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 박물관[별과 달과 바람의 노래]-②
그림자 박물관[별과 달과 바람의 노래]-②
김설미향(그림책 작가)
그런데 멀리 반짝이는 성이 보였어
아주 멋진 성문은 빠끔히 열려 있었어.
작가의 블로그 http://dandron.blog.me
그런데 멀리 반짝이는 성이 보였어
아주 멋진 성문은 빠끔히 열려 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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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 듣고 생각하기]
나는 왜 『인물과 사상 1권-33권』을 다시 읽는가! 나는 서민이다. 나는 99프로이다. 한미서민패죽이기협정(한미자유무역협정)이 폐기 되어야만 내 생활이 편해진다. 내 노후가 편해진다. 내 자손들이 편히 산다. 이 땅 서민 삶이 편해진다. 그런데도 이 땅 지식기술자들은 한미서민패죽이기협정 폐기를 외치지 않는다. 저들은 그저 1프로가 만들어 놓은 놀이터에서 적당히 하는 척만 한다. 그저 경제민주화, 복지정책만 줄기차게 외친다. 나는 말한다. 한미서민패죽이기협정 폐기하지 않고서 두 가지 절대로 이룰 수 없다. 나는 지식기술자가 못나서 이 땅에서 ‘한미서민패죽이기협정 폐기’ 열 두 글자가 한데서 고생한다고 생각한다. 이 땅 지식기술자 못남을 철저히 드러내는 책이 강준만이 쓴 『인물과 사상 1권-33권』이다. 우선 이 땅 지식기술자 못남을 철저히 알고 싶다. 그래야 이 땅에서 한미서민패죽이기협정 폐기 촛불집회를 이룰 수 있다. 우선은 저들 못남을 처절하게 알아야 겠다. 더불어 내 못남도 알아내야겠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사서 모았다. 읽는다. 천천히, 음미하면서, 열 받으면서. 읽는다. 이 땅 99프로는 1프로가 만든 놀이터 안에서만 놀고 있다. 벗어날 생각을 아예 못한다. 벗어날 상상도 못한다. 이정희, 홍세화, 박은지 이 세 사람이 바로 그렇다. 저들은 해야만 할 일 을 제대로 못한다. 김대중은 북조선과 남한 3단계 통일론을 약 40년에 걸쳐서 외쳤다. 세 사람은 김대중 한태 배워야 한다. 지금은 한미서민패죽이기협정 폐기하라 외칠 때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모든 일에 때가 있다고 멋있는 말을 한다. 하지만 이 땅 서민들은 아무 때나 한미서민패죽이기협정 피해를 본다. 10년, 30년 지나면 그 피해는 상상을 초월한다. 30년 정도 지나면 피해가 커져 이 땅 서민들이 들고 일어날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거짓말이다. 바로 지금 들고 일어나지 않는다면 30년 뒤에도 들고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자살률 거의 세계 1위, 출산률 거의 세계 꼴찌, 비정규직 노동자가 절반을 넘어선 지 오래되었다. 이런데도 99프로가 지금 들고 일어나지 않는다. 30년 뒤에도 지금과 똑 같을 것이다.
‘또 고려대학교 철학과에서 나온 한 제목이 『Hegel의 實體觀』이며 그 안에 소제목이 “Hegel과 Platon의 idealism”으로 시작하고 모든 고유명사가 직접 들어와 있다. 나는 도대체 이따위 무질서한 언어전통이 어디서 그 족보를 찾아야 할지 알 수가 없다. 서양철학을 하시는 분들은 동양철학을 하는 사람보고 한문을 풀어쓰지 않을 뿐 아니라 고루하다고 투덜댄다. 그러면서 그들은 프라톤이나 칸트, 헤겔 정도의 보편화된 우리말을 버리고 알파벳을 쓰시며 위대한 철학을 하고 계시다.’(『도올논문집』, 102쪽)
얼숲(페이스북)에서 당신 이름을 영어 알파벳으로 쓰시는 분들이 계시다.
그분들이 이야기 나누는 상대 다수가 한국인들이다. 그런데도 자신 이름을 영어로 쓰는 사람들이 있다. 좀 거시기하다. 나태영을 영어로 쓸 때 Tae-young Na 가 아니라 Na Tae-young이 되어야 한다. 외국에서도 그리 써야 한다. 그래야 외국인들이 “그래 한국에서는 성이 앞에 나오지. 우리랑 거꾸로 하네! 거 참 신기하네!” 말할 것이다. 미국인이 한국에 오면 “How mush is it?, Could you show me the way to city hall!”이 아니라 ” “이거 얼마예요?, 시청 가는 길 알려주세요.“ 정도는 말할 줄 알아야 한다.
‘한미서민패죽이기협정’이 ‘한미FTA’로 많이 쓰인다. ‘한미FTA’하면 일반인들은 그 뜻이 금방 와 닿지 않는다. 그 무시무시한 것이 내 일로 다가오지 않는다. 그러는 사이에 한국과 미국 1프로는 집요하게 사기를 쳐서 자신들 욕심을 채운다.
한겨레신문에서는 간혹 ‘한미자유무역협정’ 이라는 이름을 쓰는 기자가 있다. 나는 이 이름이 ‘한미FTA’라는 이름보다는 더 좋은 이름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이름도 사기치는 짓을 한다고 생각한다. ‘자유’라는 두 글자가 너무도 좋은 뜻을 지니고 있다. 그 두 글자 때문에 보통 사람들은 “응! 두 나라가 무역을 자유롭게 한다구! 좋지!” 그러는 사이에 한국과 미국 1프로는 집요하게 사기를 쳐서 자신들 욕심을 채운다.
2003년쯤에 민주노동당이 ‘한미매국협정’이라는 이름을 썼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잊어먹었다. 나는 이 이름을 자주 써먹었다. 하지만 이 이름도 딱 들어맞는 이름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한국과 미국 두 나라 1프로가 두 나라 99프로, 특히 한국 99프로 서민한테서 챙길 것을 최대한 챙기려고 한다. 돼지 똥구멍에 낀 콩나물까지도 빼먹으려고 한다. 그래서 나는 ‘한미서민패죽이기협정’ 이 이름이 맞춤한 이름이라고 생각한다.
그럼 보통 사람들이 그러겠지!
“아니! 죽일 놈들이 우리를 패죽인다구!
내 가만 있을 수 없지!
어디, 너 죽고 나죽자!”
언론인과 학자가 ‘한미서민패죽이기협정 폐기’ 이 열 글자를 드러내놓고 쓴다면 이 무시무시한 협정이 대선에서 쟁점도 되지 못하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이름을 다스리는 사람이 세상을 다스린다.’
강준만과 김동민이 펼치는 조선일보 제 자리 찾아주기 운동 조선일보는 반노동자 신문이다. 그런데도 민주노총 68만 회원 다수가 조선일보 본다. 억장이 무너진다. 진보정의당 노회찬이 조선일보에 아부한다. 한 두 번이 아니다. 조선일보는 반호남신문이다. 그런데도 호남 사람 다수가 조선일보 본다. 조선일보는 반통일 신문이다. 그런데도 북조선을 떠난 분들이 열심히 조선일보를 본다. 억장이 무너진다. 조선일보를 비판하기 위해서 조선일보 본다는 사람들도 많다. 답답하다. 강준만은 책을 통해서 조선일보 반대운동을 했다. 김동민도 그리했다. 현장에서도 조선일보 반대 운동을 했다. 그래서 강준만이 김동민을 높이 산다. 강준만은 중용을 이룬 사람이다.
중용은 가운데를 뜻하지 않는다. 중용은 중립을 뜻하지 않는다. 제 때에 맞게 행동하는 것이 중용이다. 중용을 잘 이루는 보기는 우리 몸이다. 날씨가 더워지면 우리 몸은 땀을 흘려서 체온을 유지한다. 그래서 중용을 이룬다. 날씨가 추워지면 우리 몸은 몸을 떨어서 체온을 유지한다. 강준만은 일부 진보적인 학자들을 비판한다. 저들이 수구세력처럼 김대중 대통령을 비판하기에 그런다. 조선일보처럼 김대중을 비판해서 그런다. 조선일보나 수구세력에게 당하는 김대중 입장은 생각하지 않고 김대중을 비판해서 강준만은 진보적인 학자들을 비판한다. 저들이 거대담론만 중시하고 이 땅 현실에서 벌어지는 사소한 일을 무시한다고 비판한다. 저들이 진보를 외치면서도 반진보적인 신문 조선일보 월급쟁이들과 인터뷰하는 것을 허물없이 받아들이기 때문에 강준만은 일부 진보적인 학자들을 비판한다. 말을 고친다. 조선일보는 신문이 아니다. 강준만은 편견을과 통념을 깨부수는 사람이다. 『인물과 사상 1권-33권』 이 책들을 통해서 나는 내 생각을 바꾸게 되었다. 김용옥은 김대중을 비판한다. 김대중이 대통령 출마하지 않겠다고 말 해놓고 그 말을 지키지 않았다고 비판한다. 나도 김용옥 생각이 옳다고 생각했다. 멋있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강준만 책을 읽고 나서 내 생각이 바뀌었다. 총각이 결혼하지 않겠다고 말했다가 결혼하겠다고 생각을 바꾸면 많은 사람들이 그 사람을 축하해 줄 것이다. 정치가가 대통령 출마하지 않겠다고 말했다가 다시 대통령 출마하겠다고 말해서 심하게 비판 받을 일은 아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김대중이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고 김대중을 비판한다. 조선일보가 앞장서서 비판한다. 진보적인 학자들도 거든다. 나는 알게 되었다. 강준만은 더 이상 다른 주장이 나올 것 같지 않은 상황에서도 용케도 다른 주장을 펼친다. 그리고 그의 그런 주장이 꽤 설득력 있다. 강준만 글을 읽고 있노라면 강준만 얼굴과 맹자 얼굴이 겹쳐진다.
강준만은 바로 우리 이야기를, 바로 우리들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다.김용옥은 우리나라 국문학 동네가 우리나라 철학 동네보다 더 뛰어나다고 부러워 한다. 박사학위 딴 석학들이 자신보다 학력이 떨어지는 고졸, 학부 출신 작가들 작품을 비평해서 국문학 동네가 뛰어나다고 부러워한다. 우리나라 철학동네 사람들은 서구 철학자들이 쓴 글을 열심히 읽고 인용하지만 우리나라 철학자들이 쓴 글을 인용하면 자신 수준이 떨어진다는 편견을 갖고 있다고 비판한다. 조선시대 퇴계 이황 등 선비들 글에는 사람들 이름이 자주 나온다고 한다. 서로 이름을 걸고 서로를 비판한다고 김용옥은 말한다. 수많은 나와 너가 나온다고 김용옥은 말한다. 우리나라 철학 수준을 높이려면 우리 철학자가 쓴 글을 열심히 읽고 비판해야 된다고 김용옥은 주장한다. 김용옥이 바른 말 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강준만은 우리 땅에서 글 쓰는 사람들을 비판한다. 그 사람 이름을 드러내며 그 사람을 비판한다. 비판당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기분 나쁘겠지만 김용옥의 주장을 생각해 보면 강준만이 우리나라가 상식이 통하는 사회로 나아가는데 큰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영원한 무림고수는 없나보다. 맹자같이 냉철하고 논리적인 강준만이 2012년 대선에서 안철수를 옹호하는 활동을 펼쳤다. 좀 거시기 했다. 나도 한 때는 안철수를 좋게 평가했다. 나쁜 짓은 절대로 하지 않을 것 같은 푸근한 인상, 지지율이 자신보다 한참 못 미치는 박원순에게 서울시장 선거 출마를 양보한 의연한 자세를 보고 나는 한 때 안철수를 좋게 평가했다. 하지만 안철수가 2012년 4.12 총선 바로 며칠 전에 ‘당보다 인물을 보고 표를 주라.’는 말을 하는 모습을 보고 나는 안철수에 대해 가졌던 좋은 평가를 접었다. 과연 이 사람이 상식 있는 사람인가 의아해했다. 이런 안철수를 강준만이 옹호하는 모습을 보고 강준만이 왜 이러지 생각했다. 영원한 무림고수는 없나보다. 강준만을 넘어서는 사람이 나와야 하는데 그런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그런 지금 자신이 1프로이고, 1프로 대변자인 박근혜가 대통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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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본 웹진의 [문화보기] 코너에 성황리에 연재를 한 [나무이야기]와 작가의 블로그http://dandron.blog.me/에 있는?김설미향 작가의 그림에 대한 단상임을 알립니다.
1. 작가의 두 자화상이 있다. 하나는 드로잉 자화상들이다. 다른 하나는 [나무이야기]라는 타이틀의 자화상이다. 나무들을 자화상이라고 [과감히] 말하는 이유는, 작품에는 항상 작가의 의식이 따른다는 예술 일반론에 기대어 하는 말이다.
드로잉화 자화상들은 제목도, 번호도 없다. 이들은 하나같이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얼굴은 일그러지거나 뼈만 남은 듯 볼 품 없다. “음, 그림이 꿈틀거리는군요. 자기 얼굴은 자기가 잘 아는 법, 자화상의 진가를 느끼고 감”이라는, 알쏭달쏭한 덧글을 남기고 가는 이도 있다. 나도 덧글을 따라, ‘그림이 요동치고 있다’는 착각에 빠지려 애써본다.
그나마 작가의 자화상에 대한 설명에서 작가의 행복하지 않은 심정을 읽을 단초가 있다. 작가는 묻는다. “나의 가족은 무엇”인가? 잠자다가도 작가는 운다. 추측으로만 가능한 트라우마가 있다는 의미이다. “쓰레게 줍는 노인들에게 슬프고”, 소비의 방향을 잃은 사람들 때문에 슬프다.
또 다른 작가의 자화상, [나무이야기]의 그림들은 드로잉 자화상에 비해 분위기가 다르다. 밝은 채색이 우선 시선을 붙잡는다. 연결되는 짧은 이야기들 덕분에 그림들에 논리적 순서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숲 속의 나무가 행복한 봄을 즐긴다. 나무는 아이들(사람들)에게 풍성히 베풀어준다. 그러나 무참히 상처받는다. 상처받고 잠이 든 나무는 동료들의 위로에 따라 다시 깨어난다(다시 생명을 얻는다). 나무는 나비들과 새들을 포함하여 자연과, 사람들과 관계한다. 아마도 자화상은 자연에 있는 모든 존재들과 생명을 나누기를 꿈꾸는지 모르겠다. 이렇게 해서 ‘예술은 삶을 짓누르는 형식에다가 인간의 의미를 새겨 넣는다’는 경구가 성립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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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그림을 읽기 위하여 니체가 [비극의 탄생] 전반부(1-5절)에서 말하는 예술 일반론을 짧게 언급할 필요가 있다. 고전 예술론과 니체에 의하면 예술은 자연의 모방이다. 그러나 단순한 자연모방이나 사실을 표현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사실로부터 등을 돌려, 사실에 대한 인상이나 착각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자연의 모방이란 주관인 내가 객관인 자연과 상호 교호작용을 하는 방식이다. 니체는 교호작용의 예를 서정시인의 시작(詩作) 상태를 빌려 설명한다. 서정시인에게 기쁨(해방된 욕구)과 비애(억압된 욕구)의 상태에서 자연에 대해 자신을 주체로 인식한다. 결핍된 욕구인 열망이 해방받기 위해 분출된다(니체 식으로 말하면, 욕망이 주관을 이끌어낸다). 니체를 따라, 쇼펜하우어 식으로 말하면 어떤 욕구가 충족되면 다른 욕구가 다시 생기게 마련이다. 주관의 열망이 분출되면 자연 경관이 다시 우리의 욕구를 순수한, 의식 없는 인식을 갖도록 해 준다. 이렇게 해서 예술가의 창작 상태는 주관적 의지와 반성적 자연 상태를 나누어갖게 된다.
예술가가 이처럼 자연을 모방하게 되는 것은 가상에 대한 필요성 때문이다. 니체는 라파엘로의 그림(천국과 지옥)을 빌려, 예술가가 왜 가상을 필요로 하는지 설명한다. 인간은 그의 토대에서 고통스러운 존재이다(그림 하반부). 그러나 매 순간 가상(상반부)이 만들어내는 욕구 충족경험을 한다. 이렇게 하여, 표현된 것으로부터 새로운 가상인 즉 [가상의 가상] 세계가 만들어진다. 새로운 가상은 이 세계를 [살 만한 것]으로 만든다는 점에서, 니체의 유명한, “세계는 예술로서만 정당화된다”는 경구가 완성된다.
예술 일반론에 더하여 리얼리즘 예술론도 잠깐 살펴보자. 까간은 [미학 강의]에서 리얼리즘과 고전 문학의 차이를 명료히 했다. 고전문학에서는 성과 속, 미와 추의 게토가 엄격히 분리되어 있었다. 그러나 리얼리즘에서는 이 게토가 무너진다. 인간은 천사도 아니고, 그 내면은 추악하기 짝이 없다. 예술가가 현실의 미, 추를 적나라하게 밝히는 이유 역시 어떤 목적 때문이다. 예술 일반론에서 예술의 목적이 가상에 대한 필요였다면 리얼리즘 예술의 목적은 사회적 치유에 있다. “그대들, 젊은이들을 위해 시인은… 플라터너의 거친 혓바닥으로 폐결핵의 가래침을 낱낱이 핥는다”. 미래를 위해 현재의 해악들을 제거하겠다는 것이 리얼리즘의 진수이다.
회화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피카소를 어느 화풍이라고 규정하든, 그의 그림 [게르니카]에는 리얼리즘이 숨쉬고 있다. 그는 그림을 통해 인간의 잔인성과 야만을 고발하고 있다. 말들이 죽어가고, 인간이 학살당하고 있다. 사실을 사실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라면 사진도 있고, 신문 기사도 있다. 그러나 리얼리즘 예술을 리얼리즘 예술답게 하는 이유는 인간의 야만성을 고발하고(이것이 현실이다), 참 인간화된 세계는 이런 것들을 제거해야 한다는 웅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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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이제 김미향의 그림들을 다시 읽을 수 있다. 또 다른 자화상인 그림에 첨가된, 이해 가능한 절제된 경구들에는 풍성한 의미들이 숨어있다. 인간은 물론 자연과의 교호작용, 형제 관계를 형성하겠다는 의지를 포기하지 않는다. 나무의 눈을 보자. 그(녀)는 암, 수 구별 이전의 존재로서 나비(이성이 아니다)를 쫒고, 아이들을 쫒고, 죽었다가(잠들었다가) 다시 깨어(살아)난다. 자연이란 원래 ‘생명’의 다른 이름이 아닌가. 그래서 “시는 나와 같은 바보나 짓지만, 나무를 만드는 것은 하나님뿐”이라는 외침이 가능할 것이다.
우중충하고 암울한 드로잉 자화상에는 다행스럽게 귀에 헤드폰이 걸려있다. 작가가 위로받을 양식이 있는 것이 다행스럽다. 자세히 보면 그림은 적적성성(寂寂惺醒)하다.
?고요한 가운데 깨어있음이 분명하다. 눈은 차분하게 어느 한 곳을 응시하고 있다. 잠들어 있지도, 요동치지도 않는다. 다시 들여다 보면, 눈은 아마도 맑은 갈색이리라 짐작하게 된다. 어쨌든 눈은 맑다. 응시하는 시선이란 반성적 시선이요 현실에서 일어나는 어느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시선이다.
작가는 오늘날 가족일반에 대해 반성한다. 가족 일반이라는 말이 중요하다. 현실을 사실적으로 바라본다는 의미이다. 박범신은 이득과 희생을 강요하는 오늘 가족의 세태를 그리지 않았던가. 어느 여성은 옷 장사하는 시누이가 제사 때마다 짝퉁을 들고 와 강매하는 통에 죽을 지경이라는 하소연을 했다. 가족 관계에서조차 장사꾼의 이득 논리가 지배하는 현실이라면 그런 장사꾼을 믿느니 차라리 창녀를 믿으라는 마크 트웨인의 경구를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가족을 이처럼 갈기갈기 찢어놓은 이유는 무엇보다도 공평하지 못한 사회적 분배에 기인한다는 것을 누가 모르랴.
가족이란 내게 무엇인가? 소통하는 존재인가? 의지할 수 있는 존재인가? 필자는 [비가 오면 우산이 되어주]는, [그림 6]에 기대어 작가의 의도를 과감하게 추측해 본다. “오늘은 내게 기대세요, 내일은 내가 당신에게 기댈께요.” 그림책의 나무들은 작가가 현실에서 살아가는 소명(Gerufe)을 보여주는 듯하다. “좋은 예술가가 되어 타인들(사회)에 도움이 되는 것”이 그녀의 바램이다. 나에게 와서 쉬라. 오늘 가족 일반에게 이것이 가능한가? 가능하다면 가족 공동체이다. 그게 아니라면 가족은 또 다른 지옥이다(홍 선생님 어록). 가족은 작은 사회이다. 가족이 이득관계로 지옥이듯이 사회 역시 이득관계로 지옥이라면, 이런 사회와 가족은 지양되어야 한다. 이 예술가의 의도이다.
드로잉 자화상에 이어지는 글 속의, 작가가 행복할 수 없는 요소들에 대해 반드시 짚어야 한다. 폐지줍는 노인과 몸 파는 여성들 때문에 고통받는 작가는 ‘창밖에 떨고 있는 저 개 한 마리 대문에 결코 행복할 수 없’는 존재이다. 타인의 고통에 무딘 것이 오늘 사회 현상임을 작가는 고발한다. 삶의 의미를 묻는 작가의 의도는 여기에 있는 듯하다. 더 나은 사회는 가슴과 가슴으로 만나는 사회여야 한다. 타인의 고통에 민감한 사회이어야 한다.
작가가 인간으로 많은 약점을 지녔다하자(자화상에서 보듯, 수려하지 않은 외모이든, 시에서 보듯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든). 시인의 의도는 범인이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시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아도 되리라. 그러나 약점들에도 불구하고 예술가로서 많은 장점을 지녔기에 그녀는 참 좋은 예술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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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를 위한 그림책이라 생각하고 가벼이 읽다가(보다가), 몸 어느 부위를 때리는 충격을 받는 것은 뎅커(Denker)로서의 기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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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 듣고 생각하기]
여유 있으면 8천만 겨레 모두에게 선물하고 싶은 책.
중국사를 관통하는 고난에 비하면, 우리 역사 관통하는 고난은 소꿉장난 수준이다. 일제강점기 일본학자가 우리 고난 침소봉대했고 이병도 따르는 역사학자들이 계속 식민사관 대물림한다. 이병도는 을사5적 이완용 양아들이다.
한국이 951번 이 땅에서 전쟁이 일어났다면, 중국 땅에서는 약 3만 번 전쟁이 일어났고, 일본에서는 약 2만 번 전쟁이 일어났다.
중국역사
맨 앞 1천년, 난세 870년 치세 130년
가운데 8백년, 난세 670년 치세 130년
마지막 1천년, 난세 700년 치세 300년(12쪽)
1979년에 박정희가 지 부하한테 총알 맞아 죽었다. 그 때 나는 중3 학생이었다. 1980년에 나는 고 1 학생이었다. 40대 중후반 윤리선생님이 침을 튀기면서 우리는 못난 민족이라고 말씀하셨다. 그 때 『시련과 극복』이라는 책이 교과서로 사용되었다. 책 앞 부분에 우리나라가 다른 나라한테 9백 몇 십번을 침략 받았다는 내용이 나왔다. 그 내용을 설명하시면서 윤리 선생님이 “우리 민족은 병신이야” 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뭐라 설명할 수 없었지만 좀 거시기 했다. 좀 억울했다.
중학교 때 국사 책 앞 부분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고구려가 위장 관구검한테 공격 받아 왕이 어디로 도망갔다. 라는 내용이 말이다. 책을 쓴 학자들이 식민사관에 세뇌되어 그리 썼을 것이다. 중국학자들이 쓴 책을 보면 자기들이 진 전쟁에 대해 역사책 앞에서 다루지 않는다. 수나라, 당나라가 고구려한테 대패한 이야기 잘 다루지 않는다. 간혹 다루더라도 아주 쪼금 다룬다.
그 분이 또 헛소리 하셨다. 우리가 세계에 내세울 유물이 석굴암이 아닙니다. 비원에 있는 아무개라는 목조건물입니다. 같이 일한 역사 강사가 그러더라. 우리 전통가옥 처마는 아래에서 볼 때 가장 웅장하게 보이도록 각도를 잡았다고 말이다.
우리나라 국사책에
일제 강점기 항목이 나온다.
그런데 우리나라 세계사 책에는
오호 16국 강점기,
요 강점기,
금 강점기,
원 강점기,
청 강점기
라는 항목이 나오지 않는다.
나는 이해할 수 없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영어판을 1985년에 대학 도서관에서 본 적이 있다. 일본 항목을 봤더니 1대 왕부터 몇 대왕까지 줄줄이 사탕처럼 나온다. 상식 있는 일본학자들이 몇 대까지는 뻥이라고 인정하는 내용이 버젓이 사실인 양 나왔다. 대한민국 항목을 봤더니 단군 왕검 이야기 나오고 갑자기 서기 삼국시대 이야기 나온다. 단군 왕검 이야기는 신화로 나온다. 서양인들이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을 보면 일본이 한국보다 더 유구한 역사를 지닌 나라로 볼 것이다. 열 받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한국 항목은 이 나라 영문과 교수들이 영역했더구만. 당연히 원래 글은 식민사관에 쪄든 이병도 제자들이 썼겠지. 이병도가 나라 팔아먹은 이완용 양아들이라는 것을 최근에 알았다.
1985년에 대학생 사촌집에 갔다. 사촌한테 내가 물었다. 일제 시대와 해방초기에는 우리나라 마라톤 선수가 세계 맨 앞 이었는데 지금은 왜 성적이 나쁠까? 사촌이 그러더라. “조선 놈은 3일에 한 번씩 맞아야 정신 차려.” 식민사학자가 우리한테 심어놓은 말을 이 나라 최고 지성인이라는 대학생 입에서 나왔다. 깝깝했다.
이래서 나는 한국고대사에 관심이 많다. “조선 놈은 3일에 한 번씩 맞아야 정신 차려.” 이 말이 이 땅에서 없어지는 그 날까지 나는 한국고대사에 관심을 가질 것이다.『중국역사의 어두운 그림자』(『3000년 중국역사의 어두운 그림자』로 책 제목 바뀜)이 책이 많이 팔려야 화이사관 식민사관 문제 풀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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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 듣고 생각하기]
많이 고민하다가 이 글을 쓴다. 며칠을 고민했다. 사랑하는 안해가 이 글을 읽고 뭐라고 하지 않을까? 주책없다고 말이다. 하지만 어쩌랴? 다 사실인 것을. 나는 어린이(초등)학교 2학년 시기를 인천에서 보냈다. 하루는 어둑 어둑한 밤에 아버지가 나와 두 살 위인 형을 데리고 논 부근 물가로 가셨다. 자전거 뒤에 다라이를 싣고 가셨다. 그 다라이에는 불에 그을려 검게 탄 개가 있었다. 아버지는 그 개를 더 작은 크기로 토막내기 위해서 논가 물 있는 곳으로 어린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신 것이다.
집에 왔더니 어머니가 이미 개고기 요리할 준비를 해 두셨다. 어머니가 개고기 토막을 큰 솥에 넣고 부글 부글 끓이시는데 냄새가 참 좋았다. 된장냄새와 함께 구수한 개고기 냄새가 참 좋았다. 요리가 다 되었는지 어머니가 개고기 덩어리를 하나씩 꺼내어 칼로 잘게 썰어주셨다. 우리 식구는 한 점 한 점 맛나게 먹었다. 나도 맛나게 먹었다. 참 맛 있었다.
그 뒤로도 집에서 개고기를 몇 번 먹었다. 커서는 보신탕 집에서 지인들과 어울려 먹었다. 나름 친한 분을 내가 초대해서 함께 보신탕을 먹곤 했다. 최근 까지도 나는 보신탕을 먹었다. 숨이라는 무크지를 읽고 깊이 생각을 해봤다. 그 동안 내가 보신탕을 먹은 개인 역사를 돌이켜 보았다. 내가 겪었던 것과 비슷한 내용이 <숨> 2권에 나와서 더 더욱 그랬다. 나는 대학 다닐 때 도올 김용옥교수 책을 열정적으로 읽었다. 책이 나오기가 무섭게 간절한 마음으로 그 분 책을 사서 읽었다. 그 분 책에서 보신탕 이야기가 나왔다. 청나라 위안 스카이 이야기를 곁들여서 보신탕 이야기를 했다. 88 올림픽 한다고 줏대없이 보신탕 집을 단속하지 말고 자신있게 전통 음식인 보신탕을 먹으라는 것이 대체적인 내용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보신탕 집이 보양탕이라는 이상한 이름으로 음성화된다는 것이다. 내가 그 당시 존경하던 석학이 보신탕을 자신있게 먹으라는 말을 들으니 나는 뿌듯했다. 나 자신이 보신탕을 먹는다고 공공연하게 밝히고 다녔다. 수업 시간에 학생들한테도 보신탕은 반만년 역사가 이루어낸 훌륭한 전통 음식이라는 말까지 했다. 프랑스 여배우 브리짓 바르도가 대한민국에서 이루어지는 보신탕 문화는 야만적이라는 비난이 너무도 몰상식한 말이라고 힘주어 비판하기도 했다. 그이는 문화 상대주의를 모르는 몰상식한 문화제국주의자라고 비판을 하면서 말이다. 의사들이 수술환자에게 수술 부위가 빨리 아물도록 보신탕을 권한다는 아버님 말씀도 내가 보신탕 신봉자가 되게 하였다.
서울시 마포구 성미산 마을에 작은나무카페가 있다. 내가 사는 동네에 말이다. 그 카페에서 숨이라는 책을 처음 읽었다. 그때는 내가 이런 글을 쓰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숨> 1권과 2권을 사서 집에서 쉬엄 쉬엄 읽었다. 안해가 요즈음 그런다. 내가 숨을 읽더니 여덟 번이나 그랬단다. “에이, 이 책 읽다 보면 앞으로는 보신탕 못 먹겠네.” 지인과 보신탕 빨리 한 번 푸짐하게 사 먹고 보신탕과 영원히 이별할까도 생각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럴 수 없었다. 숨에서 개와 관련된 글을 읽고 숨에 나온 이쁜 개 사진을 본 내가 더는 보신탕을 먹을 수 없었다. 더 깊이 들어가 보면 개를 사랑했던 기억 때문에 내가 지금 개고기를 먹지 않으려는 것 같다. 어릴 때 집에서 개를 길렀다. 아버지가 강아지를 사 오셨다. 아버지는 어떤 강아지를 사오시던지 강아지 이름을 재동이라고 지으셨다. 재동이는 내가 학교에서 집에 돌아오면 꼬리를 흔들며 이리 뛰고 저리 뛰다가 내게 안기곤 했다. 혀로 내 손을 내 얼굴을 빨곤 했다. 아직도 재동이 모습이 눈에 선하다. 재동이 혀의 촉촉한 감촉이 느껴지고, 재동이 선한 눈빛이 어른거리고, 재동이가 달려올 때 내는 핵핵거리는 소리가 바로 지금 들리는 듯하다. 재동이를 안을 때 느꼈던 따스한 체온을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뚜렷이.
우리 아버지가 네 형제에게 그랬듯이 나도 우리 딸 쌍둥이에게 보신탕을 먹게 했다. 어린 우리 쌍둥이가 보신탕도 먹을 줄 안다고 자랑하고 다녔다. 지금 생각해 보면 끔찍하다. 부모로써 쌍둥이한테 미안하다. 큰 죄를 지었다. 앞으로는 쌍둥이에게 보신탕 먹을 기회를 만들어 주지 말아야겠다. 숨에서 일하시는 분들이 내 글을 읽고 충격 받으실 것을 생각하면 내가 겁난다. 무안하다. 그래도 돌이켜 보니 내 주변에서 긍적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내가 잘 몰랐는데 돌이켜 생각해 보니 그렇더라. 아버님이 약 15년 전부터 보신탕을 드시지 않으셨다. 아버지는 절에 다니시면서 차츰 개고기를 끊으셨단다. 우리 안해도 약 3년 전부터 보신탕을 먹지 않았다. 이제 나만 안 먹으면 된다. 다행이다. 21세기 대한민국은 참 살기 힘든 곳이다. 불량한 사장 때문에 파업하는 일꾼들이 많다. 그 분들 삶은 참 팍팍하다. 하지만 <숨>이라는 책을 읽고는 그 분들이 그래도 동물들보다는 낫구나 라는 깨달음을 얻는다. 동물들은 파업도 할 수 없으니 말이다. 부당한 짓을 해대는 인간을 상대로 시위도 할 수 없으니 말이다. 오늘은 2010. 9. 21. 한가위 연휴 날이다. 내 삶에서 작은 혁명이 이루어지는 순간이다. 내게 다짐한다. 앞으로는 절대로 보신탕 먹지 말자. 앞으로는 되도록 고기 식사를 줄이자. 앞으로는 되도록 적게 먹자. 달님 저를 굽어 살피소서.
해님 제 가슴을 뜨겁게 해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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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2012년 봄에 차를 팔았다. 차 안에서 우연히 들은 라디오 방송의 사연이 내 마음을 움직이게 했다. 젊은 아내가 남편을 설득해 차를 판 사연이었다. 부부는 치솟는 기름 값과 교통체증 때문에 대중교통으로 출·퇴근을 했으며 기껏해야 주말에 마트나 나들이를 할 때만 자동차를 사용했다. 그러나 자동차를 보유하기 때문에 지불해야 하는 비용은 자동차 할부금과 보험료, 세금 그리고 유지비와 보수비를 따져보니 자신들의 소득에 비해 터무니없이 과했다. 세대 당 한 대의 자동차 보유를 당연히 여기는 요즘 시대에 그녀의 지혜로운 선택은 내게 용기를 주었다. 그 당시 나는 시간이 없다는 이유로 가까운 거리도 차로만 움직이고도 늘 시간에 쫓기어 스스로 할 수 있는 일들도 소비에 의존했다. 나는 차를 팔고 약간의 불편함을 느끼기도 했지만 지금은 차 없는 생활의 이로움을 발견하며 만족하며 살아간다. 아마도 그 배경에는 이반 일리히(I. Illich)의 영향이 크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일리히는 오스트리아 철학자며 로마 가톨릭 수사였다. 그는 서양 문화의 제도들이 우리의 교육, 의료, 노동, 에너지 사용, 교통 그리고 경제 발달에 미치는 효과를 비판했다. 일리히는 인생 후반기에 얼굴에 자라는 암 때문에 고통 받았으나 전문적인 의료에 따르기보다 전통적인 방법들로 치료했다. 그는 종양에 의한 고통을 진정시키기 위해 정기적으로 아편을 피우기도 했으며, 일리히는 종양이 진행 초기일 때, 종양을 제거하기 위해 의사와 상담했지만 종양을 제거하면 말하는 능력을 잃을 가능성이 크다는 말을 듣고 종양과 함께 사는 삶을 선택했다. 일리히는 그 삶을 자신의 운명이라 말했다.
일리히는 『상생 도구 Tools for Conviviality』에서 우리 사회가 부정의한 이유는 극소수에게만 자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도구의 존재를 정치적으로 용인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일리히의 ‘도구 tools’와 ‘상생 conviviality’ 개념은 앞으로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간단한 의미는 다음과 같다. 일리히는 “현대 기술이 관리자managers가 아니라 정치적으로 서로 연결된 개인에게 봉사하는 사회”(Illich, p.?)를 ‘convivial’하다고 말한다. 관리자는 기업의 사장을 의미한다. 즉 현대 기술은 기업의 사장이 돈을 벌게 쓰이는 것이 아니라 개인에게 돌아가는 이익이 많아지게 하는 도구여야 한다. “정치적으로 서로 연결된 개인”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려면 일리히가 정치를 어떤 뜻으로 사용하는지 알아야 한다. 일리히에게 정치는 “에너지나 정보의 동등한 투입이 아니라 일정한 한계 안에서만 최대의 산업적 산출의 분배”(Illich, p.?)를 다루어야 한다. 정치는 투입이 아니라 산출과 관련한다. 산출의 분배를 최대화하는 것이 정치의 목표다. 분배의 최대화는 곧 돈 많이 버는 것이고, 그렇다면 ‘convivial’은 사장이 아니라 개인들이 돈을 많이 벌게 한다는 뜻으로 볼 수 있다.
이 글에서 나는 먼저 도구의 근본 독점을 비판하고 일리히의 ‘도구 tools’와‘convivial’ 개념을 분석한 후, 일리히가 제시한 대안들을 평가한다. 일리히가 상생 사회를 실현하기 위해 제시한 구체적인 정치 대안은 이상적이고 전 근대적이라 현실에 적용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그러나 나는 오늘의 지구 환경과 생태 문제를 단순히 자연에 대한 존중과 인간과 자연의 화해 또는 조화라는 추상적인 답에서 찾는 것은 문제에 대한 원인을 잘못 분석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반면 일리히의 사상은 산업 도구의 근본 독점에 대한 비판을 통해 상생 사회를 위한 개인의 노력이 무엇인지를 일깨우고 사회 개혁을 모색한다는 점에서 더 구체적인 대안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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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리히에 따르면 과도하게 효율적인 도구가 자연환경에 대한 인간관계를 조장하도록 응용하면 도구가 인간과 자연 사이의 균형을 파괴하면서 환경을 부패시킨다. 또 도구는 사람들이 스스로 할 필요가 있는 일과 기성품이 필요한 일 사이의 관계를 파괴할 수 있다. 후자의 파괴는 근본 독점을 낳는다. ‘근본 독점’이란 “하나의 상표가 지배적인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유형의 제품이 지배적인 것을 의미한다.”(Illich, p.55) 예를 들어 코카콜라가 아니라 탄산수들이 음료 시장을 독점하고 식혜나 수정과 같은 전통 음료와 차를 음료시장에서 배제하는 것이 근본 독점이다. 자동차도 이런 방식으로 교통을 독점한다. 자동차는 도시 이미지를 만드는데, 미국은 이미 1970년대에 도시의 자동차가 도보와 자전거의 이동을 배제했고, 대만에서는 자동차가 하천 교통을 배제했다. 이와 같이 한 상표의 자동차를 많이 타는 것이 아니라, 자동차에 의해 도보, 자전거, 배 등의 다른 교통수단이 배제되는 것이 근본 독점이다. 학교도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공부에 대해 근본 독점을 확대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미인가 대안학교나 서원에서 공부하는 사람들은 공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으로, 즉 ‘무교육자’로 낙인찍혀 검정고시를 통과하지 않으면 교육 받은 자로 인정받지 못한다. 의료 행위도 학교 교육을 받은 의사일 경우에만 환자를 치료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다.
일리히는 우리의 타고난 능력이 배제되는 곳이라면 어디서나 근본 독점이 생기며 이 근본 독점이 강제적 소비를 강요함에 따라 개인의 자율성을 제한한다고 보았다. 또 “근본 독점은 거대 제도가 공급하는 표준 제품의 강제 소비를 수단으로 강요하기 때문에 특별한 사회적 통제를 만든다.”(Illich, p.56) 거대 제도가 만든 강제 소비의 예를 들어보자. 우리나라는 불과 50년 전만 해도 아이를 낳는 곳은 병원이 아니고 가정이었다. 간호사 경력이 있는 산파는 아이를 받는데 아무 문제가 없었고 병원에서 아이를 낳을 때 드는 비용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적은 비용만으로 출산이 가능했다. 그리고 산모의 산후 관리도 지금처럼 큰 규모의 조리원에서 이루어질 필요 없이 가족의 도움으로 집에서 조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자연분만을 위해서도 병원에 하루나 이틀 입원을 해야 하고, 입원 절차에는 각종 검사가 따르며 그에 대한 부담도 소비자가 진다. 이것은 의료 제도가 개인에게 강제하는 것이지 개인이 필요에 의해 선택한 것이 아니다. 지금도 집에서 아이를 낳는 산모들이 있지만 그녀들은 성가시고 불편한 방송 기자의 호기심 가득한 취재에 응해야하는 불필요한 관심을 감수해야 한다. 또 분만을 돕는 산파를 구하기도 어렵다.
장례 문화도 근본 독점을 낳았다. 멕시코에서는 한 세대 전(일리히가 책을 쓴 1973년을 기준)까지도 묘지를 파는 일과 죽은 자를 축복하는 일 외에는 모든 장례 준비를 가족이 했다. 가족이 모여 장례를 치르는 동안에는 서로 다투기도 하지만 죽은 자를 보내는 슬픔을 터뜨리며 기분을 풀기도 하고, 죽음이라는 숙명과 삶의 가치를 되새기는 기회로 삼을 수 있었다. 그러나 1960년대 이후 멕시코의 모든 장례 절차는 패키지 상품이 되었고, 장의사가 하는 장례 의례는 법률로 강제해서 장의사들이 시신을 통제하는 근본 독점을 낳았다.
일리히는 치유하고, 위로하며, 이동하고, 배우고, 집 짓고, 죽은 자를 묻는 일과 같은 인간의 필요를 충족하는 수단이 사람들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에 의존하면서 상품에는 제한적으로 의존한다면 우리는 풍족할 수 있다고 말한다. 즉, “스스로 가능한 활동은 교환가치가 아닌 사용가치를 부여”(Illich, p.58)하지만 우리는 더 이상 사용가치를 부여하는 자유로운 활동을 노동으로 간주하지 않고 있다. 우리가 타고난 능력을 포기하고 우리를 대신해 ‘더 좋은’ 무엇과 우리의 능력을 교환할 때 근본 독점은 성립한다. 근본 독점은 가치를 산업적으로 제도화하는 것을 말하며, 이것은 ‘새 것들’의 희소성과 소비 수준에 따라 사람을 계급화 하는 틀을 만든다. 근본 독점에 대한 이러한 새로운 정의는 가치 있는 서비스 비용을 증가시켜 특권을 차별적으로 부여하고 자원에 대한 접근 권리를 제한하여 사람을 의존하게 만든다. 최근에 장례 대행업체 가운데 일부는 상당히 고가의 장례 예식 상품을 유족에게 권한다. 부자가 아니고는 이용할 수 없는 고가의 장례 예식은 결국 서비스에서 차별화 전략으로 또 다른 특권 의식을 낳으며 일부 계층만이 누리는 서비스 자원이 되고 만다. 우리가 근본 독점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지 않는다면 그 독점은 다원적으로 진행해 강제된 모든 것들에 대한 우리가 가진 인내의 한계를 파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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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리히에게 도구의 범위는 넓다. “나는 (…) 단순한 기자재만이 아니라, (…) 거대한 기계만을 포함하는 것이 아니라, 매우 넓은 의미로 사용한다. (…) 생산시설도 포함시키고 교육, 건강, 지식, 의사결정을 생산하는 것과 같이 만져서 알 수 없는 상품의 생산 체계도 포함시킨다.” (Illich, p.22)
일리히에게 ‘도구 tools’는 어떤 목적 달성을 위해 마련한 장치인 ‘수단’을 의미한다. 그는 합리적으로 고안한 모든 장치를 하나의 범주로 포섭할 수 있기 때문에 도구라는 말을 사용하는데 기술 도구만이 아니라, 학교의 교과 과정이나 결혼 법 같은 의도적으로 형성한 사회적 고안물도 도구에 속한다.
일리히에게 ‘도구’는 이중적 의미를 갖는다. 하나는 ‘인간을 위해 일하는 도구’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과 함께 일하는 도구’다. “인간을 위해 일하는 도구인 기계는 사람들을 더욱 교묘하게 프로그램화된 에너지 노예로 만들지만, 인간과 함께 일하는 ‘도구’는 개인이 갖는 에너지와 상상력을 최대한으로 만들 수 있는 도구”다.(Illich, P.10) 동력 도구 가운데 몇 가지는 인간 에너지의 증폭기 역할을 한다. 가령 소가 쟁기를 끌지만 사람도 소와 함께 일하고 그 성과는 인간과 동물의 힘이 결합해 얻어진다. 전기톱과 기중기도 같은 방식이다. 반면에 제트기를 조정하기 위해 사용하는 인간 에너지는 제트기 출력에 의미 있게 쓰이지 않는다. 그래서 제트기는 프로그램화된 에너지 노예 인간을 위해 일하는 ‘산업 도구’며 인간과 함께 일하는 소, 쟁기, 전기톱, 기중기는 ‘상생 도구’라 부른다. ‘상생 도구’는 사용하는 각자가 상상력을 발휘해 환경을 풍요한 것으로 만들 수 있게 최대의 기회를 부여한다. 도구는 사용자의 목적에 따라 상생을 진작시키는데 전화는 구조적으로 상생 도구다. 왜냐하면 관료는 사람들이 전화하면서 이야기한 개인 비밀을 간섭하거나 보호할 수는 있어도 전화로 서로 말하는 내용을 규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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