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백성이 아니옵니다. 노비이옵니다 5-① [色 다른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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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민 (너머북스 대표)

 

조선의 백성이길 거부한 노비의 법정 투쟁기

1586년 나주 관아의 노비소송을 서사 구조로 하는 『나는 노비로소이다』(임상혁 지음, 너머북스 펴냄)를 따라가 보면, 조선시대의 사법풍경이 한눈에 들어오고 이 절차를 통해 당시 체제가 빚어내는 반목의 양태들을 확인해 볼 수 있다. 이윽고 불화의 핵심에 선 조선시대 ‘노비제’를 만난다. 흔히 조선전기는 ‘노비송(奴婢訟)’, 후기는 ‘산송(山訟)’이라는 표현처럼 조선의 사회에서는 인간의 자유를 제약하는 노비제의 질곡이 주요한 내적 모순으로 존재하였다. 조선시대 송사를 매우 역동적으로 다룬 이 책의 또 다른 관전 포인트는 조선시대 노비의 실체를 찾는데 있다.

다물사리와 구지, 허관손 등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자신의 자손을 사노비의 굴레에서 벗어나도록 하기 위해 벌이는 법정투쟁기는 조선시대의 노비제가 얼마나 야만적이고 혹독한 질곡이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역사학자들은 조선시대 노비의 수가 전체 인구의 3분의 1이 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3분의 2에 이른다고 보는 학자도 있다. 그런데도 과연 오늘날 자기 조상이 노비였다고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까? 노비의 역사적 실체를 찾는 것은 나의 최근 역사책 기획의 관심 중 하나이다.

해남의 고산 윤선도(1587~1671)는 생부와 양부로부터 660구가 넘는 노비를 상속받았으며, 유명한 어부사시사의 고향인 보길도 부용동의 원림을 조성하는데 노비 700여명을 동원하였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상층이 아닌 소박한 생활을 영위한 양반이라 하더라도 노비가 없는 삶은 상상조차 하기 어렵다. 양반에게 있어 ‘봉제사’는 일상의 일부라고 하나, 이것이 집안에서 제사를 주관하는 것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일년내내 선산을 관리하고 수시로 벌초하며, 묘사 준비와 실제 제사를 지내는 것에 이르기까지 조상을 모시는 일에 노비가 동원되었다. 생업인 파종에서 추수까지 농사일은 기본이고 험한 땅을 개간하거나 묵은 논밭을 갈아엎기도 하는 등 농지도 일구었다. 노비는 상전의 수행원이었고 심부름꾼이었으며 통신수단이기도 했다.

무반 노상추의 68년 동안 쓴 일기를 통해 조선후기 가족의 실체를 다루어 주목받은 바 있는 『68년의 나날들, 조선의 일상사』(문숙자 지음, 너머북스 펴냄)에는 가족과 재물의 경계에 선 노비의 모습이 생생이 묘사되어 있다. 노비 점발이 도망한 1726년 2월 12일 노상추는 일기에 ‘그의 죄는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썼다. 6개월 뒤 점발을 찾아내 벌을 준 뒤 그는 점발을 ‘죽을 만큼’ 때렸다고 기록했다. 일기에서 스스로 ‘죽을 만큼’이라고 표현한 것으로 보아 그에 대한 응징의 정도가 어땠는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일기의 또 다른 기록이다. 비부(婢夫) 한선이 노씨가의 계집종인 아내 손단을 데리도 도주한 것은 1779년 2월 7일이었다.

노상추는 단호하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 부부는 길바닥에서 굶어죽는 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을 듯하다”고 했다. 나에게 의지해 살던 노비 부부가 나를 떠나서, 그리고 전국에 깔려 있는 나와 내 지인들의 인적 네트워크를 벗어나 살아갈 방법은 도저히 없을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노비들은 모든 양반의 지배를 받는 존재였다. 거주지를 벗어나 멀리 도망간다 하더라도 양반의 광범위한 네트워크 안에 있었고, 양반들의 연망(聯網)은 노비의 관리에 더할 나위 없이 유용하게 활용되었다.

다시 『나는 노비로소이다』로 들어가 보자. 이 책의 2장에 소개하는 “또 다른 노비소송, 나는 양인이로소이다”에서는 노비제 고수에 강한 집착을 보였던 양반과 그들의 모순에 찬 면모를 볼 수 있다. 이 소송은 허관손이란 인물의 제소로 시작된다. 그는 지방의 아전이었으나 그의 장모의 아버지가 ‘사노’였기 때문에 그의 자손들 모두 노비로 떨어질 위기에 처했던 것이다. 그는 장모의 아버지가 보충대에 입속하였으므로 양인의 신분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 서출자녀인 경우 보충대 입속을 통해 양인이 되는 길이 있었다. – 그러나 불행하게도 소송의 상대는 『미암일기』의 저자로 잘 알려진 상층 양반 미암 유희춘이었다.

1544년 강진현에서 유희춘의 어머니, 최씨가 승소한다. 1551년에는 반대로 허관손이 승소하고, 1564년 최씨 사후 미암의 누나가 다시 제소하여 승소한다. 1566년 허관손이 사헌부에 상소했으나 패소한다. 출세가도를 달리던 고위관료 유희춘을 상대로 한 아전 허관손의 30여년이 넘은 투쟁은, 결국 1568년 3월 임금이 행차하는 길에 엎어지며 억울함을 호소하며 – 이를 ‘상언’이라 한다 – 해결하려 했지만 현직 관리의 영향력을 넘지 못하고 패소하고 만다.

이 책이 밝히는 흥미로운 사실은 허관손이 양인이라 증명하려 했던 방식대로 유희춘은 자신의 얼녀 네 명을 양인으로 속량시켰던 것이다. 이 책에서는 유희춘이 허관손에게 승소한 그 시점인 1568년부터 자신의 서출자녀들을 보충대에 입속시키고 대가를 지불하여 노비의 신분에서 풀려나게 하는 과정을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다. 미암은 8년에 걸쳐 천첩 자식들을 모두 속량한 뒤 외친다. “얼녀 네 명이 모두 몸을 씻어 양인이 되었다. 어찌 이리 기쁜지!”(미암일기초 5권 230쪽) 내적 갈등이나 모순적 의식조차 보이지 않는다. 유희춘과 허관손의 쟁송 사례에는 당시 최고 지식인이 가진 의식의 괴리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자신의 얼녀들에 대해서는 속신을 시키려 그처럼 안타까워하면서도 허관손의 후손에 대해서는 면천의 기회를 박탈하고 만 셈이다.

이 글의 앞머리에서 노비 몇 ‘구’라 했다. 조선시대에 노비를 생구(生口)라 부르고 수효를 셀 때도 한 구 두 구 식으로 세었던 것은 그들을 가축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노비제도가 전근대적인 노예제였다는 것은 노비 매매가 일상적이었다는 점에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노비 매매는 국가적으로 공인되었는데 <경국대전>에서는 노비의 값을 말 한 필과 비슷하게 매겨놓고 있다. 농지의 확대로 노비 수요가 많아진 조선 중엽에는 말 한 마리가 포목 2필일 때 노비 1구의 가격이 포목 6.5필로 급등하기도 하였다.

조선시대 양인은 먹고 살기 어려워지면 스스로를 팔아 노비가 되기도 하였다. 하층민의 경우 흉년이 들거나 하여 먹고살기 어려워지면 당장에 굶어죽기보다는 누군가에게 의지하기를 원했고, 양반들은 손쉽게 노동력 또는 재화를 손에 넣을 수 있다는 점 때문에 양자간의 거래가 빈번했던 것이다. 잠깐 눈을 감고 상상해 보자. 노비도 다른 신분처럼 혼인을 하고 자식을 낳는다. 하지만 남편과 아내, 그리고 그 자식이 각각 서로 다른 주인에게 소속되어 있다면 그 가계가 안정될 수 있을까? 서로 다른 상전이 각각의 노비를 내다팔기라도 하면 그 가족은 어떻게 될까? 그들의 가족은 안정성이 없고, 가계가 자식에게 이어지는 것이 어려울 뿐만 아니라 가계를 잇는 일이 그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 것인가?

『나는 노비로소이다』의 핵심 모티브가 되는 이지도 대 다물사리 노비소송은 시작부터 특이했다. 원고 이지도는 다물사리가 양인이라 하고, 피고 다물사리는 자신이 노비라고 반박한다. 당시 노비의 신분을 다투는 소송에서는 자기는 노비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이 보통인데, 반대의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소송이 진행되면서 그 연유는 극적인 반전 속에 드러난다. 책을 보시면 이내 알게 되지만 양인 신분인 다물사리가 성균관에 관비로 투탁한 것이었다.

독자들은 소송 당시 다물사리의 나이가 여든 살이었는데, 그처럼 노쇠한 여인이 대담하게도 성균관에 투탁하여 신분을 숨기고 상대편의 소송에 맞서려 했는지 의아하게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다물사리의 뒤에는 그의 사위인 구지라는 인물이 있었다. 그 또한 사노비로서 자기 자식들을 어떻게든 사노비의 사슬에서 끌어내 관노비로 만들어 조금이라도 나은 처우를 받게끔 하려 했다. 그리하여 이지도의 집안의 허술한 틈(저자 임상혁은 이지도의 아버지가 이유겸임이라고 추정하는데 당시 이유겸은 살인 혐의로 숨어 지내는 중이었다)을 노려 자기 장모로 하여금 투탁하도록 하는 꾀를 내고 지방 관아의 노비빗리와 공모하여 문서를 조작하기도 했던 것이다.

다물사리와 구지의 기구한 사연은 조선시대 노비제도가 얼마나 혹독한 질곡이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조선시대 절반의 사람은 노비 또는 그와 비슷한 처지의 존재였다. 노비제는 양반제의 필수도구였던 것이다. 양반의 또 다른 이면이자 상충되는 존재였던 노비, 그 역사적 실체 찾기는 『나는 노비로소이다』가 던진 새로운 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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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시대와 철학>이 기획하여 진행하는 책읽기 코너입니다. 한 권의 책에 대하여 저자 혹은 역자, 학자와 전문가, 일반 독자와 편집자가 한 권의 책에 대해 다양한 시각의 책 읽기, 세상 읽기를 보여주는 기획입니다. ’色 다른 책읽기’의 다섯 번째 책은, 임상혁의 <나는 노비로소이다-소송으로 보는 조선의 법과 사회>(너머북스 펴냄)으로 허정화(자유평론가), 이재민(너머북스 대표)님의 글을 실었습니다. 기존의 ‘4인 4색의 책읽기’의 변화된 기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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