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겔 변증법 반성운동37-절대자의 펼침과 계시[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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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 변증법 반성운동37-절대자의 펼침과 계시

1)

본질론 3편 ‘실제성’ 편에서 1장은 ‘절대자’를 다룬다. 이 1장은 양상의 운동을 추상적 개념에 따라 다루는 장이다. 이 운동은 2장 실제성 장에 이르러야 구체적으로 또는 실재적으로 전개될 것이다. (추상적 개념이란 곧 직접적인 것, 개별적인 것이므로 여기서 다루어지는 절대자 개념은 2장 처음에 등장하는 우연성 개념과 일치한다.) 1장에서 다루는 절대자의 운동은 개념적으로 세 가지 계기로 이루어진다. 즉 절대자, 속성[Attribut], 양상[Modus]이다.

종적 개체는 자기를 재생산하는 가운데 종적 본질을 지속하여 생산한다. 종적 본질이 자기를 재생산하기 위해서는 하나의 종적 개체가 다른 종적 개체와 관계해야 한다. 즉 암, 수의 결합이 이루어져야 한다. 이 암수의 개체가 종의 집단을 이룬다. 이런 종의 개체가 이루는 집단이 헤겔에서 ‘실체’라 불리는 것이다.

이 관계를 이제 논리적으로 설명하자면, 결과가 선취된다. 즉 결과로 실현된 실체는 처음에 내적인 실체로 있었다. 이것이 곧 절대자다. 이 절대자는 개념적으로 보면, 아직 개체로 분화되기 이전의 것이므로 추상적인 동일성에 해당한다.

여기서 ‘본질’ ‘종적 본질’이라는 개념과 ‘실체’ 또는 ‘절대자’라는 개념이 혼란을 일으킨다. 단순한 유기체에서 개체가 자기를 재생산하는 가운데 재생산되는 것이 본질이다. 복잡한 유기체에 이르면 ‘본질’을 재생산하는 것은 암수 개체의 관계이다. 복잡한 유기체에서 재생산되는 본질을 따로 구별하기 위해 ‘종적 본질’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인간에 이르면, 사회가 등장한다. 이 사회는 개인의 상호작용을 통해 지속적으로 재생산된다. 그러나 이 사회는 더는 종적 본질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 경우 ‘유적 본질’이라는 말이 사용되는데, 종적 본질에서 개체의 상호 관계는 자연적이며 무의식적이다. 반면, 유적 본질 즉 실체에서 개체의 관계는 의식적이며 합목적적이다.

절대자의 실현으로서 ‘실체’라는 말은 생물체의 종적 본질과 인간의 유적 본질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헤겔이 ‘실체’라 할 때는 결과적으로 나타나는 개체들의 집단을 의미하고 ‘절대자’는 이런 집단을 형성하는 출발점이 되는 목적 즉 내적 본질을 의미한다.

2)

이런 내적 실체 즉 절대자는 순수한 자기 동일성이므로 아직 “아무런 술어도 지니지 않은” 공허한 것이며, 그러나 앞으로 “모든 술어를 지닐 수 있는” 잠재적으로 풍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헤겔은 이런 절대자의 모습을 ‘가장 명백한[formellste] 모순’이라 한다. 헤겔에서 모순은 곧 운동을 의미하므로 절대자는 자기에 고요하게 머무르지 못하고 운동으로 나가게 된다.(논리학, GW11, 370)

절대자 즉 내적 실체는 추상적인 동일성이다. 아직 무엇으로 규정되지 않았다. 이 실체는 자기를 분화하여 속성으로 출현한다. 헤겔은 내적 실체의 분화를 ‘펼침'[Auslegung]이라 한다. 보통 ‘해석’이라는 의미를 지닌 이 단어는 본래 내적인 것을 밖으로 펼쳐놓는다는 의미를 지닌다. 때로 이것은 씨를 뿌리다, 산종이라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영어로는 ‘explicate’라는 의미인데 ‘implicate’에 대립한다. 이런 말은 라틴어에서 ‘접다’라는 의미를 지닌 ‘plico’에서 유래한다. 그런 의미에서 ‘explicate’는 접은 것을 펼친다고 볼 수 있는데, 헤겔이 펼침[Auslegung]이라고 하는 것은 그런 맥락에서 사용된다.

헤겔에서 절대자의 펼침[Auslegung]이란 곧 실체가 개체로 분화되는 것을 말한다. 이는 달리 말해서 실체가 자기의 씨를 이리저리 뿌려놓는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므로 헤겔은 절대자의 펼침을 단순한 외적인 반성을 통해 등장하는 규정성[Bestimmtheit]과 구별한다. 외적 반성은 절대자 밖에서 사유가 절대자에 관계하는 것이다. 절대자는 순수한 동일성이므로 사유는 자기가 원하는 모든 것으로 이를 규정할 수 있으나, 그런 규정은 모두 절대자에게 외적으로 머무르는 것이어서 부정되는 것이다.

“그와 같은 술어를 부정하거나 이와 같이 정립하는 것은 외적 반성에 속하는 한, 이런 부정이나 정립은 명백히 비체계적인[unsystematische] 궤변[Dialectik]이며 이 궤변은 약간의 노력으로도 많은 규정을 여기서나 저기서 파악하고 마찬가지로 아주 적은 노력으로도 한편으로는 그 규정의 유한성과 부정성을 지적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절대자가 그 반성 앞에 총체성으로 아른거리고 있으니 이 절대자는 모든 규정을 내재하고 있다고 언표한다. 그런데도 이 반성은 지금 말한 긍정과 앞서 말한 부정을 진정한 통일로 고양할 수 없다.”(논리학, GW11, 370)

우리는 이 절대자 즉 내적 실체를 다양하게 반성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생물체는 이런저런 기능에 따라서 이렇게 저렇게 분류된다. 예를 들어 동물은 방어나 공격의 기능을 통해 분류될 수도 있다. 어떤 동물은 발톱을, 어떤 동물은 이빨을, 어떤 동물은 독을, 어떤 동물은 지혜를 이용하여 자기를 방어하고 또는 적을 공격한다. 이런 분류는 위에서 말한 것처럼 ‘비체계적인 궤변’일 뿐이다. 이런 분류는 진정을 절대자 즉 내적 실체를 규정하지 못한다.

3)

우리는 사유를 통해 즉 반성을 통해 절대자에 접근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 반성이 절대자에 대해 단순히 외적인 것에 그치지 않고 절대자에 내적인 것으로 되면, 즉 주관적인 반성이 아니라 객관적인 반성이 되면, 비로소 이때 반성을 통해 규정된 것은 곧 절대자의 주름이 펼쳐진 것이 된다.

그렇다면, 이 외적 반성이 어떤 경우에 절대자의 펼침으로 발전하는가? 헤겔은 이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절대자의 규정은 절대적 형식이지만, 그 동일성을 이루는 계기는 단순한 규정성인 것은 아니고 오히려 그 동일성은 그것의 계기 각각이 자기 자신에서 총체성이고 따라서 그 [절대자가 지닌 순수 동일성의] 형식에 무차별하면서 전체의 완전한 내용이다.”(논리학, GW11, 371)

“거꾸로 말하자면 절대자는 절대적 내용이니, 그 자체로 무차별한 다양성인 그 내용은 자신에서 부정적인 형식 관계를 지니면서 이를 통해 그 다양성은 다만 순수한 동일성이 된다.”(논리학, GW11, 371)

이런 구절을 통해 보자면, 절대자는 형식적으로 보면, 순수한 동일성이지만, 내용 속에서는 대립하는 속성의 무구별적인 통일이다. 그 속에 포함된 하나의 속성은 전체를 이루는 하나의 계기, 동시에 그 자체로 다른 계기를 이미 포함한 전체, 총체성이다.

이런 점에서 속성은 총체성으로서 전체 내용을 갖지만, 하나의 계기로서 개별적 형식이다. 이 형식은 서로 무차별한 것이다. 속성에서 총체적 내용은 감추어져 있으며, 표면에 등장하는 것은 개별적인 형식으로서 속성이다.

그러나 내용상 이미 전체이므로, 이 개별적 속성은 타자와 관계하는 가운데 자기 부정성을 지니게 된다. 그러나 이런 아직 이런 자기 부정성이 드러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내용을 통한 통일성은 아직 감추어져 있는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설명은 기독교의 삼위일체라는 개념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것이 분명하다. 기독교에서 삼위 즉 성부와 성자, 성령은 각기 전체 신의 한 계기로서 그것은 자립적 총체이지만, 동시에 자기 부정성을 통해 전체로 복귀한다. 또한, 하나의 속성이 배후에 총체성을 지닌다는 것은 라이프니츠가 말한 모나드 개념을 연상시킨다. 모나드는 내용상 총체적이지만, 개별적인 속성을 표상한다.

이와 같이 절대자에 대한 반성이 낳은 규정이 하나의 계기이면서 총체성으로 되는 경우 이제 그 규정은 바로 절대자에 관한 펼침이 된다. 이러한 점은 생물체의 기관이 고유한 기능을 지니면서도 유기체적 전체 속에 분리되지 않으므로 다른 기능을 담당할 능력을 지니는 것과 같다. 예를 들어 두뇌의 국소화를 생각해 보자. 두뇌의 한 부분은 전체적인 통일 속에 있으므로 고유한 기능을 지니면서도 다른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

4)

속성이 자체 내에 이미 내적인 통일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이제 이 내적 통일성이 드러나게 되면, 속성은 겉보기에 자립적 독자성을 유지하지 못하며, 이런 내적 통일성 속으로 몰락하면서 자기 부정적인 것으로 된다.

만일 속성이 단지 “그 자체로서 타당성을 지닌[자립성을 지닌] 형식적 차이”에 지나지 않는다면, 이는 외적 반성에 속한다. 절대자에 대한 외적 반성에서는 그 내용은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것이며 우연한 것으로서 잡아채진 것이다.

“이런 반성은 절대적 동일성 속에 지양되면서 절대적 동일성에 내적으로 머무르고 그러나 바로 그 때문에 절대적 동일성에 외면적인 것으로 된다.”(논리학, GW11, 371)

반면, 이런 펼침에서 그 펼쳐진 속성은 ”절대자의 내적 필연성을 통해 규정된 것“(논리학, GW11, 372)이다. 헤겔은 이런 경우 개별 계기를 ‘투명한 가상’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가상은 곧 자기 부정적인 것으로서 동시에 자립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가상은 무가 아니라 “절대자가 그 속에서 빛이 나는 것”이며 투명하므로 “절대자를 자기 자신을 통해 꿰뚫어 볼 수 있게 한다.” 그런 가상에는 “절대자에 대립하는 구별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그것을 통해 빛이 나는 것에 의해 흡수되는 매체”다.(논리학, GW11, 372)

그러므로 절대자의 펼침은 하나의 운동이다. 그 운동은 순수한 동일성으로서 절대자에서 출발해서 다시 절대자로 되돌아가는 것인데 처음의 동일성은 추상적인 절대자이며 이렇게 운동을 통해 도달한 절대자가 절대자로서 절대자[Absolue-Absolute]이다.

그것을 매개하는 것이 곧 속성이다. 처음 속성은 자립적인 형식이 되면서 오히려 절대자를 은폐하게 된다. 그러나 속성 속에 감추어진 통일된 내용이 드러나면서 속성은 자기를 부정하고 절대자를 비추어 주게 된다. 즉 속성은 가상으로 전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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