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의 길을 찾아 혁명의 길을 간 행동가, 이회영 [길 위의 우리 철학] – 20
진보성
노블리스 오블리주와 이회영의 삶
우리 근현대사에서 ‘노블리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를 가장 잘 실천한 인물을 찾아본다면 아마 우당(友堂) 이회영(李會榮, 1867~1932)이 아닐까 생각한다. TV프로그램이나 언론에서 ‘육형제의 독립운동’이라는 주제로 자주 다루어졌는데, 바로 이회영 집안 형제들 얘기이다. 삼한갑족(三韓甲族)이라 불리며 대대로 귀족의 삶을 살았던 경주이씨 상위 1%의 사람들이 600억 넘는 전 재산을 독립운동에 쾌척하고, 온 가족이 압록강을 넘어 망명하면서 고난의 삶에 스스로 앞장 선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다. 이를 두고 임진왜란 때 국난극복에 크게 공헌했던 백사 이항복의 10대손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며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불변의 진리 덕이라고 얘기하는 사람들이 꽤 있다. 그러나 고귀한 귀족의식이라던가 진짜 보수라는 칭사(稱辭)로 이회영과 그 형제들의 삶을 단평(短評)한다면 그 진정성이 외려 애처로워질 것 같다. 이회영의 삶은 가문의 명예나 유림의 자존심을 지키는 것 따위와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다. 후대의 칭찬을 듣기 위해서도 아니고 귀족적 영웅으로 박제된 자신을 원한 것도 아니었을 테니, 한 사람의 진정성을 몰라주면 그 사람의 지난 삶은 애처로워지고 만다.
그의 삶을 온전히 보기 위해 일단 그 삶의 자취를 찾아보는 길을 나섰다. 서울 종로에 자하문 터널 가는 길에는 우당기념관이 있어 그가 살아온 자취를 전방위로 확인할 기회를 제공한다. 여러 자료들을 열람할 수 있었지만 한 인물을 느끼기 위해서는 유적지로 발걸음이 옮겨지기 마련이다. 이회영은 서울 저동(苧洞), 지금의 중구 명동1가에서 태어났다. 이회영이 태어난 곳은 인터넷 지도검색을 통해 쉽게 찾을 수 있다. 명동성당에서 내려다보이는 한국 YWCA연합회 건물을 정면에서 바라봤을 때 왼편으로 난 골목이 이회영의 옛 집터로 들어가는 입구다. 이 골목 입구에는 ‘우당 이회영의 길’이라는 안내 표지판이 있다. 중구청에서 “우당 이회영 선생 탄생 150주년을 맞아, 2017년 9월 20일에 명예 도로로 ‘우당 이회영 길’을 지정하였다.”고 쓰여 있다. 건물을 따라 조금만 들어가면 건물 바로 옆 작은 쉼터로 조성된 화단에 그와 여섯 형제의 집터였음을 알리는 표석과 이회영의 흉상이 자리하고 있다.
이회영 가문은 이 자리를 중심으로 명동 일대 대부분의 땅을 가지고 있었고 특히 육형제 중 둘째인 이석영은 아버지 이유승의 사촌형이자 영의정을 지냈던 이유원의 양자로 들어가게 되는데, 당시 이유원은 양주에서 서울에 이르는 방대한 대토지의 소유자였다. 이 때 물려받은 재산이 이회영 형제의 막대한 재력이 되었고 결국 신흥무관학교를 세우는 등 독립운동의 초석을 세우는데 쓰이게 되었으니 쓰임만큼은 타인을 위해, 핍박받는 이웃의 생명과 자유를 위한 공유물로 쓰인 셈이다.
이런 의식이 나오려면 이른바 혁명적 성향과 맹렬한 과감성이 필요하다. 육형제 중 넷째였던 이회영은 어린 시절 이런 성향이 두드러졌던 것으로 보인다. 이회영의 제자이자 독립운동 동지인 이관직은 이회영이 소년 시절부터 혁명적 소질이 풍부해서 일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고 한다. 자기 집안의 종들을 자유민으로 풀어주는가 하면, 밖에서는 남의 집 종들에게도 말을 높였다는 일화가 그렇다. 이런 당돌함의 배경에 어떤 영향이 있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자신의 자유만큼 타인의 자유도 존중하고 공감하는 인간적 정감의 매력이 있었음은 분명하다. 이후 보이는 신분제도에 대한 반대는 여기서 출발했다. 익숙한 질서에 얽매이지 않고 새로운 시도를 두려워하지 않았던 것. 그래서인지 그의 학문 성향도 옛 경전을 공부하기 보다는 새로운 서구 지식에 대한 관심이 매우 높았다고 한다. 이런 성향은 청년 시절 양명학에 관심을 가지고 공부했던 배경으로 보인다. 성리학이 계급적 질서의 옹호차원에서 이해되며 현실을 타개할 어떠한 희망도 찾을 수 없는 학문으로 인식될 때 양명학의 지행합일적 주체의식은 자기 안의 양지(良知)를 현실을 자각하고 개혁할 수 있는 중심핵으로 삼는다. 학술을 통한 능동적이고 자신감 있는 자기의 탄생이다. 이회영에게 양명학은 곧 자기 행동의 준거였다. 박은식 같은 인물이 참담한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 양명학을 자기 학문의 중심으로 삼은 것도 같은 맥락이다.
파격적 삶의 행보 : ‘시대의 모순에 반역하다’
이회영은 일찌감치 과거에 급제한 아우 이시영과 달리 관직에 나가는 것을 그리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다고 한다. 엄중한 시기에 관직은 중요하지 않았다. 부패한 관계(官界)에 대해서는 혐오에 가까운 반응을 보이기도 했고, 나중에는 아예 출사를 거부했다. 그의 이런 출처관(出處觀)은 『논어』에 ‘천하에 도(道)가 있으면 나타나 벼슬하고, 도(道)가 없으면 숨어야 한다’, ‘나라에 도(道)가 있을 때는 가난하고 천한 것이 부끄러운 일이며, 나라에 도(道)가 없을 때는 부귀한 것이 부끄러운 일’이라는 의식과 일치한다. 그러나 여기에 그치지 않고 옛 것을 거울삼아 현실을 인식하고 자기 행위를 통제하는 실천의 폭을 확장한다. 위정척사론자들이 봉건적 사회문화의 자장 위에서 익숙한 것을 ‘지키거나’, 아니면 ‘숨거나’·‘부끄러워’하는데 그쳤지만 이회영은 시대의 변화에 맞게 처신하여 그의 다섯 사촌 형제들을 삭발하여 신식 학교에 보내거나 그가 20세 전후 되던 시기에는 과부가 된 여동생을 전격적으로 재가시켰다. 봉건적 사회 잔재에 대한 일종의 도전이었다.
이회영의 행보에서 상동교회(감리회)는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현재 상동교회는 서울 중구 남대문로 30(남창동 1-1)에 있지만 당시 상동교회는 지금 자리 건너편 한국은행 화폐박물관 자리에 있었다. 상동교회는 상·천민이 중심이었던 교회였는데 이회영은 1904년 서울 상동청년학원 학감이 되어 청년교육에 힘쓴다. 그가 기독교를 받아들인 이유나 계기에 대한 단서는 명확히 보이지 않고, 몇몇 설이 있으나 소개할 만한 사료적 근거는 희박하다. 추측컨대 신채호의 1910년 논설이지만 「이십세기 신국민」(『대한매일신보』)에서 “20세기 신국민적 종교의 가치” 운운하며 기독교에 대해 호의적인 견해를 밝힌 사례도 있는 만큼 국민의 정신을 일깨울 종교적 구심점으로 그 기능성을 인정받기도 했고 마침 신학문에 관심이 많던 이회영이 반일운동에 앞장섰던 많은 우국지사들과 회합이 가능한 장소로 여겼기에 자연스레 귀의한 것으로 사료된다.
이회영이 양명학을 공부하며 관심을 두었던 지행합일의 실천적 주체의식은 성경에서 말하는 만인 평등이나 자유에 대해 강조한 내용들과도 충분히 잘 어울리게 해석되는 시대 배경 또한 존재한다. 이 역시 그를 공명시켰을 수 있다. 여기서 이회영은 상민출신 전덕기 목사에게 세례를 받고 친교를 맺는다. 이 둘은 함께 헤이그 특사 파견에 관여하거나 1907년 4월 상동교회 지하실에서 이동녕·양기탁 등과 함께 비밀리에 신민회를 조직하는 비밀 결사 활동을 이어간다. 이런 활동의 장소가 교회였다는 점, 그리고 이에 그치지 않고 명망 있는 사대부 집안에서 기독교에 귀의했다는 것 자체가 당시에는 매우 혁신적인 일이었다.
한국 아나키즘의 선구
이회영은 유자명처럼 사회주의 이론을 미리 학습하거나, 신채호처럼 언론계에 투신하여 신사조를 받아들인 후 지속적인 집필 과정에서 학문을 연마한 인물이 아니었다. 이회영은 당시 독립운동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었기에 주도면밀했고 무엇보다 실천과 행동을 중시한 인물로서 스스로 학술문헌을 남기거나 자기 철학과 사상을 체계적으로 정리해 두지 않았다. 전면에 나서거나 어떠한 자리에 연연하지 않았던 성향도 저술에 신경 쓰지 않은데 한 몫을 한 것으로 보인다. 아쉬운 점은 그래서 이회영의 철학사상을 확언하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 다만 알 수 있는 것은 철학사상의 중심이 양명학에서 기독교 사상으로, 망명 후에는 아나키즘이 그에게 영향을 주었고 실천의 동력으로 삼았던 학문이라는 사실이다.
이회영은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아나키즘의 선구로 불린다. 물론 당시 한국의 아나키스트들은 서구에 바탕을 둔 아나키즘의 전개와는 다르게 아나키즘을 이해했다. 이는 당시 억압적 국가로서 강도의 위치에 있던 일본에 의한 식민지배의 한국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 그래서 한국의 아나키스트들은 아나키즘의 무정부주의적 정신과는 다르게 모두 민족과 민중, 그리고 국가의 독립이라는 매우 이질적인 목표를 아울러 공유하고 있었다. 아나키스트라는 이름에 민족주의자의 성격이 혼합되어 있는 것이다.
이회영 역시 그랬다. 이러한 특징은 이을규의 『시야 김종진전』에서 단편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이 의식적으로 무정부주의자가 되었거나, 무정부주의로 전환했다고는 생각치 않는다. 한국의 독립에 대한 자신의 사고와 방책이 사상적 견지에서 무정부주의자들의 주장과 상통할 뿐이라는 의견을 피력한다. 이러한 면은 신채호가 1929년 공판에서 자신이 무정부주의에 기운 것은 책에서 얻은 이론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인간적 요구”에 의했다는 주장과 유사하다.
이와 관련하여 이회영은 1918년 고종의 망명을 계획했던 적이 있는데, 이를 두고 일부 사람들이 보황파(保皇派)나 복벽주의자라고 비판하자 신분제도 등 봉건적 제도에 반대했던 자신의 과거 사례를 거론하면서도 동시에 운동의 목적이 독립에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어서, 사심 없는 공정한 민족적 양심을 지닌 이 독립운동이 무정부주의라고 한다면 “한국의 독립운동은 무정부주의 운동이어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 자기 스스로가 이념에 포섭되었다고 평가하기 보다는 자발적 이해의 장에서 아나키즘과 만났음을 강조한다. 이 지점에서 한국 아나키즘의 기원은 앞서 말한 민족과 연계된 바탕에서 시작됐다고 할 수 있다. 민족적 상실의 탈환과 인간의 궁극적 자유를 향한 민중적 의지가 같은 궤적을 그리고 있다. 한편 이회영은 김종진과의 대담에서 조소앙과 만남 시 공산주의의 민중에 대한 정치적 지배성을 우려했던 것처럼 무정부주의와 공산주의의 차이점을 지적하고 독립된 한국에서도 무정부주의적 자유평등의 원칙은 그대로 지켜져야 할 것을 강조한다. 또 상호부조론을 인정하면서 국가를 초월하는 자유협동체의 인류적 이상의 청사진을 제시한다. 이러한 이회영의 아나키즘에 대한 생각은 북경을 중심으로 하는 독립운동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1910년 망명 이후 북경 시절 이회영의 거처는 상해와 만주에서 온 독립운동가들이 한번 씩 거쳐 가지 않았다면 이상할 정도로 망명가들이 자주 들렸던 곳이었다.
종속적 삶이 아닌 자유로운 삶을 위해
1914년 5월 30일 하와이 교포신문 『국민보』에 이회영은 자신의 공화주의적 이상을 피력하는 내용으로 「한국은 어떠한 인물을 요구하는」라는 논설을 발표했는데, 여기서 그는 “대영웅이 대국민 같지 못함”은 역사적 격언이라는 것을 강조하면서 “영웅이 건설한 나라는 길이 가지 못하지만 국민이 합동하여 세운 국가는 운명이 장구하다”고 힘주어 얘기한다. 현실의 모순을 타개하는 힘은 몇몇 거대한 영웅들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사민이 평등함을 인식하는 각각의 개인들이 곧 영웅이며 자각된 그들이야 말로 자유로운 민중으로서 연합을 이루어 독립과 자유를 쟁취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회영 자신이 치열하게 사상적 고민을 전개했던 아나키즘은 사실 그 이전부터 자기 안에서 배태되는 일정한 낌새가 있었다. 그는 민중의 자유와 평등한 세상을 바라던 이상을 파괴하는 강도들에게는 무력투쟁으로 대응했다. 정치적 조직의 구성에 반대하여 임시정부와 인연을 맺지 않았던 이회영은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여 의열단형성에 실질적인 산파 역할을 했으며 항일구국연맹과 비밀 결사체 흑색공포단을 조직하기도 했다. ‘내가 남에게 지배 받고 싶지 않으니, 나도 남을 지배하지 않음’이라는 이회영의 원칙은 이성적으로 당연히 사람다운 사람의 길을 간 것이었고 아나키스트가 실천하며 살아가는 길이었다. 일상세계에서 자기 원칙을 지키며 살아간 인물이 통속적 세상에서 희귀한 영웅의 면모로 비춰지는 것은 그리 온당해 보이지 않는다.
그의 자취 중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쌍회정을 찾아봤다. 쌍회정은 이회영의 10대조인 이항복의 집 앞에 있던 정자다. 현재 남산자락 서울 중구 퇴계로6길 36에 있는 일신교회 자리에 정자가 있었음을 알리는 작은 명판만이 남아있는데, 이마저 도로 시설물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다.(맨 위 사진 참조) 후에 이석영 소유가 된 이 곳에서 이회영은 동생 이시영은 물론 이상설·여준·이동녕 등 동지들과 신·구 학문을 공부하고 의기 넘치는 토론으로 시간을 보냈다. 이회영의 사상적 계보는 성리학에 대한 비판을 이어 자기 공부의 중심을 양명학적 지행합일에 두었고, 반일운동의 기점에서 기독교적 만민평등과 이상적 자유의 추구, 그리고 민족운동의 연장선에서 민중의 자유연합체를 구상하는 아나키즘으로 그 실천적 면모를 발전시키고 있다.
아는 것을 실천하는 지행합일의 정신을 가장 중시 했던 이회영은 한 번도 쉬지 않고 민족을 위해, 민중을 위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행동했다. 여기에는 반드시 그의 관념적 사고가 바탕 되었겠지만 그것을 알 수 있는 이회영의 직접적인 문장은 거의 없다. 그러나 인간의 행위와 족적에는 반드시 그 철학과 사상의 흔적이 남고 그 지점을 이으면 하나의 철학사상의 지도가 만들어지기 마련이다. 어떻게 보면 그의 실천적 행동가의 삶을 학술의 영역에서 정리한다는 발상이 온전치 못한 것일 수도 있지만 그 지도를 통해 종속적인 삶이 아닌 주체적 인간으로서 온몸을 던져 살다간 한 인물의 궤적을 파악해서 시대정신의 전범으로 삼는 것은 꽤 괜찮은 일이다.
한편 지금도 이회영의 삶은 우리에게 온전히 다가와 있는 것 같지 않다. 수많은 수식어와 찬사가 따르지만 독립운동가와 우국지사에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닌지. 그 삶의 정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를 종종 목도한다. 지금 자본주의 신자유주의 세상의 문제를 돌아보는데 도움이 되는 그의 선각적 교훈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고 할까. 그의 자유와 평등에 대한 미래지향적 발상은 지금도 그 가치와 의미가 충분히 통한다. 그러나 그의 길을 따라가 본다는 것은 무리수이며 낭만적 상상에 그친다는 자조가 있다. 이 자조는 이 땅의 사람들이 바라보는 이 시대의 자화상일 뿐이다. 우리 스스로가 그린 자화상을 두고 옛 이회영과는 형편이 다르니 그것은 지금 갈 길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회영의 진정성을 알기 위해서는 그의 생생한 출처(出處)에 좀 더 다가가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그래야 그 삶을 우리가 온전하게 안을 수 있다. 그의 지난 삶이 지금 시대에 외롭고 애처롭지 않도록 하는 것이 우리의 급선무다.
기고자: 진보성(한국철학사상연구회)
동양철학을 전공했고 남명 조식으로 박사논문을 썼다. 한철연 분과모임에서 한국의 근현대철학을 함께 공부한 이후 전통철학과의 관계에 대해 관심이 많다.
블로그진 ‘길 위의 우리철학’은 한국현대철학을 함께 공부하고 토론하는 한국철학사상연구회의 ‘한국현대철학분과’에서 만든다. ‘길’은 과거로부터의 역사이기도 하고, 오늘의 삶이기도 하고, 미래로 열린 희망이기도 하다. 그 위에 서서 우리는 언제나 어느 길이 더 나은 길인지, 바른 길인지 생각하고 선택한다. 그렇게 ‘길’은 지향志向이기도 하고, 그래서 철학이기도 하다. 한국현대철학분과는 앞으로 월 2회 블로그진을 통해 우리철학이 서 있었던 길, 우리철학이 만들었던 길을 이야기 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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