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가장 슬플 때[아이들과 책보며 두런두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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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소개할 그림책은 제목에서 보듯이 슬픔을 소재로 한 책입니다. 슬픔을 소재로 한 그림책이나 동화책은 물론 많지만, 오늘 소개할 책은 슬픔을 다루는 방식이 여느 그림책과 좀 다릅니다. 이 책에는 주인공이 어떻게 해서 슬픈 일을 겪게 되고 또 어떻게 슬픔을 딛고 일어서는지를 보여주는 그런 통상적인 이야기는 나오지 않습니다. 이 책은 다만 슬픔의 이런저런 모습을 마치 정물화 그리듯 담담하게 보여 주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까 슬픈 사람이나 슬픈 사연이 중심이 아니라, 슬픔 자체를 있는 그대로 보여 주려는 그런 그림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슬픔을 역경이나 고난의 한 부속 요소로만, 그래서 극복 대상으로만 보는 것에 너무 익숙해져 있지 않은지 모르겠습니다. 어린이 책이든 어른 책이든 슬픔 자체를 찬찬히 들여다보는 책을 지금까지 본 적이 거의 없는 것 같으니 말입니다. 학창 시절 교과서에서 읽은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이라는 글이 그나마 비슷한 분위기였던 것 같은데, 그 글도 슬픔이라는 감정에 초점을 맞춘 글은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아무튼 이 그림책이 우리에게 신선한 감동을 주는 까닭은 무엇보다 슬픔을 있는 그대로 보여 주려는 흔치 않은 시도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출처:『내가 가장 슬플 때』

앞서 이 그림책이 여느 그림책과 다르다고 했지만, 이 책만큼 그림책의 장점을 잘 보여 주는 책도 드문 것 같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인간의 감정을 생생하게, 때로 절묘하게 형상화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번 오른쪽 그림을 볼까요. 책을 펼치면 맨 처음 나오는 그림인데, 어떤 얼굴을 그린 것인지 한번 짐작해 보기 바랍니다. 작가는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이 그림은 내가 슬퍼하는 모습입니다.
여러분은 그림 속의 내가 행복해 보인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죠.
실은 정말 슬프지만 행복한 척하는 겁니다.
내가 슬퍼 보이면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을까 봐
행복한 척하는 겁니다.

그러고 보니 얼굴이 겉으로는 웃고 있지만 실은 울고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림을 그린 퀜틴 블레이크는 세계의 수많은 어린이들로부터 사랑받는 그림책 화가입니다. 스케치도 하지 않고 그린 듯한 그의 그림이 무척 가볍고 자유스러운 느낌을 주지만, 그럼에도 그 속에는 정곡을 찌르는 날카로움이 배어 있습니다.

출처:『내가 가장 슬플 때』

그림을 하나 더 보겠습니다. 위의 그림과 짝을 이루는 그림인데, 책장을 넘기면 같은 주인공의 다른 표정이 나옵니다.

슬픔이 아주 클 때가 있습니다.
슬픔은 어디에나 있습니다.
나를 온통 뒤덮지요.

그럴 때 나는 이런 모습입니다.
슬픔 앞에서는 꼼짝할 수가 없습니다.

두 그림을 잇따라 보자니까, 『어린 왕자』에 나오는 보아뱀에게 잡아먹힌 코끼리 그림이 생각납니다. 알쏭달쏭한 겉모습에 이어 뜻밖의 실제 모습을 보여 줌으로써 독자들의 호기심과 공감을 단박에 이끌어내는 점이 꽤 닮았습니다. 슬픈 얼굴 하면 우리는 상투적으로 눈물 흘리는 모습을 떠올리기 쉬운데, 뜻밖에도 활짝 웃는 얼굴에 이어 이런 참담한 표정을 만나게 되어 잠시나마 충격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두 번째 그림은 눈물을 흘리거나 오열을 터뜨리는 단계를 넘어 넋이 나간 듯한 극한의 슬픈 상태를 보여줍니다. 작가 마이클 로젠은 자신이 사랑하는 아들을 잃었을 때 이런 모습이었다고 쓰고 있습니다.

이 그림을 보면 아마 누구라도 슬픔을 꽤 실감나게 그렸다는 인상을 받을 것 같습니다. 폐인과도 같은 인물의 모습에서 풍겨나는 무력감은 사실 슬픔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작가의 말대로, 슬픔이 찾아오면 우리는 그야말로 ‘꼼짝할 수가 없습니다.’

슬픔은 우리로 하여금 모든 의욕을 잃게 만들고 또 어떤 적극적 행위도 할 수 없게 만듭니다. 물론 우리는 슬픔을 잊기 위해 짐짓 다양한 행위를 시도할 수도 있습니다. 책에서도 그리고 있듯이, 친한 사람과 대화를 나누기도 하고, 억지로 즐거운 일에 빠져 보기도 하고, 자랑스러워할 만한 일을 떠올려 보기도 하고, 아니면 다른 사람에게 못된 말이나 괴상망측한 행동을 저지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행동은 결국은 하릴없이 해 보는 발버둥 또는 몸부림에 지나지 않습니다. 슬픔은 그 어떤 적극적인 행동을 통해서도 쉽게 해소되지 않는 감정이기 때문입니다.

슬픔은 노여움이나 미움, 두려움 같은 다른 감정들과 그 점에서 구별됩니다. 다른 감정들은 그 감정을 불러일으킨 특정한 대상의 현존이나 양태를 반드시 전제합니다. 그렇기에 괴로움을 해소하려는 적극적 행동이 어떻게든 가능합니다. 그러나 슬픔만은 그렇지 않습니다. 슬픔은 대상의 ‘현존’이 아니라 대상의 ‘부재’에서 비롯되는 감정이기 때문입니다. 연인과의 이별이나 자식의 죽음과 같이, 슬픔은 우리가 사랑하고 애착을 느끼는 대상이 사라지고 없을 때 찾아옵니다. ‘없음’으로 말미암아 생긴 감정이므로 슬픔은 우리가 현실적으로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고, 말 그대로 꼼짝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점과 관련하여 그림의 시선처리에서 재미있는 점을 하나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 그림에서는 눈동자의 초점이 또렷이 살아 있는 반면, 두 번째 그림에서는 초점이 사라진 흐트러진 시선이 등장합니다. 이것은 그림의 주인공이 어딘가 쳐다보고 있는 것 같지만 실은 아무 데도 보고 있지 않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에는 그가 보고 싶은 사람, 시선을 보낼 대상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슬픔에 빠진 사람은 대상의 부재 앞에서 한없이 무력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만일 우리가 슬픔을 이겨내는 일이 가능하다면, 이론적으로 단 두 가지 방법이 가능합니다. 대상의 부재를 현존으로 되돌리든가, 아니면 우리의 애착심 자체를 끊는 방법이 그것입니다. 이렇게 할 수만 있다면야 슬픔을 이겨낼 수 있겠지만, 그러나 대상의 현존을 우리가 마음대로 좌지우지할 수도 없거니와 그렇다고 애착심을 끊는 일이 쉬운 일도 결코 아닙니다.

슬픔은 반드시 우리를 찾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사랑하는 대상이 언젠가는 사라지거나 없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슬픔의 근원은 결국 죽음입니다. 우리가 죽음을 벗어날 수 없다면 슬픔에서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작가가 다음과 같이 슬픔의 ‘편재성’을 노래하는 대목은 결국 슬픔과 죽음의 동근원성을, 따라서 인간의 유한성을 표현한 것이라고 보입니다.

슬픔은 어디에 있는가?
슬픔은 어디에나 있다.
어느 곳에서든 나타나 너에게 온다.

슬픔은 언제 오는가?
슬픔은 언제라도 온다.
언제라도 나타나 너에게 온다.

누가 슬픈가?
모든 사람이 슬프다.
슬픔은 모든 사람에게 오고 너에게도 온다.

우리는 슬픔을 막아낼 방도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슬픔이 찾아왔을 때 그것을 이겨낼 방도도 없습니다. 우리로서는 그저 시간의 흐름에 몸을 내맡겨 애착심이 사그라지면서 슬픔도 옅어지기를 기다리는 길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사정이 이러하다면 우리가 한사코 슬픔을 피하거나 억지로 슬픔을 이겨내려는 것은 현명한 태도가 아닐 것입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슬픔을 담담하게 인정하고 마치 평생을 함께할 오랜 친구처럼 받아들이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김우철(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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