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진 연재 ‘『그대에게 가는 먼 길』 1부’ 단행본 출간에 즈음하여 [이종철의 에세이 철학]

웹진 연재 ‘『그대에게 가는 먼 길』 1부’ 단행본 출간에 즈음하여

 

이종철(소설가)

 

∗웹진 [연재소설]  <그대에게 가는 먼 길>이 단행본 출간을 맞아(2025.04.08.) 연재를 잠정 멈추고 자전적 소설에 대한 작가의 변을 들어보려합니다. 격동의 한국사회를 배경으로 대학에서 강사와 연구자로 살아간 한 인물이 소설이란 장르를 이용해 자신의 철학적 삶과 삶의 철학을 어떻게 표현하려 했는지 그 자세한 얘기를 들어보려 합니다. 

 

『그대에게 가는 먼 길』이란 책은 내가 처음 써 본 소설이다. 이 소설은 격동의 한국 사회를 배경으로 쓴 자전적 소설이다. 이 소설은 2부작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1부는 1970년대 말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이고, 2부는 1990년대 후반부부터 2020년대 전반부에 걸쳐 있다.

필자가 이 소설을 쓴 이유는 몇 가지가 있다. 하나는 이 시대를 치열하게 겪은 한 개인의 사적인 삶을 정리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민주화와 산업화를 동시에 이룩한 한국 사회의 현실을 철학적으로 반성해 보려는 것이다.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필자는 나 자신의 삶을 주변부 인생(marginal man)으로 규정하곤 했다. 나는 상고를 나와 법대에 진학했지만, 그것은 내가 향학열이 높아서 그런 것이 아니라 몸이 불편해서 은행이나 기업체에 입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무슨 오기가 있었는지 나는 유신 독재 시절에 대학을 보낼 때 법대생으로서 사법고시 1차 시험 한 번 보지 않았다. 법대를 졸업하고 철학과 대학원에 진학을 해서 박사 종합시험까지 통과했지만, 나는 대학을 떠나 거친 사회에서 10년을 보냈다. 남들은 유학을 가거나 학위 논문 쓰느라고 매진할 때 나는 일반적인 연구자들이 경험하기 어려운 사회 경험을 많이 했다. 나중에 회사가 부도가 나서 실업자 생활을 할 때 유학을 다녀온 후배들과 다시 만나면서 대학으로 복귀할 기회를 가졌다. 뒤늦게 학위 논문을 썼지만 그 후 나의 삶은 학생들을 가르치면서도 선생으로서의 정체성을 갖기 힘든 시간 강사로 점철되었다. 그런 삶이 싫어서 몽골의 울란바토르에 한국인이 세운 대학으로 자리를 옮겼다가 생각보다 너무나 열악한 환경 때문에 1년 만에 다시 한국의 대학으로 복귀했다. 모 대학의 초빙교수로 정년퇴직을 한 다음에는 비로소 프리랜서 작가로서 자유롭게 활동을 해오고 있다. 이런 나의 삶을 ‘주변부 인생’이란 말 외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때문에 나는 중심을 해체시키려 하고, 기성에 대해 비판과 부정으로 대하는 것이 체질화되었다. 임제 선사의 “부처를 보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보면 조사를 죽여라.”라는 말은 나의 삶과 정신을 이끄는 길잡이와도 같다.

다들 알고 있듯, 한국의 1970년대에서 1980년대에 이르는 시기에 한국인들은 유신 독재와 광주 항쟁, 민주화 투쟁과 1987년의 민주주의의 쟁취 등으로 점철된 고통스럽고 의미 있는 역사적 경험을 겪었다. 동시에 이 시기는 사회과학의 전성기이자 온갖 이론과 사상이 난무하던 지적 르네상스의 시기이기도 했다. 물론 특정한 세계관과 사상이 지배적이기는 했지만, 이 시대는 그것들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이상으로 한국 사회의 변혁운동과 맞물려 상호 피드백 하면서 백가쟁명의 절정을 이루었다. 필자는 이 시기를 프랑스의 6.8 혁명 못지않은 시대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프랑스인들은 6.8 혁명을 겪으면서 자신들의 이론과 사상을 정립해서 세계인들에게 내 보였던 반면, 한국인들은 그런 귀중한 역사적 체험을 그저 그런 과거의 기억으로만 간직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필자는 우리가 겪은 이 시대의 체험을 철학적으로 반성하고 의미화하고 싶은 욕구를 소설의 형식을 빌려 표현해 본 것이다.

필자의 본업은 철학이고 그중에서도 서양철학이자 독일 근대철학이다. 이런 철학자가 소설을 쓴다는 것이 한국 사회에는 다소 생소해 보이지만, 프랑스 철학에서는 그다지 낯설지 않다. 사르트르의 경우는 철학자로서 많이 알려져 있는데, 사실 그는 소설도 꽤 썼다. 나중에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지만 사르트르는 철학자의 신념을 지키고자 그 상을 거부했다. 포스트모던 사상이 주류가 됨에 따라 전문 영역을 넘어 새로운 글쓰기 실험도 이루어지고 영역들 간에 소통도 자연스럽다. 10여 년 전 영화로도 나온 『리스본행 야간열차』의 작가인 파스칼 메르시어의 본명은 피터 비에리(Peter Bieri)인데, 그는 하이델베르크 대학 철학부 출신으로 독일의 여러 대학에서 강의를 한 철학교수이다. 한국에서도 찾아보면 없지는 않다. 경성대 철학과의 김재기 선생이 2002년에 장편 『알라 하임』을 쓴 적이 있다. 아무튼 지금의 시대는 전통적인 영역을 벗어나는 일이 시대적 트렌드가 되고 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필자는 몇 년 전부터 일상을 소재로 쉬운 일상어를 가지고 자신만의 철학을 담을 수 있는 ‘에세이철학’에 심취해왔다. 거의 매일같이 쓰는 철학 평론을 페이스 북과 네이버의 프리미엄 서비스나 브런치 스토리 같은 곳에 올리다 보니 동서와 고금을 넘나들고 전문 영역을 넘어서는 글을 쓸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문체도 자연스럽게 학자들의 논문 형식의 문체와 에세이 성격의 문체를 넘나드는 경험을 할 수가 있었다. 이 소설은 그런 실험적 글쓰기의 연장 속에 있다고 할 것이다.

필자는 이 소설의 형식을 통해 본업인 철학에 대해 반성하는 경험을 많이 했다. 철학자가 소설가들에게 배워야 것이 하나 있다. 철학자들은 허구한 날 남의 철학이나 사상을 끌어들여 해석하고 해설하는 일에 평생을 보내는 데 비해 3류 소설가라 해도 그들은 언제나 자신의 체험과 생각을 자신의 언어로 표현하려고 한다. 물론 철학자들은 개념화된 사유를 하기 때문에 주관적 언어를 쓰기 어려운 면이 있지만, 한국의 철학자들은 그 정도가 심해서 남의 언어와 남의 철학을 가져오지 못하면 사유를 하지 못할 정도다. 때문에 그들이 안고 있는 고질적인 문제는 자신들의 시대경험을 바탕으로 자신들의 철학을 구성하기보다는 여전히 바깥의 수입 철학에 의존하고 2천 년도 넘은 공맹과 노장사상을 주석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는데 있다. 이런 지적 식민성과 사대주의가 한국의 지성계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자신들이 겪은 위대한 경험을 과거로 묻어 버린 채 그저 바깥에서 들어온 새로운 이론과 사상 혹은 오래된 사상에 목을 매달고 있을 뿐이다. 『조선 사상사』를 쓴 교토대 철학과 교수 오구라 기조의 말에 의하면 한국인들은 외래 사상을 자기 것으로 소화해서 재구성하기보다는 끊임없이 새로운 것으로 바꿔치기하는 전면적 개변(改變)에만 의존하는 성향이 강하다. 한 사상이 물밀듯 들어와서 한 시대를 지배하다가 시효가 되어 사라지고 다른 사상이 그 자리를 대체하는 것이 개변의 일반적 형태이다. 과거 불교와 유교가 그랬고, 근대에 들어서는 유교와 마르크스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 등이 그랬다. 손바닥 뒤집듯 일어나는 개변의 가장 큰 단점은 사상의 축적이 이루어지지 못하는 데 있다. 외래 사상만을 끊임없이 찾다 보니까 그런 사상의 축적이 이루어지기 힘들고, 더욱이 자신의 사상을 정립하는 데도 큰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이는 오늘날 한국철학계가 부닥친 커다란 딜레마의 진실이라 할 수 있다. 이제는 이런 생각과 틀을 바꿔야 되지 않을까라는 것이 필자가 이 소설을 쓰게 된 동기다. 무엇보다 자신들의 시대 체험과 생각, 자신들의 언어를 살려서 자신들의 철학을 정립해 보자는 것이다.

이 소설은 격동의 한국 사회를 한 개인의 지적 모험을 통해 재구성해 보자는 데 있지만, 사실 이런 시도는 잘못하면 죽도 밥도 되지 못할 수 있다. 다시 말해 필자의 시도는 철학적 소설을 겨냥했지만 철학도 되지 못하고 소설이라는 면에서도 실패할 수 있다. 최대한 이러한 실패를 피하려고 했지만, 그 판단은 필자의 손을 떠나 읽는 독자들이 내릴 것이다. 하지만 최소한 문제의식에 대한 공유를 통해 우리 철학을 정립하는데 하나의 초석이 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의미 있는 작업이라 생각한다.

 

파주의 우거에서

2025년 3월

[연재 소설] <그대에게 가는 먼 길> 1부 – 23회|7. 철학과 대학원 (4) [이종철의 에세이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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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철학과 대학원 (4)

 

그가 박사 논문을 쓴 다음에 그를 둘러싸고 흉흉한 소문이 돌았다. 그가 미쳤다는 것이다. 그는 교수 연구실을 찾아다니면서 “니가 뭐냐?” 하고 삿대질하고 행패를 부렸다. 그 친구 때문에 교수들은 봉변을 피해서 강의가 끝나면 바로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그 이전에는 박사 논문을 출판한 것을 들고 지방 대학에 자리를 잡고 있는 선배들을 찾아다니면서 술을 얻어먹고 있다는 이야기가 들린 적도 있었다. 강원도 소도시의 깡촌에서 서울로 유학 온 그가 명문대에서 철학박사를 취득했으니까 얼마나 대단한가? 그의 박사 논문은 1992년에 『비트겐슈타인의 철학과 마음』이란 이름으로 <자유사상사>에서 출간했다. 이 책은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을 불교 철학의 관점에서 서술한 책인데, 국내에서는 이 방면으로 아마도 최초일 것이다. 그는 학위 논문을 그 당시 모 출판사 대표였던 김한용씨가 살던 북한산 근처에서 썼다. 그런데 논문이 마지막으로 접어들 때 잠을 제대로 못 잤다고 한다. 잠을 못 자면 기가 위로 뻗쳐서 머리가 돌 가능성이 높다. 수승화강(水昇火降)이라고, 무거운 수기(水氣)는 위로 끌어 올리고 가벼운 화기(火氣)는 아래로 끌어 내려야 한다. 그래야 기의 순환과 소통이 잘 이루어지는 것이다. 산속의 수행자들도 종종 수행과정에서 기가 뻗치는 현상이 나타나곤 해서 반드시 이를 잡아 줄 사람이 필요하다. 학위 논문을 마치고 그것을 책으로 출판하면서 그에게 이런 증세가 본격적으로 터진 것이다.

대학원 시절 아주 친하게 지냈지만 그즈음 우리는 무엇 때문인지 거의 만나지 못했다. 특별히 싸운 것은 아니지만 비트겐슈타인과 불교 철학을 하는 그와 헤겔과 마르크스를 하는 내가 서로 대화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 이전에 무수히 논쟁과 언쟁을 반복하다가 싸운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내가 대학원에 들어갔을 때 법대 동기인 김이후와 함께 용제관 2층의 아주 특이한 방을 이용한 적이 있었다. 백양로를 한 참 걸어 올라가다 보면 왼쪽에 상경관이 있었고, 정면에는 언더우드 동상과 그 뒤로 문과대 건물이 고풍스럽게 서 있었다. 오른쪽 언덕 길을 올라가면 유명한 청송대 숲이 있는데 용제관은 언덕 초입의 오른쪽에 있었다. 당시 가정대와 법대가 함께 이 건물을 사용하고 있었다. 우리가 사용했던 2층의 방은 화장실을 통과해야 들어갈 수 있는 방이다. 때문에 화장실을 수많은 사람들이 들르면서도 이 방은 몰랐다. 문 속의 문이 있는 방인데, 이 안에 들어서면 백양로가 한눈에 보일 만큼 전망이 좋았다. 이 방에는 침대와 쇼파가 있었고, 두 명이 공부할 수 있는 책상도 있었다. 이 방은 원래 금융감독원을 다니면서 박사 논문을 썼던 정모 선배가 이용하던 방이었다. 그가 P 대로 임용되면서 나가게 되었는데, 그는 나중에 P 대 총장을 두 번 연임했다. 총장을 퇴임한 다음 몽골 울란바타르로 가서 ICT Univ. 총장을 역임하고 있다.

나의 법대 동기인 김이후가 정모 선배와 아주 친했기 때문에 그 방을 물려받은 셈이다. 당시 내 친구는 법철학으로 석사 논문을 마친 다음 미국 대학으로 유학을 준비 중이었다. 그와 나는 정립회관에서 만난 이후 지금까지 수십 년을 이어 온 절친이었다. 그와 대학 다닐 때 술을 엄청마시고 1주일에도 몇 번씩 남가좌동에 있는 그의 집에서 자곤 했다. 그의 어머니는 그때마다 전혀 눈살을 찌푸리지 않고 우리를 잘 받아주고 밥도 잘 챙겨 주었다. 그가 그 방을 맡게 되자 그는 바로 나를 그 방으로 끌어들였다. 그곳에서 우리는 각자 공부하기도 하고 함께 하버마스의 『인식과 관심』(Knowledge and human interests)이라는 책을 읽기도 했다. 나중에 그가 미국에서 하버마스와 푸코로 학위 논문을 쓸 때 이때의 강독이 큰 도움이 되었다고 했다. 나는 종종 술을 마시고 이 방의 침대에서 잠을 자기도 했는데, 아침에 새소리를 들으면서 창가를 내다보면 연세 캠퍼스가 마치 나의 정원 같다는 느낌도 들었다. 이 방은 당시 대학가의 데모가 격렬했을 때 건물로 쫓겨 들어왔던 학생들의 피신처가 되기도 했고, 철학과의 선후배 동료들도 많이 찾아 주었다. 친구가 유학 간 다음에도 나는 이방을 혼자서 한참을 이용했는데 나중에 법대 학생회에서 문제 삼아 마지못해 내준 적이 있었다.

한 번은 이모 군과 신촌 시장에서 술을 먹다가 논쟁이 심하게 벌어진 적이 있었다. 개인과 사회의 문제였는데, 일종의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식으로 끝이 없는 논쟁이다. 비트겐슈타인과 불교를 하는 그에게는 자유주의와 개인의 문제가 다른 어떤 것들보다 중요했다. 하지만 헤겔과 마르크스에 심취한 나에게 그런 이야기들은 그저 자유주의자들의 헛된 욕구에 불과해 보였다. 그날 심한 논쟁을 벌이다가 밤늦게 헤어져서 나는 용제관 그 방으로 돌아와서 쓰러져 잤다. 그런데 새벽에 이모 군이 찾아온 것이다. 그는 나랑 헤어진 후 밤을 꼬박 새운 후 새벽에 버스가 다니자 나를 찾아온 것이다. 그는 마음에 조금이라도 걸리는 것이 있으면 그것을 곱씹어서 완전히 털어 내야만 풀리는 성격이다. 일종의 결벽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당시 그는 박사 논문을 쓰고 있었고, 나 역시 논문 문제로 골머리를 썩다 보니 우리가 만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런 상태에서 1992년 이른 봄 즈음 그에 관한 소식이 내 귀에도 들렸다. 그가 머리가 다소 돈 것 같고, 사람들에 대해 적대적으로 행패를 부리고 다닌다는 것이다.

한 번은 내가 철학과 강사실에 볼일이 있어서 들른 적이 있었다. 그때 마침 그가 거기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이름을 부르면서 악수를 청했다. 그러니까 그는 단호하게 내 손을 쳐 버렸다. 그는 머리를 군인처럼 짧게 잘랐고, 얼굴과 팔 곳곳에는 상처도 보였다. 막 교도소에서 나온 모습같이 험악해 보였다. 나를 빤히 쳐다볼 때는 평소의 그와 달리 살기가 느껴졌다. 더 이상 우리는 말을 하지 않고 헤어졌다. 그날이 내가 그 친구를 마지막으로 본 날이다. 그의 행각은 여전히 거친 이야기로 들려 왔다. 한 번은 학생들 축제하는 기간 중에 텐트를 불 질러 버린 적이 있다. 학생이 공부나 해야지 무슨 축제냐고 하면서 그랬다는 것이다. 그 사건은 당시 일간지 사회 면에 보도된 적도 있고, 그는 바로 서대문 경찰서로 연행되기도 했다. 지도 교수인 P 교수가 힘을 써줘서 경찰서에서 풀려나자 그를 걱정한 친구들이 정신병원에 입원시켰다. 그러고 나서 한 두어 달 동안 잠잠했다. 그런데 아주 나쁜 소식이 들려왔다. 그가 병원에서 퇴원 후 고향으로 낙향했는데 부모가 있는 집에서 농약을 먹고 자살을 했다는 것이다. 내가 철학과에서 숱한 경험을 했지만 그 일은 가장 비극적인 사건 중의 하나였다. 무지렁이 부친은 농약 먹고 고통스러워 떼굴떼굴 구르는 아들을 그냥 몇 시간 동안 방치했고, 죽자 바로 가마때기에 싸서 산에 버렸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나중에 우리가 원주의 가파른 치악산을 올라가 그의 무덤을 만들어 주었고, 간단하게 나마 추도식을 올려 주었다. 그가 죽은 지 벌써 30 여 년이 흘렀다. 여전히 껑충한 키에 오른쪽의 혹을 돌리던 그의 모습은 지금도 생생하다.


이종철(철학박사)은 『철학과 비판』(도서출판 수류화개)과 『일상이 철학이다』(모시는 사람들) 그리고 『문명의 위기를 넘어』(공저, 학지원)를 썼다. 그는 『헤겔의 정신현상학』(J. Hyppolite, 1권 공역/2권, 문예출판사), 『사회적 존재론』(G, Lukacs, 2권/4권(공역), 아카넷), 『나의 노년의 기록들』(A, Einstein, 커큐니케이션스북스)등 다수의 번역서들을 냈다. 현재는 연세대 인문학 연구소 전문 연구원이자 인터넷 신문 ‘브레이크뉴스’와 ‘내외신문’의 칼럼리스트로 활동하면서 NGO 환경단체인‘푸른 아시아’의 홍보대사를 맡고 있다.

[연재 소설] <그대에게 가는 먼 길> 1부 – 22회|7. 철학과 대학원 (3) [이종철의 에세이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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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철학과 대학원 (3)

 

철학과를 드나들면서 개성 있고 좋은 친구들을 여럿 만났다. 그중 삐쩍 말라 키가 껑충한 이상한 군은 대학원을 다니는 내내 친하게 지내고 자극도 많이 받았다. 내가 그를 처음 만난 것은 4학년 칸트 수업이었다. 강의가 끝나고 나서 그가 나중에 신과대 대학원으로 진학한 한 학생과 칸트 철학에 대해 열심히 논쟁하고 있었다. 칠판에 그림까지 그려 가면서 논쟁하는 데 이제 갓 철학과 수업에 들어온 법대생이 이해하기는 어려웠다. 다만 그렇게 진지하게 논쟁하는 모습 자체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법대에서는 결코 보지 못했던 모습이었다. 그는 수업 시간에도 수시로 질문을 하면서 따졌다. 독일에서 학위를 하고 나서 한국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되는 선생은 이런 질문에 대해 상당히 곤혹해했다. 그럴 때면 선생은 상한군에게 한 번 답변해보라고 하면서 질문을 떠넘겨 버리기도 했다. 상한군은 당시 비트겐슈타인을 가지고 석사 논문을 쓰겠다고 했다.

그는 지방 소도시의 깡촌 출신이었다. 머리가 비상해서 Y대 철학과로 진학했는데, 당시 나는 그야말로 그가 철학의 화신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다른 사람들은 보통 농담을 많이 하고 사회 문제 등도 이야기하곤 하는 데 이 친구는 그런 문제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는 자나 깨나 철학이고, 어떤 이야기를 하든 다시 철학으로 대화를 끌어갔다. 그의 모습을 보다 보면 논쟁을 즐기며 사람들을 낭패하게 만드는 소크라테스를 연상할 정도였다. 소크라테스의 별명이 소 잔등에 달라붙어서 아무리 쫓아도 사라지지 않는 ‘등애’였다. 이런 그의 태도는 처음 철학 공부를 시작하는 나에게 상당한 자극이 되었다. 나는 모르는 것이 있으면 수시로 그와 대화하면서 깨우쳤다. 우리는 주로 중앙도서관 3층의 계단에 앉아서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다. 당시는 도서관 내에서 담배도 피우던 시절이었다. 담배 연기가 자욱한 틈에서도 철학을 이야기하는 친구의 눈빛이 빛났다.

그는 머리가 비상했을 뿐만 아니라 어떤 권위도 인정하지 않을 만큼 비판적이었고, 또 절대로 비약을 허용하지 않을 만큼 논리적이었다. 그가 오른쪽 목에 난 자그만 혹을 만지면서 차분하게 논리의 허점을 집요하게 파고들면 마치 비수로 가슴을 후비는 느낌마저 든다. 이런 태도는 강의실이건 도서관이건 가리지 않았고, 술집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술을 마셔도 흥분하지 않고 차분하면서도 날카롭게 이야기했다. 술자리는 사실 논리 보다는 감성이 앞서는 자리다. 그런 곳에서 논리적으로만 이야기한다는 것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덕분에 그는 술자리에서 여러 차례 얻어맞은 경험이 있다. 그의 키가 180 센티를 넘겼지만 그는 혼자 자취하느라 제대로 영양 섭취하지 못하고 술 담배를 많이 한 탓에 삐쩍 말라 있었다. 그의 모습이 만만하게 보였는지 그에게 주먹을 휘두르는 사람들이 여럿 있었다. 그중 나는 가장 가까운 데서 그런 폭력이 자행되던 모습을 보았다.

언젠가 철학과 대학원생들끼리 1차로 술을 마시고 나와 이모군, 그리고 동양 철학을 하던 독고탁과 김수철이 함께 자주 다니던 논지당 카페에 들어갔다. 이곳은 신촌에서 유명한 카페이다. 주인 마담과도 친해서 늘 술을 마시면 들르던 곳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커피를 마시다가 일이 터졌다. 원인은 나였다. 나는 그 당시 술과 담배를 엄청 하던 관계로 기관지가 별로 좋지 않았다. 나는 칵칵거리면서 목에 낀 가래를 그냥 바닥에 몇 차례 뱉었다. 사실 정말 매너 없이 행동한 것인데 만취한 상태에서 나타난 현상이다. 그 모습을 보고 동양 철학을 하던 김수철씨가 아주 보기 좋지 않은 듯 눈을 흘겼다. 그는 연극반 출신이고 수경사 출신으로 몸도 건장하고 술도 잘 마시던 낭만파 호인이었다. 주인 마담과도 친해서 논지당을 많이 아끼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그런 반응을 보인 것은 아주 당연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상환이 이 모습을 보면서 특유의 시니컬한 반응을 보인 것이다. 그러니까 김 선배가 그를 밖으로 끌어냈다. 바로 옆 골목으로 데리고 가서 그야말로 무자비하게 팼다. 얼굴이 피떡이 된 상태로 카페에 들어온 이모 군의 모습을 보고 우리는 경악을 했다. 상처가 심해서 바로 근처에 있는 세브란스 병원 응급실로 데리고 갔다. 나에게 향해야 할 주먹을 그가 대신 맞은 것이다. 이 사건의 여파는 생각보다 컸다. 그의 동기인 김봉한이 때린 김 선배를 당장 고발해야 한다고 부추겼다. 하지만 고발까지는 가지 않고 병원 치료비와 소정의 보상비 정도로 마감했다. 아무튼 이 친구는 너무 약해 보이는 데다가 냉소적이어서 그렇게 많이 맞고 살았다.


이종철(철학박사)은 『철학과 비판』(도서출판 수류화개)과 『일상이 철학이다』(모시는 사람들) 그리고 『문명의 위기를 넘어』(공저, 학지원)를 썼다. 그는 『헤겔의 정신현상학』(J. Hyppolite, 1권 공역/2권, 문예출판사), 『사회적 존재론』(G, Lukacs, 2권/4권(공역), 아카넷), 『나의 노년의 기록들』(A, Einstein, 커큐니케이션스북스)등 다수의 번역서들을 냈다. 현재는 연세대 인문학 연구소 전문 연구원이자 인터넷 신문 ‘브레이크뉴스’와 ‘내외신문’의 칼럼리스트로 활동하면서 NGO 환경단체인‘푸른 아시아’의 홍보대사를 맡고 있다.

[연재 소설] <그대에게 가는 먼 길> 1부 – 21회|7. 철학과 대학원 (2) [이종철의 에세이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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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철학과 대학원 (2)

 

처음에 헤겔과 독일 관념론에 관심을 갖고 모교의 철학과 대학원에 진학했지만 막상 들어와 보니 대학원의 일반적 분위기는 영미 분석철학이 강했다. P 교수가 이 분야의 대부였고, 과학철학을 하던 O 교수도 영미 철학에 바탕을 두고 있었고, 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았던 D 교수도 미국에서 학위를 받았다. 또 다른 S 교수가 독일 보쿰 대에서 학위를 받았지만 내가 별로 관심을 두지 않은 해석학 분야였다. 그래서 독일 관념론을 공부하는 학생들은 따로 강독 세미나를 운영해서 자기들끼리 공부했다. 나의 동기들 모두 칸트와 헤겔에 관심을 가졌기 때문에 졸업하는 내내 독일어 원서 강독을 많이 했다. 이런 움직임 탓인지 3학기에 올라갔을 때는 독일 철학 연구자들의 숫자도 많이 늘어서 별도로 대학원 내에 독일 철학 연구자 모임을 만들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 모임은 만들자마자 바로 해산되는 비운을 경험했다. 사건의 발단은 그 모임을 만들고 나서 뒷풀이로 술을 마시던 자리에서 나왔다. 나는 그때 동생이 일으킨 사고처리 때문에 참석하지 못했다. 나중에 다른 참석자들의 이야기를 들어 본 사정은 이렇다.

 

“김 봉한이 너무 독선적이지 않아요? 저 혼자 독일 철학을 다 하는 양 하는 게 좀 눈에 거슬리네요.”

 

“그 친구 독선은 하루 이틀 된 것도 아닌데 뭘 그래.”

 

“그래도 이제는 원팀을 만들어서 함께 공부하려는 마당에 혼자서 독불장군식으로 행동하는 것은 보기 좋지 않죠.”

 

“하긴 그래. 하지만 그걸 어떻게 해? 그만하라고 일일이 막을 수도 없고.” 이 친구는 대학 2학년 때부터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옆에 끼고 살았다. 3학년이 되어서는 칸트에 관한 학술 논문을 써서 대학 신문에서 수여하는 학술 논문상도 수상해서 나름 지명도가 높았다.

 

“아무튼 나는 그런 모습 못 봅니다. 자꾸 멋대로 행동하면 내가 그만두는 수밖에 없지요.”

 

“내가 한번 잘 이야기를 해보지. 아무래도 전체의 분위기가 중요하니까,” 그나마 그와 친한 선배의 말이다.

 

그런데 그 이야기가 다음 날 그 친구 귀에 들어간 것이다. 그는 당장 화를 내면서 자기는 연구회 모임을 할 수가 없다고 했다. 이제 막 시작한 모임이 제대로 꽃도 피우지 못하고 해산될 지경에 이른 것이다. 모임을 깨고 싶지 않았던 내가 그를 따로 만나서 설득해보기로 했다.

내가 술자리에 참석 못한 것은 다른 이유 때문이었다. 당시 나의 누이가 동부 이촌동에서 기사 식당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런데 옆에서 비슷한 식당을 하는 친구가 너무 심하게 호객행위를 해서 나의 막내 동생과 물리적 충돌을 빚었다. 덩치는 훨씬 큰 친구가 운동을 했던 막내 동생에게 흠씬 두들겨 맞고 병원에 입원했다. 그는 사촌 형이라고 하는 브로커를 내세워 당시로는 거금이라 할 수 있는 5백만 원을 합의금 조로 요구한 것이다. 만약 합의를 해주지 않을 경우 막내 동생은 구속을 면할 수가 없는 상태였다. 어쩔 수 없이 내가 그를 직접 병원으로 찾아가서 호소를 해봤다.

 

“몸은 좀 어떠세요?” 그는 찾아간 나를 돌아보지도 않았다. 링게르 주사를 꼿고 병상에 누워 있는 모습을 보니까 생각보다 심하지 않아 보였다.

“사촌 형과 이야기를 해봤습니다. 물론 때린 제 동생이 많이 잘못했습니다. 하지만 서로 매일 같이 얼굴을 맞대고 있는 사람들끼리 너무 무리하게 요구하는 것은 아닐까요? 다들 하루 벌어 하루살이 하는 형편을 잘 아시잖아요.”

 

내가 여러 말을 하면서 합리적으로 풀어 보려고 했지만 그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요지부동이었다. 브로커 삼촌이 일체 말을 하지 말라고 단단히 언질을 준 것 같았다. 결국 울며 겨자 먹기로 주먹 몇 번 날린 것에 대한 댓가로 5백만 원을 줄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날 오후 교내 평화의 집에서 김봉한을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독일 철학 연구자 모임의 해체를 막기 위해서였다. 깨는 것은 쉽지만 다시 만들려고 하면은 훨씬 어렵다는 판단에서다. 먼저 내가 운을 띄웠다.

 

“오늘 제 동생이 주먹을 잘 못 놀려서 적지 않은 돈을 물어주게 되었어요. 그 친구한테 사정 사정을 해봤지만 요지부동이네요. 한 마디로 말문이 꽉 막힌 사람이더군요. 살아가는 방식이 틀려서 그런지 말이 전혀 통하지 않아요.” 그래도 우리는 함께 공부하는 연구자들이니까 그런 사람들하고는 다르지 않냐고 은근히 넘겨짚은 것이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단호했다.

“함께 공부하자고 하면서 뒷다마 치는 인간들하고 어떻게 공부해요? 오늘 아침 그 소리를 듣고 정말 화가 많이 났습니다.” 가뜩이나 외골수인데 그런 소리까지 들었으니 더 말하기 힘들었다. 그래도 한마디 더 했다.

“만약 우리가 이 모임을 깬다고 하면 앞으로 다시는 이런 모임을 구성할 수 없다고 생각해보지 않았나요? 대를 위해서 한 번쯤 이해해보면 어떨까요?” 하지만 그는 여전히 요지부동이다. “그렇게 할 수 없소.” 그걸로 끝이었다. 그냥 결별인 것이다.

 

이 친구의 고집과 뚝심은 참으로 대단했다. 나중에 그가 모 재벌을 상대로 시위하는 장면을 보고 그때의 모습이 연상되었다. 그는 내가 대학원을 그만두려 했을 때 나에게 함께 일을 해보자고 제안을 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때 잃은 신뢰 때문에 내가 거절하고 말았다. 독일 철학 연구자 모임은 만들자마자 바로 해산되었고, 다시는 만들지 못했다. 그 이후 나는 더 이상 Y대 내에서 그런 모임을 진행하지 않았다. 대신 대학 밖으로 나가서 비슷한 관심사를 가진 타 대학 대학원생들하고 세미나를 했다.


이종철(철학박사)은 『철학과 비판』(도서출판 수류화개)과 『일상이 철학이다』(모시는 사람들) 그리고 『문명의 위기를 넘어』(공저, 학지원)를 썼다. 그는 『헤겔의 정신현상학』(J. Hyppolite, 1권 공역/2권, 문예출판사), 『사회적 존재론』(G, Lukacs, 2권/4권(공역), 아카넷), 『나의 노년의 기록들』(A, Einstein, 커큐니케이션스북스)등 다수의 번역서들을 냈다. 현재는 연세대 인문학 연구소 전문 연구원이자 인터넷 신문 ‘브레이크뉴스’와 ‘내외신문’의 칼럼리스트로 활동하면서 NGO 환경단체인‘푸른 아시아’의 홍보대사를 맡고 있다.

[연재 소설] <그대에게 가는 먼 길> 1부 – 20회|7. 철학과 대학원 (1) [이종철의 에세이 철학]

20회

7. 철학과 대학원 (1)

 

법대에서는 낙오자나 다름없었지만, 문과대 수업에서는 성적이 아주 잘 나왔다. 타지에서 설움을 받다가 고향에 온 느낌마저 들었다. 힘들고 오랜 항해 끝에 섬을 발견한 뱃사공들의 기쁨과도 같았다. 남들은 일부러 법대 가기 위해 애를 쓴다고 하던데 나는 오히려 법대를 나와서 잘 팔리지도 않는 철학과로 갔다. 철학과 대학원 시험은 공부도 별로 하지 않은 상태에서 무사히 통과했다. 그 당시는 대학원 시험을 통과하는 게 어려웠던 시절이다. 나의 대학원 동기는 타 대학에서 온 여학생과 본교 교육학과 출신인 여학생이다. 모두가 타과 출신인 셈이다. 대학원 등록금은 고등학교 동기가 자기 동생을 과외 공부시켜주는 조건으로 일부를 대주고, 나머지 절반은 나의 오랜 법대 동기인 김모 군의 어머니가 내주었다. 그 당시 과외를 금지했기 때문에 도봉구 방학동이었던 친구의 집에서 3달 정도 입주 과외를 해주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돈 한 푼 없이 내가 공부를 할 수 있었던 데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음으로 양으로 나를 도와주었기 때문이다. 내 인생에서 결코 잊지 못할 참으로 고마운 분들이다.

우리 대학원 입학 동기들은 타과생이라 학부 철학과에서 2과목을 의무적으로 들어야 했다. 그런데 수강을 신청하는 과정에서 나를 아주 잘 보았던 과장 교수와 정면으로 충돌하는 문제가 생겼다. 나는 대학원에서 3과목을 신청하고 학부에서 1과목을 신청하겠다고 과장실로 찾아갔는데 과장 교수가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내가 그 자리에서 과목의 수강 능력은 나의 선택과 역량에 달린 것이 아니냐고 따졌더니 그 교수가 벌컥 화를 내는 것이었다. 그때 옆 소파에 앉아 있던 박사 과정 선배가 나가라는 눈짓을 주었다. 그 사건으로 인해 나는 과장 교수의 눈 밖에 나서 대학원 다니던 내내 불이익을 당했다. 우리 동기가 3학기가 되었을 때 그 과장 교수가 안식년 휴가를 떠나면서 과 조교에서 우리 동기들을 다 빼 버리는 사건이 벌어졌다. 조교 장학금은 나에게는 필수적인 것이어서 그것을 받지 못하면 등록을 할 수가 없었다. 나는 너무 화가 나서 대학원을 그만두겠다고 했는데, 당시 학생처장을 맞고 있었던 P 교수가 학생처장 장학금을 끌어다 줘서 간신히 등록을 맞쳤다.

대학원 수업은 재밌었다. 정말 공부하는 느낌이 들었다. 학생 수도 몇 명 안 돼서 강의의 집중력도 컸다. 학부에서 B 교수의 동양 철학 수업도 들었지만, 당시 동양철학은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아서 남은 것이 없다. 당시 철학과 대학원은 강의가 끝나면 논문 형식의 리포트를 작성해서 제출해야 했다. 이 리포트를 방학 내내 작성하는 경우도 있을 만큼 리포트 작성이 대학원 수업에서 비중을 많이 차지했다. 그때 제출한 리포트들이 교수들의 호평을 받았다. 특히 비트겐슈타인 강좌를 담당했던 P 교수는 내가 제출한 리포트 제목만 보고서 바로 그 자리에서 A를 줄 정도였다. 그때 내가 제출한 리포트 제목은 지금 봐도 멋지다. “커뮤니케이션의 선험적 지평으로서의 ‘삶의 형식’(Lebensforum)”이다. 비트겐슈타인이 전기에 ‘언어의 그림이론’을 담은 『논리-철학 논고』(Tractatus)를 발표했지만, 후기 철학서인 『철학 탐구』(Philosophical Invesgation) 에서는 초기의 이론을 죄다 뒤엎었다. 그는 이 책에서 특히 삶의 형식’(Lebensform)이라는 개념을 강조했다. 나는 이 개념을 당시 막 복사본으로 소개되었던 K. 오토 아펠의 책에서 알게된 ‘선험적 지평’이란 개념과 연결시켰다. 그의 삶의 형식은 언어공동체를 가능케 하는 선험적 지평의 의미로 충분히 해석이 가능한 것이다. 그런데 독일 철학에 생소한 P 교수는 제목 자체만으로 봐도 멋있다고 높게 평가를 해주었다. 아무튼 이런 리포트를 석-박사 졸업할 때까지 10여 편을 작성해야 했다. 어려웠지만 배운 것도 많다.


이종철(철학박사)은 『철학과 비판』(도서출판 수류화개)과 『일상이 철학이다』(모시는 사람들) 그리고 『문명의 위기를 넘어』(공저, 학지원)를 썼다. 그는 『헤겔의 정신현상학』(J. Hyppolite, 1권 공역/2권, 문예출판사), 『사회적 존재론』(G, Lukacs, 2권/4권(공역), 아카넷), 『나의 노년의 기록들』(A, Einstein, 커큐니케이션스북스)등 다수의 번역서들을 냈다. 현재는 연세대 인문학 연구소 전문 연구원이자 인터넷 신문 ‘브레이크뉴스’와 ‘내외신문’의 칼럼리스트로 활동하면서 NGO 환경단체인‘푸른 아시아’의 홍보대사를 맡고 있다.

[연재 소설] <그대에게 가는 먼 길> 1부 – 19회|6. 다시 강의실로 (4) [이종철의 에세이 철학]

19회

  1. 다시 강의실로 (4)

 

오늘은 지난 시간에 이어서 칸트 철학의 문제를 계속 강의한다. 지난 시간에 칸트 철학이 직면한 딜레마까지 다뤘다. 이번 시간에는 그것을 칸트가 어떻게 푸는 지를 다룬다. 칸트가 보기에 경험론은 모든 것을 경험적 인상들의 다발로 보다 보니까 합리론자들이 말하는 ‘필연성’을 어디서도 찾아볼 수가 없다. 때문에 이런 주장은 회의론(Sceptism)에 빠지게 되고, 학문의 객관성도 확보하기 힘들어진다. 반면 합리론은 실체가 무엇인가를 둘러싸고 논쟁하지만 그것은 여전히 증명되지 않는 전제에 기초한 독단론(Dogmatism)에 그칠 뿐이다. 그리하여 회의론과 독단론을 피해 학문 -이 학문에는 당대의 뉴턴 역학도 포함되고, 필연성의 학문인 수학도 포함된다- 의 객관성을 확보할 수 있느냐가 칸트의 문제였다. 문제를 이렇게 정립하자 이제는 그것을 어떻게 해결하느냐가 중요하다. 여기서 칸트는 유명한 ‘코페르니쿠스 혁명’의 전략을 끌어들인다.

잘 알다시피, 코페르니쿠스는 당시까지 유지되어왔던 톨레미의 항성 이론에 대해 반대했다. 성경에 따라 지구를 우주의 중심으로 놓고 태양계를 설명하려고 하니까 너무나 맞지 않는데, 이것을 뒤집어 태양을 중심으로 놓으니까 모든 것이 잘 설명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주어와 술어를 완전히 뒤집어 놓는 전략이다. 나는 종종 칸트 철학을 대하면서 그가 대단히 영리하다(clever)는 느낌을 많이 받는다. 그는 여기에서 ‘발상의 전환’을 시도하고 있다. 문제가 잘 안 풀릴 때는 이렇게 시점을 바꾸고 발상 전환을 시도하려는 태도가 중요하다. 완전히 시각을 바꾸어 보면 대상도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칸트는 인식의 주체와 객체(대상) 간의 관계를 전도시킨 것이다. 경험론자처럼 항시 대상 의존적으로 사유할 경우 언제나 상대주의와 회의주의, 확률주의의 한계를 벗어날 수가 없다. 이 점에서는 이성을 중시한 합리론자들의 전략이 훨씬 유효하다 할 것이다. 태양이 우주의 중심이듯, 인간 이성이 지식과 과학의 주체가 되도록 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경험의 중요성을 칸트가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다시 한번 학생들에게 칸트의 전략을 학생들이 이해하는지를 물어보았다.

 

“여러분들, 칸트가 시도하고 있는 전략의 의미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까?”

 

“네, 적어도 여기까지는 칸트의 전략이 분명하게 이해가 됩니다. 선생님의 탁월하신 강의 때문인 듯합니다.” 한 학생의 아부성 발언이지만 듣기 싫지는 않았다. 나는 계속 강의를 이어간다.

 

“칸트의 ‘영리함’은 또 다른 면에서 나타납니다. 칸트는 인간 이성에게 인식의 주도권을 넘겼지만, 그냥 무제한적으로 그 권리를 인정한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칸트의 저 유명한 ‘이성 비판’이라는 법정이 등장합니다. 이것은 인간 이성에 대한 냉철한 비판을 통해 인간 이성이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을 구분하는 전략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칸트는 인간의 인식 능력을 감성과 오성 그리고 이성 3가지로 구분합니다. 칸트의 이런 구분은 종래의 철학자들이 인식 능력을 감성(Sinnigkeit)과 이성(Vernunft)으로 양분했던 것에서 한 층 심화시켜 경험주의자들이 사용하던 오성(Verstand)을 끌어들인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아담 스미스가 노동의 분업의 효율성을 강조했던 것을 연상할 수 있습니다. 중세처럼 작업 공정 전체를 마스터(장인)가 다 관장하는 것이 아니라 전문 영역을 구분하고, 그 영역을 넘어서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칸트는 외계에서 인식의 재료를 받아들이는 감성의 능력과 과학의 범주로 이 재료를 재단해서 인식을 만드는 오성의 능력을 나눕니다. ‘직관이 없는 오성은 공허하고, 오성이 없는 직관은 맹목적이다.’는 그의 유명한 명제가 인식의 두 가지 능력의 차이와 역할을 보여줍니다. 그런 의미에서 칸트에게 인식은 감성과 오성의 합작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앞서 이야기했듯, 이러한 인식은 종래의 형이상학자들이 생각하듯 무제한적인 것이 아닙니다. 과거의 형이상학자들은 이것을 무제한적으로 추론했기 때문에 이른바 독단론에 빠진 것이지요.” 잠시 물 한 모금으로 목을 축이고 내 강의는 계속 이어진다.

“칸트는 분업의 생산성에 주목한 근대 경제의 이론과 마찬가지로 인식의 각각의 능력에 역할을 지정해주고, 그 결과에 대해서는 한계를 밝혀주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과학적 사유를 가능하게 하는 오성의 범주들은 경험적으로만 사용할 수 있다고 해서 그 한계를 분명히 한 것입니다. 근대식 공장의 분업에서는 누구도 자기에게 주어진 작업을 넘어설 수 없습니다. ‘이성 비판’은 오성의 월권을 제한하기 위한 전략입니다. 사실 이러한 월권, 칸트식으로 말하면 초월(Transzendenz)은 인간 이성의 숙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미 아리스토텔레스도 그 자체를 알고 싶어 하는 호기심(thaumazein)이 형이상학과 과학을 가능하게 한다고 밝힌 바 있지요. 인간의 의식은 늘 현재에 만족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넘어서고자 합니다. 칸트가 변증론에서 이러한 초월로 인해 야기된 가상을 필연적인 ‘형이상학적 가상’(Schein)이라고 한 것도 그것이 그만큼 불가피하기 때문입니다. ‘변증론’의 이성 비판은 그런 의미에서 인간 이성의 월권을 방지하려는 칸트식의 전략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월권이 이루어졌을 경우 어떤 결과가 빚어질까요? 『순수이성비판』은 감성의 역할을 다룬 <감성론>(Sinnigkeitstheorie)과 오성의 역할을 다룬 <분석론>(Analytikstheorie), 그리고 이성의 역할을 다룬 <변증론>(Dialektik)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변증론은 이성이 자신의 한계를 넘어 초월했을 때는 야기되는 문제들을 비판한 것입니다. 그것은 세계에 관한 ‘안티노미 이론’과 영혼에 관한 ‘영혼론’, 마지막으로 이 모든 것을 포괄하는 ‘신 존재 증명 비판’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칸트 철학은 그런 의미에서 인간의 인식 능력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건축(Architecture)과 같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당시는 이러한 건축의 이미지, 말하자면 체계를 구축하려는 사유의 이미지가 일반적이었지요.”

여기까지 주마간산 격으로 거칠게 설명을 했지만 학생들은 오히려 잘 이해하는 것 같다. 아마도 그것은 나의 강의 때문도 있지만, 무엇보다 칸트의 철학이 수학의 문제를 풀 듯 단순하고 명료하기 때문일 것이다. 설계도가 없으면 건축할 수 없는 반면, 설계도를 이해하면 건축을 훨씬 잘하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종철(철학박사)은 『철학과 비판』(도서출판 수류화개)과 『일상이 철학이다』(모시는 사람들) 그리고 『문명의 위기를 넘어』(공저, 학지원)를 썼다. 그는 『헤겔의 정신현상학』(J. Hyppolite, 1권 공역/2권, 문예출판사), 『사회적 존재론』(G, Lukacs, 2권/4권(공역), 아카넷), 『나의 노년의 기록들』(A, Einstein, 커큐니케이션스북스)등 다수의 번역서들을 냈다. 현재는 연세대 인문학 연구소 전문 연구원이자 인터넷 신문 ‘브레이크뉴스’와 ‘내외신문’의 칼럼리스트로 활동하면서 NGO 환경단체인‘푸른 아시아’의 홍보대사를 맡고 있다.

[연재 소설] <그대에게 가는 먼 길> 1부 – 18회|6. 다시 강의실로 (3) [이종철의 에세이 철학]

18회

6. 다시 강의실로 (3)

 

강의가 다소 추상적으로 이루어지다 보니 학생들의 집중력이 떨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마침 강의 시간도 끝날 때 쯤이라 그 정도에서 마칠 수 있었다. 이 날은 원주에서 선생들 끼리 회식이 있다. 서울에서 멀리 출강하는 강사들을 위해 철학과의 과장 교수가 한 턱을 사는 날이다. 술을 마시고 뒤늦게 버스 편을 이용해서 올라가는 선생도 있고, 차를 몰고 내려 오는 선생은 음주는 하지 않고 올라간다. 이때 그이의 차에 편승해서 올라갈 수도 있다. 예나 지금이나 술자리는 즐겁다. 여러 사람들을 만나서 이야기하는 것이 즐겁고, 술 한 잔 들이키면서 편한 마음으로 대할 수 있는 것도 즐겁다.

 

“L 선생, 요즘 늦게 배운 도둑질에 날 새는 줄 모른다고 하더니 그렇게 공부하는 게 재밌어요? 논문 열심히 쓴다고 소문이 자자하던데요?” 선배 교수가 덕담 수준으로 말을 건넨다.

“별 말씀을요. 뒤늦게 다시 시작한 공부를 따라 잡느라고 애를 많이 쓸 뿐이지요.”

 

서울에서 내려오는 강사들의 수업 시간이 다 다르기 때문에 한 꺼번에 만나기는 쉽지가 않다. 오늘은 그래도 많아서 5명이나 참석했다. 개중에는 독일서 학위를 마치고 돌아온지 얼마 안 되는 선생이 있었고, 또 한국 철학을 하는 후배도 있었다. 이 선생은 퇴계의 철학을 전공하면서 동시에 퇴계의 정신을 따라 작시(作詩)도 잘 했다. 그는 술자리에서 자기가 지은 시라고 하면서 낭독도 하곤 했다. 작시를 특별히 어렵게 하지 않고, 소재도 주변의 일상에서 찾은 것들이라 이해하기도 어렵지가 않았다. 그가 시 한 수를 뽑고 나서 바로 노래도 한 곡 부른다. 술자리의 분위기가 서서히 달아 오른다. 여기 저기서 장단 맞추는 젓가락 두들기는 소리도 난다. 서울에서는 오래 전에 사라졌던 분위기가 소도시인 이곳에서 다시 기억을 일깨운다. 다들 같은 대학의 철학과 선후배로 이루어져 있어서 술 몇 잔 들어가면 그냥 형 동생 하는 사이다. 한국인들은 어디를 가든 이런 끈끈한 분위기가 술자리를 매개로 이어지는 것이다. 이날 늦게 까지 술 자리를 이어가다가 거진 밤 10시 쯤 돼서 헤어졌다. 나는 마침 서울로 귀환하는 후배 차를 탈 수 있었다. 그는 독일의 아우토반에서 단련된 운전 솜씨가 대단해서 나는 믿고 잠시 눈 좀 붙였다. 그런데 별로 잔 것 같지도 않은데, 그가 말한다. “형, 집에 다왔어요.” 벌써 내가 사는 아파트에 도착한 것이다. 덕분에 아주 편하게 왔다.

지방의 소도시로 출강하는 수업은 힘들기는 했지만 그래도 즐겁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1주일에 한 번씩 여행을 다니는 기분을 즐겼다. 서울에서 여러 일로 스트레스를 받다가 이렇게 한 번 씩 서울을 떠날 수 있다는 것이 좋았다. 서울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였고, 소수의 학생들을 상대로 전공 강의를 하는 것도 좋았다. 학자는 어떤 경우든 논문을 써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연구를 해야 하는데 이런 전공 강의가 도움이 된다. 전임과 시간 강사의 차이가 여럿 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큰 것은 전임은 우수한 학생들을 데리고 학부 전공이나 대학원 수업을 이끌어 갈 수 있는 반면 강사들은 그저 피상적인 교양 과목만 담당하는 것에 있다. 전임은 강의를 논문 쓰기로 연결시킬 수 있는 기회가 많은 반면, 시간 강사들은 교양 과목 수업 준비만 하다가 허송세월 보내는 경우가 많다. 내가 이런 강사들의 약점을 보충하기 위해 학위 논문을 쓰는 학생들의 멘토로 이어주면 어떨까라는 제안도 해보았지만 아쉬울 것 없는 전임들은 그저 귓전으로 들었다.


이종철(철학박사)은 『철학과 비판』(도서출판 수류화개)과 『일상이 철학이다』(모시는 사람들) 그리고 『문명의 위기를 넘어』(공저, 학지원)를 썼다. 그는 『헤겔의 정신현상학』(J. Hyppolite, 1권 공역/2권, 문예출판사), 『사회적 존재론』(G, Lukacs, 2권/4권(공역), 아카넷), 『나의 노년의 기록들』(A, Einstein, 커큐니케이션스북스)등 다수의 번역서들을 냈다. 현재는 연세대 인문학 연구소 전문 연구원이자 인터넷 신문 ‘브레이크뉴스’와 ‘내외신문’의 칼럼리스트로 활동하면서 NGO 환경단체인‘푸른 아시아’의 홍보대사를 맡고 있다.

[연재 소설] <그대에게 가는 먼 길> 1부 – 17회|6. 다시 강의실로 (2) [이종철의 에세이 철학]

17회

       6. 다시 강의실로 (2)

 

3, 4학년을 대상으로 하는 전공 강의인 칸트 수업 역시 내가 공을 많이 들였다. 이 수업은 지방의 소도시에서 진행이 되었지만 나는 1주일에 한 번씩 여행하는 기분으로 다녔다. 두세 번의 수업을 통해 강의의 대략적 틀을 잡았고, 이번 주부터는 본격적으로 칸트 철학의 내용을 다루게 될 것이다. 서울에서 내려오는 학생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이 도시에서 자취를 한다.

칸트 철학은 근대 철학에서 대단히 중요한 철학자다. 그의 철학은 하나의 거대한 호수로 비유되기도 한다. 그 이전의 철학이 그의 철학으로 몰려들고, 그 이후의 철학은 그로부터 흘러나가는 호수의 이미지에 그의 철학이 딱 어울린다. 칸트의 철학으로부터 철학은 본격적으로 아카데미권에 정착을 한다. 그 이전의 철학은 아마추어들의 철학, 거리의 철학, 살롱의 철학이었지만, 칸트의 철학은 비로소 프로의 철학이 무엇이고, 그것을 어떻게 체계화시킬 수 있는 가를 보여주었다. 그런 의미에서 철학을 공부하겠다고 마음을 먹은 학생이라면 높고 험한 산을 등정하듯 칸트의 철학과 대결을 해야 한다. 근대를 경험한 지금 칸트 철학은 저 근대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철학 중의 하나이다.

두 차례 정도 지나고 보니까 이제 나의 칸트 강의에 학생들이 점점 몰입하는 느낌이 느껴진다. 강의하다 보면 느낌과 시선이 몸에 와 닿는 순간을 경험한다. 학생들 책상 위에는 백종현 선생이 번역한 하늘색 바탕의 하얀색 장정으로 만들어진 두툼한 『순수이성비판』 한글 번역본이 올라와 있고, 이 『순수이성비판』 해설서로 잘 알려진 고트프리드 회페의 번역본을 올려놓은 학생도 보인다. 20년 전 우리가 칸트 철학을 공부할 때는 활자가 빽빽한 최재희 선생의 번역본을 사용했고, 해설서도 별로 마땅한 것이 없어서 아주 기본적인 번역서를 가지고 공부했다. 내가 앞자리에 앉은 학생에게 질문을 한다.

“칸트가 ‘순수이성비판’이라고 했을 때 그것이 무슨 의미지요? 무엇이 순수(Rheinheit)이고, 무엇이 이성(Vernunft)이고, 무엇이 비판(Kritik)을 의미하나요?” 철학과 3.4학년 대상으로 진행하는 수업이기 때문에 당연히 이런 질문을 할 수가 있다. 하지만 아직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지 학생이 다소 당황한다.

“아, 선생님. 죄송하지만 제가 그걸 알고 싶어서 이 수업에 들어온 겁니다.” 이 학생이 재치 있게 내 질문을 얼버무린다.

“물론 그렇겠지. 그래도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철학과 3.4 학년이면 이 정도는 대답할 수가 있지 않을까?”

“칸트는 혹시 결백증이 있는 것은 아닐까요? 지나치게 순수를 따지고, 원칙을 따지는 것을 보면 충분히 그런 합리적 추정을 해볼 수 있지 않을까요? 칸트는 쾨니히스베르크의 주민들이 그의 산책 시간에 맞춰 시간을 맞추었다는 일화가 있을 만큼 아주 규칙적으로 산책을 했다고 하잖아요.” 간단한 직관이지만 이런 생각을 따지고 들다 보면 얼마든지 칸트의 사상에 접근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일단 학생들에게 칸트 철학의 문제의식과 배경, 그리고 그가 시도하고자 한 사유의 혁명의 내용 같은 것을 개론적으로 설명해줄 필요가 있다. 전체에 대한 그림이 그려져야 그의 철학의 세부적인 미로를 탐색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독일 관념론의 시대를 연 칸트는 쉽게 해결되지 않는 철학적 딜레마 상황에 처해 있었다. 한편으로는 대륙의 합리론(rationalism)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영국의 경험론(empiricism)이다. 예나 지금이나 섬나라인 영국과 대륙 간에는 이질적인 흐름이 강하다. 단일 유럽 공동체(EU)를 만들어보자고 외쳤지만 결국 영국이 탈퇴한 것은 대륙과 독립적으로 유지해온 오랜 뿌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영국은 섬나라이기 때문에 상업과 해양 무역이 발달할 수밖에 없다. 거래를 하다 보면 서로 다른 거래의 관행이나 규칙 그리고 법규 등의 차이를 경험할 수밖에 없다. 이런 차이를 극복하기 위해 타협하고 조정해야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처사이다. 그리고 그런 일은 어떤 독단적인 이성보다는 경험과 상식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영국에는 일찍부터 경험주의적 전통이 발달했다. 프랜시스 베이컨이 중세의 오랜 기간 유럽인들의 사고를 지배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연역 논리를 깨고 경험 논리에 기초한 ‘노붐 오르가논’(새로운 논리)를 주장한 것도 이러한 사회·문화적 배경에 뒷받침되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반면 프랑스나 독일로 대변되는 대륙의 합리론자들은 우연적이고 상대적인 경험보다는 수학적 논증처럼 순수하고 필연적인 이성의 논리에 익숙했다. 일찍이 근대 철학의 지평을 연 데카르트가 그랬고, 그 뒤를 이은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 모두 연역 논리를 강조했다. 합리론자들은 여전히 실체니 영혼이니, 신이니 존재니 하는 전통 형이상학에서 사용하는 개념들을 쓰고 있었다. 사유하는 자아(Cogito)를 정립하면서 신을 밀어낸 데카르트에게도 신은 유한 실체인 코기토를 보증하는 무한실체이다. 실체(Substance)란 “그것이 존재하기 위해서 다른 어떤 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대륙의 합리론자들은 이런 실체에 대한 이해의 차이를 가지고 갈라진다. 가령 데카르트에게 실체는 무한실체인 신과 유한 실체인 연장(res extensa)으로서의 물질과 사유(res cogitans)로서의 정신인 3가지 실체가 있다. 스피노자는 자기 스스로 존재하는 것은 오로지 자기원인(Causa sui)이자 무한실체인 신일 뿐이고, 사유와 연장은 이 신을 표현하는 속성으로 간주한다. 스피노자 보다 다소 늦은 라이프니츠는 모나드(Monad)라는 개념을 끌어들여 다원론을 주장한다. 모나드는 우주에 무수히 많이 존재하는 실체이다. 이러한 모나드들은 창이 없지만, 우주를 반영하는데 존재 등급에 따라 하이어라키(hierachy)를 이루고 있다. 일종의 형이상학적 가설이라고 할 수 있는 합리론자들의 실체설은 존재에 대한 각기 다른 설명이 될 수는 있지만 증명이 불가능하다는 한계가 있다. 칸트는 이를 독단론(Dogmatism)이라 비판한다.

경험론자인 로크도 외계의 알 수 없는 실체 X를 말한 적이 있다. 반면 버클리는 알 수 없는 것을 왜 전제하냐고 하면서 그것을 표상하는 지각으로 환원시켜 버렸다. 여기서 “지각이 곧 존재이다.”(Esse est percipi)라는 버클리의 유명한 명제가 나왔다. 20세기 유명한 초현실주의 작가인 살바도르 달리의 작품을 보다 보면 버클리의 의식이론의 영향이 곳곳에서 보인다. 데이비드 흄은 이 실체를 아예 지각의 다발(bundle) 정도로 생각했다. 그에게 실체는 합리론자들이 주장하는 것과 달리 아무런 필연성이 없는 것이다. 합리론자들은 영혼을 하나의 불멸의 실체로 가정했지만, 데이비드 흄은 그런 불멸은 없고 단지 수많은 기능으로 역할하는 지각의 다발만 존재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흄의 이야기를 그대로 밀고 나가면 인간 영혼의 정체성 혹은 동일성을 주장하기가 어렵다. 흄의 주장은 결국 회의주의(Sceptism)로 이어지고 만다. 합리론이 ‘독단’에 빠졌다면 경험론은 뿌리치기 힘든 ‘회의’에 빠졌다. 경험론과 합리론은 서로 다른 사유 전통을 유지하고 있고, 서로 간에 대화도 거의 없었다. 칸트는 이렇게 상반된 사유의 다른 전통이 안고 있는 딜레마를 어떻게 해결하느냐를 자기 철학의 과제로 삼았던 것이다.

지금까지 설명한 경험론과 합리론의 각기 다른 모습에 대해 학생들도 수긍하는 눈치다. 내가 “이해가 됩니까?”라고 질문을 하자 ‘예. 아주 재미가 있습니다.’라고 맞장구를 친다. 그들 역시 칸트가 처한 문제 상황이 충분히 공감된 것이다. 문제 상황을 이해하면 해결 방식도 찾을 수가 있다. 많은 경우 문제를 문제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문제 상황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는 것이다.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서문에는 이에 관한 유명한 예가 설명되어 있다. 어떤 사람이 숫 염소의 젖을 짜려고 하니까 다른 사람이 그 밑에 통을 받치더라는 것이다. 숫 염소에게서 젖이 나올 리도 만무지만 그것을 모르고 그 젖을 받겠다고 통을 받치는 사람은 또 무엇인가? 많은 경우 철학적 문제들이 이런 식으로 만들어지고 있다는 것을 칸트가 풍자한 것이다. 20세기의 뛰어난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은 이런 상황을 빗대 ‘파리통 속의 파리’로 묘사한 바 있다. 부처도 인간의 실존을 고통으로 보고, 중요한 것은 어떻게 이 고통을 벗어나게 할 수 있을까를 제일의 과제로 삼았다. 그가 말한 불교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사성제(四聖諦)와 팔정도(八正道)는 고통의 원인과 처방이라 할 수 있다. 이를 바탕으로나온 연기(緣起)와 무아(無我)는 불교의 핵심 사상이다. 마찬가지로 칸트에게서도 중요한 것은 이 딜레마적인 상황을 정확히 이해하고 그것을 푸는 해결 방식이었다.


이종철(철학박사)은 『철학과 비판』(도서출판 수류화개)과 『일상이 철학이다』(모시는 사람들) 그리고 『문명의 위기를 넘어』(공저, 학지원)를 썼다. 그는 『헤겔의 정신현상학』(J. Hyppolite, 1권 공역/2권, 문예출판사), 『사회적 존재론』(G, Lukacs, 2권/4권(공역), 아카넷), 『나의 노년의 기록들』(A, Einstein, 커큐니케이션스북스)등 다수의 번역서들을 냈다. 현재는 연세대 인문학 연구소 전문 연구원이자 인터넷 신문 ‘브레이크뉴스’와 ‘내외신문’의 칼럼리스트로 활동하면서 NGO 환경단체인‘푸른 아시아’의 홍보대사를 맡고 있다.

[연재 소설] <그대에게 가는 먼 길> 1부 – 16회|6. 다시 강의실로 (1) [이종철의 에세이 철학]

16회

6. 다시 강의실로 (1)

 

다시 돌아온 대학 생활은 예전과 달리 흥미진진했다. 예전에는 울며 겨자먹기로 강의를 한 면이 없지 않았다. 하지만 대학 바깥의 생활을 경험하다가 돌아온 지금은 젊은 학생들에게 내 이야기를 마음대로 떠들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흥미로웠다. 내 시간의 대부분은 1주일 12시간이나 맡은 강의를 중심으로 돌아갔다. 이번 학기에는 내가 기획한 <논증과 비판>이 단과대 특성화 수업 3년 기한으로 채택이 됐다. 이 수업은 ‘형식 논리학’ 강의와 달리 논증(Argumentation)과 관련한 토론 수업이었다. 지금은 교수가 일방적으로 강의하던 시대를 벗어나 학생들 간에 문제를 가지고 토론 수업 형태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덕분에 과거의 이념 서클과 달리 토론 관련 학회가 학생들의 인기를 많이 끌었다. 이 토론 서클의 몇몇 학생들은 각종 형태의 토론 대회에 출전하는 경우도 있었다. 뛰어난 학생들은 전국 대회 규모의 토론 대회에서 아예 내놓고 상금 사냥하러 다니기도 했다.

나는 일찍부터 난청으로 인해 청력이 좋지 않고, 젊은 시절 흡연도 많이 해서 목소리도 좋지 않은 편이다. 그럼에도 우수한 학생들을 끌고서 논증과 토론 그리고 비판 중심의 강의를 무려 11년이나 끌어갔다. 이 강의는 2016년 내가 몽골의 H ICT 대학으로 옮겨갈 때까지 유지하다가 다른 강사에게 넘겨주었지만 2년을 넘기지 못하고 폐강되고 말았다. 강의의 전반부는 주로 응용 논리와 논증 이론을 중심으로 간략하게 이론 강의를 한 다음 후반부에서는 본격적으로 난상 토론을 유도했다. 이 수업을 통해 강의 교수인 나도 많이 배웠다. 논증을 특별히 좋아한 나 역시 이 수업을 통해 단련되었다고 할 수 있다. 내가 이 수업을 시작할 때 반드시 요구하는 것이 2 가지가 있다. 하나는 목소리 관련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기 소개서이다.

“여러분, 프리젠테이션이나 토론을 하는데 절대 필요한 것이 뭔 줄 아세요? 목소리예요. 맑고 깨끗한 목소리, 불륨이 풍부한 목소리가 중요하지요. 그래서 전문 토론가들이나 성악가들은 특별히 목소리 관련해서 훈련을 받기도 하지요. 한국의 판소리 명창들도 폭포 앞에서 목소리 훈련하는 걸 영화에서 본 적이 있지 않나요? 그런데 여러분들은 굳이 그런 곳을 갈 필요가 없어요. 그냥 나를 상대로 이야기할 때 한 톤을 높이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자연스럽게 목소리 훈련을 하게 되고, 나는 여러분들의 말을 좀 더 잘 들을 수 있지요.”

토론 수업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선생은 아마도 나를 제외하고는 없을 것이다. 학생들은 나의 이런 말을 들으면 배꼽을 잡고 웃는다.

두 번째 요구사항은 자기 소개서이다. 강의 첫 째 주는 일종의 탐색 기간이라 마음에 안 들면 다른 강의로 옮겨갈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강좌를 유지하려면 첫 주에 학생들 비위를 맞춰 줄 필요가 있다. 그런데 나는 오히려 첫 주부터 학생들에게 과제물을 요구했다. 내가 의도적으로 학생들의 수강 철회를 유도하기 위해서다. 토론 수업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학생들이 너무 많으면 곤란하다. 내 경험에 비추어 본다면 20명 안쪽이 적절하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두 번째로 요구하는 과제는 3분 동안 지속되는 자기소개서다. 이것을 통해 나는 수강생의 정보와 수업에 대한 관심도를 파악할 수가 있고, 학생들에게는 이 자기소개서를 가지고 프리젠테이션을 유도함으로써 무대에 대한 공포를 없앨 수 있다. 오랫 동안 이 강좌를 이끈 내 경험에 비추어 보면 이 자기소개서가 절대적으로 효과가 있다. 어떤 경영학과 여학생은 이로 인해 자신이 무대 공포증을 벗어났다고 하고, 나중에 로스쿨에 합격한 다른 학생은 첫 시간의 특별한 경험으로 인해 수업 내내 흥미로웠다는 이야기도 했다.

나는 이 토론 수업에서 적절히 짝을 지어 난상 토론을 유도했다. 이런 토론은 길거리 싸움과 마찬가지로 개인의 역량과 준비를 총 동원해 싸우는 것이고, 그 결과는 내가 혼자 판정하는 것이 아니라 수업에 참석한 다른 모든 학생들의 평가 점수로 결정했다. 이렇게 토론에 임하는 학생들 자신에게 모든 문제를 일임하고 다른 학생들의 토론을 진지하게 평가를 하다 보니 학생들의 토론 역량이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이 점은 나만이 아니라 학생들 스스로 인정한 결과이다. 내가 수많은 강의를 맡아 보았지만 이 <논증과 비판> 수업은 나름대로 가장 보람차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종철(철학박사)은 『철학과 비판』(도서출판 수류화개)과 『일상이 철학이다』(모시는 사람들) 그리고 『문명의 위기를 넘어』(공저, 학지원)를 썼다. 그는 『헤겔의 정신현상학』(J. Hyppolite, 1권 공역/2권, 문예출판사), 『사회적 존재론』(G, Lukacs, 2권/4권(공역), 아카넷), 『나의 노년의 기록들』(A, Einstein, 커큐니케이션스북스)등 다수의 번역서들을 냈다. 현재는 연세대 인문학 연구소 전문 연구원이자 인터넷 신문 ‘브레이크뉴스’와 ‘내외신문’의 칼럼리스트로 활동하면서 NGO 환경단체인‘푸른 아시아’의 홍보대사를 맡고 있다.

[연재 소설] <그대에게 가는 먼 길> 1부 – 15회|5. 인문학 수업 (3) [이종철의 에세이 철학]

15회

5. 인문학 수업 (3)

이제 나에게 남은 학기는 마지막 한 학기다. 하지만 졸업하기 위해서는 2학년 때 F를 받은 형법 총론 수업을 재수강해야 했다. 마음은 이미 콩밭에 가 있는 내가 그 수업을 듣는 것은 상당한 고역이었다. 당시 형법 강의는 독일에서 학위를 받고 K 대에 있다가 Y 대로 옮긴 L 교수였다. 그는 학생들에게 관심을 많이 갖고 강의도 열심히 한다고 소문이 나 있었다. 방학 때는 독일어 특강을 하기도 했다. 아무튼 제대로 강의실에 들어가지도 않은 상태에서 중간고사와 기말고사를 보는 것은 남들이 이해하지 못할 만큼 나에게는 힘든 문제였다. 예나 지금이나 나는 필이 꽂히면 만사를 제쳐 놓고 깊이 빠지지만, 관심이 떠나면 거의 돌아보지 않았다. 그래도 중간고사는 우여곡절 끝에 보았다. 그런데 마지막 기말고사는 시험공부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울며 겨자 먹기로 광복관을 향해 올라가는 도중에 고시 공부하던 후배를 만났다. 그래서 그에게 대리 시험을 부탁했다. 나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한 그가 대신 시험장에 들어간 것이다. 그런데 사고가 터졌다. 그날 밤 후배에게서 다급한 전화를 받았다.

 

“형, 큰일 났어요.” 전화기 너머로 들여오는 후배 목소리가 많이 떨리고 있었다. 

“왜 그러는데? 무슨 일이야?”

“오늘 형법 총론 시험을 대신 보다가 감독관한테 걸렸어요.”

“아니, 그게 어떻게 걸리냐?” 내가 어이없다는 듯 물었다.

“감독관으로 들어온 사람이 제가 기숙사에서 잘 아는 대학원 선배예요. 이 선배가 왜 공부 잘하는 내가 형법총론 수업을 듣느냐고 물었던 거예요. 내가 답변을 제대로 하지 못하자 이 선배가 중간고사 답안지와 필체 대조를 한 거예요. 꼼짝없이 걸린 거지요.”

다른 강의도 아니고 형법 수업을 들으면서 대리 시험을 보게 했으니 완전히 빼도 박도 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래서 어떻게 됐냐?”

“일단 L 교수님 연구실로 오라고 했어요.”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모교 선배였던 또 다른 L 교수가 부정 사실을 알고서 당장 교수회의를 열자고 설쳤다. 하지만 과목 담당인 L 교수가 일단 당사자 이야기를 들어보자고 했다고 한다.

다음 날 부리나케 후배와 함께 L 교수 방으로 찾아갔다. 어떻게 변명을 할 수도 없는 상태다. 나도 나지만 고시 공부를 열심히 하던 후배는 무슨 잘못인가? 미안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었다. 이 교수가 말을 했다.

 

“거두절미하고 두 학생 모두 자신의 잘못된 행태에 대해 반성문을 제출하게.” 딱 그 한마디뿐이었다.

 

졸업 학기를 두고 반성문을 써야 하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그래도 창피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일종의 확신 범의 신념인지 모른다. 나는 그때 나의 상황을 솔직하게 진술했다. 나의 관심은 이미 법학을 떠났다. 나는 앞으로 철학을 하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도저히 어쩔 수 없어 후배를 끌어들여 대리 시험을 보게 했다. 모든 책임은 나에게 있다. 이런 식으로 장문의 반성문을 썼다. 이런 나의 솔직한 반성문이 주효했는지 L 교수는 더 이상 대리 시험을 문제 삼지 않았다. 만약 또 다른 L 교수처럼 교수 회의를 열었더라면 어쩔 수 없이 최소 정학을 맞았을 것이고, 졸업도 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 일이 있고 나서 훨씬 나중에 L 교수를 교내 화장실에서 한 번 뵌 적이 있다. 그때 L 교수는 “철학 공부 재밌어?”라고 관심을 보였다. 두고 두고 고마운 분이다. 나는 이 일을 경험하면서 어떤 사건이 벌어졌을 때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지혜로운가를 배운 셈이다. L 교수는 당신이 구제한 학생이 먼 미래에 한국의 철학계에서 빛을 발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던 것이다.

졸업을 앞두고 대리 시험까지 보게 했지만, 참으로 나의 대학 생활은 험난했다. 1학년 때 당구에 빠져서 성적 불량으로 한 학년 유급하고, 그 이후로도 쌍권총을 수도 없이 찼다. 내가 지금 생각해도 왜 그렇게 무모하게 행동했는지 전혀 이해하기가 어려울 정도다. 나의 행동은 너무나 상식을 벗어나 있었다. 그 당시 ‘경제원론’이 정법대 필수 과목이었는데, 내가 이 과목을 무려 3번이나 F를 받았다. 대학 1학년 1학기 때 정법대 학생 전체가 나중에 총장이 된 J 교수에게 ‘경제원론’ 수업을 들었다. 상대 대형 강의실에서 그 수업을 들었는데 처음에는 인상적인 J 교수의 수업을 열심히 듣긴 했다. 그런데 1교시 수업을 듣기도 힘들고, 그 수업이 끝나자마자 상경대 뒷편에 있는 종합관에서 법학통론 수업을 듣고, 그것이 끝나면 다시 언덕을 한 참 걸어 올라가 엘리베이터도 없는 종합관 5층에서 영어 수업을 들어야 했다. 몸이 불편한 내가 도저히 10분 안에 걸어서 이동하기 힘들어 수업을 자주 빼먹었다. 결국 J 교수에게 F를 받았고, 그다음 해에는 당시 유명한 경제 사학자인 C 교수의 수업을 들었다. 그때만 해도 이분이 그렇게 대단한 교수라는 것을 전혀 몰랐다. C 교수는 수업 시간에 자신이 쓴 문고판 『한국경제사』를 가지고 리포트를 내주었다. 하지만 나는 이 리포트를 제출하지 않아서 F를 맞았다. 세 번 째는 노동 경제학을 하던 K 교수의 수업을 들었다. 그런데 기말고사를 볼 때 내가 모르고 시험 시간이 끝날 때쯤 시험 장소로 들어간 것이다. 얼마나 시험 보기 싫었으면 시험 시간까지 잊었을까? 그것도 세 번 씩이나 재수강하는 수업을 말이다. 내가 원래 공간에 대한 지각 능력은 떨어져도 시간관념은 철저한 편이다. 그런데 한 시간 늦게 들어갔으니 변명하기도 힘들었다. 김 교수가 자기 연구실로 따라오라고 해서 그 연구실 안의 교수 옆에서 시험을 보았다. 당시 나는 시험공부보다는 컨닝 페이퍼만 잔뜩 준비해갔는데 도저히 사용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교수에게 리포트로 대신하면 안 되겠냐고 물었지만 교수는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어, 그래? 그럼 F지. 시험지 두고 그냥 나가게.”

 

변명할 것도 없이 또 F를 받은 것이다. 도대체 어떻게 한 과목을 세 번씩이나 F를 받을 수 있을까? 내가 경제학을 싫어한 사람도 아닌데 경제원론 한 과목에서 무려 세 번을 F 받았으니 내가 생각하기에도 어이가 없다. 내가 나 자신을 믿을 수가 없을 정도다. 아마도 이런 경우는 전무후무할 것이다. 어쨌든 나는 경제학과의 세 교수한테 한 마디로 돌림 빵을 당한 셈이라 할 수 있는데, 물론 모두가 나의 책임이었다. 운 좋게 졸업 학기 때 경제원론이 선택으로 바뀌는 바람에 간신히 졸업할 수가 있었다. 내가 대학 생활을 이런 상태로 보낸 것은 한편으로 최악의 경우라고 할 수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 당시 나에게는 길들여지지 않는 야성이 충만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누구에게도 그리고 어떤 규칙도 내가 원하지 않으면 따르지 않겠다는 고집 말이다. 하지만 이런 성적표를 가지고 내가 법대에서 생존한다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 마냥 힘들었고, 나 자신을 부적응자로 낙인찍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나중에 철학과 대학원에 가보니까 나 못지않게 권총을 많이 찬 동기가 있었다. 그는 훨씬 뒤 독일에서 학위를 받은 다음 교수 임용 면접 시험에서 권총이 너무 많아 불가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그가 칸트 철학자로 유명한 김봉한이다. 타과에서는 흠집이 되는 것이 철학과에서는 인정될 수 있는 낭만적 시대였다.


이종철(철학박사)은 『철학과 비판』(도서출판 수류화개)과 『일상이 철학이다』(모시는 사람들) 그리고 『문명의 위기를 넘어』(공저, 학지원)를 썼다. 그는 『헤겔의 정신현상학』(J. Hyppolite, 1권 공역/2권, 문예출판사), 『사회적 존재론』(G, Lukacs, 2권/4권(공역), 아카넷), 『나의 노년의 기록들』(A, Einstein, 커큐니케이션스북스)등 다수의 번역서들을 냈다. 현재는 연세대 인문학 연구소 전문 연구원이자 인터넷 신문 ‘브레이크뉴스’와 ‘내외신문’의 칼럼리스트로 활동하면서 NGO 환경단체인‘푸른 아시아’의 홍보대사를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