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깨달음이란?[아이들과 책보며 두런두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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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여러분에게 흥미로운 그림책을 하나 소개할까 합니다. 기상천외한 환상과 모험 이야기로 널리 알려진 미하엘 엔데가 쓴 『보름달의 전설』이라는 책입니다.

이 책이 흥미로운 것은 어느 은자(隱者)의 구도와 깨달음이라는 매우 이색적인 소재를 다루고 있을 뿐 아니라, 책을 읽고 난 뒤에도 작가가 말하고자 한 바가 무엇인지 알쏭달쏭해서 적잖은 여운이 남기 때문입니다. 구도의 과정은 어떠해야 하는지, 또 진정한 깨달음은 어떤 것인지에 대해 독자 스스로 대답할 여지를 남겨 놓고 있는 책인데, 이 점에서 그야말로 ‘철학 그림책’이라 부를 만합니다.

작가가 던지는 생각거리를 함께 살펴보기 위해 이야기를 먼저 간단히 개관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아직 세상에 천사와 악마가 있다고 믿던 때, 애인의 배신과 아버지의 파산으로 세상에 회의를 품게 된 젊은이가 세상을 등진 채 성스러운 책들을 공부하며 진리를 찾는 데 열중한다. 하지만 ‘자신의 모든 책이 지푸라기처럼 덧없는 것’이라는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글을 읽게 되자 젊은이는 지체없이 책과 공부방마저 버리고 떠난다. 그리고 어느 외딴 골짜기에 들어가 오로지 영원과 대화하며 궁극의 진리를 구하는 데 전념한다.

그러던 어느 날 은자가 머무는 골짜기에 한 거칠고 사나운 사내가 찾아온다. 그 사내는 약탈과 살인을 일삼은 도적으로서, 은자와 똑같이 세상으로부터 배신을 당했으나 두 사람이 걸어온 길은 사뭇 달랐다. 성자는 도적을 제자로 삼아 하느님의 말씀을 가르치려고 노력하지만, 도적은 가르침을 이해하지도, 죄를 회개할 줄도 모른다.

그러던 어느 날 마침내 은자에게 진리가 계시되는 순간이 찾아온다. 대천사 가브리엘이 보름달 뜨는 밤에 찾아오기 시작하고 곧 주님이 직접 찾으실 것이라는 소식을 전한다. 은자는 이 사실을 불경스런 제자에게 비밀로 하지만, 이 무렵 스승에게서 이상한 변화를 감지한 제자는 몰래 만남의 현장을 찾아가 가브리엘 대천사를 활로 쏘아 죽인다. 천사가 떨어진 자리에는 오소리 한 마리가 화살이 꽂힌 채 죽어 있었다. 가브리엘 대천사는 오소리 몸에 들어간 악마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제자는 ‘성스러운 것은 성스러운 자에게만 보인다’는 스승의 가르침을 마음에 새겼기에 속임수를 간파할 수 있었다. 성스럽지 않은 자신에게 성스러운 존재가 보였으므로 가짜라고 확신한 것이다. 뒤늦게 크게 깨달은 스승은 제자에게 고백한다.

“나는 내가 네 영혼을 구해야 한다고 생각했지. 그런데 네가 내 영혼을 구했구나. …… 아무튼 나는 내가 완전히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이제 나는 너에게서 배우고 싶구나. 자, 돌아가자.”

어떻습니까, 이렇게 줄였는데도 이야기가 꽤 흥미롭지 않나요? 이야기의 초점은 평생에 걸친 은자의 노력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는 마지막 반전에 있습니다. 이 반전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은자는 희로애락에 시달리는 이 세상을 허울과 속임수의 세계라고 보고 미련 없이 버렸습니다. 그리고 오직 영원의 세계만 바라보며 고행과 명상을 거듭해 왔습니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그런 노력 끝에 찾아든 것은 진리의 깨달음은커녕 속임수의 나락이었습니다. 무엇이 문제였을까요?

대답의 실마리는 스승과 제자의 처지가 역전되는 상황에 숨어 있을 겁니다. 다시 말해, 어떤 점에서 스승이 제자의 제자가 되고 제자는 스승의 스승이 될 수 있었는지 살펴봐야 합니다. 제자는 무지몽매하고 신을 믿지 않을 뿐더러 자신의 죄도 회개하지 않는 문제투성이 인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스승에게는 없는, 그래서 악마의 속임수를 꿰뚫어볼 수 있었던 세 가지 미덕을 갖고 있었습니다.

하나는 감각세계에 대한 예리한 관찰 능력이었습니다. 제자는 대천사 가브리엘을 만나기 시작한 무렵부터 스승의 눈빛이 미세하게나마 불안한 빛을 띠기 시작했음을 눈치챕니다. 그리고 급기야는 은자의 동굴에 평화롭게 찾아들던 동물들마저 발길을 끊은 사실을 알아차립니다. 이 모든 변화를 불길한 조짐으로 여기고 제자는 스승이 만나는 대천사 가브리엘의 존재를 의심하기 시작했습니다.

제자의 두 번째 미덕은 스승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었습니다. 제자는 살인과 약탈을 일삼는 흉악한 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구하기 위해 애쓰는 스승에게 감화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스승의 가르침이라면 조금도 허투루 듣지 않았는데, 그 하나가 ‘동물의 몸에 들어가 온갖 허튼 짓을 하는 나쁜 정령들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제자는 주변세계가 점차 불길한 징조를 보이자 스승의 가르침에 따라 혹시 그런 사악한 일이 벌어진 건 아닌지 의심합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확증하기 위해 ‘성스러운 것은 성스러운 사람에게만 보인다’라는 스승의 또 다른 가르침을 마음 깊이 새겼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활용하게 됩니다. 스승을 철석같이 믿고 따랐다는 점에서 그는 누구보다 훌륭한 제자였던 셈입니다.

마지막으로 꼽을 수 있는 미덕은 제자가 자신이 어리석고 불경스러운 존재라는 점을 철저하게 자각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이 자각이 있었기에 가브리엘 대천사가 자기 눈에 보였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그것이 천사가 아니라는 점을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성스러운 것은 성스러운 사람에게만 보이는’ 법이니까요. 제자는 미천한 자기 자신에 대한 뚜렷한 자각이 있었고, 이 덕분에 악마의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았던 겁니다.

이렇게 제자의 세 가지 미덕을 이렇게 찾아 놓고 보니, 『보름달의 전설』이 담고 있는 교훈이 조금 분명하게 이해될 듯합니다. 오랜 세월 고행과 수도를 거듭해 온 은자가 학식과 덕성에서 높은 경지에 오른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흉악무도할 뿐 아니라 회개할 줄 모르는 일개 도적을 교화시키기 위해 헌신한 점을 봐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제자의 세 가지 미덕을 고스란히 결여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오로지 영원의 세계에만 눈을 돌리고 있었던 탓에 주위 감각세계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지 눈치채지 못했으며, 죄를 회개할 줄 모르는 제자에 실망한 나머지 믿음을 갖지 못하여 대천사와의 만남을 비밀에 부쳤으며, 마지막으로 진리의 깨달음에 대한 열망에만 사로잡힌 나머지 자기 자신의 한계를 돌아보는 냉철한 자각이 부족했던 것입니다.

은자가 마지막 장면에서 제자에게 배우고 싶다고 한 것은 바로 그런 미덕들과 관련된 점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그러고 보면 은자가 평생 고행과 명상을 통해 공부한 것이 헛된 공부였다고 할 수는 없을 겁니다. 제자에게 배우겠다고 스스럼없이 자청한 것이 이미 큰 도량에서나 가능할 법한 이야기고 또 겸허한 반성이 이미 시작되었음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은자와 도적의 만남, 그리고 마지막 반전을 통해 미하엘 엔데가 궁극적으로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무엇이었을까요? 희로애락의 세상을 초탈하고 달관의 경지에 이르는 것도 좋지만, 자칫 그 ‘초월의 욕구’가 지나치면 오히려 눈이 멀게 되어 미망의 세계로 빠질 수도 있다는 경고 아닐까요?

김우철(한국철학사상연구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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