처를 수면 위로 들어 올리는 사건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기쁨이라고 해야 할까 고통이라고 해야 할까. 할머니에게 딸의 탄생은 새로운 고통의 시작이었다.

남편은 “당신 속에 무엇이 들어 앉아 있는가? 내가 알면 안 되는 것인가?”라며 아내의 마음을 열고자 노력했다. “가까이 오면 저리 가라고, 오지 마라고 폴을 휘둘렀지.” 털어 놓을 수 없는 비밀은 아내의 마음의 문을 굳게 닫았고, 그런 아내를 바라보는 남편의 마음은 까맣게 타 들어갔다.

“영감은 나한테 온갖 이야기 다 했다. 지 연애 했던 이야기, 첫사랑 이야기, 어릴 때 이야기, 나는 아무 말도 안 했다.” “만약 말씀하셨으면 어떻게 하셨을까요?”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영감은 참 좋은 사람이다. 예수를 믿고 나서는 더 좋아졌제. 무엇이든 나누었다.” 할머니는 나의 질문에 대한 답 대신 남편의 좋은 점을 열거했다.

좋은 사람이었으며, 50년이 넘는 시간을 함께 했지만, 사랑은 싹 트지 않았다. 딸을 바라보면서 떠나보낸 아이를 생각하면 안 된다고 다짐했지만, 그것은 다짐일 뿐이었다. 마음 깊은 곳에 자리 잡은 그리움과 연민은 불쑥불쑥 튀어 나와 가슴을 텅 비워 놓았다. 그때마다 어미는 어린 딸의 얼굴을 외면하고, 아이는 본능적으로 어미에게 더 매달렸다.

‘이렇게 병들어도 아이를 키울 수 있는데, 아이가 이렇게 아무 일 없이 잘 자라는데’라는 생각이 들 때마다 할머니는 캄캄한 들판에 홀로 서서 칼바람을 온 몸과 온 마음으로 맞았다. 그래도 추운 줄 몰랐다. 할머니의 마음을 꽁꽁 얼게 만드는 것은 지나간 시간에 대한 죄책감이었다.

죽음의 문턱에서 돌아 온 이후 할머니의 삶은 언제나 죄책감이 함께 했다. 하지만 달라진 것은 죽음에 대한 유혹을 더 이상 받지 않게 된 것이다. “죽는 것도 내 기 아이라. 내 거는 아무 것도 없는 기라.” 내가 가질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다면, 괴로움도 기쁨도 고통도 내 것이 아닐 것이다.

내 것이 없는 세상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묵묵히 살아가는 것뿐이리라. 할머니의 가슴은 언제나 찬 바람이 불어도, 그 찬 바람은 더 이상 할머니의 삶을 흔들지 못했다. 할머니에게는 이제 지켜야 하는 딸이 있고, 할머니를 지켜주는 남편이 있기 때문이다. 비록 사랑은 아닐지라도 함께 갈 수 있다는 믿음이 할머니에게 싹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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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게이아(Hygeia)는 고대 그리스의 여신의 이름입니다. 그이는 흔히 의약과 치유의 신으로 알려진 아스클레피오스(Asclepious)와는 또 다른 치유의 신입니다. 아스클레피오스가 의술이나 약으로 환자의 병을 적극적으로 치료하는 신이라면, 히게이아는 환자 자신의 자연치유력을 돌봐주고 길러주는 치유의 신입니다. 그래서 아스클레피오스가 치료의학의 수호신이라면, 히게이아는 간호학과 위생학의 수호천사로 불립니다. [히게이아의 시학]은, <e시대와 철학>과 인제대 인문의학연구소의 공동기획으로서 바로 치유의 여신 히게이아의 정신을 계승하여, 문학 특히 시를 통해 환자의 삶과 소통하고 환자의 자기 치유를 유도하는 하나의 치유인문학이자 인문의학의 성격과 내용을 널리 알리고자 기획된 것입니다. 여러분의 성원과 관심을 바랍니다. [편집자의 말]

#사진 : 상단 나무 / 하단 작가

청춘의 고전2가 시작됩니다[ⓔ시대와 철학 알림]

<ⓔ시대와 철학 알림>

지난해에 이어 올해 두 번째 청춘의 고전 시리즈가 KT&G 상상마당에서 개최된다. 3월 24일부터 9월 8일까지 매월 둘째 주 넷째 주 토요일에 개최되는 청춘의 고전2 시리즈는 총 12강으로 진행될 예정이다.

이번 청춘의 고전 시리즈는 일반에게 많이 알려진 그림을 통해 철학적인 문제의식을 자연스럽게 이끌어내어 예술과 철학의 깊은 연관성을 보여줄 것이다. 강사진은 한국철학사상연구회의 회원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주로 대학 강단에서 학생들과 만나던 틀을 깨고 자유로운 형식과 내용으로 수강생들과 만날 예정이다. 앞으로 강의의 현장을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웹진 <ⓔ시대와 철학>과 프레시안이 함께 전달할 것이다.

“너는 홍대 앞에서 클럽 가지? 난 홍대 앞에서 철학한다”라는 말로 젊은 세대와 만나는 청춘의 고전 시리즈는 가벼움과 진지함이 어우러진 젊음의 장소로 이미 2011년부터 세간의 주목을 받아왔다. 각 회별로 수강할 수도 있고 전체 수강도 가능하다. 전체 수강을 할 경우 수강료가 할인된다.

 

 

청춘들의 성공적인 연애를 위한 추천서[청춘의 서재]

청춘들의 성공적인 연애를 위한 추천서, 플라톤의 『파이드로스』와 기든스의 『성, 사랑, 에로티시즘』

이지영(광운대 강사)

 

 

 

길거리를 거닐거나, 요즘 유행하는 커피 전문점에서 차 한잔을 마시거나 캠퍼스를 지나갈 때 서로 손을 꼭 잡고 있거나 머리를 맞대고 사랑의 밀어를 속삭이는 청춘들의 모습을 찾아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에로스로서의 사랑은 분명 청춘만의 특권이다. 예컨대 우리 사회의 경우, 고등학교 졸업 이전까지의 사랑은 사실상 불법이다. 중고등 학생의 신분에 있는 이들의 연애는 기성 세대의 눈에는 아직도 금지의 대상이다. 암묵적인 합의이긴 하지만 연애 상대로서의 짝 만들기는 이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부터 결혼 이전까지만 사회에서 환영받으며 허용된다. 10대의 사랑은 학업과 미래에 치명적으로 방해가 되는 일, 소위 싹수가 노란 아이들이나 하는 일이라는 이유로 금지되고 기혼자의 사랑은 실제로 불법이다. 결혼 서약은 법의 이름으로 보호되며, 기혼자의 사랑은 그러한 법을 위반하는 짓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랑이 막 사회로 진출한 20대가 주로 향유할 수 있는 특권인 까닭이다. 청춘들이 사랑에 빠진 모습은 보기에 좋고, 달콤하게 느껴지지만 ‘사랑하기’가 그렇게 녹록하지 않은 일이란 사실은 한두 번만 연애를 해봐도 알게된다. 즉 사랑은 애틋하고 달콤하지만 동시에 혼란스럽고 쓰디쓴 것이다.

 

‘에로스’를 주제로 강의를 하면서 첫 시간에 학생들에게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사랑의 모습과 연애 경험담에 대해 글을 쓰게 한다. 짧은 에세이에서 이십 대 초중반 나이 대의 청춘들은 대체로 상대를 통해 정신적인 평화와 안식을 얻는 것을 이상적인 사랑의 모습으로 생각하며, 열정적이고 격정적인 것보다는 잔잔하고 로맨틱한 사랑을 선호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진심어린 마음으로, 사랑을 느끼는 상대에게 잘 해주면 된다고 단순하게(?) 생각하는 청춘들 또한 많다. 하지만 한 눈에 매료된 상대에게 자신의 마음을 알리는 것도, 상대의 마음을 얻어내는 것도 모두 어렵다. 게다가 설사 짝 만들기에 성공하더라도 사랑에 빠진 이들의 설레임과 상대에 대한 집중력은 서서히 줄어들기 마련이다. 또 운명적 만남임을 증명하는 듯했던 마음의 일치는 불일치로 변화하며 이는 상호 불신과 불만으로 이어지기 쉽다. 예전 같지 않은 태도에 연인의 마음이 변한 것 같아 섭섭하다, 또 변하지 않으면 않는 대로 편집증, 스토커 같아 답답하고 내 일을 제대로 할 수가 없다고 불만을 토로한다. 연애

 
파이드로스 표지

초기의 두 사람의 마음의 일치는 두 사람의 서로 다른 개성의 자연스러운 일치에서 온다기 보단, 상대의 마음을 얻기 위한 전략적(?) 양보와 희생을 바탕으로 서로에 대한 헌신에 의해 이루어진 일시적인 현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청춘의 연애 사업이 흔히 반복되는 실패, 실연으로 점철되는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즉 청춘의 연애 사업은 힘들고 괴롭다. 누군가를 향한 간절한 마음이 단지 외사랑의 가슴앓이로 끝나 괴롭고, 상대의 마음이 예전 같지 않은 것 같아 힘들고, 상대의 사랑이 도에 넘치는 집착인 듯해서 두렵고, 잘 맞는 줄 알았던 서로의 생각이 달라서 문제가 된다. 생각이 이런 문제에까지 미치면 사랑이 과연 마음의 평화를 가능하게 하는 로맨틱한 일인지, 과연 아름답기는 한 일인지 의문스럽다.

 

물론, 사랑은 분명 아름다울 수 있다, 하지만 아름다운 사랑이란 짝을 찾고, 그러기 위해 이성 교제를 전폭적으로 허용 받은 청춘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단지 마음의 진솔함, 진심, 헌신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다. 물론 사랑은 무엇보다도 마음의 문제이다. 그러나 사랑은 분명 두 사람이 서로의 마음을 주고받는 상호 작용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또 한 편 사회적으로 규제되는 것이기도 하며 이러한 규제의 대상에는 사랑하는 이들의 행위와 마음의 형식 또한 포함된다. 모든 사회는 구성원들의 정신과 행위, 생활 양식을 인위적으로 규제하려고 드는 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모두 각자 변화무쌍한 마음을 가진 서로 다른 개성의 소유자들일 뿐만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 직,간접적인 교육을 받으며 자라나고 살아가는 이상 사랑은 그냥 진실된 마음만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며 연구와 공부가 필요한 일인 것이다. 사랑이란 무엇이며, 왜 우리의 사랑은 관념 안에서의 이상적 사랑의 모습과는 달리 현실에서는 그토록 많은 갈등과 문제를 불러일으키는지, 아름다운 사랑을 만들어가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지 등등을 공부할 필요가 있다. 여기 아름다운 사랑과 인생을 위해 두 권의 책을 일독하기 권하며, 간단한 소개를 하고자 한다.

 

사랑 공부의 첫 걸음으로 플라톤의 『파이드로스』 만한 것도 없다. 플라톤의 『파이드로스』는 연애학의 고전으로 불릴만하다. 이 책의 반에 가까운 분량이 사랑하는 이의 악덕, 즉 연애의 부작용 분석으로 채워져 있다. 사랑에 빠진 이는 연인의 모든 것을 독점하고자 하며 자신을 떠나갈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자신 외의 것에 관심을 두어 그것을 탐구하고 연마하는 것을 싫어하고, 연인이 자신보다 더 뛰어난 이들을 만나는 것도 못 마땅해 한다. 즉 말하자면 연애는 무엇보다도 상대의 발전과 전인격적 성숙의 가능성을 가로막는다. 실컷 상대의 독립과 발전을 가로막다가 더 이상 연인에게 매력을 못 느끼게 되면 이별을 궁리하며 헤어지고 그때부터 갑자기 태도가 돌변, 그동안 자신이 상대에게 준 것들을 아까워하며 후회할 뿐더러 사람을 잘 못 본 자신의 무지를 탓하고 상대를 비난하기 일쑤이다. 이와 같이 사랑에 빠진 이들의 부덕함에 대한 플라톤의 비판을 읽다보면 이 책을 같이 읽은 대부분의 청춘들의 표정이 굳는다, 한두 번 쯤 연애를 경험 해본 이들 중 이러한 플라톤의 분석이 틀렸다고 부정할 수 있는 이들은 별로 없기 때문이다. 플라톤이 비난하는 사랑하는 이의 부덕은 우리 자신들의 모습인 것이다.

 
앤서니 기든스의 ‘성 사랑 에로티시즘’

플라톤은 이런 사랑의 모습을 뛰어 넘어야 한다고 말한다. 플라톤이 정의한 사랑을 시적으로 풀이해보자면 에로스로서의 사랑이란 아름다움에 취하는 것이다. 상대에게서 발견한 아름다움에 대한 욕망이 곧 사랑이다. 당신이 사랑에 빠졌다면 그것은 상대에게서 어떤 아름다움을 발견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단순히 표면적인 것, 신체적인 것에 머물러 있으면 사랑의 부작용, 부덕함에 빠져 허우적거리게 되고 그러한 사랑은 상대와 자신 모두에게 상처를 입히게 된다. 고전주의자 중의 고전주의자인 플라톤의 해법은 당신이 발견한 아름다움 너머, 눈에 보이고 피부로 느껴지는 그 아름다움을 가능하게 만들어준 안 변하는 아름다움의 가치를 발견하란 것이다. 그의 육체적 아름다움에 머물러 단지 그 사람의 신체를 구속하고 소유하려고 하지 말고 상대가 가진 비신체적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그러한 비신체적 아름다움을 아끼며 발전할 수 있도록 도와줌으로써 영혼과 영혼이 결합하게 되면 설사 둘이 헤어지게 되더라도 신체는 비록 멀어지되 서로의 영혼은 영원히 결합한 채로 남게 되리란 것이다. 사랑에 빠진 이들의 행태와 문제에 대한 플라톤의 분석은 매우 날카로우며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큰 깨우침을 준다. 하지만 그 해법과 결론은 범상한 우리들이 따라가기엔 매우 어려운 것 아닌가. 나는 사랑하는 이의 얼굴과 머리카락을 쓰다듬고 그 따듯함을 느껴보고 싶을 뿐 아니라, 그의 앞날을 방해할 생각은 없지만 그 사람의 모든 것에 대한 나의 신체적, 정신적 욕망을 포기하면서까지 그 사람의 발전에 헌신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아름다운 사랑에 일정 정도의 헌신과 희생이 필요하단 것은 사실일 테지만 어느 한 측면의 중요성만을 강조하는 것은 현대인들의 기본 정서와 가치관에 부적합하다. 그렇다, 강물만 멈추면 썩는 것이 아니다. 탐구 및 연구 또한 멈추면 고리타분해지고 시대에 부적합한 것이 된다. 이때 필요한 책이 기든슨의 『성, 사랑, 에로티시즘』이다. 기든슨은 이 책에서 사랑이 진실한 마음만으로 되지 않는다는 것이 지당한 일임을 보여준다. 이 글의 첫 부분에서 말했듯이 사랑과 연애, 결혼 등등의 모든 것이 사실은 시대적인 것이자 사회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기든슨은 소설 등에 나타나는 사랑의 행태 뿐 아니라 풍부한 사회학적 데이터들을 전거로 들면서 시대와 사회가 어떻게 우리의 사랑의 모습에 영향을 미쳐왔는가를 분석한다. 예컨대, 근대 이전까지 남녀 간의 평범한 결혼과 그 유지에 사랑의 요소는 거의 중요한 것이 아니었는데 자유 연애 자체가 부정된 시기였을 뿐더러, 사랑보다는 생존이 더 중요한 문제였기 때문이다. 그럴 듯한가? 우리 시대에 사랑이 중요한 사회적 이슈가 된 것은 성 혁명을 가능하게 한 과학 기술의 발전, 폭 넓은 사회적 자유의 허용, 여성의 사회적 지위의 향상 등에 힘 입은 바가 큰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 성공적인 남녀 간의 사랑과 결합을 위한 해법에 대해 기든슨은 여성들 보다는 남성들이 더 위기일뿐더러 남자들이 더 할 일이 많다고 주장한다. 현대 사회에서 사랑은 더 이상 제도적인 것도 아니고, 어느 일방의 희생에 의해 가능할 수도 없다. 사랑은 남녀 간의 상호적 소통을 전재로 하는 것이자, 함께 둘의 현재와 미래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이때 중요한 것이 자신의 개인사를 재구성하는 능력과 자신의 이야기와 정서를 표현하는 능력인데, 사회에서 요구되고 부과된 교육 방식의 차이로 인해 이 능력이 현저하게 떨어지는 것이 여성이 아니라 남성이라는 것이다. 사랑은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고, 상대의 마음을 수용하는 과정인 것이다. 사랑이 필요한가? 아름다운 사랑을 하고 싶은가? 청춘이여, 공부하고 노력하라! 자신을 알고, 상대를 알게 됨으로써 상대를 더욱 더 많이 이해하게 되고 함께 아름다운 사랑과 생을 만들어나가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맹자와 장자가 만난다면? [맹자와의 대화 8]

전호근 / 김시천 대담

제선왕과 양혜왕, 맹자에게 러브콜하다

김시천: 맹자는 양나라 혜왕(惠王)을 비롯하여 제나라 선왕(宣王)과도 대화를 합니다. 맹자 당시에 혜왕이나 선왕은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 중국의 원자바오 총리 등에 견줄 수 있는 강국의 왕들이었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일개 사상가에 지나지 않는데, 맹자는 도대체 어떻게 이런 제왕들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일까요?

전호근: <맹자>에도 나오듯이 맹자는 제나라 선왕에 대해 기대가 엄청나게 컸습니다. 그래서 제나라에 가서 출사(出仕)를 하려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직접 벼슬을 못하고 ‘객경’(客卿)이 됩니다. ‘경’이라면 오늘로 치면 국무총리에 해당합니다. 그런데 그런 ‘경’이지만 임시로, 정규직이 아닌 비정규직으로 임명된 것이죠. 제나라 선왕이 맹자를 통해 지방관에 대한 보고를 받기까지 합니다. 왕이 맹자를 상당히 신임했던 것이고, 맹자도 기대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맹자 또한 굉장히 뻣뻣하게 굴고 말대꾸도 하고 했지만 제나라 선왕이 굉장히 착한 군왕으로 왕도정치의 가능성을 지녔다고 보고 있었습니다. 결국 연나라를 침략한 문제로 인해 갈라서게 되지만 맹자가 떠나면서 매우 아쉬워했습니다. 왜냐하면 제나라 선왕이 소 한 마리 끌려가는 것을 보면서 눈물 흘릴 줄 아는 왕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마음을 잘 계발하면 백성들을 사랑하게 하는 것은 쉽다고 본 것입니다.

김시천: 아마도 <맹자>의 이야기 가운데 가장 유명한 두 가지 이야기를 고르라면 바로 그 이야기일 것입니다. 하나는 우물에 빠지려는 아이를 구하는 사람이야기로 바로 거기에서 맹자는 ‘측은지심’에 관한 논의를 꺼내지요. 다른 한 가지가 바로 제사에 쓰일 소를 잡으러 가는데 소가 두려워 떠는 모습을 보고서는, 소를 양으로 바꾸라고 하는 내용이지요. 맹자는 이것을 보고 그 때 느꼈던 측은지심을 백성에게 정치로 펼치는 것이 왕도정치라고 권하는 이야기죠.

그런데 선왕이 맹자를 대하는 태도는 어땠나요? 초강대국의 왕이니만큼 둘 사이의 대화가 편안했을까요?

전호근: <맹자>를 보면 선왕이 솔직하게 자신은 여자를 밝히고, 재물을 탐한다고 허심탄회하게 맹자에게 고백할 정도였습니다. 다른 왕들과는 분명 다른 면모가 있었기에 비록 맹자가 선왕을 떠나기는 했지만, 떠나면서까지 맹자는 선왕을 상당히 높이 평가했습니다. 그리고 끝까지 자기를 붙잡아 주기를 바라기도 했습니다.

선왕도 맹자를 붙잡으면서 만종의 봉록을 줄테니 맹자아카데미를 만들자고 제안하니까 맹자가 이를 거절하죠. 옛날에는 십만 종을 준다고 해도 거절했는데 이제 와서 만종을 받으라는 거냐며 떠났는데, 정당한 방법으로 자기를 붙잡아 주기를 바란 것이었죠. 맹자 당시에는 진나라보다 제나라가 훨씬 강대국이었고, 선왕은 왕도정치를 실현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김시천: 대단히 높게 평가를 했군요. 마치 오바마가 미국의 대통령에 당선되자 전세계 사람들이 상당히 많은 것을 기대했었죠. 맹자도 마찬가지였나 봅니다. 그래도 선왕이 좀 다르긴 달랐나 보네요. 그럼 양혜왕의 경우는 어땠나요? <맹자>의 첫 부분에서 보듯, 처음 만난 양혜왕에게 맹자는 “하필이면 왜 이익을 말하느냐?” 하며 다짜고짜 따지지 않았습니까?

전호근: 그렇죠. 제 선왕과는 달리 양나라 혜왕에 대해서는 도덕적 평가가 높지 않습니다. 맹자는 양 혜왕에 대해 ‘불인한 군왕’이라고 했는데, 전쟁을 너무 많이 했기 때문입니다. 양 혜왕이 “동쪽으로는 제나라와 싸웠는데 패해서 태자가 죽었고, 서쪽으로는 진나라와 전쟁을 해서 7백 리를 잃었고, 남쪽으로는 초나라에 욕을 당했다. 죽은 자들을 위해 한 번 설욕해볼까 하는데 어찌하면 좋겠소?” 라고 하자, 맹자가 “사방 백 리만 갖고도 왕 노릇 할 수 있습니다.” 라고 답합니다.

김시천: 대단히 까칠했군요. 하지만 그렇게까지 말했는데도 맹자를 죽이지 않은 것을 보면 양혜왕도 상당한 사람이었던 듯싶네요. 요즘 같은 민주주의 사회인 우리나라에서도 그랬다간 쉽지 않았을텐데 말입니다.

전호근: 더한 것은 그 아들에 대해서입니다. 양 혜왕이 죽은 뒤에 즉위한 양왕에 대해서는 최악의 평가를 합니다.

김시천: 도대체 뭐라 말했기에 최악이라고 하시나요?

전호근: 이렇게 말합니다. 멀리서 보니 임금 같지도 않고, 가까이서 보니 왕다운 위엄도 없는데 그런 자가 만나자마자 졸지에 허튼 소리부터 하는구나 하며 최악의 평가를 내립니다. 양왕은 아마도 맹자 한 번 박대한 죄로 이만큼 심한 대접을 받는 것은 억울하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맹자>에 그렇게 기록된 죄로 2,000년이 훨씬 넘도록 푸대접을 받고 있는 것이죠. 그에 비하면 맹자가 제나라 선왕을 평가한 것은 맹자로서는 최대의 평가였습니다.

 

맹자와 장자가 만났다면?

김시천: 그렇군요. 헌데 <맹자>를 보면 한 가지 이상한 생각이 자주 듭니다. 철학사에서는 유가와 도가가 늘 논쟁했고 서로 각축한 것으로 그려집니다. 그런데 사실 거의 동시대를 살았고 살던 곳도 서로 멀지 않은 곳이었는데도 <장자>와 <맹자>에는 서로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전 이것이 참으로 철학사의 수수께끼라는 생각이 듭니다.

전호근: 맹자는 생몰연대가 분명합니다. 또한 장자는 <사기열전>의 ‘노장열전’에 보면 제나라 선왕과 양나라 혜왕과 같은 시대에 살았다고 하니까 두 사람이 동시대에 살았던 것은 분명하다고 봅니다. 그런데 서로에 대한 언급이 없습니다. <장자> ‘천하’ 편과 같은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말입니다. 그래서 두고두고 논란이 되고 있는데 저는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동시대인이 분명하다고 봅니다.

김시천: 하하하! 역시 선생님다운 논법이에요. 같은 시대를 살았고 바로 이웃 지방에 살았는데 서로에 대해 언급이 없었다. 그렇다면 ‘이상하다!’ 라고 말해야 할 텐데,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동시대인이 분명하다’고요? 참으로 맹자식의 언변입니다. 자, 그 이유를 들어야겠네요!

전호근: 맹자의 세상은 ‘천하’(天下)이고, 장자의 세상은 ‘강호’(江湖)라고 볼 수 있습니다. 결국 노는 물이 다른 거죠. 맹자가 천하를 다스린다고 하는 것은 천하를 다스리는 자를 다스려서 천하를 바로잡으려고 한 것이죠. 이때 ‘천하’는 질서를 통해서 구현하려고 하는 당시 중국의 공간이고, 장자는 그런 질서에서 벗어나 있는 장자 식의 표현대로 ‘방외지사’(方外之士)인 것이죠. 그런 식으로 노는 물이 다르니까 서로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평가할 기회가 없었지 않겠느냐는 것이죠. 또 당시에는 장자가 <장자>라는 책을 쓰고, 맹자가 <맹자>라는 책을 써서 서로 바꿔볼 수 있었던 상황이 아니었죠.

김시천: 그것 참 그럴 듯하네요.

전호근: <논어>는 오랫동안 사람들의 기억 속에만 있었던 책이었죠. 말씀으로 기억되어 있다가 기록된 책이었죠. <장자>나 <맹자>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같은 주장을 하는 사람이 같이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는 상황이 아니라면 서로 만날 수가 없는 것이죠. 그 당시 텍스트가 어떤 식으로 존재했는가를 이해하면 이렇게 서로 비판하고, 이야기하고, 논쟁하기 좋아하는 맹자와 장자가 왜 서로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는가를 어느 정도 납득할 수 있습니다. 물론 둘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초절정의 고수, ‘공자’같은 사람도 물론 있었습니다. ‘방내’(方內)와 ‘방외’를 두루 섭렵하면서 말이죠.

김시천: 공자가 방내와 방외를 두루 섭력했다는 것은 선문답이네요! 물론 저도 그 점은 동의합니다. 적어도 한 제국 이후의 지식인들에게 공자는 그렇게 생각되는 인물이었죠. 그러나 맹자와 장자의 이야기는 조금 다르지 않을까 싶습니다. 물론 선생님 말씀처럼 텍스트의 형태로 이야기한다면 그것은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입니다.

전호근: 물론 그것은 가능한 한 가지 추정의 방식이긴 하죠.

김시천: 전 조금 다른 방식으로 의구심을 갖고 있어요. 무엇보다 우리가 ‘철학사’라는 것을 통해 고대 중국의 철학자들을 배우기에 공자, 노자, 맹자, 장자는 거의 대등한 위상과 의미를 갖는 것처럼 착각을 심어줄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장자열전’에 나오는 이야기도 그렇지만 장자라는 인물은 매우 불우한 인생을 살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생존 당시에는 거의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던 듯합니다. 오히려 그가 이름을 남긴 것은 재상까지 지낸 그의 친구 혜시(惠施) 덕분이 아닌가 싶어요.

물론 이것은 그의 책 <장자>와는 별 개의 이야기입니다. 어찌 보면 맹자는 생존 당시 천하의 강대국들의 제후들에게 유세하며 살았던 풍운아였다면, 장자는 한적한 시골에서 그다지 이름은 알려지지 않은 채로 여생을 보냈던 것이 아닌가 싶어요. 가끔 재상 친구 혜시와 벗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맹자의 가슴 속에 천하를 호령하는 기개가 담겨 있었듯이 장자의 가슴 속에도 우주를 꿰뚫는 도(道)가 숨겨져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합니다. 결국 그 도는 문자를 통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이겠죠.

전호근: 그 또한 충분히 그럴듯한 얘기로군요!

(계속 이어집니다)

 

 

공자와 맹자는 호랑이 선생님? [맹자와의 대화 7]

전호근 / 김시천 대담

부드러운 공자, 성깔 있는 맹자?

김시천: 지금까지는 <맹자>와 관련된 역사와 주변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다루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는 <맹자>의 안으로 들어가서 이야기를 해 보고자 합니다.

우선 눈에 띄는 점은, <논어>에서는 당시의 유력한 정치가들 즉 제후(諸侯)들이 등장하더라도 일부분에 지나지 않으며, 이들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거의 공자의 독무대이거나 공자의 제자들이 무대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이야기가 태반을 이룹니다. 이러한 정황을 반영하는 것이 지금도 쓰이는 말로, ‘공자 문하의 뛰어난 현인 10인’(孔門十哲)이나 ‘공자 문하의 뛰어난 제자 72인’(72제자) 혹은 그의 제자가 엄청나게 많았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로 ‘삼 천 여 명의 제자’(三千弟子)와 같은 표현들이 이를 증명합니다.

그런데 <맹자>에서는 이와는 사정이 많이 다른 것 같아요. <맹자>의 첫 편은 ‘양혜왕’입니다. 그는 당시 제(齊) 나라의 위왕(威王), 선왕(宣王)과 같이 천하의 이름을 떨친 중흥 군주였습니다. <맹자>는 이런 당시의 쟁쟁한 인물들과 만나 대화합니다. 오늘날로 치면 미국과 중국, 러시아, 영국, 프랑스 등등의 대통령과 두루 만나 대화한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게다가 만날 때마다 그들에게 가르침을 늘어놓지요. 간 큰 사람이라 아니할 수 없어요. <논어>에서는 이런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지 않습니까?

 

전호근: <맹자>에서 그런 점은 아주 특징적입니다. 공자의 경우는 직접적인 논쟁이 없었죠. 다만 대화를 하려고 했는데 상대가 피한 경우는 종종 있어요. 어쩌면 <논어>에서는 공자와 상대가 될 만한 논객이 없었다고 봐야 하겠죠. <장자>에서는 그런 논쟁이 대단히 많이 나오죠. 특히 <장자>에는 그의 친구이자 논쟁의 상대였던 혜시(惠施)라는 인물도 있었죠.
영화 ‘공자'(2009)의 한 장면김시천: 오죽했으면 맹자의 제자 공손추가 왜 그렇게 논쟁을 좋아하느냐고 따지기까지 하지 않았습니까? 맹자는 ‘부득이’(不得已) 해서 그렇다고 바로 부인하기는 했지만요. 바로 그 점이 또 <논어>와 다른 점인 듯합니다. <맹자>에서는 ‘만장’이나 ‘공손추’와 같이 제자들의 이름이 편명으로 등장합니다. 물론 <논어>의 경우도 그렇기는 하지만, <논어>는 첫 구절을 따서 이름을 지었기에 거기에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논어>와 <맹자>에 등장하는 제자들의 이야기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전호근: <논어>에는 제자들끼리 토론한 편이 따로 있어요. ‘자장’ 편이 바로 그것이죠. 또 ‘자하 왈’ 이라거나 ‘자유 왈’처럼 공자의 제자가 혼자 이야기한 것을 기록한 것이 있고, 또 제자들끼리 논쟁하는 부분도 있습니다. 그에 비하면 제자들이 공자와 논쟁하는 부분은 극히 드물다고 할 수 있어요. 그에 비하면 맹자는 여러 사람과 논쟁을 합니다. 심지어 제자들과도 논쟁이 있었어요. 이 점은 공자와 아주 다른 점이죠.

<논어>에도 예외적인 경우가 있기는 합니다. 바로 그의 제자 가운데 가장 나이가 많았던 자로(子路)가 그렇습니다. 그런데 자로의 경우에도 그가 공자와 대등한 대화자로서 논쟁한다기보다는 공자에게 무턱대고 대들다가 심하게 욕을 먹는 장면들이죠.

 

호랑이 선생님 공자, 논쟁의 달인 맹자

김시천: 자로가 심하게 당한 이야기 하나 들려주시지요! 도대체 어떤 식으로 욕을 먹었나요?

 

전호근: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바로 ‘자로’편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자로가 “위(衛) 나라 임금이 선생님을 초빙하고자 한다면, 가셔서 무엇부터 하시렵니까?” 하고 묻자, 공자가 “반드시 명분부터 바로 잡겠다”고 답합니다. 그때 자로가 “참 답답한 선생님! 꼭 이렇다니까!” 하며 대꾸를 합니다. 그러자 공자는 “야비하구나, 자로야!” 라고 나무랍니다. 아마도 공자가 직접 저술했다면 더욱 리얼한 표현을 했을 텐데, <논어>가 공자의 제자의 제자가 저술한 것이어서 전반적으로 온유한 표현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공자도 상당히 성격이 있는 인물이었다고 봅니다.

 

김시천: 매우 온화한 스승의 상으로만 알려진 공자의 모습과는 조금 다르군요! 정말 공자가 한 성격 하는 사람이었나요?

 

전호근: 미생고라는 사람이 매우 정직한 사람으로 소문이 났는데, 어떤 사람이 그에게 식초를 빌리러 오자 이웃에게 가서 꾸어서 빌려주었다고 합니다. 그러자 공자가 이를 일러 “부정직하다”고 비난합니다. 자기에게 없으면 그만이지 이웃에게 꾸어서 빌려주는 것은 은혜를 훔친 것이라고 비난한 것이죠. ‘월권’과 같은 것에 굉장히 예민했던 공자였던 것이죠.

이런 공자의 한 성격이 자로와의 대화에서 상당 부분 드러납니다. 공자가 온유하며 적재적소에 필요한 가르침을 베풀었다고는 하지만 자공이 잘난 체를 하자 “안회와 너 둘 중에 누가 더 낫다고 생각하느냐”며 비교하는 아주 좋지 않은 교육방법도 취했습니다.

 

김시천: 자로가 상당히 당황했겠네요. 실제로 <논어>에는 자로가 면박을 당하는 장면이 자주 나옵니다. 하지만 선생님 말씀대로 <논어>는 그래도 <맹자>나 다른 문헌들에 비해 논쟁을 찾아보기 어렵죠. 왜 그런 것일까요?

 

전호근: 기록의 차이가 크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공자의 제자의 제자들이 기록했기 때문에 공자에게 직접 배운 제자들의 말씀도 굉장히 중요하게 취급된 것이었죠. 유자나 증자의 경우에도 <논어>의 기록자 입장에서 보면 선생님이었던 것이죠. 그래서 결국 공자의 제자들 위상까지 같이 높이게 된 것이죠. 만약 <맹자>도 맹자의 제자의 제자들이 기록했다면 만장이나 공손추가 같이 높아지는 텍스트로 <맹자>가 기록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어쨌든 제 생각에 <맹자>는 맹자가 직접 저술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김시천: 그런데 제가였던 공손추가 은근히 논쟁을 좋아하는 맹자를 비꼬지 않았습니까? 그런데도 맹자의 말은 참으로 대범하지 않습니까?

 

전호근: <맹자>의 공저자라고도 볼 수 있는 제자 공손추가 “밖에서 선생님을 변론과 논쟁을 좋아하는 사람으로 보고 있습니다”라고 전합니다. 유가에서는 본래 논쟁하는 것을 높이 평가하지 않습니다. 공손추의 말에 맹자가 “내가 어찌 변론을 좋아하겠느냐” 라고 말하면서 바로 요임금, 순임금을 들어가며 변론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에 대해 구구절절하게 말을 이어갑니다.

 

<맹자> 속의 자로, 악정자

전호근: 그래서 <맹자>의 대화는 대체로 승부가 있는 방식으로 전개됩니다. 임금들과의 대화에서도 여지없이 바로 말을 잘라버리는 것이 맹자입니다. 나라의 이익을 구하기 위해 제나라 환공, 위나라 문공과 같은 패자를 닮고 싶다고 한 왕에게 맹자는 그것을 수치로 여긴다고 잘라버립니다.

<맹자>는 논쟁에서 승부가 갈리는 방식으로 대화가 전개되기에, 상대적으로 <논어>에 비해 제자들이 부각되기는 힘든 문체를 지니고 있습니다.

 

김시천: 그렇군요. 제자와의 대화를 통해 자연스럽게 스승의 상을 부각시키는 면모가 강한 <논어>와 달리, <맹자>는 논쟁의 승패를 염두에 둔 구성이기에 제자가 부각되기 어려웠다는 것은 쉽게 납득이 갑니다.

공자의 제가 가운데는 벼슬을 한 사람이 꽤 있었습니다. 맹자의 제자들은 어떤가요?

 

전호근: 맹자의 제자 중에는 악정자(樂正子) 정도가 벼슬을 한 것으로 알려졌고, 그 외는 알려지지 못했습니다.

 

김시천: 아하! 그 악정자 말씀이로군요. 공자에게 늘 면박당했던 자로처럼 맹자에게 면박을 당했던 그가 벼슬을 했었군요.

맹자가 제 나라에 있을 때 악정자가 자오(子敖)와 함께 제 나라게 갔다가 맹자에게 인사를 가죠. 그런데 맹자는 악정자를 보자마자 “그대로 나를 찾아왔나?” 하고 퉁명스럽게 말을 건넵니다. 왜 그러시냐고 악정자가 되묻자 맹자는 언제 왔느냐고 묻고 악정자는 어제 왔다고 대답을 하지요. 그러자 맹자는 어제 왔다고 하니 이렇게 말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느냐 하고 따집니다. 그제야 악정자는 묵을 곳을 정하지 못해 그렇다고 변명을 합니다. 그랬더니 맹자가 한 성깔하며 이렇게 말하지요. “그대는 그렇게 배웠는가? 묵을 곳을 정한 다음에 어른을 찾아뵌다고 배웠는가?” 하고 말입니다.

이런 기록을 보면 맹자는 무척이나 인간적인 면을 진솔하게 드러내는 사람이었던 듯 싶습니다. 그런데 맹자의 제자 가운데는 벼슬에 나아간 사람이 별로 없군요. 이는 공자의 제자들과는 사뭇 다른 듯하군요.

 

전호근: 공자의 제자 중에는 여러 나라에서 재상까지 했던 자공이 유명하죠. <사기열전>의 ‘중니열전’에는 자공의 활약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는 공자학당의 든든한 후원자기이도 했었죠. 그런 경제적 배경이 있었기에 공자학당은 오랫동안 존재할 수 있었죠. 맹자에 이어지기까지 공자학당이 존재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공자의 제자들이 더 알려졌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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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영화 <공자>(2009)의 한 장면 / 자로상

(계속 이어집니다)

 

인간의 본성, 네거티브와 포지티브 [맹자와의 대화 6]

전호근 / 김시천 대담

 

맹자의 성(性), 당근과 채찍을 거부하다!

 

김시천: 자, 이 지점에서 다시 성선설(性善說)과 성악설(性惡說)의 문제를 살펴보는 것이 순서일 듯합니다. 먼저 <맹자>에서 인간 본성의 문제는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이 점은 맹자가 고자(告子)와 한 논쟁에서 잘 드러나지 않습니까? 당시에 인간의 본성을 보는 관점이 매우 다양했었나요?

 

전호근: <맹자>에 보면 당시의 인간 본성에 관한 다양한 주장이 모두 다 실려 있습니다. 그래서 언젠가 저는, <맹자>가 고자라는 사람을 통해 인간 본성에 대한 논의를 모두 말하게 하고, 이를 비판하기 위해서 가공으로 만든 사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 적도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고자의 주장이 계속 바뀐단 말이죠.

 

김시천: 어떤 학자들은 맹자와 인간 본성을 둘러싸고 벌인 논쟁에서 고자가 도가(道家)에 속하는 인물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 어떤 학자들은 고자가 인간을 생물학적 본성에 바탕하여 이해하고 있다면, 맹자는 이념적이고 당위적으로 인간의 본성을 이해하고 있다고 보는 경우가 많지요. 전 이 점이 오해하고 생각합니다.

특히 일부 학자들은 서구적 개념인 존재와 당위, 사실과 가치의 구도를 들이대면서, 영국의 철학자 무어(G. E. Moore)가 말하는 ‘자연주의의 오류’를 범한 논변의 대표가 바로 맹자의 성선설이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맹자>에서 고자가 대변하는 인간 본성에 관한 이해는 어떤 것인가요?

 

전호근: 한 가지 예를 들어 보지요. ‘고자’ 상편에서 고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의 본성은 소용돌이치는 물과 같다. 물이 동쪽으로 터주면 동쪽으로 흐르고, 서쪽으로 터주면 서쪽으로 흐르니, 인간의 본성에 선(善)과 불선(不善)의 구분이 없는 것과 같다.” 그러자 맹자가 그것은 틀렸다고 하면서, “물은 참으로 동서(東西)의 구분이 없지만 상하(上下)의 구분도 없는가?” 라고 되묻습니다. 그리고는 모든 물이 아래로 흐르는 것처럼 모든 인간의 본성은 선하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맹자가 반박하는 논리가 타당하지 않다고 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맹자의 반박이 논리적으로 완전한 것은 아닙니다. 모든 물이 아래로 흐르는 것처럼 모든 인간의 본성은 악하다 라고 말할 수도 있으니까요. 똑같은 얘기거든요.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점은 논리적으로 완전한 것이냐 아니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이 이야기에서 고자가 물을 비유로 들었기 때문에 맹자가 같은 비유로 받아친 것이라는 점이 더 중요합니다.

 

김시천: 중요한 지적이십니다. 사실 그 부분에서 맹자는 이렇게 받아치지요. “지금 손으로 물을 탁하고 쳐서 튀게 하면 그렇게 튄 물이 우리 이마에까지 오르게 할 수 있고, 또 흐르는 물을 역행시키면 산으로 오르게 할 수도 있지만 이것이 어찌 물의 본성이겠는가?” 하고 묻습니다. 그리고 <맹자>는 여기서 ‘세’(勢)를 말합니다. 이 ‘세’는 오늘날의 말로 하면 ‘타자의 강제’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맹자>가 구분하고 싶었던 것은 인간 본성의 선악이라기보다 사실은 그 성(性)을 대하는 인간의 태도를 말한 것이 아닐까 합니다. 쉽게 이야기하자면, 당근과 채찍으로 인간의 행동을 유도하는 것을 구분하고자 했던 것이 맹자의 의도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어떤 사람이 똑같이 헌혈을 한다고 할 때, 다른 사람을 돕기 위해 헌혈을 하는 것을 맹자는 ‘본성’이라고 보았다면, 배고픔을 면하기 위해 헌혈을 하는 행동을 구분하고자 했던 것이 맹자의 본지(本旨)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가 ‘측은지심’(惻隱之心)을 말하는 것이지요.

바로 이 지점을 파고 든 것이 법가(法家)의 생각 아닌가요? 인간은 당근으로 유인할 수 있고 또 채찍으로 강제할 수 있다는 것! 바로 그것이 ‘형벌’(刑罰)의 의미이기도 하고요. <맹자>는 바로 그러한 힘에 의존하는 권력의 부당성을 말하고자 했던 것이, 그의 인간 본성에 관한 논의의 핵심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그가 그렇게 강조하는 왕도정치는 곧 측은지심의 발현에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하는 것이겠죠!

 

생장하여 열매 맺는 뿌리가 바로 ‘성’이다

김시천: 그 외에 다른 구분도 있었지요? 사람을 구분하는 논의도?

 

전호근: 그렇죠! 고자는 또, “어떤 사람의 본성은 악하고, 어떤 사람의 본성은 선하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맹자가 “모든” 사람의 본성은 선하다고 못 박아서 말합니다. 어떤 사람은 악하고 어떤 사람은 선하다면 악한 사람은 배제하고 선한 사람하고만 살아야 되겠지요. ‘악의 축’이 따로 있다는 말과 통하는 것이죠. 또 고자는 이렇게도 말합니다. “인간의 본성은 선도 없고 악도 없다” 고자가 말합니다. 그러자 맹자가 또 비판합니다. 인간의 본성은 그냥 선하다, 악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런데 ‘성선설’을 주장하면 인간의 ‘악행’에 대한 설명을 할 수 없잖아요? 그것이 문제인데 인간이 악행을 저지르는 것은 인간의 ‘재질’(才質)의 죄가 아니라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재’라는 글자를 눈여겨 볼 필요가 있어요. ‘재才’는 땅 속에 숨어서 싹을 틔우지 못하고 잠재된 것을 뜻합니다. 이것이 맹자가 말하는 ‘성’인 것입니다.

 

김시천: 바로 그런 점으로 인해 아이린 블룸이라는 미국의 학자는 <맹자>의 ‘성’ 개념이 식물적이라는 점을 지적한 바 있습니다. <맹자>의 인간 본성에 대한 개념도 생물학적이라는 말이지요. 더 나아가 사라 알란이라는 영국의 갑골문학자는 고대 중국에 식물과 물(水)의 은유를 통해 세계를 이해하는 사고방식을 매우 중시하였습니다. 특히 그는 이를 두고 ‘뿌리 은유’라고 부르기도 했지요.

시게히사 쿠리야마라는 학자는 이런 점 때문에, 고대 중국에서 출현한 한의학의 독특성이 이로부터 비롯된다고 보기도 했습니다. 마치 인간을 살아서 움직이는 나무와 같이 보았다는 것이지요. 이런 시각에서 보면 환자를 치유하는 의사는 정원사나 농부에 비유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렇게 보면 유가의 최고 덕목인 인(仁)에 씨앗이라는 의미도 있다는 것은 재밌는 일 같습니다. 그것은 생장하여 열매를 맺는 그 무엇인 모양입니다.

그런데 본성과 재질을 논하게 되면, 그 이후 다양한 논의로 이어지지 않았나요?

 

전호근: 그렇죠. 맹자의 본성론을 ‘재질’ 그 자체로만 보아서 비판을 하게 되면 굉장히 복잡해집니다. 후에 송(宋) 나라 시대에 인간의 본성을 ‘기질지성’(氣質之性)과 ‘본연지성’(本然之性)으로 나누어 본 것이 이에 해당하죠. 물론 우리는 맹자가 ‘기질지성’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를 비판할 수 없다는 것을 당연하게 알고 있죠. 왜냐하면 철학사를 공부했기 때문에 그 시대에 형성되지 않은 개념으로 맹자를 욕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송대의 학자들은 그런 오류들을 간혹 저지릅니다. 인간이 악행을 저질렀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본성’이 잘못되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악행은 기질의 잘못이지 본성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송대 학자들이 이끌어 낸 결론이었죠!

 

김시천: 그래도 송대 학자들은 ‘성선설’을 지키고자 했던 것 아니겠습니까?

 

전호근: 어쨌든 이런 식으로 <맹자>는 인간 본성에 관한 여덟 가지 입장을 고자나 그의 제자의 입을 통해 나열하며, 하나 하나 맹자가 비판을 합니다. 물론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고 한 맹자의 ‘성선설’이 논리적으로 입증이 된 것인가 하는 관점에서 <맹자>를 따라가다 보면 대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사회진화론, 우생학 그리고 <순자>의 성악설

전호근: 오히려 저는 수많은 악이 도처에서 일어나는 전쟁의 시대에 맹자가 왜 그처럼 끝까지 ‘성선설’을 놓치지 않았는가 하는 부분에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맹자는 그런 점에서는 좌절하지 않았던 사람입니다. 개인이 처한 시대에 대해서도 좌절하지 않고 인간이 선하다는 자기의 주장을 끝까지 견지했다는 점에서 평가되어야 합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실이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죠.

 

김시천: 사실이 문제가 아니라는 점에는 저도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중요한 것은 같은 논의를 하더라도 어디에 초점을 맞추는가에 따라 다른 것 같습니다. 전 오늘날 유행하는 진화론 담론도 이와 같은 상황에 처해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오늘날 신진화론의 선두 주자인 에드워드 윌슨이나 리차드 도킨스 같은 학자들이, 약육강식의 논리로 이해된 사회진화론과 같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에드워드 윌슨이나 리차드 도킨스 자신은 그렇지 않다 해도, 그들의 발언이 어디에서 어떻게 이용될지 모르는 것입니다. 인간의 유전자가 이기적이라는 말은 ‘네거티브’입니다. 분명 바꾸거나 극복해야 할 어떤 실체처럼 여겨진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맹자>에게는 그런 방식의 위험성이 내포되어 있지 않은 포지티브라는 점, 그것이 맹자의 수사학이 갖고 있는 위대함이라고 봅니다. 절대로 적이 내 논의를 써먹을 수 없도록 한다는 점이 맹자의 장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바로 ‘성선설’이라는 담론이고, 제자백가 중에서 공자를 살린 위대한 학자가 맹자라고 봅니다.

 

전호근: 진화론이나 사회진화론을 주장하는 학자들의 이야기가 결국은 ‘짝짓기’로 귀결되는데, 인간이 자기의 유전자를 남기기 위해 애쓰는 것이 인간의 가장 중요한 본성이라고 얘기되는 것이죠.

제가 읽었던 어떤 프랑스 소설에서는 한 남자가 결혼해서 여섯 자녀를 두었지만 단 한 명도 자기의 친자식이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이 바보 같은 남자는 자식들을 극진히 보살피고, 가르치고, 사랑으로 돌보면서 죽을 때에도 전 재산을 다 물려주고 갑니다. 윌슨과 같은 진화론이나 짝짓기 논리에서 본다면 이 사람의 이야기는 말도 안 되는 것이죠.

맹자가 ‘성선설’을 주장한 것도 이와 같은 입장에서 한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제나라의 전화(田和)는 자기의 집에 180명의 후궁과 부하들에게서 낳은 자식까지 두었답니다. 그래도 모두 자기의 친자식처럼 거두어 살고 나주에 나라까지 다 말아먹었다는 이야기도 전합니다. 이것은 자식이고 아니고 간에 모조리 권력욕으로 설명할 수밖에 없는데, 이런 경우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김시천: 다시 <순자>로 돌아가 보면, 순자가 성선설을 비판하며 성악설로 간 것을 저는 매우 아쉽게 생각합니다. 이를 근대 서구의 토마스 홉스와 비교해 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홉스는 인간의 본성은 사악하다는 이론을 강력하게 주장하면서 <리바이어던>을 통해 전제군주를 옹호합니다. 마찬가지로 순자도 공자나 맹자와는 달리 강력한 군주의 역할을 강화하는 논리를 폈습니다. 이런 논의의 중심에는 똑같이 ‘성악설’이 있습니다.

그런데 전 여기서 성선과 성악 가운데 어느 이론이 맞느냐 혹은 과학적으로 증명될 수 있느냐 하는 것만 중요한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순자>가 성악설을 편 이후 한 나라 때에는 희한한 일들이 있었습니다. 불길한 날에 태어난 어린아이를 죽이는 것입니다. 물론 영아 살해는 세계적으로 관찰되는 현상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이론적으로 강화될 때 그런 행위는 더욱 자주 일어날 것입니다.

마치 미국에서 우생학이 유행하며 수많은 가난한 남성들에게 강제로 자식을 낳지 못하도록 수술을 했던 일과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비록 역사적 규모는 다르지만 사건의 본질은 크게 다르지 않으니까요. 전 그래서 철학자의 수사에서도 네거티브와 포지티브의 전략이 중요한 차이를 갖는다고 생각합니다. 선거에서만 그런 게 아니라!

[사진자료] 순자 / 리바이어던

(계속 이어집니다)

‘(나)꼼수’에 속지 말고 닥치고 페미니즘[배운년 나쁜년 미친년]

황 주 영(서울시립대학교)

논점 일탈한 나꼼수의 변명

나꼼수 ‘비키니 응원’과 ‘코피 발언’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일련의 현상을 주제로 글을 쓰려고 하는데, 하루가 멀다 하고 새로운 일이 벌어지니 어디에 초점을 맞추어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현 시점은 ‘나꼼수 봉주 5회’가 업데이트 되었고, 거기에서 김어준씨는 저간의 상황을 요약하면서 김용민씨와 주진우씨 각각의 발언에 대해서 해명을 했다. 해명의 내용은 1) 원래 그런 사람들 아니다, 2) 김용민의 성욕감퇴제 관련 발언은 비키니 응원사진이 올라오기 전에 녹음한 방송분이므로 잘못 엮인 것이다, 3) 성희롱 의도는 전혀 없었으며, 우리의 발언은 모두 ‘가카’를 겨냥한 것이다, 4) 성희롱은 권력관계에서 나오는 것인데 비키니 응원 여성과 자신들 사이에는 아무 권력관계가 없으므로 사건 자체가 성립이 안 된다,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1)과 3)은 나꼼수 콘서트에서 김어준씨 스스로 말했듯이, 변명이 되지 않는다. 성폭력과 가정폭력 등 여성에 대한 폭력의 가해자들 중 많은 이들이 고학력에 가정이나 직장에서는 한없이 자상하고 점잖은 분들이다. 의도가 없었다? 그렇겠지. 지하철에서 의도치 않게 남의 발을 밟아도 우리는 자연스레 사과를 한다. 그게 뭐 어렵다고. 왜 남성들에게는 자신이 의도하지 않은 성폭력에 대한 사과가 그렇게도 어려운 일일까? 어쩌다 한 한 번의 실수가 아니기 때문인가? 자신의 의식과 무의식 속에 뿌리깊이 박혀있고 일상적으로 수행하는 언행과 관련되어 있어서, 그에 대해 사과를 하면 자기 존재와 일상 전체를 걸고 사과하는 셈이라서 그런 걸까? 게다가 자신들의 발언은 모두 가카를 향한 것이라는 변명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대의를 위해서라면 여성비하적인 발언 정도는 괜찮다는 뜻일까? 2)는 사실 관계가 그러하다면 인정하겠다. 하지만 문제는 그의 발언이 비키니 응원 여성과 관련되지 않았을 뿐, 방송을 청취하는 (김어준씨 말에 따르면 ‘동지’일 수도 있을) 여성들이 김용민씨의 발언 속에서 한낱 성적 대상으로 취급되었다는 점에서는 달라지는 게 없다. 게다가 많은 여성들이 문제를 제기한 것은 ‘비키니 응원 여성’에 대한 나꼼수 멤버들의 성희롱이 아니라, 여성 일반에 대한 나꼼수 멤버들의 남성중심적 관점이었다.

따라서 4)의 해명도 기각된다. 김어준씨가 말하는 권력관계에는 성폭력에서 가장 중요한 여성과 남성 사이의 성적 불평등은 빠져있다. 비키니 응원 여성과 나머지 다른 남성들 사이에는 불평등한 관계가 있다. 이 여성이 아무리 자발적으로 자신의 몸을 드러내도 그 자발성은 성적 불평등이라는 이 조건 속에서 완전한 자발성이 되기 어렵다. 마돈나가 여성의 욕망을 적극적으로 표현했다는 점에서는 획기적이었어도, 그 몸을 훑는 카메라의 시점은 가부장적인 남성의 시선이라는 것은 이미 수없이 언급되지 않았던가. 남성은 그러지 않는데 여성이 비키니를 입고 김어준씨가 말하는 그 ‘생물학적 완성도’를 드러내는 것을 응원의 방식으로 삼을 수 있다는 것, 그 자체가 이미 여성과 남성이 권력에 있어서 서로 다른 위치에 배치되어 있다는 걸 말해준다. 나아가 재차 강조하면, 여러 여성들이 문제 삼는 것은 ‘비키니 응원 여성에 대한 성희롱’이 아니다. 여성을 “남성의 정치적 활동의 사기 진작을 위한 대상 정도로 전락시킨 것”을 문제삼는 것이다.(<삼국카페 공동 성명서> 중 인용.)

 

페미니즘 비판으로 물 타는 마초들의 꼼수

 

김어준씨는 ‘나꼼수 봉주 5회’에서 현재 이 사안에 대한 논의 수준이 낮다고 지적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발언을 거의 그대로 옮겼으며, 주술호응이 되도록 하는 정도만 수정함.)

“<저 세 놈의 남자새끼들이 마초라서 그랬다>에서 한 발짝도 더 안 나갔다. 마초라는 혹은 쇼비니스트에, 성적 감수성이 졸라 둔한 새끼들, 남자새끼들이라서 그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한계 내에 있는 거다. 그 틀에 맞춰서 욕을 한다. 실제로는 우리를 쇼비니스트로 만드는 것 외에는 우리가 하고 있는 짓을 해석할 틀, 언어가 없다.”

안타깝게도 나꼼수 멤버들은 성적 감수성과 성인지적 사고가 부족한 마초 맞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마초 아닌 인간이 몇이나 된다고, 마초라고 지적받았다고 해서 너무 그렇게 기겁할 거 없다. 쫄지 마~) 뭘 좀 안다고 마초가 아닌 게 되는 건 아니다. 페미니스트도 제대로 페미니스트가 되려면 마초가 아니기 위해서 매순간 노력해야 한다.

김용민씨가 방송에서 ‘정봉주의 좆이 되겠다’는 발언을 했을 때는 아슬아슬했다. 더군다나 ‘생물학적 완성도’라니. ‘생물학적’이라는 표현이 여성의 몸에서 동물성을 강조하고, ‘완성도’라는 말이 남성중심적인 판단 기준을 전제로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필자의 뇌구조가 이상한 건가? 이런 표현을 떠올릴 수 있는 김어준씨가 마초적이지 않다면 대체 누가 마초적인지 되묻고 싶다. 만약 비키니 응원 사진을 올린 것이 나이든 여성이거나 장애 여성이거나 비만인 여성이었다면, 다시 말해 ‘생물학적 완성도’가 떨어지는 소위 ‘정상성’에서 벗어난 여성이었다면 나꼼수 멤버들은 무슨 농지거리를 했을까? 이런 질문을 해보면, 이들의 농담이 모두가 웃을 수 있는 농담이 아님을 금새 알 수 있다. 김어준씨는 이성을 성적으로 대상화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 했다. ‘대상화’라는 단어가 갖는 의미에 대해 김어준씨와 페미니스트들 간에 이견이 있을 수 있다. 김어준씨는 남녀 쌍방 간에 대칭적인 대상화가 가능하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는 반면, 페미니스트들은 남성중심적 시각에 따라 여성이 주체가 아닌 한갓 대상으로 취급되는 것을 대상화라 일컫는다. 후자는 남성과 여성이 가부장제적 상징질서 내에서 이미 비대칭적 권력관계에 놓여있음을 전제한다. 성적 대상화는 결코 중성적이거나 가치중립적이지 않다. 누가 누구를 어떤 성별 권력관계 하에서 어떻게 대상화하느냐 하는 것을 자문해보지 않는 김어준씨의 수준 또한 그리 대단하지가 않다.

결국 ‘나꼼수’는 언급과 변명만 했을 뿐 사과는 하지 않았다. 혹자들은 페미니스트들이 열폭(열등감 폭발의 준말로 인터넷 신조어)해서 싫고 나꼼수는 쿨해서 좋다는데, 필자 눈에는 나꼼수는 쿨한 척 하면서 열폭 중이다. 어느 블로거 말대로 ‘미안하다, 씨바, 다신 안 그럴게!’라고 나꼼수답게 사과하면 그만인 것을, 이미 닳고 닳은 논리를 끌어다 대면서 제3자를 자처하고 있다. 김어준씨는 ‘전지적 가카시점’에서 사태를 관망하면서, 모든 것이 다 논의되어야 사회적 비용을 치른 만큼 사회적 이득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이 문제와 관련해 우리 사회의 수준이 완전히 드러날 때까지 기다리는 게 맞다고 ‘유체이탈화법’을 구사한다. 자신은 당사자가 아니라는 듯 태도를 취할 뿐 아니라,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으나 아직은 때가 무르익지 않아 날개를 접고 있는 미네르바의 올빼미가 김어준 씨에게 빙의했다.

나꼼수 멤버들은 비키니 응원 여성을 ‘골빈 년’으로 만드는 폭력적인 상황을 비판하면서 그 여성 뒤로 몸을 숨기고, 당사자가 아닌 체 한다. 한 개인 여성을 보호하는 제스쳐를 취함으로써 집단으로서의 여성과 여성운동을 물 먹인다. 기가 막힌 전략이다. 거기에 더하여 몇몇 미묘한 발언들은 이번 건이 나꼼수 멤버들을 겨냥한 보수언론과 정치인들의 꼼수임을 암시한다. 그러니까 그들이 하고 있는 짓을 해석할 언어와 틀은 기껏해야 ‘음모론’이 전부다. 가카와 이하 보수세력을 겨냥한 언행이란 거다. 김어준씨는 자신이 더 큰 적, 더 큰 권력이라고 생각하는 것에 대항하는 그놈의 ‘대의’ 뒤로 또 슬며시 숨어들어간다. 이렇게 해서 비키니 입은 여성은 쿨하고 발랄하고 섹시한, ‘남성들의’ 정치적 동지가 됐고, 광우병 촛불집회 때부터 지금껏 정치활동을 하며 그 의식을 노동, 환경, 여성문제에까지 확장해온 삼국카페 회원들은 보수언론에 속아 넘어간 물정모르는 여자들이 됐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일관된 음모론이 향한 칼끝이 여기라니!

 

페미니즘으로 쟁점화 되기를 바라며

 

다행히도(?!) 나꼼수 멤버들은 (이번에 배운 건지 정말 이미 알고 있었는지 모를 일이지만) 어지간한 진보적 남성 지식인에 비해서는 약간 더 알고 있는 것 같다. 이들은 방송에서 성폭력 사건에 있어서 피해자의 판단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것, 가해자의 의도의 유무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 여성이 이런 이슈에 민감할 권리가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고, 자기들은 배운 남자라고 항변했다. (이 정도 기본 지식을 가지고 칭찬받고 싶다거나 그런 건 아니겠지?) 미안하지만 배운 여자들은 배운 남자들만큼 못 믿을 사람도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다. 특히 ‘진보적인’ 혹은 ‘비판적인’ 배운 남자들은 더 그렇다. 대학에서, 진보적 운동 단체들에서, 운동권 학생회에서 중심적인 활동을 했던 수많은 남성들과 교수들이 자신의 여성 ‘동지들’을 성폭력 피해자로 만들었고 지금도 그러고 있다는 걸 김어준씨가 모르진 않겠지.

삼국카페는 공동성명서에서 여성을 치어리더로 삼는 남성중심의 ‘반쪽 진보’인 ‘나꼼수’에 대한 ‘무한한 애정과 믿음, 동지의식을 내려놓는다’고 말했다. 얼마나 많은 여성들이 이런 심정으로 오래 몸담았던 진보적 집단에 등을 돌렸고, 페미니즘을 공부하거나 여성운동을 시작했던가! 나꼼수 멤버들이 다른 남성들에 비해 1그램 정도 낫다거나, 십 년 전이나 지금이나 남자들은 변한 게 없다거나 하는 생각으로 시간을 허비하지 말자. 사실 이번 일에 대한 (나꼼수 멤버를 포함한) 남성들의 반응은 너무 빤하기 때문에 새삼 놀랄 것도 없다. 페미니스트들이 봐야 할 것은 저 삼국카페 회원들이 낸 공동성명서이며, 그들과 페미니스트 이론 사이의 격차, 그들과 비키니 응원 여성 및 그녀를 모방하며 나꼼수를 지지하는 여성들 사이의 격차, 그리고 이 후자의 여성들과 페미니스트 사이의 격차다.

김어준씨의 말대로 피해자 프레임의 페미니즘은 문제가 있다. 이에 대한 문제제기와 반성은 페미니즘 이론과 운동 내부에서 활발하게 이루어져 왔으며, 여러 방식으로 수정보완하려는 노력들도 있어왔다. (이런 걸 언급하지 않은 걸 보니, 아마 김어준씨는 최근 몇 년간 페미니즘에 관심을 끊었나보다.) 문제는 그 파급력이다. 현재 페미니즘이 20대 여성들에게 매력이 없는 건 이전 세대들과 지금 20대의 삶이 크게 다른 데 비해 페미니즘에는 큰 변화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페미니즘은 더 이상 20대 여성들의 삶을 충분히 설명해주지 못한다. 하지만 페미니즘에 큰 변화나 도약이 없는 것은 사회 전체로 보았을 때 여성들의 삶이 크게 변하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자아를 실현하는 데 있어 그 누구보다 많은 독려를 받으며 자란 젊은 여성들은 소위 알파걸이라고 불리고 엄친딸을 지향하며 산다. 이들은 제2의 수퍼우먼이지만 선배들이나 엄마처럼 지독하게 혹은 청승맞게 애쓰지 않는다. 여성성을 한껏 뽐내면서도 학업이나 일에서 좋은 성과를 내 인정받을 수 있기를 바라고 실제로 그런 경우도 많다. 싸워야 할 상대는 남성이 아니다. 이들은 싸우지 않는다. 애교로 의존하는 척 하면서 구워삶는다(고 믿는다). 하지만 다른 세대에 속하는 여성들은 물론이고 현재 20대의 많은 여성들도 여전히 고군분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저런 특별법이 마련되었어도 여성들은 여전히 성폭력과 가정폭력에 노출되어 있다. 또한 여성들이 비정규직으로 내몰리고, 아직도 임노동과 가사노동을 수행해야 하는 이중부담을 지고 있다. 이런 문제들과 관련된 현장에서 활동하는 페미니스트들이라면 피해자 프레임의 페미니즘이 아직도 절실할 것이다. 이건 김어준씨가 스포츠 중계하듯이 ‘피해자 프레임에 대한 문제제기가 나와 줘야 되는데 안 나오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김어준씨는 “스스로 자신의 몸을 정치적 표현의 수단으로 도구화하기로 결정한 그 여성을 골빈 년으로 만드는 폭력”을 경계한다. 그리고 이 폭력이 피해자 프레임 페미니즘의 콜래트롤 데미지(부수적 피해)라고 말한다. 하지만 김어준씨가 간과한 또 하나의 부수적 결과가 있다. 그게 바로 비키니 응원 여성이나 코미디언 곽현화, MBC 이보경 기자와 같은 여성들이다. 이들은 피해자가 되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걸 원하는 여성이야 없겠지만, 이들이 원하는 것은 피해의식도 없는 아주 당당한 여성이 되는 것이다. 이들은 거칠고 민감한 페미니스트와도 거리를 두고 싶고, 고통스러워하고 청승맞은 피해자와도 거리를 두고 싶어 한다. 그래서 ‘자발적으로’ 자신의 몸을 ‘도구화’하고 어떤 여성들의 ‘피해의식’을 비꼬는 패러디물을 만들고, 나꼼수의 ‘의미’를 되살리고자 비키니 응원에 참여한다. 이들은 개인이다. 이들은 여성 집단에 대해서 아무 고려도 하지 않는다. 이 여성들은 한편으로는 이른바 ‘대의’를 먼저 생각하는 사회적 존재로 자신을 등장시키지만, 한편으로는 여성이라는 집단에 대해서는 대의 같은 건 안중에도 없다. 한편으로는 자신을 성적 존재로 노출시키지만 한편으로는 여성으로서 자기가 처해있는 성적 입장에 대해서는 의식하지 않는다. 이는 기존의 페미니즘이 피해자 프레임과 더불어 속박에서 벗어나 경제적으로 독립하고 자아를 실현하면서 살라는 일종의 강령이 자본주의와 자유주의에 포섭되고, 남성중심적 권력과 협상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결과이다. 게다가 이는 부수적인 게 아니라 결정적이다.

그렇지만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어떤 여성들은 자신의 몸이 ‘도구화’ 되는 것도 스스로 ‘도구화’ 하는 것도 모두 거부하고, 당연히 있을 수밖에 없는 ‘피해의식’에서 출발해 그것을 정치적 활동의 역량으로 확대하면서, 하이힐 신고 아스팔트를 걸으며 가카 퇴진을 외치고, 시위대에 먹거리를 제공하거나 플래시 몹을 선보이는 등 ‘발랄한’ 시위 방식을 보여주었다. ‘대의’를 위해서 어떤 취약 계층을 배제시키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타협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여성들이 있다. 페미니스트들이 사유해야 하는 것은 피해자 프레임을 넘어선 이야기들을 제시하는 페미니즘 이론과 여전히 피해자 프레임을 필요로 하는 여성운동 및 여성의 현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어느 쪽과도 관계되고 싶어 하지 않는 여성들과 그와 동시대를 살면서도 페미니스트 의식을 지니고 있는 여성들 사이에 어떤 공통성을 어떻게 마련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어차피 나꼼수를 이길 순 없다. 우리에겐 그만한 명성도 권력도 미디어도 없다. 게다가 그런 ‘팬덤’도 없다. 나꼼수의 지지자들은 이미 동지도 지지자도 아니다. 그들은 마치 아이돌의 팬들이 ‘무슨 일이 있어도 오빠들 믿고 배신하지 말자’며 팬심을 다지듯이, 다 필요 없고 김총수가 알아서 잘 판단할 것이고 그 판단에 맡기고 우리는 한 길만 가자고 서로를 도닥이는 분위기다. 이렇든 천군만마를 가진 나꼼수는 꼴페라고 만날 욕만 들어먹는 여성들에게 절대 사과하지 않을 것이다. 아마 사과한다면 잘해야 “물의를 일으켜 죄송하다” 정도겠지만, 이런 소릴 할 캐릭터들이 아니다. 앞으로도 이런 문제에 대해 여성들이 민감할 권리는 있어도 자신들의 입을 틀어막을 권리는 없다며, 조심하지는 않을 것이다. 논점을 ‘표현의 자유’ 문제로 돌리면서 회피해 가는 이런 담론에 또 휘둘릴 필요 없다. 그러는 대신 담론의 판을 새로 짜야 한다. 사과를 받아내는 일이나 대의가 뭐냐, 여성문제는 사소한 일이냐 하는 케케묵은 논쟁은 그만두자. 이런 쟁점이 중요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그 어떤 쟁점을 다루든 페미니스트들의 목소리에 힘이 실리기 위해서는 여성들 사이에 존재하는 경계선에서, 여성들이 서로를 마주보게 하고 대화하게 하고 협상하게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자거라투스트라 비키니를 만나다 [자거라투스트라 시장에 가다]

이병창(MEGA 공동대표, e 시대와 철학 자문위원)

비키니 씨, 저 알겠어요?

아, 자거라투스트라 씨, 안 그래도 소위 서자 철학자라는 자거라 씨한테 가보려 했어요. 지금 저한테 걸린 문제는 철학적인 문제가 아닌가요? 그런데 한국의 그 세계적인 철학자들께서는 어째 한 말씀도 없나요?

안 그래도 이 자거라투스트라가 나서 볼까 했지만, 원래 이 문제가 ….

자거라 씨도 겁먹었나요? 60만 ‘삼국카페’에서 들고 일어나니 그럴 만도 하겠네요.

왜 겁이 없겠소. 비키니 씨, 하지만 우리끼리 싸운다는 게 맘이 안 들어서, 그냥 넘어가기만 바랬어요.

아니 솔직히 한국의 철학자들이 언제나 그렇게 뒤꽁무니 뺐던 것은 사실이 아닌가요? 정치적인 문제야 철학자니까 몰라서, 아니 관심의 영역이 아니라서 그렇다 하더라도, 이처럼 윤리적인 또는 문화적인 문제가 나올 때도 항상 점잖은 척 뒷짐을 지고 있었던 거, 맞지요? 진중권 씨 혼자 일당백으로 싸우는데 미안하지도 않나요?

하긴 그래요. 우리 철학자들도 요새는 연구기금을 안 주면 연구 안하거든요. 그런데 보아하니 비키니 씨나 심지어 나꼼수 씨조차 큰돈은 없는 것 같은데, 무얼 하러 이 고상한 몸을 더럽히겠소.

더럽히다니요? 저 비키니는 정말 이 아름다운 가슴조차 더럽히면서 이 나라를 위해 나섰는데, 대체 이 나라 철학자들은 뭐가 그렇게 고상한 체 하는지 모르겠어요. 옛날에는 그래도 철학자 하면 디오게네스처럼 통 속에 사는 줄 알았는데 지금 보니 우리나라 철학자들은 모두 시멘트 통속에 사는 것 같아요. 디오게네스의 통보다 시멘트 통이 더 고상한가요?

아니, 하여튼 미안하오. 하지만 이 문제는 철학자들도 별무 소용이요.

왜 그래요? 저 비키니, 차라리 확 벗을까요? 그러면 철학자들이 한마디 하겠어요?

누드 퍼포먼스의 역사야 길지요. 그때마다 한바탕 소동이 일어나곤 했고요. 그러면 이왕 만난 김에 한번 따져 봅시다. 여성의 누드, 또는 벗은 몸은 본래의 역할 즉 사랑의 매체라는 것 외에 사실 여러 가지로 이용되어 왔어요.

자거라 씨, 그런데 사랑이라면 사적이며 또 비밀스러운 관계가 아닌가요? 여성의 몸을, 아니 뭐 남성의 몸이라고 해도 좋은데, 그런 공간에만 제한해야 하나요? 푸코의 연구에 따르면 그렇게 몸을 사적인 공간에 밀어 넣은 것은 근대 기독교의 권력 행사였다고 하잖아요.

하긴 여성의 몸을 사적인 공간을 벗어나 공적인 공간에 등장시키면서 문제가 발생하죠. 이런 영역이 워낙 다양하니까 일일이 검토하기에는 시간이 없겠죠. 대표적으로 두 경우를 들어보도록 하죠. 몸이 특히 여성의 몸이 가장 많이 쓰인 것이 아마 상업적인 광고의 매체가 아닐까요? 그에 못지않게 예술의 매체가 되기도 했지요. 그런데 예술의 매체일 때는 상당히 긍정적으로 평가되어 왔던 것 같아요. 하지만 상업적인 광고의 경우에는 여성의 몸에 대한 모독이라고 하면서 많은 비난을 받았지요.

왜 예술은 되는데, 광고는 안 되었던가요?

비키니 씨, 그것은 예술이 아마도 가치가 있는 것이고 더구나 예술의 경우 대부분의 경우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 여성의 벗은 몸을 매체로 썼으니, 그렇지 않을까요? 이 경우는 모독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본래적인 가치를 고양시키는 것이었으니까요. 반면 여성의 몸을 광고로 이용했을 경우는 비난을 항상 받아왔지요. 예를 들어 자동차를 여성의 몸에 비유하면, 여성의 몸이 뭔가 쇠 덩어리가 되는 것 같아, 평가절하를 받는 것 같지 않나요?

글쎄요. 자거라 씨. 잘 모르겠어요. 도올 김용옥 선생의 딸은 자기의 누드를 매체로 해서 환경파괴와 인간의 욕심을 비판하는데 그것도 보면 그건 광고인가요 아니면 예술인가요?

비키니 씨, 그 분이 그 때문에 돈 받은 적은 없다니, 예술에 속하겠지요?

그러면 저도 돈 한 푼 누구한테 받은 일이 없으니, 광고를 한 것은 아니지 않아요. 더구나 저는 몸을 통해 정치적 주장을 펼쳤고, 더구나 저의 정치적인 주장이 독재나 착취를 촉구하는 것은 아니잖아요. 오히려 반대로 민주화나 사회평등에 조금이라도 기여하려 했으니, 더 높은 가치에 기여하는 예술에 가까운 것으로 보아도 되지 않을까요?

그럼요. 비키니 씨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잘했어요. 당신은 공지영 씨에 못지않는 예술가입니다.

물론 저야, 공지영 씨처럼 탁월한 예술적 표현을 하기에는 부족하죠. 하지만 표현이야 부족했더라도 그 표현하려는 내용이야, 가치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서투른 예술가도 많지 않아요. 요새 지하철 다니다 보면 저보다 못한 시를 쓰는 시인도 많더라고요. 그런데 제가 공지영 씨한테 불쾌감을 불러일으켰다니 저는 모르겠어요. 제 몸이 그렇게 보기 싫었던 건가요? 아니면 제가 표현하려는 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가요?

아니 표현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저는 감탄했어요. 그냥 말로 ‘가슴이 터지도록’ 이라고 하면 자주 쓰는 진부한 표현이잖아요. 그런데 정말 가슴을 눈으로 보여주니, 이 표현 자체가 생생한 아름다움을 얻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철학에서 개념(Concept)은 원래 임신(Conceive)이라는 의미인데, 제가 언젠가 이 표현의 의미를 이해하게 되자, 철학의 ‘개념’의 의미가 정말 생생하게 다가왔어요. 그때처럼 저는 표현의 아름다움을 느꼈습니다.

고마워요. 그런데 저는 자거라 씨의 주장이 마음에 들지 않아요. 가치라니, 좀 억압적인 느낌이 들지 않아요? 우선 가치 평가만을 가지고 본다면, 아름다운 몸매를 가진 사람이야 높은 가치를 받겠지만 저같이 생물학적인 완성도에서 그렇게 높지는 않는 경우는 별 가치 없는 것이 아닌가요? 그러면 가치 없는 몸은 아무렇게나 이용되어도 된다는 얘기가 아니겠어요?

비키니 씨, 당신이야 딴지 총수조차 완성도에 감탄한다 했으니, 뭐 걱정이요. 하지만 사실 듣고 보니 가치 비교만으로는 안 될 것 같네요. 왜냐하면 인간의 몸은 어떤 완성도와 상관없이 항상 가치로 평가되기 이전의 신성성을 가진다고 보아도 되니까요? 몸이 이용되려면 적어도 그런 신성성에 걸 맞는 영역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자거라 씨, 몸이 신성하다 하니까 정말 더 거부감이 드네요. 솔직히 이런 신성한 몸이라면 사랑을 위해서도 사용한다는 것조차 죄스럽게 여겨지고요. 그런 생각은 결국 너무 억압적인 것이 아닌가요? 무슨 이 시대가 빅토리아 시대도 아니고, 또 솔직한 것 같지도 않고요.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몸을 이용해서 먹고 사는데 그들은 그러면 이 신성한 몸을 더럽히는 건가요?

아, 할 말이 없군요. 비키니 씨

자거라 씨, 만일 몸이 신성한 것이라면 어떤 다른 더 고위한 가치에 종속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잖아요. 그러면 몸에 스스로의 권리가 있다는 것 아닐까요? 우리는 몸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데, 그렇게 보면 몸은 쾌감을 원하는 것 같아요. 자기에게나 남에게 서로 쾌감을 줄 수 있다면 그 자체로 충분하지 않을까요? 물론 누가 강제를 이용해서 예를 들어 물리적인, 심리적인, 심지어 화폐적인 강제를 이용해서 쾌감을 강요한다면 그건 안 되겠죠. 그것은 일방만의 쾌감일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자유로운 자신의 결정이라고 한다면 이런 몸을 통한 쾌감은 어떤 방식으로 야기되든 그게 정치적인 매체든 예술적인 매체이든 문제없는 것 아닐까요? 상업적인 광고의 경우는 좀 문제가 있겠네요. 돈의 노예라서 억지로 불쾌하지만 몸을 이용하는 경우도 있을 테니까요. 그런데 돈 받더라도 즐겁게 한다면 문제없지 않을까요?

공지영 씨도 비키니 씨야 잘못이 없다 했던 것 같아요. 아니 불쾌하지만 비난할 거리는 아니다 보고, 다만 비키니 씨와 같은 누드(아니 비키니) 퍼포먼스를 장려한다는 점에서 나꼼수 씨를 비난한 거겠죠.

정말, 그래서 제가 자거라 씨를 찾아가려 했던 거죠. 나꼼수 씨가 저의 벗은 몸을 보고 마초적으로 즐겼다는 것이 공지영 씨의 판단인데, 저는 그건 타인의 마음을 자기 마음대로 재단한 것으로 봅니다. 물론 나꼼수 씨가 ‘대박’이라든가, ‘생물학적 완성도’라든가 ‘코피’라든가 말을 썼더라도 그것은 저의 벗은 몸을 보고 그저 욕망에 불타올랐다는 것은 아닐 거예요. 저는 선의로 생각합니다.

선의라니?

아까 말씀하셨잖아요. 표현방식의 생생함이라는 거죠. 저는 ‘가슴이 터지도록’이라는 표현을 생생하게 전달할 ‘수단을 찾았던 것이었어요. 아마도 나꼼수 씨가 말한 ‘생물학적인 완성도’란 ‘표현의 완성도라는 말을 찾지 못해서 나온 잘못된 언어 선택이라 봐요. 정말 나꼼수 씨가 내 몸을 생물학적으로 감상하고 있었다고 보지는 않거든요. 더구나 제 몸이 생물학적인 차원에서 결코 완성도가 높지 않고요. 그럼에도 그렇게 표현한 것은 그런 의미겠죠.

그래도 비키니 씨, ‘코피’라는 표현은 사실 이미 그런 마초적인 감정을 전제로 하는 것이 아닐까요?

자거라 씨, 손가락으로 달을 지시하는데 달은 안 보고, 손가락만 바라보니, 잘못이라고 하기는 하겠죠. 그러나 사실 이런 문제에는 늘 이중성이 있지 않나요. 예술에서도 누드 퍼포먼스란 그런 이중성을 노리는 것이고요. 그러므로 손가락만 바라 본 사람이 제 뜻을 이해못했다고 비판할 수는 있어도 잘못이라고 비난할 수는 없겠죠. 물론 그것이 그의 인간성이 아직 부족하다는 정도는 드러내기는 하겠지만 말이죠.

비키니 씨, 몸이 쾌감을 위한 것으로 충분하다면, 쾌감을 위한 것이라면 모든 것이 허용된다는 것일까요? 그럼 돈 받고 즐겁게 몸을 파는 것도 마찬가지인가요?

자거라 씨, 너무 극단화시키는 것 같아요. 매춘 속에서 쾌감을 느꼈다는 여성은 실제로 거의 없지 않아요. 사실 쾌감이란 정신적인 것과 육체적인 것의 결합으로 만들어지지, 그저 순수한 육체적인 접촉만으로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봐요. 그런데 정신적인 것을 너무 무겁게 잡으면 육체가 감당할 수 있을까요? 그래서 만일 진정으로 사랑할 때만 몸이 매체가 될 수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엄격한 도덕적인 입장이겠는데, 이 세상에 정말 그런 사랑을 찾을 수 있을까요? 이제 우리는 사랑을 상당히 가볍게 생각해도 되지 않을까요? 그저 호감이 가고, 매력을 느낀다는 정도로. 물론 이런 가벼움이야 시대나 사회에 따라서 상당히 달라지겠죠. 저는 우리나라에서 사랑은 너무 무거워서, 저 같은 사람은 감당하기 힘들어요. 그래서 사실 저는 아예 포기하고 맙니다. 사랑을 너무 무겁게 보니, 좀 지겨워요. 그러고 그런 사랑이란 것도 실제는 없고요.

가벼운 사랑이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라는 영화가 생각나는군요. 그런데 비키니 씨, 남에게 불쾌감을 주는 노출도 있다 하지 않아요? 왜 ‘바바리 맨’에 관한 얘기 들어보았잖아요? 솔직히 저는 부산에서 오래 살았는데 여름에 해운대 나가는 게 제일 싫었어요. 정말 아름다운 몸매란 찾아보기 힘들고 거의 대부분 불쾌감을 주더군요. 살들이 비죽비죽 튀어나오는데 말이죠. 그래서 저의 지론은 해수욕장에서는 비키니를 금지하자는 거예요. 모두 옷 입고 바다에 들어가라 이런 말이죠. 불쾌한 몸은 샤워할 때 혼자만 보면 된다는 거죠.

자거라 씨, 논점 이탈이 아니에요. 뭐 철학자가 그래요.

비키니 씨, 논점 이탈이라니요?

지금 문제는 여성의 몸을 (뭐 남성의 몸이라 해도 좋겠지요) 사랑이라는 관계 외에, 특히 정치적인 투쟁의 수단으로 이용해도 되는가 하는 문제이잖아요.

그거야 이제 정리된 것 아닌가요? 상업적인 것이, 예술적인 가치를 위해서 몸을 매체로 이용하는 것이 정당하다면 사회적인 가치를 위한 투쟁도 마땅하지 않을까요? 물론 예술의 경우는 직접적인 몸이 아니라 이미지화된, 기호화된 몸이라는 차이는 있겠지만, 사실 퍼포먼스 같은 경우는 인간의 몸을 직접 사용하기도 하니까, 뭐가 다르겠어요.

맞아요. 그런데 자거라 씨는 아름다운 몸매 타령만 하니, 그게 논점 이탈이 아니에요?

아니, 비키니 씨가 몸이란 쾌감의 수단이라 하니까. 꼭 쾌감만 주는 것은 아니라고 이의를 제기하는 거죠.

육체란 쾌감을 주는 건데, 어떻거나 쾌감을 주지 않는다면 그런 육체는 그 자체로서 존중받더라도, 굳이 드러낼 필요는 없지 않아요. 정말 답답해, 정말 가슴을 풀어 헤쳐야 하겠네요. ‘가슴이, 아니 복장이 터지겠다, 철학자여’ 이거 내일 나꼼수에 오를 거예요. 내 복장 누드 사진하고 같이 오를 겁니다.

아니 참아요. 비키니 씨. 제가 먼저 벗고 싶지만, 남에게 불쾌감을 주는 체형이라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