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세이온의 올빼미 – (1) 너희가 힙합을 아느냐
?
?박민미(동국대학교 강사)
?
가면 올빼미 /사진 : http://blog.aladin.co.kr/bootoyou
‘무세이온의 올빼미’는 음악에 대한 철학적 성찰의 장으로 기획되었다. 하지만 여기서는 올빼미를 ‘음악을 듣는 귀’의 아이콘으로 삼고자 한다. 우리가 귀로 여기는 귓바퀴는 바깥에서 감지되는 진동을 증폭하는 장치이다. 흔히 튀어나온 귓바퀴가 없는 올빼미를 귀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림 속 ‘가면 올빼미’의 귓바퀴는 바로 얼굴 전체이다. 우리는 밤낮 없이 일하는 비효율적인 일꾼인 반면, 가면 올빼미는 얼굴을 돌아 증폭된 소리를 감지한 덕에 천부적인 사냥 능력을 가지게 되었고, 그로 인해 잠깐 사냥하고 종일 노는 부러운 존재이다. 우리에게도 귓바퀴가 없었다면 인류는 종일 놀면서 얼굴로 음악을 듣는 예술가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러한 지복(至福) 속에서 과연 노래가 만들어질까? 인간은 다행히 귓바퀴가 있었기 때문에 음악을 만들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자연의 연주를 가장 잘 들을 수 있는 건 올빼미이겠지만 자연이 주지 않은 음악을 구성하는 건 고통 속을 더듬거리고 있는 우리와 같은 존재라 믿는다.
?
지은은 눈이 펑펑 쏟아지던 날 내게 말했다.
“언니, 난 왜 눈을 보면 화가 날까? 내 마음속엔 음악이 없어서인가 봐…”라고.
?
나는 그 메일에 답을 쓰지 않았다. 지은의 말은 ‘눈’에 대한 것도 아니고, ‘화남’에 대한 것도 아니고 ‘음악’에 대한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이내 지은의 말은 내 귓가를 맴도는 화두가 되었다. 이 짧은 두 문장을 진지하게 생각해서 답하기 시작하면 불어나고 불어나고 불어나서 우주가 꽉 차버릴 것 같았다. 그 메일에 답하지는 않았지만, 이상하게도 순간순간 그 말이 떠올랐고, 그의 말은 어떤 시의 한 구절처럼 내게 각인되었다. 그리곤 이렇게 답하게 되었다.
?
“너의 그 말이 곧 노래야. 너는 이미 노래하고 있어. 우린 항상 이렇게 노래하고 있어.”
?
이 글은 지은의 글에 대한 뒤늦은 답장이다. 그리고 노래에 대한 나의 생각이다. 이 글에는 지은과 키비와 나의 아들과 그리고 나와 내가 좋아하는 음악들이 얽혀 있다. 음악은 이렇게 사람들의 영혼에 다리를 놓는다.
?
힙합과의 조우
?
어떤 사람을 감지하는 지름길은 그가 듣고 있는 음악을 함께 듣는 일인 듯하다. 젊은 시절 녹음 테입에 일일이 좋아하는 곡을 담아 선물로 건네는 행위는 정성들인 고백에 다름 아니었다. 좋아하는 친구가 즐겨듣는 곡은 이내 내가 즐겨듣는 곡이 된다. 친구가 좋아서 그의 노래를 좋아한 것도 같고, 서로 좋아하는 것이 닮았기에 친구가 되었던 것도 같다. 친구는 이렇게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그런데 아이들의 경우는 좀 다르다. 아이들은 어느 나이까지는 음악 향유에서 부모가 끼치는 영향이 크다. 나의 아이들은 내가 즐겨듣던 ‘자우림’ 김윤아의 솔로 앨범 ?유리가면?에 수록된 전곡을 외고 있다. 비틀즈의 ‘오브라디 오브라다(Ob-la-di ob-la-da)’가 나오면 두들길 수 있는 모든 것을 두들기며 따라 부른다. ‘렛잇비(Let it be)’, 그리고 생각난 김에 ‘케세라세라(Que sera sera)’도 함께 부른다. 그리곤 뜻을 전해준다. ‘인생은 흘러가는 것’이라는 ‘오브라디 오브라다’의 뜻, ‘그것인 채 두어라’라는 ‘렛잇비’의 뜻, 그리고 ‘무엇이 될 것이든지 될 그것대로 될 것이다’라는 ‘케세라세라’의 뜻을 아이들의 귀에 못이 박히게 전해준다.
그러던 어느 날, 사춘기를 겪는 아들의 MP3를 듣다가 그의 영혼(아들에 대해 이런 말은 좀 간지럽기는 하지만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다)의 울림을 느꼈다. 다이나믹 듀오, 드렁큰 타이거, 화나, 가리온, 키비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힙합 뮤직들이 아들의 가슴에 가득 차 있었다. 아들의 MP3에 담겨 있는 모든 노래를 즐기게 된 것은 아니다. 화나의 ‘엄마 지갑’ 같이 괴로운 주제를 다뤄 즐겨 듣게 되지는 않는 노래도 있다. ‘엄마 지갑’이 다루는 내용은 이렇다. 오락실 가고 싶은 국민학교 1학년생 병환이가 엄마 지갑에서 돈을 슬쩍한 뒤 엄마에게 고백하면 용서받을 수 있다는 검은 옷의 낯선 형아의 말을 듣고 손을 댈까말까 망설이다 300원을 훔치려는 찰나, 엄마에게 들켰다는 내용의 가사이다. 여기서 병환이가 초등학생이 아니라 ‘국민학생’인 것으로 미루어, ‘어른, 너희도 엄마 지갑에 손 대며 크지 않았니?’라고 웅변하는 내용인 것이다. 내게도, 아들에게도 괴로운 주제이므로 패스.
화나의 음색은 정말 독특하고 매력적이다. 화나가 피처링한 드렁큰 타이거의 ‘주파수’는 즐겨 듣는 곡 중 하나이다. 화나의 가늘고 떨리는 색다른 음색은 그 음색 자체가 자기 주장으로 들렸다. 드렁큰 타이거의 ‘난 창작의 노예, 창작의 고뇌’를 외치는 ‘몬스터’에서 반복되는 ‘발라버려’는 지난 몇 년간 즐겨 부른 크라잉넛의 ‘말달리자’의 ‘닥쳐’만큼이나 신나서 부르는 대목 중 하나가 되었다. 키비의 ‘소년을 위로해줘’는 은희경의 [소년을 위로해줘]를 읽을 때 듣고 또 들었다. 가리온의 ‘소문의 거리’는 두 아들이 메타 파트와 나찰 파트를 번갈아 하며 부르는 틈에 나도 슬쩍 끼어 읊조린다. 이렇게 아들의 음악을 함께 즐기면서, 우리는 엄마와 아들에서 ‘친구’로 거듭났다.
?
힙합 정신
?
사진 : heykorean.com
어떤 것을 즐기는 차원이 깊어지면, 대개 ‘이게 왜 좋게 느껴지지?’라는 질문이 슬슬 발동된다. 힙합의 묘미는 비트와 랩, 그리고 ‘힙합 정신’이다. 그리고 이 중에서도 묘미의 핵은 비트와 랩이라는 기술적인 요소보다 ‘힙합 정신’으로 수렴된다고 생각한다.
모든 팝에도 비트와 가사가 있다. 상대적으로 힙합에서 멜로디나 다양한 악기가 어우러진 화음 등의 여러 다른 음악 요소는 ‘뺄 수 있으나’, 비트와 랩은 힙합 음악에서 ‘뺄 수 없는 것’을 이룬다. 그런데 동시에 힙합은 비트와 랩만 있어도 ‘갖출 것을 다 갖춘’ 힙합 곡이 된다. 내면의 심장 박동을 표현할 수 있는 두들길 수 있는 무언가(심지어 아무것도 없을 때는 비트박스로)와, 하고 싶은 말을 들려줄 수 있는 목소리를 가지고 있으면 힙합 음악을 만들 수 있다는 점, 그것이 힙합의 가장 큰 매력이다. 음악 창작의 세계를 거대한 벽이라고 느끼지 않고 언제든 출입할 수 있는 세계로서 음악 창작을 향한 ‘오솔길’이 되어 주는 음악, 그것이 힙합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트로트 정신’이라든가 ‘발라드 정신’이라는 말은 잘 들리지 않는다. 하지만 ‘록 정신’, ‘힙합 정신’이라는 말은 록 뮤지션이나 힙합 뮤지션, 혹은 향유자 사이에서 끊임없이 추구되고 의미화된다. 록 정신이 기성 세대의 권위와 그 폐해에 도전하려는 청년 세대의 저항 의식과 결부되어 있다면, 힙합 정신은 주류 (백인) 사회의 사회적·문화적 질서에 도전하려는 비주류 (흑인) 사회의 저항 의식과 결부되어 있다.
힙합 정신의 첫 번째 면모가 바로 이처럼 악기나 전문성에 호소하지 않고 최소한의 음악적 요소만 갖추어도 음악의 창작을 통해 억눌린 것을 표출하는 자유로움일 것이다.
힙합의 탄생은 1970년대 초 DJ들에 의한 것이었다. 디스코가 유행할 때 클럽에서 DJ가 간주 부분, 즉 가사 없이 비트만 나오는 브레이크(break)를 반복하여 틀어주면, 춤을 추는 사람들은 중앙으로 나와서 춤을 추었는데, 이들의 춤을 ‘브레이크 댄스’라고 하고, 이 춤을 사람들을 ‘브레이크 보이’, 즉 비보이(B-Boy)라고 불렀다. 이것이 거리 문화로 번져갔고, 거리 문화 중 낙서 그림, 즉 그래피티까지 결합되면서, 힙합 문화의 네 요소로 랩, 디제잉, 비보잉, 그래피티가 꼽히게 된다. 1970년대 말에 미국의 동부에서 시작되어 서부로 퍼져나간 힙합은 어느덧 청년 문화로 자리잡게 된다. 한국에서 힙합 문화는 이들 넷 모두를 갖춘 조합보다는 선택적 조합이 이루어지고 있다.
힙합에서 랩을 작사해 구사하고 이끌어가는 것을 엠시잉(MCing), 혹은 래핑(rapping)이라고 한다. 음반에 스크래칭을 하는 등의 조작을 통해 비트를 생산해내는 디제잉(DJing)과 함께 힙합에서 빼놓을 수 없는 두 요소이다. 랩에서 시의 운율에 해당하는 라임(rhyme)을 갖추면 기술적으로 더 매혹적인 랩이 만들어진다. [한국 힙합-열정의 발자취]에서는 미국에서 힙합을 직수입해 영어로 된 랩을 하던 시대를 거쳐 이제 한국어 라임이 3차원 라임으로 진화했다는 것을 여러 가사를 통해 보여준다. 그 중 소개된 화나의 ‘웬 아이 플로우(When I Flow)’의 라임 구사를 보면 이렇다.
?
“When I flow 펜과 종이를 양손에 잡고 생각속 에 담겨진 내 각본에 맞춰 배짱 좋게 라임을 통해 마음껏 소리의 광폭한 파동을 일으켜”
?
위의 가사에서 밑줄 친 부분은 ‘ㅐ/ㅔ, ㅏ, ㅗ’가 반복되는 라임이 흐르고 있다. 마이스터징거(Meistersinger)의 경지를 우리의 힙합퍼들이 구현하고 있는 것이다.
라임은 랩의 기술적 측면으로서 계속 고민되어야 할 요소일 것이다. 힙합 내부에서 ‘영어 가사로 랩을 해야 하는가, 한국어로 랩을 자연스럽게 구사할 수 없는가?’ 하는 오랜 고민과 논쟁이 이런 경지를 만들어내었다. 이렇게 끊임없이 표현 형식을 고민하는 정신이 힙합 음악에도 흐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힙합에만 고유하지 않은, 더 폭넓은 예술의 정신, 즉 이전의 표현 형식을 모방하면서도 뛰어넘으려고 하는 정신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볼 수 있다.
무엇보다 힙합 정신의 구성 요소로서 가장 중요한 것은 랩 가사를 관통하고 있는 주제 의식이라고 생각한다. 가리온도, 키비도, 화나도 고민하고 있는 ‘삶’ 밀착적인 주제가 힙합이라는 문화를 통해 우리에게 하나의 ‘정신’으로 공유되고 있다. 사실 얼핏 들으면 ‘삶’이라는 것은 너무 뭉뚱한 주제로 들릴 수 있다. 힙합퍼들은 자신의 주제 의식을 때론 별다른 수식어 없이 그저 ‘삶’이라고 표현하지만, 무수히 많은 삶의 양식을 고려할 때, 이들의 마음속에 있는 삶은 그저 도처에 널려 있는 ‘자연의 삶’은 아니다. 래퍼의 혀를 자르고 래퍼의 자유롭고자 하는 영혼을 도려내는 거대 상업주의 문화와 얽혀있는 삶도 삶이다. 힙합퍼는 거대한 주류의 물결을 이루고 있는, 그러나 한낱 세인(世人, das Mann)일 뿐인 군상(群像)의 삶과 다른 삶 속에 있다. 세인의 삶의 논리는 ‘돈 벌어 먹고 살아남기’의 논리이다. 여기에 질식되지 않고자 자본의 논리와 상업주의 문화에서 뛰쳐나온 삶, 저 실로 다양한 삶의 흐름에 주목하고, 허락되어 있지 않았던 길을 개척해낸 삶이 바로 힙합퍼들이 말하는 삶이라고 생각한다. 주류 사회가 살라고 하는 대로 사는 삶이 아니라, 그야말로 ‘스스로 기획한 삶을 살아 가는 삶’. 여기에서 느껴지는 고뇌, 고독, 고통, 낙담, 바람, 희망, 상상, 그리고 위로. 이것이 힙합 정신일 테다.
끝으로 또 하나의 힙합 정신은 ‘크루(crew)’의 정신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음악 장르에 비해 힙합퍼들은 마음이 맞는 이들끼리 음악적 교류와 유대 관계를 맺는다. 이를 ‘패밀리’라고도 하고 ‘크루’라고도 한다. 힙합의 구성 요소의 하나인 비보잉을 하는 비보이들은 같은 연습장을 써야 하는 이유에서, 래퍼들은 컴필레이션 음반이나 피처링 작업 등의 교류 이유에서 크루를 맺는다. 그리고 크루에 기반해서 음반 회사인 레이블을 설립하곤 한다. 크루의 정신은 ‘연대(solidarity)’의 정신이다. 가진 자가 더 많은 것을 갖기 위해 하는 ‘카르텔’이 아니라, 다양한 처지에서 느끼는 질곡을 함께 헤쳐 나아가기 위한 공감의 정신이 힙합퍼들 사이에는 자연스럽게 공유되어 있다.
?
이 땅에서 힙합퍼로 산다는 것
?
아도르노가 ‘문화 산업’이라는 말을 통해 ‘문화마저 산업화하는 데 대한 비판’을 수행할 때, 아도르노에게는 문화에 대한 기대가 있었다. 현실 속에서 모든 것이 수단으로 전락하여, 인간의 영혼마저 돈벌이의 수단으로 전락한 이 기능연관적인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최소한 문화만은 기능연관에서 벗어나 인간이 자유로운 존재라는 것을 보여주는 유일한 영역이라고 생각했다. 끊임없이 달라지고자 하는 시도, 그것이 아도르노에게는 문화의 핵심이었다.
‘인디 문화’는 아도르노의 문제의식대로 문화조차 더 많은 이윤의 수단으로 삼는 자본으로부터 독립하여 창작의 자유를 지키기 위한 대안적 몸부림이다. 그러나 서구에서 인디 문화를 고수할 수 있는 사회 상황과 우리의 사회 상황은 많이 다르다. 서구 사회에서는 상업적으로 성공하지 못한 예술가라 하더라도 최소한 굶어죽지는 않을 정도의 복지가 이루어져 있다. 국가 차원에서 마련되어 있는 복지 외에도, 기업의 활발한 메세나 활동도 문화적 창의성을 키우는 모판을 제공한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 인디 문화를 지향하는 예술인들은 실로 살얼음판 위에서 문화적 자유를 추구하고 있는 셈이다. 젊은 날을 소위 돈벌이와 상관없는 ‘딴따라’로 대책없이 보내고 나면 노후의 삶이 암담하게 기다리고 있다.
2006년에서 2008년까지 ‘비보이를 사랑한 발레리나’의 공연을 이끈 힙합 춤꾼 이우재는[힙합, 새로운 예술의 탄생]에서 힙합의 정신은 자유를 원하는 정신이며,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퍼부을 수 있는 자신감이라고 말한다. ‘힙합인은 돈, 지식, 학벌, 권력, 아무것도 가지지 않아도 당당하게 자신의 가능성을 믿는다’고 선언한다. ‘약한 사람에게는 무한히 따뜻한 자들이지만, 강요된 틀에는 타협하지 않고, 개인의 개성과 생각을 가로막는 틀에 저항하고, 어떤 도그마로써 자유를 억압하는 데 저항하는 자들이 힙합인’이라고 말한다. 힙합 정신은 ‘야생마처럼 길들여지지 않은 강하고, 실험적이고 모험적인 도전 정신’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힙합퍼를 ‘새로운 예술인’이라고 규정하며 예술이 어떤 불가해한 피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느낌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데서 성립한다는 명쾌한 예술관을 펼친다. 그의 논의에서 인상 깊었던 것은 ‘춤꾼으로서 연습은 현재를 위해서 하는 것이며 춤을 추는 순간은 항상 현재이다’라는 대목이었다. 더 나이가 들거나 무슨 사고가 나면 더 이상 춤을 표현할 수 없는 제약 아래 운명적으로 놓인 춤꾼에게는 다른 누구보다도 ‘현재와 현재 하고 있는 실천이 소중하다’는 의식이 웅변되고 있었다.
불교에서는 현재의 시간을 ‘찰나’로, 그리고 영원의 시간을 ‘억겁’으로 표현한다. 불교에서 말하는 ‘찰나’란 1초의 1/75에 해당하는 순간이다. 수학으로 표현하면? 수학에서 가장 짧은 순간은 1초를 무한수로 나눈 값이다. 현재란 0, 즉 없는 것(無)에 근사한다. 현재를 ‘수학’으로 사고하면, 다시 말해 ‘이성’으로 사고하면 현재는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된다. 그러나 춤을 추는 사람의 현재는 춤추는 행위가 분출되는 순간으로 인해 참답게 현존하는 작품이 된다. 이 대목에서 하이데거의 [예술 작품의 근원]이 떠오른다. 이 저서에서 하이데거는 라임을 구사하며 예술에 대한 철학을 펼친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작품이 존재하는 것은 ‘충격(Stoß)이 열린 장에 들어서는 것으로, 어떤 섬뜩함이 우리에게 밀어닥침(aufstoßen)으로써, 지금까지 평온해 보이던 것이 무너진다(umstoßen). 작품 자체가 존재자의 열려 있음 안으로 순수하게 밀려들(entr?cken)수록 작품은 이러한 열려 있음 안으로 우리를 밀어넣으면서(einr?cken), 우리를 습관적으로 익숙한 것으로부터 벗어나도록 우리를 떠밀어내는(herausr?cken) 변화(Verr?ckung)를 일으킨다.’
하이데거는 이 대목에서 ‘부딪치다(stoßen)’와 ‘움직이다(r?cken)’의 두 표현의 여러 변형을 사용하여 예술 작품의 본질을 규명하고 있다. 예술 작품은 우리에게 친숙한 것들을 흔들어서, 가려져 있던 것을 떨쳐내고 우리를 열린 장으로 데리고 가 진리를 흔들어 깨우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것이 시(詩)이든 회화이든 건축이든 힙합이든, 어떤 예술 작품은 팔리거나 사용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도구적 사용으로부터 떠나, 우리의 습관적인 사고, 습관적인 행위를 흔들어 깨워, 그것 너머에 숨어 있던 진리를 솟아나게 하는 것이다.
나는 순간순간을 아파하며 민감하게 느끼고 고민하고 있는 힙합 정신에서 미래를 본다. 모든 사람들이 물질을 추구하고 물질에 안주하고 물질을 위해서 오늘을 달리고 있을 때, 지하철 어느 모퉁이를 연습장 삼아 춤추었던 사람들, 비 새는 공동 작업실에서 물을 퍼내가면서 음악 작업을 하는 사람들, 이들의 젊음과 열정이 ‘돈 벌어 먹고 살기의 쇠 창살’에 갇힌 인간에게 희망이라는 진실을 느낄 수 있게 하리라고 생각한다. 여기, 키비라는 한 힙합 음악가와의 인터뷰를 통해 우리 시대 ‘젊은 예술가의 초상’을 함께하기 바란다.
(다음호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