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 침묵의 법을 부활시키지 말라[배운년 나쁜년 미친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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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륜, 침묵의 법을 부활시키지 말라[배운년 나쁜년 미친년]

윤지영(명지대 강사)

 

법륜의 말은 구토를 일으킨다. 자신의 우울증의 근간이 가족 내 성폭력에서 기인하며 그 안에 아버지에 대한 분노와 어머니에 대한 미움이 뒤엉켜 있음을 어렵게 토로한 이에게 법륜은 무엇이라 말하는가. 법륜의 손쉬운 답에 대한 비판에 앞서, 먼저 내담자가 자신의 고통을 토로한 짧은 글귀로부터 이 문제에 대한 이해를 시작해야 한다.

▲ ⓒ뉴시스

내담자의 글귀는 근친상간 성폭력의 복잡한 심리적 메커니즘을 잘 반영하고 있다. 자신의 생존기반이며 심리적, 물질적 쉼터이자 안전망이라 여기던 가정이 한순간에 위협적 공간으로 바뀌었을 때, 심리적 물리적 약자인 아이는 이 상황을 감내하거나, 아니면 폭로하게 된다. 그러나 대부분 이러한 감당하기 힘든 진실 앞에서 아이의 발언은 헛소리나 망상, 쓸데없는 이야기로 치부되어 간과되어진다. 왜냐하면 여태껏 우리는 가족에 대한 신화를 통해 행복의 패러다임을 정초해 왔기 때문이다. 가족이란 단위가 폐쇄적 불소통의 장이 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족이란 공적 영역과 분리되어야할 내밀한 사적 영역이자 혈연으로 맺어진 비영리적 자연적, 순리적 관계로 이상화됨으로써, 가족 구조 내의 위계성과 폭력의 가능성에 대해 우리는 함구해 버리고 만다. 이러한 맥락에서, 근친상간 성폭력에 대해 폭로하는 이는 영구한 단위여야 할 가족을 해체해 버리는 내부적 위협 요소로 인식되어진다. 그러하기에 가족 구조 내에 산재한 불편한 진실을 건드리는 이의 발화 위상은 내동댕이쳐져 버리고 만다. 다시 말해 내담자는 이러한 사회적, 문화적 맥락에서 자신의 고통에 대해 발화할 기회조차 박탈되어 침묵 속에 방치되어야 했다. 아버지의 가해와 어머니의 방관 속에서 내담자는 행복과 위로의 원천으로 이상화된 가족 이데올로기와 자신의 현실적 가족의 피폐함의 간극 안에서 혼동을 겪을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긴 침묵과 자기 혐오로 점철된 시간의 강을 건너 어렵게 말하기 시작한 내담자는 다시금 가족들이 그녀에게 강요했던 침묵의 법이 법륜에 의해 부활되었음을 볼 것이다.

침묵의 법에 의해 봉인되었던 뒤엉킨 고통과 몸의 기억들을 망상으로 치부하는 것이 법륜의 요지다. 마약중독의 예로 시작되는 그의 글은 마약 중독의 원인을 개인의 의지 부족으로 읽어내는 단순함을 보인다. 납치와 강제적 마약 투여란 폭력적 실태에 노출된 개인이 어떻게 그 엄청난 트라우마를 감당하며 생존할 수 있었는지에 대한 심층적 분석없이 마약중독이라 결과물만을 보고 이를 개인의 의지 부족이라 진단하는 것은 스스로가 제시한 콘텍스트에 대한 이해 부족을 여실히 드러내는 것이다. 왜 상습적 마약 복용을 통해 그가 도피하고자 하는 고통은 무엇이며 그 고통은 단순히 생리학적 뇌의 일부분의 중독 현상으로 볼 것인지 아니면 심리적 신체적 상흔을 스스로가 자해하는 방식은 아닌지 등에 대한 질문이 전제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제대로 된 트라우마의 예에 대한 이해도도 없이 법륜은 마약 중독에서 근친상간 성폭행의 문제로 이야기를 비약해 버린다.

고통의 원인을 찾기 보다, 그 고통을 키워낸 자신을 다스리면 모든 고통이 사라질 것이란 해법은 모든 폭력 양상을 개인의 마인드 컨트롤의 문제로 축소해 버리고 만다. 다시 말해 성폭행은 하나의 망상일뿐이며 피해자 자신의 정신수양 문제로 극복가능한단 법륜의 말은 억압과 차별 메커니즘을 정당화하는 보수 담론이다.세상은 아무래도 안바뀌니 당한 너가 입다물고 없었던 일로 쳐라는 논리는 고통의 개인화를 통해 구조적 폭력성을 은폐한다. 즉 억압의 부조리성을 폭로하는 불편한 진실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기보다,부조리에 분노하는 이를 망상가로 만들어 침묵케 하는 것이 여태껏 폭압적 사회질서가 유지되는 방식아니었는가? 더없이 기득권 유지적 발언을 수양으로 포장하지말라.

고통을 있는 그대로 바라봄은 고통의 원인에 대한 직시,그 감당하기 힘들고 불편한 진실과의 대면이다. 어디서 고통이 기인한 지도 모른 채, 어떻게 고통을 넘어설 수 있다고 여기는가. 그것이야말로 고통을 더욱 더 비대하게 키우는 도피의 방식일 뿐이다.

아버지의 사죄와 반성, 어머니의 방조에 대한 설명을 내담자는 필요로 한다. 물론 이러한 정면충돌의 방식에서 내가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 개인적 가족사의 특이성에 한정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폭력 양상이 구조적인 가족의 위계질서에서 발생되는 것임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어떻게 근친상간 성폭력이 빈번히 발생함에도 불구하고, 수없이 은폐되어져 버리고 마는가. 왜 어머니는 방관자가 될 수 밖에 없었나, 이는 경제적 의존성과 생존 기반의 물적 토대를 남편이 전적으로 소유하고 있기 때문은 아니었는가. 가족은 왜 해체되어선 안되는가. 피해자와 방관자, 가해자란 뒤틀린 관계성이 가족이란 이름 아래 유지되어야 하는가. 이러한 수많은 질문들을 던지는 것이 바로 내담자가 침묵을 깨고 우리에게 던지는 화두는 아닌가.

다시 말해 내담자가 겪은 이 트라우마가 미친 몇몇 개인의 가족사가 아니라, 가족에 대한 신비화가 강화될 수록 가족 내의 부조리와 폭력 현상이 지속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법륜은 고통의 기억과 몸을 속세의 헛된 망상으로 치부하는 초월적 태도로써 내담자가 수십년간 고투해 오던 실존적 고통과 몸부림을 헛된 몸에 새겨진 망상더미로 전락시켜 버리는 것은 아닌가. 이는 자기 자신에 대한 혐오를 더욱 키우게 할 수 있는 상담 방식이다.

나아가 권력을 지닌 이-아버지가 어떠한 일을 저질러도 하위주체인 자식은 그저 감사하란 말은 권력 구조의 폭력양상을 재생산하게할뿐이다.구조에 내재한 부조리 자체를 허상으로 만듦으로써 세상곳곳에서 터져나오는 고통어린 비명들을 비가시화하는것은 종교적 해탈이 아니라 폭력적 수탈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지금 당장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구조적 폭력 구도를 건드리기 보다, 개인적 차원의 마인드 컨트롤로 구원을 찾으라는 말은, 아직도 이 사회가 가족 신화를 공고히 하고자 하는 데에 있다. 가족은 신비롭고 내밀한 사적 영역으로 공적 영역의 분리를 통해 신성화되어야 하고 침묵되어야 할 성전이 아니다. 우리의 일상이 거하고 일상의 미시 정치학이 발휘되고 협상되고 갈등이 발생하는 공간이 바로 가정이다. 이 가정 내의 폭력이 사회적 폭력의 일부이며 가족이란 사적 단위의 문제로 치부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가족이 지옥이 되었을 때 대안적 공동체가 폭력 구도에 노출된 이들을 보호하고 그들의 비명과 고함에 귀기울일 지를 모색해야 하는 것이다.

누군가는 법륜의 말은 고통의 초월이란 종교적 맥락에서 읽혀야 하며, 사회적 문화적 맥락과는 다른 결에서 이해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나는 이렇게 묻겠다. 그 초월이란 위치의 강요가 과연 내담자와 같이 고통당하는 이들에게 또한번의 침묵의 법의 시행이며 그들을 자신 안으로 유폐시키는 감금 방식이라 생각하진 않는가.

8 replies
  1. 손정훈
    손정훈 says:

    법륜스님에 대한 논란이 왜 일어났을까에 대해서 살짝 다른 관점을 갖고 있습니다. 물론 법륜의 말 자체가 논란을 불러일으킬만한 빌미를 제공했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적잖이 실망스럽기도 하고요. 하지만 한겨레에서 이 시점에 왜 2011년 있었던 강연을 문제 삼는지 그 저의가 의심스럽기도 합니다. 문제의 강연을 옮겨적은 블로그 글입니다. http://hopeplanner.tistory.com/213#.URaQ_oVnBhF
    한겨레는 요즘 특정정파의 기관지가 된 듯한 인상을 주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안철수의 멘토(?)라고 알려진 법륜스님이 안철수가 대선에 나왔다면 지지 않았을 거라는, 모두가 알지만 감히 하지 못하는, 뼈아픈 얘기를 한 거지요. 문재인을 감싸는 한겨레로서는 법륜의 말이 몹시 거슬렸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법륜에 대해서 조사하다가 2011년 부산에서 했던 강연에서 했던 논란의 여지가 다분한 발언을 굳이 이 시점에 끄집어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나친 비약일까요, 아니면 음모론에 사로잡힌 턱도 없는 생각일까요.
    아무튼 법륜스님을 두둔할 생각은 없습니다. 저 역시 그러한 문제인식과 해결방법 제시에는 거슬리는 면이 상당히 많거든요. 피해자의 정신극복 이전에 가해자의 처벌이 선행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강연에서는 잘잘못을 따지기 이전에 고민을 말한 그 사람에게 현재 삶에 대한 솔루션을 제공해야 했기 때문에 그런 답을 했던 것 같습니다. 법륜은 종교인이지 법률가는 아니니까요. 불교에 대해서 잘 모르지만, 본인이 생각했었던 불교적인 이론에 기반해서 내놓은 답이라고 생각합니다. 불교는 내부의 깨달음을 가장 큰 덕목으로 치는 것이기에 어찌보면 피해자에게 가혹할만한 솔루션을 제시했던 것 같습니다.
    전 이런 상상을 해봤습니다. 만약 성폭행의 가해자인 아비가 법륜에게 고민을 털어놓았다면 그는 뭐라고 답을 했을까. 제가 법륜은 아니지만, 법륜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하지만, 저는 이런 식으로 답했을 것 같습니다. “당신의 그 행위로 인해 딸에게 씻기 힘든 상처를 평생 안겨주었습니다. 어찌 아버지란 사람이 그런 짓거리를 할 수 있단 말이오. 딸이 정상적으로 생활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표면적인 모습일뿐, 딸의 마음 한 켠에는 몹시 어둡고 차가운 방이 있을 거요. 거기에 당신이 저질렀던 그 몹쓸짓의 기억들이 가득 들어차 있을 거요. 누군가를 평생 미워하게 만드는 것만큼 큰 죄는 없소. 그런데 당신은 남도 아니고 딸의 아버지요. 보기 싫다고 해서 볼 수 없는 사람이 아니요. 없다고 치고 싶어도 없다고 할 수 없는 존재란 말이오. 그런 딸에게 더할 수 없는 번민을 준 게 당신이란 작자요. 당신은 딸에게 평생 사죄하며 살아야 할 것이오. 그리고 딸뿐만 아니라 당신의 아내에게도 씻을 수 없는 죄를 저지른 사람이오. 당신 어떻게 살아가야 하겠소? 당신 같은 사람이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소? 딸의 상처가 치유될 때까지 108배를 하시오. 평생 치유되지 않는다면 평생 그렇게 사죄하시오. 그게 당신 업이오.”라고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력의 산물로 내뱉은 말을 정당화하려는 건 아닙니다. 다만 그 상황에서 그렇게 말한 것이 이해가 안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저 또한 남성중심적으로 생각해서 그럴까요.

    • 손정훈
      손정훈 says:

      아무튼 이번 발언과 관련해서는 한겨레의 저의가 심히 의심스럽다는 말입니다. 영향력이 있는 종교인의 지난 발언을 이제서야 문제삼는다? 저는 한겨레가 법륜을 끌어내리고 싶은 이유가 있고, 그러던 중 논란의 여지가 다분한 발언을 문제 삼았고, 그 발언은 적어도 한국 사회에서는 이슈로 만들기에는 아주 괜찮은 소재라는 겁니다.
      개인적으로 법륜의 사고방식이나 행보에 동의하는 면도 있고 동의하지 않는 면도 있지만, 이번 일이 그의 가부장적 가치체계, 나아가서는 한국 사회의 남성중심주의를 드러낸 것이라고 하는 것에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한겨레의 게이트 키핑에 놀아난다는 생각이 들어 이 문제에 대해 무관심하려 했고, 침묵으로 일관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문제에 대해 의견을 제시해주셨기에 여기 대해서 한 마디 붙였습니다. 아마 관점이 상당히 다를 것이고 지적하는 포인트도 다르지만, 참고해 주셨으면 해서 글을 남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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