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편 상품과 화폐, 제2장 교환 과정[자본론강독]-⑧

제1편 상품과 화폐, 제2장 교환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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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미나 참석 : 이재유, 김선이, 김성심, 신재길, 신준하, 옥철

정리 : 김선이(2012. 10.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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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략 요약(p.108~119)

? 실제 상품의 교환은 상품 소유자에 의해 이루어지며 상품 소유자와 상품의 관계를 밝힌다.

? 상품에 내포되어 있는 가치와 사용가치의 모순이 여러 상품의 전면적 교환에 있어서 어떻게 나타나는지 분석하여 특정한 한 상품이 화폐로 전환하는 것을 밝힌다.

? 원시공동에서 처음 발생한 두 가지 상품 교환에서부터 상품들의 전면적 교환의 발전과정을 분석하여 상품 교환과정의 모순이 어떻게 화폐를 탄생시키고 해결되었는지를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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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 발제(p.108~119)

1. 상품 소유자와 상품의 관계

? 상품

– 다른 모든 상품체를 오직 자기 자신의 가치의 현상형태로 간주하며 항상 교환할 용의를 가지고 있다.

– 상품은 스스로 다른 상품체의 구체적 속성을 파악하지 못하며 상품소유자가 상품의 속성을 보충해 준다.

– 상품은 자신에 대해서는 직접적인 사용가치를 가지고 있지 않고 다른 상품에 대해 사용가치를 가지고 있다.

– 상품은 스스로 시장을 찾아가 자신을 교환하는 것이 아니라 상품소유자에 의해 교환된다.

– 물건들이 서로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상품 소유자끼리, 즉 쌍방이 동의하는 하나의 의지행위를 매개로 자신의 상품을 양도하고 타인의 상품을 자기 것으로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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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품소유자

– 상품소유자에게 상품은 교환가치의 담지자란 점에서만 직접적 사용가치를 가진다.

– 그러므로 상품소유자는 사용가치를 가진 다른 상품을 얻기 위해 자기상품을 양도하려고 한다.

– 모든 상품은 소유자에게는 비사용 가치, 비소유자에게는 사용가치

– 상품 소유자들이 상품을 서로 교환하기 위해서는 서로 상대방을 사적 소유자로 인정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상품의 교환이 아니다.

– 법적 관계는 각자가 동의하는 의지행위를 매개로 경제적 관계를 반영하며 계약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사람들은 상품의 소유자로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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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품과 상품소유자의 차이

– 모든 상품은 가치로서는 같은 성격의 것이고 서로 교환할 수 있는 물건이다. 상품들의 교환에서 사용가치는 사상되고 있다. 상품소유자에게는 많은 상품 중 어느 특정한 상품이 사용가치로서 필요하며 다른 상품은 필요치 않다. 따라서 모든 상품소유자들은 자기에게는 사용가치가 아닌 상품을 내놓고 자기에게 사용가치인 ‘특정한’ 다른 상품을 교환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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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상품의 전면적 교환에 담겨진 모순

? 상품의 교환

– 상품의 소유자를 바꾸는 일

– 상품은 사용가치로 실현되기 전에 먼저 가치로 실현되어야 하며 상품은 가치로 실현될 수 있기 전에 자신이 사용가치라는 것을 먼저 보여주어야 한다.

– 상품에 지출된 인간노동은 타인에게 유용한 형태로 지출된 경우에만 유효하게 계산된다.

– 노동이 유용한지에 대한 여부는 물건이 타인의 욕망을 충족시켜주는지의 여부에 대한 상품의 교환을 통해 증명할 수 있다.

– 상품 소유자는 다른 상품과의 교환을 통해 자기 상품을 양도하려고 하는데 이때 교환은 개인적인 과정일 따름이다.

– 상품은 자기의 상품을 동일한 가치의 다른 상품으로 실현하고자 하는데 교환은 일반적 사회적 과정이다.

– 다른 모든 상품은 자기 상품의 특수한 등가(물)로 간주되며 자기 자신의 상품은 다른 모든 상품의 일반적 등가(물)로 간주된다. 이 사실은 모든 상품소유자에게 타당하기 때문에 어떤 상품도 일반적 등가물이 되지 못한다. 따라서 일반적 상대적 가치형태를 가지지 못하며 생산물 또는 사용가치로서만 상대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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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폐의 등장

– 상품소유자들은 상품 본성 법칙에 따라 상품을 일반적 등가물인 다른 하나의 상품과 대비시킴으로써만 가치 즉 상품으로 관계 맺었다.

– 특수한 상품을 분리해 내어 선발된 상품의 현물형태가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등가형태, 즉 사회적 과정을 통해 일반적 등가(물)는 이 선발된 상품의 독자적인 사회적 기능으로 되는데, 이 상품이 화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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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교환의 역사적 발전과 화폐의 형성에 의한 모순의 해결

? 화폐는 교환과정의 필연적인 산물이다. 교환현상의 역사적 확대와 심화는 사용가치와 가치사이의 대립을 발달시킨다. 화폐의 독립적인 가치형태를 만들려는 충동은 하나의 독립적 가치형태를 얻을 때까지 지속되어 특정상품이 화폐로 전환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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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산물의 직접교환은 단순한 가치표현의 형태, 즉 X량의 상품 A=Y량의 상품 B이다.

– 이 경우 A와 B라는 물건은 교환에 의해 비로소 상품으로 된다.

– 유용한 물건이 교환가치로 될 가능성을 획득하는 최초의 방식은 그 유용한 물건이 비사용가치로 존재한다.

– 물건은 외적인 것으로 양도할 수 있고 양도가 상호적으로 되기 위해서는 사적 소유자들끼리의 암묵적 동의가 있으면 성립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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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순은 화폐의 형성에 의해 해결된다.

프롤레타리아트[노동이야기]- ⑧

프롤레타리아트[노동이야기]- ⑧

이 재 원(한철연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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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모든 사람을 다 책임질 수 있단 말인가?

평택 항 수입물류 공장 공사현장이다. 바닷바람은 육지보다 체감기온 5-6도정도 낮다. 산소가 많은 바닷가 공기 덕분에 일해도 힘든 줄 모르겠다. 목수 2인 1조로 일해서 더욱 좋다.

며칠 간 J와 손을 맞춰 일했다. 일도 잘 할 뿐 사람이 젊잖다. 고향도 같다. 목수 두 사람이 모이면 그중에 실력이 나은 사람이 있다. 힘으로나 실력으로나 J가 나보다 났다. 따라서 일머리를 J가 이끌었다. 나는 육체 뿐 아니라 머리까지 편했다.

일 끝난 후 저녁식사를 함께 하는 재미도 쏠쏠했다. 혼자서는 주문 받지 않는 물 회(회 국수)가 가장 럭셔리한 메뉴이고, 국수나 국밥 등을 함께 먹었다. 그의 개인사는 듣지 않아도 알 듯 했다.

눈이 가는 곳에 마음이 있다. 처음 J와 손을 맞춰 지하에서 바라시(해체)하는데, 그가 담배를 피우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것이 아닌가. 담배를 내밀자, 그는 3일간 담배를 못 피웠다고 했다. 그는 한 달을 방구석에서 헤매다가 돈이 떨어지자 무작정 H인력을 찾아왔다고 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인데, 그는 스크린 경마장을 즐긴다. ‘비가와도 눈이 와도 말은 달린다’는 명언을 했다. 얼마를 넣고 가도 한 순간에 없어진다고 했다. 지름 신이 임하는 순간 뭉칫돈을 거는 탓이다.

바라시를 끝내고 가와바리, 즉 공중에 걸쳐놓은 속고 위에 폼을 붙이는 작업도 둘이 함께 했다. 나는 조기, 폼에 적절한 치수를 재어 못 두 개를 밖아 J에게 건네준다. J는 내가 밖아 놓은 못 두 개를 지지 삼아 패널을 속고에 고정되도록 못을 박았다. 우리는 혼자 하는 사람들보다 두 배 이상 작업을 했다. J는 계산도 빠르고, 작업도 차분하게 했다. 이튿날도 그 이튿날도 함께 작업하니까, 작업 지시하는 반장이 아예 우리 둘을 항상 함께 작업에 배치했다.

ⓒ 이재원

J와 손 맞추어 일 하던 중, 나는 평택 항 현장의 최고참, 돼지띠 노인에게 간택 당했다. 그는 어제까지 외국인과 손을 맞춰 일했는데, 두 사람은 소란하기 짝이 없었다. 의사소통이 되지 않기 때문이요, 외국인이 노인에게 불평하기 때문이었다. 노인이 다리를 보여주는데, 퉁퉁 부어있었다. 노인은 나에게 재료는 물론 소모품도 모두 갖다 달라고 했다. 몇 일간 노인과 함께 일하는 동안, 내 별명은 졸지에 <데모도>가 되었다. 노인의 주문에 따라 움직이는 내 편을 들어준 별명이다. 바람이 몹시 부는 날, 벽체를 보강하는 일종의 보, 통칭 ‘눈썹’을 ‘되 나우시’, 즉 부적격 작업을 고치는 일을 하게 되었다. 노인은 아래에 있고, 나는 보위로 올라갔다. 폼을 뜯어내는데 벽체가 바람에 몹시 흔들렸다. 기분 나쁜 것을 가까스로 참으며 간신히 뜯어내고, 다시 정확한 치수대로 눈썹을 이어냈다.

점심 직전에 비가 내린 날이다. 한 30분을 비 맞으면서 일했다. 땀에 젓은 옷이 비에 젖어 무척 짜증이 났다. 작업을 중단하고 용역회사에 돌아와 돈을 받은 J가 총총히 사라졌다. 그는 좀 전에 넌지시 내게 물었었다.

“이제부터는 무엇을?…”

나는, ‘상명대 도서관에…’라고 응답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일요일이다. 그의 발걸음으로 봐서 늦은 경마장 행이라고 짐작했다.

몇 년 전에 만난 노동자는 <바다이야기>에 빠져 있었다. 한 달에 두어 번, 돈을 모아서 도박장에 간다. 어느 경우에는 차비도 없어, 주변 사람에게 ‘차비 좀 달라’하면 거절당하기 일쑤였다.

평택 항 일이 없는 날, J와 학교 신축 공사 현장에 팔려나갔다. 학교 건축은 80년대 말, 90년대 초 건축회사 수석 목수로서 내 전문 분야였다. 따라서 현장이 고향 같았다. 예전 식으로 슬래브 작업을 했다. 횡 800센티, 종 360 센티 슬래브 여섯 칸 작업이다. 하리, 기둥 형틀을 세웠고 하스라, 즉 보 형틀을 올려놓은 상태였다.

우선 J와 시다 목을 준비했다. 슬래브 종대 치수보다 40-60 센티 정도 짧게 오비끼를 자른 후, 여기에 삿보도를 끼워 받치기 위해 3인치 항 대못을 네 개 박아둔다.

슬래브 하스라 위에서 다른 두 사람이 각목을 횡으로 길게 매달아, 시다 목을 받을 준비를 한다. 준비가 되자, J는 시다 목을 슬래브 위 사람에게 올려주고, 나와 다른 한 사람이 삿보도를 받쳤다. 구름 속에 있던 햇빛이 드러나자, 갑자기 숨이 ‘컥’ 막히는 듯 한 기분이었다.

그다음 시다 위에 네다 재료를 배열한다. 두께 5센티 각 파이프를 30센티 간격으로 깔고, 이음매 부위에 각재를 깔아, 시다와 못으로 고정시킨다. 그리고 그 위에 수지 알판이나 베니야 알판을 못으로 고정시킨다.

알판 슬래브 작업은 십 몇 년 만에 처음이다. 오직 한 가지 기억에 남는 것은, ‘슬래브 깔아갈 때는 물결 흐르듯이 작업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한 쪽부터 한 사람이 한 칸씩 깔아 가면, 그 다음 사람이 하리 통 치수를 맞추면서 다음 칸 슬래브 작업을 해 나간다는 의미이다. 처음에는 다른 사람들 작업을 도와주다가, 간신히 작업 방식을 파악하고는 J의 조언을 참고로 맨 마지막 슬라브를 깔아나갔다.

J는 하루 쉬고 경마장에 가겠단다. 도박, 광신과 세뇌를 클리닉 하는 방식에 대해 ‘줏어들은(口耳之學)’ 적이 있다. 나는 J가 경마장 간다고 한 날 새벽에 메시지를 했다. “경마장 가지 말고 강릉 가서 물 회나 먹고 오자.” 잠시 후 그가 전화로, ‘오늘은 경마장, 강릉은 다음에 가자’고 했다. 나는 도서관에 앉아 있다가, 시장으로 갔다. 오리 한 마리, 낙지 두 마리, 전복 세 마리를 샀다. J가 TV에서 보았다며, 이것들을 함께 끓인 음식을 먹어보고 싶다는 말을 기억했던 것이다. 다시 전화했다. J가 당장 오겠다고 했다.

그는 ‘난생 처음 이토록 맛있는 음식을 먹어 본다’고 했다. 옥에 티는, 그가 오리 뼈를 덕수가 십여 년 전 수학여행에서 사다 준 은도금 재떨이에 버렸다는 것이다. 식사 후 그는 총총히 경마장으로 갔다. 나는 혼잣말을 했다. ‘너(나)여, 모든 사람을 책임질 수 있는가?’

대학원 시절, 유학 간 약혼녀로부터 파혼을 선고받은 친구가 빠친꼬에 빠지는 것을 보았다. 그를 따라 빠친꼬장에 가 보았다. 그는 크게 돈 욕심을 내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상처를 잊으려 몸부림치는 것 같았다.
노동자들이 도박에 빠지는 것은 자기 고뇌에 대한 응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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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성(性愛)과 경제, 그리고 두목노동자

인간 내면에 대해서는 항상 더러운 이야기만 하게 된다. 전에 가본 적이 있는 H인력에서 멧세지가 왔다. ‘목수 일 많습니다. 일 나오세요.’ H인력은 하루에 100명 정도의 목수를 현장에 보내고 있었다. 나는 평택 항에 고정으로 일 나가기 전까지 땜빵용, 그러니까 고정으로 한 현장에서 일하던 목수들이 안 나올 때 그 현장에 투입되는 인력으로, 이곳저곳 현장을 돌아다녔다. 원룸 현장에서 외국인 Y와 함께 일했다. 나는 그를 <따거>라 불렀다. 키가 크고 힘이 좋은 이를 지칭하기 좋은 이름 아닌가. 그가 서투른 한국 말로 내게, ‘내일 비 와. 애인(자기에게 소개시켜 줄 여성) 있어?’라고 말했다. 나는 ‘없어’라고 말했다. 그가 재차, ‘애인 줘’라고 말했다.

이튿날 비가 왔다. Y와 점심때 국밥집에서 만났다. 그는 머리고기와 소주 두 병을 해 치웠다. 잘 통하지 않는 대화로 애먹고 있을 때, 한국말을 잘 하는 Y의 친구가 왔다. 친구로부터 시원하게 Y의 심중을 들을 수 있었다. Y는 곧 고국으로 돌아갈 참이다. 고민이 있으니, 방금 한국에 온 친구 때문이다. 친구는 목수 일은 되지만, 한국말을 못해서 어디현장에서 일을 시켜줄 지 의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나에게 자기 친구를 데리고 일 다녀 달라는 것이다. 나는 그 문제에 대해서는 자신 있게 대답을 못 했다.

두 사람이 모국어로 한 참을 이야기했다. 나는 무료해, 가방에서 책을 꺼내 읽었다. 이것이 실례되지 않을 듯 했다. 그만큼 그들은 할 이야기가 많았다.

그들이 나가자고 했다. 어슬렁거리며 따라가자, 콜라텍으로 들어갔다. 자리에 앉자, J의 친구가 말했다.

“내내 일 하면서 고생하다가, 이런 곳에 와서 기분을 풀지요. 언니들 바글바글 해요.”

플로어에는 할머니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녀들의 옷차림은 전문 댄서와 같았다. 현실은 소설이나 영화보다 더 적나라하다. 눈치를 보아 하니, 파고다 할머니들이 많은 듯 했다. 노동할 수 없는 여성들은 경제력 있는 남성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다. 파고다 할머니들에 비하면 일용 노동자조차도 아주 높은 계급이다.

나는 다시 책을 꺼내 읽었다. Y의 친구가 ‘책은 집에 가서 읽어요, 여기에서는 그냥 놀아요’라고 했다. 다시 둘러보니, 외국어를 하는 젊은 여성들도 많았다.

술 취한 Y가 집요한 내면을 드러내었다. 말끝마다 새끼손가락을 들어올리고, <애인>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아마도 hook-up body만 중요한 곳에서 ‘아름다운(젓가슴, 사랑, 육체)이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플로어의자에서 사람들이 끈적거리는 눈으로 다른 사람들의 뒤를 쫓았다.

60대의 O목수는 좋은 차를 몰고 다닌다. 우람한 몸에 성질도 장기(長氣)해서, 화내는 것을 본 적이 없는 호인이다. 그 역시 <땜빵>이라서 나는 그의 차를 타고 몇 군데 현장에 일하러 갔다. 그 역시 말끝마다 <여자친구>였다. 외국인 여자 친구와 아라비아 지역 까지 여행을 다녔다. 여자 친구는 몇 년간 출국 했다가, 이제 며칠 후면 한국에 들어온다고 했다.

하루 벌어 하루를 사는 노동자들에게 감정과 성, 남성과 여성의 관계에는 답이 없다. ‘손 맞인 즉 땡기는 맛이 없어 유흥업소 여성은 사양’하고 자기만의 창녀를 갖기 위해, 입에 담기에도 꺼려지는 인간 종들이 <장자연>을 만드는 세계에서 경제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리는(빼았기는) 것이 현실이다. 더 얻은 사람이 있다면 빼앗기는 사람이 있게 마련이다. 경제적 형편 대문에 사랑을 빼앗긴다는 것은 소설이 아니다. 이런 저런 사정, 특히 경제적 형편 때문에 남편을 버리고 돈 벌러 나왔다는 이야기는 항용 듣지 않는가. ‘생식 능력만 있는 이’(이것이 프롤레타리아트의 의미이다)가 성적 상대를 빼앗긴다는 것은 그에게 행복 추구권리, 사랑을 통한 감정 충족 까지도 박탈당한다는 의미이다. 그들은 황폐해질대로 황폐해진다.

노동자들은 반장에게 비 호감적이다. 단지 반장이 우리보다 돈을 더 많이 번다는 것에 대한 질투만은 아니다.

반장 급은 일을 시키고, 목수들이 일하는 것을 감시한다. 일반 목수들이 자주 쉬어야 하지만, 반장들은 한 달 내내 일 할 수 있다. 일당도 더 많이 받는다. 책임이 큰 만큼 돈 많이 버는 것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진리를 탐구하는 이들이 일신의 영달을 위해 태도를 바꾼다면 그것은 <변절>이다. 그러나 반장이 진리를 탐구하는 사람도 아니니 그가 노동자 편이 아니라 사용자 편이라고 해서 변절이라는 말을 붙일 수는 없다. 그러나 노동자들의 의도를 해석하자면, 반장들이 미운 이유는 ‘한 사람의 노예 상태를 다른 사람의 완전한 인간적 발전을 위한 수단으로서 정당화하는 데 기여하기 때문이다’.

평택 항 현장에는 반장이 두 사람이다. 월급 받는 총 반장은 모든 데마, 철근, 콘크리트, 형틀을 총괄한다. 목수 반장에게 작업지시를 하는 것도 총 반장이다. 그리고 일당 노동자 목수 반장이 있다. 반장들이 정확히 일하면 ‘되 나우시’는 없다.

지금도 항용 그렇지만, 옛날이라야 몇 십 년 전만 해도 거짓말처럼 돈 잘 버는 오야지들은 애인이 있었다. 대충 서너 사람이 기억난다. 잡철 오야지의 여성은 아기를 안고 현장에 함께 왔다. 현장에서 그녀가 하는 것은 아이를 어르는 일이다. 어느 목수 오야지는 젊은 여성에게서 얻은 아이를 키우기 위해 은퇴할 나이가 훨씬 넘도록 일했다. 둘 이상의 여성을 거느린 미장 오야지는 오통으로 항상 허리를 움켜쥐고 있었다.

애인인 여성들로부터 두목 노동자의 ‘카리스마에 반했다’는 이야기를 우회해서 듣곤 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어느 여성의 결정을 이끌어주는 남성다움에 반했다는 것인 즉, 그 여성이 일종의 매저키스트적이거나 자기 독립적(자기중심적이 아니라)이지 못한 여성들일 것이다. 그러한 결합이 바람직할 리 없다. 다만, 그 여성들이 경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다면, 그러니까 파고다 할머니들이 엄존하는 현실에서 타인에게 의탁할 수밖에 없는 여성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질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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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외국인 노동자와 내국인의 임금

목수들이 아주 흔히 화제를 삼는 것이 외국인 노동자와 내국인 인건비에 관한 것이다. 80년대부터 현장을 떠나지 않았던 O씨가 말했다.

“90년대만 해도 2000년 도에는 목수 품값이 일본이나 미국 수준이 되리라고 예상했다. 당시에는 젊은 사람들이 목수 일을 배우지 않았을 뿐 아니라, 점점 임금이 올라가는 추세였다. 그런데 갑자기 IMF터지고, 외국인 노동자들이 들어오면서 품값이 오히려 떨어졌다. 여행 비자든 방문비자든 개의치 않고 현장에 와서 일하는 통에 완전히 망했다.”

87년 민주화 운동이 일어나면서 건축노동자들의 품값이 오르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공공연히, ‘노태우가 우리 형편을 좋게 해 주었다’고 말했다. 지금이야 5,1.6프로의 보수층이 있지만, 권력 지지 기반이 없던 당시로서는 정치가들이 기층노동자들에게 어느 정도 잘 해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자본가들은 노동자들보다 정보도 많고 똑똑하다. 중소기업 협회 등에서는 기업하기 좋은 나라, 인건비가 싼 나라를 만들려고 불철주야 노력한다.

한 나라의 경제가 발전하고 인건비가 비싸지면 값 싼 노동력을 외국에서 끌어들여온 역사는 길다.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는 것은 공허한 메아리가 아니라 당대의 노동자들이 처한 절실한 문제였다. 노동 시간이 짧아지고 인건비가 오를 만하면 자본가들이 가난한 나라의 값 싼 노동력을 끌어들이는 통에 노동자들이 국제적으로 단결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가난한 나라의 값 싼 노동력이 만들어 내는 것은 생 떽쥐베리가 분노하듯이 <살해된 모차르트>들, 짐짝처럼 실려 있는 폴란드 노동자들이 탄 기차의 교육 받지 못하는 어린이들만이 아니다. 자국과 타국 노동자들의 빈곤의 공평화도 만들어낸다.

제 1 장 제 3 절 가치형태 또는 교환가치[자본론강독]-⑦-1

제 1 장 제 3 절 가치형태 또는 교환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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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미나 참석 : 김선이,김성심,나태영,박종호,신재길,신준하,옥철,윤지미

발제자 : 신재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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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 상품의 이중성과 그에 대응하는 노동의 이중성을 보았다.

상품의 이중성은 사용가치와 가치의 모순이고, 노동의 이중성은 구체노동과 추상노동의 모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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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하나의 상품에 서로 다른 성격이 공존하는 모순이 현실에선 어떻게 나타나며, 이 모순이 어떻게 해소되고, 또 더욱 심화되는지를 가치형태의 검토를 통해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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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품은 사용가치에 대응하는 현물형태와 가치에 대응하는 가치형태를 갖는다.

“상품은 철, 아마포, 밀 등과 같은 사용가치의 형태, 곧 상품체의 형태로 세상에 나타난다. 이것이 상품의 평범한 현물형태이다. 그러나 그것들이 상품으로 되는 것은 그것들의 이중적인 성격. 곧 사용의 대상인 동시에 가치의 담당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것들은 오직 이 이중적 형태, 곧 현물형태와 가치형태를 가지는 경우에만 상품으로 나타나는 것이다.”(자본론1상 59p 김수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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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용가치는 상품의 물질적 속성이기 때문에 그 형태가 자연적인 물건인 현물형태로 나타난다. 그러나 “상품의 가치에는 상품의 감각적이고 거친 외형과는 정반대로 단 한 분자의 물질도 들어 있지 않다.”(60p) 상품의 가치는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순전히 사회적인 것“(60p)이다. 사회적이란 인간관계를 말한다. 상품의 가치는 “인간노동이라는 동일한 사회적 실체의 표현”(60p)이기 때문에 가치는 그자체로 물질적 형태를 취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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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상품들은 그 사용가치의 잡다한 현물형태와 뚜렷이 구별되는 하나의 공통적인 가치형태, 곧 화폐 형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누구나 … 다 알고 있다.”(60p) 우리는 상품의 가치를 화폐를 통해 가격으로 나타낸다. 즉 화폐가 상품의 가치를 나타내는 형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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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스는 이 가치형태의 절에서 “화폐의 신비”를 “화폐형태의 발생기원”(60p)을 통해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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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할 것은 이 가치형태의 절에서 맑스가 밝히고자 하는 것은 “가치란 대체 어떻게 하여 탄생했을까?”(자본을 넘어선 자본, 64p, 이진경)라는 물음에 답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맑스가 가치관계의 형태를 연구하여 해명한 것은 “가치가 어떻게 탄생하였는가?”라는 점이 아니라 일개 상품에 불과한 금, 은 등과 같은 귀금속이 어떻게 화폐로 되어 가치를 대표하게 되었는가를 밝히는 것이다. 이진경이 화폐의 탄생과정을 가치의 탄생과정으로 잘못 본 것은 “가치형태를 가치 자체와 혼동했기 때문”(자본론1상 63p 주17, 김수행)이다. 이러한 잘못은 온도계의 발명을 온도의 탄생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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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단순한, 개별적인. 또는 우연적인 가치형태

“x량의 상품 A = y량의 상품 B 또는

x량의 상품 A = y량의 상품 B와 가치가 같다.

20미터의 아마포 = 1 개의 저고리, 또는

20미터의 아마포는 1개의 저고리와 가치가 같다.“(61p)

이것이 모든 가치형태의 비밀이 숨겨져 있는 단순한 가치형태인데 다음의 도식으로 요약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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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A=y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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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가치표현의 양극 : 상대적 가치형태와 등가형태

“종류가 다른 두 상품 A와 B(우리의 예에서는 아마포와 저고리)는 여기서 분명히 두 개의 서로 다른 역할을 한다. 아마포는 자기의 가치를 저고리로 표현하며, 저고리는 이러한 가치표현의 재료가 된다. 제1의 상품은 능동적 역할을 하며, 제2의 상품은 수동적 역할을 한다. 제1의 상품의 가치는 자기의 가치를 상대적 가치로 표현한다. 바꾸어 말하면, 그 상품은 상대적 가치형태로 있다. 제2의 상품은 등가물로서 기능한다. 다시 말해, 그 상품은 등가형태로 있다.”(6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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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호로 연결되어 있는 두 상품 A 와 B 에서 좌변의 A상품은 상대적 가치형태이고 우변의 B는 등가형태이다. 상대적이라는 말은 다른 것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의미를 갖는다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상대적 가치형태는 자신의 가치를 다른 상품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표현한다는 의미이다. 즉 상품A는 상품B와의 관계를 통해서 자신의 가치를 드러낸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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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에 등가라는 말은 가치가 같다거나 또는 가치에 대응한다는 의미이다. 즉 등가형태로서의 상품B는 상대적 가치형태인 상품A의 가치와 같은 가치를 갖거나 그에 대응한다는 말이다.

#상대적 가치형태와 등가형태는 비대칭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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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적 가치형태와 등가형태의 관계는 상품소유자의 입장에서 보면 분명하게 드러난다. 상품A(아마포)를 소유한 사람은 아마포를 사용가치로서 소유하고 있는 게 아니다. 만약 상품A(아마포)를 사용가치로 소유한다면 그 상품을 소비하고 말 것이다. 따라서 상품A의 소유자는 상품A를 교환가치로서 소유하고 있게 된다. 즉 자신이 필요로 하는 다른 상품과 교환할 수 있는 가치로서 소유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상대적 가치형태로서의 상품을 소유한 사람은 자신의 상품이 교환가치가 있음을 적극적으로 드러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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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때 “아마포의 가치를 아마포로 표현할 수는 없다.”(61p) 그래서 상품A(아마포)의 소유자는 아마포의 가치를 다른 상품(저고리)를 통해서 표현하게 된다. 즉 아마포 20미터는 저고리 1개의 가치와 같다고 적극적으로 표현한다. 이때 저고리는 아마포의 “가치표현에 재료를 제공하고 있을 뿐”(62p)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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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품A가 능동적이란 의미는 상품A가 자기의 가치를 드러내고자 한다는 것이고 상품B가 수동적이란 의미는 상품A의 가치를 나타내는 재료로 쓰인다는 의미가 된다. 이러한 역할의 차이는 ‘단순한 가치형태’의 도식에서 차지하는 위치에 의해 결정된다. 어떤 상품이 도식의 좌변에 위치하면 상대적 가치형태로서 능동적으로 자신의 가치를 나타내고자 하는 것이요, 도식의 우변에 위치하게 되면 상대적 가치형태의 가치를 나타내는 재료의 역할만을 수동적으로 수행할 뿐인 등가형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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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등호는 좌변과 우변의 역할의 같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만약 도식에서 역할만을 표식한다면 xA –> yB 의 형태가 더 어울릴 것이다. 하지만 맑스는 이렇게 화살표로 가치형태를 표식하지 않고 등호로서 표식하고 있다. 이는 도식의 양변에 위치한 상품들의 역할을 나타내는 게 아니라 두 상품의 가치량이 같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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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상대적 가치형태

(a) 상대적 가치형태의 내용

맑스는 “가치관계를 우선 그 양적 측면으로부터 완전히 떠나서 고찰할 필요가 있다”(63p)고 한다.

“20미터의 아마포=1개의 저고리이든, 20미터의 아마포=20개의 저고리이든, 또는 20미터의 아마포=X개의 저고리든, 다시 말하면, 일정한 양의 아마포가 다수의 저고리와 가치가 같든 소수의 저고리와 가치가 같든, 그러한 비율의 존재 자체는 가치량으로서는 아마포와 저고리가 동일한 단위의 표현들이며, 동일한 성질을 가진 물건들이라는 것을 항상 전제하고 있다. 아마포=저고리라는 것이 이 등식의 기초이다.“(6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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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이를 도식으로 나타내면 A = B 가 된다. 이 도식은 가치관계에서 양적 측면을 배제한 것을 나타낸다. 영희는 철수와 같다고 할 때, 즉 영희 = 철수라고 할 때 무엇이 같은가? 학교성적일 수도 있고, 몸무게 일 수도 있고, 나이 일수 도 있다. 그것이 무엇이든 “동일한 성질”임을 전제로 한다. 영희의 성적과 철수의 몸무게가 같다고 할 수 없는 것은 자명하기 때문이다. 상품간의 관계에서는 이러한 “동일한 성질”이 가치이다. 즉 “인간노동의 단순한 응고물”이다. 이 ”인간노동의 단순한 응고물“인 가치가 ”상대적 가치형태의 내용“이다.

그러나 “우리가 가치로서의 상품은 인간노동의 단순한 응고물이라고 말할 때, 우리의 분석은 상품을 추상적 가치의 차원으로 환원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 현물형태와는 다른 가치형태를 상품에게 주는 것은 아니다.”(6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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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상품의 “추상적 가치”는 “어떻게 표현되는가?”(6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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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품의 가치성격은 다른 상품과의 관계에서 표면에 나타난다.“(자본론1상 63p, 김수행 초역판)

“예컨대 우리는 가치물로서의 저고리를 아마포와 등치시킴으로써 저고리에 들어 있는 노동을 아마포에 들어 있는 노동과 등치시킨다. 저고리를 만드는 재봉과 아마포를 만드는 직포는 그 종류가 다른 구체적 노동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재봉을 직포에 등치시키는 것은 사실상 재봉을 두 가지 노동에서 진실로 똑같은 것[즉, 인간노동이라는 양쪽에 공통된 성격]으로 환원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직포도 또한[가치를 짜는 한] 재봉과 구별되지 않으며 따라서 추상적 인간노동일 뿐이라는 것을 말하는 우회적 방식이다.”(자본론1상 64p, 김수행 제2개역판 이하 동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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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저울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된다. 어떤 한 물건의 무게를 알고자 할 때 저울의 한 쪽에 그 물건을 올여 놓고 저울 반대쪽에 쇠덩어리인 추를 달아 잰다. 무게란 그 자체로 만지거나 볼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다른 물건(쇠덩어리)의 무게를 통해 나타낸다. 이와 마찬가지로 상대적 가치형태인 아마포의 가치를 알아내기 위해서 다른 가치물인 저고리를 비교하여 등치시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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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상대적 가치형태의 양적 규정성

위에서 상대적 가치형태의 내용 즉 인간노동의 응결인 가치를 살펴보았다. 이제 양적 측면을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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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치형태는 가치일반뿐 아니라 양적으로 규정된 가치[즉, 가치량]도 표현해야 한다. 그러므로 상품 A의 상품 B에 대한 가치관계, 아마포의 저고리에 대한 가치관계에서는 저고리라는 상품 종류가 가치체 일반으로 아마포에 질적으로 등치될 뿐 아니라. 일정한 양의 가치체 또는 등가(물)[예컨대 1개의 저고리]이 일정한 양의 아마포[예컨대 20미터의 아마포]에 등치된다.”(68p)

그러나 가치량은 생산성이 변동함에 따라 변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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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아마포의 가치는 변동하는데 저고리의 가치는 불변인 경우

“상품 B의 가치는 불변이더라도 상품A의 상대적 가치[즉, 상품 B로 표현하는 상품 A의 가치]는 상품 A의 가치에 정비례해 상승 또는 하락한다.”(6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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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 아마포의 가치는 불변인데 저고리의 가치가 변동하는 경우

“상품 A의 가치는 불변이라도 상품 B로 표현하는 상품A의 상대적 가치는 상품 B의 가치변동에 반비례해 하락 또는 상승한다.”(6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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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i. 아마포와 저고리의 생산에 필요한 노동량이 동시에 동일한 방향으로 그리고 동일한 비유로 변동하는 경우

“이 경우 이 상품들의 가치가 아무리 변동하더라도 여전히 20미터의 아마포= 1개의 저고리다. 이 상품들의 가치변동은 이 상품들을 [가치가 변하지 않은] 제3의 상품과 비교할 때에만 드러난다.”(6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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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 아마포와 저고리 각각의 생산에 필요한 노동시간[즉, 그것들의 가치]이 동시에 동일한 방향이면서 서로 상이한 정도로, 또는 반대방향으로 변동하는 경우

“이와 같은 각종 조합이 한 상품의 상대적 가치에 주는 영향은 I, ii, iii의 경우를 적용해 간단히 알 수 있다.”(7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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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듭을 풀어나가는 자기실현의 길[치유시학]

매듭을 풀어나가는 자기실현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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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리 (인제대 인문의학연구소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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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실현의 길?

자신의 비밀을 평생 동안 혼자 간직하고 있다가 누군가에게 털어놓기 위해서는 많은 용기가 필요하다. 그 용기 뒤에는 온전한 자유를 향한 염원이 있다. 온전한 자유, 진정한 자유는 세계와 교류하여 나와 세계가 서로 영향을 줄 때 실현가능한 것이다. 삶의 빛은 현실적인 어려움과 고난 속에서 더욱 빛나기 때문이다.

할머니가 7개월 동안의 만남에서 보여준 모습은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한센병에 걸렸다는 사실만으로 개인의 고유성과 존엄성을 인정받지 못한 삶을 살아왔기에 세상을 원망하기도 하고 지금은 없는 기억 속의 이웃들에게 분노하기도 했지만, 스스로 자신을 돌아보며 지난 삶을 정리하는 모습은 한 줄기 빛과 같았다.

그 지난한 삶에 맺혔던 매듭을 말로써 하나씩 풀어나가는 모습을 생각하면 어린 시절의 내 할머니와 어머니의 다림질 모습이 떠오른다. 우물에서 퍼 올린 물로 긴 광목천을 발로 밟아 빨아서 마당을 가로지른 빨랫줄에 널어놓으면 마치 햇살이 내려와 하얗게 부서지는 것처럼 보였다. 바람에 펄럭이던 광목천 사이를 뛰어노는 사이 광목천은 바싹 마르고, 어머니는 그 천을 하나씩 걷어서 풀을 먹였다.

커다란 대야에 마른 광목천을 넣고 어머니가 풀주머니를 주물럭거리면 하얀 풀물들이 나와 광목천을 촉촉하게 적셨다. 광목천을 손으로 주물러 풀물이 골고루 천에 스며들면 다시 빨랫줄에 널어 말렸다. 풀을 먹인 광목천은 햇빛 아래에서 더 하얗게 표백되어 갔다. 빳빳하게 마른 천을 걷어 들인 어머니는 마루에 앉아서 입으로 물을 뿜어 천을 다시 촉촉하게 만들었다. 어머니가 물을 뿜는 소리에 비례해서 어머니의 콧등에는 땀이 맺혔다.

촉촉하게 젖은 광목을 직사각형으로 개켜 보자기로 싸서 발로 밟았다. 어머니의 발 아래에서 광목은 물기가 골고루 퍼지면서 동시에 구김살도 펴지고 있었다. 어느 정도 밟기가 끝나면, 광목은 다듬잇돌 위에서 다듬이 방망이에 의해 부드럽게 다듬어지고 있었다. 어머니는 양손에 방망이를 들고 일정한 속도로 다듬잇돌 위에 있는 광목을 두드렸다. 어머니의 다듬이 소리는 그 어떤 음악소리보다 어린 내 가슴 속을 휘젓고 다녔다. 마당의 평상 끝에 앉아 다듬이 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마치 어머니가 광목천과 하나가 되는 착각에 빠져들곤 했다.

다듬이질이 끝나면 할머니와 어머니는 마주 앉아 광목천의 끝자락을 잡고 팽팽하게 밀고당기다가 다리미질을 시작했다. 동그란 쇠 다리미에는 타고 남은 숯이 들어 있었고, 광목천은 다리미가 왔다갔다하는 사이에 잔주름 하나 없이 평평해지고 있었다. 나는 어머니 옆에서 사악거리는 다리미 소리를 들으며 잠이 들곤 했다.

할머니가 자신의 삶과 가슴에 맺힌 한을 말로 풀어나가는 그 모습이 마치 누런 광목을 하얀 천으로 만들어가는 어머니의 손길 같았다.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원망도 미움도 안타까움도 사랑의 아픔도 하나씩 벗어던지는 모습이 지난한 시간을 거쳐 하얗게 탈색되어 햇살 아래 빛나던 광목천과 같았다. 그것은 자기 의지에 의해 자기 본연으로 돌아가는 것, 곧 자기실현의 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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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이 크면 자신의 삶은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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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만났을 때, 할머니는 자신의 고통을 정확하게 드러내지 못했다. 떠나보낸 아들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 마쓰시타에 대한 회한, 먼저 가신 할아버지에 대한 미안함, 함께 살지 못하는 딸에 대한 아쉬움 등이 서로 뒤엉켜 마치 헝클어진 실타래처럼 실마리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한 한은 할머니를 무겁게 누르고 있었다.

살아가면서 하나씩 보태지는 고통은 매듭과 같다. 이 매듭은 삶을 얽매는 질곡이자 현실을 어두움 속으로 몰아넣는다. 그래서 나의 고통에 함몰되면 내 고통이 너무 크게 느껴지기 때문에 자신의 삶은 보이지 않는다. 이 세상에 오로지 나 홀로 내던져진 것 같은 막막함만 남는다.

할머니의 초기 시를 보면 “나는 왜 이렇게 고통이 많고/ 내 앞에는 여러 가지 시련이 닥치나/ 절망에 싸였다.(시 [내 인생길] 중)”고 고백한다. “약한 자는 아무리 말을 하여도/ 소귀에 경 읽기더라.(시 [내 인생길] 중)”는 표현으로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울분을 토해 놓았다. 그러나 시를 읊고 그 시를 내 목소리를 통해 다시 들으며, 시로 못다한 이야기들은 말로 하면서 맺혀 있던 매듭을 하나씩 풀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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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본시 왈가닥한 성격에
참지 못해 그 사이로 뛰어들어
발로 얼음을 타며 돌아다니다가
결국 엉덩이로 얼음에
방아를 찧고 말았네.
내 죽는다고 뒹구르니
길가는 나그네 아저씨가 두 손을 잡아
일으켜 주셨네
너무도 감사하여 맘으로 답례하였네.
– 시 [임진강에서]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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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wallsonline.org/beautiful-winter-river/

할머니는 구술한 마지막 시인 [임진강]에서 처음으로 세계와 교류하고 소통하는 표현을 했다. 할머니는 이 시에서 “많은 인파들이 아이 어른 분별없이/ 팽대를 치며 썰매를 타고/ 옆에서는 스키를 타며/ 즐겁게 놀고 있는” 사이에 뛰어들어 얼음을 지치며 놀다가 넘어졌는데, 알지 못하는 나그네 아저씨가 도움을 주어서 고마웠다고 회상했다.

“임진강에는 언제 가보셨어요?” 나의 질문에 할머니는 “어데, 가 본적 없다. 학교 다닐 때 선생님에게 들었다. 꼭 한번은 가보고 싶대. 그래서 한번 생각해봤다.”라며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으며 큰 소리로 웃었다. “김선생, 어떻노? 얼음이 얼모 팽이도 돌리고 얼음썰매도 탄다. 임진강은 저 우에 있으니 얼음이 더 얼었을 끼다.” 할머니는 눈을 지긋이 감고 혼자만의 생각에 젖어 들었다.

그 모습이 너무도 편안해 보여서 말없이 옆에 앉아 있었다. 자신에게 일어났던 사실만 시로 읊거나 말을 하다가 상상으로 시를 읊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시 속에 처음으로 많은 사람들(“많은 인파”)이 등장하고, 스스로 그 인파 속으로 뛰어 들어가 함께 놀았다는 것은 또 어떤 의미일까? 우물물조차 마시지 못하게 하는 이웃사람들에 대한 원망에서 벗어나 넘어진 자신에게 손을 내밀어준 나그네에게 마음으로 답례를 하는 것은 어떤 변화일까?

어쩌면 고달픈 현실의 삶에서 희망을 찾고 꿈을 가지게 된 것은 아닐까라는 데에 생각이 미치자 나는 할머니의 팔을 잡았다. “으응?”하며 나를 보는 할머니의 눈빛은 잔잔했다. 얼굴에는 밝은 빛이 서려 있었다. 며칠 계속된 감기로 머리가 아프다는 말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표정은 어린아이처럼 들떠 있었다. 할머니는 어두웠던 과거에서 빛을 찾아내어 어둠을 밝음으로 바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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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이 있어 기쁨은 빛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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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가 시와 이야기를 통하여 찾아낸 빛은 어린 시절 책에서 읽고 동경했던 임진강에 대한 기억이었다. 한 번도 가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리고 갈 수 없었기에 마음 깊은 곳에 꽁꽁 묶어놓았던 임진강으로 떠나서 해보고 싶었던 얼음지치기를 하며 노는 자신을 상상한다는 것은 할머니에게 그 어떤 자유가 찾아 온 것은 아닐까.

온전한 자유란 혼자만의 세계를 떠나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행해지는 실천이다. 비록 상상의 세계이지만, 많은 인파들 사이에 스스로 뛰어 들어가 놀다가 넘어지고, 누군가의 손을 잡고 일어서는 그 행위야말로 할머니가 원하던 자유였다. 할머니와는 물 한 모금도 나누어 마시지 않으려 하던 과거의 이웃은 넘어진 자기에게 손을 내밀어 주는 이웃으로 변화하고 있었다.

새로운 삶을 추구하는 과정에서는 늘 과거의 낡은 생각과 결별해야 하는 의식이 따른다. 생각은 생각을 낳고 분노는 어리석음을 낳고, 어리석음은 눈과 귀를 가리고 미혹으로 우리를 유혹한다. 이 미혹으로부터 빠져나오기 위해서는 자각이 있어야 하는데, 자각은 경험으로부터 시작한다. 지나온 삶을 때로는 시로 나타내고 때로는 말을 하는 경험으로부터 할머니의 자각은 시작되었던 것이다. 자각은 과거의 삶을 버리고 새로운 삶으로 할머니를 이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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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갑자기 아무런 소식도 없이
회오리바람이 불어
온 스키장은 아수라장이 되어
모자와 목수건이 날아가며
그 나그네 아저씨의 모자가
하늘로 뱅뱅 돌더니
임진강 흐르는 강가에 떨어져서
돌고 있는데 철새 한 마리가
날개 죽지가 부러져서
퍼득퍼득 뛰며
그 모자 속으로 들어가서
갑자기 사공이 되어 노를 젓고
끝이 없이 어딘가로 흘러가고 있네.
이 일을 보고 있는 나그네 아저씨는
고요한 말로
‘허, 참, 이상하다’ 하더니
뒤돌아서네.
나는 곁에서 눈이 땅에 흐리도록
그것을 바라보고 있다가
신기하다고 느꼈네.
– 시[임진강에서]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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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손을 잡아 일으켜주었던 나그네의 모자는 날개 죽지가 부러져 날지 못하는 새의 피난처가 되어 어딘가로 흘러간다. 그것을 눈이 흐려질 정도로 보면서 할머니의 마음은 신기함으로 가득 차 있다. 상처 입은 새와 함께 할머니의 지난 삶은 어딘가로 흘러가고, 이제 할머니는 사람 사이에서 신나게 놀기도 하고, 타인의 손을 잡고 일어서기도 하는 활달한 소녀로 다시 태어나고 있었다.

강물은 스스로 흘러 바다로 간다. 나와 너, 자연과 인간이 서로 어울려 하나가 될 때, 우리의 삶도 강물처럼 가야할 곳으로 간다. 그러나 삶의 질곡은 우리를 세계와 단절시키고, 우리는 마음의 문을 닫고 어둠 깊숙한 곳으로 자신을 유폐시킨다. 유폐의 길고 어두운 시간을 지나 할머니는 닫혔던 삶의 문을 열고 새로운 희망의 공간으로 발을 떼기 시작했다.

내 고통의 실체를 그대로 볼 수 있을 때 진정한 삶은 모습을 드러낸다. 그리고 나와 내 옆에 있는 사람을 함께 볼 수 있다. 할머니는 자신의 고통을 ‘날개 죽지가 부러진 철새 한 마리’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 철새에게 모자를 양보한 나그네도 함께 놀던 많은 인파도 사라지고 할머니는 혼자서 멀리 사라져가는 철새를 보고 있다.

60년의 시간을 지나, 지금 여기에 있는 할머니에게 남은 것은 무엇일까? 60년의 시간 동안 자신을 할퀴고 간 수많은 고통의 순간들을 할머니는 어떻게 보고 있을까? 병에 걸린 자신을 스스로 용서할 수 없었던 지나간 시간, 병 때문에 떠나보낼 수밖에 없었던 아들, 어머니, 마쓰시타에 대한 기억도 철새 한 마리와 함께 강물에 흘려보낼 순간이 온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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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 그동안 참말로 욕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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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시를 읊은 후에도 우리들의 만남은 한 달 정도 지속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봄이 오고 있는데도 그날은 몹시 추웠다. 방바닥은 냉기만 면하고 있었고, 전기장판 위에서 우리는 이불을 무릎에 덮고 앉아 있었다. 할머니는 담담하게 앞을 보면서 나지막하게 말했다. “인자 오지 마라.” “내 할 말 다 했다.” “니 그동안 참말로 욕 봤다.” 짧게 이어지는 말에 나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자신의 삶을 있는 그대로 스스로 드러낸 할머니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없었다.

할머니가 시를 들려주면서 나에게 한 말이 생각났다. “전에는 밤에 누우면, 무신 생각이 그리 많은지 잠이 안 온다. 잠은 안 오고 생각은 자꾸 나고. 눈물은 왜 그리 나오던지. 그런데 요새는 시 생각한다고 다른 생각이 안 난다. 뭐라고 할꼬. 우찌하면 잘 표현이 될꼬. 하룻밤에도 수십 번은 시를 썼다고 허물었다가 안 하나. 어떤 때는 머리가 아파서 에이 하지 말자 하다가도 또 생각하는 기라. 그라다보모 머리도 안 아프고 잠이 든다.”

“보래이, 김선생. 내 살아온 이런 이야기도 시가 되나? 참 우습제. 내 다시는 말 못할 줄 알았다. 하모, 누한테 말하겄노. 시를 생각하다보모 내가 나한테 말을 하는 기라. 그때는 그랬다. 아이다. 이랬다. 혼자 그라다보모 날이 샌다. 허허허. 참 우습제?” 그렇게 마음으로 쓰고 기억한 시를 구술하고 내가 받아 적은 후 다시 읽고 있노라면, 더러는 “아이가, 그기 아이다.” 하며 수정하기도 했다.

자신의 삶을 시로 나타내기 위하여 온 정신을 다하여 집중하는 동안, 할머니는 자신을 얽매고 있던 매듭을 하나씩 풀어나가는 지혜를 터득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 지혜는 자신의 삶을 시로 만드는 성찰과 집중의 과정에서 저절로 생겨난 것일지도 모르겠다.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누군가가 곁에 있고, 곁에 있는 사람에게 자신의 삶을 시와 이야기로 들려주며 스스로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으며, 그래서 마음의 파도를 잔잔하게 다스릴 수 있었던 이러한 모든 과정을 통해 할머니는 스스로 삶의 매듭을 풀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니 그동안 참말로 욕 봤다.”라는 말은 곁에서 이야기를 들어 준 나에게 한 말이자 할머니 자신에게 해주는 위안의 말이었으리라. 또한 구술을 할 때 상대의 말을 듣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우치게 해 준 말이었다.

우리들의 마지막 만남이 있었던 15개월 후, 할머니의 전화번호로는 더 이상 신호가 가지 않았다. 지난 6월 5일은 할머니가 시간과 공간, 무수한 인연들로부터 자유로워졌던 날이다. 날개 죽지 부러진 한 마리 철새는 임진강물을 따라 바다로 흘러가서 현해탄을 건너 아들을 만났을까. 마쓰시타를 만나 아들의 존재를 알렸을까. 그리고 할아버지를 만나 내 옆에 있어주어 고마웠다고 두 손 마주 잡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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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기술자 못남을 드러내는 책: 강준만이 쓴 『인물과 사상 1권-33권』[보고듣고생각하기]

[보고 듣고 생각하기]

지식기술자 못남을 드러내는 책

강준만이 쓴 『인물과 사상 1권-33권』

글:? 나태영(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나는 왜 『인물과 사상 1권-33권』을 다시 읽는가! 나는 서민이다. 나는 99프로이다. 한미서민패죽이기협정(한미자유무역협정)이 폐기 되어야만 내 생활이 편해진다. 내 노후가 편해진다. 내 자손들이 편히 산다. 이 땅 서민 삶이 편해진다. 그런데도 이 땅 지식기술자들은 한미서민패죽이기협정 폐기를 외치지 않는다. 저들은 그저 1프로가 만들어 놓은 놀이터에서 적당히 하는 척만 한다. 그저 경제민주화, 복지정책만 줄기차게 외친다. 나는 말한다. 한미서민패죽이기협정 폐기하지 않고서 두 가지 절대로 이룰 수 없다. 나는 지식기술자가 못나서 이 땅에서 ‘한미서민패죽이기협정 폐기’ 열 두 글자가 한데서 고생한다고 생각한다. 이 땅 지식기술자 못남을 철저히 드러내는 책이 강준만이 쓴 『인물과 사상 1권-33권』이다. 우선 이 땅 지식기술자 못남을 철저히 알고 싶다. 그래야 이 땅에서 한미서민패죽이기협정 폐기 촛불집회를 이룰 수 있다. 우선은 저들 못남을 처절하게 알아야 겠다. 더불어 내 못남도 알아내야겠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사서 모았다. 읽는다. 천천히, 음미하면서, 열 받으면서. 읽는다. 이 땅 99프로는 1프로가 만든 놀이터 안에서만 놀고 있다. 벗어날 생각을 아예 못한다. 벗어날 상상도 못한다. 이정희, 홍세화, 박은지 이 세 사람이 바로 그렇다. 저들은 해야만 할 일 을 제대로 못한다. 김대중은 북조선과 남한 3단계 통일론을 약 40년에 걸쳐서 외쳤다. 세 사람은 김대중 한태 배워야 한다. 지금은 한미서민패죽이기협정 폐기하라 외칠 때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모든 일에 때가 있다고 멋있는 말을 한다. 하지만 이 땅 서민들은 아무 때나 한미서민패죽이기협정 피해를 본다. 10년, 30년 지나면 그 피해는 상상을 초월한다. 30년 정도 지나면 피해가 커져 이 땅 서민들이 들고 일어날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거짓말이다. 바로 지금 들고 일어나지 않는다면 30년 뒤에도 들고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자살률 거의 세계 1위, 출산률 거의 세계 꼴찌, 비정규직 노동자가 절반을 넘어선 지 오래되었다. 이런데도 99프로가 지금 들고 일어나지 않는다. 30년 뒤에도 지금과 똑 같을 것이다.

강준만/ 출처: http://jtlee.khan.kr/163


‘이름을 다스리는 사람이 세상을 다스린다.’
이 땅에서 영어 알파벳이 점령군처럼 들어와 있다. 이 땅 기지촌 지식인들이 열심히 영어 알파벳을 쓰고 있다.

‘또 고려대학교 철학과에서 나온 한 제목이 『Hegel의 實體觀』이며 그 안에 소제목이 “Hegel과 Platon의 idealism”으로 시작하고 모든 고유명사가 직접 들어와 있다. 나는 도대체 이따위 무질서한 언어전통이 어디서 그 족보를 찾아야 할지 알 수가 없다. 서양철학을 하시는 분들은 동양철학을 하는 사람보고 한문을 풀어쓰지 않을 뿐 아니라 고루하다고 투덜댄다. 그러면서 그들은 프라톤이나 칸트, 헤겔 정도의 보편화된 우리말을 버리고 알파벳을 쓰시며 위대한 철학을 하고 계시다.’(『도올논문집』, 102쪽)

얼숲(페이스북)에서 당신 이름을 영어 알파벳으로 쓰시는 분들이 계시다.
그분들이 이야기 나누는 상대 다수가 한국인들이다. 그런데도 자신 이름을 영어로 쓰는 사람들이 있다. 좀 거시기하다. 나태영을 영어로 쓸 때 Tae-young Na 가 아니라 Na Tae-young이 되어야 한다. 외국에서도 그리 써야 한다. 그래야 외국인들이 “그래 한국에서는 성이 앞에 나오지. 우리랑 거꾸로 하네! 거 참 신기하네!” 말할 것이다. 미국인이 한국에 오면 “How mush is it?, Could you show me the way to city hall!”이 아니라 ” “이거 얼마예요?, 시청 가는 길 알려주세요.“ 정도는 말할 줄 알아야 한다.

‘한미서민패죽이기협정’이 ‘한미FTA’로 많이 쓰인다. ‘한미FTA’하면 일반인들은 그 뜻이 금방 와 닿지 않는다. 그 무시무시한 것이 내 일로 다가오지 않는다. 그러는 사이에 한국과 미국 1프로는 집요하게 사기를 쳐서 자신들 욕심을 채운다.

한겨레신문에서는 간혹 ‘한미자유무역협정’ 이라는 이름을 쓰는 기자가 있다. 나는 이 이름이 ‘한미FTA’라는 이름보다는 더 좋은 이름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이름도 사기치는 짓을 한다고 생각한다. ‘자유’라는 두 글자가 너무도 좋은 뜻을 지니고 있다. 그 두 글자 때문에 보통 사람들은 “응! 두 나라가 무역을 자유롭게 한다구! 좋지!” 그러는 사이에 한국과 미국 1프로는 집요하게 사기를 쳐서 자신들 욕심을 채운다.

2003년쯤에 민주노동당이 ‘한미매국협정’이라는 이름을 썼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잊어먹었다. 나는 이 이름을 자주 써먹었다. 하지만 이 이름도 딱 들어맞는 이름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한국과 미국 두 나라 1프로가 두 나라 99프로, 특히 한국 99프로 서민한테서 챙길 것을 최대한 챙기려고 한다. 돼지 똥구멍에 낀 콩나물까지도 빼먹으려고 한다. 그래서 나는 ‘한미서민패죽이기협정’ 이 이름이 맞춤한 이름이라고 생각한다.
그럼 보통 사람들이 그러겠지!

“아니! 죽일 놈들이 우리를 패죽인다구!
내 가만 있을 수 없지!
어디, 너 죽고 나죽자!”

언론인과 학자가 ‘한미서민패죽이기협정 폐기’ 이 열 글자를 드러내놓고 쓴다면 이 무시무시한 협정이 대선에서 쟁점도 되지 못하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이름을 다스리는 사람이 세상을 다스린다.’

강준만과 김동민이 펼치는 조선일보 제 자리 찾아주기 운동 조선일보는 반노동자 신문이다. 그런데도 민주노총 68만 회원 다수가 조선일보 본다. 억장이 무너진다. 진보정의당 노회찬이 조선일보에 아부한다. 한 두 번이 아니다. 조선일보는 반호남신문이다. 그런데도 호남 사람 다수가 조선일보 본다. 조선일보는 반통일 신문이다. 그런데도 북조선을 떠난 분들이 열심히 조선일보를 본다. 억장이 무너진다. 조선일보를 비판하기 위해서 조선일보 본다는 사람들도 많다. 답답하다. 강준만은 책을 통해서 조선일보 반대운동을 했다. 김동민도 그리했다. 현장에서도 조선일보 반대 운동을 했다. 그래서 강준만이 김동민을 높이 산다. 강준만은 중용을 이룬 사람이다.

출처: http://blog.naver.com/blogId=bloodlee

중용은 가운데를 뜻하지 않는다. 중용은 중립을 뜻하지 않는다. 제 때에 맞게 행동하는 것이 중용이다. 중용을 잘 이루는 보기는 우리 몸이다. 날씨가 더워지면 우리 몸은 땀을 흘려서 체온을 유지한다. 그래서 중용을 이룬다. 날씨가 추워지면 우리 몸은 몸을 떨어서 체온을 유지한다. 강준만은 일부 진보적인 학자들을 비판한다. 저들이 수구세력처럼 김대중 대통령을 비판하기에 그런다. 조선일보처럼 김대중을 비판해서 그런다. 조선일보나 수구세력에게 당하는 김대중 입장은 생각하지 않고 김대중을 비판해서 강준만은 진보적인 학자들을 비판한다. 저들이 거대담론만 중시하고 이 땅 현실에서 벌어지는 사소한 일을 무시한다고 비판한다. 저들이 진보를 외치면서도 반진보적인 신문 조선일보 월급쟁이들과 인터뷰하는 것을 허물없이 받아들이기 때문에 강준만은 일부 진보적인 학자들을 비판한다. 말을 고친다. 조선일보는 신문이 아니다. 강준만은 편견을과 통념을 깨부수는 사람이다. 『인물과 사상 1권-33권』 이 책들을 통해서 나는 내 생각을 바꾸게 되었다. 김용옥은 김대중을 비판한다. 김대중이 대통령 출마하지 않겠다고 말 해놓고 그 말을 지키지 않았다고 비판한다. 나도 김용옥 생각이 옳다고 생각했다. 멋있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강준만 책을 읽고 나서 내 생각이 바뀌었다. 총각이 결혼하지 않겠다고 말했다가 결혼하겠다고 생각을 바꾸면 많은 사람들이 그 사람을 축하해 줄 것이다. 정치가가 대통령 출마하지 않겠다고 말했다가 다시 대통령 출마하겠다고 말해서 심하게 비판 받을 일은 아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김대중이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고 김대중을 비판한다. 조선일보가 앞장서서 비판한다. 진보적인 학자들도 거든다. 나는 알게 되었다. 강준만은 더 이상 다른 주장이 나올 것 같지 않은 상황에서도 용케도 다른 주장을 펼친다. 그리고 그의 그런 주장이 꽤 설득력 있다. 강준만 글을 읽고 있노라면 강준만 얼굴과 맹자 얼굴이 겹쳐진다.

강준만은 바로 우리 이야기를, 바로 우리들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다.김용옥은 우리나라 국문학 동네가 우리나라 철학 동네보다 더 뛰어나다고 부러워 한다. 박사학위 딴 석학들이 자신보다 학력이 떨어지는 고졸, 학부 출신 작가들 작품을 비평해서 국문학 동네가 뛰어나다고 부러워한다. 우리나라 철학동네 사람들은 서구 철학자들이 쓴 글을 열심히 읽고 인용하지만 우리나라 철학자들이 쓴 글을 인용하면 자신 수준이 떨어진다는 편견을 갖고 있다고 비판한다. 조선시대 퇴계 이황 등 선비들 글에는 사람들 이름이 자주 나온다고 한다. 서로 이름을 걸고 서로를 비판한다고 김용옥은 말한다. 수많은 나와 너가 나온다고 김용옥은 말한다. 우리나라 철학 수준을 높이려면 우리 철학자가 쓴 글을 열심히 읽고 비판해야 된다고 김용옥은 주장한다. 김용옥이 바른 말 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강준만은 우리 땅에서 글 쓰는 사람들을 비판한다. 그 사람 이름을 드러내며 그 사람을 비판한다. 비판당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기분 나쁘겠지만 김용옥의 주장을 생각해 보면 강준만이 우리나라가 상식이 통하는 사회로 나아가는데 큰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영원한 무림고수는 없나보다. 맹자같이 냉철하고 논리적인 강준만이 2012년 대선에서 안철수를 옹호하는 활동을 펼쳤다. 좀 거시기 했다. 나도 한 때는 안철수를 좋게 평가했다. 나쁜 짓은 절대로 하지 않을 것 같은 푸근한 인상, 지지율이 자신보다 한참 못 미치는 박원순에게 서울시장 선거 출마를 양보한 의연한 자세를 보고 나는 한 때 안철수를 좋게 평가했다. 하지만 안철수가 2012년 4.12 총선 바로 며칠 전에 ‘당보다 인물을 보고 표를 주라.’는 말을 하는 모습을 보고 나는 안철수에 대해 가졌던 좋은 평가를 접었다. 과연 이 사람이 상식 있는 사람인가 의아해했다. 이런 안철수를 강준만이 옹호하는 모습을 보고 강준만이 왜 이러지 생각했다. 영원한 무림고수는 없나보다. 강준만을 넘어서는 사람이 나와야 하는데 그런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그런 지금 자신이 1프로이고, 1프로 대변자인 박근혜가 대통령이다.

‘당파성’이 ‘객관성’에 앞선다.[철학을다시 쓴다]-⑤

‘당파성’이 ‘객관성’에 앞선다.[철학을다시 쓴다]-⑤

 

윤구병(도서출판 보리 대표)

 

* 이 글은 보리출판사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이제부터 파르메니데스가 이미 없는 것으로 규정했던 과거와 아직 없는 것으로 규정했던 미래와 있는 것으로 규정한 현재의 관계가 어떻게 형성되는지 몇 개의 문장으로 나타내 볼까요?

1-1. 있었던 것이 있었다.
1-2. 있었던 것이 없었다.
1-3. 없었던 것이 있었다.
1-4. 없었던 것이 없었다.

2-1. 있는 것이 있었다.
2-2. 있는 것이 없었다.
2-3. 없는 것이 있었다.
2-4. 없는 것이 없었다.

3-1. 있을 것이 있었다.
3-2. 있을 것이 없었다.
3-3. 없을 것이 있었다.
3-4. 없을 것이 없었다.

위에 적은 열두 개의 문장은 모두 이미 없는 것의 관점에서 본 과거─과거, 현재─과거, 미래─과거의 관계들을 나타냅니다. 여기에서,

1-1은 과거의 실재를 단순히 확인하는 문장으로 볼 수도 있고 과거의 어느 시점에서 그보다 앞선 과거가 지속되어 왔음을 가리키는 문장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1-2는 하나도 없었다는 말의 다른 표현으로 해석할 수도 있고, 또 그보다 앞선 과거에는 있었던 것이 과거의 어느 시점에서 보니 없어졌음을 나타내는 문장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1-3은 빠진 것이 있었다는 말의 다른 표현이거나 그보다 앞선 과거에는 없었던 것이 과거 어느 시점에서 있게 됨을 나타낸 문장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1-4는 다 있었다는 말의 다른 표현으로 해석될 수도 있고, 또 그보다 먼 과거에도 없었던 것이 과거의 어느 시점에서도 없었다는 것을 확인하는 문장으로 해석될 수도 있습니다.

하나의 문장이 하나의 사태를 가리키지 않고 여럿(둘 이상)의 사태를 가리키는 까닭(다시 말해서 언어의 모호성)은 사태의 무규정성을 반영합니다. 우리가 이미 없는 것, 지나간 것, 끝난 것으로 파악하는 과거에도 여전히 규정되지 않는 것, 유동적인 것, 바뀔 수 있는 것, 변화의 계기가 들어 있고, 바로 이 과거에, 이미 없는 것으로 규정된 것에 남아 있는 변화와 운동의 숨은 힘이 어떤 계기에 현재와 미래를 바꾸는 힘으로 작용합니다.

파르메니데스(Παρμεν?δη?, 기원전 510년경 – 기원전 450년경) /출처: athenakanenas.blogspot.com

1-1에서 1-4까지 살펴본 문장이 이미 없는 것 사이의 내부 관계를 드러내는 것이라면, 2-1에서 2-4까지는 지금 있는 것(지금 없는 것)과 이미 없는 것 사이의 관계를 드러내는 문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2-1은 실재하는 것이 지난날에도 있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고, 지금 있는 것이 지난날에도 있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2-2는 하나도 없었다는 말의 다른 표현일 수도 있고, 지금은 있는 것이 지난날에는 없었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도 있습니다.

2-3은 빠진 것이 있었다는 말의 다른 표현일 수도 있고, 지금은 없는 것이 지난날에는 있었음을 뜻할 수도 있습니다.

2-4는 다 있었다는 말의 다른 표현일 수도 있고, 지금 없는 것이 지난날에도 없었음을 뜻할 수도 있습니다.

얼핏 보면 2-1과 2-4 문장은 현재까지 이어져 온 과거의 사태를 가리키고, 2-2와 2-3 문장은 변화된 사태를 가리킵니다. 그러나 상황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2-2, 2-3, 2-4 문장이 단순히 과거의 관점에서 본 현재와 과거의 지속이냐, 변화냐를 나타내지 않고, 이미 없는 것 자리에서 하나와 빠진 것과 여럿(다는 여럿 모두를 가리키는 말입니다.)을 문제삼고 있지 않습니까? 말하자면 이미 없는 것에 지금 있는 것(지금 없는 것)이 문제 상황으로 이미 담겨 있는 것입니다.

저마다 뜻은 다르지만 1-1에서 2-4까지 여덟 개의 문장은 전체로 보아 모두 과거의 관점에서 내린 사실 판단의 틀 안에 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앞으로 살펴볼 3-1에서 3-4까지 문장은 사실 판단의 틀을 벗어납니다. 물론 이 문장들이 지닌 뜻의 일부는 사실 판단의 틀 속에 가둘 수도 있지요. 그러나 사실 판단의 틀을 아무리 넓혀 놓아도 여전히 그 밖에 서 있는 의미의 계열을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3-1은 앞으로 있으리라 예상되는 사태가 지난날에도 있었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이 해석의 틀 안에서 보면 이 문장은 사실 판단의 한 갈래입니다. 그러나 이 문장은 또 있어야 할 것이 있었다는 뜻으로 해석해도 손색이 없습니다. 앞으로 있게 될 것이 아니라 지난날 마땅히 있어야 한다고 여겼던 것이 있었다는 뜻도 지니고 있다는 거지요. 3-2, 3-3, 3-4 문장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이미 없는 것과 아직 없는 것 사이에 사실 판단뿐만 아니라 가치 판단까지 내릴 수 있는 관계가 성립한다는 게 기묘하지 않습니까?

판단 주체의 문제로 돌아가자고요? 그 주체가 무엇입니까? 누구입니까? 인간의 의식인가요? 아니면 초월의식인가요? 혹시 개미나 선인장은 그 주체 안에 들어가지 않습니까?

나머지 문장들을 분석해 보고 논의를 진행시키기로 하지요.

아래에 다른 열두 개의 문장이 있습니다. 이 문장들은 지금 있는 것의 관점에서 본 이미 없는 것과 아직 없는 것과 있는 것의 관계를 드러내는 문장들입니다.

가-1. 있었던 것이 있다.
가-2. 있었던 것이 없다.
가-3. 없었던 것이 있다.
가-4. 없었던 것이 없다.

나-1. 있는 것이 있다.
나-2. 있는 것이 없다.
나-3. 없는 것이 있다.
나-4. 없는 것이 없다.

다-1. 있을 것이 있다.
다-2. 있을 것이 없다.
다-3. 없을 것이 있다.
다-4. 없을 것이 없다.

여기에서, 문장 가-1은 ‘지난날에 있는 것이 지금도 있다.’는 뜻으로 읽힐 수 있습니다. 또 ‘지난날에는 하나도 없었단 말이냐?’라는 질문에 ‘아니다. 지난날에도 무엇인가 있었다.’는 답변의 뜻으로 이 말을 했을 수도 있습니다.

문장 가-2는 ‘지난날에 있는 것이 지금은 없다.’는 뜻으로 읽힐 수 있습니다. 또 ‘하나도 없었다.’는 뜻으로 읽힐 수도 있습니다. 이 두 번째 뜻풀이에서 없다는 현재가 없었다는 과거로 때 매김이 바뀌었다는 사실을 눈여겨보십시오.

문장 가-3은 ‘지난날에 없는 것이 지금은 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고 또 ‘빠진 것이 있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현재에서 과거로 시점 전환이 또 한 번 더 이루어졌습니다.

문장 가-4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문장이 지닌 뜻 하나는 ‘지난날 없는 것이 지금도 없다.’이지만 다른 뜻은 ‘다 있었다.’입니다. 여기서도 지금 있는 것(지금 없는 것)이 의미 전환을 통하여 이미 없는 것으로 때매김이 바뀌어 버렸습니다. 말하자면 우리의 의식 속에서도 불가능한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과거와 현재, 과거와 미래, 현재와 과거, 현재와 미래, 미래와 과거, 미래와 현재를 이어 주는 비밀의 통로가 없고서야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나요? 현실은 그렇지 않은데 우리의 의식이 만들어 낸 가상의 통로일 뿐이라고요? 글쎄요, 과연 그럴까요?

나머지 문장들을 살펴보기로 하지요.

문장 나-1에서 나-4까지는 이 강의 처음 시작할 때부터 이제까지, 또 앞으로도 두고두고 되풀이되는 분석의 대상이므로 여기에서는 빼기로 합니다.

문장 다-1에서 다-4까지는 모두 가치 판단을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이 한눈에 보일 것입니다. 물론 다른 해석의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다-1을 ‘앞으로 있게 될 것이 지금 있다.’는 뜻으로, 다-2를 ‘앞으로 있게 될 것이 지금 없다.’는 뜻으로, 다-3을 ‘앞으로 없게 될 것이 지금 있다.’는 뜻으로 또 다-4를 ‘앞으로 없게 될 것이 지금 없다.’는 뜻으로 해석하자면 못 할 것도 없지요. 그러나 이 문장들을 그런 사실 판단의 틀 속에 억지로 끼워 맞추려는 데는 무리가 따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이런 의문이 떠오를 것입니다.

‘왜 과거와 현재의 상관관계에서는 사실 판단만 성립하는데 미래가 끼어들면, 다시 말해 지금까지 살펴본 바로는 미래와 과거, 미래와 현재가 관계를 맺을 때는, 그리고 미래가 주체가 될 때(미래를 나타내는 말이 주어의 자리에 올 때)는 가치 판단이 성립할까?’

이 문제에 대한 해명은 나머지 문장들을 살펴보고 난 뒤로 돌리기로 하지요.

이제 아직 없는 것의 관점에서 본 ‘이미 없는 것과 아직 없는 것’, ‘있는 것과 아직 없는 것’, ‘아직 없는 것’ 들 상호 관계를 드러내는 열두 개의 문장을 적겠습니다.

ㄱ-1. 있었던 것이 있을 것이다.
ㄱ-2. 있었던 것이 없을 것이다.
ㄱ-3. 없었던 것이 있을 것이다.
ㄱ-4. 없었던 것이 없을 것이다.

ㄴ-1. 있는 것이 있을 것이다.
ㄴ-2. 있는 것이 없을 것이다.
ㄴ-3. 없는 것이 있을 것이다.
ㄴ-4. 없는 것이 없을 것이다.

ㄷ-1. 있을 것이 있을 것이다.
ㄷ-2. 있을 것이 없을 것이다.
ㄷ-3. 없을 것이 있을 것이다.
ㄷ-4. 없을 것이 없을 것이다.

ㄱ-1에서 ㄱ-4까지 이미 없는 것이 주어가 되고 아직 없는 것이 술어가 되는 과거와 미래의 관계에서 있을 것, 없을 것이라는 판단은 있어야 할 것이나 없어야 할 것이라는 당위나, 있으리라 또는 없으리라는 예상이 아니라 추측의 성격을 띱니다. 칸트의 분류에 따르면 이른바 개연 판단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요.

물론 ㄱ-1을 ‘지난날 있는 것이 앞으로 있으리라 예상된다.’ 또는 ‘무엇인가 있었을 것이다.’ ㄱ-2를 ‘지난날 있는 것이 앞으로 없으리라 예상된다.’ 또는 ‘지난날 하나도 없었을 것이다.’ ㄱ-3을 ‘지난날 없는 것이 앞으로 있으리라 예상된다.’ 또는 ‘지난날 빠진 것이 있었을 것이다.’ ㄱ-4를 ‘지난날 없는 것이 앞으로 없으리라 예상된다.’ 또는 ‘지난날 다 있었을 것이다.’로 뜻풀이하자면 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특별한 경우에 생략 어법에 따라 현재라는 관계 고리가 빠져도 이해되는 그런 상황에서가 아니라면 이 문장들을 보고 예상이나 예측이 강조되어 있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여기에서는 ‘무엇인가 있었을 것이다.’ ‘하나도 없었을 것이다.’ ‘빠진 것이 있었을 것이다.’ ‘다 있었을 것이다.’라는 의미가 각각의 문장에 함축되어 있어서 술어에서 아직 없는 것이 이미 없는 것으로 시점 전환이 일어납니다. 말하자면 과거의 미래가 현재의 과거로 바뀌는 상황인데 이러한 변화는 나중에 변화와 운동을 통틀어 다룰 때 자세히 이야기하기로 합시다.

ㄴ-1에서 ㄴ-4까지 문장도 예상, 예측의 뜻으로 새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ㄱ-1에서 ㄱ-4까지 문장과 마찬가지로 이 문장들에서도 추측의 측면이 두드러집니다.

ㄴ-1은 ‘무엇인가 있으리라 추측한다.’

ㄴ-2는 ‘하나도 없으리라 추측한다.’

ㄴ-3은 ‘빠진 것이 있으리라 추측한다.’

ㄴ-4는 ‘다 있으리라 추측한다.’

의 뜻으로 자연스럽게 풀이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뭐 대단한 존재라고! 절망이 오히려 희망이라네! [철학자의 서재]

? 마크 트웨인의 <정말 인간은 개미보다 못할까>

 

김의수(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 이 글은 <프레시안>의 기사를 재게재 한 것임을 알립니다.
 

“내가 보기에 진화는 엉터리다. 인간은 정말로 한심한 실패작이다.”
-커트 보네거트, <나라 없는 사람>(김한영 옮김, 문학동네 펴냄, 19쪽)
 
 

아동 작가에서 신랄한 독설가로

10년 전만 해도 마크 트웨인(Mark Twain, 1835~1910)은 <톰 소여의 모험>, <허클베리 핀의 모험> 등의 모험 소설 작가로만 알려져 있었다. 적어도 나에겐. 70년대를 유년 시절로 보낸 또래들은 마크 트웨인의 소설을 읽은 추억담이 있을 것이다. 소설만 아니라 TV에서 애니메이션이나 영화로도 방영됐다. 그래서 마크 트웨인은 아동 모험 소설의 대명사였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는 사회 비판가, 아니 독설가로 더 유명하다. 특히 미국의 제국주의 대외 정책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나는 유년기의 기억 외에 그에 관한 정보가 없었기 때문에 실상을 알고 크게 놀랐다. 오히려 사회 비판가로서의 말년 행보가 그를 이해하는 핵심일지도 모르겠다.

마크 트웨인을 새롭게 발견한 것은 작가 커트 보네거트를 통해서였다.

“유머는 인생이 얼마나 끔직한 지를 한 발 물러서서 안전하게 바라보는 방법이다. 그러다 결국 마음이 지치고 뉴스가 너무 끔찍하면 유머는 효력을 잃게 된다. 마크 트웨인 같은 사람은 인생이 정말 끔찍하다고 생각했고 그 끔찍함을 농담과 웃음으로 희석시켰지만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아내와 단짝 친구와 두 딸이 죽은 후였다.” (<나라 없는 사람>, 126쪽)

커트 보네거트의 소개에 따르자면, 마크 트웨인은 노년기에 이르러 미국이란 나라와 나아가 인류에게 희망을 잃은 듯하다. 실제로 그의 책 번역본 말미에는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그가 이 책을 쓴 시기는 60세를 바라보는 시기였다. 당시 병상에 누워있던 그의 부인 올리비아는 책의 내용에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부인은 책 출간을 만류했다. 그래서 1904년 부인이 사망할 때까지 책은 출간되지 않았다. 1906년 처음 발간되긴 하였으나, 특히 성직자들의 반응이 두려워 250부만 찍어 주변 지인들만 돌려봤다고 한다. 그리고 마크 트웨인 사후 7년이 되어서야(1917년) 정식 출간되었다.” (마크 트웨인, <정말 인간은 개미보다 못 할까>(박영선 옮김, 북인 펴냄) 203쪽, 내용 요약)
 
 

선행은 자기만족에 불과

그런 마크 트웨인이 보기에 애초에 인간은 기계에 가깝다. 이 기계가 외부의 힘에 영향을 받아 사유하고, 판단하고, 행동할 뿐이다. 이때 외부의 힘은 교육과 훈련을 뜻한다. 그리고 교육도 외부에서 받은 영향의 결과물인데 그 영향의 대부분은 인간관계다(위의 책 90쪽). 즉 기질 차이만 제외하면 인간은 소속된 사회의 교육과 훈련에 의해 그 판단과 행동이 좌우된다. 여기서 인간관계는 사회적 관계로 풀어도 무방할 듯하다. 마르크스가 말한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는 구절이 연상된다.
 

마크 트웨인(1835~1910)


 
기질은 타고난 성질인데 이것만은 아무리 교육을 해보아도 없앨 수 없다고 한다. 단지 할 수 있는 것은 기질에 압력을 가해 살짝 눌러 놓을 뿐이라는 것(위의 책 103쪽)이다. 프로이트는 아인슈타인에게 보낸 서한에서, 인간의 공격 충동을 영구히 없앨 수는 없다고 한다. 그러나 조절하는 노력은 가능한데 그게 바로 (교육을 포함한) ‘문화’다.

“인간의 공격적 충동을 완전히 제거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공격적 충동을 전쟁으로 발산할 필요가 없도록 그 충동의 방향을 다른 데로 돌리려고 애쓰는 것이 고작입니다.” (…) “문화 발전은 어떤 종의 동물을 길들이는 것과 비교할 수 있고, 신체적 변화를 수반하는 게 분명합니다. (…) 문화 발전에 수반되는 ‘신체적’ 변화는 두드러지고 명백합니다. 그것은 본능이 지향하는 목표를 차츰 다른 데로 돌리고, 본능적 충동을 억제합니다.”

프로이트가 볼 때 본능은 없앨 수 없다. 문화로 방향을 조절할 뿐이다. 마크 트웨인이 볼 때 타고난 성질은 없앨 수 없다. 문화로 관리할 뿐이다. 그래서 양자 공히 인간 형성의 주요 기제로 문화의 역할을 거론하고 있다.

무엇보다 가장 격렬한 논란은 선행이 자기만족에 불과하다는 주장에서 비롯됐다. 무릇 선행이란 누구에게나 지지와 동의를 얻는 보편적 행위, 즉 타인을 배려하고 존중하고 동등하게 대우하고 요즘 식으로 말하면 ‘힐링’하는 그런 행위일 것이다. 그런데 그런 행위의 의미를 굳이 궁색하게 말하는 건 당시 미국 사회상과 관련 있을 것이다. 앞서 밝혔듯 종교계의 비난이 두려워 초판 간행수를 최소화했다는 게 단서다. 19세기 미국은 청교도 영향 하에 있었으니까, 사고방식과 행동 전반은 종교라는 이름의 굴레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주홍글씨>(1850)가 그렇고, 실화에 기반을 둔 영화 <크루서블(The Crucible)>(1998)의 어처구니없는 마녀사냥도 그렇다. 행동강령이 외부에서 주어지면 행동을 규제하는 건 당연지사고 규제의 정도 차가 있을 뿐이니까.

“오로지 타인을 위해 선의를 베풀 것을 요구한다네, 온전히 우선 의무를 위한 의무를 다할 것, 자기희생의 행위를 하라는 식의 요구를 내놓는 거야. (…) 인간의 내부에 깃든 절대 최고의 군주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네. 그리고 우리 인간들 모두는 그 앞에 끓어 엎드려서 그 절대군주에게 호소하는 것이지. 그런데 거기가 틀리지. 다른 무리들은 교묘하게 속여서 몸을 바꾸니까.” (<정말 인간은 개미보다 못할까>, 108쪽)

때문에 애써 밖에서 찾지 말고, 나를 진정 기쁘게 하는 행위를 내 스스로 결정하는 게 중요하다. 그리고 타인이 느끼는 감사함, 고마움은 부차적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중요한 건 일단 선행의 이유가 내가 만족하고 즐거워야 한다. 나아가 사회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선행에서 만족감(일종의 쾌감)을 얻을 수 있도록 교육을 통해 유도해야 한다.

“스스로를 만족시킴과 동시에, 이웃과 넓게는 사회에도 선을 뿌리는 행위가 있어야 해. 그래서 그런 행위 속에서 우선 최대의 기쁨을 발견해낸다는 경지에 오르도록 뜻을 두어야겠지.” (위의 책, 106쪽)

마크 트웨인은 인간이 선행에서 최대의 만족을 얻는 것은 일정 수준의 도야를 거쳐야만 가능하다고 보고 있다. 인간이 느끼는 기쁨이 반드시 선행에만 있지 않기 때문이다. 타인의 고통과 불행에서 쾌감을 느끼는 것도 일상다반사니까. 우리 사회가 함께 고민해야 할 지점이다.
 
 

자기만족의 전제 – 타인의 행복, 상호 존중

그런데 읽으면서 궁금한 게 하나 있었다. 선행의 원칙은 무엇이어야 할까? 어떤 행위를 해야 나도 만족할 수 있으며, 또한 타인도 행복할 수 있을까? 이타적 행위가 자기만족을 위한 자기 주도적 행위라면 내가 마음먹은 대로 행동하면 될까?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선배님의 글에서 그 실마리를 가져왔다. 다소 길지만, 의미심장한 내용이어서 인용한다.

“자공(子貢)이 공자(孔子)에게 묻는다. ‘한 마디 말로 평생토록 실천할 만한 것이 있습니까?’ 공자가 대답한다. ‘그것은 서(恕)로다! 자기가 원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 하지 않는 것이다'(其恕乎 己所不欲 勿施於人 <논어(論語)> 위령공(衛靈公) 편)

이 가르침은 이미 서(恕)라는 글자 안에 다 들어 있다. 서(恕)는 마음(心)이 같다(如)는 두 글자가 합쳐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공자는 왜 ‘자기가 원하는 것을 남에게도 하라’는 식의 긍정형이 아니라, ‘하지 말라’는 식의 부정형으로 표현했을까? 공자뿐만 아니라 성인(聖人)의 가르침 거의 모두가 부정형이다. 우선 긍정형으로 가르치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공자가 만약 ‘네가 원하는 대로 남을 대하라’고 했다면, 세상 끝장나게 돌아간다. 알다시피 우리는 그리 도덕적이지 못하다. 그렇기에 내가 원하는 것이 남에게 도움이 되는 경우는 별로 없다. 힘이 센 나쁜 사람은 힘이 약한 사람이 가진 좋은 것을 빼앗고 싶어 한다. 그런데 공자가 거기에다 ‘네가 원하는 대로 남을 대하라’고 하면 아무런 죄책감 없이 빼앗게 될 것이다. 착한 사람은 자기 것을 남을 위해 내놓고 싶을 것이다. 마침 착한 사람과 게임을 하게 되면 그만큼 또는 그 이상 돌려받겠지만, 그러나 나쁜 사람을 만나서 자기 것을 내놓으면 그것으로 거래는 끝이 난다.

반면에 부정형으로 하면 사정이 바뀐다. 누구도 자기 것을 남에게 강제로 빼앗기고 싶지 않다. 따라서 자기가 원하지 않는 대로 남을 대한다면, 남의 것을 빼앗지 않을 것이다. 착한 사람도 부정형으로 보호받을 수 있다. 나쁜 사람이 더러운 게임을 하고 싶더라도, 이 원칙을 받아들인다면 자신이 그런 피해자가 되고 싶지 않기에 나쁜 짓을 그만둘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이 부정형은 무엇보다 보복의 악순환을 방지하는 장치이기도 하다. 남이 나에게 해를 끼쳤을지라도, 내가 보복 당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면, 나는 그 사람에게 보복하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이다. 이게 바로 ‘악인에게 맞서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뺨을 치거든 왼뺨도 내줘라’는 말의 숨은 뜻이다.”
(김범춘(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철학박사), ‘철학 강의(15) 사람의 도움원리’ 중에서 인용, ☞바로 가기 다음(DAUM) 카페 ‘fridaybeer’)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 하지 않는다! 인류사에 등장한 모든 참혹한 반인륜 사건, 인권침해의 공통점은 이 가르침과 상반된 원칙이 적용된다는 것이다. 나는 내 의지와 무관하게 타인의 강요에 의해 죽고 싶지 않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친위대장교는 유대인을 가스실로 보낸다. 나는 내가 원하지 않는 시간과 장소에서, 강제로 타인의 강압에 의해 성행위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광주 인화학교 직원은 장애인 학생을 성추행한다.

결국 자기만족은 타인에게 억압이나 폭력이 아니어야 하며 타인의 행복이 전제될 때 비롯한다. 그리고 타인의 행복은 내 즐거움을 원해서 나 스스로가 선택한 행동이어야 한다. 이렇게 하면 자기 주도적인 선행은 타인의 행복을 동반할 수 있다. 결국 이 원칙은 상호 존중이라고 말 할 수 있는데, 인권침해 예방의 원리로서도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스스로 착각의 함정에 빠지지 않으려면

책 전반에서 마크 트웨인은 인간이 변변치 못한 존재임을 누차 강조한다. 허나 책을 읽고 나서는 그 일관된 냉정한 태도야말로 인간에게서 희망의 근거를 찾기 위한 역설이 아닐까하는 추측을 하게 되었다. 정녕 인간에게 환멸을 느꼈다면 그런 주제에 관한 책을 쓸 의욕조차 없었을 것이 아니겠는가. 오히려 마크 트웨인처럼 인간의 가능성에 붙어 있는 화려한 수사와 막연한 믿음을 제거해야 섣부른 희망을 품지 않을 것이다. 이 섣부른 희망은 결국 착각인데 이 착각이 매우 심각한 결과를 가져온다. 조급한 희망의 결과는 상반된 현실이다. 그런데 이 현실은 직면하기 힘들 정도로 참혹하다. 결과적으로는 절망의 과잉 상태에 빠진다.

지난 대선에서 나는 정권의 변화를 염원했다. 하지만 야당이 실력 없고 긴장감 없고, ‘허당’이라는 인식은 이미 지난 총선과정에서 확인됐고, 그 불안의 전조는 민선 5기 지방선거의 승리를 해석하는 당시 야당지도부의 태도에서 조짐이 보였다(기존 여당이 싫어서 반대급부로 찍어준 것뿐인데 자기들이 잘해서 이긴 거라고 자화자찬 하다니!). 하지만 이 정권 하에서 사는 게 하도 고통이라 이번만큼은 무조건 야당 단일 후보에 ‘올 인’했다. 그 후 회자되는 단어는 ‘멘붕’이다. 대선 이후 한 달 넘게 미디어의 정치면을 외면하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나는 뉴스를 다시 보는데 2주일 걸렸다).

어떻게 보면 멘붕은 좀 더 냉정하지 못한 나 스스로가 선택한 착각의 결과일 것이다. 미래가 불투명해서 조급히 선택하는 미완성의 희망은 후폭풍이 거세다. 그럴 바에야, 냉정을 유지하는 것, 그 버티는 힘이 오히려 희망의 싹일지 모른다. 그리고 그 버팀의 시작은 나와 타자가 동시에 행복해지도록, 거기에서 쾌감을 얻을 수 있도록 훈련하고 실천하는 것이다. 그리고 집단 프로그램으로 제안해야 한다. 상호존중과 연대 그리고 냉정! 마크 트웨인의 독설에서 얻은 교훈이다.

‘당파성’이 ‘객관성’에 앞선다.[철학을 다시 쓴다]-④

‘당파성’이 ‘객관성’에 앞선다.[철학을다시 쓴다]-④

 

윤구병(도서출판 보리 대표)

 

* 이 글은 보리출판사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 ‘있는 것’보다 ‘있을 것’이, ‘없는 것’보다 ‘없을 것’이 더 앞선다. 따라서 ‘당파성’이 ‘객관성’에 앞선다.

 
다시 한 번 제 신상에 변화가 있었습니다. 저에게는 꽤 큰 변화이기 때문에, 그리고 이 삶의 변화가 제 생각이나 느낌, 그리고 그것을 드러내는 말투의 변화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이런 글에 맞지 않는 사사로운 이야기일지 모른다는 느낌이 없지 않지만, 보고를 드리겠습니다.

지난번 말씀드렸던 국립 대학 대학원의 교환 교수 노릇을 끝으로 저는 강단을 떠났습니다. 제가 몸담고 있던 학교에 사표를 내고 서해안에 있는 조그마한 시골 동네 산자락에 묵어 가는 밭을 사서 농사를 짓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거의 한 해 반이 흘렀습니다. 늦깎이 농사꾼으로 처음부터 농사일을 다시 배우다 보니, 해뜨면 일어나 들에 나가고 해지면 개울물에서 손을 씻고 들어와 저녁을 먹자마자 그대로 쓰러져 자는 날의 연속이었지요. 그러다 보니 이제 돌이켜보면 내가 강의실에서 학생들과 무슨 이야기를 어떻게 나누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합니다. 애써 그 때 상황을 되살려 보려 합니다만 제 단순한 삶이 기억까지도 단순화시켜 버렸기 때문에 도대체 옛 기억의 복원이 가능할 것 같지 않습니다. 실제 상황과 많이 다르더라도 그 동안 정신이 흐려져 꿈과 현실, 실제와 가상,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엉클어진 실타래를 제대로 추스르지 못하는 탓이라 여기고 너그럽게 보아 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학생들과 이야기하면서 제가 하는 말에 두서가 없다는 것을 의식했습니다. 그래서 칠판에 다음과 같은 몇 개의 메마른 문장을 적어 내려갔습니다. 본디 뜻은 제 생각을 정리하고 학생들에게 제 머릿속에서 뒤엉켜 있는 검증되지 않은 이론들을 명확한 형태로 전달하려는 데 있었습니다만 그 작업이 성공했는지 실패했는지도 지금은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이제 제가 그 때 적어 내려갔던 문장을 다시 적어 보지요.

1. 있었던 것이 있다.
2. 있었던 것이 없다.
3. 없었던 것이 있다.
4. 없었던 것이 없다.

“자, 보다시피 여기 적힌 문장들은 존재론의 차원에서 과거와 현재가 관계 맺는 네 가지 방식을 문장의 형태로 드러낸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진술을 존재 판단이라고도 합니다. 이 판단들은 모두 사실 판단의 모습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 문장들 가운데 1과 4는 과거에서 현재로 이어지는 있음의, 또 없음의 지속을 드러냅니다. 그리고 2와 3은 변화를 드러냅니다. 2와 3에서 우리는 ‘있음에서 없음으로 바뀜’(있었던 것이 없다.)과 ‘없음에서 있음으로 바뀜’을 상식의 기준에서 확인할 수 있지만 그러한 변화의 구체 내용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이를테면 있었던 것이 없다고 할 때 이 변화는 무엇인가 빠져 있다는 결핍을 나타낼 수도 있고, 군더더기가 없어졌다는 뜻에서 평형을 나타낼 수도 있고, 이러한 관계의 변화가 낳을 수 있는 여러 차원(현실, 심리, 판단……)의 달라진 사태를 확인할 수 있겠지요. 없었던 것이 있다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시 말해서 1, 2, 3, 4의 문장은 모두 객관화한 정보만을 제공하고 있을 뿐 그래서 어떻다, 그러니 어떻게 해야 한다, 그러한 지속이나 변화가 바람직하다, 바람직하지 않다 들에 대한 판단의 근거는 제공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지속이나 변화가 미래의 영역, 곧 있을 것과 없을 것과 관계를 맺으면 사실 판단은 가치 판단으로 바뀌는 계기를 맞습니다.”
제가 여기까지 이야기하자 학생 하나가 제 말을 가로막더군요.

“선생님, 있었던 것이 없다나 없었던 것이 있다는 판단이 그 안에 어떤 가치 판단도 내포하고 있지 않다고 말씀하셨는데,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은데요. 실제로 오늘 저는 있었던 것이 없어서 기분이 몹시 언짢았던 경험이 있었습니다. 강의 발표 요지를 분명히 책가방 안에 넣고 왔는데 찾아보니 없더라고요. ‘기분이 안 좋다.’ 이것도 가치 판단이 아닙니까?”

“좋은 질문입니다. 없었던 것이 있다는 판단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겠지요. 이를테면 굶주린 사람에게 어떤 계기로 밥이 생겼다 할 때 그 사람에게 없었던 것이 있게 된 계기는 결핍의 충족이라는 점에서 ‘좋다’는 판단을 내리게 하겠지요. 반대로 갑자기 없었던 위장 장애가 생겨 배가 몹시 아프다면 ‘나쁘다’는 판단을 내릴 겁니다. 학교 교문이 자유롭게 열려 있다가 어느 날 전투 경찰들이 교문을 닫아걸고 기관총을 걸어 놓았다면 두렵다는 느낌을 불러일으키겠고요.

그러나 이러한 모든 가치 판단은 이제부터 말하려는 미래의 영역, 곧 있을 것과 없을 것의 관계 속에서 생겨납니다. 우리는 과거의 존재를 있었던 것으로, 현재의 존재를 있는 것으로, 미래의 존재를 있을 것으로 나타냅니다. 또 과거의 비존재를 없었던 것으로, 현재의 비존재를 없는 것으로, 미래의 비존재를 없을 것으로 나타냅니다.

그런데 있는 것, 없는 것, 있었던 것, 없었던 것과는 달리 있을 것과 없을 것이라는 말에는 크게 보아 두 가지 뜻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는 단순한 예측이나 추측이고, 다른 하나는 마땅히 그러해야 함, 곧 당위〔sollen〕입니다.

‘여기 있는 칠판은 내일도 이 자리에 있을 것이다.’ ‘여기 없는 분필은 내일도 이 자리에 없을 것이다.’ 또는 ‘있을 것으로 여긴 모래무지는 없고, 없을 것으로 여긴 붕어는 많이 있다.’ 같은 말에서 있을 것과 없을 것은 추측이나 단순한 예상의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있을 것이 있고 없을 것이 없는 세상은 좋은 세상이요, 있을 것이 없거나 없을 것이 있는 세상은 나쁜 세상이다.’와 같은 말에서 있을 것과 없을 것은 단순한 예측이나 추측의 뜻을 지니고 있다고 보기 힘듭니다. 여기에서 있을 것이라는 말에는 있어야 할 것이라는 뜻이, 또 없을 것이라는 말에는 없어야 할 것이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면 왜 있을 것, 없을 것이라는 말에 이런 이중의 뜻이 담겨 있을까요?

파르메니데스에서 아우구스티누스로 이어지는 서양 존재론의 전통에 따르면 미래는 ‘아직 없는 것’입니다. 앞에서 네 개의 문장을 보기로 들면서 ‘있었던 것이 있다.’나 ‘없었던 것이 없다.’는 있음의 지속 또는 없음의 지속을 나타내고, ‘있었던 것이 없다.’나 ‘없었던 것이 있다.’는 말은 있음과 없음의 관계의 변화를 나타낸다고 한 적이 있지요?
 

보티첼리의 ‘아우구스티누스’. [중앙포토] http://p.joongang.co.kr/kr/news.do?_method=webcontent&newsid=20110624N0026#


 
과거와 현재의 관계에서 우리는 이런저런 원인 또는 이런저런 원인과 조건에서 이런저런 지속이나 변화가 결과했다고 말합니다. 말하자면 과거와 현재의 관계에서 필연의 법칙을 유추해 내는 거지요. 그런데 그 필연의 법칙은 엄밀히 말하자면 의식의 법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속의 측면에서는 필연의 법칙을 끌어 낼 수 있을지 모르나 변화의 측면에서는 필연의 법칙이 안 나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있었던 것이 없게 되거나, 없었던 것이 있게 되는 이 극단의 변화에 어떤 필연성이 있습니까? 필연성이 없어서 필연의 법칙을 끌어 낼 수 없으니까 우리의 의식은 자꾸 ‘없는 것은 없다.’ ‘있는 것이 없는 것으로 바뀌거나 없는 것이 있는 것으로 바뀌는 일은 일어날 수 없고, 생각할 수도 없다.’ ‘모든 관계는 있는 것과 있는 것의 상관관계이고, 이 관계가 어느 측면에서는 지속으로, 어느 측면에서는 변화로 드러나는 것뿐이다.’ 하는 식으로 외곬으로 흐르게 됩니다.

그러나 앞에서 귀에 못이 박히도록 이야기했듯이 있는 것은 하나로 있지 여럿으로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있는 것과 있는 것의 상관관계라는 말은 일상의 차원에서는 편의에 따라 쓰이지만 엄밀하게 따지면 어불성설이요 모순입니다. 마치 야바위꾼이 품속에 무엇인가 감추어 놓고 모르는 사람을 속이려 들듯이,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있는 것과 있는 것 사이에는 없는 것이 있어서 이 있는 것과 저 있는 것을 갈라놓는데, 없는 것을 있다고 하면 논리에 모순이 생기므로 없는 것은 없다고 하고 논의를 진행시키자.’고 강변을 하는 것입니다.

이 야바위 노름이 서양의 철학과 과학에서 어찌나 오랫동안 사람들을 세뇌시켜 왔던지, 지금 대부분의 철학자와 과학자들이 의식하거나 의식하지 못하거나 이 엉터리없는 일면적인 의식의 법칙을 자연의 불변하는 법칙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형편입니다.”

제가 이렇게 말하자 학생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습니다. 많은 학생들의 표정에 불만의 빛이 역력했습니다. 손을 드는 많은 학생 가운데 한 학생에게 이야기하라고 했더니 이렇게 반박을 하더군요.

“지나친 매도인 것 같은데요. 만일에 선생님 말씀처럼 있는 것이 하나로 있고, 있는 것과 있는 것 사이의 관계 법칙이 야바위 노름에 지나지 않는다면 그 동안 물질의 최소 단위를 찾으려는 과정에서 밝혀진 물질세계의 여러 법칙들, 또 생명체의 최소 단위를 찾으려는 시도에서 파생된 여러 과학 기술의 축적과 그것이 인류 사회에 기여한 공로는 어떻게 해석해야 하지요? 도대체 시공 연속체인 이 우주 안에서 단위인 여러 하나를 찾으려는 시도가 성공하지 못한다면 철학이고 과학이고 다 사상누각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더 나아가서 우리의 삶의 틀도 다 무너지지나 않을까요?”

다른 학생이 일어나서 또 이렇게 말하더군요.

“선생님 말씀을 들으면 이 우주 안에서 양〔quantity〕의 최소 단위나 질〔quality〕의 최종 단위를 찾으려는 시도는 모두 부질없는 노력인 것같이 여겨지는데요, 그리고 그 최소 단위나 최종 단위가 확정되지 않으면 무엇을 무엇이라고 규정하거나 무엇이 얼마라고 측정하는 일이 불가능한데요. 질과 양, 척도 뭐 이런 것에 대한 규정이 없이 어떻게 어떤 현상에 대한 합리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나요?”

“잠깐, 내가 마지막에 덧붙인 말이 성급했다는 건 인정합니다. 그리고 학생들의 질문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도 알고요. 그러나 그 문제는 나중에 이야기하기로 하고 이미 꺼낸 말이니까 먼저 사실 판단에서 가치 판단으로 전환하는 데 아직 없는 것으로 규정된 미래가 어떤 구실을 하느냐에 대한 설명을 마저 하기로 합시다.

파르메니데스의 규정을 받아들이면 있을 것도 아직 없는 것이요, 없을 것도 아직 없는 것입니다. 있는 것(또는 없는 것)으로 규정되는 현재와 관계에서 아직 없는 것은 단순히 있는 것(없는 것)의 지속으로 나타낼 수도 있고 이 경우에는 지금 있는 것이 앞으로도 있을 것이라는 예측을 낳겠지요. 또는 지금 없는 것이 앞으로도 없을 것이라는 예측을 낳을 겁니다. 있는 것이 없는 것으로 바뀌는 변화(또는 없는 것이 있는 것으로 바뀌는 변화)로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있음과 없음을 저마다 독립된 항으로 놓고 실체화시키는 관점에서 보면 이 변화는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우리의 의식은 이러한 변화를 모순으로 보아 있을 수 없는 일로 못 박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