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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 정신현상학의 시대적 의의[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이 글은 정신현상학 번역과 주해의 발간을 기념해서 25년 11월 27일 대안 공동 연구소에서 이루어졌던 강연의 원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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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 정신현상학의 시대적 의의

1) 필자의 관심

필자는 본디 인간의 마음을 이해하는 데 관심을 가졌다. 대학 시절 실존철학이나 불교에 깊이 빠졌던 것도 그 때문이었으리라. 필자가 문학과 예술에 늘 마음을 빼앗겼던 것도 그 속에서 다양하고 복잡한 인간의 마음을 엿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철학과 대학원에 들어갔을 때도 실존철학을 연구하고 싶은 마음에서였는데, 어느 날인가 철학 하는 선배의 석사학위 논문을 읽다가 갑작스럽게 방향을 바꾸어 헤겔의 『정신현상학』을 읽기 시작했다. 그 논문의 주제는 『정신현상학』 자기의식 장에 나오는 주인과 노예의 관계였을 것이다.

그렇게 시작한 연구가 끝나지 않았다. 『정신현상학』은 도대체 이해되지 않았으니 처음엔 그저 한 쪽을 읽다가 잠에 빠졌으며 읽기를 매번 다시 포기했다가 얼마 뒤 다시 되돌아오기를 반복하면서 이제 70대 노인이 돼버렸다. 그간 몇 권에 걸쳐 『정신현상학』의 비밀을 풀어보려 했으나 다들 중도에 그치고 말았다.

두서너 해 전 코로나가 창궐하던 시대, 문득 죽음이 부르는 듯한 환청처럼 듣고, 죽기 전 마지막 힘을 다해 이 책의 번역과 주해를 마쳐야 하겠다는 생각으로 만사를 제치고 집에 틀어박혔다. 생각해 보면 학자적 삶의 거의 전부를 『정신현상학』의 이해에 매달렸으니, 무엇이 필자를 이 책에 걸신들리게 했는지를 이제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필자가 헤겔의 『정신현상학』에 몰두했던 것도 이 책이 본래 필자의 관심 영역인 마음의 문제를 다루었기 때문이다. 마음 즉 정신이란 단순히 세계에 대한 인식이나 삶의 가치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심성 즉 실천적 의지나 정신적 표현의 문제까지 포괄하는 개념이다. 많은 철학은 마음을 다루더라도 주로 인식과 가치의 문제만을 다룰 뿐이고 심성의 문제나 표현의 문제는 심리학이나 교육학 또는 예술의 문제로 넘겨버렸다. 심리학이나 교육학은 경험적 방법이나 실용적 목적이 지배하고 심층적 이해는 없었다. 예술은 표현을 개인의 천성의 문제로 돌렸으니 아쉬웠다. 일부 철학(예를 들어 실존철학)은 심성의 문제를 다루기는 했으나 적절한 방법론이 없이 내적인 수련의 문제로 여길 뿐이었기에 그 역시 필자로서는 답답했다.

그런 마당에 헤겔의 『정신현상학』에서 인식과 가치뿐만 아니라 심성이나 표현의 문제를 다룰 수 있는 학문적 방법론을 발견할 수 있었으니, 필자로서는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구나 『정신현상학』을 조금씩 이해해 나가면서 그 가운데서 인간의 실천적 의지나 정신적 표현에 관련된 다양한 모습을 발견하게 됐다. 여기서 상세하게 설명할 여유는 없지만, 그 이름만 들어보자면 자기의식 장에 나오는 ‘노예 의식’과 ‘불행한 의식’이라든가, 이성 장에 나오는 ‘덕성’과 ‘세속’의 개념, ‘성실한 의식’ 그리고 정신 장에 나오는 ‘인륜적 의식’ ‛세계의 주인’ ‘소외된 정신’ ‘분열된 의식’이나 ‛순수 의식’ ‘유용한 존재’ ‘절대적 자유’ ‛전치[Verstellung]’와 ‛아름다운 영혼’의 개념 등이 있다. 헤겔은 많은 문학 작품이나 종교적 형태에서 그런 모습의 원형을 찾으려 했다. 그가 참고했던 대표적인 소설만 들더라도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나 디드로의 『라모의 조카』, 야코비의 『볼데마르』 등이 있다. 그 모습은 필자가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풍요로웠으니 그 모습을 발견할 때마다 필자로서는 놀라움을 금하지 못했다.

헤겔은 그 모습을 역사적으로 출현하는 것으로 설명했다. 그것은 과거의 모습을 극복하는 한에서 출현하며, 출현했다가는 역사적 운동을 거쳐 다시 자기 모순에 빠지고, 그럼에도 새로운 극복의 가능성을 열어준다. 그 모습은 한편으로 보면 역사 앞에서 부딪히는 모순 때문에 비극적으로 몰락하면서 숭고성을 띤다. 그러나 다른 한편 현실의 역사를 은폐하려는 시도 속에서 풍자되고 희화화된다.

2) 정신현상학의 역사적 배경

그런데 헤겔이 정신현상학을 쓰게 된 동기는 무엇일까? 필자는 그 동기를 두 가지 측면에서 바라볼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하나는 그 시대 역사적 배경이며 여기서 정신현상학이 추구하는 목표가 나온다. 다른 하나는 철학적 배경인데 여기서 정신현상학이 전개되는 구조와 전개 방식이 나온다.

① 독일의 궁핍

우선 그 역사적 배경을 살펴보자. 헤겔 시대 이웃하는 영국이나 프랑스에서는 이미 민족적 통일 국가와 근대적 민주주의 체제 그리고 활발한 자본주의적 발전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러나 독일은 여전히 중세 봉건적 시대를 벗어나지 못했다. 17세기 초 30년 전쟁이 끝난 뒤 독일은 소 국가로 분열됐으며, 각 국가는 봉건적 지배 아래 있었고 자본주의적 발전은 오히려 후퇴하고 말았다.

그런 상황에서 프랑스 혁명의 기운을 전해 받고, 나폴레옹의 지배 아래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일부 개혁이 이루어지면서 독일에서도 혁명적 지식인이 출현했다. 헤겔 역시 이 시대 청년기를 보냈으며, 그런 혁명적 지식인의 이상을 공유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청년들은 프랑스 혁명 가운데 전개된 공포 정치에서 충격받았으며, 새로이 발전하는 자본주의의 불평등을 목격했으니, 혁명적 지식인들은 한편으로 근대적 체제를 실현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공포와 불평등이 없는 이상을 실현하려 했다.

② 헨 카이 판의 이념

그것이 곧 헨 카이 판[hen kai pan]이라는 이념이었다. 이것은 곧 ‘하나이자 전체[All Einheit]’라는 사상을 구체적으로 실현한 것이다. 이 원리는 그리스 헤라클레이토스의 단편에서 나온다고 하는데, 헤겔은 청년기부터 시인 횔덜린과 자연철학자 셸링과 더불어 가슴에 품고 있었다고 하는 원리다. 이 원리를 헤겔은 각자는 전체이면서 동시에 전체의 한 계기라는 의미로 재해석한다. 필자는 이를 간단히 공동체적 정신이라고 부르려 한다.

그런 이상의 가능성 보여준 최초의 인물이 곧 칸트였다. 칸트는 로베스피에르가 사사한 루소의 일반 의지 개념이 지닌 한계를 깨닫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순수 의지 즉 도덕적 자유의지 개념을 제시했으니, 칸트의 세례를 받은 청년 지식인들은 이런 도덕적 자유의지를 통한다면 자신의 이상을 실현할 수 있다는 희망에 들뜨게 됐다.

그러나 칸트의 순수 의지 개념은 나름대로 문제를 지녔으니, 이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낭만주의자는 이를 양심 개념으로 발전시켰으며, 헤겔은 그것조차 넘어선 ‘하나이자 전체’라는 절대지의 개념을 제시하기에 이른 것이다.

헤겔은 정신현상학 서문에서 칸트 철학에서 새로운 빛이 탄생했다고 한다. 이 빛은 철학적으로는 선험철학이며 사상적으로는 그의 순수 의지 개념이다. 칸트는 이런 순수 의지가 지닌 자체 내 한계 때문에 낭만주의의 양심 개념이 출현했다고 한다.

③ 낭만주의의 한계

헤겔은 낭만주의적 양심 개념을 정신현상학의 절대정신에 도달하기 직전에 다루었는데, 그만큼 그가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면서도 결정적 한계를 지니고 있었는데 그것은 그 시대 낭만주의자들이 나갔던 길을 보면 충분히 이해될 것이다.

독일 낭만주의는 여러 흐름이 있지만, 대체로 학생운동을 배경으로 한다. 이 학생운동은 예나 대학에서 시작돼서 전국적으로 파급됐다. 학생들은 학생조합이라고 할 부르셴샤프트를 조직해서 활동했는데, 초기에는 매우 급진적이었다. 학생운동은 독일의 통일과 민주화를 요구했다. 그러나 1807년 나폴레옹의 독일침략을 거치면서 학생운동은 분열했다. 상당수는 보수화했다. 그들은 종교적으로 개신교에서 가톨릭으로 전향했고 정치적으로는 민족주의적으로 전향했다. 그런 가운데 중세를 이상화했고 신성로마제국의 부활을 꿈꾸었으며 그 후예라고 할 합스부르크의 오스트리아 제국을 지지했다. 반면 급진파는 전쟁 이후 1814년 발트부르크 축제를 통해 보수파의 저서를 불태우는 등 급진적인 활동을 전개했다.

이렇게 낭만주의 운동은 급진파와 보수파로 분열된 가운데 온건 개혁파라고 할 프로이센 중심의 독일 개혁 운동을 반대했다. 여기서 정치적으로나 사상적으로 낭만주의와의 대결이 전개됐는데, 이때 헤겔은 낭만주의의 양심 개념이 지닌 긍정적 측면과 부정적 측면을 동시에 보면서 이를 극복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됐다. 바로 이것이 그가 사상적으로 절대정신으로 이행하게 된 역사적 동기였다고 하겠다.

3) 정신현상학의 목적

헤겔은 이념적으로는 낭만주의자들이 지닌 이념을 지지했다. 그 역시 헨 카이 판의 공동체를 지지했으며 이를 통해 독일의 봉건제와 민족적 분열, 자본주의적 참상을 극복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 방법에서 그는 칸트의 순수 의지도 아니고 낭만주의의 양심도 아니며 그것을 넘어선 절대정신을 요구했는데, 그렇다면 절대정신이란 무엇인가?

헤겔에서 절대정신이란 곧 공동체다. 이 공동체는 단순히 공동의 목적(이성, 법)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 공동체는 그와 동시에 개별 의지의 통일체 즉 집단의지 또는 공동 자아를 말하며, 이는 국가라는 형태로 드러난다. 다음 구절을 참조하라.

“절대정신은 곧 공동체다. 이 공동체는 우리가 이성이 실천적으로 실현된 형태로 들었을 당시에는 우리에게 절대적 본질로 나타났으나 여기서는 자신의 진리에 도달하면서 자기 자신에 대해 의식된 인륜적 본질 즉 우리가 대상으로 삼는 본질로 등장한다.”(446 구절)

이런 절대정신은 구체적으로 두 가지 모습을 지닌다. 하나는 내적인 모습인데 그것은 사랑이라는 정신으로 출현한다. 이는 근대에서 개신교를 통해 출현했다. 다른 하나는 외적인 모습인데 앞으로 구체적으로는 국가로 출현해야 할 이상이다. 이는 곧 사랑이 현실적으로 실현될 수 있는 사회 제도를 의미한다.

헤겔은 이 사회 제도를 나중에 법철학에서 제시했는데 이는 기독교의 삼위일체라는 개념에 기초해서 전개된 것이다. 즉 국가가 삼위일체와 같은 방식으로 구성되는 것을 말한다. 삼위일체는 각각이 전체이면서 동시에 전체의 한 계기라는 헨 카이 판의 원리에 기초하지만, 개별자와 일반자 사이에 양자를 매개하는 특수자를 개입시켜 세 가지 항이 각기 전체이면서 동시에 전체의 한 계기가 되도록 만든 것이다. 국가 속에서 이런 삼위일체의 방식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적용하는가는 법철학에서 나오지만, 여기서는 생략하도록 하자.

정신현상학에서 중요한 것은 어떻게 이런 절대정신에 도달할 수 있는 가이다. 헤겔은 이와 같은 절대정신에 추상적인 윤리적 사유가 아니라 역사를 통한 실제 훈련을 통해 몸으로 직접 체득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그는 구체적으로 역사 속에서 이런 절대정신에 도달하는 길을 찾으려 했으니, 바로 이것이 정신현상학이 정신의 역사로 구성된 이유다.

4) 정신현상학의 철학적 배경

그렇다면 역사 속에서 정신이 어떻게 전개되는가? 여기서 헤겔은 정신이 전개되는 구체적 방식에 대해 고민하게 되는데, 이런 고민은 그 시대 철학적 문제와도 관련된다.

① 의식 경험의 길

『정신현상학』이 전개되는 방법은 헤겔이 「서론」에서 ‛의식 경험의 길’이라는 개념을 통해 밝혔다. 이 개념은 칸트의 선험철학에서 출발한다. 그것은 곧 대상이란 의식의 범주가 규정하는 것이라는 관점이다.

이런 관점에 서면 의식의 경험은 대상 너머에 있는 물 자체에 부딪히게 된다. 이는 곧 의식의 범주로 규정되지 않는 딜레마나 모순이 출현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칸트 철학은 이런 물 자체에 부딪힘으로써 그 너머 영역은 인식 불가능한 영역으로 규정했다. 이 물 자체의 난제를 해결하는 것이 시대의 과제였다. 직관으로 돌아간 셸링과 달리 헤겔은 칸트 선험 원리를 지키면서도 이 물 자체의 난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헤겔은 여기서 의식 경험의 개념을 제시한다.

헤겔에 따르면 의식 경험의 길에서 딜레마나 모순을 통해 드러나는 물 자체는 사실 그 의식이 이미 전제한 특정한 범주를 통해 대상을 규정하는 것 때문이다. 그런 특정한 범주를 벗어나게 되면 더는 딜레마나 모순이 출현하지 않게 된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런 딜레마나 모순에 부딪히면 의식은 자기 내로 반성하여 기존의 의식 형태와 다른 새로운 의식 형태가 출현하며 이를 통해 의식이 자기 내로 반성하는 것이 곧 헤겔이 말하는 의식 경험의 길이다.

의식의 자기 내 반성은 그 의식에 대해 존재하는 대상을 넘어 물 자체 즉 딜레마가 출현하는 것을 매개로 한다. 의식이 딜레마를 매개로 더 일반적 의식으로 발전하면서 기존의 물 자체는 의식이 파악하는 현상 영역 안으로 들어오고, 이에 따라 의식이 규정할 수 있는 대상의 영역도 확장된다. 하지만, 이 새로운 의식 경험 역시 일정한 범주를 전제로 구성된 것이니, 다시 물 자체에 부딪히게 된다. 이렇게 매번 새롭게 등장하는 물 자체는 이전에 출현했던 물 자체보다 더 근본적인 물 자체가 될 것이다.

② 근거로의 복귀와 개념의 실현

이와 같은 ‘의식 경험’의 개념에 따르면, 의식은 개별적 형태에서 일반적 형태로 발전한다. 즉 좁은 영역에만 적용되는 의식의 범주는 이로부터 발생하는 물 자체까지 포괄하는 더 넓은 영역에 적용되는 일반적 의식 범주로 발전한다. 개별적 의식에 대해 일반적 의식은 근거가 되는 것이므로 의식 경험의 운동은 자기 내에 있는 근거로 복귀하는 운동이라 할 수 있다. 이 운동은 의식이 물 자체라는 대상에 부딪히는 운동이며, 마침내 의식과 대상이 통일되면서 자기의식이 되는 운동이다.

의식의 이런 운동은 출발점에서 본 운동이다. 이 운동을 그 결과에서 그리고 대상의 측면에서 본다면, 결과는 더 포괄적인 대상이므로, 이런 대상이 의식의 출발점에 가능성으로 있다가 마침내 실현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운동은 추상적이며 가능적인 것에서 구체적으로 실현된 것으로 나가며, 헤겔은 이런 운동을 개념의 자기실현 운동이라 한다. 여기서 추상적 가능성을 헤겔은 그 자체 존재라고 하고 이 그 자체 존재는 자기 밖의 물 자체에 대립하게 되면, 대자 존재와 대타 존재로 분리된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구체적으로 실현된 것을 그 자체이면서 동시에 대자적인 것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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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의식의 반성과 대상의 출현이 서로 매개한다. 의식이 자기 내로 발전하는 과정은 거꾸로 보면 대상의 본질이 드러나는 과정 즉 물 자체가 출현하는 과정을 매개로 한다. 거꾸로 대상의 본질이 드러나는 과정은 의식의 자기 내 반성을 매개로 한다. 의식이 더 일반적 의식이 되면서 더 근본적인 대상의 본질이 출현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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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이 존재하는 한, 끝없이 그 의식을 넘어서 규정될 수 없는 물 자체가 출현할 것이니 이 과정은 개방적이고 열린 과정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일정한 시대에서는 더는 당시의 의식으로 규정되지 않는 대상은 없으니, 그런 한에서 이 과정은 닫힌다. 열림과 닫힘은 서로 교체된다. 열린 운동 끝에서 보면 닫힌 것이며, 닫혔다 하더라도 새로운 물 자체가 출현하면, 다시 열리게 된다.

의식의 경험에서 의식은 개별적 의식에서 일반적 의식으로 발전한다. 반면 대상의 실현은 추상에서 구체로 나가니, 양자는 서로 전도된 모습을 취하고 있다. 전자가 상향적이며 끊임없이 자기를 넘어서는 개방적 과정이라면 후자는 하향적이다.

의식 운동이나 개념 운동은 서로 매개하는 것이니, 의식 운동의 이면에 개념 운동이 있으며, 개념 운동의 이면에 의식 운동이 있다. 헤겔의 경우 대부분 학문은 개념 운동의 길을 택하고 있다. 학문의 경우(논리학이든 자연철학이나 정신철학이든) 개념 운동이 전면에 나오며 그 이면에 의식 경험이 전개된다. 반면 『정신현상학』의 경우는 의식 경험의 길이 전면에 나오며 그것을 매개하는 것이 대상의 개념 운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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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는 헤겔이 말한 의식 운동과 개념 운동을 연구 과정과 서술 과정으로 설명했다. 연구 과정은 경험적으로 얻어지는 개별 사실들에서 출발하여 가장 일반적이고 근거가 되는 원리로 나간다. 서술 과정은 연구 과정을 통해 발견된 원리로부터 시작한다. 여기서 추상적 원리를 구체화하면서 현실의 대상을 설명하게 된다. 마르크스의 경우에서도 연구 과정과 서술 과정이 서로 매개한다.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보면, 장마다 먼저 개념적으로 서술한 다음 이를 다시 역사적인 발전을 덧붙이는데, 이는 연구 과정과 서술 과정이 매개됨을 보여준다.

③ 형태와 계기의 운동

의식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이전의 의식 형태는 이후의 의식 형태에 내면화[기억:Erinnerung ]되니, 이후의 형태가 전개될 때는 이전의 형태가 다시 반복된다. 다만 과거의 것이 똑같이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의식 형태를 지반으로 해서 반복된다. 그러므로 헤겔은 이를 개념의 계기가 된다고 한다. 의식 형태의 이행은 개념의 계기가 전개되는 과정에서 반영된다. 전자는 시간 속에서 일어나며, 이것이 곧 의식 경험의 길이다. 후자는 논리적 과정이며 이것은 앞에서 말한 대상의 개념 운동과 같은 것이다. 시간 속에서 이행과 사유 속에서 이행은 서로 다른 차원에 놓여 있음에도 서로 평행한다. 양자의 과정은 마치 계통의 발생 과정을 개체가 반복하는 것과 같다. 헤겔은 이를 형태와 계기의 관계라고 한다.

7) 정신의 전개 과정

헤겔에서 정신은 매우 포괄적인 개념이다. 이 정신은 세 가지를 포함한다. 즉 인식과 실천적 의지 그리고 표현이다. 헤겔은 『정신현상학』에서 이 세 가지 영역을 개별성과 일반성이라는 두 단계로 구분해서 다룬다. 그러므로 전체적으로 보면 『정신현상학』은 다음과 같이 구성된다. 이 구성은 대체로 헤겔이 칸트의 범주표에서 끌어낸 4개 범주(12개 판단형식)에 대응한다.

정신현상학 내용 판단형식
의식 개별적 인식 개별자의 본질을 인식하려는 시도가 다루어진다. 질 범주
자기의식 개별적 의지

(자아)

형식적 자유의의 출현 과정이 탐구된다. 이는 노예의 노동을 통해서 내적으로 출현하고 스토이시즘과 회의주의 불행한 의식을 거쳐 현실적으로 출현한다. 양(본질) 범주
이성 일반적 인식 사물의 일반적 본질이 인식된다. 이는 자연에서는 분류학의 형태로 출현하며, 인간 사회에서는 정의의 개념으로 출현한다. 실체 범주
정신 일반적 의지(일반적 자아) 개별 의지가 자기를 극복해서 일반적 본질 즉 정의를 실현하려는 이성적 의지로 발전하는 과정이 다루어진다. 이 과정에서 계몽주의, 프랑스 혁명, 칸트의 자유의지, 낭만주의의 양심 개념 들이 다루어진다. 개념 범주
절대정신 정신의 표현

(예술, 종교, 철학)

정신의 표현은 개별 의지를 공동 자아로 조직하는 방식을 결정한다. 그 공동 자아는 종교에서는 교회라는 형식으로 나타나며, 절대지의 단계에서는 삼위일체적 이상 국가로 출현한다. 이념

이런 과정에서 자기의식의 단계에서 개별적 자유의지가 출현한다. 이는 곧 형식적으로 자유로운 의지, 결정하고 선택하는 의지를 말한다. 이성의 단계에서 사회의 공동 목표라고 할 정의가 파악된다. 그리고 정신의 단계에서 이런 공동의 목표를 수행하는 실천적 의지가 형성된다. 마침내 절대정신의 단계에서 이런 실천적 의지 가운데 공동체의 정신이 출현하면서 구체적으로 이상 국가의 출발점이 된다.

8) 정신현상학과 이 시대의 철학

마르크스는 역사가 반복된다고 했다. 한 번은 비극이고 다른 한 번은 희극이다. 마찬가지로 사상도 반복하는 것이 아닐까?

90년대 초 포스트모던 사상이 불어닥쳤다. 대체로 푸코, 데리다 등 포스트모던 사상가는 후기 구조주의에 기초한다. 포스트모던 사상은 진리도 부정하고 어떤 가치도 부정한다. 포스트모던 사상은 억압을 반대한다는 긍정적 가치도 지니지만, 모든 것을 상대화하고 결국 개인주의, 상업주의, 쾌락주의를 정당화해 왔다. 이는 이 시대 함께 퍼진 신자유주의 체제의 이데올로기로 작동했다.

2008년 세계 금융위기를 전후로 신자유주의가 비틀거리기 시작했다. 이와 더불어 포스트모던 사상의 상대주의를 극복하려는 시도가 전개됐고 그 결과 전 세계적으로 직관주의적 철학이 발전했다. 라캉은 이드를 직접 대면하는 순간이 있다고 보았으며, 들뢰즈는 사물을 생성하는 미분적 차이를 직관할 수 있다고 보았다. 직관주의는 포스트모던 시대 사라진 진리와 객관적 가치를 찾으려는 숭고한 노력이었으나, 직관 개념이 지닌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직관은 결국 주관적이기 때문이다.

21세기를 수놓은 이런 사상의 발전은 거슬러 올라가면 헤겔 당시의 사상사적 발전을 상기시킨다. 칸트의 선험철학은 구조주의와 유사하다. 이어서 등장한 낭만주의 철학은 직관주의다.

헤겔은 칸트 선험철학을 계승한다. 즉 사태를 인식하는 데서 개념의 구조를 전제한다. 그렇게 된다면, 칸트가 말했듯이 물 자체의 아포리아에 부딪히고, 상대적 현상주의에 빠지게 되지 않을까? 그러나 헤겔은 개념의 구조를 전제하면서도 진리와 객관적 가치의 인식에 육박할 수 있다고 하면서 상대주의를 극복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면서 그는 개념을 거부하고 직관에 의존해 진리를 인식하려는 낭만주의를 비판했다. 즉 진리를 회복하려는 낭만주의의 이념을 받아들이면서도 그 방법에서 헤겔은 직관이 아니라 구조적인 개념을 통해 가능하다 보았다. 그 과정에 곧 앞에서 말한 의식 경험의 길인데 즉 모순과의 대결을 통해 사유가 객관화된다는 것이다. 그런 의식 경험의 길을 통해 헤겔은 한편으로 자기가 진리다라고 주장하는 독선적 오만에 빠지는 것도 경계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진리를 포기하고 상대적 세계에 머무르는 것도 거부한다. 헤겔은 신이 아닌 인간으로서는 모순에 온 몸으로 부딪혀 가면서 진리를 향해 끊임없이 전진하는 고투 외에 다른 길이 없는 것으로 주장한다고 할 수 있겠다.

헤겔이 제시하는 정신적 고투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아인슈타인의 물리학이 뉴턴의 물리학을 포함하면서도 넘어서는 것이거나 마르크스가 정치경제학의 노동 가치설을 수용하면서 이를 넘어서 독자적인 가치론을 확립한 것에서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헤겔 형이상학 산책50-양적 무한성[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형이상학 산책50-양적 무한성

1)

앞에서 셈법과 수의 종류를 다룰 때 정수에서 분수로 이행하면서 새로운 양이 출현한다고 했다. 정수는 외연 량을 표현한다. 그것은 길이나 무게와 같은 추상적인 개별 량이다. 분수는 비례 량을 표현한다. 이것은 두 개의 서로 다른 정량의 관계로 이루어진다. 예를 들어 무게와 부피의 비례인 비중, 거리나 시간의 비례인 속도와 같은 것이다. 이런 관계를 통해 성립하는 구체적인 양을 비례 량이라고 이름 붙였다. 양자를 매개하는 것이 내포 량 또는 정도다. 내포 량은 타자와 비교에서만 성립하지만, 여전히 추상적인 양이다.

외연 량(정수)에서 비례 량(분수)으로 나가는 과정은 경험적으로는 경험이 더 풍부해져서 개별적 정량을 넘어선 다른 정량들 사이의 관계가 출현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헤겔은 이런 이행을 추상에서 구체로 나가는 개념의 실현 운동으로 설명한다.

이 운동 과정에 대한 헤겔의 설명은 모호하다. 이는 c절 양적 무한성 절에서 설명되는데, 표면적으로 보면, ‘악 무한’에서 ‘진 무한’으로 이행하는 것으로 설명된다. 그 사이를 매개하는 것이 무한 진행이다. 무한 진행이 악 무한(예를 들어 무한대나 무한소)으로 표현됐다가, 이것이 무한 진행임이 밝혀지고 나아가서 그 본질은 진 무한 또는 내적인 무한성 개념이라는 사실이 자각된다.

처은 악 무한을 다룰 때는 헤겔의 설명은 동일한 정량에서 정량의 운동(예를 들어 길이의 확장)을 설명하는 듯이 보였다. 그런데 진 무한 개념이 등장하면서 이 진 무한이 곧 비례 량 즉 다른 정량의 내적 관계임을 천명하면서 끝난다. 이 과정은 약간 어리둥절하게 보이며 이 과정을 분석적으로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여기에 헤겔이 논의를 전개하는 독특한 방법이 숨어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제 헤겔의 논의를 따라가 보자.

2)

먼저 헤겔에서 양적 무한성에 관한 개념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그 출발점은 하나의 정량과 다른 하나의 정량이 관계다. 이 관계는 길이나 무게와 같은 개별 정량에서 두 정량의 관계로 볼 수도 있고 비중같이 두 다른 정량 사이의 관계로 볼 수 있다. 차라리 헤겔의 개념 규정은 앞으로 보게 되겠지만, 이 두 차원을 넘나든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는 개별 량와 비례 량이라는 구체적 내용의 차이를 무시하고 두 정량의 일반적 형식적 관계를 보자.

양적인 것은 대자 존재인 일자에서 동일한 대자 존재인 다른 일자로 이어지는 것이다. 여기서 서로 같은 대자 존재가 관계한다는 점에서 연속적이며 각 대자 존재는 고유한 일자라는 점에서 서로 구별되고 무차별하므로 이 관계는 분산적이다.

양적 관계가 이와 같은 이중성을 지니므로, 어떤 정량의 부정은 정량의 타자지만 또 하나의 정량이 된다. 그러므로 그 부정은 새로운 정량에 머무르지 못하며, 그 새로운 정량조차 자기를 부정하게 하니, 이 과정은 끝없이 계속된다. 새로운 정량은 기존 정량의 부정이면서 동시에 자기가 부정되니, 이중 부정 또는 자기 부정이며 이런 점에서 무한 정량, 즉 양적인 무한성이 된다.(이런 자기 부정성 개념은 길이나 무게 등 개별 정량의 무한 진행에서 잘 드러날 것이다.)

앞에서 질적 무한성 개념을 다룰 때도 양적 무한성에서와 마찬가지의 자기 부정성이 출현했다. 그러나 같은 자기 부정성이더라도, 질적 무한성과 양적 무한성에서 나타나는 모습은 다르다. 이제 현존 절에서 다루었던 질적 무한성과 양 절에서 나타나는 양적 무한성을 비교해 보자.

3)

질적 존재에서 규정성은 어떤 것이 지닌 속성이다. 예를 들어 소금은 짜거[p]나 입방체[-p]다. 모든 소금은 짜며, 동시에 입방체다. 양자의 통일은 p가 아니고 -p도 아니며 동시에 p이면서 -p인 것이다. 이것은 서로 대립하는 p와 -p를 매개하고 자기를 p와 -p로 출현하게 하는 동시에 양자를 초월하는 일반성 즉 대자 존재다.

이 질적 무한성 즉 대자 존재는 자기를 때에 따라 p나 -p와 같은 대립하는 성질로 나타내는 운동을 의미하지만, 그 자신은 질적 성격을 잃어버리고 양적인 것으로 전환한다. 왜냐하면, 대자 존재와 대자 존재는 일자와 일자의 관계이며 양적인 관계이기 때문이다. 즉 질적 무한성은 양으로 이행한다.

일반적으로 질적 규정성은 타자와 대립하는 가운데 타자의 부정을 통해(반성적으로) 규정된다. 예를 들어 짠맛은 입방체에 대립해서 짠맛으로 규정된다. 즉 p는 -(-p)이다. 양적인 것에서는 이런 타자에 대한 대립 관계가 사라진다. 그 때문에 질적 성격도 사라진다. 여기서는 동일한 대자 존재 그러나 서로 무차별한 존재 즉 일자와 일자 사이의 관계만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양적 존재에서 두 대자 존재, 즉 일자와 일자는 서로 동일한 것이면서도 서로 무차별한 것이다. 두 개의 나뭇잎, 두 개의 물방울은 서로 무차별하면서도 서로 동일하다. 그러므로 여기서 양적인 무한성 즉 p가 아닌 것은 그 자체가 p이므로 자기 자신도 부정할 수밖에 없으니 어떤 부정은 자기 부정으로 나타나게 된다. 이런 끝없는 자기 부정성이 곧 양에서 나타나는 양적 무한성이다. 이런 양적 무한성은 하나의 정량 내에서 이 정량이 자기를 부정해서 자기를 넘어서게 만드는 것 그러므로 내적인 무한성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정량에서 나타나는 자기 부정성이 독특하다는 사실이다. 정량의 자기 부정성은 어떤 정량의 타자가 곧 자기 즉 자기와 같은 대자 존재이므로 나타나는 자기 부정성이다. 그러므로 이 부정성은 타자를 부정해서 다시 자기가 되는 것이다. 전자의 측면에서는 타자로 미끌어지는 것(무한 진행)이며 후자의 측면에서는 자기 자신으로 되돌아오는 것이다. 미끌어진다는 측면에서 그것은 무한성이다. 그러나 타자를 부정해 자기로 돌아온다는 측면에서는 규정성이다. 질적 규정성이란 타자에 대립해서 나타나는 부정성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무한성을 통해 양에서 질적인 것이 회복된다.

4)

예를 들어(이런 의미에서 양적 무한성은 개별 량에서보다 오히려 비례 량에서 더 잘 드러난다) 무게는 독자적인 정량일 수도 있고 부피에 비례하는 정량일 수도 있다. 후자가 비례 량이다. 전자일 때는 정량의 규정성(예를 들어 삼 미터)은 자기(길이)에 대해 외면적이다. 그 규정성은 자기에 무차별하다.

그러나 부피에 비례하는 무게 즉 밀도 또는 비중은 같은 타자에 대해 관계하는 정량이다. 비중이 크다는 것은 그저 무게와 무차별한 부피에 대해 무게가 외면적으로(사유를 통해) 비교된 것이 아니다. 비중은 부피라는 자기의 타자에 대해 관계하며 그것도 대립적으로 관계하니 즉 비중이 크다는 것은 자기의 부피를 축소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비중은 부피에 대립하고 부피를 부정하는 것이다.

이처럼 타자에 대립해서 규정되므로 질적인 규정성이 다시 회복된다. 비례 량을 이루는 구성 요소인 개별 양은 추상적이고 그 각각은 양적 관계를 갖지만, 비례 량에 이르면, 그 자체는 한편으로는 여전히 양적 관계에 머무르면서도 이제 질적 차이를 발생하게 한다. 이런 점에서 헤겔은 양적 무한성 즉 이중적 부정은 “어떤 정량으로서뿐만 아니라 정량 자체로서 지양된 정량이다.”(논리학 초판, GW12, S. 140)라고 한다. 즉 단순히 하나의 정량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정량 자체를 부정하는 것 즉 질을 회복한다는 것이다.

“정량은 자기의 비 존재 무한자를 매개로 하여 다른 정량 속에서 자기 규정을 갖는다. 즉 질적인 차원에서 정량의 본성으로 된다. 그러나 정량의 개념과 그 현존을 비교하는 것은 차라리 우리의 반성에 속하며 즉 여기서 아직 출현하지 않은 비례에 속한다. … 이제 외면성 속[정량의 타자]에서 자기 자신이라는 것, 외면성 속에 자기 관계하며 자신과 단순한 통일성 속에 있고 질적으로 규정되어 있다는 것이 정립된다.”(논리학 재판, GW21, S. 235)

“이 비례 속에서 정량은 자기에 외면적이며 자기 자신과 상이하다. 그러나 이 자기의 외면성, 다른 정량에 관계하는 것이 동시에 그의 규정성을 이룬다. 이 속에서 무차별한 규정성이 아니라 질적 규정을 갖는다. 정량은 자기의 외면성 속에서 자기 내로 복귀한다.”(논리학 초판, GW12, S. 153)

5)

양적 무한성의 개념은 이처럼 자기를 자기가 부정하는 것이라는 의미다. 그런데 헤겔은 양적 무한성 개념을 통해서 무한대나 무한소, 무한 진행, 진정한 무한성이라는 세 가지 개념을 구분한다.

무한대, 무한소는 무한히 크고 무한히 작은 것을 실체화하여 실제로 그런 것이 존재한다고 할 때다. 그것은 마치 피안이 존재한다고 할 때와 같은 의미다. 반면 무한 진행은 정량이 극한에 도달한 순간 다시 그것을 넘어가는 것을 말하니, 비유하자면 수평선을 끝까지 가면 다시 더 멀어지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과 같다.

그러나 헤겔은 무한대나 무한소는 잘못된 이미지라고 보며 이를 일단 무한 진행이라는 개념으로 환원한다. 사실 엄밀하게 말해서 무한대나 무한소는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헤겔에 따르면 그것은 무한 진행의 왜곡된 표현이며 이 무한 진행을 일정한 이미지로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무한대나 무한소로서 무한량은 본래 무한 진행이다. 그것은 크거나 작은 것으로서 정량이면서 정량의 비존재다. 따라서 무한대나 무한소는 표상을 이미지화한 것이다. 그 표상은 좀더 가까이 다가가 고찰해 보면, 무실한 그림자와 안개처럼 나타난다.”(논리학 재판, GW21, S. 233)

“정량을 넘어서는 것은 정량의 부정 즉 무한이다. 그러나 새로운 정량이 정립되면서 이것은 무한의 부정이다. 이 악 무한은 표상에서 절대자로 여겨지며 다시 지양되지 않는 최종적인 것으로 여겨지고 그것을 더는 넘어설 수 없는 것으로 여겨진다.”(논리학 초판, GW12, S. 151)

헤겔은 이런 무한 진행 역시 넘어서면서 이 무한 진행은 진 무한으로 이행해야 한다고 말한다. 무한 진행은 끝없이 자기를 부정해서 앞으로 나가는 운동인데, 진 무한은 자기를 부정하고 자기를 넘어서는 탈자화의 운동 자체를 말한다.

엄밀히 말하자면, 무한 진행와 진 무한은 다를 바가 없다. 둘 다 자기를 넘어서는 운동이다. 진 무한이라 할 때는 어떤 정량 속에 그것이 자기를 넘어서는 운동을 말한다. 무한 진행이라 할 때는 그런 진 무한의 운동한 결과 도달한 결과가 다시 넘어서서 끝없이 전개되는 것을 말한다. 진 무한이 내적 운동이라면 무한 진행은 그런 내적 운동의 표현이다.

자기를 부정한다는 것은 질적 무한성에서도 출현한다. 이때는 질적 무한성은 대립하는 성질을 넘어서는 포괄적 일반화로 즉 대자 존재로 나간다. 그러나 양적인 것의 평면에서는 자기 부정성은 즉 양적 무한성은 일반화가 아니라 옆으로 미끌어지는 무한 진행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럼에도 무한 진행의 진정한 모습이 내적 부정성에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그저 외면적으로 끝없이 앞으로 나가는 모습만을 취해서 본다면 그것이 헤겔이 비판하는 무한 진행이다. 무한 진행은 아직 내적 부정성의 운동임을 모르고 있는 내적 부정성의 운동일 뿐이다. 거꾸로 무한 진행이 지닌 본래적 모습을 자각한다면, 그것이 곧 진 무한이다. 헤겔은 이 진 무한을 ‘정량의 개념’, ‘개념에 따라서 규정된 정량’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무한자는 다만 최초의 부정으로 규정되고 무한 진행 속에 나타난다. 그러나 이런 무한 진행 속에서 그 이상의 것이 출현한다는 사실이 지적되어 왔다. 즉 부정의 부정 또는 본래적으로 무한자인 것이 말이다. 이런 사실은 정량의 개념이 이를 통해 회복된 것으로 여겨져 왔다.”(논리학 재판, GW21, S. 234)

5)

위에서 악 무한이나 무한 진행은 진 무한을 왜곡된 방식으로 표현하는 것으로 설명했다. 그러나 헤겔의 설명을 제대로 이해한다면, 사실 이런 무한의 여러 종류는 자연의 운동 또는 수 운동의 종류에 따라서 다르게 나타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필자는 헤겔의 설명을 이해하기 위해 헤겔의 설명을 다음과 같이 재구성해 보았다.

앞에서 말했듯이 양적 무한성은 정량에 내재하는 운동이며 이는 곧 자기를 부정하는 또는 자기를 넘어가는[Hinaus] 운동이며, 자기를 벗어나는 운동 즉 탈자화[Aussersich]로 규정된다. 그런데 이런 양적 무한성은 정량의 종류에 따라서 다른 방식으로 출현한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 먼저 자연에 존재하는 다양한 운동을 보자. 이 자연의 운동은 수적으로 표현될 수 있다.

등속 운동 S=at a ; 1, 1, 1 (정수): 속도가 고정된 운동

등가속 운동 S=vt v=S/t : 1/2, 2/4, 3/6 (유리수적 분수)…. : 일정한 양으로 속도가 증가하는 운동

가속 운동 S=1/2at² a=2S/t² : 1/2, 1/4, 1/9(무리수적 분수) … : 속도가 가속적으로 증가하는 운동

여기서 세 가지 운동은 전혀 다른 운동으로 보이지만, 사실 하나로 환원될 수 있다. 즉 가속 운동이 단순화된 형태가 등가속운동이고 이 등가속 운동이 단순화된 형태 등속 운동이라는 것이다.

세 가지 운동을 이렇게 본다면, 이 관계를 다시 이렇게 설명할 수도 있다. 양적인 영역에서 운동의 개념은 탈자화하는 운동이다. 즉 자기를 부정해서 또 다른 자기로 이행하는 운동이다. 그런 운동의 개념이 등속 운동에서는 가능성으로만 나타나고 비로소 가속 운동에 이르러 그 개념이 실현된다고 볼 수 있다.

등속 운동에서 운동의 개념이 가능성에 머무르고 감추어져 있다. 무한 진행이 감추어져 있다는 사실은 이 운동에서 운동의 개념인 운동의 기울기가 곧 0라는 것을 통해 표현된다. 그러므로 여기서 운동은 외면적으로만 나타나고 그 결과 운동은 악 무한이나 무한 진행이라는 외적인 모습으로 나타난다.

반면 기울기가 일정수인 경우나 기울기가 증폭하는 경우에서도 그 운동은 무한히 확산한다. 그러므로 여기서도 무한 진행이 나타난다. 그러나 이런 경우에는 운동의 개념이 이미 드러나고 있다. 여기서 운동이 확산하거나 증폭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속에 있는 운동의 기울기가 내적 부정성, 진 무한의 표현이라는 사실을 드러낸다.

6)

자연의 운동이란 본래 두 가지 정량 사이의 관계다. 이는 등가속 운동이나 가속 운동이 분수로 표현된다는 사실을 통해 잘 드러난다. 이런 운동의 개념은 이미 개별 양이 지속적으로 전개되는 등속 운동에서도 감추어져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드러나지 않을 뿐이다. 따라서 엄밀하게 말하자면 등속 운동도 비례 량이다. 이미 거기서도 두 다른 정량이 관계하고 있다.

등속 운동에서는 비례 량이라는 사실도 드러나지 않기에 여기서는 마치 개별적 정량이 자기 내에서 서로 관계하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그러나 등가속, 가속 운동에 이르러 운동의 개념이 드러나면서 두 다른 정량의 비례 량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존재론 현존 절은 판단 형식에서 질적 범주에 해당한다. 존재론 양적인 것은 판단 형식에서 양의 범주를 다룬다. 이때 1절 양적인 것은 양의 운동 일반을 다룬다. 2절 정량은 양의 판단 형식에서 최초의 판단인 단칭 판단의 형식에 해당한다. 그리고 이 단칭 판단이 부정되는 가운데 양적 무한성 개념이 출현하고, 그 결과 등장하는 진 무한은 곧 특칭 판단 형식에 해당한다. 진 무한은 곧 비례 량이니 비례 량이 특칭 즉 양적인 어떤 것에 해당한다.

헤겔 형이상학 산책49-외연량, 내포량, 비례량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형이상학 산책49-외연량, 내포량, 비례량

1)

앞에서 정량에 두 종류가 있다고 했다. 외연량과 내포량이다. 외연랑은 자기의 한 부분을 단위로 해서 자기를 잴 수 있다. 외연량은 이 단위가 몇 배인가[Vielheit]로 표시된다. 수적으로 표현하자면 외연량은 기수로 표시될 수 있다. 구체적으로는 물체의 길이나 무게와 같은 정량을 예로 들 수 있겠다. 헤겔은 이런 외연량은 “자기 내에서 개수”, “자기 관계하는 다수라는 규정성”을 갖는다고 말한다.

그에 반해 내포량은 이런 몇 배라는 방식으로 표시할 수 없다. 한마디로 여기서는 기본 단위가 발견되지 않는다. 어떤 것의 내포량은 다른 것의 내포량과 비교를 통해 더 많거나 더 적거나 하는 방식으로만[Mehrheit] 표시된다. 수적으로 말하자면 내포량은 다만 서수로만 표시될 수 있다. 예를 들어 다이아몬드가 경도에서 스무 번째라 할 때 그런 점에서 경도가 첫 번째 되는 사물보다 다이아몬드의 경도가 스무 배 더 강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저 여러 사물의 경도를 서로 비교해 볼 때 스무 번째라는 말에 지나지 않는다.

내포량은 이처럼 타자와 비교를 통해 나오지만, 여전히 여기서 비교되는 정량은 하나의 정량이며 이는 비교되는 타자와 공유하는 정량일 뿐이다. 즉 물질의 경도나 강도나 감각적 뜨거움이나 가벼움 등과 같은 특정 정량이 비교된다. 그러므로 헤겔은 내포량은 “자기 밖에 있는 것으로서 개수,” “자기에게 외면적인 것으로서 규정성”을 갖는다고 한다.

헤겔은 외연량과 내포량을 넘어서 새로운 정량의 형태로 이행한다. 이 새로운 정량의 형태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비중과 같은 것인데, 이는 두 개의 정량(부피와 무게)의 관계 또는 비례를 통해 형성되는 정량이다. 이제 단순한 정량에서 관계 속에 있는 정량 즉 비례량으로의 이행을 살펴보기로 하자.

2)

자연에는 이처럼 두 개 정량 사이의 관계를 통해 형성되는 정량이 많다. 비중을 예로 들었지만, 비중 외에도 등속도 운동을 보자. 속도는 시간에 비례한다. 등속 운동은 분수로 표현된다. 즉 p=V/t이다. 또 뉴턴의 힘의 법칙에서 힘은 질량이나 가속도에 비례한다.(즉 F=am)

앞에서 수의 종류가 발전하는 가운데 분수가 출현한다고 했다. 분수는 더하기, 곱하기를 거쳐 셈법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이지만, 이런 셈법은 단순히 사유의 유희는 아니다. 이런 분수가 곧 두 개의 정량 사이의 관계를 의미한다고 보면, 이 분수는 자연에 존재하는 어떤 정량 즉 두 개의 정량 사이의 관계 또는 비례를 통해 만들어지는 정량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다.

이런 분수를 통해 표현되는 정량은 외연량과 내포량보다 더 발전된 정량이다. 외연량이 자기를 단위로 하는 것이라면, 내포량은 타자와 비교하되 결국 동일한 단순한 정량의 측면에서 서로 비교되는 것이다. 그러니 내포량은 자기 관계를 아직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이제 새로이 등장하는 비중과 같은 비례량은 더는 단순한 정량에 머무르지 않으니, 여기서 비교되는 정량은 비교하는 정량과 전혀 다른 정량이다. 즉 하나의 정량이 타자를 통해 규정되는 것이다. 여기서 비교되는 것은 비교의 대상을 단위로 측정된다.

어떤 것이 단순히 자기 관계하지 않고 타자 관계 속에서 규정된다면, 그것은 질적인 것이 된다. 헤겔에서 질이란 타자의 부정성을 기본 성격으로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때 타자는 그 질과 대립하는 타자이며, 이때 두 가지는 반성 관계에 있게 된다. 구체적으로 예를 들자면 헤겔에서 빨강은 항상 빨강이 아닌 색과 대립해서만 빨강으로서 의미를 지닌다.

마찬가지로 하나의 정량이 단순한 자기 관계 속에서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와 대립하는 다른 정량을 통해서 규정된다면 그때 이 정량은 질적으로 규정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3)

외연량과 내포량은 단순한 정량이다. 그 정량의 한계를 규정하는 방식 즉 몇 배수[Vielheit]냐 아니면 크고작음[Mehrheit]이냐 방식의 차이다. 그런데 외연량과 내포량을 측정할 때 다른 정량과 관계하는 방식으로 측정할 수도 있다. 이렇게 되면 외연량이나 내포량은 서로 환원될 수 있다.

외연적 크기는 내포량을 지닌 정량과 관계하면, 내포적으로 규정된다. 예를 들어 무게를 보자. 무게는 외연량이지만, 만일 피부에 가해지는 압박감을 통해 규정된다면 내포량으로 규정된다. 무거운 것은 강하게 압박하고, 가벼운 것은 약하게 압박한다.

“외연적 크기는 내포적 크기로 이행한다. 왜냐하면, 그 다수의 개수[Vieles]는 그 자체로 그리고 대자적으로 총수 즉 다수의 개수 바깥에 등장하는 총수로 몰락하기 때문이다.”(논리학 재판, GW21, S. 213)

거꾸로 내포량도 외연량을 지닌 다른 정량을 통해서 규정될 수 있다. 예를 들어 감각적 내포량인 뜨거움을 보자. 이 뜨거움은 수은주를 확장하는 효과를 지니는데, 그런 수은주의 확장은 외연량으로 측정된다. 그러므로 뜨거움도 외연량으로 규정될 수 있다.

“다르게 규정된 내포성에 무차별한 것으로서 이 단순한 것은 외면적인 개수를 그 자체에서 가지며, 따라서 내포적 크기는 본질적으로 외연적 크기다.”(논리학 재판, GW21, S. 213)

외연량과 내포량은 사실 단순한 정량이므로 실제 세계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라기보다 인간이 필요에 따라 측정하기 위해 추상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실제 모든 정량은 항상 다른 정량과 관계 속에 있으므로, 이런 관계의 방식에 따라서 외연량은 내포량으로, 내포량은 외연량으로 전환할 수 있다.

거꾸로 말하자면 두 정량의 관계를 통해서 규정된 새로운 정량 즉 비례량은 외연량인 동시에 내포량이라고 할 수 있다. 비례량이라는 개념을 통해 헤겔은 외연량과 내포량을 통일한다. 앞에서 두 정량의 관계 즉 비례량을 통해 양적인 것에서 질적인 것이 출현한다고 했다. 이 두 가지 주장을 연결하면 다음과 같은 헤겔의 말을 이해할 수 있다.

“양자[내포량과 외연량]의 동일성으로부터 질적인 어떤 것이 등장한다. 왜냐하면, 이 동일성은 자기의 구별을 부정하는 것을 통하여 자기에 관계하는 총수이기 때문이다.”(논리학 재판, GW21, S. 213)

4)

정량에는 수의 종류만큼이나 다양한 것이 있다. 수가 분수로 발전하면서 단순한 정량은 관계를 지닌 비례량으로 발전한다.

분수는 다시 두 가지로 구분된다. 유리수에 머무르는 것과 무리수가 되는 것이다. 유리수적 분수가 자연수의 비례 관계로 표현한 것이라면 무리수에서는 제곱의 비례 관계가 출현한다. 예를 들어 등속도 운동 S=vT 와 가속도 운동 S=1/2aT² 을 서로 비교해 보면, 그 차이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만일 분수에서 허수가 개입하게 된다면, 이는 원운동과 같은 것으로 출현할 것이다.

양자는 마찬가지로 분수로 표현되지만, 그 의미는 달라진다. 등속도 운동, 가속도 운동, 원운동은 서로 다른 운동을 표현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지만, 이들의 관계를 이렇게 볼 수도 있다. 즉 등속도 운동도 하나의 가속도 운동이지만 가속도 운동의 가장 낮은 단계일 뿐이며, 마찬가지로 가속도 운동도 원운동으로 볼 수 있지만, 그 원운동의 가장 낮은 극한에서 등장한 한 운동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의 관계를 헤겔적 개념을 가지고 설명한다면, 등속도 운동에서는 개념이 아직 숨어 있고 마침내 원운동에 이르러 비로소 개념이 자기를 실현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마찬가지로 외연량, 내포량, 비례량을 서로 다른 자연의 운동을 표현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달리 보면, 외연량은 내포량의 가장 낮은 극한이며, 내포량은 비례량의 가장 낮은 극한으로 볼 수 있다. 즉 비례량에서 표면에 드러나게 될 개념이 외연량에서는 감추어져 있다는 것이다.

이제 중요한 것은 이렇게 감추어진 개념을 드러내는 일이다. 그렇다면 이런 숨어 있는 개념이 표면에 드러나는 과정은 어떻게 일어날까? 헤겔은 바로 그것을 부정의 작용으로 본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부정의 부정이라는 이중 부정인데, 이런 이중 부정을 통해 정량에 감추어진 개념이 드러난다.

이 정량에 감추어진 개념이 곧 무한 개념이다. 헤겔에서 이 무한 개념은 곧 자연의 운동하는 모습을 의미한다. 이어서 헤겔은 2편 2장 3절에서 ‘양적 무한’ 개념을 다루는데, 여기서 헤겔은 비례량에서 드러날 무한 개념을 그 출발점에서부터 추적해 나간다. 무한 개념은 외연량과 내포량, 비례량에서 서로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앞에서 나타난 무한 모습(무한소나 무한대/ 그리고 무한 진행)은 최종적인 비례량에서 나타나는 무한의 모습즉 진 무한을 암시하며 선취하는 것이다. 유의해야 할 것은 무한 개념의 발전 밑에는 정량의 종류에서 발전이 매개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헤겔 형이상학 산책48-셈법과 수의 종류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형이상학 산책48-셈법과 수의 종류

1)

앞에서 여러 번 수는 정량을 대표하는 정량의 화폐라고 말했다. 이 수를 세는[Zaehlen] 것을 셈법[Rechenschaft]이라 한다. 셈법은 초등학교 들어가서 배우는 제일의 기법이다. 누구나 셈법 하면 더하기 빼기, 곱하기 나누기가 있다는 것을 알 것이다.

더하기 빼기는 그 가운데 더 초보적이고 곱하기에 숙달하려면, 외우는 것이 요구된다. 구구단을 얼마나 외웠는지, 이 나이 들어 자기 전화번호는 종종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래도 구구단은 잘 외운다.

흥미로운 것은 우리는 구구단이라 하는 데 독일 사람들은 일일단[Einmaleins]이라 한다. 이왕 농담하는 김에, 켐브리지 대학교에서 발간한 수학에 관한 소개서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옛날 그러니까 중세 독일의 한 상인이 자식을 상인으로 키우기 위해 셈법을 가르쳐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당시 독일 대학교수(아마 수학 교수는 없었고 철학 교수였을 것이다)에게 자식을 데리고 가서 후하게 해 줄 테니 자식에게 셈법을 가르쳐 달라고 했다. 그때 독일 교수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예, 더하기 빼기까지는 저희가 가르칠 수 있지만, 곱하기 나누기를 배우려면, 이탈리아 유학을 가야 합니다.”

이 농담의 전거를 굳이 밝힐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당시 독일에서는 아라비아 숫자를 쓰지 않고, 로마자로 수를 표현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럴듯하다. 솔직히 지금 필자는 로마자로 된 숫자조차 제대로 읽기 힘들다. 본론으로 돌아가자.

셈법이 이처럼 초등학교에서 배우는 단순한 기술이라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헤겔이 논리학에서 이 셈법에 관한 철학을 제시했으니 말이다. 좀, 웃길 것 같은데, 사실은 헤겔의 논리학에서 정량에서 무한량 개념으로 이행하는 이유를 이해하는 데서 결정적인 것이다. 이 부분에는 전거를 밝힐 필요가 있겠다.

헤겔 논리학 재판에서 대체로 주석에 관한 한, 초판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런데 주석조차 초판을 대폭 확장한 부분이 있는데, 그 부분이 바로 정량과 무한량을 다루는 절에 속한 주석이다. 무한량을 다룬 주석에서는 거의 100쪽에 가까운 광대한 주석을 달아서 소위 해석기하학의 근본원리 즉 무한계산의 원리를 철학적으로 다룬다. 그에 앞서서 정량의 1절(제목 수)에 덧붙인 주석 1에서는 초판의 주석에 덧붙여 바로 이 셈법을 철학적으로 다룬다.

2)

헤겔은 이 셈법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항상 다만 동일한 것을 다루면서도 외면적으로 산출하는 셈법의 상이성은 셈해지는 수들의 상호 차이에 놓여 있다. 그런 구별은 어디 다른 곳에서 외면적인 규정으로부터 받아들여야 한다.”

간단히 말해 셈법의 차이가 곧 수들의 차이에서 나온다는 말이다. 셈이란 동일한 수를 다루는 것이 아닐까? 더하기와 곱하기, 나누기에서 셈하기 전의 수와 셈한 이후의 수는 동일한 수다. 이런 수들은 소위 자연수 가운데 어느 한 위치에 놓여 있는 것이니, 셈법의 차이와 수의 차이는 무관하지 않을까? 그런데도 헤겔은 수의 차이에서 셈법의 차이가 나온다고 하는데, 그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

셈법에 네 가지가 있다는 것은 다시 말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우선 더하기와 빼기를 생각해 보자. 이건 어렵지 않다. 3 더하기 4는, 3개까지 개수를 세고, 더해서 4개의 개수를 더 센 것이다. 이것은 손가락으로 세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앞에서 말했듯이 여기서 중요한 것은 여전히 개수가 그대로 보존된다는 것이다. 즉 7개의 개수가 아니라 8개나 6개가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 명제는 분석적이라 본다. 하지만 이 분석적 명제를 아는 데는 경험적으로 즉 손가락으로 세어보는 것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그 결과가 12개의 개수라는 사실은 분석적으로 알 수 있지만, 그것을 어떤 총수로 표현하는가를 알려면, 손가락의 도움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빼기는 더하기로 환원된다. 3 빼기 2은 3 더하기 -2이다. 즉 3에서 거꾸로 세워가면 된다. 빼기가 더하기로 환원된다고 하더라도, 이미 여기서는 -수가 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 수는 앞으로 가는 것이라면, -수는 거꾸로 가는 것이다. -수가 등장하면서 수가 하나의 벡터 즉 운동하는 방향을 지닌 것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우리의 시야가 공간의 좌우로 뻗어 나간 것이다.

3)

이제 곱하기를 생각해 보자. 더하기는 1이라는 단위를 개수만큼 반복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3 곱하기 4에서, 곱하기는 3이라는 총수가 이제 기본 단위가 된다. 그래서 이런 기본 단위를 4번 반복하는 것이다. 즉 3+3+3+3이다. 3은 1+1+1이니, 위의 곱하기는 (1+1+1)+(1+1+1)…로 환원할 수 있어서, 곱하기는 더하기와 다름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수의 기본 계기를 단위, 개수, 총수로 볼 때, 여기서 단위는 총수와 일치한다. 즉 총수가 기본 단위가 된 것이다. 더구나 3 곱하기 4는 4 곱하기 3이나 마찬가지다. 즉 3이라는 총수를 단위로 보고 4를 개수로 보든, 4를 단위로 보고, 3을 개수로 보든, 마찬가지다.

나누기는 곱하기를 변형한 것이다. 3 곱하기 4는 12라는 명제는 12를 4 또는 3으로 나누면 3 또는 4가 된다. 이는 얼마나 여러 번 기본 단위 3이나 4가 주어진 총수 속에 포함돼 있는가를 의미한다. 그 답이 곧 개수다. 또는 나누기는 이렇게도 해석될 수 있다. 즉 어떤 총수를 주어진 개수(3이나 4)에 도달하도록 나누려면 기본 단위를 무엇으로 해야 하는가로 이해할 수도 있다.

어떻든 곱하기와 나누기는 총수를 원하느냐, 개수를 원하느냐, 단위를 원하느냐 하는 요구에 따라 달라지는 표현일 뿐이다. 일정한 과자를 자기 아이들에게 동일하게 나누어주려면 단위가 필요하며, 일정한 과자를 한 아이가 먹을 만큼 나누어주면 몇 명이나 먹일 수 있는가를 생각하려면 개수가 필요하다. 나가서 자기 아이가 먹을 만큼 과자를 사려면 얼마나 사야 하는지, 그 총수를 알려면 곱하기가 필요하다.

더하기는 양수의 영역에서 일어나는 운동이다. 빼기에 이르면 수는 정수로 확장한다. 곱하기는 여전히 정수에 머무르는 것 같지만, 나누기에 이르면 이제 수는 분수의 영역으로 들어가게 된다. 곱하기에는 여전히 자연수에 머무른다. 그러나 그것을 변형한 나누기에 이르면, 자연수를 넘어선 분수가 출현하게 된다.

곱하기는 다시 거듭제곱으로 발전한다. 거듭제곱 예를 들어 3³은 3*3*3이다. 이것은 처음 3이라는 총수가 단위로 되어 3의 개수만큼 반복한다. 그 결과는 9인데 이제 9가 단위가 되어 다시 3의 개수만큼 반복한다. 그러므로 이 거듭제곱은 곱하기로 환원되고, 다시 더하기로 환원될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단순한 곱하기는 반복적이지만 여기서 곱하기는 누적적으로 일어난다. 누적하는 운동이 들어간다.

나아가서 거듭제곱은 새로운 수를 발생한다. 이는 그것에 대립하는 운동인 근의 운동에서 드러난다. 제곱근은 4의 제곱근은 +/-2이어서 지만, 5의 제곱근은 루트로 표현된다. 즉 무리수다. 나가서 삼제곱이나 삼제곱근에 이르면 허수가 등장하게 된다.

이처럼 셈법의 상이한 방식은 수의 종류와 연관된다. 한편으로 셈법이 발전하면서 수의 종류도 발전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의 생각이다. 이런 생각은 분수나, 무리수, 허수 등이 인간 사유의 산물로 생각한다. 그러나 헤겔은 오히려 거꾸로 설명한다. 즉 수의 종류는 자연 속에 이미 존재하는 정량의 운동과 관계를 표현하는 것이며, 이 운동과 관계를 우리가 인식 또는 파악하면서 셈법이 나온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헤겔은 앞에서 말했듯이 셈법의 기원은 수의 차이에 있다고 한 것이다.

4)

그렇다면, 수의 종류는 정량의 어떤 관계를 표현하는 것일까? 헤겔은 두 가지를 집중적으로 설명하는데, 분수와 무리수다. 무리수는 나중에 무한량(미분양)과 관계되는 데, 우선 정량을 다루는 데서는 분수가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우선 분수를 보자. 그런데 분수란 무엇인가? 헤겔은 이 분수를 단순한 수의 관계가 아니라 자연에 존재하는 두 가지 정량의 관계를 표현하는 것으로 본다. 예를 들어 비중은 질량과 부피의 관계다. 가속도는 힘과 질량의 관계다. 분수는 이런 두 개의 정량이 갖는 관계를 표현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다.

자연 속에 정량은 하나의 양이다. 이 정량은 동일한 일자의 반복적 관계이며, 이 정량은 외연량과 내포량으로 구분된다. 앞에서 설명했듯이 외연량은 자기의 한 부분으로 자기를 측정한다. 이는 단순한 자기 관계다. 헤겔에서 단순하다는 것은 추상적이라는 말이며, 개별적이라는 의미다. 예를 들어 길이나, 무게 등등 각각은 이런 추상적인 개별적 정량이다.

그런데 내포량에 이르면 이 내포량은 이런 추상적인 단순한 자기 관계를 벗어난다. 내포량은 다른 것과 비교해서만 측정되며, 즉 어떤 것은 다른 것보다 어떤 점에서 더 많고 더 강한 것이다. 헤겔은 이런 내포량은 타자를 매개로 해서 자기 관계하는 정량이라고 규정한다.

내포량에서는 아직 하나의 정량이 다른 정량에 대한 관계가 출현한 것은 아니다. 다른 것과 비교되지만, 그러나 비교되는 것 자체는 동일하다. 즉 다이어몬드의 강도와 유리의 강도가 강도라는 하나의 정량에서 비교된다.

그러나 이제 내포량을 넘어서 하나의 정량이 다른 정량과 관계하는 것을 통해서 출현하는 정량이 등장한다. 그게 바로 앞에서 예로 든 비중이나 가속도와 같은 것인데, 수로 보면 이런 관계는 분수 즉 비례나 관계로 표현된다.

그러므로 수가 분수가 된다는 것은 사유의 유희가 아니라, 자연 속에 존재하는 두 정량의 관계를 표현하기 위해 분수가 고안된 것이다. 헤겔은 정량이 다른 정량과 관계하면 이 관계를 통해 질적인 정량이 등장한다고 본다. 양에서 다시 질이 되돌아온 것이다. 비중이나 가속도는 양적인 것이지만, 이미 질적인 성격을 지닌 것이다.

앞에서 질을 설명하면서 두 성질의 상호 관계를 통해서 대자 존재가 출현하고, 이로부터 양적인 것이 출현했다고 했다. 이제 거꾸로 양이 서로 관계 맺으면서 질을 발전시킨다. 이 질은 단순한 감각적 성질이 아니라 질적 성격을 지닌 양적인 것이라는 것이다. 양이 질로 발전한다는 사실은 양적인 것과 질적인 것을 대립하는 것으로 보고, 심지어 양적인 것을 자연에서 제거하려는 철학자들에게는 충격적인 주장이 될 것이다.

[신간안내] 『헤겔 정신현상학 번역과 주해』1, 2 (이병창|먼빛으로|2025-11-15) [한철연 소식]

『헤겔 정신현상학 번역과 주해』1, 2 (이병창)

 

헤겔 철학 연구에 있어서 기념비적 저서가 출간되었습니다. 한철연 이병창 회원(동아대 명예교수)이 헤겔의 『정신현상학』을 번역하고 주석과 해제를 달았습니다. 세계적으로도 보기 드문 성과로 저자의 50여 년 헤겔 연구의 결정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본 웹진 <이 시대와 철학>에도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코너를 운영중인 저자는 현재 <헤겔의 형이상학 산책>을 47회 째 연재 중에 있으며 60회를 연재한 <헤겔미학산책>은 『정신의 표현 기호로서 예술』(2024)이라는 단행본으로 작년 8월에 출간되었습니다. 퇴임 후에도 여전히 왕성한 학술 활동과 집필을 이어가는 저자의 학문적 성과 앞에 예를 표하며, 헤겔 철학의 봉우리이자 깊은 심연으로 안내할 책의 내용을 직접 확인할 일이 우리에게 남아 있습니다. 

 

아래는 『헤겔 정신현상학 번역과 주해』1, 2에 대한 저자 제공 소개글입니다.

이번에 발간된 『헤겔 정신현상학 번역과 주해(1, 2)』는 헤겔의 『정신현상학』을 한국어로 번역하고 동시에 주석과 해제를 달아 놓은 책이다. 헤겔 『정신현상학』 번역은 국내에서 여러 번 시도됐지만, 헤겔 『정신현상학』을 번역하고 동시에 주석과 해제를 단 책으로서는 이 책이 처음이다. 아니 세계적으로 볼 때도 『정신현상학』을 주해하기를 시도한 책으로는 처음이 아닐까 생각한다. 저자는 『정신현상학』의 해석을 위해 거의 50여 년을 바쳐왔다. 그동안『정신현상학』 해설서를 여러 권 발표했으나, 이번 나온 주해 본은 그의 최종적인 노력의 결실이라 하겠다.

헤겔 『정신현상학』은 1807년 발간된 지 200년이 더 지났어도 아직 그 감추어진 진의가 충분히 드러나지 않았다. 헤겔이 도대체 어떤 목적으로 이 책을 지었고 나가서 이 책이 전개되는 독특한 방식이나 전체 구조도 여전히 오리무중이었다. 지금껏 부분적인 해석은 있었어도 전체에 거쳐 완전하고 일관적으로 해석한 책은 없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겠다. 그런데도 누구도 헤겔 『정신현상학』의 내용이 심대한 의미를 지닌 것이라는 점을 부정하지 못했는데, 간간이 드러난 내용만으로도 헤겔 이후 철학의 발전에 어마어마한 충격과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헤겔 『정신현상학』 연구와 관련된 저간의 사정을 생각해 볼 때 이를 번역한 것에 그치지 않고 심지어 주석과 해제를 붙였다는 것은 국내뿐만 아니라 세계에서도 엄청난 의미를 지닌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책은 헤겔 『정신현상학』의 전개 과정을 헤겔이 서론에서 제시한 ‘의식 경험’이라는 개념을 통해 이해하고, 『정신현상학』의 최종 도달 목적인 절대정신을 그리스 철학의 비의인 ‘헨 카이 판(hen kai pan)’에서 흘러나오는 공동체 정신이라고 해석하면서 전체를 일목요연하게 서술했다. 이 과정에서 주인과 노예의 투쟁을 통해 형식적 자유의지가 출현하고 근대정신의 소외된 관계를 통해 실질적 자유의지 또는 정의를 추구하는 일반의지가 출현하며, 마지막으로 예술과 종교, 철학을 통해 이 일반의지가 구체적으로 표현된다고 보았다.

이 책의 설명이 모든 점에서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니더라도, 헤겔 『정신현상학』을 이해하는 데 하나의 초석이 될 것은 틀림없다. 이 책을 토대로 질정을 거쳐나가면, 헤겔이 『정신현상학』에 감추어놓은 비의가 철저하게 드러나면서 앞으로 정신의 발전을 고대하는 세상 사람들의 갈망을 충족할 것이다. 특히 우리 민족의 철학사는 항상 심성을 함양하는 문제에 주력해 왔는데, 이 책은 그런 철학적 관심을 충족하는 데도 많이 이바지할 것으로 기대된다.

 

♦ 뉴스 기사 참조

[인터뷰] “헤겔이 ‘정신현상학’을 쓴 목적은 원대한 ‘공동체 정신’의 실현”

 

♦ 책 미리보기 (알라딘으로 연결)

https://www.aladin.co.kr/shop/book/wletslookViewer.aspx?ItemId=375627803

 

● 1권과 2권의 전체 목차

  1권

번역자 서문

서문[Vorrede]
서론[Einleitung]

A 의식
Ⅰ 감각적 확신 또는 이것과 의도[meinen]
Ⅱ 지각; 사물 그리고 속임
Ⅲ 힘과 지성, 현상과 초감각적 세계

B 자기의식
Ⅳ 자기를 확신하는 진리
A 자기의식의 자립성과 비 자립성: 주인과 노예
B 자기의식의 자유: 스토아주의, 회의주의 및 불행한 의식

C (AA) 이성
Ⅴ 이성의 확신과 진리
A 관찰하는 이성
a 자연의 관찰
b 자기의식을 순수한 상태에서 외적 현실과 관계해 관찰 하는 것: 논리적 법칙과 심리학적 법칙
c 직접적인 [신체적] 현실과 자기의식의 관계에 관한 관찰, 관상학과 골상학
B 이성적인 자기의식의 자기 자신을 통한 실현
a 쾌락과 운명[필연성]
b 심정의 법칙과 자만의 광기
c 덕과 세속
C 그 자체로 자기에게 나타나면서 스스로 실재하는[reell] 개체성
a 정신적인 동물의 나라와 속임 또는 사태 자체
b 법칙을 발견하려는 이성
c 이성에 의한 법칙의 검증

2권

C (BB) 정신
Ⅵ 정신 11
A 참다운 정신, 인륜성 24
a 인륜의 세계; 인간의 법칙과 신의 법칙; 남성적 존재와 여성적 존재 28
b 인륜적 행동; 인간의 인식과 신의 인식; 죄와 운명 62
c 법적 상태 97
B 자기에게 소원화된 정신: 교양 114
B-1 자기에게 소원화된 정신의 세계 126
a 교양과 교양이 실현된 나라 129
b 신앙과 순수 통찰 203
B-2 계몽 229
a 계몽과 신앙의 투쟁 236
b 계몽의 진리 310
B-3 절대적 자유와 공포 336
C 자기를 확신하는 정신, 도덕성 368
a 도덕적 세계관 376
b 전치 409
c 양심, 아름다운 영혼, 악과 그 용서 443

C (CC) 종교
VII 종교 545
A 자연 종교 576
a 빛[Lichtwesen] 582
b 식물과 동물의 신 588
c 장인 593
B 예술 종교 604
a 추상적 예술작품 613
b 생동하는 예술작품 642
c 정신적인 예술작품 656
C 계시 종교 706

C (DD) 절대지
Ⅷ 절대지 797
부록-1 정신현상학을 이해하기 위한 예비지식 851
1 『정신현상학』의 발간 851
2 판본에 관해 863
3 『정신현상학』의 구조, 방법, 개념과 목적 869

 


저자 소개

이병창

서울대학교 철학과 수학, 서울대학교 철학박사, 동아대학교 철학과 교수, 2011년 2월 명예퇴직, 현대 사상사 연구소 소장
헤겔철학과 정신분석학 및 마르크스주의를 연구하면서 문화철학 및 영화철학을 연구한다.

박사학위 논문
「헤겔의 정신현상학에서 정신 개념에 대한 연구」, 서울대, 2000.

주요저서
『영혼의 길을 모순에게 묻다(헤겔 정신현상학 서문 주해)』, 먼빛으로, 2010
『반가워요 베리만 감독님』, 먼빛으로, 2011
『불행한 의식을 넘어(헤겔 정신현상학 자기의식 장 주해)』, 먼빛으로, 2012
『지젝 라캉 영화』, 먼빛으로, 2013『청년이 묻고 철학자가 답하다』, 말, 2015
『우리가 몰랐던 마르크스』 , 먼빛으로, 2018
『정신의 오디세이-자유의지의 역사』, 먼빛으로, 2021
『헤겔의 정신현상학-EBS오늘의 클래식』, EBS BOOKS, 2022
『지적 대화를 위한 교양인의 현대철학』, 팬덤북스, 2024
『헤겔 미학 산책-정신의 표현 기호로서 예술』, 먼빛으로, 2025

번역
프리드리히 슐레겔, 『그리스 문학 연구』, 먼빛으로, 2014
프리드리히 슐레겔, 『미학 철학 종교 단편』 , 먼빛으로, 2020
마르크스 엥겔스, 『독일 이데올로기』, 먼빛으로, 2018

이규성 철학 연구회 2025년 10월 제20차 정기세미나│『중국현대철학사론』7장. ‘도’의 형이상학과 ‘이사겸중’의 지식론: 김악림(金岳霖)│발제: 인현정 / 토론: 한대석│2025.10.31.

-주제: 이규성 선생의 김악림 연구(중국철학사론 7장)
-발제: 인현정 선생님(한철연 회원)|토론: 한대석 선생님(충남대)
-일시: 2025년 10월 31일(금) 오후 4시
-장소: 한철연 세미나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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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성 선생이 지은 대작 『중국현대철학사론』 독해도 거의 마무리 단계에 이르렀습니다. 이번 10월 모임에서 김악림을 다루고 다음 모임에서 장세영을 다루면, 마칠 듯합니다.

이번 모임에서는 중국 현대철학자 김악림(金岳霖, 1895~1984)을 다루고자 합니다.

이규성 선생에 따르면, 그는 중국의 특수성을 반영하는 중국철학과 중국에서 발견되는 철학을 구분했다고 합니다.

중국에서 발견되더라도, 보편성을 지닌 철학이 있을 수 있다는 말인데, 그에게서 보편적인 것은 ‘ 리적이고 분석적인 것’이라고 합니다. 명료한 진리에 기초하여 논리적으로 전개된 철학이라 분석철학의 이상을 담은 말로 보입니다.

물론 여기서 논리란 형식논리학을 의미합니다.

그는 철학을 보편성과 특수성이 공존하는 것으로 보는데, 철학의 필수 조건은 논리학과 지식론이지만, 특수성은 자기 사회나 시대를 반영하는 윤리와 정치사상을 의미한다고 봅니다. 김악림은 후자의 측면에서는 노자나 장자의 초탈한 삶을 추구했다고 하네요.

그는 청년기 개혁적 자유주의, 윤리적 사회주의에 관심을 가졌으며, 장개석의 파시즘이나 공산당의 지배에 대해서는 반대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역사는 그가 지향하는 것과는 반대로 흘러갔으니, 그는 현실로부터 내적으로 망명한 상태에서 논리와 명료한 진리를 추구하면서 현실적으로는 방관자로서 “권태로운 무심함을 즐겼다”고 합니다.

어떻든, 그가 명료한 진리를 어떻게 논리적으로 전개시켰는지 궁금한데요. 이번 발제는 인현정 선생님이 맡아주셨고, 토론은 충남대 철학과에서 분석철학과 논리학을 연구하는 한대석 선생님이 맡아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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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 출처: https://www.youtube.com/watch?v=CCESvI24z3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