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이상학 산책6- 존재자의 형이상학에서 존재의 형이상학으로[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형이상학 산책6- 존재자의 형이상학에서 존재의 형이상학으로
1) 칸트의 혁명
앞에서 칸트가 판단형식과 범주를 연결했다는 것을 말했다. 아리스토텔레스에서 개별 언어를 분류하는 틀이었던 범주가 칸트에 이르면 판단형식을 규정하는 고유한 내용으로 규정되었다. 범주가 언어의 틀에서 판단의 틀로 바뀐 것일 뿐인데, 이게 뭐 큰일인가 하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나비의 날갯짓이 태풍을 불러일으킨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사유의 역사에 유사한 사건이 또 있다. 데카르트의 좌표이다. 데카르트는 우리 흔히 아는 수학의 XY축을 발견했다. 여기에는 무리수라는 개념이 개입한다. 고대 철학자는 유리수와 무리는 같은 선상에 놓을 수 없는 전혀 다른 독자적인 수라고 생각했다. 데카르트는 무리수를 유리수 사이에 끼워 넣어 수의 연속성을 확보했고 이를 통해 통일적인 좌표축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콤파스를 이용한 간단한 작도를 통해 무리수를 직선상에 위치시킬 수 있으니, 이는 아주 단순한 생각이었지만, 이 좌표축을 통해 기하학과 대수학의 통일할 가능성이 생겨났으며, 라이프니츠 뉴턴의 미적분학이 출현했다. 미적분학이 근대과학을 근본적으로 변화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니, 과히 데카르트의 좌표 혁명이라고 말할 만하다.
칸트가 범주를 판단형식과 관계시킨 것도 이런 사유의 혁명에 속한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이제 그가 일으킨 사유의 혁명을 좀 더 면밀하게 들여다보자.
2) 형식 논리학
우선 기존의 논리학은 판단의 형식에는 전혀 주목하지 않는다. 판단형식은 주어, 술어가 관계를 맺는다. 이 주어 술어의 관계가 어떤 종류의 것인지는 기존 논리학에서는 전혀 문제 되지 않는다.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개념 논리학뿐만 아니라 최근에 발전된 다양한 기호논리학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양화 논리학은 주어와 술어를 함수로 표현하지만, 그것은 표현의 문제이고, 그 함수가 주어 술어의 관계에 대한 어떤 해석을 품고 있는 것은 아니다. 양화 논리학이 주어나 술어의 양을 다룬다 하더라도 이것은 주어 술어의 관계와는 무관하다. 그저 복합판단을 표현하는 방식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개념 논리학이든 기호논리학이든 논리학의 출발점은 명제 또는 판단이다.
최근 발전된 새로운 기호논리학의 업적이라면, 판단형식의 겉모습을 파헤친 데 있다고 하겠다. 표면적으로 단순한 주어 술어 관계로 표현된 많은 판단은 복합적인 판단으로 분석되었다. 이런 작업은 흔히 분석철학에서 언어의 거짓된 모습을 제거하고 언어의 진정한 모습을 발굴해내는 방법이라고 지칭되었다. 소위 언어분석의 철학이 여기서 시작했다고 보아도 될 것이다.
예를 들어 특칭판단이나 전칭판단이 그렇다. ‘모든 사람이 죽는다’라는 판단은 ‘소크라테스가 죽고, 아리스토텔레스가 죽고, … 등등’으로 표현되어야 할 복합판단을 단순화한 것에 불과하다. 이렇게 되면 심지어 부정판단조차 기본적 판단이 아니라 긍정판단에서 나온 직접추론(대당관계) 즉 부정하는 사유의 결과이다. ‘소크라테스는 죽지 않는다’는 판단은 ‘소크라테스는 죽는다는 판단은 부정된다’라는 추론으로 전환했다.
그 결과 논리학은 마치 레고를 쌓는 것처럼 보인다. 그 작업은 판단의 내용 즉 주어 술어 관계와 무관하게 판단 자체를 이리 쌓았다 다시 해체하고 달리 쌓은 것이 된다. 이 작업은 내용과 무관한 내용에 전적으로 외면적인 작업이므로, 순수한 형식적 작업이 된다.
이 형식적 작업을 지배하는 규칙이 있다. 그것은 곧 순수한 비어 있는 공간에서 이리저리 물체를 이리저리 옮기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 순수한 비어 있는 공간이 곧 사유의 공간이다. 이 공간은 형식은 아무리 바꾸어도 여전히 내용은 같은 것이 되어야 하니, 즉 동어반복이 지배하는 공간이라 할 수 있다. 동어반복의 비어 있는 공간을 벗어나면 잘못된 사유가 된다.
그러므로 논리학은 일종의 사유 유희이다. 마치 레고 블록을 쌓았다가 부수고 다시 쌓은 아이의 유희와 마찬가지 유희일 뿐이니 이런 논리학이 세상을 파악하는 데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세상에 대한 진리를 얻는 것은 사유와 무관한 경험일 뿐이다. 여기서 사유의 세계와 경험의 세계는 단적으로 구분된다.
3) 판단형식의 차이
그러나 칸트가 판단형식을 범주로 규정하면서 논리학에 관한 이런 생각은 근본적으로 바뀌게 된다. 판단형식이란 곧 주어와 술어의 관계이다. 판단형식이 서로 다르다는 것은 곧 주어와 술어의 관계가 다르다는 것이다. 판단에 여러 가지 형식이 있다는 것은 주어와 술어가 관계하는 여러 방식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판단에서 주어는 대상을 지시하고 술어는 어떤 일반성을 의미한다고 해석한다. 그러면 주어와 술어의 관계 즉 판단의 형식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흔히 ‘이것은 빨갛다’에서 술어의 의미인 성질은 주어의 대상에 ‘속한다’고 말하는 데 이 속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이것은 소금이다’라고 할 때, 술어인 ‘소금’은 ‘빨갛다’는 것과 마찬가지로 주어 대상에 ‘속한’ 것일까? 오히려 여기서는 주어의 대상이 술어인 소금이라는 유에 속하는 것이 아닐까?
이상의 판단들은 언어분석의 작업을 통해서 드러나게 될, 겉보기와 다른 판단형식을 감추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예를 들어 ‘이것은 소금이다’라는 판단이 다른 기초 판단으로 분석 가능할까? 그런 분석의 예를 들자면 ‘이것은 흰색이고, 사각형이며, 짠맛이 난다’와 같은 복합판단일 텐데, 이런 분석은 본래 ‘이것은 소금이다’라는 판단과는 다른 종류가 아닐까? 위의 복합판단은 흰색, 사각형, 짠맛이 이것에 속한다는 의미이지만, 아래 판단은 이것이 소금에 속한다는 판단이니, 전혀 방향이 다른 것이라 볼 수 있지 않을까?
환원주의자는 모든 판단형식은 기초적 판단으로 환원 가능하며, 기초적 판단에서 주어 술어의 관계는 ‘속한다’와 같은 것으로 일정하니, 판단형식을 더 문제 삼을 바는 없다고 한다. 하지만 판단형식은 서로 환원될 수 없는 차이를 지닌 것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철학은 기본적인 판단형식 자체에 어떤 종류가 있는지를 찾아보아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판단형식의 차이는 각기 무엇을 의미하는가가 분석되어야 하지 않을까?
4) 범주적 관계
판단에서 주어와 술어를 관계시키는 것이 계사 즉 ‘이다(또는 존재)’라는 말이다. 존재란 곧 관계이다. 판단형식을 통해 존재의 다양한 모습이 제시되는데, 그것이 곧 범주다. (앞에서 우리는 칸트가 12개의 판단형식을 통해 12개의 범주를 끌어내는 것을 보았다.)
판단형식이 곧 주어 술어의 관계이고 그것이 곧 범주라면, 관계 범주(예를 들어 선언판단이나 가언판단)가 그런 관계를 보여주는 것은 언뜻 보아도 이해된다. 그러나 나머지 범주들에서는 그것이 판단형식이라는 사실이 그렇게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우리는 흔히 질의 범주는 술어와 관계하고 양의 범주는 주어와 관계한다고 보지 않는가?
그러나 범주를 판단형식으로 본다면, 질이나 양의 범주조차 주어 술어의 관계를 말하는 것이 된다. 술어의 부정은 개별 술어가 ‘이 세계에 없다’라는 의미에서 부정이 아니라 개별 술어가 ‘이미 판단에서 제시된 주어에 속하지 않는다’라는 의미에서 부정이다(나중에 헤겔은 ‘특정적 부정bestimmte Negation’이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또한, 특칭이란 주어가 지시하는 대상이 ‘이 세계에 다수 존재한다’라는 의미가 아니라, ‘술어에서 제시된 속성 속에 그런 대상이 다수 존재한다’라는 의미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5)
판단을 이루는 요소 가운데 주어와 그 지시 대상, 술어와 그 의미는 서로 상응한다. 그런데 판단의 주어 술어 관계를 이루는 계사는 어떠한가? 그 계사는 단순히 어느 경우에나 ‘이다’이고 이 세계 속에 이런 ‘이다’에 대응하는 것은 없는 것처럼 보인다.
존재[Sein]는 존재자[seiendes, dasein]의 전체가 아니다. 존재는 계사 즉 ‘이다, 또는 임’를 말하며, 존재자는 ‘있는 것, 있음’을 말한다. 우리 말로 이다와 있는 것은 분명하게 구별되지만, 게르만 계통 언어에서는 다같이 sein(be) 동사에서 나온다. 존재는 칸트에 이르면 세계를 구성하는 범주가 된다.
모든 판단형식에서 계사는 ‘이다’이더라도 그 구체적 의미는 다르다. 그 구체적 의미는 칸트에서 보듯이 범주를 통해 규정되는데, 이렇게 계사를 범주로 확장해 보더라도 그것이 경험으로부터 직접 주어지거나 추상을 통해 형성된 개념은 아니라는 생각은 변하지 않는다.
누구나 쉽게 생각할 수 있듯이 세계 속에는 부정성이란 없다. 모든 존재자는 그 나름대로 긍정적 존재이다. 이 세계 속에 특칭적 존재란 없다. 아리스토텔레스와 헤겔은 있어도 ‘여러 철학자’라는 존재는 없다. 가언적 관계는 세계에도 유사한 것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세계에 존재하는 인과적 관계가 가언적 관계와 다르다는 사실은 철학사에 널리 알려져 있다. 마지막으로우연성 역시 세계 속에는 없다.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일회적 사실이고, 이것을 우연성으로 규정하는 것은 우리다.
사실 그런 관계가 직접 경험을 통해 주어지는 것이라면 인식론이라는 골치 아픈 철학이 생겨났을리도 없을 것이다. 결국, 이 관계는 사유 자체에 고유한 관계로 볼 수밖에 없다. 주어 술어를 결합하는 것이 사유라면, 새로운 문제가 생겨난다. 이 사유를 통해 이루어진 관계는 자의적인 것이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다. 세계의 진정한 모습은 이런 판단의 관계와 무관한 것이 아닐까?
이런 문제가 칸트가 해결하려 했던 것이고, 그 결과가 바로 선험적 연역이다. 여기서 칸트의 선험적 연역에 관해서는 추후 살펴보기로 한다. 이렇게 판단의 관계사 사유라고 보면, 여기서 지금까지 형식적인 것에 불과한 논리학의 역할이 바뀌게 된다는 것만은 짚어두고 가자.
앞에서 말했듯이 형식 논리학에서는 판단은 통째로 경험을 통해 주어지며, 주어진 판단을 결합하는 논리적 형식은 즉 추론의 형식은 내용이 없다. 그러니 논리학은 세계에 관여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순수한 사유의 형식에 머무를 뿐이다.
그러나 다양한 판단형식을 통해 다양한 관계가 제시된다. 판단형식에서 주어 술어 관계는 구체적 내용을 지닌 것이면서도 사유의 관계이다. 판단형식이 이렇게 구체적 내용을 지니고 있으므로 어떻든 이 판단형식은 세계의 모습에 연루된다.
물론 그것은 올바른 것일 수도 있고 잘못된 것일 수도 있으나 이런 옳고 그름이 판단형식이 구체적 내용을 지니기 때문에 일어나는 사건이다. 형식 논리학에서 사유의 형식에 대해 옳고 그름을 묻지는 않는다. 그것은 규칙에 합당한 것인가 아닌가를 따질 뿐이다. 그러나 판단의 형식에서 우리는 옳고 그름을 묻지 않을 수 없으니, 판단형식은 세계에 개입한다. 그러기에 칸트는 일반논리학과 구분하여 자기의 논리학을 선험적 논리학이라 한다.
판단형식이라는 개념은 이렇게 논리학의 영역 자체를 확장한다. 즉 논리학은 추론에서 판단으로까지 확장된다. 이렇게 확장된 논리학은 구체적 내용을 지니면서 세계에 연루된다. 이렇게 구체적 내용을 지니게 된 논리학, 세계에 연루된 논리학이 헤겔의 논리학의 출발점이 된다.
6) 형이상학의 혁명
지금까지 언어와 세계의 관계는 언어와 그 의미 사이의 관계였다. 이런 관계를 통해서는 세계 속에 어떤 것들이 있는가를 발견했다. 사실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형이상학은 모든 존재자가 지닌 일반성을 다루었으며, 그런 존재자의 일반성은 언어의 범주를 통해 제시되었다.
그러나 칸트처럼 판단형식을 범주로 보게 된다면, 그리고 이 범주가 자기를 주어 술어의 관계로 전개했다면, 그리고 이 판단형식 즉 계사 즉 ‘존재’가 세계와 연관한다면, 이제 세계 속의 존재자의 전체가 아니라 이 존재가 형이상학적으로 다루어지게 된다. 칸트의 형이상학이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과 구분되는 지점이 여기에 있다.
하이데거 역시 형이상학은 존재자의 일반성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존재자의 존재를 다루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 존재자의 존재란 존재자의 관계이며, 그런 한 하이데거 역시 칸트가 열어놓은 형이상학의 길을 걸어갔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혁명가 칸트의 모습을 단순히 그의 선험철학에서 찾으려 해서는 안 될 것 같다. 그의 혁명적 모습은 형이상학 자체의 양상을 바꾸어 놓은 데서도 찾을 수 있다. 그의 형이상학은 곧 존재의 형이상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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