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소설] <그대에게 가는 먼 길> 1부 – 17회|6. 다시 강의실로 (2) [이종철의 에세이 철학]

17회

       6. 다시 강의실로 (2)

 

3, 4학년을 대상으로 하는 전공 강의인 칸트 수업 역시 내가 공을 많이 들였다. 이 수업은 지방의 소도시에서 진행이 되었지만 나는 1주일에 한 번씩 여행하는 기분으로 다녔다. 두세 번의 수업을 통해 강의의 대략적 틀을 잡았고, 이번 주부터는 본격적으로 칸트 철학의 내용을 다루게 될 것이다. 서울에서 내려오는 학생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이 도시에서 자취를 한다.

칸트 철학은 근대 철학에서 대단히 중요한 철학자다. 그의 철학은 하나의 거대한 호수로 비유되기도 한다. 그 이전의 철학이 그의 철학으로 몰려들고, 그 이후의 철학은 그로부터 흘러나가는 호수의 이미지에 그의 철학이 딱 어울린다. 칸트의 철학으로부터 철학은 본격적으로 아카데미권에 정착을 한다. 그 이전의 철학은 아마추어들의 철학, 거리의 철학, 살롱의 철학이었지만, 칸트의 철학은 비로소 프로의 철학이 무엇이고, 그것을 어떻게 체계화시킬 수 있는 가를 보여주었다. 그런 의미에서 철학을 공부하겠다고 마음을 먹은 학생이라면 높고 험한 산을 등정하듯 칸트의 철학과 대결을 해야 한다. 근대를 경험한 지금 칸트 철학은 저 근대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철학 중의 하나이다.

두 차례 정도 지나고 보니까 이제 나의 칸트 강의에 학생들이 점점 몰입하는 느낌이 느껴진다. 강의하다 보면 느낌과 시선이 몸에 와 닿는 순간을 경험한다. 학생들 책상 위에는 백종현 선생이 번역한 하늘색 바탕의 하얀색 장정으로 만들어진 두툼한 『순수이성비판』 한글 번역본이 올라와 있고, 이 『순수이성비판』 해설서로 잘 알려진 고트프리드 회페의 번역본을 올려놓은 학생도 보인다. 20년 전 우리가 칸트 철학을 공부할 때는 활자가 빽빽한 최재희 선생의 번역본을 사용했고, 해설서도 별로 마땅한 것이 없어서 아주 기본적인 번역서를 가지고 공부했다. 내가 앞자리에 앉은 학생에게 질문을 한다.

“칸트가 ‘순수이성비판’이라고 했을 때 그것이 무슨 의미지요? 무엇이 순수(Rheinheit)이고, 무엇이 이성(Vernunft)이고, 무엇이 비판(Kritik)을 의미하나요?” 철학과 3.4학년 대상으로 진행하는 수업이기 때문에 당연히 이런 질문을 할 수가 있다. 하지만 아직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지 학생이 다소 당황한다.

“아, 선생님. 죄송하지만 제가 그걸 알고 싶어서 이 수업에 들어온 겁니다.” 이 학생이 재치 있게 내 질문을 얼버무린다.

“물론 그렇겠지. 그래도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철학과 3.4 학년이면 이 정도는 대답할 수가 있지 않을까?”

“칸트는 혹시 결백증이 있는 것은 아닐까요? 지나치게 순수를 따지고, 원칙을 따지는 것을 보면 충분히 그런 합리적 추정을 해볼 수 있지 않을까요? 칸트는 쾨니히스베르크의 주민들이 그의 산책 시간에 맞춰 시간을 맞추었다는 일화가 있을 만큼 아주 규칙적으로 산책을 했다고 하잖아요.” 간단한 직관이지만 이런 생각을 따지고 들다 보면 얼마든지 칸트의 사상에 접근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일단 학생들에게 칸트 철학의 문제의식과 배경, 그리고 그가 시도하고자 한 사유의 혁명의 내용 같은 것을 개론적으로 설명해줄 필요가 있다. 전체에 대한 그림이 그려져야 그의 철학의 세부적인 미로를 탐색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독일 관념론의 시대를 연 칸트는 쉽게 해결되지 않는 철학적 딜레마 상황에 처해 있었다. 한편으로는 대륙의 합리론(rationalism)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영국의 경험론(empiricism)이다. 예나 지금이나 섬나라인 영국과 대륙 간에는 이질적인 흐름이 강하다. 단일 유럽 공동체(EU)를 만들어보자고 외쳤지만 결국 영국이 탈퇴한 것은 대륙과 독립적으로 유지해온 오랜 뿌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영국은 섬나라이기 때문에 상업과 해양 무역이 발달할 수밖에 없다. 거래를 하다 보면 서로 다른 거래의 관행이나 규칙 그리고 법규 등의 차이를 경험할 수밖에 없다. 이런 차이를 극복하기 위해 타협하고 조정해야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처사이다. 그리고 그런 일은 어떤 독단적인 이성보다는 경험과 상식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영국에는 일찍부터 경험주의적 전통이 발달했다. 프랜시스 베이컨이 중세의 오랜 기간 유럽인들의 사고를 지배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연역 논리를 깨고 경험 논리에 기초한 ‘노붐 오르가논’(새로운 논리)를 주장한 것도 이러한 사회·문화적 배경에 뒷받침되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반면 프랑스나 독일로 대변되는 대륙의 합리론자들은 우연적이고 상대적인 경험보다는 수학적 논증처럼 순수하고 필연적인 이성의 논리에 익숙했다. 일찍이 근대 철학의 지평을 연 데카르트가 그랬고, 그 뒤를 이은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 모두 연역 논리를 강조했다. 합리론자들은 여전히 실체니 영혼이니, 신이니 존재니 하는 전통 형이상학에서 사용하는 개념들을 쓰고 있었다. 사유하는 자아(Cogito)를 정립하면서 신을 밀어낸 데카르트에게도 신은 유한 실체인 코기토를 보증하는 무한실체이다. 실체(Substance)란 “그것이 존재하기 위해서 다른 어떤 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대륙의 합리론자들은 이런 실체에 대한 이해의 차이를 가지고 갈라진다. 가령 데카르트에게 실체는 무한실체인 신과 유한 실체인 연장(res extensa)으로서의 물질과 사유(res cogitans)로서의 정신인 3가지 실체가 있다. 스피노자는 자기 스스로 존재하는 것은 오로지 자기원인(Causa sui)이자 무한실체인 신일 뿐이고, 사유와 연장은 이 신을 표현하는 속성으로 간주한다. 스피노자 보다 다소 늦은 라이프니츠는 모나드(Monad)라는 개념을 끌어들여 다원론을 주장한다. 모나드는 우주에 무수히 많이 존재하는 실체이다. 이러한 모나드들은 창이 없지만, 우주를 반영하는데 존재 등급에 따라 하이어라키(hierachy)를 이루고 있다. 일종의 형이상학적 가설이라고 할 수 있는 합리론자들의 실체설은 존재에 대한 각기 다른 설명이 될 수는 있지만 증명이 불가능하다는 한계가 있다. 칸트는 이를 독단론(Dogmatism)이라 비판한다.

경험론자인 로크도 외계의 알 수 없는 실체 X를 말한 적이 있다. 반면 버클리는 알 수 없는 것을 왜 전제하냐고 하면서 그것을 표상하는 지각으로 환원시켜 버렸다. 여기서 “지각이 곧 존재이다.”(Esse est percipi)라는 버클리의 유명한 명제가 나왔다. 20세기 유명한 초현실주의 작가인 살바도르 달리의 작품을 보다 보면 버클리의 의식이론의 영향이 곳곳에서 보인다. 데이비드 흄은 이 실체를 아예 지각의 다발(bundle) 정도로 생각했다. 그에게 실체는 합리론자들이 주장하는 것과 달리 아무런 필연성이 없는 것이다. 합리론자들은 영혼을 하나의 불멸의 실체로 가정했지만, 데이비드 흄은 그런 불멸은 없고 단지 수많은 기능으로 역할하는 지각의 다발만 존재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흄의 이야기를 그대로 밀고 나가면 인간 영혼의 정체성 혹은 동일성을 주장하기가 어렵다. 흄의 주장은 결국 회의주의(Sceptism)로 이어지고 만다. 합리론이 ‘독단’에 빠졌다면 경험론은 뿌리치기 힘든 ‘회의’에 빠졌다. 경험론과 합리론은 서로 다른 사유 전통을 유지하고 있고, 서로 간에 대화도 거의 없었다. 칸트는 이렇게 상반된 사유의 다른 전통이 안고 있는 딜레마를 어떻게 해결하느냐를 자기 철학의 과제로 삼았던 것이다.

지금까지 설명한 경험론과 합리론의 각기 다른 모습에 대해 학생들도 수긍하는 눈치다. 내가 “이해가 됩니까?”라고 질문을 하자 ‘예. 아주 재미가 있습니다.’라고 맞장구를 친다. 그들 역시 칸트가 처한 문제 상황이 충분히 공감된 것이다. 문제 상황을 이해하면 해결 방식도 찾을 수가 있다. 많은 경우 문제를 문제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문제 상황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는 것이다.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서문에는 이에 관한 유명한 예가 설명되어 있다. 어떤 사람이 숫 염소의 젖을 짜려고 하니까 다른 사람이 그 밑에 통을 받치더라는 것이다. 숫 염소에게서 젖이 나올 리도 만무지만 그것을 모르고 그 젖을 받겠다고 통을 받치는 사람은 또 무엇인가? 많은 경우 철학적 문제들이 이런 식으로 만들어지고 있다는 것을 칸트가 풍자한 것이다. 20세기의 뛰어난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은 이런 상황을 빗대 ‘파리통 속의 파리’로 묘사한 바 있다. 부처도 인간의 실존을 고통으로 보고, 중요한 것은 어떻게 이 고통을 벗어나게 할 수 있을까를 제일의 과제로 삼았다. 그가 말한 불교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사성제(四聖諦)와 팔정도(八正道)는 고통의 원인과 처방이라 할 수 있다. 이를 바탕으로나온 연기(緣起)와 무아(無我)는 불교의 핵심 사상이다. 마찬가지로 칸트에게서도 중요한 것은 이 딜레마적인 상황을 정확히 이해하고 그것을 푸는 해결 방식이었다.


이종철(철학박사)은 『철학과 비판』(도서출판 수류화개)과 『일상이 철학이다』(모시는 사람들) 그리고 『문명의 위기를 넘어』(공저, 학지원)를 썼다. 그는 『헤겔의 정신현상학』(J. Hyppolite, 1권 공역/2권, 문예출판사), 『사회적 존재론』(G, Lukacs, 2권/4권(공역), 아카넷), 『나의 노년의 기록들』(A, Einstein, 커큐니케이션스북스)등 다수의 번역서들을 냈다. 현재는 연세대 인문학 연구소 전문 연구원이자 인터넷 신문 ‘브레이크뉴스’와 ‘내외신문’의 칼럼리스트로 활동하면서 NGO 환경단체인‘푸른 아시아’의 홍보대사를 맡고 있다.

[연재 소설] <그대에게 가는 먼 길> 1부 – 16회|6. 다시 강의실로 (1) [이종철의 에세이 철학]

16회

6. 다시 강의실로 (1)

 

다시 돌아온 대학 생활은 예전과 달리 흥미진진했다. 예전에는 울며 겨자먹기로 강의를 한 면이 없지 않았다. 하지만 대학 바깥의 생활을 경험하다가 돌아온 지금은 젊은 학생들에게 내 이야기를 마음대로 떠들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흥미로웠다. 내 시간의 대부분은 1주일 12시간이나 맡은 강의를 중심으로 돌아갔다. 이번 학기에는 내가 기획한 <논증과 비판>이 단과대 특성화 수업 3년 기한으로 채택이 됐다. 이 수업은 ‘형식 논리학’ 강의와 달리 논증(Argumentation)과 관련한 토론 수업이었다. 지금은 교수가 일방적으로 강의하던 시대를 벗어나 학생들 간에 문제를 가지고 토론 수업 형태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덕분에 과거의 이념 서클과 달리 토론 관련 학회가 학생들의 인기를 많이 끌었다. 이 토론 서클의 몇몇 학생들은 각종 형태의 토론 대회에 출전하는 경우도 있었다. 뛰어난 학생들은 전국 대회 규모의 토론 대회에서 아예 내놓고 상금 사냥하러 다니기도 했다.

나는 일찍부터 난청으로 인해 청력이 좋지 않고, 젊은 시절 흡연도 많이 해서 목소리도 좋지 않은 편이다. 그럼에도 우수한 학생들을 끌고서 논증과 토론 그리고 비판 중심의 강의를 무려 11년이나 끌어갔다. 이 강의는 2016년 내가 몽골의 H ICT 대학으로 옮겨갈 때까지 유지하다가 다른 강사에게 넘겨주었지만 2년을 넘기지 못하고 폐강되고 말았다. 강의의 전반부는 주로 응용 논리와 논증 이론을 중심으로 간략하게 이론 강의를 한 다음 후반부에서는 본격적으로 난상 토론을 유도했다. 이 수업을 통해 강의 교수인 나도 많이 배웠다. 논증을 특별히 좋아한 나 역시 이 수업을 통해 단련되었다고 할 수 있다. 내가 이 수업을 시작할 때 반드시 요구하는 것이 2 가지가 있다. 하나는 목소리 관련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기 소개서이다.

“여러분, 프리젠테이션이나 토론을 하는데 절대 필요한 것이 뭔 줄 아세요? 목소리예요. 맑고 깨끗한 목소리, 불륨이 풍부한 목소리가 중요하지요. 그래서 전문 토론가들이나 성악가들은 특별히 목소리 관련해서 훈련을 받기도 하지요. 한국의 판소리 명창들도 폭포 앞에서 목소리 훈련하는 걸 영화에서 본 적이 있지 않나요? 그런데 여러분들은 굳이 그런 곳을 갈 필요가 없어요. 그냥 나를 상대로 이야기할 때 한 톤을 높이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자연스럽게 목소리 훈련을 하게 되고, 나는 여러분들의 말을 좀 더 잘 들을 수 있지요.”

토론 수업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선생은 아마도 나를 제외하고는 없을 것이다. 학생들은 나의 이런 말을 들으면 배꼽을 잡고 웃는다.

두 번째 요구사항은 자기 소개서이다. 강의 첫 째 주는 일종의 탐색 기간이라 마음에 안 들면 다른 강의로 옮겨갈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강좌를 유지하려면 첫 주에 학생들 비위를 맞춰 줄 필요가 있다. 그런데 나는 오히려 첫 주부터 학생들에게 과제물을 요구했다. 내가 의도적으로 학생들의 수강 철회를 유도하기 위해서다. 토론 수업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학생들이 너무 많으면 곤란하다. 내 경험에 비추어 본다면 20명 안쪽이 적절하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두 번째로 요구하는 과제는 3분 동안 지속되는 자기소개서다. 이것을 통해 나는 수강생의 정보와 수업에 대한 관심도를 파악할 수가 있고, 학생들에게는 이 자기소개서를 가지고 프리젠테이션을 유도함으로써 무대에 대한 공포를 없앨 수 있다. 오랫 동안 이 강좌를 이끈 내 경험에 비추어 보면 이 자기소개서가 절대적으로 효과가 있다. 어떤 경영학과 여학생은 이로 인해 자신이 무대 공포증을 벗어났다고 하고, 나중에 로스쿨에 합격한 다른 학생은 첫 시간의 특별한 경험으로 인해 수업 내내 흥미로웠다는 이야기도 했다.

나는 이 토론 수업에서 적절히 짝을 지어 난상 토론을 유도했다. 이런 토론은 길거리 싸움과 마찬가지로 개인의 역량과 준비를 총 동원해 싸우는 것이고, 그 결과는 내가 혼자 판정하는 것이 아니라 수업에 참석한 다른 모든 학생들의 평가 점수로 결정했다. 이렇게 토론에 임하는 학생들 자신에게 모든 문제를 일임하고 다른 학생들의 토론을 진지하게 평가를 하다 보니 학생들의 토론 역량이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이 점은 나만이 아니라 학생들 스스로 인정한 결과이다. 내가 수많은 강의를 맡아 보았지만 이 <논증과 비판> 수업은 나름대로 가장 보람차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종철(철학박사)은 『철학과 비판』(도서출판 수류화개)과 『일상이 철학이다』(모시는 사람들) 그리고 『문명의 위기를 넘어』(공저, 학지원)를 썼다. 그는 『헤겔의 정신현상학』(J. Hyppolite, 1권 공역/2권, 문예출판사), 『사회적 존재론』(G, Lukacs, 2권/4권(공역), 아카넷), 『나의 노년의 기록들』(A, Einstein, 커큐니케이션스북스)등 다수의 번역서들을 냈다. 현재는 연세대 인문학 연구소 전문 연구원이자 인터넷 신문 ‘브레이크뉴스’와 ‘내외신문’의 칼럼리스트로 활동하면서 NGO 환경단체인‘푸른 아시아’의 홍보대사를 맡고 있다.

[연재 소설] <그대에게 가는 먼 길> 1부 – 14회|5. 인문학 수업 (2) [이종철의 에세이 철학]

14회

5. 인문학 수업 (2)

 

E 여대 철학과 교수인 J 교수의 인식론 강의는 대단히 흥미로웠다. J 교수는 인식 이론에 관한 일반 강의를 한 것이 아니다. 그는 매시간 간단한 명제를 제시하고 그것에 관해 A4 용지 한 장 정도로 학생들이 답변서를 써오도록 했다. 그리고 학생들 답변서를 읽으면서 함께 이야기하는 것으로 수업 시간을 채웠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완전히 토론식 수업이라고 할 수 있다. J 교수가 첫 시간에 내준 숙제는 “자살로서 복수를 할 수 있는가?”였다. 이에 관해서 찬반으로 답변을 쓰면 된다. 나는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했다. 복수는 그것을 지켜볼 주체가 있어야 하는 데 자살한 이후에는 전혀 볼 수가 없기 때문에 복수는 불가능하다는 논지를 적은 것이다. 그런데 정교수는 이것을 보고 ‘Excellent!’라고 점수를 주었다. 내가 이 떡밥을 물고서 생각한 바가 있다. “아, 나는 정말 철학이 맞는 거 같아.” 나중에 학위를 받고 우연히 학회에서 J 교수를 만나 이 이야기를 했더니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거진 30년 전의 일이라 기억을 못하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하지만 그때 J 교수가 이끈 수업은 내가 철학의 문제의식을 탐구하는 데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

문과대에서 수업을 들으면서 인문학에 관심갖는다는 것이 매우 흥미로웠다. 문사철과 같은 학문들이 나의 관심과 체질에도 맞는 느낌이다. 문과대를 드나들면서 문과대의 전형적인 친구들과 많이 어울리기도 했다. 그들과 술도 많이 마시고 토론도 많이 하면서 분과대 분위기에 서서히 적응해 들어갔다. 하지만 나는 진로와 관련해 결정해야 할 일이 남아 있었다. 무엇보다 계속 공부하려면 대학원에 진학을 해야 한다. 일단 전공과 관련해서도 사회학과 대학원에 진학할 것인가, 아니면 점점 흥미를 갖게 된 철학과 대학원에 진학할 것인가를 결정해야 한다. 내가 집에서 대학원 학비를 보조받는 것은 현실적으로 힘들다. 그런 상태에서 대학원 입학 시험에 합격한다하더라도 어떻게 입학금과 등록금을 마련할 수 있을까가 걱정이었다.

1982년에 접어들자 대학가는 연일 데모가 일어났고, 대학가나 그 주변은 매캐한 체루 가스로 숨쉬기조차 힘들었다. 등교를 할 때는 마스크를 쓴 학생들이 호신용 무기를 들고 교문에서 짭새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고 있었다. 대학은 이제 매일같이 전투를 치르는 전장(戰場)과도 같았다. 학생들의 마음도 점점 피폐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무장한 짭새들이 최루탄을 터트리면서 학교로 밀고 들어오고, 그것을 막기 위해 돌팔매질을 할 때는 전쟁이 따로 없었다. 매일 그런 전투에 임하는 사람들에게 정상적인 심리 상태를 요구한다는 것은 무리일지 모른다. 강의는 수시로 휴강이 이루어져서 한 학기 제대로 수업을 한 기억이 요원할 정도다. 그 와중에 마음에 맞는 친구들끼리 모여 스타디하는 것이 유행이었다. 당시 세미나는 학생들의 일상적인 공부 방식이었다. 70년대에는 주로 학내 이념 서클에서 진행되었던 세미나가 80년 대는 대부분의 학생들의 일상적인 공부 방식이었다. 80년대의 의식화 작업은 이렇게 선후배 동료 간에 이루어지는 세미나를 통해서 이루어졌다. 끊임없이 전투에 임할 전사를 배출하는 독특한 방식이었다. 한국의 70-80년대의 학습 방식은 세계의 투쟁사에서도 귀감이라 할 수 있을 정도였다.

당시 학생들의 학습에 대한 욕구는 대단했다. 워낙 책이 없었던 시대라 책에 대한 욕구도 컸다. 어쩌다 용돈이라도 생기면 바로 서점으로 달려가 평소 읽고 싶었던 책을 구입하곤 했다. 집의 책장에 책이 한 권 두 권 쌓이는 것을 보는 것도 낙이었고 자부심도 컸다. 그 당시는 단순히 욕구가 아니라 문제의식도 컸다. 왜 우리가 이렇게 살아야 하나, 왜 우리는 인간으로서의 보편적 권리인 자유를 제대로 누리지 못하는가, 왜 한국 사회는 이 모양 이 꼴인가, 이런 현실을 바꾸기 위해 대학생인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 등으로 대단히 현실적인 문제의식들이다. 물론 이런 시대 현실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노는 데 열중하는 낭만파나 아니면 출세가 보장된 고시 공부에 몰두하는 고시파들도 있었다. 이도 저도 아닌 학생들은 회색분자로 치부되곤 했지만, 그들 역시 시대 문제로 인해 마음고생을 많이 했다. 그 당시 치열한 대학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목숨을 끊는 경우도 많았다. 한 마디로 요즘 학생들이 전혀 경험하지 못하고 공감하기도 힘든 대학 생활이었다. 단순 비교가 쉽지 않겠지만, 그 시대의 젊은이들에 비하면 요즘 학생들은 너무 나약하고 무책임한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이종철(철학박사)은 『철학과 비판』(도서출판 수류화개)과 『일상이 철학이다』(모시는 사람들) 그리고 『문명의 위기를 넘어』(공저, 학지원)를 썼다. 그는 『헤겔의 정신현상학』(J. Hyppolite, 1권 공역/2권, 문예출판사), 『사회적 존재론』(G, Lukacs, 2권/4권(공역), 아카넷), 『나의 노년의 기록들』(A, Einstein, 커큐니케이션스북스)등 다수의 번역서들을 냈다. 현재는 연세대 인문학 연구소 전문 연구원이자 인터넷 신문 ‘브레이크뉴스’와 ‘내외신문’의 칼럼리스트로 활동하면서 NGO 환경단체인‘푸른 아시아’의 홍보대사를 맡고 있다.

[연재 소설] <그대에게 가는 먼 길> 1부 – 13회|5. 인문학 수업 (1) [이종철의 에세이 철학]

13회

5. 인문학 수업 (1)

 

암자에 들어온 지 한 달이 다 되어가고 방학도 끝나가기 때문에 나는 다시 서울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오랫동안 수염을 깍지 않아서 턱수염이 많이 자랐다. 산에서 있다 보니 다소 거친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서울로 올라가는 기차 간에서 다소 달라진 나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서울로 복귀하자마자 2학기 등록을 마치고 수강 신청할 때 나는 법대 과목 보다는 주로 문과대와 신과대 과목으로 수강표를 짰다. 이제 심적으로도 법대와는 완전히 결별했다. 문과대에서는 영문과의 O 교수의 햄릿 강의를 신청했고, 사학과의 K 교수의 농업 경제사 강의도 신청을 했다. 사회학과에는 당시 새로 부임한 J 교수 수업을 신청했다. J 교수는 오랫동안 미국에서 교수 생활을 했고, 종교 사회학자로서 미국 대학 내 지명도가 높았다. 철학과 과목도 하나 신청했다. 철학과에서는 P 교수가 안식년이기 때문에 이화여대의 J 교수가 대신 강의하는 인식론 수업을 들었다. 그리고 신과대의 유명한 H 교수 강의는 그 이후로도 한 3학기 정도 들을 정도로 열심히 수강했다. 외부에는 많이 알려져 있지 않지만 H 교수는 Y대가 자랑하는 천재였다. H 교수는 원래 교회사 전공이지만 다양한 분야에 대한 해박한 사고와 복잡한 문제들을 구조적으로 도식화하는 뛰어난 재주를 가졌다. 항상 만면에 웃음기가 돌면서 거침없는 입담으로 강의하던 H 교수의 수업을 제대로 이해는 못했어도 지적으로 많은 자극을 받을 수 있어서 좋아했다.

문과대에서 수업을 들을 때는 참으로 행복한 느낌이 들었다. 내가 정법대 4년을 다니면서 전혀 느껴보지 못했던 경험이다. 유일하게 정치학과의 L 교수 강의를 들을 때 한 번 경험했을 뿐이다. 긴 머리를 뒤로 넘기는 오드리 햅번 흉내를 내면서 “권력은 도취적이다.”(Power is intoxical, Acton경)이라고 외치던 L 교수의 정치학 강의가 그나마 나의 지적 욕구를 채워 주었을 뿐이다. 그 당시 법대 교수들은 각기 그 분야에서 이름을 날리던 교수들이었지만 내가 워낙 법대 과목에 흥미를 느끼지 못해서 수업을 제대로 듣지 않았다. 반면 문과대에서 수업을 들을 때는 상황이 달랐다. 지금은 행정관으로 바뀐 낡은 문과대 건물은 대부분 소강의실로 이루어져 있다. 기껏해야 열 댓 명 정도 들어갈 수 있을 뿐이다. 덕분에 선생과 학생들 간의 공간적 거리가 가깝고, 학생들 상호 간에도 유대가 적지 않았다. 그 공간에는 대학의 낭만이 가득 차 있었다. 이런 좋은 인문적 공간을 행정 공간으로 바꾸어 버린 인간들이 지금 대학을 운영하고 있으니 대학이 기업화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이곳에서 나는 문과대의 유명 교수들의 강의를 들었다. 앞서 언급한 사학과의 K 교수는 선비풍의 조용한 용모와 다르게 강의는 대단히 열정적으로 했다. 조선에도 자본주의 맹아가 싹트고 있었다는 것을 유물사관에 입각해 설명하던 모습이 대단히 인상적이었다. 나에게는 K 교수가 학생들의 수많은 질문에 대해 일일이 답변해주는 친절한 면모도 인상적이었다. 국문과에서는 당시 강사로 출강하던 『오발탄』의 작가 이범선이 ‘창작론’을 강의했다. 당시 나는 창작에 내가 전혀 소질이 없다고 생각해서 중도에 포기했는데 두고두고 후회했다. 사회학과에 새로 부임한 J 교수의 수업도 열심히 들었다. 그는 1973년에 출간된 미국 사회학자 다니엘 벨의 The Coming of Post-Industrial Society 1973 을 교재로 삼아 강의했다. 지금은 다니엘 벨의 이론이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여 지지만 당시 한국은 산업화 단계에 들어선 지 얼마 되지 않았고, 그 단계에서 벌어지는 독재와 자유, 인권과 같은 가치들을 둘러싸고 갈등이 첨예한 사회였다. 특히 1980년도에 일어난 광주사태는 많은 대학생들에게 트라우마처럼 작용했다. 반면 테크놀로지의 환상을 자극하는 후기 산업 사회 이론은 우리 현실과 너무나 동떨어진 것 같아서 수업 시간 내내 그 선생하고 설전을 많이 벌였다. 돌이켜 보면 미국에서도 지명도가 높은 대학자에게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까불었다는 생각도 들겠지만, 그 당시 나를 위시한 학부생들의 문제의식은 대단했다고 할 것이다. 이 책은 산업 사회에서 후기 산업 사회로 넘어가는 사회 발전론을 설명하고, 지식과 기술이 후기 산업 사회의 계급 구조를 형성하는 데 큰 역할을 한다고 기술했다. 더 나아가서 이런 현상들을 설명할 수 있는 사회학적 개념과 사회 계획에 관심을 가지고, 궁극에는 누가 후기 산업 사회를 지배할 것인가라는, 지금 보면 대단히 상식적일 만큼 당시 상황을 기술하고 도래할 미래를 전망한 책이다. 하지만 그 당시 나에게 그 책은 버터 냄새가 물씬 풍기는 양키들 이론 정도로 뿐이 보이지 않았다.

“선생님, 그 책이 한국 현실과 너무 동떨어진 것은 아닐까요? 왜 우리가 이책을 가지고 공부를 해야 하는 지 도통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남이 차려 놓은 상에 앉아서 감놔라 배놔라 하는 당돌한 형국이다. 이런 도전적인 자세를 보고 J교수는 혀를 끌끌 찬다. 이건 완전히 우물 안 개구리 같은 쇼비니스트의 행태가 아닌가라고 생각했을 지도 모를 일이다.

“이 책의 내용은 선진국 미국에서 대단히 호평을 받고 있어요. 산업 사회의 현실과 도래할 탈 산업 사회에 대한 전망에서 이 책만한 분석이 없지요. 지금 있는 현실만이 아니라 사회 발전의 전망에서 앞으로 다가올 사회에 대해 연구하는 이론도 중요하지요.”

“하지만 선생님 말씀과 달리 현실 적합성이 없다고 한다면 한낱 공염불이 아닐까요? 한국의 현실을 보세요. 한국은 1960년대 세계 최빈국의 상황을 벗어나 수출 입국에 돌입하면서 저임금 과노동으로 엄청 시달리고 있지요. 가까운 구로 공단에 한 번 가보세요. 후기 산업 사회라는 것이 얼마나 뜬구름 잡는 환상이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을 겁니다. 한국은 유신 독재를 거치면서 표현의 자유를 완전히 박탈당했고, 80년대에 들어오자마자 광주에서 무장한 군인들에 의해 수많은 시민들이 학살당한 경험도 안고 있습니다. 이런 한국적 현실에서 명색이 사회학을 한다고 하면서 선진이론이라는 명목으로 엉뚱한 이야기만 늘어놓는다면 과연 그게 설득력이 있을까요?”

나의 당돌한 이야기에 많은 학생들이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J 교수도 이 상황을 숙지하고 있었고, 이런 나를 꺽어 놓지 않으면 수업 시간 내내 시달릴지 모른다고 예감을 했을 것이다.


이종철(철학박사)은 『철학과 비판』(도서출판 수류화개)과 『일상이 철학이다』(모시는 사람들) 그리고 『문명의 위기를 넘어』(공저, 학지원)를 썼다. 그는 『헤겔의 정신현상학』(J. Hyppolite, 1권 공역/2권, 문예출판사), 『사회적 존재론』(G, Lukacs, 2권/4권(공역), 아카넷), 『나의 노년의 기록들』(A, Einstein, 커큐니케이션스북스)등 다수의 번역서들을 냈다. 현재는 연세대 인문학 연구소 전문 연구원이자 인터넷 신문 ‘브레이크뉴스’와 ‘내외신문’의 칼럼리스트로 활동하면서 NGO 환경단체인‘푸른 아시아’의 홍보대사를 맡고 있다.

[연재 소설] <그대에게 가는 먼 길> 1부 – 12회|4. 선택과 탐색 (4) [이종철의 에세이 철학]

12회

  1. 선택과 탐색 (4)

 

“그러나 당신이 갈구하는 사랑이 무엇이오? 나의 가슴을 안타깝게 하는 것은 당신이 찾고 있는 그 사랑의 샘의 내용물이오. 당신은 정녕 진실한 사랑을 찾는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순수한 사랑이 아니오. 내 눈에 비치는 것은 감각적이며 말초적인 언어의 유희에 당신의 순수한 혼을 흥정하고 있는 것이나 다를 바 없소. 왜 사랑을 세속적인 가치에 팔아 버리려고 하오? 보다 나은 대상, 보다 나은 사랑, 내가 당신이 믿는 신의 이름을 걸고서 이야기하되 결코 사랑에는 보다 나은 것이라고는 없다고 맹세하오. 사랑은 그 자체이오. 거기에는 조건이 붙을 수가 없소. 대가를 바랄 수도 없는 것이오. 더욱이 경제적인 가치에 사랑을 결부시키려고 한다면 정말 잘못 생각한 것이오. 황금의 신과의 교제는 정말이지 사랑의 탈을 가장한 가장 추잡하고 더러운 짓거리요. 사정이 이러할진대 왜 당신은 당신의 영혼을 그러한 것들과 결부시키려고 하오. 안타깝소.”

사실 좀 더 냉정하게 생각한다면 그녀와 나는 어울리기 쉽지 않은 배경과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바로 회사에 들어갔다. 워낙 성격이 쾌활하고 사교성이 많아서 회사에서도 바로 인정을 받았다. 그녀는 70-80년대 한국의 건설 붐을 주도하던 건설 회사에 다녔다. 이른바 잘 나가는 사람들 틈에 끼어있으니 그녀가 나에게 눈을 주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빨리 현실적인 판단을 하고 그녀에 대한 마음을 접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다.

편지는 단순히 한 여인에 대한 사랑의 감정만 담고 있는 것이 아니다. 모든 고통은 사물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을 요구한다는 것은 변함없는 진실이다. 이런 고통으로 인해 실존의 위기를 느끼면 더욱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 볼 수밖에 없다.

“당신으로 인하여 나는 지금 커다란 정신적인 진통을 겪고 있소. 내가 지녀 왔던 철학의 근본마저 뒤흔들리고 있소. ‘전체는 진리이다’는 헤겔의 말과 시민 사회의 주축 가치는 화폐의 신이 지배하는 물신주의임을 역설한 마르크스의 말이 묘한 조화를 이루어 나의 머리를 혼돈의 나락 속으로 끌어들이고 있소. 일찍이 내가 헤겔에 접하기 전에 나는 어떤 계기로 인하여 인간 -개인-의 삶은 전체적 삶 속에서 비로소 조화와 생명을 얻는 것이라 확신했소. 해서 이러한 전체적 삶을 통한 인간 해방의 실현을 위하여 기꺼이 나의 작은 몸을 바치리라 결심했소. 불교에서 말하는 소신성불(燒燼成佛),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고자 하는 것이 나의 삶이며 인생관이라고 확신했소. 그러기에 나는 헤겔 철학에 접하는 순간 지적 안식처를 발견했다고 느낀 것이고 곧 마르크스의 실천 철학에 매혹 당한 것이오.”

초보적일지 몰라도 당시 나는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어느 정도 생각을 굳혔고, 새로 공부를 시작한 헤겔과 마르크스에 대한 직관적 이해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은 지난 1년 동안 유치장 동기들과 해온 세미나를 통해 상당 부분 강화되었다. 헤겔과 마르크스는 내가 본격적으로 철학을 하기 시작하면서 수행자의 화두처럼 나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들은 나의 생각의 알파이자 오메가 역할을 했다. 나의 철학적 캐리어는 바로 헤겔과 마르크스 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이성적으로 이해하는 철학과 감성적으로 느끼는 철학 간에는 차이가 없을 수 없다. 바로 다음에 이어지는 편지글에서 사랑에 좌절한 젊은 청년의 감성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그러나 인간의 사회적 삶을 구성하는 요소는 개인 대 전체, 고난과 행복, 육체와 영혼, 차안과 피안, 투쟁과 승리등 단순히 이분법적으로 나열된 것이 아님을 깨닫기 시작했소. 예컨대 일 개인을 들추어 본다 할지라도 그에게 작용하는 변수는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그리고 환경적, 심리적 등의 수다한 것이 있소. 전체를 사상하고 단지 심리적 측면을 고찰할 때 우리가 발견하는 그 오묘하고 미묘한 움직임이란 우리를 매번 당혹스럽게 만드오. 더욱이 개인의 활동 및 사상의 흐름이 경제적으로 규정 받는 영역이 확대되어 감에 따라 전체와 관련이 커지고 동시에 그 역으로 고립을 자초하고 미분화된 심리적 고독이 증대되어 가는 것 등은 단순히 헤겔적 사유 양식으로는 파악하기 힘든 것이오. ‘전체는 진리이다가 아니라 오히려 ’개인은 영원히 개인일 수밖에 없다‘는 숙명적인 절대 고립의 오뇌가 현대인의 뿌리를 이루고 있는 것이오. 한 인간의 사회 경제적인 규정 조건을 파악하는 것도 좋지만 그 이상의 심리적 정신적 소외감의 해결을 위한 진지한 노력도 간과할 수는 없는 것이오. 이러한 문제의 해결은 현재의 나의 생각으로는 전체와 관련시킨 인간의 유적 본질의 실현이라는 마르크스적 접근 방식으로는 어려운 것이라 믿어지오. 정말이지 실존 상황에서 느끼는 개인의 자기의식의 분열은 법증법적 운동에서 보여지는 자기의식의 지양이라는 언어의 유희로서 위안 받을 수 없는 괴로운 것이오. 더욱이 모든 사람이 동등하게 느끼는 괴로움도 아니기에 그것이 더욱더 가중되는 것인가 보오. 케어케고르가 말하는 신 앞에서 선 단독자의 처절한 사투라고나 할까, 이러한 현상이 오늘날 메카니즘의 차가운 환경 속에서 원자화된 개인이 물신주의를 헤어나지 못하고 좌절하는 아픈 경험의 진상이오. 이러할진대 우리가 어찌 절대, 전체라는 거대한 언어를 들먹이면서 유토피아의 아름다움을 노래할 것이오.”

“전체는 진리이다.”는 헤겔이 그의 주저인 『정신현상학』 ‘서문’에서 사용한 유명한 명제이다. 반면 이와 완전히 대조되는 ‘신 앞에서 선 단독자’라는 명제는 키어케고르의 잘 알려진 명제이다. 그 둘은 전체와 개인을 각각 대변하는 사상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나는 소나기가 밤새 내리던 산속의 암자에서 신앙 고백을 하듯 머리는 헤겔을 따르지만 마음은 키어케고어를 따른다고 한 것이다. 게다가 마지막 구절은 이런 감성을 전도서의 구절을 끌어들여 더욱 확인시켜 준다.

“하물며 당신의 사랑도 그러하니 나의 마음은 심히 안타깝소. 전도서 기자의 말처럼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사랑도 헛되고 진리도 헛된 것이니 해 아래 새로운 것이 없으니 이러다가 허무주의의 나락에 빠지지 않을까 두렵소. 당신이여, 이제 나를 잡아 주오.”

한참 그녀를 향한 장문의 편지를 쓰다 보니 어느새 비도 그치고 하얗게 날이 새고 있었다. 우거진 숲에서는 산새들의 울음소리가 시끄러울 정도로 들리고 있었다. 내 머리도 점점 더 맑아지고 있었다.


이종철(철학박사)은 『철학과 비판』(도서출판 수류화개)과 『일상이 철학이다』(모시는 사람들) 그리고 『문명의 위기를 넘어』(공저, 학지원)를 썼다. 그는 『헤겔의 정신현상학』(J. Hyppolite, 1권 공역/2권, 문예출판사), 『사회적 존재론』(G, Lukacs, 2권/4권(공역), 아카넷), 『나의 노년의 기록들』(A, Einstein, 커큐니케이션스북스)등 다수의 번역서들을 냈다. 현재는 연세대 인문학 연구소 전문 연구원이자 인터넷 신문 ‘브레이크뉴스’와 ‘내외신문’의 칼럼리스트로 활동하면서 NGO 환경단체인‘푸른 아시아’의 홍보대사를 맡고 있다.

[연재 소설] <그대에게 가는 먼 길> 1부 – 11회|4. 선택과 탐색 (3) [이종철의 에세이 철학]

11회

  1. 선택과 탐색 (3)

 

“나요, 이형이요.

놀랬죠? 전혀 기대하지 못했던 편지일 테니까. 그렇소, 나 역시 사전에 마음을 가다듬고 쓰고자 한 편지가 아니라 다소 얼떨떨하오. 그러나 왠지 당신에게 이 편지를 꼭 띄워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소. 어제부터 몸살이 나서 그런지 오한이 나고 온통 몸이 쓰시오. 아무도 돌봐줄 사람 없는 외로운 산사에서 몸이 아프다는 것은 정말이지 육체적인 고통 이상으로 정신적인 고통이기도 하오. 그래서 어제는 낮잠을 무려 네 시간이나 잤소. 어제는 많은 꿈이 유달리 선명하게 기억되었소. 그 가운데서도 아름다운 당신이 나를 힐책할 때의 고통이란…그 꿈 내용은 대강 이렇소. X-mas를 전후로 해서 모두들 즐겁게 놀 때 내가 당신 또래들 모임에 나타났소. 처음 박모 군을 보고 그리고 송모 군도 보았소. 그러나 당신이 그 자리에 있다는 생각이 들자 불현듯 자리를 피한 것이오. 당신을 만나고 싶지 않다는 생각 때문이오. 그러나 황급히 돌아서 나오는 나에게 당신이 수도 없는 욕을 해대는 것이오. 왜 여기까지 와서 자기도 만나지 않고 돌아가느냐, 비겁하다 등 당신 특유의 감정이 고양되었을 때 내뱉는 말은 너무도 모욕적이어서 참기 어려웠소. 잠에서 깨어난 후에도 고통스러운 육체와 더불어 뇌리에 선명히 박히는 당신의 기억이 무엇인가 이 편지를 쓰도록 한 것이오. 그리고 당신과 나 사이에 분명 정리할 것이 있다면 정리해야겠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오.”

 

편지는 이렇게 이어지고 있다.

 

“흔히들 꿈은 현실의 반영이라고 하오. 꿈속에서 기피하는 현상이 있다면 그것은 필시 현실 가운데에서 그러하기 때문이오. 언제부터인가 내가 당신에 대한 기대를 포기하자 당신은 나를 기피하기 시작했소. 처음 당신을 만나는 순간부터 당신은 나에게 천사처럼 귀여운 우상이 되었소. 그러기를 무려 반년, 내가 당신에게 쏟았던 지순 지고한 정열은 내가 생각하기에도 아름다운 것이었소. 당신도 나를 무척이나 따랐고 또한 그렇게 행동했소. 그러나 이렇게 꿈속에서 부유하는 사랑은 우리의 생각처럼 그리 오래가지 못했소. 지난 해 여름, 나의 고통스러운 기억이 가득 채워지던 때에 당신은 나의 감정을 공감하기는커녕 전혀 상관없는 사람처럼 나에게 비쳤소. 당신은 가벼이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그때 내가 느꼈던 허망함이란, 자유가 차단되었을 때의 괴로움보다 더한 하늘이 무너지던 허탈함이었소. 그 뒤 뭐라고 할까. 당신이란 여자에게는 더 이상 깊이 빠져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나를 사로잡은 것이오. 당신이란 여자, 참으로 무서운 여자요. 남자의 혼을 송두리째 앗아 가버리는 악녀요.”

“당신을 향한 불타는 사모의 정이 차츰 식어 들자 당신의 모습도 달라지더군요. 아름답고 귀여운 작은 천사이던 예전의 당신은 이제 점차로 하나의 평범한 여자로 비치기 시작한 것이요. 아, 인간의 눈의 간사함이란 정말 모를 것이오. 한 얼굴이 지닌 두 가지 모습이 이처럼 천양지차로 변하다니, 우리는 항시 사물의 외관에서 비롯되는 착각 속에서 살아가는 가련한 미물인가 보오. 그러나 슬퍼하지는 않소. 오히려 다행스러운 것인지도 모르오. 당신이 언젠가 말하지 않았소? 당신에 대한 나의 기대가 깨질까 당신도 두렵다고. 비록 기대가 깨어지는 순간은 두렵고 고통을 수반할지라도 그러한 고통은 서로를 위해서도 반드시 넘어야 할 장벽이라고 생각하오. 너무 잔인한 말 이른지는 몰라도 우리는 그동안 미망 속에서 헤어나지 못했소. 또한 이것을 아는 게 두려워서 더욱더 그렇게 행동했는지도 모를 일이오. 하지만 꿈에서 깨어나 비로소 맑은 정신을 지니고 당신을 직시했을 때, 당신의 모습은 이전의 천사는 아니었지만 여전히 사랑스러운 여자였소. 이제는 좀더 정돈된 마음가짐으로 당신을 바라볼 수 있었으며, 더욱이 예전의 그것과는 질적으로 다른 애정을 품을 수 있었소. 당신은 언제나 내 마음의 태양이오. 해산의 난고를 겪고 난 후의 차분한 마음가짐으로 당신을 내 마음속에 받아들일 수 있다는 자신이 들었소.”

 

그녀에 대한 나의 마음은 상당히 순수하고 순진했다. 여자 경험이 거의 없었던 나에게 처음 청년회 친교 모임에서 다가온 그녀의 인상은 아주 강렬했다. 그날 촛불만 켠 상태라 내 표정을 들키지 않은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몰랐다. 그녀를 볼 때면 나의 마음은 한없이 설레고 기뻤다. 그런데 경찰서 유치장에 와서 그녀가 남의 일처럼 떠들던 모습을 보았을 때 그녀와 나 사이를 높은 절벽이 가로막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 이후 다른 이들에게 대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면서 내가 혹시 착각한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게 이성적으로 그녀를 판단하고 있었지만 감정적으로는 쉽게 정리되지 않았다. 편지는 바로 이런 감정을 잘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불행히도 큐피드의 화살은 한 개로는 부족한가 보오. 당신을 향한 나의 화살로는 당신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크게 밑도오. 당신이 나를 피하기 시작한 것을 느끼기 시작했소. 그것이 나의 마음을 갈기갈기 찢어 놓는 듯한 아픔을 안겨줄 때마다 나는 나에게 잘못을 되돌리면서 애써 태연해지려고 했소. 당신에 대한 나의 정념도 순화시켜 절제하고 당신에게 보다 많은 기회를 주려고 했소. 올해도 거진 반년을 넘어섰지만 특히나 올해는 당신에게 연락하는 회수도 크게 자제했소. 당신도 아마 괴이하게 생각했을 것이오. 그러나 나는 확신을 가지고 행동한 것이오. 당신에게 보다 많은 선택의 기회를 부여할지라도, 당신은 반드시 내게 돌아올 지혜로운 여자라고 나는 믿었던 것이오. 그러나 언젠가 당신이 내게 보이지 않으면 마음도 멀어진다고 말했던 것처럼 당신은 점점 더 내게서 멀어져만 가고 있었소. 전혀 기대와는 어긋나게 당신은 무분별할 정도로 당신의 사랑만 갈구하고, 목마른 사슴처럼 사랑의 샘만 찾아 헤메이고 있는 듯하오. 정말 안타깝소. 당신이 어찌 나를 버릴 수 있소. 나는 당신에게 나의 순수한 혼을 바쳤소. 당신도 기꺼이 그것을 받아들였소. 언젠가 당신도 내가 한 것처럼 나에게 할 수 있기를 바란다면서.”


이종철(철학박사)은 『철학과 비판』(도서출판 수류화개)과 『일상이 철학이다』(모시는 사람들) 그리고 『문명의 위기를 넘어』(공저, 학지원)를 썼다. 그는 『헤겔의 정신현상학』(J. Hyppolite, 1권 공역/2권, 문예출판사), 『사회적 존재론』(G, Lukacs, 2권/4권(공역), 아카넷), 『나의 노년의 기록들』(A, Einstein, 커큐니케이션스북스)등 다수의 번역서들을 냈다. 현재는 연세대 인문학 연구소 전문 연구원이자 인터넷 신문 ‘브레이크뉴스’와 ‘내외신문’의 칼럼리스트로 활동하면서 NGO 환경단체인‘푸른 아시아’의 홍보대사를 맡고 있다.

[연재 소설] <그대에게 가는 먼 길> 1부 – 10회|4. 선택과 탐색 (2) [이종철의 에세이 철학]

10회

4. 선택과 탐색 (2)

 

1981년 여름 나는 모종의 결단을 내려야 했다. 앞으로의 진로도 확정해야 하고, 현재 하고 있는 공부도 확실히 해야 한다. 지금 상태로는 지지부진해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여름 방학을 이용해 한 달 정도 외가 근처에 있는 암자에 가 있기로 했다. 그 당시 나의 관심사였던 책들을 한 보따리 들고 가 그냥 산속에서 책에만 파묻히고 싶었다. 외가가 있는 전라북도에 위치한 Y읍 까지의 동행은 친구 이은성 군이 해주었다. 그는 젊은 시절 내내 내 곁을 지켜주었다. 나중에 결혼해서 신혼여행을 갔을 때는 자신의 신형 소나타를 끌고서 무려 4박 5일 동안 동해안으로 함께 다니기도 했다. 절에서 공부하는 비용은 당시 모 신문사의 주필을 맡고 있던 최 모 집사가 대 주었다. 그는 나의 결심을 말하자 선뜻 10만 원 짜리 수표 한 장을 내주었다. 나중에 여유가 있을 때 갚으라고 했다. 워낙 술을 좋아하던 그는 비교적 많지 않은 나이에 간암으로 죽었다. 빚을 갚지 못했다고 생각해서 두고두고 부담을 느꼈다.

 

Y읍에 위치한 외가에 도착해서 먼저 큰 외숙부댁과 작은 외숙부댁에 들러 인사를 드렸다. 양가 외숙댁에는 내 또래의 사촌 둘이 있어서 그들과 어울리기도 했다. Y읍은 비교적 조용한 동네였다. 근처에 Y 초등학교도 있었는데, 나는 그렇게 숲이 울창하고 아름답게 조성된 초등학교를 본 적이 없었다. 암자에 있을 때는 가끔씩 그 초등학교를 산책하면서 머리를 식히곤 했다. 암자는 외가의 뒤편 산에 위치해 있었다. 나이 든 스님이 운영을 하고 있었고, 젊은 보살이 여러 가지 수발을 했다. 한여름의 산속은 나무들이 울창해서 한낮에도 서늘했다. 조용히 공부를 하기에는 딱 좋았다. 암자에는 나 말고도 고시 공부한다는 젊은 친구가 한 명 있었고, 떠돌이 중도 한 명 있었다. 아침에 식사할 때 흰죽 같은 수프가 먼저 나왔는데 다들 맛있게 그걸 먹었다. 하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수행하는 데 잡념이 들지 않도록 하는 정력 감퇴제가 들어 있다고 해서 그 이후로는 먹지 않았다.

 

의탁할 데가 없는 나이 많은 중들은 절에서도 반기지 않는 것 같았다. 암자에 함께 기숙하던 나이 많은 스님은 식사할 때 반은 눈칫밥을 먹었다. 내가 관여할 일이 아니라서 그런 일을 보아도 나는 의식적으로 외면했다. 그런데 하루는 이 스님이 어디 가서 술을 걸쭉하게 먹고 오더니 그동안 받았던 설움을 큰 소리로 푸는 것이다. 소리도 꽥꽥 지르고 발에 걸리는 물건들도 막 차고 그랬다. 그러더니 걸망을 메고 가면서 하는 말이 걸작이다. ‘내가 땡중인가비…’ 암자에 있는데 하루는 아주머니 두 분이 오더니 사주팔자를 보고 싶다고 했다. 그러니까 부엌에서 일하던 보살 아주머니가 앞치마에 물 묻은 손을 털고 나왔다. 보살은 생년월일과 난 시(時) 등을 묻고서 사주팔자를 보는 책자를 뒤적이면서 아주머니들의 사주를 봐주었다. 그 앞에서 연신 고개를 끄덕이는 아주머니들을 보면서 희한한 생각이 들었다. 한편으로 한 인간의 사주팔자 보는 게 너무 쉽다는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한 인간의 운명이 그렇게 미리 정해져 있다는 것이 납득이 가지 않았다.

 

하루는 소나기가 종일 내렸다. 밤중에도 그치지 않았다. 억지로 쓰러져 잠을 자고 있는데 갑자기 내 가슴 위로 무언가 지나다니는 느낌에 잠을 깼다. 큰 쥐 한 마리가 내 배 위에 올라와 있다가 내가 깨는 바람에 놀라서 달아난 것이다. 쥐는 내가 워낙 싫어하는 동물이다. 그 쥐가 다시 나타날까 봐 그날 밤 꼬박 새울 수밖에 없었다. 불빛 하나 없는 산중에는 소나기가 주룩주룩 내리고, 시커먼 쥐가 언제 또 나타날지 모르는 두려운 상황에 처하자 어쩔 수 없이 시간을 보내기 위해 나는 글을 썼다. 내가 사랑하고 싶었지만 더는 진도가 나가지 않았던 여인에게 장문의 편지를 쓴 것이다. 그 편지는 이렇게 시작했다.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연상시키는 이 편지는 그녀에 대한 나의 마음과 이제 막 시작하려는 철학에 대한 나의 아주 원초적인 생각을 담고 있었다.


이종철(철학박사)은 『철학과 비판』(도서출판 수류화개)과 『일상이 철학이다』(모시는 사람들) 그리고 『문명의 위기를 넘어』(공저, 학지원)를 썼다. 그는 『헤겔의 정신현상학』(J. Hyppolite, 1권 공역/2권, 문예출판사), 『사회적 존재론』(G, Lukacs, 2권/4권(공역), 아카넷), 『나의 노년의 기록들』(A, Einstein, 커큐니케이션스북스)등 다수의 번역서들을 냈다. 현재는 연세대 인문학 연구소 전문 연구원이자 인터넷 신문 ‘브레이크뉴스’와 ‘내외신문’의 칼럼리스트로 활동하면서 NGO 환경단체인‘푸른 아시아’의 홍보대사를 맡고 있다.

[연재 소설] <그대에게 가는 먼 길> 1부 – 9회|4. 선택과 탐색 (1) [이종철의 에세이 철학]

아홉 번째 글

  1. 선택과 탐색 (1)

 

별다른 흔적을 남기지 않고 경험한 지난 한 달은 여러모로 나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다. 유신이 무너진 후 고시 공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한 결심은 그냥 물 건너 가버렸다. 5.17 이후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되자마자 법대 고시원도 폐쇄되었다. 덕분에 법학이나 고시에 대한 미련을 깨끗이 벗어 버렸다. 고시를 하겠다고 하고서 기숙사에 입소했는데, 사회 분위기가 바뀐 탓에 내 마음도 완전히 바뀐 것이다. 2학기에 등록할 때는 법대 과목이 아니라 문과대의 사회학과나 영문과 그리고 사학과에서 과목을 선택했다. 보다 현실적이고 자유로운 학문을 시작하기로 한 것이다. 실제로 이런 과목들이 훨씬 흥미로웠고, 시험을 봐도 성적이 훨씬 잘 나왔다. 사실 나의 경제 상황을 고려한다면 가능한 한 빨리 취직해야 하는 데 나는 그런 것에 거의 관심을 두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아나키스트의 방랑을 선택한 것인지도 모른다. 한때 마음을 주었던 여성과의 만남도 예전 같지 않았다. 대신 유치장에서 사귄 몇몇 사람들과는 따로 세미나를 계속했다. 이 세미나는 단순히 공부를 위한 것이 아니라 모종의 데모를 시도하기 위한 학습으로 시작했다. 정치 상황은 여전히 살벌했다.

세미나를 하던 멤버 중의 한 명은 S 대 사회학과 4학년이었고, 다른 한 명은 같은 대학의 체육학과 4학년이었다. 졸업 학기를 앞두고 데모하겠다고 하는 것은 보통 결심이 서지 않으면 가능한 일이 아니다. 나는 이미 경험도 있고 해서 다시 시위할 엄두는 나지 않았다. 그리고 여성 한 명도 참석했는데, 그녀는 세미나를 정기적으로 참석하기 보다는 가끔씩 참석해서 함께 술을 마시곤 했다. 세미나는 각자 집을 돌아가면서 했지만 주로 우리 집과 사회학과 신모 군의 집에서 했다. 그 당시 우리는 주로 정세 분석과 향후 정국의 방향에 관한 이론서들을 많이 다루었다. 『전환 시대의 논리』를 쓴 리영희 교수의 책들과 한국 경제를 다룬 최호진 교수의 책, 한국 근대사에 관한 김용섭 교수의 책을 주로 읽었다. 사회 이론에 관해서는 미국의 진보적인 사회학자인 C. Wright Mills의 『사회학적 상상력』과 『파워 엘리트』를 집중적으로 읽었다. 당시 우리들의 지적 관심은 상당해서 그 당시 막 소개가 되기 시작한 독일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비판이론’(Critical Theory)과 헤겔을 전반적으로 소개한 H. 마르쿠제의 『이성과 혁명』(Reason and Revolution) 원서를 열심히 탐독했다. 사회 이론서들은 비교적 이해하기 쉬웠지만 처음 접한 헤겔 철학을 소개한 『이성과 혁명』은 개론서 임에도 불구하고 이해가 잘되지 않았다. 특히 법(Recht)을 Right로 번역해 놓았는데, 왜 이런 개념이 법철학을 다루면서 반복적으로 나오는지 알 수 없어서 애를 먹었다. 아마도 이때 부딪힌 어려움이 나중에 헤겔 철학을 전공하게 된 계기가 되었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이런 책들이 법대생인 나에게는 생소한 편이었지만 사회학도인 신모 군이 과 내에서 도는 독서 목록과 동향들을 많이 소개해주었다. 체육학과 생인 복기호 군은 추상적인 이론보다는 현실 운동에 보다 관심을 많이 보였다. 그는 실제로 대림동 야학에서 노동자들을 가르치고 시위 현장은 거의 빠짐없이 참석하는 편이었다. 우리들은 서로 간에 관심사와 편차는 있어도 거의 1년 이상을 꾸준히 세미나를 진행하면서 향후 진로에 대해 이야기도 많이 나눴다. 세미나가 끝나면 술을 많이 마신 편이었다. 그 당시는 정말로 술과 담배를 억수로 많이 마시면서 급박하게 돌아가는 사회와 대학가의 현실 이야기도 많이 나눴다.

 

“형, 오늘 인문대 쪽에 삐라가 뿌려졌어요. 시위가 확대되지는 않았지만 요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요.” 복기호군의 말이다. S대생들하고 세미나를 하는 덕분에 S대 동향을 많이 듣는 편이다.

“Y대도 마찬가지야. 요즘은 검색도 더 심해진 것 같아. 내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요즘 학생들의 분위기는 과거보다 훨씬 격렬해진 것 같아. 아마도 광주의 경험이 영향을 많이 미치는 것 같아.”

“그렇지요. 광주사태는 대한민국의 민주화 운동에서 하나의 전환점이 될 겁니다. 이제는 광주 이전과 광주 이후로 운동사가 나뉘어 질 거에요.” 신모군이 예리하게 당시 정세를 분석한다.

“독재자들은 늘 국민과 국가를 이야기하지만 그들의 관심은 오로지 자신들의 권력 유지일 뿐이지요. 그들을 권좌에서 쫒아내지 않는 한 국민도 없고 국가도 없을 겁니다.” 라고 말을 하면서 복모군이 오른손을 살짝 들고 ‘투쟁, 투쟁!’을 외치는 흉내를 낸다.

“일단 혁명의 견인차는 젊은 엘리트 혁명가들이 되어야 할 겁니다. 과거의 모든 혁명 운동사를 통해서 볼 때 이것은 변함없는 진리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대학가의 운동을 좀 더 조직화하고 체계화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봐요. 우리가 이런 세미나를 하는 이유도 그 일을 선도적으로 하기 위해서이지요.” 신모 군이 세미나의 목적이 시위 주도에 있음을 다시 상기시킨다.

“하지만 그렇게 소수 엘리트 중심으로 나가다 보면 일반 대중으로부터 고립될 위험도 크다고 뵵니다. 엘리트주의는 철저히 경계할 필요가 있어요. 대중 속에서 대중과 함께 하지 않는 운동은 결코 결정적 시기를 앞 당길 수 없어요.” 늘 체험적으로 시위에 참여하고 있는 복모 군의 말이다.

 

엘리트와 대중의 관계는 우리들에게 늘 고민할 거리를 안겨주었다. 과연 우리는 어디에 몸담고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이종철(철학박사)은 『철학과 비판』(도서출판 수류화개)과 『일상이 철학이다』(모시는 사람들) 그리고 『문명의 위기를 넘어』(공저, 학지원)를 썼다. 그는 『헤겔의 정신현상학』(J. Hyppolite, 1권 공역/2권, 문예출판사), 『사회적 존재론』(G, Lukacs, 2권/4권(공역), 아카넷), 『나의 노년의 기록들』(A, Einstein, 커큐니케이션스북스)등 다수의 번역서들을 냈다. 현재는 연세대 인문학 연구소 전문 연구원이자 인터넷 신문 ‘브레이크뉴스’ 와‘ 내외신문’의 칼럼리스트로 활동하면서 NGO 환경단체인‘푸른 아시아’의 홍보대사를 맡고 있다.

[연재 소설] <그대에게 가는 먼 길> 1부 – 8회|3. 광주항쟁 (5) [이종철의 에세이 철학]

여덟 번째 글

3. 광주항쟁(5)

 

  어느 정도 이곳 생활에 익숙해져 갈 때 내가 다니던 교회의 장로님이 위로차 방문했다. 장로님은 불편한 것은 없는지 물어보고 사식을 넣어 주었다. K 교회에서 자주 어울리던 상수는 수시로 유치장으로 우리를 찾아왔다. 그는 이렇게 큰 거사를 하면서 자기한테 안 알린 것에 대해 무척 섭섭해했다. 하지만 의대 본과에 다니던 그를 무조건 끌어들일 수는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다니던 교회의 미정이가 위문을 왔다. 그녀는 특유의 쾌활한 목소리로 이것저것 묻기도 하고, 혼자 깔깔거리기도 했다. 위문 온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그녀의 평소 스타일이 그런 면이 많기는 해도 나의 처지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 것에 섭섭한 느낌도 들었다. 나는 그날 시위한 이래 처음으로 내가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자유가 차단되었다고 생각했다. 철창 밖의 사람들과 내가 이질적인 삶을 사는 것 같았다. 그리고 설령 이곳을 나간다 해도 다시 또 들어올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무슨 일이든 처음이 어렵지 다시 반복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그래도 비교적 적응을 잘하는 체질이라 나는 유치장 분위기에 금방 젖어 들었다. 우리는 정치범이라고 해서 일반 잡범들이 대우도 해주고 자리도 좋은 곳으로 주었다. 나는 그곳에서 명색이 법대생이라고 해서 형사소송법과 법전을 옆에 펼쳐 놓고 일반 잡범들의 법률 상담도 해줬다. 소매치기로 들어온 어떤 여성은 생리 중에 그런 도벽이 생긴다는 현실을 호소해서 대신 이유서를 써준 적이 있다. 잡범들 가운데서도 소매치기들은 여간해서는 자신들의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고, 일단 하는 말들 대부분은 거짓말인 경우들이 많다. 오히려 솔직하고 단순한 잡범은 주먹을 쓰는 건달들이다. 이런 건달도 노는 구역이 어디냐에 따라서 행태가 다 틀린다. 중부서 관할의 남대문에서 노는 건달들은 비교적 순진하고 단순한 반면, 타워 호텔을 무대로 노는 건달들은 자신들의 처지를 은근히 뻐기는 경우들이 있었다. 당시 명동 신상사파의 중간 보스쯤 되는 건달이 있었는데 그의 입담이 아주 걸쭉했다. 외모로 볼 때는 일반인하고 거의 차이가 없는데 목소리가 우렁우렁하고 말도 유창하게 잘했다. 그는 특히 음담패설을 잘했는데 한밤중에 그가 한 창 음담패설을 할 때는 내근하는 형사들까지 와서 열심히 듣곤 했다. 당시 연청의 핵심 멤버 중의 한 사람이 있었는데 외모로 볼 때는 호랑이처럼 생겼지만 마음 씀씀이는 여우 같은 면이 많은 사람이었다. 내가 법률 상담할 때 그가 뒤에서 자문해주곤 했다. 나중에 유치장을 나가면 그의 사업장으로 한번 찾아오라고 해서 찾아간 적이 있었는데 은근히 외면하는 것 같아서 발길을 끊었다. 그는 나중에 정치적으로 크게 성공하기도 했지만 그때의 경험 때문에 별로 신뢰감이 가지 않았다.

  유치장 안에서 비교적 대화가 잘 통하는 것은 비슷한 또래의 학생 운동권 사람들이다. D 대의 운동권 인사가 여럿 들어왔는데 그들과 향후 정국 동향이나 앞으로의 진로 등과 관련해 토론을 많이 했다. 그중의 한 사람인 우성과는 나중에 바깥으로 나가서도 만남이 이어져서 세미나도 함께 하곤 했다. 기억나는 한 분은 민중 불교를 하던 승려였다. 그는 평소 다른 사람들이 열심히 떠들고 토론해도 일체 관여하지 않고 면벽 참선만 했다. 결혼을 앞둔 상태라 신부 될 사람이 자주 유치장을 찾았다. 신부는 아주 옛된 여군 장교라 사람들의 관심을 많이 끌었다. 당시 김대중의 연설을 녹음해서 판매하다가 들어온 음반 제조업자인 모 씨는 바깥에 나가서 우리와 자주 어울렸다. 사람 좋은 그는 우리들이 경제적으로 어려운 것을 알고 술도 많이 사줬고, 그가 제작한 클래식 테이프 모음집을 우리에게 줘서 한때 그것들을 팔아 용돈으로 쓰기도 했다. 그때의 경험을 통해 왜 사람들이 교도소를 학교라 생각하는지 알 수가 있었다.물론 우리가 있었던 곳은 교도소가 아니라 경찰서 유치장에 불과했지만 그곳에서 여러 부류의 사람들을 만나다 보니 사람 경험을 많이 한 편이다. 내가 처음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 라는 문제에 관심을 가질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무더운 날씨에 사람들이 많다 보니 육체적으로 많이 힘들었다. 그래도 국방부 시간은 여지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우리가 시위를 한 것이 6월 27일인데 한 달쯤 돼서 갑자기 친구와 나를 불렀다. 따라서 올라가 보니 서약서를 제출하라고 하면서 석방이라고 했다. 다시는 그런 엉뚱한 짓을 하지 말라고 서약서를 쓰라고 했다. 비상계엄으로 삼엄한 상황에서 데모를 했지만 우리는 무사히 풀려났다. 우리와 관련된 모든 조사 기록들은 다 폐기 처분했다고 한다. 처음 거사했을 때 방사형으로 배후를 캐던 형사들이 아무 것도 나오지 않으니까 허탈해하면서 돈키호테 같은 놈들이라고 말했었다. 이번에는 그동안 조사했던 기록들을 하나 하나 씩 지워가면서 석방한 것이다. 함께 거사한 친구의 아버지가 백방으로 손을 보안사 과장의 도움을 받았다고 한다. 숨통이 콱콱 막히던 유치장을 나오니까 밖은 햇볕으로 눈이 부시고 더위가 한창인 7월 말이었다.


이종철(철학박사)은 『철학과 비판』(도서출판 수류화개)과 『일상이 철학이다』(모시는 사람들) 그리고 『문명의 위기를 넘어』(공저, 학지원)를 썼다. 그는 『헤겔의 정신현상학』(J. Hyppolite, 1권 공역/2권, 문예출판사), 『사회적 존재론』(G, Lukacs, 2권/4권(공역), 아카넷), 『나의 노년의 기록들』(A, Einstein, 커큐니케이션스북스)등 다수의 번역서들을 냈다. 현재는 연세대 인문학 연구소 전문 연구원이자 인터넷 신문 ‘브레이크뉴스’ 와‘ 내외신문’의 칼럼리스트로 활동하면서 NGO 환경단체인‘푸른 아시아’의 홍보대사를 맡고 있다.

[연재 소설] <그대에게 가는 먼 길> 1부 – 7회|3. 광주항쟁 (4) [이종철의 에세이 철학]

일곱 번째 글

3. 광주항쟁(4)

 

예나 지금이나 명동으로 들어가는 입구는 사람들로 붐볐다. 마침 우리의 거사 날짜는 토요일 오후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특히 많았다. 수걸은 시위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토요일로 잡은 것이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왼쪽으로 지하도가 있었고, 바로 앞에는 유명한 빵집이 있었다. 우리는 그곳에서 각자 맡은 분량의 전단지를 뿌렸다. 동시에 우리는 외쳤다.

 

“계엄을 철폐하라, 광주의 진실을 밝혀라. 학살 원흉 전두환은 물러나라!”

 

비상계엄이 여전했고, 곳곳에 무장 군인들이 지키고 있는 현실에서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고 이런 엄청난 구호를 외친 것이다. 도로 위에 있던 수많은 사람이 깍깍 소리를 지르면서 달아나는 모습이 보였다. 광주 사태 이후 더욱 강화된 계엄상황에서 이런 데모를 벌이는 것 자체를 두렵게 보았을 것이다. 전단을 여기저기 뿌렸다. 뿌렸다기보다는 처음 해보는 일에 당황해서 그냥 뭉터기로 내 던졌는지 모른다. 지하도 안으로도 던졌고, 거리에도 던졌다. 손에 더 이상 전단이 없자 수걸과 나는 주먹을 쥔 오른손을 번쩍 들고 명동 방향으로 구호를 외치면서 걸었다. 사람들이 바다가 갈라지듯 우리 앞길을 열어 주었다. 단 5분도 안 걸린 시간이었을 텐데 그 순간이 영원히 지속되는 느낌이 들었다. 짧은 시간에 목이 쉬어 버렸다. 그 이후로 내가 여러 차례 경험해봤지만 아주 짧은 시간에 영원과 접속되는 경험을 한 것은 그때가 처음 같았다. 그 사이 누군가가 우리를 신고했다. 호루라기 소리가 들리더니 경찰 몇 명이 나타났다. 계엄군이 출동하지 않은 게 다행이다. 만약 군인이 출동했다면 그 자리에서 그냥 반죽음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바로 수갑찬 채 명동 파출소로 끌려갔다.

파출소에 도착하니 비로소 상황이 정리되는 느낌이 들었다. 파출소의 한 젊은 순경은 우리가 다소 안쓰러운지 담배를 권했다. 담배 한 모금을 빨자 긴장이 풀리는 것 같았다. 바깥은 우리의 시위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듯 토요일 오후 인파들로 덮여 있었다. 우리의 시위는 찻잔 속에 잠시 미풍이 분 것 정도도 안 되었다. 그런 일을 도대체 왜 했을까? 개인적으로는 엄청난 변화가 일어날 수도 있는 일이지만 타인이나 사회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동키호테식 행동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실제로 조사받는 과정에서 우리 뒷선을 아무리 캐도 나오지 않자 ‘이거 미친놈들 아냐. 완전 동키호테구먼.”이라는 말도 들었다. 그 말이 맞을 수도 있다. 우리의 시위는 일종의 자기 확신에 기초한 자기 고백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자기 자신과의 약속이고, 자신이 스스로 설정한 채무 이행이었는지 모른다. 훗날 이 사건을 반추하면서 나는 다시 새로운 다짐을 했다. 다시는 이런 동키호테식 자기 고백은 하지 않겠다고.

명동 파출소에서는 별다른 조사 없이 바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중부서로 이첩됐다. 우리가 도착하니 큰 상황판에 방사선 형태의 그림이 그려졌다. 일단 형사 앞으로 가서 심문받고 조서를 써야 했다. 우리가 앉자마자 다짜고짜 한 형사가 뺨을 때린다.

 

“이런 미친놈들, 지금 시국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알아?” 이런 폭력을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우리는 당황하지 않았다. 하지만 대답은 하지 않았다.

“이놈들, 무슨 생각을 하고 이런 짓을 벌인 거야? 배후가 누구야?” 다른 형사가 큰 목소리로 추궁했다.

“배후는 없습니다. 우리 둘이 다 결정한 것입니다.” 친구가 대답했다.

 

한참을 캐도 드러난 이상의 것이 나오지 않으니까 그냥 보호실 철창으로 집어넣으라는 말이 들렸다. 바지의 혁띠를 푸르고, 내가 차고 다니던 보조기도 풀어야 했다. 당장 걷는 데 지장이 있지만 할 수 없었다. 그날 밤 우리는 잡범들과 함께 보호실에서 보냈다. 낯선 철창, 평소 범죄자들로 백안시했던 사람들과 한방에서 그날 밤을 보냈다. 긴장이 풀어져서인지 잠은 잘 잤다. 이제 나에게 익숙한 세상은 사라지고, 낯설고 새로운 상황이 다가온 것이다.

거사 당일 밤 수걸과 나의 집으로 형사대들이 급파돼서 증거물이 될 법한 것들을 가지고 왔다. 그날 밤 가족들이 크게 놀랬다고 한다. 아닌 밤중에 형사들이 조사를 위해 왔다고 하니까 가뜩이나 걱정이 많은 어머니가 많이 놀랬다. 수걸의 집을 조사했던 한 형사는 수걸의 집 책장의 수많은 장서들을 보고 놀랬다는 이야기를 했다. 사실 그의 집에는 아버지와 형이 보던 책, 그리고 수걸이 보던 책들이 빼곡히 꼿혀 있었다. 조사하는 과정에서 주범은 지수걸이고, 종범은 나로 확정됐다. 때문에 수걸은 수시로 불려 나갔다. 전단지를 인쇄한 곳이 어디냐는 추궁을 받았지만 그는 잘 둘러쳤다. 적어도 그를 믿고 일을 해준 사람들이 곤욕 치르지 않도록 처리했다. 그의 일처리는 생각보다 꼼꼼했다. 그가 한참 후에 한국형 레스트랑을 창업해서 크게 성공한 적이 있었는데, 이 때의 일솜씨가 바탕이 됐을 것이다.

처음 시작한 경찰서 보호실 생활을 하면서 여러 사람을 만났다. 때가 때인 지라 정치범들이 여럿 잡혀 있었다. 이곳에는 이미 김대중 산하 청년 조직인 연청 관련 인사가 들어와 있었고, 근처 동국대의 핵심 간부들과 선후배들도 들어와 있었다. 그리고 김대중 씨 연설한 것들을 녹음해서 배포한 음반 업자도 있었고, 사회주의에 발을 들여놓은 지사형 정치인도 있었다. 그리고 이 보호실에는 정치적인 이유로 들어온 사람들 외에도 일반 잡범들도 많았다. 계엄 상황에서 나중에 삼청교육대로 보내진 수많은 잡범들의 숫자가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정치범에 대한 예우 때문인지 우리는 비교적 좋은 자리에 있었지만, 더운 여름날 에어컨이나 선풍기가 없는 상태로 칼 잠을 자는건 참으로 고역이었다. 나중에 본격적으로 철학을 공부할 때 알게 된 “타인은 지옥이다.”는 사르트르의 말을 몸으로 체감했다.

내가 광주 학살에 관해 이야기를 들은 곳은 바로 경찰서 보호실 안에 들어와 있던 한 잡범을 통해서였다. 보호실 안은 끊임없이 소란스럽고, 온갖 소리들이 난무했다. 특히 밤에는 입담 좋은 친구들 주변으로 삼삼오오 몰려서 이야기꽃을 피우기도 했다. 담당 경찰관도 특별한 경우 아니면 그냥 묵인했다. 하루는 20대 중반의 한 청년이 할 이야기가 있다고 했다. 그는 광주에서 아주 끔찍한 경험을 했다고 했고, 자신은 사선을 넘다시피 해서 그곳을 탈출했다고 했다. 그가 그날 밤 구구절절이 광주 이야기를 풀기 시작했을 때 다들 할 말을 잊은 듯 침묵했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이야기가 너무나 충격적이고 리얼했기 때문이다. 그가 남도 사투리로 떨리는 듯 말했다.

 

“정말 이제 못 보겠습디다. 공수 부대 안 있소? 완전히 무장해 갔고 대학생으로 보이면 무조건 곤봉으로 머리빡부터 뚜드려 패버리는 거예요. 그러먼 그 자리에서 자빠져불죠. 그렁께 여기저기 사람들이 막 쓰러져 있는 거예요. 일어설 수 있는 사람들은 무조건 옷부터 배께 갖고 팬티만 남기고 도로에 무릎 꿀레서 일렬로 안치고,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개머리판으로 사정 없이 패 부었어요. 길 가던 시민들은 놀래갖고 ‘오매 저러다 사람 죽이겄다’고 하면서도 군인들이 워낙 살기가 등등하니까 어쩌지도 못하고라. 최루탄을 쏴나서 눈도 못 뜨고 숨도 못 쉬고요. 멀리서 보고 오다가 도망가는 젊은이가 있으면 끝까지 쫒차가서 같은 방식으로 패버리는 거예요. 나는 너무 무서워서 밖에 나갈 엄두를 못 냈어요.”

 

그날 밤 이런 끔찍한 이야기가 그의 입에서 나올 때 일반 잡범들도 조용히 침묵했다. 어떤 이들은 눈물마저 글썽거렸다. 도저히 국민의 군대라고 할 수 없다고 분노하는 이도 있었다.

 

조용히 듣기만 하던 동국대 운동권 출신의 한 사람이 질문했다.

“직접 당신이 확인한 건가요?”

“그러문 요오. 신문에 안 나니까 모르시는 거예요. 그러다가 3일째 되는 날 집으로 들이닥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니께 무서워서 못 있겠더라고요. 그래서 화순 쪽으로 빠져서 어떻게 기차를 겨우 타고 서울로 도망을 온 거예요. 물론 오면서 양심의 가책도 들었어요. 내가 아는 친구들도 저렇게 무자비허게 당하고 있을 텐디 나만 도망을 가는구나 하고요.”

 

그가 광주의 현장에서 도망간 것에 대해 누구도 비난할 수 없었다. 목숨을 보전한다는 것은 모든 생명체의 1차적인 보호 본능이기 때문이다. 이날 이후로 한반도의 남녁은 깊은 침묵의 세월로 접어들었다. 과연 하늘에 신이 있다고 한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을까? 주여! 당신은 어디로 가시나이까?(쿠오바디스 도미네)

그날 그에게 끔찍한 광주의 학살 현장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리는 솔직히 분노 이상으로 두려움을 느꼈다. 도대체 이놈들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일을 벌렸는가, 그리고 다음 희생자가 누가 될 것인가, 감방에 있는 우리들에게도 그 여파가 밀려오지 말라는 보장이 없지 않은가 등등으로 밤에 잠을 이루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우려했던 것과 달리 경찰서 유치장에서의 삶은 큰 변화는 없었다. 다만 민생 사범들을 대거 잡아들이면서 보호실의 인구 밀도가 극도로 높아져서 지내기가 더욱 힘들어졌다.


이종철(철학박사)은 『철학과 비판』(도서출판 수류화개)과 『일상이 철학이다』(모시는 사람들) 그리고 『문명의 위기를 넘어』(공저, 학지원)를 썼다. 그는 『헤겔의 정신현상학』(J. Hyppolite, 1권 공역/2권, 문예출판사), 『사회적 존재론』(G, Lukacs, 2권/4권(공역), 아카넷), 『나의 노년의 기록들』(A, Einstein, 커큐니케이션스북스)등 다수의 번역서들을 냈다. 현재는 연세대 인문학 연구소 전문 연구원이자 인터넷 신문 ‘브레이크뉴스’ 와‘ 내외신문’의 칼럼리스트로 활동하면서 NGO 환경단체인‘푸른 아시아’의 홍보대사를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