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는 ‘악의 평범성’이 아니라 ‘도덕적 용기의 부재’이다. [이종철 선생의 에세이 철학]
♦ 아래 글은 2022년 3월 1일 <내외 신문>(http://www.naewaynews.com/) [이종철 칼럼]에 게재된 원본 기사에 일부 사진을 첨부하여 <ⓔ 시대와 철학> [이종철 선생의 에세이 철학] 코너에 게재한 것임을 밝힙니다.
문제는 ‘악의 평범성’이 아니라 ‘도덕적 용기의 부재’이다.
이종철(연세대)
미국의 여성 정치 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나치 전범 학살자인 아이히만의 법정을 참관하고 내놓은 이야기는 널리 알려져 있다. 본인이 유태인으로서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건너온 아렌트 입장에서는 도대체 나치 전범들은 어떻게 생겨 먹은 인간들이기에 그런 반인륜적 범죄를 저질렀는가가 궁금했다. 아렌트는 이 법정을 참관하기 위해 한 학기 강의를 반납하기까지 했다. 아렌트가 아이히만의 법정 진술을 오랫동안 관찰하고 나서 내놓은 진단은 너무나 평범했다. 아렌트는 유태인 학살과 같은 천인공노할 범죄를 저지른 아이히만이 괴물 같은 존재가 아니라 그냥 이웃집에서 평범하게 만날 수 있는 사람 좋은 아저씨 같다고 했다. 실제로 아이히만은 대단히 가정적이고, 딸아이들 한 테는 좋은 아빠이기도 했다고 한다. 그런 그가 어떻게 그런 범죄를 저질렀을까? 여기서 아렌트가 내놓은 진단이 저 유명한 ‘악의 평범성’이다. 범죄를 저지르는 괴물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이웃들이 그런 짓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렌트에 따르면 이런 평범한 사람들이 아무런 생각 없이 행동하다 보니 저런 범죄에 휩쓸리고, 자신의 범죄 행위에 대해 아무런 반성도 하지 않은 것이다. 사고의 부재가 저런 엄청난 범죄를 야기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인간이 전혀 사고를 하지 않을 수는 없다. 아렌트는 여기서 제대로 사고하지 않았다고, 말하자면 반성적이고 비판적으로 사고를 하지 않다 보니 저런 행동을 했다고 덧붙인다. 아렌트가 여기서 도출한 ‘악의 평범성’은 나치의 행태에 대한 거의 고전적인 해석처럼 여겨지고 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젊은 시절 하이데거와 야스퍼스 밑에서 철학을 공부한 명민한 학생이 보기에 나치에 부역한 그녀의 스승 하이데거가 별 생각 없이 행동한 것으로 판단할 수 있을까? 철학자의 나라 독일, 유럽에서도 가장 지성적이라고 자부했던 독일의 국민이 과연 아무런 생각 없이, 비판적이거나 반성적인 사고를 하지 않아서 나치에 열광하고, 유태인 학살과 같은 인종 청소에 동조를 했단 말인가? 나는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이라는 진단이 틀렸다고 본다.
평범한 사람들이 생각 없이 행동해서 저런 범죄를 저지른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사소한 일을 할 때도 무수히 많은 생각을 한다.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라는 파스칼의 말이나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의 말을 빌릴 것도 없이 생각과 이성적 사고는 인간을 다른 동물들과 구분하는 종적인 차이(종차)이기도 하다. 그런 인간이 생각이 없이 행동했다는 말은 그 말의 의미를 백분 이해한다 하더라도 적확한 진단이 아니다. 인간은 생각이 없이 행동하다가 범죄를 저지르고 악에 동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이기적 욕망에 휩쓸리고 도덕적인 판단과 행동을 이끌 수 있는 용기가 부족해서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이다. 도덕은 오래 전 플라톤이 이야기했듯 인간을 구성하는 이성이나 욕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전사(military man) 들의 용기의 원천인 의지에서 나오는 것이다. 따라서 도덕은 원인과 결과를 따지는 이성에 의해 자동적으로 발휘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본능적인 감성과 욕구에 사로잡힌 상태에서 나올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전장 터에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무릅쓰고 싸움에 임하는 전사들의 용기와 의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렇길래 플라톤은 이성의 덕이 지혜이고, 욕구의 덕이 절제라고 한 반면 의지의 덕은 전사들에게 요구되는 용기라고 말했다.
도덕적 행동을 의지에서 찾는 플라톤의 전통은 근대의 도덕 철학을 종합하고자 한 칸트에게서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칸트는 “이 세계 안에서, 아니 그 밖에서조차 우리가 무제한적으로 선하다고 볼 수 있는 것은 오직 선의지(Good will)뿐이다.”라고 말했다. 고대인들이 덕(virtue)이라고 간주했던 우수한 두뇌, 강인한 체력, 뛰어난 판단력 같은 것들도 그 밑에 선 의지가 깔려 있지 않다면 오히려 가장 큰 악덕이 될 수 있다. 빼어난 재능을 가진 자들이 얼마든지 가장 나쁜 악인이 될 수 있으며, 그런 의미에서 선의지만이 선한다고 칸트는 말한다. 그런데 이런 선 의지는 저절로 발휘되는 것이 아니다. 성경에 나오는 ‘선한 사마리아 인’의 이야기를 보자. 밤에 산길을 가는데 한 사람이 부상을 당해 신음을 하고 있는 광경을 보자. 산길을 갈 때 가장 두려운 존재는 산짐승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이다. 그런데 밤중에 산길에서 부상당한 사람을 보았을 때 어떤 생각이 들까? 대부분은 머리끝이 솟는 두려움을 느끼면서 자기도 똑같이 저런 봉변을 당하지 않을까 걱정이 앞설 것이다. 이 경우 감성적 판단은 끊임없이 두려움을 피하고 싶어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여러 가지 정황을 고려하는 이성적인 판단에 따르더라도 이성은 이 자리를 피하는 것이 합리적 행동이라고 자위하고 싶어할 것이다. 하지만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도덕적인 양심이 있는 사람은 두렵기도 하고 도망치는 것이 상책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저 사람을 내가 구하지 않으면 죽을 수도 있다는 연민이 앞서 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도덕적 행동은 이런 감정적 두려움과 이성적 판단에도 불구하고 용기를 내서 부상당한 사람을 돕는 것이다. 도덕이란 이처럼 전사들이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의무감에 따라 행동하듯, 감정과 이성을 넘어서 마땅히 선의지(양심)가 명령하는 바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다. 내가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에 반대하는 이유는 그들이 생각 없이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이기적 욕망을 나치가 대변하고 있고, 그들이 반대할경우 닥칠 수 있는 불이익이 두려워서 나치에 동조하거나 적극적으로 부역 행위를 하는 데 있다. 그것은 결코 생각이 없는 것이 아니라 본능적인 욕구와 합리적인 이유에 따른 행동인 것이다.
추운 겨울날 박근혜 정부가 저지른 행태에 대해 ‘이게 국가냐’고 분노하면서 촛불을 든 시민들이 5년도 채 되지 않아서 정권 교체를 강하게 요구하고, 석고대죄를 해도 시원찮을 한나라 당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당명만 바꿔서 활개를 치고, 게다가 특수부 검사 출신이 어느 날 갑자기 편집증 환자 같은 수사로 하루아침에 스타가 돼서 대통령이 되겠다고 나서는 현실을 도대체 어떻게 설명을 할 수 있을까? 문재인 정권이 과거 명박-근혜로 이어지는 보수당의 실책과 같은 큰 실수를 저질렀거나 나라를 덜어 먹을 만큼 부패한 정권도 아닌데 ‘정권 교체’를 강하게 요구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문재인 정부가 최저 임금을 가파르게 상승시키다 보니 자영업자들에게 부담을 준 측면이 있고, 부동산이 급등함에 따라 적지 않은 국민의 원성을 산 부분이 있지만 그것 자체는 정책적인 실수일 뿐 커다란 실책이라고 볼 수는 없다. 문 대통령이 윤 석열처럼 화끈하게 행동하지는 못해도 늘 노심초사 국민을 생각하면서 정치를 한 노고를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정치적인 자질이나 자격 면에서 크게 부족한 윤 석열이 대선 가도에서 많은 지지를 받고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 이러한 대열에는 단순히 태극기 부대나 보수적인 노인네들만 참여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는 기존 정부와 정치에 참여했던 정치인들과 법조인들, 그리고 대학의 지식인들도 대거 참여하고 있다. 과연 이들의 이런 행동에 대해 아렌트처럼 생각 없이 행동하는 것이라고 딱지를 붙일 수 있을까? 만약 그렇게 단순화시킨다면 본질을 크게 벗어난 것이다.
필자가 보기에 이러한 세력들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는 꼴 보수의 경우처럼 적극적으로 동조하고 지지하는 세력이 있다. 이들은 진영 논리에 나포된 경우가 있고, 자신들의 욕망을 진영 논리와 일체화시키는 경우가 있다. 몽골의 초원에서 경험한 것이다. 어린아이 한 두 명이 수많은 양떼들을 몰고가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양들의 정신이 아이의 정신에 의해 나포되었기 때문에 가능하다. 마찬가지로 나치를 지지하던 수 많은 동조자들은 이런 식으로 히틀러의 나치에 의해 정신적으로 나포되었기 때문에 그런 행동을 할 수 있었다. 이런 현상은 멀리 갈 것도 없이 트럼프 체제하에서도 별로 다르지 않게 나타나기도 했다. ‘영혼이 없는 대중’이란 바로 이들을 가리키는 적절한 표현이라 할 수 있다.
다음으로 진영 논리에 자신의 정체성을 일치시켜 적극적으로 동조하는 세력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보수적 욕망의 대리인이나 대변자를 윤석열과 국민의 힘에서 찾고 있는데, 이처럼 정치가 원시적 욕망에 기대는 순간 부패하고 타락한 예는 역사적으로 많다. 한국의 보수는 보수 본래의 가치를 존중하고 고수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내 것 -내 가족, 내 아파트, 내 진영 등-을 지키려는 원시적 욕구를 우선시 하는 데서 더 정체성을 찾기가 쉽다. 보수의 정치 평론가 조 갑제가 올바로 이야기했듯, 한국의 보수는 ‘가진 게 돈 뿐’이란 말이 보수의 탐욕을 잘 드러내주고 있다. 물론 이런 욕구가 한국 경제의 성장에 큰 견인차 역할을 했다는 것을 부인하지는 않겠다. 하지만 정치적 차원에서의 효과는 정반대다. 이런 원시적 욕망이 그들의 행동을 정당화해주기 때문에 그들을 대변하는 국민의 힘 당과 정치 초년병인 윤 석열을 앞세우려는 것이 아닐까?
마지막으로 상황에 따라 양쪽 진영을 오락가락하는 이른바 회색 집단의 경우가 있다. 이들이 과거 일말의 양심으로 촛불을 들고 거리에 나섰는 지는 몰라도 지금 이들은 기득권을 위협한다는 명분하에 탐욕적인 보수의 뒷전으로 숨고 있다. 지식인 집단과 같은 하이 클래스에게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모습이다. 하지만 그들도 윤 석열이 세계 10권 안에 든 대한민국 호를 이끌기에는 자질이나 자격 면에서 크게 부족하다는 것을 다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윤 석열의 지지 대열에 서는 것은 양심을 지키기에는 그들의 도덕적 의지가 미약한 탓이 크기 때문이다. 과거 독일에서 히틀러가 등장할 때 가장 지적으로 우수한 독일의 지성인 집단이 보여준 행태가 이와 비슷하다. 그들은 아렌트가 지적한 것처럼 생각 없이 행동한 것은 아니다. 그들은 히틀러 체제의 문제를 적극적으로 인식했지만 그것을 비판하기에는 자신들이 입게 될 불이익에 대한 정서적 두려움과 이성적 고려를 더 중시하는 세력이다. 한 마디로 자신들의 알량한 양심을 지키기에 필요한 전사들의 용기가 너무나 부족한 세력이다. 이런 자신들의 부끄러운 모습을 감추려고 막무가내 정권 교체의 명분을 내세워서 자신들이 보기에도 절대적으로 부족한 윤 석열을 적극적으로 동조하고 지지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윤 석열에 대한 그들의 지지와 동조는 기득권 세력이 보일 수 있는 가장 비겁하고 부끄러운 행태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과거 히틀러 체제하에서 보여주었던 지식인 집단의 행태와 크게 다르지 않다.
아렌트가 말한 것과 다르게 ‘생각 없는 행동’이나 ‘제대로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악을 행하는 것이 아니다. 악은 단순히 선의 부재가 아니라 적극적인 실체를 가지고 있다. 그들은 훨씬 더 이기적이고 교활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에게 부족한 것은 선과 악을 결단하는 삶의 매 순간에서 악을 버리고 선을 택하려는 선의지와 그것을 관철시키려는 전사의 용기이다. 그리고 이러한 선의지와 전사의 용기야말로 플라톤과 칸트가 강조해 마지않았던 도덕의 본질이고 도덕적 인간이 갖추어야 할 덕목이라 할 수 있다. 이런 덕목을 외면하는 자가 대한민국의 미래의 지도자가 될 수는 없다.
출처 : 내외신문(http://www.naeway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220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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