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가 힙합을 아느냐 (2) [무세이온의 올빼미]

너희가 힙합을 아느냐 (2) [무세이온의 올빼미]

 

?
박민미(동국대학교 강사)

?

?

?나는 순간순간을 아파하며 민감하게 느끼고 고민하고 있는 힙합 정신에서 미래를 본다. 모든 사람들이 물질을 추구하고 물질에 안주하고 물질을 위해서 오늘을 달리고 있을 때, 지하철 어느 모퉁이를 연습장 삼아 춤추었던 사람들, 비 새는 공동 작업실에서 물을 퍼내가면서 음악 작업을 하는 사람들, 이들의 젊음과 열정이 ‘돈 벌어 먹고 살기의 쇠 창살’에 갇힌 인간에게 희망이라는 진실을 느낄 수 있게 하리라고 생각한다. 여기, 키비라는 한 힙합 음악가와의 인터뷰를 통해 우리 시대 ‘젊은 예술가의 초상’을 함께하기 바란다.

– 젊은 예술가의 초상-키비(kebee)를 만나다

 

?
키비( 2007년 앨범)힙합 인디 레이블의 아이콘인 ‘소울 컴퍼니’의 사장이자 힙합 뮤지션인 키비를 만난 건 2011년 2월 25일 저녁 6시 10분이었다.

‘소울 컴퍼니’ 위치를 설명하기 곤란했는지, ‘상상마당’ 앞에서 보기로 했다. ‘상상마당’은 한국철학사상연구회가 ‘너는 홍대 앞에서 클럽 가지? 나는 홍대 앞에서 철학한다!’라는 모토로 철학 강좌를 연 홍대 앞 문화 공간이다. 키비는 상상마당에 미리 나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초면이지만 어렵지 않게 알아볼 수 있었다.

키비의 단정하고 반듯한 미소가 반짝였다. 처음엔 뭐라 말해야 할지 많이 걱정하고 갔는데, 환대받고 있다는 생각, 그래서 무엇이든 물을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상상마당에서 소울 컴퍼니로 가는 200여 미터의 짧은 거리 동안, 그 잠시도 놓치지 않고 몇 가지를 물었다. 대뜸 ‘어찌 그리 단정하냐?’고 물었다. 웃으며, ‘그래서 자신들의 힙합 공연에 아이들을 데리고 온 부모들께서 힙합 공연에 아이들만 보내도 되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시더라’ 한다. 은희경 작가의 작품 『소년을 위로해 줘』를 쓰기 전에 키비를 벌써 만났던 거냐와 주인공 소년이 키비를 모델로 했던 거냐를 물었더니, 그건 아니고 은희경씨가 소설을 쓰면서 고민을 하는 글을 읽고 키비가 먼저 연락을 했다고 한다. 뭔가 도움이 되고 싶었다고. 그리고 지금은 정신적 스승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런 얘기를 나누며 잠시 가고 있었는데, 뒤에서 어떤 여학생 둘이 내게 묻는다. 혹시 저분 키비 아니냐고. 맞다고 했더니 “꺄~” 소리를 지르며 키비에게 자기들을 소개해 달라고 한다. 불과 이들보다 1분 앞서 만난 내가 키비에 대한 기득권이 있는 기분이 드는 순간이었고, 함께 사진을 찍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며 지금 만나고 있는 키비의 유명함에 내 어깨가 으쓱해졌다.

뮤직 비디오 화면만으로 보던 키비의 사무실, ‘소울 컴퍼니’는 가운데 넓은 공간의 사무실과, 내부의 작업실들로 구성된 공간이었다. 네모난 사무실인데 난 그 공간이 둥글다는 느낌을 받았다. 나누는 이야기가 둥글었던 것 같다.

가장 먼저 꺼낸 질문은 ‘힙합을 청년 문화라고 생각하는데, 생각보다 힙합을 많은 청소년이 듣지는 않더라’는 것이었다. 키비는 이를 인정했다. ‘오버 그라운드든 언더 그라운드든 클럽에 찾아와 듣고, 온라인에서 활동하는 언더 그라운드 음악을 찾아 듣는 건 소수’라는 것이다. 찾아들을 수 있을 정도의 취미 시간이 허락되지 않은 청소년들의 얼굴이 머리를 스쳤다.

단도직입적으로 키비에게 ‘오버에 못 올라갔나, 안 올라갔나’를 물었다. 키비는 이렇게 답했다.

키비: ‘그걸 정해놓고 하는 건 아니다. 음악하는 사람의 목표 지점은 각자 다르다. 유명해지는 것이 좋은 사람도 있고, 자기 음악을 제시하고 싶은 사람도 있고 등이다. 나는 음악을 하는 것 자체가 동기였다. 자기가 음악 생산에 다 관여할 때 하고 싶은 것을 자유롭게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음악을 하려는 사람에게 열린 길 중에는 기획사에 들어가는 식의 오버 그라운드 방식도 있지만, 이 중에서 기회를 스스로 만드는 사람들이 생겨났고, 그것이 곧 언더 그라운드이고, 그게 인디 음악이다. 시장을 스스로 만들어내고 청중을 스스로 만들어내는 것이다.’

‘시장이라는 표현을 쓴다’라고 물었다. ‘그리고 현실의 무엇이 키비에게 시장이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언더를 하게 했나?’라고도 물었다. 키비는 답했다.

키비: ‘22세에 창업했다. 형동생 하는 친구들이 회사를 만들어 7년 왔다. 기획사에 들어가 오디션을 보거나 데모 시디 갖고 다니던 친구들도 있었고, 스스로 만들어봤던 사람들도 있었다. 그런데 그 중 자기 길 가는 사람도 있고 음악을 안 하는 사람도 생겼다. 음악의 유일한 길이 기획사 가는 것만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들이 입증하는 거다. 기획사 가면 자기 음악보다 기호에 맞는 음악만 억지로 하게 된다. 같이 음악 시작했던 사람 중에 자기 색 잃고, 그렇다고 상업적 성공을 하지도 못한 친구를 보았다. 나는 음악을 하는 사람이자 동시에 생활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음악을 구입해주는 사람이 있어야 내 삶이 유지되니까. 나는 취미로 음악을 하는 게 아니고 그게 내 삶이니까 그걸 통해 살기도 하고, 그러면서 내가 존립하는 거다.’

‘음악을 하게 된 시점’을 물었을 때 키비는 중학생 시절을 기점으로 꼽았다.

키비: ‘중학교 방송반 하며 힙합을 점심시간마다 틀었다. 미국 본류 힙합. 궁금해 하다, 따라 듣다, 졸업하고 나서 고교 가기 직전, 클럽 가서 너무 충격적이고 즐거웠다. 프리스타일 랩. 비트에 맞춰 하는 즉흥랩을 보며 멋있고 놀라웠다. 지금 성격도 까불지 않는데 그 때는 더 조용했다. 말하고 싶고 억눌린 것이 있었는데 그 장이 모두에게 주어져 있었다. 뮤지션과 관객 모두에게. 나를 데리고 간 친구가 랩을 하더라. 나는 처음이어서 안 올라갔지만, 이 때 랩이라는 음악이 가슴에 들어왔다.’

‘음악을 만들기 시작한 것은?’

키비: ‘가사 쓴 건 고2때부터인데, 첫 작품은 가지고 있지 못하다. 당시 노트는 있다. 힙합은 가사량이 많고, 많을 수 있다. 메시지가 많을 수 있다.’

‘비트나 비보잉 등을 중시하는 힙합퍼도 있을 텐데. 키비는 가사에 집중하나?’를 물었다.

키비: ‘나는 처음에 힙합 문화는 몰랐고 랩이 좋았다. 랩하고 가사 쓰고 프리스타일하면서 힙합 문화를 이해하고 좋아하게 되었다. 반대 경우도 있다. 힙합 문화에서 출발하는 사람들도 있다.’

‘랩에서 라임이 중요하다, 아니다에 대해 논쟁하며, 네 라임은 1차원적이라는 둥 서로를 극단적으로 비방하며 하는 논쟁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를 물었다.

키비: ‘나는 논쟁 자체가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 뭐가 옳든 그르든 한 현상에 대해 이야기를 할 만큼의 에너지가 오간다는 게 중요하다. 사실 정답이 없다. 음악에서 스타일을 만들어내고 하다보면 정답이라는 게 무의미하다. 누군가 정답을 만드는 순간, 그것에 대한 대안이 만들어지니 정의내리는 게 시간낭비이다. 하지만 누구든 답을 만들고 싶어 하고, 그 과정에 동참하는 사람이 힙합씬을 활발하게 만들고 있으니 답을 모색하는 과정 자체가 의미 있지 않은가?’

‘미국 힙합씬에서 배틀하다 죽이기, 디스하기, 분쟁 등의 사례가 있다. 한국 힙합씬에서는 이런 게 어떻게 드러나나?’

키비: ‘한국에서는 뮤지션, 매니아, 힙합 범주 밖에서 보는 사람들 모두 조금 오해하는 게 있다. 여기는 미국이 아니며 우리 힙합은 우리 문화 속에서 하는 거다. 흑인 문화가 그대로 우리 삶 속에 들어올 수는 없는 거다. 우리 문화와 사회적 흐름 안에 어울리는 형태로 힙합이 발전하는 거고 나라마다 다르게 발전한다. 미국 문화를 보면서 가사에 그런 분쟁 써야 해 라는 생각을 하는 친구도 있는데 그건 그들의 철학이다. 하지만 우리는 미국 문화와 다른 문화 토양 속에 있는데, 그런 걸 그대로 가져오는 건 이율배반 아닌가 싶다. 우리 풍토와 상황에 어울리는, 내 스스로가 편한 마음으로 음악을 하고 싶다. 나는 서정적인 랩으로 표현하는 것을 추구한다. 우리 문화 안에서, 우리의 흐름 안에서 형성된 내 성격에 따라 나는 음악을 해가고 있다.’

‘요즘 들어서 키비의 음악 스타일 달라졌다는 평도 있더라.’

키비: ‘그건 신경 안 쓴다. 그때그때 하려는 게 있고 앨범에서 성취하려는 것 있다. 10년 여 음악을 해왔다. 그동안 어떤 굴곡을 가졌다고 내 음악에 결론을 낸 게 아니다. 앞으로 성취해야 할 음악이 훨씬 많기 때문에 변했다는 평은 나를 흔들지 못한다.’

‘그렇게 붙들려고 하는 힙합, 힙합의 본질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코어는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키비: ‘삶이다. 무슨 얘기냐면, 힙합은 다른 장르에 비해 훨씬 더 말에 가깝다. 더 날것이다. 정제되지 않은, 익히지 않은 날고기 같은 것. 힙합 음악에 내 삶을 그대로 투영할 수 있고, 삶을 그대로 담아낼 수 있다. 그래서 더 자유로운 것 같다. 물론 록도 자유다. 음악의 정신은 동일하다고 생각한다. 힙합 음악 속에 담긴 자유는 겪은 삶이 있고, 겪은 삶을 삶 그대로 풀어낼 수 있는 음악이라는 의미에서 자유다. 그렇기 때문에 거기서 자유를 만끽하는 거다. 힙합은 다른 음악 장르보다 훨씬 더 말에 가깝다. 그래서 정제해서 만들지 않아도 분출해낼 수 있는 특성이 있다.’

‘이런 생각 형성에서 가장 영향을 받은 것은 무엇인가, 혹은 사람은 누구인가?’

키비: ‘가리온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았다. 한국 사회, 한국의 말에 가장 맞는 힙합 음악을 추구하는 정신을 배웠다. 가리온의 메타 형은 불혹으로 나와 띠동갑이다. 2011년 2월 23일에 있었던 ‘제8회 한국대중음악상’ 시상식에서 가리온이 ‘올해의 음반’, ‘최우수 힙합 앨범’, ‘최우수 힙합 노래’ 등 3관왕의 쾌거를 이뤘다. 굉장한 사건이 아닌가?’

‘키비의 영향을 받은 사람은?’

키비: ‘지금 가르치는 사람은 있지만 내 음악 시간이 좀 더 흐르면, 영향을 받았다는 사람 생기지 않겠나?’

‘음악을 만들어내고 창조하는 사람. 이전에 없었던 걸 창조하는 사람을 보면 경외의 마음을 느낀다. 글을 몇 자 쓰는 사람으로서, 글 쓰는 건 재배열의 성격도 있는 것 같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는 거니까. 그러나 음악을 창작하며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내는 창작자로서 느끼는 창작의 고뇌는 무엇인가?’

키비: ‘나도 무에서 나오는 건 없다고 생각한다. 살지 않고는 무엇이 안 나온다. 경험했기에 음악이 나온다. 창조하는 사람은 관찰하는 능력이 뛰어난 듯하다. 모두가 많은 걸 겪으며 사는데, 그것을 관찰해내고 기록해내고 남기는 사람이 예술가라고 생각한다. 자기와 맞닿아 있는 걸 접하고 느끼면 좋아하는 사람이 예술가인 것 같다. 삶이 없는 예술은 없다고 생각한다. 지금은 내 삶의 궤적이 더 다양해져야 한다고 느낀다. 대학을 다닐 때에는 친구들과 내가 공감하는 것이 있었다. 그런데 점차 나는 음악하고, 다른 친구들은 직장 혹은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하다 보니, 서로 나눌 얘기가 없어지는 것을 느꼈다. 요즘은 예술 범주 아닌 사람들과 만날 기회가 적어지니, 서로 공감할 것이 결국 사랑밖에 안 남지 않았나 싶다. 옛날에는 사랑 얘기 질색했는데, 이제 건드릴 주제가 사랑일 수도 있겠다 싶다. 얼마나 삶을 살고, 겪어서 음악을 풀어낼까 하는 게 과제인데, 연애하다 상실하고, 일 안 풀려 술 먹으며, 그래 이것이 가사 소재가 되네 하며 그런 식으로라도 위안한다. 현재 창작의 고뇌라면 바로 이것이다. 다른 사람의 삶과 조우할 지평을 넓혀야 하겠다는 것. 쉽지 않겠지만 말이다.’

‘유네스코 예술가 정의가 자기를 예술가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경제는 먹고 살기, 정치는 공존의 문제 등 삶과 절박한 연관을 갖고 끊임없는 분쟁과 갈등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있다. 경제와 정치는 잘 못되면 누군가를 파멸시킬 수도 있다. 하지만 타인에게 고통이나 피해 유발하지 않는 무해한 방식으로, 인간이 바라는 것,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것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것이 예술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면서도 예술은 고통 속에서 태어난다. 키비는 어떤 의미에서 예술가인가? 그리고 예술가로서의 키비의 고통은?’

키비: ‘사실 나는 음악을 택했다고 생각하지 않고 음악이 내게 주어졌다고 생각했다. 하고 싶은 일을 통해 경제 생활도 하고 이걸 통해 세상에 내 존재 증명을 하게 되었다는 생각이다. 나는 아무리 봐도 내가 음악을 선택했다고 생각이 들지 않는다. 선택을 했다면 이것저것 중에 고민해서 이 길로 결정하는 것이었을 텐데, 나는 음악을 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항상 나는 음반을 내고 있으면서도 내가 과연 음악을 할 수 있나 물었었다. 예술가라는 자의식은 오랜 시간을 거치면서 힘겹게 형성되었다. 나는 가수라는 직업을 가졌고 노래를 하니까 가수야가 아니라, 항상 음악에 대해 고민하고 삶을 살다보니 어느새 받아들여진 것이다. 지금까지 낸 음반이 네 장이 된다. 앞으로 더 하겠지만. 근원적으로는 소외감이 있다. 나 이외의 모든 것들이 내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고립되어 있다는 감정들. 그건 어릴 때부터 느꼈고, 그건 모든 사람이 그렇다. 고독. 모든 사람이 다 그럴 것 같다. 다 가지고 있는 고독. 예술을 하기 때문이 아니라 살기 때문에. 예술처럼 무해한 영역이 또 없고, 예술은 인간의 정신을 풍요롭게 만든다. 음악을 통해 무엇이 전달된다. 나 혼자에게서 끝나지 않고 누군가에게 가치가 전달되었다. 그런 의식을 하면서 예술가로서 자아를 찾게 되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쓰고 있는 것, 만드는 음악이 누군가에게 들려지니까 어떤 대상을 두고서 쓰는 게 아니라 근본적으로 자기 만족을 위해 글을 써야 한다고 생각한다. 직업이니까 어쩔 수 없이 쓰는 가사가 아니라 나를 통과했기에 흘러나오는 것이 나의 가사이다. 이렇듯 자기에게 온전하고 충실하고 자기를 다 벗겨 놓을 수 있는 작품이어야만 감동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작품을 통해 내가 위로를 받아야 그 감동이 남에게 갈 수 있다. 누가 들으면 안 된다거나, 누구에겐 불편할 수 있다고 하는 검열 장치를 만들기 시작하고, 그런 장치 때문에 내게 감동을 주지 못하면 그건 다른 누구에게도 감동을 못 준다.’

‘정말 잘 위로 받은 느낌이 드는 가장 좋았던 곡은?’

키비: ‘‘소년을 위로해줘’이다. 20대로 넘어오며 강요된 남성성에 대한 문제제기였다. 내 고민을 그대로 드러냈고, 비슷하게 고민한 사람에게 전달되었고, 대표곡이 되었고 인기를 누렸다. 인기를 위해 장치를 만든 게 아니라 고민을 그대로 얹어놓았다.’

‘또 있나?’

키비: ‘2집의 ‘백설공주’를 들 수 있겠다. 동화 ?백설공주?로 스토리텔링했다. 음반이 나온 해는 2007년인데, 아이디어는 2003년에 떠오른 걸 묵혀놨다 발표했다. 나이 드는 여성에 대한 이야기였다. 여자에게 나이가 든다는 것의 의미가 궁금했다. 이 곡은 왕비가 주인공이다. 왕의 사랑을 받다가 백설공주가 나타나 사랑을 빼앗긴 그녀도 과거엔 사랑스러운 사람이었을 텐데. 어린 소녀로 인한 그녀의 상실감에 대해 풀었다. ‘거울아, 거울아, 누가 가장 예쁘니?’를 물은 게 왜 거울이었을까? 거울이 ‘백설공주’라고 대답하는데, 사실 거울은 자기다.’

대화를 하는 내내 키비의 사색의 깊이가 느껴졌다. 사색하는 뮤지션의 초상을 보았다. 끝으로 『한국 힙합-열정의 발자취』라는 책에서 ‘소울 컴퍼니’의 ‘소울’이 ‘疏鬱’, 즉 ‘답답함을 풀어헤침’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는 말을 본 적이 있어서 ‘키비’의 뜻을 물었다. 그의 대답은 의외였고 유쾌했다. ‘나중에 막 의미를 붙였는데, 그러다보니 내가 없더라. 사실은 스타크래프트 아이디를 만들다 옆에 있는 공룡 그림 보고 친 건데 그렇게 말하긴 뭐해 의미를 막 붙였었다. 그런데 그건 내가 아니니까 그냥 솔직히 말한다. 우발성의 계획(contingency plan).’

키비와 소울 컴퍼니와 힙합인에게 존경의 마음을 품게 한 잔잔한 대화였다.

– 끝으로, 지은에게

『어린왕자』에는 어른들은 새로 사귄 친구 얘기를 하면 ‘무슨 놀이를 좋아하나’와 같이 중요한 건 묻지 않고 ‘그 애의 나이는? 몸무게는? 그 애 아버지는 돈을 얼마나 버나?’ 등 숫자에 얽힌 질문만 한다고 투덜거리는 대목이 나온다.

어느덧 과거의 내가 이상하게 여긴 어른의 모습대로 나의 아들들에게 질문하고 있다. 아니, 오히려 훨씬 심하다. 때론 아이들이 예술가가 된다고 할까봐, 철학을 공부하고 싶다고 할까봐 전전긍긍하기도 한다. 예술을 좋아하는 공학도나, 철학에 조예가 깊은 회사원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철학을 공부하는 것이 고통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이들에게는 그 고통이 없길 바라는 마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이 글을 적으며 생각한다. 고통이 없는 삶이 어디 있단 말인가. 고통이 있고, 고통에 대한 표현이 있고, 고통에 대한 위로가 있는 것이다.

키비의 고통과 그 고통에 대한 위로가 ‘소년을 위로해 줘’로 승화되었다. 지은의 고통과 그 고통에 대한 위로가 그녀의 글로 승화되었다. 그리고 우리 곁에 무수한 비명과 위로가 맴돈다. 예술과 철학을 하는 사람이 내지르는 비명이 저렇게 노래로, 작품으로 승화되어 교호하고 있다. 아들의 MP3에 담긴 곡들은 그의 비명이자, 그의 존재의 외침이다. 내 마음에도 울려 퍼지는 공감의 박동은 기성세대가 되지 않으려는 나의 몸부림이다.

자, 지은. 래퍼로서 따라해.

 

눈이 부시게 온 눈을 보고

화가 나는 우리~

눈과 같던 하얀 마음

지금은 녹슨 구리~

지친 마음 위로하며

상처를 나눠 둘이~

아픈 비명 달래어 주는

노래 불러 주리~ (작사 박민미, 작곡 누구나, 노래 우리들)

딸바보, 그 가부장성에 대하여 [배운년, 미친년, 나쁜년]

김세서리아(성신여대 연구교수)

‘딸바보’라는 신조어가 있다. 딸에 대한 사랑이 지극한 아버지를 일컫는 말이란다. 어떤 연예인은 ‘딸바보의 원조’라 하고 또 다른 연예인은 ‘딸바보의 종결자’라 불리운단다. 주변의 남자 선후배들 역시 딸바보 임을 자처하는 이가 많아졌다. 핸드폰 단축번호 1번을 딸아이의 핸드폰 번호로 저장하기도 하고 컴퓨터, 핸드폰의 바탕화면을 딸아이의 사진으로 장식하기도 한다. 게다가 딸 아이 사진을 서슴없이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며 자랑까지 한다. 이처럼 아버지와 딸 관계가 남달라지고 ‘딸바보’라는 용어가 새로운 남성상을 대변하게 된 세태를 두고 가부장제가 그만큼 약화된 것을 증명하는 것일까? 이제는 어머니-자녀의 관계, 모성이 강조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자녀의 관계, 부성이 강조되는 시대가 이르게 된 것이라 말해도 좋을까?

-모성과 가부장제의 변주곡

가부장제와 모성이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것, 모성 이데올로기를 강조하는 것이 가부장제를 공고히 하려는 목적이라는 것은 거의 일반화된 논의다. 모성을 여성의 본질적 특성으로 규정하고 여성 일반에게 강요하는 것은 확실히 가부장제를 공고히 하려는 목적과 부합하며 이러한 생각에서 많은 여성주의자들이 모성을 여성억압의 원천으로 간주한다. 지나온 역사 속에서 모성과 가부장제가 상호 긴밀하게 연관되고 모성이데올로기가 가부장제에 봉사하였던 사례는 쉽게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바처럼 가부장제가 모성 강조에 언제나 협조적인 것은 아니다. 그 둘의 관계 양상은 생각보다 복잡하다. 모성과 가부장제는 긴밀한 관계에 놓여 있지만 종종 갈등하고 모순 관계에 놓인다. 그래서 가부장제 질서를 위하여 모성이 포기되거나 모성의 강조가 가부장제 질서를 무너뜨리는 상황을 산출하기도 한다. 많은 사람들이 전통 유교 사회에서 모성은 출산-태교-자녀교육의 과정으로 이어지면서 여성들의 중요한 규범적 책무로 되었으며 현대 사회에서는 그런 모성이 사라진 것이라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그것이 전적으로 다 맞는 것은 아니다. 전통 유교 사회에서 모성이 강조되는 궁극적인 목적은 가부장 질서를 유지하고 공고화 하는 데 있었고 따라서 어머니-자녀의 직접적이고 친밀한 관계 보다는 어머니-자녀 관계에서 나오는 정서(모성)를 다른 사람들에게로 얼마나 잘 확장하였는가가 더 중요한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자녀에 대한 사랑과 보살핌보다 부모 봉양이나 조상의 제사가 더 우선시되는 전통 유교의 정서는 이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전통 유교 사회에서 출산과 자녀 교육의 의미는 그 자체보다는 그것을 통하여 부모와 조상에 대한 효,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가부장제 질서를 공고히 하는 것에 있다. 때문에 자녀와의 친밀한 정서보다는 자녀를 기르는데 부지런히 애쓰고 그 성공을 바라는 것의 목적이 가문을 이어가며 죽은 사람을 잘 보내고 살아있는 사람을 잘 봉양하려는 것에 두어져 있다.

열녀 이 씨의 이름은 아무개로 선비 김 아무개의 아내이다. 나이 스물 하나에 그 남편이 병들어 죽자 바로 머리를 풀고 짚자리를 깔고 방에 틀어박혀 지냈다. 입관한 뒤에 관에 기대 곡을 하고 말했다. “장례가 끝나면 따라 가겠습니다.” 달을 넘기면서 임신한 것을 알게 되자 졸곡(삼우제 뒤에 지내는 제사) 때 곡을 하며 말했다. “홀몸이 아니니 감히 당신의 자식을 버릴 수 없습니다. 일 년 뒤에 따라 가겠습니다.” 해산을 해서 아들을 낳았으나 아들로 여기지 않고 여종을 골라 그에게 젖을 먹이게 하였다….“제가 복이 없어서 남편이 일찍 세상을 떠났으니 아내로서 마땅히 따라가야 합니다. 이제 저 어린 아이로 핑계를 대고 남편이 제게 말한 것을 어찌 감히 지키지 않겠습니까?” 아이를 불러 이마를 세 번 어루만지고 방으로 들어가려 하니 유모와 종들이 그를 엄하게 지켰다. ··· 여종이 자리를 정돈하고 베개를 편히 하자 손을 바로 해서 배에 얹고 눈을 감고 죽었다. 이 일이 알려지자 정려를 내렸다. (이옥李鈺, 「열녀이씨전烈女李氏傳」)

“당신은 이 미망인을 염려하지 마시고 편안히 지하로 돌아가십시오. 저는 당신이 죽으면서 남긴 부탁 때문에 차마 바로 죽지 못합니다. 당신의 상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면 아이의 나이가 5살이 되고 그때는 아이가 혼자서도 보전할 수 있겠지요. 그날이 되면 당신을 따르겠습니다.”·····탈상이 다가왔는데 딸이 병들어 거의 죽게 되었다.······시부모는 그가 다른 마음을 가지고 있음을 눈치 채고 여종에게 지켜보라고 주의를 주었다. 하루는 여종을 시켜 딸의 약을 구해오게 하고는 지니고 있던 남편의 작은 띠로 들보에 목을 매고 죽었다. (황용한黃龍漢, 「열부함양박씨전烈婦咸陽朴氏傳」)

이와 같이 가부장제 이념이 우선하는 사회에서 모성이데올로기는 가부장제를 유지하기 위한 중요한 장치이기는 하였지만, 다른 한편으로 모성 강조는 가부장제에 도전하는 것이었고 그래서 모성은 무시되어야 했다. 따라서 가부장제를 강조하는 만큼 모성이 강조되는 구도를 지니지만, 또한 가부장제 강화와 부계혈통을 잇는 목적의식이 강한 그만큼 어머니-자녀 관계에서 나타나는 친밀한 정서는 은폐되거나 축소되었다. 모든 여성에게 부과되는 모성이라는 본질적 의미로서의 정체성과 가족 구조의 재생산을 위해 부과되는 규범적 의미로서의 정체성은 가부장제 안에서 통합되는 상보적이고 필수불가결한 요소이지만, 이 둘은 종종 갈등 관계에 놓이게 된다. 또 가부장제 이념과 정서적 모성이 상충했을 때에는 가부장제 이념이 더 우선한다.

-어머니/딸, 아버지-딸, 그리고 가부장제

전통 사회는 현대 사회보다 훨씬 더 가부장제적이라고 여겨지고, 그래서 모성도 더 강하게 부추겨졌다고 간주된다. 분명 이념과 질서, 가문의 영화와 존속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으로 이해되었던 전통 사회에서 어머니-자녀의 관계는 강조된다. 하지만 그 관계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현대 가족에서만큼 어머니-자녀의 친밀감과 정서적 유대가 강조되지는 않는다. 즉 현대 가족이 모성에 근거한 자녀의 복지를 최우선으로 하고 그만큼 어머니의 직접적인 보살핌을 중요한 것으로 인식하는 것에 비하면, 전통 가족에서의 어머니 역할은 오히려 상대적으로 약하다고 할 수 있다.

전통 사회에서 모성의 핵심은 어머니-자녀 관계가 남성 혹은 가부장제에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에 달려 있었고, “가부장적인 친족체계 하에서 여성은 남성의 자녀를 갖는 자이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씨(seed)라는 개념”이었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모성을 강조하는 목적 자체가 가부장제 옹호와 부계혈통 강화에 있었으므로, 아이를 남성의 소유로 계승시키기 위해서는 아이를 낳고 기르는 어머니의 존재는 가능한 은폐되거나 축소되어야 한다. 따라서 가부장제 사회에서 어머니-자녀의 관계는 한편으로는 강조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강력하게 무시되어야 한다. 출산이라는 여성의 일을 본성으로 규정하면서 그에 수반하는 여러 가지 보살핌의 실천과 심리들을 통해 거대한 모성 이데올로기를 산출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출산을 하나의 도구로 사용하면서 철저하게 모성을 무시하게 된다는 것이다. 전통 유교 사회의 씨받이 같은 제도는 가부장제를 유지하고 공고화하기 위하여 출산과 연관한 모성을 강조하면서도 동시에 모성을 무시하는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에서는 딸들이 어머니에 대하여 분노를 느끼는 것은 자신에게 남근을 주지 않아서라고 본다. 또 어머니-아들의 관계는 어머니 자신의 낮은 지위와 충족되지 않는 욕망이 아들을 통해 성취될 수 있다는 기대로 설명된다. 때문에 어머니-딸의 관계와는 다른 위치에 놓인다. 아들을 위해 딸을 희생시키는 어머니는 딸들의 분노를 자아내는 위치에 있다. 이에 반해 어머니를 대신하는 자상한 아버지는 남성이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준다.

때때로 “나는 여성보다는 남성과 친하고 남성에게서 동료애를 더 느끼며 남성에게서 더 많은 도움을 받는다.”고 말하는 소위 사회적으로 성공하였다고 일컬어지는 여성들을 만난다. 그들의 말은 틀리지 않다. 그 어느 누구라도 자신을 도와주고 힘을 북돋는 사람에 대해서는 감사와 호의의 마음을 갖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구도 자체가 여성들의 지위를 상승시키거나 혹은 가부장제를 약화시키거나 남성과 여성의 화해 무드로 나아가게 하지는 않는다. 딸이 아버지와 친하게 되는 상황에는 여전히 아버지의 힘이 자리하고 있으며, 딸은 아버지 자신의 지위를 위협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이 반영되어 있다. 이 때문에 많은 남성들은 자기 아내에게는 주지 않을 도움, 사랑을 딸들에게는 아낌없이 준다. 이렇게 보면 아빠들의 딸바보 행진은 가부장을 넘어서는 길목이 아니라 가부장제의 또 다른 단면을 보여주는 것은 아닐지?

2011년 여름, 로맨스 드라마에서 여성이 ‘구원’(?)받는 법[배운년 나쁜년 미친년]

김은주(이화여자대학교 철학과 박사 수료)

신문을 보다가 다음과 같은 기사를 발견했다. 20-30대 미혼여성 60%. 조건 맞지 않으면 결혼하지 않겠다고 응답. 기사에 따르면, 설문에 응답한 여성은 비정규직이었지만, 자신보다 나은 조건을 갖춘 안정적인 정규직 남성과 결혼하지 못한다면, 차라리 독신을 선택하는 편이 낫다는 의견을 밝혔다. 혹자는 이 기사를 보며, ‘여자들은 원래 돈 많은 남자를 좋아해. 속물!’ 이라고 단정 짓고 끝낼지 모르겠다.

결혼이 행복한 로맨스의 결말이라는 공식은 무너진 지 오래다. 그렇지만 기사를 읽으면서 나는 이제 낭만적 사랑인 로맨스와 결혼은 완전히 분리되었구나란 생각이 들었다. 결혼은 이제 점점 더 경제적 안정성의 담보물이자 계급 상승의 수단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 점이 확실하지 않다면, 미혼 여성에게 결혼은 고려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현실에서 결혼과 로맨스는 결코 닿을 수 없는 평행선처럼 점점 더 무관해지고 있다. 하지만 이런 기사에도 불구하고, 소위 ‘로코’라고 불리는 로맨스 코메디와 일일 연속극의 여주인공은 여전히 로맨스에 몰입하며 결혼에 분투하면서, 답답한 일상과 현실의 시련으로부터 ‘구원’받으려고 한다. 그렇다면 2011년 멜로 드라마의 여주인공들은 어떻게 ‘구원’받는가?

앤서니 기든스에 따르면, 연예소설로서의 로맨스는 대중이 읽은 최초의 문학 장르이다. 특히 19세기에 혼인 관계를 경제적 가치와 분리하기 시작하면서, ‘로맨싱(romancing)’은 구애와 동의어가 되었다. 이러한 로맨스 개념은 부르주아 집단에서 주로 지속되었던 낭만적 사랑의 개념이 사회에 확산되면서, 사랑의 이상으로 자리 잡는다. 또한 혼인 관계가 보다 폭 넓은 친족 관계로부터 분리됨에 따라, 로맨스는 결혼으로 귀결되면서 더욱 더 특별한 의미를 지니게 된다. 낭만적 사랑인 로맨스에서 성공한 남편과 아내는 아이와 상관없이 부부 관계에 헌신하는 일종의 정서적 공동체를 성립한다.

그러나 이러한 전형적인 로맨스와 결혼의 관계는 현재의 트랜디 드라마에서 적극적으로 반영되고 있지는 않다. 하나의 변수를 더 넣어야 하는데, 그것은 바로 미혼인 여주인공의 직업과 경제 사정이다.

요즘 ‘로코’ 드라마의 여주인공은 세 가지 부류로 나뉜다. 집안의 경제 사정이 안정적이며 전문직인 여성, 경제 사정이 좋지 않지만 전문직 여성이 될 수 있는 여성, 별 볼일 없는 집안에 스펙조차 없는 여성. 첫 번째 부류가 무용과 졸업생이나 기생이 된 “신기생뎐”의 단사란, 두 번째는 재벌남과 결혼하고 싶어 하는 5급 행시를 패스한 공무원인 “내게 거짓말을 해봐”의 공아정, 세 번째는 스펙 자체가 없어 ‘식모’를 직업으로 택한 “로맨스 타운”의 노순금이다.

아직 종영을 하지 않은 로맨스 타운을 제외하고는 두 부류의 여주인공 모두 결국 결혼에 성공하는 해피엔딩을 맞이할 것으로 보인다. 특히 완전히 성공한 결혼으로 골인하는 전형적 로맨스는 첫 번째 여주인공에게 일어난다. “신기생뎐”의 단사란은 재능과 미모, 자존심도 있지만, 돈에 눈이 먼 계모의 강요로 결국 기생이 된다. 그렇지만 결국 자신이 사랑하는 재력 있는 남성과 결혼하여 구원받는다. 드라마의 주요한 내용은 결혼에 어떻게 이르는지를 보여주는 사건과, 결혼 생활에서 일어나는 소소한 일상이다. 이 드라마의 핵심은 가장 바닥의 상황에서 시련을 겪는 품위 있는 여주인공이 가부장제의 처가 되는 결혼에 성공하여 행복에 이르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에 있다.

두 번째 분류인 공아정은 행시를 패스한 엘리트 여성이지만 ‘결혼’을 해보고 싶어서 거짓결혼을 하는 활극을 벌인다. 이 과정에서 거짓 결혼 상대자인 재벌 남성과 사랑에 빠지면서 여주인공이 원했던 것이 낭만적 연애였음이 밝혀진다. 두 주인공 모두 경제적인 시련은 겪지 않는다. 그녀의 시련은 사랑으로 인해 직업을 잃을 뻔 하는 사건에 있다. 일이냐 사랑이냐라는 선택의 기로에서 일을 인정해주는 재벌남과 그의 배려를 사랑으로 이해하는 여주인공의 결혼 승낙을 통해, 드라마는 해피엔딩에 이른다. 이 드라마의 주요한 축을 이루는 로맨스는 경제적 현실을 고민하는 않은 주인공들에게 분명하게 보장된다. 문제는 결혼에 있다. 드라마의 엔딩은 프로포즈를 받아들이는 사랑의 확인으로 끝난다. 결혼을 상징하는 웨딩드레스 장면은 결코 등장하지 않는다. 일과 사랑 모두를 붙잡는 것, 그것이 그녀의 행복이다. 두 번째 부류의 여성에 있어서, 로맨스는 결혼과 무관하다. 그녀가 원하는 것은 일과 사랑의 공존이지 구체적으로 결혼은 아니다.

위의 두 부류의 드라마에 비해, “로맨스 타운”은 로맨스와 결혼에 대해 냉소적이다. 여고 동창인 두 여성은 어떤 남자를 만나는가에 따라 식모가 되고 사모님(미모의 여성이 성공한 남성의 상징이라는 점에서 사모님은 트로피 사모님이라고 불린다.)이 된다. 드라마는 오히려 결혼이 계급을 구축하는 도구라는 사실만을 명료하게 보여줄 뿐이다. “로맨스 타운”은 점점 로맨스와 무관해진 채, 로또에 당첨된 식모들의 추리 복수극으로 나아간다. 스펙도 내세울 집안도 없는 여성에게 있어 로맨스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 여주인공은 정서적 위로와 다정한 친밀감을 로맨스 상대에서가 아니라 식모들의 공동체에서 찾는다. 이 드라마의 여주인공인 그녀, 노순금에게 있어서 사실상의 구원은 로맨스의 대상인 남자가 아니라 로또이다.

드라마에서 더 이상 로맨스와 결혼은 짝을 이루지 않으며, 여주인공들에게 구원은 각기 다르게 나타난다. 결혼은 더 이상 로맨스에 어울리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돈 없는 남자와의 로맨스 역시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로맨스에 가장 몰입하고 있는 여주인공은 누구인가? 위 세 부류에 해당하지 않은 번외편이자, 가장 적극적인 시청률을 자랑하는 저녁 8시 매일 연속극의 여주인공이다. 주인공인 아줌마는 더 이상 남편의 불륜에 목매거나 이로 인해 망가지지 않는다. 바람난 남편에게 버림 받은 여주인공 아줌마는 캐리어 우먼이 되어 성공하고, 자신에게 목숨 거는 애교덩어리 식스팩 말 근육 총각과 사랑에 빠진다. 이제는 매일 연속극의 단골 소재가 되어버린 ‘줌마렐라’의 탄생! 아줌마는 결혼에 실패했지만, 로맨스에 성공한다.

여기서 로맨스가 결혼으로 다시 이어지는 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로맨스만이 중요하다. 아줌마는 로맨스를 겪으면서 성적인 매력을 지닌 여성이자 하나의 인격체로 인정받으며 다시 태어난다. 이러한 줌마렐라 소재가 인기를 끄는 것은 줌마렐라야 말로 낭만적 사랑, 다시 말해, 가족이나 계급, 돈과 상관없이 인격과 인격의 만남으로 정서적 친밀감에 이르는 데이트와 구애의 과정인 로맨스를 성공적으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방영을 시작한 “불굴의 며느리”에서 아줌마 그녀는 남편으로부터 이혼당한 직후 비정규직인 콜센터 직원인 오영심(신애라 분), 그녀가 사랑에 빠지는 대상은 하버드 졸업하고 월 스트리트서 펀드 매니저로 일하던 재벌 2세.

여기서 매우 흥미로운 것은 오영심 역을 맡은 신애라가 1994년에 방영된 “사랑을 그대 품안에”라는 성공한 로맨스 드라마의 주인공이었다 사실에 있다. 신애라가 맡은 여주인공은 집안도 별 볼일 없고 심지어 백수 오빠까지 딸린 백화점 비정규직 직원이었지만 재벌 2세와 극적인 로맨스 끝에 결혼에 성공한다. 실제로 신애라는 이 드라마 후 남자 주인공인 차인표와 결혼하여 드라마의 실사의 주인공으로 이목을 끌은 바 있다.

성공한 로맨스 신화의 주인공인 신애라가 십 오년 후, 줌마렐라라는 새로운 로맨스 장르의 주인공이라는 사실은, ‘2011년 여성이 어떻게 구원받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을 보여준다. 여성은 결혼으로 구원받지 않고 로맨스로 구원받는다. 그런데 시청자 모두가 알고 있듯, ‘줌마렐라’의 로맨스는 환상이다. 구원은 그래서 거짓이다. 그래, 구원은 없다. 잔혹한가?

사랑, 그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무거움[배운년 나쁜년 미친년]

이현재(서울시립대 도시인문학연구소)

사랑, 배신 그리고 자살

송지선 아나운서의 투신자살이 5월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그녀의 죽음을 두고 언론이 문제네, 악성댓글이 문제네, 우울증이 문제네, 야구선수 임태훈이 문제네 등등 말들이 많았다. 무엇이 근본적인 문제였을까? 자살의 원인은 한 가지가 아니라 그 모든 것이 합쳐진 결과였을 수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일기를 통해 추측해 볼 수 있는 사실은 송지선에게 임태훈은 함께 한 사랑에 책임질 줄 모르는 혹은 사랑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도 모르는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송지선은 그가 그녀를 배신했다는 사실에 그리고 그의 예의 없는 태도에 상처를 받았다.

작고한 탤런트 최진실 역시 애정 관계에서 비롯된 배신감 때문에 자살을 했다. 결혼한 지 몇 년도 되지 않아 조성민은 자신의 사랑이 식었음을 전했고 그의 사랑을 철석같이 믿었던 최진실은 절망의 나락에 빠지게 된다. 가만 생각해 보면 사랑의 실패가 극단적인 선택으로 이어지는 경우는 적지 않다. 경제적 파탄의 상황에서 죽음을 선택하는 사람만큼이나 사랑의 실패로 인해 자살을 기도하는 사람들이 있다. 자살까지는 아니어도 많은 사람들이 애정의 문제로 슬픔에 잠기고 오랜 시간을 절망과 한탄 속에 ‘죽은 듯’ 혹은 ‘죽지 못해’ 살아간다. 평생 동안 바람피운 아버지를 원망하고 울분을 토했던 우리 엄마에서부터 실연의 고통에 몸부림치다 결국 자리에 누워버린 내 친구까지.

이러한 사건을 두고 내가 질문하고 싶은 것은 과연 어디까지가 사실인가, 누가 잘못을 했는가. 원인이 무엇인가, 뭐 이런 것이 아니다. 사건의 진실이나 원인은 경찰이나 기자들이 더 잘 파헤쳐 줄 수 있고, 누가 얼마만큼 잘못을 했는가는 당사자가 존재하지 않는 이 시점에서 답이 제대로 나올 수 없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철학적 관점에서 내가 질문하고 싶은 것은 왜 이들이 죽음이라는 극단적인 선택까지도 강행하게 되었는가이다. 사랑의 실패는 왜 죽음까지도 불사하게 만드는가? 왜 그러한 사건은 삶의 의미와 생동감을 일거에 빼앗아 가는가?

나의 경험과 내 주변의 사람들과의 대화를 반추해 볼 때 배신은 언제나 심리적 자존감의 파괴와 관련되어 있었다. 평생 바람을 피웠던 아버지를 향해 우리 엄마가 항상 했던 말은 “나를 어떻게 보고!”였고, 자신의 애인이 동거하는 여자 친구에 대해 숨겨왔음을 나중에 알게 된 한 학생은 “너무 자존심이 상한다”고 괴로워했으며, 천청벽력과 같이 갑작스럽게 이별을 통보받은 내 친구는 “내가 아무 것도 아닌 것 같다”고 호소했다. 그렇다. 사랑을 잃는다는 것은 내 존재 전체, 나의 자존감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사건이다. 배신을 당한다는 것은 내 존재 자체가 거절되는 느낌이다.

사랑이 무엇이기에?

그렇다면 왜 사랑은 이렇게 존재 전체와 관련된 사건이 되는 것인가? 사랑이 무엇이기에 이렇게 당사자의 존재를 뒤흔들고 삶의 의미마저 잃게 만드는가? 최근에 내가 본 한 권의 심리 에세이는 헤어짐이나 배신을 내 존재 자체가 거부되는 사건으로 보지 말 것을 권고한다. 자존심을 걸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 아니 그럴 수 있는가?

이 문제에 대답하기 위해서 나는 우선 사랑이 무엇인가를 해명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독일의 사회철학자 악셀 호네트(Axel Honneth)는 사랑을 “인정(recognition)”관계로 설명한다.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 뿐 아니라 연인, 친구 간의 사랑은 모두 내가 너를 그리고 네가 나를 구체적인 욕구를 가진 존재로 배려하고 정서적인 지지를 보낸다는 의미에서 인정의 행위라는 것이다. 호네트는 사랑이라는 인정관계를 두 사람의 절대적 합일상태로만 보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랑 속에서 두 사람은 독립된 개체로 분리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절대적 공생기를 지나 상대적 공생기에 아이는 엄마를 환상 속에서 파괴한다. 그러나 아이의 파괴행위에도 불구하고 어머니가 곁에 남아 아이에게 사랑과 보살핌을 계속한다면 아이는 자신의 환상 밖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어머니가 있음을 인정하게 되고 이러한 독립된 어머니와의 상호작용 속에서 정서적 합일감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호네트는 제시카 벤자민을 인용해 사랑을 “자기주장과 타자 인정”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능력이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인정행위로서의 사랑이 실패할 때 왜 우리는 존재 전체가 뒤흔들리는 경험을 하게 되는가? 그것은 바로 사랑의 실패와 더불어 우리는 사랑을 통해 획득한 자신감(Selbstvertraun)을 잃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타자의 사랑을 통해 나의 구체적이고 특수한 욕구가 배려되는 것을 경험하게 되고 이와 함께 자신이 인정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임을 확인하게 된다. 즉 우리는 구체적 타자에 의한 정서적 인정의 경험을 통하여 나의 구체적인 존재가 가치있음을 확인하게 되고 이를 바탕으로 자신에 대한 믿음과 신뢰를 형성하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타자의 정서적 인정, 즉 사랑이 철회될 때 우리는 자신감과 자존감이 훼손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즉 사랑의 실패는 특별한 존재로서의 나에 대한 자신감과 자존감을 잃게 되는 계기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사랑의 실패는 내 자존심과 자신감을 뒤흔든다.

이러한 존재의 상실감이 더욱 절망적인 것은 사랑이 바로 구체적이고 특별한 사람과의 관계에서 수행되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한 심리학 에세이는 또한 이번에 사랑이 가면 아주 사랑이 안 올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하고 권고한다. 사랑의 기회는 언제든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랑에 실패한 사람들에게 이런 말들은 위로가 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가 사랑의 실패를 통해 잃게 되는 것은 구체적인 사람과의 특수한 관계 속에서 형성한 특별한 자신감과 자손심이기 때문이다. 물론 또 다른 사랑은 올 수 있다. 그러나 특정한 바로 그 사람과의 사랑, 그 사람의 정서적 인정, 그 사람을 통해 형성된 나의 정체성은 다른 사람과의 사랑을 통해 대체될 수 없다. 사랑이 끝나면 사랑했던 사람과의 기억을 지우고 추억이 될 만한 물건들을 버리는 이유는 그 사람과의 사랑을 통해 형성했던 그 특별한 나를 지우기 위해서이다. 그런 나의 존재는 다른 사람과의 사랑을 통해 대체될 수 없기 때문에.

이렇듯 사랑의 실패가 존재 전체를 뒤흔드는 것은 사랑이 나의 자존심과 자신감을 구성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사랑의 실패가 지독하게 절망적인 것은 그것이 대체될 수 없는 사람과 만들어낸 구체적이고 특별한 나의 존재의 의미를 한 순간에 소멸시키기 때문이다. 그토록 의미를 부여했던 나 자신이 더 이상 지탱될 수 없다는 생각, 자존심이 한 순간 무너져 내렸다는 사실, 이런 것들은 우리에게 삶의 의미를 잃게 만든다.

참을 수 없는 사랑의 무거움

현대 사회에서 사랑은 가볍게 수행된다. 예전과 달리 사람들은 쉽게 만나고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여전히 사랑은 그리고 사랑의 실패는 참을 수 없이 무겁다. 사랑이 깊을수록, 이별이 극단적일수록 사람들은 절망에서 헤어나오지 못한다. 그것은 개인의 특수한 정체성과 존재의 의미를 뒤흔든다. 이런 의미에서 호네트 역시 정서적 인정이 되지 못하는 상태가 윤리적 문제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이다. 호네트는 아쉽게도 사랑이라는 인정형식이 구체적인 개인들 간의 특수한 관계라는 점에서 보편적인 윤리의 문제로 확장될 수 없다고 본다. 개인적인 관계는 보편적 학문의 담론이 되기에는 부적절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비단 호네트의 생각일 뿐이 아니다. 여전히 많은 학자들은 사랑이 학적 가치를 갖지 않는 에세이나 다룰 수 있는 주제라고 치부한다.

그러나 다시 한 번 생각해보자. 학문은 개인적인 문제로 치부되는 사랑의 문제를 다룰 수 없다는 생각, 나아가 감정에는 어떤 윤리적 잣대도 들이댈 수 없다는 생각이 어떤 끔직한 풍경을 만들어 냈는가? 우리는 방금 전까지도 사랑했던 사람을 내팽개치고 거리와 공론의 장으로 나와 사회를 비판하고 사회정의를 부르짖는다. 그가 혹은 그녀가 죽어가든 말든 상관하지 않는다. 그건 당사자가 겪어 내야할 개인적인 일이니까. 그래서 사회비판과 혁명에는 피의 냄새가 나는 것일까?

『혜화, 동』-‘여성적’인 영화에 대한 단상 [배운년 나쁜년 미친년]

김 수 현(서울시립대학교 박사과정)

몇 년 전에 나는 하이메 로살레스(Jaime Rosales) 감독의 <고독의 편린>과 훌리오 메뎀(Julio Medem) 감독의 <혼란스런 아나>를 약간의 시간간격을 두고 보게 되었는데, 이 두 영화가 여성을 다루는 서로 다른 방식이 흥미로웠다.

두 영화는 다루는 소재나 주제에서도 차이가 있었지만 그것을 표현하는 형식에서도 차이가 났다. 특히, 나는 두 영화 중 어떤 것이 좀더 ‘여성적인’ 감수성에 맞는 표현형식일까에 대해 생각했었다. <혼란스런 아나>는 영화를 보는 내내 그리고 영화를 보고 나서도 어떤 불편함이 남았다. 반면, <고독의 편린>은 영화 속 그녀들의 삶에 공감하게 되면서 나의 마음 속에도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 듯했다. 거칠게 말하면 영화의 진행 과정에서 <혼란스런 아나>는 관객을 몰입하게 하고 <고독의 편린>은 관조적인 시선으로 인물들의 삶을 지켜보게 만든다. <혼란스런 아나>가 ‘역사적이고 무의식적’이며 조금은 추상적인 여성성을 보여준다면 <고독의 편린>은 ‘지금 여기’에서의 여성의 삶을 구체적이고 세밀하게 보여준다. <혼란스런 아나>에서 여성은 ‘신비로운 존재’이거나 ‘성적 대상’이다. <고독의 편린>에서 여성은 힘겹게 삶을 꾸려가지만, 정작 자신의 삶의 방향을 잘 찾지 못하는,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보게 되는 여성이다.

<고독의 편린>에서 여성들은 서로 소통하지도 못하며 서로를 위로하지도 않는다. 인물들의 대화는 허공을 맴돌며 그들 각자는 서로 다른 곳을 향해 이야기한다. 인물들의 표정 변화도 극적이거나 급격하지 않다. 그렇지만 그녀들이 덤덤하거나 편안하게 상황을 받아들이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영화를 보고 나면 그녀들의 고독에 공감하게 된다. 영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텅 빈 공간과 사물들이 인물들의 고독을 더 차갑고 선명하게 보여주는 장치가 된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어떤 현란함도 없는 텅 빈 공간이 인물들의 고독을 효과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그래서 일견 딱딱해 보이고 덤덤해 보이며 때론 무표정하기까지 한 인물들의 표정 이면의 감정을 관객이 들여다 볼 수 있게 해 준다.

<혼란스런 아나>에서 여성은 무의식의 깊은 심연과도 같은 존재이다. 또한 죽음의 고통을 보여주는 ‘신비로운’ 존재다. 주인공인 아나는 모든 여성을 대신해 ‘고통으로서의 여성의 역사’와 만난다. 그런데 <혼란스런 아나>와 함께 한 심연으로의 여행은 사실 감독의 여성에 대한 사고를 따라가는 것과도 같다. 아나의 무의식 여행에 동참하여, 관객으로 하여금 ‘생각’하게 만든 다음에 감독은 상투적이고 진부한 여성의 이미지를 동원하여 여성이 처한 억압에 대한 비관적인 결론을 내린다. <혼란스런 아나>는 감독을 비롯한 남성이 생각하고 있는 여성에 대한 ‘이미지’를 반복하는 듯 보였다.

이 두 영화가 특별히 여성 영화의 표현방식에 대해 나에게 질문을 던진 것은 사실이지만, 대부분의 영화를 볼 때, 감독들이 어떤 방식으로 여성이나 성을 묘사하는지에 대해 눈길이 가게 된다. 그렇지만 약간의 불편함을 뒤로 한 채 영화전체의 구조나 작품 자체의 완성도를 중점에 두고 영화를 보게 된다. 또한 영화의 이미지나 그 이미지들의 배치 및 표현방식이 얼나마 ‘영화적’인가를 두고 더 많은 생각을 하곤 한다. 여성인 감독이 여성을 소재나 주제로 다루면서 여성문제의 현실을 잘 진단하고 보여준다면 ‘좋은’ 여성영화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경우는 극히 드물어 보인다. 오히려 나는 영화의 표현방식과 감독이 인물을 대하는 태도에서 ‘여성적’인 것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조금 포괄적으로 말한다면 내가 ‘여성적’이라 생각하는 영화에서는 여성을 대하는 담담하고 관조적인 시선 가운데 어떤 따뜻함이 느껴지는 것 같다. 아마도 그것은 영화 속 그녀들이 삶에서 마주하는 이러저러한 사건을 겪고 상처를 받으면서도 조금씩 치유하고 극복해가는 모습에 공감하기 때문일 것이다.

<혜화, 동>이 보여주는 ‘여성적인 것’

여성영화에 대한 이런 개인적인 고민이 있던 차에, 지난 3월에 본 민용근 감독의 <혜화, 동>은 다루는 소재와 주제, 그리고 표현방식이 내가 평소에 생각해 왔던 ‘여성적’인 영화의 면모를 보여주는 것 같아 반가웠다. 영화는 한 여성의 마음 속 상처를 관조적이고 담담한 시선으로 보여주며 동시에 감정의 변화들을 보여준다. 또한 그 과정은 인물에게는 상처와 마주하여 치유하는 과정인데, 관객에게는 관계를 돌아보게 하는 기회를 주는 것 같다. <혜화, 동>이라는 제목이 암시하듯이 영화는 혜화와 그녀의 마음 속의 아이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 영화에서 내가 주목하게 된 문제의식은 아이의 죽음과 그것을 둘러싼 보살핌으로서의 ‘모성성’이다. 가족을 둘러싼 해체와 파괴의 문제, 가족을 구성하는 일에 대한 문제의식도 암시적으로 드러나 있다. 몇몇 평자들은 이 영화에 대해 영화의 소재나 주제가 진부한 데 비해 영화의 화법이 흥미롭다고도 했다. 내가 주목했던 것도 한 여성의 삶과 그녀의 내면의 감정의 변화들을 영화가 보여주는 방식이었다.

1> 영화의 표현형식과 관찰하는 시선

혜화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계속 버려짐의 상황에 처하게 되는 우리의 주변에서 살고 있을 법한 여성이다. 유기견을 돌보며 사는 애견미용사인 스물 세 살의 혜화에게 5년 전에 자신을 떠났던 한수가 찾아와 놀라운 소식을 전해준다. 이 때부터 그녀는 5년전 과거와 직접적으로 마주하게 된다. 고등학생이던 혜화와 한수는 서로 사귀었고 혜화가 아이를 가지게 되었다. 혜화는 학교를 그만두고 네일아트를 배우면서 둘이 함께 하는 미래를 준비한다. 혜화의 어머니는 혜화를 잘 보살피려 하고 그녀를 데리고 한수의 집을 방문한다. 그런데, 한수의 어머니는 한수의 장래를 걱정하며 혜화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혜화는 혼자 아이를 낳았지만, 아이는 몸이 약해서 태어나자마자 죽어 버리고 만다. 그런데, 한수는 그 당시 혜화의 어머니와 자신의 어머니가 함께 작성했던 입양통지서를 들고 와서 혜화에게 아이가 아직 살아 있다고 말한 것이다. 이후 영화는 이 아이를 둘러싸고 미스테리한 플롯으로 전개된다. 혜화의 현재 삶에 과거의 기억들이 침투해 들어오면서 묻혀진 상처들이 하나둘씩 드러나고 혜화를 향한 한수의 건강하지 못한 모습이 보여진다. 묻혔던 상처를 꺼내보는 혜화는 마치 고였던 감정이 흐르듯 혼란스런 감정의 변화들을 겪게 된다.

영화의 미스테리한 플롯에서 중심이 되는 것은 탈장된 개와 그들의 아이인데, 탈장된 개와 아이는 혜화의 ‘마음 속의 아이’를 상징한다. 이들이 과거 속 혜화의 집에서 사라진 그 강아지인지, 진짜 혜화의 아이인지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그런데, 감독은 한 관객과의 대화에서 실제로 사실이냐 아니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 과정에서 혜화의 마음의 변화를 보여주는 것이 중요했다고 말했다. 사실, 혜화와 한수의 아이를 둘러싼 미스테리는 한수의 건강하지 못한 마음 상태로 인해 발생한 것이다. 그는 혜화에게 다가가고 싶었지만 직접적으로 부딪치지 못하기 때문에 아이를 통해 다가가고자 한다. 영화의 결말에 이르면 혜화와 한수의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죽었고, 입양통지서에 적힌 주소에서 한수가 본 아이는 다른 아이였음이 밝혀진다. 한수는 자신이 찾아갔던 집에서 그 아이의 부모들에게 사실을 전해들었어도 믿지 않는다. 결국은 혜화가 임신했던 당시에 태어난 자신의 조카(나연)가 자신들의 아이인 것처럼 혜화를 속이게 된다. 한수가 의도치 않게 꾸민 조금은 엉뚱한 일로 인해 혜화는 그 아이를 진짜 자신의 아이라 믿게 된다. 그리고 혜화의 집에서 세 사람은 하룻밤을 함께 보내게 된다. 혜화는 아이를 부모들에게 보내기 전에 씻겨주고 대화를 하면서 마치 잃어버린 자신의 아이에게 하듯 아이와 작별하는 시간을 갖게 된다.

영화 속에서 아이와 탈장된 개와 함께 중요한 이미지는 폐허가 된 집터이다. 영화 초반에 혜화는 탈장된 한 유기견을 따라 폐허가 된 집터로 가게 된다. 영화 속에서 이 집터는 혜화와 한수가 자주 마주치게 되는 공간이며, 마치 잃어버린 그들의 아이와도 같은 유기견의 흔적을 끝없이 찾게 되는 곳이다. 폐허가 된 집터는 두 사람의 단절된 관계와 해체된 가족의 모습을 보여주는 듯하다. 또 한 편으로는 두 사람의 상처받은 마음을 보여주는 듯하다.

어떻게 보면 진부한 소재이거나 주제일 법한 이 영화의 이야기가 갖는 가장 큰 미덕은 감독이 신적인 화자가 되어 혜화의 마음 속을 설명하고 그녀가 처한 상황에 대해 섣불리 어떤 판단을 내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감독은 주변에서 보게 되는 누군가에게 마음이 끌리고 궁금증을 품게 될 때, 그 사람의 행동 하나하나를 관찰하게 된다고 말했다. 영화의 미스테리적인 구성이나 과거와 현재의 이미지들의 연결 방식은 이런 식으로 혜화라는 사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녀가 말을 아끼고 담담하면서도 건강한 캐릭터인 것과 마찬가지로 영화도 그녀의 아픔을 그와 같은 방식으로 보여준다.

2> 아이, 모성성 그리고 관계를 맺어가는 법

영화를 보다보면 특별히 혜화라는 인물의 건강하고 강인한 면모가 돋보인다. 맑고 깨끗한 이미지를 지닌 실제 여배우만큼이나 혜화라는 인물도 맑고 깨끗해 보인다. 어떤 관객은 혜화라는 인물이 모든 것을 다 포용하고 관용하는 어떻게 보면 성인과도 같은 인물이라고 말했다고도 한다. 분명 그런 측면이 있지만, 나는 혜화의 강인한 면모는 그녀가 특별히 타자에 대한 감수성에 예민할 수밖에 없었던 삶의 과정에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그녀의 강인함은 처음부터 영화에서 설정된 것이라기보다는 그녀가 상처를 마주하고 그것을 치유하며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형성된 것이라 생각한다.

혜화는 자신이 일하는 동물병원 원장의 아들(현웅)을 거의 3년 동안 돌봐왔다. 여섯 살인 이 아이를 향한 혜화의 시선은 흡사 자신의 잃어버린 아이라도 돌보듯 사랑스런 눈길이다. 혜화는 현웅이 잠들때까지 기다리다가 자신의 집으로 간다. 현웅은 시시때때로 혜화의 가슴을 만지기도 하며, 때로 혜화는 잠든 현웅이 자신의 가슴을 만지도록 놔두기도 한다. 또한 현웅이 ‘엄마’라고 불러도 되냐고 할 때, 흔쾌히 그러라고 한다. 한편, 혜화는 유기견을 구조하는 일을 하는데, 입양되지 못한 유기견을 그녀의 집으로 데려와 키우고 있다. 그녀의 집에는 조금은 병이 든 것도 같은 유기견들로 가득하다. 그런데 혜화가 이렇듯 버려짐에 대한 감정에 민감하고 그만큼 또 보살핌에 대해 민감한 까닭은 그녀가 한 번 버려진 경험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녀는 자신을 낳아준 어머니에게 버림받고 지금의 어머니에 의해 길러졌다. 그녀의 어머니는 지금은 비록 늙고 병들었지만 혜화를 냉대하지 않고 따뜻하게 잘 길러줬다. 혜화가 아이를 가졌을 때도 어머니는 혜화를 탓하지 않고 자신이 잘 도와주겠다고 말하였다.

혜화가 지닌 이런 면모를 보면서 나는 레비나스의 타자 개념과 ‘모성성’이란 말을 떠올렸다. 레비나스는 주체에 대한 책임을 넘어서 고통받는 타자, 헐벗고 굶주리는 타자를 위해 나를 내어주고 책임을 다하는 타자의 윤리학을 강조한다. 고아나 과부, 굶주린 사람 등 비참한 타인의 얼굴과 맞닥뜨렸을 때 우리는 ‘상처’를 받고 타인의 고통에 직면하게 된다. 레비나스는 그런데 이러한 타인의 얼굴과의 마주침에 의한 고통의 경험이 나를 새로운 존재로 만든다고 한다. 그는 주체 안에 있는 이러한 타자성을 ‘내 안에 있는 타자’ 혹은 ‘동일자 안의 타자’ ‘내재 속의 초월’이라고 말한다. 내 안에 들어온 타자가 타자를 위해 짐을 짊어질 수 있는 새로운 존재로 나를 키워내는 것을 일컬어 ‘모성성’이라 불렀다. 레비나스의 이러한 타자와 모성성 개념이 가지고 있는 다른 많은 함의들을 제쳐놓고 생각해 본다면 영화에서 혜화가 보여주는 유기견과 아이, 그리고 한수에 대한 태도를 ‘모성성’이라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녀의 모성성은 타자에 대해 민감할 수 밖에 없었던 그녀의 삶이 만들어낸 것이다.

혜화에게서 그녀의 모성성을 길러냈던 타자는 무엇보다도 죽은 아이이다. 덧붙이자면 그녀의 첫 번째 버려짐의 경험과 그런 그녀를 거두고 돌봐준 지금의 어머니가 있다. 또한 그녀가 어머니가 살던 집에서 함께 기르던 개가 낳은 강아지들과의 이별의 경험이다. 한수의 가족에게 외면당한 혜화는 오랫동안 기르던 개 혜수와 혜수가 낳은 강아지들을 다른 곳으로 보내려 한다. 기어코 가려 하지 않던 혜수를 억지로 새로운 주인에게 넘긴다. 그 때 아빠가 달랐던 꼬리가 노란 강아지는 어딘가에 숨어서 나타나지 않았다. 그런데 그녀가 한수의 집에서 거부를 당하고 절망감에 손목을 그으려던 순간에 그 어린 강아지가 집구석에서 나와 그녀의 품에 안긴 일이 있었다.

한편, 영화의 결말에서 혜화와 한수는 폐허가 된 집터에서 갓 태어난 강아지들을 구조하는 일로 다시 맞닥뜨리게 된다. 아직도 아이가 죽었다는 것을 믿지 못하는 한수에게 혜화는 아이가 죽었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준다. 또 그 때 혜화가 찾아 헤매던 탈장된 그 개가 다시 나타나게 된다. 혜화는 어린 강아지들을 데리고 혼자 집으로 가다가 다시 후진하여 한수를 향해 가는 것으로 영화가 마무리된다. 이런 결론을 두고 관객들의 반응이 엇갈렸다고 감독이 전해주었다. 감독은 두 사람의 관계가 시작되거나 회복되는 것과 상관없이 아이를 매개로 하지 않고 두 사람이 직접 마주할 수 있게 한 것이라고 말했다. 영화에서 혜화가 보여준 ‘모성성’은 한수에게도 예외가 아닐 수 없다. 한수는 영화에서 계속해서 비겁하고 나약한 모습으로 보여진다. 한수는 어머니, 누나와 함께 조금은 안정적인 가정에서 자랐다. 아마도 어머니와 누나의 보살핌을 받고, 그만큼 그녀들의 말을 거역하지 못하면서 자랐을 것으로 짐작된다. 한수는 혜화에게는 유학을 간 것으로 알려졌지만, 사실 고등학교도 제대로 마치지 못했고, 집에는 가끔 들어오는 등 끊임없이 방황하면서 지난 5년의 시간을 보냈다. 군대를 갔던 것도 가족들이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을 정도이다. 다리를 다쳐서 약간 절룩거리는 상태만큼이나 한수는 마음이 건강하지 못한 것이다.

탈장된 개와 아이를 둘러싼 미스테리가 해결되면서 혜화의 감정도 조금씩 흐르기 시작한다. 혜화의 타자에 대한 보살핌의 ‘모성성’을 드러내고 또 한편 키워냈던 이 두 타자와의 만남 이후에 한수라는 또 다른 타자와의 관계를 물음으로 남기고 영화가 끝을 맺는다. 영화는 인물의 삶을 하나하나 지켜보게 하면서 나에게도 그녀의 마음 속에 차근차근 접근할 수 있게 해주었다. 또한 모성성의 문제가 어머니로서의 희생 이전에, 한 사람의 상처와 내면에 관한 것, 즉 삶의 일부라는 것을 새삼 느끼게 해주었다.

잔혹한 복수극 판타지, 『건축학 개론 』/이지영 [보고 듣고 생각하기]

?[보고 듣고 생각하기]

?잔혹한 복수극 판타지 영화『건축학 개론 』

 

글: 이지영 (홍익대학교 강사)

 

친구와 ‘건축학 개론’을 보았다. 재미있었다. 깔깔거릴 수 있는 에피소드들, 재미난 캐릭터(남자 주인공의 재수생 친구), 대학 1학년 시절과 현재를 오가는 깔끔한 편집, 당시에 20대를 보냈던 나에겐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돌아간 듯 추억 속 여행을 하게 하기에 충분한 영화였다. 지루하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고 두 시간 남짓을 아주 재미나게 보았다. (나이를 먹으면서 여자주인공은 너무 눈이 커졌고, 남자 주인공은 머리가 너무 커졌구나! 눈이 저렇게 두 배로 커졌으니 남자주인공이 첫사랑을 못 알아볼 법도 하겠다는 따위의 쓸데없는 생각과 함께.. ) 영화를 보는 동안 그 시절 그 공간으로 돌아간 듯 추억 속을 헤매이고 있었고, 그 추억 속 여행은 문득 문득 당시의 풋풋하고 어린 나의 모습을 떠올리게 했다. 그런데 솔직히 그뿐이었다. 영화를 보기 전 많은 사람들의 감상평 ‘8월의 크리스마스와 번지점프를 하다를 잇는 오래도록 마음을 울릴 멜로 영화’도, ‘지나간 첫사랑을 떠올리며 술을 마시고 싶게 하는 가슴 찡한 감동의 영화’도 아니었다. ‘기억의 습작’을 듣는 건 좋았다. 원래 좋아하는 노래였으니까. 그런데 그뿐. 난 궁금했다. 왜 난 재미만 느낄 뿐 감동을 받지 못했을까?

▲ 영화 건축학 개론

함께 영화를 본 친구와 밥을 먹으며 이야기했다. 우리의 결론은 ‘첫사랑에 대한 남자들의 모든 판타지를 충족시켜 주기에 모자람 없는 영화다, 그러니 평소 멜로 안 보던 남자 관객들의 입소문을 타고 그리 흥행했지’였다. 뭐 여성 판타지를 충족시켜 주는 영화나 드라마도 많으니, 남자들의 첫사랑 판타지를 충족시켜주는 것이 뭐가 나쁜가. (수많은 드라마에서 남편에게 구박받다가 이혼하고 나면, 출세를 하면서 연하의 꽃미남 재벌 2세 실장님들의 구애를 받는 여자 주인공들이 몇 년간 브라운관을 휩쓸지 않았던가. 그런 드라마 보면서 리얼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드라마니까 라고 접고 넘어가지 않는가.) 이렇게 가끔 판타지가 충족이라도 되면 즐거운 거지. 솔직히 나 역시 매일 매일 눈 부릅뜨고 직시해야 하는 현실이 버거워 영화를 보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영화를 통해 판타지를 충족하는 걸 꼭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니 지금 하는 이야기는 이 영화가 꼭 나쁘고 후지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저 영화가 함축하는 ‘팩트’를 지적하는 것뿐이다.
15년 만에 만난 남자 주인공 승민은 첫사랑 수연을 첫눈에 알아보지도 못한다. 뭐 가끔 떠올리며 살았겠지만, 첫사랑에 목매달고 살지 않고 나름 쿨하게 살았음을 보여주는 첫 장면이다. 나름 쿨하게 살아온 듯 보이는 그도 사실 과거엔 쿨하지 않았다. (솔직히 어디 그리 쿨한 인간이 많으랴. 희망사항일 뿐, 대부분의 인간들은 ‘쿨하지 못해 미안해’하며 살지 않나.) 건축학 개론 시간에 뛰어 들어온 수연에게 첫눈에 이미 호감을 느낀 승민은 같은 버스를 타고 통학하며, 숙제를 함께 하면서 수연과 가까워진다. 외모는 청순하나 성격은 나름 호탕하고 쿨한 수연은 승민과 친구와 애인의 경계선에서의 풋풋하고 파르스름한 시간들을 보낸다. 하지만 승민은 수연이 건축과 선배(돈 많고, 잘 생기고, 키 큰 바람둥이- 그 당시 자가용을 몰고 다니는 대학생)를 좋아하고 있다고 굳게 믿게 되고, 혼자 가슴앓이를 하며 어찌 고백을 하나, 어떻게 하면 수연의 마음을 얻을까를 재수생 친구와 의논하기도 하고, 연습하기도 하며 사랑을 키워간다. 하지만 문제의 종강 날이 왔다. 그는 수연의 자취방 앞에서 팩소주를 들이키며 수연이 나중에 살고 싶다고 그려줬던 2층집을 모형으로 만들어와 고백을 준비하고 있었고, 수연은 종강날 나타나지 않은 그에게 삐삐를 치며 기다리다가, 선배의 권유로 술을 마시게 되어 떡실신이 된 채 선배와 함께 자취방에 도착한다. 떡실신 직전의 수연에게 선배는 키스를 시도하지만 수연은 얼굴을 피했고, 몸도 제대로 못 가누는 수연을 선배는 자취방으로 데리고 들어간다. 그 장면을 목격한 그는 분노에 떨며 수연을 “썅년”으로 간주한다. 그리고 한참 후 그를 찾아온 수연에게 “꺼져줄래”라는 엄청 센 말을 날리고는 표표히 사라진다.

자… 이제 그의 첫사랑을 다시 되짚어 볼까? 사랑하는 여자가 떡실신 일보직전에 바람둥이 뺀질이 선배에게 겁탈을 당할지도 모르는(그런 일이 실제로 벌어졌는지 아닌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을지 모른다. 그런 나쁜 일이 벌어질 가능성이 매우 큰 순간이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순간을 목도한 그는 선배를 욕하며 그 상황을 막는 대신 비겁하게 피하고 나서는, 그녀를 “썅년”으로 만들어 버렸다. 자신이 충분히 그 상황을 막을 수 있었음에도 그는 그러지 않았다. (선배가 수연에게 키스를 시도했으나 몇 번이나 수연이 그것을 거부하는 장면을 보았다면, 당연히 수연이 그를 원하지 않는 것이고 특별한 관계가 아닌 그냥 친구라도 수연을 곤경에서 구해줘야 하지 않나라는 생각이 든다.) 못 한 건지 안한 건지 하여간, 승민은 자신의 비겁함은 온데간데없이 그녀를 “썅년”으로 취급해버린다. 그리고는 방학 내내 연락하고 기다려온 그녀에게 “꺼져줄래”라고 쿨한 척하며 한마디를 날리지만, 이건 쿨한게 아니라 자신의 비겁함에 눈감으며 저지르는 싸가지 없는 행동이라 생각한다. 왜? 최소한 애인이 아닌 친구 사이라 하더라도 갑작스런 결별에는 이유를 말하는 것이 최소한의 예의 아닐까? 그 예의조차 갖추지 못할 만큼 승민은 화가 났던 거다. 그런데 무엇에? 수연에게도 화가 났겠지만 자신의 찌질함에 대한 화가 상당 부분 차지하지 않았을까? 그런데 승민은 그 두 가지의 화를 잘 구분하지 못했고 자신의 찌질함은 잊고 모든 사태의 책임을 수연에게 돌렸다. 그러니 수연을 ‘썅년’이라고 삼십대 중반까지도 호명하지 않았을까? 그 나이까지도 그렇게 자신의 찌질함에 대한 반성 능력이 없는 건 사실 좀 심각해 보였다.

여하튼 아마도 대부분의 남자들은 첫사랑이 떠나간다고 생각하는 순간에, “꺼져줄래”라는 말 대신 오히려 네가 어떻게 그럴 수 있나며 떠나가는 첫사랑을 붙들고 징징거렸든, 아니면 혼자 징징거렸을 가능성이 더 크다. 마치 과거에 첫사랑에게 차였던 남자들의 대리 복수라도 해주듯 “꺼져줄래”라는 대사는 남자들의 판타지에 정확히 내다꽂혔을 것이다. 그리고 15년 만에 만난 첫사랑을 못 알아보는 것으로까지 복수는 제법 잘 이루어지고 있다. (만일 그들이 차이지 않았다면 그것은 첫사랑으로 기억되지 않을 수도 있다. 자신이 간절히 원했으나 실패한 사랑의 기억이 첫사랑으로 남으니까.. 자신이 싫다고 거절한 여자는 그저 잠깐 만났다거나 뭐 별거 아닌 기억으로 남지, 첫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남을 일은 아마 별로 없을 것 같다.)

수연을 보며 나는 안타까웠고 불쌍했다. 하지만 영화는 수연을 잔혹하게 밀어붙였다. 수연의 첫사랑은 실제로는 주인공 승민이었으나, 승민은 수연이 돈 많은 남자를 좋아한다고 오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수연의 캐릭터는 돈 많은 의사 남편 만나 결혼했으나, 3년 만에 버티다가 이혼당하고 혼자 사는, 즉 순수한 그의 첫사랑을 짓밟은 죄 값을 톡톡히 치른, (어릴 때보다 눈은 커졌지만) 성취한 것도 없는 이혼녀일 뿐이다. 왜? 과거에 “썅년”이었으니까. 지금은 술 마시고 자신의 처지에 대해 ‘쌍욕’을 하며 한탄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된 것이다. 어때 복수가 이 정도면 충분한 걸까? 아니 아직이다.

일반적으로 남자들은 첫사랑을 못 잊고, 여자들은 그렇지 않다고들 그런다. 뭐 나를 비롯하여 주변을 봐도 맞는 말 같다. 가끔 생각나는 일이 있긴 하지만, 전혀 첫사랑에 목을 매거나 그리워하거나 그러지들 않는다. 사실 냉정히 말하면, 기억도 잘 안 난다. 아마 그립다면, 그리움의 대상은 그 시절의 젊음과 나의 감정이지 과거의 누군가는 아닌 듯하다. 그런데 수연은 승민을 지난 15년간 마음에 품고 그가 버리고 간 집 모형을 아직도 간직하고, 수소문해서 그를 찾아오기 까지 했다. 판타지를 충족시켜 주기에 딱 좋은 설정이다. 게다가 수연은 나이를 먹었으나 눈에 확 띄게 아름다운 모습으로 나타났다. 판타지의 절정은 아마 이 부분일 것이다. 솔직히 첫사랑을 다시 만났는데 푹 퍼진 아줌마가 되어 있을까봐 무서워서 찾지 못하는 경우도 종종 있지 않은가. 판타지에 금 갈까봐. 충분히 이해가는 상황이다. 현재의 수연은 남자들의 판타지 로망에 너무나도 적합한 상대가 되어 나타났다.

그런데 그녀가 아직까지 미혼이라면 곧 결혼을 해야 하는 그에게 매우 부담스러운 설정일 것이다. 혹은 그녀가 유부녀라면 그녀를 만나는 것 자체가 법적, 도덕적 부담을 져야 하는 일이 된다. 하지만 그녀는 돌싱, 즉 이혼녀이다. 심하게 말하자면, 잠깐 다시 만나 추억을 되새기며 원나잇 스탠드를 하기에 아무 부담 없는 상대로 나타나 주었다. 와. 기가 막힌 판타지 아닌가. 더구나 그녀의 집을 완성해준 그는 결혼을 하고 미국으로 떠나는 상황이다. 미국으로 가버리게 되면 그녀 쪽에서는 그를 찾을 수 없다. 이혼녀 첫사랑이 다시 만나자고 매달리기라도 한다면 얼마나 복잡하고 불편한 상황이 되겠는가. 게다가 첫사랑 못지않게 아름다우며, 같은 분야에 종사하는 능력자에, 부모님마저 부유한 약혼녀와 외모와 추억 이외에는 아무것도 볼 것 없는 첫사랑 사이에서 갈등을 할 필요가 전혀 없으니까 말이다. 승민은 지난 15년간의 수연의 마음을 확인하고, 격한 키스를 나눈 후(키스 이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제주도 외딴 집에 둘만 남아있던 밤 시간에 벌어진 상황이니 뭐 대략 짐작 가능하다.) 미국으로 ‘깨끗이’ 떠난다. 하지만 그녀는 그가 지어준 집에 병든 아버지를 모시며 정착했다. 게다가 그 곳은 제주도. 조선시대의 유배지였던 그곳은 살기에는 좋은 자연 환경이지만, 정말 거기에만 산다면 죽을 때까지 외롭게 혼자 살아야 할 가능성이 99%로 보인다. 게다가 수연은 제주도에 사는 걸 싫어했었고, 서울로 탈출하기 위해 무지하게 노력했던 소녀였는데 말이다. 와….정말 처절한 응징이다!!! 후덜덜. 이혼녀로도 모자라 사회적 무능력자로 패배자를 만들고, 심지어 외딴 섬에 유배까지 시켜 버렸다. 아무리 새로 지은 집이 예쁘면 무엇 하나. 거기서 평생 혼자 아버지 병간호나 하고 살면. 첫사랑 그를 못 잊는 수연의 집을 우리의 주인공 그는 주소와 위치를 너무나도 정확히 알고 있다. 언제든 사실 맘만 먹으면 올 수도 있다. 이거 뭔가. 지금 조선 시대인가? 마음 내키면 한 번씩 찾을 수도 있는 첩실(?) 같은 분위기마저 난 느껴졌다. 너무 처절한 복수의 판타지 아닌가. 이 정도만으로도 복수는 처절하다.

그러나 복수는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마지막 자신의 주소조차 없이 보낸 택배 상자에는 첫눈 오는 날 그를 기다리던 수연이 약속장소에 놓고 갔던 전람회 씨디가 들어있다. 그나마 간직하고 있던 자신의 기억조차 깔끔하게 털고 가는 듯 보였다. (뭐 좋게 해석해 주자면 자신도 그곳에 갔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해 볼 수도 있지만, 그 정도 오해의 해소를 위해서라면 굳이 그 씨디를 보내지 않았을 수도 있다. 키스하던 그날 밤 말했어도 충분한 일이다. 그러니 씨디를 보내는 그의 행동은 과거와 수연을 모두 털어내는 일종의 이별식으로 보인다.) 마지막 장면에서 승민이 보낸 ‘기억의 습작’ 씨디를 듣는 수연의 얼굴은 어떠한가. 허전함? 아쉬움? 아니, 수연의 얼굴은 아련한 추억에 잠겨드는 모습으로 엔딩! 와우! 이거 쿨한거라고 할 수 있어? 첫사랑에서 상처 좀 받았다고, 첫사랑 수연에게 이렇게까지 복수와 응징을 해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생각들이 들어서인지, 감성이 풍부하기론 남부럽지 않고, 평소 멜로 영화를 좋아하는 나에게조차 이 영화는 그닥 멜로스럽게 감성에 다가오질 않았다.나를 잇는 감성멜로? 아니, 아니! 그보단 오히려 잔혹하고 처절한 복수극 판타지였다. 복수를 대놓고 하게 되면, 복수하는 자의 품격을 손상시키기 쉽고 또 다른 복수를 불러올 수도 있으니 말이다. 그러니 복수를 하려면 감쪽같이 상대방으로 하여금 복수를 당하는지조차 모르게 처리하는 것이 여러모로 경제적이다. 이 영화의 복수극은 바로 이렇게 교묘하고 깔끔하게 이루어졌다. 이러한 점을 고려했을 때, 영화의 광고 카피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첫사랑이었다’는 이렇게 바뀌어야 한다. ‘우리 모두는 누군가에 대한 ‘썅년/놈’이었다. (사실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첫사랑이었다’는 말은 말이 안 되는 말이다. 사실 첫사랑의 대상은 예쁘고 잘생긴 소수에게 몰려 있었던 것이 현실 아니던가. 사실 누구의 첫사랑도 아니었던 사람들도 허다하다고 본다. 뭐 여하튼 우리를 첫사랑을 하던 시절로 불러내는 데에는 성공적으로 작동했던 카피임은 인정한다. 그 카피를 보고 내가 누군가의 첫사랑이었던 시절과 그 시절에 대한 기억 속에서 스치고 지나가는 얼굴들이 있었으니 말이다.)

평소 낭만적이고 감성이 매우 풍부한 인물로 평가받는 필자로 하여금 감동이 아닌 재미만을 느끼게 했던 이 영화에 대해 매우 불편한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인터넷과 영화 잡지를 뒤져 보아도 필자처럼 이 영화를 읽고 투덜거리는 영화평을 단 하나도 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마치 요즈음은 첫사랑 떠올리기 열풍이라도 불고 있는 듯하다. 다들 정릉의 골목길, 710번 버스 노선 등 당시의 추억에 빠져 이 잔혹한 복수극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는 관심이 없어 보이니 말이다. 그래서 필자만 뭔가 삐딱하고 곱지 않은 심성의 소유자가 되어 버린 듯한 이 분위기. 그래서 이런 의견을 말하는 것이 뭔가 눈치가 보이는 듯한 상황임을 느끼고 있는 나의 이 동요하고 있는 마음상태가 이 영화가 불러일으킨 문제적 지점인 듯도 싶다. 나의, 즉 개인적인 추억과 관련되는 것이면, 특히나 첫사랑처럼 아련하고 가슴시린 기억들과 관련되어 있다면, 그에 대해서는 어떠한 객관적인 반성적 사고나 비판적 시선조차 용납되지 않을 것 같은 이 분위기 말이다. 아무리 아름답고 아련했다 하여도, 찌질한 것은 찌질한 것이고, 비겁한 것은 비겁한 것이고, 제대로 자신의 못남을 맞닥뜨리지 못했었다면 시간이 지나도 찌질하고 비겁한 태도는 사라지지 않는다는 아련한 추억으로 포장만 하지 말고 생각도 좀 하면 좋겠다는 바람이 들었다.

과 관련하여 가장 감동적이었던 순간은, 영화 보기 전 전람회 CD를 꺼내어 ‘기억의 습작’을 오랜만에 다시 들었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김동률의 마성의 저음이 울려 퍼지던 2012년 어느 봄날 오전, 나는 타임머신을 타고 그때로 돌아가 있었고 오랜만에 다시 들었던 그 노래의 감동은 쉬이 잊히지 않을 것 같다.

PS. 사실 영화에 대해 이런 식의 영화평을 쓰는 것은 내가 좋아하는 방식도 옳다고 생각하는 방식도 아니다. 그저 줄거리, 캐릭터 설정에 대한 분석만 가지고 영화를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정말로 비영화적인 사고방식이다. 그래서 이 글을 쓰면서도, 나의 글에 대한 아쉬움과에 대한 미안함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반드시 밝히고 싶다. 이 영화에는 장점도 상당히 있다. 과거와 현재가 동시에 펼쳐지는 것 같은 구성방식도 아주 깔끔하고 효과적이었으며, 첫사랑의 판타지가 과도한 낭만주의나 비현실적인 판타지로 촌스럽게 가지 않고, 상당히 세련되고 깨끗하게 처리되었다는 점에서 이 영화의 힘을 찾아볼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그랬기 때문에 이 영화의 처절한 복수극이 더욱 교묘한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가 만일 촌스럽고 후진 멜로 영화였다면 비판도 할 필요 없었을 것 같다. 그만큼 잘 만들어진 장르 영화였기 때문에 비판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남장을 한 여자와 페미니즘적 주체[배운년 나쁜년 미친년]

황 주 영(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조선 후기에는 남장을 한 여자가 주인공인 여성 영웅소설이 많이 나타났다고 한다. 『방한림전』이나 『옥주호연』등의 소설은 당시의 답답한 가부장제적 현실을 벗어나려고 했던 여성들의 열망과 상상력을 보여준다. 21세기에도 남장 여자가 자주 등장하고 있다. <커피프린스 1호점>(2007)을 시작으로, <바람의 화원>(2008), <선덕여왕>(2009), <미남이시네요> (2009), <성균관 스캔들>(2010) 등의 드라마는 남자 행세를 하는 여자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면서 방영 당시 큰 인기를 끌었다. 여성 상위 시대, 알파 걸, 역차별 등의 단어들이 페미니즘과 여성운동을 공격하는 시대에 쏟아져 나온 남장 여자를 다루는 드라마를 우리는 어떻게 읽을 수 있을까?

알고 보면 부드러운 여자라오

이 드라마들의 공통점 중 하나는 이야기의 한 축인 러브스토리에서 찾을 수 있다. 일반적인 여성들과는 다른 성격을 지닌 주인공은 어쩔 수 없는 이유로 남장을 하고 남자들에게 둘러싸여 생활한다. 이런저런 사건 사고 끝에 서로 호감을 갖게 된 남녀 주인공. (<선덕여왕>을 제외하면) 남자 주인공이 자신의 성정체성을 고민하다가 어렵사리 여주인공에게 마음을 고백하면, 여주인공은 사실은 자신이 여자였노라고 털어놓고 둘은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다.

많은 경우 영화나 드라마 속 여성들은 성녀와 창녀, 캔디같이 착한 여자와 이라이자 같은 나쁜 여자 중 하나였다. 최근 들어 다양해진 여성 캐릭터들도 전형적인 여성 이미지를 조금씩 변주한 것에 그쳤다. 씩씩하거나 좀 남자 같은 데가 있는 여성은 꼭 한번 정도는 연약하고 순진한 면을 보이고, 혹은 진정한 사랑을 하면서 정상적인 여성성을 획득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현대를 배경으로 한 <커피 프린스 1호점>의 고은찬이 그랬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는 고은찬은 일자리를 얻기 위해 남자 행세를 한다. 그녀는 일부러 남장을 한 것이 아니라 자라면서 줄곧 소위 여성스러운 면보다는 남성적인 성격을 갖고 있던 터라 남자행세가 그리 어려운 것은 아니었다. 우여곡절 끝에 남자주인공과 서로의 애정을 확인 한 후, 본격적으로 바리스타 교육을 받기 위해 해외로 떠난 고은찬은 달라진 모습으로 귀국한다. 변화의 폭이 크지는 않았지만 파마도 하고 화장도 해서 훨씬 더 여성스러워진 것이다. <미남이시네요>의 고미녀는 소위 4차원의 민폐형 캐릭터라서 전형적으로 얌전하고 착한 인물은 아니지만, 사고를 치면 뒷수습을 해줄 남자가 필요한 약하고 순진한 여자다.

두 여자 모두 결말에 이르러 남자 주인공의 품에 덥석 안기는 대신 각자의 삶의 계획에 따라 멀리 떠난다. 『방한림전』이나 『옥주호연』에서 여성 영웅들이 결국에는 집으로 돌아와 결혼을 하고 아내와 어머니로 살아가는 것과 달리, 남장을 한 여성 캐릭터들은 사랑이나 결혼보다 더 중요한 무언가를 찾게 된다. 이런 점에서 고은찬과 고미녀가 기존의 여성 캐릭터를 뛰어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이들은 남성성이나 여성성을 체현하는 과정에서 갈등을 겪거나, 이런 정체성에 대해 의문을 갖지 않는다. 이것은 이 드라마들이 현대를 배경으로 하고 연애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끌어갔기 때문에 갖는 자연스러운 한계일 것이다. 현대를 사는 두 주인공은 말 그대로 생존을 위해서 혹은 목숨처럼 소중한 꿈을 위해서 남장을 해야 할 만큼 절박한 상황에 처해있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달달하고 설레는 사랑 이야기에 무겁고 심각한 고민 따위는 안 어울리지 않는가.

진화하는 남장 여자

하지만 남장 여자가 살아가는 무대를 먼 과거로 옮기면 오히려 여성 캐릭터는 조금 더 진화한다. 남장 여자가 등장하는 드라마의 다른 한 축은 여자 주인공의 성장 스토리이다. 조선 후기 여성영웅 소설에서처럼 천부적인 재능과 능력으로 영웅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드라마의 여주인공들은 역경 속에서 자신의 꿈과 욕망을 찾게 되거나 이루게 된다. 앞의 두 드라마에서는 크게 두드러지지 않지만, 사극인 <바람의 화원>, <선덕여왕>, 그리고 <성균관 스캔들>은 여자 주인공이 온갖 역경을 극복하면서 성장해 가는 과정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성균관 스캔들>의 윤희는 페미니즘적 여성 주체에 가장 가까운 인물이다. <선덕여왕>의 덕만은 소위 여성적인 리더십을 보여주는 캐릭터이기는 하지만 남성적인 정치 질서에 대해서 비판적 태도를 드러내지는 않는다. <바람의 화원>의 윤복도 자신의 성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하지만 역시 남성중심적이고 이성애중심적인 사회에 대한 비판적 의식까지 보여주지 않는다. 반면 윤희는 이 두 인물의 한계를 넘어, 가부장적 질서를 비판하고 그에 도전하는 인물이다.

윤희는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남동생은 병약하여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한다. 지금으로 치면 십대 여성 가장인 셈이다. 어린 여자의 몸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었던 데다 스스로 어려서부터 글을 읽고 쓰는 데 관심이 많았던 윤희는 남장을 하고 글을 팔아 돈을 벌었다. 과장에서의 사건으로 인해 임금의 명을 받아 성균관에 들어가게 된 윤희는 세 명의 꽃미남들과 동고동락 하게 된다. 물론 생계유지와 어명이라는 이유도 주요했지만, 윤희는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공부를 할 수 있게 된 것이 무엇보다도 기뻤다. 이렇게 윤희가 생계와 꿈을 위해 남자의 모습으로 성균관에 들어간 상황은 여성이 남성중심의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남성적 질서를 따라야만 함을 보여주는 것으로 읽을 수 있다.

하지만 윤희는 남성적 특성을 체현함으로써 남성적 질서를 수용하는 데서 그친 것이 아니라, 그 남성중심 사회의 모순을 날카롭게 인식하고 비판하며 그 질서를 이겨내는 인물이다. 윤희는 여자도 남자와 다를 바 없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노력한다. 성균관에서 벌어지는 체육활동에서도 시험에서도 좋은 성적을 거두려는 것은 그런 노력의 일환이었다. 여자인 윤희가 남자와 똑같은 능력을 가졌다는 것을 인정해주는 권위는 가부장제에 있으며, 이를 대표하는 인물이 바로 정약용이다. 개혁과 개방을 주장했던 정약용조차도 여자인 윤희가 학문을 탐하는 것을 쉽사리 받아들일 수 없었다. 윤희는 그런 스승에게 ‘남자와 동등한’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으려고 애쓰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스승의 허를 찌르는 질문과 비판을 서슴지 않는다.

“안 된다는 말로는 절 단념시키실 수 없습니다. 계집의 몸으로 글을 알고자 한 그날부터 지금껏 전 단 한 번도 된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으니까요”

“학문은 백성을 위한 것이라 하셨습니다. 계집은 백성이 아닙니까?”

“계집에겐 관원의 자격이 없다 하셨습니다. 헌데 스승님, 참 이상한 일입니다. 이 나라 조선은 왜 이 모양일까요? 관원의 자격을 지닌 사내들이 쭉 만들어왔는데 말입니다.”

윤희는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공적인 영역에 참여할 모든 권리를 박탈당한 상황의 부조리를 인식하고 있다. 그녀는 사회 질서가 추구하는 보편성과 공명정대한 원칙이 여성에 대해서만큼은 적용되지 않는다는 모순을 예리하게 파악한다. 즉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는 것과 별개로 남성중심의 질서를 그대로 수용하지는 않는 것이다. 윤희는 남성과 동등한 능력을 가졌다는 것을 증명하면서도 남성과 똑같이 되려고 하지는 않는다. 이는 성적 차이를 강조하는 페미니스트들이 제시하는 여성 주체와 닮아있다.

남자의 탈을 쓴 여자들

조선 후기의 윤희와 이 천 년대의 여성 사이에 다른 점이 있다면 윤희에게는 없는 권리가 현대의 여성들에게는 주어져 있다는 것이다. 이제 여성들은 남성과 똑같이 교v b 육받을 수 있고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으며, 적어도 법적으로는 공적 영역에서의 정치적, 경제적 활동을 할 기회를 동등하게 갖고 있다. 초기 페미니스트들은 윤희가 갖지 못했던 ‘평등한 권리’를 획득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다. 그러나 자유주의적인 평등주의 페미니스트들이 만족했던 평등한 참정권, 교육, 동일임금은 사실상 빛 좋은 개살구 같은 것이다.

이 평등한 권리들은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남자와 똑같다는 것을 인정받기 위해서 여성들은 몇 배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똑같이 야근을 할 수 있고, 결혼 후에도 아이를 낳아도 일에 지장을 주지 않을 것이며, 부족함 없는 이성적 존재임을 증명해야 하는 것은 남성이 아니라 여성이다. 여성들은 남성이 이미 가지고 있다고 여겨지는 특성들을 똑같이 가지고 있다는 것을 증명해야만 한다. 하지만 이러한 특성들과 가치들, 그 가치를 평가하는 기준 자체는 의문에 부쳐지지 않았다. 여성철학자 뤼스 이리가레는 이러한 문제점을 간파하고, “누구에 대한 평등인가?”라고 묻는다. 이는 여성이 남성과 똑같아지는 것이 과연 진정한 여성해방인지를 묻는 것이다.

이리가레에 따르면 여성들은 남성중심적 사회문화에서 남성이 수립한 언어를 사용하고 법과 질서를 따라야 하는 한, 남성의 타자일 뿐 진정한 여성 주체가 아니다. 남성과 인간이 동의어인 세계에서 여성은 남성처럼 되어야만 인간으로 또는 시민으로 인정된다. 하지만 여성은 여전히 남성보다 뭔가 덜 가진 존재로 여겨진다. 또한 여성이 가부장제가 요구하는 여성성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것 역시 여성 주체라고 볼 수 없다. 이는 오히려 남성의 욕망을 반영한 여성의 이미지이기 때문에 남성의 또 다른 모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리가레는 여성이 남성처럼 되기 위해 노력할 것이 아니라, 남성이 ‘인간’ 개념을 구성하는 기준이 되는 상황 자체를 문제 삼고, 여성의 언어와 문화를 만들어 가면서 진정한 여성 주체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보면 ‘여자답게’ 변하면서 정상적인 여성성을 획득하는 고은찬(커피 프린스)은 겉모습만 변했을 뿐 여전히 남성의 욕망을 반영한 여성 이미지이다. <선덕여왕>의 덕만이는 한 발 나아가, 남성과 똑같은 힘과 권리를 가진 여성의 이미지라고 할 수 있다. 이는 평등주의 페미니스트들이 바랐던 여성의 모습이다. 이런 덕만은 성 주류화 정책에 힘입어 고위관직에 진출하고 기업의 CEO가 된 우리 시대의 여성들을 떠올리게 한다. 우리는 이런 여성들이 가부장제적 관점을 철저히 내면화한 ‘명예남성’으로서 오히려 반여성적인 언행을 하는 장면을 종종 목격한다. 그렇다면 윤희는 진정한 여성 주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진정한 여성 주체란 무엇일까?

페미니즘적 주체

이리가레와 같은 차이의 페미니스트들이 제안하는 진정한 여성 주체가 무엇인지, 어떻게 그런 여성이 될 수 있는지 간단하게 대답할 수는 없다. 게다가 ‘진정한 여성’의 내용을 못 박아 두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여성이 가부장제 안에 있으면서 동시에 그 체계에 저항하는 방식으로 여성의 주체성을 계속해서 창조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성균관 스캔들>의 윤희는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페미니즘적 주체성을 구성해 가는 여성 주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윤희는 전통적인 여성성을 고수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명예남성이 되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녀는 한편으로는 자신의 능력과 장점을 권력을 가진 남성에게 인정받으려고 노력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바로 그 남성 권력의 모순을 드러내고 도전한다. 즉 윤희는 남성중심적 사회의 중심으로 들어가려고 하면서도 그 중심 자체를 뒤흔드는 여성인 것이다. 그리고 윤희가 이렇게 할 수 있게 된 동력 중 하나는 그녀 자신의 욕망이다. 이런 모습은 이리가레가 말하는 여성 주체와 많이 닮아있을 뿐 아니라, 우리 시대의 여성들의 일상적 모습과도 비슷하다.

남성중심적 사회에서 살아가는 여성들은 모두 남자의 탈을 쓰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여성들은 이 질서 안에서 살아남기 위해 남성적 특성을 습득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성들은 드라마 속 주인공들처럼 어느 정도는 남장을 하고 있다. 하지만 또 다른 측면에서 여성들은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남자의 탈을 쓰기도 하고 벗기도 한다. 주체가 되고자 하는 여성에게 남성중심적 사회 질서에 적응하고 그 한 가운데로 들어가는 것이 중요할 때도 있지만, 그 질서가 여성을 방해하고 괴롭힌다는 것을 인식하고 그 핵을 깨뜨리는 것 역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최근 남장 여자가 등장하는 드라마와 소설이 자주 등장하는 것은 어쩌면 여성들이 처한 이러한 상황에 대한 인식이 은연중에 사회적으로 공유되어 있기 때문 아닐까?

엄동설한에 본 따뜻한 영화, 『호우시절(好雨時節)』/송종서 [보고 듣고 생각하기]

[보고 듣고 생각하기]

엄동설한에 본 따뜻한 영화, 『호우시절(好雨時節)』

글: 송종서 (민족의학연구원 상임연구원)

 

시와 자전거

 

2009년 5월 8일 건설기계를 만드는 중장비 회사 팀장 박동하(정우성)는 청두(成都)행 비행기를 타고 쓰촨(四川) 지역으로 출장을 간다. 신혼여행을 떠난 담당자 대신이지만 기내에서 동하가 손에 들고 있는 책갈피 속에는 언젠가 중국 친구 메이(까오 위안위안)에게서 받은 엽서가 꽂혀 있다. 쓰촨 청두는 메이가 태어나서 자란 고장이다.

메이와 동하는 미국 유학 시절에 만나 서로를 좋아하는 감정을 품었지만 실제 연인 사이로 발전하지는 못했다. 동하는 메이에게 자전거 타는 법을 가르쳐준 기억이 있고, 메이는 미국에 있을 때 동하가 써서 보여준 영시들을 좋아했던 기억이 있다. 시와 자전거는 슬픔과 아름다움을 함께 가진 영화 『호우시절』(2009, 허진호)의 영상과 스토리를 만들어내는 씨줄과 날줄이다. 그러나 두 남녀가 지닌 이런 낭만적인 기억들은 동하가 시내 관광을 하러 잠시 두보초당(杜甫草堂)에 들른 출장 첫날, 오후의 햇살 아래 우연히 다시 만난 두 사람이 서로에게 드리운 긴 그림자 같은 것이다. 그날 저녁 둘이 만나 맥주를 연거푸 마시고 또 고량주를 마시러 포장마차로 2차를 가면 두 사람의 미국시절 기억은 서로 엇갈린다.

▲ 영화 호우시절

말하자면 현재와 무관한 과거의 기억에서 현재와 밀접하게 관련된 과거로 옮겨간다. 동하는 미국 유학시절에 메이에게 키스를 한 적이 있다고 말하지만 메이는 그런 일이 없었다고 대답한다. 동하는 짐짓 자신이 메이의 남자 친구였다고 주장해 보지만 메이는 둘이 연인이었던 적이 없다고 부인한다. 심지어 메이는 동하에게 자전거를 배운 기억도 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여기서 허진호 감독은 현대 영화의 오랜 주제인 진술(기억)의 문제를 던져놓는다. 물론 이것은 멜로드라마의 흥미와 감동을 더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도 그는 다림(심은하)과 정원(한석규)의 연애담을 각자의 시선과 기억으로 나누어 보여줌으로써 애틋한 감동의 느낌을 더하는 효과를 거두었다. 그 열쇠는 진술자의 기억 또는 시선 속에 숨겨진 욕망일 것이다. 욕망은 사람과 상황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난다. 진술자의 적극적인 의지를 통해 드러날 수도 있고, 진술자가 처한 무기력한 현실을 반영하는 것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 적극적이고 소극적인 차이는 있어도 결국 모두가 진술자의 의식적인, 또는 무의식적 욕망의 표현이다. 동하와 메이는 예전과 다름없이 매력적인 서로에게 이끌리고 서로를 원한다. 그러나 오랜만에 다시 만난 두 사람이 처한 현실상황은 사뭇 다르다.

돼지곱창쌀국수

 

“메이, 너 그거 알아? 네가 김치를 좋아했더라면 우린 그때 완벽한 커플이 되었을 거야.”

“아니지. 네가 중국 음식을 잘 먹었더라면 우린 지금쯤 결혼을 했을 거야.”

“무슨 소리야? 내가 중국 음식을 얼마나 잘 먹는데……”

『호우시절』은 남녀의 사랑에 관한 심각한 주제를 다룬 영화는 아니다. 그래서 이런 대화는 적당히 우스운 에피소드를 만들어 내고 그것이 멜로 주인공들의 연애감정을 더욱 진전시키기 마련이다. 이 영화에서 두 사람의 대화는 ‘페이창펀’이라는 사실적인 소재와 연결되어 가볍고 유쾌한 분위기에서 연애 무드를 무르익게 한다.

동하가 처음 청두에 도착한 날 공항으로 마중 나온 능청맞은 지사장(김상호)은 그를 데리고 노천 식당에 가서 유명한 쓰촨의 국수를 맛보게 한다. 딴딴미엔(擔擔麵)으로 보이는 국수를 마주한 동하에게 지사장은 자꾸 자신의 페이창펀(肥腸粉)을 맛보라고 권한다. 동하는 어쩔 수 없이 한 젓가락 입에 가져가지만 비릿한 돼지창자와 혀를 마비시키는 아리고 매운 향신료에 숨이 막힌다. 쓰촨의 맛은 그렇게 강렬하고 이질적이다. 한국인의 ‘중화요리’와는 거리가 멀다. 김치와 중국음식으로 가벼운 실랑이를 벌인 끝에 메이는 배가 부르다는 동하에게 꼭 먹어봐야 할 음식이 있다고 말한다. 동하는 손사래를 쳤지만 꽤 진지한 메이의 태도에 더 이상 만류를 할 수가 없다. 에누리 없이 그것은 페이창펀이다. 우리말로 옮기면 ‘돼지곱창 쌀국수’ 쯤 된다. 메이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한다. “동하. 나는 페이창펀을 잘 먹는 남자가 좋아.”

여기서 동하의 기호나 선택은 무의미하다. 메이와 어렵게 다시 만나 이번에는 잘해보리라 마음먹은 동하는 컥, 컥 하면서도 페이창펀을 열심히 먹는다. 돼지창자를 삶다가 또 삼각형, 팔각형의 울긋불긋한 향신료들을 넣고 끓인 국물에 그 곱창을 썰어 넣고 쌀국수를 말아서 낸 붉고 느끼한 외계인의 음식을, 먹게 만드는 힘은 연애다. 하지만 이런 단순명쾌한 연애감정은 주로 박동하의 것이다. 메이는 동하와 함께 저녁을 먹는 자리가 기쁘지만 그녀가 처한 현실은 말할 수 없이 복잡하다. 메이에게 페이창펀은 단순한 고향 음식일 뿐만이 아니다. 물론 이 음식은 청두에서 나고 자란 메이의 삶과 기억의 상징이기도 하겠지만 그녀가 안고 있는 상처와 관계가 깊다.

요즘 유행하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뜻하는 ‘트라우마’라는 의학 용어를 빌려 말하면 그녀에게는 사랑하는 사람과 페이창펀을 분리할 수 없는 트라우마가 있다. 다시 말해 페이창펀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할 때 죄의식을 느끼는 것이다. 영화 막바지에 나오지만 메이는 1년 전에 사랑하는 남편과 사별했다. 메이의 남편은 페이창펀을 좋아했고 사망 1주기가 되는 날 메이는 동하와 함께 있을 때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한스럽게 오열하며 페이창펀을 끓여서 남편의 영정 앞으로 가져간다.

착각과 추측

 

미국 유학 시절에 동하는 메이에게 미국인 남자 친구가 있다고 생각했고, 메이는 동하에게 일본인 여자 친구가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생각들은 모두 착각이었다. 어쩌면 그들 자신의 자기보호본능이 만들어낸 두려움 때문에 갖게 된 착각인지도 모른다. 두 사람은 서로 좋아하는 감정이 있었지만 서로의 주변에 있는 다른 이성을 핑계로 자신을 드러낼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리고 메이가 겨우 용기를 내서 고백했을 때에는 동하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어쩌면 그날 동하가 말한 대로 두 사람은 키스를 했는지도 모르겠다.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할 때 동하는 메이에게 자신이 타던 자전거를 주었다. 그러나 메이는 동하가 떠난 후 자전거를 팔아버렸고 1년 뒤 청두로 돌아왔다. 메이는 중국인답지 않게 자전거를 무서워했지만 동하의 자전거를 팔아버린 진짜 이유가 자전거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동하가 없는 시?공간에서 자전거는 무의미한, 죽은 사물이 된 것이다.

마찬가지로 동하는 메이를 알면서 시적 영감을 받았을 것이고, 그래서 그의 시들은 메이의 사랑을 받았을 것이다. 귀국한 뒤에 메이는 동하에게 안부를 묻는 엽서를 보냈지만 동하의 답장을 받지 못했다. 갓 취직을 했을 때에는 너무도 바빴고, 좀 여유가 생겼을 때에는 여자 친구가 있었다고 동하는 대답한다. 사실 몇 통인지 기억이 나지 않을 만큼 여러 번 답장을 쓰고도 보내지 못한 동하였다. 처음에는 메이를 그리워했을 것이고, 그럴수록 메이가 멀리 있음을 실감했을 것이다. 메이는 고향에 돌아와 대학에서 일하면서 두보초당에서 외국인 관광객을 위한 영어 가이드를 했다. 선후는 불분명하지만 두 가지 일을 모두 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는 동안 메이는 동하를 잊지 못하고 엽서를 보냈고 기다리던 답장은 끝내 오지 않았다. 그렇게 세월이 흘렀고 메이는 두보초당에서 만나 함께 일하던 다른 사람과 사랑하게 되었으며 결혼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들의 결혼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메이는 동하와 다시 만난 며칠 동안 예전 미국 유학시절로 돌아가 다시 가슴 두근거리는 사랑을 꿈꾸었다. 그 시절 동하와 메이는 서로를 사랑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설레임과 기쁨이 클수록 현실은 더욱 무겁고 절망적이다. 메이는 결국 동하에게 자신이 결혼한 여자임을 털어놓지만 남편을 잃었다는 말은 차마 할 수 없다. 그녀는 이제 동하를 그만 놓아야 할 때라고 느낀다. 그리고 좀 더 가볍고 강해지려고 애쓰지만 혼자 감당하기 힘든 괴리에 부딪혀 넘어진다. 메이를 쓰러지게 한 것은 교통사고가 아니다.

동하가 쓰촨으로 출장을 온 목적은 ‘사천 현장 장비 조사 및 딜러 방문’이다. 여기서 ‘사천 현장’은 무거운 언어다. 박동하가 출장을 오기 1년 전인 2008년 5월 12일에 중국 쓰촨성 원촨(汶川)에서 리히터 8.0의 대지진이 일어났다. 이 지진으로 쓰촨 전역에서 죽고 행방불명이 된 사람이 9만명이었다. 청두에서만 4,276명이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메이의 남편도 그들 중 한명이다. 무너져 내린 집과 건물은 21만 6천동이다. 지금도 쓰촨성 각지에서는 복구공사가 한창 진행중이다. 동하와 지사장의 기업에서 생산하는 중장비가 호황을 누리는 것은 중국의 일반적인 건설경기가 좋기 때문이 아니라 바로 쓰촨 대지진 때문이다. 죽은 자와 산 자, 메이 남편과 박동하.

꽃이 피어서 봄이 오는가

 

동하의 출장이 거의 끝나 갈 무렵 청두 시내에는 촉촉하게 밤비가 내린다. 두 사람은 비를 맞으며 길가에 서 있다. 메이는 비에 젖은 얼굴로 동하를 보면서 묻는다. “옛날에 내가 너에게 사랑한다고 말한 걸 기억하니?” 영화뿐 아니라 현실에서도 객관적인 ‘사실’이 별로 의미를 갖지 못할 때가 있다. 동하와 메이가 미국에서 연인으로 발전하지 못한 것은 서로 사랑한다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이 아닐 것이다. 두 사람 사이에는 ‘현실’이 가로놓여 있었다. 한국과 중국이라는 국적의 차이, 민족의 차이, 문화의 차이, 또 그보다 유서 깊은 양국 사이의 오랜 선입견들이 버티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남성과 여성이라는 만고불변의 차별의식이, 두 사람 사이에도 왜 있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이 모든 ‘현실’은 그들이 의도한 것이 아니다. 다만 이렇게 운명적인 것으로 보이는 ‘현실’에 순응하는 사람도 있고 거역하는 사람도 있다.

슬픈 얼굴로 여자가 남자에게 묻는다.

“동하, 꽃이 피어서 봄이 오는 걸까, 봄이 와서 꽃이 피는 걸까?”

슬프고도 아름다운 이 말은 시(詩)의 성인(聖人) 두보(杜甫)의 시구에서 비롯된 것이다. 두보는 전란과 당쟁 속에서 심한 굴곡을 겪었지만 청두에서 초가집을 짓고 5~6년 동안 살았던 그 시절이 그의 인생에서 그나마 가장 평화롭고 행복한 시절이었다고 한다.

봄날 밤의 반가운 비」
두보
좋은 비는 때를 알고 내리니
봄에 내려 생명을 피어나게 하네
바람을 따라 밤중에 살며시 들어와
소리 없이 만물을 적시고 있구나
들길에는 먹구름 드리워 컴컴한데
강 위에 저 조각배 홀로 불을 밝혔네
새벽에 붉게 젖은 곳을 보니
청두는 온통 꽃으로 덮여 있구나
「春夜喜雨(춘야희우)」
杜甫
好雨知時節 (호우지시절)
當春乃發生 (당춘내발생)
隨風潛入夜 (수풍잠입야)
潤物細無聲 (윤물세무성)
野徑雲俱黑 (야경운구흑)
江船火獨明 (강선화독명)
曉看紅濕處 (효간홍습처)
花重錦官城 (화중금관성)

 

두보의 이 시구에서는 해가 등장하지 않는데도 이 시를 읽으면 마치 따사로운 봄 햇살이 비치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엔딩 크레딧에 올라오는 두보의 시가 이 영화의 따스한 이미지와 어우러지면서 생겨난 착각일 것이다. 『호우시절』은 두 남녀의 애틋한 사랑과 운명적인 이별, 그리고 마지막 장면의 희망이 쓰촨 청두의 햇살과 촉촉한 봄비, 그리고 자전거와 잘 어우러져 아름답고 슬픈 감흥을 주는 영화다. 특히 이 영화에 등장하는 사실적이지만 추악하지 않은 사물들은 이 영화가 지닌 서정시의 느낌을 더한다. 허진호 감독은 이전 영화들에서도 주인공들의 삶, 주변 인물, 사물의 리얼리티를 음으로 양으로 균형감 있게 보존하면서 꺼져가는 생명이나 지켜지지 못하는 약속들, 변해가는 사물의 속절없는 운명들을 조용한 시선으로 그려냈다. 이런 이유 때문에 허진호의 영화는 시적 정서를 좋아하는 관객들에게 큰 호응을 얻는 게 아닌가 싶다.

아무런 사전 정보 없이 이 영화를 본다면 마지막으로 갈수록 드러나는 메이의 아픔과 절망적인 상황을 예상하기란 쉽지 않다. 햇살이 내리쬐고 물이 흘러가는 듯한 자연스러운 시나리오가 한 몫을 했다. 또 결이 섬세하면서도 억지스럽지 않고 자연스러운 까오 위안위안의 연기가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정우성의 연기도 이전과 사뭇 다르게 새로운 인물 전형의 가능성을 느끼게 한다.

 

커다란 무협, 『검우강호』/최인실 [보고 듣고 생각하기]

[보고 듣고 생각하기]

커다란 무협, 『검우강호』

글: 최인실(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졸)

 

1.『검우강호』의 줄거리

 

『검우강호』는 달마의 시신에 관한 프롤로그로부터 시작한다. 이제 관객들이 기대하는 것은 무림 맹주를 만들어준다는 달마의 시신을 차지하기 위한 강호인들의 혈투이다. 그리고 관객의 기대에 부응하듯이, 강호 최대의 살해집단 흑석파의 소개와 함께 장해단 일가가 살해된다. 하지만 곧 흑석파 최고 살수 세우가 팀을 배신하고 달마의 시신을 훔쳐서 달아난다. 흑석파는 세우의 목과 달마의 시신에 현상금을 건다. 그녀를 쫓는 강호인들. 세우는 이들을 피하기 위해 얼굴을 바꾼다.

이 숨 막히는 15분이 지나고 나면 『검우강호』는 세우가 그런 것처럼, 자신의 얼굴(장르)을 바꾼다. 증정이 된 세우는 등장과 함께 집을 구하고 비단 장수란 직업을 갖는다. 그리고 그녀는 우편배달부 강아생을 만난다. 강아생은 증정의 테스트를 모두 통과한 다음에야, 그녀와 결혼을 할 수 있었다. 초반 15분 동안의 빠른 전개와는 다르게, 증정과 강아생의 사랑은 느긋하게 진행된다. 영화는 스피디한 무협에서 느긋한 로맨스로 변화한다.

증정의 도피 생활이 탄로가 난 것은, 강아생을 구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그녀가 자신의 무공을 드러낸 이후이다. 세우가 얼굴을 바꿨지만, 그의 무술을 바꾸진 못했다. 그리고 영화는 다시 한 번 얼굴을 바꾼다. 이제 『검우강호』는 흑석파에 속한 인물들의 욕망, 그리고 그들의 관계를 주로 다룬다. 세우라는 개인으로부터 시작해서 남녀 관계(로맨스)로 그리고 마지막에는 흑석파라는 모의 가족 관계로, 영화가 다루는 단위는 점차 복잡해진다. 그리고 영화는 육죽이 가르쳐준 4개의 초식으로 전륜왕을 물리친 증정과 강아생이 행복하게 맺어지는 것으로 엔딩을 맞는다.

 

2. 거세된 아버지들

?

영화 『검우강호』에서 흑석파의 수령, 전륜왕은 이름 그대로 강호의 절대고수이다. 그러나 그의 또 다른 모습은 9품 서한잡이 환관 조봉이다. 강호에서 조봉은 절대 고수이지만, 그의 실체는 거세당한 환관에 불과하다. 그는 비유적으로가 아니라 말 그대로 국가에 의해 남성성을 거세당한 인물이다. 그가 라마의 시신을 욕망하는 유일한 이유는, 거세된 자신의 신체를 정상인으로 돌려놓기 위해서이다. 명나라에 살던 조봉은 페니스를 거세당함으로써 국가의 폭력을 자신의 신체에 각인한다. 여기선 결핍이 곧 (통제의) 흔적이다. 『검우강호』에서 그가 했던 모든 행동은 자신의 신체적 결핍, 즉 자신의 신체에 남아 있는 국가 폭력의 흔적을 지우기 위함이었다. 그는 자신의 신체를 국가의 통제 이후가 아닌, 온전히 자신의 것이었던 시절로 되돌리고자 동분서주한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것은 조봉이 흑석파의 수령이라는 점이다. 무술을 가르쳐주는 스승이자 전륜왕으로 불리는 수장으로서 조봉은, 흑석파 일원의 아버지 자리에 위치한다. 하지만 조봉은 페니스가 없는 아버지, 거세된 아버지이다. 그리고 그의 뒤에는 더 큰 아버지, 명나라 황제가 버티고 있다. 그러나 전륜왕을 통제하는 아버지, 황제는 『검우강호』에서 언급되지 않는다. 단지 조봉의 신체에 각인되어 있을 뿐이다. 혹은 황제의 존재는 이 영화에서 그리 중요한 것이 아일 수 있다. 이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거세된 아버지들’, 더 구체적으로는 거세된 아버지들의 욕망이다.

『검우강호』에서 조봉을 포함한 나이 든 남자는 모두 라마의 시신을 욕망한다. 채희서(마법사)는 자신의 병든 몸을 고치기 위해, 그리고 앉은뱅이 은행장 장대경은 다시 걷기 위해 라마의 시신을 욕망한다. 흥미로운 것은 그들 모두가 무림맹주라는 강호의 큰아버지를 욕망하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그들은 거세 이전의 완전했던 자신의 신체를 욕망한다. 단지 그뿐이다. 또 그들은 자신이 거세된 이유나 시스템에 대해선 감히 불만을 품지 않는다. 그리고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그 시체가 중국 외부인인 인도인 라마의 신체라는 점이다. 나이 든 남자들은 중국 외부의 신체로 자신들의 몸을 재구성하려고 한다. 즉 그들은 중국인의 정체성을 버림으로써 자신들의 결핍을 극복하려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 외부인인 라마의 신체는 800년 전 시체이다. 게다가 반 토막이 난 시체이다. 바로 여기가 그들의 욕망이 실현 불가능함을 드러내는 지점이다. 고목에서 꽃이 피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검우강호』 속 나이 든 남자들은 시체를 통해 자신의 결핍을 채우려 한다. 그들은 이미 죽어버린 것 속에서 새로운 생명 혹은 건강한 신체를 욕망한다. 그리고 그들은 마치 시간屍姦에 몰두하는 병자처럼 광기에 사로잡혀있다. 『검우강호』의 풍경은 이 불가능성,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욕망하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 그리고 이는 장 이머우의 2002년 작품 『영웅』과 정확히 반대되는 지점이다.

 

3. 중국으로부터 무협, 홍콩(대만)으로부터의 무협

 

“(…) 유가의 ‘의(義)’가 통치계층의 경전중심주의와 결합한 것과는 다르게, ‘협의(俠義)’는 피압박계층의 도덕적 준칙을 이루고 있는 것이라는 점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이것은 ‘협의’가 약자의 철학임을 시사한다. 그리고 그것은 광범하게 중국대중의 심층을 형성하고 있는 요인이 되었다. 중국의 무협문화는 유가와 법가 통치의 경전중심주의적 권력에 대항하는 수단이었다.” – 박병원,「시가, 경극, 무협-중국 영화 속의 시의와 국가 상상」,『중국학논총中國學論叢 제19집』, 고려대학교 중국학연구소, 2006, p,107

중국 무협장르는 『와호장룡』 이후와 이전으로 나뉜다. 2000년 『와호장룡』이 세계화된 무협블록버스터 시대를 예고했다면, 이 흐름을 본격화한 것은 2002년작 장 이머우의 『영웅』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와호장룡』이 전 세계적으로 흥행에 성공했지만, 중국대륙에서만큼은 예외였다는 사실이다. 중국 관객들과 평단은 대만식, 그리고 미국식으로 변형된 이안의 무협에 불편함을 드러냈다. 반면 장 이머우의 『영웅』은 중국 ‘본토’인들의 열렬한 호응을 받았다 (이 영화는 중국에서 본토 내 흥행에서 처음으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를 앞선 작품이다). 그러나 『영웅』 속 진왕의 ‘천하통일’에서 드러나는 중국인의 제국주의적 욕망은 중국 ‘외부인’들에게는 불편함을 주었다.

원래 무협은 약자의 장르이다. 무협에서 (유)협은 국가의 해체를 시도하고, 그들은 체제 밖에서 체제를 감시했다. 하지만 장 이머우의 『영웅』은 기존의 무협 장르를 뒤집는다. 영화 『영웅』에서 무명(자객 형가)은 사라지고, 진왕의 업적만이 남는다 (『영웅』의 마지막 장면은 만리장성을 배경으로, 진왕의 업적을 기록한 문자텍스트와 이를 읊는 나레이션이다). 2002년 중국의 욕망이 ‘진시황’으로 구체화되어 스크린에 등장했다. 피압박계층의 문화이자 도덕 준칙이었던 협객 문화가 2000년대에 들어와서는 세계를 향한 중국의 제국주의적 욕망을 드러내는데 이용된 것이다. 그 이후에도 장 이머우는 『연인』, 『황후화』 등을 통해 이 경향을 이어갔다.

하지만 홍콩 출신 오우삼과 대만 출신 수 차오핑이 만든 영화 『검우강호』는 다르다. 의리가 땅에 떨어진 강호에서의 고아들의 생존기, 그것은 홍콩 누아르 장르인 동시에 홍콩 영화 자체이다. 홍콩 누아르의 시작은 오우삼 감독의 1986년 작품 『영웅본색』 부터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송자호(적룡)과 송자걸(장국영) 형제의 아버지는 병들어 침대에만 누워있다가 영화 중반에 죽는다. 그리고 소마(주윤발)에겐 처음부터 아버지가 없었다. 『영웅본색』 이후 오우삼의 영화에서 아버지의 존재는 아예 사라진다. 이는 비단 오우삼만의 특징은 아니었다. 홍콩영화에는 대부분 아버지와 어머니가 등장하지 않는다. 그들에겐 형제가 있고, 연인이 있을 뿐이다. 그래서 마치 홍콩은 고아들이 만든 도시처럼 느껴진다.

중국 대륙에 의해 거세된 아버지 조봉, 마술사로도, 무술인으로도 완전할 수 없었던, 그래서 죽는 순간까지 두 가지 정체성을 가진 채희사, 최고의 경제적 부를 가졌지만 정작 걷지 못하는 장대경. 이 나이 든 세 명의 남자는 묘하게 홍콩을, 그리고 대만을 상기시킨다. 홍콩영화에서 사라졌던 아버지는 그렇게 온몸에 결핍의 흔적을 가득 갖고서 2010년 다시 등장한다. 하지만 그들의 결핍은 결코 채워지지 못한다. 그리고 결핍(거세)된 아버지들의 아들과 딸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4. 살부, 가족의 해체 그리고 커다람

 

『검우강호』의 모티브 중 하나는 원수 집안의 딸과 아들의 사랑이야기인 『로미오와 줄리엣』이다. 세우와 장인봉은 이름과 얼굴을 버리고, 두 번의 죽음을 경험한 후에 사랑을 이뤄낸다. 둘의 사랑이 이뤄지는 과정은 언뜻 불교에서의 업보와 윤회, 그리고 결국 깨달음을 얻는 과정으로 보인다. 하지만 더 정확히 그것은 세우와 장인봉의 가족이 살해되고, 둘이 각자의 가족으로부터 해방되는 과정이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줄리엣은 로미오에게 “아버지를 거부하고, 당신의 이름을 버리라”라고 로미오에게 요청한다. 그들은 사랑의 도피를 계획하지만 결국 둘의 사랑을 가로막고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은 여전히 살아 있던 그들의 가족이었다. 하지만 중국의 줄리엣과 로미오는 다른 방식을 택한다. 세우와 장인봉은 서로의 가족을 죽인다.

세우가 처음 스크린에 등장해서 하는 일은, 장해단 일가의 살해이다. 그리고 곧 그녀는 자신을 쫓는 강호인들로 이루어진 모의 가족을 살해한다. 하지만 정작 세우는 자신의 가족인 흑석파로부터 쫓긴다. 그녀는 얼굴과 이름을 바꾸지만 “細雨池上看 微風木末知 이슬비(세우)는 못 가운데에서 볼 수 있고, 가는 바람은 나무 밑에서 알 수 있다.” 라는 말처럼, 세우는 자신의 무공인 벽수검법으로 인하여 정체를 들키게 된다. 세우는 얼굴은 바꿨지만 자신의 무술을 바꾸진 못했다. 그녀가 자신의 정체성을 완전히 바꾸기 위해서는 조봉에게서 배운 무술을 버려야 했다.

조봉은 세우에게 잘못된 초식을 가르쳐 주고, 소림사 스님 육죽이 이를 바로잡아준다. 그리고 이는 세우의 스승, 즉 아버지가 조봉에서 육죽으로 변화하는 과정이다. 여기서 다시 한 번 불교가 중국 외부로부터 들어온 종교라는 것이 상기되어야 한다. 세우는 자신에게 잘못된 가르침을 주던 결핍된 신체의 아버지를 버리고, 올바른 가르침을 주는 건강한 아버지를 선택한다. 육죽이 라마의 시체를 푸는 열쇠가 불심이라고 한 것은, 또 영화 내내 ‘돌다리’라는 모티브가 계속 등장한 것은 그들이 받아들여야 할 것이 중국 안의 이미 죽은 시체가 아니라 중국 ‘외부’에 있다는 것을 드러낸다. 아버지 세대는 이를 깨닫지 못했고, 세우는 이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세우는 이름을 버리고, 얼굴을 버리고, 무공을 버리고, 아버지이자 스승인 조봉을 살해함으로써 겨우 증정이 되었다. 장인봉은 흑석파를 제거하고, 아버지를 죽인 세우를 용서하고서(혹은 망각하고서) 강아생이 되었다.

『검우강호』 속 나이 든 남자들은 모두 죽는다. 장해단, 채희사, 장대경, 조봉은 자신의 욕망, 혹은 결핍을 메우지 못하고 죽임을 당한다. 거세된 아버지의 욕망은 애초부터 이뤄질 수 없었다. 그들의 몸에 새겨진 ‘거세’의 흔적은 극복되지 못하고, 아들과 딸에 의해 그들과 함께 통째로 제거된다. 그리고 남은 아들과 딸은 무덤가에서 되살아난다. 때문에 『검우강호』의 터무니없이 낙천적인 마지막 장면은 사실 무섭도록 냉정한 결론이다. 이 마지막 장면에는 거세된 아버지 세대를 죽여야지만 새로운 세대가 다시 태어날 수 있다는 메시지가 숨어 있는 것이다. 또 그 새로운 세대는 중국 내부가 아닌 중국 바깥에서 새로운 스승, 아버지를 찾아야 한다. 거세된 아버지들이 신체에 집착하는 반면, 아들과 딸은 신체가 아닌 정신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어쩌면 이 새로운 세대들이 말하는 것은 영토를 넘어선 국가, 진정한 세계인으로서의 정체성일지도 모른다. 중국 대륙으로부터 파생된 국가 정체성이 아닌, 자기 자신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기 위해 홍콩, 대만(그리고 마카오)이라는 거세된 국가성은 제거해야 한다. 무덤으로부터의 부활, 탄생.

많은 사람들이 『검우강호』가 기존의 무협블록버스터에 비해 소작인 것에 아쉬움을 표하였다. 특히 우리나라 배우 정우성이 주연한 영화라는 점에서 더욱 그러했던 것 같다. 하지만 장 이머우의 『영웅』이 중국으로 모아지는 한 점, 단지 일一을 말하고 있다면 수 차오핑의 『검우강호』는 중국을 넘어서는 세계, 다多를 말한다. 『영웅』이 모든 걸 한 점으로 모으는 깔데기라면, 『검우강호』는 뒤집힌 깔데기이다. 작은 점으로부터 무한히 확장될 수 있는 뒤집힌 깔데기 말이다. 또 『검우강호』는 영토 국가, 민족 국가를 넘어선, 세계인으로서의 상생을 말하고 있다. 때문에 내가 보기에 『검우강호』는 작은 영화가 아니라 오히려 굉장히 커다란 영화이다.

 

당신이 생각하는 모성은?, 일본 드라마 ‘mother’ / 신우현 [보고 듣고 생각하기]

[보고 듣고 생각하기]

당신이 생각하는 모성은?

– 일본 드라마 ‘mother’를 보고 –
글: 신우현 (상지대 강사)

 

모성신화 추종자의 고백

 

지금 나는 모성신화를 믿지 않는다. 어머니라는 이름을 부여받은 사실 하나만으로도, 자식이 있다는 이유만으로도, 희생적이고도 절대적인 사랑이 저절로 생기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고백하건대 나도 꽤나 오랫동안 이 신화의 추종자였다. 결혼 전에는 친정어머니에 대해서 ‘도대체 무슨 엄마가 이래?’ 라며 이런저런 불평을 해댔다. 엄마라면 당연히 자기희생적이어야 하고, 어떤 상황에도 흔들리지 않는 강한 존재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랬기에 아이를 낳고나서는 패배감에 시달려야 했다. 특히 처음 아이를 낳고 삼 년 간은 무척 힘들었다. 이 시기에 아이는 엄마의 모든 시간과 주의력과 육체적인 희생을 요구한다. 책을 읽고 생각할 수 있는 시간, 좋아하는 취미를 즐길 수 있는 여유, 만나고 싶은 사람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일은 모두 허용되지 않았다. 아이가 원할 때 젖을 물려야 했으며, 수시로 찾아오는 젖몸살, 젖 먹이느라 손목이 나가서 침을 맞아야 했던 일 등은 내 몸을 내 마음대로 할 수 없었던 시기의 일로 육체적인 고통의 연속이었다. 아이의 얼굴을 들여다봐도 내 몸의 고통은 사라지지 않았다.

▲ 일본 드라마 머더mother

게다가 아이가 좀 더 크자 육체적인 고통은 상대적으로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힘들었다. 끼니를 챙기는 등의 엄마로서 당연히 감당해야 하는 일상의 무게, 온전한 인격을 지닌 한 사람으로 성장하도록 돕고 사회의 일원으로 규범을 익히도록 돕는 일, 아이에게 사랑을 표현하는 바른 방법 등 모두 어려운 일 투성이였다. 매일 자기 한계를 느껴야 했다. 그러니 자책을 멈출 수가 없었다. 나는 어쩌면 이렇게도 부족한 엄마인 걸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만의 일과 나만의 시간을 원하는 내가 또 있었다.

나는 현명하지도 않고, 강하지도 않으며, 여전히 이기적이어서 헌신적이지도 않은 열등한 엄마구나. 그리고 생각했다. 나는 모성이 부족한 여자구나.

일본 드라마 ‘mother’

이제부터 이야기하려고 하는 ‘마더’는 김혜자 씨가 엄청난 연기를 보여줬다던 한국의 영화가 아니다. 전해 듣기로는 모자란 아들을 지키려고 엄청나게 싸워나가는 엄마가 그려졌단다. 하지만, 가뜩이나 엄마로서 열등감에 싸여 있던 나는 그 영화를 보고 싶지 않았다.

그러던 중 평상시 즐겨가는 블로그에서 이 드라마를 알게 되었다. 무척이나 짜임새가 있는 이야기가 좋았고, 특히 여덟 살 여자아이 역할을 했던 아역 배우의 연기가 좋았다. 무엇보다도 엄마에 대해 이야기하면서도 희생적인 어머니를 찬양하는 모성신화를 신봉하는 작품이 아니라서 좋았다.

찾아보니 ‘mother’는 2010년 4월부터 일본에서 방영되었던 TV 드라마였다. 진지한 소재에 비해 16%라는 상당히 높은 시청률로 보인 것으로 미루어 일본에서도 꽤나 호응이 컸던 작품이다. 게다가 아동학대와 유괴라는 선정적인 소재의 이야기라 자칫하다가는 막장으로 갈 수도 있었을 텐데도 근래 보기 드문 수작이라는 평가받고 있었다.

드라마의 여주인공인 스즈하라 나오는 30대 중반의 철새를 연구하는 대학 연구소의 연구원이다. 하지만, 연구소가 폐쇄되는 바람에 아이를 싫어하면서도 초등학교 선생님이 되고, 임시로 떠맡은 학급의 담임으로서 미치키 레나라는 8살짜리 여자 아이를 만나게 된다. 레나는 온 몸에 멍이 들어 있어 학교로부터 아동학대 피해자가 아닌가 하는 우려를 받고 있는 아이였다.

하지만 무표정한 차가운 얼굴로 방관하던 나오는 우연히 영하 4도의 날씨에 얇은 원피스 바람으로 검은 쓰레기 봉투에 넣어진 채 골목에 버려져 있던 레나를 발견하게 된다. 결국 나오는 레나의 엄마가 되기로 결심하여 레나를 데리고 떠난다. 하지만, 생모가 아닌 여자가 아이에게 모성을 품는 것은 현실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없는 범죄다. 결국 나오는 유괴범으로 경찰의 추격을 받게 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모성은 어떻게 생겨나는가

 

나오가 레나의 엄마가 되기로 결심한 것은 학대받던 아이를 보호하는 범주에서 벗어난다. 아동보호소와 경찰이 부모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시기를 놓쳐 학대당하던 아이가 죽을 수 있다 해도, 새로운 연구소의 일자리까지 마다하고 잡히면 감옥에 갈 수도 있는 유괴범이 되기로 한다는 것은 상식적이지 않다.

사실 나오는 생모에게 버림 받은 아이였다. 생모로부터 버림받은 기억 때문에 나오는 친자식 못지않게 사랑해준 양어머니에게도 마음을 열지 못할 정도로 상처를 입은 사람이었다. 그녀의 무표정한 얼굴은 버려질 당시 자신이 웃는 것을 보고 안심한 생모가 자신을 떠났기 때문에 비롯된 것이다. 그러니 이렇게 버려진 기억을 가지고 있던 나오가 눈앞에서 처절하게 버려진 레나를 보고 외면할 수 없었을 터였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진정한 엄마가 될 수 없다. 처음에 나오는 츠쿠미(나오가 엄마로서 레나에게 다시 붙인 이름)의 속마음을 눈치 채지 못한다. 하지만, 츠쿠미의 손이 커지고 키가 크는 걸 보고 기뻐하면서, 식사를 챙겨주고, 발에 맞는 편한 신발을 사주고, 도망다니는 처지에 위험을 무릅쓰고 학교에 보낸다. 이러는 과정에서 나오는 배 아파 낳지도 않은 츠쿠미를 엄마로서 사랑하게 된다. 자신이 엄마이기를 자처하면서 츠쿠미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구하려 하고, 진정한 행복을 바란다.

나오는 뒤쫓아 온 레나의 생모에게 아이는 부모를 미워할 수 없는 존재니까 진짜 엄마의 품속에서 자라는 것이 아이의 행복이라면, 레나를 돌려주겠다고 이야기한다. 만일 나오가 버린 아이를 구원했다는 심리적 위안을 얻어서 자신의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서였다면, 나오가 체포된 뒤에 신문에 난 기사처럼 독신 여성의 외로운 마음의 틈을 메우기 위해서였다면, 어떤 이유로도 생모에게 츠쿠미를 돌려주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츠쿠미의 진정한 행복을 바라는 나오는 엄마로서의 사랑을 츠쿠미에게 쏟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나오의 사랑은 기존의 모성 신화로는 설명이 불가능하다. 이런 환타지 안에서 자신이 낳지도 않은 츠쿠미를 엄마로서 사랑하는 나오는 절대 성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모성은 아이를 낳음으로써 자연스레 생기는 것이 아니다. 엄마가 스스로 ‘이 아이는 내 아이다’, ‘내가 이 아이의 엄마가 되겠다’는 의지로부터 생겨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의지를 현실로 실현하여 아이를 사랑함으로써 유지된다. 아이의 존재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받아들이고, 아이가 필요로 하는 것을 얻을 수 있도록 돕는 과정을 통해서 사랑은 현실화된다.

모성은 어떻게 상실되는가

 

레나의 생모는 드라마의 중반까지도 남자에게 미쳐 자신이 낳은 아이를 방치하고 학대하는 이해될 수 없는 여성으로 그려진다. 하지만 레나는 감수성이 뛰어나며 명랑하고도 사랑스러운 아이다. 태어나면서부터 사랑을 받아 본 적이 없는 아이답지 않다. 과연, 드라마 중반부에는 레나와 나오를 뒤쫓아 온 레나 생모의 과거가 나온다.

레나의 생모는 원래 다정하고 배려 넘치는 사랑을 주는 엄마였다. 뉴스에 보도되는 아동학대의 사건을 보고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 치부하는 엄마였다. 하지만, 레나 아빠와 이혼하면서 점점 망가진다. 혼자서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일하고, 집안일을 하고, 점점 커가는 아이의 양육을 담당하는 일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다. 더욱이 도움이 될 만한 가까운 이웃이나 친척이 전혀 없는 상황은 레나의 생모를 막다른 벽으로 몰고 간다.

숨을 돌리러 들어간 술집에서 만난 남자를 집에 들이게 되고, 그 남자는 재미로 레나를 벽장에 가두거나 목도리로 목을 조르는 등의 학대를 하기 시작한다.

처음엔 만류했지만 남자가 집을 나가려 하자 레나의 생모는 레나를 방치하기에 이른다. 더욱이 조숙한 레나가 엄마를 감싸기 위해 병원이나 학교, 이웃에 몸의 상처에 대해 거짓말을 하자 오히려 그 거짓말에 숨어버린다.

하지만,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던 레나는 어느날 밤 엄마에게 이제는 도와달라고 울면서 요청한다. 하지만 레나의 생모는 이를 외면했고, 다시 남자가 레나에게 원피스를 입혀 화장을 시키는 장면을 목격하고서는 이번에는 자신이 원피스 차림의 레나를 검은 쓰레기 봉투에 넣어서 골목에 내놓고 외출을 해버린다.

가사와 양육, 생계유지를 위한 노동을 혼자서 힘겹게 하면서 애쓰지만 결국 망가져버린 레나의 생모 이야기는 충분히 가슴을 울리는 장면이었다. 영화에서처럼 극한 상황에서 아이를 지키기 위해 싸우고, 자신을 엄청나게 희생하는 엄마만 위대한 엄마가 아니다. 밥하고 빨래하고 설거지하는 일상의 무게를 견디면서 끊임없이 아이와 자신을 위해 무엇이 좋은지 고민하고 삶을 살아온 모든 엄마들은 위대하다.

하지만, 레나의 생모는 결국 자신을 놓아버렸고, 아이도 놓아버렸다. 자신이 직접 낳았다는 사실만으로는 아이와의 사랑은 지속되지 않는다. 드라마에는 레나의 생모가 쫓아와서 레나는 아직도 자신을 사랑할 것이라고 단언하는 장면이 나온다. 목숨의 위협을 느낀 레나가 울며 보호를 요청했을 때도 외면하고, 딸을 쓰레기봉투로 포장해 버린 엄마면서도 말이다. 자신은 사랑하기를 그만두어도 아이는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고 믿고 싶어 한다. 이것은 사랑이 아니다.

모성은 상실될 수 있다. 엄마라고 해서 자연스레 모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다. 상대인 아이를 끊임없이 배려하고 관심을 쏟지 않는다면 엄마로서의 사랑은 없어진다. 가꾸지 않으면 사랑은 상실된다.

모성 신화가 극복되어야 하는 이유

 

레나의 생모를 비난하는 것은 쉽다. 엄마라면, 좀 더 강하게 자신을 추스르고, 아이를 사랑했어야 했다고 가르치는 것도 쉽다. 하지만, 누가 레나의 생모를 비난할 자격이 있는 것일까? 물론 아무도 비난할 자격이 없다는 말이 레나 생모의 잘못을 옹호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아이는 부모를 사랑할 수밖에 없다. 자신의 생존을 추구하는 약한 자의 사랑이라는 면에서 풀이하든 태어나서 처음으로 관계 맺은 첫 상대에 대한 조건 없는 호감의 감정이라 풀이하든 아이는 부모를 사랑한다. 그런데도 현실 속에서 아직 아무런 힘도 없는 아이를 아무렇지도 않게 방기하고 학대하는 것은 범죄다. 하지만, 가사와 양육, 생계유지까지 혼자서 담당해야 했던 레나 생모의 실패는 동정의 여지가 있다. 그리고 모성신화에 비추어 레나 생모를 비난하는 것은 비겁한 일이다.

우리 사회의 모성 신화는 아이의 양육을 전적으로 엄마에게 떠넘기는 전략을 수행하는 수단이 되고 있다. 엄마는 아이를 사랑하기에 아이에게 필요한 도움을 기꺼이 주고 배려한다. 엄마의 적극적인 배려와 사랑은 성장해야 하는 아이를 제대로 돕는 방법 중 하나다. 하지만, 올바른 의미의 양육은 엄마 혼자만으로는 불가능하다. 아빠의 사랑과 도움도 필요하고 사회의 제도적인 뒷받침도 필요하다.

현실 속의 엄마는 모성 신화 속의 엄마처럼 강하지 않다. 그저 나약한 인간으로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조건에서 사랑하는 아이와 자신을 위해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지 끊임없이 고민하고 싸워가며 살아나갈 뿐이다. 그래서 엄마는 강해져가는 것이다. 처음부터 강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엄마는 본래적으로 자기희생적이고도 강한 모성을 지니는 존재라고 신화로 만들어 버리면 오히려 비극을 낳는다. 레나 생모와 같은 방황하는 엄마들의 문제를 함께 해결하려는 노력을 사전에 막아버리기 때문이다.

게다가 더 힘 낼 수 있었을 엄마들이 열등감에 휩싸여 자신감을 상실하고, 있는 힘껏 아이를 사랑으로 안아 줄 수 있었을 아빠들이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게 되고, 아이들은 받을 수 있었던 사랑을 받을 수 없게 된다. 모성 신화가 강조될수록 양육에 2차적인 책임이 있는 사회는 그 책임을 면하게 된다.

되돌아오는 모성신화

 

드라마의 최고 반전은 나오의 생모가 나오를 버린 이유다. 딸을 버렸다는 죄책감으로 평생을 산 듯한 그녀는 조심스러운 태도로 막다른 골목의 나오와 츠쿠미를 있는 힘껏 돕는다. 게다가 나오의 생모가 츠쿠미에 대해 쏟는 사랑은 무척이나 다정하고 배려 깊은 할머니의 사랑이어서 어떻게 저런 사람이 나오를 버렸을까, 하는 의구심마저 들게 한다.

드라마 중반에 나오의 생모는 폭력을 행사하던 남편을 살해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살인을 저지르고 딸과 도망을 다니다가 나오를 버린 뒤 경찰에 체포되어 13년을 복역했던 것이다. 하지만, 드라마의 결말 부분에 가면 사실은 어린 나오가 엄마를 구하기 위해 집에 불을 질렀고, (엄마는) 딸의 죄를 덮기 위해 자신이 죄를 뒤집어썼다는 암시가 나온다.

드라마를 볼 때는 이 부분을 보면서 ‘아아, 이런 불쌍한 사람들’이라며 그 기구한 운명에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곧 마음이 불편해졌는데 제작진이 모성신화를 이야기의 절정에서 사람들의 마음을 끄는 승부처로 사용했다는 생각에 미쳤기 때문이었다.

한 때 잘못한 엄마여도, 아이를 버리는 심각한 잘못을 저질렀어도, 속죄하고 진심으로 아이를 대했다면 용서받을 수 있지 않을까? 저렇게까지 강한 엄마가 아니어도 괜찮은 것 아니었을까? 오히려 나오의 생모가 과거에 잘못이 있었던 설정으로 딸과 화해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가 더 주제의식에 맞았던 것 아닐까? 모성신화는 문화 상품 생산의 산업적 전략에서 더 부풀려져왔던 것인 걸까? 라고 부족한 엄마인 나는 계속 뇌까리고 있었다.

사랑, 그리고 또 사랑

 

나오는 츠쿠미를 엄마로서 사랑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츠쿠미를 구하고 자신을 구할 수 있었다. 차가운 무표정의 얼굴로 어느 누구에게도 마음을 열지 못하던 나오는 츠쿠미의 엄마가 되면서 웃음을 서서히 되찾는다. 그리고 소중한 사람이 있어서 인생이 행복하다는 것도 알게 된다. 더욱이 자신을 버린 생모를 만나게 되고, 정면으로 마주 대하게 되었고, 버림받은 상처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된다. 사랑이 상처를 치유하고 또 다른 사랑을 낳게 되었다.

엄마가 되기로 결심하고 의지를 갖는 일, 그 상대인 아이를 끊임없이 지켜보면서 배려하는 일은 힘들지만 희생적이지만은 않다. 아이와 사랑하는 과정에서 힘을 얻는 것은 바로 엄마이고, 소중한 사람의 존재 덕분에 행복감을 느낄 수 있는 사람도 엄마이기 때문이다. 모성이 부족한 엄마여도 지금 이 자리에서 도망치지 않고 자신을 놓아버리지 않는다면, 방법을 찾을 수 있으리라 믿어본다. 손발이 오그라들더라도 말해보고 싶다. 믿는다. 사랑의 힘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