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이상학 산책 5-칸트의 논리학 혁명[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형이상학 산책 5-칸트의 논리학 혁명
1)
문제의 발단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를 범주로 분류한 것이다. 여기서 주어로 사용될 수 있는 것들 때문에 결국 실체 개념이 제시되었다. 실체는 자기를 통일하는 하나이며, 그럼으로써 지속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개별자를 징검다리로 해서 시간상 지속하는 진정한 실체는 곧 종적 본질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서 본질이 무엇인가 하는 점은 좀 불분명한 것 같다. 플라톤의 형상처럼 아리스토텔레스의 본질도 개체들이 지닌 질료적 속성과 분리되어 따로 존재한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플라톤을 비판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에 비추어 본다면 본질이란 질료들의 통일적 관계 자체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헤겔의 철학적 출발점도 다름 아닌 이런 본질 개념에 있다. 헤겔은 진정으로 존재하는 것은 개별자가 아닌 이런 본질적 존재이다. 본질적 존재가 곧 자기를 통일하면서 무로 해체되는 것을 막으면서 자기를 지속하게 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지속하는 존재라는 점에서 실체라는 말을 좋아했다면, 헤겔은 이 실체가 자기를 통일하는 힘을 지닌 존재라는 측면에서 아예 주체라고 이름을 붙였다.
헤겔은 아리스토텔레스보다 분명하게 본질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질료적 속성의 상호적 관계 자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그는 이 본질을 다시 힘이라는 개념으로 발전시켰다. 속성의 상호적 관계가 가능하기 위해서 그사이에 양자를 매개하는 힘이 있어야 한다. 본질이란 이런 매개하는 힘과 다르지 않다.
헤겔은 이 힘을 그의 시대 등장한 미분적 차이의 개념에 기초하여 두 가지 힘의 대립적 관계로 규정했다. 이 두 가지 힘이 곧 표출하는 힘과 수축하는 힘이다. 이를 동양 철학적으로 말하자면 미분적 차이는 곧 음양의 동정이다. 음양의 동정으로부터 만물이 실체로서 자기를 지속한다는 것이다.
원래 우리는 헤겔이 형이상학을 근본적으로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하게 된 근거를 따지다가 범주라는 개념에 이르렀고 이 범주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 실체라는 개념으로 빠져들었다. 이쯤하고 다시 이 이야기의 출발점으로 다시 돌아가 보자.
2)
사실 아리스토텔레스에서 범주의 의미는 명확하지 않다. 범주론에서 구별된 10개의 범주는 대체로 언어를 분류한 틀로 보인다. 그런데 언어가 의미하는 것이 곧 대상이니, 이런 분류는 대상을 분류한 것으로 보아도 된다. 사실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특히 5장에서)에서는 범주론에 제시되었던 범주들이 형이상학적 개념으로 사용한다. 형이상학적 개념이란 존재자의 존재를 규정하는 개념이라는 것이다. 주1) 범주론과 형이상학 5장을 비교해 보자면 다음과 같다. 괄호 밖이 범주론, 괄호 안이 형이상학이다. 실체(8절), 양(13절), 질(14절), 관계(15절), 장소, 시간, 상태(20절), 행동, 능동(12절), 수동(12절) 형이상학에서는 범주론에 다루어지지 않은 개념 원인. 필연성 등이 다루어지며, 또한 동일성과 차이, 대립과 배치, 앞과 뒤 등 반성 개념도 포함된다.
아리스토텔레스에서 범주는 어디까지나 언어(존재자)의 가장 일반적인 류에 속하는데, 이와 같은 범주의 의미는 칸트에 이르러 근본적으로 변화한다. 칸트에서 범주의 의미는 이제 판단형식과 관계된다. 언어와 판단형식은 엄청난 차이가 있는데, 그런 차이는 나중에 논하기로 하고 우선 칸트가 판단형식과 관련해 범주를 어떻게 규정했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알다시피 칸트는 소위 12개의 판단형식을 제시했다. 칸트 자신은 이런 판단형식을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으로부터 받아들였다고 말했다. 하지만 누구나 배웠듯이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에서 판단형식은 네 가지뿐이다. 전칭긍정 판단, 전칭부정 판단, 특징긍정 판단, 특칭부정 판단이다.
그런데도 칸트는 대담하게도 네 가지 판단형식을 12개의 판단형식으로 확장하였다. 우선 칸트가 제시하는 관계 판단(정언, 가언, 선언)이나 양상 판단(개연, 실연, 필연)을 보자. 이는 전통 논리학에서는 일종의 복합판단이므로, 독자적인 판단형식에 속하지 않는다. 그런데 칸트는 이를 기본적인 판단형식으로 받아들였다. 또 분량판단이나 성질판단도 이상하다. 분량판단에서 전통 논리학에서 동일한 것으로 간주한 전칭판단과 단칭판단이 구분되며, 성질판단에서는 전통 논리학에서 배제한 무한판단을 받아들인다.
3)
칸트가 왜 이렇게 판단형식을 부풀렸을까? 이는 형식 논리학의 관점에서 보면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라는 사실을 칸트가 모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왜? 칸트의 독단이었을까? 그 이유는 칸트가 제시한 다음과 같은 말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위에서 지적했듯이 일반논리학은 인식의 모든 내용을 무시한다. 즉 인식과 객체의 모든 관계를 도외시한다. 그래서 한 인식이 딴 인식에 관계할 무렵의 논리적 형식만을 다룬다. 즉 사고 일반의 형식만을 다룬다. 그러나 (선험적 감성론이 증시했듯이) 순수 직관이 있는 동시에 경험적 직관이 있기 때문에, 대상의 사고에도 순수한 사고와 경험적 사고가 구별될 수 있다. 이런 경우에 인식의 모든 내용을 무시하지 않는, 논리학이 존재하겠다. 왜냐하면 대상의 순수한 사고에 관한 규칙만을 포함하는 일반논리학은 경험적 내용을 소유하는 모든 인식을 배척하겠기에 말이다. 선험적 논리학은 우리가 대상을 인식하는 바 기원을 다루기도 하겠으나 이런 기원이 대상에 귀속될 수 없는 한에서 다루겠다.”(순수이성비판, A판, 80)
칸트의 말을 자를 수가 없어서 인용이 길어졌지만, 그 내용은 간단하다. 형식 논리학에서 판단형식은 다만 형식일 뿐, 어떤 내용도 갖지 않는다. 그러나 선험 논리학에서 판단형식은 일정한 내용을 갖는다.
이 내용은 경험적으로 주어지는 내용이 아니라, 판단형식 자체에 고유하게 들어 있어서 경험을 규정하는 내용이다. 즉 ‘s는 p이다’라는 단칭 판단형식은 경험적으로 ‘소크라테스는 죽는다’라든가, ‘백두산이 지리산보다 높다’ 등과 같은 경험적인 명제에 일반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판단형식이다. 이 판단형식은 경험적 내용을 갖지 않는다. 또한 ‘S는 p다’라는 사물의 종을 주어로 하는 정언 판단형식은 예를 들어 ‘사람은 죽는다’ 또는 ‘산은 언덕보다 높다’라는 경험적 내용을 갖지 않는 일반적 형식이다.
그러나 ‘s는 p다’라는 단칭 판단형식은 ‘S는 p다’라는 판단형식과는 판단형식 자체에서 어떤 차이를 갖는다. 이 차이가 곧 판단형식 자체에 속하는 내용이라 할 수 있다. 이 판단형식 자체에 속한 내용은 경험적으로 주어지는 예에서 주어지는 내용과는 다른 것이다.
그러므로 판단형식이 그 자체로 고유한 내용을 갖는다는 선험 논리학의 관점에서 본다면, 기존의 복합판단에 속한 관계 판단이나 양상 판단이나, 무한판단과 전칭판단도 하나의 고유한 내용을 지닌 판단형식이다. 칸트는 이런 이유로 판단형식을 12개의 기본적 판단형식으로 확장했다고 볼 수 있겠다.
4)
이처럼 판단형식에 고유한 의미가 있다는 선험 논리학의 관점은 논리학을 혁명적으로 전환하는 엄청난 충격적인 사건이다. 판단형식이 그 자체 의미를 지닌다면, 형식 논리학의 근본 관점과 충돌되기 때문이다. 이 혁명적 사건이 칸트를 넘어가면서 헤겔 논리학의 출발점이 되었으나, 우리는 여기서 헤겔로 바로 뛰어넘기보다 헤겔이 칸트의 혁명을 받아들이다가 갈라지는 지점까지 더 추적해 보기로 하자.
칸트는 선험논리학의 관점에서 각 판단형식에 고유한 내용을 추구하면서 이를 범주로 규정하면서 범주표를 만들었다. 이 범주표는 A판 106쪽에 실려 있다. 보기 쉽게 아래에 표를 만들어 보았다.
분류 |
판단형식 |
범주 |
분량 |
단칭판단 |
단일성 |
특칭판단 |
수다성 |
|
전칭판단 |
전체성 |
|
성질 |
긍정판단 |
실재성 |
부정판단 |
부정성 |
|
무한판단 |
제한성 |
|
관계 |
정언판단 |
실체 |
가언판단 |
인과 |
|
선언판단 |
상호작용 |
|
양상 |
개연판단 |
가능성 |
실연판단 |
현존(우연)성 |
|
필연판단 |
필연성 |
이 범주표를 보면, 누구나 쉽게 범주의 의미가 판단의 형식에서 나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게 평범한 말과 같지만, 앞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범주의 의미를 언어의 종류에서 찾았던 것과 비교하면 이게 얼마나 혁명적인 주장인지 짐작될 것이다.
판단형식이란 곧 주어와 술어의 관계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 관계가 곧 계사[Sein]이니 거꾸로 말하자면 판단형식의 차이는 곧 계사[존재]의 차이이며, 계사[존재]가 자기를 드러내는 방식의 차이가 된다.
아리스토텔레스에서 범주 즉 언어의 차이는 어떤 개별적 존재자 사이의 차이를 다룬다. 그러나 칸트에서 범주의 차이는 계사[존재]의 차이이니, 쉽게 말해서 하나의 경험[주어 경험]과 다른 경험[술어 경험]이 어떤 관계 속에 있는가를 규정하는 차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칸트는 여기서 범주의 의미를 개별자[언어 또는 대상]에 관한 것에서 개별자들의 관계에 대한 것으로 근본적으로 전환했다는 것이다.
하이데거의 용어를 빌리자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존재자를 다루었다면 칸트는 이제 존재[계사]를 다룬다는 것이다.
5)
아리스토텔레스에서 범주는 언어의 류이면서 동시에 존재자의 류가 된다. 언어가 의미하는 것이 곧 존재자이니, 이런 전환은 별다른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다. 그러나 칸트가 이제 판단형식에서 나온 범주를 경험 세계를 규정하는 일반적 범주로 전환한다면, 여기서는 누구나 금방 의문을 제기할 것이다.
그렇다면 사유에 속하는 판단형식이 세계의 일반 구조란 말인가? 사유와 세계가 일치한다는 것을 믿을 수 있는가? 비트겐슈타인의 언어 그림이론이 아니라면, 이와 같은 주장을 단순히 믿기는 어려울 것이다.
판단형식과 이런 동일성이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세계를 인간이 전체적으로 경험하여 그 근본구조를 밝혀냈기에 사유의 근본구조가 성립하게 되었다고 볼 수는 없다. 원시인부터는 제쳐놓더라도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우리까지 사유의 근본구조는 변함이 없지만, 우리가 아직 세계의 근본구조를 안다고는 아무도 말할 수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이 동일성이 가능한 것은 칸트와 같이 사유가 세계를 구성하기 때문이라고 볼 수밖에 없지 않을까? 판단형식으로부터 칸트의 인식론적 혁명으로 나가는 길은 이처럼 단순하다. 여기서 칸트 자신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그러므로 선천적인 개념으로서의 범주의 객관적 타당성은 그것에 의해서만 경험이 가능하다는 것에 의거한다. 대저 그럴 적에는 범주는 필연적으로 즉 선천적으로 경험의 대상에 상관한다. 왜냐하면 범주에 의거해서만, 경험의 그 어떠한 대상은 일반적으로 생각될 수 있기 때문이다.”(A판, 126쪽)
판단형식에서 범주를 끌어낸 데서 인식론의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으로 나가는 길은 단순하지만, 혁명적인 길이었다. 판단형식 즉 범주가 이처럼 경험을 규정하게 되면, 판단형식 즉 범주가 이제 형이상학적 개념으로 된다. 이런 전환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범주론에서 형이상학으로 간 것과 마찬가지다. 다만 아리스토텔레스는 개별 언어로부터 존재자로 나갔으나 칸트는 판단형식 즉 계사[존재]로부터 경험 세계로 나간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은 존재자의 일반적 규정을 다루지만, 칸트의 형이상학은 이제 과학으로 전락한다. 즉 보편적 경험의 세계를 규정하는 원리가 되었다.
6)
판단형식이 고유한 의미를 지니고, 이것이 경험을 선험적으로 구성하는 것이라면, 실제로 경험이 판단형식을 통해 어떻게 규정되는 것일까? 이 과정이 바로 칸트의 선험적 연역의 과정인데, 그 핵심에는 도식이라는 개념이다.
칸트에서 판단형식 즉 범주의 의미 내용은 이 도식에 의해 규정된다. 이 도식에 관한 상세한 설명은 생략하기로 하자. 칸트를 공부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니 말이다. 범주표처럼 도식표도 있다.
분류 |
판단형식 |
범주 |
도식 |
|
분량 |
단칭판단 |
단일성 |
시간계열(수) |
|
특칭판단 |
수다성 |
|||
전칭판단 |
전체성 |
|||
성질 |
긍정판단 |
실재성 |
시간내용 |
충실 |
부정판단 |
부정성 |
공허 |
||
무한판단 |
제한성 |
|||
관계 |
정언판단 |
실체 |
시간순서 |
지속 |
가언판단 |
인과 |
후속 |
||
선언판단 |
상호작용 |
공존 |
||
양상 |
개연판단 |
가능성 |
시간총괄 |
혹시 |
실연판단 |
현존(우연) |
정시 |
||
필연판단 |
필연성 |
상시 |
(위의 도식표는 칸트의 작품이 아니라 순수이성비판 번역자 최재희 선생의 작품이다. 번역본 180쪽에 나온다) 주2) 범주와 도식의 관계는 마치 논리적 판단을 컴퓨터 언어로 전환하는 방식과 유사하다. 컴퓨터 언어는 이진법으로 이루어진다.
그런데 칸트는 이런 범주 즉 판단형식을 경험에 어떻게 적용한 것일까? 그는 마치 이 도식표를 하나의 좌표처럼 이용한 것으로 보인다. 즉 어떤 경험이 다른 경험과 어떤 관계를 가지고 들어오면, 그것은 어떤 판단형식의 좌표 중 어떤 지점 즉 어떤 범주에 귀속된다. 그런데 경험의 다른 관계가 출현하면, 그것은 또 다른 좌표 다른 범주에 찍히게 된다.
헤겔의 불만은 바로 여기서 시작되었다. 칸트의 선험철학에 경악하면서 따라온 헤겔이 칸트와 갈라지는 지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즉 칸트가 이처럼 도식표를 하나의 좌표처럼 이용했다는 것인데, 헤겔은 이를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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