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케아, 인문학 연구자 그리고 인천공항 [내게는 이름이 없다]

이케아, 인문학 연구자 그리고 인천공항

 

아내가 이케아에서 6단 철제 서랍을 주문했다. 이케아가 약속한 3만 8천원의 가성비를 즐기려면 3시간 이상 손수 조립하는 수고를 바쳐야 한다. 처음에 아내는 나보고 조립을 해달라고 했다. 이럴 때 취할 수 있는 전략은 얼빠진 바보 행세를 하는 것이다. 순식간에 바보를 앞에 둔 아내는 혼자 조립하기 시작했다. 아내는 현실 인식 능력이 탁월하다.

서랍장이 완성되자 아내는 탄성을 지르며 스스로 대견해 했다. 기쁨에 들 떠 있는 아내를 뒤로 하고 나는 무심코 서랍을 열다가 대참사를 저지르고 말았다. 견고하게 서 있던 서랍장이 산산이 무너진 것(실제로는 부품 몇 개가 떨어져 나갔을 뿐)이다. 아내는 서랍장이 민감한 아이라면서 조심스럽게 다뤄야 함을 누누이 강조했다. 예전에 볼보는 차 예닐곱대를 쌓아놓는 광고로 견고함을 강조했는데, 이 스웨덴 출신 서랍장은 어찌된 일인지 ‘아기 돼지 삼형제’의 첫째 돼지 집처럼 연약하기 짝이 없었다.

 

 

바우만은 우리 시대가 단단한 모든 것을 연약한 액체로 전화시켜버리는 ‘액체근대’에 진입했다고 말했다. 우리 집 6단 서랍장은 액체근대의 산물임을 유감없이 입증했다. 내가 서 있는 자리도 액체임은 물론이다. 이른바 ‘전임’이 되어 사뭇 의기양양해진 요즘이지만, 실상을 따지고 보면 2년마다 계약을 갱신해줄 것을 애원하는 ‘전임’ 아닌 ‘전임’이다. 10년 안에 정년 자리를 꿰차지 못하면 나가야 하고, 정년이 되려면 다시 시험 절차를 거쳐 ‘신입’이 되어야 하는 자리다. 학교에서는 이것을 ‘비정년 트랙 교육중점전임교원’이라고 한다.

 

<1984>의 신어(newspeak)같은 이 용어의 의미는 대략 이러하다. 2년 동안 의료보험과 사학연금(국민연금같은 것) 그리고 매달 월급을 받을 수 있다. 고용보험과 산재보험은 해당되지 않으므로 실업수당과 산업재해 수당은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승진과 그에 따른 임금 상승에 대한 규정은 ‘정년 트랙 전임’과별도다. 하지만 근무 내용은 동일하다. 주당 12시간 강의, 매년 1~2편의 논문 실적, 교내 행정 업무를 위한 보직 봉사 등은 정년과 비정년의 구분이 없다. 전임이지만 교수회의에 참여하여 학교 행정에 대해 논할 수 없고 교수협의회의 구성원이 될 수도 없다. 연구년이 보장되지 않는 것은 물론이다. 무기계약이 아니므로 고용 내용상으로는 전임으로 분류할 수 없는데 서류상으로는 전임의 명칭을 쓰고 있다. 아마도 전임 비율을 높이라는 교육부 행정 지침을 준수하고자 이런 꼼수를 쓰는 듯 하다.

 

비정년전임이 되면 다음달 수입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서 좋지만, 언제나 이곳저곳의 평가에 노출된다는 점에서 여간 고역이 아니다. 무슨 일을 하든 2년 뒤 계약 연장을 염두에 둬야 하므로 학교에서 요구하는 일을 거절하기는 웬만한 담력으로는 어림도 없다. 이를테면 교수와 학생이 동아리를 지어서 정기적으로 만나 무슨 활동을 같이하고 무언가를 지도하게 하는 사업이랄지, 교수학습커뮤니티 참가, 연탄 나르기 봉사, 교재 집필, 고등학생 대상 특별 강연 준비, 교양 도서 소개 집필, 거의 매주 열리는 회의 참여, 회식 등등 연구와 강의 이외의 잡다한 업무가 한아름이다. 이런 업무는 대부분 에이스나 코어 사업(나는 일 년이 넘도록 이 사업이 뭐하는 건지 이해하지 못했다) 수행을 위해 나랏돈을 지원받으면서 하는 건데, 비정년 전임 같은 파리 목숨은 사업에 참여하면 받게 되어 있는 소액의 수당마저도 받지 못하고 무급 봉사를 감내하는 신세에 몰리기도 한다.

 

이렇게 일주일을 정신없이 보내면 어느새 학기말이 되어 강의평가서가 날아온다. 떨리는 마음으로 평가서를 열어보면 인문교양 강의자들은 영락없이 평균 이하의 평가를 받게 되어 있다. 온통 실용주의와 효율성에 사로잡힌 대학 사회에서 고색창연한 인문교양을 강의하고도 평점 90 이상의 강의 평가를 바란다는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내가 속해 있는 조직의 교수들은 강의 평가 평점 90 이상을 달성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한다. 강의 이외의 시간을 학생 면담으로 보내고 학생들의 온갖 개인적 요구를 충족시키고자 노력하고 항상 웃는 얼굴을 유지하려고 용을 쓴다. 고객 만족 점수에 목숨 거는 서비스직 사원의 비애는 강단에서도 예외는 아닌 것이다.

 

비정년전임의 사정은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란다. 마가렛 대처 체제가 지구를 휩쓸게 된 이후, 정년 교수직은 드물어지고 있다. 미국에서는 미국인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수많은 후보가 정년 자리 하나를 두고 150~200명의 후보가 경쟁한다. 철학이나 인문학 분야에서는 정년 자리 하나를 위해 300~400명이 경쟁한다. 한국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이 참혹한 경쟁률을 뚫고 정년이든 비정년이든 자리를 마련하는 것은 개인의 능력이나 노력만으로는 불가능하다.

 

일차적으로 임용은 대학 입학 성적에서 결정된다. 입학 당시 대학의 순위가 1차적 요인이다. 두 번째 요인은 역시 유학, 그 중에서도 미국 유학 출신자인가 여부다. 미국을 중심으로한 영어권 유학 출신자들은 SCI급 논문 실적을 쌓는 데에도 유리하지만 영어 강의 능력면에서도 이득을 본다. 이런 것을 기대할 수 없는 사람들은 핸디캡을 메꾸기 위해 국내 등재지 논문 실적에 열을 올릴 수 밖에 없다. 그렇게 해서 한 해에 서너 편씩 논문을 남발해 500%, 1000%의 실적을 올리지만 큰 효과를 보기는 어렵다. 개인적 노력이외에 힘을 쓸 사람들을 널리 알거나 지원한 대학에 대한 폭 넓은 정보 취합 능력과 임기응변력 등이 맞아 떨어져야 한다. 한 마디로 운수소관이다. 그렇게 얻은 자리도 대략 열에 일고 여덟은 일 이년 뒤의 미래를 전망하기 어려운, 이케아 서랍장만큼이나 부실한 자리다.

 

그런데 이 부실한 자리도 얻지 못한 채 근근히 연명하고 뛰어난 연구자들이 한 둘이 아니다. 인문학 연구자의 대부분은 이런 알량한 교수 자리도 얻지 못하는 유랑지식인 신세로 생을 마친다. 인문학 연구자들은 10여년의 대학원 수련 기간을 거쳐 학위를 받는다. 졸업 후 운이 좋으면 시간당 5~6만원정도의 강의 자리를 얻을 수 있다. 시간 당으로 받는 액수로는 고액이지만 강의 시수가 일주일에 고작 5~10시간 이하여서 정상적 생활을 유지할 수준은 되지 않는다. 월 200만원 이하의 수입을 올리면 ‘재벌’에 속한다. 이마저도 방학에는 기대할 수 없다. 한국의 시간강사들은 방학 중에 이렇다할 수입이 없으므로 1년 52주의 시간 중 30주만 연명 가능한 상태이다. 나머지 기간은 동면에 들 수밖에 없는 기이한 삶을 살게 된다. 이런 생활도 1년만 가능하다. 대부분의 강사 계약은 최장 1년이기 때문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난방비를 이기지 못하고 겨울 방학 중에 태국 등지를 떠도는 이들도 있다. 해외여행을 자주 하고 싶다면 인문학 연구자의 길을 걷는 것도 한 방법이다.

 

처음 인문학 연구자의 길을 걷고자 했을 때는 1998년 구제금융기였다. 그때 나의 스승께서는 추어탕을 사주시면서 반가움 반 안쓰러움 반의 복잡한 표정을 지으셨다. 20년 후 이 표정을 후배에게 물려 주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정치권에서 적폐청산의 목소리가 높다. 2017년을 전후하면서 끈질기게 광화문 앞을 점거하던 수많은 사람들의 염원 덕에 그것을 바랄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세상은 여전히 1998년의 적폐를 깔고 앉은 채 돌아가고 있다. 기술관료들이 지배하는, 자유 없는 신자유주의사회에서는 적폐청산의 구호로는 어림없다. 액체근대적 비정함을 우리에게 선사한 당사자들이 바로 적폐청산을 외치는 그들이었기 때문이다.

 

어제는 대통령이 인천공항에 가서 정규직 전환 문제에 대해 한 마디했다. 비정규직자들의 무기계약직화를 둘러싼 노동자 간 갈등을 두고 노조가 지혜롭게 문제를 풀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공적 사안은 모든지 민영화해 버리는 것을 시대의 규범으로 만드는데 일조한 정치 세력의 수장답다.

글 : 행길이

 

리제 마이트너, 여자가 과학을 한다구? [자연과 문화 사이에서]-2

최종덕(상지대, 과학철학)의 종횡무진 책읽기 : 서평연재 -2

오늘의 서평 책
: 샤를로테 케르너 지음 (이필렬 옮김), 리제 마이트너, 한 번도 인간적 면모를 잃은 적이 없는 여성 물리학자, 양문출판사, 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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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왜 리제 마이트너인가

여성 최초의 핵물리학자인 리제 마이트너Lise Meitner1878-1968의 삶을 새롭게 조명한 국내 번역서를 보았다. 애당초 나는 몇 년 전부터 대중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은 리제 마이트너라는 여성 과학자를 한국에 처음 소개하려는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래서 틈나는 대로 그의(주1) 자서전 등을 읽고 메모해 두곤 했다. 그런데 마이트너의 자서전을 읽던 중 유럽에서조차 마이트너가 크게 알려지지 않았다는 점에 나는 놀랐다. 그에 관한 몇 권의 자서전과 인터넷 자료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또 놀란 것이 있는데, 마이트너의 저서전 중 한 책이 과학사가이신 이필렬 교수에 의해 <한번도 인간적 면모를 잃은 적이 없는 여성 물리학자 리제 마이트너>라는 제목으로 이미 6년 전에 번역되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그 책을 다시 꼼꼼히 읽을 수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주1)  ‘그’라는 3인칭 지시어를 남녀 구분 없이 사용합니다. 원래 우리말에서 ‘그녀’라는 3인칭 지시어가 없기 때문입니다.

리제 마이트너

리제 마이트너

2. 여성물리학자 리제 마이트너 볼츠만을 만나다.

마이트너는 1878년 오스트리아 비인에서 태어났다. 그는 부모 양쪽 혈통으로 내려온 전형적인 유대인이다. 그의 부모는 자식들에게 유대 전통의 삶의 방식을 요구하지 않고 매우 자유로운 분위기로 자식들을 키웠다. 8남매 중 셋째인 리제는 언니들의 말을 잘 들으면서도 동생들을 잘 돌보는 깊은 우애심을 갖고 있었다. 당시 오지리 비인은 다른 유럽국가와 마찬가지로 여자에게는 초등학교만 허락되고, 김나지움 등의 고등교육 입학은 불가능하였다. 그 이후 프랑스어 교사학교에서 공부도 하였지만 결국 그의 아버지는 어릴 때부터 수학에 큰 자질을 보인 리제에게 개인교육을 시켜가면서 대학 입학 자격시험에 응시하도록 하였다. 다행히도 그 와중에 비인 황제대학 입학이 여성에게도 최초로 허락된 큰 변화가 있었다.(1899년, 독일의 경우 1900년) 대학에 합격한(1901년) 마이트너는 볼츠만에게서 물리학을 공부하고, 여성 최초로 박사학위를 받았다.(1906년) 마이트너는 볼츠만 교수로부터 물리학이라는 학문에 대한자신감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야하는지에 대한 여정의 방향을 얻기도 했다.

“모든 문화와 기술의 진보로 인간이 더 행복해졌을까요? 이것은 사실 까다로운 질문입니다. 우리를 행복하게 만드는 메커니즘이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행복은 각자 자신의 가슴 속에서 찾고 발견해야 하는 것입니다.”(28쪽)

라이프치히 대학 초빙교수를 마치고 다시 비인으로 돌아와서 행한 인사말 중에서 행복에 대한 볼츠만의 언명은 마이트너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이때부터 이미 마이트너는 과학이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을 잃지 않았던 것으로 보여 진다. 볼츠만 교수는 힘들게 대학에 입학한 두 명의 여학생이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 어떤 성적 편견을 갖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볼츠만 교수는 마이트너의 수학적 재질을 인정하면서 물리적 세계의 근원에 대해 호기심을 갖도록 마이트너를 독려하였다. 볼츠만은 통계역학을 정립하였다. 독립적인 기본 입자들 간의 운동 역학은 원리적으로 설명가능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통계적으로 해명될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볼츠만의 통계역학은 물리학 발전의 급진적 계기였다. 통계역학은 물질의 기본입자가 독립적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기본입자란 물질의 원자를 말한다. 원자란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단위를 뜻했다. 원자의 세계까지 파고들어가는 이유는 물질의 특성을 밝히기 위한 환원주의적 방법을 찾으려 함이다. 물질의 특성은 그 물질을 구성하고 있는 원자의 특성을 밝힘으로써 설명이 가능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원자론은 철저히 환원주의를 논증하고 검증하기 위한 근거가 된다. 여기서 환원은 대상의 특성을 ‘남김없이 설명하려는’ 방법론적 태도이다. 즉 원자들의 합은 대상 물질 전체가 되고 대상 물질의 특성을 인식하기 위하여 물질을 분해하면 원자들의 존재로 다시 분해되어야 한다는 전제가 깔려있다.(Weizaecker, S.43-47) 그런데 통계의 기본 설명방식인 확률은 환원과 반대로 부분과 전제의 환원론적 설명이 불가능함을 보여준다. 이 점에서 어떻게 환원주의와 확률론이 만나는지를 반드시 설명해야 한다.

예를 들어 열역학은 통계역학의 전형적인 사례이다. 볼츠만의 가장 큰 과학적 성과 중의 하나는 열역학적 평형을 향해서 모든 물질에너지가 이동한다는 사실에 착안했다는 점이다. 우리는 이런 현상을 ‘열역학 제2법칙’이라고도 부른다. 아시다시피 근대 열역학의 전환은 열 개념을 물질 입자들이 충돌에너지의 통계적 합으로 정의하는데 있었다. 통계적 합이란 개별의 입자 즉 분가 덩어리가 분자끼리 혹은 벽에 충돌할 때 동일한 에너지를 발산한다는 전제가 있어야 한다. 이 점에서 볼츠만의 탁월한 재능이 드러나는데, 이는 곧 물질의 원자론적 사유방식에 의해 보장될 수 있다. 여기서 원자론적 환원주의와 1023개 수 이상의 무한에 가까운 물질입자들의 충돌에 의한 통계역학적 에너지 총합이 만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물리세계의 원자론적 형식은 철학적 선험존재의 사유구조와 밀접 되어 있음을 암시하며, 동시에 확률에 대한 사유는 경험과학적 실험정신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마이트너는 볼츠만 교수에게 4년 이상 수업을 듣는 과정에서 이러한 양 날개의 사유구조를 심도있게 배우게 되었다. 이후 마이트너는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자신의 장래를 구체적으로 모색해야 했다. 그런데 갑자기 그의 스승 볼츠만 교수가 죽었다. 마이트너도 잘 몰랐던 오랜 우울증으로 자살한 것이다. 마이트너는 갑자기 방황하게 되었다. 놀라기도 했지만 인생과 지식이 삶의 바다에서 서로 만나지 못하는 현장을 경험하게 되었다. 마이트너는 좀 더 강해지기로 했다. 속으로는 학문적 냉정함과 인생의 주관성이 뒤섞여지는 일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그리고 이제 비인을 떠날 때가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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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차별의 강함을 이긴 성실함의 부드러움

지금까지 오스트리아에서의 마이트너는 여성으로서의 차별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큰 지장없이 살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독일로 이전하면서 마이트너는 스스로 마음에 드는 지적 탐구는 수행했지만 여성으로서의 차별을 눈에 띄게 느꼈다. 먼저 마이트너가 존경했던 퀴리 박사에게도 연구 수행 신청을 위한 편지를 썼으나 거절되었다. 여자로서는 너무 힘든 실험실 일이라는 이유도 있었지만 화학과 물리학이라는 학문의 경계에서 퀴리 박사가 마이트너의 전문분야를 보기에 자신과 같은 화학 분야가 아닌 물리학 분야라고 여겼기 때문일 수 있다. 마이트너는 독일의 베를린으로 옮기기로 마음먹었다. 지금은 막스 프랑크 연구소로 이름을 바꾸었지만 당시 이름인 카이저 빌헬름 연구소의 전신이었던 대학 실험실로 연구원 자리를 찾아갔다. 그는 막스 플랑크 교수를 직접 찾아가서 그의 수업을 참가하고 싶다고 신청했지만 거절당했다. 내가 아는 막스 플랑크는 여성에 대한 편견을 가질만한 인물이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분명히 막스 플랑크는 마이트너를 여자라는 이유하나로 거절했다. 당시의 사회적 분위로서 진보적 성향의 플랑크 같은 사람도 여성에 대한 편견을 가졌을 수도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마이트너는 물러서지 않았다. 마이트너는 자신의 강한 학문적 열정과 전문분야에 대한 경력을 막스 플랑크에게 전달했다. 플랑크는 마이트너를 인정하게 되었다. 이후 마이트너는 30년 가까운 베를린의 학문적 역사를 갖게 되었다. 마이트너가 보기에 플랑크는 비인의 스승 볼츠만과 다른 성격을 지녔다. 무미건조하게 보이는 그의 품성은 오히려 지적 신념을 실현시키고자 하는 의지로 여겨졌다. 플랑크는 상대적으로 마이트너에게 큰 장벽이 아니었다. 베를린 대학 실험물리 연구실로 소개받으면서 성적 차별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마이트너와 운명적인 만남이었던 오토 한 박사와의 공동 실험실이 지하목공소에 겨우 임시로 차려졌다.(1907년) 본 실험실에 여자 연구원을 절대로 들여놔서는 안 된다는 피셔Emil H. Fischer 연구소장의 엄명 때문이었다. 일년 반 만에 피셔 소장은 그 임시 실험실에 여자 화장실을 짓게 해주었을 정도다. 그제서야 남학생 전용 실험실에 마이트너의 출입을 허가해 주었으니 말이다. 왜 그렇게 피셔 소장이 변했을까? 여성에 대한 편견을 버렸기 때문이 아니라, 그 초라한 지하 공간에도 불구하고 마이트너의 조잡한 지하 실험실에서 더 많은 연구성과를 냈기 때문이다. 이 당시 이미 마이트너는 원자 붕괴 시의 원자핵 분열을 예언한 방사선 붕괴물질을 찾아내었을 정도로 마이트너의 연구진척은 상당했다. 빈약한 실험실 여건이었지만 이러한 마이트너 연구논문의 질적 수준 역시 탁월했다. 피셔 소장은 갑자기 그들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여자 화장실을 짓게 되었다는 말이다.

1912년 카이저 빌헬름 연구소를 개소하면서 좀 더 안정적인 연구를 진행할 수 있었다. 그 이후 오스트리아는 전쟁을 치루게 되었다. 소위 1차세계 대전이었다. 마이트너는 연구실에만 있는 냉동 지식인이 아니었다. 그는 오스트리아를 위해서 방사선 담당 간호사로 자원했다. 뢴트겐 검사원으로 일했다. 2년 가까이 전쟁터에서 일하면서 그는 독일의 독가스 사용의 현장을 목격했다. 독일은 이미 1차 대전 때부터 프랑스와의 접전에서 독가스를 사용했다. 마이트너는 독가스 사용에 대하여 비판적 의사를 표현했다. 그러나 위정자들은 그의 비판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문제는 마이트너가 일했던 빌헬름 화학 연구소가 독가스 연구를 주도했다는 점이다. 마이트너는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과학자의 연구성과가 전쟁에서 사람을 죽이는 무기로 변할 수 있다는 점에 몸서리를 쳤다.

다시 연구소로 돌아와 그는 원자번호 91번이며 방사선 원소인 프로탁티늄protactinium 원소를 발견하였다.(1918년) 이제 마이트너는 과학자로서의 위상을 굳건히 인정받았으며 교수의 지위를 갖게 되었다.(1922년) 여자가 교수Dozent로 될 수 있었던 일은 독일 프로이센 사회의 혁명을 일으킨 것 이상이었다.(Rife, p.87) 오토 한을 비롯하여 그의 남자 동료들은 이미 10여년 전 이상부터 교수였었다.(1907년) 마이트너의 교수취임 강연(1922년)을 취재한 어느 기자의 표현은 더 웃기는 일이었다. “여성이 우주를 언급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고 판단하여 ‘우주적kosmisch 과정’이라는 단어를 ‘화장술kosmetisch 과정’ 으로 간단히 바꾸어 버렸다.”(78쪽) 알고 보니 마이트너의 교수직도 요즘 말로 하면 비정규직으로 바뀌었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1926년) 이때부터 조교수 자격과 소위 교수자격시험에서 “venia legendi ”를 취득하여 10년 교수 계약을 하게 된다. 마이트너는 베를린 대학의 실질적인 교수가 된다.(주2)  마이트너는 학과장 막스 플랑크에게 감사의 편지를 썼다. 그 내용은 자신을 신뢰하여 패컬티로 되게 한 데 대하여 책임감있는 모습을 보여주겠다는 내용이었다.(Rife, p.87; letter thanking Planck) 그의 뛰어난 학문적 능력은 이미 다 알려진 상태여서 어느 누구도 외형적으로는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여성에 대한 일반적인 편견은 여전했다.

프로탁티늄의 발견을 통해 마이트너는 노벨상 후보로 추천되면서 그 이후 1920-30년대 마이트너의 과학적 성과가 빛을 발하게 된다. 방사선 붕괴 시 베타선이 감마선보다 먼저 나온다는 사실을 증명한 것은 아인슈타인으로 하여금 깊은 인상을 주었다. 아인슈타인은 그를 ‘독일의 퀴리부인’이라고 부르면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특히 닐즈보어와 마이트너는 유럽 최고의 과학자 그룹에서 진지하고 열띤 토론을 지속했다. 그러나 이러한 학문적 성취에도 불구하고 마이트너는 여성으로서 느끼는 불평등함에 대하여 마음 속으로 불편해 했다. 여전히 많은 남성 과학자들은 마이트너의 논문을 제대로 읽지 않거나 책장 속에 파묻어 두었다. “나의 남성 동료가 이 보고서를 제출했다면 벌써 인정했을 것입니다. 단지 내가 여자이기 때문에 채드웍은 나를 멸시하는 것이죠. 이런 일이 나를 정말 우울하게 만듭니다.(84쪽; 오토한에게 보낸 편지, 1922년5월17일) 그 다음해 1923년 마이트너는 채드웍의 명성에 휘말리지 않고 냉정한 시각으로 채드웍의 베타선 붕괴에 관한 실험결과에 대하여 비판을 한다.(Simm, p.89) 마이트너에게 있어서 남녀의 문제가 아니라 사실의 문제에서 오류를 지적할 뿐이었다.

그러나 마이트너는 1928년 캠브리지 학술대회에서 채드웍을 만나면서 매우 호의적인 관계를 표현한다.(Simm, p.105) 마이트너는 자신의 감정을 직접적으로 표현하는데 매우 서툴렀다. 아니면 남자들의 본질적 속성을 이해하고 너그럽게 수용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수줍음을 잘 타는 마이트너의 천성 때문일 수도 있다. 오히려 그런 갈등을 스트레스로 갖느니 실험실에 몰두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 듯하다. 이런 자신의 성격이 여성의 평등 권리를 찾는데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을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었다. 마이트너가 여자인줄 모르고 독일 브로크하우스Brockhaus 출판사에서 발간하는 학술지 편집장은 마이트너의 논문을 적극 게재하려고 시도하다가 그가 여자인 것을 알게 되자마자 게재 거부를 했다. 그러나 마이트너가 그렇게 유명한 줄 알고서는 다시 마이트너의 논문을 게재하려고 편지를 냈다. 이런 일들은 마이트너에게 흔했다. 이제 상할 마음도 없었다.

이런 일이 지나치면서 그는 결혼할 생각을 접었다. 실제로는 왜 그가 결혼을 하지 않았는가라는 주변 사람들의 추리가 많았지만 마이트너는 결혼을 안 하겠다는 철저한 원칙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단지 실험실 연구를 하느라 결혼에 신경 쓸 틈이 없었던 것이다. 실험실 연구 과정에서 그는 남성 동료 연구원들이 밤을 새가며 실험하는 현장을 일상적으로 보아왔다. 그러면서 그 반대급부로 그의 부인이 얼마나 힘든 결혼생활을 하겠는가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마이트너도 결혼해서 그의 남편이 실험실에서 밤을 지새우는 일이 잦아 질 경우 분명 자신도 그런 일상을 싫어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그는 남성에 대한 반감보다는 자신의 감정을 조절하는데 힘을 쓴 편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여성의 평등한 지위를 찾는 일이 개인적인 차원보다는 사회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다. 그는 당시 여성운동 그룹에 참여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더욱 현장에서 어렵게 활동하는 실천적 여성운동가들에게 짐을 지우고 있다는 생각을 하였다.

당시로는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인종적, 성적, 계급적 차별을 정당화하려는 과학적 시도가 꽤 있었다. 아리안 인종의 유전적 우수성을 과학으로 정당화하는 독일 계열의 사이비 과학자들이 있었다. 지식을 배우거나 습득한 여자는 일반 여자와 달리 일종의 유전적 변종에서만 가능하다는 주장을 담은 책이 선풍적으로 팔려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다. 이런 극단의 우생학적 주장은 여자를 남성과 아이의 중간 수준의 특별 인종으로 간주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나아가서는 귀족과 노예 사이의 차이도 단순한 사회적 차이가 아니라 유전적 차이에서 오는 것으로 간주하는 사회적 우생학이 널리 번져 있었다.(Max Planck Gesellschaft, S.116-118) 이렇게 사회에 만연한 성적 편견에 대하여 마이트너는 크게 마음을 두지 않았다. 마이트너도 이제 50대의 중년이며 인정받는 과학자이기 때문이다. 1933년 솔베이 학술대회에 참석한 마이트너는 국제적으로 실력있는 핵물리학자 대열에 있었다. 그런데 그때에 맞추기라도 하듯 나치가 권력을 장악했다. 여성으로서의 차별을 극복하는 듯싶었는데, 이제 유대인으로서의 차별의 시절이 본격적으로 오기 시작했다.

나치 집권 이후에도 마이트너는 카이저 빌헬름 연구소에서 자신의 위치를 확고히 가졌다. 유대인이기는 하지만 오스트리아 시민권자이면서 국제적으로 알려진 과학자라는 점 때문에 나치는 마이트너를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그런데 1938년 나치가 오스트리아를 점령하면서 하루 밤 사이에 마이트너는 오스트리아 시민에서 독일 시민으로 바뀌어졌다. 이에 나치는 외국 지역 유대인에 대한 증오를 본격적으로 현실화하기 시작했다. 유대인인 마이트너는 이제 독일을 떠나야 한다는 결심을 한다.

주2) 한국사회에서 통용하는 “교수”라는 표현이다. 당시 독일 학과에서 교수는 한 사람뿐이다. 독일 개념으로는 막스 플랑크만이 교수라는 뜻이다.

4. 노벨상과 여성

1938년 덴마아크를 거쳐 스웨덴 망명길에 오르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다. 그의 학문적 능력을 가장 많이 인정해주는 닐즈 보어는 마이트너의 탈출이 성공하도록 적극적으로 도왔다. 여권을 만드는 일에서부터 비자를 발급받는 일 등, 여객선 등의 교통편을 주선하는 일에까지 거의 영화 <미션임퍼서블>에 맞먹는 비밀조직의 도움으로 덴마아크에 도착했다. 비밀조직에는 네덜란드 그로닝겐 대학 물리학과 교수인 코스테르Dirk Coster가 있었다. 코스테르는 독일의 지식인 망명자의 탈출을 돕는 결사대 비슷한 조직의 행동대원이기도 했다. 코스테르는 마이트너와 동행하기 위하여 일부러 베를린까지 왔다. 네덜란드 영사 등을 통해 오스트리아 여권으로 네덜란드까지 검문을 받지 않고 무사히 도착했다. 이후 7월초 덴마아크에 도착하여 닐즈 보어를 만나고 곧 스웨덴 스톡홀름 노벨연구소로 이동했다. 단지 15마르크가 들은 손가방 하나만 달랑 들고서, 그의 인생은 새로 시작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 과정은 거의 영화 스토리가 되어도 충분할 정도다.

그해 11월 스톡홀름에 있던 마이트너는 오토 한과 서신왕래를 계속 했다. 그리고 덴마아크에서 그들의 비밀스런 만남이 이루어졌다. 이 자리에 조카 프리쉬도 있었는데 이들에게 의미있는 토론 자리였다. 이 때 오토 한은 마이트너에게 핵 붕괴 이후의 과정에 대하여 질문을 했다. 마이트너는 새로운 입자 생성이 실험적으로도 가능하다는 점을 제시했다. 화학적인 시야에서 도저히 볼 수 없었던 실험 예상치를 물리적인 시야로 볼 것을 마이트너는 오토 한에게 독려했고, 이에 오토 한은 무릎을 쳤다. 오토 한은 마이트너와의 토론에 결정적인 힌트를 얻어 독일로 돌아 간 후 슈트라스만과 함께 역사적인 실험결과를 얻어냈다. 우라늄 핵에 중성자를 쏘아서 분열을 시키고 소위 바륨이라는 원소가 탄생하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이론적으로는 마이트너가 오래 전에 밝혀낸 것이다. 1938년에서 1939년 사이에 오토 한과 슈트라스만 그리고 마이트너 공동의 작품으로 붕괴 이후의 새로운 원소를 발견한 것이다. 여기서 나오는 에너지는 아인슈타인의 에너지 법칙에 딱 맞아떨어진 물리학의 역사적 전환점이었다.(Schirra, S.204) 마이트너는 조카 프리쉬의 제언대로 단순한 ‘쪼개짐’Zerplatzen 이라는 용어 대신에 영어로 ‘분열’fission 이라는 용어를 만들었다. 새로운 용어만이 새로운 원소의 탄생을 설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위대한 발견은 망명 이전 3년 전부터 오토 한, 슈트라스만 그리고 마이트너 세 사람이 공동으로 연구해 오던 프로젝트였다. 그래서 그 실험 성과 역시 세 사람 공동에게 돌아갔어야 했다. 그러나 오토 한은 마이트너가 스톡홀름으로 가고 없었던 사이에 발견한 우라늄 붕괴 결과를 자기만의 성과로 했다. 이 점은 나중 마이트너가 섭섭해 했던 점이며 추후 이 발견으로 노벨상을 단독으로 받게 된 오토 한에게 말할 수 없는 불편함이 있었다. 물론 슈트라스만의 이름도 빠졌기 때문에 슈트라스만도 섭섭해 했다.(박병소, 154-156쪽) 그러나 두 사람 모두 오토 한에게 공개적으로 불만을 표현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1945년 전쟁이 끝나자마자 노벨상 위원회는 그 공로로 오토 한의 단독 노벨화학상 수상을 발표했다.

이에 대한 상황분석은 다층적이다. 나는 그런 상황을 성적 편견과 연관하여 몇 가지로 나누어 다음처럼 파악한다.
(1) 첫째 한 평생 실험실 동지였던 오토 한에게 묘한 배신감 비슷한 것을 느꼈을 것이라는 판단이다. 오토 한의 노벨상 수상 이후 마이트너가 친구 에파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그 판단이 타당하다. 이필렬 교수가 번역한 것을 그대로 따서 읽어본다.

“오토 한이 노벨화학상을 수상할 자격을 충분히 가지고 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어. 그러나 이와 관련된 부수적인 일에서 오토 로버트 프리쉬(조카)와 나는 부당한 대우를 받았어. 스웨덴 신문 D.N.에서의 한 기사는 거의 모욕적이었단다. 내가 정말로 오토 한의 보조연구원이었을 뿐만 아니라 여성 물리학자였고, 물리학 분야에서 몇 개의 제대로 된 연구를 했다고?”(139쪽)

이 문제에 대하여 오토 한의 해명은 없었기 때문에 한의 입장을 결정적으로 판단하기는 어렵지만, 당시 여성 학자의 사회적 편견이 상존했다는 점은 분명한 사실이다.

(2) 둘째 스톡홀름 노벨연구소로 자리를 옮긴 마이트너는 정말 최악의 상황이었다. 60살이 된 국제적인 물리학자였지만 노벨연구소에서는 조교 이하의 대접을 받았다. 당시 노벨연구소 소장이었던 시그반 교수는 마이트너에게 아주 간단한 실험기기조차 제공하지 않았다. 급여를 받았지만 조교 수당만도 못했다. 독일에서 건너올 때 가지고 온 것은 아무 것도 없었기 때문에 이불보 하나라도 새로 사야만 했다. 그러나 돈이 없었다. 이런 푸대접은 실상 아무 것도 아니었다. 노벨상 심사위원회의 편견에 비하면 말이다. 시그반 소장은 노벨상 심사위원회에도 속했는데 당시 최고의 물리학자들에 의해 해마다 추천이 올라 온 마이트너를 전적으로 배제하는 데 앞장서 있었다. 시그반 소장이 보기에 여성이 노벨상을 받는 것은 당치도 않은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마이트너가 노벨상 수상에서 빠진 이유는 이처럼 앞의 두 이유를 주로 들고 있다. 물론 이 두 사항 모두 추정일 뿐 확정된 사실은 아니다. 그들 어느 누구도 마이트너를 배제한 이유에 대하여 공식적으로 수긍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편견은 역사적 풍토에 기인한다. 오늘날 양성평등 제도에 대한 사회적 실천이 가장 잘 되고 있다는 스웨덴이나 노르웨이에서도 불과 70년전인 1934년도에 장애자나 정신박약자에 적용하는 극단의 우생학적 단종법이 가결되어 시행되었었다. 특히 스웨덴 정부는 1941년도 나치의 위협이 커지면서 오히려 특정 목적성 단종법을 추가로 가결시켰다. 선천성 장애자 혹은 불구자 정신박약자 등에게 출산을 제한했던 인종 악법이 겨우 없어진 것은 1960년대 들어서였다.

이와 비슷한 수준으로 여성 차별의 역사적 문제는 성적 우생학적 풍토와 깊이 연관한다는 입장이 나의 결론이다. 성적 우생학은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조선시대 과거 역사도 아니고 30년대 스웨덴의 문제만도 아니다. 바로 텔레비전을 틀기만 하면 나타나는 우리 안의 루저와 위너의 위계가 문제다. 성적 쇼비니즘이 아직도 우리 안에 내재해 있음을 파악해야만 비로소 나눠 살만한 평등사회를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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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트너 생애>

1878 오스트리아 비엔나 탄생, 필립 마이트너와 헤드빅 사이 8남매 중 3녀. Phillip and Hedwig Meitner
1892 비엔나 시민학교 수료; 이미 어렸을 때부터 카톨릭 교육을 받았으나 정식으로 개종.
1896 프랑스어 교사학교 공부를 하고 대학입학 자격시험을 위해 개인교습을 받음.
1901 비엔나 대학 물리학과 입학, 미적분학 수업을 들으면서 어릴 때부터 재능을 보여왔던 수학보다는 물리학을 공부하는 것이 좋다고 판단함.
1902 볼츠만Ludwig Boltzmann 교수 수업 대부분을 들으면서 깊은 영향을 받음.
1906 최초의 여성 박사학위 수여 PhD in Physics from University of Vienna
1907 독일 베를린 대학 실험실 연구 시작, 화학자 오토 한과 만남
1909 막스플랑크, 폰라우에, 아인슈타인 등과 함께 콜로키움 참석; 이후 베를린에 완전히 정착하기로 결심.
1912 카이저 빌헬름 연구소 입소
1915-16 전쟁에 참여
1915 오토 한 “Gas Pioneer” 참가를 적극 반대
1918 91번 원소 protactinium 발견(오토 한 공동)
1919 막스 플랑크 노벨물리학상 수상
1919 빌헬름 연구소와 장기계약 및 급여 상승
1920 닐즈보어 만남
1922 프러시아 여성 최초 조교수 Assistant Professor
1926-1933 베를린 대학 교수
1923 오토 한 단독으로 노벨 화학상 후보 추천
1924 오토한과 마이트너 노벨 화학상 공동 후보 추천 (이후 10차례 가까이 후보 추천됨)
1928 그의 조카이며 평생 조력자이고 한 오토 프리쉬Otto R. Frisch도 베를린으로 연구지를 옮김.
1933 나치, 연구소에서 유대인 마이트너 박사를 사임하도록 압력 시작, 델브릭과 원자핵 구조에 대한 새로운 연구성과 제시
1936 오토 한은 독일화학회에 마이트너와 다른 상급의 대우를 요구.
1937 막스 플랑크 사임
1938 독일 오스트리아 침공, 따라서 마이트너 연구소를 탈출하여 코스터 박사의 도움으로 닐즈보어가 있는 덴마아크로 피신, 그리고 곧 스웨덴으로 망명.
1939 조카 프리쉬와 원자핵 분열Nuclear fission 논문 게재.
1958 요양 차 조카가 있는 캠브리지로 이사함.
1968 (27 October) Lise Meitner died a few days short of her 90th birthday
<참고문헌>

박병소, 노벨상 이야기. 범한서적, 1998
Bankston, John, Lise Meitner and the Atomic Age.
Hamilton, Janet, Lise Meitner: Pioneer of Nuclear Fission.

Kerner(이필렬 옮김), 한번도 인간적 면모를 잃은 적이 없는 여성 물리학자 리제 마이트너, 양문출판사, 2009

Kerner, Charlotte, Lise Meitner, Atomphysikerin. Weinheim,1986
Krafft, F., Lise Meitner und ihre Zeit, in: Angew. Chem. 90(1978)
Max Planck Gesellschaft (Herg.), Verantwortung und Ethik in der Wissenschaft, Wissenschaftliche Verlag, 1985
Rife, Patricia, Lise Meitner and the Dawn of the Nuclear Age. Birkhaeuser, 1999
Schirra, Norbert, Die Entwicklung des Energiebegriffs und seines Erhaltungs- konzepts. Harri Verlag. 1991
Sime, Ruth Lewin, Lise Meitner: A Life in Physics. Univ. of California Press, 1996
Stolz, W.: Otto Hahn – Lise Meitner. 2. Aufl. Leipzig, 1989
Weizaecker, Carl Friedrich, Zum Weltbild der Physik, Hirzel, 1990
마이트너 소개 동영상 http://eyeofphilosophy.net/board/view.php?forum=vod&num=206

박지용의 복직투쟁 이야기 [침몰하는 대학]

박지용의 복직투쟁 이야기

박지용(한철연 회원)

즐거운 방학, 우울한 시간강사

또! 방학이다. 초등학생부터 대학생까지 학생 신분인 모든이들은 방학을 기다린다. 학생들만큼이나 초등학교 선생님부터 대학교수들까지도 방학을 기다린다. 모두 방학을 즐겁게 기다린다. 방학을 두려워하는 사람들, 그들은 시간강사들이다. 계절학기를 하지 않고서는 강의가 있을리 만무하고 강의가 없으니 수입이 없다. 대학에서는 1년 열두 달 동안 방학이 네 달이나 된다. 그러니 시간강사들에게는 삼분의 일 이상의 정기적인 무직상태를 견뎌내는 나름의 생존기술과 지혜가 요구된다. 스님들이 동안거 하안거를 하듯이 일상적인 사회관계를 최소화해서 지출을 줄여야 한다.

대학 생태계 질서에는 정년을 보장받았거나 곧 받게 되는 전임교수들이 있고 강의만 하고 강의수당을 받는 시간강사들이 있다. 시간강사에서 전임교수의 간격은 냉혹하게 말하면 급여와 연금, 4대보험이다. 신분변동에 따른 자존감 상승 따위의 비경제적 효능은 신경쓰고 싶지 않다. 승자에게 주어지는 경제적인 보상에 패자들은 부러워할 수밖에 없다. 오랜 번데기 생활을 견뎌내 나비로 변신한 친구는 첫 달 급여통장에 찍힌 숫자를 보고서야 전임교수가 되었음을 실감했다고 한다. 이 과정을 폄하하거나 무시할 생각은 없다. 그야말로 경쟁의 승자이기 때문이다. 얼마나 좋을까, 부럽다.

교육당국과 대학의 밀약에 의해서 대학 생태계의 어떤 변화가 생겨났다. 대학은 큰 돈 들이지 않고 전임의 머리수로 셀 수 있으면서 대학 평가에도 점수를 올릴 수 있는 OO교수를 만들어 냈다. 특임, 초빙, 연구, 객원, 강의전담 등등 그 명칭은 각양각색이지만 기본범주로는 비정년교수 혹은 비전임교수이다. 현재 대한민국의 모든 대학을 대상으로 통계를 내면 통계학자마저도 한 눈으로는 전체를 이해못할 정도로 엄청나게 복잡하다. 핵심은 간단하다. 대학평가 기준과 요건이 시시각각 바뀜에 따라서 대학의 주판이 튕겨지고 잡다한 OO교수의 직함이 만들어졌다. 하지만 전임교수와 시간강사의 차별이 달라지지 않듯이, OO교수들은 그저 OO일 뿐이다. 오히려 뻔데기가 나비가 될 확률만 더 줄어들고 큰 뻔데기 작은 뻔데기만 많아질 따름이다.

 

큰 뻔데기에서 작은 뻔데기로, 작은 뻔데기에서 큰 뻔데기로

어릴 적 읽은 <꽃들에게 희망을>이라는 책의 한 대목이 기억난다. 꼭대기까지 올라간 뻔데기가 나비가 되어 “저 꼭대기까지 가보아도 아무 것도 없어”라고 말한 장면이 인상 깊게 남는다. 이제 나비가 될 수 없다. 이 상황이 비장할 정도는 아니지만 나비들이 여전히 부럽다. 지금은 시간강사로 강요된 하안거 기간을 보내며 최소식단의 섭생과 금욕을 실천하고 있다.

대학에서 4년간 OO교수로 적힌 명함에 방학에도 급여를 받고 4대보험과 퇴직금을 받은 적이 있다. 보수에 비해 노동조건이 열약했다는 점을 다시 시간강사가 되고서야 절감하게 될 정도로 일이 많았다. 다행히 현재로서는 순수 시간강사(참으로 낭만적인 단어다)가 된 지금이나 그때나 연간 급여총액에서는 그리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물론 한시적인 호황일따름이다.

2015년 3월 경기 지방노동위원회에 여섯 명의 동료가 부당해고를 문제 삼아 복직투쟁을 시작했다. 사건의 피해당사자는 거의 삼배수였지만 대학이라는 특수 노동환경 탓에 어렵사리 시작한 투쟁이다. 절친한 선배는 하지 말라고 했다. 아내는 아무 말 없었지만 말았으면 하는 눈치였다. 현재 진행형인 이 싸움에서 아직 외면적으로는 그 누구와도 언쟁 한 번 없었다. 그야 말로 조용한 싸움, 싸움 같지도 않은 답답한 싸움이다. 해당 보직교수(학장)와의 협의 자리에서도 아메리카노를 아이스로 마실지 설탕을 넣을지를 물어가며 웃으며 얘기했다. 기껏해야 한겨레신문에 사건보도 기사를 하나 내는 정도였고 그마저도 동료들과 겨우 협의를 이끌어낼 정도였다. 사건을 맡은 담당 노무사가 답답해서 화를 내기도 했다. 경기 지방노동위원회에서 승소했지만 대학은 중앙노동위원회로 재심을 신청했고, 8월 말 즈음 중앙노동위원회에서도 승소하게 되었다. 주문 내용은 원직복직과 해고 기간 동안의 임금차액을 배상하라는 것이었다.

노동위원회의 최종적인 행정명령에 대해 학교측은 법원에서는 달리 판단할 것이라 생각하여 행정소송을 진행시켰다. 노동위원회가 국가 행정기구이므로 행정명령의 법적인 정당성은 행정법원에서 심판하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우리는 참조인의 신분이 되었다. 학교는 원고가 되고 노동위원회가 피고가 되고 우리는 피고의 참조인이었다. 노동위원회의 법률 담당자는 관례상 우리도 변호사를 선임하는 것이 좋다고 해서 각출하여 변호사를 샀다. 행정소송도 삼심제인 상황이므로 지방행정법원, 고등법원, 대법원으로 절차적으로 이어진다. 2016년 5월, 1심에서 의외로 패소하게 되었다. 패소 판정이 나자마자 노동위원회 법률 담당자가 원고가 되어 다시 항소할 것이라는 의사를 우리에게 전달했다. 우리는 법률적인 신분이 참조인이기 때문이다. 다시 변호사와 계약서를 작성하고 비용을 각출했다. 이제 사건은 고등법원에 접수된 상황이며 9월에 심리가 열릴 예정이다. 대법원에서 이긴다하더라도 주위에서는 글쎄라고 다들 말한다.

 

연대를 가로막는 것들

아내가 이전에 같이 활동했던 선배 하나가 책을 낸 적이 있다.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로 해고투쟁 일지를 출간한 것이었다. 아내는 그 선배가 동지애적인 결혼관계에도 불구하고 결국 이혼을 했다고 말했다. 순간 겁이 났지만 대범한 척 잠자는 아들을 품에 안았다. 나는 내년에 오십이 되지만 내 아이는 네 살이 된다. 어떻게 살 것인가?

사건을 처음 시작하면서 더 많은 동료들과 뜻을 같이하고자 했다. 다들 연령대, 전공분야가 다른 만큼이나 가치관이나 판단기준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이 사건이 명백하게 해고자복직투쟁이라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는 상황도 있었지만, 1년 반 정도 지금까지의 과정에서 기대하고 예상했던 것과도 조금은 다르다. 조금 더 느슨하게 말하자면, 이 시대에 노동자의 계급의식이라는 게 쌍용자동차의 투쟁이나 현재 금속노조의 투쟁에 있기나 한 것인가?

시간강사 노동자는 강의선택의 기회에서 수동적일 수밖에 없다. 학기 말 들려오는 핸드폰에서 학교 번호가 떴을 때 통화음을 누르는 손이 떨린다고들 한다. 학과장인 선배도 미안해서 직접 전화하지 못할 것이기에 학과 조교가 강사해촉 통보를 내린다. “아, 네. 그래요? 할 수 없죠. 알겠습니다.” 하늘은 여전히 푸르다.

다행히 강의를 맡게 될 영광을 안고 뿌듯한 마음으로 강의 준비를 한다. 교양강좌든 전공강좌든 철학을 업으로 삼은 이들에게 삶의 문제를 비켜갈 수 없다.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철학의 문제는 상황과 조건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이 아니다. 총체로서의 삶, 굴곡있는 시간을 관통하여 충만한 삶, 그것이 무엇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성찰을 담아 아이들과 공유하는 시간을 갖는 것이 철학자의 행복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의 지혜와 용기, 절제의 미덕을 칭송한다.

아래 한겨레 관련기사 참조

“[단독]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객원교수들에 ‘계약해지’ 일방통보 논란”
http://v.media.daum.net/v/20150909013006307?f=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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