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의 망상과 분열에 대하여: 과학철학자가 보는 윤석열의 망상과 중독, 그리고 시급한 우리 문제 [윤석열 탄핵과 우리의 민주주의 – 시대와 철학] ②

윤석열의 망상과 분열에 대하여

 

과학철학자가 보는

윤석열의 망상과 중독,

그리고 시급한 우리 문제

최종덕(독립학자, philonatu.com)

원글 출처: https://philonatu.com/home/mainpage_view.php?id=361

 

윤석열의 기이한 행동 양식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그가 손바닥에 왕王자를 새기고 정치 권력을 쥐면서 한국사회의 정치-경제-문화-군사 모든 분야에서 퇴락은 시작되었다.

그의 정치적 미숙함에서 비롯된 권력 망상은 일제부터 이어져 온 기득권 집단이 잠재적으로 조직해 온 기회주의적 기획물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검찰에서 국회까지 그리고 보수언론에서 대재벌까지 연쇄된 그들의 권력 유지 전략은 상시적이고 포괄적이며 철저히 자기중심적이라서, 그들은 이명박에서부터 박근혜를 거쳐 윤석열이라는 욕망의 캐릭터를 조립하여 말초 권력을 확장해가고 있다.

국회, 행정부와 사법부 및 군부까지 골고루 퍼져있는 권력 욕망 중독자들은 그들의 집단 아바타를 만들기 위한 중독 증상을 발현시키고 있다. 그 증상은 바로 난폭성과 기만성이다. 난폭과 기만의 증상을 일일이 설명하기보다 간단한 사례로 그들의 의도를 직파할 수 있다.

첫째, 난폭의 증상이다. 판사 출신 어느 인물은 윤석열의 계엄 행위가 “유혈사태”까지 간 것이 아니라서 내란 행위로 볼 수 없다고 말했다. 끔찍할 정도로 섬뜩한 그러한 괴성은 피의 폭력성을 그대로 보여준다.

둘째, 기만의 증상이다. 무소불위 권력을 쥔 검찰과 안락함을 갖춘 대학교수에서부터 극우 유튜버에 이르는 사람들은 정적들을 비난하는 데 한결같이 ‘위선자’라는 기만적 프레임을 악용하고 있다. 자신들의 대죄를 묻어 놓은 채 상대방 일상생활의 소소한 흠결을 찾아내어 악성 공격에 몰두하는 그들의 모습은 자기-기만의 전형이다.

낭자한 선혈의 폭력이 아니라서 괜찮다는 난폭과 기만이라는 그들의 일상적 성정은 윤석열 개인의 심리를 이용하여 오늘의 끔찍한 내란을 유도하였다. 그렇게 결탁된 윤석열의 심리상태를 분석하는 일이 지금 상황에서 당면한 문제일 수 있다.

 

심리철학의 관점에서 윤석열의 심리상태는 다음의 다섯 가지 행동 양식으로 해석될 수 있다.

(1) 폭압적 행동 양식

(2) 악성 중독 증상

(3) 사회적 소통 장애

(4) 자기기만의 인지 부조화

(5) 주술 의존 망상장애라는 다섯 가지 행동 양식이다.

 

(1) 폭압적 행동 양식

폭력성과 타자 억압성은 윤석열 행동 전반에 깔린 심리기저이다. 심리적 폭력성 행동 양식은 외상 후 스트레스장애PTSD의 후유증이 거나 과도한 자기중심적 인물이 상당한 권력을 소유했을 때 나타나 는 전형적인 증상이다. 윤석열의 경우, PTSD 사례로 보기보다는 후 자 즉 과도한 자기 중심성 심리가 그의 폭압적 행동 양식의 밑에 있다고 파악된다.

이런 행동 양식의 특징으로서 자기통제력을 갖추지 못한 경우가 많고 상대를 적반하장으로 공격하는 이중적 행태들이 있다. 동시에 자기 자신의 행동 양식에 대해 고치거나 변화하려는 태도를 일체 부정한다.

 

(2) 악성 중독 증상

윤석열의 술 중독증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술 중독은 다른 양상의 중독 증상을 일으키는 기폭제로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술 중독은 언어폭력 중독과 자기제어 불능증을 배가시킨다.

술좌석에서 대장처럼 으쓱거리는 행동 양태들은 술좌석이 아닌 시간과 공간에서는 이성적 행위가 아닌 언어폭력 증상 그리고 술 마시는 자아와 술 못 마시는 자아가 분리되는 이인화 증상(離人症, Depersonalization)을 유도한다.

 

(3) 사회적 소통 장애

소통장애의 윤석열은 남들과 정서를 공유하는 데 결정적인 결핍상태에 있으며 나아가 공공성 있는 대외적 활동을 피하거나 심각하게 서툴다. 이미 대중매체에서 익숙히 봐왔듯이 윤석열은 대화상대의 질문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거부하거나 혹은 2.5 개 이상의 짧은 문장을 논리적으로 이어나가지 못하는 커뮤니케이션 장애 social communication disorder를 보여주고 있다.

사회적 소통 장애는 상황 인지 불능을 수반한다. 상식적으로 독재자는 거대권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관련자들에게 작은 권력을 적절히 분산하는 포섭전략을 사용하는 데 반해 윤석열의 독재방식은 소통 장애로 인한 포섭력을 갖추지 못해서 결국 그 스스로 나락에 빠질 수밖에 없다.

그의 권력은 그 자신의 심리구조 때문에 오래 갈 수 없다는 뜻이다. 사실 이런 설명은 너무나 일반화된 것이라서, 이를 조금이라도 눈치채는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윤석열 권력의 파멸을 쉽게 짐작하기도 했다.

 

(4) 자기기만의 인지부조화

인지편향의 특징 중 하나는 인지편향 난관에 닥쳤을 때 탈출하는 방법이 자기-기만으로 나타난다는 점이다. 반대 증거가 아무리 많이 드러난다고 해도, 논리적으로 말도 안 되는 상황에 부딪혀도, 양심에 벗어난 부정불법이 가득해도 자기만이 만든 자기합리화 속에서 자신을 변명하고 타인을 부정한다.

윤석열의 심리구조에서 자기기만의 인지 부조화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 대외경제력의 손상과 국민의 피해를 가져온 공적인 문제이다. 그리고 손상과 폐해를 시급히 회복해야만 대한민국이 다시 살 수 있다.

 

(5) 주술 의존 망상장애

윤석열이 지금까지 버텨올 수 있었던 이유는 그만큼 주변에 주술과

미신을 권력의 도구로 악용한 사람들이 많다는 데 있다. 대중을 위한 정치, 국민을 위한 정치 대신에 자기 이익을 위한 가짜 정치를 선택한 정치인 일반은 필연적으로 미신을 쫓게 되어 있다.

가짜 정치인은 자신조차도 규정하지 못하는 불안감에 쫓기게 되기 때문이다. 내면의 불안감에 쫓겨 외면의 미신을 쫓게 된다는 것이 주술의존 망상장애의 현상이다.

정치인을 포함한 다수의 권력자들이 점집을 찾는다는 것은 이미 오래전부터 잘 알려진 사실이다.

전 세계를 놀라게 한 12.3 계엄을 공모한 이들 가운데 아예 무당이나 주술인이 있는 것으로 밝혀졌을 정도로 무당 정치의 괴이한 권력 구조가 실감 나게 연회되었다.

미신과 권력을 혼재시킨 개인적 망상들이 그들 사이에서 묵시적 합의로 변질되면서 거대한 집단적 주술 상징계로 정착된 것이 한국 권력사회의 특징이다. 이제는 그들 각각이 믿고 있는 미신을 실행할 수 있는 실질 권력을 누가 더 많이 가지느냐의 암투일 뿐이다.

왕王의 망상이 갑자기 튀어나온 것이 아니라 주술적 집단 상징계로부터 보호받은 셈이다. 그리고 왕의 망상이 강할수록 뭇사람들의 상상은 갈가리 찢긴다.

주술 의존성은 망상과 자기 통제 불능의 일상을 대신하는 특징을 지닌다. 일상의 생활인이 재미 삼아 점집에 방문하는 것과 다르게 대통령의 주술 의존성은 국가의 정체를 무너트리고 공공성의 파멸을 가져온다.

 

자행된 폭압과 소통 장애, 미신과 중독 증상들을 그 스스로 인지하지 못한 채 거꾸로 자신의 불법과 폭력, 부정과 독단을 확대 재생산하려는 오도된 윤석열의 의지를 방치하는 것은 곧 국가의 시민으로서 시민 됨의 역할을 포기하는 것과 같다.

윤석열 개인 차원의 심적 증상은 윤석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대한민국 온 국민의 문제이기 때문에 하루빨리 윤석열의 행동 양식과 의지 양태가 발현되지 못하도록 대통령 행위를 시급히 단절시켜야 한다.

시간이 정말 급하다.

그런 다음 술중독이나 주술중독 치료 등 그에 대한 개인적 심리치료를 나중에 천천히 하도록 배려하면 더 좋다.


문구: 조배준, 편집: 정희수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시국선언〉 영상|2024년 12월 14일 [윤석열 탄핵과 우리의 민주주의 – 시대와 철학]

사단법인 한국철학사상연구회(이하 한철연)는 12월 3일 윤석열의 불법 비상계엄을 독재자의 야만적 폭거이자 반란으로 규정하는 대다수 시민들과 뜻을 함께하여 2024년 12월 12일 시국선언문을 작성하였습니다.

시국선언문은 회원들의 동의를 얻어 웹진〈ⓔ시대와 철학〉에 게시(http://ephilosophy.kr/han/57059) 하였으며 이어 12월 14일(토) 숭실대학교에서 거행된 제66회 정기학술대회에 연효숙 회원(전 한철연 회장)의 주도로 참석한 회원들이 함께 시국선언문을 낭독하고 탄핵구호를 외쳤습니다.

같은날 오후 4~5시 경 국회에서는 찬성 204명, 반대 85명, 기권 3명, 무효 8명으로 윤석열 탄핵소추안이 가결되었습니다.

한철연은 헌정을 유린하고 민주주의를 훼손한 윤석열을 즉각 체포하여 구속할 것을 요구합니다. 또 잘못된 권력의 범죄에 복무한 김건희 및 그 부역자들을 철저하게 처벌할 것을 검찰을 제외한 수사기관에 강력히 요구합니다.

유튜브 출처 https://youtu.be/ITJ3EVBCcSw?si=E3IVogLdVwNfJJyI


▼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시국선언 전문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시국선언문〉 [윤석열 탄핵과 우리의 민주주의 – 시대와 철학]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시국선언문〉1

 

 

지난 12월 3일 밤 우리는 사상 초유의 사태를 겪었다민주 공화국의 대통령직을 수행하던 자가 계엄을 선포하고 군을 동원해 국회를 봉쇄하여 정치적 반대자들을 처단할 것을 명령한 것이다이는 민주 공화국을 부정하는 독재자의 야만적 폭거이자 명백한 반란 행위다.

민주 공화국을 전복하려는 반란 수괴의 야수적 책동에 경악한 시민들은 황급히 국회로 달려가 맨몸으로 반란군의 진입을 막았다시민들의 용기 덕에 국회의원들은 반란의 시계를 잠시 멈출 수 있었다.

그러나 야수의 밤은 끝나지 않았다반란 수괴와 하수인들은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며 반전의 기회를 엿보고 있다. 1212 군사 반란 이후 45년이 지난 오늘 반란 수괴 윤석열은 자신의 범죄를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한 고도의 통치 행위이자 구국의 결단이라고 강변하며 지지자들의 결집을 호소했다자유와 민주가 살해당한 순간이었다.

이 자의 썩은 내 나는 발악에 대법원과 국민의힘은 기다렸다는 듯이 호응하고 나섰다반란군의 총칼은 막았지만반란 동조 세력의 반동적 음모는 사그라지지 않았다더구나 군 통수권은 아직도 윤석열에게 있다이 자가 외환을 구실로 내란 범죄를 덮으면서 영구 집권 시도를 하지 않으리라고 누구도 확신할 수 없다방심은 이르다.

동은 아직 트지 않았다야수의 밤을 끝내고 민주의 아침을 맞이하려면 반란자들의 2차 책동과 암약을 막아야 한다우리는 민주 시민의 이름으로 다음을 명령한다.

하나탄핵 가결을 방해한 국민의힘은 국민에게 사죄하고 탄핵 가결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것은 물론반란 수괴 윤석열과 그 부역자들을 출당시켜라.

하나검찰은 내란 범죄 수사에서 당장 물러나라내란 범죄 수사권이 없는 검찰의 개입은 공소 기각을 노린 것이라는 의혹을 사고 있다더구나 검찰은 이미 국민의 믿음을 잃어버린 지 오래다.

하나경찰과 공수처는 반란 수괴 윤석열과 내란 중요 임무 종사자들을 긴급 체포하라.

하나헌법재판소는 시민들의 민주적 의지에 부응하여 탄핵 심판을 통해 윤석열을 파면하라.

하나보수 언론은 언론 중립을 구실로 반란 옹호론을 묵인하거나 교묘히 확산시키려는 시도를 포기하라.

이 모든 것은 특정 정치 엘리트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시민들의 직접 참여를 통해 민주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반란 수괴와 하수인들의 처벌로 만족해서는 안 된다민주화 이후 사상 초유의 헌정 유린을 경험한 우리는 87년 헌법의 취약성을 그냥 두고 볼 수 없다현재의 헌정 체제는 내란을 획책한 대통령이 선출되는 것을 저지하는 것은 물론이요그것을 지지하거나 묵과하려는 이들이 지배권을 행사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대한민국 국민은 오인된 자유주의가 입헌 민주주의 체제를 치명적으로 파괴할 수 있다는 점을 목격했다우리 국민은 시민의 민주 역량을 폄하하고 직접 민주주의의 계기를 봉쇄하는 과두적 민주주의 체제가 어떻게 독재자의 준동을 용인하고 입헌 민주주의 질서를 위기에 몰아넣는지 절절하게 경험했다.

이제 우리는 새로운 입헌 민주주의 체제를 세워야 하는 헌법의 순간에 직면했다새로운 입헌 민주주의 체제는 오염된 자유를 평등과 연대의 정신으로 정화해야 한다시민들이 입법사법행정 엘리트들의 통치를수탈적 자본의 지배를 민주적으로 직접 통제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다양하게 마련하고헌법으로 보장함으로써 위기에 처한 민주주의를 구제해야 한다.

야만의 밤국회 앞에서 야수들의 이빨을 맨몸으로 막으며 몰아낸 민주 시민들의 기백과 지혜를 보라반란군의 총이 두려워 국회를 버리고 도망간 의원들에게반란 수괴의 위세에 질려 반대할 엄두도 내지 못한 장관들에게이태원에서 죽어간 청춘들에 대한 애도조차 금지하는 지도자들에게 나라를 맡기는 체제가 과연 건강한 것인가더는 우리 국민의 용기와 지혜를 의심하지 말라우리 국민을 모욕하지 말라민주 시민의 용기와 지혜를 믿으면서 가장 민주적인 공화국을 세우도록 하자야수들이 날뛰는 야만의 밤을 몰아내고 누구도 지배하지 않고누구도 지배받지 않으며누구도 저버리지 않는 참다운 민주 국가의 아침을 맞이하자.

민주 시민 만세!

민주주의 만세!

민주공화국 만만세!

2024년 12월 12

사단법인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일동

 


 


윤석열이 내팽개친 열 가지 가치, 함께 되찾아 가야 할 열 가지 가치 [윤석열 탄핵과 우리의 민주주의 – 시대와 철학] ①

2024년 12월 3일 밤,

윤석열이 내팽개친 열 가지 가치,

함께 되찾아 가야 할 열 가지 가치

 

조배준(숭실대)

 

공화국 : 비상계엄을 빙자해 사리사욕을 채우려 한 친위쿠데타의 어설픈 시도

국민 : 주권자들의 명령을 거부하고 국민의 생명, 안전, 자유를 담보로 내란을 획책한 엄중한 죄

민주주의 : 자유민주주의를 운운하며 민주 헌정을 유린한 군사테러

책임 : 국가 위상과 외교를 박살 내고, 세금과 국력을 낭비하고, 경제지표를 위기에 빠뜨린 대표자의 망국적 배임

정치공동체 : 민족분단과 민중의 피, 땀, 눈물 위에서 구축한 역사의 진보에 대한 신뢰를 깨버리고, 지속 가능한 미래를 위한 민중 자치의 상상력을 짓밟는 반역적 도발

평화 : 일상의 안녕과 시민성의 문화를 경악, 공포, 분노의 감정적 소모로 소진케 하는 심리적 만행의 무도함

치유 : 군부독재의 국가폭력으로 인한 역사적 트라우마에 대한 고통을 모독하는 몰역사성

인권 : 시민의 기본권과 헌법적 자유를 말살하더라도 폭력으로 지배하면, 정권의 거짓과 멍청한 탐욕을 뒤덮을 수 있다고 믿었던 전 사이비 법률가의 피폐한 양심과 참담한 인격

정의 : 시민사회의 상식과 절차적 정당성을 무시하고, 실체적 진실을 조롱하고도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고 인식한 퇴행적 무지성

인간성 : 사람이라면 마땅히 가져야 할 인륜적 판단과 인간에 대한 존중을 저버린 파렴치하고 몰염치한 공공의 적

 

그리고 그 모든 것들에 비친,

대의민주주의의 한계와 87체제의 질곡에 갇힌 우리 시대에 대한 서늘한 얼굴의 자화상


(사)한국철학사상연구회(이하 한철연) 여러 회원은 2024년 12월 3일 화요일 밤 기습적으로 자행된 윤석열의 불법 비상계엄 사태를 심판하여 현재 대통령직에 있는 윤석열과 그의 부역자들에게 책임을 묻고 윤석열 탄핵과 체포·구속운동에 민중과 시민의 이름으로 동참할 것입니다. 우리는 탄핵 정국과 그 이후까지 무너진 민주주의 회복을 위한 실천으로 이 지면에 현 사태를 대하는 철학·정치적 견해를 연이어 기록합니다. 민주주의가 파괴된 날이 민주주의가 더 명확하고 새롭게 건설되는 시작임을 스스로 잊지 않도록 새기는 것입니다.

문구: 조배준, 편집: 정희수

상명통(喪明痛) [시대와 철학]

상명통(喪明痛)

※ 이 글은 <경인일보>에 연재하는 [전호근 칼럼]의 2024년 4월 15일자 기사를 저자와 언론사의 허락으로 본 웹진에 게재함을 알립니다.

 

전호근(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장)

 

에둘러 말하지 않겠다. 오늘은 세월호 참사 10주기다. 꼭 10년 전 이날 일어난 참사로 안산 단원고 학생들을 포함하여 모두 304명의 귀중한 생명이 희생되었다. 사고 자체의 비극성뿐 아니라 참사 이후 이 나라에서 벌어진 온갖 비인간적인 일들은 유가족을 비롯한 온 국민들의 마음을 갈기갈기 찢어 놓았고 지금까지도 지울 수 없는 상처로 남아 있다. 돌이켜보면 누구나 마찬가지겠지만 내 기억 속 4.16도 그날 아침 다음의 보도를 접하면서 시작한다.

“안산 단원고등학교 학생들은 전원 구조되었고 사망자는 없는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철렁했던 가슴이 진정되는가 싶었지만 얼마 안 가 오보라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사고 후 선장과 승무원들이 먼저 탈출했고, 구조가 시작되었지만, 정부의 무능과 안이한 대처로 ‘가만히 있으라’는 말에 따라 선실에 머물러 있던 학생들은 대부분 차가운 물 속에서 목숨을 잃고 말았다. 이후 정부는 진상을 은폐하고 책임을 회피하는 태도로 일관하다가 급기야 애도와 추모를 방해하는가 하면 심지어 국가 기관을 동원하여 유가족을 사찰하는 등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만행을 저질렀다. 기운 건 세월호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막말과 패륜이 난무하기 시작했다. 사고 당일 현장에 가서 실종자 가족들이 있는 곳에서 라면을 먹은 교육부 장관을 비롯하여 정부의 기본 입장은 교통사고에 지나지 않는다는 막말, 구조헬기를 구조에 이용하지 않고 경찰 간부를 실어 나르느라 소중한 생명을 잃은 일, 발견된 유해를 유가족에게 알리지 않고 은폐한 일, 국가배상금을 둘러싼 저급한 왈가왈부, 단식하는 유가족 앞에서 햄버거를 먹으며 조롱하던 패륜의 무리, 국가의 책임을 회피하고 사건의 진실이나 실체를 가리고 은폐하려고만 들던 정부까지, 온통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넘쳐났다.

옛날에 세종 임금이 신하들에게 “부모 돌아가신 것과 자식 잃은 것 중 어떤 것이 더 섧은가” 하고 물은 적이 있다. 그때 모든 신하가 부모님 돌아가신 것이 더 섧다고 대답했는데 황희 정승만은 말이 없었다. 임금이 다시 물었더니 황희가 대답하기를, “글쎄, 어느 것이 더한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다만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는 종남산(終南山, 서울 남산의 옛이름)이 보였는데 자식이 죽으니 종남산이 보이지 않습디다.” 했다고 한다.

이 글은 함석헌 선생이 1975년 4월 5일에 아이를 잃고 슬퍼하는 김태현에게 보낸 위로 편지의 한 대목이다. 선생 또한 일찍이 어린 딸을 잃고 슬픔을 겪은 적이 있었기에 자식 잃은 슬픔이 어떤 고통을 주는지 잘 알고 있었으리라.

자식 잃은 슬픔으로 눈이 보이지 않게 되는 아픔을 상명통(喪明痛, 눈이 보이지 않게 되는 고통)이라 한다. 이 말은 옛날 공자의 제자 자하가 자식을 잃고 슬퍼하다가 마침내 눈이 멀고 말았다는 데서 유래했지만, 어찌 자하뿐이랴. 모든 부모의 마음이 다르지 않을 것이니, 상실의 아픔이 마침내 보이는 것의 상실에까지 미쳐, 눈은 뜨고 있으되 바라보는 그것이 산인지 들인지, 초목에 푸른 잎이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게 되고 마는 것이다. 황희의 대답처럼 돌아가신 부모는 앞산을 바라보며 그리움을 달랠 수 있지만 먼저 간 자식에 대한 그리움은 그렇게 달랠 수 있는 것이 아닌 성싶다.

참사 이후 10년의 세월이 흘러 다시 4월이 되었다. 시퍼런 바다에 기울어 잠겨 들어가던 배를 그저 바라보기만 했던 그날 그 시간의 기억은 박제되어 모두의 마음에 묻혔다. 봄이 오면 바다가 일렁이듯 우리 마음이 일렁인다. 사무치는 그리움이다. 지난 토요일, 한동안 서랍에 넣어두었던 노란 리본을 다시 꺼내 달고 세월호 기억문화제에 참여해 함께 울고 함께 노래하며 함께 웃었다. “세월이 지나도 우리는 잊은 적 없다”는 구호를 몇 번이고 되뇌었다. 그날 이후 시간이 멈춰버린 유가족들의 마음을 헤아려 본다. 덜어내거나 옅어지지 않는 아픔은 위로할 길이 없고 그리움은 옅어지지 않는다.

<경인일보 제공> – 출처: http://www.kyeongin.com/main/view.php?key=20240416010001725

헤겔 바깥의 헤겔 ―오늘의 우리 현실과 헤겔― ② [시대와 철학]

헤겔 바깥의 헤겔

―오늘의 우리 현실과 헤겔― ②

 

문성원(한철연 회원, 부산대 철학과)

 

이 글은 2023년 11월 18일 부산대에서 열린 한국헤겔학회 학술대회에서 발표한 글입니다. 저자의 기고로 게재합니다. 앞에 이은 두 번째 글입니다.

 

 

 

1. 많은 분이 비슷한 경험을 했으리라 짐작합니다만, 청년 시절 제게 헤겔은 무엇보다 ‘자유’의 철학자였습니다. 세계사는 “자유의식의 진보의 역사”라는 말이 강한 인상으로 남았지요. 진보의 순서를 문명권에 따라 공간적으로 배치한 것이나 물질적·경제적 동인을 제대로 고려하지 못한 것 따위는 맑스 같은 후대의 사상가들에 의해 극복되는 시대적 한계로 여겨졌죠. 이런 지연 효과를 고려하면, 자기의식의 원리에서 출발한 자유는 산업화로서의 외화와 그것의 자주적 전유를 그 전개 형태로 담고 있다고 해석될 수 있을 겁니다. 그럴 경우, 자유는 산업화와 자주를 아우르는 근본 틀로 취급될 여지를 갖겠지요.

2. 그런데 이 ‘자유’는 최근에 우리가 여러 번 목도했다시피 내용 없는 공허한 울림으로 되뇌어지기도 합니다. 이럴 때 자유가 운위되는 양태는 매우 자의적어서, 실제로는 자신의 좁게 겨냥된 과녁만을 노릴 뿐, 주변의 중요한 문제들을 수습하거나 해결하는 데는 무책임하며 그런 의미에서 역설적으로 자유롭죠. 흔히 말하는 대로 아집과 무지와 무능의 소치라 하겠습니다. 다만, 저는 이런 모습이 나타나는 데에는 애당초 자유 개념과 결부되어 있는 자기 중심성 탓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유주의에서 자유는 보편적 권리로서의 자유를 의미한다고 합니다만, 알다시피 이때의 보편은 실상 시대적으로 또 집단적으로 한정된 ‘보편’이죠. 게다가 우리가 익히 보다시피 그런 특정한 잣대마저도 보편적으로 적용되지 않습니다. 덕택에 지금 우리는 권리와 법이 그야말로 ‘자유롭게’ 전횡되는 현실을 아프게 경험하고 있는 것이지요.

3. 이런 모습이 자유가 완성되어 가는 과정에서 보이는 부정적 면모일 따름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오늘날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구태일 겁니다. 이념의 외화와 자기복귀라는 틀이 한 때 호소력이 있었던 건 그것이 자기 확인과 자기 확장에 대한 사회의 전반적인 열망에 부응했기 때문이겠죠. 물론 아직도 그런 생각을 고집하고픈 집단이 있겠으나(아마 북한―적어도 현재의 주도적 지배층―의 경우는 여전히 이런 범주에 들어가지 않을까 합니다), 그렇게 하려면 그동안 드러난 숱한 문제들을 도외시할 수밖에 없을 거예요. 주체는 단일하지 않을뿐더러 궁극적으로 단일해질 수도 없다는 것, 각각의 주체는 재현의 실패를 지시하며1 그런 실패가 계속되는 한에서 요구된다는 것, 또 주체의 자유란 이 같은 실패가 일회적이지 않게 하는 선택의 기제이고 이것이 바로 자유의지―집단적 자유의지(만일 그런 것이 있다면)를 포함해서―의 실체라는 것, 등등이 그간의 사태에 대한 반성을 통해 도출된 일반적 결과들이라고 생각합니다.

4. 그렇다고 자유의 여지를 확대하고 공고히 하려는 활동이 중요하지 않다는 소리는 아니에요. 확실성을 보장받으려는 과도한 목적론적 구도를 포기하고 자기중심적 외화가 초래하는 감당하기 어려운 결과들을 충분히 경계한 채로 그러한 노력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볼 뿐입니다. 그리고 그러할 때, 시대에 뒤떨어진 목표에 얽매인 상태에서가 아니라면 과연 ‘자유’가 주도적 모토로 내세워질 수 있는지, 오히려 퇴행적 발상에 이용당할 소지가 많지 않은지 의심스러워 하는 것이죠. 더러 얘기되듯 누구의 자유인가, 어떤 자유인가를 구체적으로 문제 삼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유 자체의 본질에 대해서, 자유 개념의 특성에 대해서 따져보는 일이 필요하다는 겁니다.2

5. 외화로서의 산업화와 자기복귀로서의 자주를 주된 계기로 삼아 지나간 일들을 꿰어보려 했다고 해서 미래에 대해서도 같은 틀에 갇혀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겠죠. 오히려 그동안 불거진 예기치 못했고 해결의 실마리를 제대로 발견하지 못한 문제들에 초점을 맞추어 보는 일이 긴요할 겁니다. 그 같은 과정을 통해 새로운 문제틀의 수립 가능성을 모색할 수 있을 테지요.

 

 

1. 여러 문제 가운데 제가 특히 흥미롭다고 여기는 우리 현실의 사안으로는 무엇보다 세대 문제를 들고 싶군요. 그중에서도 근래에 두드러진 세대 간의 불평등 논란이 관심을 끕니다. 세대의 문제는 시간적 추이와 관련된 문제고 그런 점에서 변화, 발전의 문제이기도 할 테지만, 변화의 속도가 느린 사회에서는 신세대와 구세대의 갈등이 일반적인 형태로 논의될 따름이었겠죠. 혁명적 격변의 시기에도 체험의 단절적 변화가 세대의 구분에 새겨지겠으나, 우리의 경우는 유례를 찾기 힘든 압축적인 산업화와 민주화의 경험을 한 탓에 세대 간의 특성이 더욱 뚜렷하게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2. 이제 산업화 이전 세대는 거의 사라지고 있다 하겠고, 70년대까지 젊은 시절을 보내고 지금은 확연히 노년층에 접어든 산업화 세대와 87년을 전후한 민주화 운동의 주역이라 할 이른바 386(이 이름이 등장했던 1990년대초 당시에 386이었지 현재는 586을 거쳐 686에까지 이른) 세대, 그리고 민주화 이후 성장기를 보낸 X, Y, Z의 알파벳 세대 등 갈수록 구분도 촘촘해지는 세대들이 오늘을 함께 살아가고 있죠. 여기서 특히 세기의 전환기를 어려서 겪은 이들, 대체로 1980년대 중반쯤에 태어난 Y세대에 해당하는 이들을 M(밀레니엄) 세대라고 하고, 이들과 1997년 외환 위기 이후에 태어난 Z세대를 묶어서 MZ 세대라 부르는 것 같군요. 그런데 불평등과 관련한 논란의 초점은 현재 사회의 중심 세력이라 할 386세대와 2,30대 청년층을 이루는 MZ세대 사이에 있는 듯합니다.

3. 『불평등의 세대』라는 책을 쓴 사회학자 이철승 교수는 한국의 세대를 ‘자원 동원 네트워크’라고 이해합니다.3 단순히 경험과 기억을 공유하는 집단 이상이라는 거죠. 특히 그는 386세대가 성공적으로 이 네트워크를 활용하여 한국사회의 주도층이 되었으며, 그 다음 세대들을 소외시키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철승 교수가 드는 386세대의 성공 요인들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어요. 첫째, 베이비 붐 세대라서 수가 많다는 점, 둘째, 민주화 운동에 힘입어 균질성과 응집력을 획득했으며 학생-시민-노동조직의 연계를 이루어 내었다는 점, 셋째 이른바 세계화에 편승한 고도성장기에 사회에 본격적으로 진출했다는 점. 그런데 다른 한편, 이 세대는 세계화의 신자유주의 바람에 휘말리고 만 탓에―IMF 외환위기가 그 단적인 징표겠죠― 시장이 야기하는 불평등한 ‘신분의 위계화’에 빠져들게 되었고, 이를 극복하지 못한 채 결국 ‘권력의 과두제화와 독점’에 안주하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 청년 세대가 불만을 가지고 반발하는 주요 이유라고 할 수 있을 테죠.4

4. 이철승 교수는 386세대와 다른 세대의 소득격차가 커져가고 있고, 세대간 정치권력의 분포 비율 면에서도 이 세대 이후 젊은 세대가 차지하는 비중이 줄어들고 있다는 점을 여러 통계 도표를 통해 제시합니다.5 하지만 여기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지요. 그 주된 논거는 세대간 불평등에 비해 모든 세대 내의 계급간·계층간 불평등이 더 심하며, 따라서 우리 사회의 불평등 및 갈등의 주요 원인은 세대 격차에 있지 않다는 겁니다. 오히려 세대간의 갈등을 부추기고 이용하려는 세력이 문제라는 것이지요.6 저는 이 논란에서 어떤 편을 들 만큼 우리 사회의 실증적 사실에 밝지 못합니다. 양측이 내놓는 통계들은 나름으로 자기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설득력이 있다고 보여요. 다만, 세대내의 불평등 역시 크다고 하더라도 386이라는 1960년대 출생 세대의 경제적·정치적 비중이 다른 세대가 같은 연배일 때에 비해 다소 큰 것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로서는 이런 차원과는 조금 다른 결의 사태에 주목해 보고 싶군요.

5. 저출산의 문제야말로 심각한 세대의 문제이고 또 세대간의 문제가 아닐까요? 노령층을 부양해야 할 젊은 세대의 부담이 늘어난다든가 한국 사회의 소멸이 우려될 지경이라든가 하는 얘기만이 아닙니다. 그렇게 예상되는 결과 이전에 자식 세대가 출산을 기피하게 만든 부모 세대의 책임을 먼저 문제 삼아야겠죠. 그리고 지금의 청년 세대가 처한 상황의 엄중함에 주목해야 할 줄 압니다. 저는 이것이 앞서 말한 공백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산업화가 낳은 문제들이 집약되어 나타난 증상이 저출산이고, 여기에 대한 대책의 부재가 사회 발전 방향과 비전의 공백으로 이어지며, 이것이 윤석렬 정권의 탄생과 같은 현상을 낳았다는 것이지요.

6. 저는 몇 해 전에 저출산이 ‘생물학적 파업’이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7 작년에는 영국의 BBC가 ‘한국은 출산 파업 중’이라는 표현으로 우리의 저출산 사태를 보도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지요.8 사전의 협의도 주도하는 조직도 없는, 그런 점에서 무의식적이지만 집단적인 저항인 셈입니다. 무엇보다 오늘의 청년 세대를 낳은, 그리고 현 상황을 만든 세대를 향한 (아마 오늘의 발표자들 대부분이 여기에 해당하지 않을까 싶은데) 항의겠지요.

7. 산업화한 국가들 대부분이 저출산 현상을 보인다는 것이 변명거리가 될 수는 없을 겁니다. 지난 몇 세기에 걸친 급속한 인구 증가를 생각하면 장기적으로는 인구수가 주는 것이 바람직한 일일지 모르죠. 하지만 인류세의 위기를 개체수 조절로 극복하는 선구적 모습을 보인다고 자위하기에는 출산을 포기하게 되는 이유들이 너무 팍팍하고 출산율의 저하가 너무 가파릅니다. 그 원인들에 대해서는 차고 넘칠 만큼 많은 논의가 있지만, 한 가지 분명해 보이는 것은 이러한 사태가 급속한 압축 성장의 대가라는 점이죠. 극심한 경쟁과 수도권 중심의 과밀집 등이 저출산의 원인으로 흔히 지목되는 그 결과지요. 여기에 덧붙여 저는 축약된 과정 탓에 욕망에 대한 반성과 조절의 기회가 없었거나 부족했다는 것도 무시하지 못할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말하자면 서구의 68혁명에 해당하는 계기가 생략되어 버렸다고 할까요. 이런 면을 고려하지 않으면, 늘어난 소득에도 불구하고 더욱 돈에 모든 가치 평가의 기준이 집약되는 오늘의 분위기를 설명하기 어렵다고 봅니다. 이 점에 대해서도 386세대는 책임을 면하기 어려울 거예요. 비록 압축적 과정 때문에 오히려 지연된 민주화라는 과제에 치여 스스로는 어쩔 수 없었던 면이 있다고 해도 말이죠.

8.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요? 또 이 ‘어떻게’는 오늘 우리의 주제인 헤겔 철학과 어떤 관련이 있을까요? 아마 헤겔이라면 혹 압축적 산업화에 대립하는 계기로 탈성장을 내세우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얼핏 들긴 합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 탈성장 담론이 자리잡을 여지는 얼마나 될까요? 그것은 주변 강대국들의 영향으로 여전히 고초를 겪고 있는 한반도 주민의 일부가 그 반대의 극을 추구하기 위해 영세중립국을 내세우는 일9보다는 더 현실적인 시도일까요?

9. 이창동 감독의 영화 <버닝>(2018)에는 두 개의 원작이 있습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헛간을 태우다」(1983)가 직접적 원작이지만, 무라카미의 그 단편이 제목에서부터 윌리엄 포크너의 “Barn Burning”(1939)을 염두에 둔 것인 데다가, 이창동 감독 자신도 포크너의 그 작품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아예 영화 한 장면에 그 소설이 실린 포크너의 책이 등장하기까지 합니다. 주인공인 종수(유아인 분)가 포크너의 소설을 좋아한다고 말하고 그 말을 들은 벤(스티브 연 분)이 그 책을 구해 카페에서 읽고 있는 것으로 나오죠. 그거야 어쨌든 이 세 작품은 다 같이 헛간(<버닝>의 경우 비닐하우스)을 태우는 걸 모티브로 하고 있어요. 하지만 세 작품의 배경이 다르듯, 태운다는 행위의 의미도 조금씩 다릅니다.

10. 포크너의 헛간 불태우기는 소작농의 저항을 표현하죠. 지주에게 헛간은 대단한 재산은 아니지만 쓸모없는 것도 아닙니다. 몰래 불 지르고 적당한 손해를 입히기에 적합한 장소지요. 그래서 그 일은 추적당하고 재판받는 자못 심각한 사태에 이르기도 합니다. 반면에 무라카미의 경우에는 헛간은 “태워지기를 기다리는” 것으로 묘사되죠.10 적어도 그것을 태우는 소설 속의 부유한 젊은이에게는 말입니다. 그는 있어도 그만이고 없어도 그만인 헛간, 그러니까 완전히 무가치한 것은 아니지만 사라져도 별 지장이 없는 헛간을 골라두곤 마음 내킬 때 몰래 태웁니다. 아니, 그렇게 한다고 얘길 하죠. 소설에서 이 헛간은 그가 별 부담 없이 사귀는 젊은 여자와, 그러니까 있어도 없어도 좋을 그런 여자와 암시적으로 겹칩니다. 이창동의 영화 <버닝>에서도 비슷해요. 돈 많고 세련된 젊은이 벤(스티브 연 분)이 주기적으로 태운다는 비닐하우스와 그의 일시적 애인인 해미(전종서 분)가 겹치죠. 그런데 큰 차이는 <버닝>에서는 태우는 행위가 거기에서 그치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11. <버닝>의 주인공 종수는 무라카미 소설의 화자(話者)와 마찬가지로 소설가(정확히는 소설가 지망생)이기는 하지만, 쿨한 분위기의 전자와 달리 농촌 출신의 투박함을 잃지 않은 청년이지요. 그래서 그는 태워짐에 분노하며 결국 태우는 자를 태웁니다. 쓸모없음을 처리하는 자를 처리하죠. 물론 영화 마지막의 이런 장면들은 종수가 쓰는 소설 속의 사태라고, 그러니까 종수의 희망이 영상으로 드러난 것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가능할 겁니다. 어떻든 <버닝>은 이렇게 저항을 재도입하죠. 포크너가 묘사한 소작농의 저항은 이제, 사회가 꼭 필요로 하지 않는 잉여적 존재로 전락할 위험에 놓인 청년 세대의 저항이 됩니다. 이 저항이 무엇을 목표로 하는지는 분명치 않습니다. 우리 현실에서도 아직 그렇죠. 출산율 저하는 어쩌면 소극적 저항으로 보이지만 자신의 삶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회의 미래를 태우는 극단의 저항으로 연결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1. “보통 사람도 자동차나 PC 같은 개인 소유 기계는 통제할 수 있겠지만, 대형 기계 시스템에 대한 통제권은 극소수 엘리트의 손에 쥐어지게 될 것이다. 오늘날과 비슷한 상황이지만, 거기엔 두 가지 차이점이 있다. 진보된 기술 덕분에 엘리트는 대중에 대해 더 강화된 통제권을 갖게 된다. 그리고 인간의 노동이 불필요해진 탓에 대중은 불필요한 존재, 즉 체제에 떠넘겨진 쓸모없는 짐더미가 되어 버린다.”11 이것은 ‘유나바머’ 테어도르 카진스키의 선언문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그는 십수년간이나 미국 몬태나주 숲 속에 숨어 지내며 기술문명을 중단시키려는 목적으로 십여차례에 걸쳐 폭탄 테러를 저지르다 1996년 체포되었던 인물이죠(무기형을 선고받고 수감 중에 금년 6월 숨을 거뒀지요). 카진스키에 견해에, 특히 그의 반기술주의 방법론에 찬성하는 것은 전혀 아니지만, 그의 문제의식에는 동조할 수 있는 부분이 꽤 있다 싶어요.

2. 사실, 청년 세대의 집단적 불안감에는 자신들의 존재 가치에 대한 의구심이 강하게 자리 잡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것이 이전과는, 그러니까 소외되고 착취를 당하더라도 스스로의 활동에 분명한 가치를 부여할 수 있었던 시절과는 크게 달라진 점이 아닌가 해요. 코인에 대한 열풍도 외모에 대한 지나친 관심도 이처럼 가치의 기준이 불확실해진 데 따른 것이 아닐까 짐작해 봅니다. 그렇다면 이런 불안감을 해소해 줄 수 있는 길이 있을까요? 그리고 그것은 헤겔 철학과 어떤 관련이 있을까요? 유감스럽게도 여기에 대해 제가 자신 있게 답을 내놓을 처지는 아닌 것 같군요.12 저로서는 이렇게 어설프고 산만한 문제 제기를 하는 것으로 그치고 다른 분들의 발표에 귀를 기울여야 할 듯합니다.

3. 끝으로 덧붙이자면, 저의 이 부족한 발표에 ‘헤겔 바깥의 헤겔’이라는 제목을 붙여본 데에는 오늘의 상황이 헤겔 철학의 태생적 배경과는 확연히 다르다는 판단이 작용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젝은 “헤겔을 넘어선 헤겔”13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던데, 아마 외적 조건보다는 내적 특징의 발전과 연속성에 더 무게를 둔 것이겠죠. 저는 오늘날의 철학은 외부에, 바깥의 변화에 좀 더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봅니다. 그러면서 설명과 의미 부여의 틀을 짜나가야겠죠. 그것이 제가 주제넘게 떠올려 보는 오늘의 헤겔 모습입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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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헤겔 레스토랑』, 앞의 책, 469쪽 참조.

  2. 외람되지만 저는 오래 전부터 이런 문제에 관심을 가져 왔습니다. 졸저 『배제의 배제와 환대』, 동녘, 2000 참조.

  3. 이철승, 『불평등의 세대』, 문학과지성사, 2019, 33쪽 이하 참조.

  4. 이 책이 조금만 더 늦게 나왔더라면(출간일은 2019년 8월 9일인데요), 조국 사태를 이 불만 표출의 대표적 사례로 연결시켰을 법합니다.

  5. 이철승, 『불평등의 세대』, 문학과지성사, 2019, 125쪽 이하, 또 70쪽 이하 참조.

  6. 대표적으로 신진욱, 『그런 세대는 없다』, 개마고원, 2022 참조.

  7. 졸저, 『철학의 슬픔』, 그린비, 267쪽.

  8. https://m.khan.co.kr/world/world-general/article/202208262158001#c2b

  9. 「한반도 영세 중립화 선언」 참조.https://docs.google.com/forms/d/e/1FAIpQLScTw8byRcRmOEwZHZeg2TBgsPN7LBrsOaupmykENb-cgnZ74Q/viewform

  10. 무라카미 하루키, 「헛간을 태우다」, 『반딧불이』, 권남희 옮김, 문학동네, 2014, 68쪽.

  11. 테어도르 카진스키, 『산업사회와 그 미래』, 조병준 옮김, 박영률출판사, 2006, 111쪽.

  12. ‘만듦의 문명’에 대비되는 ‘즐김의 문명’에 대한 전망과 기대는 제가 단편적으로나마 곳곳에서 계속 피력해 온 것이지만, 이 자리에서 거론하기는 어렵겠습니다.

  13. “Hegel beyond Hegel” ― 이것은 그의 책 『분명 여기에 뼈가 있다』(정혁현 옮김, 인간사랑, 2016. 원서는 Absolute Recoil, Verso, 2014)의 3부 제목입니다.

헤겔 바깥의 헤겔 ―오늘의 우리 현실과 헤겔― ① [시대와 철학]

헤겔 바깥의 헤겔

―오늘의 우리 현실과 헤겔― ①

 

이 글은 2023년 11월 18일 부산대에서 열린 한국헤겔학회 학술대회에서 발표한 글입니다. 저자의 기고로 게재합니다.

 

문성원(부산대 철학과)

 

 

1. 지금부터 약 반세기 전 루치오 콜레티는 루이 알튀세르의 헤겔 해석을 가르켜 “헤겔을 읽은 지 매우 오래되어서 헤겔에 대한 기억이 대단히 희미해진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주장”1이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알튀세르가 헤겔에게서 ‘주체도 목적도 없는 과정’을 그 사상의 핵심으로 간파해낼 수 있다고 주장한 데 대한 평이었지요. 제가 이 자리에서 이 얘기를 먼저 꺼낸 것은 우선, ‘헤겔을 읽은 지 오래되었다’는 말이 제게도 해당한다는 생각이 들어서입니다. 저는 1980년대 초에 정신현상학을 비롯해서 몇몇 헤겔의 저작을 잠시 공부한 적이 있습니다만, 그 이후로는 헤겔에 대해 집중적 연구를 한 일이 없습니다. 그러니 제가 오늘처럼 여러 훌륭한 헤겔 전공자들 사이에서 감히 발표자로 나서는 건 정말 무모한 작태인 셈입니다.

2. 그나마 다행인 건, 이번 논의의 초점이 헤겔에 대한 문헌학적 이해나 해석에 있지는 않다는 점이겠습니다. 콜레티가 알튀세르를 몰아세웠던 요체가 바로 문헌학적 정확성 문제였지요. 헤겔에 ‘주체’가 없다는 건 정말 말이 안 되는 해석이라는 거죠. 아마 헤겔을 좀 공부한 사람이면 당연히 그렇게 생각할 겁니다. 저도 그랬지요. 우리 사회에 알튀세르가 뒤늦게, 또 압축적으로 수입될 당시에, 그러니까 1990년대 초에, 저는 헤겔에 대한 오해와 곡해 속에 받아들여지는 구조주의적 맑스주의의 편향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문제는 단순히 문헌학적 정확성에 있는 것이 아니었지요. 오히려 우리가 이해해야 하는 것은 그와 같은 다소 무리한 주장이 부각되었던 이유가 무엇이었는가 하는 데 있을 겁니다.2

3. 슬라보예 지젝과 관련해서도 비슷한 생각을 해 볼 수 있겠지요. 지젝이 오늘날 헤겔을 재론하고 현재화하는 데 중심에 서 있다는 점을 인정하는 사람들도 그의 헤겔 해석이 자의적이며 문헌학적 근거가 취약하다고 여기는 경우가 많다고 알고 있습니다. 역시 ‘주체’에 대한 해석이 초점이 되겠지요. 알튀세르처럼 주체가 없다고까지 주장하진 않는다 해도, 지젝이 내세우는 헤겔의 주체는 라캉 식의 빗금 쳐진 주체, 자기 부정의 주체이니 말입니다. 반면에 통상적으로 이해되는 헤겔의 주체는 발전과 진보의 주체, 자기 확장과 자기 확증의 주체일 겁니다. 문제는 이런 주체로는 더 이상 현실에 대한 설명력을 갖추기 어렵게 되었다는 작금의 사태에 있는 것이겠죠.

4. 철학과 설명력의 관계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을 수 있겠습니다만, 적어도 헤겔의 경우에는 사후(事後)의 설명이라도 가능해야 그 스스로가 ‘미네르바의 올빼미’라는 별칭에 부합할 수 있을 테지요. 저처럼 철학이 과학적 성과의 한계와 인간의 이지적 욕구 사이를 그럴 법한 가정과 논리를 통해 메우는 역할을 한다고 보는 처지에서는 더욱 이런 요구를 물리기 어렵습니다. 나름의 한계 내에서나마 미래를 예측하고 거기에 맞추어 목적을 세우는 일에 간접적으로라도 이바지하는 것이 아니라면 지적 작업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목적론에 대한 비판은 우리의 이런 활동 방식을 무차별하게 다른 존재들에게 적용하는 데서 오는 무리함을 지적하고 경계하려는 것이지, 목적이 우리 삶에서 지니는 중요성을 부정하기 위한 것이 결코 아닐 겁니다. 그리고 적절한 목적 설정과 추구를 뒷받침하기 위해서는 잘 짜인 설명이 꼭 필요할 테지요.

5. 한국에는 사회 운영에 대한 장기적인 목표와 계획이 부재하다는 말을 여러 번 들은 적이 있습니다. 중국 출신의 경제학자이자 유튜버인 안유화라는 분의 지적이었는데, 중국 공산당이 주도하는 사회 운영 프로그램과 비교하여 나온 말이라는 점을 감안해야 하겠으나, 뼈아픈 비판임은 분명해 보입니다. 장기적 전망과 청사진에 대한 집착이 오히려 변화무쌍한 현실에 대한 유연한 대응을 어렵게 할 뿐 아니라 그런 구도 자체가 민주적 사회 운영 방식과는 어긋나는 면이 있다고 반론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산업화와 민주화 이후 우왕좌왕해온 ―실제로는 ‘우왕우왕’이었다고 보는 분도 있겠지요― 금세기의 경험 가운데서 우리 사회가 과연 어떤 목표를 추구하고 있는지 새삼 자문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6. ‘큰 이야기’에 대한 불신을 설파하는 것은 한참 전에 시효가 지났다고 생각합니다. 혹 아직도 “공산 전체주의”를 운위하는 시대착오에 대한 비아냥거림으로 활용하는 경우라면 또 모르겠지만요. 우리는 거대 담론의 파국이 초래한 반작용의 음울하고 착잡한 늪에서 진작 벗어났어야 마땅한 것이 아닐까요? 저는 여기에 오늘날 헤겔을 다시 거론하는 중요한 이유가 있다고 여깁니다. 제가 보기에 이것은 알튀세르와 지젝이 원본의 헤겔을 변형하고 왜곡하면서까지 헤겔을 놓지 않은 이유와 통하는 것이지요. 변화와 발전 가능성을 설명할 수 있는 이론이, 그런 의미에서의 변증법이 여전히 필요합니다. 오늘의 ‘로도스’에서 뛰는 헤겔의 사유가 요구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7. 그렇다고 제가 이 자리에서 헤겔 전문가들과 함께 뜀뛰기 경쟁을 할 자신은 없습니다. 저로서는 다만, 우리 현실에 대한 해명의 실마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싶은 것들을 몇 가지 늘어놓아 보는 데 그칠 수밖에 없을 것 같군요. 객석에 머물러 있어야 할 아마추어가 경기장에 끼어들어 물을 흐리는 꼴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미리 양해를 구합니다.

 

 

1. 세상은 복잡하지만, 설명은 가능한 한 단순할수록 좋습니다. 헤겔 철학이 제아무리 어렵다고 한들, 복잡한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방편이니, 세상사보다는 쉽고 단순해야 할 테지요. 두 항의 대립과 모순을 통한 변화의 설명 방식은 그런 형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두 항이 본래 하나에서 비롯된 것인지, 두 항의 설정에는 논리적 연관 외에 다른 요소들이 때로는 은밀하게 때로는 자의적으로 끼어든 것인지에 대해서는 따지지 말기로 합시다. 저는 헤겔 논리학(또는 “논리의 학”)의 세부 내용은 잘 알지 못하지만, 인류가 오랜 세월에 걸쳐 집단적으로 개발해온 각종의 주요 개념들을 하나의 체계로 다시 엮어낸 그 솜씨가 매우 경탄스럽다고 여깁니다. 두 항의 운동이 하나로 지양되어 모이고 재차 다른 두 항으로 갈라져 대립하는 과정들이 이어지고 쌓여서 두툼할 뿐 아니라 방향성을 갖는 체계를 이루어내지요. 단순함으로 복잡함을 구현해내는 멋진 직조술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2. 물론 여기에 불만을 가질 수도 있어요. 헤겔의 논의를 쫓아갈 때, 우리는 대체로 현재 진행되는 과정만을, 말하자면 한 채널만을 염두에 두게 됩니다. 우리 의식의 집중 방식이 보통 그러니까요. 하지만 이렇게 해서는 실제 세계에서 일어나는 다른 채널들로부터의 간섭을 고려하기 힘들죠. 이른바 중층결정(Überdetermination)의 효과들을 놓치게 되는 셈입니다. 그러나 이건 헤겔에게 책임을 물을 일이 아닐 테지요. 헤겔식의 과정을 좇아 구성된 얼개를 통해 지속적으로 점검해야 할 경험적 보충이 필요한 사안일 겁니다. 채널들의 자립성은 실험실에서 외부 요인들을 통제하듯 추상적 사유 과정에서 요구되는 것일 따름이어서 상대적이고 잠정적일 수밖에 없겠지요. 또 그런 과정들의 총괄이라 할 ‘전체’ 역시 잠정적일 테죠. 지젝이 헤겔에서 현재 또는 미래로부터의 소급을 통한 의미 발굴이 불가피하다는 점을 거듭 강조하는 것은 이런 면에서 당연해 보입니다.3

3. 그런데 이 같은 잠정성은 특정한 ‘전체’의 불완전성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현실 또는 실재 자체의 잠재적 면모와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할 수 있죠. 우리에게 알려지는 것이 불완전한 ‘전체’들 뿐이라면, 그 너머의 현실이란, 아니 현상을 통해 다가오는 현실 너머의 실재란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여기서 저는 이제껏 철학 논의에서 어쩌면 블랙홀 같은 모습을 보여온 이 현기증 나는 영역으로 넘어갈 의도는 없습니다. 다만, 두 가지만 짧게 짚어 두도록 하죠. 우선, 현상 너머의 실재에 대한 생각도 현상에 속하니까 현상을 벗어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입론은, 새로운 경험의 가능성을 봉쇄하지 않는 한 현상 너머의 영향을 부정할 수 없고 따라서 그 실재성을 무시할 수 없다는 점4, 다른 한편으론, 그렇다고 해서 새로운 경험에 대한 개방성만 주목하고 강조하는 것은 미래에 대한 응답(response)의 자세 면에서 무책임(irresponsible)하기 쉽다는 점.

4. 저는 특히 두 번째와 관련하여 헤겔적 사유에 적극적인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숱한 철학자들이 개방성의 근거나 양상 문제에 초점을 맞추곤, 블랙홀 근처에서처럼 우리의 시간이 가는 걸 잊어버린 듯한 인상이에요. 지젝이 내세우는 “무보다 못한 것(less than nothing)”이나 “덴(den)” 같은 데 홀린 채 말이지요. 보기에 따라선 바디우의 “사건(événement)”이나 데리다의 ‘대상 없는 기다림’ 따위도 유사한 작용을 하고 있지 않나 싶어요. 이런 모토들을 둘러싼 진지한 태도들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같은 막연함을 한껏 세공해 본들 거기에서 더 이상 기대할 만한 것이 있을지 궁금하군요. 그것보다는 차라리 체계화의 한계를 인정하면서, 두 대립되는 계기들로 변화의 과정을 논리화하고 설명하려는 방도를 세련화하는 것이 진정 헤겔을 계승하는 길이 아닐까요?

 

 

1. “근대화가 함축하는 서구적 산업화를 추구하는 계기와 식민지적 종속에 대항하는 자주의 계기가 근대 이후 우리의 역사를 이루는 변증법적 대립의 두 축이라고 할 만하다.”5 몇 년 전에 저는 이런 식의 문장으로 시작해서 우리 역사에 헤겔적 변증법을 적용해 보려는 어설픈 시도를 해 본 적이 있습니다. 그다지 만족스럽지 않았고 별다른 반향도 없었던 그 내용을 여기서 되풀이할 필요는 없겠지요. 하지만 연속적인 문제의식은 버리지 않았던 탓에, 최근 몇 년간의 답답한 사태들의 해명 요구에 유사한 방식을 참조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도 현재와 같은 검찰공화국의 성립이 어떻게 가능했으며, 민주주의의 후퇴와 남북관계의 경색, 대미 대일 종속의 심화 등등 이 어떻게 일어났는지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고, 이런 점들을 되짚어 보는 데 이전의 사유가 소환되기도 하니까요.

2. 최근 몇 년간 가장 극적인 변화를 겪은 것은 제가 보기에 남북관계인 것 같습니다. 벌써 옛날 일이다 싶지만, 평창 동계 올림픽 남북 단일팀과 판문점 도보다리 회담, 평양 능라도 경기장의 연설이 있었던 것이 2018년, 불과 5년 전의 일입니다. 당시의 분위기를 회상해 보면, 우리가 여전히 같은 사회에 살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러워질 지경이지요. 더 흥미로운 면은 이런 변화의 주요 원인이 우리 사회 내부에 있지 않다는 점을 이제는 누구나 알고 있다는 겁니다. 그 가시적 변곡점은 2019년 2월의 북미 하노이 회담 결렬이라고 할 수 있겠으나, 그런 변화가 우연적이 아니며 그 뿌리가 결코 얕거나 만만하지 않다는 점이 이후의 과정에서 여실히 드러났죠. 지금까지 이어지는 미국의 대북 정책 기조는 최소한 오바마 시절부터 시작된 것이고, 그것은 중국에 대한 견제를 노리는 이른바 아시아로의 회귀(Pivot to Asia) 정책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공화당이냐 민주당이냐, 트럼프냐 바이든이냐 하는 정권의 문제보다 더 깊고 단단한 수준의 것이죠.

3.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를 한반도에 배치하고 남한과 일본을 묶어 세우려는 미국의 의도는 현재 성공적으로 관철되고 있다고 보입니다. 뒤집어 말하면 앞서 언급한 ‘자주’의 계기는 후퇴하고 위축되었다고 해야 되겠지요. 이런 분위기 탓인지, 근대 이후 한반도의 운명에 압도적 영향을 미쳤고 지금도 미치고 있는 것은 무엇보다 외세와 지정학적 조건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예컨대, 한국전쟁의 실질적 주역이 미국과 중국이었다는 인식이 부각되고 있는 것도 오늘날 미중의 대립과 긴장 관계를 반영하는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6 산업화 면에서도 외세의 영향이 강조됩니다. 1990년대 이후 일본의 반도체 산업이 몰락하고 대신 한국과 대만이 반도체 생산의 상당 부분을 담당하게 된 것도 미국의 주도하에서 일어난 일이고, 따라서 현재의 우리 산업구도와 미래 전망도 미국의 대중국 견제 전략에 따라 큰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인 것 같습니다.

4. 중국의 중요성도 만만치 않지요. 특히 금세기 들어와 중국이 WTO에 가입하고 세계의 공장으로 급성장하기 시작하면서 수출입의 주요 상대국으로서 한국 경제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근래에 한동안 화제가 되었던 좋은 불평등이라는 책의 저자는 한국에서 소득 불평등의 정도가 심해진 시기가 중국과의 무역에서 대기업이 호황을 누렸던 기간과 겹친다는 점을 여러 통계수치들을 통해 입증하려 했지요.7 저는 이런 주장의 사실에 입각한 설득력을 부인하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지금은 ‘탈중국’을 외치는 사람들이 많기는 합니다만, 2023년 8월 현재 중국은 수출과 수입 모두에서 20%를 넘는 비중으로 우리의 교역상대국 가운데서 여전히 수위를 차지하고 있지요.8 현재 한국 경제의 불황이 중국 경제의 상대적 위축이나 투자 및 무역 여건의 악화와 관련이 있음도 분명해 보입니다.

5. 미국이 되었든 중국이 되었든 이들의 영향력을 떠나서는 우리 사회의 형편을 논하기 힘들 테지요. 이제 동남아나 남미 등 다른 지역과의 관계 다변화에 힘을 쏟고 있다고 합니다만, 그런다고 해서 우리의 지정학적 위치와 이미 돌이키기 어려운 대외의존적 산업구조가 바뀔 것 같지는 않군요. 돌이켜 생각하면, 우리와 같은 여건에서 산업화와 자주의 요구를 마주했을 때, 자본주의적 산업화의 길을 택했을 경우 자주(自主)는 상당 부분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지 않았나 싶습니다.

6. 우리 사회의 발전에 중요한 계기로 작용한 ‘민주화’는 이런 산업화와 연결되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내속적이고 연속적인 계기였다고 할까요. 물론 이때의 ‘민주’를 보편적인 것이라 여길 순 없을 겁니다. 다중(多衆)이 힘과 권리를 가지는 방식이 여럿일 수 있을 테니까요. 또 현재 실존하는 민주주의의 방식들이 과연 명실상부한 것인지 의심스러운 면도 많죠. 하지만 한때 우리에게 익숙했던 구호로 말하자면, ‘민중민주’가 ‘민족해방’보다는 산업화와 친화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중국의 예에서 보듯 산업화가 필연적으로 서구적 민주화를 수반한다고 속단하기는 어려우나, 우리의 경우는 국가자본주의 축적 단계를 넘어선 서구적 산업화와 민주(民主)의 요구가 적어도 한동안은 잘 호응한 사례가 아닐까 합니다.

7. 북한의 경우는 반대라고 할 수 있겠지요. 자주의 요구에 산업화와 민주가 밀려난 꼴이라고 할까요. ‘민족해방’이 오래도록 실질적인 ‘민중민주’를 가로막았다고 해야 될 것 같습니다. 과거 소련과 중국 도움을 받았지만, 나름의 독자성을 유지하고자 하는 고집이 핵개발에 이르게 했다고 볼 수도 있겠어요. 지금도 명목상으로는 조중동맹 조약이 유지되고 있고 최근에는 러시아와의 관계가 긴밀해지고 있으나, 남한의 경우처럼 외국 군대가 계속 주둔을 한다든지 합동 군사훈련을 한다든지 하는 경우는 없었다고 하지요. 지속적으로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이를 극복하기 위해 자주를 ―그것이 비록 민중의 자주라기보다 소수 지배집단의 자주라고 할지라도― 뒤로 물릴 생각은 지금도 없는 듯합니다. 요컨대, 거칠게 말하면, 한반도에서 남쪽에는 산업화 내지 민중민주의 계기가, 북쪽에는 자주 내지 민족해방의 계기가 우위에 선 채 다른 계기와 대체로 길항적 관계에서 작용해 왔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8. 그런데 이런 조야한 개관이 헤겔의 철학과 어떤 관련이 있으며, 오늘의 현실을 해명하는 데 어떻게 연결이 된다는 걸까요? 일단, 산업화와 자주의 계기란 헤겔 식의 모순을 이루는 쌍도 아니고, 또 거기서부터 민주화나 핵무장 따위가 필연적으로 도출되는 것도 정당화되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물론 그렇지요. 앞서도 언급했듯이, 개념이나 계기의 연결을 통한 설명은 여러 요인들이 영향을 미치는 현실을 단순화하여 재구성하는 방편일 따름입니다. 하지만 ‘산업화’와 ‘자주’가 모순까지는 아니더라도 대립하거나 상충하는 계기로서 그 구체적 형태들을 달리하며 작용해 왔다고 파악하는 것이 오늘의 사태를 바라보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9. 무엇보다도 저는 우리의 현황이 산업화 우위의 맥락에서 작용하던 내부적 동인이 목표를 잃고 취약해진 가운데 외적 요인이 극성을 부리고 있는 국면이라고 봅니다. 단적으로 말해, 많은 이들이 의아하게 생각하는 뜬금없는 윤석렬 정권의 등장은, 민주화 이후 자주의 요소가 개입된 시도들이 좌절되고 그간의 산업화 방식이 낳은 문제들이 극복되지 못한 데서 비롯한 방향 설정의 공백을, 고유한 내용 없는 형식적 수단에 불과한 검찰 중심의 관료적 집단이 주워 ‘먹은’ 데 따른 것이라고 할 수 있죠. 강하게 도사리고 있던 미국의 요구가 그 비어 있는 자리에 손쉽게 파고든 것은 지극히 자연스런 사태일 겁니다. 그렇게 해서 이제 우리는 한 나라의 정책 결정 심장부가 도청을 당하고도 항의할 생각조차 못하는 어처구니 없는 ‘신뢰’의 일방적 투명함을 목도하게 된 것이죠.

10. 촛불혁명이라는 놀라운 형태의 민주화를 발판으로 성공적인 출발을 보였던 문재인 정권이 궁지로 몰리기 시작한 과정을 돌이켜 보면, 계기들의 양상을 좀 더 구체적으로 재구성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노이 회담의 결렬 이후 ―그 다음에도 2019년 6월말의 판문점 남북미 정상회동 같은 몇몇 에피소드적 사건은 있었으나 실질적 변화는 없었죠― 남북의 관계는 사실상의 관계 단절에 이르기까지 악화 일로를 걸었고,9 대중의 관심과 기대도 급속히 식어버렸습니다. 조국 사태가 터진 것이 2019년 9월이니까, 대외 여건 악화에 내부의 문제가 겹쳐진 양상이라고 해야겠죠. ‘적폐청산’의 도구로 썼던 칼날에 베인 꼴이라고들 합니다만, 더 큰 문제는 대북 정책의 좌절을 뚫고 나아갈 만한 ‘적폐청산’ 이상의 목표가 없었던 데 있지 않나 싶습니다. 2020년 코로나에 대한 대응으로 국민적 역량이 결집되긴 했으나, 그해 여름부터 터진 아파트 가격의 앙등이 민심의 이반을 재촉하는 결정적 역할을 했지요. 문재인 정권이 구태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이 거푸 확인된 셈입니다. 하지만 이를 극복할 만한 동인이나 세력은 눈에 띄지 않았지요. 윤석렬의 검찰 정권은 앞선 정권과 맞서는 공허한 힘만을 과시한 채 아무런 비전도 없이 이 상황을 집어삼킨 격입니다. 그렇다 보니, 실제의 내용은 강력한 외세의 영향을 적극 수용하는 것 말고는 이전 정권에 대한 반대라는 퇴행적 방식으로밖에 채워질 수 없는 것이겠지요.

11. 그렇다면 이제 우리 사회의 목표는 이러한 퇴행과 종속성의 강화를 다시 되돌리는 데에 맞춰져야 할까요? 아마 대부분 그런 것 이상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실 겁니다. 새로운 변화의 기초를 제시하고 그에 맞는 목표를 설정하는 일, 여기에 헤겔을 끌어올 수 있을까요?


② 에서 계속

♦ 다음 글


  1. 「루치오 콜레티와의 정치적·철학적 대담」, 이병천·박형준 편저, 『마르크스주의의 위기와 포스트 마르크스주의·Ⅰ』, 의암출판, 1992, 276쪽.

  2. 이 점에 대해서는 졸저, 『철학의 시추 ― 루이 알튀세르의 맑스주의 철학』, 백의, 1999 참조.

  3. 슬라보예 지젝, 『헤겔 레스토랑』, 조형준 옮김, 새물결, 2013, 4장, 특히 401장 이하 참조.

  4. 여기에 대해서는 졸고, 「현상에서 윤리로」, 졸저, 『해체와 윤리』, 그린비, 2012 참조.

  5. 졸고, 「끝나지 않은 변증법의 모험」, 졸저, 『철학의 슬픔』, 그린비, 2019, 192쪽.

  6. 대표적으로 2020년 한국전쟁 70주년을 맞아 방영된 KBS 다큐멘터리 <미중전쟁> 참조. 그 내용은 책 (『1950 미중전쟁』, 책과 함께, 2021)으로도 출판되었습니다.

  7. 최병천, 『좋은 불평등』, 메디치, 2022. 특히 7장, 8장 참조.

  8. https://www.kotra.or.kr/bigdata/visualization/korea#search/ALL/ALL/2023/8/exp (KOTRA 통계) 2023년 연간으로도 수출, 수입 점유율은 각각 7%와 22.2%로 수위를 보이고 있지요.

  9. 이로부터 일년 뒤인 2020년 6월 북한은 남북통신연락 채널을 폐기하고 급기야 개성의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폭파했었죠. 2021년 7월 통신선은 복원했으나, 같은 해 남북간 왕래 인원은 0명이었고, 이런 상황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정욱식,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새로운 북한이 온다』, 서해문집, 2023, 122, 216쪽 등 참조.

최소한의 합리성이 없는 정치 [시대와 철학]

최소한의 합리성이 없는 정치

 

정동훈(성공회대 대학원)

 

모두의 주목을 받은 화제의 보궐선거가 끝났기 때문에 윤석열 정부에 대한 조금 이른 중간평가를 해도 적절할 것 같다. 처음 이 글을 쓰려고 했을 때 생각보다 막막했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얘기해야지? 라는 생각이 제일 처음 들었다. 비판할 주제가 너무 많아서 1주에 3번씩 글을 써도 6개월은 버티겠다는 생각부터 들었다. 아마 6개월이 지나기 전에 6개월 치를 새로 쌓아줄 것이다. 악재를 더 큰 악재로 잊게 만든다는 말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니다. 이만큼이나 엉망이다. 윤석열 정부의 임기 첫날부터 지금까지를 평가하면 총체적 난국이라는 표현도 부족하다. 개인적으로 윤석열 정부의 특징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최소한의 합리성이 없는 정치’라고 말하고 싶다.

나는 개인적인 정치 성향이 좌측이다 보니 보수 정부의 정책 내용에 찬성하는 경우가 별로 없다. 그러나 나의 성향이나 동의 여부와 무관하게 보수 정부의 정책이라도 정책 결정의 맥을 이해할 수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내가 동의하지 않아도 보수 정부라면 충분히 추진할 수 있는 정책들이 있다. 이해가 어려운 경우에는 보통 보수당원인 지인들에게 설명을 부탁하고 들어보면 의사결정의 맥락을 대부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데 윤석열 정부의 정책 결정은 보수당원들에게 물어봐도 이해할 방법이 없다. 보수당원이나 관계자들도 왜 그런 결정을 내렸는지 모르겠다는 반응이 대부분이다. 본인의 소속정당 사람들도 이해하지 못하는 결정들이 임기 초반부터 지금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다. 구태여 예시를 나열하지 않아도 아마 문득문득 떠오르는 크고 작은 사건들이 있을 것이다. 윤석열 정부에는 최소한의 합리성이 없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역사상 집권을 했던 세력은 최소한의 합리성을 가지고 통치를 했다. 예를 들어 현재 군부가 권력을 장악한 파키스탄은 군부의 성향이 폭력적이지만 주변국과의 분쟁을 적절히 조절하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다. 북한의 김정일 역시 한반도의 평화와 동북아시아의 세력균형을 위해 주한미군의 주둔이 이어져야 한다는 발언을 했다. 이것이 집권세력이 가지는 최소한의 합리성이다. 윤석열 정부는 어떤가? 임기 초부터 지금까지 국제정치는 물론 국내적으로도 분야를 불문하고 제대로 설명이 가능한 정책이 거의 없다. 몇몇은 자신들이 내세운 주장을 어떻게든 관철하기 위해서 무리수를 두는 경우가 있다. 최근 치러진 보궐선거가 가장 시의성 있는 예시라고 생각한다. 대법원에서 유죄로 판결이 나와서 보궐선거를 진행하는데 거기에 그 원인이 되는 인물을 다시 출마시켜놓고 그것을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듯, 심지어 승리를 바라는 모습에 최소한의 합리성이 있다고 볼 수 있을까? 나는 없다고 생각한다.

민주공화정 체제를 성공적으로 이룩하고 경제적 풍요와 문화적 번영까지 일구어낸 선진국에서 이러한 현상이 연이어 일어나는 현실은 매우 불행하다. 심지어 한국이 공화정이 아니라 왕정이었더라도 집권세력이 제대로 설명하기 어려운 의사결정을 남발하는 현실은 집권세력은 물론 최종적으로 국민에게도 득 될 것이 전혀 없다. 정말로 안타까운 지점은 이보다 더 비합리적일 수는 없다고 생각하는 사건이 일어나면 그에 대한 평가가 무색하게 며칠이 지나면 더 비합리적인 사건이 일어나는 패턴의 반복이 윤석열 정부의 현재라는 것이다. 앞으로 개선의 가능성도 별로 없어 보인다. 많은 이들의 평가가 그렇다. 그 과정에서 우리의 정치는 수준이 낮아지고 국민은 고통받는다. 더욱 충격적인 진실은 윤석열 정부의 임기가 아직도 3년이 넘게 남았다는 것이다. 최소한의 합리적 정책을 기대할 수 없는 시간 동안 우리 공동체에 비합리적 이해가 팽배해질 것은 자명하다.

법 권리의 주체는 누구인가: 법치국가 담론이 놓치고 있는 것들 [시대와 철학]

법 권리의 주체는 누구인가: 법치국가 담론이 놓치고 있는 것들

이 글은 지난 1월 27일에 ‘말과활아카데미’에서 열린 기획강좌 <지금, 여기의 정치철학: 빼앗긴 법치주의 정치철학적 고찰> 중 한철연 회원인 한상원 선생님이 강의한 2강의 주요 내용을 강연자의 허락을 받아 게재하는 것임을 알립니다.

강의: 한상원(충북대), 정리: 편집주간

 

2023년을 지내는 지금, 이 시대는 빼앗긴 개념들의 시대이다.

우리의 민주주의에서 자유와 공정, 반지성주의, 법치 개념은 전도되고 왜곡되어 쓰인다.

지금 우리 시대의 ‘자유’는 소극적 자유에 국한되지 않을까. 보수 정치권에서 100시간 일할 자유를 운운한 것은 시민의 자유와 부합되지 않는다. 개체로 분절되고 원자화된 자유는 시민들의 자유로운 삶에 대한 가능성을 약화한다. 자주 회자되는 ‘공정’은 어떤가. 공정 이전에 평등은 2023년에는 사라진 개념이 되었고 그 빈자리를 공정이 채웠다. 지금 말하는 공정은 게임의 법칙으로서 공정이다. 공정한 경쟁이 유일한 정의관이 되어 강자는 약자를 위한 정책에 반발하고 역차별을 주장한다. 민주주의 위기의 원인을 진단하는 ‘반지성주의’는 정치적 대립 상대에 대한 공격과 비난의 구호로 바뀌었다. ‘법치’는 이미 선택적 법치주의가 되었다. 강자의 부정의는 사면으로 보호받고 노동자의 투쟁에는 법과 질서의 잣대를 엄격하게 들이댄다. 약자의 저항은 법치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한다. 우리가 아는 법치는 탈취되었다.

∎법치주의의 이름으로

그간 법치주의의 이름으로 여러 일이 일어났다. 2023년 1월 18일 사상 최초로 국정원이 민주노총을 압수수색했고, 2022년 11월 29일에는 화물연대의 파업에 정부는 국가가 국민(노동자)을 강압하는 초유의 업무개시명령을 발동하여 전체주의적 발상을 정당화했다. 2022년 10월 29일 이태원 참사 당일에 경찰은 질서 유지가 아닌 마약 단속을 주업무로 삼아 국민의 생명을 보장하는 사고 예방이 아닌, 범법자 검거를 경찰 활동의 우선순위로 이해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런 사태들이 오늘날 민주주의 정신에 부합된 법치의 모습인가. 우리는 민주주의와 법치의 관계를 어떻게 규정할 수 있을까? 도대체 법치주의란 무엇인가?

∎법치주의의 기원

영어권 국가들에서 법치라는 개념은 일반적으로 13세기 영국의 ‘대헌장[마그나 카르타(Magna Carta)]’에서 비롯되었다. 대헌장은 영국의 국왕 존(John, 1199~1216)에 대항하는 귀족들의 요구로 제정되었는데 ‘자유민을 체포하거나 구금할 수 없고’(39항), ‘왕을 포함한 그 누구도 정당한 정의와 권리의 행사를 거부하거나 늦출 수 없다’(40항)는 조항을 포함하고 있어 국왕의 권리를 제한하고 시민의 권리(자유)를 보장하는 근대 민주주의의 상징과도 같다. 물론 농노민이 아닌 자유민을 대상으로 삼기에 귀족 운동의 한계는 존재한다. 또 서구에서는 미국혁명을 통해 법을 성문화하여 인격체가 아닌 법에 기반한 통치의 제도화가 이루어졌고 프랑스혁명에서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 인권선언이 이루어졌다.

∎법치주의의 자기모순

절대군주제를 비판하고 시민정부론을 주장한 존 로크, 법치국가에서 자유를 중시한 몽테스키외, 자신과 타인의 자유가 공존하게 만드는 질서가 법이라 명시한 칸트 등 근대 법치주의 사상가들의 주장을 살펴보면 근대 법치는 자유주의와 떨어질 수 없다. 그런데 현대 자유·민주주의 국가 안에서 개인의 자유가 과연 확대되는지는 의문이 아닐 수 없다. 근대 법치는 국왕의 전제주의보다 개인의 권리와 자유를 높였다. 그러나 현대는 개인의 소극적이고 원자화된 자유의 방향으로 가고 있다. 현대 법치주의의 현실은 통치권을 장악한 정권이 법치주의의 이름으로 무제한의 권력을 행사하며 개인의 권리는 축소한다. 법 전통을 위배하는 현상이다. 이를 위해 통치 권력을 잡은 정권은 특정 적(敵)을 설정한다.

모든 통치 권력은 좌우를 가리지 않고 적을 언급한다. 흥미로운 사실이다. 가까운 한국의 경우 정권에 따라 일본이나 북한, 또는 엄한 이란이 적이 되기도 한다. 내부적으로는 토착왜구나 종북세력으로 불리는 적들이 등장한다. 법치주의는 자유주의 이론의 역사에서 전제주의를 몰아내고 개인의 권리를 확보하기 위해 도입된 이념인데, 실상 법치주의라는 이름은 적에 대항하는 국가의 투쟁이라는 반자유주의적 논리에 활용된다.

∎이상한 현실

또 이상한 것은 법을 가장 잘 아는 검찰 출신들이 통치 권력을 잡은 지금 한국에서 그들은 자신들이 공부했던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에 기반한 법치주의를 실행하지 않고 마키아벨리와 홉스, 슈미트의 얼굴로 등장한다는 점이다. 법은 그 자체로 동시에 권리를 의미하며 이것이 법의 존재 목적이지만, 법의 이름으로 특수 집단의 권리가 제한되고 억압되고 있다. 이것은 비단 한국만이 아닌 현대 여러 국가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현대에 법은 개인들을 시민이라는 법 권리를 가진 자로 호명하나 실상 많은 사람을 법의 권리적 공간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만든다.

∎법적 주체

우리는 법적 주체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현대 법학자 한스 켈젠은 법적 주체 개념을 비판하면서 법적 주체는 사적 소유권을 보장하기 위한 주관적 법 이해에 불과하다는 일리 있는 주장을 했으나 다시 생각해보면 경제적 권리라는 소극적 자유라는 의미보다는 정치적 권리를 실현하는 보다 적극적인 권리의 차원에서 법적 주체를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조금 넓은 의미에서 법적 주체를 이해하자는 것이다.

미국 수정 헌법 4조에는 “불합리한 압수와 수색에 대하여 신체, 주거, 서류, 물건의 안전을 확보할 국민의 권리는 침해되어서는 아니 된다”고 명시되어 있다. 그러나 미국 현실에서는 흑인(소수자)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 개인의 존엄은 박탈된다. 이런 상황에서 저항적 주체 운동이 벌어지게 되고 그것을 마주하는 우리는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주체 없이는 법은 권리를 실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봉기와 헌정(구성)의 변증법과 민주주의의 민주화: 평등자유 명제

발리바르는 봉기와 헌정[constitution, 헌법, 구성]의 변증법을 얘기한다. 구성은 아래에서 위로의 혁명적 행위를 수반한다. 구성 단계는 혁명적 모험주의가 아니라 봉기를 통한 제도화로 나아가는 지점이다. 프랑스 이주노동자들의 폭동에 대해 발리바르가 지지 의사를 표명한 것을 보면 발리바르가 얘기한 봉기의 맥락이 어떤 것인지를 추측할 수 있다. 한편 이미 제도화된 헌정도 다른 형태로 변동 과정을 겪을 수 있다고 한다. 발리바르는 프랑스혁명이 제출한 프랑스 제1공화국 헌법의 전문(前文, 공포문)에서 자연권 사상가들이 내세운 인간이라는 말과 자연권 비판의 영역에서 특정한 정치 공동체에 소속된 시민이라는 말이 동의어라 본다. 여기에서 ‘평등자유[Egaliberté, equaliberty(equality+liberty)]’라는 명제를 도출하고 이것이 프랑스 인권선언의 핵심이라고 주장한다. 근대 민주주의와 시민권 이념의 기원을 이루는 ‘평등자유’ 명제는 자유와 평등을 동시에 요구하는 과정에서, 해방을 향한 투쟁 과정에서 언제나 반복적으로 출현하게 된다는 것. 이로써 갈등을 통한 새로운 제도화로 귀결된다.

현대 사회에서는 인간과 시민의 권리가 항상 발현되지 못하므로 기존의 지배 질서에 대항하게 된다. 한국에서 노동자, 또는 장애인의 투쟁은 ‘인간이되, 왜 시민으로 대우받지 못하느냐’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이러한 해방적 운동이 봉기의 의미를 지닌다. 그래서 시민권의 내용은 갈등적 관계라는 토대 위에서 규정된다. 그렇다면 파업, 시위 등 자신의 권리를 실현하기 위한 민주주의의 봉기적 계기를 억압하는 법치주의는 사실상 민주주의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이 아닌가. 혹인 민권운동의 역사를 보면 시민권은 내부적 갈등에서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백인 흑인 유색인종의 구분은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서 구분되지 않고 시민권 안에서 구분되기 때문이다.

∎인권의 ‘주체’는 누구인가

랑시에르는 인권의 ‘주체’는 누구인지를 묻는다. 한나 아렌트는 추상적인 인권 개념은 존재하지 않으며 보장될 수도 없다고 했다. 현대에 미국은 인권이라는 이름 아래 전쟁을 용인하기도 하지 않는가. 과거 프랑스에서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을 통해 인권은 천명되었지만, 주체들이 그 내용의 이행을 요구하는 투쟁에 나서고, 스스로 ‘인권의 주체’로 거듭나는 과정을 거쳐야만 인권은 주체화와 정치화의 과정을 촉발할 수 있는 실질적인 근거가 된다. 모든 인간은 자유롭고 평등하다는 정치적 술어를 증명하려는 주체들이 등장하고 그 구체적 내용을 규명하려는 시도 위에서 과연 자유와 평등이 현실에 존재하는지? 누가 자유롭고 평등한지에 대한 물음이 제기되는 것이다.

한편 올랭프 드 구즈는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에 사용된 인간을 뜻하는 프랑스어 단어 ‘homme’가 남성을 의미하기도 하다는 사실을 토대로, 이 권리선언이 여성을 배제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그리하여 그녀는 일종의 패러디로 ‘인간(남성)과 시민의 권리선언’에 대항하는 ‘여성(femme)과 시민의 권리선언’을 작성한다. ‘단두대 처형은 남녀 모두 똑같이 적용하나 왜 여성은 남성과 달리 연단에서 연설을 못하는가’라는 올랭프 드 구즈의 항변은 이미 존재하고 합의되어 성문화된 내용을 증명하기 위한 정치적 주체들의 활동이다. 이러한 불화는 조화가 아닌 갈등에서 출발한다.

‘모든 인간은 자유롭고 평등하다’는 인권선언의 내용은 ‘누가 자유롭고 평등한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지면서, ‘인간’의 범주에 생물학적으로는 포함되나 정치적으로는 포함되지 않는, 그리하여 자유롭고 평등한 공동체에서 배제되는 여성의 지위에 관한 전복적 질문으로 ‘재맥락화’된다. 즉 정치적 주체는 성문화된 권리의 내용을 증명하는 주체이고 공동체의 공동체성을 증명하는 주체이며 배제를 넘어서는 공동체를 창출하는 주체이다.

인권의 주체란 자신이 가진 권리를 갖지 못한 주체이자 자신이 갖지 못한 권리를 가진 주체이다. 법에 명시된 권리를 현실에서 갖지 못한 주체(예컨대 미국 내 흑인들 )와 실정법상 권리를 갖지 못했으나 인권의 이념에 의해 권리를 가져야 마땅한 주체(예컨대 이란 내 여성들, 유럽의 난민들)들도 인권의 주체이다.

∎권리는 자신의 주체를 요청한다

대한민국 헌법 제33조 제1항은 “근로자는 근로조건의 향상을 위하여 자주적인 단결권·단체교섭권 및 단체행동권을 가진다.”라고 하여 ‘노동3권’을 기본권으로 규정하고 있다. 성문화된 권리의 내용을 증명하는 주체로서 화물노동자들은 업무개시명령에 적용되지 않으며 헌법을 벗어난 명령에 저항할 권리가 있다. 현행법에서 ‘나’를 배제하는 지점을 발견하여 그 권리를 주장할 때 그들은 곧 권리의 주체로 발생하는 것이다. 2022년 9월 중순 이후 이란 여성들이 ‘여성, 삶, 자유(Women, Life, Freedom)’를 외치며 반히잡 시위에 나서고 이로써 촉발된 반정부 시위의 주체들은 ‘인권의 주체’이다. 1970년 11월 13일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는 전태일의 외침은 법과 권리 사이 간극의 모순 문제를 통찰한 인권 주체의 외침이었다.

자신이 가진 권리를 증명할 주체를 소멸시키는 법치주의는 법이 실현해야 할 권리를 억압하는 ‘치안의 논리’이다. 지금 2023년 한국에서 우리가 마주한 법치주의는 권리와 인권의 주체를 억압하는 ‘치안’일 뿐이다.


 

빼앗긴 자유, 도둑맞은 공정 [시대와 철학]

빼앗긴 자유, 도둑맞은 공정 [시대와 철학]

[출처] https://blog.naver.com/readingclassics/222995108058 (세상책방 진로글방)

이 글은 지난 1월 27일에 ‘말과활아카데미’에서 열린 기획강좌 <지금, 여기의 정치철학: 빼앗긴 법치주의 정치철학적 고찰>의 1강(강사: 김성우) 강의록 일부를 저자의 허락을 받아 게재함을 알립니다.

김성우(상지대)

 

자유를 묻는가

자유라는 개념을 정의 내릴 때는, 지배라는 단어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가 중요하다. 자유의 반대말이 ‘지배’이기 때문이다. 지배를 받는 사람은 자유인이 아니다. 노예가 왜 노예인가? 주인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노예이다. 자유라는 단어의 원초적인 의미는 바로 지배로부터의 자유이다. 그런데 지배에 대한 관점에 따라 자유의 의미도 달라진다. 자유의 의미가 여러 가지이기에 자유라는 말 자체가 대단히 애매모호하다. ‘자유주의’라는 말이 혼란스러운 이유이다.

자유주의(liberalism)가 유래한 liberal이라는 말은 현재 미국에서는 진보를 뜻하고, 유럽에서는 소유의 자유와 시장의 자유를 주창하는 시장주의(자유방임주의와 작은 정부를 외치는 고전적 자유주의나 이것의 세계화 버전인 신자유주의)를 가리킨다. ‘libertarian’의 경우도 지금은 시장만능의 극우논리로서의 자유지상주의(신지유주의)로 알려져 있으나 원래는 무정부주의자들이 최초로 썼던 단어이다. 그러니까 자유라는 단어의 원초적인 의미는 바로 지배로부터의 자유이다. 모든 지배를 거부하는 것이다. 지배 없는 삶. 이것이야말로 무정부주의자들의 꿈이다. 자본의 지배를 거부하는 마르크스가 내린, 코뮌주의의 정의도 자유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코뮌주의란 “자유로운 개인들에 기반을 둔 자유로운 연합(어소시에이션)”이다.

그런데 지금의 자유주의는 재산권과 시장만능주의를 외치며 지배 없는 삶을, 재산(생산수단)이 있는 소수에게만 부여하고 재산이 없는 다수를 지배하는 논리로 전락했다. 자본과 이를 보호하는 권력에 의해 착취 받을 자유만 있는 사람들은 겉으로만, 즉 형식적으로 자유로울 뿐이다. 자유로운 소수가 다수를 예속하고 착취하는 자유주의의 자유는 형식적인 자유, 가짜 자유이다. 그런데 진정한 문제는 가짜 자유를 외치는 사람들에게 자유를 빼앗겼다는 점이다. 소수만 자유로운, 더 정확히는 죽은 노동인 자본만 자유로운, 가짜 자유를 외치는 자유주의가 자유를 독점해서는 안 된다. 루소, 칸트, 헤겔, 마르크스를 포함해서 사르트르는 모든 사람이 자유로운 시스템을 만들 때 진정한 자유가 실현된다고 주장했다. 위대한 철학자가 외친 진짜 자유를 다시 외쳐야 한다. 그래서 진짜 자유를 실현하는 ‘세계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만인이 자유로운 이성국가(헤겔)이든, 자유로운 연합(마르크스)이든, 다중의 절대민주주의(네그리)이든, 자유로운 시스템으로서의 국가(지젝)이든, 어소시에이션으로서의 세계공화국(가라타니)이든.

세계화로 인해 불평등이 심각해지자 자유주의자들이 극우 포퓰리즘으로 전락해서 자유의 이름으로 노골적으로 스스로 자유의 적임을 드러내고 있다. 이와 동시에 시장 실패로 인해 시장의 자유가 예전의 헤게모니(설득에 의한 지배력)를 잃었다. 그러자 우리 사회에서 보수 언론이 ‘공정’이라는 단어를 다시 훔쳐갔다. 그들이 말하는 공정은 교묘한 엘리트주의인 ‘능력주의’를 포장하는 기만적인 언어조작에 불과하다. 본래 존 롤스가 <정의론>에서 말한 ‘공정’은 소수 엘리트가 부와 지위의 독점을 보장하는 논리인 능력주의가 아니라, 최소수혜자의 존엄성과 자유를 보호하는 사회 정의이다. 유사하게 마이클 샌델도 신자유주의 엘리트들이 능력주의를 내세워 공정하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고 폭로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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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라는 단어는 1980년대 민주화 이후에 우리의 간절한 열망에서 사라졌다. 어떤 낱말도 인생과 마찬가지로 생로병사가 있는 것 같다. 이제 자유라는 단어는 많이 화석화됐고 더 나아가서는 자본에 의해 독점화되었기 때문에, 살아 있는 의미보다는 왠지 낡아빠지고 의미 없게 느껴진다. 도리어 정의나 평등 아니면 복지라는 단어가 훨씬 의미 있게 다가온다. 그렇지만 정의라는 철학적인 개념도, 평등이라는 개념도, 복지라는 개념도, 자유 개념이 빠지면 그 고유한 의미가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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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 사회는 민주화되었다. 그런데 민주화된 이후에 우리는 실제로 자유로운가? 일상생활에서 여러분이 자유롭다고 느끼는 순간이 어느 때인가? 예컨대, 지도 교수님에게 매여 자기 발언을 못하는 학생들이 많다. 심지어 고상한 음악을 하는 대학에서도 매를 맞는다. 다행히 물의를 빚은 그 폭행 교수는 쫓겨났다. 이처럼 일상생활 속에서 우리는 자유롭지 않다. 항상 무언가에 예속되어 있어요. 한 청소부 아주머니가 이런 얘기를 하셨다. 자신은 비정규직이고 그래서 일자리를 계속 유지해야 하므로 불만스럽고 고통스러워도 항의할 수가 없다고 한다. 심지어 법치의 이름으로, 여론의 이름으로 미국과 브라질이나 우리나라의 경우처럼 극우적인 엘리트 정부가 들어서기도 한다. 이로 인해 촛불시민이 이룩한 민주주의가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다. 이 위기 앞에서 현재의 정치 시스템이 얼마나 연약하고 부서지기 지운 제도인지를 알 수 있다. 그렇지만 촛불시민의 강인한 열망도 확인할 수 있다. 열망은 제도에 의해 뒷받침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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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일상적인 삶 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예속의 문제를 들여다봐야 한다. ‘자유’라는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단 자유와 반대가 되는 단어, 즉 ‘지배’와의 대조부터 출발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먼저, 모델 1은 ‘지배를 간섭으로 해석할 것인가?’에서 비롯된다. 이때, 자유는 ‘선택’이 될 것이다. 이것이 자유(지상)주의 모델이다. 모델 2는 ‘지배를 강제로 해석할 것인가?’이다. 이때, 자유는 ‘자율’이 된다. 자유는 도덕적이고 보편적인 모습을 하게 되어 자율적인 인간들이 서로의 인권을 존중하는 모델이다. 모델 3은 ‘지배를 예속으로 해석할 것인가?’이다. 이때, 자유는 ‘해방’이 될 것이다. 이 모델은 자유가 단순히 개인적인 추상적 차원이 아니라 좋은 공동체 체제를 통해 실현될 가치라는 점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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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 첫 번째 모델, 간섭으로부터의 자유

‘이기적 개인’이 가장 원하는 자유는 간섭으로부터의 자유이다. 따라서 첫 번째 자유의 모델은 신자유주의의 모델로서 간섭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누가 개인에게 간섭하는가? 간섭하는 주체가 누구인가? 국가가 개인의 자유를 간섭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신자유주의는 무정부주의가 아니라는 점도 여러분이 이해해야 한다. 신자유주의는 무정부주의가 아니라, ‘최소 국가’를 의미하다. 국가가 내 재산을 지켜주고 타인이 내 재산을 뺏어가는 것을 막아주기를 원하는가? 방범 역할을 해주기를 원하다. 다만 세금을 많이 걷어가는 것을 싫어한다. 왜냐하면, 세금을 많이 걷어가는 것은 로빈 후드처럼 강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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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 두 번째 모델, 강제로부터의 자유

이제, 두 번째 자유의 모델이다. ‘지배’를 ‘강제’로 해석해 보면 이런 ‘강제’의 반대말은, 칸트가 말한 ‘자율’ 개념이다. 자율이란 내가 스스로 명령을 내리는 것이고 나 스스로 규칙을 부여하는 것이다. 다만, 이때의 규칙은 개인적인 선호에 의해 생겨난 것이 아니라, 수학처럼 보편성을 지향하는 것이다. 공자님이 말씀한 경지이다.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慾不踰矩).” 내가 내 뜻대로 하지만 법도에 어긋나지 않는다, 이와 같은 경지이다. 그래서 칸트가 말하는 자유 개념이 왜 공리주의나 신자유주의의 자유와 다른지 여러분들이 여기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도덕법칙을 내게 스스로 부여하는 자율이 진정한 자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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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 세 번째 모델, 예속으로부터의 자유

자유의 세 번째 모델은 지배를 예속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간섭이나 강제는 간헐적일 수 있다. 하지만, 전근대사회의 노비나 현대사회의 비정규직처럼 예속은 지속적이라는 데 문제가 있다. 예속이라는 말의 반대말은 해방(liberation)이 될 것이다. 이것이 영화 「브레이브 하트」에서 월레스가 외친 프리덤(freedom)이다. 노동해방과 민족해방과 같은 단어가 이러한 모델을 대표하는 말이다. 이는 단순한 형식적 자유가 아니다. 해방의 자유를 의식하고 실현하려면 먼저 노예로 살아가는 예속적 삶에 대한 깨달음이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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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민주화된 이후에 민주와 자유를 얻은 듯이 보였다. 하지만 우리가 얻은 건 형식적인 민주와 형식적인 자유에 불과하다. 자유를 형식적인 자유와 실질적인 자유로도 구분할 필요가 있다. 형식적인 자유라는 말은 법적으로 자유롭다는 뜻이다. 우리는 신분제 사회의 노예는 아니다. 법적으로 1인 1표의 투표권을 가지고 있다. 법적으로 우리는 똑같이 재판받을 권리가 있다. 그런데 실제로는 ‘유전무죄, 무전유죄’이다. 이를 해결하려면 실질적인 자유, 실질적인 평등이 요구된다. 이미 지적했듯이 우리는 민주화를 통해서 형식적인 자유와 형식적인 평등을 성취했다. 그러나 우리는 사법 재판에서 자본과 권력에 유리한 판결이 얼마나 많은지를 알고 있다. 예컨대, 여러분들이 당장 법적 문제가 발생했을 때 무엇이 가장 필요할까? 제일 중요한 게 무엇인가? 돈과 연줄이다. 예컨대, 삼성 X파일 사건이 있었다. 삼성과 연관된 쪽에서 대권 주자한테 어마어마한 뇌물을 준 사건이다. 그런데, 이걸 기자가 신중하게 공표한 행위는 표현의 자유가 아니라, 사생활을 침해한 범죄라고 해서 대법원에서 유죄판결이 내려졌다. 그래도 그중에 다섯 분이 반대 의견을 냈다. 사실 반대 의견 내기가 쉽지 않다. 왜냐하면, 만약에 이런 반대 의사를 표시하면, 반재벌 성향의 법조인이 되는 것이다. 그러면 판사를 그만두고 나와 변호사로 성공하기 어렵다. 재벌에 협조하면 엄청난 수입이 보장되어 있다. 반대하는 행위는 수십억 원, 많게는 수백억 원을 포기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판사들도 소수이지만 존재하다. 그런 점에서 우리 사회가 조금씩 실질적인 자유와 평등을 성취해 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여전히 ‘법꾸라지’라는 말이 상징하듯이 ‘선택적 수사’, 심지어 ‘조작적 수사’를 하는 검사와 이에 동조하는 판사도 존재하고, 이를 여론조작으로 돕는 언론인들도 있다. 이러한 엘리트들이 제도적 권한으로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극우 포퓰리즘이 우리 시대의 문제로 부각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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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는 자유주의자의 전유물이 아니다

결론적으로 ‘자유’라는 단어는 자유주의자들의 전유물이 아니라,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생명력을 의미하는 말이다. 그래서 자유라는 단어를 극우에 양보해서는 안 된다. 참된 자유는 단지 국가로부터의 간섭에서 벗어나는 가짜 자유가 아니라, 우리가 국가 권력에 참여할 수 있는, 바로 주체적인 ‘시민으로서의 자유’이다.

일상생활에서 예속된 상태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하는 행위가 거시적인 노력 못지않게 중요하다. 왜냐하면, 미시와 거시는 서로 분리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푸코가 말한 대로 개인화와 전체화는 같은 흐름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근본 흐름은 같다. 다시 말하면 개인과 전체가 대립하는 게 아니라, 어떤 하나의 흐름은 개인을 만들고 또 하나의 흐름은 전체를 만든다. 자유주의의 흐름은 자유주의적 시민을 만들고 자유주의적 국가를 만든다. 마찬가지로 어떤 새로운 정치적 운동은 새로운 주체의 모습과 새로운 공동체의 모습을 만든다.

우리 사회에는 불행하고 굶주리는 사람들이 많다. 이는 우리에게 강제된 제도인 신자유주의적인 ‘세계 체제’ 탓이다. IMF 프로그램이라는 이름으로 1997년에 신자유주의가 우리 사회에 들어왔다. 불행하게도 구조화된 불평등과 착취와 억압이 커졌다. 영화 <기생충>과 드라마 <오징어 게임>이 신자유주의 사회의 인간 모습을 제대로 형상화하여 세계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이 영화들이 보여주듯이, 경제는 성장하는데 왜 대다수는 행복하지 않은가? 왜 많은 사람들이 자유롭지 않다고 느끼는가? 왜 정의와 평등이라는 말이 오늘날 우리 사회에 필요하다고 생각되는가? 이는 진정한 자유가 없기 때문이다. 자유가 없이는 정의도 평등도 무의미하다. 마찬가지로 정의와 평등이 없이는 진정한 자유가 성취될 수 없다. 따라서 정의와 자유, 평등과 자유를 함께 고민해야만 우리가 진정으로 자유롭고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는 제도를 구축할 수 있다.

푸코가 말한 대로 철학이란 바로 현대에 우리가 사는 우리의 현실 삶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며 동시에 우리의 현재 삶을 거부하는 것이다. 로크의 <정부론>은 오늘날 우리의 제도를 그리고 있다. 이 <정부론>에서 나온 자유와 평등이라는 언어가 미국 헌법의 언어이며 현대 자본주의 세계의 언어이다. 이처럼 고전이 우리의 제도와 틀과 우리의 삶의 방향을 만든다. 그러면 내가 어떤 고전을 읽는가가 우리 삶의 방향을 잡는 데 중요하다. 현재 만들어진 것을 이해하게 해준 거라면, 거꾸로 루소의 <사회계약론>은 우리가 이것을 다른 식으로 바꿔볼 가능성을 이야기해 주는 데 의미가 있다. 루소의 <사회계약론>은 이런 점에서 ‘진정한 자유’에 관한 정치철학적인 정립에 대단히 중요하다.

 

심장의 자유를 이성에까지

과연 트럼프적인, MB적인 극우 포퓰리스트들의 정치권력 행사는 사적으로 운영되고 있는가? 아니면 공적으로 운영되고 있는가? 중요한 것은 제도이지만 민주주의 위기라는 시대적 모순으로 인해 제도가 뒷받침하는 권한 ‘행사’가 더욱 중요한 문제로 부각되고 있는 시점이다. 과연 우리의 입법권이 국민의 의지를 제대로 반영하고 있는가? 오히려 우리 국민들의 삶을 어렵게 만드는 데 기여하고나 있지 않는가? 우리의 행정부와 사법부가 과연 우리 국민들에게 잘하고 있는가? 우리의 행정부와 사법부에 대한 국민 대다수의 불신은 널리 퍼져가고 있다.

입법, 행정, 사법이라는 정치권력이 이렇듯 국민들의 의사에 반하게 사적인 것으로 운영되고 있다면, 앞으로 이것을 어떻게 공적인 것으로 만들어야 할 것인가? 공적인 것은 개인의 자유를 억압한다는 자유주의적 의미로 이해해서는 전혀 해법이 보이지 않는다. 이미 언급한 것처럼 개인화와 전체화는 같은 흐름의 다른 표현이므로 어떤 개인과 어떤 정치 공동체라는 개념을 만들어낼 것인가가 중요하지, 공적이라고 해서 자유를 억압한다는 단순 도식에 빠져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그래서 우리들이 생각해야 될 출발점과 문제의식을 오늘 철학적으로 마련해 보고자 했다. 일단 자유라는 단어가 생각보다 원초적이고 중요하다는 점이다.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성취해야 할 가치가 자유라고 말하고 싶다. 우리는 언제나 삶의 현장에서 자유를 향한 전쟁터에 있다. ‘심장의 자유를 이성적인 자유로 실현하는 것,’ 이것이 루소, 헤겔, 마르크스의 철학적 과제였다. 내가 살아가는 데 어느 순간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다고 느낀 그 순간이 바로 철학함의 시작점이다. 루소만 따로 읽으면 그 철학적 의미가 잘 엮이지 않는다. 고전들도 서로 관계로 엮여 있기 때문이다. 루소를 칸트나 롤스와 같은 사람의 입장 속에서 읽을 수 있지만, 헤겔이나 마르크스, 니체나 푸코 같은 사람들과 연결해서도 읽을 수 있다. 그래서 어떤 계열로 책을 읽을 것인가가 중요하다. 고전들도 관계가 있으므로 여러 계열이 있다. 그래서 오늘날 다양한 계열의 철학자들이 등장했다. 한 사람의 철학도 홀로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관계의 망 속에 있고 그런 관계망 속에 서야 그 철학적 고전의 의미가 우리의 삶을 제대로 비출 수 있다.

 

빼앗긴 자유를 되찾기

우리 사회에서 독재적 억압에서 벗어난 민주화 이후에 왜 평등과 정의뿐만 아니라 다시 자유를 말해야 하는가? 그것은 자유라는 단어가 지나치게 한쪽에서 독점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유의 진정한 실현은 정의롭고 평등한 사회에서 가능하기 때문이다. 역으로 평등과 정의를 강조하다 자유를 놓쳐버리면 평등과 정의를 외치는 체제도 (구소련의 스탈린 독재정권처럼) 억압적으로 변질될 수 있기 때문이다. 박노해 시인이 절규한 것처럼 ‘적과 싸우면서 적을 닮아 버렸다’는 자기비판이 필요한 시점이다. 이 말은 독재라는 거시적인 적이 사라지면서 우리 스스로가 일상생활에서 자유의 적(敵) 노릇을 담당하고 있다는 점을 통렬하게 지적한 것이다. 자유는 자유주의의 독점물이 될 수 없다. 시장과 선택의 자유는 단지 하나의 자유가 아니라 소수만을 위한 가짜 자유이다. 이러한 가짜 자유는 모든 사람이 자유로운 진정한 자유에 역행할 수 있다. 신자유주의가 이를 입증하고 있다. 자유는 서양 근대 정치철학에서 신분제와 봉건사회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시대적 열망을 담은 주요한 가치어가 되었다는 점에서 자유는 단지 근대적인 것만도, 자유주의적 것만도 아니다. 자유가 있어야 인간이 인간다울 수 있다. 자유는 인간다움의 기초이다. 이런 자유를 실현할 수 있는 제도를 만드는 것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과제이다. 정의는 평등한 자유를 실현하는 제도의 원칙이다. 공정은 자유주의적 정의관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지점이다. 소수의 횡포로 다수가 억압받고 착취당하는 사회는 정의롭거나 공정하지 않다. 이를 능력주의로 공정하다고 표현하는 것은 공정을 훔친 격이다. 물론 공정으로서의 정의는 진정한 정의로 가는 디딤돌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 루소, 헤겔, 마르크스가 주장한 것처럼 모든 사람이 자유로운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 진정한 정의이다. 민주주의가 위협에 받은 지금이 도둑맞은 공정을 되찾아 빼앗긴 자유를 실질적으로 실현하는 정의로운 시스템을 만들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