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거라투스트라, 삼성 미술관 리움에 가다 [자거라투스트라 시장에 가다]
이병창(‘e 시대와 철학’ 자문위원, MEGA 공동대표)
니체 아부지, 삼성 미술관 리움에 가보셨어요?
나야, 독일 촌구석에 사는데, 어찌 그런 데를 다 가보겠냐? 니는 천방지축으로 쏘다니니 그런 데를 다 갔다 온 모양이구나.
예, 아부지. 이번이 두 번째예요.
자거라투스트라야, 니도 삼성 국물을 좀 마시려고? 아서라, 니 차례까지 오겠냐?
아니 아부지, 그래도 제가 아부지 얼굴에 먹칠하겠어요. 처음에는 건축 공부하러 갔었어요. 그때 한참 건축 공부하고 있을 때인데, 글쎄 삼성 미술관에 세계적인 건축가들의 작품이 집결되어 있다 하더 라고요. 이게 웬 떡인가 싶어서 직접 가보기로 했죠. 그런데 그때에는 미술관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어요. 미리 예약하고 와야 한 대요. 그래서 아이고, 내 팔자에 재벌 미술관에 들어가 보겠냐 하고선 돌아섰지요.
그럼 이번에는 안으로 들어갔더냐?
예, 신통하게도 이젠 예약 없이 들어갈 수 있대요. 김용철 변호사가 무언가를 폭로한 이후 삼성한테 유일하게 변한 게 그거라고 하더 라고요. 재벌 미술관이 서민에게 개방된 거죠. 정말 설레는 마음으로 들어갔어요. 솔직히 좀 떨렸어요. 제가 입성이 형편없으니, 혹 그 때문에 입장을 거부당할까 봐서 말이요. 다행히 집어넣어 주더 라고요.
그래? 그 안이 어떻더니?
정말 깜짝 놀랐어요. 밖에서 보면 세 개 건축이 있거든요. 그게 안으로는 이어져 있어요. 아부지도 들어서 아시겠지만 전부 세계적인 건축가예요. 이런 사람들을 이어놓은 것은 삼성의 힘이 아니면 불가능하겠죠. 우선 이태리의 포스트모던 건축가 마리오 보타, 들어보셨어요?
야, 인마, 자거라투스트라야, 아비는 건축에 관심이 없다. 아비는 음악을 좋아하지. 그런데 음악에 비하면 건축이 어디 예술이냐? 그건 그저 물질 덩어리에 불과해. 그래서 헤겔도 건축을 예술 중에 제일 천박한 예술로 꼽지 않았니?
역시 아부지는 아직 19세기이군요. 요즈음 건축이 얼마나 찬란한데요? 건축을 영화에 비교하는 글도 있어요?
예끼, 이 놈, 지가 써놓고 슬쩍 자랑하다니. 그런데 포스트모던 건축이라는 게 무어냐?
니체 아버지, 그건 한 마디로 말하기는 어렵지만 마리오보타만 가지고 말한다면, 주변이나 역사, 문화의 맥락을 고려한 건축이라는 거죠. 모더니즘은 이런 것들에 대해 무관심하거든요. 모더니즘 건축은 자기완결성을 추구했었지요.
그러면 마리오 보타가 삼성 미술관에서 고려한 맥락은 무어지?
글쎄요. 아부지, 그게 아리송해요. 좀 억지로 연결시키자면 미술관이 위치한 남산의 성곽의 형태를 건물의 지붕 선에서 발견할 수 있어요. 그런데 그 자리에서 실제로 보이는 것은 성곽이 아니라 거대한 하이야트 건물이죠. 시꺼먼, 흉측한, 남산을 파괴하는, 박정희 시대 특혜를 선명하게 보여주는 건물이죠. 더구나 미술관 지붕 선에서 발견하는 것은 꼭 한국적인 성곽이라 할 수는 없고, 로마적인 성곽처럼 보여서, 전체적으로 마리오 보타가 이태리에서 지은 건축을 그대로 하나 수입한 것처럼 보입니다.
쯧쯧, 뭐 이렇게 생각하려무나. 차용을 통해 패러디한 거라고.
뭐, 어쨌거나, 겉모습은 그런데 안으로 들어가니, 한 가운데 로톤다라고 있어요. 뒤집어진 원추형 로톤다인데, 그 주위로 계단이 있어요. 많은 사람들이 그 계단을 오르내리면서 창문으로 아래쪽이나 위쪽을 쳐다보는데 그런 체험이 운동감을 주었어요. 건축이 시각이 아닌 감각을 보여 줄 수 있다는 증거지요.
원 무슨 말인지 모르겠네.
하여튼 아부지, 그 외에도 해체주의 건축가 렘 쿨하스의 건축도 있어요. 그는 네덜란드 사람이죠. 삼성 미술관에서 가장 앞에 있는 건축물이 그가 지은 거죠. 밖에서만 보면 저건 나도 짓겠다 싶었는데, 그래서 별 감동을 못 받었죠. 그런데 이번에 안에 들어가 보니 아, 역시 해체주의자구나 하고 감탄했어요.
궁금하구나, 그게 뭐지?
건물 안에 또 건물이 있는데, 그 속에 있는 건물은 잘 보면 공중에 떠 있는 것처럼 보여요. 부양하는 돌덩어리, 어때요? 멋있죠? 물론 착각을 이용한 거죠.
거 참 재미있구나.
그래요. 건축이란 게 원래 무게의 예술인데, 그걸 전복시킨 거죠. 하지만 솔직히 기분 나쁜 게 렘 쿨하스가 지은 서울대 미술관 건축(관악 캠퍼스)하고 이 건축이 너무 닮았거든요. 두 건축이 연대도 비슷하게 지어졌어요. 건축의 다양성과 깊이는 서울대 미술관 건물이 더 탁월하죠. 그래서 서울대 미술관 짓다 남은 아이디어로 삼성 리움 건축을 지은 게 아닌가 생각했어요. 렘 쿨하스나 삼성 미술관 관계자가 들으면 팔짝 뛸 이야기죠.
얘야, 자거라투스트라야, 확인할 수 없는 비난은 삼가 거라.
예, 죄송해요. 실제로 그럴 리가 있겠어요. 다만 그런 인상을 받는다는 거죠.
하여튼 조심하래도.
예, 알겠어요. 그리고 니체 아부지, 장 누벨의 작품도 있어요. 장 누벨의 이름이 나오면 건축을 아는 사람들의 가슴이 황홀해지죠.
장 누벨이라? 그는 어떤 스타일로 짓는데?
그의 건물은 전체적으로는 모더니즘의 본래적인 입장으로 돌아간 듯해요. 원래 모더니즘 건축이 처음 출발할 때(1920년대)는 과학적인 구조를 바탕으로 하면서도 그것을 통해 인상적인 표현을 추구했거든요. 나중에(1940년대) 모더니즘은 기능주의로 타락하고 말았죠. 특히 장 누벨은 건축물의 입면이 시시각각으로 변화하는 운동성을 추구했어요. 그런 점에서 초기 모더니스트들이 운동성을 추구했던 것과 비슷해요. 그래서 예를 들어 파리에 있는 아랍 문화원 건물의 입면에는 수많은 카메라 조리개가 모여서 한편으로는 아랍식 전통 건물의 타일의 형태를 만들죠. 또 다른 한편에는 이 카메라 조리개가 빛의 양에 따라서 조였다가 풀어지면서 건물 안에 찬란한 빛의 예술을 전개하죠.
그러면 삼성 미술관 건물에는 장 누벨이라는 사람이 어떤 건물을 지었지?
마리오보타의 건물 옆에 있는 철판이 녹슨 건물처럼 보이는 건축을 그가 지었어요. 밖의 모습은 기둥을 다양한 크기와 형태의 사각형 입방체로 만들어 인상적이기는 하죠. 그런데 이 비슷한 건축을 그는 어디 딴 데 또 한 번 지어 놓았더 라고요. 어느 게 먼저인지는 모르지만 외면적인 모습은 너무 비슷해요.
음, 좀 실망스러운데..
세월이 지나면 녹슨 것이 진행되니까 입면이 바뀌죠. 그런 점에서 운동성을 추구한다는 장 누벨의 태도가 잘 표현되었다고도 하겠어요. 그런데 안으로 들어가면 놀라운 정경이 하나 있어요. 건축의 모서리가 유리 창문으로 되어 있어서 다가가 보았죠. 그랬더니 놀랍게도 맞은 편 옹벽을 예술작품으로 만들어 놓았더 라고요. 녹슨 철근으로 상자를 만들어 옹벽을 따라 축조해 놓았어요. 거칠고 황량한 느낌을 주죠. 그런데 그 앞에 살아있는 대나무를 심어 놓았어요. 그 대비가 동양의 선적인 경지를 보여주는 듯해요.
오호, 자거라투스트라, 니는 행복했겠네? 그런 위대한 작가들의 작품을 직접 체험했으니 말이야.
그런데 말이에요. 아부지, 개별 건물들은 틀림없이 세계적인 작가의 탁월한 작품인데, 문제는 그것들이 모여 있으니 뭔가 답답한 거죠.
자거라투스트라야, 무슨 말이니?
그래서 제가 집으로 돌아오면서 그 답답함의 정체를 풀기 위해 고민해 보았죠. 그리고 이런 결론에 이르렀어요. 이건 너무 교과서적이잖아. 자 보자, 모더니스트 장 누벨, 포스트모더니스트 마리오 보타, 해체주의자 렘 쿨하스. 그러면 교과서에 나오는 순서 그대로이네. 한 가지가 빠졌는데 그게 뭐지? 아, 초현실주의가 빠졌군. 이렇게 생각하면서 밖을 돌아보니, 아니나 다를까 초현실주의적인 조각 작품이 하나 거기 버티고 있더 라고요.
그게 뭐지?
루이스 부르주아의 작품 ‘마망(엄마)’인데, 거대한 거미이죠. 이건 설명 안 해도 정신분석학적인 차원에서 성적인 상징이라는 것을 잘 알겠죠. 그러니 완벽하죠. 삼성미술관이란 건축사의 교과서예요. 아주 공부 잘하는 모범생들이 좋아하는 교과서 그대로이죠. 니체 아부지, 단정하고 바르게 살아가지만 답답하고 고루한 모범생들 말이에요. 삼성 리움 미술관은 그런 학생이예요. 그런 학생들은 모든 것을 잘 알지만 다만 느낌은 없죠.
자거라투스트라야, 그걸 ‘삼성’이라 한단다. 너도 KS마크라면서, 그러니 ‘삼성’ 아니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