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등급을 알라!’는 사회, 그러나 ‘네 자신을 알라’[썩은 뿌리 자르기]

나를 보는 나가 아닌 대상으로 알려지는 나

얼마 전 보았던 영화『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소년』첫 장면에 John Betjeman의 자서전 『종소리에 눈을 뜨고』의 구절인 다음과 같은 글이 나온다. “Childhood is measured out by sounds and smells and sights, before the dark hour of reason grows(유년시절은 이성의 어두운 시간이 자라기전에 소리와 냄새 그리고 시각에 의해 평가된다).” 우리는 여기서 영화의 상세한 줄거리를 얘기하기보다는 영화의 첫 장면에 나오는 “the dark hour of reason”은 무엇을 의미할까? 라는 의문을 할 수 있다. 우리는 무엇을 잣대로 세계와 만나고 있는가? 영화 속에서 독일 소년 브루노는 슈무엘이라는 유대인 소년을 이성이라는 잣대로 만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는 유대인 소년과 이성의 어두운 시간보다는 감성의 창문을 통해 만나고 있다.

아마도 영화 속에서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이성의 어두운 시간”이란 모든 세계를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시키는 것, 개체의 질적 측면보다는 양적 측면만을 자신의 판단 기준으로 간주하는 것을 의미하고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소위 합리성이라는 기준으로 세상을 보는 이러한 시각은 결국 인류의 참혹한 사건을 만들어낸 도구적 이성으로 귀결되며 인류의 삶을 파국으로 몰아넣었던 것이다. 모든 것을 양화시키려는 이성은 생텍쥐베리의『어린왕자』본문에서도 잘 드러난다. 작가는 숫자로 세상을 파악하고자 하는 어른들을 향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어른들은 숫자를 좋아한다. 새로 사귄 친구 이야기를 할 때면 그들은 가장 중요한 것은 물어보는 적이 없다. “그 애 목소리는 어떻지? 그 앤 어떤 놀이를 좋아하니? 나비를 수집하니?”라는 말을 그들은 절대로 하지 않는다. “그 앤 몇 살이니? 형제는 몇이고? 몸무게는? 아버지 수입은 얼마야?”하고 그들은 묻는다. 그제야 그 친구가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된 줄로 생각하는 것이다. 만약 어른들에게 “창가에는 제라늄 화분이 있고 지붕에는 비둘기가 있는 장밋빛 벽돌집을 보았어요”라고 말하면 어른들은 그 집이 어떤 집인지 상상하지 못한다. 어른들에게는 “십만 프랑짜리 집을 보았어요”라고 말해야만 한다. 그러면 그들은 “야 근사하겠구나!”하고 소리친다. …
…어른들은 다 그렇다. 그들을 나쁘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어린아이들은 어른들을 항상 너그럽게 대해야만 한다. 하지만 인생을 이해하는 우리는 숫자 같은 것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학벌사회의 문제를 다루고자 하는 이 글에서 영화, 소설 이야기가 현상적으로는 다소 주제와 벗어난 것이라고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근대 자본주의와 맞물려 강력하게 사회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존재하는 것에 대한 수량화 문제는 ‘나’를 내가 주체가 되어 바라보지 않는다는 점과 연결된다. 나의 내면이 아니라 나를 외부의 그 무엇을 통해 표현하고자 하는 이 점이 바로 학벌 문제와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이를테면 주체로서 ‘자아the self를 알아듣는 나the I’가 아니라 ‘대상으로서 알려지는 나 the me’에 무게 중심을 맞추어 살아야 하는 우리의 현실이 바로 그 핵심에 있다. 학벌 사회를 조장하고 추구하는 생활양식이 공고화된 사회에서는 대상으로 알려지는 ‘나’를 더 가치 있는 것으로 간주한다. 바로 이 알려지는 대상화에

병역비리의 그림자 [썩은 뿌리 자르기]

[썩은 뿌리 자르기]

병역비리의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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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윤태양 (건국대 석사수료)

* 본인은 본 글에서 ‘병역비리’의 이면을 고민하고자 했다.? 허나 글을 시작하기에 앞서, 너는 잘났냐는 어린 백성들의 본체없는 손가락들로부터 본인을 지키기 위해, 밝혀둔다. ?본인은 신체검사 1등급, 현역 육군병장 만기제대 예비역이다.

연예인과 정치인, 병역 비리자들을 대표해 뭇매를 맞는 그들

수 년 전 병역의무를 지지 않았다는 이유로 한국에 들어올 수 없게 된 연예인이 있다. 외모와 실력을 겸비해 많은 촉망을 받았던 그이기에 어쩌면 국민들의 분노는 더 활활 타올랐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최근 들어서도 한창 주가를 올리던 연예인 한 명이 병역비리라는 지뢰를 밟은 것 같은데, 적어도 그 지뢰는 그의 발목을 잘라먹긴 할 것 같다. 연예인이라는, 공인이라는 이름아래 그들의 병역비리문제는 호사가들의 입에만 오르내리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병역비리는 사실 연예인이나 정치인들의 전유물은 아니다. 스무살 남짓한 대한의 남아들이 모인 술자리에서 삼겹살과 함께 얹어지는 얘기들은 여자 아니면 군대. 군대를 가게 된 친구들은 세상이 끝나는 양 사회의 전우들의 이별주를 받으며 미꾸라지 같은 친구들에게 부러움 반 비아냥 반으로 술잔을 넘긴다. 가기 전엔 가지 않은 친구들을 그렇게 부러워하다가도 막상 갔다 오면 그네들을 비웃게 되는, 군대가 대체 무엇인가.

병역비리라는 말 자체의 비리

비리라는 말이 붙었다는 것이 우리로 하여금 병역을 피하는 일이 그 자체로 사회적 지탄의 대상이 된다는 것을 정직하게 느끼게 해준다. 고리타분해보이지만 국어사전을 보면, 비리(非理)는 ‘올바른 이치나 도리에서 어그러짐’이다. 이걸 빌미로 거꾸로 되짚어보면 병역을 행하는 것은 올바른 이치나 도리에 맞는 것이다. 이른바 ‘신성한 국방의 의무’. 우리는 이미 병역을 당연한 의무로 생각하고 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아직도, 병역을 신성한 국방의 의무로 생각하도록’ 훈육당하고 있는 것 같다.

‘신성한 국방의 의무’는 근대국가의 태동과 함께 시민의 권리이자 의무로 지워진 그리고 이른바 보수주의자들의 깃발에 쓰이는 대표적인 문구들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누군가 ‘국방의 의무’라는 말 앞에 ‘신성한’이라는 수식어를 붙일 때, 우리가 그를 오른편에 세우곤 하는 것은 그 문구 자체가 가진 근대적이고 보수적인 측면에 주목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냥 근대적인 것이 모두 다 나쁘다고 생각하는 것은 나쁠 것이다. 보수적인 태도를 가졌다고 그를 ‘꽉 막힌 꼴통’이라고 손가락질하는 것은 오히려 또 다른 보수적 태도가 아닐 수 없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것에 대한 사회적 시선이나 판단’이 묶이지 않고 ‘그것 자체’를 봐야만 하지 않을까. 비록 ‘신성한’이라는 단어가 우리 앞을 가로막아 서지만 사뿐히 즈려 밟아주고 국방의 의무의 당위성에 대해 고민해 볼 필요가 있지 않냐는 말이다.

신성한 국방의 의무? 썩히는 시간?

대한민국 헌법은 교육, 납세, 근로, 국방의 4가지 기본의무를 국민에게 부여하고 있다. 대한민국 병역법은 ‘대한민국 국민인 18세 이상의 남자’에 대해 제 1국민역에 편입시키고 19세에 징병검사를 받게 하며, 1급에서 7급까지 등급에 따라 병역을 지게 한다. 법에 따르면 병역의 의무는 모든 국민 – 정정하자 – 국민 중 모든 18세 이상 남자에게 지워진다. 그런데 신체검사 후 등급에 따라 구분되는 병역을 배분하는데 문제는 현역판정을 받을 수 있는 남자들이 이런저런 지혜를 짜내 현역 등급에서 벗어나는데 있다. (물론 자신의 성적 정체성에서 남성성을 찾지 못하여 고민인 분들의 문제는 또 다를 것이다. 왜냐하면 그네들에 대해서는 병역의 의무보다도 주민번호 뒷자리의 결정문제가 더 시급할 것이기 때문이다. 또 이른바 종교적인 혹은 비종교적인 이유로 양심적 병역거부를 주장하는 친구들에 대해서는 요점이 다른 두 가지 판단; 양심의 자유를 보장해주어야 한다는 판단과 양심의 자유라는 가면 뒤에 숨은 비겁한 거짓말쟁이들이라는 판단 사이에서 각각의 케이스가 구분되겠지만 어찌되었든 전자로 판단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이 글에서 다루는 범위 밖에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왜 2년이라는 시간을 헐값에 팔아야 하는가. 왜 우리는 하루 일당도 안 되는 돈을 월급으로 받아가며 평소 때는 쳐다보지도 않던 XX파이에 침을 흘려야 하는가. 사실 이 문제는 근대국가와 국민의 관계설정에 있어서 상호에 교환의 관계를 설정하면서부터 생긴 것인지 모르겠다. 어쩌면 이 교환은 근대로 넘어서면서 국민에게 자유를 부여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국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존립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고 여기는 어떤 것들에 대해, 국민에게 의무로 부과하면서 그럴 듯한 이유를 갖다 대야 할 것 같은데 어떤 것도 적절하지 않아서 만든 것인지도 모른다. 이 관계는 꽤나 그럴 듯 해 보인다. 교환은 아주 익숙한 관계이고, 국가가 당신에게 딱히 해준 것이 없어 ‘보일지라도’ 당신이 적어도 그 국가 속에서 살아가며 유익을 얻었다면 당신도 국가에게 무언가로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것은 당연해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잠깐. 당신이 만약 ‘어, 그런가.’ 했다면 당신은 방금 무언가를 놓쳤다. 교환은 어디까지나 공통된 기준을 가지고 상호가 비슷한 정도의 가치로 자유롭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 땅에서 농사지어 이만큼 벌었으니 요만큼은 나에게 주라.’는 말은 그나마 낫다. ‘내 땅에서 농사지었으니 이만큼은 나에게 주라.’는 말은, 더구나 ‘내 땅에서 농사지었으니 이만큼은 세금, 이만큼은 보너스로 주라.’는 말은 글쎄, ‘내 구역에서 장사하면 보호세를 내야 할 것 아니야!’라는 동네 건달패의 대사의 유려한 표현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인간의 가능성을 이른바 측정불가능의 무궁함으로 둔다면, 그리고 세상의 것들이 전부 돈으로 환산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손 친다면 우리의 2년은 어느 정도의 가치인지 알 수도 없다. 우리의 2년은 대한민국에서 살아오고 살아갈 값의 부가세인가. 그보다, 우리는 그 교환을 꼭 해야만 하는가.

상대적 박탈감

이른바 병역비리자들에 대한 분노의 표출에 있어서 군대를 다녀오지 않은 자들에게 그 분노의 권리조차 분배되지 않는 것을 보면 이는 확실히 상대적 박탈감인 듯하다. ‘나는 갔다 왔는데 너는 안 갔냐!’라는 말에는 이미 ‘가기 싫은 곳’이라는 것이 전제되어 있다. 가기 싫은 곳이라는 말에는 또 ‘가야하는 곳’이라는 것이 전제되어 있다. ‘가야하는 곳’이라는 말에는 ‘모두’라는 말이 숨어있다. 곧 제대로 말하자면, ‘모두 다 (대한민국 국적을 가진 18세 이상 성인 남자) 가야하는, 그렇지만 가기 싫은 그 곳에 나는 갔는데 너는 안 갔다.’가 되지 않을까. 사실 이렇게 보면 대부분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어쨌든 가긴 가야한다.’ 이렇게 놓고 보면 위에서 말한 것, 곧 군대를 가야하냐 갈 필요 없냐의 문제는 이미 병역비리에서는 얘기가 끝난 문제라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서 병역비리의 그림자가 언뜻 보인다. ‘저 녀석 군대 안 가려고 버둥거렸어. 나쁜 놈.’이라는 분노 뒤에 ‘군대 말이야, 꼭 가야 하는 거, 너도 알잖아.’를 숨긴 것이다.

죄다 언론이 뒤집어 쓸 죄목은 아닐 것이다. 언론도 목적이 있을 것이고, 사실 그것은 언론을 움직이는 사람들의 목적일 것이다. 이른바 ‘영감’님들이 그 중심에 있을 것은 아마도 사실일 것이다. 보수적인 생각을 하는 ‘분’들의 입맛에 병역은 (그 자신은 해당되고 싶지 않을지 모르지만) 빠져선 안 될 소스일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되는 부분이 있다. ‘병역비리’라는 떡밥이 어느새 굉장히 쫄깃쫄깃한 이슈거리가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언제, 누가 그랬는지도 모르겠고 정당한 이유가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어느새 ‘병역’은 그 사람의, 특히 공인인 경우엔 더더욱, 도덕성을 판단하는 잣대로까지 그 위상을 드높이게 되어버린 것이다. 병역비리 혹은 병역비리의혹이라는 낙인은 당시의 손가락질을 한 곳으로 모으는 과녁 같다. 마치 비탈길을 구르는 눈덩이마냥 이젠 누가 굴렸는지 중심에 무엇이 있는지는 알 수도, 알 필요도 없이 일단 걸리면 그 대상은 아마존에 던져진 고깃덩이 신세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 ‘국민의 분노’가 재생산되는 과정에서 그 정당성문제는 이미 한 쪽 구석으로 치워진 느낌이 없지 않다는 것이다.

마치며

예전에 대학에 막 들어갔을 때, 플라톤의 초기 대화편을 읽으면서 끝에 책을 덮을 때마다 헛웃음을 웃었던 기억이 있다. ‘이건 뭐지, 자기주장이 없어.’라며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을 ‘파괴자’로 생각하며 살짝 미워했기도 했다. 소크라테스의 위상을 올려다보기에도 허리가 휘는 나는 감히 그런 입장이나 위치를 자처할 수 없다. 다만 지금에 와서 보니 소크라테스가 참 대단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는 말을 하고 싶을 뿐이다.

이 글에서 문제를 삼고자 한 것은 ‘병역의 당위성’이 아니다. 솔직히 말하면 그 병역의 당위성에 관한 입장들 중 심정적으로 쏠리는 입장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확고한 무적의 논리로 반드시 그러하다는 명쾌한 답을 스스로 도출해 낸 것은 아니기 때문에 난, 부끄럽지만, 소심하게도 그에 대한 판단을 일단 유보해 둔 상태다. 하지만 뉴스에 간간히 그런 기사들을, 그리고 댓글들을 볼 때마다 생각했던 것이 있다. 돌멩이를 던질 때 던지더라도 한 번쯤은 고민해봐야 하는 것 아닌가. 던져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던지라고 부추기는 이 사람들은 누군지.

언젠가 영화 을 다시 보면서, 사자왕 무파사를 죽게 만든 것이 대중의 알 수 없는 공포라는 것을 보고 그 섬뜩한 표현에 몸이 떨렸던 적이 있다. 디즈니의 의도가 무엇이든 간에 그 장면은 나를 잠깐이나마 돌아보게 만들어주었다. 설사 같이 깔려버리게 되더라도 (실제로 그렇게 되는 일이 비일비재하지만) 누군가 잠깐이라도 멈추었다면 그런 참사는 멈출 수 있지 않았을까. 그가 무파사이든 스카이든 간에 어쨌든 그런 식으로 남는 건 참혹한 시체뿐일 테니 말이다.

 

문제는 ‘병역 비리’가 아닌데 [썩은 뿌리 자르기]

[썩은 뿌리 자르기]

문제는 ‘병역 비리’가 아닌데

글: 한길석(충북대 강사)

‘원숭이’와 ‘람보’

약간 비실하게 생긴 후배가 해준 얘기다. 유학 시절 자신을 ‘조그맣고 머리만 좋은’ 동양인으로 깔보던 미국인과 대화를 하다가, 우연히 군대 얘기를 하게 되었단다. 그런데 이 뺀질하게 생긴 동양인이 제대 군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그 미국인은 자신을 ‘노란 원숭이’에서 단숨에 ‘람보’로 ‘진화’시키더라는 것이다. 미국은 모병제고, 그 미국인은 군대란 공화국 시민의 안전과 공공의 복리를 보위하는 조직이라고 배웠을 테니 그렇게 보는 것도 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구나 한반도는 가장 유명한 분쟁지역 중 하나지 않은가. 그런 험악한 곳에서 군 생활을 했으니 ‘전사’쯤으로 보는 것도 당연하겠지.

하지만, 그 미국인이 ‘원숭이’를 ‘람보’로 바꾸는 절정신공을 전개하든 말든, 한국 남성에게 군대란 꿈에서 볼까 무서운 곳 중 하나일 뿐이다(절대 과장이 아니다. 군대 다시 가는 꿈은 악몽계 랭킹 3위권 안에 든다.) 그런데 시민의 기본권을 보장한다는 대한민국 헌법은 권리는커녕, 이 악몽과 같은 생활을 수 년 간 감수하라고 한국 남자들에게 강제한다. ‘강제긴 하다만, 뭐…공화국 시민의 공적 복리를 위해서는 개인의 권리도 잠시 유보할 수 있는 거고, 더구나 멀쩡한 군함이 지뢴지 어뢴지에 쪼개진다는 나라라니, 내 나라 지키는 일은 당연한 일인 것 같기도 하다.’ 대충 이래서 국방의 의무는 신성하게 되었는데, 문제는 징집제 시행 이래 줄곧 이 신성의 영역에서 자유로운 ‘자유인’들이 적지 않았다는 점이다. 처음에는 정·재·계의 전통적 기득권층이, 이제는 연예인과 운동선수들이 ‘자유인’의 대열에 합류하여 ‘자유인’들은 매년 불어나고 있다. 그때마다 사람들은 죽여 살려를 반복하는데, 해마다 불거지는 병역 비리 논란이니 이젠 화낼 여력도 없다.

대한민국이 그렇게 허술한 나라가 아닙’니까요?

그런데 이 ‘공사다망(工事多忙)’한 정권에서는 정도가 ‘초큼’ 심하다. 대통령, 역대 총리, 장관 셋, 당 대표 모두가 병역을 면제 받은 ‘자유인’들인 것이다. 당·정·청 삼관왕을 휩쓴다는 건 정말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하는 것만큼 어려운 일인데, 산수유 액즙을 마신 것도 아닌 이 느낌을 “참, 뭐라 말할 수도 없고…표현할 방뻡이 엄네….”

국회의원들과 지방자치단체장들도 빠질 수 없는 노릇이니, 현직 국회의원 본인의 병역 면제율은 16.2%, 그 직계 비속은 10.3%라 하고, 지방자치단체장 본인은 20%, 직계 비속은 15%라고 한다. 상황이 이렇다면, 군대 가는 건 돈 없고 힘없는 사람들에게만 부과된 고역이 된다. 법 앞에서는 누구나 평등한 대우를 받는다는 법치(rule of law)의 원칙이라는 것은 민주적 입헌국가의 꼴을 갖춘 나라라면 어디에서나 적용되어야 하는 원리다. 그러나 법치국가 한국에서 헌법 39조와 병역법은 법치의 원칙 밖에 있다. 그러니 한국 남자들의 대부분이 징병절차가 불공정하다고 불평하고, 기회만 있다면 병역 면제를 위해 여러 방법을 동원해 보겠다고 푸념하는 것은 이해 못할 일도 아니다. 하지만 병역 면제를 받기 위해서는 돈과 줄과 정보와 배경이 있어야 하는데, 특권층이 아닌 보통 사람들은 이런 게 없으니 그냥 입영열차를 기다릴 뿐이다.

그런데 문제가 되는 것은 민주화가 이루어지면서 특권층이 독점하던 ‘혜택’에 마구잡이로 들이대기 시작하는 보통 사람들이 등장하고 있다는 거다. 연예인과 운동선수들로 이루어진 이들은 이빨과 어깨를 뽑고, 국적을 바꾸고, 체중을 늘리고, 정신병원에서 한 달 간 버티는 등의 고행 끝에 ‘신의 아들’이 되어 군 면제를 받아냈다. 하지만 신검 때만 짝눈이 되는 무공을 지닌 총리 말대로 “대한민국은 그렇게 허술하지 않”아서, 이들을 잡아내서 다시 군대로 보내고, 징집 기준을 높이고 있다.

우스운 희생제의

이들은 병역법 위반죄가 아닌 괘씸죄로 처벌된 듯싶다. 특권층에게나 은밀히 허용되던 군 면제를 감히 ‘광대 나부랭이들’이 넘봤으니 얼마나 괘씸했으랴. 더구나 면제 요령은 예비 판검사 영감들이 고시 준비 과정에서 어렵게 터득한 비법인데, 이를 따라하다니 이건 저작권 위반이기도 하다. 대한민국은 허술하지 않고, 법치국가로도 믿어지니 법의 이름으로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는 것이다. 게다가 연예인 등은 병역 비리를 엄중히 처벌하는 티를 내는 데 딱 좋은 먹잇감이다. 걸렸을 때 뒤를 봐줄 힘이 없는데다가 이름까지 알려져 대중에게 널리 사랑받고 있으니 전시 효과로서는 ‘왔따’다. 그래서 유명한 연예인들은 처벌받고 군대에 가지만, 안(?) 유명한 정치인들과 재벌들은 법적 공방을 벌여 합법의 검증표를 획득한다. 유명세가 없는 이들의 비리 행위는 상품성이 없으니 언론에서도 그리 깊숙하게 다루지도 않는다. 병역 비리 처벌 문제가 만만한 희생양을 통하여 사람들의 불만을 무마하는 우스운 희생 제의로 끝나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사정에 있다.

구호로서의 공정사회

그런데 저 희생 제의로 피해보는 이는 희생양만이 아니다. 진짜 이와 어깨가 빠지고 신체와 정신이 병역을 수행하는 데에 어려운 가난한 이들이 피해를 본다는 것이다. 위와 같은 병역 비리 사건이 발생하면, 사람들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서 징집 기준은 강화된다. 그 와중에 정말 병역 면제로 보호 받아야할 사정이 있는 사람들이 징집되어 영구적인 손상을 입을 우려가 있는 것이다. 예전에는 어깨와 치아에 심각한 문제가 생기면 면제였는데, 어깨와 이로 요령 피우던 놈들을 처벌하면서 공정성을 기하기 위해 이제는 이와 어깨로는 면제가 안 된단다. 희생제의와 공정사회론이 합쳐져서 불공정하게도 애꿎은 사람만 잡게 됐다. 이는 위대한 각하께서 휴가 기간 동안 ‘공정사회 단기 속성 과정’을 다닌 효과다.

병역 비리의 근절 방법은 간단하다. 병역을 기피하려는 기득권층이 요령 피우지 못하도록 하면 된다. 진정한 공정사회의 원칙이 일반화된다면 이러한 문제는 발생하지도 않는다. 롤즈는 공정한 사회의 원칙에 대해 각자의 양립가능한 기본적 자유를 평등하게 인정하면서도, 사회적?경제적 불평등이 발생하는 경우에는 최소수혜자가 최대한 이익을 보게 하고, 공정한 기회 균등을 보장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것이 정의로운 자유주의 사회가 갖춰야할 요건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정의원칙대로 하자면 대략, 기득권층이건 서민이건 병역의 의무는 공정하게 지게 되며, 병역을 질 수 없는 최소수혜자들은 예외가 된다.

하지만 공정사회를 경영학 책이나 주변인에게서 주워들은 이들에게 공정으로서의 정의원칙이 공정하게 적용될 리는 만무하다. 정략적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의도에서 주장된 정의원칙은 자기 이익을 손상시키지 않는 범위 내에서만 ‘공정하게’ 적용될 수밖에 없다. 자기 이익이 다른 이들의 이익과는 양립불가능하다면 자기 것을 포기해야만 한다는 것이 공정함의 한 조건인데, 자기이익의 보존을 절대 목표로 하는 이에게는 이러한 조건은 안중에도 없다. 그러니 친정부 신문마저도 공정사회론을 빈정대는 것이다. 병역 비리자의 엄중 처벌이 희생제의 촌극인 것처럼, 공정사회론 또한 그 못지않은 희극이 되었다. 웃음이 헤퍼지면 헛웃음만 나오듯이, 사회에 희극이 만연하면 공허감만 들 뿐이다.

자유주의를 부탁해

병역 비리에 대해 사람들이 민감한 이유는 공정한 대우를 받지 못하는 데에 대한 불만에 있다. 병역 비리는 우리 사회의 불공정성을 몸으로 직접 겪은 문제라서 더욱 사람들의 공분을 사고 있는 것이다. 결국 분노의 정체는 병역 비리가 아니라 공정한 대우다. 병역 비리 문제만 발생하면 이를 가는 시민들은 다만 지극히 상식적인 믿음이 현실화되기를 바랄 뿐이다. 민주적 입헌국가에서 시민들은 누구나 동등한 권리를 지닌 이들로 대우받아야 함을 상호 인정해야 하며, 사회적 약자는 보호받을 권리가 있음을 현실에서 확인받고 싶은 것이다. 이것은 지극히 자유주의적인 열망이다. 최소한 자유민주주의를 신봉한다고 자부하는 이라면, 자유주의 정당의 집권 생명을 연장하려고 한다면, 이 지극히 온건하고도 얌전한 기대를 좌절시키지 말아야 한다. 자유주의로는 성이 차지 않는 필자지만 그래도 저 정도 사회라면 숨이라도 쉴 수 있기에, 부탁한다, 제발. 자유주의라도 제대로 하나 해줘. 나도 좀 살자!!

덧붙임: 징집의 공정한 집행을 주장했다고 해서 필자가 징집 거부자를 백안시한다든가, 남북의 군사적 대치를 당연시한다고 짐작하지 마시길. 난 ‘Imagine’의 존 레논도 좋아하구요, 한반도 평화와 여러 양심적 이유들 때문에 징집을 거부할 권리가 존중되어야 한다고 봐요.

 

“전 공익 다녀왔습니다” – 병역비리 문제 [썩은뿌리 자르기]

[썩은뿌리 자르기]

“전 공익 다녀왔습니다”

?- 병역비리 문제 –

최성문(서울시립대학교 학부생)

 

남자들 사이에서 첫 통성명 후에 등장하는 레퍼토리 중 하나가 군대다. “군대 어디 다녀오셨어요?” 라고 물으면 나는 “예, 전 공익 다녀왔습니다”라고 말한다. 나는 2008년 5월 말 공익근무요원으로 복무를 시작해 2010년 6월에 소집해제를 했다. 이러한 이유로 말을 조심해야한다. 왜냐하면 소집해제가 아닌 제대라는 단어를 쓰면 심한 상대의 경우 적확한 단어가 아니라고 지적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한 달의 군사훈련 끝에 2년을 부당한 대우와 호소할 곳 없는 환경에서 일을 한다는 점에서 현역들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더욱 고달팠을 현역들에게 감히 악수를 청한다.

첫 건강검진의 결과는 1급이었다. 곧 공군에 지원했으나 훈련소에서 받은 검진에서 건강이상이 의심되어 귀가조치를 당했다. 이듬해 병원에서 검사를 받으니 4급에서 5급에 해당하는 판정이 나왔다. 왜 4급이면 4급이지 5급이 왜 나올까? 이 글을 읽는 모두가 아시다시피 병무행정이란 것이 그 해에 군 지원자가 많으면 기준이 느슨해지고, 지원자가 적으면 엄격해지는 고무줄이다. 따라서 4급과 5급 사이는 운만 조금 따라준다면 해당 시기의 분위기를 봐서 공익근무 혹은 병역면제를 약간이나마 스스로 점칠 수 있다.

하지만 사회는 개인의 의도를 허락하지 않는다. 생애 2년을 통째로 날려버린다는 부담감에도 불구하고 내가 공익근무를 선택한 이유는 자명하다. 왜냐하면 군대에 다녀오지 않으면 사회의 구성원으로써 실격이라 간주하는 주변의 시선 앞에 나 자신은 무력했기 때문이다. 얼마간의 타협을 필요로 했고 주변에서도 그 편을 권유했다. 어차피 운이 따라줘야 한다는 단서가 붙은 면제이기에 아쉬운 마음은 떨쳐버리고 공익근무를 선택했다. 대다수 현역 보다야 편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당시 했던 고민은 꽤 심각한 것이어서, 몇날 며칠을 컴퓨터 앞에서 병역관련 자료를 살펴봤는지 모른다. 법이 강제하지 못하는 범주에서는 사회가 그 역할을 대신해준 격이다. 이러한 고민과 행동은 징병제국가로서는 개인이 할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이 아닐 수 없다.

훈련소에 입소하여 한 달 여의 기초 군사훈련을 마치고 살던 곳으로 ‘복귀’했다. 자신이 살던 곳을 숙소로, 관청을 본 업무지로 삼아 공익근무요원으로써의 병역을 시작했다. 현역 앞에서는 미안한 이야기일지 모르나, 이러한 생활도 참 힘들다. 2년을 시급 740원으로 노동해야했던 것 외에도 의무라는 미명 아래 온갖 잡일을 떠맡기던 공무원들과, 우습게도 그 안에서 연공에 따른 계급을 만들어 자신의 편의를 도모했던 같은 공익근무요원 선임들의 틈바구니에서 병역의무의 참맛을 알아갔다. 담당공무원은 공익근무요원관리의 편의를 위해 선후임 관계를 장려했다. 호소할 곳 없던 나는 으레 예비역들이 말하는, 인내를 배울 기회라 생각하며 애써 스스로를 다독였다. 하지만 오래가지는 못했다.

최소한 나의 공간에서나마 내가 믿는 상식을 관철시키리라 결심했고 이내 행동으로 옮겼다. 먼저 담당공무원에게 업무배분의 부당함을 따졌다. 공무원에게만 허락된 책임 있는 업무를 공익근무요원에게 떠넘기지 말 것이며 업무선택에 있어 개인의 희망을 고려할 것과 선임과 후임의 계급관계를 장려하는 행위를 멈추라고 큰 소리로 요구했다. 돌아온 것은 욕설과 고함이었지만 오히려 호기라 여긴 나는 멈추지 않았다. 며칠을 걸러 계속 고성이 오가는 가운데 하루는 선임의 호출을 받았다. 온갖 위협적인 언사와 함께 몰매가 쏟아지는데, 난 그때 본인의 위치를 자각했어야 했다. 두 사람을 때려눕히고 속은 시원했지만 그날 이후로 근 1년이 가시밭길이었기 때문이다.

저항을 크게 하면 할수록 상대는 조용히, 하지만 더욱 심하게 나를 옥죄였다. 따돌림은 기본이고 온갖 일상적인 잡무에 병역법이 허락하는 업무강도의 한계선까지 나를 몰아댔다. 너무 지쳤던 나는 결국 기약 없는 저항을 포기하고 조용히 귀순하기로 마음을 바꿨다. 그렇다고 그들의 행패가 수그러들지는 않았으나 나의 심지는 거기까지였다. 과거 고래고래 난리치던 모습과 갑작스레 조용해진 지금의 대비가 주변 사람들 눈에 어떻게 비칠까 전전긍긍하는 매일이었다. 그렇게 세월이 지나자 선임들은 모두 제대를 하고 공무원들의 인사이동으로 내 옛 모습도 서서히 잊혀져갔다. 어느새 나는 부서에서 착실한 공익근무요원이자 가장 맏 선임으로 받아들여졌다. 처음 느꼈던 병역의무의 부당함은 잊은 채 그저 살기 편해졌다는 것에 자족하며 빠르게 제도화되었다. 권력을 가진 사람을 대하는 법이라던가 일 대신 요령을 배우며 소위 사회생활을 착실하게 예습했다.

1년여가 흐르고 나에게도 첫 후임이 배정되었다. 첫 인사 나누며, 이 친구를 어떻게 부려먹어야 내가 편해질까 고민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애써 그 욕심 달래며 후임과 약속을 한 가지 했다. 공무원들은 우리에게 계급을 강요하지만 우리끼리는 호형호제 하며 어려운 병역의무를 서로 편하게 마치자고. 결국 처음 목표했던 상식의 관철은, 담당공무원이라는 실체로 대변되는 병역의무와 나의 의지 사이에서 타협을 한 셈이다. 난 안타깝게도 징병제국가의 의도대로 권력 앞에서 가져야할 태도를 배워버린, 한국사회의 훌륭한 구성원이 되어버렸다. 한 가지 위안이라면 공익근무요원들의 사이가 이후 동네 형과 동생처럼 편해졌다는 것이다.

소집해제 후 다시 이전의 사회생활을 영위하며, 확실히 과거와 지금의 내가 많이 달라짐을 느낀다. 의사를 전달할 때 직접 하기보다는 상대의 눈치를 살피며 에둘러 표현하는 일이 잦아졌다. 일을 할 때 내용 보다는 그 겉보기나 완성도에 치중하며, 일에 들이는 노동력의 절감에 무게를 두기 시작했다. 아직 병역을 겪지 않은 사람들에게 일종의 선배라는 의무감이 들며 상대의 미래에 대해 괜한 훈수가 늘었다. 혹 상대가 나보다 권력관계로 우위를 점한다면 태도가 그렇게 유순해질 수가 없었다. 덕분에 주변으로부터 예전과 달리 인간관계를 중시하며 나이 먹은 티가 난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재는 저 험난한 경쟁사회를 어떻게 헤쳐 나갈까에 대한 어린 날 고민이 조금씩 사라지고 있다. 결과적으로 고민을 의지로써 극복하는 것이 아닌, 내가 고민에 녹아들어버린 셈이다.

좀비영화가 생각난다. 좀비는 살아 움직이는 시체로, 산 사람을 물어서 그 역시 좀비로 만든다. 감염성이 기하급수적이라 영화 속에서 감염되지 않은 사람은 언제나 소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소수는 고달프다.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드는 좀비를 열심히 피하지만 대개 붙잡혀 좀비가 되고 만다. 다수가 가해자의 입장이 되면 도망치느라 겪을 괴로움은 없다. 오히려 여러모로 편하다. 하지만 과거 저항했던 나라는 한 인간을 떠올려본다. 나는 좀비 되기를 거부하고자 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러한 선택권이 없는 지극히 온건해진 스스로를 대비하며 새삼 괴로워해본다.

헌법 9조의 개정과 일본의 제국주의 – 일제와 현대 [썩은 뿌리 자르기]

[썩은 뿌리 자르기]

헌법 9조의 개정과 일본의 제국주의

– 일제와 현대-

이유철 (코뮤닉스 회원)

올해로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되고 100년이 지났다. 여기에 맞춰 수많은 성명서들과 기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중 가장 눈길을 끈 것은 일본 현 정권의 수장인 간 총리의 한일병합조약 체결 100년 ‘즈음’한 담화이다. 1995년 무라야마 전 총리가 ‘전후 50년’을 기념하여 발표한 ‘아시아 제 국가들’을 대상으로 발표한 담화 이후 15년만의 일이다. 이를 두고 대부분의 여론은 과거 식민지에 대한 담화라는 점에서 긍정적이라는 의견이다.

그러나 진보진영과 시민사회단체들은 여전히 해결되고 있지 않은 위안부문제, 독도문제, 역사교과서문제 등을 거론하며 100년 전이나 현재나 일본의 제국주의적 경향은 변화하지 않았으며,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 부터의 사과’를 뛰어넘는 담화여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일본의 식민지배를 경험한 대부분의 아시아 나라들의 입장도 마찬가지이다. 한일병합 100년이 지난 현재 일본의 제국주의의 현주소는 어떠한가?

반세기만의 정권교체와 헌법 9조의 개정 가능성

지난해 일본에서는 반세기만에 정권교체가 이루어졌다. 중의원 선거에서 일본 민주당이 압도적인 차이로 지난 54년간 정권을 유지해온 일본 자민당을 물리친 것이다. 당시 선거의 화제는 일본의 신자유주의와 이에 따른 병폐였으나 국내와 다르게 주변국들은 對아시아 외교를 선언한 민주당의 이후 행보에 대한 관심이 더 높았다.

한국에서는 얼마 전 사임한 하토야마 전 총리의 영부인이 한류 광팬이라는 것부터 시작하여 민주당 실세인 오자와 전 간사장의 한국에 대한 애착 등을 근거로 내세우며 과거사 해결을 비롯해 한일관계 개선 등에 대한 핑크빛 전망을 그렸다. 물론, “정권교체 당시 제국주의의 상징인 야스쿠니 신사에 대한 참배를 하지 않겠다”, “과거 식민지는 잘못된 것”이라는 등의 발언을 하며 과거 자민당과는 어쩌면 180도 다른 행보를 보이는 이들에게 건 기대는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실, 과거사에 대한 청산과 對아시아 국가들과의 관계개선은 일본의 제국주의적 경향과는 별개의 문제이다. 일본의 제국주의적 경향을 인식하는데 있어 중요한 잣대가 되는 것은 헌법 9조, 일명 ‘평화헌법’이다. 일본 헌법 9조는 2차 세계대전 후 승전국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일본의 ‘전력보유(군대) 금지’와 ‘국가 교전권 불인정’을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다. 즉 이는 제국주의 일본을 전망해 볼 수 있는 중요한 잣대이며, 이 조항에 대한 개정은 또다시 일본이 제국주의로 나아가기 위한 중요한 교두보가 될 것이다.

따라서 완전한 제국주의 국가로서의 일본을 만들기 위한 일본 국내 보수주의자들은 이에 대한 개정을 꾸준히 시도하고 있다. 이는 적어도 외면적으로는 과거 자민당 아베 전 총리에 의해 명문개헌이 제기되면서 적극적으로 추진되지만 민주당의 반발로 무산되고 만다. 이러한 외면적 과정이 주변국들을 안도하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실제 상황을 살펴보면 일본 민주당도 어쩔 수 없이 포기한 것일 뿐이다. 그 이유는 첫째, 민주당이 개헌수속법에 대한 자민당과의 협의를 비토한 것은 헌법 9조 수호를 위한 ‘9조회’의 활동이 커지면서 여론의 움직임을 반영한 결과이기 때문이며, 둘째로는 당시 오자와 민주당 대표가 선거를 앞두고 자민당과의 대결노선을 취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과거 민주당의 행보를 살펴볼 때, 개헌 가능성은 여전히 존재한다는 점이다.

2005년까지 일본 민주당의 기본적인 입장은 명문개헌에 긍정적이었다. 특히 주목해 볼만한 점은 2003년 당시 민주당 대표이자 현 일본 총리인 간 나오토가 작성한 메니페스토와 현 민주당 간사장인 오카다 카쓰야가 작성한 2005년 민주당 메니페스토이다. 당시 민주당 메니페스토는 ‘헌법창조’라는 표현으로 개헌입장을 명확히 하고 있었다.

2007년 오자와 전 간사장의 취임으로 민주당의 자민당 대결노선이 취해지지만 의원 개개인으로 살펴볼 경우에는 민주당 소속 의원들의 개헌입장은 변함이 없다. 예를 들어 개헌파 의원 모임인 ‘신헌법제정 의원동맹’에서는 아베 개헌 좌절 후 새롭게 민주당 내 개헌파를 임원으로 영입하는데, 2008년 3월 의원동맹총회에서 다름 아닌 당시 민주당 간사장이었던 하토야마 유키오와 현 칸 정권의 외무대신인 마에하라 세이지가 그들이다. 이러한 요인들은 일본 민주당도 언제든지 개헌으로 나아갈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의미하는 것이다.

최근 사민당과의 연립이 깨지면서 국민여론이라는 장애물만 해결되면 개헌의 가능성은 더욱 높아진다. 이는 복고적 형태의 제국주의 일본의 완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미국의 군사개편과 일본

이러한 일본의 움직임은 일본 헌법 9조 개정의 문제로 그치지 않고 UN 안전보장이사회 상임 이사국 진출로 이어지고 있다. 결국 일본은 제국주의적 경향에 더욱 박차를 가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지원하는 것은 다름 아닌 미국이다.

지난 2007년 미국에서는 對아시아 정책에 관한 흥미로운 보고서가 제출되었다. 일명 아미티지-나이 보고서가 그것이다. 미국 대외정책의 싱크탱크인 CSIS에서 나온 이 보고서는 전?현직 미의회 의원들도 다수 참여한 영향력 있는 보고서로, 미국 대외정책의 전망을 가늠해 볼 수 있는 중요한 잣대가 된다.

이 보고서의 대략적인 내용을 살펴보면 Pan-Asia(중국-러시아)에 대항한 Ocean-Asia(미국-일본-호주)의 강고한 연대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협조체제 구축에 있어 핵심이 미일관계 구축이다. 따라서 이 보고서에서는 미국이 세계전략을 세우는데 있어 일본의 확대된 역할을 요구하고 있는데, 이를 위해서 헌법 9조의 개정과 나아가 일본의 UN 안전보장이사회 상임 이사국 진출의 필요성에 대해 제언하고 있다.

이 보고서 작성의 주된 역할을 한 학자 중 한 명인 미국의 대표적 친일파 인사인 조셉 나이가 현재 미국 오바마 대통령의 대외정책 고문을 맡고 있다는 점은 이 보고서가 현재에도 매우 유효한 것임을 의미한다.

그러한 미국이기에 2009년 일본 민주당이 선거를 앞두고 보인 태도변화는 충격적이면서도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었다. 테러대책특차법연장 반대와 미일지위협정 재검토, 오키나와 기지이전을 내세운 일본 민주당에게 미국은 즉각적으로 대응했다.

하토야마 전 총리는 자신의 착각-이라크 전쟁 반대로 미국 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끈 오바마도 이해해 줄 것이라는-에 대한 책임을 고스란히 자신이 떠안아야만 했다. 미국의 동북아 안보정책에 있어 핵심기지인 오키나와 기지 문제 등에 대한 일본의 요구들은 미국 군사개편의 핵심사항이며 당장 필요한 문제였기에 미국의 입장에서는 그 무엇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결국 미국의 압력으로 하토야마는 오키나와 현 외 기지이전을 포기했을 뿐더러, 5년간 아프가니스탄에 50억 달러, 2년간 파키스탄에 10억 달러 지원에 관한 정책마저 통과시켰다. 그리고 그는 사퇴했다. 재계의 압력에도 꿋꿋하게 복지정책 추진을 주장했던 하토야마였지만 미국의 압력에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이 부분은 미국의 압력이 얼마나 컸는지를 가늠해 볼 수 있는 부분이다.

이러한 과정들은 일본 스스로의 제국주의적 야망과는 별도로 미국의 압력 하에 군사대국화 정책이 진행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2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군사적, 경제적 패권을 쥐고 세계를 뒤흔들었던 미국은 중국이라는 새로운 패권국의 등장과 세계금융공황을 계기로 급격히 흔들리고 있다.

바야흐로 포스트 팍스 아메리카나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이 선택할 수 있는 최적의 파트너는 일본이다. 왜냐하면 일본은 풍부한 경제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며, 또한 미국과 경쟁하는 패권국이 유일하게 존재하는 동아시아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다. 이는 미국이 일본을 비롯해 한국을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일본의 제국주의와 그 전망

일본의 제국주의적 경향성은 외면적으로 정체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민주당에 대한 그릇된 인식은 이에 대한 오해를 확대시켰다. 헌법 9조를 둘러싼 개헌에 대한 입장은 기본적으로 동일하기 때문이다. 자민당 주도의 보수주의적 보통국가론(명문개헌론)이든 민주당 주도의 자유주의적인 보통국가론(해석개헌론)이든 대외적인 군사활동을 목적으로 하기는 매한가지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일본의 헌법 9조 개헌을 둘러싼 제국주의적 경향성에 제동이 걸린 가장 큰 원인은 무엇보다도 국민들의 반발에 있다. 그리고 9조회를 중심으로 한 호헌운동이 그 중심에 있다.

2004년 6월 자위대의 이라크파병과 명문개헌론이 대두되면서 이에 위기감을 느낀 9인의 제언으로 만들어진 9조회는 매년 급속도로 성장하면서 2009년 현재 그 수가 8000명에 육박하게 되었다.

9조회의 특징을 살펴보면 구성원들의 연령대는 대부분 과거 전쟁세대인 50~70대가 중심이며, 개인 멤버십형태인 이 조직의 이념적 스펙트럼은 진보부터 보수까지 아우르며 헌법 9조 개정 반대라는 단 한 가지 원칙에 동의하는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광범위성은 결국 2004년 당시 개헌에 대한 여론조사에서 찬성 65%였던 여론을 2008년에 이르러서는 뒤엎고 만다. 당시 집권당도, 현재 집권당도 개헌정책을 수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나아가 이들 9조회 구성원들 중 일부 좌파들은 9조+25조(생존권) 운동으로 이를 확장시키면서 반신자유주의 운동으로까지 확대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국민적 반발에도 불구하고 평화헌법 개정과 일본의 군사대국화 야욕이 다시금 표면화될 가능성은 여전히 존재한다. 정치 안보지형적 요인, 정치세력의 폐쇄성, 미국의 압력 등은 그러한 요인들이다.

일본 정치세력의 입장에서 개헌 및 군사대국화라는 과제는 사회양극화의 급격한 확대에 따라 나타나고 있는 일본 내 국민들의 계층, 계급간의 위화감을 잠재우고 이들을 하나로 묶어 내면서 동시에 이들을 보수정치의 집표기계로 만들어 낼 수 있는 유일한 기제이다.

또한 중국의 패권국 부상과 북한의 핵개발, 러시아의 자원 패권주의에 대항하여 자신들의 헤게모니를 유지하기 위해서도, 한편으로 독자적인 패권유지가 어려워진 미국의 강력한 요구에 의해서도 이들 이슈는 계속해서 제기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요인들을 극복하거나 견제하기 위해서는 ‘전쟁’이라는 공통적인 경험(두려움)에 기반한 각국 시민사회 간의 교류 및 협력체제 구축이 필요할 것이다. 현재 일본의 제국주의적 경향은 일국적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패권국들 간의 제국주의적 경쟁을 지양하고 억제해 나가기 위한 동북아 시민사회들 간의 가칭 ‘동북아 평화를 위한 시민사회 6자회담’은 하나의 좋은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힘의 논리가 전부인 국제사회에서 피해자로 남을 수밖에 없는 국민들이 스스로 전쟁에 대한 공포를 공유하고 평화를 지켜나가기 위한 협력 및 교류는 이기적 행위자의 폭주를 막기 위한 유일한 기제일 것이다.

일본제국주의와 현재 – 일제와 현대 [썩은 뿌리 자르기]

[썩은 뿌리 자르기]

일본제국주의와 현재

– 일제와 현대 –

글: 이순웅(숭실대 강사)

공(功)과 과(過)를 구별하지 못하는 사람들

민주당을 이끌어가는 사람들이 당의 정통성을 계승한다면서 거명하는 사람 중에는 박순천(1898~1983)도 있다. 거명되는 사람 중 유일하게 여성이다. 5선 국회의원, 민주당 총재를 지낸 바 있는 한국 여성 정치인 1호.

지난 광복절 직후인 8월 16일, 부산 기장군의회는 박순천의 생가 복원을 위한 추경 예산 편성을 논란 끝에 찬성 4표, 반대 2표, 기권 1표로 승인했다. 논란이 된 주요 이유는 그의 친일 행적 때문이다. 대부분의 민족주의자들이 그랬듯이 식민지 시절 초기에는 박순천도 3.1만세 운동에 가담한 적이 있지만, 1940년 12월 25일 이광수가 발기인 대표였던 황도학회의 발기인이 되면서부터는 본격적인 친일 활동에 들어간다. 황도학회는 ‘내선일체의 완성’을 목표로 황도 사상을 교육, 선전하기 위해 조직된 단체다.

이후 박순천은 조선임전보국단 산하 부인대 지도위원으로 참여하였다. 조선임전보국단은 1941년 10월 결성된 최대의 친일 민간단체로서, 부인대에는 김활란(이화여대 총장), 고황경(서울여대 총장), 박마리아(자유당 시절 2인자인 이기붕의 부인), 박인덕(인덕대 설립자), 배상명(상명대 설립자), 송금선(덕성여대 총장), 유각경(한국 YWCA 창립), 이숙종(성신여대 설립자), 임숙재(숙명여대 총장), 임영신(중앙대 설립자), 황신덕(추계예대 설립자) 등이 망라돼 있었다.

1943년 3월, 경성가정의숙(지금의 서울 중앙여고)의 교장 황신덕과 부교장 박순천은 전교생을 불러놓고, 학교를 살리기 위해 한 명이라도 근로 정신대에 지원해달라고 호소한다. 그 결과 당시 2학년(18세)이던 김금진 학생이 지원에 나섰다. 김금진은 일본에서 총알을 만드는 군수공장으로 끌려가 해방이 될 때까지 고초를 겪었다. 2년여 동안 생리를 못할 정도로 몸이 망가졌지만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가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그리고 1983년 박순천이 사망했을 때는 서울 화곡동 같은 동네에 살았지만 문상도 가지 않았다. 해방 뒤에 찾아보기는커녕 사과 한마디 하지 않은 박순천을 스승으로 인정할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박순천의 생가 복원 사업에 관해 기장군 관계자는 “향토 인물이자 독립운동가인 박 여사의 생가가 방치돼서는 안 된다는 민원이 잇따르고 있고…..” “박 여사의 ‘과’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공’이 훨씬 많은 만큼 사업 추진에는 문제가 없다”고 말했다.1)

‘공’이 훨씬 많다니? 도대체 무엇이 ‘공’이고 무엇이 ‘과’란 말인가. 박순천의 경우 이른바 ‘공과’라는 것이 서로 비교 대상이나 될 수 있는가. 설사 공과를 비교할 수 있다 하더라도 과가 더 크다. 교육자로, 정치가로 행세하려면 친일 행적을 감추고 만세 운동에 가담했던 것을 부풀렸을 터이니 사기꾼임에 틀림이 없고, 제자를 사지에 몰아넣고도 사과 한마디 없었으니 철면피에 후안무치한 인간 아닌가.

박순천의 더 큰 과는 과를 공으로 포장하여 감추면 과가 과로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데 있다. 이런 점에서 보면 기장군 관계자는 박순천의 사기행각에 놀아날 뿐만 아니라 또 다른 박순천식 ‘과’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어디 기장군 관계자뿐이겠는가. 당의 정통성을 박순천 같은 사람에게서 찾는 민주당 역시 무엇이 공이고 과인지,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구별하지 않음으로써 바람직한 역사의식을 갖는 데에 큰 걸림돌이 되고 있다.

공과를 진정으로 따지는 일은 끝까지 독립운동을 했던 사람들에게나 해당한다. 예를 들어 독립운동상의 ‘공’이 있으나 전술상 또는 방법상의 실수가 있었다면 그런 것이 ‘과’이다. 공과라는 것은 같은 일을 계속한 사람에게나 해당하는 것이지 이리 붙었다 저리 붙었다 하는 변절자에게는 해당하지 않는다. 식민지 역사를 겪은 우리에게는 끝까지 독립운동을 한 사람에게만 과보다 많은 공이 있다.

야당다운 야당이 없는 나라 – 여전히 살아있는 일본제국주의의 잔재

제1야당이라고 하는 민주당은 왜 친일 인사에 관해 냉정하게 평가하지 못할까? 많은 굴절이 있지만 자신의 뿌리가 한민당에 있기 때문인데, 한민당은 일제 시대의 지주세력이 중심이 돼서 만든 당이다. 민주당의 흐름(한민당→민국당→민주당)은 이승만의 자유당뿐만 아니라 박정희의 공화당, 전두환·노태우의 민정당에 대한 대항 세력 역할을 일정부분 해왔다. 그러나 한민당은 그 뿌리가 일지주세력인 만큼 친일 혐의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그렇기 때문에 집권 정당과 권력 투쟁은 할 수 있어도 그 권력의 원천이 정당성, 정통성에서 나오는 것은 아니었다.

남한에서는 야당다운 야당의 뿌리가 싹부터 잘렸다. 건국준비위원회를 꾸리면서 임시정부를 준비했던 여운형의 암살, 미군정에게 권력을 내놓으라고 요구하면서 조국의 분단을 끝까지 막으려 했던 김구의 암살, 이승만에 의해 농림부 장관으로 임명되기도 했던 조봉암의 죽음 등은 정통성 없는 지배 권력과 정통성 없는 야당의 시대를 예고하는 것이었다.

친일 세력을 대거 기용했던 이승만이 좌파 운동 경력이 있는 조봉암을 농림부 장관으로 임명한 데에는 그에게 토지 개혁을 맡겨 민심을 달래고 얻는 한편, 한민당의 물적 기반을 흔들어놓겠다는 의도도 있었다. 조봉암은 북한의 ‘무상몰수 무상분배’ 토지개혁과는 달리, 지주에게 억울한 희생을 시키지 않고 농민에게는 염가로 분배하는 방법을 채택했다. 그러나 이것은 한민당 세력을 만족시킬 수 없는 것이었다. 조봉암이 6개월 만에 장관직에서 물러나는 데에는 한민당의 집요한 공격이 한몫을 했다.

이후 조봉암은 진보당을 결성하고 대통령 선거에서 민국당의 이시영 후보보다 20만 표를 더 얻는 등 선전(善戰)했으나 이승만의 최대 정적으로 부상하는 바람에 곧 간첩 누명을 쓰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야 했다.2) 진보적 개혁주의자, 한국판 사회민주주의자의 최후이다.

이후 자유당, 공화당, 민정당으로 이어지는 ‘근본도 없는 정치꾼들’의 집권 정당은 한민당에 뿌리를 둔 이른바 민주당의 견제를 받으면서 권력을 행사했다. 김영삼의 3당 합당이 가능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친일의 뿌리, 계급적 기반으로 볼 때 서로가 서로에게 그다지 적대적인 세력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3당 합당(민자당)은 신자유주의의 길을 가기 위한 보수 세력들 간의 야합이었으며, 김대중의 평민당은 민자당에 대한 전라도적 안티테제에 가까운 정당이었다.

김대중으로부터 정치적 ‘적자(嫡子)’임을 인정받음으로써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노무현 역시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노무현 스스로도 말했듯이 한미 FTA 협상 테이블에 나섰을 때 개혁은 이미 실패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그 역시 대연정을 말함으로써 본인이 김영삼의 정치적 ‘적자’이기도 하다는 점을 보여주려 했다.

일본이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하면 핏대를 올리는 사람이 많지만, 독도 주변 해역을 공동어로구역으로 설정했던 때가 김대중 정부 시절이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은 것 같다. 김대중 정부의 태도는 “지금은 곤란하니 기다려 달라”고 말한 이명박 대통령의 태도와 질적으로 큰 차이가 있다고 할 수 있을까. 역대 정부 간의 차이에만 주목하고 닮은 모습은 보지 않으려 하면 사실이 사실대로 보이지 않는다.

야당이라면 모름지기 현재 정권을 잡지 않고 있다는 뜻뿐만 아니라 여당과는 질적으로 다른 대안을 갖고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지금의 야당 민주당은 진보의 외피를 쓴 거대 보수 야당일 뿐이며 지금의 여당과는 권력을 나누는 데에만 관심이 있는 일종의 정치적 동반자이다.

둘 다 나쁜 놈이라는 양비론 넘어서기 – 더 나쁜 놈과 덜 나쁜 놈

한때 민주인사로 행세했던 김동길 교수는 전두환 정권 시절에 이른바 양비론을 펼쳐 젊은이들의 웃음거리가 된 적이 있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어중간한 태도를 취해 결국에는 전 정권을 정당화하는 데 기여했기 때문이다. ‘좋은 놈’과 ‘나쁜 놈’이 분명해 보였던 시절, 그의 태도는 양비론의 전형으로 여겨졌다.

그런데 문제는 ‘둘 다 나쁜 놈인데 한 쪽이 더 나쁜 놈일 경우 덜 나쁜 놈이 좋은 놈 행세를 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서유럽이나 미국에서 만들어진 제2차 세계대전 관련 영화나 다큐멘터리의 경우 나치스트나 파시스트, 일본의 군국주의자는 ‘나쁜 놈’으로 그려진다. 물론 그들과 싸우는 미국, 영국, 프랑스 등의 세력은 좋은 놈으로 그려진다. 그런데 이 ‘좋은 놈들’은 ‘나쁜 놈들’을 나쁘다고 말하면서 자신들이 나쁜 놈들이라는 점을 감추고 있다. 그들 역시 식민지를 한 뼘이라도 더 가지려고 했던 제국주의 세력일 뿐이라는 점을 말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사회 자체가 감옥과 같은 사회일 경우, 감옥을 만들어놓고 감옥 밖의 사회는 감옥이 아니라고 우기는 것과 같다.

얼마 전 고은 선생이 노벨 문학상 후보에 올랐다가 또 다시 상을 받지 못한 일이 있었다. 8년째의 고배라고 한다. 하지만 노벨 문학상 수상을 거부했던 사르트르를 생각하면 그다지 섭섭해 할 일도 아니다. ‘알제리도 프랑스다’라는 식으로 식민지 알제리의 독립 문제에 무심했던 카뮈는 노벨상을 받은 반면에 알제리 독립을 지지했던 사르트르는 그 상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고은 선생의 행보로 봐서 사르트르와 같은 태도를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다만 다음과 같은 통계는 왜 고은 선생이 상을 받기 어려운지 말해주는 것처럼 보인다. 1901년부터 2009년까지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된 사람의 국적을 보면 프랑스 14회, 미국 11회, 영국 9회, 독일 7회, 스웨덴 7회, 이탈리아 6회, 스페인 5회, 소련 4회, 노르웨이 3회, 덴마크 3회, 일본 2회 순이다.3)

11개 국가가 104분의 71을 차지하고 있는데, 이들 나라는 모두 식민지 건설의 역사, 정복·점령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반면에 식민지였거나 타국으로부터 정복을 당했던 국가는 아일랜드 4회, 폴란드 3회, 칠레 2회 순이다. 노벨상은 식민지 경험이 있는 약소국에게 가끔씩 떡을 하나씩 던져줌으로써 이 상이 제국주의자들의 잔치라는 것을 감추고 있는 것은 아닐까.

자본과 권력은 걸인, 노숙인, 실업자와 같은 사회적 약자를 필요로 한다. 그들에게 일정한 복지 혜택을 줌으로써 선행을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사회적 약자는 그들이 무능하기 때문이 아니라 자본의 필요에 의해 존재한다.

‘당선 가능성’이라는 이유로 보수 야당에게 표를 던지거나 노벨상을 염원할 때, 세상이 죄의식도 없고 부끄러움도 모르는 강자, 자신의 모습을 이전보다 훨씬 더 세련되게 감추는 강자의 이해관계에 맞춰 움직인다는 것을 보지 못할 수 있다. 그래서 이제는 양비론적 의미에서의 둘 다 나쁜 놈이라는 관점이 아니라 애초부터 둘 다 나쁜 놈이었다는 관점으로 되돌아가 더 나쁜 놈과 덜 나쁜 놈에 관해 이야기해야 한다. 바로 이것이 사실을 사실대로 볼 수 있는 출발점이고 우리 안에 여전히 살아있는 일본제국주의를 극복하는 길이다.

*주석

1) 이상의 내용은 방학진(민족문제연구소 사무국장), “제자를 사지로 보낸 자”, 『작은책』 2010년 10월호(제184호), 도서출판 작은책, 118~121쪽에서 발췌했음.

2)아직까지도 조봉암의 묘비에는 비문이 없다. 가족들은 그가 간첩 혐의를 벗을 때까지 비문을 새기지 않겠다고 했다.

3) http://preview.britannica.co.kr/spotlights/nobel/npw/npwp/win_lite.html

번역을 통해 본 일제와 현대 [썩은 뿌리 자르기]

[썩은 뿌리 자르기]

번역을 통해 본 일제와 현대

글: 강경표 (중앙대 박사과정수료)

사회진화론의 수용과 진화

누구나 알고 있지만 청산하지 못한 슬픈 근대 이야기, 역사적 가정이 가능하기만 하다면 지워버리고 싶은 수치스러운 역사, 우리는 이 시대를 일제식민시대라고 부른다. 학문의 수용 과정에서도 일제식민시대의 영향력은 막강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가 사용하는 학문 용어의 대부분이 일본을 통해 수입되고 정리된 서구의 용어들이라는 사실은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진화(進化)’ 또한 일본에서 수입되고 지금까지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과학 용어다. ‘과학(科學)’이라는 용어 또한 일본에서 만들어진 개념이다. 물론 일본에서 만들어진 용어라고 해서 모두가 나쁜 것은 아니다. 청산해야 할 과거의 유물도 아니다. 그러나 어떤 용어가 번역이 되고 개념이 형성되어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을 생각할 때 일제식민시대를 거치면서 자리 잡은 학문용어들에 대한 반성은 불가피하다.

안타깝게도 근대 서구 학문을 주체적으로 수용할 수 없었던 시대에 우리는 중국과 일본을 통해 ‘진화(進化)’라는 개념을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일제식민시대에는 사회적?제도적 제약으로 이?공학 분야에서 전문 연구자로서 경력을 쌓을 수 있었던 조선인은 매우 드물었기 때문에 ‘진화(進化)’라는 개념 또한 학문적 또는 과학적으로 수용되었다기보다는 사회?정치적 맥락에서 수용되었다는 사실이다.

과학용어를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하면 관찰용어와 이론용어로 구분할 수 있다. ‘진화(進化)’라는 용어는 관찰용어라기보다는 이론용어에 가깝다. 다윈의 진화론이라는 이론체계가 성립된 이후 ‘진화(進化)’라는 용어의 사회적 파급력은 대단했다. 그렇게 탄생한 학문이 바로 사회진화론이다. 그러나 사실 사회진화론은 학문이라기보다는 당시 서구열강의 우월함을 이론화하고 정당화한 교리에 가깝다.

사회진화론의 파급력은 대단했다. 일본을 포함한 서구열강뿐만 아니라 그들의 지배를 받는 약소국과 식민지에서도 계몽의 논리 또는 자강의 논리로 사회진화론이 수용되었고 우리도 예외는 아니었다.

우리 사회에 사회진화론이 유입된 경로는 크게 세 가지로 볼 수 있다. 근대 유학생 1호로 알려진 유길준에 의한 미국식 사회진화론과 윤치호를 통한 일본식 사회진화론, 박은식, 신채호, 안창호를 중심으로 한 중국식 사회진화론이 그것이다. 이 세 가지가 서로 확연히 구분되는 것은 아니지만 나름의 특징을 갖는다. 미국식 사회진화론과 일본식 사회진화론은 서구열강의 강자논리가 그대로 적용된다는 점에서 그 맥락이 비슷하지만 중국식 사회진화론은 당시의 중국 사정이 우리와 비슷하다는 측면에서 강자의 논리를 극복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진화(進化)’라는 용어가 수용되는 과정에서도 중국과 일본의 영향력은 거의 동시적이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중국식 개념은 사라지고 일본식 개념만이 남았다.

‘Evolution’의 번역과 수용

그렇다면 이제부터는 직접적으로 진화 개념의 형성을 살펴보자. ‘진화(evolution)’라는 단어는 라틴어의 ‘에볼루티오(?vol?t?o)’에서 유래한다. ‘에볼루티오(?vol?t?o)’는 ‘풀어 가는 행위(action de d?rouler)’, ‘굴러가면서 실어 나르다, 두루 돌아다니다(parcourir)’라는 뜻으로 사용이 되었다. ‘에볼루티오(?vol?t?o)’는 ‘두루마리처럼 말린 것이 펼쳐지는(unrolling)’ 이라는 뜻으로 사용되기도 되기도 했다.

또한 우리 중 일부는 ‘진화(evolution)’라는 개념이 다윈의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이 용어를 진화론적인 의미에서 처음으로 사용한 사람은 지질학자 라이엘이다. 그는 『지질학의 원리』 제 2판에서 개체발생(ontogeny)과 계통발생(phylogeny)을 ‘진화(evolution)’라는 하나의 용어로 모호하게 뭉뚱그려 사용했다. 이는 진화 개념이 처음부터 다의성을 함축할 수밖에 없었음을 뜻한다.

다윈이 『종의 기원』 초판에서 ‘진화(evolution)’라는 명사형 단어를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음은 비교적 잘 알려져 있다. 그는 책의 말미에서 ‘진화했다(evolved)’라는 동사를 한 번 썼을 뿐이다. ‘진화’ 대신 그가 썼던 것은 ‘변이를 수반한 계승(decent with modification)’이라는 표현이었다. 그가 진화라는 단어를 선호하지 않았던 한 가지 중요한 이유는 이 개념이 이미 목적론적인 발전 경향을 의미하는 방식으로 발생학에서 사용되었던 단어였기 때문이었다.

‘진화(進化)’라는 개념을 열렬히 전파시킨 사람은 다윈이 아닌 다윈과 동시대의 철학자 겸 사회학자 스펜서였다. 스펜서의 사회진화론의 핵심은 생명체가 진화의 과정에서 단순한 것에서 복잡한 것으로, 균질적인 것에서 이질적인 것으로 지속적으로 진보해왔듯이 사회, 정부, 산업, 상업, 언어, 문학, 과학, 예술의 발전 같은 우주의 모든 것들의 진화가 동일한 과정을 겪는다는 것이었다. 스펜서에게 진화는 생명체와 사회를 포괄하는 원리였다.

‘진화(進化)’라는 개념이 정확하게 정립되지 않았던 시기에 우리도 사회진화론을 통해 진화 개념을 받아들인다. 이 과정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중국식 번역과 일본식 번역의 차이다.

중국에서도 처음에는 ‘Evolution’의 음가를 그대로 차용하여 ‘이허루샹(義和綠尙)’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후에 옌푸(嚴復)가 헉슬리의 『진화와 윤리:Evolution and Ethics』(1894)를 『천연론 : 天演論』이라고 번역하면서 진화를 ‘천연(天演)’이라고 옮기는데, 여기서 ‘연(演)’은 ‘드러남’이나 ‘전개’를 뜻하며 천연이라 함은 ‘자연의 펼쳐짐 또는 드러남’으로 원어인 ‘Evolution’의 뜻에도 가깝다. 물론 옌푸는 ‘진화’라는 말도 함께 사용을 하고 있다. 이때 진화는 인종의 교화 혹은 사회의 발전이라는 뜻으로 자연선택의 결과만을 일컫는 지금의 진화와는 다르다.

일본에서는 가토 히로유키(加藤弘之)에 의해 사회진화론이 수용되고, 사회진화론적 맥락에서 진화론의 용어들이 번역되기 시작한다. 가토 히로유키는 일본 메이지시대의 대표적인 관변지식인이다. 그는 원래 입헌정치를 주장했던 인물이었으나 일왕에게 강의를 한 이후부터 사상을 전향한다. 그는 『진켄신세츠(인간신설) : 人權新說』(1882)에서 ‘우승열패(優勝劣敗)’가 ‘세계 운행의 법칙’이라고 말하며, 『쿄사노켄리노쇼코(강자의 권리 경쟁) : 强者の權利の競爭』(1893)을 통해 사회진화론을 바탕으로 하는 전제군주 중심의 국가유기체론을 주장하여 일본제국주의 이념을 기초를 다진다.

당시 서구 학문을 독자적으로 수용할 수 없었던 우리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진화론의 개념들을 받아들임에 있어 중국과 일본의 영향력은 무시할 수 없다. 또한 어떤 번역이 더 원어의 개념에 부합하면서도 잘 된 번역인가를 생각할 때,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진화(進化)라는 용어가 ‘Evolution’에 적절한 번역인가는 숙고해볼 필요가 있다.

비교를 쉽게 하기 위해 진화론의 주요 개념들 중 중국에서 만들어진 번역어들과 일본에서 만들어진 번역어들을 비교해 보면 다음 표와 같다.

 

정리된 표에서 보면 우리가 사용하는 번역어들 중 상당수가 일본식 번역에서 의존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물론 일제침략을 같이 겪었던 중국 또한 현재는 일본식 번역을 사용하고 있다. 이미 고정되어 사용되고 있는 번역어들을 바꾸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사소해 보이는 용어 하나에도 역사적 아픔과 제국주의의 망령이 녹아들어있는 것이다.

부활하는 사회진화론과 진화

우리가 사용하는 ‘진화(進化)’라는 용어는 사회진화론의 토대 위에서 수용되었다. 사회진화론을 토대에 두고 번역이 이루어지다보니 진화(進化)는 자연스럽게 ‘진보(進步)’를 수반하는 것처럼 보인다. 과연 진화는 진보를 수반할까? 혹시 번역어에 이미 내포되어 있는 사회진화론의 망령을 아직도 떨쳐 버리지 못한 것은 아닐까? 부케티츠에 따르면 진보는 과학적 개념도 아니며 진화론적인 개념은 더더욱 아니다.

필자의 짧은 과학적 견지에서도 근대의 사회진화론은 과학이 아니다. 이름을 바꿔 진화심리학이라고 부르든 사회생물학이라고 부르든 간에 사회진화론이 가진 사회?정치적 맥락들이 고스란히 녹아있다. 물론 현대의 진화심리학과 사회생물학의 과학적 성과는 주목할 만하다.

현대에 들어와 사회진화론적 제국주의의 망령은 ‘통섭(Consilience)’이라는 번역에서 드러난다. ‘통섭(Consilience)’은 학문적 제국주의의 의미를 내포한 말이다.

다른 학문들이 일방적으로 자연과학에 수직적으로 종속된다는 의미를 가진 이 용어는 ‘통섭(統攝)’이라고 해야 마땅하지만 한 국내 학자에 의해 ‘통섭(通攝)’이 되어 버렸다. 정확하게 말하면 국내 역자는 ‘통섭(統攝)’이라고 번역함을 명시하지만, ‘통섭(通涉)’의 의미도 포함하고 있다고 한다.

물론 번역도 하나의 창조물이고 번역자의 의도나 시대적 상황에 따른 의미가 추가될 수 있다는 점에서 번역의 자유는 있다. 그러나 번역어가 원래의 뜻을 왜곡하거나 또는 숨겨진 의도가 있을 때에는 번역의 적절성 여부를 검토해야만 한다. 문제는 국내 역자의 의도를 떠나서 사회생물학을 피상적으로 아는 사람들이 ‘통섭(統攝)’을 ‘통섭(通攝)’으로 이해한다는 것이다.

‘통섭(統攝)’은 ‘도맡아 다스린다’는 뜻으로 원래 불교와 성리학에서 흔히 사용되는 용어다. 원효의 화엄사상에 대한 해설에서 자주 등장하며 조선 말기 실학자 최한기의 기(氣) 철학에도 등장한다.

‘통섭(通攝)’은 재미있는 신조어다. ‘통섭(通涉-사물에 널리 통함)’이라는 단어를 바탕으로 ‘통섭(統攝)’과 결합되어 만들어 진 것으로 추정되는 이 단어는 굳이 말을 만들자면 ‘통하여 다스린다’는 뜻이 된다. 뜻을 달리하여 ‘끌어당겨 통하게 하다’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번역의 억지스러움은 여전히 남는다. ‘다스린다’라는 말을 ‘끌어당기다’로 바꿔 이해한다고 해서 그 용어가 가진 원래의 뜻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통섭은 수직적 학문 통합의 의미인 ‘통섭(統攝)’에서 조금은 수평적이고 학제적 연구와 비슷해 보이는 ‘통섭(通攝)’으로 변모했지만 바뀐 것은 없다. ‘통섭(統攝)’이 생물학을 중심으로 한 학문 통합을 꿈꾼다면, ‘통섭(通攝)’은 유비쿼터스를 중심으로 인문학과 예술을 하나의 콘텐츠로 종속 시키는 기능을 하고 있다.

필자는 앞서 과학용어는 크게 관찰용어와 이론용어로 구분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통섭(統攝)’은 어떠한 과학용어도 아니다. 다시 말해 과학적 탐색을 통해 만들어진 관찰용어도 이론용어도 아닌 것이다. 그것은 단지 인간이 지식을 바라보는 하나의 태도에 불과하다.

서구 사회는 사회진화론을 근간으로 하는 우생학이 사회에 적용될 때 생길 수 있는 폐해를 아우슈비츠라는 공간을 통해 극단적으로 경험했고 그에 대한 반성 또한 철저했다. 그에 비해 우리는 청산하지 못한 친일의 역사 속에 추정만 가능한 일제의 생체 실험과 우생학적 견지에서 시행되었던 나병 환자들의 격리와 불임 수술이 전부였고 그에 대한 비난은 있었어도 반성은 없었다. 사회진화론이 지배하는 근대적 틀 속에서 애국계몽운동을 하던 윤치호는 제국주의에 스스로 무릎을 꿇고 강자의 논리에 순응하며 영원한 친일파로 남았다, 서정주는 스스로 자신을 종천순일파(從天順日派)라고 불렀으며 친일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필자의 우려는 여기에 있다. 컨실리언스(Consilience)의 국내 역자는 자신의 번역은 ‘통섭(統攝)’이지만 통섭의 의미가 이중적이라고 했다. 통섭을 받아들인 다른 학자들은 통섭을 ‘통섭(通攝)’이라고 이해한다. 그러나 ‘통섭(通攝)’ 아닌 ‘통섭(統攝)’의 의미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의 뇌 속에 각인되고 있다.

일제식민시대 사회진화론은 우리에게 자강과 독립의 의지를 심어주기도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강자의 논리에 순종할 수밖에 없는 태도도 만들어냈다. 또 다시 강자의 논리에 무릎 꿇는 지식인들이 나오지 말라는 법은 없는 것이다.

 

감성의 탯줄을 자르지 마라! -자연과 자본 [썩은 뿌리 자르기]

[썩은 뿌리 자르기]

감성의 탯줄을 자르지 마라!

– 자연과 자본 –

글: 박종성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강사)

감성의 거주 공간으로서의 자연

우리는 자연과 매개될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둠벙은 생명의 물줄기를 품고 있다가 논과 밭에 물을 대주는 공간이다. 둠벙은 나의 어릴 적 놀이터이자 학습장이고 휴식의 공간이자 타인과 만나는 교류의 공간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둠벙은 고요하지만 끊임없이 운동하기 때문에 썩지 않고 많은 생명을 잉태하고 산출한다. 이렇듯 둠벙은 생명과 생명을 이어주는 물질(Materie)의 공간이다. 인간의 측면에서 산과 강이나 생명과 생명을 이어주는 둠벙은 결국 인간과 자연을 매개해 주는 물질이다.

물질(hyle, materia) 개념은 나무를 뜻하는 ‘Holz’에서 비롯되며, 일상적으로 ‘이브의 나무’, ‘뱀의 나무’, ‘출생의 맹아’로서의 자연(mater, natura), 어머니(Mutter)의 어원이 된다. 즉 자연은 인간에게 어머니(Mutter)의 탯줄과 같은 것이다. 나아가 만상의 자연(physis, 自然)이란 ‘사물들이 스스로(自), 그러한(然)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때 물질이 정신 또는 생명과 대조적인 개념임에 반해, 자연(physis)의 일차적 의미는 ‘성장’이다. 그러므로 ‘성장’을 의미하는 자연은 정지와 죽음보다는 생명과 운동의 의미를 갖는다. 따라서 자연의 파괴는 생명의 공간을 파괴하는 것이다.

정신이 거주할 자리가 문학, 예술, 역사, 종교라고 한다면, 감성이 거주할 자리는 자연이라 할 수 있다. 희랍 최초의 종교시인 헤시오도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들을 위해 대지는 풍성한 식량을 산출하고, 언덕 위에선 참나무가 그의 꼭대기에선 상수리나무가 열매를 맺으며 그 가운데 줄기엔 벌레가 모인다; 그들의 양들은 푹신한 양모를 기르고, 그들의 아내는 자신들을 닮은 아이를 배며…”

이 인용문에서는 인간 행위와 자연 사이에 공감적(共感的) 관계가 드러난다. 감성이 거주할 자리를 파괴하는 것은 인간에게서 자연과의 공감적 관계를 끊어버리는 것이다. 공감의 물질적 공간의 파괴, 이것은 휴식의 공간, 인간이 숨 쉴 수 있는 생명의 여백을 메워버리는 것이다. 왜냐하면 휴식(休息)은 사람(人)과 나무(木)가 같이 숨을 쉬는(息)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4대강 사업, 홍익 재단의 성미산 파괴는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인간의 공감적 관계인 자연과 전체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밀레투스학파에게 있어 이러한 생각은 물활론으로 드러나며, 불교에서는 인연(因緣) 사상으로 집약된다.

자연과의 공감적 관계의 회복

오늘날 인간과 자연의 문제는 환경오염과 생태계 파괴의 문제가 전인류의 생존과 직결되기 때문에 더욱더 우리의 삶과 밀접한 것으로 다가오고 있다. 이러한 문제의 원인으로 근대 자연관을 들 수 있다. 아도르노에 따르면 이러한 근대의 정신은 계몽주의이다. 계몽주의는 자연의 지배로부터 해방되려는 인간의 노력을 의미하는데, 이때 계몽주의는 인간 주체의 해방과 자연 지배를 동일시하고 정당화하기 위해 자연을 지배의 대상으로 전락시킨다.

‘동일성 원리’(das Prinzip der Identit?t)는 자연과 사회 가운데서 주체와 같지 않은 다른 모든 것을 동일한 하나의 형식으로 포섭하여 주체와 같게 만들려는 지배원리의 정신적 형식이다. 동일성 원리는 “사물은 언제나 동일한 것, 즉 지배의 대상이라는 데에 그 본질이 있다.” 왜냐하면 주체가 자연을 자기동일성의 표준, 즉 “계산가능성과 유용성의 척도”에 맞춰 측정할 수 있도록 자연을 객체의 지위로 격하시키기 때문이다.

계몽주의는 이성에 의한 자연의 지배를 동반하면서 자연에 의해 인간이 무제한적으로 지배받는 상황을 벗어날 수 있는 원리를 제공했지만 동시에 인간을 사회적 속박에 처하게 했다. 왜냐하면 자연에 대한 지배는 필연적으로 기술과 노동 활동을 기반으로 하여 사회적 구성이 위계적으로 체계화되어 실현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회적 지배 속에서 인간은 자신의 내적인 자연을 억압하게 된다.

내적 자연에 대한 지배를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오디세이 신화는 계몽주의라는 역사적 과정의 필연성을 드러낸다. 즉 사이렌의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선원들의 귀를 밀랍으로 막고 자신을 돛대에 밧줄로 묶은 오디세이의 행위는 ‘감각의 통제’를 시도하는 계몽적 이성의 전형을 드러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의 다양한 능력을 나타내는 인간의 내적 자연이란 육체와 환상, 욕구와 감정 등을 의미한다. 이제 자연에 대한 지배는 내적 자연에 대한 자기 통제, 즉 감성적인 것의 억압, 육체와 본능의 길들임으로 내면화된다. 이렇듯 이성에 대한 신뢰를 넘어 그것에 대한 맹목적인 신봉은 인간과 자연의 화해 불가능함으로 귀결된다.

이러한 새로운 종류의 야만에서 벗어나기 위한 시도의 일환으로 아도르노는 이성적 폭력의 대상이 되는 경험 또는 감성을 구출하는 것이 동일성 원리를 그 핵심으로 하고 있는 계몽주의의 폭력성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길임을 제시한다.

아도르노는 이러한 탈출의 공간을 열어 놓을 수 있는 단초를 “미감적 동일성(?sthetische Identit?t)”에서 찾는다. 여기서 아도르노는 단순히 이성에 대한 감성의 우위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근대의 이성과 감성이라는 이분법적 틀을 극복하기 위해 등장하는 개념이 ‘미감적 동일성’인데, 이는 여전히 동일성의 원리이기 때문에 감각적 질료라는 측면에서 혼란스러움을 통일하면서, 동시에 미감적 동일성이기 때문에 감성(Sinnlichkeit)을 억압하지 않는다.

아도르노는 자신이 제시하는 ‘미감적 동일성’의 개념을 구체화하기 위해 칸트와 프로이트를 대조시켜 본다. 그 핵심은 양자 모두 공통적으로 미적 경험의 원천을 주관적 원리에서 찾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칸트와 프로이트의 차이점을 전자는 욕구 능력의 부정을 통해, 후자는 욕구 능력의 긍정을 통해 미학의 내용을 구성하고 있다는 것에서 찾고 있다. 욕구 능력의 부정을 의미하는 것으로 칸트는 ‘무관심적 만족’을 주장한다. 그리하여 “칸트의 이론은 욕구 충족 이론으로서의 프로이트 이론에 대한 안티테제가 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아도르노는 칸트가 “최초로 미감적 반응이 직접적인 욕구와는 다르다는 사실을 인식”하였다고 평가한다.

아도르노가 주장하듯이 동일성 원리를 그 핵심으로 하여 운영되는 자본주의적 체계에서 마침내 “질(質)을 상실한 자연은 양(量)에 의해 분할된 혼란스러운 단순한 ‘소재’로 격하되고 전능한 자아는 단순한 ‘가짐’(haben), 즉 ‘추상적 동일성’이 된다.” 이러한 방식으로 욕구하는 인간은 소유하는 인간에 다름 아니다. 따라서 “무관심적 만족”은 소유욕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것으로서 자본주의 체제의 안티테제가 된다. 체제라는 외부에서 강제된 욕구, 즉 소유욕은 목적 없는 합목적성과 대립되는 것이다.

칸트는 무관심한 만족으로 취미판단을 규정하는데, 이는 어떤 이해관계도 없는 상황에서 판단을 내리는 것으로 타인도 동일한 판단을 내릴 것이라는 보편성을 획득할 수 있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인간과 자연의 화해를 위해

우리는 근대의 자연관 자체를 시대적 상황에 맞게 재설정해야만 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아도르노에게 계몽의 자기 파괴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주체는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 왜냐하면 주체성 자체가 이미 지배와 억압의 산물이며 계몽의 변증법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맑스는 인간이 인간을 지배하는 과정에서 지배와 착취로부터 벗어날 잠재력을 보았다. “자연은 인간의 비유기적 몸이다.” 그리고 인간과 자연의 통일은 노동 과정을 통해 실현된다. 자연을 단순히 인간의 활동을 위한 매개로 전락시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자연의 일부이기 때문에 자연의 자기 매개로서 인간을 바라보는 것이다.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있어서 세 차원, 즉 자연 존재로서의 인간이라는 차원과 노동, 그리고 감각이라는 차원을 통해 맑스는 자연과 인간 사이의 관계 설정을 인간의 자기실현이나 자연의 자기 운동 중 어느 한쪽으로도 환원시키지 않고 있다.

인간과 자연의 통일성은, 칸트에 따르면 미감적 만족에서 얻는 쾌락(Lust)와 감각적 만족에서 얻는 즐거움(das Angenhme)의 구분을 넘어서는 것이고, 아도르노에 따르면 그것은 칸트의 이러한 취미 판단의 구분을 통합시킨 미감적 동일성의 실현이다.

만약 우리가 ‘감각(Sinn)’을 정신적 감각(생각, 지각)과 실천적 감각(의지, 사랑)을 포함하는 넓은 의미로 받아들인다면 이성 중심적 사유에서 벗어날 가능성을 갖게 된다. 이러한 넓은 의미로 사용된 감각은 칸트적 의미에서처럼 단순히 대상의 ‘수용’에 그치지 않는다. 인간의 감각은 대상에 작용하여 대상의 의미를 드러낸다. 음악은 인간에게 음악적 감각을 일깨운다. 하지만 아름다운 음악도 비음악적 귀에게는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한다.

인간과 자연 사이의 관계가 붕괴된 핵심적인 원인은 자본주의적 체제에 있다. 이러한 체제에서 인간의 감각은 소유라는 감각적 취향에 한정될 수밖에 없다. 인간의 감각이 풍부해지는 범위만큼 감각의 대상도 풍부한 의미(Sinn)을 가질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자연과 인간의 화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우선 모든 감각을 소유 감각으로 환원시키는 사회에 대한 지양이 필요하다. 우리가 그려 볼 수 있는 더 나은 사회는 맑스가 말하듯 “전면적이고 심오한 감각을 지닌 풍부한 인간”을 만들어 내는 사회일 것이다.

인간과 자연의 화해는 감각과 대상의 상호작용 속에서 실현된다. 인간이 자연과의 관계맺음에서 자연을 자신의 비유기적 몸으로 본다면, 인간의 감각은 대상을 통해 풍부해질 것이고 인간의 감각이 풍부해지는 만큼 자연도 억압에서 풀려나 인간과 자연이 통일될 수 있을 것이다.

자연은 인간이 지배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자연이 인간의 지배에서 부활하면 자연은 인간의 병을 치유하는 주체로 등장할 수 있다. 미학적 측면에서 보더라도 인간의 감각이 보다 풍부하게 발전한다는 것은 자연이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동일성으로부터의 탈출을 모색하고자 할 때는 가치법칙의 총체성이 개별 주체에 선행하여 현실을 지배하는 자본주의라는 체제의 문제를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가치법칙이라는 도구적 이성이 다른 무엇보다 선행하며 이것이 사회 현실의 총체성을 구성하고 있는 상황에서 국가, 사회, 자연의 문제는 분리되어 고찰될 수 없을 것이다.

그들만의 더 많은 부를 창출하기 위해 ‘살리기’라는 이름으로 자연 속의 인간, 인간 속의 자연을 ‘죽여서’ 자연과 생명의 순환을 끊어버리려고 하는 우리 시대의 욕망이 불러들일 파국에 대해 누가 책임을 지려고 할까.

막무가내식 토건 이데올로기로 무장한 이명박 정부에 의해 저질러지는 역사적?민중적?생태적 과오인 4대강 사업, 아니 눈 가리고 아웅하는 운하사업을 우리는 아이들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이 사회에서 규정된 방식으로, 이 시대가 훈육한 욕망의 작동 방식으로 다시 세계와 자연을 규제하고 욕망하는 우리의 존재양식을 되돌아보자. 그리고 아직 살아 숨 쉬는 우리 안의 자연, 풍요로운 감성의 강에 깨끗한 물이 돌게 하자.

‘녹색성장’의 형용모순 – 자연과 자본 [썩은 뿌리 자르기]

[썩은 뿌리 자르기]

‘녹색성장’의 형용모순

?-? 자연과 자본 –

 

글: 박민철 (건국대 박사수료)

4대강 살리기 사업과 ‘녹색성장’.

‘악마를 보았다’보다 더욱 잔인하며, ‘동물의 쌍붙기’(2002년 영화진흥법이 개정 시행된 이후, 첫 제한상영가 판정을 받은 북한 영화)보다 더 자극적이며, ‘죽어도 좋아’(두 번째 제한상영가 판정)보다 훨씬 더 노골적이어서, 이들 영화와 마찬가지로 국가가 나서서 방영을 금지하라고 요청했던 PD수첩 ‘수심 6M의 비밀’편을 보았다.

PD수첩 ‘수심 6M의 비밀’편에 담긴 내용을 정리하자면, 1. 4대강 살리기 사업은 그동안의 홍보와는 달리 홍수나 물 부족 문제 해결에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으며, 2. 애초의 계획과는 달리 대운하 사업과 유사한 방향으로 변경되었으며, 3. 현재의 계획 하에서 강에 호화 여객선을 띄울 수 있는 수심 6미터를 유지하기 위해 무리한 공사비용이 지출되고 있으며, 4. ‘녹색성장’이라는 본래의 의미와는 달리 생태계 파괴가 우려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핵심은 무엇보다도 4번이다. ‘녹색성장’이라는 거대한 패러다임 아래에서 시행되는 4대강 살리기 사업이 그에 걸 맞는 모습으로 진행되고 있는지의 여부가 가장 본질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명박 정부는 2008년 8월 15일 경축사를 통해 ‘저탄소 녹색성장’을 ‘新국가발전 패러다임’으로 내세웠다. 수사법에 놀라울 만치 능한 그들이 내세운 이 말은 꽤나 섹시했고, 그에 따라 국가 주도 사업 및 국가 정책 맨 앞에 사용되고 있다. 그 중 4대강 살리기 사업은 4대강을 ‘녹색성장’의 거점으로 만들자는 야심찬 계획이다.

그런데 PD수첩 ‘수심 6M의 비밀’편이 말하고 있는 비판의 가장 핵심은 4대강 살리기 사업≠‘녹색성장’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PD수첩 ‘수심 6M의 비밀’편이 주장하는 ‘4대강 살리기≠녹색성장’이라는 비판은 어쩌면 비판자체가 성립하지 않을 수 있다. PD수첩과 우리가 생각하는 ‘녹색성장’과 이명박 정부가 생각하는 ‘녹색성장’의 의미는 ‘녹색성장’이라는 단어에 담긴 형용모순으로 인해 전혀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녹색성장’에 담긴 형용모순

국어사전에 따르면 형용모순은 ‘형용하는 말이 형용을 받는 말과 모순되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면, ‘둥근 사각형’이나 ‘작은 거인’, ‘소리 없는 아우성’ 등이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명박 정부가 고안한 ‘녹색성장’이라는 단어에도 표현적인 형용모순이 담겨져 있다.

우선 이명박 정부가 녹색성장이라는 단어를 어떤 의미로 사용했는지는 몰라도, 이 단어를 의미적으로 풀어보면 ‘녹색의 성장’과 ‘녹색적인 성장’ 등으로 나눠볼 수 있다. 그런데, ‘녹색성장’에 담긴 형용모순으로 인해, 이 단어가 의미하는 것은 ‘녹색의 성장’과 ‘녹색적인 성장’은 결코 아니다.

‘녹색성장‘에서 우선 ’녹색‘의 대표적인 대응어는 곧 ‘자연’이다. 다들 알다시피 자연은 ‘스스로 그러함’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반면 여기에서의 ‘성장’은 인위적인 참여와 조작으로 그것을 발전시키고 보다 나은 상태로 개선시킨다는 의미를 포함한다. 물론 인위적인 참여와 조작이 없는 ‘자연적인 성장’도 가능하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가 고안한 ‘녹색성장’에서 성장은 무분별한 삽질과 땅파기를 의미하는 것이며 자연적인 성장과 발전이라는 의미를 애초부터 담고 있지 않다. 이렇게 볼 때, 자연성(自然性)과 인위성(人爲性)라는 구도 속에서 ‘녹색의 성장’은 의미적으로 형용모순에 빠진다.

그렇다면 ‘녹색성장’이 ‘녹색적인 성장’을 의미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녹색적인 성장’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이것은 성장이 곧 녹색의 의미와 가치를 포함해야 함과 동시에, 이러한 녹색의 의미와 가치를 성장이라는 구체적인 모습을 통해 드러내야 함을 말한다. 그런데 성장이 녹색의 의미와 가치를 포함하는 일, 그리고 녹색의 의미와 가치가 성장이라는 구체적인 모습 속에서 바깥으로 드러나는 것은 쉽지 않다.

예를 들어 보자. ‘녹색성장’과 같은 의미에서 ‘성장’이라는 단어가 쓰이는 것은 ‘경제성장’이다. 이것의 대표적인 표현방식은 일정 기간 동안 한 국가에서 생산된 재화와 용역의 시장 가치를 합한 것을 의미하는 GDP를 들 수 있다. 하지만 GDP에는 눈에 보이는 가치만이 표현될 뿐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는 담겨 있지 않다.

반면에 녹색은 눈에 보이는 가치가 아니다. 보다 정확히 얘기하자면, 녹색이 갖는 가치는 눈에 보이는 이익과 지표로 전환되지 않는다. 예컨대, 산을 깎아 레저시설을 만들고 그 산에서 나온 나무로 어떤 것을 만들 때 GDP는 늘어나지만, 산 자체가 우리에게 주는 안락함과 편안함, 삶의 재충전과 회복 등은 GDP라는 수치에 포함되지 않는다.

또한 강을 파서 그 모래로 무엇을 만들거나, 강 주위를 개발하여 대단위 레저시설을 만들 때 GDP는 늘어나지만 강 자체가 주는 눈에 보이지 않는 혜택과 이익은 GDP라는 수치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성장이라는 가시성(可視性)과 녹색이라는 비가시성(非可視性)의 구도 속에서 역시나 ‘녹색적인 성장’은 의미적으로 형용모순에 빠진다.

‘녹색성장’이라는 형용모순 속에서 4대강 살리기 사업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애초에 그들이 생각했던 방식으로 잘 진행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물론 이 형용모순을 알고서도 활용한 건지 아니면 모르고 사용한 건지는 중요하지 않다. 노골적으로 얘기해 전자라면 ‘나쁜 놈’이고 후자라면 ‘모자란 놈’이다.

그들의 무모한 경제주의적 사고방식

이러한 형용모순은 이명박 정부가 생각하는 ‘녹색’과 ‘성장’의 의미가 우리가 생각하는 그것과는 다르기 때문에 발생한다. 여기서 그들이 생각하는 ‘녹색’은 성장이라는 만고불변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하나의 수단에 불과하다. 그리고 성장은 눈에 보이는 지표로 확인가능하고 계산가능한 것이어야 한다. 즉 녹색이 갖는 가치와 의미는 수단에 불과할 뿐 목적과는 별 상관없는 것이며, 눈에 보이는 지표와 이익들로 환원되기 위해 바쳐진 제물과 같은 것이다.

이명박 정부가 말하는 ‘녹색성장’은 이렇게 보자면, ‘녹색의 성장’도 아니며 ‘녹색적인 성장’도 아니다. 그들이 말하는 ‘녹색성장’은 ‘녹색을 통한 성장’이다. 이것은 녹색을 희생시켜 눈에 보이는 이익으로 환원하는 것, 녹색이 지닌 의미와 가치를 성장이라는 자본주의적 시스템 속에 포함시키는 것, 그리하여 산을 깎고 강을 파내어 구체적인 이익을 창출하는 것, 궁극적으로는 눈에 보이지 않는 본질적인 가치까지도 눈에 보이는 이익으로 바꾸는 것이다.

세상 모든 것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자신만의 본질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다. 그러한 가치들이 자본주의적 시스템을 통하면 눈에 보이는 이익으로 변하게 된다. 자본주의적 시스템 속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들은 부차적인 것이며, 그것들이 눈에 보이는 이익으로 환원될 때에만 대접을 받을 수 있다. 즉 자본주의는 잠재적으로 담겨 있는 가치를 눈에 보이는 이익으로 환원시키는 것을 최우선적 목적으로 한다.

그런데 녹색이 갖는 가치와 비슷한, 눈에 보이는 이익들로 환원되지 않는 가치들이 존재한다. 그러나 자본주의적 시스템 이 녹색의 가치들은 훼손되어 버린다. 이명박 정부의 무모한 경제주의적 사고방식에 의한 ‘녹색을 통한 성장’은 바로 이러한 자본주의적 사고방식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녹색의 의미와 가치를 경제주의적 사고방식으로 규정하는 이명박 정부의 인식틀 속에서 성장의 의미와 가치들도 경제주의적 패러다임을 고스란히 이어받았다. 그들에 의하면 성장은 개조 및 개발과 동의어이다. 앞 선 예처럼, 성장은 GDP로 대표되는 수치로 평가되어야만 하는 것이며 눈에 보이는 이익들을 우리들 앞에 제시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경제주의적 사고방식과는 다른, 우리들이 바라보아야 할 진정한 의미에서의 ‘성장’은 인간 삶을 질적으로 보다 윤택하게 만드는 보편적 가치들의 증대를 의미한다. 이 보편적 가치들에는 도덕성, 역사적 책임의식, 공동체의식과 같은 거대한 것들로부터 배려와 존중, 사랑과 베풂, 평화와 공존 등과 같은 아주 구체적인 가치들도 포함된다. 이것들은 결코 자본주의적 시스템 속에서는 눈에 보이는 이익들로 나타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이것들의 증감의 결과가 눈에 보이는 지표와 표시들로도 나타나지도 않는다.

녹색의 의미와 가치들, 그리고 성장의 의미를 일면적으로 규정하는 그들의 무모한 경제주의적 사고방식 속에서 ‘녹색성장’은 하나의 형용모순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녹색의 성장’도 아니며 ‘녹색적인 성장’도 아닌, 녹색을 희생시켜 눈에 보이는 성장을 이룩하자는 ‘녹색을 통한 성장’은 그들이 만들어낸 ‘녹색성장’의 형용모순이 낳은 필연적인 결과물이다.

녹색의 진정한 가치: ‘녹색을 통한 성장’에서 ‘녹색을 위한 성장’으로

어찌됐건 섹시한 수사법에 강한 현 정부는 ‘녹색성장’이란 말을 만들어 냈다. 미려한 수사에 반해 참혹한 결과를 가져온 ‘녹색성장’을 그들의 무모한 사고방식에서 건져내 그것이 가진 본질적인 의미를 되살려야 한다.

그것의 첫 걸음은 ‘녹색’과 ‘성장’의 의미를 본래의 그것으로 되돌리는 것이다. ‘녹색을 통한 성장’이 아닌 ‘녹색을 위한 성장’이 그것이다. 이것은 곧 ‘녹색’이 갖는 가치를 증대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녹색의 가치는 굳이 여기서 얘기하지 않아도 우리들 모두 체감하고 있을 것이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우리들의 삶에 구체적인 이익으로 돌아오는 녹색의 가치를 보존하고 증대시키는 것은 ‘녹색을 통한 성장’이라는 형용모순에서 벗어날 수 있는 하나의 해결책이 될 것이다.

물론 이것은 소위 ‘생태근본주의’를 주장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들의 무모한 경제주의적 사고방식을 또한 아주 급진적인 주장으로 중화시켜야 할 필요성이 있어 보인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바람이 있다. 서울의 조그마한 개천을 복원시킨 경험으로 전국의 4대강을 살리겠다고 했으니, 그분의 ‘사이즈’로 볼 때, 이제 앞으로 하고자 하시는 일은 전 세계의 5대양을 살리는 일일 것이다. 만약 그러한 일이 정말로 실현된다면, 그 땐 제발 ‘녹색성장’이란 말을 버려주십사 하는 바람뿐이다.

 

4대강 사업 그리고 자본과 환경 – 자연과 자본 [썩은 뿌리 자르기]

[썩은 뿌리 자르기]

4대강 사업 그리고 자본과 환경

– 자연과 자본 –

글: 강경표(중앙대 박사과정수료)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거짓말

대한민국은 자본주의 국가다. 최소한 우리 중 일부는 대한민국이 자본주의 국가라는 사실을 의심치 않으며, 그렇게 믿고 살고 있다. 그러나 대한민국 헌법에 명시된 것은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이라는 사실뿐이다. 헌법 어디에도 대한민국이 자본주의 국가라는 사실이 명시되어 있지 않다. 단지 헌법 119조 1항에 “대한민국의 경제 질서는 개인과 기업의 경제상의 자유와 창의를 존중함을 기본으로 한다”라고 명시되어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이 자본주의 국가라는 강력한 믿음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사회주의와 민주주의가 반대되는 개념이라는 그릇된 믿음으로부터 자연스럽게 결합된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그리고 슬그머니 민주주의의 어깨를 밟고 일어선 자본주의까지 이러한 그릇된 믿음 뒤에는 우리의 교육, 거대언론사, 대기업이 있어왔고, 현재에는 자본주의 전도사 노릇을 하는 이명박정부가 자리하고 있다.

경제학의 기본 가정은 유한한 자원을 완전한 정보를 가진 이기적인 사람들이 수요와 공급에 따라 나눠 갖는 것이다. 그리고 수요와 공급은 “보이지 않는 손”이 조절한다. 자원이 유한하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다. 수요와 공급의 원리도 중학교 과정 정도만 알아도 대강은 이해한다.

그러나 문제는 완전한 정보를 소유한 사람과 “보이지 않는 손에 있다. 우리들 중 누구도 시장에 대한 완전한 정보를 갖고 있지 못하며, “보이지 않는 손”을 가진 구세주도 없다. 시장에 대한 완전한 정보를 소유한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비합리적인 믿음에 근거한 시장 경제 원리는 자본주의의 신앙과 같다. 생각해 보면 금방 답이 나온다. 시장에 대한 완전한 정보를 소유하고 있다면 언제나 확실한 선택을 할 수 있다. “보이지 않는 손”따위는 필요가 없어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정보 수준이 불완전하다는 사실을 인정해보자. 그러면 “보이지 않는 손”을 가진 구세주를 기다려 볼만도 하다. 그러나 정보가 부족할 때 우리는 마냥 기다리기만 하는가? 아니다. 우리에게는 불완전한 정보를 가진 사람들끼리 일을 처리하는 방법이 있다. 서로의 의견을 듣고 조율하며 협의하여 무언가를 결정하는 방식, 그것이 바로 민주주의다.

우리의 실생활에 있어 경제 활동은 시장경제의 원리가 아니라 서로의 의견을 듣고 협의하는 활동으로 이루어진 것이지 “보이지 않는 손”따위를 기다리는 행위가 아닌 것이다.

“보이지 않는 손”은 원래 가격에 의한 자율적 결정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자본주의 이념을 철통같이 신봉하며 시장경제 원리를 부르짖는 이명박정부도 “보이지 않는 손”을 기다리지 않는다. 먼저 나서서 결정을 하고 우리에게 그것을 강요한다. 바로 4대강 사업이 그것이다. 그들은 말한다. 대통령이 결정했다. 따라라. 다 너희를 위한 일이다. 내가 곧 너희의 “보이지 않는 손”이다.

공유지의 비극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4대강

환경문제를 설명하는 몇 가지 이론 중에 특히 국가가 소유한 공유지 문제를 다룰 때에는「공유지의 비극(The Tragedy of the commons)」이라는 이론이 있다. 1968년에 게렛 하딘에 의해 발표된 이 이론은 환경철학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비교적 잘 알려져 있다. 모든 사람들에게 개방된 목초지에서 각각의 개인은 가능한 많은 가축을 기르려고 한다. 결국 개인의 이익 증대를 위해 공유지는 황폐화되며 공유지의 자유는 모두에게 파멸만을 가져온다는 것이 이 이론의 골자다.

우리의 4대강에도 이 이론은 적용되었다. 4대강 사업을 위해 국가의 공유지인 하천 둔치에서 농사를 전면 금지한 것이다. 어떻게 생각하면 국가 공유지에서 농사를 짓는 행위를 막는 것은 공유지의 비극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다. 그러나 진정한 공유지의 비극은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명박정부의 4대강 사업 자체에 있다.

공유지 비극 이론은 게임이론이다. 하딘의 공유지의 비극을 게임이론으로 재구성하면 다음과 같다. 공용의 목초지가 있다고 가정을 하고 이 목초지에서 한 철 동안 잘 먹여 키울 수 있는 가축의 상한선을 X라고 하자. 목동은 A와B 둘뿐이라고 가정하면 2인 게임을 만들 수 있다. 게임의 룰은 협동전략과 배반전략이 있을 뿐이다. 이 게임에서 협동전략은 각각의 목동이 X/2마리의 가축을 방목하는 것이다.

반면 배반 전략은 이윤을 남기고 팔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최대한 많은 가축을 방목하는 것이고 그 숫자는 X/2보다 크다. 두 목동이 각각 X/2마리에 가축만을 풀어 놓으면, 각각은 10단위의 이윤을 얻고, 반면 둘 모두가 배반전략을 선택하면 둘 다 아무런 이윤을 얻을 수 없다. 만일 한명은 X/2마리만 풀어 놓고, 다른 한명은 원하는 만큼 많은 가축을 방목한다면 그 배반자는 11단위의 이윤을 얻고 상대방은 -1의 보상을 받는다. 두 목동이 각각 배반 전략을 사용한다면 각자의 이득은 0이 된다.

우리는 A와B 목동 모두가 협동전략을 사용하는 것이 좋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경제학에서 가정하는 이기적인 개인은 배반전략을 사용할 것이기 때문에 결국 공유지는 황폐화되고 만다는 것이 공유지 비극 이론을 게임이론으로 재구성했을 때의 결과이며, 이를 막기 위해서는 국가의 강력한 규제를 필요로 하게 된다. 이러한 이론은 공유지를 점유해 농사를 짓는 농민에게도 쉽게 적용이 되며, 이러한 논리에 의한 국가 규제가 어쩌면 당연한 것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4대강 사업과 같은 규제의 주체가 되어야 할 국가가 나서서 하는 공유지 사업에도 이러한 이론이 적용될 수 있을까? 공유지의 비극을 극복할 수 있는 가장 큰 역할을 수행하는 국가가 나서서 공유지의 비극을 초래하고 있다면, 사실 해답은 없다.

환경을 자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자원 할당에 도움을 주는 판단의 기준으로 제시하는 것에는 최소한 비용편익분석(cost-benefit analysis)과 쾌락가치법(Hedonic Price Methods), 여행비용법(Travel Cost Method) 같은 것들이 있다.

비용편익분석은 소위 프로젝트 투자의 최적 수준을 연구하는 것이다. 어떤 프로젝트로부터 끌어낸 이익과 이 이익을 얻는 데 들어간 비용 사이의 차이를 극대화 하여 현재 들어간 비용보다 미래의 편익을 수학적 모델로 계산해 보는 것이다.

쾌락가치법은 시장이 존재하지 않고, 그에 따라 가치가 관찰될 수 없을 경우에 사회적 가치들을 평가하기 위한 방법 중의 하나인데 전체 가치에 기여하는 각각의 속성들이 가진 가치를 통계적으로 이용한다. 예를 들어 공장 옆에 있는 집과 시골에 있는 집이 거래가 없어 시장 가격이 없다면 땅의 가치가 아닌 공기 오염도, 위치, 크기, 풍경 등 집 전체에 포함되는 각각의 속성들의 가치를 통계적으로 따져보는 것이다.

여행비용법은 사람들이 어떤 자원에 도달하기 위해 여행하는데 걸리는 시간과 거리는 이용자에게 그 자원의 가치를 추정해 볼 수 있다는 것에서 기인한다. 이 기법은 사람들이 교외에서 자연을 향유하는 기쁨 같은 것을 평가하는 지표가 된다.

세 가지 방법 모두 단점이 있지만 그래도 최소한 경제에서만이라도 가치판단의 준거가 될 수 있는 기준들을 제시한다. 그러나 이명박정부는 국가 수준 최대의 토목공사를 시행함에도 불구하고 최소한의 평가기준이 될 수 있는 비용편익분석 자료도 없고, 나머지 자료도 없다. 특이한 것은 4대강의 전신인 한반도대운하사업추진 때에는 잘못된 분석이긴 해도 비용편익분석과 뜬금없는 얘기지만 “대운하를 요트로 여행하면 즐거울 것”이라는 나름의 여행비용법 같은 이명박 대통령의 말 정도는 있었다는 것이다.

또 다른 공유지의 비극은 주체가 누구이든 간에 경제적 이익을 위한 개발로부터 시작된다는 사실을 이명박정부가 인지하지 못한다는 사실로부터 출발한다. 공유지는 특정한 개인이나 사적 집단이 아니라, 국가 또는 공공단체에 의하여 소유되는 토지를 말한다. 다시 말해 특정한 건설사의 이득을 위해 개발되거나 대통령의 의지 또는 정부의 논리에 의해 개발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를 구성하는 국민의 합의가 있을 때에만 신중한 절차를 거쳐 그 개발이 가능하다.

그러나 이명박정부는 공익을 내세우면서도 사실은 특정 건설사와 자신을 지지하는 세력들을 위한 권력 행사를 하고 있다. 국회 정치부 기자들 사이에서는 이명박 대통령이 4대강 사업에 목을 매는 이유가 대형건설사들에게 선거자금을 받았기 때문일 것이라는 의구심을 제기하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시민일보 칼럼 2010.3.15). 언론의 주식 지분을 소유한 4대강 건설사는 16곳이고(미디어오늘 2010.3.24), 4대강 사업에 편승한 지자체들 또한 물놀이 전용보와 같은 막개발을 추진하고 있다(한겨레 2010.3.15).

민주적 합의 그것이 우리가 원하는 환경철학의 출발이다

자연에는 “보이지 않는 손”은 없다. 더구나 자연에는 숨은 의도가 없으며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 “보이지 않는 손”은 경제학자들이 부족한 이론을 보충하기 위해 개발한 개념 장치에 불과하며, 사실 그 “보이지 않는 손”의 이면에는 특정한 이익을 가진 자들과 부의 재분배를 원하지 않는 자들, 더 많은 부를 얻고 싶은 자들의 협의가 있을 뿐이다. 다시 말해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모종의 은밀한 합의가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 손”일 뿐이다.

그들의 “보이지 않는 손”은 말이 없는 자연에 더해져 그 이익은 배가된다. 보이지도 않고 말도 없으니 자연이 그들 마음대로 하기에 얼마나 좋은 것인지는 설명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자연을 대신해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는 그들을 환경론자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사실은 이 땅에 살고 있는 우리 모두를 말한다. 때로는 자연재해로 고통을 받기도 하고 거대한 자연 앞에서는 한없이 작은 인간에 불과하지만 자연의 일부로서 자연을 대신하기도 한다. 그리고 우리가 자연을 대신하여 하는 말은 4대강 사업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4대강 사업과 같은 거대 환경파괴사업을 할 때 우리는 국민적 협의 수준을 넘어 생태계의 일원으로서 협의를 해야만 한다. 이때 민주적 협의가 필요함은 두말할 필요조차 없다. 때로는 자본주의가 자연을 모방한 경제 논리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자본주의의 경쟁논리가 자연의 경쟁에서 왔다고 착각하는 이런 사람들은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자연적 필연성의 결과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자연은 공생을 기본으로 한다. 그리고 말하는 동물인 우리가 공생함에 있어 기본은 민주적 합의다. 민주적 합의야 말로 자연을 대신해 말하는 자, 즉 우리의 경제 절차이자 환경 철학의 출발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