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겔 변증법 반성 운동11-개체와 심연으로서 본질[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변증법 반성 운동11-개체와 심연으로서 본질
1)
반성 운동은 현존과 본질 사이의 관계다. 이런 관계의 축은 수직적이다. 반면 본질 규정에서 다루어지는 동일성과 구별, 상이성과 대립, 모순은 개체적 현존들 사이의 관계를 다룬다. 이 관계의 축은 수평적이다.
개체적 현존과 개체적 현존 사이의 관계를 매개하는 것이 본질이다. 개체적 현존을 그 자체로 보면, 유기적인 통일체이고 자기 완결적이다. 그러므로 마치 모나드처럼 다른 개체적 현존으로부터 독립적이다. 그러므로 이 개체적 현존 사이는 서로 건너갈 수 없는 심연의 바다로 보인다.
그러나 이런 개체적 현존은 사실 본질의 구체적 실현태이며 본질을 통해 다른 개체적 현존과 연관된다. 이 본질이 열어 놓는 공간에서 하나의 현존이 다른 현존과 관계한다. 이 본질을 통해 하나의 개체적 현존은 다른 개체적 현존으로 지속한다.
본질이 현존에 대해 어떤 관계에 있는가, 즉 그 운동이 외적 반성 운동인가 아니면 내적 또는 규정하는 반성 운동인가에 따라 개체적 현존의 관계도 변화한다. 그 관계는 외적 반성 운동에서 개체적 현존의 관계는 상이성이다. 반면 규정하는 반성에서 개체적 현존의 관계는 대립, 모순이다.
2)
반성 운동을 다룰 때 추상적인 차원에서 정립하는 반성과 전제하는 반성이 있어서 현존과 본질 사이의 운동하는 양 측면을 이루었다. 마찬가지로 개체적 현존을 개별적으로 보면, 그 내부에서 두 측면이 존재한다. 즉 동일성과 구별이다. 즉 동일성과 구별은 아직 개체적 현존 사이를 다루지 않고 이 서로 관계하는 개체적 현존 각각에 내재하는 두 측면이 된다.
그 가운데 본질의 운동은 자기 부정성을 통해 매개된 자기 관계이다. 이런 자기 부정성이 자기 관계하는 측면을 일컬어 동일성이라 한다. 이 동일성은 곧 자기 동일성이며 개체적 현존이 지속해서 현존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마치 모나드처럼 창이 없으며 타자와의 사이에 심연이 놓여 있다.
“본질[본질의 현존]*은 절대적 부정성 속에서 자기 자신과 동일하며 이런 절대적 부정성 속에서 타자 존재와 타자에 대한 관계가 단적으로 자기 자신에서 순수한 자기 동일성 속으로 사라지고 만다. 그러므로 본질은 자기와 단순한 동일성이다.”(헤겔 논리학, GW11, 260)
주*) 여기서 본질이란 현존과 구별되는 본질을 말하지 않는다. 여기서 본질은 현존하는 것으로서 본질을 말한다.
그러나 이런 동일성은 부정성의 부정을 매개로 한 자기 관계이고 이 자기 부정성이 곧 구별이니, 이 동일성은 구별을 자신의 한 계기로 포함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이 동일성은 추상적인 동일성과 다른 것이다.
추상적 동일성은 서로 다른 현존을 비교하여 공통된 것을 의미하므로 이 공통성은 현존들이 서로 구별되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러므로 이 동일성은 타자 즉 구별을 부정함으로써 규정되는 동일성이다.
반면, 생물체의 개체가 끊임없는 신진대사를 통해 자기를 유지하는 것이듯, 이 개체적 현존에서 나타나는 동일성은 이미 내적으로 자기 부정성 즉 구별을 포함하고 있으니, 그 자신은 전체의 한 계기이면서 동시에 전체가 된다.
“동일성은 자기 내로의 반성[본질로의 반성]이어서 이는 내적인 반발인 한[현존의 정립]에서만 가능하다. 이런 반발은 자기 내로의 반성으로서 반발이며 직접 자기 내로 자기를 환수하는 반발이다. 따라서 동일성은 자기와 동일한 구별인 한에서 동일성이다. 그러나 구별은 동일성이 아니라 절대적인 비동일성이므로 자기 자신과 동일할 뿐이다.”(헤겔 논리학, GW11, 262)
3)
동일성의 이면인 구별의 측면도 마찬가지다. 여기서 구별은 추상적인 구별과 다르다. 추상적 구별이 비교를 통해 나온 구별이며 그것은 공통성이라는 추상적 동일성에 대립하는 것이다.
그러나 개체적 현존에서 나타나는 구별은 자기 자신과의 구별이니, 헤겔은 이를 ‘절대적 구별’이라 한다. 이런 자기 구별은 동시에 자기 관계하는 것이며 그런 가운데 자기 동일성을 획득하니, 절대적 구별은 이런 자기 동일성을 자신의 한 계기로 내포하고 있는 구별이다. 이 구별은 자기의 한 계기이자 동시에 전체이다.
“구별은 본래 자기 관계하는 구별이다. 그러므로 구별은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것이며 타자로부터 구별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자기 자신으로부터 구별하는 것이다. 구별은 구별 자체가 아니며 자기의 타자이다. 그러나 구별로부터 구별된 것은 동일성이다. 그러므로 구별은 구별 자체인 동시에 동일성이다.”
“이 구별은 그 자체이며 대자적인 구별이니, 절대적 구별이며 본질의 구별이다. 그 자체이며 대자적인 구별로서 이 구별은 외적인 것을 통해 일어나는 구별이 아니며 구별이 자기에 관계하므로 단순한 것으로 되는 구별이다.”(헤겔 논리학, GW11, 266)
존재론의 영역에서 개별 현존[즉 어떤 것의 술어적 규정]은 타자로 직접 그 자신에서 이행한다. 빨간색은 어떤 것에 우연적이므로 이 어떤 것[주어]은 언제라도 파란색이라는 타자로 넘어갈 수 있다.
그러나 본질론에서 개체적 현존이 지닌 구별은 생물적 개체에서 보듯이 구별된 것이면서 동시에 구별되지 않은 것이다. 어제의 나는 오늘의 나와 분명 다른 나이지만, 동시에 어제의 나는 오늘의 나와 같은 나이다. 그런 점에서 이 구별은 필연적이니, 헤겔은 여기서 타자는 그 자체로 대자적인 타자라고 한다.
“이 구별은 반성의 구별이며 현존[존재론 영역에서]의 타자가 아니다. 현존과 그 타자 존재는 서로 밖에 존재하는 것으로서 정립된다. 서로 대립적으로 규정된 현존 가운데 각각은 독자적으로 직접적인 현존을 갖는다. 그에 반해서 본질의 타자는 그 자체로 대자적인 타자이지 타자 밖에서 발견되는 타자로서 타자가 아니며 또한 단순한 규정성 그 자체로서 타자가 아니다.”(헤겔 논리학, GW11, 266)
4)
개체적 동일성은 자신의 타자인 구별을 지양하면서 자기 동일성에 이르지만, 이 자기 동일성은 이미 자기를 부정하는 것이니, 곧 자신의 타자인 구별로 넘어가는 것이다.
개체는 자기의 타자인 구별로 넘어가는 측면을 헤겔은 자기 반발이라 하는데, 이렇게 자기 반발은 다시 구별에 이르지만, 이 구별은 다시 지양되니, 개체는 다시 자기 내로 반성하여 자기 관계 즉 동일성에 이른다.
개체적 현존은 동일성으로서 다른 개체적 현존과 심연을 통해 떨어져 있으나 이미 자기 부정성을 통해 끊임없이 자기의 다른 개체적 현존으로 이행하는 것이다. 개체적 현존과 다른 개체적 현존은 심연을 통해 연결된 본질적인 동일성이다.
심연을 통해 단절되고 동시에 연결되는 이유는 개체적 현존을 매개하는 것이 심층 속에 존재하는 본질이기 때문이다. 이런 개체적 현존이 내부에서 겪은 운동은 곧 현존과 본질 사이의 운동이며 이 운동이 표면에 비추어지면, 동일성과 구별의 운동으로 나타난다.
개체적 현존이 본질로 자기 내 반성하는 것은 개체가 자기를 구별하는 것으로 나타나며 본질이 다시 자기를 개체적 현존으로 정립하는 것은 자기 관계하는 동일성으로 나타난다. 수직적 운동이 매개되어서 수평적 운동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5)
동일성과 구별의 통일은 생물체의 종적 개체에서만 성립하는 것이다. 이 점에 관해서 헤겔은 분명하게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이상의 사실[구별의 절대성]이 반성의 본질적 본성이며 그리고 모든 활동[Taetigkeit]과 자기 운동[Selbstbewegug]의 특정한 원초적 근거[bestimmte Urgrund]로서 고찰될 수 있다.”(헤겔 논리학, GW11, 266)
윗글에서 ‘자기 운동’이라는 말이 주목된다. 헤겔에서 스스로 운동하는 것은 바로 생물체의 종적 본질밖에 없다. 이 스스로 운동하는 본질이 곧 개체적 현존과 개체적 현존의 심연 속에 잠복하면서 개체적 현존을 지속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추상적인 동일성과 추상적 구별과 달리 공허한 동어반복으로서 사유 법칙은 아니다. 그것은 적어도 종적 개체에서는 일반적으로 적용되는 필연적 법칙이니, 그것은 존재의 영역에서 나타나는 이행의 법칙과 마찬가지로 자연적 법칙이고 구체적인 법칙이다.
개체적 현존이 이처럼 두 측면 즉 동일성과 구별이라는 두 측면을 가지며 양자의 통일이라는 점에서 이제 이런 개체적 현존과 다른 개체적 현존 사이의 관계가 출현한다. 처음 나타나는 관계가 곧 상이성이다.
6)
자주 헤겔은 동일성의 철학자로 간주한다. 특히 현대에 와서 아도르노나 들뢰즈 등이 헤겔을 그렇게 해석한다. 그런데 헤겔 자신은 정신현상학에서 셸링의 철학을 동일성의 철학이라고 비난했다. 그는 셸링이 모든 소는 밤에 까맣게 보인다고 주장한다면서 비난했다.
이런 비판은 셸링의 직접적인 일반성 또는 무차별적 존재를 비판하는 것인데, 이런 무차별적 존재가 아도르노나 들뢰즈 철학의 기초라는 점에서 아이러니하다. 서로서로 동일성의 철학으로 비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위에서 설명했듯이 헤겔에서 동일성은 자기 부정성의 자기 관계이며 그런 점에서 이미 구별을 내포하는 동일성이다. 이 동일성은 생물체의 개체적 현존이 지닌 동일성이며 이 개체적 현존은 본질을 매개로 해서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동일성이다. 그런 점에서 헤겔을 동일성의 철학으로 규정하기보다는 자기 부정성의 철학으로 규정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된다.
자기 부정성이 곧 절대적 부정성이며, 이것이 곧 차이이니, 헤겔은 차이의 철학자이며 이 절대적 부정성이 곧 본질이 자기를 재생산하는 생성의 운동이니 헤겔은 또한 생성의 철학자이다.
헤겔 변증법 반성 운동10-본질 규정과 동일률[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변증법 반성 운동10-본질 규정과 동일률
1)
헤겔 논리학 본질론 1편 2장은 본질 규정을 다룬다. 헤겔은 이 본질 규정을 반성 규정이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여기에 속하는 규정이 동일성과 구별, 상이성과 대립 그리고 모순이라는 규정이다. 이 규정은 오른쪽과 왼쪽, 아버지와 아들 등과 같이 반성 규정이지만, 오직 본질적인 것 즉 본질의 현존에만 적용되는 것이므로 본질 규정이다. 그러므로 정확하게 말하자면 본질적 반성 규정이라 해야 할 것이다.
본질 규정을 본격적으로 다루기 전에 헤겔은 바로 주석을 달아서 이 본질적 반성 규정[본질 규정]이 존재론에서 다루었던 규정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설명한다. 그는 이 문제를 본질적 반성 규정이 지닌 독특한 특징과 관련하여 풀어나간다. 그 문제란 곧 본질적 반성 규정은 사유의 일반 법칙으로서 성립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유법칙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바로 동일률이나 모순률 그리고 배중률과 같은 것인데, 여기서 다루어지는 것이 동일성, 구별, 모순 등과 같은 반성 규정이다. 왜 질적이거나 양적인 다른 규정 즉 존재론에 속하는 규정들은 사유법칙으로 되지 않지만, 반성 규정은 사유의 법칙으로 올라설 수 있는가?
이 동일률이나 모순률은 흔히 사유법칙으로서 동어반복을 표현하는 것이니 필연적인 추론의 법칙이기는 하지만, 세계의 현실을 파악하는 범주로서는 무의미한 것이라 보는데, 헤겔은 이 사유법칙을 어떤 구체적인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파악하는 것일까?
2)
존재론에 속하는 질적인 규정이나 양적인 규정은 판단의 술어에 해당한다. 판단의 술어는 한편으로는 주어에 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는 독립적인 것이어서 여러 가지 것들에 공통적으로 적용된다. 이렇게 독립적이더라도 그것은 항상 타자와의 관계 속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판단의 술어인 질적 규정이나 양적 규정에 관해서는 일반화된 법칙이 적용될 수 없다. 판단에서 주어와 술어의 관계는 두 독립적인 것의 만남이니, 이는 항상 우연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어떤 술어는 그 사물에 우연적이며 경험적인 명제이다. 다시 말하자면 대상이 바뀌면 술어는 다른 술어로 바뀌게 마련이다. 이를 헤겔적으로 표현하자면 즉 이런 술어는 그 자체에서 자기를 지양하는 것이며 “본질적으로 대립된 것으로 이행하는” 것이다.
“존재의 영역에서 어떤 규정성은 본질적으로 대립된 것으로 이행한다. 어떤 하나의 규정성을 부정하는 규정성은 그 규정성만큼이나 필연적이다. 모든 규정성은 직접적인 규정성인 한에서 그것에 대립하는 다른 규정성이 직접 존재한다.”(헤겔, 논리학, GW11, 259)
그러므로 이런 존재론의 영역에서 어떤 하나의 술어가 모든 사물에 적용되거나 영원히 존재할 수는 없는 것이므로, 이런 술어에 관해서는 일반화된 법칙이 적용될 수 없다. 이런 주장은 “직접적 진리이거나 반박할 수 없는 사유 명제라는 성격이 더는 귀속될 수 없는”(헤겔, 논리학, GW11, 259) 주장이다. 예를 들어 ‘모든 존재자가 빨간색이라’거나 ‘모든 금은 원자가 32이다’는 판단은 성립할 수 없다.
그러나 동일성과 구별과 같은 반성 규정은 이런 존재론적 규정 즉 술어와는 구별된다. ‘어떤 것이 빨간색이다’ ‘어떤 것의 크기는 3미터다’라는 판단은 말이 되지만, ‘빨간색은 동일하다’라든가, ‘32 그램은 동일하다’는 명제는 무언가 부족하다.
문장에서 반성 규정이 술어로 부가되려면 적어도 비교되는 두 개의 무엇인가가 있어야 한다. 두 개의 개별자가 비교될 수도 있고 두 개의 술어가 비교될 수도 있다. 즉 두 물방울의 본질이 동일하거나 현존이 동일하든가 두 색깔이나 두 량이 동일하다. 동일성과 구별이라는 단순한 반성 규정은 그 비교 대상이 무엇이든 상관없다.
그런데 헤겔은 문장에서 명제와 판단을 구분한다. 문장은 주어와 술어로 이루어지는데, 명제는 술어가 개별적인 것이다. 반면 판단에서 술어는 일반적인 것이다. (헤겔은 명제와 판단의 구별을 나중에 논리학 개념론 판단론에서 서술한다. 여기서는 일단 헤겔에서는 그렇다고 말하면서 지나가기로 하자)
그러므로 어떤 주어가 반성 규정을 술어로 할 때 헤겔은 이를 판단으로 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여기서 술어는 일반성을 지니지 못하고 자립적인 것일 수 없기 때문이다. 반성 규정인 ‘동일하다’는 사물 자체가 지닌 성질도 분량도 아니니, 사물 자체에 속하지 않는다. 그것은 비교하는 작용에서 나오는 것이다. 이런 비교에서 나오는 반성 규정은 비교되는 대상에 따라 변화하므로 비교 대상에 개별적으로 속하는 것이며, 그러기에 명제다.
“판단은 내용을 일반적 규정성인 술어 속으로 옮겨놓는다. 그 결과 일반적 규정성은 독자적으로 존재하며 단순한 계사로서 그 관계와 구별된다…. 그에 반해서 반성 규정은 정립된 것이 자기 내로 반성된 것이니, 명제 형식에 가깝다.”(헤겔, 논리학, GW11, 259)
여기서 정립된 것은 곧 술어를 말한다. 이것이 자기 내로 반성된 것이라는 것은 곧 그 현존에 고유한 것이라는 뜻이다. 여기서는 술어가 주어에 고유하니, 이는 판단이 아니라 명제가 된다.
그런데 여기서 의문을 품을 수 있을 것이다. X 대신 Y나 Z를 주어로 삼으면 ‘Y는 A와 동일하다’라든가 ‘Z는 A와 동일하다’와 같은 문장이 나온다, ‘X는 A와 동일하다’라는 판단에서 ‘A와 동일하다’를 일반적 자립적 술어로 볼 수 있을까? 그러나 ‘A와 동일하다’는 술어와 ‘동일하다’는 술어는 다른 의미를 지닌다. 지금 논의되는 것은 ‘동일하다’는 술어이지 ‘A와 동일하다’라는 술어는 아니다. ‘A와 동일하다’가 아니라 ‘동일하다’라는 술어를 가지고 볼 때, 이 후자는 술어는 일반성과 자립성을 지니지 못한다.
3)
반성 규정 자체만 가지고 보면 서로 다른 것들의 비교에서 나오니, 필연적인 사유법칙이 될 수 없다. 어떤 것은 다른 것의 오른쪽에 있지만, 또 다른 것의 왼쪽에 있다. 그렇다면 동일률이나 모순률과 같은 사유법칙은 어떻게 성립하는 것일까?
그런데 여기 본질론에서 헤겔이 다루는 반성 규정은 이런 개별자나 질적, 양적 규정 등의 동일성과 구별이 아니다. 여기서 헤겔이 다루는 것은 특히 특정한 반성 규정인데 그것은 곧 본질이 나타난 현존 즉 개체에서의 반성 규정이다. 그러므로 헤겔은 여기서 다루는 반성 규정 즉 동일성과 구별을 본질 규정[Wesenheit]*이라 한 것이다.
주*) Wesenheit는 일상적으로 본성을 의미하는데, 사물의 본질이라고 할 때 Wesen과 구별해야 한다. 그러면 이 Wesenheit는 마치 존재론에서 개별자에 관해 적용되는 질적, 양적 규정성「Bestimmtheit]이 다루어지듯이 본질에 관해 적용되는 규정성이라는 의미로 이해된다.
그런데 헤겔 논리학에서 이데아와 같은 초월적인 본질이 있고 그것이 질료 속에서 현존으로 실현되는 것은 아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현존은 자기를 재생산한다. 본질이란 이런 재생산의 과정을 통해서 출현할 뿐이다.
현존은 마치 생물체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개체와 같다. 이런 개체들은 이전의 개체 내의 본질이 자기를 새로운 현존으로 재생산한 것이다. 본질은 이 과정에 감추어져 있고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곧 개체적 현존일 뿐이다.
생명체에서 개체에서 또 하나의 개체가 출현하는 것은 시간상 단절을 통해 이루어지지만, 사실 개체 자체가 끝없는 자기 재생산을 통해서만 자기를 유지하는 존재일 뿐이니 여기서는 개체와 개체 사이에는 시간상의 단절도 없으며 우리가 보기에 하나의 개체가 지속하는 것처럼 보이게 된다. 헤겔이 개체라고 한다면, 그것은 단순히 불가분적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그것은 유기적으로 체계화된 것이므로, 자기를 지속적으로 재생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존재론에서 술어가 적용되는 주어는 개별자「Einzelne]이지 개체[Individualitaet]는 아니다. 반면 본질론에서 다루어지는 주어는 항상 개체적 현존이다. 이런 개체적 현존 또는 본질적 현존에 대해 적용되는 술어가 본질 규정이다.
4)
이처럼 본질론에서 다루는 동일성 등 반성 규정은 이와 같은 개체의 술어가 되는데, 여기서 ‘A[어떤 개체]가 동일하다’라는 문장은 기이하게 보인다. 왜냐하면, 동일하다라는 반성 규정은 항상 두 개의 비교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의 개체가 동일하다는 문장은 따라서 비문법적인 문장일 뿐이다.
그런데도 우리가 자주 ‘A는 동일하다’라고 말한다면, 사실 이것은 생략된 표현이다. 즉 이 표현은 정확하게 하자면 ‘A는 자신과 동일하다’라든가 ‘A는 A와 동일하다’로 표현되어야 마땅하다.
그런데 ‘A가 A와 동일하다’는 것은 사유법칙으로서 동일률을 표현하는 것으로 이는 일반적으로 사유의 필연적 법칙으로 간주하고 있다.
물론, 사유법칙으로서 동일률은 대체로 ‘A는 A이다’라고 표현한다. 이런 표현을 하나의 판단으로 보면, ‘A이다‘는 술어화되면서, 마치 빨간색이나 32그램과 같은 A의 존재론적 규정이 된다. 그러나 동일성과 같은 술어는 사물의 존재론적 규정이 될 수 없다. 그러므로 이런 술어적인 표현은 동일성과 같은 반성 규정을 잘못 표현한 문장이다.
이런 표현이 의미가 있으려면 일종의 동어반복적 추론의 표현으로 파악해야 한다. 즉 ‘A이면 A이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동어반복적 표현은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못하는 문장이다.
또한, 동일률은 지시의 동일성을 표현하는 문장으로 오해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샛별은 저녘별이다’와 같은 문장이다. 하지만 이런 문장은 의미의 동일성을 다루는 하나의 반성 명제이어서 예를 들어 색깔의 동일성 문장과 같이 경험적으로 확인되는 명제이지, 사유법칙으로서 동일률을 표현한다고 볼 수 없다.
5)
형식논리학에서 사유법칙으로서 동일률은 동어반복을 표현하는 것으로 경험과는 무관하게 사유의 규칙[추론의 법칙: A이면 A이다]을 표현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헤겔은 이 동일률 법칙은 단순한 사유법칙이 아니라 본질의 반성 규정을 의미하는 것으로 본다.
여기서 비교되는 두 대상은 본질의 구현체로서 두 개체적 현존이다. 두 개체는 모두 자기 자신이니 여기서 비교 대상은 곧 자기 자신이다.
본질은 여기서 감추어져 있으므로 단순히 두 개체적 현존이 비교된다. 그 개체적 현존은 자기 내에서 유기적인 통일성을 가지고 있으니 자기 밖에 있는 다른 현존과는 무관하다. 두 현존은 마치 심연을 통해 분리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두 현존은 본질의 구현체이다. 물론 이 본질은 감추어져 은폐되어 있고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다만 두 개체적 현존일 뿐이다. 그러므로 두 개체적 현존 즉 ‘A는 A이다’라는 명제는 유의미한 것이며 본질의 동일성을 표현하는 명제이다.
모든 개체는 자기 동일적인 것이다. 이것은 개체가 개체인 한에서는 필연적 원리이다. 도대체 개체가 자기 동일적이지 않으면, 이들은 본질의 구현체라고 할 수 없으며 그 때문에 개체라고 말할 수도 없다.
“반성 규정은 사실 자기 자신과 동일하며 따라서 타자에 관계하지 않고 대립 없이 존재한다는 형식을 갖는다.”(헤겔, 논리학, GW11, 260)
6)
이제 헤겔은 동일률의 법칙을 개체적 현존에 관한 한 필연적인 명제로 본다. 그러므로 그것은 법칙이지만, 이 동일률의 법칙은 단순한 동어반복적 사유의 법칙도 아니고 모든 개별자에 해당하는 일반적인 법칙도 아니다. 이 동일률의 법칙은 개체 즉 생물적 개체에서만 일반적으로 성립하는 법칙이다.
반성 규정은 모든 개체적 현존에 관해서는 필연적으로 성립한다. 개체적 현존은 곧 본질의 구현체이므로 다시 말해 “자기 내에서 본질이 비추는 것”이므로 한편으로는 개체적 현존이며 다른 한편에는 본질이다. 전자의 측면에서 그것은 자기 동일한 것이며 본질이 자기를 정립한 것이다. 후자의 측면에서 그것은 자기 구별적인 것으로 자기 내로 복귀하여 본질로 돌아간다. 그러므로 모든 개체적 현존은 한편으로 동일한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 구별하는 것이다. 그에 따라서 사유법칙으로서 동일성과 구별도 서로 대립하면서도 매개하고 지양하는 것이다.
“반성 규정은 서로에 대해 규정된 것이다. 그러므로 반성 규정은 반성이라는 형식을 통해 이행이나 모순을 벗어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절대적인 사유법칙으로서 제기된 여러 명제들은 엄밀하게 고찰해 볼 때 서로 대립하며 상호 모순적이고 서로 지양한다.”(헤겔, 논리학, GW11, 260)
헤겔 논리학 반성 운동9- 지젝과 반성 개념[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논리학 반성 운동9- 지젝과 반성 개념
1)
라캉 해석자이면서 문화나 이데올로기 비평가로서 이름을 떨치고 있는 지젝은 헤겔이나 칸트와 같은 고전 철학에 해박하다. 그는 라캉의 정신분석학 이론을 헤겔의 개념을 이용해서 소개하기도 하는데, 그 가운데 흥미로운 것이 곧 헤겔 반성 개념에 대한 지젝의 설명이다.
그는 1989년 지은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국내 번역은 이수련 역, 인간사랑, 2002년 5월)이라는 책의 마지막 6장에서 정립, 전제, 외적 반성, 규정하는 반성 개념을 설명한다. 그의 설명을 라캉의 정신분석학 이론에서 실재 개념을 설명하기 위한 시도로 보인다.
이는 헤겔의 논리학에 나오는 반성 개념과 연관되어 있어 보인다. 그의 설명은 헤겔의 맥락과는 다른 맥락에서 하지만, 그 자체로 흥미롭고 거꾸로 헤겔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해서 이 자리에서 언급하고자 한다.
2)
지젝에서 루소의 순수한 자연, 칸트의 물 자체와 포이어바흐의 소외된 신, 라캉의 증상 너머의 실재, 국가의 의지로서 군주, 텍스트의 원초적 의미가 같은 차원에서 논의된다. 이야기를 단순화하기 위해 여기서는 물 자체라는 개념을 중심에 놓고 설명하기로 하자. 동일한 논리가 자연이나 신이나 실재, 의미에도 똑같이 적용된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겠다.
알다시피 칸트는 물 자체라는 개념을 설정 즉 정립했다. 이 물 자체는 현상 너머에 있으면서 현상의 근거가 되는 것인데, 이 개념이 설정되는 논리적 과정을 설명하기 위해 지젝은 헤겔의 반성 개념을 끌어들인다.
그는 헤겔이 본질론 1편 1장에서 전개한 반성 운동 즉 정립하는 반성과 외적 반성, 그리고 규정하는 반성을 끌어들이는데 이를 단순화해서 ‘전제를 정립하기’와 ‘정립을 전제하기’라는 두 과정으로 나누기도 한다. 이 두 개념은 헤겔에서 나타나지는 않지만, 이때 그는 헤겔의 외적 반성을 ‘전제를 정립하기’로 규정하고 규정하는 반성을 ‘정립을 전제하기’로 규정한 것으로 보인다.
그가 헤겔의 정립하는 반성이나, 외적 반성, 규정하는 반성에 부여하는 의미는 헤겔 자신의 것과는 구별되는데, 우선 그의 개념을 설명한 다음, 그 차이를 밝혀 보기로 하자.
3)
그 가운데 첫 번째 정립하는 반성은 어떤 현상을 그 자체로 물 자체로 보는 소박한 또는 순진한 관점을 말한다. 즉 현상적으로 주어진 것을 그대로 믿는 태도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살아가는 가운데 취하는 태도가 주어진 현상의 규정을 그대로 믿는 태도이니, 이것을 지젝은 정립하는 반성이라 부른다.
두 번째, 외적 반성은 현상 너머에 현상의 근거가 되는 어떤 것이 있다고 보고 그것을 물 자체로 설정하는 태도이다. 이 초월적 실재는 현상을 출발점으로 해서 소급적인 방식으로 설정되며, 일단 설정된 이후에는 오히려 이 현상을 설명하는 근거로 여겨진다. 물 자체가 설정된 이후에 물 자체는 현상과 괴리되며, 진리인 물 자체에 비추어 본다면, 현상은 제약된 것, 왜곡된 것에 지나지 않게 된다.
이런 외적 반성을 그는 ‘전제를 정립하기’로 부르기도 하는데, 여기서 정립이란 곧 현상을 말하며 전제하기란 이 현상의 근거를 찾아 들어가는 운동을 말한다. 일단 그 근거가 확립된 다음엔 현상은 이제 그 근거로부터 설정된 것으로 규정된다.
사실 이 근거란 현상으로부터 소급된 것이니 현상에 의존하는 것이다. 그러나 거꾸로 이 현상의 근거로 설정되면서 현상이 오히려 근거에 의존하는 일종의 소외 또는 전도가 여기서 출현하게 된다. 이런 전도는 종교적으로 신에 매달리는 인간의 모습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또 다른 흥미로운 예로서는 ‘아름다운 영혼’이라는 개념이다. 아름다운 영혼은 자신을 현실로부터 학대받는 존재로 규정한다. 그런데 사실은 자신이 학대받는 현실을 설정하는 것은 그 자신이다. 그것은 마치 어머니가 자신이 희생당한 존재가 되도록 자기를 희생하게 하는 가족을 설정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여기서 학대하고 희생하는 현실은 자기도 모른 채 자기가 전제한 것이다.
4)
현상의 근거가 되는 물 자체가 사실은 현상으로부터 주관에 의해 소급적으로 도출된 결과이니 곧 물 자체는 주체 자신이 설정한 것이다. 그런데도 외적 반성에 사로잡혀 있는 경우 이 주체 자신의 설정 운동은 은폐되고 만다. 그 결과 마치 물 자체가 현상 외부에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규정하는 반성에 이르면, 이 물 자체가 사실은 주관 자신이 소급하여 설정한 것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지젝은 이를 ‘정립을 전제하기’로 규정하는데, 여기서 정립이란 정립하는 주체를 의미하며, 이 정립하는 주체가 곧 물 자체의 전제가 된다는 의미로 보인다.
그는 흥미로운 예로서 남근을 들고 있는데, 남근은 관념을 통해 발기되지만, 그 관념은 신체적인 것으로서 의식적 통제 너머에 있다. 의식적 통제 너머에 신체적인 것이라는 점에서 남근은 물 자체로 전제된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관념을 통해 발기된다는 점에서는 주관이 설정한 것이다.
이와 같은 전환은 단순한 형식적 전환에 지나지 않는다. 즉 주관 밖에 물 자체가 주관이 정립한 물 자체라고 인식되었다고 하더라도, 현상의 근거가 되고 의식이 인식할 수 있는 영역 밖에 있다는 점에는 변함이 없다.
지젝은 헤겔이 실체가 주체가 된다고 말했을 때 그 의미는 이상과 같은 형식적 전환을 의미한다고 본다. 이런 전환은 “순수하게 형식적인 공허한 제스처”이다.
“어쨌든 일어나고 있는 무엇에 대해 책임지도록 하는 순수한 가장 행위이다. 이것이 ‘실체가 주체가 되는’ 방식이다.”(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 345)
5)
지젝은 이상과 같이 헤겔의 반성 개념을 자기 나름대로 설명한 다음, 헤겔적인 반성 개념의 한계를 지적한다. 헤겔에 대한 그의 비판은 마르크스의 이데올로기 비판을 참조한다. 마르크스는 어떤 것이 거짓된 이데올로기라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못하며, 그런 이데올로기를 갖도록 하는 사회적 조건이 변화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지젝 역시 마찬가지다.
첫째, 그에게서 외재적 반성은 단순히 주관이 현상의 근거로 물 자체를 설정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이런 외재적 반성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본질 자체가 자기를 타자화하여야 한다.
“외재적 반영의 결정적 특징은 본질이 사전에 객관적으로 주어진 외재성의 형태로 자기 자신의 타자로서 바로 자시 자신을 미리 전제한다는 것이다.”(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 351)
여기서 ‘본질의 타자화’란 곧 본질 속에서 주체가 현상의 근거를 초월적 물 자체에서 찾고자 하는 조건이 만들어져 있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즉 소외된 사회에서 인간은 스스로 소외될 수밖에 없으니, 그 때문에 외재적으로 반성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둘째, 마찬가지로 지젝은 헤겔이 말하는 규정하는 반성이 지닌 한계를 지적하고 있다. 왜냐하면, 물 자체가 주관이 설정한 것이라는 점을 인식하더라도, 주관이 그런 물 자체를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물 자체를 설정하는 주관 자신의 조건이 변화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조건이 변화되어야만 비로소 물 자체를 설정하는 일이 끝나게 될 것이다. 이를 지젝은 신 자체의 주체화라고 말한다.
“인간은 신의 진리이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는, 다시 말해 주체가 소외된 실체적 본체의 진리라는 것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주체가 자신의 전도된 이미지 속에서처럼 이 본체 속에서 자기 자신을 인정 반영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핵심은 실체적 본체가 그 자체로 분열되어 주체를 산출해내야 한다.(즉 신 자신이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 356-357)
5)
외적 반성과 규정하는 반성에 관한 지젝의 설명은 헤겔의 설명과는 다르다. 헤겔은 외적 반성은 어떤 정립된 것의 본질이 그것 자체에 외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즉 제삼자인 주관이 자의적으로 설정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반면 규정하는 반성에서 찾아진 본질은 그 어떤 것 자체에 내재적인 것이며, 따라서 제삼자인 주관이 아니라 그것 자체에 본질적인 것이라는 의미다.
그러므로 헤겔에서 외적 반성에서 규정하는 반성으로 이행하는 것은 인식의 발전을 의미하며, 즉 주관적 인식이 사물 자체의 본질에 다가가는 것을 의미한다.
반면, 지젝에서 외적 반성은 주관이 물 자체를 설정한다는(물론 자각 없이) 의미에서 주관적이지만, 설정된 것은 주관 밖의 물 자체다. 이는 헤겔에서 단순히 주관적으로 본질을 설정하는 외적 반성 개념 이상의 것이다. 헤겔에서는 주관 밖의 물 자체를 설정하는 운동은 나중에 정신의 소외 운동에서 설명되는데, 이는 하나의 주관이 아니라 다수의 주관이 상호작용이라는 것을 매개로 한다.
또한, 규정하는 반성의 경우 지젝은 주관이 그런 물 자체를 설정했다는 것을 자각하는 것이며, 이는 단순한 형식전환에 지나지 않는다. 여기서는 헤겔에게서처럼 사물에 내재하는 객관적 본질이 인식된 것은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 1권, 3권, 4권의 3장까지(1)
* 안녕하세요.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웹진편집부에서 알려드립니다.
6월부터 격주로 한철연 학문후속세대 지원사업에 선정된 팀의 활동 상황을 웹진을 통해 공개하기로 하였습니다. 세미나에서 다룬 내용을 소개하고 풀어내는 기회가 되리라 기대합니다. 많은 관심과 응원 부탁드립니다.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 1권, 3권, 4권의 3장까지
다자인多字人
1. <형이상학> 1(A)권
<형이상학> 1권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사람은 본성상 알고 싶어 한다”라는 문장으로 논의를 시작한다. 이 앎에 대해 아리스토텔레스는 앎의 단계를 ‘감각’, ‘기억’, ‘경험’, ‘학문적 인식과 기술’ 네 단계로 구분하여 감각과 기억까지는 동물도 가능하지만, 경험의 단계 다음부터는 오직 사람에게만 국한된 것이라고 말한다. 학문적 인식과 기술은 “경험에서 얻은 많은 생각들로부터 성질이 같은 것들에 대해 하나의 일반적 관념”이 형성될 때 생겨난다. 예를 들어 칼리아스나 소크라테스 같은 개별적인 개개인에게 이런저런 치료가 통했다고 판단하는 것은 경험에 속하지만, 보편적 관점에서 개인의 체질을 분류하고 그에 맞는 치료가 어떤 것인지 판단하여 그에 맞는 치료와 그것이 통했다고 판단하는 것은 기술(의술)에 속한다.
비록 실제 행위에 있어서 경험을 가진 자들이 경험 없이 이론을 가진 사람보다 더 능숙할 수는 있더라도 학문적 인식과 기술이 더 높은 단계인 이유는 경험만을 가진 사람들은 결과가 그렇게 된다는 사실은 알더라도 이유를 알지 못하는 반면, 학문적 인식과 기술을 가진 사람은 이유와 원인을 알기 때문이다. 또한 기술자들은 가르칠 수 있는 능력이 있지만 유경험자들은 그렇지 않다는 점에서 기술은 경험보다 우위에 놓인다.
나아가 기술들 가운데 어떤 것들은 필요에 의해, 어떤 것들은 여유 있는 삶을 위해 있다. 그리고 앞의 기술보다 후자의 기술을 발명한 사람이 더 지혜롭다. 그들이 가진 인식들은 유용성이나 필요에 의해 있지 않고, 그 어느 것에도 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활동에 따른 것이기 때문이다. 즉 아리스토텔레스는 필요에 종속된 기술보다, 그 자체가 목적인 학문, 앎 자체가 목적이 되는 자유로운 기술과 학문이 더욱 지혜로운 것으로 본다. 이로부터 아리스토텔레스는 지혜를 최고 단계의 앎으로, 어떤 원리들과 원인들에 관한 학문적 인식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이 지혜, 즉 철학에 대해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일반적인 견해로부터 출발한다. 이에 따르면 지혜는 1) 가능한 모든 것을 알고, 2) 알기 어려운 것을 알며, 3) 엄밀하고, 4) 원인들을 뛰어나게 가르치며, 5) 자기 목적적이고, 6) 지배적 위치에 있다. 이러한 특징들을 통해 아리스토텔레스는 지혜를 ‘가장 보편적인 인식’이자 ‘첫째 원리들과 원인들에 대한 이론적 학문’이라고 규정한다. 또 이 특성들에 따라 이 학문은 신이 소유하기에 가장 알맞다는 뜻에서 신적이며, 이것이 신적인 것들을 다룬다는 이유에서 신적이다. 왜냐하면 신은 모든 것을 주재하는 원인들 가운데 하나이고 일종의 원리라는 점에서 그러한 학문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필요성을 따지자면 어떤 학문도 그것보다 더 필요하나, 그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
이후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원인들에 대한 논의로 네 가지 종류를 제시한다. 첫째, 실체와 본질(형상인), 둘째, 질료이자 기체(질료인), 셋째, 운동이 시작되는 출처(작용인), 넷째, 그것과 대립하는 원인, 즉 지향 대상과 좋은 것(목적인)이 바로 그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이 제시한 네 가지 원인의 관점에서 그 이전 철학자들이 이야기한 ‘원리’ 혹은 ‘원인’에 대해 검토한다. 선대의 철학자들은 질료인으로부터 시작하여 원인들에 대해서 많은 주장과 논의를 내세웠지만,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그들의 방법은 적절치 않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여러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논의를 검토하면서 그들이 내세운 논의가 어떤 한계와 문제가 있는지를 밝혀낸다. 나아가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에 대해 형상에 대해 말한 철학자들이 제일 본질에 가깝게 접근했다고 말하면서도 한계가 있다고 말하는데, 왜냐하면 플라톤은 질료인과 형상인 만을 활용하였기 때문이다.
특히,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이데아론을 중점으로 비판한다. 왜냐하면 아리스토텔레스가 보기에 이데아론은 개별자와 떨어져 설명에 대상을 늘렸을 뿐이며, 그 자체의 증명에도 분명한 것이 없고, 운동과 변화에 관해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혹여 이러한 이데아가 수라고 하여도 이것이 원인이 될 수 없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결론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을 포함하여 선대 철학자들이 형이상학을 시작하기는 했지만 미숙했으며, 네 가지의 원인을 두루 파악하지는 못했다.
(계속)
『논어(論語)』「옹야(雍也)」의 여러 해석 가능성에 대하여(1) [건국대학교 논어 강독팀]
* 안녕하세요.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웹진편집부에서 알려드립니다.
6월부터 격주로 한철연 학문후속세대 지원사업에 선정된 팀의 활동 상황을 웹진을 통해 공개하기로 하였습니다. 세미나에서 다룬 내용을 소개하고 풀어내는 기회가 되리라 기대합니다. 많은 관심과 응원 부탁드립니다.
『논어(論語)』 「옹야(雍也)」의 여러 해석 가능성에 대하여(1)
건국대학교 철학과 학부 김종범
– 『논어』라는 텍스트에 관하여
『논어』는 동양철학을 논함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고전 중 하나이다. 또한 그 내용은 겉보기에는 이해하기 쉬운 격언들로 구성되어있다. 그렇기에 『논어』는 동양철학을 접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큰 부담감 없이 시도할 수 있는 창구가 되어준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동양철학을 거대한 체계가 있는 철학 사상으로 생각하지 않고 오래전 사람의 삶의 지혜를 담은 명언 모음집으로 치부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러나 『논어』는 단순히 오래된 격언 모음집이 아니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논어』라는 텍스트 안에서는 일관된 사상적 체계가 있다.
본고에서는 4월 30일 진행된 『논어』 강독에서 논한 「옹야」11-20 강독의 내용에서 구성원 사이에서 다양한 의견이 나온 부분을 공유하고 몇몇 부분에서는 그에 대한 추가적인 의견을 제시하고자 한다. 이번 강독에서 다양한 의견이 나온 부분으로는 「옹야」13, 18, 19, 20이 있다. 구체적으로 「옹야」13, 18에서는 스터디 구성원들의 해석을 바탕으로 『논어』 텍스트 안에서의 정합성을 바탕으로 해석의 타당성을 논하고자 하고, 「옹야」19, 20에서는 새로운 해석의 가능성을 제시해보고자 한다. 이 부분에 대한 해석을 고민하는 과정에서 『논어』의 일관된 사상적 체계의 부분들에 대하여 확인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 「옹야」13
아래 인용은 「옹야」13의 원문과 스터디 시작 전 스터디 구성원들이 미리 번역해온 문장이다.
子謂子夏曰:「女為君子儒,無為小人儒。」(자위자하왈:「여위군자유,무위소인유。」)
재국: 선생이 자하에 이르길, “너는 군자다운 선비가 되고 소인 같은 선비가 되지 말아라”
종범: 선생님께서 자하에게 일컬어 말씀하셨다. 너는 군자의 유학자가 되고 소인의 유학자가 되지 말아라.
서진: 선생님께서 자하를 가리켜 말씀하셨다. “너는 군자다운 유자가 되어야지 소인 같은 되서는 안 된다.”
수진: 선생님께서 자하에게 말씀하셨다 : 「너는 군자같은 선비가 되도록 하고, 소인같은 선비가 되지 말아라.」
「옹야」13에서 크게 논할 수 있었던 부분은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군자유(君子儒)’와 ‘소인유(小人儒)’에서 ‘군자의’와 ‘소인의’로 해석할 것인지 혹은 ‘군자’와 ‘소인’을 ‘군자다운’과 ‘소인다운’으로 해석할 것인지에 대한 부분이다. 전자로 해석할 때는 ‘군자’와 ‘유’ 그리고 ‘소인’과 ‘유’ 사이에 소유격을 의미하는 ‘지(之)’가 생략된 것으로 판단한 것이며 후자로 해석할 때는 ‘군자’와 ‘소인’이 ‘유(儒)’를 수식하는 단어로 사용되었다는 의미이다.
「옹야」13에서 논할 수 있었던 다른 부분은 ‘유(儒)’의 의미이다. 스터디 구성원의 경우 이에 대한 해석으로 ‘선비’, ‘유학자’, ‘유자’의 번역어를 사용하였다. 그리고 이는 총 3가지의 의미로 해석될 수 있었다. 하나는 가장 떠올리기 쉬운 의미로 조선 시대 선비의 이미지이다. 그러나 『논어』라는 텍스트가 만들어질 시기에 그 선비들이 공부할 사서가 아직 성립되기 이전이므로 조선 시대 선비의 이미지로 ‘유’가 해석될 수는 없다. 두 번째 의미는 많은 동양철학자들이 제시하는 제사 전문가로서 ‘유’이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의미는 가장 포괄적인 의미로 그저 글에 관심이 많았던 학자를 의미하는 것이다.
‘군자유’와 ‘소인유’에 대한 해석과 ‘유’의 의미는 그 둘을 관련지어 생각할 때 그 의미가 더 잘 드러난다. ‘군자유’와 ‘소인유’를 ‘군자의’와 ‘소인의’라는 의미로 해석하면 유를 제사 전문가로 이해하는 것이 상대적으로 자연스럽다. 제사 전문가로서 제사를 지낼 때 그 제사를 실제로 지내는 사람이 군자인 것을 추구하고, 소인인 것을 거부하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이해하면 「팔일(八佾)」6과 연관을 지어 생각해볼 수 있다. 「팔일」6에서는 계씨를 모시는 염유에게 계씨가 태산에 제사를 올리려고 하자(분수에 맞지 않은 제사를 올리려고 하자) 제사를 말릴 수 있는지 묻지만 염유는 할 수 없다고 대답한다. 위 문장에 따르면 염유가 계씨를 모시는 것은 소인의 유인 것이며 이는 추구할 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다음으로 ‘군자유’와 ‘소인유’를 ‘군자다운’과 ‘소인다운’의 의미로 해석하면 유를 제사 전문가로 이해해도 글에 관심이 많았던 학자로 보아도 문제가 없다. 그렇다면 정확히 ‘군자다운’ 것과 ‘소인다운’ 것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이와 관련하여 「이인(里仁)」11과 16에 연관을 지어 생각해볼 수 있다. 두 구절에서 군자는 ‘덕(德)’과 ‘의(義)’를 강조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고, 이와 대비하여 소인은 ‘편안함’과 ‘이익’을 강조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즉, ‘군자유’와 ‘소인유’의 의미는 ‘덕’과 ‘의’를 강조하는 글공부 혹은 제사 전문가가 되고 ‘편안함’과 ‘이익’만을 위한 글공부 혹은 제사 전문가가 되지 말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계속)
제국의 쇠퇴: 삶의 창발 [천 하룻밤 이야기]
제국의 쇠퇴: 삶의 창발
2026 05 21 소만(小滿): 모내기가 한창일 때, 어제 오늘 비가 내리다.
나로서는 70년대 초에서부터 우리나라의 변역의 시기들에 관심을 기울여왔다. 환국으로부터 단군, 고조선, 삼국시대, 고려, 조선, 일제강점, 미국점령 하에서 변전의 과정 등은 할배들께 들어서, 그리고 여러 역사서술을 보면서, 말하는 이들마다 관점들이 왜 다른지 궁금하였다. 철학이란 학문을 공부하면서 세계관의 차이, 사상의 입문에서 차이, 풍토의 차이 등으로 해석하는 것을 보아왔다.
철학을 학문으로 공부하겠다는 시기에, 이미 서울 중심이 되어있었지만, 일제의 잔재로 남아있었던 데칸쇼(데카르트, 칸트, 쇼펜하우어)의 시대가 저물고 있었지만, 일반인에게 널리 읽히는 사상은 니체의 허무주의와 하이데거의 실존주의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신군부의 정권시절에는 진리치를 따지는 분석철학과 과학철학이 주류로서 나오면서, 이 분과들이 진위 구분을 위해 다루는 대상으로서 현상이 그대로 이어져서, 현상학과 과학철학이 한편을 이루고 있었다. 그 이유도 모르면서, 공부란 그렇게 하는 모양이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따라가는 중에, 박정희-전두환을 이어가는 과정에서 산업화가 궤도에 오르면서 노동이 중요문제로서 제기되었고, 맑스-레닌 사상과 사회주의 사상에 대한 공부를 하는 이들이 표면으로 올라왔다. 이미 이시기에 미국 제국의 금본위제도가 달러본위로 바뀌었다.
1953년 이래 규소의 시대가 열렸지만, 서구 산업사회의 250년 여년처럼 세대를 지나가면서 변화를 가져온 것이 아니라, 세대와 세대 사이에 변곡점을 달리하고, 변곡점의 형성의 속도가 빨라서 같은 세대에도 년도의 차이에서 달라지는 시대가 되었다.
디지털 산업이란 용어가 성립하자, 바로 컴퓨터를 통한 정보교환의 시대를 열었다. 천리안과 하이텔을 아는 세대가 이어서, 곧이어 정보소통의 토대는 마그네틱 저장과 달리 USB의 저장으로 넘어갔다. 흥미로운 것은 후진국이었던 중국에서는 마그네틱시대 없이 바로 USB로 바로 넘어갔다. 그리고 김대중 대통령시대에, IT 산업의 거의 대가 없는 투자는 다음시대에 어떤 귀결들이 이루어질지 그 당시에는 잘 가늠하지 못할 정도였다. 그리고 세대를 바꾸지도 않고서도, 바둑에서 알파제로가 이세돌을 이기면서 정보자료의 독해와 이용이 인간의 두뇌를 떠나 기계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심었다. AI에 의한 산업화의 속도가 증기기관에서 모터로 변환보다 훨씬 빠르게, 그리고 전지구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이런 시기에 제국이, 철기산업시대의 기계화의 기준과 규소시대의 AI를 다루는 기준이 잘 이우러지지 않는다는 알아챈다. 즉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이란-이스라엘 전쟁에서, 냉전시대에 미국이 뒷배로서 개입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전쟁이라는 것을 그들도 알아챘다.
미국이 1975년 브레튼우즈 시대의 막을 내리고 2008년 리먼 브라더즈의 파산으로 미국 패권의 몰락이 시작되었다고 했었다. 게다가 이번 중동전쟁의 지형은 지리적, 역사적, 종교적 문제와 함께 경제적, 군사적 문제가 겹쳐있다는 것인데, 소위 말하는 진리와 허위라는 진리론에 근거한 과학과 분석이론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다. 프랑스 철학이 1999년 말에 제시했듯이, 세계의 연관을 이해하고 설명하는데, 문명론이 아니라 문화론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 그리스 문명론에서 2천 500여 년이 지나서 성찰하는 것 같다.
제국의 쇠퇴를 알리는 이야기가 많아졌다. 미국이 1991년 소비에트연방을 무너뜨리면서 자본주의 군수산업의 승리한 것으로 보았다. 그러한 무기가 철기산업의 마지막이었다는 것이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이렇게 길어질 것이라고 아마도 미국도 러시아도 상상하지 않았을 것이다. 제국주의를 지지하는 세력들이 생각하기에 한 나라에서 2-3년 전쟁하면 마치 우리나라 전쟁에서 일본이 복구하듯이, 베트남전쟁에서 우리나라가 복구하듯이, 우크라이나 전쟁 후 재건에서 동유럽이 서유럽처럼 되살아날 것으로 생각했다고들 한다. 그런데 IT에서 AI의 지능을 이용한 소품의 전쟁무기가 전쟁의 전략뿐만 아니라 전술을 바꾸어 놓았다. 드론뿐만이 아니라, 전자장치를 탑재한 여러 장비들의 이용, 좀 더 중요한 인공위성을 통한 전쟁 지형의 실시간 관전이 있다.
기술 면에서 철기산업시대에는 후진국이 선진국을 따라잡기 위해 한 세대를 거쳐 가야 했었다. 그런데 이 IT 산업에서는 공장제가 필수적이라기보다, 인력(재능있는 인간)이 주축이라 한다. 미국이 실리콘벨리를 통해 19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초반을 장악한듯하지만, 인공지능 기술론에는 수학처럼 국경이 없다. 전 세계의 인재들이 실리콘 벨리로 유학가거나 돈 벌러 가는 시대가 지나갔다. 이미 인도와 중국의 일류의 인재들은 자국에 남고, 노동자처럼 돈 벌러 가는 이들은 이류들이라 한다. 제국이 철기산업의 무기들이야, 핵무기를 포함해서 우세하지만, 전 지구적으로 확장된 규소시대의 무기에서 제국이 지배권을 장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학문은 경계가 없다. IT와 AI의 자료는, 마치 인류 복지를 위한 DNA의 공유화처럼, 수학과 물리학이 어느 나라의 것이 아니듯이, 누구의 어느 나라의 자료가 아니다. 그것을 다루는 최상의 인재가 다수의 나라에서 미국보다 자국에 머물고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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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의 일부로서 IT와 AI의 학문도 경계가 없다. 철학도 학문의 경계가 없다. 철학과 종교가 경계를 갖지 않았던 시기에, 화두로서 오랫동안 가장 큰 문제는 “삶”이었다. 삶에서 먹거리 그리고 잠자리였다. 고대 문명들은 이런 자취를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생존의 연관으로서 입는 것이 제도의 이야기거리가 되면서, 공공선을 위해 치장하지 말라고 한다.
삶과 죽음은 대립이 아니라 반대 또는 모순이다. 삶이 중요하다는 것은 죽음 이후를 논하지 않는다는 것, 퀴니코스-스토아학파 이래로 논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삶에서 공감하고 동화하며 살았다는 관계들 사이의 잔상이 남아있어서 죽은 자에 대해 설화 또는 신화를 남긴다. 이런 이야기는 19세기 후반에 와서야 기억과 유전이라 부른다.
삶의 대구(對句)로서 죽음이라고 여기면서, 학문에서 형이상학이라는 학과가 존재와 무라는 모순관계를 다룬다. 이 관계는 사람과 사람 아닌 것, 동일자와 타(율)자의 용어를 만들었다. 삶 다음으로 사변(사유)이 등장하여, 동일자의 인간에 대비되는 다른 사물들을 잘 다루어야 인간이 편안하고 안락하게 살 수 있다는 것으로 여겼다. 대상들을 잘 다룬다는 것은 도구를 잘 만들고 이용하여 먹거리 생산과 잠자기 건물을 잘 만드는 것이다. 이런 작업의 여러 귀결들이 토지와 기후와 연관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고, 토지는 기후의 영향을 받고, 기후는 하늘의 운행에 영향을 받는다. 인간이 천문학이라는 이름으로 24절후(12별자리)를 체계화하는 데 오래 걸렸을 것이다. 하늘의 운행에서 시간을 토지의 분할에서 공간을 사유했다고 한다.
시간과 공간을 다룬다는 것은 축적된 지식을 체계화하는 지자들이 한다고 하였고, 이것을 전수하는 학문들이 있었다. 그럼에도 인간이 현세에서 오래 살고, 그리고 죽은 자를 영웅과 신들로 만들었듯이, 살아서도 그렇게 대우받고 싶은 욕망으로 죽은 자 또는 죽은 자들의 세상을 생각하기도 한다. 이런 사후세계는 현재가 투영된 사유의 귀결이다. 이처럼 거꾸로 하늘의 운행이 지상의 운동에 투사된다고 보았던 시대가 있었을 것이다.
학문의 역사에서 공간이 당연히 중심이었다고 하지만, 시간의 과정 없이 공간을 생각할 수 없었다. 오래 산다거나 또는 영생을 바라고 사유하면서, 하늘과 땅 사이에서 하늘에 영원(평상의 유지)을 지상에 무상(無常, 평상이 없음)을 대립시킨 투사의 사유가 있었으며, 이는 동일률에서는 모순율로서 무상 또는 허무를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설득하기 위한 수단정도였을 것이다. 무상은 구전의 이야기가 문자화되어 학문이 시작하던 시기의 주제(선문답거리)였다. 화두와 달리 선문답에는 모순율과 같은 부조리 파라독사들이 있음에도, 주제들을 다음 세대의 전승에서 필요한 체계를 만들었다. 이런 체계에 대한 맹목적 믿음이 신들을 만들기 한다. 그리고 하나의 신을 만들고 체계화에 완전성을 부여하려고 했던 시대가 있었다.
하늘과 땅 사이에서 인간이 산다는 것이 중요했다. 천지인의 상식도 이에 준한다. 학문은 이 둘 사이의 인간이 생존도, 어쩌면 영혼과 신체라는 이중화 현상도, 하늘과 땅 사이의 유비적인 것으로 생각했다. 하늘의 영광과 영원에 대한 욕망은 땅에서 아픔과 비참을 해소하기 위해 우화적 이야기를 무한정하게 만들 수 있었다. 그럼에도 존재가 아니라 현존으로 생각하게 되는 것은, 사람들이 죽어서 잘 살거나 하늘나라에 신과 나란히 있다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에 대한 선문답 제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래도 살아있다는 것은 혼이고 몸은 사라지는 것이 현존 세상이라 여겼다.
혼(魂)에다가 정신(오성, 지성, 이성)을 두고, 그 정신이 잘 생각하면 혼도 잘 살고 몸도 잘 산다고 여기면서, 정신이 잘한다는 것은 지성이 체계를 잘 만든다는 것으로 여겼다. 이 체계를 누구나 잘 이용하는 상식과 그리고 다른 이들과 더불어 이제에도 잘 이용하게 하는 양식이 있다고 믿었다. 이런 사유 체계에서 더불어 잘 산다는 것이, 모든 사람에게라기보다 우선 자기와 맞는 사람들과 잘 산다는 것이 되었다. 그들 속에서 지식을 공유하고, 이용하며, 새로운 생산 방식을 바꾸어 가면, 그다음에 인간은 누구나 함께 다 잘 살 수 있을 거라고 여겼다. 우선 한편이라는 생각에서 역사는 개인주의를 만들었고, 게다가 자기들끼리 잘사는 국가주의를 만들었다. 그게 당연하다고 여겼다. 게다가 이들이 전승과 교육을 통한 과학적 지식의 소유하고서, 이들은 다른 문화에서 체계 없이 공감과 감화로서 살아가는 것을 야만인 취급하고, 자기들 방식으로 따르지 않으면 무지의 신앙을 갖는 것처럼 취급하였다.
이들은 타자들을 교화시키거나 훈육해야 한다고 하였지만, 국가주의 이후 제국주의에서 드러나듯이 착취와 수탈의 대상으로 삼았다. 이에 저항하고 불복하는 이들을 악마화하고, 그리고 자기들에 반대하는 맑스-레닌 사상을 빨갱이라고 만들었다. 미국의 멕카시 선동이 그랬고, 이승만의 보도연맹학살과 박정희의 인혁당과 통혁당 사건을 조작하면서 빨갱이 사냥을 했다. 21세기에는 미국의 마가(MAGA)라는 집단의 광기와 윤석열의 계엄과 내란의 획책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그래도 철학이란 학문은 모순율의 사고, 논리적 무모순, 종교의 무오류 등이 얼마나 많은 파라독사들을 생산해왔다는 것을 가르쳐준다. 학문은 이런 획일적인 사고의 광기와 유일신의 파라노이아에 저항하고 인류의 삶과 사유의 확장을 노력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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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죽음, 존재와 무, 영원과 현존이라 기본 문제, 그리고 학문적 대립 또는 선문답과 같은 대립적 사유가 있다. 자연 발생론 대 유일 존재론, 우주발생론 대 우주론, 에피스테메 대 독사, 자연 대 신, 물질 대 정신으로 이어지는 해답 없는 논쟁(선문답)들이 있어왔다. 이런 논쟁에 대해 조주선사는, 무(無)라고 말하는 것처럼, 그런 질문도 그런 논의도 안하는 게 좋다는 것이다. 삶이 화두이다.
그러면 오래 전승의 체계와 학문들(수학들, 철학들, 과학들)은 무슨 소용이 있는가? 전승과 기억은 개인의 이익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인간이 자연 속에서 달리 살기를 찾아가는 노력 과정이었다는 것이다. 현재 상태에서 문제를 올바로 제기하고, 다음으로 달리 말하기, 달리 문자화하기, 달리 실천하기를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인성자유주의자(le libertaire) 대 상품자유주의자(le liberaliste), 인도주의자(huminitaire) 대 인문주의자(humainiste), 자연주의 대 인간주의, 우주발생론 대 우주론, 조화중항 대 비례중항 등이 마치 대립(l’opposition)처럼 보이지만, 이러한 관점의 차이는 우선 사유방향의 차히이다. 대립은 비교의 차이이지만, 방향의 차히는 삶의 태도와 대처에 있다. 지금까지 학문의 방향과 달리 방향을 찾아야 할 것이다. 학문의 영역에서도 데칸쇼의 유행이 일본제국주의에 영향 하에서 이승만에서 박정희로 훈육과 통제의 지배 방식에 있었다면, 제도 측면에서 논리실증주의과 과학주의가 미국 제국의 영향 하에 있으면 신군부와 이명박으로 명령(지시)과 조작의 방식으로 상층에서 표면으로 지배하였다. 이제 심층에서 표면으로, 즉 세계사 속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자치, 자주에서 자율과 자발성으로 만들어갈 때이다.
학문과 제도에서 문명사관이 아니라 문화관으로 보는 관점은 심층에서 표면으로 발현과 창안을 실행하는 것이다. 우리 입말이 문자화하고, 그 문자와 이미지가 빛의 속도로 전지구를 돌고 있다. 이런 시대에 민주당은 당원주권을 실현하려 하듯이, 다음 공화국은 프랑스 대혁명의 공화정 수립처럼 인민주권을 실질적으로 실현하는 길을 나서야 할 것이다. 사상의 자유, 집회 결상의 자유를 토대로 하는 다음 7공화국을 건설할 차비를 해야 할 것이다.
반만년의 역사에서 길어 올린 문화와 기억을 위한 노력도 필요하다. 공자도 학습이 즐거움이라 하였듯이, 인민이 평생을 살아가면서 학습과 동지들을 만들면서 살아가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을 수 있는 토대를 만들어야 할 것이다. 교육이다. 교육은 백년대계를 넘어서 기억과 전통에서 영구대계일 것이다. 이제 달리 말하기, 달리 문자화하기, 달리 실천하기, 이에 맞는 교육이 방향을 달리해야 할 것이다. 물론 이항 대립에서 비례중항처럼 50 대 50이라기보다, 인습에 젖은 50 대 새로운 세계를 만들 50에서, 조화중항을 찾아가면서 서로 합의와 평결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인생무상(人生無常) 속에서, 매일, 매달, 매년이 동일반복 같아 보이지만, 평생의 과정에서 보면 매일 이질반복을 하고 있으며, 그 성과는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라 한다. 긴 시간에서 단 한 번의 성취를 기적이라고 부르는데, 기적, 은총, 음덕, 자비, 성덕 등은 같은 의미의 다른 용어일 뿐이다. 하늘의 번개는 기적과 같다. 그 번개는 수없이 많이 치지만, 모든 과정에서 번개는 인생처럼 딱 한번 뿐이라고 하고, 동일한 번개는 없듯이 동일한 삶도 없다. 산다는 것, 번개와 같은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의 기적이 각자에게 있지만, 다른 이들에게 동일한 것이 아니기에 다른 이들이 전혀 모른다. 이질반복에서 평생의 노력이 번개같이 지나간다. 그럼에도 인간은 그 삶의 다양체를 느끼면 살다가 간다. 이럴 이해하는 벗과 동지를 만나 혁명도 하려하고 결사도 만든다.
(4:16, 59PMA)(4:34, 59PMAA)
경제학 – 무기산업 (에너지)
IT 산업과 인간(기술자)
자료(le donne)
자정 능력의 상실
전통의 빈약성 – 극우의 서식지
기술정보
손흥민
현재 인간계 최고의 바둑 기사는 신진서 9단
게임계의 ….
BTS 공연 해외순회 공연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
권선징악(勸善懲惡), 인과응보(因果應報), 사필귀정(事必歸正), 자업자득(自業自得),
새옹지마(塞翁之馬), 전화위복(轉禍爲福), 고진감래 (苦盡甘來), 어려움 좋은 일로
흥진비래(興盡悲來), 호사다마 (好事多魔), 좋은 일만 있지 않고 조심하라
인생무상(人生無常):
교복(제복)을 입고 학교에 가는 모습을 줄달린 인형(마리오네뜨)
니체를 읽으며 허무주의로 읽어온 독해와 망치의 철학이라고 읽는
자연의 흐름과 황제(참주)제의 반대에 대해서 프랑스혁명의 공화국
이승만 박정희의 빨갱이 사냥은 종속권력이 자치와 자주 하나의 방향만이 맞다고 주장하는 편집증의 광기를 파라노이아라 한다.
Les technologies de l’information (TI), ou IT pour « information technologies »
Les technologies de l’information et de la communication ou techniques de l’information et de la communication (TIC, traduction de l’anglais information and communication technologies, ICT) sont les outils et systèmes qui permettent de créer, transmettre, stocker et partager des informations.
필자 류종렬: 한철연 회원, 철학아카데미
『깊이 읽는 베르그송』(2018), 『처음 읽는 베르그송』(2016) 등을 번역했고, 『박홍규 철학의 세계』(2023), 『박홍규 형이상학의 세계』(2015) 등을 함께 썼다.
코너명인 ‘천 하룻밤 이야기’는 트라우마에 걸린 한 인간을 바꾸기 위해,
세헤라자데가 천 하룻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는 설화에서 따왔다.
이 지면에 천 하룻밤 만큼 이어진 한 사람의 생각을 적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