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소 [퍼농유]

우쑵니다.

어제 광화문에 홀로 나가 나에게도 이런 감정이 있었던가를 느끼며 박근혜 퇴진을 외치며 싸돌아 다녔습니다. 그곳에서 한철연 식구들을 만나 술한잔 했습니다. 아! 이런 인연이! 빈속에 마구 쐬주를 들이켰던지라 마니 취했습니다. 노래방까지 가는 호기를 부렸지만 체력적 한계를 느껴서 인사도 제대로 드리지 않고 도망가 버리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우철이형 미안해 ㅠㅠ) 고3때에도 밤샘을 하며 공부하지 않았던 체력인지라 급격한 노화로 제대로 버티지 못했습니다.
이런 엄중한 시기에 또다시 욕 들어 먹을 짓을 하려고 합니다. 홍보질입니다. 부끄럽기 짝이 없는 짓인 줄 왜 모르겠습니까. 박최순실의 짓거리에 비한다면 새 발의 피라고 혜량해 주시기 바랍니다. 책을 한 권 출간하게 되었습니다. 책을 낸다는 것이 처음은 아니지만 이 책에는 뭔가 남다른 사연과 감회가 있습니다. 하나의 계기라고 생각합니다. 출발선상에서 다시 마음 다잡고 신발끈 매고 몸을 푸는 마라톤 선수의 심정이라고 할까요. 제목은 ‘마흔의 단어들’입니다. 살만큼 살았음에도 아직 살아야할 날들이 많이 남은 마흔들이 가진 애환들을 묶어보았습니다. 마음은 아직 젊은데 사회에서는 밀려나기 시작하기에 더 이상 젊지 않은 사정들이 절박한 마흔의 감정들을 모아보았습니다. 다음 주에 책이 나올 예정입니다. 부끄럽고 염치없지만 널리 홍보를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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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한 꼭지 올려봅니다. 페터 슬로터다이크의 [냉소적 이성비판]이라는 책을 중심으로 구성해보았습니다. 니체의 이런 말을 좋아합니다. “너희는 사자가 먹이를 갈구하듯이 그렇게 지식을 갈구하는가?” 과연 우리는 철학을 통해 진리 그 자체를 그렇게도 목말라 갈구했었던 것일까요? 회의적입니다.
페터 슬로터다이크는 이 점에 대해서 냉소적입니다. 그는 철학이 임종의 순간을 맞이했다고 선언하고 있더군요. 그러나 아직 그 임무를 다하지도 못해서 죽지 못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임종을 맞은 철학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거창한 주제들은 모두 핑계였고 신이나 우주, 주체나 객체, 의미나 무 등의 추상적 주제들은 모두 사실 아무 것도 아니라고.
슬로터다이크는 칸트의 사유, 아니 철학적 사유 자체와 접촉할 때 안게 되는 위험을 이렇게 정의하고 있더군요. 우숩지만 멋진 표현입니다. “격렬하고 급작스러운 노화 현상.” 철학을 한다는 것은 급격하게 늙어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곤 이렇게 묻더군요. “과연 지식에 대한 혈기왕성한 젊은 의지는 지금 철학에 어느 정도 남아 있는가?”
그는 이성과 비판의 힘을 통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계몽의 신화는 무너지고 있다고 진단하더군요. 전통적 이데올로기 비판은 냉소주의 앞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습니다. 이 시대는 냉소주의로 가득합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냉소주의를 계몽된 허위의식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계몽주의는 종교적 환상을 비판했고 형이상학적 허구를 비판했고 도덕적 허구를 비판했고 관념론적인 상부 구조 등을 비판했습니다. 이제 계몽된 의식은 바보가 아닙니다. 그러나 계몽되었지만 무감각해졌을 뿐 아니라 냉소적이 되었다. 어떻게 해야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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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터 슬로터다이크는 현대인들의 냉소주의에 맞서 유머, 욕설, 아이러니, 반항적 몸짓 등 고대적 냉소주의의 선구자인 디오게네스의 미덕들을 제시하더군요. 슬로터다이크는 철학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이해를 바탕으로 한 몸(physis)과 정신(logos)의 상호작용이 철학이지, 그것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철학은 아니다.” 슬로터다이크는 비판정신과 저항정신을 잃은 근대인들은 실제로 저항도 못하면서 그저 머리로만 사회적 부정의를 냉소하고 있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닐까요? 근성도 오기도 없이 너무도 허약해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시대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주저하는 허약한 사유가 아닙니다. 개 같은 곤조입니다.
그러나 지금 이 정치적 상황 속에서는 개 같은 곤조와 함께 더욱더 냉정한 사유가 필요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더욱더 교활한 정치적 상상력, 더욱더 냉정한 법적인 태도, 더욱더 강직한 도덕적 힘들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입니다.

부끄럽고 염치없습니다.

냉소

1.
이방인의 뫼르소가 정오의 태양빛이 너무 강렬하여 방아쇠를 당긴 일은 결코 이해하지 못할 일도 아니다. 모든 것이 태양 빛 아래 노골적으로 드러나서, 명명백백해지는 순간 그는 권태를 느꼈던 것은 아닐까? 이 따분한 권태가 그로 하여금 방아쇠를 당기게 했던 것은 아닐지. 아! 이 너무나도 뻔한 세상의 가증스런 노골(露骨)이란! 세상이란 고작 이런 것이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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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정오를 맞이한 40대는 그 정오의 태양 아래에서 뻔하게 그 몰골을 드러내는 자신의 인생을 바라보며 무엇을 느낄까? 뫼르소가 느낀 따분한 권태가 아닐까? 이 한낮의 뙤약볕 무기력에는 어떤 섬뜩함이 있다. 무관심, 냉담, 냉소, 불안, 분노, 탐욕, 외로움이 자리한다. 그리고 이 섬뜩한 무기력의 정체는 바로 권태이다. 내가 살아온 삶이 고작 이런 것이었단 말인가!
그러나 이 섬뜩한 권태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스벤젠(Svendsen)은 지루함의 철학이란 책에서 “존재 차원의 지루함, 다시 말해 삶 자체와 결부된 지루함은 근대에 들어서 생겨난 현상”이라고 분석한다. 근대 이전에 귀족만이 누렸던 여가의 상징이었지만 이제는 근대인 모두가 가진 특권이 되었다. 그러나 왜 근대와 함께 존재 차원의 권태가 시작되었을까?
근대는 종교의 시대에서 과학의 시대로, 신비의 세계에서 합리의 세계로 이행했던 시대이다. 그래서 신의 세계에서 이성의 시대로 전환된 것이다. 이 과학과 이성의 시대에서 세상은 정확하게 계산되고 명증하게 드러난다. 이해하지 못할 신비의 영역은 사라지고 이해 가능한 합리적인 영역이 펼쳐진다.
그런데 왜 이러한 명증하고 합리적인 세계인 근대로부터 권태가 시작할까? 어쩌면 권태란 세계의 무의미에서 오는 것이 아닌지도 모른다. 권태는 오히려 역설적으로 의미의 명백함에서 온다. 모든 것의 의미가 뻔하게 이해될 때 오히려 의미가 없다는 착각을 일으킨다. 의미의 결여에서 권태가 오는 것이 아니라 의미의 과잉에서 권태가 온다.
이제 세상은 명백해졌고, 미지의 세계는 사라져 버린다. 이제 낯선 두려움도, 흥미도, 설렘도 없게 된다. 모든 것을 드러낸 세상은 뻔해진다. 뻔해진 세상은 뻔하기 때문에 알 필요가 없어진다. 권태가 시작되는 것이다. 근대의 권태와 함께 과시적인 스펙타클한 소비의 시대가 시작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중년에 찾아오는 권태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삶을 살아볼 만큼 살아본 나이이기에 이제 세상은 뻔해진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뻔해진 세상의 권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중년들은 뻔뻔해진다. 뻔뻔함은 중년들의 특권이다. 뻔한 세상에 중년에게 찾아온 뻔뻔함, 이것은 이 시대에서 성공을 위해 필수적인 조건이 되었다.
그래서 바야흐로 뻔뻔스러운 시대이다. 모진 사람이 이기고 뻔뻔한 사람이 성공한다. 어진 사람은 바보취급 당하고 어수룩한 사람은 언제나 실패한다. 뻔뻔함은 강한 자기 확신이며 배짱이다. 일을 성취하려는 현실주의자의 추진력이다.
자신의 이익과 속내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면서도 그것에 대해 비난을 하는 사람에게 “왜 이래 아마추어처럼”하며 오히려 역정이다. 1억을 거절하는 청렴에 대해서는 “10억이면 되겠어?”라며 떠본다. 성적 유혹을 부끄러워하는 순진함에 대해서는 “왠 내숭이야, 내숭떠니 더 섹시한데?”라며 수치심을 조롱한다.
뻔뻔함은 인간의 탐욕과 욕망과 쾌락에 대한 신념으로 무장하고 있다. 너도 별 수 있겠어라는 의심에 기초한다. 이것은 인간의 도덕성과 선함에 대한 무의식적 불신에 근거한다. 이러한 냉소적 의심은 뻔뻔함의 철학적 토대다.

2.
서양의 근대적 이성이 낳은 결과는 무엇일까? 중세적 세계관을 비판하면서 합리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이 되었을까? 의외의 답안을 내놓은 사람은 페터 슬로터다이크(Peter Sloterdijk)이다. 그는 근대 문화가 가진 새로운 특질을 냉소주의(Zynismus)로 규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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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계몽주의자들이 중세적 세계관에 현혹되었던 대중들을 대하는 이데올로기적 태도는 무엇인가? “그들은 그들이 행하는 일이 무엇인지 모른다. 그러나 행한다.” 때문에 아무것도 모르는 대중은 계몽되어야 했다. 자신이 속고 있는 이데올로기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했다. 계몽적 태도는 권위적이다.
계몽을 통해 무지몽매한 대중들은 자신이 속고 있는 이데올로기의 정체를 깨닫고 계몽된 삶을 살았을까? 아니다. 슬로터다이크에 따르면 그들의 논리는 이러하다. 그들은 계몽되었다. 자신들이 모르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그런데도 여전히 그대로 행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무엇을 하는지 알고 있다. 그러나 상황 논리나 자기 보존의 욕망이 그렇게 해야 한다고 말하기 때문에 그렇게 행하는 것이다.”
근대의 계몽된 인간들은 근대 사회의 자본들이 현혹하는 이데올로기를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속이는 것을 알지만 그 이데올로기에 따라서 그대로 행한다. 근대적 인간들은 그들이 가진 이데올로기의 문제점을 비판하더라도 꿈적하지 않는다. 냉소적이 된 것이다.
자본가들의 뻔뻔한 탐욕과 염치없는 비도덕을 이데올로기적으로 비판하더라도 그들은 냉소할 뿐이다. “그래서 어쩔 건데. 억울하면 돈 벌던지.” 이 냉소주의적 태도는 단지 자본가들만의 태도는 아니다. 현대 대중이 가진 일반적인 태도이기도 하다. “그래서 어쩌라고? 어쩔 수 없잖아.”
슬로터다이크에 따르면 이런 태도는 비도덕적이지는 않다. 오히려 현실적으로 바보로만 살지 않겠다는 계몽된 인간들의 행동 방식이다. 냉소주의자는 바보가 아니다. 여러 가지 피치 못할 사정과 이유를 대면서, 그래 그렇지만 그렇게 행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슬로터다이크는 이러한 냉소주의를 ‘계몽된 허위의식’이라고 규정했다. 중세시대의 거짓과 억압의 환상에서 스스로 계몽되었다고 생각하지만 결국에는 근대적 먹고사니즘의 실존적 한계에 무릎을 꿇는다. 알고 있지만 어쩔 수 없다는 것이다.
중세의 신학적 세계관에서 근대의 과학적 세계관으로 변했다. 신이 죽은 음울한 회색빛 공간에 과시적인 스펙타클한 소비의 문화가 들어섰다. 돈이 신이 된 시대다. 그리고 돈이 신이라는 것이 환상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다. 그런데도 돈을 섬긴다.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교활한 어른이 되어야 했다. 뻔뻔함은 이 계몽된 허위의식이 낳은 어른들의 불행한 의식이다. 삶이 너무 각박해지고 있다. 각박한 세상에서 ‘계몽된 허위의식’은 냉소할 뿐이다. 그래봐야 어쩔 수 없다고 냉소한다.
문제는 계몽된 허위의식의 뻔뻔함은 스스로 고결하다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스스로 고상한 도덕적 탈을 쓰면서 유체이탈 현상이 일어난다. 뻔뻔한 사람들은 자신의 뻔뻔함이 자기 확신적 도덕에 근거하고 있다고 착각한다. 무거운 표정으로 진지한 자신의 도덕을 늘어놓곤 한다.
뻔뻔한 철면피들을 대중들은 증오한다는 뻔한 사실을 뻔뻔하게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뻔뻔한 사람들도 공적인 자리에서는 도덕적이고 근엄하다. 어느 대기업 그룹 회장은 “모든 국민이 정직했으면 좋겠다. 거짓말 없는 세상이 돼야한다.”고 심각하게 말했지만, 그 말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믿는 척하는 사람만 있을 뿐이다. 이 믿는 척하는 태도에 담긴 이데올로기는 무엇일까? 믿는 척하는 자기기만적 태도를 유지해야 안락한 삶을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결하고 깨끗하며 우아하다고 생각한다. 계몽된 허위의식의 이러한 태도를 키치(kitsch)적 삶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키치적 삶이란 무엇인가?

3.
키치(kitsch)란 단순하게 말하자면 고급예술과는 다른 통속예술이다. 천박하고 저속한 모조품 또는 대량 생산된 싸구려 예술 상품을 이르는 말이다. 모나리자 그림이 있는 시골이발소 풍경이 키치의 전형이다.
주목해야할 것은 통속 예술 작품과 관련한 키치보다는 하나의 삶의 태도와 관련된 키치이다. 키치는 바로 근대적 존재 양식이다. 신의 죽음이 선언된 근대에서 그 죽음이라는 빈 공간속에 색칠해 놓은 환상과 소비의 과시적 세계이다.
우리는 대량으로 생산되고 모방되는 다양한 상품들을 소비하고 향유한다. 귀족들이 가진 고급 예술과 삶의 양식을 근대 이후 경제적인 성공을 이룬 신흥 계급이 키치로서 즐긴다. 마찬가지로 경제적 성공을 이룬 중년들도 귀족적 삶의 양식을 키치적으로서 즐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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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이 아니라 아저씨하면 떠오르는 모습은 후줄근하고 촌티 나는 행색이다. 요즘 이런 아저씨들은 어디를 가도 환영받지 못한다. 꽃중년이 탄생하게 된 배경이다. 외모, 패션, 건강, 운동, 자기계발 등 치장이나 옷차림에 금전적 투자를 아끼지 않는다.
피부 관리, 두발, 성형도 불사한다. 몸짱은 기본이다. 적지 않은 돈이 필요하다. 꽃중년의 삶은 이제 외모에서 태도에 이르기까지 엘레강스하고 클래식하거나, 스마트하고 모던하다. 최신형 자동차를 사고, 유행에 따라 옷을 입으며, 맛집을 찾아 식도락을 즐기고, 고급 상품을 소유하고, 독특한 취미생활로 삶의 의미를 찾는다. 그것도 예술적으로. 물론 키치적이다.
계몽된 허위의식을 가진 중년들은 바로 키치적인 삶을 살고 있다. 의미를 찾으려 하지만 의미가 없는 뻔한 세상의 권태와 부조리를 키치가 메꾸고 있다. 이 키치적 삶을 살고 있는 중년의 삶의 태도가 냉소주의다. 다 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행한다.
밀란 쿤데라의 키치에 대한 정의는 이렇다. “키치는 어떤 세계관에 의해 뒷받침된 미학, 거의 철학에 가까운 것입니다. 그건 인식이 제외된 아름다움이고 사물을 아름답게 만들어 남에게 환심을 사려는 의지이며 총체적인 순응주의입니다.”
“인식이 제외되”었다는 것은 그것에 대해 의심을 제기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때문에 총체적인 순응주의이다. 순응할 수밖에 없다고 굴복하지만 거기에는 다른 욕망이 숨어 있다. “너희들만 즐기냐? 나도 좀 즐기자”거나 “너희들만 고상하냐? 나도 좀 고상하게 살아보자”는 욕망이다.
고상하게 즐기기 위해서는 세상에 존재하는 부패와 부조리와 부정의는 은폐되어야 한다. 은폐되어야할 것은 우리들의 삶의 추악함이다. 세상이 부패했고 부조리하고 부정의하다는 것 쯤 나도 다 알어. 하지만 나도 좀 즐기자.
밀란 쿤데라는 그래서 키치를 이렇게 정의한다. “똥이 부정되고, 각자가 마치 똥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처신하는 세계를 미학적 이상으로 삼는 것이다. 바로 이런 미학적 이상을 키치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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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히 말한다면 똥이 부정되는 것이 아니다. 세상의 부패와 부조리와 부정의는 부정되는 것이 아니라 은폐되는 것이다. 은폐란 세상의 청렴과 합리와 정의를 냉소하는 것이고, 다 알지만 모르는 척 무관심하게 지루해하는 것이다. 권태로운 것이다.
계몽된 허위의식은 실존적 한계를 잘 알고 있지만, 키치적 삶을 욕망하고 있다. 똥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 아니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하는 세상에서 총체적 순응주의자들인 중년은 진심으로 고상한 신사의 품격을 지니고 살고 싶어 한다. 그러나 그것은 키치적이다.

4.
계몽된 허위의식은 계몽을 통해서 해결할 수는 없다. 그들은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르는 척하면서 행하기 때문이다. 대안은 있을까? 슬로터다이크가 제안하는 바는 이렇다. 이 계몽된 허위의식의 ‘냉소주의’(Zynismus)의 대안으로 고대 희랍시대의 ‘견유주의’(犬儒主義, Kynismus)를 제안한다. 왜 그럴까?
냉소를 뜻하는 영어의 ‘시니컬’(cynical)은 원래 고대 그리스어의 ‘퀴니코스’(kynikos)에서 나온 말이다. 슬로터다이크는 현대의 시니컬한 냉소주의를 그리스어인 ‘퀴니코스’로 대응하고자 했던 것이다. ‘퀴니코스’란 ‘개 같다’는 뜻이다. 그래서 ‘견유주의’(犬儒主義)라고 번역되었다.
왜 개 같다고 했을까? 디오게네스의 삶 자체가 개 같은 삶이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사람들은 디오게네스를 개라고 불렀다고 한다. 우리도 ‘개 같다’라는 말을 욕으로 사용한다. 그러나 개는 개 같은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원리에 따라 사는 도덕적 동물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디오게네스를 개 같다고 욕을 했을 때 디오게네스는 그래 나는 개라고 말한다. 그러나 너희들은 개만도 못한 위선적인 놈들이라고 폭로했던 것이 아닐까? 개가 자연적으로 살 때 인간은 유체이탈의 위선을 범하면서도 개를 욕하며 자신의 위선을 은폐하기 때문이다.

Alexander and Diogenes exhibited 1848 Sir Edwin Henry Landseer 1802-1873 Bequeathed by Jacob Bell 1859 http://www.tate.org.uk/art/work/N00608

Alexander and Diogenes exhibited 1848 Sir Edwin Henry Landseer 1802-1873 Bequeathed by Jacob Bell 1859 http://www.tate.org.uk/art/work/N00608

똥이 없는 듯이 세상을 고결하고, 깨끗하고, 아름다운 것으로 이상화하는 뻔뻔한 사람들은 스스로를 비도덕적이거나 사악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뻔뻔한 냉소를 가지고 있을 뿐이다. 바보는 아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뚜렷한 명분이나 냉철한 논리가 통하지 않는다. 모르고 행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하기 때문이다.
슬로터다이크는 이런 계몽된 허위의식의 뻔뻔한 냉소에 대해서는 더더욱 개 같은 냉소로 맞서기를 권한다. 머리로 싸움하려고 하지 말고 직접 몸으로 보여준다. 똥을 무시하는 그들의 고상함에 대해서 똥과 오줌과 정액으로 조롱한다. 무관심한 냉소가 아니라 몸으로 보여주는 냉소를 권유하고 있다.
알면서도 모른 척 고상한 태도로 뻔뻔한 냉소를 취하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고상함에 감춰진 똥들을 폭로하면서 맞서라는 얘기다. 그들의 계몽된 이성에 맞서 육체적인 분노와 조롱으로 그들의 계몽된 허위의식을 일깨우라는 말이기도 하다.
슬로터다이크의 계몽된 허위의식에 대항하는 방법은 뻔해진 세상의 권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뻔뻔해진 중년들의 냉소와 권태와 무관심에 대항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뻔뻔한 키치에 저항하라. 그것이 디오니게스적 저항이다.
뻔해진 세상에 뻔뻔해진 중년들은 그래서 알고도 행하는 허위의식에 빠진 뻔뻔스러움보다는 디오니소스적 냉소를 실천해 볼만하다. 그래 나는 개다. 하지만 개만도 못한 너희들보다는 적어도 자연스럽다. 그러니 웃자. 이것이 슬로터다이크가 뻔뻔해진 중년에게 권하는 디오게네스적인 냉소와 유머다.

우리는 또 다른 최순실을 원하는가? [피켓2030]

건국대학교 철학과 사회철학반 일동: 이동구, 이윤하, 서동기

2016년 11월 4일

 

2016년 11월 4일의 이른 새벽, 저희 사회철학반은 철학과 학술제를 위한 논문을 쓰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잠시 작성을 중지하기로 했습니다. 학문과 진리를 사랑하는 철학도로서 도저히 말이 안 되는 이 현실을 그저 바라보기만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최순실-박근혜로 이어지는 국정농단 사태는 단순히 그들 개인의 도덕성과 판단력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이 사건은 대한민국 사회가 이제까지 추구해왔던 가치에 대한 결말이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저희 사회철학반은 우리 사회를 향해 철학만이 할 수 있는 말을 하고자 이렇게 장문의 글을 쓰게 된 것입니다.

“무엇이 무겁단 말인가? 짐 깨나 지는 정신은 그렇게 묻고는 낙타처럼 무릎을 꿇고 짐이 가득 실리기를 바란다.”
–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정동호 역, 책세상 출판, 1부 <세 변화에 대하여> 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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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으면 저희는 질문에 ‘질문을 던지는 것’이라고 대답합니다. 당연해서 의심조차 들지 않는 것에 ‘그것이 정말 그러한가?’라고 질문을 던지는 것이 철학의 목적이라고 말입니다. 최근 ‘최순실-박근혜 게이트’ 사건에 국민들의 분노가 일어났습니다. 스스로는 아무 결정도 할 수 없었던 박근혜 대통령은 자신의 모든 핵심적 권한들을 최순실씨에게 위임하였습니다. 지금 모든 분노는 최순실씨를, 그리고 박근혜 대통령을 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과연 무엇 때문에 분노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리고 분노의 화살은 올바르게 향하고 있을까요?

이명박 전 대통령과 지금의 박근혜 대통령은 우리가 직접 만든 대통령입니다. 그들은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 주겠다고, 잘 살게 해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들이 정의하는 잘 사는 삶은 곧 부자가 되는 것이며, 이를 위해서 경제를 살려야 한다고 주장해왔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선택하였고, 이는 곧 ‘부자가 되는 것=잘 사는 삶’에 동의한 것입니다. 그들을 지지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렇다면 당신 또한 ‘부자가 되는 것, 풍요로운 삶=잘 사는 삶’에 동의하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입니까? 우리는 이러한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부자가 되고, 성공하는 것이 정말로 잘 사는 삶일까요? 우리는 무엇을 꿈꾸고 있습니까? 어떻게 살고 싶습니까? 우리의 그 대단한 꿈, 청춘, 행복한 삶이란 무엇입니까? 우리는 성공을 목표로 살아갑니다. 공무원이 되기를, 안정적 직장을 갖기를 꿈꾸고 우리의 자식들과 친구들에게 성공신화를 가르칩니다. 그러나 우리시대의 성공한 자들을 보십시오. 무당의 말을 받아 적고 있던 고시 출신의 청와대 엘리트 행정 관료들을 보십시오. 새파란 아이들 300명이 죽었는데도, 뉴스에 나오는 게 지겹고 노란리본이 지겹다고 생각하고 있는 우리의 모습을 보십시오. 혹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용인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합니다.

누군가는 이 혼란한 시국을 해결하기 위해 정치적 결단으로 거국중립내각을, 또 어떤 이는 다음 대선 주자를 애타게 기다립니다. 어쩌면 이 혼란을 수습할 인물이 나타나기를 바라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우리 스스로에게 질문하지 않았으며,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새로 나타난 인물들이 만약 똑같은 실수를 되풀이 한다면? 오늘의 절망적 현실을 해결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좌절과 분노를 되풀이하고, 또 다른 구세주를 기다릴 것인가요? 이렇듯 우리는 언제나 구원자를 기다려왔습니다. 우리는 훌륭한 구원자가 선택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는 스스로를 구원하기보다, 구세주를 선택하는 것을 ‘자유’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기보다, 자유로운 선택을 통해 ‘훌륭한’ 인물들에게 삶을 맡겨왔습니다. 하지만 묻고 싶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남아있는 ‘자유’는 무엇입니까? 여전히 우리는 대단한 자유를 갖고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남은 자유란, 어떤 기업에 들어가든지 정년을 채우지도 못하고 희망퇴직을 당해 치킨집을 차릴지 고민할 자유거나, 비정규직으로 내일의 불안을 견뎌내며 어떤 컵라면을 먹을지 선택할 자유, 공무원 시험을 준비할지 어떤 스펙을 쌓을지 고민할 자유들이 남아 있을 뿐입니다.

“일단 먹고 살아야지”라는 명분하에, 금전적 성공과 안정적 삶만이 우리의 유일한 목표로 남아있는 건 아닐까요? 정작 지금 우리에게는 “어떻게 하면 성공할 수 있을까?”하며 탐욕과 욕망으로 자신을 몰아가는, 스스로 노예가 될 수 있는 자유밖에는 남아 있는 게 없을지도 모릅니다. 철학자 스피노자는 정념에 이끌리고, 정념에 예속되는 삶을 노예의 삶이라고 말합니다. 마찬가지로 물질적 욕망으로부터 기인한 ‘우리가 가진 자유’라는 것도 실상 자유라고 할 수 없습니다. 욕망을 통한 자유가 아닌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합니다.

우리는 일상 속에서 욕망을 통해서만 자유를 느낍니다. 그리고 우리의 욕망을 방해하는 사소한 것들에 분노합니다. 카드를 거절하고 현금지불을 요청하는 업주, 퉁명스러운 태도를 보이는 편의점 알바생, 노약자석에 앉아있는 젊은이, 자꾸만 비싸지는 물가,  성심껏 써낸 자소서가 휴지조각이 되는 일들처럼. 우리는 우리가 일상 속에서 마주치는 사소한 것에 분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분노는 기껏해야 자신의 눈앞에 있는 업주와 알바생, 젊은이, 물가, 면접관들을 향할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조금 더 넓은 관점에서 다르게 바라봐야 합니다. 우리의 조그마한 분노가 과연 무엇에 의해서 만들어졌는지를 말입니다. 우리의 초라한 분노가 생겨난 까닭은 작은 몫이라도 얻어내지 못하면 살아갈 수 없는 현실 때문입니다. 이러한 절박한 상황을 만들어낸 것은 내 눈앞에 있는 알바생과 업주, 젊은이 같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가 선택한 바로 그 구세주들이 만들어 온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작은 일들에 다투고 있을 때, 정작 우리의 마땅한 몫은 탐욕스러운 구세주들이 차지해왔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부당한 처우를 당했던 것은 단순히 우리가 나약한 ‘개, 돼지’라서가 아니라, 우리가 그러한 탐욕스러운 구조를 허락했기 때문입니다.

수만 명의 관중들이 모인 스포츠 경기장을 상상해보십시오. 멋진 경기와 훌륭한 기예를 펼치는 선수들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옵니다. 하지만 경기는 그런 스타플레이어들을 통해서만 구성되는 것일까요? 경기장을 진정으로 완성 시킬 수 있는 사람들은 그들을 응원하고 바라보는 관중들입니다. 관중들이 없다면, 경기는 남들보다 조금 특출한 기술을 가진 사람들의 몸짓일 뿐입니다. 관중들의 시선이 있을 때 비로소 선수들은 인정받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대한민국은 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이 지닌 힘을 통해 구성된 나라입니다.

우리는 이명박 전 대통령, 박근혜 대통령이 제시한 좋은 삶에 대한 정의와 성장과 성공에 동의했고 그들을 지탱해왔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오늘의 이 사태를 만들어낸 동조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로 지극히 평범한 우리는 이러한 시대를 바로잡을 수 있는 힘을 지닌 사람들입니다. 그토록 힘겹게 얻어낸 87년의 승리는 우리 스스로가 주인임을 제도적으로 확인해낸 업적입니다. 그리고 이 승리를 통해서 만들어진 헌법은 우리가 국가의 주권자이며, 그 권력의 근원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 앞에 놓인 상황은 절망적입니다. 이렇게 글을 쓰고, 시위를 한다고 해도 변화는 없을 것이라는 허무와 회의 역시 존재합니다. 하지만 지금 아무것도 하지 않고 이 시국을 구원할 구세주를 기다리는 우리는, 또 다른 최순실을 기다리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이렇게 고분고분한 우리는 그들의 가장 든든한 지지자가 될 것입니다. 최순실씨와 박근혜 대통령께 깊은 감사의 말을 전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덕분에 우리가 더 이상 이렇게 짐이 실리기를 바라지만은 않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우리의 자유는 어떤 자유여야 하는지, 우리는 과연 어떤 세상에 살고 싶은지, 우리가 추구하고자하는 가치가 무엇인지, 우리가 꾸는 꿈은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상상합시다. 그리고 현실이 우리의 상상들과 반대로 나아가고 있다면 단호하게 저항해야 합시다. 다시, ‘상상력에게 권력을!’ (L’imagination au pouvoi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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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왓슨, 무신론자의 시대 [자연과 문화 사이에서] -1

 

최종덕의 종횡무진 책읽기 : 서평연재 -1

 

피터 왓슨, 무신론자의 시대, 책과함께 2016년 5월 출간 (Peter Watson, The Age of Nothing, 2014) 

 

무신론자의 시대 : 이 책 피터 왓슨의 <무신론자의 시대>는 원래 영국판 책 제목을 <무의 시대>로 달고 나왔었다. 그러나 미국판에서 <무신론자의 시대>로 제호를 바꾸었다. 이 책의 제목으로 이 책을 무신론을 강조하는 내용으로 단정지면 안 된다. 무신론도 의미가 있겠지만 인간에게 본성적으로 내재된 종교심이라는 것이 있음을 은근히 보여주려는 책이다. 하버머스와 네이글로 시작하여 니체와 산타야나마르크스와 하이데거 그리고 융과 빅터프랑클에 이르기까지 현대 20세기 철학자들을 통하여 종교와 무신론이 서로 모순관계가 아니라 공존관계임을 보이려고 한 것이 저자 왓슨이 이 책을 쓴 목적이다.

예이츠가 본 니체 : 니체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는 무신론의 성경이지만, 그런 책도 당시 니체의 책의출판을 맡은 인쇄소에서 니체 책보다는 찬송가집 50만권을 인쇄하는 일정 때문에 니체 책 출간이 한참 뒤로 밀려났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상징적으로 종교와 반종교이 당시 분위기를 표현한 것이다. 니체의 초인을 저자 왓슨은 존재론적으로 해석하기보다는 방향적으로 해석하고 싶었다. 니체의 초인을 설명하기 위하여 니체를 직접 건드리지 않고 예이츠William Buttler Yeats가 본 니체로 대신했다.(1902) 예이츠는 니체를 “가혹한 니체”와 “온화한 니체”로 구분했다고 한다. 가혹한 니체란 “물기없는 눈으로 바라본 세계”와 “무시무시한 인간의 내적 본성”을 강조한 니체이다. 반면 니체는 다른 모습을 가지고 있다고 예이츠는 강조하고 이 책의 저자 왓슨은 더 강조한다. 그런 다른 모습의 니체를 예이츠는 “온화한 니체”라고 했다. 온화한 니체가 바라본 세상은 다음과 같다. 전체적 세계는 혼돈스럽고 모순에 가득차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익한 세계라고 한다. 적대자들 사이의 짧은 용서가 존재한다고 한다. 끊임없는 새로운 선택의 자유는 그것 자체로 ‘기꺼이 맞이하는 기쁨’이다. 삶이 비극임을 인정하지만 그짧은 순간순간에도 신성한 무엇인가가 담겨져 있음을 생각한다. 예이츠는 그런 상태를 황홀한 긍정이라고 했다고 한다. 나는 에이츠를 읽지 않아서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하겠지만 이 책의 저자가 에이츠의 니체 해석을 지나치게 황홀경의 존재론으로 만든 것 같다. 그 이유로서 예이츠는 나이가 들어 신비과학occult science과 민족주의로 빠졌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산타야나의 탈속세 : 또 한 명의 미국 현대철학자 산타야나가 있다. 산타야나의 반초월주의 철학은 이미 당시의 실증주의와 과학주의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산타야나의 논거는 매우 정교했다. 그에게 초자연성은 없으며 따라서 영혼도 없다. 그는 철학적 자유주의자로서 절대적이고 완전한 실재의 관념을 싫어했다. 그는 관념론의 철학을 인정하기는 하지만 그 철학은 하나의 견해일 뿐이라는 것이다. 관념론도 지나치면 신비주의 가지에 지나지 않는다. 산타야나는 신비주의를 철학적 논의 자체의 붕괴로 간주했다. 그러나 저자 왓슨은 교묘하게도 산타야나에서 신성성을 골라내었다. 산타야나가 삶의 가치를 속세가 아닌 것(unworldiness)에서만 찾을 수 있다는 명제를 골라낸 것이다. 즉 탈속의 범주에서 아름다움이 있고 그 안에서 정신성이 내재된다는 산타야나의 명제를 왓슨은 부각시켰다. 그러나 내가 산타야나를 아는 범위에서 왓슨의 강조점은 초점을 약간 벗어났다. 그가 말하는 정신성이란 미학적 정신성에 국한한다. 학문적 혹은 합리적 정신성은 여전히 세속적 합리성에서 찾아진다.

아방게르 : 1차 세계 대전 직전 프랑스의문화적 풍토를 말한다. 이에는 프랑스혁명의 저항정신이 포함된다. 나는 이 책에 나온 그 저항정신의 질문들을 아래처럼 요약했다. 1)성숙한 어른이 아이보다 과연 우월한가? 2)유머와 아이러니(풍자)의 차이가 있을까? 3)꿈의 의미는 무엇인가 4) 모호하지만 상징적인 그리고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는 다중성이 무엇인가? 왓슨은 다중성과 아이의 개념을 이성으로 접근하지 못하는 어떤 미지의 영역으로 유도하려는 글쓰기 전술을 보이지 않게 노출시켰다.

 

마르크스의 혁명 : 저자의 마르크스 해석을 더 보자. 경제학자며 철학자로서 마르크스의 저서 <자본>은 아래의 주장을 담았다고 말한다. 1)노동자는 자신이 생산한 부가 많아질수록 더 가난해진다. 2)더 높은 임금을 받게 되어도 더 가난해진다. 즉 인간 존재로서 더 궁핍한 소외로 빠지고 만다는 것이다. 3) 결국 소외는 노동에서 생겨난다. 왓슨은 소외의 기원을 다음처럼 설명한다. 1)노동의 댓가는 노동자 자신에게 돌아오지 않고 오히려 노동자를 지배한다. 2)생산행위자체가 노동자의 존재론적 본성을 빼앗는다.(소외시킨다) 3)시장이 형성되면서 인간이 다른 인간을 소외시킨다. 4)결국 노동은 노동자를 노동자가 속한 문화에서 소외시킨다. 나아가 저자 왓슨은 마르크스가 본 사회를 기술하고 있다. 첫째 어느 시대에서나 지배계급의 사상이 지배적인 사상으로 된다는 점을 지적한다. 즉 물리적 힘을 지배하는 계급이사회를 지배하는 지식권력의 주류가 된다는 점을 말한 것이다. 둘째 인간은 오로지 혁명행위를 통해서만 자기 자신을 정화하고 순화된 새로운 인간으로 만들 수 있다고 말한다.(책 10장) 왓슨이 왜 마르크스를 설명했는지 이유가 분명하지 않다. 확실한 것은 마르크스에 대한 전형적인 비판 중의 하나가 마르크스의 혁명조차도 유토피아와 같은 이상적 구원에 해당할 뿐이라는 것인데, 왓슨도 마르크스를 이런 식으로 보고 있다.

 

하이데거의 현존재 : 다 알다시피 우리 인간은 세계 속에 던져진 존재라는 것이 하이데거의 표제어이다. 즉 우리는 우리의 세계와 존재를 스스로 선택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 세계에 잘 맞추어 잘 사는 방법을 터득해야 한다. 세계가 우리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세계에 맞춰야 한다 다시 말해서 인간에게 고유한 본성이나 본질은 무의미하며 존재하지도 않는다고 하이데거는 말한다. 본래적 삶이란 허구이며 세계 앞에서 우리는 유한한 작은 존재일 뿐이다. 그러한 유한성을 깨닫고 세계 속에 던져진 우리가 세계의 다원성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일 선택하는 것이기 보다 선택될 수밖에 없는 일을 결단이라고 말하며, 우리는 결단 외에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삶을 살고 있다. 이러한 현재적 인정은 “여기서 그리고 지금”이라는 세계에 살고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다. 결국 우리는 세계를 건드리는 것이 아니라 세계에 잘 맞추는 길을 찾아야 한다. 하이데거는 이런 길을 ‘염려’Sorge라고 표현했다. 세계를 염려하는 울의 하이데거의 태도는 세계를 관조해야 한다는 초연함으로 우리를 끌고 가려한다. 세계라는 말 대신에 사회라는 말을 대입하면 우리는 세상에 대해 탈정치화 되어야 한다는 견해로 귀착된다. 하이데거는 바로 이 지점에서 초연함의 종교성과 만나게 된다는 것이 저자 왓슨의 해석이다. 왓슨의 이런 해석은 아주 명쾌하다.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 (1927)에서 존재는 두 가지 양상으로 드러난다고 했다. 하나는 변화를 인정하는 미래지향의 존재(Sein-Zu)이며, 다른 하나는 죽음으로 가는 존재(Sein-Zum-Tode)이다. 여기서 저자 왓슨은 하이데거의 존재를 현실적 존재로 이해할 수도 있지만 보이지 않는 어딘지는 모르지만 어디로 가야하는 ‘향함’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한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저자 왓슨은 추상세계를 거부한 하이데거에서도 종교적 향함의 태도를 볼 수 있다고 한다. 다른 말이지만 왓슨은 하이데거의 인간적 태도에 대하여는 아주 부정적이다. 하이데거의 문체가 조악하여 읽기 어려운 것은 둘째치더라도 하이데거가 나치에 부역한 사실과 나중에 후설과 아렌트에 대해 비열한 처신을 한 사실을 저자 왓슨은 잘 꼬집어 내었다.

 

, 원형에 숨겨진 종교 감정 : 집단의식 형태의 무의식에는 인간을 깊이 이해할 수 있는 내재된 패턴이 있으며, 그런 패턴을 융은 ‘원형’이라고 했다. 원형을 이해하는 몇몇 개념을 나열한다. 인간에 씌여져 착각과 허상을 일으키는 페르소나가 있다. 남성성은 남성의 것, 여성성은 여성의 것이라는 이분법에서 벗어나 남성성과 여성성은 혼재되어 있다고 한다. 남성에게도 여성성이 있으며 여성에게도 남성성이 있다는 것이 융의 중요한 인간이해방식이다. 그런 의미에서 남성 안에 가능한 여성성을 아니마라고 하며 여성 안에 가능한 남성성을 아니무스라고 한다. 요즘 통속심리학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외향성과 내향성이 구분도 융이 설정해 놓은 것이다. 그림자 개념은 인간의 이면을 관찰하는 중요한 통로이다. 여기서 왓슨은 융의 자아 개념을 강조한다. 융이 말하는 자아 개념 자체가 바로 신을 믿으려는 존재라고 왓슨은 해석한다. 융은 종교에 대해 애매한 태도를 보인다. 종교 자체를 부정하지만 사람의 종교 감정을 이해하는 일이 신경심리학적 치료에 도움이 된다고 한다. 왓슨이 보기에 융이 말하는 종교 감정을 거부할 수 없는 인간의 속성이라고 강조하는 듯한데, 저자 왓슨도 이 부분에서 분명하게 말하지 않고 애매한 태도로 기술하였다.

 

듀이, 종교와 종교적 : 실증주의자로서 듀이는 실증 범주를 벗어난 초자연적인 것을 부정한다. 당연한 일이다. 초자연주의를 인식의 방해물로 규정하는 것이 듀이의 기본 입장이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이 책의 저자 왓슨은 듀이의 종교이해를 새롭게 관찰한다. 듀이는 초자연적 계시종교를 거부한 것이지 사람 마음 속에 있는 종교적 성향을 거부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듀이가 보기에 종교는 하늘의 문제를 푸는 것이 아니라 이 땅의 문제를 풀어야한 한다고 한다. 종교는 사람들 사이의 공통된 문제에 직접 닿아 있어야 한다. 또한 그런 일이 가능하다. 사람 마음속에 더 잘 살기 위해 경험에 내재한 힘과 가치를 보여주는 시적인 상징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시적인 상징의 힘이 바로 종교라고 왓슨은 말한다. 결국 왓슨이 보기에 실증주이자 듀이조차도 종교를 버릴 수 없었다는 것이다.

 

빅터 프랑클의 높이심리학 : 빅터 플랑클의 강제수용소 일기는 우리 내면의 반성과 성찰을 가져다 준 생명의 고전이다. 독일 점령 아래 3년간 감금된 경험을 전쟁이 끝나자마자 고향인 빈으로 돌아와 9일 만에 집필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프랑클은 고통의 참상에서 인간의 원형을 보았다. 고통 안에서 멈춘 것이 아니라 고통으로부터 인간의 자유와 고귀함을 발견하였다. 그가 말하는 자유란 삶의 의미이며, 그 의미란 자기 개인에서 벗어나 세계로 나아가는 통로이며, 그 통로에서 자신의 존재를 재발견할 수 있었다. 자기존재의 발견이 곧 자기실현이다. 자기실현은 자기 초월이다 자기 초월의 심리학을 높이심리학이라고 표현한다. 융의 깊이심리학에 대비하여 표현한 말이라고 한다. 그 ‘높이’란 인간으로 하여금 영성을 찾아가는 내면의 에너지라고 저자는 말한다. 다시 말해서 빅터프랑클의 심리학은 단순한 행동주의나 유물론적 심리학이 아니라 영성의 심리학임을 저자 왓슨은 간접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초월성에 대한 내재적 충동 : 하바마스는 종교의 기원을 결여된 것에 대한 의식이라고 말했다.(Habamas 2008,”Ein Bewusstsein von dem, was fehlt”) 언어분석철학으로 시작한 현대 영미철학자 네이글은 스스로 무신론자이지만 초월적인 것에 대한 충동성은 어쩔 수 없는 인간의 본능이라고 말했다. 네이글에게서 생명은 이중적이다. 생명은 물질적 현상이면서도 목적론적 실체라는 것이다. 왓슨은 네이글의 이러한 이중적 태도를 매우 긍정적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왓슨은 네이글의 이중성을 지나치게 호의적으로 혹은 편향적으로 해석했다. 분석철학자 네이글이 젊었을 때는 전형적인 유물론자였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변했듯이 네이글도 나이들어서 신비주의자로 된 전형적인 사례이다.

네이글은 무신론을 유지하지만 세계 안의 목적을 인정한다. 네이글은 그런 종교적 성향의 목적론을 ‘자연목적론’이라고 했다. 저자 왓슨은 네이글을 통해서 종교와 무신론의 구분에서 벗어나 공존가능의 논리를 세우려 했다. 그의 태도는 무신론과 종교의 공존보다는 애매한 상태의 병립으로 드러나고 있다. 그는 노년에 들어서 진화론을 부정하면서도도 기독교 창조론의 새로운 버전인 <지적설계론>과도 의도적으로 거리를 두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네이글의 <마음과 우주>(Mind and Cosmos, 2012)라는 책이 지적설계론을 지지하는 디스커버리 연구소로부터 찬사를 받았다. 서평자가 보기에 노년의 네이글은 무신론의 주장을 포기한 것이다. 어쨌든 인간에게는 보이지 않는 무엇에 대한 공포와 동경을 함께 가지고 있는 것은 진화론적으로나 심리학적으로 아니면 인류학적으로도 사실인 듯하다.

 

논리와 시 : 저자 왓슨은 시의 성찰적 기능을 크게 강조한다. 시는 일종의 세속적 계시에 해당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미국윤리학자 리처드로티는 유명하다. 그는 불행히도 노년에 췌장암에 결렸다. 그러면서 그는 그의 전공분야에서 약간 벗어난 논문 “실용주의와 낭만주의”를 썼다. 그 글에서 로티는 셀리의 시를 언급하며 <시의 옹호>Defence of Poetry를 다루었다. 로티가 한 말이다. “종교도 아니고 철학도 아닌 시이다.” 그는 말년에 들어서 논리에서 시로 전환했다. 왜 나이가 들면 논리를 싫어할까? 이 책은 그런 전환을 찬사했지만 최소한 나는 그러고 싶지 않다.

 

피터 왓슨, 무신론자의 시대, 책과함께 2016년 5월 출간 : 원제 Peter Watson, The Age of Nothing, 2014

피터 왓슨, 무신론자의 시대, 책과함께 2016년 5월 출간 : 원제 Peter Watson, The Age of Nothing,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