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제국주의와 현재 – 일제와 현대 [썩은 뿌리 자르기]

[썩은 뿌리 자르기]

일본제국주의와 현재

– 일제와 현대 –

글: 이순웅(숭실대 강사)

공(功)과 과(過)를 구별하지 못하는 사람들

민주당을 이끌어가는 사람들이 당의 정통성을 계승한다면서 거명하는 사람 중에는 박순천(1898~1983)도 있다. 거명되는 사람 중 유일하게 여성이다. 5선 국회의원, 민주당 총재를 지낸 바 있는 한국 여성 정치인 1호.

지난 광복절 직후인 8월 16일, 부산 기장군의회는 박순천의 생가 복원을 위한 추경 예산 편성을 논란 끝에 찬성 4표, 반대 2표, 기권 1표로 승인했다. 논란이 된 주요 이유는 그의 친일 행적 때문이다. 대부분의 민족주의자들이 그랬듯이 식민지 시절 초기에는 박순천도 3.1만세 운동에 가담한 적이 있지만, 1940년 12월 25일 이광수가 발기인 대표였던 황도학회의 발기인이 되면서부터는 본격적인 친일 활동에 들어간다. 황도학회는 ‘내선일체의 완성’을 목표로 황도 사상을 교육, 선전하기 위해 조직된 단체다.

이후 박순천은 조선임전보국단 산하 부인대 지도위원으로 참여하였다. 조선임전보국단은 1941년 10월 결성된 최대의 친일 민간단체로서, 부인대에는 김활란(이화여대 총장), 고황경(서울여대 총장), 박마리아(자유당 시절 2인자인 이기붕의 부인), 박인덕(인덕대 설립자), 배상명(상명대 설립자), 송금선(덕성여대 총장), 유각경(한국 YWCA 창립), 이숙종(성신여대 설립자), 임숙재(숙명여대 총장), 임영신(중앙대 설립자), 황신덕(추계예대 설립자) 등이 망라돼 있었다.

1943년 3월, 경성가정의숙(지금의 서울 중앙여고)의 교장 황신덕과 부교장 박순천은 전교생을 불러놓고, 학교를 살리기 위해 한 명이라도 근로 정신대에 지원해달라고 호소한다. 그 결과 당시 2학년(18세)이던 김금진 학생이 지원에 나섰다. 김금진은 일본에서 총알을 만드는 군수공장으로 끌려가 해방이 될 때까지 고초를 겪었다. 2년여 동안 생리를 못할 정도로 몸이 망가졌지만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가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그리고 1983년 박순천이 사망했을 때는 서울 화곡동 같은 동네에 살았지만 문상도 가지 않았다. 해방 뒤에 찾아보기는커녕 사과 한마디 하지 않은 박순천을 스승으로 인정할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박순천의 생가 복원 사업에 관해 기장군 관계자는 “향토 인물이자 독립운동가인 박 여사의 생가가 방치돼서는 안 된다는 민원이 잇따르고 있고…..” “박 여사의 ‘과’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공’이 훨씬 많은 만큼 사업 추진에는 문제가 없다”고 말했다.1)

‘공’이 훨씬 많다니? 도대체 무엇이 ‘공’이고 무엇이 ‘과’란 말인가. 박순천의 경우 이른바 ‘공과’라는 것이 서로 비교 대상이나 될 수 있는가. 설사 공과를 비교할 수 있다 하더라도 과가 더 크다. 교육자로, 정치가로 행세하려면 친일 행적을 감추고 만세 운동에 가담했던 것을 부풀렸을 터이니 사기꾼임에 틀림이 없고, 제자를 사지에 몰아넣고도 사과 한마디 없었으니 철면피에 후안무치한 인간 아닌가.

박순천의 더 큰 과는 과를 공으로 포장하여 감추면 과가 과로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데 있다. 이런 점에서 보면 기장군 관계자는 박순천의 사기행각에 놀아날 뿐만 아니라 또 다른 박순천식 ‘과’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어디 기장군 관계자뿐이겠는가. 당의 정통성을 박순천 같은 사람에게서 찾는 민주당 역시 무엇이 공이고 과인지,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구별하지 않음으로써 바람직한 역사의식을 갖는 데에 큰 걸림돌이 되고 있다.

공과를 진정으로 따지는 일은 끝까지 독립운동을 했던 사람들에게나 해당한다. 예를 들어 독립운동상의 ‘공’이 있으나 전술상 또는 방법상의 실수가 있었다면 그런 것이 ‘과’이다. 공과라는 것은 같은 일을 계속한 사람에게나 해당하는 것이지 이리 붙었다 저리 붙었다 하는 변절자에게는 해당하지 않는다. 식민지 역사를 겪은 우리에게는 끝까지 독립운동을 한 사람에게만 과보다 많은 공이 있다.

야당다운 야당이 없는 나라 – 여전히 살아있는 일본제국주의의 잔재

제1야당이라고 하는 민주당은 왜 친일 인사에 관해 냉정하게 평가하지 못할까? 많은 굴절이 있지만 자신의 뿌리가 한민당에 있기 때문인데, 한민당은 일제 시대의 지주세력이 중심이 돼서 만든 당이다. 민주당의 흐름(한민당→민국당→민주당)은 이승만의 자유당뿐만 아니라 박정희의 공화당, 전두환·노태우의 민정당에 대한 대항 세력 역할을 일정부분 해왔다. 그러나 한민당은 그 뿌리가 일지주세력인 만큼 친일 혐의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그렇기 때문에 집권 정당과 권력 투쟁은 할 수 있어도 그 권력의 원천이 정당성, 정통성에서 나오는 것은 아니었다.

남한에서는 야당다운 야당의 뿌리가 싹부터 잘렸다. 건국준비위원회를 꾸리면서 임시정부를 준비했던 여운형의 암살, 미군정에게 권력을 내놓으라고 요구하면서 조국의 분단을 끝까지 막으려 했던 김구의 암살, 이승만에 의해 농림부 장관으로 임명되기도 했던 조봉암의 죽음 등은 정통성 없는 지배 권력과 정통성 없는 야당의 시대를 예고하는 것이었다.

친일 세력을 대거 기용했던 이승만이 좌파 운동 경력이 있는 조봉암을 농림부 장관으로 임명한 데에는 그에게 토지 개혁을 맡겨 민심을 달래고 얻는 한편, 한민당의 물적 기반을 흔들어놓겠다는 의도도 있었다. 조봉암은 북한의 ‘무상몰수 무상분배’ 토지개혁과는 달리, 지주에게 억울한 희생을 시키지 않고 농민에게는 염가로 분배하는 방법을 채택했다. 그러나 이것은 한민당 세력을 만족시킬 수 없는 것이었다. 조봉암이 6개월 만에 장관직에서 물러나는 데에는 한민당의 집요한 공격이 한몫을 했다.

이후 조봉암은 진보당을 결성하고 대통령 선거에서 민국당의 이시영 후보보다 20만 표를 더 얻는 등 선전(善戰)했으나 이승만의 최대 정적으로 부상하는 바람에 곧 간첩 누명을 쓰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야 했다.2) 진보적 개혁주의자, 한국판 사회민주주의자의 최후이다.

이후 자유당, 공화당, 민정당으로 이어지는 ‘근본도 없는 정치꾼들’의 집권 정당은 한민당에 뿌리를 둔 이른바 민주당의 견제를 받으면서 권력을 행사했다. 김영삼의 3당 합당이 가능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친일의 뿌리, 계급적 기반으로 볼 때 서로가 서로에게 그다지 적대적인 세력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3당 합당(민자당)은 신자유주의의 길을 가기 위한 보수 세력들 간의 야합이었으며, 김대중의 평민당은 민자당에 대한 전라도적 안티테제에 가까운 정당이었다.

김대중으로부터 정치적 ‘적자(嫡子)’임을 인정받음으로써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노무현 역시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노무현 스스로도 말했듯이 한미 FTA 협상 테이블에 나섰을 때 개혁은 이미 실패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그 역시 대연정을 말함으로써 본인이 김영삼의 정치적 ‘적자’이기도 하다는 점을 보여주려 했다.

일본이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하면 핏대를 올리는 사람이 많지만, 독도 주변 해역을 공동어로구역으로 설정했던 때가 김대중 정부 시절이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은 것 같다. 김대중 정부의 태도는 “지금은 곤란하니 기다려 달라”고 말한 이명박 대통령의 태도와 질적으로 큰 차이가 있다고 할 수 있을까. 역대 정부 간의 차이에만 주목하고 닮은 모습은 보지 않으려 하면 사실이 사실대로 보이지 않는다.

야당이라면 모름지기 현재 정권을 잡지 않고 있다는 뜻뿐만 아니라 여당과는 질적으로 다른 대안을 갖고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지금의 야당 민주당은 진보의 외피를 쓴 거대 보수 야당일 뿐이며 지금의 여당과는 권력을 나누는 데에만 관심이 있는 일종의 정치적 동반자이다.

둘 다 나쁜 놈이라는 양비론 넘어서기 – 더 나쁜 놈과 덜 나쁜 놈

한때 민주인사로 행세했던 김동길 교수는 전두환 정권 시절에 이른바 양비론을 펼쳐 젊은이들의 웃음거리가 된 적이 있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어중간한 태도를 취해 결국에는 전 정권을 정당화하는 데 기여했기 때문이다. ‘좋은 놈’과 ‘나쁜 놈’이 분명해 보였던 시절, 그의 태도는 양비론의 전형으로 여겨졌다.

그런데 문제는 ‘둘 다 나쁜 놈인데 한 쪽이 더 나쁜 놈일 경우 덜 나쁜 놈이 좋은 놈 행세를 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서유럽이나 미국에서 만들어진 제2차 세계대전 관련 영화나 다큐멘터리의 경우 나치스트나 파시스트, 일본의 군국주의자는 ‘나쁜 놈’으로 그려진다. 물론 그들과 싸우는 미국, 영국, 프랑스 등의 세력은 좋은 놈으로 그려진다. 그런데 이 ‘좋은 놈들’은 ‘나쁜 놈들’을 나쁘다고 말하면서 자신들이 나쁜 놈들이라는 점을 감추고 있다. 그들 역시 식민지를 한 뼘이라도 더 가지려고 했던 제국주의 세력일 뿐이라는 점을 말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사회 자체가 감옥과 같은 사회일 경우, 감옥을 만들어놓고 감옥 밖의 사회는 감옥이 아니라고 우기는 것과 같다.

얼마 전 고은 선생이 노벨 문학상 후보에 올랐다가 또 다시 상을 받지 못한 일이 있었다. 8년째의 고배라고 한다. 하지만 노벨 문학상 수상을 거부했던 사르트르를 생각하면 그다지 섭섭해 할 일도 아니다. ‘알제리도 프랑스다’라는 식으로 식민지 알제리의 독립 문제에 무심했던 카뮈는 노벨상을 받은 반면에 알제리 독립을 지지했던 사르트르는 그 상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고은 선생의 행보로 봐서 사르트르와 같은 태도를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다만 다음과 같은 통계는 왜 고은 선생이 상을 받기 어려운지 말해주는 것처럼 보인다. 1901년부터 2009년까지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된 사람의 국적을 보면 프랑스 14회, 미국 11회, 영국 9회, 독일 7회, 스웨덴 7회, 이탈리아 6회, 스페인 5회, 소련 4회, 노르웨이 3회, 덴마크 3회, 일본 2회 순이다.3)

11개 국가가 104분의 71을 차지하고 있는데, 이들 나라는 모두 식민지 건설의 역사, 정복·점령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반면에 식민지였거나 타국으로부터 정복을 당했던 국가는 아일랜드 4회, 폴란드 3회, 칠레 2회 순이다. 노벨상은 식민지 경험이 있는 약소국에게 가끔씩 떡을 하나씩 던져줌으로써 이 상이 제국주의자들의 잔치라는 것을 감추고 있는 것은 아닐까.

자본과 권력은 걸인, 노숙인, 실업자와 같은 사회적 약자를 필요로 한다. 그들에게 일정한 복지 혜택을 줌으로써 선행을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사회적 약자는 그들이 무능하기 때문이 아니라 자본의 필요에 의해 존재한다.

‘당선 가능성’이라는 이유로 보수 야당에게 표를 던지거나 노벨상을 염원할 때, 세상이 죄의식도 없고 부끄러움도 모르는 강자, 자신의 모습을 이전보다 훨씬 더 세련되게 감추는 강자의 이해관계에 맞춰 움직인다는 것을 보지 못할 수 있다. 그래서 이제는 양비론적 의미에서의 둘 다 나쁜 놈이라는 관점이 아니라 애초부터 둘 다 나쁜 놈이었다는 관점으로 되돌아가 더 나쁜 놈과 덜 나쁜 놈에 관해 이야기해야 한다. 바로 이것이 사실을 사실대로 볼 수 있는 출발점이고 우리 안에 여전히 살아있는 일본제국주의를 극복하는 길이다.

*주석

1) 이상의 내용은 방학진(민족문제연구소 사무국장), “제자를 사지로 보낸 자”, 『작은책』 2010년 10월호(제184호), 도서출판 작은책, 118~121쪽에서 발췌했음.

2)아직까지도 조봉암의 묘비에는 비문이 없다. 가족들은 그가 간첩 혐의를 벗을 때까지 비문을 새기지 않겠다고 했다.

3) http://preview.britannica.co.kr/spotlights/nobel/npw/npwp/win_lite.html

번역을 통해 본 일제와 현대 [썩은 뿌리 자르기]

[썩은 뿌리 자르기]

번역을 통해 본 일제와 현대

글: 강경표 (중앙대 박사과정수료)

사회진화론의 수용과 진화

누구나 알고 있지만 청산하지 못한 슬픈 근대 이야기, 역사적 가정이 가능하기만 하다면 지워버리고 싶은 수치스러운 역사, 우리는 이 시대를 일제식민시대라고 부른다. 학문의 수용 과정에서도 일제식민시대의 영향력은 막강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가 사용하는 학문 용어의 대부분이 일본을 통해 수입되고 정리된 서구의 용어들이라는 사실은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진화(進化)’ 또한 일본에서 수입되고 지금까지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과학 용어다. ‘과학(科學)’이라는 용어 또한 일본에서 만들어진 개념이다. 물론 일본에서 만들어진 용어라고 해서 모두가 나쁜 것은 아니다. 청산해야 할 과거의 유물도 아니다. 그러나 어떤 용어가 번역이 되고 개념이 형성되어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을 생각할 때 일제식민시대를 거치면서 자리 잡은 학문용어들에 대한 반성은 불가피하다.

안타깝게도 근대 서구 학문을 주체적으로 수용할 수 없었던 시대에 우리는 중국과 일본을 통해 ‘진화(進化)’라는 개념을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일제식민시대에는 사회적?제도적 제약으로 이?공학 분야에서 전문 연구자로서 경력을 쌓을 수 있었던 조선인은 매우 드물었기 때문에 ‘진화(進化)’라는 개념 또한 학문적 또는 과학적으로 수용되었다기보다는 사회?정치적 맥락에서 수용되었다는 사실이다.

과학용어를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하면 관찰용어와 이론용어로 구분할 수 있다. ‘진화(進化)’라는 용어는 관찰용어라기보다는 이론용어에 가깝다. 다윈의 진화론이라는 이론체계가 성립된 이후 ‘진화(進化)’라는 용어의 사회적 파급력은 대단했다. 그렇게 탄생한 학문이 바로 사회진화론이다. 그러나 사실 사회진화론은 학문이라기보다는 당시 서구열강의 우월함을 이론화하고 정당화한 교리에 가깝다.

사회진화론의 파급력은 대단했다. 일본을 포함한 서구열강뿐만 아니라 그들의 지배를 받는 약소국과 식민지에서도 계몽의 논리 또는 자강의 논리로 사회진화론이 수용되었고 우리도 예외는 아니었다.

우리 사회에 사회진화론이 유입된 경로는 크게 세 가지로 볼 수 있다. 근대 유학생 1호로 알려진 유길준에 의한 미국식 사회진화론과 윤치호를 통한 일본식 사회진화론, 박은식, 신채호, 안창호를 중심으로 한 중국식 사회진화론이 그것이다. 이 세 가지가 서로 확연히 구분되는 것은 아니지만 나름의 특징을 갖는다. 미국식 사회진화론과 일본식 사회진화론은 서구열강의 강자논리가 그대로 적용된다는 점에서 그 맥락이 비슷하지만 중국식 사회진화론은 당시의 중국 사정이 우리와 비슷하다는 측면에서 강자의 논리를 극복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진화(進化)’라는 용어가 수용되는 과정에서도 중국과 일본의 영향력은 거의 동시적이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중국식 개념은 사라지고 일본식 개념만이 남았다.

‘Evolution’의 번역과 수용

그렇다면 이제부터는 직접적으로 진화 개념의 형성을 살펴보자. ‘진화(evolution)’라는 단어는 라틴어의 ‘에볼루티오(?vol?t?o)’에서 유래한다. ‘에볼루티오(?vol?t?o)’는 ‘풀어 가는 행위(action de d?rouler)’, ‘굴러가면서 실어 나르다, 두루 돌아다니다(parcourir)’라는 뜻으로 사용이 되었다. ‘에볼루티오(?vol?t?o)’는 ‘두루마리처럼 말린 것이 펼쳐지는(unrolling)’ 이라는 뜻으로 사용되기도 되기도 했다.

또한 우리 중 일부는 ‘진화(evolution)’라는 개념이 다윈의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이 용어를 진화론적인 의미에서 처음으로 사용한 사람은 지질학자 라이엘이다. 그는 『지질학의 원리』 제 2판에서 개체발생(ontogeny)과 계통발생(phylogeny)을 ‘진화(evolution)’라는 하나의 용어로 모호하게 뭉뚱그려 사용했다. 이는 진화 개념이 처음부터 다의성을 함축할 수밖에 없었음을 뜻한다.

다윈이 『종의 기원』 초판에서 ‘진화(evolution)’라는 명사형 단어를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음은 비교적 잘 알려져 있다. 그는 책의 말미에서 ‘진화했다(evolved)’라는 동사를 한 번 썼을 뿐이다. ‘진화’ 대신 그가 썼던 것은 ‘변이를 수반한 계승(decent with modification)’이라는 표현이었다. 그가 진화라는 단어를 선호하지 않았던 한 가지 중요한 이유는 이 개념이 이미 목적론적인 발전 경향을 의미하는 방식으로 발생학에서 사용되었던 단어였기 때문이었다.

‘진화(進化)’라는 개념을 열렬히 전파시킨 사람은 다윈이 아닌 다윈과 동시대의 철학자 겸 사회학자 스펜서였다. 스펜서의 사회진화론의 핵심은 생명체가 진화의 과정에서 단순한 것에서 복잡한 것으로, 균질적인 것에서 이질적인 것으로 지속적으로 진보해왔듯이 사회, 정부, 산업, 상업, 언어, 문학, 과학, 예술의 발전 같은 우주의 모든 것들의 진화가 동일한 과정을 겪는다는 것이었다. 스펜서에게 진화는 생명체와 사회를 포괄하는 원리였다.

‘진화(進化)’라는 개념이 정확하게 정립되지 않았던 시기에 우리도 사회진화론을 통해 진화 개념을 받아들인다. 이 과정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중국식 번역과 일본식 번역의 차이다.

중국에서도 처음에는 ‘Evolution’의 음가를 그대로 차용하여 ‘이허루샹(義和綠尙)’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후에 옌푸(嚴復)가 헉슬리의 『진화와 윤리:Evolution and Ethics』(1894)를 『천연론 : 天演論』이라고 번역하면서 진화를 ‘천연(天演)’이라고 옮기는데, 여기서 ‘연(演)’은 ‘드러남’이나 ‘전개’를 뜻하며 천연이라 함은 ‘자연의 펼쳐짐 또는 드러남’으로 원어인 ‘Evolution’의 뜻에도 가깝다. 물론 옌푸는 ‘진화’라는 말도 함께 사용을 하고 있다. 이때 진화는 인종의 교화 혹은 사회의 발전이라는 뜻으로 자연선택의 결과만을 일컫는 지금의 진화와는 다르다.

일본에서는 가토 히로유키(加藤弘之)에 의해 사회진화론이 수용되고, 사회진화론적 맥락에서 진화론의 용어들이 번역되기 시작한다. 가토 히로유키는 일본 메이지시대의 대표적인 관변지식인이다. 그는 원래 입헌정치를 주장했던 인물이었으나 일왕에게 강의를 한 이후부터 사상을 전향한다. 그는 『진켄신세츠(인간신설) : 人權新說』(1882)에서 ‘우승열패(優勝劣敗)’가 ‘세계 운행의 법칙’이라고 말하며, 『쿄사노켄리노쇼코(강자의 권리 경쟁) : 强者の權利の競爭』(1893)을 통해 사회진화론을 바탕으로 하는 전제군주 중심의 국가유기체론을 주장하여 일본제국주의 이념을 기초를 다진다.

당시 서구 학문을 독자적으로 수용할 수 없었던 우리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진화론의 개념들을 받아들임에 있어 중국과 일본의 영향력은 무시할 수 없다. 또한 어떤 번역이 더 원어의 개념에 부합하면서도 잘 된 번역인가를 생각할 때,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진화(進化)라는 용어가 ‘Evolution’에 적절한 번역인가는 숙고해볼 필요가 있다.

비교를 쉽게 하기 위해 진화론의 주요 개념들 중 중국에서 만들어진 번역어들과 일본에서 만들어진 번역어들을 비교해 보면 다음 표와 같다.

 

정리된 표에서 보면 우리가 사용하는 번역어들 중 상당수가 일본식 번역에서 의존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물론 일제침략을 같이 겪었던 중국 또한 현재는 일본식 번역을 사용하고 있다. 이미 고정되어 사용되고 있는 번역어들을 바꾸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사소해 보이는 용어 하나에도 역사적 아픔과 제국주의의 망령이 녹아들어있는 것이다.

부활하는 사회진화론과 진화

우리가 사용하는 ‘진화(進化)’라는 용어는 사회진화론의 토대 위에서 수용되었다. 사회진화론을 토대에 두고 번역이 이루어지다보니 진화(進化)는 자연스럽게 ‘진보(進步)’를 수반하는 것처럼 보인다. 과연 진화는 진보를 수반할까? 혹시 번역어에 이미 내포되어 있는 사회진화론의 망령을 아직도 떨쳐 버리지 못한 것은 아닐까? 부케티츠에 따르면 진보는 과학적 개념도 아니며 진화론적인 개념은 더더욱 아니다.

필자의 짧은 과학적 견지에서도 근대의 사회진화론은 과학이 아니다. 이름을 바꿔 진화심리학이라고 부르든 사회생물학이라고 부르든 간에 사회진화론이 가진 사회?정치적 맥락들이 고스란히 녹아있다. 물론 현대의 진화심리학과 사회생물학의 과학적 성과는 주목할 만하다.

현대에 들어와 사회진화론적 제국주의의 망령은 ‘통섭(Consilience)’이라는 번역에서 드러난다. ‘통섭(Consilience)’은 학문적 제국주의의 의미를 내포한 말이다.

다른 학문들이 일방적으로 자연과학에 수직적으로 종속된다는 의미를 가진 이 용어는 ‘통섭(統攝)’이라고 해야 마땅하지만 한 국내 학자에 의해 ‘통섭(通攝)’이 되어 버렸다. 정확하게 말하면 국내 역자는 ‘통섭(統攝)’이라고 번역함을 명시하지만, ‘통섭(通涉)’의 의미도 포함하고 있다고 한다.

물론 번역도 하나의 창조물이고 번역자의 의도나 시대적 상황에 따른 의미가 추가될 수 있다는 점에서 번역의 자유는 있다. 그러나 번역어가 원래의 뜻을 왜곡하거나 또는 숨겨진 의도가 있을 때에는 번역의 적절성 여부를 검토해야만 한다. 문제는 국내 역자의 의도를 떠나서 사회생물학을 피상적으로 아는 사람들이 ‘통섭(統攝)’을 ‘통섭(通攝)’으로 이해한다는 것이다.

‘통섭(統攝)’은 ‘도맡아 다스린다’는 뜻으로 원래 불교와 성리학에서 흔히 사용되는 용어다. 원효의 화엄사상에 대한 해설에서 자주 등장하며 조선 말기 실학자 최한기의 기(氣) 철학에도 등장한다.

‘통섭(通攝)’은 재미있는 신조어다. ‘통섭(通涉-사물에 널리 통함)’이라는 단어를 바탕으로 ‘통섭(統攝)’과 결합되어 만들어 진 것으로 추정되는 이 단어는 굳이 말을 만들자면 ‘통하여 다스린다’는 뜻이 된다. 뜻을 달리하여 ‘끌어당겨 통하게 하다’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번역의 억지스러움은 여전히 남는다. ‘다스린다’라는 말을 ‘끌어당기다’로 바꿔 이해한다고 해서 그 용어가 가진 원래의 뜻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통섭은 수직적 학문 통합의 의미인 ‘통섭(統攝)’에서 조금은 수평적이고 학제적 연구와 비슷해 보이는 ‘통섭(通攝)’으로 변모했지만 바뀐 것은 없다. ‘통섭(統攝)’이 생물학을 중심으로 한 학문 통합을 꿈꾼다면, ‘통섭(通攝)’은 유비쿼터스를 중심으로 인문학과 예술을 하나의 콘텐츠로 종속 시키는 기능을 하고 있다.

필자는 앞서 과학용어는 크게 관찰용어와 이론용어로 구분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통섭(統攝)’은 어떠한 과학용어도 아니다. 다시 말해 과학적 탐색을 통해 만들어진 관찰용어도 이론용어도 아닌 것이다. 그것은 단지 인간이 지식을 바라보는 하나의 태도에 불과하다.

서구 사회는 사회진화론을 근간으로 하는 우생학이 사회에 적용될 때 생길 수 있는 폐해를 아우슈비츠라는 공간을 통해 극단적으로 경험했고 그에 대한 반성 또한 철저했다. 그에 비해 우리는 청산하지 못한 친일의 역사 속에 추정만 가능한 일제의 생체 실험과 우생학적 견지에서 시행되었던 나병 환자들의 격리와 불임 수술이 전부였고 그에 대한 비난은 있었어도 반성은 없었다. 사회진화론이 지배하는 근대적 틀 속에서 애국계몽운동을 하던 윤치호는 제국주의에 스스로 무릎을 꿇고 강자의 논리에 순응하며 영원한 친일파로 남았다, 서정주는 스스로 자신을 종천순일파(從天順日派)라고 불렀으며 친일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필자의 우려는 여기에 있다. 컨실리언스(Consilience)의 국내 역자는 자신의 번역은 ‘통섭(統攝)’이지만 통섭의 의미가 이중적이라고 했다. 통섭을 받아들인 다른 학자들은 통섭을 ‘통섭(通攝)’이라고 이해한다. 그러나 ‘통섭(通攝)’ 아닌 ‘통섭(統攝)’의 의미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의 뇌 속에 각인되고 있다.

일제식민시대 사회진화론은 우리에게 자강과 독립의 의지를 심어주기도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강자의 논리에 순종할 수밖에 없는 태도도 만들어냈다. 또 다시 강자의 논리에 무릎 꿇는 지식인들이 나오지 말라는 법은 없는 것이다.

 

감성의 탯줄을 자르지 마라! -자연과 자본 [썩은 뿌리 자르기]

[썩은 뿌리 자르기]

감성의 탯줄을 자르지 마라!

– 자연과 자본 –

글: 박종성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강사)

감성의 거주 공간으로서의 자연

우리는 자연과 매개될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둠벙은 생명의 물줄기를 품고 있다가 논과 밭에 물을 대주는 공간이다. 둠벙은 나의 어릴 적 놀이터이자 학습장이고 휴식의 공간이자 타인과 만나는 교류의 공간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둠벙은 고요하지만 끊임없이 운동하기 때문에 썩지 않고 많은 생명을 잉태하고 산출한다. 이렇듯 둠벙은 생명과 생명을 이어주는 물질(Materie)의 공간이다. 인간의 측면에서 산과 강이나 생명과 생명을 이어주는 둠벙은 결국 인간과 자연을 매개해 주는 물질이다.

물질(hyle, materia) 개념은 나무를 뜻하는 ‘Holz’에서 비롯되며, 일상적으로 ‘이브의 나무’, ‘뱀의 나무’, ‘출생의 맹아’로서의 자연(mater, natura), 어머니(Mutter)의 어원이 된다. 즉 자연은 인간에게 어머니(Mutter)의 탯줄과 같은 것이다. 나아가 만상의 자연(physis, 自然)이란 ‘사물들이 스스로(自), 그러한(然)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때 물질이 정신 또는 생명과 대조적인 개념임에 반해, 자연(physis)의 일차적 의미는 ‘성장’이다. 그러므로 ‘성장’을 의미하는 자연은 정지와 죽음보다는 생명과 운동의 의미를 갖는다. 따라서 자연의 파괴는 생명의 공간을 파괴하는 것이다.

정신이 거주할 자리가 문학, 예술, 역사, 종교라고 한다면, 감성이 거주할 자리는 자연이라 할 수 있다. 희랍 최초의 종교시인 헤시오도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들을 위해 대지는 풍성한 식량을 산출하고, 언덕 위에선 참나무가 그의 꼭대기에선 상수리나무가 열매를 맺으며 그 가운데 줄기엔 벌레가 모인다; 그들의 양들은 푹신한 양모를 기르고, 그들의 아내는 자신들을 닮은 아이를 배며…”

이 인용문에서는 인간 행위와 자연 사이에 공감적(共感的) 관계가 드러난다. 감성이 거주할 자리를 파괴하는 것은 인간에게서 자연과의 공감적 관계를 끊어버리는 것이다. 공감의 물질적 공간의 파괴, 이것은 휴식의 공간, 인간이 숨 쉴 수 있는 생명의 여백을 메워버리는 것이다. 왜냐하면 휴식(休息)은 사람(人)과 나무(木)가 같이 숨을 쉬는(息)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4대강 사업, 홍익 재단의 성미산 파괴는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인간의 공감적 관계인 자연과 전체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밀레투스학파에게 있어 이러한 생각은 물활론으로 드러나며, 불교에서는 인연(因緣) 사상으로 집약된다.

자연과의 공감적 관계의 회복

오늘날 인간과 자연의 문제는 환경오염과 생태계 파괴의 문제가 전인류의 생존과 직결되기 때문에 더욱더 우리의 삶과 밀접한 것으로 다가오고 있다. 이러한 문제의 원인으로 근대 자연관을 들 수 있다. 아도르노에 따르면 이러한 근대의 정신은 계몽주의이다. 계몽주의는 자연의 지배로부터 해방되려는 인간의 노력을 의미하는데, 이때 계몽주의는 인간 주체의 해방과 자연 지배를 동일시하고 정당화하기 위해 자연을 지배의 대상으로 전락시킨다.

‘동일성 원리’(das Prinzip der Identit?t)는 자연과 사회 가운데서 주체와 같지 않은 다른 모든 것을 동일한 하나의 형식으로 포섭하여 주체와 같게 만들려는 지배원리의 정신적 형식이다. 동일성 원리는 “사물은 언제나 동일한 것, 즉 지배의 대상이라는 데에 그 본질이 있다.” 왜냐하면 주체가 자연을 자기동일성의 표준, 즉 “계산가능성과 유용성의 척도”에 맞춰 측정할 수 있도록 자연을 객체의 지위로 격하시키기 때문이다.

계몽주의는 이성에 의한 자연의 지배를 동반하면서 자연에 의해 인간이 무제한적으로 지배받는 상황을 벗어날 수 있는 원리를 제공했지만 동시에 인간을 사회적 속박에 처하게 했다. 왜냐하면 자연에 대한 지배는 필연적으로 기술과 노동 활동을 기반으로 하여 사회적 구성이 위계적으로 체계화되어 실현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회적 지배 속에서 인간은 자신의 내적인 자연을 억압하게 된다.

내적 자연에 대한 지배를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오디세이 신화는 계몽주의라는 역사적 과정의 필연성을 드러낸다. 즉 사이렌의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선원들의 귀를 밀랍으로 막고 자신을 돛대에 밧줄로 묶은 오디세이의 행위는 ‘감각의 통제’를 시도하는 계몽적 이성의 전형을 드러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의 다양한 능력을 나타내는 인간의 내적 자연이란 육체와 환상, 욕구와 감정 등을 의미한다. 이제 자연에 대한 지배는 내적 자연에 대한 자기 통제, 즉 감성적인 것의 억압, 육체와 본능의 길들임으로 내면화된다. 이렇듯 이성에 대한 신뢰를 넘어 그것에 대한 맹목적인 신봉은 인간과 자연의 화해 불가능함으로 귀결된다.

이러한 새로운 종류의 야만에서 벗어나기 위한 시도의 일환으로 아도르노는 이성적 폭력의 대상이 되는 경험 또는 감성을 구출하는 것이 동일성 원리를 그 핵심으로 하고 있는 계몽주의의 폭력성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길임을 제시한다.

아도르노는 이러한 탈출의 공간을 열어 놓을 수 있는 단초를 “미감적 동일성(?sthetische Identit?t)”에서 찾는다. 여기서 아도르노는 단순히 이성에 대한 감성의 우위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근대의 이성과 감성이라는 이분법적 틀을 극복하기 위해 등장하는 개념이 ‘미감적 동일성’인데, 이는 여전히 동일성의 원리이기 때문에 감각적 질료라는 측면에서 혼란스러움을 통일하면서, 동시에 미감적 동일성이기 때문에 감성(Sinnlichkeit)을 억압하지 않는다.

아도르노는 자신이 제시하는 ‘미감적 동일성’의 개념을 구체화하기 위해 칸트와 프로이트를 대조시켜 본다. 그 핵심은 양자 모두 공통적으로 미적 경험의 원천을 주관적 원리에서 찾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칸트와 프로이트의 차이점을 전자는 욕구 능력의 부정을 통해, 후자는 욕구 능력의 긍정을 통해 미학의 내용을 구성하고 있다는 것에서 찾고 있다. 욕구 능력의 부정을 의미하는 것으로 칸트는 ‘무관심적 만족’을 주장한다. 그리하여 “칸트의 이론은 욕구 충족 이론으로서의 프로이트 이론에 대한 안티테제가 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아도르노는 칸트가 “최초로 미감적 반응이 직접적인 욕구와는 다르다는 사실을 인식”하였다고 평가한다.

아도르노가 주장하듯이 동일성 원리를 그 핵심으로 하여 운영되는 자본주의적 체계에서 마침내 “질(質)을 상실한 자연은 양(量)에 의해 분할된 혼란스러운 단순한 ‘소재’로 격하되고 전능한 자아는 단순한 ‘가짐’(haben), 즉 ‘추상적 동일성’이 된다.” 이러한 방식으로 욕구하는 인간은 소유하는 인간에 다름 아니다. 따라서 “무관심적 만족”은 소유욕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것으로서 자본주의 체제의 안티테제가 된다. 체제라는 외부에서 강제된 욕구, 즉 소유욕은 목적 없는 합목적성과 대립되는 것이다.

칸트는 무관심한 만족으로 취미판단을 규정하는데, 이는 어떤 이해관계도 없는 상황에서 판단을 내리는 것으로 타인도 동일한 판단을 내릴 것이라는 보편성을 획득할 수 있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인간과 자연의 화해를 위해

우리는 근대의 자연관 자체를 시대적 상황에 맞게 재설정해야만 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아도르노에게 계몽의 자기 파괴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주체는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 왜냐하면 주체성 자체가 이미 지배와 억압의 산물이며 계몽의 변증법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맑스는 인간이 인간을 지배하는 과정에서 지배와 착취로부터 벗어날 잠재력을 보았다. “자연은 인간의 비유기적 몸이다.” 그리고 인간과 자연의 통일은 노동 과정을 통해 실현된다. 자연을 단순히 인간의 활동을 위한 매개로 전락시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자연의 일부이기 때문에 자연의 자기 매개로서 인간을 바라보는 것이다.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있어서 세 차원, 즉 자연 존재로서의 인간이라는 차원과 노동, 그리고 감각이라는 차원을 통해 맑스는 자연과 인간 사이의 관계 설정을 인간의 자기실현이나 자연의 자기 운동 중 어느 한쪽으로도 환원시키지 않고 있다.

인간과 자연의 통일성은, 칸트에 따르면 미감적 만족에서 얻는 쾌락(Lust)와 감각적 만족에서 얻는 즐거움(das Angenhme)의 구분을 넘어서는 것이고, 아도르노에 따르면 그것은 칸트의 이러한 취미 판단의 구분을 통합시킨 미감적 동일성의 실현이다.

만약 우리가 ‘감각(Sinn)’을 정신적 감각(생각, 지각)과 실천적 감각(의지, 사랑)을 포함하는 넓은 의미로 받아들인다면 이성 중심적 사유에서 벗어날 가능성을 갖게 된다. 이러한 넓은 의미로 사용된 감각은 칸트적 의미에서처럼 단순히 대상의 ‘수용’에 그치지 않는다. 인간의 감각은 대상에 작용하여 대상의 의미를 드러낸다. 음악은 인간에게 음악적 감각을 일깨운다. 하지만 아름다운 음악도 비음악적 귀에게는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한다.

인간과 자연 사이의 관계가 붕괴된 핵심적인 원인은 자본주의적 체제에 있다. 이러한 체제에서 인간의 감각은 소유라는 감각적 취향에 한정될 수밖에 없다. 인간의 감각이 풍부해지는 범위만큼 감각의 대상도 풍부한 의미(Sinn)을 가질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자연과 인간의 화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우선 모든 감각을 소유 감각으로 환원시키는 사회에 대한 지양이 필요하다. 우리가 그려 볼 수 있는 더 나은 사회는 맑스가 말하듯 “전면적이고 심오한 감각을 지닌 풍부한 인간”을 만들어 내는 사회일 것이다.

인간과 자연의 화해는 감각과 대상의 상호작용 속에서 실현된다. 인간이 자연과의 관계맺음에서 자연을 자신의 비유기적 몸으로 본다면, 인간의 감각은 대상을 통해 풍부해질 것이고 인간의 감각이 풍부해지는 만큼 자연도 억압에서 풀려나 인간과 자연이 통일될 수 있을 것이다.

자연은 인간이 지배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자연이 인간의 지배에서 부활하면 자연은 인간의 병을 치유하는 주체로 등장할 수 있다. 미학적 측면에서 보더라도 인간의 감각이 보다 풍부하게 발전한다는 것은 자연이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동일성으로부터의 탈출을 모색하고자 할 때는 가치법칙의 총체성이 개별 주체에 선행하여 현실을 지배하는 자본주의라는 체제의 문제를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가치법칙이라는 도구적 이성이 다른 무엇보다 선행하며 이것이 사회 현실의 총체성을 구성하고 있는 상황에서 국가, 사회, 자연의 문제는 분리되어 고찰될 수 없을 것이다.

그들만의 더 많은 부를 창출하기 위해 ‘살리기’라는 이름으로 자연 속의 인간, 인간 속의 자연을 ‘죽여서’ 자연과 생명의 순환을 끊어버리려고 하는 우리 시대의 욕망이 불러들일 파국에 대해 누가 책임을 지려고 할까.

막무가내식 토건 이데올로기로 무장한 이명박 정부에 의해 저질러지는 역사적?민중적?생태적 과오인 4대강 사업, 아니 눈 가리고 아웅하는 운하사업을 우리는 아이들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이 사회에서 규정된 방식으로, 이 시대가 훈육한 욕망의 작동 방식으로 다시 세계와 자연을 규제하고 욕망하는 우리의 존재양식을 되돌아보자. 그리고 아직 살아 숨 쉬는 우리 안의 자연, 풍요로운 감성의 강에 깨끗한 물이 돌게 하자.

‘녹색성장’의 형용모순 – 자연과 자본 [썩은 뿌리 자르기]

[썩은 뿌리 자르기]

‘녹색성장’의 형용모순

?-? 자연과 자본 –

 

글: 박민철 (건국대 박사수료)

4대강 살리기 사업과 ‘녹색성장’.

‘악마를 보았다’보다 더욱 잔인하며, ‘동물의 쌍붙기’(2002년 영화진흥법이 개정 시행된 이후, 첫 제한상영가 판정을 받은 북한 영화)보다 더 자극적이며, ‘죽어도 좋아’(두 번째 제한상영가 판정)보다 훨씬 더 노골적이어서, 이들 영화와 마찬가지로 국가가 나서서 방영을 금지하라고 요청했던 PD수첩 ‘수심 6M의 비밀’편을 보았다.

PD수첩 ‘수심 6M의 비밀’편에 담긴 내용을 정리하자면, 1. 4대강 살리기 사업은 그동안의 홍보와는 달리 홍수나 물 부족 문제 해결에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으며, 2. 애초의 계획과는 달리 대운하 사업과 유사한 방향으로 변경되었으며, 3. 현재의 계획 하에서 강에 호화 여객선을 띄울 수 있는 수심 6미터를 유지하기 위해 무리한 공사비용이 지출되고 있으며, 4. ‘녹색성장’이라는 본래의 의미와는 달리 생태계 파괴가 우려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핵심은 무엇보다도 4번이다. ‘녹색성장’이라는 거대한 패러다임 아래에서 시행되는 4대강 살리기 사업이 그에 걸 맞는 모습으로 진행되고 있는지의 여부가 가장 본질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명박 정부는 2008년 8월 15일 경축사를 통해 ‘저탄소 녹색성장’을 ‘新국가발전 패러다임’으로 내세웠다. 수사법에 놀라울 만치 능한 그들이 내세운 이 말은 꽤나 섹시했고, 그에 따라 국가 주도 사업 및 국가 정책 맨 앞에 사용되고 있다. 그 중 4대강 살리기 사업은 4대강을 ‘녹색성장’의 거점으로 만들자는 야심찬 계획이다.

그런데 PD수첩 ‘수심 6M의 비밀’편이 말하고 있는 비판의 가장 핵심은 4대강 살리기 사업≠‘녹색성장’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PD수첩 ‘수심 6M의 비밀’편이 주장하는 ‘4대강 살리기≠녹색성장’이라는 비판은 어쩌면 비판자체가 성립하지 않을 수 있다. PD수첩과 우리가 생각하는 ‘녹색성장’과 이명박 정부가 생각하는 ‘녹색성장’의 의미는 ‘녹색성장’이라는 단어에 담긴 형용모순으로 인해 전혀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녹색성장’에 담긴 형용모순

국어사전에 따르면 형용모순은 ‘형용하는 말이 형용을 받는 말과 모순되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면, ‘둥근 사각형’이나 ‘작은 거인’, ‘소리 없는 아우성’ 등이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명박 정부가 고안한 ‘녹색성장’이라는 단어에도 표현적인 형용모순이 담겨져 있다.

우선 이명박 정부가 녹색성장이라는 단어를 어떤 의미로 사용했는지는 몰라도, 이 단어를 의미적으로 풀어보면 ‘녹색의 성장’과 ‘녹색적인 성장’ 등으로 나눠볼 수 있다. 그런데, ‘녹색성장’에 담긴 형용모순으로 인해, 이 단어가 의미하는 것은 ‘녹색의 성장’과 ‘녹색적인 성장’은 결코 아니다.

‘녹색성장‘에서 우선 ’녹색‘의 대표적인 대응어는 곧 ‘자연’이다. 다들 알다시피 자연은 ‘스스로 그러함’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반면 여기에서의 ‘성장’은 인위적인 참여와 조작으로 그것을 발전시키고 보다 나은 상태로 개선시킨다는 의미를 포함한다. 물론 인위적인 참여와 조작이 없는 ‘자연적인 성장’도 가능하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가 고안한 ‘녹색성장’에서 성장은 무분별한 삽질과 땅파기를 의미하는 것이며 자연적인 성장과 발전이라는 의미를 애초부터 담고 있지 않다. 이렇게 볼 때, 자연성(自然性)과 인위성(人爲性)라는 구도 속에서 ‘녹색의 성장’은 의미적으로 형용모순에 빠진다.

그렇다면 ‘녹색성장’이 ‘녹색적인 성장’을 의미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녹색적인 성장’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이것은 성장이 곧 녹색의 의미와 가치를 포함해야 함과 동시에, 이러한 녹색의 의미와 가치를 성장이라는 구체적인 모습을 통해 드러내야 함을 말한다. 그런데 성장이 녹색의 의미와 가치를 포함하는 일, 그리고 녹색의 의미와 가치가 성장이라는 구체적인 모습 속에서 바깥으로 드러나는 것은 쉽지 않다.

예를 들어 보자. ‘녹색성장’과 같은 의미에서 ‘성장’이라는 단어가 쓰이는 것은 ‘경제성장’이다. 이것의 대표적인 표현방식은 일정 기간 동안 한 국가에서 생산된 재화와 용역의 시장 가치를 합한 것을 의미하는 GDP를 들 수 있다. 하지만 GDP에는 눈에 보이는 가치만이 표현될 뿐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는 담겨 있지 않다.

반면에 녹색은 눈에 보이는 가치가 아니다. 보다 정확히 얘기하자면, 녹색이 갖는 가치는 눈에 보이는 이익과 지표로 전환되지 않는다. 예컨대, 산을 깎아 레저시설을 만들고 그 산에서 나온 나무로 어떤 것을 만들 때 GDP는 늘어나지만, 산 자체가 우리에게 주는 안락함과 편안함, 삶의 재충전과 회복 등은 GDP라는 수치에 포함되지 않는다.

또한 강을 파서 그 모래로 무엇을 만들거나, 강 주위를 개발하여 대단위 레저시설을 만들 때 GDP는 늘어나지만 강 자체가 주는 눈에 보이지 않는 혜택과 이익은 GDP라는 수치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성장이라는 가시성(可視性)과 녹색이라는 비가시성(非可視性)의 구도 속에서 역시나 ‘녹색적인 성장’은 의미적으로 형용모순에 빠진다.

‘녹색성장’이라는 형용모순 속에서 4대강 살리기 사업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애초에 그들이 생각했던 방식으로 잘 진행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물론 이 형용모순을 알고서도 활용한 건지 아니면 모르고 사용한 건지는 중요하지 않다. 노골적으로 얘기해 전자라면 ‘나쁜 놈’이고 후자라면 ‘모자란 놈’이다.

그들의 무모한 경제주의적 사고방식

이러한 형용모순은 이명박 정부가 생각하는 ‘녹색’과 ‘성장’의 의미가 우리가 생각하는 그것과는 다르기 때문에 발생한다. 여기서 그들이 생각하는 ‘녹색’은 성장이라는 만고불변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하나의 수단에 불과하다. 그리고 성장은 눈에 보이는 지표로 확인가능하고 계산가능한 것이어야 한다. 즉 녹색이 갖는 가치와 의미는 수단에 불과할 뿐 목적과는 별 상관없는 것이며, 눈에 보이는 지표와 이익들로 환원되기 위해 바쳐진 제물과 같은 것이다.

이명박 정부가 말하는 ‘녹색성장’은 이렇게 보자면, ‘녹색의 성장’도 아니며 ‘녹색적인 성장’도 아니다. 그들이 말하는 ‘녹색성장’은 ‘녹색을 통한 성장’이다. 이것은 녹색을 희생시켜 눈에 보이는 이익으로 환원하는 것, 녹색이 지닌 의미와 가치를 성장이라는 자본주의적 시스템 속에 포함시키는 것, 그리하여 산을 깎고 강을 파내어 구체적인 이익을 창출하는 것, 궁극적으로는 눈에 보이지 않는 본질적인 가치까지도 눈에 보이는 이익으로 바꾸는 것이다.

세상 모든 것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자신만의 본질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다. 그러한 가치들이 자본주의적 시스템을 통하면 눈에 보이는 이익으로 변하게 된다. 자본주의적 시스템 속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들은 부차적인 것이며, 그것들이 눈에 보이는 이익으로 환원될 때에만 대접을 받을 수 있다. 즉 자본주의는 잠재적으로 담겨 있는 가치를 눈에 보이는 이익으로 환원시키는 것을 최우선적 목적으로 한다.

그런데 녹색이 갖는 가치와 비슷한, 눈에 보이는 이익들로 환원되지 않는 가치들이 존재한다. 그러나 자본주의적 시스템 이 녹색의 가치들은 훼손되어 버린다. 이명박 정부의 무모한 경제주의적 사고방식에 의한 ‘녹색을 통한 성장’은 바로 이러한 자본주의적 사고방식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녹색의 의미와 가치를 경제주의적 사고방식으로 규정하는 이명박 정부의 인식틀 속에서 성장의 의미와 가치들도 경제주의적 패러다임을 고스란히 이어받았다. 그들에 의하면 성장은 개조 및 개발과 동의어이다. 앞 선 예처럼, 성장은 GDP로 대표되는 수치로 평가되어야만 하는 것이며 눈에 보이는 이익들을 우리들 앞에 제시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경제주의적 사고방식과는 다른, 우리들이 바라보아야 할 진정한 의미에서의 ‘성장’은 인간 삶을 질적으로 보다 윤택하게 만드는 보편적 가치들의 증대를 의미한다. 이 보편적 가치들에는 도덕성, 역사적 책임의식, 공동체의식과 같은 거대한 것들로부터 배려와 존중, 사랑과 베풂, 평화와 공존 등과 같은 아주 구체적인 가치들도 포함된다. 이것들은 결코 자본주의적 시스템 속에서는 눈에 보이는 이익들로 나타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이것들의 증감의 결과가 눈에 보이는 지표와 표시들로도 나타나지도 않는다.

녹색의 의미와 가치들, 그리고 성장의 의미를 일면적으로 규정하는 그들의 무모한 경제주의적 사고방식 속에서 ‘녹색성장’은 하나의 형용모순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녹색의 성장’도 아니며 ‘녹색적인 성장’도 아닌, 녹색을 희생시켜 눈에 보이는 성장을 이룩하자는 ‘녹색을 통한 성장’은 그들이 만들어낸 ‘녹색성장’의 형용모순이 낳은 필연적인 결과물이다.

녹색의 진정한 가치: ‘녹색을 통한 성장’에서 ‘녹색을 위한 성장’으로

어찌됐건 섹시한 수사법에 강한 현 정부는 ‘녹색성장’이란 말을 만들어 냈다. 미려한 수사에 반해 참혹한 결과를 가져온 ‘녹색성장’을 그들의 무모한 사고방식에서 건져내 그것이 가진 본질적인 의미를 되살려야 한다.

그것의 첫 걸음은 ‘녹색’과 ‘성장’의 의미를 본래의 그것으로 되돌리는 것이다. ‘녹색을 통한 성장’이 아닌 ‘녹색을 위한 성장’이 그것이다. 이것은 곧 ‘녹색’이 갖는 가치를 증대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녹색의 가치는 굳이 여기서 얘기하지 않아도 우리들 모두 체감하고 있을 것이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우리들의 삶에 구체적인 이익으로 돌아오는 녹색의 가치를 보존하고 증대시키는 것은 ‘녹색을 통한 성장’이라는 형용모순에서 벗어날 수 있는 하나의 해결책이 될 것이다.

물론 이것은 소위 ‘생태근본주의’를 주장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들의 무모한 경제주의적 사고방식을 또한 아주 급진적인 주장으로 중화시켜야 할 필요성이 있어 보인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바람이 있다. 서울의 조그마한 개천을 복원시킨 경험으로 전국의 4대강을 살리겠다고 했으니, 그분의 ‘사이즈’로 볼 때, 이제 앞으로 하고자 하시는 일은 전 세계의 5대양을 살리는 일일 것이다. 만약 그러한 일이 정말로 실현된다면, 그 땐 제발 ‘녹색성장’이란 말을 버려주십사 하는 바람뿐이다.

 

4대강 사업 그리고 자본과 환경 – 자연과 자본 [썩은 뿌리 자르기]

[썩은 뿌리 자르기]

4대강 사업 그리고 자본과 환경

– 자연과 자본 –

글: 강경표(중앙대 박사과정수료)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거짓말

대한민국은 자본주의 국가다. 최소한 우리 중 일부는 대한민국이 자본주의 국가라는 사실을 의심치 않으며, 그렇게 믿고 살고 있다. 그러나 대한민국 헌법에 명시된 것은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이라는 사실뿐이다. 헌법 어디에도 대한민국이 자본주의 국가라는 사실이 명시되어 있지 않다. 단지 헌법 119조 1항에 “대한민국의 경제 질서는 개인과 기업의 경제상의 자유와 창의를 존중함을 기본으로 한다”라고 명시되어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이 자본주의 국가라는 강력한 믿음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사회주의와 민주주의가 반대되는 개념이라는 그릇된 믿음으로부터 자연스럽게 결합된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그리고 슬그머니 민주주의의 어깨를 밟고 일어선 자본주의까지 이러한 그릇된 믿음 뒤에는 우리의 교육, 거대언론사, 대기업이 있어왔고, 현재에는 자본주의 전도사 노릇을 하는 이명박정부가 자리하고 있다.

경제학의 기본 가정은 유한한 자원을 완전한 정보를 가진 이기적인 사람들이 수요와 공급에 따라 나눠 갖는 것이다. 그리고 수요와 공급은 “보이지 않는 손”이 조절한다. 자원이 유한하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다. 수요와 공급의 원리도 중학교 과정 정도만 알아도 대강은 이해한다.

그러나 문제는 완전한 정보를 소유한 사람과 “보이지 않는 손에 있다. 우리들 중 누구도 시장에 대한 완전한 정보를 갖고 있지 못하며, “보이지 않는 손”을 가진 구세주도 없다. 시장에 대한 완전한 정보를 소유한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비합리적인 믿음에 근거한 시장 경제 원리는 자본주의의 신앙과 같다. 생각해 보면 금방 답이 나온다. 시장에 대한 완전한 정보를 소유하고 있다면 언제나 확실한 선택을 할 수 있다. “보이지 않는 손”따위는 필요가 없어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정보 수준이 불완전하다는 사실을 인정해보자. 그러면 “보이지 않는 손”을 가진 구세주를 기다려 볼만도 하다. 그러나 정보가 부족할 때 우리는 마냥 기다리기만 하는가? 아니다. 우리에게는 불완전한 정보를 가진 사람들끼리 일을 처리하는 방법이 있다. 서로의 의견을 듣고 조율하며 협의하여 무언가를 결정하는 방식, 그것이 바로 민주주의다.

우리의 실생활에 있어 경제 활동은 시장경제의 원리가 아니라 서로의 의견을 듣고 협의하는 활동으로 이루어진 것이지 “보이지 않는 손”따위를 기다리는 행위가 아닌 것이다.

“보이지 않는 손”은 원래 가격에 의한 자율적 결정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자본주의 이념을 철통같이 신봉하며 시장경제 원리를 부르짖는 이명박정부도 “보이지 않는 손”을 기다리지 않는다. 먼저 나서서 결정을 하고 우리에게 그것을 강요한다. 바로 4대강 사업이 그것이다. 그들은 말한다. 대통령이 결정했다. 따라라. 다 너희를 위한 일이다. 내가 곧 너희의 “보이지 않는 손”이다.

공유지의 비극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4대강

환경문제를 설명하는 몇 가지 이론 중에 특히 국가가 소유한 공유지 문제를 다룰 때에는「공유지의 비극(The Tragedy of the commons)」이라는 이론이 있다. 1968년에 게렛 하딘에 의해 발표된 이 이론은 환경철학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비교적 잘 알려져 있다. 모든 사람들에게 개방된 목초지에서 각각의 개인은 가능한 많은 가축을 기르려고 한다. 결국 개인의 이익 증대를 위해 공유지는 황폐화되며 공유지의 자유는 모두에게 파멸만을 가져온다는 것이 이 이론의 골자다.

우리의 4대강에도 이 이론은 적용되었다. 4대강 사업을 위해 국가의 공유지인 하천 둔치에서 농사를 전면 금지한 것이다. 어떻게 생각하면 국가 공유지에서 농사를 짓는 행위를 막는 것은 공유지의 비극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다. 그러나 진정한 공유지의 비극은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명박정부의 4대강 사업 자체에 있다.

공유지 비극 이론은 게임이론이다. 하딘의 공유지의 비극을 게임이론으로 재구성하면 다음과 같다. 공용의 목초지가 있다고 가정을 하고 이 목초지에서 한 철 동안 잘 먹여 키울 수 있는 가축의 상한선을 X라고 하자. 목동은 A와B 둘뿐이라고 가정하면 2인 게임을 만들 수 있다. 게임의 룰은 협동전략과 배반전략이 있을 뿐이다. 이 게임에서 협동전략은 각각의 목동이 X/2마리의 가축을 방목하는 것이다.

반면 배반 전략은 이윤을 남기고 팔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최대한 많은 가축을 방목하는 것이고 그 숫자는 X/2보다 크다. 두 목동이 각각 X/2마리에 가축만을 풀어 놓으면, 각각은 10단위의 이윤을 얻고, 반면 둘 모두가 배반전략을 선택하면 둘 다 아무런 이윤을 얻을 수 없다. 만일 한명은 X/2마리만 풀어 놓고, 다른 한명은 원하는 만큼 많은 가축을 방목한다면 그 배반자는 11단위의 이윤을 얻고 상대방은 -1의 보상을 받는다. 두 목동이 각각 배반 전략을 사용한다면 각자의 이득은 0이 된다.

우리는 A와B 목동 모두가 협동전략을 사용하는 것이 좋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경제학에서 가정하는 이기적인 개인은 배반전략을 사용할 것이기 때문에 결국 공유지는 황폐화되고 만다는 것이 공유지 비극 이론을 게임이론으로 재구성했을 때의 결과이며, 이를 막기 위해서는 국가의 강력한 규제를 필요로 하게 된다. 이러한 이론은 공유지를 점유해 농사를 짓는 농민에게도 쉽게 적용이 되며, 이러한 논리에 의한 국가 규제가 어쩌면 당연한 것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4대강 사업과 같은 규제의 주체가 되어야 할 국가가 나서서 하는 공유지 사업에도 이러한 이론이 적용될 수 있을까? 공유지의 비극을 극복할 수 있는 가장 큰 역할을 수행하는 국가가 나서서 공유지의 비극을 초래하고 있다면, 사실 해답은 없다.

환경을 자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자원 할당에 도움을 주는 판단의 기준으로 제시하는 것에는 최소한 비용편익분석(cost-benefit analysis)과 쾌락가치법(Hedonic Price Methods), 여행비용법(Travel Cost Method) 같은 것들이 있다.

비용편익분석은 소위 프로젝트 투자의 최적 수준을 연구하는 것이다. 어떤 프로젝트로부터 끌어낸 이익과 이 이익을 얻는 데 들어간 비용 사이의 차이를 극대화 하여 현재 들어간 비용보다 미래의 편익을 수학적 모델로 계산해 보는 것이다.

쾌락가치법은 시장이 존재하지 않고, 그에 따라 가치가 관찰될 수 없을 경우에 사회적 가치들을 평가하기 위한 방법 중의 하나인데 전체 가치에 기여하는 각각의 속성들이 가진 가치를 통계적으로 이용한다. 예를 들어 공장 옆에 있는 집과 시골에 있는 집이 거래가 없어 시장 가격이 없다면 땅의 가치가 아닌 공기 오염도, 위치, 크기, 풍경 등 집 전체에 포함되는 각각의 속성들의 가치를 통계적으로 따져보는 것이다.

여행비용법은 사람들이 어떤 자원에 도달하기 위해 여행하는데 걸리는 시간과 거리는 이용자에게 그 자원의 가치를 추정해 볼 수 있다는 것에서 기인한다. 이 기법은 사람들이 교외에서 자연을 향유하는 기쁨 같은 것을 평가하는 지표가 된다.

세 가지 방법 모두 단점이 있지만 그래도 최소한 경제에서만이라도 가치판단의 준거가 될 수 있는 기준들을 제시한다. 그러나 이명박정부는 국가 수준 최대의 토목공사를 시행함에도 불구하고 최소한의 평가기준이 될 수 있는 비용편익분석 자료도 없고, 나머지 자료도 없다. 특이한 것은 4대강의 전신인 한반도대운하사업추진 때에는 잘못된 분석이긴 해도 비용편익분석과 뜬금없는 얘기지만 “대운하를 요트로 여행하면 즐거울 것”이라는 나름의 여행비용법 같은 이명박 대통령의 말 정도는 있었다는 것이다.

또 다른 공유지의 비극은 주체가 누구이든 간에 경제적 이익을 위한 개발로부터 시작된다는 사실을 이명박정부가 인지하지 못한다는 사실로부터 출발한다. 공유지는 특정한 개인이나 사적 집단이 아니라, 국가 또는 공공단체에 의하여 소유되는 토지를 말한다. 다시 말해 특정한 건설사의 이득을 위해 개발되거나 대통령의 의지 또는 정부의 논리에 의해 개발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를 구성하는 국민의 합의가 있을 때에만 신중한 절차를 거쳐 그 개발이 가능하다.

그러나 이명박정부는 공익을 내세우면서도 사실은 특정 건설사와 자신을 지지하는 세력들을 위한 권력 행사를 하고 있다. 국회 정치부 기자들 사이에서는 이명박 대통령이 4대강 사업에 목을 매는 이유가 대형건설사들에게 선거자금을 받았기 때문일 것이라는 의구심을 제기하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시민일보 칼럼 2010.3.15). 언론의 주식 지분을 소유한 4대강 건설사는 16곳이고(미디어오늘 2010.3.24), 4대강 사업에 편승한 지자체들 또한 물놀이 전용보와 같은 막개발을 추진하고 있다(한겨레 2010.3.15).

민주적 합의 그것이 우리가 원하는 환경철학의 출발이다

자연에는 “보이지 않는 손”은 없다. 더구나 자연에는 숨은 의도가 없으며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 “보이지 않는 손”은 경제학자들이 부족한 이론을 보충하기 위해 개발한 개념 장치에 불과하며, 사실 그 “보이지 않는 손”의 이면에는 특정한 이익을 가진 자들과 부의 재분배를 원하지 않는 자들, 더 많은 부를 얻고 싶은 자들의 협의가 있을 뿐이다. 다시 말해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모종의 은밀한 합의가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 손”일 뿐이다.

그들의 “보이지 않는 손”은 말이 없는 자연에 더해져 그 이익은 배가된다. 보이지도 않고 말도 없으니 자연이 그들 마음대로 하기에 얼마나 좋은 것인지는 설명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자연을 대신해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는 그들을 환경론자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사실은 이 땅에 살고 있는 우리 모두를 말한다. 때로는 자연재해로 고통을 받기도 하고 거대한 자연 앞에서는 한없이 작은 인간에 불과하지만 자연의 일부로서 자연을 대신하기도 한다. 그리고 우리가 자연을 대신하여 하는 말은 4대강 사업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4대강 사업과 같은 거대 환경파괴사업을 할 때 우리는 국민적 협의 수준을 넘어 생태계의 일원으로서 협의를 해야만 한다. 이때 민주적 협의가 필요함은 두말할 필요조차 없다. 때로는 자본주의가 자연을 모방한 경제 논리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자본주의의 경쟁논리가 자연의 경쟁에서 왔다고 착각하는 이런 사람들은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자연적 필연성의 결과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자연은 공생을 기본으로 한다. 그리고 말하는 동물인 우리가 공생함에 있어 기본은 민주적 합의다. 민주적 합의야 말로 자연을 대신해 말하는 자, 즉 우리의 경제 절차이자 환경 철학의 출발인 것이다.

 

학생 인권 조례를 학생 손으로 – 학생 인권 문제 [썩은 뿌리 자르기]

[썩은 뿌리 자르기]

학생 인권 조례를 학생 손으로

– 학생 인권 문제-?

글: 김영삼 (성동글로벌경영고등학교 교사)

2009년 사회적 논란 속에서 시작되었던 경기도 교육청의 학생 인권 조례 제정 작업이 2010년 2월 ‘경기도 학생인권조례 제정 자문위원회 결과 보고서’ 제출로 마무리 되었다. 학생인권선언이 아닌 조례 제정이라는 원대한 목표는 조례가 통과되지 않아 최종적인 결실을 맺지는 못했지만 우리 사회에서 학생 인권 문제와 관련된 제반 사항들 하나하나를 근본적으로 검토하고 해결 방향을 제안했다는 것만으로도 매우 의미있는 작업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것은 연극의 1막에 불과했다.

경기도 학생인권조례 제정 자문위원회 위원장이었던 곽노현 교수가 서울시 교육감 후보로 출마하였고 덜컥 당선이 된 것이다. 이제 학생 인권 조례는 경기도라는 지역적 한계를 뛰어넘어 진보 교육감이 진출한 6개 시도에서 공통의 관심사로 떠오르게 되었다. 특별한 한 교육감의 튀는 제안이 아닌 우리사회 학생 인권의 사회적 통념과 상식의 기준을 새로 만드는 일이 현실로 다가온 것이다.

체벌금지로 수면위로 올라온 학생인권 문제

최근 서울 한 초등학교의 일명 ‘오장풍’ 교사 폭력 사건이 사회적 공분을 불러일으키자 이를 계기 삼아 서울시 교육청이 2학기부터 모든 학교에서 체벌을 전면 금지하겠다고 발표 했다. 그러자 진보 교육감과 대립각을 세우려 준비하고 있었던 조중동이 중심이 되고 일부 교원?학부모 단체까지 합세한 소위 보수(?) 세력이 일제히 서울시 교육청의 조치를 비난하고 나섰다. 그들은 체벌 금지 조치를 서울시 교육청발 ‘학생인권조례 제정’의 수위를 가늠해 볼 사안으로, 학생인권조례 제정의 속도를 높이기 위한 조처로 받아들이고 있는 모양이다.

흘러간 옛 노래 같은 체벌 논쟁이 다시 벌어지는 상황이 우습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엄연히 존재하는 우리사회 구성원들의 인식 격차를 어떻게 좁혀 나갈 것이냐는 집권 세력(?)으로서의 고민도 함께 갖게 된다.

우리 사회 민주주의 발전과 한참 동떨어진 학교 현실

경기도 학생인권조례안이 담고 있는 내용에 대한 논쟁은 이미 한 차례 지나갔다. 그러나 서울시 교육청이 추진하는 학생인권조례 내용 역시 경기도의 고민으로부터 출발할 것이기에 그 내용을 간단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선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체벌과 두발규제를 금지하고, 복장의 자유를 허용하고 방과 후 학습에서 학생의 선택권이 침해되지 않도록 했다. 학생들이 수업시간 외에 평화적 집회를 열고, 학칙 제정 과정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도 부여했다. 인권 침해 문제를 다룰 학생인권옹호관과 학생인권심의위원회, 학생참여위원회도 두기로 했다. 논란이 되었던 조항들만 몇 가지 나열했는데 이를 보면 많은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87년 이후 20여 년 동안 진행되어온 우리 사회 여러 분야의 민주적 발전은 우리 사회의 통념과 상식의 기준을 바꿔왔다. 이명박 정권이 들어선 이후 많은 사람들이 혼란스러워 하는 것도 이런 상식을 벗어난, 이미 지나간 일로 생각했던 구시대적 행태들이 다시 등장했기 때문 아닐까.

2010년의 사회적 기준과 상식으로 학생인권을 보장하겠다고 논의하고 있는 내용들을 살펴보자. 체벌, 두발, 복장 규제 등 이미 오래전에 해결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많은 내용들이 논의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다. 90년대에 태어난 학생들만 재학하고 있는 현재의 학교가 80년대 이전 상황에 머물러있다는 기막힌 현실을 발견하게 된다. 도무지 우리는 뭘 하고 있었던 것일까?

체벌은 개인이 아닌 구조의 문제

하지만 현실은 현실이다. 전교조조차도 체벌 금지를 조직적 자기 입장으로 발표하지 못했던 것이 우리 교육운동의 현실이다. 물론 조직적 입장 정리는 되어있지 않지만 많은 교사가 체벌없는 교육활동을 위한 변화를 모색하고 또 실천하고 있어 전혀 변화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일명 ‘오장풍’ 교사 사건과 같은 체벌이 아닌 폭력에 해당하는 무지막지한 상황이 주기적 혹은 반복적으로 보도되는 것은 우리 교육 현장이 체벌과 관련해 구조적으로 문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방증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가 체벌 문제를 교사 개인의 교육관, 철학으로 간주한다면 교사들에게 생각을 바꿀 것을 요구하고 교사 집단이 자성을 통해 의식을 바꾸는 것으로 그 해결 방안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체벌 문제는 개인의 의식까지 지배하는 구조적 문제이기에 그 해결책 역시 사회적 논의와 제도 개선을 통해 마련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교육이 과정의 가치를 상실하고 결과(입시 성공)의 성패에 모든 가치를 두고 있는 현실, 그래서 학생들을 얼마나 잘 관리하느냐가 학교와 교사의 능력으로 인정받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그러니 관리의 가장 효율적 수단으로 체벌이 사용되는 것은 당연시될 수 밖에 없다.

‘아니 학교가 아직도 저래’ 하고 생각하시는 분들은 입시라는 오래된 과제에 발목 잡혀있는 우리 교육의 현실을 생각해 보시라. 바뀌지 않은 교육적 상황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익숙하고 지속적으로 이어져오는 대처 방안을 사용하게 되는 것이다. 입시와 체벌은 오래된 앙상블이다. 다음으로는 교사 무한책임 시스템을 살펴봐야 한다. 현재 학교에서는 학급 운영, 수업, 생활 지도 등 모든 부분에 대한 교육적 책임이 개별 교사의 몫으로 귀결되고 있다. 무한책임의 시스템 속에서 교사는 자신의 교육활동 중 발생하는 다양한 문제 상황에서 즉각적인 해결사 역할을 요구받고 있다. 그래서 교사는 고독하고 외롭다. 그 상황을 개인적으로 해결하지 못하면 무능한 교사로 취급받을 수 있다는 두려움을 갖게 된다.

기본적으로 여러 명의 학생들과 함께 수업을 해야 하는 교육 노동의 특성상, 문제 상황에서 역할 분담을 통해 그 책임을 나눌 수 있는 지원 체계를 구축하는 것은 매우 필요하고 시급한 과제이다. 다른 학생들의 수업권을 방해하는 몇몇 학생들에 대한 교육적 조치를 분담해줄 수 있는 별도의 지원체계를 갖추어야 교사가 즉각적이고 충격적인 개입(대체로 체벌)을 통해 그 상황을 정리하고 모두의 수업권을 지켜야 하는 부담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이러한 시스템의 부재 역시 명백한 구조적 문제이다.

마지막으로 학교 생활규정(좁혀 말하면 학생 생활규정) 문제이다. 등교 시간 학교 교문에서 시작되는 교사와 학생의 실랑이는 학교 생활 규정의 용의복장 관련 조항과 직접 관련되어 있다. 두발, 복장 규정은 학생들의 기대를 벗어나 있는 경우가 다반사이고 자기 표현의 욕구를 규제받고 있다고 생각하는 학생들의 불만과 교칙을 준수해야 한다는 학교와 교사들의 요구 사이에 만성적이고 구조적인 충돌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한 교육부의 일관된 입장은 학교 구성원들(교사, 학생, 학부모)이 합의를 통해 두발, 복장에 대한 규정을 결정하라는 것이다. 10년째 반복되고 있는 이 처방은 현장 갈등 상황 해결에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하고 있다. 2005년 대만에서는 모든 중고등학교에서의 전면적인 두발 자유화 조치를 시행하였다. 개별 학교 구성원들에게 그 책임을 전가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 차원의 기준과 원칙을 제시하여 갈등 발생 원인을 제거한 것이다.

여전히 수직적 권력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학교 구성원들이 함께 모여 민주적인 의사결정을 할 것이라고 말하는 우리나라 교육부의 무책임하고 무성의한 대처가 학교 구성원들간의 긴장을 유발시키는 구조적 원인인 것이다.

구조와 문화를 바꾸기 위한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

이상 몇 가지 요인들이 현실적으로 우리 앞을 가로막고 있는 구조적 장애물들이다. 그래서 체벌 금지를 교육청이 나서서 해결하려 하고 학생 인권 조례를 만들어 학교 생활규정을 둘러싼 오래된 갈등 구조를 해소하려 하는 것이다. 개별학교 개별교사에게 무책임하게 맡겨 놓지 않는다는 측면에서 분명 의미있는 사회적 논의 진전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선언과 지침을 통해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 제도 개선과 학교(교육) 문화 바꾸기라는 긴 호흡과 강한 걸음이 필요한 사안이라는 긴장감을 늦춰서는 안된다. 학생 인권조례가 되었든 체벌 금지가 되었든 우리에게 익숙한 기준을 새로운 사회적 기준으로 만들면 된다는 단순한 생각으론 사회적 변화를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 어설픈 선언과 준비되지 않은 실행은 쉽지 않은 역풍을 맞아 지지부진한 상황만을 지속시킬 수 있다는 긴장감을 가지고 차분하고 의미있는 준비를 해야 한다.

앞에서 체벌과 관련해서 구조적 문제로 제기한 사항들에 대한 대책 마련이 반드시 필요하다.

첫째 교사 교육활동을 직접 도울 수 있는 학교 교육 지원 체계 구축이 필요하다.
둘째 학생 개개인에 대한 차별화된 지원과 접근이 가능한 교육체계 구축을 위해 싸구려 교육을 탈피하기 위한 적극적 투자가 필요하다.
셋째. 학습, 연수, 교육을 통한 지속적인 자기 변화의 과정을 학교 구성원 모두가 가져야 한다.
이 모든 것이 긴 호흡과 강한 걸음이 필요한 부분이라 생각한다.

학생인권조례 제정은 학생의 자치와 참여로

그러나 진정 중요한 것은 현재 어른들이 말하고 있는 학생인권조례, 체벌 금지 등의 논의가 직접 당사자인 학생 청소년들의 적극적인 문제제기에 의해 진행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그동안에 여러 가지 움직임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학교에 묶여있는 대부분의 학생들은 학생인권, 체벌 금지 문제를 자기 문제로 인식하고 있을지 모르나 그것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사회화시키지는 못하고 있다.

출발은 소위 진보교육감이 그 역할을 할 수 있겠지만 우리가 원하는 사회를 변화시키는 동력은 바로 직접 당사자인 학생 청소년들의 더욱 적극적인 진출이 있을 때 비로소 가능할 것이다. 학교 밖에서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광장을 마련해 주는 것과 함께 개별 학교에서 학생들이 스스로 주인되어 자치와 참여의 학교 교육을 통해 주체적으로 자기 목소리를 모아갈 수 있는 학교 교육의 변화, 이것이 미래를 변화시키고자 하는 학생인권조례의 진정한 출발점이 될 것이다.

학생이 하게 하라!

학생인권을 어떻게 볼 것인가? – 학생인권 문제 [썩은 뿌리 자르기]

[썩은 뿌리 자르기]

학생인권을 어떻게 볼 것인가?

– 학생인권 문제 -?

글: 김성우 (상지대학교 교양학부 겸임교수)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났지만 어느 곳에서나 쇠사슬에 묶여 있다.”(장 자크 루소, 『사회계약론』)

“정치 상태가 충만한 전개에 도달한 경우에 인간은 사유와 의식 속에서만이 아니고 현실과 삶 속에서도 (천상과 지상의) 이중적인 존재를 영위한다. 인간은 자신을 공동 존재(공적인 시민)로 여기는 정치 공동체 속에 살면서, (동시에) 단지 사적인 개인으로서 활동하며 다른 이들을 수단으로 취급하고 자신도 단순한 수단의 역할로 강등되어 낯선 권력의 장난감이 되는 시민(부르주아) 사회 속에 살고 있다.”(맑스, 『유태인의 문제』)

학생도 인간이다

곽노현 서울시교육감은 학생인권조례 제정과 관련해서 “체벌을 전면 금지시키는 것은 물론이고 두발 및 복장을 자율화하고, 강제적인 야간 자율학습을 폐지시키는 내용이 인권조례의 골자가 되는 방향으로 논의가 이뤄지고 있다.”고 언급했다. 또한 “학교생활 규정을 만드는 데 학생이 주인이 돼야 하는데 그동안 학생들은 자신이 동의한 적이 없는 규정에 의해 규제를 받아왔으나 학생들이 입법 과정에 참여할 경우 그만큼 자율규제 능력이 생길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자유민주주의 국가에 살고 있다. 자유주의는 로크 이후로 인간은 자유롭고 평등하며 독립적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신체와 재산의 자유를 지닌다고 주장해왔다. 그러나 한국의 자유주의자는 일례로 종부세 부당성을 강조하는 등 재산의 자유는 늘 강조되면서도 재산권의 기초가 되는 더 기본적인 신체의 자유는 특히 군대와 학교에서 규율이라는 이름아래 권위주의적으로 억압받고 있는 것을 용인한다는 점에서 극히 이율배반적인 모습을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 현재 제정준비중인 경기도학생인권조례안은「헌법」 제31조, 「유엔 아동의 권리에 관한 협약」, 「교육기본법」 제12조 및 제13조, 「초ㆍ중등교육법」 제18조의4에 근거하여 학생인권이 학교교육과정에서 실현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 및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는 점에서 한국의 인권역사에서 매우 의미심장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학생인권이라 함은 「헌법」 및 법률에서 보장하거나 「유엔 아동의 권리에 관한 협약」 등 대한민국이 가입?비준한 국제인권조약 및 국제관습법에서 인정하는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 및 자유와 권리 중 학생에게 적용될 수 있는 모든 권리를 말한다.

본래 인권은 ‘인간’의 자연적 권리라는 점에서 주로 근대의 정치철학과 법철학에서 논의되었고, 기본권은 이 자연적 권리가 국가의 실정법체계에 편입되어 헌법적 가치를 지니게 된 것으로, 근대적 국민국가의 ‘국민’으로서의 자유와 권리를 포괄하는 용어로 헌법 담론에서 주로 쓰인다.

이러한 인권개념의 철학적 기초는 서구 근대의 자연법론과 사회계약론이다. 자연법론에 따를 때 인간은 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 천부의 권리를 당연히 지니고 누려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역사적으로 1776년 미국 버지니아 인권선언 그리고 1789년 프랑스 혁명의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은 이러한 근대의 자연권 개념을 실정법적으로 표현한다. 특히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은 “인간의 자연적이고 양도불가능한 신성불가침한 권리들”을 엄숙히 선언하면서(전문), “인간은 자유롭고 평등하게 태어나며 생존한다”(제 1조)고 천명한다.

기본권이라는 표현은 독일의 바이마르헌법에서 비롯되는데, 기본권 개념은 “자연권에 기초를 두고 헌법에서 보장하고 있는 여러 자유와 권리에 관한 규범체계”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기본권은 자연적 인간의 권리와 근대적 국민국가의 국민의 권리를 동시에 담고 있으며, 우리나라의 학계와 헌법재판소도 이런 맥락에서 기본권을 사용하고 있다.(박성철, 『헌법줄게 새법다오』)

이번의 학생인권조례안은 학생도 인간이고 따라서 인간으로서의 권리와 기본권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주고 있다. 이 조례안은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부터 군사독재정권에 이르기까지 학생인권이 부당하게 침해당했던 현실에 대한 대응일 뿐이다. 그리고 이는 근대의 법적이고 정치척인 담론에서 지극히 기본적이고 상식적인 인권과 기본권의 회복을 의미할 뿐이다. 그런데도 우리나라에서 상식 이상의 의미로 논란을 일으키고 있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현직 교사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 70% 이상의 교사들이 이 조례안에 대해 반대한다고 응답했다. 주로 학생인권을 존중하면 학습 분위기가 저해되거나 학생지도가 어려워지고 학교 단위의 자율성이 침해될 것이라는 우려를 이유로 제시한다.

그런데 교사들의 우려 뒤에는 학생을 ‘피교육자’, ‘약자’, ‘지시를 따라야 할 자’, ‘보호의 대상’, ‘미성숙한 자’ 등으로 보는 관점이 깔려 있다. 이는 교사를 비롯한 교육 관계자들이 ‘학생인권’ 자체를 교권에 대한 도전이나 교권침해로 간주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일제시대 이후로 생성된 권위주의의 영향으로 학교에서도 권위주의가 지배적인 문화로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명백히 드러낸 준다. 이런 문화에서 학생지도는 일방적 통제나 지시, 타율과 획일성을 그 원리로 삼게 된다.

1주 1표라는 비민주주의적인 의사결정을 원리고 삼고 있는 기업마저도 팀제니 리더십이니 하며 수평적 조직구성에 힘쓰고 있는데도 미래의 민주시민을 길러내고 민주주의의 중심장이 되어야 할 학교는 여전히 수직적인 관리방식을 선호하고 있다는 이 역설을 어떻게 이해하면 좋은 것인가? 왜 우리나라의 교사들은 학생을 삶의 주체나 헌법적 권리주체로 인식하기를 거부하는 것일까?

일례로 ‘나이어린’ 학생들에게 체벌을 금지하거나 두발과 복장의 자유를 부여하거나 야간학습 및 보충수업에 대해 선택권을 주고 휴대전화를 소지할 자유를 주고 집회의 자유를 주면 학교운영이 힘들어지고 나라의 법질서가 무너지기라도 한다는 말인가?

국가주의와 자유주의의 두 얼굴을 한 공교육

원래 프랑스 혁명 이후에 공교육위원회의 의장이 되어 새로운 공교육의 방식을 규정한 사람은 백과전서파의 철학자 콩도르세이다. 그에 의하면 교육의 목적은 현 제도의 추종자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제도를 비판하고 개선할 수 있는 능력을 배양하는 것이며, 이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사상의 자유’, ‘교수의 자유’, ‘학습의 자유’가 모두 다 중요하며 이는 ‘인간의 본성에서 유래한 모든 권리로서의 인권’과 마찬가지로 옹호되어야 한다.

이와는 달리 일본이나 대한민국의 공교육은 처음에는 근대화 조기달성이라는 명분 아래 국가주의가 지배하였고 현재는 선진화라는 명분 아래 자유주의를 여기에 도입하려고 애쓰고 있다. 그러나 교육의 국가주의는 국가관리형 관리 시스템과 암기식 위주의 강압적 학습이라는 정형을 낳았다.

이런 문제점 때문에 국가주의는 대중교육이라는 명분 아래 개방적 자유주의로 전환되지만 이는 소비자/수용자 중심의 교육이라는 허울을 쓴 채 교육내용의 질을 현저히 떨어뜨린다. 기존의 국가주의적 암기식 교육보다 개방된 교육의 질이 더 떨어지는 기이한 현상을 보여주게 된다. 거기다가 무너진 권위와 자유주의의 바람은 학생지도의 어려움으로 이어지고 이에 따라 교실이 붕괴되고 교권이 무너지는 사건들이 심심치 않게 보도되고 있다.

그런데 국가주의적 획일화는 눈에 두드러지게 나타나지만 자유주의적 획일화에 의한 출세주의, 실용주의 및 소비주의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후자가 은밀하게 전 사회구성원의 건전한 이성을 마비시키고 개방과 소비자주의라는 미명 하에 학력의 저하를 초래하고 초중등의 공교육을 파괴하고 고등교육의 교양교육과 인문학을 움츠러들게 하였다.

교육의 국가주의나 자유주의는 서로 대립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서구의 근대성의 전체화/개별화라는 단일적 구조의 다른 양태일 뿐이다. 마치 정치에서 자유주의와 전체주의는 대립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역사적 쌍둥이인 것처럼.

인권에도 종류가 있다

로크의 자유주의 인권 개념은 수학에서 추상적으로 동일적인 단위(하나)를 전제하듯이 사회에서 추상적으로 동일적인 단위인 개인을 전제하고 있다. 개인에 해당하는 라틴어 인디비둠(individuum)은 원자에 해당하는 그리스어원인 아톰(atom)과 마찬가지로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것인 기본 단위를 의미한다. 단순 관념의 순열과 조합을 통해 복합 관념이 만들어지듯이 개인들이 기계적으로 합쳐져서 사회가 생성된다. 이때 개인은 수의 하나와 마찬가지로 동질적인 추상적 동일성을 지닌 것으로 생각된다. 이 개인은 형식적으로 동등한 자유롭고 평등한 성격을 부여받는다.

이 자유롭고 평등한 개인들의 세계가 바로 로크가 말하는 ‘자연상태’이다. ‘자연상태’는 아직 정치사회(로크는 이 정치사회, 즉 국가를 시민사회와 동일시한다)를 형성하기 이전의 사회다. 이 자연상태에서 인간은 누구나 천부적으로, 기본적으로 자신의 생명과 자유 그리고 재산에 대한 권리를 지니고 있다.

이처럼 로크의 자유주의 인권사상은 분명히 개인을 전통과 권위에서 해방시켜 ‘자유롭고 평등하고 독립적인’ 존재자로 상정했다는 면에서 인류의 보편적 성취의 한 단계를 구성한다. 하지만 변증법적 시각에서 보면 이는 아직 추상적 단계(헤겔)이고 기만적 단계(마르크스)이다. 자연상태가 추상적이라는 것은 원인과 결과가 거꾸로 되어 있음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결과를 원인으로 잘못 제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로크의 ‘자연상태’란 국가로부터 논리적으로 추상화한 결과이지 국가의 선행원인이 아닌 것이다. 이탈리아 정치철학자 보비오의 말대로 “자유주의 국가 이론의 형성 순서는 (실제 역사와는) 정반대의 방향에서 진행되었다. 최초의 가설적인 자유의 상태를 이론적인 출발점으로 설정함으로써 인간은 자연적으로 자유로웠다고 전제한 뒤 지배자의 권력에 제한을 가하는 사회인 하나의 정치 사회의 형성에 도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연권 이론은 역사적인 사건들의 실제 진행 방향을 반대로 뒤집어 놓고 있다. 즉 역사적으로 결과인 것을 시발 또는 선행상태로서 취급하고 있다는 것이다.”(『자유주의와 민주주의』)

한편 로크는 시민사회를 정치사회, 즉 국가와 동일시한다. 이는 그가 시민사회의 경제적 측면과 국가의 공론적(더 나아가서는 인륜적인 이념적) 차원을 혼동하여 그 각각의 특성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데 있다. 이점은 그가 국가형성의 목적을 재산보호로 규정한다는 점에서 특히 잘 드러난다. 여기서 그는 정치적 차원과 경제적 차원을 혼동하고 있으며 정치를 경제적인 목적을 위해 수단으로 삼는 전형적인 자유주의적 시각을 드러내고 있다.

그는 ‘부르주아’와 ‘공민’을 혼동하고 있다. 로크는 공동 존재로서 정치 공동체에 참여하는 ‘공민’과 사적 개인으로서 살아가는 ‘욕망기계’(들뢰즈와 가타리)로서의 ‘부르주아 시민’을 구분하지 않는다. 이러한 무구분의 상태가 헤겔이 말하는 ‘직접성’의 단계이다. 이러한 직접성이 가장 잘 드러난 개념이 ‘인격’이다. 인격은 수의 단위와 마찬가지로 추상적 동일성에 바탕을 두고 있다. 따라서 공민이나 시민이 ‘법적인 주체와 대상’의 추상화된 직접성의 형태로서 제시된 것이 자유주의적 인격 개념이 된다.

이 ‘인격’ 개념과 ‘개인’ 개념이 차이가 나는 것은 법적인 것과의 연관성 여부이다. 자연 상태의 자유롭고 평등한 ‘개인’이 재산보존을 위해 통치 계약을 통해 국가로 들어가서 자신들이 신탁한 그 대표자가 제정한 법률에 따라 인정받는 ‘권리’를 지닌 법적 주체이자 ‘책무’를 지닌 법적 주체이자 대상인 법적인 개인이 된다. 이 법적 개인이 바로 인격이다. 자신의 권리를 보장받기 위해 자신의 자유를 제한한 역설적인 장치가 바로 인격이다.

인격은 권리를 위해 자유를 제한한다는 자유주의의 딜레마를 잘 드러내주는 개념이다. 더 나가 로크 인권 개념의 중심줄기는 역시 재산권이다. 그는 생명과 자유와 자산을 모두 재산이라고 부르며 이 재산을 보호하기 위한 장치로서 국가를 언급한다는 점에서 그의 권리 개념은 분명히 재산권에 편중되어 있다. 그에게는 ‘시민’과 ‘인격’은 존재하지만 ‘공민’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위에서 언급한 대로 헤겔은 로크의 권리와 인격 개념의 추상성을 지적하는 반면에 마르크스는 그 개념의 이중성, 즉 기만성(인간성 소외와 억압)을 폭로한다. 그렇지만 마르크스는 절대로 인권이라는 개념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는 부르주아적 권리 개념을 비판한 것이지 권리 일반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인권에 대한 오해하게 된 이유는 경제적 자유를 대표하는 재산권과 사상과 사회경제적 약자의 권리보호를 중시하는 시민권 개념의 차이를 간과했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인권의 탄생이래로 시민권을 주창하는 인권의 민주주의의 담론은 재산권중심의 인권담론과 갈등과 충돌을 일으켜 왔다. “재산권과 인권의 긴장은 바로 자유주의적 공화주의의 탄생부터 느껴져 왔다. 17세기 올리버 크롬웰은 그 당시 평등한 법적 권리에 관한 급진적 개념을 지지하던 수평파 운동과 대결해야 했다.”(Bowles & Gintins, Democracy and Capitalism) 이런 점을 파악하려면 오늘날 자유주의적인 권리 중심적인 학파들 내부에서도 재산권을 중시하는 노직 류의 자유지상주의와 약자의 사회경제적 권리를 중시하는 롤즈 류의 수정자유주의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학생들의 인권은 모두 소중하다

경기도학생인권조례안은 기본적으로 자유권을 중심에 놓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대단히 자유주의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도 우리 학교관계자들은 여전히 권위주의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우리 헌법에서 가장 보장하고 있는 기본적인 자유주의적 권리마저 부정하고 있다.

자유주의를 좌파라고 한다면 우리 한국에서 권위주의적 수구 외에는 모두 좌파가 될 것이다. 이런 점에서 학교는 민주화 이전의 권위주의 시대의 유물이다. 토플러가 말한 대로 기업이 100마일로 뛴다면 학교는 5마일 이하로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

학생들도 인간으로서 권리의 주체이고 삶의 주체라는 단순한 이 사실을 부정하지 말자. 시민으로서의 그들에게 기본적인 자유권을 보장해야 한다. 또한 학생들 중에는 사회적 약자들도 존재하므로 공민으로서 그들의 사회권 보장에도 적극 힘써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조례안에 장애학생이나 이주민이나 다문화 가정의 학생 그리고 성적소수자 학생이나 빈곤층의 학생 등을 고려한 조항들이 있다는 것은 매우 반가운 일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학생지도의 어려움이라는 명분 아래 주로 자유권이 쟁점화되면서 이러한 조항들이 별로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점은 안타까운 일이다. 우리는 학생들이 학교에서 인간답게 교육받을 수 있게 해야 하며 학교가 차별의 기원지가 아니라 차별을 사라지게 하는 출발지가 될 수 있도록 문화적 분위기를 바꾸어야 한다.

 

학생인권조례가 학교에 질문하는 것 – 학생인권 문제 [썩은 뿌리 자르기]

[썩은 뿌리 자르기]

학생인권조례가 학교에 질문하는 것

– 학생인권 문제 –

 

글: 조영선(경인고 교사)

학생인권조례 제정을 두고 많은 논란이 일고 있다. 소극적으로는 ‘학교현장과 맞지 않다.’는 견해부터 ‘교권침해 우려’, 적극적으로는 ‘촛불 홍위병을 만들려는가’까지 반론의 스펙트럼도 다양하다. ‘인권’은 보편적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왜 이런 논란이 일고 있는 것일까? 학생인권조례는 정말로 학교를 망칠 만한 것인가? 이런 반론은 학생인권조례가 제기하는 문제들에 합당한 것인가?

학생인권조례는 학교 질서를 엉망으로 만들 것이다?

학생인권조례가 권고하는 내용은 보편적인 인권과 헌법에 보장된 권리에 비추어 학생들에게 신체의 자유와 양심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이다. 그것이 현실적으로는 ‘인권을 침해하는 각종 생활규정의 폐지’, ‘체벌과 모욕적인 발언 금지’, ‘집회와 시위의 자유 보장’ 등으로 드러난 것이다.

그런데 ‘인권을 침해하는 각종 생활규정의 폐지’와 ‘체벌과 모욕적인 발언 금지’가 학교질서를 엉망으로 만들 것이라는 의견은 무엇을 뜻하는가? 그것은 학교의 질서가 ‘인권을 침해하는 각종 생활규정’과 ‘체벌과 모욕적인 언행’으로 유지되어왔음을 의미한다. 즉, 서로의 자유를 평등하게 보장하기 위해 있어야 할 생활규정이 사실은 학교의 억압적인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장치였음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아침마다 자신의 모습을 거울에 비춰보면서 ‘혹시 걸리지 않을까?’ 긴장하며 학교에 오게 하는 교문지도는 교칙을 잘 지키는 학생에게도 학교에 대한 반감을 일으킨다. 교사가 학생의 잘못을 가르쳐주겠다는 이유로 체벌을 하면서 동급생에게 폭력을 행사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학교폭력예방 교육은 효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학생들의 폭력을 예방하는 교육을 하는 교사들이 학생에게 폭력의 한 형태인 체벌을 실시해서는, 그 교육이 효력을 거둘 수 없다는뜻이다. 이런 억압적인 장치들이 겉으로는 학교의 권위를 지켜주는 것 같아도 다른 한편으로는 학교 교육의 권위를 실추시키고 있는 것이다.

학생인권조례는 교권 침해다?

어떤 교사가 담임에게 욕하는 카페를 만드는 아이들에게 인권의 이름으로 비행의 날개를 달아주는 격이라고 말하는 인터뷰를 본 적이 있다. 그 학생들은 왜 담임을 욕하는 카페를 만들었을까? 학생지도를 하다보면 학생의 의견과 반(反)하게 교육적으로 지도해야 할 경우가 있다. 중요한 것은 왜 그렇게 지도할 수밖에 없는지 설명하고 동의를 구하는 것이다.

그런데 교권의 이름으로 대부분의 경우 동의는커녕 체벌 등의 강압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사실이다. 학생들의 의견을 공식적으로 낼 통로가 없다보니 학생들이 음성적으로 자기 목소리를 내는 카페를 만들고, 그것이 음성적이다보니 ‘인신공격을 해서는 안 된다’는 교육적인 지도가 들어설 자리가 없는 것이다.

즉 학생과 교사의 의사소통이 보다 현실화되면 음성적으로 교권을 침해하는 사각지대가 존재할 이유가 없다. 혹 그런 공간이 존재한다면 ‘공식적으로 너희들의 의견을 내지 않고 이렇게 인신공격을 하는 것은 인권침해’라고 교육할 수 있다. 즉 학생인권조례는 오히려 교권존중의 바탕이 될 것이다. ‘너희들의 권리를 보장받는 만큼 너희도 교사, 학부모 등 타인의 권리를 존중하라’고 가르칠 수 있는 근거가 생길 것이기 때문이다.

또, 학생의 인권을 존중하는 방식으로 지도하려고 하다보면 학생의 진정한 ‘동의’ 없이 무엇을 교육하기 어려워진다. 학생들의 ‘동의’를 이끌어 내기 위해 교사는 다양한 수업 방법을 구안할 수밖에 없고 교육과정이 아닌 서로가 참여하는 교육 속에서 교사와 학생이 그 의미를 구성할 수밖에 없다. 그런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입시 위주, 지식 교과 위주의 교육 과정이 침해해왔던 교사의 교육과정 편성권 및 평가권을 확보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학생인권조례는 미성숙한 학생들을 촛불 홍위병을 만들려는 것이다?

사회 교과서는 학생들에게 정치에 참여하라고 끊임없이 가르친다. 특히 자신의 생활과 관련된 지역 사회의 정치에 참여하여 의정활동을 참관하고 의견을 내고 지방 선거에서 후보의 공약을 비교해보는 것이 교과서에 제시된 학습활동이다. 자신의 기본적인 생활과 관련된 학교의 여러 규정의 제정 과정에 참여하고 토론하는 것은 가장 기본적인 민주시민 교육이다.

그런데 미래의 민주 시민이 될 학생들에게 유엔 아동권리협약과 헌법이 보장한 기본적인 인권을 보장하는 것이 특정한 정치 이념을 구현하기 위한 것이라는 비판은 무엇을 근거로 하는가? 오히려 그것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보편적인 인권을 인정하지 못하는 특정 정치 이념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리고 개별적으로 미성숙한 학생들이 존재하지만 그만큼 미성숙한 어른들도 많다. 즉 성숙과 미성숙은 나이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이 가진 경험과 사고의 폭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미성숙한 존재를 성숙한 존재로 만드는 것은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결정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경험과 타인과의 의사소통 훈련을 통해서이다. 그런데, 지금의 학교는 유의미한 경험들을 전화할 수 있는 시도의 기회를 박탈하고 금지함으로써 학생의 성숙을 지연시키고 있다.

이 사회가 학생인권조례를 두려워한다면 그 이유는 학생들의 다양한 시도와 그로 인한 사고의 확장을 인정하는 가운데 대화하고 토론할 자신이 없기 때문은 아닐까?

학생들이 현재 학교의 지도에 반항해왔던 이유는 학생지도 방식이 교사나 학교에 따라 너무나 자의적이고 주관적이었기 때문이다. 학생들의 가장 많은 반발을 사왔던 두발 지도의 기준은 ‘학생답게’였고 체벌의 기준은 ‘교육적으로 필요할 때’였다. 이러한 모호한 기준 속에 진행되어온 학생 지도는 지도의 권위를 잃고 폭력만을 남기게 되었고 학생들은 이에 반항하여 지도를 거부하거나 태업하는 형태로 저항해왔던 것이다. 즉 불합리한 지도 관행에 발목을 잡혀 정말 필요한 권위조차 짓밟히게 된 상황인 것이다.

두발 지도의 근본은 타인의 신체적 자유를 ‘합당한 이유가 있다면’ 침해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체벌의 근본 역시 ‘잘못이 있다면’ 폭력으로 그것을 가르쳐줄 수 있다는 것이다. 경쟁적인 입시 지도의 근본은 ‘나를 위해서라면’ 남을 짓밟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질서가 일상적으로 작동하는 학교에서 학생들이 교사들을 존중의 대상으로 보지 않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힘센 교사들이 학생들의 잘못을 체벌로 다스리듯 자신을 짜증나게 하는 약한 학생들과 심지어 어린 여교사들의 교육적 행위에도 폭력적으로 대응하는 것이다. 입시에 들어가지 않는 수업 정도는 간단히 무시하는 것이 경쟁 사회에서 살아남는 길이라는 걸 일찍부터 알기 때문에 딴짓과 태업을 일삼는 것이다.

학생인권조례가 현 교육에 진정으로 질문하는 것들

지금까지 학교가 권위를 유지해왔던 방식은 피교육자의 기본적인 인권을 제한하는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었다. 두발과 용의복장 지도는 아침마다 교문 앞에서 감시의 시선에 학생들의 몸을 조아리게 만들었고 , 체벌은 권력자의 폭력은 합법적일 수 있다는 공권력의 이치를 가르쳐왔다. 학생인권조례는 이러한 철학에 근본적인 문제제기를 하는 것이다.

‘개인의 신체에 대한 권리를 양도받아 관리하는 형식이 교육의 수단이 될 수 있는가?’

‘채찍과 당근이라는 행동주의적 방식이 인간을 진정으로 교육하는 수단이 될 수 있는가?’

‘보호와 참여 중 어느 것이 인간을 성숙하게 하는가?’

‘진정한 권위를 위해 권력은 필요한가?’

학생인권조례에 대한 논의는 사실 이런 토론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이렇듯 학생인권조례에 대한 논의가 지금까지 수월성 교육에 밀려 뒷전이었던 인간과 교육에 대한 물음을 다시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고등교육법을 개정하라! – 대학의 비정규직 문제 [썩은 뿌리 자르기]

[썩은 뿌리 자르기]

고등교육법을 개정하라!

-? 대학의 비정규직 문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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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김광호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1000일이 넘어간 농성장의 외침

지난 6월 2일로 1000일이 된 농성장이 있다. 고등교육법 개정을 통해 시간강사에 대한 교원자격의 회복을 요구하는 국회 앞 농성장이다. 솔직히 이 농성이 이렇게 길어질 것이라 생각하지 못했다. 농성이 시작될 당시 17대 국회에는 최순영?이상민?이주호의 3개 법안이 상정되었으나 17대 국회의 종료와 더불어 사장되었다. 나는 일단 농성이 거기서 잠시 쉬었다가 18대 국회가 시작하면서 다시 시작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김동애?김영곤 선생님은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다는 각오로 농성장을 지금까지 지키고 계신다.

투쟁단위가 있지만 두 선생님을 구체적으로 거론하는 것은 이 농성은 두 선생님이 이어온 것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요구는 단순하다. 고등교육법 일부 개정을 통해 77년에 박탈된 시간강사의 교원지위를 회복하자는 것이다!

수업의 1/3 이상을 담당하지만 무권리자인 시간강사

개인적으로 대학언저리를 ‘방황’하다보니 시간강사 선후배와 어울릴 기회가 자주 있다. 전국을 돌아다니며 20학점 넘게 강의하는 선배들에게 ‘강사재벌’이란 자조적인 농담을 한다. 대학 다닐 때 한 학기에 20학점을 따라가기도 힘들었던 기억을 떠올리면, 그 선배들의 전국투어가 얼마나 힘든 길인지 느낄 수 있다.

전봇대를 부여잡고 ‘너는 한 곳에 있기라도 하지’라며 흐느꼈다는 말을 들으면 저절로 분위기가 숙연해진다. 반면에 강의가 적은 선배들의 경우 나마저 가슴이 답답해진다. 그래서 학기말과 초에는 어디서 강의를 얼마나 하는지를 묻는 것이 예의가 아닌 예의가 되었다.

박사학위자의 경우 후속연구와 경력차원, 비박사학위자의 경우 논문준비와 강의경험이란 차원에서 보면 시간강사제도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현실은 제도의 개선을 요구하고 있다. 원래 취지에서 벗어나 오늘날 시간강사는 하나의 직업이며 대학교육의 중요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교육과학기술부가 공개한 ‘2010년도 대학별 시간강사 시간당 강의료 지급단가’에 따르면, 4년제 일반대학 186곳의 시간당 강의료는 평균 3만6천400원이다. 학교별로 보면 시간당 2만원(신경대)부터 6만 4천원(상지대)으로 편차가 매우 심하다. 한나라당 임해규 의원이 공개한 ‘2008학년도 시간강사 현황’에 따르면 2008년도 시간강사 평균 연봉(주당 9시간 기준)은 999만원으로 전임강사 평균연봉인 4123만8000원에 대략 4분의 1정도이다.

이런 상황에서 시간강사가 담당하는 수업시간은 34%정도에 달한다. 일부 지방대의 경우는 의존도가 심해서 50% 전후를 담당한다. 시간강사가 없다면 수업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을 정도로 차지하는 비중이 높다. 즉 시간강사는 대학교육의 많은 부분을 책임지고 있지만, 그에 합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문제에 대하여 각 교육주체들이나 정부도 많은 노력을 해왔다. 정부는 한국학술진흥재단 등을 통해 각종 연구지원 사업을 펼쳤고, 각 대학도 비정규직 트랙이지만 각종 형태의 교수를 채용하여 시간강사의 부담을 줄이려 노력했다. 그러나 시간강사제도 자체에 대한 대안은 지지부진했다.

포장만 화려한 정부정책

지난 5월 25일 조선대 서모 시간강사가 자살하면서 시간강사의 현황과 제도적 문제점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이에 지난 6월 23일 교육과학기술부는 시간강사 지원대책을 발표했다.

핵심은 전업시간강사 가운데 일부를 비정년 강의전담교수로 채용하고, 시간강사료는 전임강사 대비 50%수준까지 인상한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첨예한 쟁점인 시간강사의 법적인 교원 지위 회복에 대해서는 전업시간강사 일부를 비정년 강의전담교수로 전환하면서 교원지위를 부여한다는 것이다.

먼저 시행할 것으로 보이는 국립대의 경우 공무원보수규정에 따른 보수와 연금을 적용할 것으로 보인다. 규모는 5년 동안 매년 4백 명씩 총 2천명을 채용할 것으로 보이며, 평균연봉은 2천600만원 수준일 것으로 예상된다. 그리고 4대 보험도 적용되어 국립대의 경우 국가가, 사립대의 경우 법인의 사업자부담금을 정부가 지원할 예정이다.

또 국립대의 경우 시간강사료는 5년 이내에 4만3천원에서 단계적으로 8만원까지 인상할 계획이다. 그리고 사립대의 경우 최저 시간강사료를 책정하는 방식으로 강의료 인상을 유도하는 정책을 시행할 예정이다.

일그러진 정부정책에 어그러지게 반응하는 교육주체들

그 동안 나왔던 어떤 정책보다 시간강사제도의 문제점을 해결하겠다는 정부의 의지가 엿보인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그러나 이해당사자들의 반응은 싸늘하다.

우선 논의를 촉발시킨 대통령 직속 사회통합위원회의 ‘대학 시간강사 대책 소위원회’의 위원장을 맡은 고형일 교수(전남대 교육학)가 “국공립은 물론 사립대학에 편파적으로 이익을 주고, 시간강사뿐만 아닌 대학의 교수요원 전체에 막대한 불이익을 주려는 친대학·반교수·반시간강사의 음모가 있다고 의심케 한다”며 위원장직을 사임하였다.

나아가 ‘한국비정규교수노동조합’과 ‘대학강사교원지위회복과 대학교육정상화투쟁본부’ 등 전국 시간강사들이 사회통합위원회의 대책에 대해 ‘땜질식 처방’, ‘또 다른 시간강사 트랙’이라며 거센 반발을 하며 잇달아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그리고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 ‘전국교수노동조합’, ‘학술단체협의회’ 등의 교수단체들도 사회통합위원회의 대책은 ‘시간제 교원’, ‘반쪽짜리 교원’ 도입이라며 철회할 것을 요구했다.

도대체 왜 정부의 정책은 시작하기 전부터 비난을 받을까? ‘한국비정규교수노조’가 지난달 24일 발표한 ‘교육과학기술부는 기만적 미봉책으로 국민을 호도하지 마라!’란 성명서를 보자.

“교과부 대책안 중 비정년 강의전담교수는 전국 국공립대에서 매년 400명을 뽑는다고 하지만 전국에 국공립대가 40여개 있으니 한 학교당 10명 정도 배정되는 셈”이며 “이는 기간제 근무를 하는 비정규직 교수들을 계층화하여 10% 정도만 간택하고 나머지는 현 상태로 내버려 두면서 분할지배하려 한다”고 비난했다.

이번 정부의 대책을 국립대부터 시작하려 해도, 강의전담교수 채용비용 외에도 국립대 시간강사료 6만원 인상에 350억원, 4대보험 적용에 365억원, 공동연구실 지원금 300억원 등이 확보되어야 한다. 위 성명서를 보면 “교과부가 내 놓은 강의료 인상안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며 “2001년 4월 24일 대통령 보고 자료에서도 거의 같은 내용의 장밋빛 전망을 내놓았고 2003년에도, 2007년에도 거의 매년 인상안을 내 놓았지만 관철된 것은 거의 없다”며 정부정책의 실천의지를 의문시했다.

화려한 포장 속에 숨은 원하지 않는 선물

제일 의문시되는 것은 대학의 주요 평가지표인 교원확보율에 강의전담교수를 포함한다는 점이다. 물론 정부는 무분별한 강의전담교수의 확대를 막기 위해 전체전임교원의 10%로 제한할 계획이라고 한다. 그러나 현재 이미 겸임교수, 초빙교수, 강의교수 등 다양한 형태로 비전임 교원을 20%까지 인정해주고 있다.

따라서 정부의 정책은 시간강사제도의 문제점을 해결한다기 보다는 대학교원 임용의 다변화 전략을 목표로 하고 있다. 특히 교육과학기술부가 발표한 강의전담교수는 재임용 기회가 원칙적으로 제한된다. 임용형태는 2~3년마다 계약제로 임용되며, 5년의 범위내에서 계약기간이 연장된다. 사립대가 운영하고 있는 비정년트랙 교원의 경우 재임용 심사 신청권을 갖지만, 강의전담교수의 재임용 기회는 법적으로 제한된다.

물론 개별 시간강사의 경우 강의전담교수 중에 전임교수가 될 수 있다. 그러나 몇 명이 그럴 기회를 가질 수 있을 것인가! 결국 이번 정부정책은 시간강사제도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보다는 정년을 보장하는 전임교원의 10%를 비정년트랙으로 전환하여 교수노동시장 체계를 유연화하려는 목적이 뚜렷한 것이다.

시간강사제도의 첫 단추는 1000일이 넘는 요구에 답하는 것으로!

지난 2004년 국가인권위에서는 시간강사의 처우를 전임 교수에 비례하게 하여 차별을 없애라고 당시 교육인적자원부에 권고했었다. 그러나 당시 교육인적자원부는 재정을 핑계로 이행하지 않았다. 그리고 지난 17대 국회에서 시간강사의 교원화를 골자로 하는 고등교육법 개정안이 발의되었으나 상임위조차 통과하지 못하고 임기 만료로 폐지되었다. 그리고 현 18대 국회에서 다시 2개의 법안(이상민, 김진표 대표발의)이 국회에 제출됐지만 역시 계류 중이다.

여기에 정부도 개정안을 제출했다. 입법취지 중 하나가 교수, 부교수, 조교수, 전임강사로 되어있는 14조(교직원의 구분) 2항에서 전임강사를 조교수로 통합한다는 것이다. 그 사유가 재미있다. “전임강사인 교원의 경우 ‘강사’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어 해당 교원의 사기를 저하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입법취지를 읽으면서 강사는 교원이 아니라는 정부의 시각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되어 씁쓸했다.

‘대학강사교원지위회복과 대학교육정상화 투쟁본부’의 김동애?김영곤 선생님은 77년에 삭제된 고등교육법상 시간강사의 교원지위를 회복하기 위해 1000일이 넘게 농성을 하고 계신다. 고등교육법상의 교원지위가 시간강사제도 문제점을 해소하는 것은 아니다. 반면에 강사료를 올리고, 시간강사의 일부를 비정년트랙 교원으로 채용하는 것으로 시간강사제도의 문제점을 해소하는 것도 아니다. 현실적으로 전자의 경우 대학 당국과 교수들의 반발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더 어려운 길이다.

그럼에도 김동애?김영곤 선생님의 투쟁을 지지하는 것은 시간강사가 ‘보따리 장사꾼’이 아니라 하나의 직업이 되었으며 대학교육의 중요한 주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간강사의 교원지위 회복은 잃어버린 권리를 되찾는 것임과 동시에 우리 대학현실을 인정하는 것이며, 시간강사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첫 단추이다.

 

 

비정규직 교수에 대한 문제 [썩은 뿌리 자르기]

[썩은 뿌리 자르기]

비정규직 교수에 대한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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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이재유 (건국대 강사)

대학 시간 강사 제도 발생과 재생산의 구조적 원인

?대한민국 건국 초에 대학강사와 교수는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 1949년의「교육법」제73조에(서) 교원은 ‘학생을 직접 지도?교육하는 자’였고, 제75조에(서) ‘대학 교원으로 총?학장, 교수, 부교수, 강사, 조교를 둔다’고 되어 있어 강사는 교원이자 교육공무원에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통성 없이 쿠데타로 집권한 군부정권이 비판적 지식인의 언로를 통제할 수 있는 ‘절대반지’를 손에 쥐자 대학강사의 지위는 급락하였다.

1962년, 박정희 정권은 「국?공립대학및전문대학강사료지급규정」을 만들어 그 제3조2항에서 ‘시간강사료는 시간강의를 담당한 자에게 실지로 강의한 시간 수에 의하여 지급한다’는 시간당 강의료 지급 근거를 설치하였다. 1963년에는 「교육공무원법」제27조를 손질하여 교육공무원에 드는 강사의 범위는 예전대로 두었지만 총?학장이 임면하는 강사를 전임강사로 국한시켰다. 10월 유신이 단행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1972년 12월 16일에는 「교육공무원법」의 교육공무원 정의에 전임강사란 단서를 달아버렸다.

마침내 1977년 12월 31일, 「교육법」 제75조에서 ‘교원에 포함되었던 강사를 전임강사로 바꾸어 버려 강사들의 교원지위를 박탈’하였다(홍영경, 2003). 지식인을 통제하려는 최고 권력자의 야욕이 오늘날의 시간강사 문제를 야기시킨 것이다. 1980년대에 집권했던 전두환?노태우 군부 정권은 국민들의 불만을 다른 데로 돌리고자 대학과 대학생의 수를 대폭 늘렸다. 이 과정에서 전임교원을 별로 충원하지 않아도 대학을 운영할 수 있게 해 주어 오늘날 부실 대학의 초석을 확고히 다져 주었다.

**이상은 2007년 8월 23일 국회 정책 토론회 자료집에서 발췌한 내용이다.

문민 정부와 국민의 정부 기간 동안 대학 교육 개혁이 화두로 제기되며 무수한 개혁 정책들이 시행되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아무 것도 없었다. 새로 들어온 참여 정부 또한 또 다른 대학 교육 개혁을 시행했다. 그러나 겉모양만 바꾸면서 기존의 방식 그대로 시행되거나 근본적인 사항을 고치지 않은 채, 대학 개혁 정책이 시행될 때 그것은 또 다른 교육 ‘개악’이 될 뿐이다. 다른 어떤 것보다 대학 부문에서는 대학 강사 및 비정규 교수들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제대로 된 교육 개혁은 고사하고, 대학 교육의 정상화도 가능하지 않다.

오늘날 대학 강사 및 비정규직 교수에 대한 문제는 크게 몇 가지 문제로 이야기될 수 있다. 먼저, 대학 강사와 비정규직 교수들이 대학 강의의 절반 이상을 담당한 지가 오래되었지만, 강의 여건이 거의 전혀 개선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두 번째가 비정규직 교수의 임금이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유지하기도 힘들만큼 열악하다는 것이다. 비정규직 교수의 한 달 임금은 평균 80만원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정규직 교수와 비교해 볼 때 상당한 정도의 차이가 나는 수준이다.

사실상, 정규직 교수와 강사와 비정규직 교수는 동일한 자격을 가지고 동일한 노동을 하지만, 사회적으로 정규직과 비정규직 교수 사이의 차이는 극심하다. 예를 들면, 정규직 교수(전임 교수)는 금융 기관의 신용도가 A등급이며, 온갖 사회 보장이 되어 있고, 안정적인 연구와 교육이 가능하다.

그러나 강사 및 비정규직 교수(비전임 교수)는 금융기관의 신용은 無이며, 온갖 사회 보장으로부터 배제되어 있으며(기본적인 4대 보험만이라도 적용해 달라는 것이 비정규직 교수들의 바람이다), 안정적인 연구와 교육이 거의 불가능한 수준에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부분의 비정규직 교수들이 전임 교수를 지망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에 무리를 해서라도 교수가 되고자 하고, 채용 비리가 없어지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런 비리와 같은 부당함이 당연시되는 대학을 졸업한 사람이 사회에 나가서도 사회의 부당함과 불평등을 당연시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학문의 전당인 대학이 정의가 숨쉬는 곳이 되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대학 강사 및 비정규직 교수들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세 번째는 비정규직 교수의 신분이 법적으로 보장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즉 대부분의 비정규직 교수는 ‘교원 노동자로서의 법적 신분’이 보장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고등교육법 시행령] 제 7조에 따르면 시간 강사를 단지 “교육 과정의 운영상 필요한 자”로서 일용 잡급직의 한 형태로 분류하고 있다. 그리하여 대부분의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마찬가지로 4대 사회 보장 보험 적용 대상에서도 빠져 있다.

헌법에서 교원들의 지위에 대해 법률로 정하도록 한 것은 교원들의 신분이 안정되어야 보다 좋은 교육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학 강의의 절반 이상을 담당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러한 지위를 전혀 부여하지 않는 것은 대학 교육을 방기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따라서 대학 강사 및 비정규직 대학 교수들에게 ‘교원 근로자로서의 법적 지위’를 하루 빨리 부여해야 한다.

네 번째는 이러한 것들로부터 발생하는 문제이다. 즉 학생들의 학습권이 엄청나게 침해될 수 있다는 것이다. 대학 교육의 절반 이상(평균치:53% 정도)을 담당하고 있는 비정규직 교수들이 자신의 생존 문제에 얽매이게 될 때, 학생들에게 거의 신경을 쓰지 못하게 됨으로써 학생들의 의문을 제때 풀어주지 못하여, 학생들의 학습 의욕을 상당히 떨어뜨리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이다.

비정규직 교수들은 대학 교육의 한 주체이면서도 능동적으로 대학 교육에 참여하지 못하고 강의만 할 뿐, 교육 과정을 설계하고 입안하는 일로부터 완전히 배제되어 있으며, 학생 지도와 상담을 사실상 할 필요가 없는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대학 교육을 담당하는 한 사람으로서 상당히 가슴 아픈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다섯 번째는 신분상의 불안정과 경제적 어려움이 연구와 교육에 집중하는 것을 힘들게 하고, 그리하여 보다 나은 교육을 불가능하게 함으로써 전반적으로 대학 교육의 질을 저하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곧 어처구니없게도 이 사회의 모토라고 할 수 있는 ‘경쟁력 강화’에 위배되는 결과를 가져온다. 이것은 교육 개방이 이루어지면 불을 보듯 뻔한 일이 될 것이다.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뜻 있는 비정규직 교수들은 ‘한국비정규직교수 노동조합’을 만들어 힘을 모으고 있다. 한국비정규직대학교수노동조합(이하 비정규직교수노조)은 1인 시위 및 집회, 정규직 교수 단체와 연대투쟁, 국회 토론회 참가, 국가인권위원회에 제소, 언론매체와 인터뷰, 기고 등 다양한 방법을 통해 7만 대학강사들이 대학교육의 절반 이상을 맡아 실질적으로 교원의 역할을 하고 있음에도 이를 인정받지 못한 채 온갖 부당한 차별대우를 받고 있는 실태를 적극적으로 알려 나갔다).

이와 함께 강사의 법적 교원 지위 부여 및 강사의 처우개선 대책을 해당 정부부처에 끈질기게 요구함으로써 40년 이상 방치된 대학강사의 문제를 그들이 이제는 더 이상 방관하거나 서로 책임을 전가할 수 없도록 여론을 조성하였다.

먼저 강사 문제의 1차적인 해결은 강사들이 자신의 역할과 능력에 걸맞게 법으로 교원근로자임을 보장받는 것이다. 이러한 법적인 보장을 통해서 다음 표와 같이 강사를 비롯한 비정규직 교수의 문제점을 해결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비전임교원 제도 문제의 해결 수준]

 

다른 한편 학생들의 수업권 강화에 힘을 써야 한다. 왜냐하면 학생들의 수업권 강화는 강사들과 비정규직 교수들의 노동 조건 개선, 생존과 유기적이고도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가령 예를 들자면, 100명이 넘는 대형 강의실에서의 강의는 거의 일방적인 강의가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설사 토론식 수업이 이루어져도, 그 수업에 참여하는 인원은 소수의 학생들뿐이기 때문에, 나머지 학생들은 단순히 구경꾼으로만 전락하게 될 수밖에 없다.

수업은 모든 학생들이 주체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수업 인원 수가 줄어들어야 한다. 그래야만 학생들이 수업에 주체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기며, 다른 사람들과의 의사소통을 통해서 민주주의를 수업 시간에 능동적으로 체험하고 학습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은 대학이 민주 시민을 양성해 낸다는 것, 그리고 이를 통해서 비판적인 안목을 가지게 되어 진리를 탐구할 수 있는 학문 분위기를 형성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대학 본연의 모습을 가질 수 있는 밑거름이 될 것이다. 이것은 곧 강사들과 비정규직의 노동 조건 개선과 생존의 보장을 위한 교원의 법적 지위 쟁취와도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될 수 있다.

하나의 수업 당 학생 수가 줄어든다는 것은 강좌 수가 그만큼 늘어난다는 것이며, 늘어나는 강좌 수만큼의 임금이 늘어날 것이다. 그런데 장기적인 안목으로 보자면, 임금의 증대는 곧 대학으로 하여금 정규직과 비슷한 임금을 주면서 법정 교원 수에 포함되지 않는 강사를 교원으로 인정하여 한 교수 당 학생 인원 수 비율을 낮춤으로써 교육인적자원부의 지원을 더 많이 받는 것이 유리하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결과를 낳게 될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다른 한편으로, 학생들이 스스로 학습할 수 있게끔 하여, 자신들의 개성을 드러내는 문화를 만들어 갈 수 있도록 하는 것 또한 교육자들의 임무이자 권리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것은 곧 대학의 학문의 발전을 가져오게 될 것이며, 따라서 연구자와 교육자의 연구 역량을 배가시킬 수 있는 결과를 낳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대학 본연의 모습이 현실적으로 자리를 잡게 될 것이며, 이는 동시에 교육자들의 목적이자 권리를 쟁취하는 현상으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지금처럼 각 수강 과목이 어떤 관련성도 없이 개별화되어 있는 것을 각 수강 과목이 보다 유기적인 연관성을 가지게끔 수강 과목들 사이의 교류화(inter-discipline)를 꾀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되었을 때 학생들은 보다 폭넓은 안목을 가지게 되고, 그리하여 보다 많은 논의와 연대의 틀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과정이 제대로 이루어진다면, 대학교의 모든 공간이나 시설들은 학생들의 자치적인 학술 활동에 맞춰지게 될 것이며, 존재하는 모든 곳에서 사람을 만나려고 하며 그 속에서 자기 자신을 발견하며 만들어가려고 노력하게 될 것이다.

가령 예를 들자면, 그들은 그들의 삶을 풍부하게 할 수 있는 학습의 목록을 만들고, 서로 의견을 교환한 후에 적정한 학습 커리큘럼을 짠다. 그리고 그 커리큘럼에 따라 서로가 서로에게 교육한다. 그리고 그 커리큘럼의 내용을 풍부하고 새롭게 만들어 나갈 것이다.

이들은 일정 기간 학습하고 교육한 성과물을 다른 사람에게 발표하고, 다른 사람들의 비판에 귀를 기울인다. 그런 비판은 곧 자기 자신들의 삶에 소금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자신의 삶의 시야를 넓혀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삶의 경이로움을 배운다.

그들의 학습, 교육의 장은 하나의 과나 단대를 넘어서서 대학 전체 차원으로 넓혀 간다. 그래서 그들은 일 주일 정도 학술 포럼 축제를 벌인다. 그 기간 동안 대부분의 사람들은 학교에서 먹고, 자고, 논쟁하고 토론하며 그들의 삶을 즐긴다. 매년마다 학술 포럼의 주제를 정해 모든 학회나 소모임, 동아리들은 그 주제에 맞게 학습하고 교육하여 학술 포럼 축제 때 자신들의 역량을 내보이게 된다.

그리하여 학술 포럼 축제의 실질적인 주체가 되어 연대의 아름다움을 맛보게 될 것이며, 스스로 자기 삶의 주체임을 자랑스러워 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이 학술 포럼 축제를 전국적인 차원으로, 그리고 세계적인 차원으로 승화시켜 나가려고 노력할 것이다. 이것이 진정 인간을 위한, 인간에 의한 세계화일 것이다.

이러한 방향으로 비정규직의 권익 옹호와 대학 교육의 민주화, 학문의 발전에 기여하기 위한 끊임없는 노력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역사는 ‘인간으로서의 권리가 누군가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쟁취해야 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잘 보여 주고 있다.

우리의 권리를 스스로 쟁취하기 위한 어렵고 힘든 길을 가는 비정규직 교수들에게 정규직 교수님들의 따뜻한 격려와 연대의 지지를 간곡하게 바란다. 비정규직 교수들은 대체로 정규직 교수님들의 후학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학생 여러분들의 따뜻한 격려와 힘찬 연대의 지지를 너무나도 간절히 바란다. 학생 여러분들은 대학 교육의 다른 한 주체이자, 앞으로 노동자가 될 소중한 동지들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