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바닥에서 진리를 찾은 이- 장일순 [길 위의 우리 철학] – 15

구태환

 

1. 원주역과 장일순의 얼굴

열차가 정차하는 역에는 그곳을 거치는 사람들만큼 많은 사연이 쌓이게 마련이다. 전국적으로 도로망이 촘촘해진 지금에야 열차보다 편리한 것이 고속·시외버스이지만, 예전에 큰 도시로 가는 가장 빠르고 쉬운 방법은 열차였다. 그리고 지금은 스마트폰으로 열차 시간을 알아보고 좌석까지 예매하지만, 예전에는 열차 시간을 알아보거나 열차표를 예매하기 위해서, 그리고 벗이나 자녀를 배웅하고 맞이하기 위해서 가야 할 곳이 열차역이었다. 이래저래 열차역에는 많은 사람이 모이게 되고, 그 많은 사람들은 대상으로 한 식당, 여인숙 등이 주변을 차지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곳의 상인이나 여객들을 노린 깡패, 소매치기, 사기꾼들도 적지 않았다. 한 마디로 열차역과 그 주변은 온갖 인간 군상의 집결지였다.

 

 

<원주역 전경 (출처: 저자)>

 

 

원주역도 다른 도시의 역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많은 이들이 오가고, 상권이 형성되고, 소매치기, 깡패 등이 순박한 시골 사람들을 노리기도 했던 곳이다. 적어도 대학생인 필자가 치악산에 가기 위해 청량리에서 기차를 타고 처음으로 원주역에 도착했던 1980년대 후반 당시에는 그랬다. 그 이후 원주를 다녀갈 때에 열차를 이용했던 기억은 별로 없다. 한참 후에 필자는 원주에 있는 대학에 강의를 다니게 되었고, 간혹 원주역에서 열차를 이용하게 되었는데, 역의 승강장에서 무위당(无爲堂) 장일순(張壹淳, 1928~1994)을 만나게 되었다. 한때(2013년~2016년) 원주역의 승강장 벽에 그의 얼굴이 그려져 있었던 것이다.

 

 

<장일순 벽화 (출처: 저자)>

 

 

장일순은 자신의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원주역에서 다양한 인간 군상들과 어울렸다고 한다. 그러한 어울림은 많은 일화를 낳았고, 그러한 일화들은 그의 인간에 대한 태도를 잘 보여준다. 그 중 하나가 떠오른다.

 

원주역을 지나던 아주머니 한 사람이 딸의 결혼 비용을 소매치기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당황한 아주머니에게 주위 사람들이 이곳에서는 어려운 일을 장일순이라는 사람에게 상의하면 해결되기도 한다고 알려주었고 그녀는 그를 찾아가 하소연한다. 사정을 들은 그는 원주역 주변 일대를 돌면서 그 소매치기를 찾아내고 결국 소매치기한 돈을 받아 아주머니에게 돌려줬다는 일화다. 참 영화 같은 이야기이다. 장일순이 그 동네를 주름잡던 깡패 두목 정도라면 모르겠지만 힘을 쓰는 사람도 아닌 그가 어떻게 소매치기를 설득했을까?

 

하지만 이야기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그 후 장일순은 그 소매치기를 다시 불러 술 한 잔 대접했다고 한다. 이 이유인 즉 피치 못할 사정으로 당신에게 소매치기한 돈을 돌려받았지만, 결국 내가 당신 영업을 방해한 것이니 미안하다는 것이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 같지만, 잘 생각해보면 이 사건은 사람을 대하는 장일순의 태도를 알 드러내준다. 그대가 도둑일지라도 나는 그대의 잘잘못을 따지지 않는다는 태도, 그리고 나는 그대를 인간으로, 그리고 소매치기라는 당신의 직업을 생업으로 인정한다는 태도 말이다. 타인 위에 군림하고 가르치려 하지 않는 태도 말이다.

 

 

2. 생애

장일순은 원주에 세거한 집안에 태어나 생의 대부분의 시간을 원주에서 보냈고, 원주에서 삶을 마감했다. 그의 유소년기를 살펴볼 때에 필자의 시선을 끄는 인물이 몇 있는데, 특히 그의 조부와 모친은 예사롭지 않으면서도 예전의 우리 주변에서 간혹 볼 수 있는 현명한 이들의 전형이라 할 것이다.

 

조부 장경호(張慶浩)는 가족들에게 “밥 한 그릇을 우습게 봐서는 아니 되느니! 온 우주가 힘을 합해야 그게 만들어지지 않더냐. 쌀 한 톨이라도 버리는 짓은 큰 죄를 저지르는 일이야.”라고 하면서 땅에 떨어진 한 알의 곡식도 허투루 지나치지 않았다. 젊은 시절에 장사를 통해 상당한 부를 축적한 그의 조부가 이처럼 한 알의 곡식도 아끼는 행동은 자린고비의 그것으로 보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의 조부는 걸인이 오면 상을 차려 대접하도록 하는 등 결코 자신만의 호의호식을 위해 곡식을 아끼거나 자신보다 가지지 못한 자를 무시한 태도를 보인 적이 없었다. 그래서 그의 집에는 수많은 묵객들이 드나들었고, 그의 어머니 역시 시아버지와 마찬가지로 걸인 상을 차릴 때에도 정성을 다하였고, 소작농에게는 더운밥을 대접하고 자식들에게는 찬밥을 주는 그런 이였다.

 

원주에서 소학교를 마친 장일순은 서울의 배재중학교를 졸업하고 경성공업전문대학(서울대 공대의 전신)에 입학하지만 ‘국립대학 설립안’에 반대하다가 제적당하고 원주로 내려온다. 하지만 주위의 권유로 다시 서울대학교 미학과에 입학했지만, 4학년인 1950년 한국전쟁 발발로 학업을 중단하고 원주로 돌아온다. 그후 교육에 뜻을 두어 당시의 성육고등공민학교를 인수하여 1954년 대성중고등학교를 설립하고 이사장으로 봉직하는데, 교사 부족 때문에 교사로도 활동한다.

 

그는 1958년과 1960년에 모순된 현실 사회를 바꾸기 위해 국회의원에 입후보하지만, 현실 정치 현실에 대한 지나친 낙관과 정치적 탄압으로 인해 두 번 모두 낙선하고 만다. 그런 그는 1961년 5.16 쿠데타 직후에 평소 주장하던 중립화 평화통일론을 빌미로 체포되어 3년 동안 옥고를 치르게 된다. 외세를 배제하고 남북한 당사자가 만나 평화통일을 협의하자는 주장이 북한의 그것과 유사하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출소 이듬해에 대성학원 이사장에 복귀하여 교육 사업에 몰두하고자 하지만, 박정희 독재정권은 그를 그대로 두지 않았다. ‘사회안전법’ 등으로 그의 모든 활동을 감시하고 방해했으며, 결국 1965년 대성학교 학생들이 굴욕적인 한일외교 반대운동으로 구속되자, 장일순은 학생들의 석방을 조건으로 이사장직을 포기하게 된다.

 

독재정권의 이러한 부당한 탄압 때문에 현재 우리가 장일순의 사상을 파악하는 데 한 가지 애로점이 생기게 된다. 일찌감치 군사독재정권으로부터 요주의 인물로 지목된 그는 자신의 글로 인해서 자신만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까지 피해가 미칠까봐 저어하여 글을 남기지 않은 것이다.

 

이후 그는 사람들의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 관심을 집중하여, 망가져가는 농촌과 광산촌을 살리기 위한 신용협동조합 운동에 펼치게 되고, 1971년 이후에는 지학순 주교와 함께 민주화 운동의 조력자로서 역할을 했다. 이러한 민주화 운동의 조력자로의 그의 역할로 인해서 박정희에서 전두환, 노태우로 이어지는 군사독재정권 시절의 많은 민주인사들이 정권의 탄압을 피해 원주에 와서 장일순에 몸을 의탁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의 협동조합운동은 ‘원주소비자협동조합’의 설립으로 드러나며, 특히 현재 전국적인 네트워크를 갖고 있는 ‘한살림 생협’의 창립에 많은 공헌을 했다. 생산자와 소비자를 잇고, 결국 생산자와 소비자, 나아가 땅과 생명을 살리는 운동에서 차지하는 장일순의 역할은 지대했다고 평할 만하다.

 

병든 세상을 고쳐보고자 평생을 노력한 그에게도 못된 병이 찾아왔으니, 1991년 위암이 발병하여 결국 1994년에 그 ‘병을 모시고’ 이 세상을 등졌다.

 

 

3. 걸어다니는 동학

암을 앓으면서 “병을 모시고 간다”던 장일순은 자신의 병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러니까 자연도, 지구도 암을 앓고 있고, 자연 전체가 암을 앓고 있는데 사람도 자연의 하나인데 사람이라고 왜 암에 안 걸리겠어요. 그러니까 큰 것을 나한테 가르쳐주느라고, 결국은 지금 뭐냐 하면 너 좀 앓아봐라 하고 그러시는 것 같아요.”

 

누군가가 ‘진리는 단순하다’고 했다. 사람들이 ‘진리’라고 이야기하면 대단히 거창한 것처럼 생각하지만 사실 우리의 삶의 참된 이치가 진리이고, 결국 진리는 우리 삶 속에 녹아있고, 우리는 진리 속에서 살고 있다는 말일 것이다. 그것이 진리라는 것을 모르고서 말이다. 지구의 급격한 환경 변화, 그러한 변화의 급격함에 적응하지 못하는 우리의 몸, 그 결과 드러나는 내 몸의 이상 현상인 병은 서로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것이고, 그것은 참된 이치이다. 그것을 누구보다도 먼저 아는 것은 내 몸이다. 그런데 우리는 가장 가까운 내 몸이 아는 것을 무시하고 다른 고차원적인 것에서 진리를 찾는다. 장일순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이런 것 아니겠는가?

 

사람이 자연의 일부이고, 자연이 병들면 사람도 병들 수밖에 없다는 장일순의 사고는 예전부터 있어왔지만, 가까이에서 그 연원을 찾자면 해월(海月) 최시형(崔時亨, 1827~1898)을 떠올릴 수 있다. 인간과 만물은 모두 한울님을 모신 존재이고 만물과 내 몸에 깃든 한울님은 같은 존재다. 그리고 만물을 아우르는 하늘과 땅은 만물을 낳았으니, 내 부모와 한 몸이다. 따라서 최시형은 나막신을 신은 아이가 뛰어다니는 것을 마뜩치 않게 생각한다. 나막신이 딸각거리며 땅을 울리면 땅에 깃든 한울님, 내 부모가 상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한울님, 내 부모가 상하면 그 자식인 우리 역시 상하게 된다. 만물과 나는 천지라는 같은 부모의 품에서 생장하는 존재이니, 천지가 병들었는데 내 몸이 병들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장일순은 ‘국대안 반대 투쟁’으로 제적당해서 원주로 내려왔을 때 먼 친척형인 오창세를 통해 해월 최시형을 접하여 그의 사상에 심취하게 된다. 상당히 젊은 나이에 접하게 된 것이다. 그후 그의 사상 행적 곳곳에서 최시형의 흔적이 보이는데, 원주시 호저면 고산리 송골의 최시형이 관군에게 체포된 곳에 기념비를 세우고 직접 글씨를 남긴다.

 

특히 그는 만물이 한울님을 모신 존재라고 한 최시형의 사상에 심취한 것 같다. 사람만이 아니라 곡식 한 알, 돌멩이 하나, 벌레 하나도 한울님이니, 이러한 한울님을 무시하고서 멋대로 개발하는 행위는 한울님을 해치게 되고, 결국 인간 역시 살아갈 수 없다고 한다. 그렇다면 인간이 한울님을 어떻게 섬겨야 할까?

 

장일순은 ‘알뜰함’을 꼽는다. 수많은 농부의 땀과 하늘과 땅이 일체가 되어 한 사발의 밥이 나오는데, 그 밥을 소중하고 알뜰하게 다뤄야만 남는 것을 이웃과 함께 나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처럼 한 사발의 밥을 알뜰하게 다뤄서 이웃과 서로 나누는 것이 ‘한살림’ 정신이라고 강조한다. 음식에도 한울님이 있으니 음식을 섭취하는 것이 한울님을 영접하는 행위라고 강조한 최시형의 생각을 그러한 한울님이 깃든 음식을 알뜰하게 다뤄 주변 사람과 함께 먹음으로써 모두가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데에까지 확장했다고 할 수 있다. 한울님이 깃든 음식을 많다고 해서 허투루 낭비해서는 안 될 일이다. 이러한 생각은 자연을 무한정 착취할 수 있는 대상으로 보고 그것을 인간의 의도에 맞게 개발하고 변형함으로써 더욱 풍요로운 삶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인간중심주의적 사고에 정면으로 맞서는 것이다.

 

 

4. 밑으로 기는 자세

자연을 인간의 이용과 지배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태도에 대한 그의 비판은 타인에게 군림하지 않는 그의 사상과 맥락을 같이 한다. 그가 제자들에게 항시 했던 말 가운데 하나는 “기어라”이다. 장일순 자신 앞에서 기라는 것이 아니라 남과 맞서서 내가 잘났다고 내가 힘있다고 우기지 말고 남들 밑에 처하라는 말이다. 이에 대한 우스꽝스러운 이야기가 전해지기도 한다.

 

제자 한 사람이 얼큰하게 취한 상태에서 길을 걷다가 장일순을 만났다. 그는 술김에 선생님께 치기를 부려 “선생님은 맨날 저희보고 기어라, 기어라 하시지만 당신께서는 언제나 저희에게 대접만 받지 않습니까”라고 따졌다. 이러한 제자의 치기어린 투정에 대한 장일순의 답변은 그 자리에 납작 엎드리는 것이었다. 아마도 그 제자는 술이 확 깼을 것이다. 그의 말이 알맹이 없이 입으로만 뱉어내는 것이 아님을 드러내는 일화라고 할 것이다.

 

그렇다면 타인 발밑을 기라는 그의 말은 무슨 의미일까? 많은 이들은 장일순의 이러한 사고의 연원을 『노자』에서 찾으며, 필자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의 호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무위당’도 노자에서 차용한 것이며, 장일순의 구술을 제자 이현주가 풀어냈다고 하는 장일순의 노자 이야기라는 책이 있는 것도 주지되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기어라’와 관련되는 노자의 대표적인 언급은 “가장 선한 것은 물과 같다(上善若水)”고 했다. 이러한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지만 스스로의 공을 뽐내지 않는다. 그리고 산에 있는 물은 아래로 흘러 계곡에 모인다. 노자는 이처럼 물이 모이는 계곡의 신은 죽지 않는다고 하면서 계속의 신을 오묘한 암컷의 생식기에 비유하는데, 이러한 암컷의 생식기에서는 만물이 탄생한다. 노자는 이 말을 통해서 남들 위에 군림하려고만 하고 남 밑에서 기고 싶어 하지 않는 세태를 비판했다. 이러한 세태와는 달리 물은 모두가 싫어하는 밑으로 흐르면서도 만물에 생명을 부여한다는 것이다. 타인과 다투고 그 위에 군림하고자 하면, 결국 모두가 다칠 뿐이다. 중요한 것은 다툼이 아니고 함께 사는 것이다.

 

그렇다면 타인에게 군림하려는 태도는 어디에서 오는가? 장일순은 그 태도가 자신을 내세우는 데 있다고 본다. 그리고 자신을 내세우는 것은 자신을 채우기 때문이라고 한다. 노자의 말처럼 비어있어야만 다른 무엇인가를 채울 수 있다. 즉 다른 이를 받아들일 수 있다. 그리고 다른 이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나를 성장시키는 것이다. 그러할 때 비로소 우주 만물과 그에 속하는 나와 우리를 살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의 ‘기어라’ 역시 만물과의 함께 삶을 추구하는 고민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5. 그의 자취

모든 사람, 그리고 자신을 괴롭히는 몹쓸 병과도 함께 살아가고자 한 장일순의 자취를 파악하는 데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 앞서도 말한 것처럼 그는 의도적으로 글을 남기지 않았다. 하지만 한 사람의 사상을 파악하기 위해서 반드시 그가 남긴 글이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인류 역사에서 성인으로 숭상되는 공자, 소크라테스, 석가, 예수 가운데 누구도 글을 남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의 말과 행동은 제자들을 감복시켰고, 그 제자들이 스승의 말과 행동을 글로 남겨서 아직도 우리는 그 성인들의 위대한 사상에 젖어 있는 것이다. 장일순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의 사상 행적은 우선 제자들의 기록으로 남아 있다. 그리고 그의 서화도 우리에게 그의 사상의 단편을 접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그는 어렸을 적에 할아버지의 묵객 가운에 한 사람인 차강(此江) 박기정(朴基正)에게 서예를 배웠는데, 글을 쓸 수 없는 처지인 그에게 서화는 자신이 생각을 펼치는 수단 가운데 하나였다. 특히 사람의 얼굴 모습을 한 ‘의인란(擬人蘭)’은 일품이라 할 것이다.

 

<장일순 서화 (출처: 저자)>

 

 

윗 사진의 그림은 장일순의 대성학교 제자와 그의 부인이 운영하는 식당에 걸려 있는 것이다. 단아한 얼굴 모습을 한 꽃과 부드러운 듯하면서도 곧게 선 꽃대, 그리고 휘어져있지만 강한 생명력을 함유한 듯한 두 이파리는 그 그림의 주인공인 제자의 부인과 꼭 닮아 있다. 이 그림에는 삶의 역경을 견뎌내면서 자신의 길을 꿋꿋이 가는 사람에 대한 장일순의 무한한 애정이 담겨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그의 흔적은 그의 활동 공간에서 잘 드러난다. 인간을 포함하는 모든 생명체를 살리고자 설립하거나 설립에 도움을 준 협동조합은 이미 전국적인 단위로 확산되었고, 많은 이들이 협동조합 운동에 참여하고 있다. 원주 중앙동에 위치한 ‘밝음 신협’은 그 가운데 하나로서 그곳에는 아담한 규모이긴 하지만 ‘무위당 장일순 기념관’이 자리하고 있다.

 

<장일순의 고거 (출처: 저자)>

 

 

그리고 그의 흔적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곳이 1955년에 장일순이 스스로 지었다는 봉산동의 집이다. 예전에는 많은 사람들이 북적였을 이곳을 여전히 그의 부인이 지키고 있다. 안뜰에 잡초가 뒤섞인 온갖 생명체를 안고 소박하게 자리하고 있는 이 집은 자연을 인간을 위한 도구나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같은 생명을 가진 존재로 보는, 그래서 그 위에 군림하지 않는 장일순의 모습이 아닐까. 그는 봉산동 집을 나서 원주천 제방을 따라 원주역까지 걸어다니곤 했다고 한다.

 

<무위당길 표지판 (출처: 저자)>

 

 

이 봉산동 집 부근의 작은 길에는 ‘무위당길’이라는 명칭이 붙여져 있다. 혹자는 이처럼 작고 초라한 길에 장일순처럼 큰 스승의 이름이 부여된 것이 불만스러워 할 수도 있다. 하지만 필자는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자 한 그에게 큰 길을 선사하는 것은 오히려 모욕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중요한 것은 이 작은 길에서라도 그의 삶과 그의 정신을 기억하고, 우리 자신을 돌아보는 것 아닐까 한다.

 

 

기고자: 구태환(한국철학사상연구회)

최한기의 인체론과 관련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본 분과에서 동학에 대해서 공부하고 있으며, 배타적 소유권에서 벗어난 ‘인권’의 가능성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다.

 


 

블로그진 ‘길 위의 우리철학’은 한국현대철학을 함께 공부하고 토론하는 한국철학사상연구회의 ‘한국현대철학분과’에서 만든다. ‘길’은 과거로부터의 역사이기도 하고, 오늘의 삶이기도 하고, 미래로 열린 희망이기도 하다. 그 위에 서서 우리는 언제나 어느 길이 더 나은 길인지, 바른 길인지 생각하고 선택한다. 그렇게 ‘길’은 지향志向이기도 하고, 그래서 철학이기도 하다. 한국현대철학분과는 앞으로 월 2회 블로그진을 통해 우리철학이 서 있었던 길, 우리철학이 만들었던 길을 이야기 하려고 한다.

 

  1. 광장에 서다 – 촛불의 승리 그리고 박정희 시대의 종언 [길 위의 우리 철학] -1 : 박영미
  2. 대통령 탄핵, 그 후 – 박은식(朴殷植)의 개혁론, 독립운동, 임시정부 [길 위의 우리 철학] – 2 : 이지
  3. 송곡의 길가에서 최시형을 만나다 [길 위의 우리 철학] –3 : 구태환
  4. 붉은 얼굴의 경계인(境界人), 신남철 [길 위의 우리 철학] – 4 : 이병태
  5. 어린이를 노래하는 방정환을 만나다[길 위의 우리 철학] – 5 : 김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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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 시대정신을 찾는 여정의 첫 발걸음: 신채호와 서울 [길 위의 우리 철학] – 13: 진보성
  14. 큰 이룸을 위해 한 걸음씩 나아간 삶의 철학자, 도산 안창호 [길 위의 우리 철학] – 14: 배기호

한국철학은 누가 세우겠나 [최종덕의 책과 리뷰] -13

최종덕(철학)의 종횡무진 책읽기

 

한국철학은 누가 세우겠나

 

오늘의 서평 책 :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처음 읽는 한국 현대철학』 동녘, 2015

 

1. 우리의 철학을 찾아서

 

어린이날이 왜 좋을까? 사랑하는 아이들이 있어서, 아니면 공휴일이라서? 어린이날하면 방정환 선생이 떠오른다. 방정환 선생이 어린이날을 직접 제정한 것은 아니지만, 방정환 선생이 만드신 <색동회>가 오늘의 어린이날 전신이었다. 여기까지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다. 그런데 방정환 선생이 어린이를 어린이답게 만나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동학에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의외로 많지 않다. 개천절이 어떻게 국가공휴일로 되었는지, 주시경 선생으로부터 촉발된 한글날이 왜 한국철학과 연관되는지를 알게 되었는데, 한국철학사상연구회에서 쓴 『처음 읽는 한국 현대철학』(동녘, 2015)을 읽은 덕분이다.

 

이 책 『처음 읽는 한국 현대철학』은 “우리에게 철학은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시작한다. 이 책은 읽기 쉽고 이해하기 쉽게 만들었으며 매우 분명한 문제의식을 세우고 있다. 이 책에서 한국현대철학의 문제의식을 대신한 한 마디의 표현이 있는데, 일본 제국주의자를 비판적으로 흘겨본다는 표현이다. 독립운동가 신규식이 일제에 항거하며 독약을 마시고 한쪽 눈을 잃었는데, 그 이후 그는 자신의 호를 한쪽 눈으로 흘겨본다는 뜻으로 예관晲觀이라고 붙였다.(344쪽) 예관이란 반성하고 비판하며 행동하는 지식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한철연의 책은 우리에게 철학이 어떤 의미인지 지식이 무엇인지를 묻는 질문이 철학함의 출발이라고 말한다. 출세와 입신양명의 도구로 전락한 지식을 비판하며, 권력에 결탁하는 학문을 거부하는 새로운 비판과 부정, 저항과 혁명의 철학이 현대한국철학의 기초였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341쪽) 한철연의 한국현대철학은 부제로 “동학에서 함석헌까지, 우리 철학의 정체성 찾기”에서 암시하듯이 철학의 의미를 스스로 질문하며 나아가 분열의 시대를 마주한 현대인의 철학적 지혜를 모색하고 있다.

 

『처음 읽는 한국 현대철학』은 현대인이 한국의 현대철학을 이해하도록 안내하는 입문서로서 최소한의 한국현대철학자들을 소개하고 있다. 동학의 최제우, 대종교의 나철, 양명학의 박은식, 민족주의형 무정부주의의 신채호, 사회적 휴머니즘의 신남철, 실천철학의 박치우, 국가주의의 박종홍, 씨알철학의 함석헌의 철학을 잘 풀이해주고 있다. 동학의 최제우에서 씨알 함석헌에 관통하는 철학은 이념적으로 평등과 자유에 있었으며, 방법론으로 저항과 실천에 있었으며, 내재적으로는 주체와 성찰에 있었다고 이 책은 말하고 있다.

 

2. 생명존재론

 

이 책에서 주로 다룬 동학이나 대종교 그리고 당대 양명학은 인격의 선천적 동등성을 강조한다. 당대에서 문제된 인격의 선천적 동등성이란 계급 차별, 직위 차별, 남녀 차별, 부자간 차별과 나이 차별의 역사적 질곡에서 벗어나려는 생명의 존재론이다. 생명의존재론이라는 말은 서평자 마음대로 붙인 것이지만 나름대로 전체 맥락을 상징한다고 보기 때문에 이런 브랜드를 붙어보았다.

 

인격에서 존재론적 동등성의 실현되면 그것이 비로소 삶의 자유이다. 인격적 동등성을 누릴 수 있다는 민중의 희망이 자유를 실현하며 이런 자유의 실현이 당대의 일제 침략으로부터 자신의 자존감을 지킬 수 있다. 동학과 대종교 그리고 당대 양명학에서 말하는 생명의 자유론은 일제에 대한 저항정신의 기초가 된다는 뜻이다. 특히 자유를 희망하는 당대의 동학은 계급에 대한 탈피와 일제에 대한 저항이라는 두 가지 통과제의를 거쳐야 했다. 탈피와 저항이 바로 동학의 기본정신이다. 저항과 탈피는 거창한 독립운동 이데올로기나 종교 경전을 통해 실현되는 것이 아니다. 저항과 탈피는 일상생활에서 남녀 혹은 부부 사이에 가로놓여진 사회적 차별이나 어린이를 함부로 다루는 어른들의 관습을 버리고 동등한 관계임을 실천하는 것에서 실현된다는 것이 동학의 기본 철학이다.

 

서평자는 이 책을 읽고 교훈이나 경험담을 민중에게, 여성에게, 학생에게, 어린이에게 억지로 가르치려들거나 강요하지 말라는 뜻을 알게 되었다. 그러면 어린이와 같이 모르는 사실이 세상으로부터 어떻게 복잡한 세상사를 배워갈 것인지 의문이 들 수 있다. 간단하다. 아이들도 혹은 학생들도 다 알고 있거나 크면 자동적으로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어른들은 그저 올바르고 제대로 돈 행동과 생각을 하면 아이들이 모방을 하고 따라서 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른들이 나쁜 짓하면 어린이도 따라서 할 것이다. 자기 자식을 아비가 원하는 어떤 방향으로 잘 키우고 싶으면 아비가 그렇게 하고 싶은 방향대로 잘 행동하면 될 뿐이다. 이런 선천성의 가능성이 바로 존재론적 동등성이다. 좀 어려운 말이지만 존재가 서로 동등해야만 비로소 존재의 생명성이 부여된다는 점에서 존재론적 동등성은 생명 존재론의 전제이다. 쉽게 말해서 생명존재론이란 일상생활에서 남녀, 부부, 계급, 직위, 나이의 차이가 사회적 차별로 이어지지 않는 철학적 토대이다.

 

특히 동학에서 생명존재론의 생명이란 풀 한 잎, 한 잎의 작은 생명이 우주의 생명을 반영하고 있다. 개인 한 사람 한 사람이 계급이나 성별, 지식이나 재산에 관계없이 누구나 생명의 소중함을 안고 태어난다는 것이다. 백성은 계몽의 대상이 아니라 백성 한 사람마다에게서 대생명의 흔적을 찾아내어 되살릴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동학의 생명존재론은 조선 전통의 성리학 전통과 결정적으로 다르다. 기존 성리학에서 대인은 소인이 지향해야할 모델이며, 거꾸로 소인은 합리적인 절차에 따라 계도되어야 할 계층이었다. 기존의 유가적 수양론에 의하면 성인의 훈교를 통해 무지한 자는 무지로부터 벗어나게 되며, 무지한 자가 훈교되지 않는다면 계속 무지한 채로 남게 될 수밖에 없다고 한다.

 

반면 동학으로 촉발된 생명존재론은 일방향적 군주정치나 성인정치의 그늘에서 벗어나 있다. 동학은 빈한한 유랑 지식인들에 의해 주도되었지만, 크나큰 인간관의 변혁을 일으켰다. 군자가 소인을 훈교하도록 정초된 성리학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동학은 세상의 도탄을 해결하려고 노력했다. 이렇게 생명존재론의 씨앗은 일방적 계몽정치를 부정한다. 오히려 개인들 즉 백성은 이미 남녀의 평등성, 아이와 어른의 평등성, 양반과 상인의 평등성의 마음을 선천적으로 구비한 상태다. 단지 그런 마음이 미발현 상태일 뿐이라는 철학적 존재론을 표명한다. 이 책에서는 이런 미발현 상태의 인격적 잠재성을 조선 양명학으로 설명하고 있다.

 

미발현의 마음을 발현되도록 도와주기만 하면 사람들은 생명과 자유를 실현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바로 조선말 생명 존재론의 고유성이며 독특성이다. 그런 변화로의 반등을 촉발하는 철학적 기반은 조선 양명학이다. 중국 명나라 시기 왕양명에서 시작된 양명학이라는 철학은 대학의 격물치지를 양지良知라고 해석했다. 즉 생명의 힘과 자유의 권리는 가난한 사람이나 부자에 관계없이 임금이나 신하에 관계없이 동등하게 이미 내재되어 있으며 그런 내재된 자기를 발견하는 힘이 바로 양지인 것이다. 자기 안에 이미 군자가 들어 있는 것이며 그래서 소인도 자기 안에서 군자를 찾아내기만 하면 되었다. 그런 양명학의 인식론은 조선말에서 일제 압정기로 거치면서 생명사상의 뿌리로 발전했다. 양명학에서 말하는 양지의 사유구조는 평등과 주체, 자립과 현존을 세울 수 있는 철학적 기초이다. 또한 양지는 양명학의 인식론적 기초인 몸과 마음이 하나 되도록 하는 생명사상의 근간인 지행합일의 논리 위에 정초되어 있다.

구체적인 사례를 하나 들어보기로 하자. 2대 교조 해월(1827-1898) 선생은 35세 동학에 입교하였는데, 입교한지 불과 2년만인 37세에 교조가 되었다. 그렇게 가능한 이유는 동학 안에 내재된 양명학에서 말하는 양지良知와 맥을 같이하는 인내천 철학이 있었기 때문이다. 선천적 양지가 있었기에 단박에 도를 깨칠 수 있는 것이고, 도를 깨치면 누구나 교조가 될 수 있다고 1대 교조 수은 선생은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람이 한울이니 사람을 한울처럼 섬기라”는 평등사상은 백성 한 사람마다 주체가 될 수 있다는 무계급의 철학을 포함한다. 나아가 “두려워하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라”(77쪽)는 말이 내 안의 시천주侍天主에 대한 확신의 표현이라고 이 책에서 잘 설명되고 있다.

 

방정환 선생의 예를 더 말해보자. 일본에서 막 돌아온 방정환 선생은 이런 동학의 인내천 철학을 처음 접했다. 그리고 방정환 선생의 심장이 휘둥그레졌었다. 이런 인내천의 철학이 어린이에게 구체적으로 실현되어야 한다고 방정환 선생이 깨달았다. 이후 그는 짧았던 인생기 내내 어린이를 위해 살았다. 철학에서 별로 혹은 크게 다루지 않은 어린이를 새로운 관점에서 조명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실제로는 새로운 관점이 아니라 원래 우리 안에 이미 양지(良知)로 있었지만 감춰져있었거나 억압되어 드러나지 않았던 관점일 것이라고 재해석할 수 있다. 그런 관점을 읽을 수 있고 덧붙여 말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진 것이 이 책을 읽는 행운이다.

 

3. 동학 말고 한국철학의 다른 주제들

 

단군교로 시작한 대종교의 창시자 나철(1863-1916)은 단군을 부흥시키는 일에 머물지 않고 일제탄압에 정면으로 맞서서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한다. 천지인, 혹은 한인-한웅-한검이라는 3의 구성체는 단순히 절대적인 구원의 길을 제시한 단순 종교적 특성을 넘어서서, 인간이 살면서 겪는 “느끼고 숨 쉬고 부딪치는” 세 가지를 가리켜 ‘세 길’이라고 부른다고 하며, 인간은 이 세 길에서 방황하며 살아가는 존재라고 했다.(112쪽)

 

황성신문을 창간한 박은식(1859-1925)은 사회진화론을 도입하여 서양과학에 친화적인 양명학자로 잘 알려져 있다. 이 책은 박은식이 말하려는 양지를 잘 요약해주었다. 양지는 주자학의 주지주의적 도덕론에서 벗어나 있으며, 오히려 맹자가 말한 측은심의 기반이라고 했다. 후천적으로 습득한 것이 아닌 내재된 도덕적 정감의 의미를 포함하는데, 공정함과 시비선악의 기준으로서 성선함의 기초라고 설명한다. 특히 박은식은 양지를 자연을 밝게 통찰하는 앎, 순일하고 거짓없는 앎, 끊임없이 유행하며 쉬지 않는 앎, 두루 감응하며 막힘이 없는 앎, 성인과 어리석은 사람과 차이가 없는 앎, 우주와 인간을 합일하는 앎이라고 쉽게 풀어주었음을 이 책에서 잘 설명하고 있다.(149쪽)

 

우리에게 민족 개념이 들어온 역사는 짧다. 그나마도 박정희 군부독재 국가주의를 옹립하기 위한 이념적 도구로서 ‘단일민족’이라는 선전구호로 왜곡되었다. 이념적 도구가 아닌 주체로서의 민족 개념을 처음으로 안착시킨 철학자는 바로 신채호(1880-1936)였다.(173-6쪽) 신채호는 성균관 박사(교수 지위)로 임용되었지만 과감히 그 자리를 박차고 나온다. 첫째 이유로서 전통이 유교적 세계관으로는 현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보았으며, 둘째 이유는 자신의 스승 신기선을 포함해서 당시 유가적 전통을 따르는 집단이 친일 행위를 하는 것을 보고 분개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외적 역사와 내적 성찰을 거치면서 신채호는 군주와 양반 중심의 일방향적 군주 사회가 아니라 백성과 민중이 주인되는 민족 개념을 형성하였다. 신채호의 민족주의는 오늘날 해석에 따르면 ‘방어적’ 민족주의에 해당한다. 민족이란 민중이 주인 되는 주체의 국민을 의미하며, 서구식으로 말하면 시민에 해당한다. 신채호는 나중에 국가 차원의 주인성보다 개인의 자유와 평등을 더 중시하게 된다. 결국 신채호의 철학적 관심은 1928년 이후 민족주의에서 탈피하고 사회진화론의 영향력에서도 벗어나서 아나키즘으로 변화한다.(190쪽) 이런 점에서 신채호의 철학은 한국현대철학에서 중요한 위상을 갖는다. 한철연 책은 신채호에 대한 기존의 이미지가 지나치게 민족주의자와 독립투사로만 부각되어 있음을 지적했다. “사회를 구성하는 각각의 주체들이 자기성찰과 자기각오를 통해 궁극의 자유를 창조하는 사유의 발판”을 신채호가 마련했다는 점에서(194쪽) 신채호 철학의 의미는 과거에 그칠 일이 아니라 미래의 지표로 될 수 있음을 이 책은 강조했다.

 

브렌타노 현상학 논문으로 경성제대 철학과를 졸업한 신남철(1907-1958)은 헤겔과 고대그리스 자연철학 연구를 지속해 왔다. 헤겔의 정신철학 연구에서 신남철은 역사철학과 인식론을 연결시켰고, 나아가 철학을 현실역사에 접목시켰다.(215쪽) 신남철은 헤겔의 정신철학을 단순한 관념의 발전이 아니라 세계와 인식주체 사이의 끊임없는 실천적 상호작용으로 해석한 점이 독특하다.(215쪽) 결국 신남철의 관심은 서구 르네상스 문화가 조선역사에 출현할 수 있는 사회적 조건을 묻는 실천적 질문이었다. 신남철은 그 답을 계몽과 인간 그리고 자유라는 세 가지 키워드에 초점 맞추었다. 1942년 7월 1일 매일신보에 실린 신남철의 “자유주의 종언” 은 그의 현실참여형 정치철학이 무엇인지를 알려준다. 그 글에서 첫째 대동아공영권 개념을 강조한다. 이 점으로부터 신남철을 비롯한 당대의 많은 지식인들이 일본의 제국주의 야욕을 세계보편주의로 오해했음을 알 수 있다. 둘째 서구 국가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위상을 가져야 한다고 했다. 셋째 국가를 떠나서는 자유를 실현할 수 없다고 했다. 넷째 자본주의를 비판한다.(226-7쪽) 이후 중국식 사회주의에 영향을 받고 월북한다. 신남철은 1948년부터 김일성종합대학에서 서양철학사를 강의하다가, 나중에 자유주의자로 낙인찍힌 후 1958년 사망했다. 결국 그는 정치적으로 남한 정부나 북한 정부에도 적응할 수 없었으며, 자유주의와 이상주의를 영원히 품고 있었던 휴머니스트였을 뿐이다.

 

총을 든 빨치산 철학자로 알려진 박치우(1909-1949)의 삶은 정말 실천철학의 범례였다. 박치우의 실천은 사회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노동인민이 자유롭고 평등하게 살 수 있는 권리를 실현하는 데 있다고 한다. 박치우는 경성제국대학 철학과를 졸업하고 숭의실업전문학교 교수와 조선일보기자로 있다가 월북했다. 그는 문학평론가이며 마르크스 철학의 학자였지만 유격투쟁의 일선에서 삶의 실천을 더 중시했다. 그는 빨치산으로 남파되어 활동하다 1949년 태백산에서 사살되었다. 그는 근대철학의 방법론을 배우고 실천하려 했던 최초의 강단철학자로 평가받기도 한다.(233쪽) 그는 현실에서 실천으로 이행하는 철학적 단계를 그의 책 <사상과 현실>(1946)에서 해명하였다. 그것은 ‘교섭적 파악’, ‘모순적 파악’, 그리고 ‘실천적 파악’의 세 단계이다. 위기의 파악과 극복은 이성에 근거하지만 실제로는 ‘실천’으로만 현실화될 수 있다는 것이 박치우의 기본 명제이다. 이를 그는 “로고스와 파토스의 변증법적 결합”이라고 불렀다.(239쪽) 철학이 이론으로만 머물 때 가장 호사스러우면서도 가장 허울에 찬 것에 지나지 않음을 박치우는 강조한다. 우리는 박치우의 실천 행로가 꼭 옳은 것이라는 평가를 내리기는 어렵지만, 최소한 철학의 할 바가 무엇인지를 박치우를 통해 배울 수 있다고 본다. “철학은 오늘. 이 땅, 우리에게 있어서 ,,,, 어떤 책임을 분담해야만 될 것인가?”라는 질문에서 박치우는 한시라도 떨어진 적이 없었음을 알 수 있다.(243쪽) 한철연은 박치우에 대한 평가를 다음의 한 마디로 하고 있다. “한국에도 사유와 삶을 하나로 만들기 위해 분투한 철학자가 있었습니다”.(267쪽)

 

이 글을 쓰는 서평자는 어렸을 적 학교에서 박정희 군부독재의 의식화 사업의 하나였던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로 시작하는 국민교육헌장을 외우지 못해 선생님에게 매를 맞은 일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그 국민교육헌장을 작성한 이가 박종홍(1903-1976)이다. 근대의 폭력적 권력이 전근대의 전제적 왕권보다 더 잔인하다는 것을 알게 해준 퇴행의 역사, 박정희의 ‘10월 유신’이라는 이름도 박종홍이 붙인 것임을 서평자도 이 책에서 처음 알았다. 박종홍은 신남철이나 박치우처럼 경성제대 철학과 출신이었으며, 1968년 서울대 철학과 교수로 평온하게 은퇴했다. 다른 한국현대철학자들이 철학과 현실을 접목시키려 시도한 지식인으로 평가된다면, 박종홍은 철학과 현실에 권력까지 접목시킨 국가주의 지식인이었다. 그의 청년 지식기는 헤겔과 하이데거 그리고 퇴계를 통해서 전통철학과 서구철학을 연결하는 데 있었다고 이 책은 말한다. 박종홍은 그의 후반기로 이행하면서 개인의 자유와 평등보다는 집단의 운명을 강조한다. 집단의 공동체적 운명이 자각과 자유를 지닌 개체로서의 ‘나’보다 선행한다고 했다. 이러한 박종홍의 입장은 그가 향후 왜 독재권력에 적극적으로 승차한 정치적 이유를 알게 해준다. 그의 철학은 보통 ‘부정과 창조의 철학’으로 이름 붙여지기도 하는데, 그 내용인즉 부정을 통해 집단성의 힘을 창조한다는 데 있다. 박종홍에게 주체는 개체가 아니라 철저히 우리 민족이라는 결론에 이른다.(294-9쪽) 해방 후 미군정 중심으로 경성제대를 편성한 ‘서울국립종합대학안’을 많은 지식인이 반대했지만 박종홍은 관여하지 않았으며 이승만 독재에 대해서도 박종홍은 묵인의 함구를 했다. 이러한 사실과 대조적으로 박정희 군사 쿠데타 이후 박종홍은 대통령교육문화담당 특별보좌관을 역임하는 둥 적극적인 권력참여를 했다.

 

씨알의 철학자로 알려진 함석헌(1901-1989)은 억압에 대한 저항으로 점철된 삶을 살았다. 젊은 함석헌의 오산학교 시절은 일제 저항의 민족적 정신과 스승 유영모를 통한 노자 철학 그리고 개신교와 세계의 문화적 보편성에 다층적으로 영향받은 시간이었다. 이후 일본 유학기에 범신론적 종교성, 평화주의, 반자본주의, 노장 사상의 현대적 해석을 통해 실천적 지식의 지평을 넓혔다. 함석헌의 철학은 평화사상과 생명사상으로 줄여 표현할 수 있다. 평화와 생명은 저항으로부터 온다는 점을 강조한 것은 함석헌 씨알 사상의 핵심이기도 하다. “비폭력, 불복종, 총단결”로 요약되는 ‘민주시민을 위한 헌장’(1974)은 앞서 말한 박종홍의 국가주의 칙령인 국민교육헌장에 정면으로 맞서는 씨알의 지표였다. 한철연의 책에 써진 그대로 씨알의 의미를 서평자가 대신 요약하면, 씨알이란 진보의 역사를 끌고 가는 주체, ‘고난의 역사와 고난을 당하는 사람들의 역사’의 주체이다. 서평자는 이 책에서 가장 기억나는 함석헌의 말이 있어서 인용한다. “저항하는 것이 사람이고, 저항할 줄 모르는 것은 사람이 아니다.”(334쪽) 서평자는 함석헌을 현대 생명사상의 기초를 다져준 지식인으로 평가한다. 나의 이런 평가는 전적으로 이 책을 읽고 나서 생겼다. 함석헌의 생명의 원리는 첫째 자연적이며, 둘째 스스로 드러나며, 셋째 환경에 맞서 고난하며, 넷째 자유로우며 능동적이다.(321-8쪽) 즉 생명 자체가 평화의 근원임을 보여준 것은 함석헌 철학의 역사적 혁명이었다.

 

4. “다시 읽는 한국현대철학의 탄생을 위하여

 

서평자는 이 책 <처음 읽는 한국현대철학>을 꼼꼼히 읽으면서 새로운 시각으로 나의 한국을 바라볼 수 있었다. 내가 몰랐던 것이 너무 많았고, 내가 아는 척 한 것이 너무 많았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 알게 되었다. 이 책은 단순히 한국의 현대철학사를 나열한 것이 아니라 내가 사는 삶의 이유를 스스로 묻게 해주었다. 철학은 답변이 아니라 질문이라는 점을 정말로 실감하게 해 준 책이었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여름휴가 동안 한번 읽어 보시도록 주변 사람들에게 강하게 추천한다.

 

한마디 더 붙여보자. 2017년 7월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여름 학회는 <동학>을 주제로 열린다고 들었다. 이번 학회의 주제를 토대로 하여 “처음 읽는 한국현대철학”에서 “다시 읽는 한국현대철학”의 탄생이 있기를 한 번 더 강하게 기대한다. i) 서구의 사유를 배제하진 않지만 스스로 창발된 한국철학, ii) 자아민족주의에 빠지지 않는 한국철학, iii) 정서적 믿음이 아닌 엄밀한 지성에서 쌓아올려진 한국철학의 탄생은 이미 이 책 “처음 읽는 한국현대철학”에서 예고된 것이기 때문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