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겔 변증법 반성운동38-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에서 실체[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 비평]
헤겔 변증법 반성운동38-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에서 실체
1)
앞에서 절대자의 펼침[Auslegubng]에 관해 말했다. 헤겔은 이 펼침은 하나의 가상으로서 절대자가 자기를 실현하는 운동에서 매개가 된다고 한다. 이 매개는 우선 절대자가 자기를 속성으로 드러내고 이 속성이 다시 자기를 부정하는 양상으로서 전환하는 것을 말한다.
사실 여기서 하나의 개체는 다른 개체와 대립하면서 상호 결합하여 실체를 이루고 있다. 그런데 이 관계는 논리적으로 이렇게 파악된다. 즉 절대자는 자신의 함축된 대립한 속성을 펼쳐서 그중 한 속성을 현존으로 정립한다. 예를 들자면, 종적 실체는 자기를 분화하여 암컷이나 수컷을 산출한다.
여기서 개체를 그 형식[기능]에서 본다면, 곧 속성이다. 각자의 형식은 절대자를 토대로 하므로 이미 다른 형식과 통일 속에 있다. 왜냐하면, 이 형식은 통일적인 종적 본질에서 분화된 속성이기 때문이다. 이런 속성은 표면적으로 독립적인 형식이지만, 잠재적으로는 이런 통일성 속에 있다.
그러므로 속성은 이중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 속성은 한편으로 고유한 분화된 형식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 결여를 지니고 자기를 해소하는 것이다. 속성은 절대자의 순전한 동일성에 비추어본다면 무실한 것으로 부정되니, 무실하며 유한한 것이다.
“총체성은 절대적인 동일성으로서 정립된다. 또는 속성은 절대자를 자신의 내용과 존립으로 삼는다. 속성의 형식 규정은 이 속성을 속성으로 만드는 것이지만 따라서 또한 정립[부정]되어 있으며, 직접적으로 단순한 가상으로 존재한다. 즉 부정적인 것으로서 부정적인 것이다. 펼침이 이런 속성을 통해 얻는 긍정적 가상은 이 펼침이 한계 속에 있는 유한한 것을 그 자체로 자기에 대해 존재하는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며, 그의 존립을 절대자 속에서 해소하고 이 절대자를 속성에 이르기까지 확산하는 가운데 다시 이것이 속성이라는 사실을 그 자체로 지양한다. 그러므로 이 펼침은 속성과 그것이 전개하는 구별 활동을 단순한 절대자 속에 침몰시킨다.”(논리학, GW11, 373-374)
2)
하나의 속성이 자립적인 개체로 분화한다. 이 과정은 앞에서 형식이 내용을 거쳐 실존으로 되는 과정에서 설명되었다.
이제 이 속성이 현존하는 개체를 보자면, 한편으로 이 개체는 실존이므로 자립적이고 타자에 무차별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개체는 “절대자의 탈자적 존재”이며 “절대자가 존재에 속하는 가변성과 우연성 속에서 상실되는 것”이다. (논리학, GW11, 374)
그러나 다른 한편, 속성의 통일성은 개체 속에 결여한 어떤 것으로 나타난다. 그것은 즉 자기와 대립하는 것을 결여를 통해 지시하며 그 자체는 자기를 보완하는 타자가 결여한 어떤 것을 지니고 있다.
속성이 개체화하면서, 속성의 통일성은 개체의 결여로 등장하는데, 바로 이 결여가 개체의 내적 목적으로서 제시된다. 이런 내적 목적이 처음에는 각자에게 자연적 욕망으로 출현한다. 이런 욕망은 아직은 자각되지 않은 본능적 욕망이다.
예를 들어, 암컷이나 수컷은 평생 타자 없이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개체로서 암컷이나 수컷은 종의 재생산과 무관하며 결국 개체로서 곧바로 소멸하고 마는 것이다.
3)
개체의 내면에서 욕망이 있는 한 개체는 자신에 결여한 타자를 추구한다. 개체는 이제 다른 개체와 결합하면서 자기가 결여한 욕망을 충족하는데, 여기서 개체들의 상호 관계로서 실체가 출현한다. 헤겔은 이 실체를 “그 형식에서 자기 내로 복귀한 절대자” 또는 그 “형식이 내용과 동일하게 된 절대자”(논리학, GW11, 374)라고 한다.
결여한 타자와 성공적으로 관계하고 결합하게 된다면, 개체는 더는 개체가 아니라 개체는 자기 부정성을 통해 가상이 된다. 이런 가상이 곧 양상이다. 부정의 부정을 통해 가상은 절대자로 되돌아간다. 이를 통해 가상은 곧 “절대자가 스스로 빛나는 것”이다. 그것은 “절대자가 반성하면서 전개하는 고유한 운동”이다.(논리학, GW11, 375)
“그러나 양상 즉 절대자의 외면성은 이런 것[가변적이고 우연적인 것]일 뿐만 아니라 외면적인 것으로서 정립된 외면성이니, 단순한 종류나 방식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므로 가상으로서 가상이거나 형식의 자기 내 반성이다. 따라서 양상은 자기 동일성으로 되고, 이는 곧 절대자이다. 그러므로 사실상 절대자는 양상 속에서 절대적 동일성으로 정립된다. 절대자가 절대자의 본래 모습으로 되는 것은 그 자기 동일성이 자기 관계하는 부정성으로서 또는 가상으로서 정립된 가상으로 될 때이다.”(논리학, GW11, 375)
헤겔은 이런 절대자의 실현을 ‘외화’[Aeusserung]와 구별한다. 외화는 자신의 타자 속에 자기를 실현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노동을 통한 형상화에서 보듯이 이런 외화는 타자의 한계에 부딪힌다.
그러나 여기서 절대자의 실현은 개체가 내적으로 결여한 것을 다른 개체를 통해 충족하는 것이다. 이 관계는 상호적인 것이며 따라서 이는 개체의 실현이 아니라, 절대자 자체가 감추어진 자기를 겉으로 드러내는 것이니, 즉 “자기를 자기 자신에 대해 절대적으로 계시[Menifestieren]하는 것이다.” 즉 최초의 추상적 동일성으로서 절대자가 구체적인 동일성으로서 절대자로 즉 ‘절대적인 절대자’로 드러나는 것이다. 헤겔은 이런 ‘절대적 계시’를 실제성이라 한다.
그러나 처음에 자립적인 개체는 내적으로 타자에 대한 욕망을 느끼지만, 현존에서 타자와의 만남은 우연적이다. 내적 총체성으로서 절대자가 실현된 총체성 즉 실제성으로 되는 절대자의 계시는 아직은 우연적인 것 또는 추상적인 필연성에 머무를 뿐이다.
4)
이상에서 헤겔에서 절대자, 속성, 양상 사이의 삼위 일체적 관계를 살펴보았다. 그런데 절대자[실체], 속성, 양상은 근대 초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 철학의 근본 틀이었다. 그러므로 헤겔은 주석에서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의 실체, 속성, 양상 개념을 비판적으로 검토한다.
스피노자에서 실체는 ‘자기 원인’이라는 개념에서 나온다. 그러므로 본래 자기를 산출하는 것이며 그 본질 속에 실존을 포함하는 것이다. 스피노자에서 실체가 지닌 생산적 성격을 능산적 자연이라는 개념으로 구정하거나 또한 무한성 개념을 통해 이해한다.
“스피노자가 실체에 관해 제공하는 개념은 자기 자신의 원인이라는 개념이다. 즉 실체는 그 본질 속에 실존이 포함된 것이다. 다시 말해 절대자의 개념은 그 개념을 발전시키는 출발점이어야 하는 타자의 개념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런 자기 원인 개념은 심원하고 올바르며 학문에 앞서서 직접 가정되는 정의이다.”(논리학, GW11, 376)
스피노자는 무한성은 무한히 크거나 작은 것과 같은 현재 속에 존재하지 않고 피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스피노자는 무한성이 현재에 존재할 수도 있다고 하면서 예를 들어 하나의 원이 다른 원 속에 있을 때 그 두 원의 차이는 무한한 소수 계열(ψ)로 이루어지는 수이지만, 구체적으로 두 원 사이라는 한정된 크기를 지니고 있다고 한다.
이런 무한성 또는 자기산출의 입장에 서면 실체는 두 대립한 것의 상호 작용으로 나타나며 이런 점에서 여기서 긍정적인 것은 항상 자기 부정적인 것으로 된다.
5)
헤겔은 스피노자가 나중에 실체에 관한 올바른 출발점을 지니고 있었음에도, 여전히 외적 반성에 머물러 있어서 실체에 관한 그의 생각은 모순적인 성격을 드러낸다고 한다. 그것은 그가 실체를 모든 규정성이 사라진 무규정인 것으로 파악하는 데 있다. 그는 이런 실체를 절대적인 것으로 삼아서 모든 규정된 존재는 겉으로 자립적인 것으로 보이더라도 실체 속에 몰락하고 마는 유한한 존재라고 보았다.
실체 자체는 아무런 규정이 없는 순수한 자기 동일성이지만, 외적 반성의 관점에 서면 무한히 많은 규정이 출현한다. 외적 반성은 다시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지성이며 다른 하나는 표상이다. 전자는 인간의 지성이더라도 신적인 관점이며 후자는 유한한 인간의 관점이다.
이제 지성의 관점을 통해 실체를 보면, 실체의 속성이 나온다. 여기서 지성은 인간의 지성이지만, 신적인 지성이므로, 사실 속성은 실체를 신 자신의 관점에서 본 것이고 따라서 이 속성은 실체의 자신이 산출하는 규정성이고 본질적인 규정성이다.
그러나 인간의 실제로 존재하는 지성은 유한한 것일 수도 있으니, 이 경우 지석이 파악한 것은 속성이라기보다 양상에 속하게된다. 그러므로 인간 지성이 파악한 실체의 두 속성은 올바른 것이고 실체에 내적이라고 가정할 근거는 없다. 지성의 이런 이중성 때문에 스피노자는 오락가락하게 된다.
“그러나 이 전체[인식] 운동은 절대자 밖에서[즉 인간적 지성에서] 일어난다. 사실 절대자 자체는 사유[신적 지성]이기도 하며 그런 한 이 운동은 절대자 속에서만 일어난다.”(논리학, GW11, 377)
신적 지성에서 절대자의 속성은 무한하나, 인간 지성의 관점에서는 오직 두 가지만이 실체의 속성으로 규정된다. 그것이 곧 사유와 존재이다. (헤겔은 왜 하필이면 이 두 가지인가를 반문하면서 이는 스피노자가 아마도 경험으로부터 받아들인 것으로 생각한다.) 이 사유와 존재는 동일한 실체를 지성의 관점에서 본 것이므로 내용은 동일하면서도 형식은 무관하니, 이 때문에 사유와 존재 사이에는 서로 평행하는 상응 관계가 존재한다.
양상은 이런 속성을 다시 지성이 아닌 표상의 관점에서 본 외적 반성이다. 이는 “실체가 타자에 의해 감염된[Affection] 상태이니 그 규정성은 타자 속에 있으며 타자를 통해 파악된 것이다.”(논리학, GW11, 377) 그 결과는 개별적이고 우연적인 것이며 실체 앞에서 전적으로 무실한 것이다.
6)
그러나 본질적인 속성이든(지성이 인간적 지성인 한), 우연적인 양상이든 스피노자에서는 외적 반성에 속하므로 이는 실체 자체의 순수한 동일성에 비추어본다면 한계를 지닌 것이며 부정되는 것일 뿐이다.
헤겔은 스피노자가 모든 규정성을 부정성으로 파악한 것은 위와 같이 자기 부정적인 것으로 파악할 여지를 남겨놓았으나 그 자신은 이런 자기 부정성으로 나가지 못하고 다만 유한성으로서 부정성에 머물렀다고 한다. 그러면 실체의 규정성은 실체의 자기산출이 아니라 외적 반성에서 나온 것이며 실체 앞에 부정되는 것으로 된다.
“그러나 스피노자는 규정성이거나 질로서 부정성에 머무른다. 그는 이 부정성을 절대적인 즉 자기를 부정하는 부정성으로 인식하는 데까지 나가지 못한다. 따라서 그의 실체는 그 자체 절대적 형식을 포함하지 못하며 형식에 대한 인식은 내재적인 인식이 아니다.”(논리학, GW11, 376)
그러나 이런 순수한 동일성으로서 실체 자체도 사실은 외적 반성을 통해 나온 것일 뿐이다. 결론적으로 헤겔은 스피노자가 실체 자체를 파악하면서도 자기 원인이라는 올바른 관점에서 외적 반성에 다시 미끄러짐으로써 사유에서 혼란을 벗어나지 못했다고 한다.
7)
라이프니츠는 스피노자가 단초적으로 제시한 자기 원인이라는 개념으로부터 자기산출과 자기 내 반성이라는 개념을 확립한다. 그는 자기산출의 능력을 지닌 실체를 모나드라고 규정한다. 라이프니츠는 이런 자기산출 능력을 표상 능력이라 규정한다.
모나드는 자기산출의 능력은 무한하니, 각각의 모나드는 그 자체가 총체성을 내적으로 지니고 있으나 개별 모나드는 특정하게 자기를 산출하니, 이 점에서 다른 모나드와 구별된다. 왜냐하면, 실체가 자기를 산출하면, 그 산출된 규정은 다른 것과 다르며, 각자 독립적이고 서로 무차별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 산출 능력이 무한하므로 모나드는 수적으로 무한하다.
“이때 모나드는 또한 규정적이며, 다른 것으로부터 구별되고, 그 규정성은 특수한 내용이나 표명[Menifestation]의 종류나 방식에 속한다. 모나드는 본래 그 실체상 총체성이지만, 그 표명에서는 그렇지 않다.”(논리학, GW11, 373-374)
모나드는 총체적 산출 능력을 가지므로 하나의 규정에 머물러 있을 수 없다. 그것은 하나의 규정에서 다른 규정으로 끊임없는 이행 속에 있다. 모나드는 폐쇄적이므로 이런 이행은 외부의 힘에 의해 촉발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기 내에서 일어나는 자발적인 운동이다.
하나의 모나드와 다른 모나드가 자의적으로 특정한 규정을 산출한다면, 이런 모나드 사이에 대립된 규정이 나타나서 서로 충돌할 수 있다. 그러면 우주는 충돌 속에서 소멸하고 말 것이므로, 우주가 보존되고 있다는 사실은 모나드와 모나드 사이에 조화가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무수한 가능성 가운데 모나드 사이의 조화는 결코 모나드 자신에 의한 것은 아니다. 여기서 라이프니츠는 모나드 밖에서 모나드를 조화하도록 조절하는 존재를 상정하는데 그것이 곧 신이다. 이 신이 본래 모나드를 조화하도록 만들어놓았으므로 이 조화는 이미 예정된 것이다.
“모나드의 이 제한성은 필연적으로 자기 자신을 정립하거나 표상하는 모나드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 한계 즉 모나드의 본래 존재에 속하거나 모나드와 다른 본질을 통해 정립되는 예정 조화이다.”(논리학, GW11, 378)
8)
헤겔은 라이프니츠가 모나드의 표상 능력을 통해 자기를 산출하며 자기 내로 복귀하는 운동을 설정한 것은 탁월한 생각이라 한다. 라이프니츠는 스피노자가 단초적으로 제시한 개념을 발전시켰다.
그러나 그는 개별 모나드에 머물러 모나드 사이의 조화를 설명할 수 없었으므로 다시 외부에 존재하는 신을 끌어들이게 되었다. 라이프니츠에게 신은 연극에서 나오는 기계 신과 같은 것이다.
헤겔에서 실체는 개체들의 집단이지만, 이는 단순히 개체들의 집합을 의미하지 않고, 서로 대립하는 개체의 상호 작용을 통해 성립하는 집단이다. 대표적 예가 암컷과 수컷으로 이루어진 집단이다.
이 집단이 논리적으로 선취되면, 절대자가 되며 여기서 절대자는 서로 대립하는 속성의 통일로서 무한한 절대자이다. 이 절대자가 자기 분화하여 하나의 속성이 등장한다. 이 속성은 라이프니의의 모나드처럼 하나의 속성이지만, 그 내용은 총체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의 형식은 절대자를 토대로 즉 자신의 내용으로 삼기 때문이다.
헤겔은 이 개별 속성이 하나의 실존인 개체로 출현하면, 이 개체 속에 속성의 총체인 절대자는 결여로서 남게 된다. 그러므로 개체에는 타자에 대한 욕망이 출현한다. 개체는 이런 욕망을 충족하면서 자기의 완전한 총체성을 회복한다. 이런 의미에서 개체는 부정성을 지닌 존재이며 이 개체의 자기 부정을 통해 절대자가 실현된다. 이렇게 절대자로 되돌아가는 개체가 곧 양상이다.
라이프니츠에서 모나드는 완전한 총체성이다. 그러나 헤겔에서 개체는 내적 통일을 결여한 욕망하는 존재이다. 전자에서는 개체와 개체가 관계할 이유가 없으나 후자에서는 개체는 타자와 관계해서만 절대자로 되돌아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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