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만과 불통을 넘어서 -프랑크푸르트학파[마르크스주의 사상사]-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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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과 불통을 넘어서 -프랑크푸르트학파[마르크스주의 사상사]-⑧

 

강사 : 이현재(서울시립대 HK교수)
후기 : 이원혁(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서유럽의 혁명이 좌절된 후 서유럽에 남겨진 좌파들은 난감한 문제에 직면했다. 자본주의는 생각보다 견고했고 무너지기는커녕 수시로 모습까지 바꿔가며 저항에 적응해갔다. 그러는 한편 자본의 지배는 노동자의 처우와 임금문제를 넘어 생활세계 깊숙이 들어와 그 손을 뻗히기 시작했다. 일상에 대한 자본주의의 지배와 그 지배법칙은 이들에게 자본주의와 사회에 대한 다른 접근방식을 고민하게 하였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매개로 나타난 대표적인 학파가 프랑크푸르트학파다. 그들은 프랑크푸르트 사회연구소를 중심으로 활동하며 자본주의의 현대적 지배양식에 대해 연구를 하였다. 그들은 서구 유럽에서 체계보다 일상에 더욱 주목함으로써 수정주의라 비판받기도 했지만 그들이 진행한 비판이론은 자본주의가 펼치는 지배법칙을 다각도로 고민하는데 여전히 좋은 실마리를 안겨주고 있다.의 1부 마지막 시간인 8강에서는 이현재 서울시립대 HK교수와 함께 프랑크푸르트학파의 계보를 추적하며 그들의 이야기를 함께 들어보는 시간을 가졌다.

 

자유를 원한 계몽, 양화의 노예로

2차 대전의 참상을 겪은 호르크하이머(1895~ 1973)와 테오도어 아도르노는 전쟁과 테러의 참화 속에서 ‘인류는 왜 야만의 상태로 되돌아가는가?’라는 질문은 던진다. 소크라테스 이래 끊임없이 발전했다 자부하는 인간의 이성과 도덕이 어찌 홀로코스트와 같은 야만을 저지르는 지경에 이르렀을까? 이 교수에 따르면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는 『계몽의 변증법』에서 소위 신화를 극복했다고 간주되었던 계몽이 실제로는 신화론적 계기들에 여전히 얽매 있어 이같은 결과가 발생했다는 진단을 내린다고 한다. 즉 야만의 상태인 신화를 극복하고 이성의 상태인 계몽이 나타났지만 그들이 보기에는 그 계몽 역시 여전히 신화의 상태에 머물고 있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그들에게 신화의 상태는 ‘황금의 시기’가 아닌 야만의 상태로 폐쇄적이며 적나라한 지배법칙을 가지는 부정적 상태라 설명한다. 따라서 계몽의 시기인 근대 역시 폐쇄성과 적나라한 지배법칙의 시기라는 것이다.

 

이 교수에 따르면 근대 계몽주의는 주체와 객체, 문화와 자연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하고 전자에 의해 후자가 지배될 수밖에 없다고 본다. 이는 주체가 객체에 비해 더 큰 권한을 가지며 객체를 지배한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바로 이러한 것이 지배법칙으로, 한편으론 야만으로 작용한다고 보는데 이 교수는 『계몽의 변증법』저자들이 인간이 인간 밖에 있는 자연과 사물에 대한 지배, 더 나아가 자신의 육체와 타자에 대한 지배를 계몽이 만들어 내는 것으로 지적하고 있다고 말한다.
계몽의 기획 속에서 인간은 자연을 사물과 동일화시킨 후 이를 인과율의 법칙에 따라 파악하고 이용하려한다. 이 교수는 바로 여기서 계몽의 문제가 발생한다고 보는데 사실성과 유용성, 계산 가능성과 교환가능성이 없는 자연은 의심스러운 것으로 감금되고 배제된다는 것이다. 인간은 대상의 효용성을 극대화하기위해서만 자연을 이용하기 때문에 대상으로서 자연은 주체를 위한 순수한 도구로 전락한다. 이것이 바로 그들이 말하는 이성의 도구화이다. 이 교수는 이것이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자본주의비판으로 이어진다고 말하는데 자본주의의 가장 큰 미덕인 효율성 추구의 근간에 바로 계몽과 이성이 자리한다고 프랑크푸르트학파는 보고 있다는 것이다. 즉 계몽은 자연에 의한 인간 지배를 인간에 의한 자연 지배로 역전시킴으로써 인간을 자연의 노예에서 주인으로 만들었지만 이는 곧 인간에 의한 인간의 지배로 귀결되었다. 이런 계몽의 기획은 살아있는 자연뿐만 아니라 인간까지도 죽은 자연 사물 혹은 객체로 취급하는 과학과 시장 지상주의로 빠져 지배법칙으로 타락했다.

만약 이성이 도구화됨에 따라 비판의식이 상실되었다면 우리는 갇힌 이성을 어떻게 구할 것인가? 이 교수는 이에 아도르노는 이성 자체의 폐기가 아닌 더 합리적인 이성을 꿈꾼다고 말한다. 즉 계몽의 폐기가 아닌 미완의 계몽을 완성하자는 것이 아도르노와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주장인 것이다.

 

내 안의 파시즘, 주체와 객체의 변증법을 넘어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건너간 아도르노는 당시 미국에서 유행한 실증주의적 사유가 사실을 입증하고 현실을 긍정하는 것으로만 작동있음을 강하게 비판하였다. 이 교수는 아도르노의 또 다른 대표적 저서 『부정의 변증법』은 이러한 실증주의에 맞서기 위해 그가 변증법을 선택하고 그만의 이론을 진행한 것이라 설명한다.

아도르노는 헤겔의 변증법과 당시 소련의 유물론적 변증법을 모두 비판하며 자신만의 부정변증법을 발전시킨다. 그는 헤겔의 변증법을 주관의 선차성을 주장하며 객체를 이미 주체를 통해 개념화된 것으로 본다고 비판한다. 이는 주관 밖에 있는 비동일성의 이성을 만들지 못하고 주관 안에서 동일성을 유지할 뿐이라고 한다. 즉 주체 밖에 있는 객체를 모두 주관화하여 타자를 바라보지 못한다는 것인데 이는 그가 『계몽의 변증법』에서 비판한 계몽의 지배법칙과 유사하다.
그리고 객체의 독립성과 주체의 무용(無用)을 말한 소련의 변증법은 어떤 것을 통해서도 매개되지 않은 대상 세계를 가정함으로써 의식과 사상을 사물의 반영과 모상으로 환원시킬 위험을 가지고 있다고 비판한다. 나아가 이는 주체의 자발성을 부인하는 결과를 낳고 객관적임을 자칭하는 공산당이 파시즘적 독재 세력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져올 수밖에 없다고 한다.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

이 교수는 아도르노의 변증법을 비동일성의 변증법이라 소개하며 그가 헤겔과 달리 객체의 우선성을 인정하지만 주체의 권좌를 객체가 대신한다는 것은 아니라 설명한다. 즉 아도르노가 말하는 “객체는 순수한 사실성(Faktizitaet) 이상의 것”이기 때문에 그에게 객체는 주체를 통해 매개되어 있지만 이와 동시에 그는 주체의 동일성 체계에 동화되지 않는 비동일적 객체를 인정한다. 객체는 주체의 안과 밖에서 다양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이로써 아도르노가 모든 것을 자신의 안에서 구성하고 이해하려는 주체의 횡포를 주체에게 포섭되지 않는 비동일성에 대한 인정으로 극복하고 한다고 한다. 즉 타자, 이방 등으로서 대표되는 비동일성에 집중함으로써 계몽의 야만을 극복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생활세계의 식민화와 토의 민주주의

주체와 대상 간의 관계를 중심으로 이성의 문제를 진단했던 1세대와는 달리 위르겐 하버마스(1929~ )는 의사소통적 이성 즉 주체가 주체와의 관계 속에서 갖는 이성에 주목한다. 하버마스는 사회를 물질적 차원인 체계와 상징적 차원의 재생산인 생활세계로 구분한다. 하버마스는 경제적, 정치적인 구조로서 체계와는 달리 문화, 사회, 인격 등을 구성요소로 하는 생활세계를 사회학적 차원으로 확대하고 체계와 생활 세계는 다른 영역이므로 구분해야하며 자본주의에서는 체계가 생활세계를 침범하여 손상시켰다고 보았다. 따라서 하버마스는 생활 세계의 질서가 파괴된 것이(을) 작금의 가장 큰 문제로 인식하고 생활세계의 규칙을 왕성하게 복구하여 생활세계를 활성화시켜야 한다고 보았다. 시민사회, 공론의 장, 토의민주주의를 발전시킴으로써 “생활세계의 식민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하버마스는 이러한 토의민주주의의 핵심원리를 의사소통적 행위라 한다. 이 행위는 인지-도구적 행위, 도덕-실천적 행위, 미적-표현적 행위 등의 측면을 가지는데 바로 이 세 가지를 통해 상호이해를 가능하게 한다. 즉 이는 도구적 이성과 구분되는 포괄적 이성으로서 타자를 토론의 멤버를 인정하고 비판과논거를 통한 토론 및 정당화를 가능함으로써 합리적 논의를 가능하게 한다.

그러나 이 교수는 하버마스의 이러한 합리적 의사소통 이론에는 한계가 있다고 지적한다. 재분배와 체계 자체에 대한 외면은 대표적으로 좌파진영에서 제기되는 문제이다. 이뿐만 아니라 생활세계의 침식만을 병리현상으로 보면 동성애, 이민자, 소수집단 등 다양한 사회영역에서 발생하는 고유한 갈등구조를 무시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점을 이 교수는 하버마스의 한계 중 하나로 지적한다. 이어 이 교수는 하버마스가 생활세계는 합리적으로 흘러갈 수 있다고 하는 것에 의문을 던지며 생활세계를 이상화시킴으로서 생활세계 내에 발생하는 문제에 대한 우려를 표했다.

 

생활 속 투쟁, 인정투쟁

악셀 호네트(1949 ~ )는 체계에 의한 생활세계의 식민화뿐만 아니라 규범적 혹은 사회 세계 내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정체성 무시까지도 포괄하는 이론을 제시하고자 했다. 이 교수는 3세대 프랑크푸르트학파인 호네트를 소개하면서 그에게 있어 행복한 삶을 가능하게 하는 사회는 사회적 인정을 통해 성공적인 자아실현이 이루어질 수 있는 사회라 설명한다. 따라서 그에게 도덕 발전을 이루기 위해 필수적인 것은 인정투쟁이라고 전한다. 이 교수는 이러한 인정투쟁은 무시에서 비롯된다고 하는데 무시는 자신감, 자기존중, 자기존경에 대한 훼손이라고 한다. 자신감은 자신이 충분히 배려 받을 가치가 있다고 보는 등 물리적 욕구등을 포함한다. 또 참정권과 같은 자율성에 관련한 것이 자기존중이며, 사회적 관계에서 나타는 명예와 같이 특수한 수행에 대한 인정욕구가 바로 자기존경이다. 호네트는 이러한 3가지 욕구에 대한 무시가 사회적 병리를 낳고 이를 극복하고자 인정투쟁이 발생한다고 한다. 이 교수는 이러한 점이 하버마스가 설명하지 못한 생활세계 속의 차별, 예를 들면 이민자들에 대한 생활세계 속의 문제를 호네트가 설명 가능하게 만들었다고 평가한다.

악셀 호네트

프랑크푸르트학파는 이전 마르크스주의자들과 확연한 차이들 보인다. 그들이 자본주의체계에 대한 부정적 평가를 하고 있음은 분명하지만 그들은 체계에 대한 공격에 적극적이지 않다. 그러나 이를 단순히 수정주의로 폄하하기에는 그들이 던지는 메시지의 긍정성이 아쉽다. 프랑크푸르트학파는 인간해방은 단순히 물질적 문제의 해결이 아닌 자기관계를 해방하는 것으로 본다. 그들은 체계에 대한 공격과 재분배를 통한 해방담론이 고려하지 못한 미시적 해방 즉 생활공간에 발생하는 소외와 문제들을 인간해방의 주요테마로 가져오며 ‘해방’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다시한번 고민하게 만든다. 이 교수는 재분배에 대한 담론이 혹시 물리적 계산, 즉 도구적 양화적 이성에 기울지는 않았는지, 또 재분배 투쟁도 인정투쟁의 문제의식과 무관해 질 수 없다는 호네트의 말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고 평가한다. 하지만 이 교수는 낸시 플레이져가 여전히 재분배의 유효성은 주장하며 호네트와 논쟁을 벌이듯 재분배와 생활세계에 대한 문제는 소위 ‘해방’을 말하는 담론에서 깊은 고민 속에 다루어져야 한다고 말하며 이날 강의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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