낸시 초도로우(下) [페미니즘 고전들을 찾아서]

 

18. <모성의 재생산>, 낸시 초도로우 (下)

 

김상애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여성과 철학 분과)

 

 

아주 어린아이는 자신의 의지대로 몸을 가눌 수도, 스스로 음식을 섭취할 수도, 심지어는 스스로 잠을 청할 수조차 없는 매우 취약한 상태에 있다. 즉 문자그대로 스스로 생존할 수 없다. 이 시기 어린아이는 자신을 돌보는 이를 필요로 하지만, 자신과 환경, 그리고 자신과 자신을 돌보는 사람(주로 어머니)을 구분하지 못한다. 어머니 없이는 생존하지 못함에도, 아이는 자신과 분리된 존재인 어머니가 자신을 ‘돌보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어머니가 어린아이를 ‘잘’ 돌본다면, 어린아이는 자신이 전능하다고 느낀다. ‘잘’ 돌보는 어머니는 아이에게 극도로 헌신하며 아이의 생리적인 욕구와 정서적인 욕구를 재빠르게 알아채고, 섬세하게 충족시켜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머니와 아이의 일차적인 관계는 가장 안정적이고 완벽하며 모든 사랑의 토대가 된다. 정신분석학자들은 이처럼 어머니와 아이의 초기관계가 특별하고,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하며, 이와 같은 경험이 이후 부모노릇에 영향을 미친다고 설명한다.

어머니와 아이의 관계가 특별하고 매우 중요하다면, 자녀 양육이 자신이 어렸을 때 경험한 완전하고 충만한 관계를 어머니가 되어 재구성하는 것이라면, 모든 어머니는 아이와의 관계에서 완벽한 사랑을 느껴야 한다. 그런데 왜 어떤 어머니는 육아우울증에 걸리는 걸까? 초도로우는 어머니와 아이의 관계를 본질적으로 중요한 것으로 다루는 정신분석학적 설명을 강하게 비판한다. 어머니-아이 관계의 절대성은 아이에게나 적용된다는 것이다. 아이는 어머니에게 전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아이에게 어머니는 관계와 사회의 전부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어머니-여성은 아이 외에도 다른 사람과 다른 관계를 맺고 있으며, 가정 밖의 사회에 또한 속해 있다. 자신을 돌보는 사람 없이는 아예 생존이 불가능한 어린 아이가 자신의 어머니에게 느끼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성인 여성이 자신의 아이에 대해 느끼고 경험한다고 보는 것 자체가 이상하지 않은가?

어머니-아이 관계의 절대적 중요성이 상호적이지 않다는 점 외에도, 어머니와 아이의 관계, 그리고 어머니의 역할이 이 초기관계로부터 비롯된다고 기술하는 정신분석학은 문제적이다. 어째서 여성만이 양육하는 ‘어머니’가 되는지 충분한 설명을 제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만족스러운 돌봄을 받은 경험이 이후 부모노릇에 영향을 미친다면, 부모를 가졌던 모든 이들이 부모노릇을 하고 있어야 마땅하다. 하지만 주로 여성만이 아이를 돌보는 부모노릇을 한다. 남성 또한 틀림없이 자신을 돌본 부모를 가졌음에도 말이다.

초도로우는 여자아이만이 자라서 ‘어머니’가 되는 현실을 분석하기 위해 여자아이의 심리발달과정에 주목한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에서 여자아이는 오이디푸스콤플렉스를 남자아이와 정확하게 대칭적으로 해소한다. 그 결과로 여자아이는 여성으로서 젠더정체성과 남성을 향한 이성애 지향성을 획득한다. 하지만 여자아이의 이와 같은 오이디푸스콤플렉스 극복기는 초도로우가 지적하듯, 매우 비약적이며 단순한 설명이다.

 

  • 여성-어머니의 돌봄으로 인한 대상관계경험의 젠더화

 

대상관계이론은 인생 초기에 만나는 가장 가까운 타인과의 애착과 분리의 경험이 자아 내에 대상 이미지를 형성하며, 이렇게 자아에 내면화된 대상과의 관계가 훗날 타인과의 대인관계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강조한다. 초도로우는 대상관계이론의 설명을 빌어, 어머니와 자신이 분리된 주체임을 인지하지 못하는 시기에서부터 성인 여성으로 성장하고 ‘어머니’가 되기까지 여자아이의 심리발달과정을 다시 쓴다.

초도로우에 따르면 고전적인 오이디푸스콤플렉스의 내용과는 달리, 여자아이 또한 남자아이 못지 않게 어머니에게 집중적으로 애착하며, 그 관계에 등장한 아버지를 경쟁자로 본다. “양성의 아이들 모두에게 일차적 사랑과 동일시의 대상은 어머니이고 아버지들은 나중에, 다른 방식으로 그 관계 구도에 들어온다”는 것이다. 오이디푸스기 진입 이전, 즉 어머니와 아이의 관계에 아버지가 등장하기 이전의 ‘전오이디푸스기’에서부터 여자아이와 남자아이의 심리발달과정은 다르게 진행된다. 프로이트는 이 차이가 생물학적으로 결정되었다고 보았다. 하지만 초도로우는 남자아이와 여자아이의 심리발달과정이 다른 이유를 비대칭적인 부모노릇에서, 그리고 아이의 심리발달과정에 매개되는 부모의 양육 태도, 감정과 무의식에서 찾는다.

모자관계와 모녀관계를 다룬 여러 임상자료들을 통해 초도로우는 어머니가 여자아이와 남자아이를 대하는 방식이 다름을 지적한다. 기존의 정신분석학은 어린아이의 심리발달이 타고난 충동들에 의한 것이라 설명하지만, 아이의 심리발달에는 돌보는 이의 느낌과 무의식이 개입한다는 것이다. 초도로우가 다루는 임상자료들에 따르면, 어머니는 아들을 자신과 분리된 타인으로 경험하고,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아들을 어머니 자신과 분리하도록 권한다. 반면에 어머니는 자신 또한 어머니의 딸이었기에 자신의 딸을 분리된 타인이라기보다는 자기자신의 확장으로 대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전오이디푸스적 경험은 남자아이가 명확한 자아 경계를 발달시키도록, 여자아이는 모호하고 혼란스러운 자아 경계를 발달시키도록 장려한다. 그리하여 이 대상관계적 경험은 남자아이는 독립적인 남성적 남성이 되도록, 여자아이는 관계적인 여성적 여성이 되는데 큰 영향을 미친다. 결국 어머니노릇은 아이를 양육하는 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어머니노릇)의 재생산 능력을 포함한다. 이 재생산은 일차적 양육을 감당하는 특정한 심리적 능력과 태도를 지닌 여성과 그것이 없는 남성을 생산하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 딸은 어머니를 사랑했다


전오이디푸스기를 거쳐 여자아이는 자신의 성애적 지향을 어머니에게서 아버지로 바꾸는 오이디푸스기에 진입한다. 하지만 앞서 강조했듯, 아버지는 어머니의 애착을 깨뜨릴 만큼 충분히 중요한 대상으로 봉사하지 않는다. 따라서 여자아이는 오이디푸스기를 거치는 와중에도 어머니에 대한 의존, 애착, 공생의 관계를 지속시킨다. 새로운 관계의 대상으로 등장한 아버지는 어머니와의 관계에 단순히 추가되는 오이디푸스적 애착일 뿐이다. 이에 따르면 여자아이가 어머니로부터 아버지로 돌아서게 되더라도, 이는 자신에게 페니스를 주지 않은 어머니가 미워서, 혹은 어머니가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경쟁상대로 간주되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여자아이는 어머니에 대해 양가감정을 갖는데, 한편으로 여자아이는 어머니를 여전히 특별히 중요한 대상으로 사랑하고, 다른 한편으로 여자아이는 어머니의 사랑을 획득하고 싶지만, 어머니가 이미 이성애자임에 대해 좌절한다. 이에 반해 아버지는 어머니에게서 얻지 못하는 성애적 사랑을 여자아이에게 제공하며, 어머니의 사랑을 받을 만한 페니스를 소유한 사람이다. 결국 이와 같은 심리과정을 거쳐 여자아이는 어머니에게서 아버지로 돌아서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여자아이의 오이디푸스기는 아버지와 딸의 문제인 만큼이나, 전오이디푸스기에서 연장된 어머니와 딸의 문제이기에 결코 단순하지 않으며, 쉽게 해소되지 않는다.

오이디푸스콤플렉스를 해결한 이후, 새로운 성적 자극이 등장하기까지 여자아이와 남자아이의 섹슈얼리티는 특별히 문제되지 않는다. 이 시기를 정신분석학에서 ‘잠재기’라고 부르는데, 초도로우에 따르면 이 잠재기에 아이들은 가족 안의 삶과 더불어 학교나 또래집단 등 가족적 삶의 바깥에서 생활하면서 의식적으로 학습하고 역할을 훈련한다. 잠재기 이후, 보다 더 비가족적인 관계의 세계에 진입하는 청소년기의 여자아이는 또 다시 위기와 갈등에 직면한다. 남자아이는 오이디푸스콤플렉스를 잘 해결했기 때문에 가족 외부의 세계에 쉽게 진입한다. 반면에 이 시기 여자아이는 해소하지 못한 전오이디푸스기와 오이디푸스기의 갈등을 지속한다. 게다가 청소년기는 여자아이가 월경을 시작하고, 남성과 교제를 하는 등 여성이 되는 것의 모든 사회학적, 심리학적 문제들과 맞닥뜨리는 시기이기도 하다. 이 때 어머니는 딸의 발달하는 섹슈얼리티에 대해 관심을 갖고 개입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여자아이는 어머니-여성과 의식적으로 동일시하면서도, 동시에 어머니에게서 벗어나고 싶은 양가감정을 갖는다. 어머니에 대한 애착과 거부의 양가성에서 동요하면서, 여자아이들은 어머니 대신에 사랑하고 동일시하며 자신의 모든 것을 공유하는 단짝을 찾거나, 남성을 향한 성애를 선택하면서 이성애적 결단을 내리는 것으로 해결책을 찾게 된다.

 

  • 서로를 재/구성하는 가족관계와 경제관계

 

“우리는 노동의 성별분업을 성 불평등과 분리할 수 없다. 노동의 성별분업과 여성의 아이 돌보기 책임은 남성 지배와 연결되고 남성지배를 낳는다.”

 

초도로우는 딸이 ‘어머니’가 되는 가족 내의 구조가 가족 외에서 젠더가 사회적으로 조직되는 방식과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그가 책 전반에서 강조했듯, 어머니가 아이에게 일차적으로 중요한 대상이 되는 까닭은 아버지의 부재 때문이다. 그리고 아버지는 가족 부양을 위해 가정 밖에서 노동하기 때문에 가정에 부재한다.

뿐만 아니라, 전오이디푸스기, 오이디푸스기, 청소년기를 모두 거쳐 성인기에 진입한 남성과 여성은 남성을 남성으로, 여성을 여성으로 사회화시키는 노동시장의 가족 외 제도에 속하게 된다. 노동시장이라는 사회는 여성을 일차적으로 아내와 어머니로 규정하고, 여성의 일을 “정서적 일”로 정의하는 반면, 남성은 일차적으로 보편적인 직업적 용어로 규정한다. 이는 단지 서로 다른 정의를 할당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남성적 활동을 사회적으로 중요하고 우월한 것으로, 그에 반해 여성적 활동은 열등하고 남성의 활동만큼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규정한다. 이처럼 자본주의적 노동 세계와 가족 내적 삶은 서로를 재/구성하면서 남성지배적 가족과 사회를 재/생산한다.

 

  • 대안을 상상하기 – ‘어머니노릇’에서 ‘부모돌봄’으로, 그리고 사회적 돌봄으로

 

가족 내에서 돌보는 어머니와 가족 외에서 역할을 다하는 아버지, 어머니의 돌보는 성향을 닮아 아이와 남편을 돌보는 ‘어머니’가 되는 딸과 아버지를 닮아 독립적이고 사회적인 성인이 되어가는 아들. 낸시 초도로우와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같은 장면을 보았다. 같은 장면을 보았음에도 이에 대한 분석과 이를 통해 이끌어낸 통찰은 매우 다르다. 초도로우는 <모성의 재생산> 초반부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이 책은 여성주의적 노력의 하나이다. 그것은 어머니노릇을 사회적 조직과 젠더 재생산의 중심적인 구성요소로 보고, 어머니노릇의 재생산을 분석하는 것이다.”

초도로우는 자신의 글이 어머니의 배타적인 자녀 양육에서 출발하는 젠더 이데올로기에서 비롯된 각종 젠더 불평등을 개선하기 위한 여성주의적 개입임을 강조한다. “왜 여성이 일차적 돌봄을 제공하는 자인가? 왜 일차적 돌봄을 제공하는 자는 여성인가?”라는 질문은 “여성-어머니라는 성별 분업을 변화시키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바꿔야 하는가”라는 그 다음 물음을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초도로우는 부모의 젠더와 성역할, 이성애적 섹슈얼리티의 결정론적, 목적론적 심리발달과정을 기술하는 정신분석적 체계들을, 여성주의적 관심과 더불어 아들과 딸을 가진 어머니를 상담하여 얻어낸 임상 사례들을 통해 반증한다. 그럼으로써 기존의 정신분석학이 자연화하고 낭만화한 어머니의 역할과 어머니와 아이의 관계를 세대를 거쳐 재생산되는 구성된 것으로 역사화하고, 젠더 정체성 획득과 이성애적 섹슈얼리티는 본능적 충동이 아니라 학습되는 것임을 지적했다.

그러나 초도로우의 논의는 기존의 정신분석학이 전제하는 어머니, 아버지, 자녀로 이루어진 가족 구조를 넘어서지 못했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 또한 그가 이론적 배경으로 삼는 정신분석학과 대상관계이론은 인간의 정신구조와 심리발달이 어린시기에 결정적임을 전제하기에 문제적일 수 있다. 그리고 초도로우는 후에 여성을 관계적인 사람으로, 남성을 독립적인 사람으로 본질화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정신분석학이 치료를 위해 개발되었다는 점을 상기해보자. 정신분석학은 인간의 정신구조와 심리발달이 5세 이전에 핵심적인 방식으로 형성되지만, 삶의 경험으로부터 변화될 수 있고 분석적 과정을 통해 바뀔 수 있음을 전제한다. 바로 이 점에서 초도로우는 자신의 개입점을 명확히 한다. 만약 어머니와 아버지 모두가 어린아이와 일차적 관계를 맺는다면, 다시 말해 어머니뿐만 아니라 아버지가 자녀 양육에 헌신한다면, 그리고 양육에 있어서 아이의 젠더와 무관하게 아이를 대한다면, 아이가 젠더 이데올로기를 답습하지 않는 성인으로 성장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초도로우는 가족 외에도 아이가 사회화되는 여러 핵심적인 과정들을 다루면서, 그 과정들이 어린 시절 형성된 정신구조가 공고해지는 계기로 작동한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정상’과 ‘비정상’적 젠더정체성과 섹슈얼리티를 나누고, 학습시키는 제도들 또한 정신구조와 심리발달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그러한 제도에 개입하고, 수정하는 것 또한 불평등한 젠더이데올로기를 종식시키는 데에 기여할 수 있다.

초도로우 자신은 어머니, 아버지 그리고 아이로 구성된 정신분석학적 가족 모델에 한정해서 연구를 진행했다는 한계를 인정한다. 하지만 그의 분석은 이성애적 핵가족 모델 안에서 여성의 배타적인 ‘어머니노릇’에 대한 문제제기일 뿐만 아니라, 다른 형태의 가족모델과 다른 형태의 양육이 가져다 줄 다른 형태의 젠더관계에 대한 상상이기도 하다.

 

  • 낸시 초도로우의 <모성의 재생산>은 여기까지 입니다.
  • 다음으로 연재될 책은 주디스 버틀러의 <젠더 트러블>입니다. 많은 기대와 관심 바랍니다. 🙂

낸시 초도로우(上) [페미니즘 고전들을 찾아서]

 

17. <모성의 재생산>, 낸시 초도로우(上)

 

김상애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여성과 철학 분과)

 

 

‘부모parents’는 아버지와 어머니로 구성된다. 아버지는 아이의 남성 부모parent를, 어머니는 여성 부모parent를 의미한다. 하지만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주어지는 역할은 잉태와 출산의 과정 이후에도 다르게 지속된다. 다시 말해 ‘아버지’와 ‘어머니’라는 단어는 단지 부모의 성별을 지시할 뿐만 아니라, 아버지와 어머니의 특정한 역할까지 규정한다는 것이다. 특히 “누군가가 어머니이다 라고 말할 때는 누군가가 아버지이다 라고 말할 때와는 다른 어떤 의미가 덧붙여진다.” 낸시 초도로우(1944. 1. 20 – )<모성의 재생산>을 관통하는 문제의식은 여기에서 시작한다.

“왜 어머니는 여성인가?, 부모노릇의 모든 활동들을 일상적으로 하는 사람이 왜 남성이 아닌가?”

낸시 초도로우 뿐 아니라, 많은 페미니스트 학자들이 여성의 ‘돌봄’을 페미니즘의 중요한 문제로 다루었다. 돌봄의 역할이 주로 여성에게 할당되며, 돌봄은 여성화된 활동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여러 여성주의 윤리학자들은 자기 입법적인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도덕 주체를 가정하는 비관계적인 도덕 모델을 비판하고, ‘여성적’ 활동으로 간주되어 가치절하된 돌봄에 적절한 가치를 부여함으로써, 도덕적 패러다임을 전환시키고자 했다. 돌봄을 포함한 여성의 재생산 노동을 ‘노동’으로 규정하고, 이를 자본주의의 착취적 본성과 연결지어 분석하고자 한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들의 노력도 적지 않다. 초도로우는 이들과는 다르게, 어쩌면 조금 도전적인 관점으로 돌봄, 특히 어머니가 아이와의 관계에서 수행하는 돌봄에 접근한다. ”어머니 노릇”이 젠더를 재생산하는 핵심적인 장치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에 따르면, 돌봄에 높은 도덕적 가치를 부여하거나 임금을 지급하는 등의 수단을 동원하더라도, 여성-어머니가 아이를 돌보는 한 불평등한 젠더관계는 유지될 것이다.

 

  • ‘어머니’와 ‘어머니노릇’


어머니mother라는 단어는 어머니라 불리는 사람의 젠더, 섹슈얼리티, 가족구성, 가족 내 역할을 내포한다. 다시 말해, 누군가가 어머니라면, 대개 이성애자 여성이고, 아이가 있을 것이며, 아이에게 어머니로서 특정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고 추측할 수 있다는 것이다. 페미니즘이 다양한 수준에서 “여성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라고 질문하는 이론이라면, 이 문제의식에 어머니가 빠질 수 없다.

초도로우는 젠더재생산의 핵심이 ‘어머니’라는 명사가 아닌 동사로서 ‘어머니노릇’이라고 보았다. 어머니를 어머니로 만들며, 여자아이를 잠재적으로 어머니와 같은 여성으로 만드는 것이 바로 ‘어머니노릇’이라는 것이다. <모성의 재생산>의 원제인 <reproduction of mothering>에서 ‘mothering’이 바로 이 ‘어머니노릇’이다. 초도로우가 문제삼는 ‘어머니노릇’은 특히 어린 아이가 자신이 독립된 인간임을 인지하지 못하는 완전히 수동적인 상태일 때 어머니가 아이에게 제공하는 돌봄이다. 어머니노릇의 구체적인 활동은 아이와 접촉하며 애착을 형성하는 것에서부터 아이를 먹이고 재우는 아이의 생리적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것까지 다양하다. 초도로우는 이러한 어머니노릇으로 인해 여성의 삶, 여성에 대한 이데올로기, 남성성, 젠더 불평등, 그리고 특수한 형태의 노동 권력들이 재생산된다고 보았다.

 

  • 이론적 배경 – 정신분석학과 대상관계이론


초도로우는 “어린 아이가 생의 초기에 경험한 어머니와의 관계가 젠더 이데올로기를 재생산한다”는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정신분석학과 대상관계이론을 이론적 배경으로 삼는다.

정신분석학을 처음으로 이론화한 지그문트 프로이트(1856. 5. 6 – 1939. 9. 23)는 인간의 정신과 행동이 전적으로 의식적이지 않다는 중요한 사실을 발견했다. 인간의 정신적 삶은 의식적 사유뿐만 아니라, 무의식적 정신 활동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인간의 행동은 언제나 목적과 동기를 의식적으로 파악한 결과가 아니라는 것이다. 프로이트가 인간의 의식적 사고를 ‘말하기’ 그리고, 무의식적 정신을 ‘꿈’과 연결짓는 것처럼, 정신분석학 안에서 의식은 사회적 활동으로, 무의식은 의식화, 언어화할 수 없는 개인적 정서로 이해할 수 있다.

프로이트는 인간이 생물학적 유기체에 다름 아닌 상태, 즉 사회화된 의식적 주체가 되기 이전의 어린아이가 ‘가족’이라는 최초의 사회에서 성적 욕망의 억압을 경험하면서, 자기 자신을 부모라는 대상에 동일시하는 과정을 통해 사회화된 의식적 주체로 거듭나는 과정을 상세히 다룬다. 이 때 사회화/의식화 과정의 가장 중요한 목적과 결과는 젠더화된 주체를 생산하는 것이다. 프로이트의 설명에 따르면, ‘정상적’ 사회화 과정을 거친 아이는 이성애적 섹슈얼리티를 지향하는 남성적 남아가 되거나 여성적 여아가 된다. 그리고 이러한 정신 발달은 유아의 타고난 성기적 본능에 따라 생물학적으로 결정되어 있다.

초도로우는 프로이트가 인간 무의식의 영역을 발견하고, 인간의 정신발달이 가족 구조와 밀접한 연관이 있음을 밝혀낸 공헌을 인정한다. 또한 인간의 섹슈얼리티가 생애 초기에 조직된다는 프로이트의 주장에도 어느정도 동의한다. 그러나 초도로우는 인간의 타고난 충동들이 자연적으로 행동과 발달을 결정한다는 프로이트의 주장에 의문을 제기하며, 인간의 타고난 충동들은 오히려 관계를 획득하고 보유하는 과정에서 조작되고 변형된다는 대상관계이론을 따른다.

대상관계이론은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에서 발전된 정신분석학의 방법론이다. 대상관계이론의 핵심은 초기 어린 아이의 관계적 경험이 심리적 성장과 성격 형성에 결정적이라는 것이다. 대상관계이론에 따르면 인간의 의식과 무의식에는 자신이 다른 인간과 맺는 관계성이 매우 중요하게 작동한다. 물론 프로이트 또한 정신적 삶의 모든 요소는 관계적 경험의 영향을 받는다고 언급한 바 있지만, 대상관계이론은 프로이트가 본능이라 가정하는 것도 양식화되고 구성될 수 있음을 드러낸다.

초도로우는 “부모노릇을 통해 전달된 사회구조, 특히 젠더구조가 어린 아이의 내면에서 무의식적 과정을 통해서 승인되고 변형되며, 아이의 정서적 삶을 발달하는데 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대상관계이론의 주장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간 대상관계이론에서 언급하지 않았던 젠더에 따른 대상관계적 경험들의 차이와 이로 인한 심리발달의 차이에 주목한다.

 

  • 어머니와 딸을 중심으로 정신분석학을 다시 쓰다

 

정신분석학의 주인공은 사실상 아들과 아버지이다. 다시 말해,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의 주인공이 ‘오이디푸스’라는 그리스 비극의 남성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것처럼, 정신분석학은 어린 아이였던 남자아이가 사회적 주체로서 남자어른이 되는 과정을 기술한다. 아이의 발달에 대한 정신분석학적 설명에서 어머니는 아버지가 상징하는 ‘사회’에 진입하기 위해 아이가 극복하고 버려야할 ‘의존성’으로 간주된다.

앞서 말했듯, 사회적 주체가 되는 과정은 젠더화된 주체가 되는 과정이며, 이는 자신과 같은 젠더인 부모와 동일시하고, 젠더가 반대인 부모에 대한 사랑에서 확장된 이성애를 발달시키는 과정이다. 프로이트는 이 과정을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고 불렀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과정에 진입하기 이전, 남자아이와 여자아이는 섹슈얼리티와 젠더정체성이 특정되지 않은 상태이며 모두 어머니와 애착을 형성한다. 그러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과정을 거치면서 남자아이는 어쩔 수 없이 어머니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포기하지만, 여자아이는 어머니를 미워하면서 어머니에 대한 사랑을 포기한다. 이 과정에서 페니스는 매우 중요한 매개물이다. 남자아이의 경우, 어머니와 형성하고 있는 애착관계에 아버지라는 인물이 중요하게 개입한다. 아버지의 등장으로 남자아이는 어머니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지속한다면 자신이 가지고 있는 페니스를 상실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을 갖게 되고, 점차 아버지의 권위에 복종한다. 그리고 아버지와 자신을 동일시하면 이 권위를 획득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반면에 여자 아이는 자신이 페니스를 결여하고 있다는 열등감을 갖는다. 그리고 자신을 이러한 상태로 낳아준 어머니를 미워하고, 그리하여 여자아이는 자신이 사랑하는 대상을 어머니에서 아버지로 바꾼다.

일반적으로 현대 자본주의 핵가족 모델에서 아버지는 가정 외에서 자신의 역할을 다하며, 어머니는 가정 내에서 주된 역할을 담당한다. 프로이트가 저술하던 당대에는 이같은 젠더분업이 더 뚜렷했다. 그렇다면 프로이트는 어째서 대체로 가정 외부인으로 자신의 역할을 다하던 아버지가 어린아이의 심리발달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고 가정하는 것일까? 그리고 페니스의 결정적 중요성을 강조하는 동시에, 남자아이의 심리발달모델을 여자아이에게 대칭적으로 적용하려는 무리한 시도로, 프로이트는 여자아이의 젠더정체성 발달을 비약적이고 단순하게 마무리한다. 이와 같은 비판과 더불어 초도로우는 어린아이의 심리발달과정을 어머니와 딸을 중심으로 다시 쓰면서, 정신분석학이 상대적으로 덜 주목한 오이디푸스기 이전 과정, 즉 전오이디푸스기를 재이론화할 필요성을 제기한다.

 

(下)편에서 계속-

마사 누스바움(上) [페미니즘 고전들을 찾아서]

 

15. <혐오와 수치심>, 마사 누스바움(上)

 

유민석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여성과 철학 분과)

 

 

페미니스트 철학자 마사 누스바움(Martha Nussbaum, 1947.5.6~)은 다양한 분야에서 다양한 철학적 작업을 일구어온 철학자이다. 그녀의 관심사는 주로 고대 철학, 정치철학, 페미니즘, 윤리학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녀가 연구한 주제의 일부만을 거론해봐도 장애인, 동물에 대한 윤리, 생명윤리, 시민 교육, 전지구적인 사회 정의에까지 걸쳐 있다. 특히 그녀는 인간의 취약성에 대한 고찰, 혐오나 수치심 같은 인간의 감정과 정동에 대한 연구, 그리고 여성철학에서는 여성의 자율성이나 성적 대상화나 성노동에 대한 연구 등으로 유명하다. 사실 이 모든 철학적 문제의식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오래된 철학적 물음과 맞닿아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녀의 대표적인 저서중 하나인 『인간성으로부터 숨기: 혐오, 수치심, 그리고 법Hiding from Humanity: Disgust, Shame and the Law』(국역: 『혐오와 수치심 – 인간다움을 파괴하는 감정』, 조계원 옮김, 민음사, 1995)에서는, 우리를 지극히 취약하게 만들면서도 압도적으로 휘감아버리는 대표적인 감정인, 혐오와 수치심을 집중적으로 파고든다.

혐오는 페미니즘이 많은 관심을 두는 주제였다. 줄리아 크리스테바(1941.6.24~)혐오(aversion)에 대한 고민이 그러하고, 마사 누스바움의 혐오(disgust)에 대한 고민이 그러하다. 이 글에서는 누스바움의 수많은 저서들 중에서 ‘혐오’와 ‘수치심’이라는 감정을 다룬 저서인 『혐오와 수치심』을 중심으로 그녀의 혐오에 대한 사유를 전달해보고자 한다. 먼저 감정(emotion) 일반에 대한 누스바움의 논의를 살펴본 후에, 혐오라는 감정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들여다보기로 하겠다.

 

  • 감정의 비밀

 

마사 누스바움은 먼저 두려움이나 분노, 혐오와 같은 감정들은, 배고픔이나 목마름 같은 욕구(appetite) 또는 우울함이나 짜증같은 기분(mood)과는 다르다고 설명한다. 감정은 욕구나 기분과는 어떻게 다른걸까? 먼저 욕구는 내 의지와 다르게 불가항력적으로 찾아온다. 예를 들어 피곤함이나 배고픔 같은 욕구를 생각해보자. 이 욕구들은 인간이 살기 위해서 필연적으로 가질 수 밖에 없는, 본능에 가까운 것들이다. 그러나 감정은 보다 섬세한 측면이 있다. 예컨대 남편의 가정폭력을 두려워하는 여성은 고통이나 무력감 같은 기분을 동반할 수 있다. 그러나 그녀의 두려움이라는 감정은 어떤 대상, 그리고 그 대상에 대한 믿음과 평가를 동반한다.

먼저 감정은 대상(object)을 갖는다. 북핵과 전쟁에 대한 두려움, 최순실과 국정농단에 대한 분노, 가족에 대한 사랑이나 세월호 참사에 대한 연민을 생각해보자. 이 모든 감정들은 각각 구체적인 명확한 대상들을 가지고 있다. 불법촬영물에 대한 여성들의 공포와 두려움은 불법촬영물이라는 대상을 가지고 있으며, 성범죄에 대한 페미니스트들의 분노는 성범죄라는 대상을 향한다. 철학자들은 이런 대상을 갖는 감정의 특성을 지향성(intentionality)이라고 설명한다. 마음은 마음 바깥의 어떤 대상을 지향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구체적인 대상 없이 발생하는 우울함 같은 기분과 달리, 연민이나 혐오 같은 감정은 구체적인 대상을 향한다.

감정의 또 다른 중요한 특징은 바로 믿음(belief)이 감정의 본질적 구조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누스바움은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가져온 페르시아인들에 대한 아테네인들의 분노를 예시로 든다. 아테네인들은 페르시아인들이 아테네를 약탈하고 있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향해 분노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남편의 폭력에 대한 두려움을 갖는 여성은, 남편이 자신을 죽이거나 상하게 할 것이라는 믿음으로 인해 두려움이 증폭되는 것이다. 아이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은 어머니의 슬픔을 떠올려보자. 그 어머니 역시 아이가 사망했다는 믿음으로 인해 슬픔을 느끼게 된다.

물론 이 믿음은 사실관계가 틀린 거짓된 믿음일 수도 있다. 예컨대 아이가 사망하지 않았는데 누군가가 거짓말을 하거나 착오에 의해 그런 말을 전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틀린 믿음을 갖게 되었다 하더라도 어머니의 슬픈 감정에는 영향을 줄 수 있다. 또한 믿음은 근거없는 부당한 믿음일 수도 있다. 예컨대 화성 외계인의 침공에 대한 두려움을 갖는 사람이 있다고 해보자. 화성 외계인이 지구를 침략할 가능성은 거의 없기 때문에 이 사람의 믿음은 분명 근거없는 믿음일 것이다. 또한 우리는 칫솔을 잃어버리는 것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두려움을 갖지는 않는다. 잃어버리면 사면 되기 때문이다. 치아 농양이라는 질병에 대한 두려움 역시 부당한 믿음이라고 누스바움은 설명한다. 이 질병은 조기에 발견되면 치료가 가능하기 때문에,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생소한 이 질병에 대해서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한 누스바움에 따르면 감정에는 대상에 대한 가치평가가 들어있다. 예컨대 친구나 가족의 죽음에 대한 슬픔을 생각해보면, 친구나 가족이라는 존재는 한 개인의 삶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기 때문에 그 슬픔이 극심할 수 밖에 없다. 반면 우리는 먼 외국인의 사망 소식에는 그렇게 별다른 슬픔을 느끼지 못한다. 예컨대 중국에서 지진이 발생해서 사망한 사람에게 그렇게까지 슬픔을 느끼진 않을 것이다. 동일한 감정도 대상에 대한 가치평가에 따라서 그 양상이 다른 것이다. 마찬가지로 외모에 대해 많은 가치평가를 두고 있다면 외모에 대한 모욕적인 발언에 대한 분노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이러한 감정의 특성, 즉 감정이 믿음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은 생각보다도 감정이 비이성적이거나 비합리적인 것이 아닌, 합리적인 이성과 밀접한 연관이 있음을 시사한다. ‘믿음’은 플라톤의 저서 『메논』이나 『테아이테토스』에서 보듯이, ‘앎’과 함께 전통적으로 중요한 철학적인 인식론의 주제였기 때문이다. 또한 믿음에는 거짓된 믿음이나 부당한 믿음이 있다는 것은 이미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역시 간파했던 사실이였다. 예컨대 페르시아인들을 향해 분노하는 아테네인들의 경우, 사실은 아테네에게 해악을 끼친 사람들은 페르시아인들이 아니라 스키타이인들이였을 수도 있다. 이 경우 아테네인들은 거짓된 믿음을 가졌던 것이다. 혹은 페르시아인들이 고의가 아닌 미비한 피해를 끼쳤을 수도 있다. 이 경우 아테네인들은 정당화되지 않는 근거없는 믿음을 가졌던 것이다.

이처럼 믿음이 감정에 필수요소라는 누스바움의 논의는, 감정에 있어서 판단이나 이성의 중요성을 시사해준다. 아테네인들은 가짜뉴스를 듣고서 부당하게 페르시아인들에 대해 혐오나 분노의 감정을 가지게 되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아리스토텔레스는 쥐를 두려워하는 사람은 사소한 것에 두려움을 갖는 것이라고 비판했고, 세네카 또한 식당에서 상석에 앉지 못했다고 화를 냈던 자신을 반성했다고 한다. 이런 사례들을 통해 누스바움은 따라서 감정에 있어서 교육이 매우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예컨대 교통체증에 대해 쉽게 화를 내는 사람, 혹은 어둠을 무서워하는 아이에게는 감정에 대한 교육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사실 플라톤은 이미 유명한 영혼 삼분설에서, 영혼이 이성과 기개 또는 분노(thymos), 그리고 욕구의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있다고 말한 바 있다. 플라톤은 이를 각각 몸의 머리, 가슴, 배의 부분과 연결시킨다. 오로지 본능에만 충실하는 욕구와 달리, 기개는 이성의 도움을 받아 이러한 욕구에 저항하도록 사용될 수 있다. 물론 기개가 욕구와 한편이 되어 이성을 따르지 않게 될 수 도 있다. 감정이 욕구와 다르며, 이성의 인도를 받기도 하고 받아야 한다는 것은 이미 고대철학에서도 사유되었던, 오래된 인류의 지혜인 것이다.

 

  • 혐오스러운 혐오

 

우리는 무엇을 혐오하는가? 누스바움은 우리가 원초적으로 혐오하는 대상이 있다고 설명한다. 예컨대 우리는 종이, 금잔화, 모래는 혐오하지 않지만, 신체 배설물과 부패한 음식은 혐오한다. 치즈는 냄새가 고약하다고 해서 혐오하지 않지만, 대변은 혐오한다. ‘똥인지 된장인지 먹어봐야 아나’라는 속담처럼, 심지어 대변과 형태마저 유사한 된장은 혐오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설탕은 혐오하지 않지만, 바퀴벌레에서 설탕맛이 난다 하더라도 혐오할 것이다.

앞에서 감정은 대상을 갖는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이러한 혐오의 대상들의 특징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인간에게서 떨어져나간 부산물들(예컨대 토사물이나 대소변)이거나, 인간의 불완전성과 동물성을 떠올리게 하는 물질들(동물이나 시체)이라는 것이다. 누스바움에 따르면 이러한 대상들은 인간에게 불완전성과 유한성, 동물성을 환기시키면서 혐오의 대상이 된다.

이러한 혐오의 대상들은 두 가지 법칙, 즉 ‘접촉의 법칙’과 ‘유사성의 법칙’을 따른다. 먼저 접촉의 법칙이란, 혐오의 대상이 다른 대상과 접촉될 경우 다른 대상마저 혐오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예컨대 죽은 바퀴벌레가 떨어졌던 쥬스 잔의 경우, 우리는 그 쥬스 잔이 아무리 깨끗하게 세척되었다 하더라도 기피하게 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전염병이 있는 사람이 입었던 옷 역시, 살균 소독되어 전염병과 무관하게 세탁되어 있다 하더라도 기피한다는 것이다. 또한 유사성의 법칙이 있다. 즉 원래의 혐오의 대상과 유사한 다른 대상 역시 혐오하게 되는 법칙이다. 예컨대 개똥 모양으로 만든 쵸콜렛의 경우, 왠지 꺼림칙하게 된다. 살균한 파리채로 휘저은 수프의 예시도 그렇다. 만일 파리채로 수프를 휘저었다면 그 수프 역시 마시기가 힘들 것이다. 새로 산 빗으로 휘저은 음료 역시 마찬가지다. 아무리 그 빗이 공장에서 막 나온 새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으로 휘저은 음료 역시 마시기가 거북할 것이다. 이런 예시들은 혐오가 작동하는 법칙들을 잘 보여준다.

다음으로 누스바움은 혐오와 위험, 혐오와 비정상, 그리고 혐오와 분노를 구분한다. 예컨대 독버섯은 위험한 대상이지만, 우리는 독버섯을 혐오하지는 않는다. 또한 돌고래는 바다에 사는 포유류이기 때문에 비정상이라고 볼 수 있지만, 그렇다고 돌고래를 혐오하지는 않는다. 혐오의 대상들은 이것들과 달리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인간의 유한성과 동물성을 환기시키는 존재들로, 나를 오염시킬 수 있다는 믿음을 초래하는 것들이다.

 

  • 혐오스럽다고 감옥에 보내야 할까?

 

누스바움은 다른 감정들과 달리 혐오는 특히 매우 불안정한 감정이기 때문에, 법이나 도덕의 판단 기준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 그녀는 따라서 혐오를 불신의 눈초리를 가지고 비판적으로 바라보면서 혐오를 옹호하는 철학자들과 법학자들을 비판한다. 예컨대 생명윤리학자인 레온 카스(Leon Kass, 1939.2.12~)는 혐오를 적극적으로 옹호하면서 특정한 혐오감이 인류의 지혜를 드러내는 감정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생명복제에 대한 직관적인 거부감 같은 것이 그것이며, 그런 혐오는 생명복제가 옳지 않다는 것을 알려주는 인류의 지혜의 지표라는 것이다. 그러나 누스바움에 따르면 혐오는 편견에 기반한 감정이 되기 쉽기 때문에, 인종간 결혼이나 동성결혼법에 대한 혐오로 악용되면서, 사회적 약자에 대한 억압과 박해에 이용되어왔다고 주장한다.

누스바움은 앞에서 다루었던 배설물이나 동물의 시체 같은 ‘원초적 혐오’와, 동성애자나 장애인에 대한 혐오 같은 ‘사회적으로 매개된 혐오’를 구별한다. 원초적 혐오는 위생과도 관련되어 있고 진화의 산물일 수 있기에 그렇게 위험하지 않으며 인간 삶과 떼어놓을 수 없는 반면, 사회적으로 매개된 혐오의 경우엔 특정 집단에 대한 혐오 같이 매우 위험한 혐오다. 특히 사회적인 혐오는 주로 해당 사회의 문화적 편견의 영향을 받으며, 주로 그 사회의 소수자와 약자를 향한 투사적인 성격을 가진다. 원초적 혐오가 사람에게 귀속되어 그 대상이 혐오하는 자의 유한성과 동물성을 환기시킨다는 이유로 낙인이 찍히고 혐오를 당하는 것이다. 예컨대 동성애자 남성은 이성애 남성을 오염시킬 수 있는 전염성을 지닌 존재로 취급당하기 때문에 기피당하며, 역사적으로 여성 역시 역사적으로 유약하고, 끈적거리며, 유동적이고, 냄새나는 존재로 취급당해 여성의 몸이 오염된 불결한 영역으로 상상되어 왔다고 설명한다.

이런 사회적 혐오 혹은 혐오의 정치는 동성애자들의 성관계를 처벌했던 ‘소도미 법’(Sodomy Law)나 군대 내 동성애자의 커밍아웃을 금지했던 ‘묻지도 말고 말하지도 말라’(Don’t ask, Don’t tell) 정책 등에도 반영되어 있다. 특정 집단에 대한 혐오가 공적인 영역인 법과 정치로 침투한 것이다. 누스바움은 존 롤즈(1921.2.21~2002.11.24)의 정치적 자유주의를 따라, 공적인 영역에 사적인 감정이나 선입관이 진입해서는 안되며, 존 스튜어트 밀(1806.5.20~1873.5.8)을 따라 오로지 타인에게 피해를 끼친 행위들만 법적으로 처벌해야 하지, 혐오감을 준다는 이유로 동성애자들의 성관계나 알콜 중독, 약물 중독을 처벌해서는 안된다는 ‘해악 원칙’(harm principle)을 지지한다. 해악 원칙이란 오로지 타인에게 해악을 낳은 행위만이 도덕적으로 그른 행위이며 법적으로도 제재할 수 있는 행위라는 원칙이다. 이러한 누스바움의 주장은 결국 ‘해악 원칙 대 불쾌 원칙이냐’로 압축될 수 있을 것이다. ‘불쾌 원칙’(offense principle)이란 해악을 낳지 않았다 하더라도 처벌의 기준이 될 수 있다는 철학자 조엘 파인버그(Joel fineberg, 1926.10.19~2004.3.29)가 주장한 원칙이다. 누스바움은 혐오를 법이나 도덕의 기준으로 삼을 수 있는 불쾌 원칙을 당연히 반대할 것이다.

예컨대 지적 장애인이나 게임 중독에 걸린 사람들은 많은 사람들에게 불쾌감 혹은 혐오감을 줄 것이다. 온 몸에 문신을 한 사람은 어떤가? 보기만해도 혐오스러울 수도 있다. 그런데 보기에 혐오스럽다는 이유로 게임 중독에 걸린 사람이나 문신을 한 사람들을 감옥에 보내도 되는 것일까? 뚱뚱해서 불쾌감을 주는 사람은, 특이한 헤어 스타일과 옷차림을 한 사람은 또 어떤가? 현대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인권탄압일 것이다. 한국에서도 과거에 그런 적이 있었다. 부랑자들, 미니 스커트를 입은 여성들, 장발을 한 청년들을 단속하고 적발한 역사가 있었다. 아직도 군형법에는 동성애 장병들을 처벌할 수 있는 조항이 존재한다. 퀴어문화축제에 대한 많은 이들의 반감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나 우리는 누스바움의 혐오에 대한 통찰을 따라 혐오는 많은 경우 사회적인 편견에서 비롯된 것이며, 사회적 약자들을 탄압하는 도구로 악용되어왔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그런 혐오는 잘못된 믿음에 기반한 이성적이지 않은 편견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