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향연에서 꽃핀 인간의 위대함[고전은 숨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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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메로스의 『일리아스』를 [고전은 숨쉰다]의 첫 번째 고전 비평으로 두 번에 걸쳐 소개합니다. 첫 번째 소개글은 영웅적 삶의 위대함이 어디에 있는가에 초점을 맞출 것이며, 두 번째 소개글은 영웅들 간의 경쟁에 관한 현대 연구자들의 논쟁을 소개하면서 『일리아스』가 왜 현대에도 유효한 논쟁의 장(場)이 될 수 있는가를 제시하려 합니다.(필자)

기독교 윤리와 희랍의 윤리

서양 문명의 대표적인 윤리 체계로는 기독교 윤리와 희랍의 덕윤리를 들 수 있을 것이다. 기독교 윤리, 특히 예수의 윤리는 용서를 통해 인간이 행한 일의 업과(ta opheil?mata)에서 벗어날 가능성을 발견한다. (‘ta opheil?mata’는「마태복음」 6장12절(주기도문의 일부) 등에 나오는 표현으로 희랍어 원래의 의미는 ‘빚(진 것)’을 가리킨다.) 바로 그 길이 새로운 인격적 관계인 사랑이다. 그러나 인간이 행한 일의 결과를 신이 떠맡음으로써 사랑의 가능성이 열린다는 점에서 예수의 윤리는 인간 ‘자체’의 탁월성에 주목하는 윤리는 결코 아니다.

반면에 희랍의 덕윤리는 인간 자체의 가능성을 새롭게 발견하는 데서 성립된다. 흔히 德으로 옮겨지는 ‘aret?’는 인간적 탁월함(excellence)이나 훌륭함(goodness)을 뜻하는데, 이 같은 인간적 탁월함을 꽃피우는 데서 아름다움(to kalon)을 발견하고 또 그런 가치를 고양하는 인생관에서 희랍 윤리가 자라났다고 할 수 있다. 느슨하게 말하자면 인간적 가치를 발견하고 고양하는 태도 속에 서양 휴머니즘의 원초적 뿌리가 있다고 하겠다.

호메로스, 희랍의 교사

호메로스의 위대함은 그의 작품이 서양 역사 속에서 지속적으로 재현되고 각색되고 있다는 점에서 일차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진정한 위대함은 그가 인간의 위대함을 발견했다는 데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같은 발견은 호메로스가 후대 희랍에 미친 영향 속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아닌 게 아니라 고대 희랍인들은 호메로스의 작품을 암송할 수 있다는 것을 늘 자랑으로 여겼으며, 플라톤의 『이온』(533d-e)에서는 호메로스를 자력(磁力)과 같은 매력을 가진 존재로까지 묘사한다.

호메로스에 대한 고대 희랍인의 평가는 단순히 매력적인 시인이었다는 데 머물지 않는다. 크세노파네스는 “처음부터 모든 사람이 호메로스를 따라 배웠다.”(DK21B10)고 하고, 플라톤 또한 호메로스가 희랍을 가르쳤다고 말한다.(『국가』606e.) 그렇다면 도대체 호메로스가 희랍인들에게 가르친 것은 무엇이었을까?

전능한 영웅?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는 영웅서사시이다. 따라서 우리가 호메로스의 가르침으로 자연스럽게 연상할 수 있는 것은 영웅들의 영웅적 활동, 즉 승리와 성공에 대한 이야기이다. 실상 우리는 영웅하면 무슨 성공신화의 대명사처럼 여기지 않는가. 이런 영웅 개념에 따르면 영웅적 존재는 어떤 난관이든 아무 어려움 없이 수월하게 헤쳐 나갈 수 있는 전능한 존재이다.

그러나 『일리아스』의 영웅들이 언제나 모든 난관을 쉽게 해쳐나가며 눈부신 행적만을 보이는 건 결코 아니다. 아가멤논은 자신의 권위만 내세우다 결국 수치스러운 꼴을 당하며, 아킬레우스는 아가멤논에게 당한 모욕에 화를 내다가 분을 이기지 못해 전쟁터에 나가지도 않는다. 그리고 자신의 부관인 파트로클로스의 죽음에 어린아이처럼 줄줄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트로이아의 영웅인 헥토르는 아킬레우스와 벌이게 될 결투에 앞서 두려움에 움츠리기도 한다. 이런 모습은 우리가 영웅에게서 기대하는 모습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여기에 『일리아스』를 단순한 영웅 무훈시로만 보면 안 되는 까닭이 있다.『일리아스』에서 묘사되는 영웅들은 잘나기만 한 ‘신적인’ 영웅이 아니라 뭔가 빈 데가 있는 ‘인간적인’ 영웅이기 때문이다.

죽음의 시

간결하고 압축적인 표현을 하는 호메로스식 문체를 깊게 의식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일리아스』가 처음부터 끝까지 죽음을 노래하고 있다는 것은 쉽게 알아챌 수 있다. 시인은 곳곳에서 죽음의 전장을 묘사한다. 전사들이 흘린 피가 내를 이루고 돌이 힘줄과 뼈를 박살내며 창이 관자놀이를 관통하고 창자가 땅 위로 쏟아지는 이야기와 표현들이 텍스트를 뒤덮고 있다. (죽음이 마치 눈앞에서 일어나듯 생생하게 시각화하는 것이 호메로스의 특징이다.)

이런 점 때문에 일찍이 라인하르트(Reinhardt)는 『일리아스』를 ‘처음부터 끝까지 죽음의 시’라고 규정하기도 했다. 여기에 시인이 드러내려는 핵심이 있다. 인간은 영웅이라고 해도 신이 아니기 때문에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thanatos)이다. 신의 몫이 불멸이라면, 인간의 몫(moira)은 피할 수 없는 죽음(moira)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호메로스의 영웅들은 죽음이 난무하는 전장을 “남자의 영광을 높여주는 싸움터”(XII.324)로 여긴다. 그 곳에서 적을 무찌르고 승리를 거둘 수 있기 때문이리라. 영웅들은 죽음(의 전장)을, 전사의 탁월성이 꽃필 수 있는 터전으로 생각했던 셈이다. 그러나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일리아스』는 승리만 이야기하는 무훈가가 아니다. 시인은 승리만큼이나 패배에 대해, 그리고 그 패배에서 비롯되는 고통에 대해 세부적인 묘사를 하고 있다. 영웅 서사시이면서 어떻게 죽음과 파멸을 노래하는 시일 수 있는 것일까? (통속적인 영웅 개념으로는 도통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이다.)

독자를 더욱 곤혹스럽게 하는 것은 등장인물들이 보이는 죽음에 대한 인식이다. 이를테면 헥토르는 아킬레우스와 벌일 결투를 앞두고, 협상하는 쪽과 맞서 싸우는 쪽 중 어느 쪽을 선택할까 고민한다. 그는 후자를 선택하면서 “영광스럽게 죽는 것(olesthai euklei?s)이 더 나을 것”(XXII.110)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어찌 보면 이것은 형용모순이다. 이때의 죽음이란 패배를 뜻하기 때문에 영광스러운 죽음이란 다름 아니라 ‘명예로운 패배’를 뜻하니 말이다. 패배가 어떻게 명예로울 수 있단 말인가?

또 하나 해석하기 어려운 경우는 아킬레우스에게서 볼 수 있다. IX권(410-416)에서 그는 자신이 전쟁터에 나가 싸우다 죽는 길과 전쟁터에 나가지 않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 중 전자의 길, 즉 죽는 길을 택할 경우 자신의 명성(kleos)이 불멸할(aphthiton) 것이라고 말한다. 아킬레우스는 자신의 명성이 죽음을 통해 실현되는 양 말하고 있다. ‘불멸의 명성’이 죽음이란 소멸을 통해 달성된단 말인가? (그렇다!)

아름다운 죽음

역설적으로 보이는 영웅들의 태도를 이해하려면 그들이 죽음 자체를 삶의 조건 내지 일부로 보았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죽을 줄 알면서도 전사답게 싸우다 쓰러져 죽는 것, 이것을 이상으로 삼은 데 영웅들의 진면목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가치관은 실패(패배)를 두려워하기보다 죽음이라는 리스크(risk)를 무릅쓰고 자신의 온 존재를 던지려는 태도 속에서 가능하다.

이런 점에서 호메로스의 영웅들은 단순한 운명론자도 아니며 수동적인 존재들인 것은 더더욱 아니다. (20세기 대부분의 서양고전학자들은 호메로스 영웅들에게 의지의 자율성과 자기의식이 없다는 이유로 행위자(agent)의 자격조건을 갖추고 있지 못하다고 보는데, 이는 잘못이다!) 이렇게 볼 때 영웅들이 ‘행동하는 능동적 존재’(men of action)였다는 바우라(Bowra)의 통찰은 몇 십 년이 지나도 퇴색되지 않는 생생한 울림을 가진다. (바우라(이창대 옮김),『그리스 문화예술의 이해』,철학과 현실사,2006. 참고. 원저는 The Greek Experience라는 제목으로 1957년에 출간되었다.)

영웅들이 죽을 줄 알면서 죽음의 길을 택하는 건, 죽음이란 운명의 몫에 굴하지 않고 인간의 모든 능동성을 펼쳐 보이려는 태도 속에서 가능했을 것이다. 여기에 희랍 영웅주의의 일차적 본질이 있다. 영웅들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는 건 그들이 죽음을 삶의 일부로 내면화했다는 것을 시사하며, 죽음 자체보다는 어떻게 죽느냐가 더 문제였음을 시사한다.

죽음을 내면화한 그들에게 ‘어떻게 죽느냐’는 것은 일종의 삶의 방식을 뜻했다. ‘비겁하게’ 오래 사는 것보다는 ‘용감하게’ 싸우다 죽는 것, 그 속에서 탁월성을 꽃피우는 것 그것이 그들의 이상이었다. (이것은 행위의 의미를 성공이나 실패라는 결과의 관점에서만 보지 않고, 행위자 연관적으로 보았음을 암시한다. ‘용감한 방식의(용감하게)’ 행위는 행위자와 연관될 때만 유의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용기’와 ‘비겁’은 행위자와 연관 짓지 않고는 ‘실질적으로’ 구별되지 않는다.)

그들은 죽음 앞에서도 자신의 ‘자긍심’과 ‘품위’(aid?s)를 잃지 않았던 것이다. 바로 이 점에 영웅들의 위대함이 있다. 후대의 아리스토텔레스는 겉으로 보면 형용모순으로 보이는 이런 인생관을 압축적으로 멋지게 묘사한다. ‘아름다운 죽음’(kalos thanatos)이라고!(『니코마코스 윤리학』,1115a34.)

고통을 보듬는 연민

전통적으로 『일리아스』의 XXIV권, 그리고 XXIII권까지도 전체 플롯의 구도에서 벗어난 부분으로 보는 견해들이 있다. XXII권에서 헥토르가 아킬레우스한테 죽임을 당하는 것으로 전투 장면은 끝나기 때문이다. 시인은 무슨 할 말이 남은 것일까?

『일리아스』는 죽음의 시일지언정 단순한 전쟁시는 결코 아니다. 구성에서부터 내용에 이르기까지 균형감을 잃지 않는 시인은 XXIII권에서 파트로클로스를 추모하는 아카이아인들의 모습을 그리며, XXIV권에서는 헥토르의 아버지인 프리아모스가 아킬레우스와 만나 탄원하는 장면과, 헥토르의 죽음으로 비탄에 잠긴 트로이아인들의 장례식 장면으로 마무리한다. 두 권 모두 산 자들이 먼저 간 이들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장면으로 되어 있다. 이런 받아들임이 프리아모스와 아킬레우스가 만나는 장면을 중심으로 양쪽으로 펼쳐져 있다고도 볼 수 있다.

흥미로운 건 두 사람이 만나 함께 운다는 데 있다. 프리아모스는 먼저 간 헥토르를 생각하며 울고, 아킬레우스는 (자신의 아버지와) 파트로클로스를 생각하며 통곡한다. 결국 아킬레우스는 자기 자식(헥토르)의 시신을 내달라는 프리아모스의 탄원을 받아들인다. 아킬레우스가 탄원을 받아들이는 이유는 자기처럼 프리아모스가 사랑하는 이를 잃었다는 데 대한 공감 때문이다. 늘 그렇듯이 울음이 공감을 자아낸 것이다. 이것이 바로 연민(eleos)의 정서이다.

호메로스의 영웅들은 죽음 앞에서 굴하지 않는 당당함을 보이는 한편, 죽음을 끼고 사는 같은 인간들에게 연민의 마음을 가진다. 이 같은 연민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다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 그리고 그렇게 죽어간 이들을 추모하며 살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대한 존재론적 통찰에서 비롯된다. 그렇다면 『일리아스』는 인간의 보편적인 고통을 내면화하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고 이 측면에서 비극적이다. 후대의 플라톤은 호메로스를 비극시인으로 부르고 있는데 ‘어떤 점에서’ 이는 적절한 통찰이라고 할 수 있다.

후대 희랍에 미친 영향

우리는 앞에서 호메로스가 희랍을 가르쳤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 말이 맞는다면 호메로스를 모르고서는 고대 희랍을 다 알았다고 할 수가 없으리라. 왜 그런가? 지면상 몇 가지 간단한 이야기로 마무리하도록 하자.

우선 고전기 비극이 흔히 옛날의 영웅을 주인공으로 삼아 이야기를 끌어간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비극은 일반적으로 행위자가 수행하는 행위의 ‘의도’와 행위가 끝나고 난 뒤 일어난 ‘결과’ 사이의 단절 문제를 제기한다. (이것이 비극의 hamartia 문제이다!) 비극이 호메로스보다 더 강하게 밀어붙인다는 차이는 있지만 애초에 이런 문제를 제기한 건 호메로스이다.

호메로스는 인간의 삶에서 행위의 의도와 결과의 결속이 깨질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그리고 그런 위험이 죽음과 같은 운명(moira)이란 삶의 조건에 의해 어쩔 수 없는 필연으로 놓여 있음을 통찰한다. 인간 앞에 어쩔 수 없는 필연의 운명이 놓여 있다는 것을 응시하고, 그 운명의 조건을 어떤 식으로 내면화할 것이냐는 문제를 던지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때의 필연이 결정론적 필연인 건 아니다.) 바로 이런 점에서 『일리아스』는 인간적 삶의 비극성을 노래하는 시라고 할 수 있고, 이렇게 본다면 비극은 다분히 호메로스의 유산을 업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호메로스의 유산이 이것으로 끝나는 건 결코 아니다. 고전기의 위대한 정치가 페리클레스의 추도연설 한 대목을 보도록 하자.
“그들[아테네 사람들]은 맞서 싸우고 감내하는 것이 굴복해서 살아남는 것에 앞서는 일이라고 생각해 수치스런 비난은 기피하고 해야 할 일은 온몸으로 감내해 냈습니다. 그리고 찰나와 같은 운명의 호기를 통해 공포가 아닌 영광의 절정에서 자신을 해방시켰던 것입니다.”(투퀴디데스,『펠로폰네소스 전쟁』,42.4.(이정호 옮김,『메넥세노스』부록,139 쪽.))

페리클레스는 영웅적 가치관을 아테네 폴리스에 적용하고 있다. 호메로스에게 영웅이 개인이었다면, 페리클레스에게 영웅은 더 이상 한 개인이 아니라 ‘폴리스 자체’이다. 이런 점에서 희랍 고전기의 정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시 호메로스적 영웅주의의 전통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런가 하면 우리에게는 친숙한(?) 소크라테스에서도 호메로스 전통의 일단을 볼 수 있다. 『소크라테스의 변론』28c-d에서 소크라테스는, 아킬레우스가 “죽음과 위험은 대수롭지 않게 여긴 반면, 못난 사람으로서 사는 것을 (…) 훨씬 더 두려워”한 것으로 묘사하면서 죽음에 맞서는 자신의 선택을 아킬레우스에 빗댄다. 호메로스의 영웅들과 마찬가지로 소크라테스의 경우도 죽는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떻게 죽느냐가 중요한 문제였던 것이다. 그리고 어떻게 죽느냐는 문제를 어떻게 사느냐는 문제의 일부로 받아들였던 것 같다.

그렇다면 죽음에 굴하지 않는 소크라테스의 면모 역시 호메로스가 남긴 유산의 일부로 보는 것도 지나친 해석만은 아닐 것이다.

정준영(정암학당 연구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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