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사 누스바움(下) [페미니즘 고전들을 찾아서]

16. <혐오와 수치심>, 마사 누스바움(下)

 

유민석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여성과 철학 분과)

 

 

  • 숨기고만 싶은 치부

 

인간은 누구나 취약하고 부족한 요소들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걸 인정하는 것은 곧 자신이 부족하고 완벽하지 않은 불완전한 사람이라는걸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를 인정하지 않으려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자신의 치부가 드러날까봐 꼭꼭 숨기고 덕지덕지 봉합한다. 잡힐까 두려워 머리만 풀숲에 쳐박는 꿩처럼 그렇게 위장하고 은폐한다.

혹시라도 남들 앞에 자신의 이런 치부가 발각되거나 드러나기라도 하게 된다면, 많은 경우엔 강렬한 수치심이 동반되게 마련이다. 이런 수치심은 자존감을 무너뜨리리게 되고 온전한 인격을 형성하는 것을 방해함으로써 개인의 정체성과 인간 관계를 비롯한 삶의 전반에 위협을 초래하게 된다.

이처럼 수치심은 우리를 압도하면서도 위태롭게 만들기 때문에 매우 위험한 감정이라고 할 수 있다. 페미니스트 철학자 마사 누스바움(Martha Nussbaum, 1947.5.6~)은 저서 『인간성으로부터 숨기: 혐오, 수치심, 그리고 법Hiding from Humanity: Disgust, Shame and the Law』(국역: 『혐오와 수치심 – 인간다움을 파괴하는 감정』, 조계원 옮김, 민음사, 1995)에서 이러한 파괴적인 감정인 수치심을 예리하게 분석한다. 본 글에서는 먼저 수치심에 대한 누스바움의 설명을 살펴보고, 그리고는 수치심이 법과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해야하는지, 그리고 수치심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는 사회는 어떤 사회인지에 대해서 논의해보고자 한다

 

  • 편안한 자궁, 비극적인 출생

 

“자신의 약점이 노출되었을 때 생기는 고통스러운 감정”인 수치심은 개별 인간의 삶의 발달과정에서 비교적 이른 시기에 형성된다. 누스바움에 따르면 수치심은 전지전능함과 완전함, 그리고 편안함을 바라는 유년기의 욕구 속에 이미 자리잡고 있다. 유아는 점차 성장하면서 자신의 유한성, 부분성, 거듭된 무력감을 깨닫게 되는데, 이 때 자신이 유한한 존재임과 동시에 과도한 욕심과 기대가 두드러지는 존재라는 깨달음 안에 있는 일정한 긴장을 해소하는 일시적인 방법이 수치심이라는 것이다.

그녀는 이렇게 유아기에서부터 형성되는 수치심을 ‘원초적 수치심’이라고 일컫는다. 이 원초적 수치심은 불가피하면서도 다소 보편적인 감정이지만, 그만큼 위험하며 삶의 어느 단계에서는 극복되어야 할 감정이다. 그런데 어떤 외적인 계기로 인해 원초적 수치심을 제어하거나 극복하지 못하고 강화된 채로 존속된다면, 자신과 타인에게 매우 위험한 감정이 된다.

누스바움에 따르면 유아는 태아 상태에서 자궁 속에 있을 때는 불필요한 자극이 없고 자동적으로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기 때문에 편안함과 완벽함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출생의 순간부터 비극이 발생하게 된다. 엄마의 편안한 자궁과 달리, 세상은 유아에게 호락호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세상은 온갖 고통스러운 자극과 매정함으로 가득차 있고, 돌봄 제공자는 항상 원할 때 자동으로 욕구를 충족시켜주지 않는다.

이런 풍경은 다양한 고전들 속에 그려지고 있다. 이를테면 출생을 거센 파도에 난파되어 낯선 땅위에 표류한 선원에 비유하는 루크레티우스의 시라던지, 노동할 필요도 없고 강에서는 젖과 꿀이 흐르며 날씨는 따뜻하고 대지는 풍요로운 곡식들로 넘쳐나는 황금시대를 이야기하는 헤시오도스의 신화라던지, 인간이 둥근 모습을 하고 있고 힘이 엄청났으며 신과 겉이 강했다가 제우스의 저주를 받아서 둘로 갈라지게 되었다는 아리스토파네스의 신화 이야기는, 완벽한 세상인 자궁 안에 있다가 출생과 동시에 비극적인 세상으로 나오게 되는 유아의 모습을 은유한다.

유아는 예전처럼 세상이 완벽하게 자기 뜻대로 통제되지 않는다는 것을, 따라서 자신이 세상의 중심이 아니며 전지전능하지 않고 결핍되고 부족한 인간이라는 깨닫게 되면서 원초적 수치심을 갖게 된다. 따라서 원초적 수치심은 완전한 자아 이상을 바라는 나르시시즘이 충족되지 않았을 때 발생하는, 자신의 부족한 모습을 들키기 않고 감추기 위해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숨어버리고자 하는 방어적인 감정이다. 이런 원초적 수치심은 유아기 이후에도 잠복되어 있게 되며, 이제 부끄럽다고 여겨지는 특성들, 즉 부족하거나 결핍되거나 완벽하지 못하거나 의존적이라는 특성들은 수치스러운 것들이 되어 억압의 대상이 되고 파괴의 대상이 되어버린다.

 

  • 수치심을 옹호하는 사람들

 

그런데 수치심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있다. 도덕적으로 잘못된 짓을 저질러 놓고도 수치심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로 인해 사회가 무질서해지소 타락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수치심은 좋은 감정이며, 심지어 사회가 법을 통해서 수치심을 주는 형벌을 권장할 필요마저도 있다고 주장한다. 예컨대 공동체주의 사상가 아미타이 에치오니(Amitai Etzioni, 1929. 1. 4 ~)나 법학자 댄 케이헌(Dan Kahan)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케이헌은 노상방뇨를 한 사람에게 직접 길바닥을 솔로 북북 문지르게 한 처벌을 옹호하며, 성매매를 한 사람의 신상을 신문에 공개해야 하고 심지어 음주운전자거나 범죄자임을 알리는 표시를 자동차에 부착해야 하며 얼굴에 낙인찍는 형벌을 복원해야 한다고까지 주장한다.

이들에 따르면 이러한 수치심을 주는 처벌들은 범죄에 대한 강력한 억제 효과와 처벌 효과가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미혼모, 약물중독자, 범죄자 같은 일탈적인 사람들에 대한 이런식의 수치심 주기는 사회 질서와 도덕적 가치 구현에 매우 유용하기 때문에 권장되어야 할 좋은 수치심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누스바움은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의 이유를 근거로 수치심 처벌에 반대한다. 그 이유는 첫째, 수치심을 주는 처벌은 모욕을 주기 때문에 인간 존엄성을 해친다. 둘째, 수치심을 주는 처벌은 국가의 사법적인 절차가 아니라 인민재판이 된다. 셋째, 수치심을 주는 처벌은 잘못된 대상을 처벌하거나 처벌의 정도를 명확히 정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신뢰할 수 없다. 넷째, 수치심을 주는 처벌은 억제 효과가 없으며 오히려 대상을 소외시킴으로써 더 범죄로 몰아넣는 역효과를 지닌다. 다섯째, 수치심을 주는 처벌은 시민들을 사회적 통제 아래에 둔다.

 

  • 낙인찍히는 존재들

 

무엇보다도 이러한 사회적 수치심 처벌은 주로 역사적으로 억압당해온 집단에 부과되어왔다. 예컨대 옆에 있기만 해도 수치심을 불러일으킨다는 이유로 낙인찍히거나 수치심을 부여받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그런 특성들을 상기시키는 사람들은 낙인과 배제의 대상이 되곤 한다. 주로 사회적으로 비정상적이라고 간주되는 존재들, 예컨대 여성이나 동성애자, 범죄자 등이 그런 낙인과 수치심주기의 대상이 되어온 것이다.

누스바움은 얼굴에 문신을 새기는 형벌과 같은 스티그마나 여성의 치마에 대한 역사등의 고찰을 통해서, 불완전하고 비정상적이라고 여겨지는 집단들에게 수치심을 주어왔다고 들려준다. 예컨대 여성의 신체는 남성에게 수치스럽고 부끄러운 것이기 때문에 성차별적인 사회는 여성들의 패션과 치마 길이를 통제해 왔으며, 범죄나 동성애자는 그 자체로 수치스러운 존재들이지만 겉으로는 그들의 그런 특성이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그런 표지를 얼굴에 문신으로 새겨넣음으로써 누구나 인식하게끔 자행되어왔다.

앞에서 원초적 수치심을 다룰 때 이야기됐던 것처럼, 주로 장애인이나 여성, 동성애자같은 사회적 약자들은 비정상적이거나 약하고 불완전하다고, 즉 수치스러운 특성을 지녔다고 간주됨으로써, 원초적 수치심을 일으키는 대상이 되어 투사되는 것이다. 그런 낙인을 부여함으로써 그들과 다른 나는 정상적이며 완벽하다고 위안을 삼을 수 있게 된다.

“그렇게 야한 옷을 입다니 천해보인다”, “니가 짧게 입고 돌아다니니 그런 일을 당하지”같은 ‘피해자 비난하기’victim blaming나 ‘창녀 수치심주기’slut shaming를 생각해보자. 여성의 몸을 드러내는 것은 수치스러운 것으로, 경박한 것으로 여겨지곤 한다. 나이든 여성이 예쁘게 꾸미는 것도 수치스럽고 주책맞은 일로 취급하기도 한다. 반면 남성들의 경우엔 감정을 드러내거나 눈물을 보이거나 약해보이는 것은 남자답지 못한 것, 여성스러운 것이므로 수치스러운 것이기에 억누르라는 문화 속에서 성장한다.

누스바움은 이렇게 감정이나 친밀성을 억누르면서 수치스럽게 여기는 이런 사회에서는 남성들이 솔직한 감정의 표현과 타인과의 감정 교류나 공감과 연민의 문제에서 어려움을 겪을 공산이 크다고 주장한다. 뿐만 아니라 당연히 여성적인 것에 대한 비하의 맥락 안에 놓여 있기에 ‘여성혐오자’가 될 가능성도 있다. 여성을 통제하고 싶어하는 욕망, 여성이 자신의 통제 밖에 놓여 있는 독립적인 개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한 채, 통제되지 않는 여성을 향해 분노와 적대를 표출하는 것이다.

 

  • 좋은 수치심도 있을까?

 

이처럼 수치심은 신뢰할 수 없고 매우 위험한 감정이며, 특히 그것이 사회적으로 억압당해온 집단에게 부여될 경우엔 더더욱 위험한 낙인이나 예속으로 기능할 위험이 있다. 그런데 좋은 수치심도 있을까? 누스바움에 따르면 도덕적인 분개나 도덕적 반성에서 기인하는 수치심이나, 아니면 성취한 목표에 대한 열망의 독려 차원에서의 수치심의 경우엔 어쩌면 위에서 언급한 차별적이고 신뢰할 수 없는 수치심에 비해서는 긍정적인 역할을 할 수도 있다고 설명한다.

그녀는 이러한 수치심을 ‘건설적 수치심’ 또는 ‘생산적 수치심’으로 일컫는다. 예컨대 작가이자 활동가인 바버라 에렌라이히(Barbara Ehrenreich, 1941. 8. 26~)가 자신의 저서에서 이야기한, 노동자들이 극심한 빈곤과 주거 및 고용 불안, 열악한 노동 조건에 시달리는 현실에도 불구하고 이에 무관심한 탐욕스러운 미국 사회를 향해 수치심을 가져야 한다고 강변한 것과 같은 수치심이 그런 종류의 건설적인 수치심일 수 있다.

누스바움은 이러한 수치심은 누군가를 낙인찍지 않기 때문에 괜찮은 수치심일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이런 도덕적 반성을 일깨우는 건설적 수치심이 잘 작동하기 위해서는 첫째, 도덕적으로 바람직한 규범에 호소해야 하며, 둘째, 나르시시즘(완벽한 자아 이상에 대한 사랑)적인 요소가 없어야 한다고 경고한다. 수치심은 자칫하면 비정상에 대한 낙인과 배제로 기능하기가 쉽기 때문에, 이런 수치심의 경우에도 신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 수치심과 혐오가 없는 사회

 

수치심을 주지 않는 사회를 만드려면 어찌해야 할까? 누스바움에 따르면 인간은 누구나 취약한 비정상성을 하나 이상 가지고 있을 수 밖에 없다. 그녀는 어빙 고프만(Erving Goffman, 1922. 6. 11~1982. 11. 19)의 사회학적인 논의를 끌어들여 인종, 장애, 계급, 지역, 학벌, 외모, 성별, 성적지향 등에서 모두 완벽한 ‘정상적인’ 사람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또한 타인의 보살핌을 필요로하고 서로 상호의존할 수 밖에 없는 존재다. 무엇보다도 나이가 들면 누구나 노인이 되고 장애인이 되며, 우리는 모두 언젠가는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다. 물론 사람들은 이런 현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하며, 자신의 이런 취약성과 불완전성을 숨기려하고, 이를 환기시키는 사람이나 집단에게는 수치심을 투사하는 방식으로 낙인을 찍고 모욕을 준다.

누스바움에 따르면 우리가 지향해야 할 사회는인간의 취약함과 인간다움을 인정하고, 이를 제도적으로 보호해주는 사회다. 이 점에서 그녀는 모든 인간의 평등한 존엄성과 상호의존성, 그리고 다양한 다원성을 인정하는 존 롤즈(John Rawls, 1921. 2. 21~2002. 11. 24)식의 정치적 자유주의를 옹호한다. 롤즈에 따르면 모든 인간의 존엄성과 권리는 공공복리 같은 목적을 이유로 수단화 되어서는 안되며, 우리는 서로 타인의 종교, 세계관, 생활방식과 같은 ‘포괄적 교설’(comprehensive doctrin)을 존중해줘야 한다.

누군가는 동성결혼이 도덕적이나 종교적으로 옳지 않으며 수치스럽다고 생각하거나, 여성의 자유로운 옷차림이나 성적인 표현이 도덕적으로 문란하고 수치스럽고 정숙하지 못한 일이라고 통제하고 싶어할 수도 있다. 그런 포괄적 교설은 개인이 가질수는 있지만, 그것이 사회의 법과 제도의 기초가 되어서는 안된다. 특정한 누군가의 세계관이나 종교가 정치나 법의 영역에 들어와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롤즈는 그런 모욕과 수치심은 자유주의가 보장하고자 하는 시민의 존엄성과 배치된다고 보았으며, 이를 중요한 문제로 보았기 때문에 ‘자존감의 사회적 기반’(social base of self-respect)가 정의로운 사회가 신경써야할 가장 중요한 기본적 사회재(primary social goods)라고 이야기했다.

롤즈의 이런 자유주의는 누스바움의 수치심에 대한 주장과 공명한다. 누스바움에 따르면 타인을 그렇게 통제하고 싶어하는 그런 도덕관이나 세계관은, 비정상적으로 보이는 열등함을 참지 못하는 원초적 수치심이 잘못된 사회적 편견에서 강화된 경우일 수 있다. 누스바움은 이처럼 법이나 제도에 수치심이 들어와서는 안되며, 그럴 경우 낙인에 취약한 사회적 약자들이 주로 피해를 입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누스바움의 말처럼 인간은 모두 불완전하고 불확실한 존재이며, 타인의 보살핌을 필요로 한다. 수치스러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솔직하게 받아들이고, 서로 다른 차이를 받아들이고 존중하는 상호존중과 존엄성을 구축하는 자유주의 사회를 구축하는 것이, 다시 말해 철학자 아비샤이 마갈릿(Avishai Margalit, 1939. 3. 22~)의 주장처럼 모욕을 주지 않는 사회를 만들어나가는 것이 수치심과 혐오로부터 보호받는 사회를 만드는 길이지 않을까.

마사 누스바움(上) [페미니즘 고전들을 찾아서]

 

15. <혐오와 수치심>, 마사 누스바움(上)

 

유민석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여성과 철학 분과)

 

 

페미니스트 철학자 마사 누스바움(Martha Nussbaum, 1947.5.6~)은 다양한 분야에서 다양한 철학적 작업을 일구어온 철학자이다. 그녀의 관심사는 주로 고대 철학, 정치철학, 페미니즘, 윤리학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녀가 연구한 주제의 일부만을 거론해봐도 장애인, 동물에 대한 윤리, 생명윤리, 시민 교육, 전지구적인 사회 정의에까지 걸쳐 있다. 특히 그녀는 인간의 취약성에 대한 고찰, 혐오나 수치심 같은 인간의 감정과 정동에 대한 연구, 그리고 여성철학에서는 여성의 자율성이나 성적 대상화나 성노동에 대한 연구 등으로 유명하다. 사실 이 모든 철학적 문제의식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오래된 철학적 물음과 맞닿아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녀의 대표적인 저서중 하나인 『인간성으로부터 숨기: 혐오, 수치심, 그리고 법Hiding from Humanity: Disgust, Shame and the Law』(국역: 『혐오와 수치심 – 인간다움을 파괴하는 감정』, 조계원 옮김, 민음사, 1995)에서는, 우리를 지극히 취약하게 만들면서도 압도적으로 휘감아버리는 대표적인 감정인, 혐오와 수치심을 집중적으로 파고든다.

혐오는 페미니즘이 많은 관심을 두는 주제였다. 줄리아 크리스테바(1941.6.24~)혐오(aversion)에 대한 고민이 그러하고, 마사 누스바움의 혐오(disgust)에 대한 고민이 그러하다. 이 글에서는 누스바움의 수많은 저서들 중에서 ‘혐오’와 ‘수치심’이라는 감정을 다룬 저서인 『혐오와 수치심』을 중심으로 그녀의 혐오에 대한 사유를 전달해보고자 한다. 먼저 감정(emotion) 일반에 대한 누스바움의 논의를 살펴본 후에, 혐오라는 감정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들여다보기로 하겠다.

 

  • 감정의 비밀

 

마사 누스바움은 먼저 두려움이나 분노, 혐오와 같은 감정들은, 배고픔이나 목마름 같은 욕구(appetite) 또는 우울함이나 짜증같은 기분(mood)과는 다르다고 설명한다. 감정은 욕구나 기분과는 어떻게 다른걸까? 먼저 욕구는 내 의지와 다르게 불가항력적으로 찾아온다. 예를 들어 피곤함이나 배고픔 같은 욕구를 생각해보자. 이 욕구들은 인간이 살기 위해서 필연적으로 가질 수 밖에 없는, 본능에 가까운 것들이다. 그러나 감정은 보다 섬세한 측면이 있다. 예컨대 남편의 가정폭력을 두려워하는 여성은 고통이나 무력감 같은 기분을 동반할 수 있다. 그러나 그녀의 두려움이라는 감정은 어떤 대상, 그리고 그 대상에 대한 믿음과 평가를 동반한다.

먼저 감정은 대상(object)을 갖는다. 북핵과 전쟁에 대한 두려움, 최순실과 국정농단에 대한 분노, 가족에 대한 사랑이나 세월호 참사에 대한 연민을 생각해보자. 이 모든 감정들은 각각 구체적인 명확한 대상들을 가지고 있다. 불법촬영물에 대한 여성들의 공포와 두려움은 불법촬영물이라는 대상을 가지고 있으며, 성범죄에 대한 페미니스트들의 분노는 성범죄라는 대상을 향한다. 철학자들은 이런 대상을 갖는 감정의 특성을 지향성(intentionality)이라고 설명한다. 마음은 마음 바깥의 어떤 대상을 지향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구체적인 대상 없이 발생하는 우울함 같은 기분과 달리, 연민이나 혐오 같은 감정은 구체적인 대상을 향한다.

감정의 또 다른 중요한 특징은 바로 믿음(belief)이 감정의 본질적 구조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누스바움은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가져온 페르시아인들에 대한 아테네인들의 분노를 예시로 든다. 아테네인들은 페르시아인들이 아테네를 약탈하고 있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향해 분노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남편의 폭력에 대한 두려움을 갖는 여성은, 남편이 자신을 죽이거나 상하게 할 것이라는 믿음으로 인해 두려움이 증폭되는 것이다. 아이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은 어머니의 슬픔을 떠올려보자. 그 어머니 역시 아이가 사망했다는 믿음으로 인해 슬픔을 느끼게 된다.

물론 이 믿음은 사실관계가 틀린 거짓된 믿음일 수도 있다. 예컨대 아이가 사망하지 않았는데 누군가가 거짓말을 하거나 착오에 의해 그런 말을 전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틀린 믿음을 갖게 되었다 하더라도 어머니의 슬픈 감정에는 영향을 줄 수 있다. 또한 믿음은 근거없는 부당한 믿음일 수도 있다. 예컨대 화성 외계인의 침공에 대한 두려움을 갖는 사람이 있다고 해보자. 화성 외계인이 지구를 침략할 가능성은 거의 없기 때문에 이 사람의 믿음은 분명 근거없는 믿음일 것이다. 또한 우리는 칫솔을 잃어버리는 것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두려움을 갖지는 않는다. 잃어버리면 사면 되기 때문이다. 치아 농양이라는 질병에 대한 두려움 역시 부당한 믿음이라고 누스바움은 설명한다. 이 질병은 조기에 발견되면 치료가 가능하기 때문에,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생소한 이 질병에 대해서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한 누스바움에 따르면 감정에는 대상에 대한 가치평가가 들어있다. 예컨대 친구나 가족의 죽음에 대한 슬픔을 생각해보면, 친구나 가족이라는 존재는 한 개인의 삶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기 때문에 그 슬픔이 극심할 수 밖에 없다. 반면 우리는 먼 외국인의 사망 소식에는 그렇게 별다른 슬픔을 느끼지 못한다. 예컨대 중국에서 지진이 발생해서 사망한 사람에게 그렇게까지 슬픔을 느끼진 않을 것이다. 동일한 감정도 대상에 대한 가치평가에 따라서 그 양상이 다른 것이다. 마찬가지로 외모에 대해 많은 가치평가를 두고 있다면 외모에 대한 모욕적인 발언에 대한 분노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이러한 감정의 특성, 즉 감정이 믿음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은 생각보다도 감정이 비이성적이거나 비합리적인 것이 아닌, 합리적인 이성과 밀접한 연관이 있음을 시사한다. ‘믿음’은 플라톤의 저서 『메논』이나 『테아이테토스』에서 보듯이, ‘앎’과 함께 전통적으로 중요한 철학적인 인식론의 주제였기 때문이다. 또한 믿음에는 거짓된 믿음이나 부당한 믿음이 있다는 것은 이미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역시 간파했던 사실이였다. 예컨대 페르시아인들을 향해 분노하는 아테네인들의 경우, 사실은 아테네에게 해악을 끼친 사람들은 페르시아인들이 아니라 스키타이인들이였을 수도 있다. 이 경우 아테네인들은 거짓된 믿음을 가졌던 것이다. 혹은 페르시아인들이 고의가 아닌 미비한 피해를 끼쳤을 수도 있다. 이 경우 아테네인들은 정당화되지 않는 근거없는 믿음을 가졌던 것이다.

이처럼 믿음이 감정에 필수요소라는 누스바움의 논의는, 감정에 있어서 판단이나 이성의 중요성을 시사해준다. 아테네인들은 가짜뉴스를 듣고서 부당하게 페르시아인들에 대해 혐오나 분노의 감정을 가지게 되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아리스토텔레스는 쥐를 두려워하는 사람은 사소한 것에 두려움을 갖는 것이라고 비판했고, 세네카 또한 식당에서 상석에 앉지 못했다고 화를 냈던 자신을 반성했다고 한다. 이런 사례들을 통해 누스바움은 따라서 감정에 있어서 교육이 매우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예컨대 교통체증에 대해 쉽게 화를 내는 사람, 혹은 어둠을 무서워하는 아이에게는 감정에 대한 교육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사실 플라톤은 이미 유명한 영혼 삼분설에서, 영혼이 이성과 기개 또는 분노(thymos), 그리고 욕구의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있다고 말한 바 있다. 플라톤은 이를 각각 몸의 머리, 가슴, 배의 부분과 연결시킨다. 오로지 본능에만 충실하는 욕구와 달리, 기개는 이성의 도움을 받아 이러한 욕구에 저항하도록 사용될 수 있다. 물론 기개가 욕구와 한편이 되어 이성을 따르지 않게 될 수 도 있다. 감정이 욕구와 다르며, 이성의 인도를 받기도 하고 받아야 한다는 것은 이미 고대철학에서도 사유되었던, 오래된 인류의 지혜인 것이다.

 

  • 혐오스러운 혐오

 

우리는 무엇을 혐오하는가? 누스바움은 우리가 원초적으로 혐오하는 대상이 있다고 설명한다. 예컨대 우리는 종이, 금잔화, 모래는 혐오하지 않지만, 신체 배설물과 부패한 음식은 혐오한다. 치즈는 냄새가 고약하다고 해서 혐오하지 않지만, 대변은 혐오한다. ‘똥인지 된장인지 먹어봐야 아나’라는 속담처럼, 심지어 대변과 형태마저 유사한 된장은 혐오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설탕은 혐오하지 않지만, 바퀴벌레에서 설탕맛이 난다 하더라도 혐오할 것이다.

앞에서 감정은 대상을 갖는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이러한 혐오의 대상들의 특징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인간에게서 떨어져나간 부산물들(예컨대 토사물이나 대소변)이거나, 인간의 불완전성과 동물성을 떠올리게 하는 물질들(동물이나 시체)이라는 것이다. 누스바움에 따르면 이러한 대상들은 인간에게 불완전성과 유한성, 동물성을 환기시키면서 혐오의 대상이 된다.

이러한 혐오의 대상들은 두 가지 법칙, 즉 ‘접촉의 법칙’과 ‘유사성의 법칙’을 따른다. 먼저 접촉의 법칙이란, 혐오의 대상이 다른 대상과 접촉될 경우 다른 대상마저 혐오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예컨대 죽은 바퀴벌레가 떨어졌던 쥬스 잔의 경우, 우리는 그 쥬스 잔이 아무리 깨끗하게 세척되었다 하더라도 기피하게 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전염병이 있는 사람이 입었던 옷 역시, 살균 소독되어 전염병과 무관하게 세탁되어 있다 하더라도 기피한다는 것이다. 또한 유사성의 법칙이 있다. 즉 원래의 혐오의 대상과 유사한 다른 대상 역시 혐오하게 되는 법칙이다. 예컨대 개똥 모양으로 만든 쵸콜렛의 경우, 왠지 꺼림칙하게 된다. 살균한 파리채로 휘저은 수프의 예시도 그렇다. 만일 파리채로 수프를 휘저었다면 그 수프 역시 마시기가 힘들 것이다. 새로 산 빗으로 휘저은 음료 역시 마찬가지다. 아무리 그 빗이 공장에서 막 나온 새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으로 휘저은 음료 역시 마시기가 거북할 것이다. 이런 예시들은 혐오가 작동하는 법칙들을 잘 보여준다.

다음으로 누스바움은 혐오와 위험, 혐오와 비정상, 그리고 혐오와 분노를 구분한다. 예컨대 독버섯은 위험한 대상이지만, 우리는 독버섯을 혐오하지는 않는다. 또한 돌고래는 바다에 사는 포유류이기 때문에 비정상이라고 볼 수 있지만, 그렇다고 돌고래를 혐오하지는 않는다. 혐오의 대상들은 이것들과 달리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인간의 유한성과 동물성을 환기시키는 존재들로, 나를 오염시킬 수 있다는 믿음을 초래하는 것들이다.

 

  • 혐오스럽다고 감옥에 보내야 할까?

 

누스바움은 다른 감정들과 달리 혐오는 특히 매우 불안정한 감정이기 때문에, 법이나 도덕의 판단 기준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 그녀는 따라서 혐오를 불신의 눈초리를 가지고 비판적으로 바라보면서 혐오를 옹호하는 철학자들과 법학자들을 비판한다. 예컨대 생명윤리학자인 레온 카스(Leon Kass, 1939.2.12~)는 혐오를 적극적으로 옹호하면서 특정한 혐오감이 인류의 지혜를 드러내는 감정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생명복제에 대한 직관적인 거부감 같은 것이 그것이며, 그런 혐오는 생명복제가 옳지 않다는 것을 알려주는 인류의 지혜의 지표라는 것이다. 그러나 누스바움에 따르면 혐오는 편견에 기반한 감정이 되기 쉽기 때문에, 인종간 결혼이나 동성결혼법에 대한 혐오로 악용되면서, 사회적 약자에 대한 억압과 박해에 이용되어왔다고 주장한다.

누스바움은 앞에서 다루었던 배설물이나 동물의 시체 같은 ‘원초적 혐오’와, 동성애자나 장애인에 대한 혐오 같은 ‘사회적으로 매개된 혐오’를 구별한다. 원초적 혐오는 위생과도 관련되어 있고 진화의 산물일 수 있기에 그렇게 위험하지 않으며 인간 삶과 떼어놓을 수 없는 반면, 사회적으로 매개된 혐오의 경우엔 특정 집단에 대한 혐오 같이 매우 위험한 혐오다. 특히 사회적인 혐오는 주로 해당 사회의 문화적 편견의 영향을 받으며, 주로 그 사회의 소수자와 약자를 향한 투사적인 성격을 가진다. 원초적 혐오가 사람에게 귀속되어 그 대상이 혐오하는 자의 유한성과 동물성을 환기시킨다는 이유로 낙인이 찍히고 혐오를 당하는 것이다. 예컨대 동성애자 남성은 이성애 남성을 오염시킬 수 있는 전염성을 지닌 존재로 취급당하기 때문에 기피당하며, 역사적으로 여성 역시 역사적으로 유약하고, 끈적거리며, 유동적이고, 냄새나는 존재로 취급당해 여성의 몸이 오염된 불결한 영역으로 상상되어 왔다고 설명한다.

이런 사회적 혐오 혹은 혐오의 정치는 동성애자들의 성관계를 처벌했던 ‘소도미 법’(Sodomy Law)나 군대 내 동성애자의 커밍아웃을 금지했던 ‘묻지도 말고 말하지도 말라’(Don’t ask, Don’t tell) 정책 등에도 반영되어 있다. 특정 집단에 대한 혐오가 공적인 영역인 법과 정치로 침투한 것이다. 누스바움은 존 롤즈(1921.2.21~2002.11.24)의 정치적 자유주의를 따라, 공적인 영역에 사적인 감정이나 선입관이 진입해서는 안되며, 존 스튜어트 밀(1806.5.20~1873.5.8)을 따라 오로지 타인에게 피해를 끼친 행위들만 법적으로 처벌해야 하지, 혐오감을 준다는 이유로 동성애자들의 성관계나 알콜 중독, 약물 중독을 처벌해서는 안된다는 ‘해악 원칙’(harm principle)을 지지한다. 해악 원칙이란 오로지 타인에게 해악을 낳은 행위만이 도덕적으로 그른 행위이며 법적으로도 제재할 수 있는 행위라는 원칙이다. 이러한 누스바움의 주장은 결국 ‘해악 원칙 대 불쾌 원칙이냐’로 압축될 수 있을 것이다. ‘불쾌 원칙’(offense principle)이란 해악을 낳지 않았다 하더라도 처벌의 기준이 될 수 있다는 철학자 조엘 파인버그(Joel fineberg, 1926.10.19~2004.3.29)가 주장한 원칙이다. 누스바움은 혐오를 법이나 도덕의 기준으로 삼을 수 있는 불쾌 원칙을 당연히 반대할 것이다.

예컨대 지적 장애인이나 게임 중독에 걸린 사람들은 많은 사람들에게 불쾌감 혹은 혐오감을 줄 것이다. 온 몸에 문신을 한 사람은 어떤가? 보기만해도 혐오스러울 수도 있다. 그런데 보기에 혐오스럽다는 이유로 게임 중독에 걸린 사람이나 문신을 한 사람들을 감옥에 보내도 되는 것일까? 뚱뚱해서 불쾌감을 주는 사람은, 특이한 헤어 스타일과 옷차림을 한 사람은 또 어떤가? 현대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인권탄압일 것이다. 한국에서도 과거에 그런 적이 있었다. 부랑자들, 미니 스커트를 입은 여성들, 장발을 한 청년들을 단속하고 적발한 역사가 있었다. 아직도 군형법에는 동성애 장병들을 처벌할 수 있는 조항이 존재한다. 퀴어문화축제에 대한 많은 이들의 반감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나 우리는 누스바움의 혐오에 대한 통찰을 따라 혐오는 많은 경우 사회적인 편견에서 비롯된 것이며, 사회적 약자들을 탄압하는 도구로 악용되어왔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그런 혐오는 잘못된 믿음에 기반한 이성적이지 않은 편견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