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ntries by admin

철거의 삽화[카메라 옵스큐라]

꽤 긴 시간을 골목에서 보낸 탓인지 이제 대로행(大路行)은 철저히 남의 행습이다. 더욱이, 철거가 시작되어 대낮에도 인적 없이 으슥한 곳을 그리 싸돌아다니니 불입위방(不入危方)의 몸가짐도 내팽개친 셈이다. 고로 군자(君子) 되긴 글렀다. 불가능한 게 과잉한 세상에서 뭐 그쯤이야. 아닌 게 아니라 골목을 돌다보면 가끔 식겁할 일도 있고, 바짝 긴장하게 되는 순간도 있다. 가장 오금이 저렸던 일은 부끄럽게도 개 […]

아라크네의 계단[카메라 옵스큐라]

어느 날 회현동 좁은 골목을 지나다 2층 창가에서 들려오는 드르륵 하는 재봉틀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창틀 끝에 처연히 매달린 계단. 누구라도 상승을 꿈꾸며 달려들었다가는 필시 깊은 상처를 입고 말 날카로운 쇠창살, 그리고 당장에 거 보란 듯이 이미 상처를 입고 비틀거리는 실 뭉치. 거기서 나는 아라크네가 꿈꾸었을 법한 하늘로 오르는 계단을 보았다. 그리스 신화의 아라크네는 신과 […]

대중옥 이야기[카메라 옵스큐라]

건장한 아지매들의 어깨 사이 저 야윈 영감님은 50년 전통의 해장국집 ‘대중옥’ 사장님이시다. 실제론 더 구부정하고 왜소해서 할배티가 확연한데, 문턱을 넘는 모든 이에게 한결같이 ‘어서옵~쇼’를 외친다. 인터넷사이트 회원 가입시 약관 동의절차만큼이나 일방적이고 예외없는 인사이건만 불쾌하긴커녕 묘한 따뜻함을 준다. 가끔은 몸 가누시기도 힘들어 뵐 때가 있는데 그래도 손님이 들면 ‘어서옵쇼’하는 소리를 반사적으로 앓듯이 내뱉으실 정도니 그 지극한 […]

늦가을의 이야기〔카메라 옵스큐라〕

지난번에는 빛이 보여주는 이야기를 했다. 오늘은 그림자 이야기를 해 보자. 그렇다, 2005년 꽤 늦은 가을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림자가 건네는 이야기에 붙들려 이 사진을 찍었다. 어떤 이야기가 떠오르는지? 웬 사내와 여자가 마주 서서 대화를 나누고 있다는 정도? 마주 선 여인이 꽃이라도 들고 있는 듯 보이니 오늘이 무슨 특별한 날은 아닐까? 그런데 사내는 손에 틀림없이 휴대 전화로 […]

오늘은 나, 내일은 너[카메라 옵스큐라]

골목은 침울하다. 일상조차 변변히 흐르지 못할 만치 생동의 기운이 점점 쇠해가는 탓이다. 그러니 작은 화초나 아이들, 햇볕 한뼘처럼 사소한 생기의 편린들이 강렬한 대비를 이루며 달리 보일 수밖에. 사진을 시작한 후로 몇 차례나 옛 동네의 임종을 했건만 그 쇠락의 면면은 항상 처연한 기시감(旣視感)을 몰고 온다. 병증의 악화 정도만 다를 뿐 소멸의 압박은 늙은 골목 어디에서나 감지되기에, […]

오후의 표지(標識) [카메라 옵스큐라]

텅 빈 골목길은 때로 에드워드 호퍼가 그린 빈 방이 생각날 정도로 아름답다. 하지만 텅 빈 골목을 찍은 사진이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는 어렵다. 아무래도 비어 있다는 사실 자체를 대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리라. 그런 사진을 본 사람들이 말한다. “도대체 뭘 찍은 거야?” 오후의 표지(標識), 2007, 통의동의 막다른 곳, Contax G1 이 사진은 경복궁 서쪽 통의동의 […]

뭘 찍어요? [카메라 옵스큐라]

사진기 들고 뒷골목 헤매길 만 6년, 햇수로 8년째 접어듭니다. 비슷하게 영혼이 고장난 동행이 있어 긴 방랑에 지치기는커녕 더욱 기꺼이 몰입할 수 있었습니다. 어떤 목적을 갖고 골목을 헤맨 것은 분명 아닙니다만 어쨌든 허튼짓의 흔적들과 이야기가 남아 이렇게 ‘카메라 옵스큐라’에 담습니다. 사진 찍는 ‘철학도’들의 수다라서 주로 사진과 피사체, 촬영과 감상, 혹은 사진 너머에 대한 철학적 수상들이며, 당연히 […]

내겐 너무 가벼운 그녀들[배운년 나쁜년 미친년]

2002년 개봉한 영화에는 175센티미터의 늘씬한 키에 군살이라고는 한 점도 없는 예쁜 여주인공 기네스 펠트로가 등장한다. 뭐 이렇게 예쁘고 날씬한 배우들이 헐리웃에만 있나? 우리나라에도 널렸다. 내 주위를 둘러보면? 한국 여성의 유전적 특성상 175센티미터의 키를 자랑하는 이는 거의 없다. 대신 날씬한 여성들은 많은 편이다. 특히 학회 분과에서 같이 공부하는 후배들은 뭘 먹고 사는지 하늘하늘하기까지 하다. 그래서 세미나를 […]

당신은 친절하신가요?[배운년 나쁜년 미친년]

#1. 당신은 은행원입니다. 주 업무는 대출상담이지요. 그런데 오늘은 대출 조건에 맞지 않는 할머니 한 분이 당신을 곤란하게 하고 있네요. 수입, 담보 등 대출 규정을 말씀드려도 막무가내로 대출을 해 달라고 조르고 있어요. 상황이 어려운 건 알겠지만, 규정에 맞지 않는데 저라고 도리가 있겠어요? 그러니까요 할머니, 제발 다른데 가서 알아보시라고요!!! #2. 당신은 운전 중입니다. 마침 신호 대기 중이라서 […]

미용 성형, 외모지상주의? 자기 배려?[배운년 나쁜년 미친년]

현대 사회에서 몸은 문화를 전달하는 하나의 매체로 활용된다. 먹는 것, 입는 것, 사회적 의사소통 장치로서의 제스처, 보디랭귀지를 표현하는 것 등의 일상 하나하나가 모두 우리의 몸을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신체 튜닝’이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는 현대 사회에서 “미용성형은 외모지상주의의 산물”이라는 여성주의 비판은 아직도 유효한 것일까? 압구정동에 가본 일이 있는가? “성형은 압구정으로!”이라는 광고 문구가 무색하지 않을 정도로 빽빽하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