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제국주의와 현재 – 일제와 현대 [썩은 뿌리 자르기]
[썩은 뿌리 자르기]
일본제국주의와 현재
– 일제와 현대 –
글: 이순웅(숭실대 강사)
공(功)과 과(過)를 구별하지 못하는 사람들
민주당을 이끌어가는 사람들이 당의 정통성을 계승한다면서 거명하는 사람 중에는 박순천(1898~1983)도 있다. 거명되는 사람 중 유일하게 여성이다. 5선 국회의원, 민주당 총재를 지낸 바 있는 한국 여성 정치인 1호.
지난 광복절 직후인 8월 16일, 부산 기장군의회는 박순천의 생가 복원을 위한 추경 예산 편성을 논란 끝에 찬성 4표, 반대 2표, 기권 1표로 승인했다. 논란이 된 주요 이유는 그의 친일 행적 때문이다. 대부분의 민족주의자들이 그랬듯이 식민지 시절 초기에는 박순천도 3.1만세 운동에 가담한 적이 있지만, 1940년 12월 25일 이광수가 발기인 대표였던 황도학회의 발기인이 되면서부터는 본격적인 친일 활동에 들어간다. 황도학회는 ‘내선일체의 완성’을 목표로 황도 사상을 교육, 선전하기 위해 조직된 단체다.
이후 박순천은 조선임전보국단 산하 부인대 지도위원으로 참여하였다. 조선임전보국단은 1941년 10월 결성된 최대의 친일 민간단체로서, 부인대에는 김활란(이화여대 총장), 고황경(서울여대 총장), 박마리아(자유당 시절 2인자인 이기붕의 부인), 박인덕(인덕대 설립자), 배상명(상명대 설립자), 송금선(덕성여대 총장), 유각경(한국 YWCA 창립), 이숙종(성신여대 설립자), 임숙재(숙명여대 총장), 임영신(중앙대 설립자), 황신덕(추계예대 설립자) 등이 망라돼 있었다.
1943년 3월, 경성가정의숙(지금의 서울 중앙여고)의 교장 황신덕과 부교장 박순천은 전교생을 불러놓고, 학교를 살리기 위해 한 명이라도 근로 정신대에 지원해달라고 호소한다. 그 결과 당시 2학년(18세)이던 김금진 학생이 지원에 나섰다. 김금진은 일본에서 총알을 만드는 군수공장으로 끌려가 해방이 될 때까지 고초를 겪었다. 2년여 동안 생리를 못할 정도로 몸이 망가졌지만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가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그리고 1983년 박순천이 사망했을 때는 서울 화곡동 같은 동네에 살았지만 문상도 가지 않았다. 해방 뒤에 찾아보기는커녕 사과 한마디 하지 않은 박순천을 스승으로 인정할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박순천의 생가 복원 사업에 관해 기장군 관계자는 “향토 인물이자 독립운동가인 박 여사의 생가가 방치돼서는 안 된다는 민원이 잇따르고 있고…..” “박 여사의 ‘과’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공’이 훨씬 많은 만큼 사업 추진에는 문제가 없다”고 말했다.1)
‘공’이 훨씬 많다니? 도대체 무엇이 ‘공’이고 무엇이 ‘과’란 말인가. 박순천의 경우 이른바 ‘공과’라는 것이 서로 비교 대상이나 될 수 있는가. 설사 공과를 비교할 수 있다 하더라도 과가 더 크다. 교육자로, 정치가로 행세하려면 친일 행적을 감추고 만세 운동에 가담했던 것을 부풀렸을 터이니 사기꾼임에 틀림이 없고, 제자를 사지에 몰아넣고도 사과 한마디 없었으니 철면피에 후안무치한 인간 아닌가.
박순천의 더 큰 과는 과를 공으로 포장하여 감추면 과가 과로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데 있다. 이런 점에서 보면 기장군 관계자는 박순천의 사기행각에 놀아날 뿐만 아니라 또 다른 박순천식 ‘과’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어디 기장군 관계자뿐이겠는가. 당의 정통성을 박순천 같은 사람에게서 찾는 민주당 역시 무엇이 공이고 과인지,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구별하지 않음으로써 바람직한 역사의식을 갖는 데에 큰 걸림돌이 되고 있다.
공과를 진정으로 따지는 일은 끝까지 독립운동을 했던 사람들에게나 해당한다. 예를 들어 독립운동상의 ‘공’이 있으나 전술상 또는 방법상의 실수가 있었다면 그런 것이 ‘과’이다. 공과라는 것은 같은 일을 계속한 사람에게나 해당하는 것이지 이리 붙었다 저리 붙었다 하는 변절자에게는 해당하지 않는다. 식민지 역사를 겪은 우리에게는 끝까지 독립운동을 한 사람에게만 과보다 많은 공이 있다.
야당다운 야당이 없는 나라 – 여전히 살아있는 일본제국주의의 잔재
제1야당이라고 하는 민주당은 왜 친일 인사에 관해 냉정하게 평가하지 못할까? 많은 굴절이 있지만 자신의 뿌리가 한민당에 있기 때문인데, 한민당은 일제 시대의 지주세력이 중심이 돼서 만든 당이다. 민주당의 흐름(한민당→민국당→민주당)은 이승만의 자유당뿐만 아니라 박정희의 공화당, 전두환·노태우의 민정당에 대한 대항 세력 역할을 일정부분 해왔다. 그러나 한민당은 그 뿌리가 일지주세력인 만큼 친일 혐의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그렇기 때문에 집권 정당과 권력 투쟁은 할 수 있어도 그 권력의 원천이 정당성, 정통성에서 나오는 것은 아니었다.
남한에서는 야당다운 야당의 뿌리가 싹부터 잘렸다. 건국준비위원회를 꾸리면서 임시정부를 준비했던 여운형의 암살, 미군정에게 권력을 내놓으라고 요구하면서 조국의 분단을 끝까지 막으려 했던 김구의 암살, 이승만에 의해 농림부 장관으로 임명되기도 했던 조봉암의 죽음 등은 정통성 없는 지배 권력과 정통성 없는 야당의 시대를 예고하는 것이었다.
친일 세력을 대거 기용했던 이승만이 좌파 운동 경력이 있는 조봉암을 농림부 장관으로 임명한 데에는 그에게 토지 개혁을 맡겨 민심을 달래고 얻는 한편, 한민당의 물적 기반을 흔들어놓겠다는 의도도 있었다. 조봉암은 북한의 ‘무상몰수 무상분배’ 토지개혁과는 달리, 지주에게 억울한 희생을 시키지 않고 농민에게는 염가로 분배하는 방법을 채택했다. 그러나 이것은 한민당 세력을 만족시킬 수 없는 것이었다. 조봉암이 6개월 만에 장관직에서 물러나는 데에는 한민당의 집요한 공격이 한몫을 했다.
이후 조봉암은 진보당을 결성하고 대통령 선거에서 민국당의 이시영 후보보다 20만 표를 더 얻는 등 선전(善戰)했으나 이승만의 최대 정적으로 부상하는 바람에 곧 간첩 누명을 쓰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야 했다.2) 진보적 개혁주의자, 한국판 사회민주주의자의 최후이다.
이후 자유당, 공화당, 민정당으로 이어지는 ‘근본도 없는 정치꾼들’의 집권 정당은 한민당에 뿌리를 둔 이른바 민주당의 견제를 받으면서 권력을 행사했다. 김영삼의 3당 합당이 가능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친일의 뿌리, 계급적 기반으로 볼 때 서로가 서로에게 그다지 적대적인 세력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3당 합당(민자당)은 신자유주의의 길을 가기 위한 보수 세력들 간의 야합이었으며, 김대중의 평민당은 민자당에 대한 전라도적 안티테제에 가까운 정당이었다.
김대중으로부터 정치적 ‘적자(嫡子)’임을 인정받음으로써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노무현 역시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노무현 스스로도 말했듯이 한미 FTA 협상 테이블에 나섰을 때 개혁은 이미 실패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그 역시 대연정을 말함으로써 본인이 김영삼의 정치적 ‘적자’이기도 하다는 점을 보여주려 했다.
일본이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하면 핏대를 올리는 사람이 많지만, 독도 주변 해역을 공동어로구역으로 설정했던 때가 김대중 정부 시절이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은 것 같다. 김대중 정부의 태도는 “지금은 곤란하니 기다려 달라”고 말한 이명박 대통령의 태도와 질적으로 큰 차이가 있다고 할 수 있을까. 역대 정부 간의 차이에만 주목하고 닮은 모습은 보지 않으려 하면 사실이 사실대로 보이지 않는다.
야당이라면 모름지기 현재 정권을 잡지 않고 있다는 뜻뿐만 아니라 여당과는 질적으로 다른 대안을 갖고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지금의 야당 민주당은 진보의 외피를 쓴 거대 보수 야당일 뿐이며 지금의 여당과는 권력을 나누는 데에만 관심이 있는 일종의 정치적 동반자이다.
둘 다 나쁜 놈이라는 양비론 넘어서기 – 더 나쁜 놈과 덜 나쁜 놈
한때 민주인사로 행세했던 김동길 교수는 전두환 정권 시절에 이른바 양비론을 펼쳐 젊은이들의 웃음거리가 된 적이 있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어중간한 태도를 취해 결국에는 전 정권을 정당화하는 데 기여했기 때문이다. ‘좋은 놈’과 ‘나쁜 놈’이 분명해 보였던 시절, 그의 태도는 양비론의 전형으로 여겨졌다.
그런데 문제는 ‘둘 다 나쁜 놈인데 한 쪽이 더 나쁜 놈일 경우 덜 나쁜 놈이 좋은 놈 행세를 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서유럽이나 미국에서 만들어진 제2차 세계대전 관련 영화나 다큐멘터리의 경우 나치스트나 파시스트, 일본의 군국주의자는 ‘나쁜 놈’으로 그려진다. 물론 그들과 싸우는 미국, 영국, 프랑스 등의 세력은 좋은 놈으로 그려진다. 그런데 이 ‘좋은 놈들’은 ‘나쁜 놈들’을 나쁘다고 말하면서 자신들이 나쁜 놈들이라는 점을 감추고 있다. 그들 역시 식민지를 한 뼘이라도 더 가지려고 했던 제국주의 세력일 뿐이라는 점을 말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사회 자체가 감옥과 같은 사회일 경우, 감옥을 만들어놓고 감옥 밖의 사회는 감옥이 아니라고 우기는 것과 같다.
얼마 전 고은 선생이 노벨 문학상 후보에 올랐다가 또 다시 상을 받지 못한 일이 있었다. 8년째의 고배라고 한다. 하지만 노벨 문학상 수상을 거부했던 사르트르를 생각하면 그다지 섭섭해 할 일도 아니다. ‘알제리도 프랑스다’라는 식으로 식민지 알제리의 독립 문제에 무심했던 카뮈는 노벨상을 받은 반면에 알제리 독립을 지지했던 사르트르는 그 상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고은 선생의 행보로 봐서 사르트르와 같은 태도를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다만 다음과 같은 통계는 왜 고은 선생이 상을 받기 어려운지 말해주는 것처럼 보인다. 1901년부터 2009년까지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된 사람의 국적을 보면 프랑스 14회, 미국 11회, 영국 9회, 독일 7회, 스웨덴 7회, 이탈리아 6회, 스페인 5회, 소련 4회, 노르웨이 3회, 덴마크 3회, 일본 2회 순이다.3)
11개 국가가 104분의 71을 차지하고 있는데, 이들 나라는 모두 식민지 건설의 역사, 정복·점령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반면에 식민지였거나 타국으로부터 정복을 당했던 국가는 아일랜드 4회, 폴란드 3회, 칠레 2회 순이다. 노벨상은 식민지 경험이 있는 약소국에게 가끔씩 떡을 하나씩 던져줌으로써 이 상이 제국주의자들의 잔치라는 것을 감추고 있는 것은 아닐까.
자본과 권력은 걸인, 노숙인, 실업자와 같은 사회적 약자를 필요로 한다. 그들에게 일정한 복지 혜택을 줌으로써 선행을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사회적 약자는 그들이 무능하기 때문이 아니라 자본의 필요에 의해 존재한다.
‘당선 가능성’이라는 이유로 보수 야당에게 표를 던지거나 노벨상을 염원할 때, 세상이 죄의식도 없고 부끄러움도 모르는 강자, 자신의 모습을 이전보다 훨씬 더 세련되게 감추는 강자의 이해관계에 맞춰 움직인다는 것을 보지 못할 수 있다. 그래서 이제는 양비론적 의미에서의 둘 다 나쁜 놈이라는 관점이 아니라 애초부터 둘 다 나쁜 놈이었다는 관점으로 되돌아가 더 나쁜 놈과 덜 나쁜 놈에 관해 이야기해야 한다. 바로 이것이 사실을 사실대로 볼 수 있는 출발점이고 우리 안에 여전히 살아있는 일본제국주의를 극복하는 길이다.
*주석
1) 이상의 내용은 방학진(민족문제연구소 사무국장), “제자를 사지로 보낸 자”, 『작은책』 2010년 10월호(제184호), 도서출판 작은책, 118~121쪽에서 발췌했음.
2)아직까지도 조봉암의 묘비에는 비문이 없다. 가족들은 그가 간첩 혐의를 벗을 때까지 비문을 새기지 않겠다고 했다.
3) http://preview.britannica.co.kr/spotlights/nobel/npw/npwp/win_lite.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