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겔미학산책27- 후마누스[Humanus]의 예술[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미학산책27- 후마누스[Humanus]의 예술
1) 정신의 자각
앞에서 낭만주의 예술이 리얼리즘적 예술에 다가가는 것을 살펴보았다. 그것은 우연한 현실을 리얼하게 생산하는 것(모더니즘적 기법)이며, 주관의 절대적 자유를 보여주는 아이러니의 예술이다. 이런 해체기 낭만주의 예술 형식을 지나서 헤겔은 마침내 예술의 종언을 선언하고 나선다.
예술의 종언은 정신의 발전을 토대로 한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낭만주의 해체기 즉 시장이 성숙하고 시민적 자유가 확립되는 시대는 여전히 오성 국가에 머무르고 있었다. 이 시대에도 경제적 불균형과 사회적 불평등이 존속하며 민주화된 국가라도 억압적인 방식으로 이를 짓누르고 있을 뿐이었다.
헤겔은 이런 단계가 지나 마침내 이성국가에 이르게 되면 국가가 나서서 경제불 불균형과 사회적 불평등을 해소하게 된다. 여기서 사회적 상호 관계는 개인에게 더 이상 적대적이지 않고 개인과 사회의 합일이 일어나게 된다. 이제 인간은 자유롭게 자신을 추구하면서도 객관적 가치, 정의에 따라 행동한다. 바로 이 시대 정신은 마침내 자신에 대한 자각을 얻게 되니, 비로소 정신은 절대정신의 단계에 이르게 된다.
이런 합일은 헤겔이 볼 때 이상적인 사회에서나 도래할 것이지만, 헤겔은 근대 사회가 그런 방향으로 발전한다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프랑스 혁명 이후 그리고 독일적 정신 혁명을 거쳐, 그런 사회가 바야흐로 목전에 도달했다고 믿었다.
3) 예술 종언 시대의 예술
마침내 개인이 자유롭게 행동하면서도 객관적 가치 즉 정의에 따라 행동할 때 헤겔은 이제 예술은 종언에 이른다고 한다. 헤겔의 이런 주장은 예술을 옹호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고 그 때문에 여러 논의가 전개되었다.
그러나 예술의 종언이라는 제목으로 서술된 헤겔 자신의 주장을 면밀하게 살펴보면, 헤겔은 오히려 이런 시대 새로운 독특한 예술이 출현할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 그는 이에 대해 괴테의 서동시집과 같은 구체적 예를 거론하고 있다. 헤겔은 이 시대 새로운 예술을 ‘후마누스[Humanus]의 예술’이나 ‘자기 초극의 예술’이라고 명명하는데, 예술의 종언과 새로운 예술은 서로 모순된 이야기는 아닐까?
예술의 종언에 관한 다양한 논의는 생략하고 필자의 생각만 언급하자면 예술의 종언이란 한마디로 말하자면, 예술이 더 이상 작성되지 않거나 불필요하게 된다는 말은 아니며 다만 예술이 지금부터는 절대 정신의 최고 표현 형식이 아니라는 말이다.
상징주의 시대에서는 종교가 절대정신의 최고 표현형식이었다. 고전주의 시대에서는 예술이 최고 형식이었다. 낭만주의 시대에 아직도 소외된 정신이 지배하는 상태에서는 예술은 종교만큼이나 소외된 정신을 표현하는 주요 형식이었다. 이제 절대 정신에 대한 개인의 자각이 출현하게 되면서 마침내 철학이 절대 정신의 최고 형식이 되고 예술과 종교는 그런 최고 형식으로서 역할을 더는 전개하지 못한다.
사람들이 아직 정신을 자각하지 못하고 정신이 그 자신에게 비밀로 남아 있을 때, 이런 비밀에 접근하는 유일한 방식은 종교 또는 예술이었다. 그런 비밀은 종교인이나 예술가에게 자극을 주어 예술이나 종교를 통해 이를 포착하려는 활동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이제 정신의 비밀이 드러나게 되었을 때 종교나 예술적 활동을 자극할 충동 자체가 일어나지 않게 될 것이다. 예를 들어 이미 산수를 배워 잘 아는 성인이 산수를 다시 공부하라고 한다면, 지겨움을 느끼지 않을까?
“정신은 대상들 속에 비밀스럽고 드러나지 않는 것이 있는 한에서 오직 그런 한에서 대상들에 대해 두루 힘쓴다. … 그런데 예술이 그 개념에 들어 있는 본질적 세계관을, 그리고 이런 한 세계관에 속하는 내용의 권역을 모든 면에서 걸쳐 드러내었다면…. 그것을 다시 채택하려는 욕구에 의해서만 환기될 뿐이다.”[1]
4) 자기 초극적 예술
예술이 정신을 파악하는 최고의 형태가 아니라 하더라도, 이제 예술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는 말은 아니다. 앞의 인용문 헤겔은 “과거의 정신을 다시 채택하려는 욕구가 있다면” 예술은 다시 계속될 수 있다고 했으니, 예술의 종언 시대에 예술작품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사실 정신의 비밀이 철학을 통해 폭로된 시대에도 여전히 정신을 자각한 자는 소수 철학자에 지나지 않고 대중에게서 정신은 여전히 소외된 상태에 머무른다. 이런 대중에게 정신을 자각하는 과정에서 예술과 종교는 여전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제 예술은 대중에게 정신을 자각하게 하는 교육적인 의미를 지니게 된다.
하지만 이미 정신에 대한 자각이 출현했으므로, 여기서는 새로운 형태의 예술이 출현하게 되니, 헤겔은 이를 ‘후마누스[Humanus]의 예술’이라 한다. 여기서 후마누스는 곧 정신에 대한 자각을 이룬 인간을 의미한다.
“예술이 자기를 초극하는 것을 통해서 예술은 인간의 자기 내로 복귀시키는 것이 되며, 자기 자신의 가슴 속으로 침잠하는 것이 된다. 이를 통해 예술은 특정 권역의 내용과 이해에 국한된 일체의 견고한 제한성을 자신으로부터 떨쳐내고 또한 인간적 심정 그 자체의 심연과 정점들, 보편적 인간성의 기쁨과 슬픔, 그 노력, 행동 그리고 운명들을 대변하는 후마누스[Humanus]를 새로운 성자로 만든다.”[2]
그렇다면 후마누스의 예술은 어떤 새로운 형태를 지니고 있을까? 과거 예술은 시대 정신의 산물이었다. 예술가는 개인적으로 작품을 생산하지만 실제 그들을 지배하는 것은 시대 정신이니 그 시대 정신이 예술의 내용과 그 형상 방식을 제공해주었다. 예술가는 그것을 무의식적으로 따라고 있었을 뿐이다.
이제 정신에 대한 자각이 등장했을 때 예술가의 주관성은 이원화 된다. 그는 한편으로 예술가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철학자이다. 그는 예술가로서는 예술적 표현의 기호를 통해 활동하지만, 철학자로서는 그런 예술적 표현 기호의 의미를 이미 알고 그것의 한계를 파악하면서 그것을 넘어서 있다.
예를 들어 이 시대 예술가가 그리스 신들을 형상화하거나 성모 마리아를 조각한다고 할 때, 한편으로 예술가로서 그는 그리스 신이나 기독교 신적인 내용을 실체로 삼아, 그것을 믿는 자의 방식에 따라 형상화할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그는 이미 그리스 신과 기독교 신의 한계를 깨닫고 있으므로 그 자신은 그것을 이미 넘어서 있다. 헤겔은 이점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그[예술가로서]의 작업은 순수한 개념 파악의 행위 즉 그 소재에 완전히 맞서는 그리고 자유로운 사상과 순수한 사유 속에서 그 소재와 하나가 되는 행위가 아니라, …. 대상과 직접 합일하는 행위, 즉 대상을 신봉하며, 또한 가장 고유한 자아의 면에서 대상과 동일한 행위이기 때문이다.”
순수한 개념 파악의 행위가 철학자로서 예술가라면, 대상과 직접 합일하는 행위가 예술가로서 예술가를 의미한다. 이런 이중성 때문에 예술의 종언 시대 예술 작품은 이원적으로 분열된다. 예술 작품 속에는 예술적으로 활동하는 예술가와 그 자신을 초월하여 이를 바라보는 철학자로서 예술가가 동시에 등장한다. 그것은 마치 격자 소설에서 주인공의 시점과 작가의 시점이 분열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두 개의 주관은 단순히 대립하는 것은 아니다. 철학자로서 예술가의 주관성은 예술가로서 예술가의 주관성을 넘어서 지양하니, 헤겔은 이를 ‘예술의 자기 초극[Hinausgehen de Kunst Ueber sich selbst]’이라 한다.
4) 괴테의 시
앞에서 해체기 예술의 두 경향 즉 추상적 외면성과 추상적 내면성 다시 말해 외적 현실과 내적 주관성의 예술 경향은 자기 초극적 예술에서 다시 합치하기에 이른다. 외적 현실을 그려내는 작가적 주관성과 절대정신을 자각한 철학적 주관성은 일치하는 동시에 대립하므로, 여기서 일치하는 측면에서 친밀성을 느낌과 동시에 대립하는 측면에서 객관적 유머가 출현하게 된다.
“그런데 [우연적] 외면성 및 [우연적] 주관성의 표현에서 얻는 이 만족이 낭만적 예술의 원칙에 걸맞게 심정의 대상 속으로의 침잠으로 고양된다면, 게다가 다른 한편 유머에서는 객체도 즉 주관적으로 반사된 객체의 형상화도 중요하다면, 이를 통해 우리가 얻는 것은 대상과의 친밀감, 말하자면 객관적 유머이다.”[3]
헤겔은 여기서 후마누스의 예술의 특징으로 대상과의 친밀성, 객관적 유머를 동시에 들고 있다. 헤겔은 이런 표현에 대해 상세한 설명을 덧붙이지 않아 그 의미가 무엇인지 짐작하기 어렵다. 다만 헤겔이 들고 있는 예를 통해 보면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헤겔이 들고 있는 예는 바로 괴테의 서동시집에 나오는 시 재회이다. 이 작품은 아랍 시인 하피스의 줄라이카에 대한 사랑에 기대어 있는데 실상 이는 시인 괴테가 마지막 사랑했던 연인 마리안네에 대한 사랑을 표현한 것이다. 괴테는 두 사람의 사랑을 단순한 연인의 관계를 넘어서 곧 신의 창조의 섭리로 해석한다. 여기서 작가는 자신의 사랑이라는 대상을 친밀하게 동시에 초연하게 바라보고 있다. 이 시의 마지막 4연을 보라.
그렇듯 붉은 아침 햇살 날개에 실려온
힘이 나를 가로채 당신 입에다 붙여놨으니
밤하늘 총총한 별들 수천 겹의 봉인으로 우리의 결합을 확인해 주네
우리 둘은 이 지상에서
즐거울 때나 고통스러울 때나 모범적인 짝이니
다시 한번 이루어지라는 말 떨어진다 하여도
두 번 다시 우리를 헤어지게 하지는 못하리
괴테의 시 ‘툴레의 왕’도 헤겔이 말하는 후마누스의 예술로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이 시는 파우스트에서 그레첸이 노래로 부른다. 후일 슈베르트가 가곡으로 완성하기도 했다. 역시 마지막 두 연만 소개한다.
그곳에 그 늙은 주객이 서 있었네
마지막 삶의 불꽃을 마셨지
그리고 그 소중한 잔을 던졌네
아래로 물결 속으로
그는 그 잔이 떨어지고 채워지고
바다속으로 깊이 가라앉는 것을 보았지
그의 논도 가라앉는 듯했네
한 방울도 더 이상 마시지 못했네
5)
이 두 시는 모두 공통적 특징을 지니고 있다. 우선 시 재회에서는 괴테와 연인 마리안네의 사랑이 곧 신적 창조의 섭리가 되고 시 툴레의 왕에서는 황금의 술잔이 곧 영원한 사랑을 의미한다.
여기서 사랑과 술잔은 예술적인 표현인데,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마리안네의 사랑은 신적 창조의 구체적 형상이니 유사성을 지닌 도상(헤겔로서는 고전주의적 현상)이다. 반면 술잔은 왕비가 왕에게 선사하고, 함께 있었을 때 사용했던 것이니 관습적인 관계를 지니는 것 즉 상징에 속한다.[4]
여기서 괴테는 시대를 뛰어넘어 과거 예술적 형식에 속하는 것을 자유롭게 이용하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으며, 그 때문에 이런 시에서 괴테는 그 자신을 작품의 서술 주체로 내세우지 않고 자신을 대신하는 가상적 인물 즉 아랍의 시인 하피스나 가상적 왕국의 왕인 툴레 왕을 서술 주체로 내세우고 있다.
위의 두 시는 고전적, 상징적 정신으로 표현되어 있지만 괴테는 기꺼이 낭만적 예술 표현 형식을 취할 수도 있다. 그는 이 경우 개별적 형상 속에 무한한 심정이 투영되는 가상적 형상을 취할 것이다.
괴테가 그 어느 시대의 정신으로도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는 것은 이미 괴테가 일정한 시대 정신의 무의식적 구속 상태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는 괴테 자신이 정신의 본질을 자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 특수한 의미 내용에 대한 예속과 오직 이러한 소재에 적합한 종류의 표현은 오늘의 예술가들에게는 일종의 과거사이며 또한 예술은 이를 통해… 어떤 내용에 관해서도 균일하게 사용할 수 있는 하나의 자유로운 도구가 되었다. 이와 더불어 예술가는 특정의 신성한 형식과 형상화들 너머에 서 있으며, 또한 자유로이 독자적으로 … 독립적으로 움직인다.”[5]
6)
그 결과, 예술 작품 속에 이중적인 시선이 등장한다. 시 재회에서는 작중 인물인 하피스(또는 연인 마리안네를 사랑하는 괴테 자신)의 시점과 그것을 서술하는 작가 괴테의 시점이 동일화되어 있다. 시 툴레의 왕 역시 시에서 형상화된 인물인 툴레의 왕의 마음과 작가 괴테의 마음이 중첩되어 있다.
하피스나 툴레 왕의 시점은 곧 예술가로서 시점이며 괴테 자신과 달리, 과거 시대의 정신 속에 살고 있는 인물이며 그 시대 예술 형상화 방식에 따라서 정신을 형상화하고 있다. 하피스나 툴레 왕은 사랑이나 술잔이라는 형상이 그가 표현하고자 하는 대상 즉 신의 창조와 영원한 사랑을 진실하게 표현한다는 것을 진심으로 믿고 있다. 그것은 마치 신도들이 신상을 보고 신의 예술적 형상으로 보기보다 진심으로 신의 현현으로 보는 것과 같다.
하피스나 툴레 왕의 관점에서 본다면, 위의 두 시에서 표현된 예술적 형상과 그 지시 대상 사이에 친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으니, 이런 점에서 헤겔은 “심정이 대상 속에 침잠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작가 괴테의 시점에서 작가는 신의 창조와 영원한 사랑의 비밀을 알고 있으니, 그에게 사랑이나 술잔이라는 예술적 형상은 다만 예술적인 형상화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에게 사랑이나 술잔이라는 형상은 그가 개념적으로 이미 알고 있는 신의 창조와 영원한 사랑을 감각적으로 표현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는 이런 형상을 넘어 있으니, 이것이 헤겔이 객관적 유머라고 했던 것이 아닐까 한다.
7)
독일 낭만주의에서 출현했던 주관적 아이러니는 이제 객관적 아이러니 개념으로 전환한다. 주관적 아이러니는 앞에서 설명했듯이 주관이 자의적으로 대상을 부정하는 것이니, 여기서는 우연적 환상과 변덕으로 가득하다.
그에 반해 객관적 아이러니에서 대상에 대한 비판은 대상의 객관적 본질을 통해서 일어나는 부정이다. 이런 부정은 각 시대의 정신적 한계를 정확하게 인식한 끝에 나오는 것이다. 이런 인식은 정신의 발전에 관한 자각에 기초하니, 이런 점에서 헤겔은 유머가 “실체적인 것을 출현시키기 위한 것”[6]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역으로 심정의 주관적 깊은 감정이 묘사의 본질적 계기로 될 경우에는, … 낭만적 내면은 온갖 정황들에서 나타날 수 있고 수천 수만의 상황, 상태, 관계, 오류 그리고 혼란, 갈등 만족들 속에 산재할 수 있으니, 까닭인즉 오로지 추구되고 중시되는 것은 자신에 즉한 내면의 주관적 형성, 심정의 표현과 수용방식일 뿐, 객관적이며, 즉자 대자적으로 타당한 의미 내용이 아니기 때문이다.”[7]
[1] 미학강의 2, 249쪽
[2] 미학강의 2, 253
[3] 미학강의 2, 255쪽
[4] 괴테는 일반적 본질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개별적 형상을 상징이라 한다. 어떻게 보면 고전주의적 형상과 유사하지만, 고전적 형상이 이상화된 형상을 통해 본질을 드러내는 것과 달리 여기서는 가장 개별적인 것이 본질적인 정신을 드러낸다. 그러나 엄밀하게 본다면 괴테가 말하는 이런 상징이 존재하는가는 의문이다. 괴테 자신이 자신의 상징으로 간주한 것도 분석해 보면, 관습적 상징이나 유사성을 지닌 도상에 속한다.
[5] 미학강의 2, 250쪽
[6] 미학강의 2, 246쪽
[7] 미학강의 2, 23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