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야민과 만화-폐허 산책하기 2-2 feat.자우림 샤이닝 [여기가 로도스다, 춤추자!]

벤야민과 만화-폐허 산책하기 2-2 feat.

자우림 샤이닝

 

이상하(한철연 회원)

 

5.

지금이 아닌 언젠가 여기가 아닌 어딘가

나를 받아줄 그곳이 있을까

가난한 나의 영혼을 숨기려 하지 않아도

나를 안아줄 사람이 있을까.

-자우림의 노래 샤이닝 중에서.

 

출처 여행중에 직접 찍은 제주도 협재 해변의 사진

 

 

 이번 만드라고라 에피소드의 나오미수녀와 벤야민에 대해 쓰면서 난 자우림의 명곡 샤이닝을 계속해서 떠올렸다. 도망을 꿈꿔보지 않은 사람은 없으리라. 이 지루한 반복되는 일상과 예기치 못한 고난과 고통이 산재하는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을까. 허나 자기가 지금 살고 있는 이 땅에선 도무지 이 반복되는 지겨운 현실의 중력을 벗어나기가 어렵다. 니체도 지긋지긋하다고 강조한 중력의 정령을.

 그래서 현대인들의 유토피아는 항상 외국, 여행 속에만 존재한다. 이 유토피아, 낙원에서 자기를 알아보는 사람이 없는 땅에서만… 진정한 자기를 알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그런 욕망이 여행에는 잠재되어 있다. 타인이 자기를 알아볼 일이 없는, 타인의 시선이 없는 곳의 자기를 알고 싶은 것이다. 어쩌면 베를린에서 모스크바로 떠났었고, 나치의 유럽을 피해서 미국으로 가려던 벤야민도, 수녀원을 떠나 여기가 아닌 어디로든 가고 싶었던 덴마의 나오미 수녀에게도 분명히 그런 욕망이 있었으리라. 그래서 수녀는 이렇게 주문했다. 어디로든 여기서 가장 먼 곳으로.

 그렇지만 그 여기서 먼 공간 조차도 돈이라는 자본주의 체제의 한계 안에서만 정해진다. 분명 그러한 속세의 논리가 싫어서 봉사하는 삶을 위해 수녀원으로 들어갔을 나오미 수녀지만, 토지 소유권 문제로 그곳에서 나오게 되었고 거길 나와서도 이 돈의 한계에 갖히게 된다. 이런 상황이라면 프랑스의 철학자 알튀세르나 푸코 같은 사람이 말했다는 ‘자본주의의, 세계의 외부란 없다’라는 끔찍한 말이 떠오른다. 지금 여기의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어도 사실은 벗어날 이 내부의 ‘바깥’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건 아닐까.

 게다가 이 에벤에셀 지역에 도착하자마자 나오미는 정말로 마지막으로 남은 짐 또는 재산인 가방을 타지에 도착하자마자 부랑자에게 도둑질당한다. 그리하여 돈이 없기에 식사를 하고서 식당주인의 허락을 받아 설거지 노동으로 보상하려는데 그마저도 기차역에서부터 온갖 사람들이 타인의 시선으로 나를 쳐다보며 스트레스를 준다… 시선이란 참으로 이중적인 면모가 있다. 헤겔 시절부터 말해온 것처럼 우리는 타인의 관심 타인의 시선을 누구나 받고 싶어하는 인정욕망이 있지만, 그 때문에 또한 인정투쟁에 시달리게 되고 고통을 받고 일상적인 스트레스에 노출된다. 그래서 앞에서 말했듯 그런 시선이 없는 타지로의 여행을 이상화하지만, 나오미 수녀는 분명 멀리 타지로 왔음에도 오히려 수녀원보다 더욱 타인의 시선에 시달린다. 그리고 왠 낯선 남자가 자기 이름을 부르며 찾아오는데…

 이는 놀랍게도 에벤에셀 도시의 시장이 직접 나오미 수녀를 알아보고 찾아와서 그녀를 극진히 대접하려는 것이었다. 노인이 절반 이상인 실버타운 에벤에셀의 시장은 당연히 건강에 큰 관심이 있었고, 나오미 수녀가 그동안 만들어온 약효가 있는 만드라고라에 나오미 수녀의 얼굴이 새겨져 있었기에 시장을 비롯해서 모든 시민이 나오미 수녀를 알아볼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시장의 비서가 그녀에게 살짝 나오미가 계속 이 도시에 살며 만드라고라를 만들기를 원한다고 전해준다. 조용히 살던 수녀원에서 아무 대책도 없이  야반도주한 나오미 수녀의 입장에서 정말 만세라고 외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어쩌면 진작 그 끝도 없는 보상없는 노동이 반복되는 수녀원에서 도망쳤어야 하는 게 아닐까 더 후회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20세기 세계대전중 나치의 독일에 살던 유대인 벤야민도 이런 희망을 기대하며 모스크바로 떠나고 미국으로 떠나려고 했던 건 아니었을까.

 이제 부르주아의 자식으로 크리스마스날 상가를 헤매고 파리의 아케이드를 산책하던 벤야민처럼, 듬직한 경호원이 항상 대동해주고 그보다도 더 듬직한 시장의 신용카드를 받고서 에벤에셀의 거리를 산책하는 나오미수녀.그녀는 돈이 필요없는 수녀로 자신이 살았다는 것을 겨우 며칠만에 잊어버릴 만큼 이 풍족한 소비생활에 익숙해진다. 이는 참으로 무섭고도 매혹적인 돈의 마력이자 자본주의의 매력이 아닐까.

 돈이 없을땐 누구나 돈과 자본주의에 악담과 저주를 퍼붓지만 돈이 많을땐 이 자본주의만큼 나에게 쉽게 만족과 행복을 제공해 주는게 없다. 그래서 우리는 지름신이라던가 sibal 비용이라는 새로운 말을 만들어가며 나의 행복을 위해 소비를 저지른다. 수녀였던 나오미 수녀조차도 예외가 아니다. 이전에 가라타니 고진의 근대문학의 종언을 읽을 때 자본주의와 관련해 그런 일화가 있었다. 아일랜드였나 어떤 유럽의 소국에선 전통 음악 등 지역 문화에 대한 자긍심이 대단해서 전혀 미국의 화려함을 부러워하지 않았었는데, 어느날 티비가 아일랜드에 들어오고 엠티비같은 방송이 시작되자 겨우 몇년만에 아일랜드 사람들이 할리우드와 미국 팝송에 열광했다는 것이다. 이 나오미 수녀도 그와 비슷한 씁쓸하고도 달콤한 자본의 매혹과 참맛을 보여주는 사례가 아닐까. 자본가의 자식으로 태어난 벤야민도 아마 그러하지 않았을까.

 물론 그렇다고 해서 겨우 며칠만에 완벽하게 바뀌는 사람은 없고 나오미 수녀님도 그러하다. 5일전에 수도원을 철거하겠다는 용역 깡패의 말을 나오미수녀는 기억해내고,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때마침 자신을 찾아온 택배원 덴마를 따라 다시 수도원으로 가게 된다. 허나 그곳에서 이전에 자신이 구하고 간호했던 거지들이 수도원 철거를 막는 광경을 보고… 나오미는 이전에 수녀원장님이 자신에게 남긴 말을 떠올린다…

 

 

출처 https://m.comic.naver.com/webtoon/detail.nhn?titleId=119874&no=44&week=tue&listSortOrder=ASC&listPage=2

양손에 시장의 카드로 사거나 선물받은 물건을 잔뜩 쥐고서,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거지 부랑자의 무리를 만난 나오미 수녀.

벤야민은 이 나오미 수녀처럼 도시의 빈자들을 만난 적이 있다. 베를린의 유년시절에 크리스마스 선물을 사러 부모손을 잡고 상점가를 가다가 거리의 가난한 아이들을 만났었고… 파리같은 대도시의 거대한 아케이드를 산책하다가 화려한 상품들에 대비되는 실업자 거지 매춘업자 노숙자 심지어 온몸을 광고판으로 채운 샌드위치맨을 만났었다.

그리고 이 가진 것 없는 약한 자들 사이를 산책하면서 벤야민은 희망을 수집하고 새로운 서사를 구성해낸다. 어쩌면 나오미 수녀도 벤야민같은 마음이 아니었을까. 프랑스 철학자 랑시에르의 말을 빌려본다면, 사회에서 아무 몫도 없는 자들에게 그들의 몫을 찾아주기… ?

 

 

6.

보다 편안하고 안락한 삶이 있으니

더 늦기 전에

더 늦게 전에

어서 도망치렴.

안밖으로 몸과 마음이 힘들었던 나오미수녀에게 원장수녀님은 병환으로 아픈 와중에도 이런 말을 남겨주었다. 이제 왜 그녀가 그런 말을 남겼는지 다시금 알아볼, 벤야민 식으로 말한다면 과거를 회억, 회상하고 기억해볼 시간이다.

수녀원의 삶이 너무 힘들어서 도망친 나오미 수녀. 하지만 도망쳐서 도착한 곳에서 의외의 물질적 풍요를 누렸음에도 그녀는 그다지 행복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곳은 자신이 원했던 곳이, 자기가 즐거운 곳이 아니었으니까. 복에 겨운 말일 수도 있겠지만 나오미는 만드라고라를 재배하는 농부일 때나 병자를 간호하는 간호사일 때나 신의 종으로 하루종일 신에게 기도를 올리는 수녀일 때가 가장 생명력이 넘치고 즐거웠다는 것을, 그 장소를 떠나고서야 깨달을 수 있었던 것이다.

존재에 대해서 다뤘던 철학자 하이데거도 딱 이런 상황에 대해 말한 바 있다. 무언가가 부재할 때 우리는 진실로 그 존재가 무엇이었는지에 대해 깨닫는다고. 물론 꼭 철학자의 이런 언어가 아니더라도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는 속담으로도 왜 나오미 수녀가 이제서야 그것을 깨달았는지, 수녀원을 떠난 이후 처음으로 저렇게 양손에 잔뜩 쥔 무거운 상품들을 내려놓고 예수나 부처를 떠올리게 할만한 미소를 짓게 되는지 알게 되는 이유로 충분하리라.

출처-https://m.comic.naver.com/webtoon/detail.nhn?titleId=119874&no=45&week=tue&listSortOrder=ASC&listPage=2

그리고 이제 수녀원으로 돌아온 나오미는 이전의 자신과 마찬가지로 현재에 너무나 힘들어하는 후배를 만나고 원장수녀님이 말한 말씀을 계속 전해준다. 어서 도망치라고. 자신은 이미 잘 다녀왔다고. 심지어 이 후배의 이름은 마리아, 덴마의 세계에 기독교는 없고 그와 닮은 종교들만 있지만 예수를 낳았다는 성모 마리아를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는 이름이다. 물론 이것은 순전히 내 자의적 해석이지만, 나오미라는 이름 자체도

나오(더라도) 바깥으로

미(me)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온다

라고 양영순이 의도한 것은 아닐까. 물론 마리아는 서양에 한국의 영희만큼이나 흔해빠진 이름이고 이 모든 게 나의 시쳇말로 뇌피셜 무리수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허나 이런 게 바로 그저 재밌었다고 한번 휙 보고 넘길 수도 있는 만화 한 편에 대해서, 산책하고 수집하는 리뷰적 글쓰기를 통해 새로운 해석의 가능성을 재구성하는 길은 아닐까. 벤야민이 모스크바 일기를 재구성했듯이.

출처 https://m.comic.naver.com/webtoon/detail.nhn?titleId=119874&no=46&week=tue&listSortOrder=ASC&listPage=2

나오미를 그렇게까지 움직이게 한 힘의 원천이란 결국 뭐였을까. 그것은 아마도 생명이리라. 생명이라는 건 천주님이 이 우주 곳곳에 보편적으로 일어나게 한 가장 즐거운 에너지 흐름, 스피노자의 에티카를 읽어본 사람이라면 여기에서 마치 스피노자가 기쁨의 정서에 대해 말한 부분과 상당히 유사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흔히 스피노자는 데카르트와 함께 서양의 중세를 끝내고 근대 철학을 개시한 이성을 중시한 철학자로 알려져 있지만, 그와 동시에 기쁨이나 명예욕같은 구체적인 인간의 정서에 대해 매우 상세히 다룬 섬세한 철학자이기도 하다.

벤야민도 이런 스피노자나 니체의 철학을 분명히 읽었고 영향받은 기록들이 그의 저서 곳곳에 남아있다. 아마 그래서 벤야민은 20세기 나치의 파시즘이 휘몰아치는 유럽의 거리에서 빈민과 창부와 산책꾼들을 바라보며, 그들의 마음과 정서에 대해 살펴보고 수집하며 자신의 역사철학을 다듬어나간 것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나도 바로 그런 수집가이자 산책가로서 벤야민의 문장과 마음을 훔치고 흉내내고 싶어서 이 연재글을 시작한게 아닐까.

이제 나오미수녀는 자신에게 확신이 생겼다. 떠나보고 나서야 그곳이 자신에게 얼마나 소중하고 즐거운 공간, 즐거운 삶이 있었는지 알게 된 것이다. 어쩌면 벤야민도 부르주아의 아들로 태어나 베를린에서 물질적으로 풍족한 삶을 누리다가, 자신의 연인인 아샤를 보기위해 모스크바로 떠났다가 돌아오고 모스크바의 일기를 남긴 것도 바로 이런 나오미의 마음과 닮아있는 건 아닐까.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여행을 떠났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것도 이런 정서를 다시 느끼기 위해서일지도 모른다.

여기서 글을 마무리하면 나름 감동적이고 훈훈한 흔한 결말이리라. 하지만 나는 또 마음 한켠에서 삐딱한 작은 아이가 고개를 들고 입을 삐쭉 내민다.사실 나오미 수녀도 이전 야엘로드 에피소드의 야엘과 마찬가지로, 굉장히 능력있으면서도 운까지 좋은 일부 사례에 불과한건 아니냐고. 만드라고라 마스터로 이미 하나의 엘리트 전문가였고, 여행객이 타지에서 가방을 소매치기 당하면 보통 패닉에 빠져서 아무것도 못하기 마련인데 하루도 지나지 않아서 도시의 시장이 그녀를 구해주러 오는건 지나치게 그녀에게 편리하고 양 작가의 작위적인 전개가 아니냐고. 좀 더 무리수를 던져본다면 어쩌면 베를린의 부잣집 엘리트로 자라난 벤야민이 잠시 모스크바로 외도를 떠난 것도 단지 그런 ‘일탈이자 행운으로 가득찬 여행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라고.

https://m.comic.naver.com/webtoon/detail.nhn?titleId=119874&no=46&week=tue&listSortOrder=ASC&listPage=2

또한 이 에피소드의 스토리 전체가 그 각자 다양하고 수많은 일상의 고통과 고난을 자칫 개인적으로 버티고 즐기면 된다고 정당화하는건 아니냐고 의문을 가져볼 수도 있을 법하다. 천년도 더 전에 로마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론 시절부터 기독교의 이런 서사는 매우 고전적인 레파토리 아니었는가.

 현재의 고통이 크면 클수록 미래에 더 큰 구원을 받는다는 식의 서사. 이는 자칫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그저 구원은 미래에, 심지어 죽음 뒤에만 존재하니 현실에서 무슨 고통을 받는 큰 문제가 아니라는 종말론, 메시아주의적인 이야기가 아닌가? … 21세기에 오히려 종교는 더더욱 날개를 펴고 날아오르는 중이라는 걸 우리 모두가 알게 되는 2020년 대한민국에서, 우리는 모두 살고 있다…

 

 

7.

 개신교니 신천지니 하는 특정 종교나 특정 교파의 교인이 아니더라도, 우리들이 다들 영원한 경제성장을 비롯한 유사 종교의 열병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을 나는 전편에 이어 이번 글을 통해 말하고 싶었다. 또한 고통받으면 나중에 보상받는다는 기독교스러운 서사는 여전히 우리 세계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는 것도. 그렇다면 이런 만드라고라 마스터이자 수녀였던 나오미 수녀나 벤야민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사유하고 감각해야 할까. 이에 대해 나는 앙겔루스 노부스의 시선 서론을 끝내는 이 말로서 내 표현을 대신하고자 한다. 물론 이에 대해 전적으로 지지하지만 모든 말에 동의할 수는 없다는 단서를 달고서… 비판, 비평이란 당연히 그러해야 하니까. 다음 글에선 이런 기독교와 수도원의 구원서사가 아닌, 맑스의 투쟁과 해방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자.

-필자는 이러한 논의 속에서 자신의 관점을 숨기지 않으려 한다. 다시 말해 고통받는 사람들의 관점에서 역사를 어떻게 서술할 것인가라는 관점으로 역사철학을 재검토해 보려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에서 출발한 서구 역사철학 역시 이러한 관심, 즉 고통과 불의를 신의 관점 속에서 설명하려는 이유에서 ‘역사의 신’의 존재를 증명함으로써 현재의 고통을 정당화하려는 시도를 비판하고자 한다. 그러한 과정에서 맑스와 벤야민의 역사철학을 옹호할 것이다. 이 과정에서 앞서 언급된 맑스의 이중성 역시 논증할 것이며, 아울러 벤야민에 의해 도입된 새로운 메시아에 대한 관점을 이를 보완하려는 시도로, 역사적 유물론을 일관된 방식으로 억압받는 자들을 역사의 주체로 사유하는 역사철학으로 재설정하기 위한 방향 전환으로 해석해볼 것이다.

그것은 ‘역사의 진보’라는 명분으로 과거를 망각하려는 모든 시도에 저항함으로써 가능할 것이다. 결국 역사철학의 세속화에 관한 이 책의 논의는 미래라는 이름으로 과거를 정당화하고 망각하려는 시도들과 정반대로, 망각에 저항하고 과거를 기억함으로써 미래로 ‘도약’하려는 모든 형태의 ‘몫 없는 자들’의 서사를 재구성하기 위한 예비 작업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책은 역사철학에 대한 시론임과 동시에 정치철학적인 고찰을 담고 있다. 이러한 이중성이 실은 모든 역사철학에 공통된 것이며, 앙겔루스 노부스의 시선이 의미하는 바 역시 그러할 것이다. (한상원 앙겔루스 노부스의 시선 39-40p)

계속…

이유도 없는 외로움 사랑했다는 괴로움

내게도 날개가 있어 날아갈 수 있을까.

이 가슴 속의 폭풍은 언제 멎으 려나

바람부는 세상에 나 홀로 서 있네

 

지금이 아닌 언젠가 여기가 아닌 어딘가

나를 받아줄 그 곳이 있을까…

 

가난한 나의 영혼을-

 

 

 

​​

자유의 길을 찾아 혁명의 길을 간 행동가, 이회영 [길 위의 우리 철학] – 20

 

진보성

 

노블리스 오블리주와 이회영의 삶

우리 근현대사에서 ‘노블리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를 가장 잘 실천한 인물을 찾아본다면 아마 우당(友堂) 이회영(李會榮, 1867~1932)이 아닐까 생각한다. TV프로그램이나 언론에서 ‘육형제의 독립운동’이라는 주제로 자주 다루어졌는데, 바로 이회영 집안 형제들 얘기이다. 삼한갑족(三韓甲族)이라 불리며 대대로 귀족의 삶을 살았던 경주이씨 상위 1%의 사람들이 600억 넘는 전 재산을 독립운동에 쾌척하고, 온 가족이 압록강을 넘어 망명하면서 고난의 삶에 스스로 앞장 선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다. 이를 두고 임진왜란 때 국난극복에 크게 공헌했던 백사 이항복의 10대손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며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불변의 진리 덕이라고 얘기하는 사람들이 꽤 있다. 그러나 고귀한 귀족의식이라던가 진짜 보수라는 칭사(稱辭)로 이회영과 그 형제들의 삶을 단평(短評)한다면 그 진정성이 외려 애처로워질 것 같다. 이회영의 삶은 가문의 명예나 유림의 자존심을 지키는 것 따위와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다. 후대의 칭찬을 듣기 위해서도 아니고 귀족적 영웅으로 박제된 자신을 원한 것도 아니었을 테니, 한 사람의 진정성을 몰라주면 그 사람의 지난 삶은 애처로워지고 만다.

‘우당 이회영 길’ 입구 안내 표지판, 사진출처 : 필자

그의 삶을 온전히 보기 위해 일단 그 삶의 자취를 찾아보는 길을 나섰다. 서울 종로에 자하문 터널 가는 길에는 우당기념관이 있어 그가 살아온 자취를 전방위로 확인할 기회를 제공한다. 여러 자료들을 열람할 수 있었지만 한 인물을 느끼기 위해서는 유적지로 발걸음이 옮겨지기 마련이다. 이회영은 서울 저동(苧洞), 지금의 중구 명동1가에서 태어났다. 이회영이 태어난 곳은 인터넷 지도검색을 통해 쉽게 찾을 수 있다. 명동성당에서 내려다보이는 한국 YWCA연합회 건물을 정면에서 바라봤을 때 왼편으로 난 골목이 이회영의 옛 집터로 들어가는 입구다. 이 골목 입구에는 ‘우당 이회영의 길’이라는 안내 표지판이 있다. 중구청에서 “우당 이회영 선생 탄생 150주년을 맞아, 2017년 9월 20일에 명예 도로로 ‘우당 이회영 길’을 지정하였다.”고 쓰여 있다. 건물을 따라 조금만 들어가면 건물 바로 옆 작은 쉼터로 조성된 화단에 그와 여섯 형제의 집터였음을 알리는 표석과 이회영의 흉상이 자리하고 있다.

이회영 가문은 이 자리를 중심으로 명동 일대 대부분의 땅을 가지고 있었고 특히 육형제 중 둘째인 이석영은 아버지 이유승의 사촌형이자 영의정을 지냈던 이유원의 양자로 들어가게 되는데, 당시 이유원은 양주에서 서울에 이르는 방대한 대토지의 소유자였다. 이 때 물려받은 재산이 이회영 형제의 막대한 재력이 되었고 결국 신흥무관학교를 세우는 등 독립운동의 초석을 세우는데 쓰이게 되었으니 쓰임만큼은 타인을 위해, 핍박받는 이웃의 생명과 자유를 위한 공유물로 쓰인 셈이다.

좌 : 이회영 집터 표석과 흉상 – 서울시 중구 명동1가, 우 : 쌍회정 터 – 서울시 중구 퇴계로6길 36(일신교회) *쌍회정은 아래 글 참조. 사진출처 : 필자

이런 의식이 나오려면 이른바 혁명적 성향과 맹렬한 과감성이 필요하다. 육형제 중 넷째였던 이회영은 어린 시절 이런 성향이 두드러졌던 것으로 보인다. 이회영의 제자이자 독립운동 동지인 이관직은 이회영이 소년 시절부터 혁명적 소질이 풍부해서 일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고 한다. 자기 집안의 종들을 자유민으로 풀어주는가 하면, 밖에서는 남의 집 종들에게도 말을 높였다는 일화가 그렇다. 이런 당돌함의 배경에 어떤 영향이 있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자신의 자유만큼 타인의 자유도 존중하고 공감하는 인간적 정감의 매력이 있었음은 분명하다. 이후 보이는 신분제도에 대한 반대는 여기서 출발했다. 익숙한 질서에 얽매이지 않고 새로운 시도를 두려워하지 않았던 것. 그래서인지 그의 학문 성향도 옛 경전을 공부하기 보다는 새로운 서구 지식에 대한 관심이 매우 높았다고 한다. 이런 성향은 청년 시절 양명학에 관심을 가지고 공부했던 배경으로 보인다. 성리학이 계급적 질서의 옹호차원에서 이해되며 현실을 타개할 어떠한 희망도 찾을 수 없는 학문으로 인식될 때 양명학의 지행합일적 주체의식은 자기 안의 양지(良知)를 현실을 자각하고 개혁할 수 있는 중심핵으로 삼는다. 학술을 통한 능동적이고 자신감 있는 자기의 탄생이다. 이회영에게 양명학은 곧 자기 행동의 준거였다. 박은식 같은 인물이 참담한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 양명학을 자기 학문의 중심으로 삼은 것도 같은 맥락이다.

 

파격적 삶의 행보 : ‘시대의 모순에 반역하다’

이회영은 일찌감치 과거에 급제한 아우 이시영과 달리 관직에 나가는 것을 그리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다고 한다. 엄중한 시기에 관직은 중요하지 않았다. 부패한 관계(官界)에 대해서는 혐오에 가까운 반응을 보이기도 했고, 나중에는 아예 출사를 거부했다. 그의 이런 출처관(出處觀)은 『논어』에 ‘천하에 도(道)가 있으면 나타나 벼슬하고, 도(道)가 없으면 숨어야 한다’, ‘나라에 도(道)가 있을 때는 가난하고 천한 것이 부끄러운 일이며, 나라에 도(道)가 없을 때는 부귀한 것이 부끄러운 일’이라는 의식과 일치한다. 그러나 여기에 그치지 않고 옛 것을 거울삼아 현실을 인식하고 자기 행위를 통제하는 실천의 폭을 확장한다. 위정척사론자들이 봉건적 사회문화의 자장 위에서 익숙한 것을 ‘지키거나’, 아니면 ‘숨거나’·‘부끄러워’하는데 그쳤지만 이회영은 시대의 변화에 맞게 처신하여 그의 다섯 사촌 형제들을 삭발하여 신식 학교에 보내거나 그가 20세 전후 되던 시기에는 과부가 된 여동생을 전격적으로 재가시켰다. 봉건적 사회 잔재에 대한 일종의 도전이었다.

이회영의 행보에서 상동교회(감리회)는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현재 상동교회는 서울 중구 남대문로 30(남창동 1-1)에 있지만 당시 상동교회는 지금 자리 건너편 한국은행 화폐박물관 자리에 있었다. 상동교회는 상·천민이 중심이었던 교회였는데 이회영은 1904년 서울 상동청년학원 학감이 되어 청년교육에 힘쓴다. 그가 기독교를 받아들인 이유나 계기에 대한 단서는 명확히 보이지 않고, 몇몇 설이 있으나 소개할 만한 사료적 근거는 희박하다. 추측컨대 신채호의 1910년 논설이지만 「이십세기 신국민」(『대한매일신보』)에서 “20세기 신국민적 종교의 가치” 운운하며 기독교에 대해 호의적인 견해를 밝힌 사례도 있는 만큼 국민의 정신을 일깨울 종교적 구심점으로 그 기능성을 인정받기도 했고 마침 신학문에 관심이 많던 이회영이 반일운동에 앞장섰던 많은 우국지사들과 회합이 가능한 장소로 여겼기에 자연스레 귀의한 것으로 사료된다.

좌 : 예전 상동교회 자리. 한국은행 화폐박물관 – 서울 중구 남대문로 39(남대문로3가 110) 한국은행, 우 : 현재 상동교회. 서울특별시 중구 남대문로 30(남창동 1-1), 사진출처 : 필자

이회영이 양명학을 공부하며 관심을 두었던 지행합일의 실천적 주체의식은 성경에서 말하는 만인 평등이나 자유에 대해 강조한 내용들과도 충분히 잘 어울리게 해석되는 시대 배경 또한 존재한다. 이 역시 그를 공명시켰을 수 있다. 여기서 이회영은 상민출신 전덕기 목사에게 세례를 받고 친교를 맺는다. 이 둘은 함께 헤이그 특사 파견에 관여하거나 1907년 4월 상동교회 지하실에서 이동녕·양기탁 등과 함께 비밀리에 신민회를 조직하는 비밀 결사 활동을 이어간다. 이런 활동의 장소가 교회였다는 점, 그리고 이에 그치지 않고 명망 있는 사대부 집안에서 기독교에 귀의했다는 것 자체가 당시에는 매우 혁신적인 일이었다.

좌 : 현재 상동교회 입구 벽면 부조, 우 : 현재 상동교회 역사 전시관. 정면 좌측 큰 초화상화가 전덕기 목사, 우측 옆에 스크랜턴 선교사, 맨 우측 아래 이회영 선생 초상이 보인다. 사진출처 : 필자

 

한국 아나키즘의 선구

이회영은 유자명처럼 사회주의 이론을 미리 학습하거나, 신채호처럼 언론계에 투신하여 신사조를 받아들인 후 지속적인 집필 과정에서 학문을 연마한 인물이 아니었다. 이회영은 당시 독립운동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었기에 주도면밀했고 무엇보다 실천과 행동을 중시한 인물로서 스스로 학술문헌을 남기거나 자기 철학과 사상을 체계적으로 정리해 두지 않았다. 전면에 나서거나 어떠한 자리에 연연하지 않았던 성향도 저술에 신경 쓰지 않은데 한 몫을 한 것으로 보인다. 아쉬운 점은 그래서 이회영의 철학사상을 확언하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 다만 알 수 있는 것은 철학사상의 중심이 양명학에서 기독교 사상으로, 망명 후에는 아나키즘이 그에게 영향을 주었고 실천의 동력으로 삼았던 학문이라는 사실이다.

이회영은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아나키즘의 선구로 불린다. 물론 당시 한국의 아나키스트들은 서구에 바탕을 둔 아나키즘의 전개와는 다르게 아나키즘을 이해했다. 이는 당시 억압적 국가로서 강도의 위치에 있던 일본에 의한 식민지배의 한국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 그래서 한국의 아나키스트들은 아나키즘의 무정부주의적 정신과는 다르게 모두 민족과 민중, 그리고 국가의 독립이라는 매우 이질적인 목표를 아울러 공유하고 있었다. 아나키스트라는 이름에 민족주의자의 성격이 혼합되어 있는 것이다.

이회영 역시 그랬다. 이러한 특징은 이을규의 『시야 김종진전』에서 단편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이 의식적으로 무정부주의자가 되었거나, 무정부주의로 전환했다고는 생각치 않는다. 한국의 독립에 대한 자신의 사고와 방책이 사상적 견지에서 무정부주의자들의 주장과 상통할 뿐이라는 의견을 피력한다. 이러한 면은 신채호가 1929년 공판에서 자신이 무정부주의에 기운 것은 책에서 얻은 이론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인간적 요구”에 의했다는 주장과 유사하다.

이와 관련하여 이회영은 1918년 고종의 망명을 계획했던 적이 있는데, 이를 두고 일부 사람들이 보황파(保皇派)나 복벽주의자라고 비판하자 신분제도 등 봉건적 제도에 반대했던 자신의 과거 사례를 거론하면서도 동시에 운동의 목적이 독립에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어서, 사심 없는 공정한 민족적 양심을 지닌 이 독립운동이 무정부주의라고 한다면 “한국의 독립운동은 무정부주의 운동이어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 자기 스스로가 이념에 포섭되었다고 평가하기 보다는 자발적 이해의 장에서 아나키즘과 만났음을 강조한다. 이 지점에서 한국 아나키즘의 기원은 앞서 말한 민족과 연계된 바탕에서 시작됐다고 할 수 있다. 민족적 상실의 탈환과 인간의 궁극적 자유를 향한 민중적 의지가 같은 궤적을 그리고 있다. 한편 이회영은 김종진과의 대담에서 조소앙과 만남 시 공산주의의 민중에 대한 정치적 지배성을 우려했던 것처럼 무정부주의와 공산주의의 차이점을 지적하고 독립된 한국에서도 무정부주의적 자유평등의 원칙은 그대로 지켜져야 할 것을 강조한다. 또 상호부조론을 인정하면서 국가를 초월하는 자유협동체의 인류적 이상의 청사진을 제시한다. 이러한 이회영의 아나키즘에 대한 생각은 북경을 중심으로 하는 독립운동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1910년 망명 이후 북경 시절 이회영의 거처는 상해와 만주에서 온 독립운동가들이 한번 씩 거쳐 가지 않았다면 이상할 정도로 망명가들이 자주 들렸던 곳이었다.

좌 : 우당 이회영 초상, 우 : 우당기념관 – 서울 종로구 필운대로10길 17(신교동 6-22) 유니온빌, 사진출처 : 필자

 

종속적 삶이 아닌 자유로운 삶을 위해

1914년 5월 30일 하와이 교포신문 『국민보』에 이회영은 자신의 공화주의적 이상을 피력하는 내용으로 「한국은 어떠한 인물을 요구하는」라는 논설을 발표했는데, 여기서 그는 “대영웅이 대국민 같지 못함”은 역사적 격언이라는 것을 강조하면서 “영웅이 건설한 나라는 길이 가지 못하지만 국민이 합동하여 세운 국가는 운명이 장구하다”고 힘주어 얘기한다. 현실의 모순을 타개하는 힘은 몇몇 거대한 영웅들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사민이 평등함을 인식하는 각각의 개인들이 곧 영웅이며 자각된 그들이야 말로 자유로운 민중으로서 연합을 이루어 독립과 자유를 쟁취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회영 자신이 치열하게 사상적 고민을 전개했던 아나키즘은 사실 그 이전부터 자기 안에서 배태되는 일정한 낌새가 있었다. 그는 민중의 자유와 평등한 세상을 바라던 이상을 파괴하는 강도들에게는 무력투쟁으로 대응했다. 정치적 조직의 구성에 반대하여 임시정부와 인연을 맺지 않았던 이회영은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여 의열단형성에 실질적인 산파 역할을 했으며 항일구국연맹과 비밀 결사체 흑색공포단을 조직하기도 했다. ‘내가 남에게 지배 받고 싶지 않으니, 나도 남을 지배하지 않음’이라는 이회영의 원칙은 이성적으로 당연히 사람다운 사람의 길을 간 것이었고 아나키스트가 실천하며 살아가는 길이었다. 일상세계에서 자기 원칙을 지키며 살아간 인물이 통속적 세상에서 희귀한 영웅의 면모로 비춰지는 것은 그리 온당해 보이지 않는다.

그의 자취 중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쌍회정을 찾아봤다. 쌍회정은 이회영의 10대조인 이항복의 집 앞에 있던 정자다. 현재 남산자락 서울 중구 퇴계로6길 36에 있는 일신교회 자리에 정자가 있었음을 알리는 작은 명판만이 남아있는데, 이마저 도로 시설물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다.(맨 위 사진 참조) 후에 이석영 소유가 된 이 곳에서 이회영은 동생 이시영은 물론 이상설·여준·이동녕 등 동지들과 신·구 학문을 공부하고 의기 넘치는 토론으로 시간을 보냈다. 이회영의 사상적 계보는 성리학에 대한 비판을 이어 자기 공부의 중심을 양명학적 지행합일에 두었고, 반일운동의 기점에서 기독교적 만민평등과 이상적 자유의 추구, 그리고 민족운동의 연장선에서 민중의 자유연합체를 구상하는 아나키즘으로 그 실천적 면모를 발전시키고 있다.

아는 것을 실천하는 지행합일의 정신을 가장 중시 했던 이회영은 한 번도 쉬지 않고 민족을 위해, 민중을 위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행동했다. 여기에는 반드시 그의 관념적 사고가 바탕 되었겠지만 그것을 알 수 있는 이회영의 직접적인 문장은 거의 없다. 그러나 인간의 행위와 족적에는 반드시 그 철학과 사상의 흔적이 남고 그 지점을 이으면 하나의 철학사상의 지도가 만들어지기 마련이다. 어떻게 보면 그의 실천적 행동가의 삶을 학술의 영역에서 정리한다는 발상이 온전치 못한 것일 수도 있지만 그 지도를 통해 종속적인 삶이 아닌 주체적 인간으로서 온몸을 던져 살다간 한 인물의 궤적을 파악해서 시대정신의 전범으로 삼는 것은 꽤 괜찮은 일이다.

한편 지금도 이회영의 삶은 우리에게 온전히 다가와 있는 것 같지 않다. 수많은 수식어와 찬사가 따르지만 독립운동가와 우국지사에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닌지. 그 삶의 정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를 종종 목도한다. 지금 자본주의 신자유주의 세상의 문제를 돌아보는데 도움이 되는 그의 선각적 교훈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고 할까. 그의 자유와 평등에 대한 미래지향적 발상은 지금도 그 가치와 의미가 충분히 통한다. 그러나 그의 길을 따라가 본다는 것은 무리수이며 낭만적 상상에 그친다는 자조가 있다. 이 자조는 이 땅의 사람들이 바라보는 이 시대의 자화상일 뿐이다. 우리 스스로가 그린 자화상을 두고 옛 이회영과는 형편이 다르니 그것은 지금 갈 길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회영의 진정성을 알기 위해서는 그의 생생한 출처(出處)에 좀 더 다가가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그래야 그 삶을 우리가 온전하게 안을 수 있다. 그의 지난 삶이 지금 시대에 외롭고 애처롭지 않도록 하는 것이 우리의 급선무다.

 

기고자: 진보성(한국철학사상연구회)

동양철학을 전공했고 남명 조식으로 박사논문을 썼다. 한철연 분과모임에서 한국의 근현대철학을 함께 공부한 이후 전통철학과의 관계에 대해 관심이 많다.


블로그진 ‘길 위의 우리철학’은 한국현대철학을 함께 공부하고 토론하는 한국철학사상연구회의 ‘한국현대철학분과’에서 만든다. ‘길’은 과거로부터의 역사이기도 하고, 오늘의 삶이기도 하고, 미래로 열린 희망이기도 하다. 그 위에 서서 우리는 언제나 어느 길이 더 나은 길인지, 바른 길인지 생각하고 선택한다. 그렇게 ‘길’은 지향志向이기도 하고, 그래서 철학이기도 하다. 한국현대철학분과는 앞으로 월 2회 블로그진을 통해 우리철학이 서 있었던 길, 우리철학이 만들었던 길을 이야기 하려고 한다.

  1. 광장에 서다 – 촛불의 승리 그리고 박정희 시대의 종언 [길 위의 우리 철학] -1 : 박영미
  2. 대통령 탄핵, 그 후 – 박은식(朴殷植)의 개혁론, 독립운동, 임시정부 [길 위의 우리 철학] -2 : 이지
  3. 송곡의 길가에서 최시형을 만나다 [길 위의 우리 철학] -3 : 구태환
  4. 붉은 얼굴의 경계인(境界人), 신남철 [길 위의 우리 철학] – 4 : 이병태
  5. 어린이를 노래하는 방정환을 만나다[길 위의 우리 철학] – 5 : 김세리
  6. 국가의 철학, 철학의 부재(不在), 안호상 [길 위의 우리 철학] – 6 : 박민철
  7. 정치의 중심에서 주변을 배회한 타고난 근대인 몽양(夢陽) 여운형 [길 위의 우리 철학] – 7 : 유현상
  8. 우리, 나라, 사랑 – 윤치호와 관련한 애국에 대한 단상 [길 위의 우리 철학] – 8 : 배기호
  9. 서일- 잊혀진 어느 무장투쟁 사상가의 초상 [길 위의 우리 철학] – 9 : 김정철
  10. 현상윤, 최초의 근대적 체제의 조선사상사를 짓다 [길 위의 우리 철학] – 10 : 윤태양
  11. 구도와 구세의 길, 운명적 불화 – 한용운 [길 위의 우리 철학] – 11 : 송인재
  12. 태백산에서 최후를 맞은 서양철학 1세대, 박치우 [길 위의 우리 철학] – 12 : 조배준
  13. 시대정신을 찾는 여정의 첫 발걸음: 신채호와 서울 [길 위의 우리 철학] – 13 : 진보성
  14. 큰 이룸을 위해 한 걸음씩 나아간 삶의 철학자, 도산 안창호 [길 위의 우리 철학] – 14 : 배기호
  15. 밑바닥에서 진리를 찾은 이- 장일순 [길 위의 우리 철학] – 15 : 구태환
  16. 서재필과 개화운동, 계몽을 통해 근대를 꿈꾸다 [길 위의 우리 철학] – 16 : 박영미
  17. 이항로의 위정척사, 당신들만의 진리 [길 위의 우리 철학] – 17 : 구태환
  18. 한국 현대 철학의 주목받지 못한 변방, 함석헌 [길 위의 우리 철학] – 18 : 유현상
  19. 유림의 정신으로 독립의 길을 걷다, 심산 김창숙 [길 위의 우리 철학] – 19 : 김세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