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 박물관[별과 달과 바람의 노래]- 12

그림자 박물관[별과 달과 바람의 노래]- 12

 

김설미향(그림책 작가)

크기변환_그12

열쇠가 너무 많아 박물관의 열쇠를 찾아내기가 어려웠어.
그런데 아침해가 방긋하고 올라오자 열쇠 하나가 빤짝하는거야.
문을 열자 죽어 있던 그림자들이 아침햇살을 받아 반짝반짝 살아났어.

작가의 블로그 http://dandron.blog.me

 

죽음에 대한 단상(斷想)-1?[가동(可洞)선생의 삶의 철학]

?죽음에 대한 단상(斷想)-1?[가동(可洞)선생의 삶의 철학]

 

 

이종철(연세대학교 철학연구소)

 

 

 

나이를 먹을수록 자주 가는 곳이 있다. 하나는 결혼식장이고, 다른 하나는 장례식장이다. 젊은 시절에는 친구들 결혼식장을 다녔지만, 이제는 친구 자녀들의 결혼식장이다. 결혼식장은 선남 선녀가 사랑을 다짐하면서 인생의 새로운 출발을 함께 하는 자리이니까 보는 사람도 즐겁다. 젊었을 때는 나도 그런 결혼을 하고 싶다는 생각 때문에 즐거웠고, 나이를 먹어서는 나도 저런 사랑과 결혼을 한 시절이 있었구나 하는 추억을 되돌릴 수 있어 기쁘다. 하지만 장례 식장을 다녀올 때는 마음이 무겁다. 축하해주러 가는 길이 아니라 슬픔을 위로하고 함께 하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아직은 그래도 부모님 연배의 죽음을 슬퍼해주는 경우가 많지만, 드물지만 주변 친구들이나 그 부인의 죽음을 함께 슬퍼해주고 위로해주는 경우도 있다. 더구나 자식 세대들의 죽음을 대할 때는 그 아픔이 더 크다. 부모가 죽으면 청산에 묻고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는 말도 있듯, 그런 고통은 참으로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몇 년 전 친동생의 딸이 허망하게 세상을 떠났을 때, 올 해 친구의 다 큰 아들의 죽음을 대했을 때는 그 고통을 그대로 느낄 수 없는 것이 고통스럽기까지 했다. 참으로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가깝게 지내던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내 곁을 떠났다는 생각이 주마등처럼 스친다. 중학교 시절부터 아주 최근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얼굴들, 오래 전이어서 이제는 그 얼굴도 잘 떠오르지 않는 사람들…부모의 죽음, 세월호의 죽음들… 아, 생명은 이렇게 죽을 밖에 없는 것인가? 일전에 대학 동기의 모친상을 다녀오고서 잠시 잊고 있었던 죽음을 생각해본다.
 
오래 전 고등학교를 다닐 때 암송하던 시 <제망매가>이다.
 
죽고 사는 길이
이 세상에 있으므로 두려운데
나는 간다는 말도
못다 하고 가버렸느냐
어느 가을 이른 바람에
이리저리 떨어질 이파리처럼
같은 가지에 났어도
가는 곳을 모르겠구나
아, 극락세계에서 만날 나는
도를 닦으며 기다리겠노라
(월명사, 제망매가)
 
그 당시는 별 생각 없이 외웠지만 지금 다시 보니 죽음에 관한 성찰이 다 담겨 있는 것 같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 예고 없이 찾아오는 죽음의 우발성, 가을바람에 나부끼는 이파리 같은 생명의 유한성, 태어난 곳은 하나이고 분명해도, 죽고 난 후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사후의 세계는 과연 있는 것인가? 죽음 이후에 대한 인간 지식의 완벽한 무지, 죽음 이후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면 너무 허무하지 않은가? 그럼에도 극락과 천국에서의 만남을 위해 도를 닦고 선을 행하겠다는 윤리적 결단, 과연 신은 존재하는가? 극락정토는 있는 것일까? 죽음은 삶에 대해 어떤 의미를 갖는가? 등…이 짧은 시 안에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죽음에 관한 많은 이야기들이 담겨 있는 것이 아닌가? 한 배에서 태어난 누이가 먼저 간 것을 슬퍼하며 쓴 시이지만 어찌 이것이 오누이만의 사별에 한정될 수 있겠는가?
 

1. “죽고 사는 길이 이 세상에 있으므로 두려운데”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는 어두운 철학자로 알려져 있다. 그는 사람들의 통속적인 생각을 넘어선다. 만물이 유전한다는 그의 철학은 변증법의 시작을 알린다. 그의 잠언은 이렇다. “삶은 죽음이다.” “시작은 끝이다.” 만물의 시작에서 종말을 이야기하고, 생명의 탄생에서 죽음을 이야기하는 이 어두운 철학자의 말을 사람들이 깨닫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죽음은 삶에서 나오는 것이 아닌가? 삶이 없다면 죽음도 없는 것이고, 시작이 없다면 끝도 있을 수 없다. 너무나 자명한 사실이지만 우리는 오직 사물의 한 면만을 보려고 한다. 탄생과 소멸, 만물의 끊임없는 변화를 그는 타오르는 불의 이미지로 묘사한다. 불교는 헤라클레이토스의 지혜를 더 깊게 해준다. 불교의 가장 기본 철학인 사성제(四聖諦)는 고(苦)에서 시작한다. 고는 어디서 오는가? 생명이 있기 때문이 아닌가? 모든 생명은 죽을 수밖에 없다는 데서 고통이 시작되는 것이다. 생명이 탄생하면서 이 생명을 지속하기 위해 먹어야 되고, 먹기 위해서 일해야 되고, 이 몸이 힘들다 보면 병도 생기는 것이 아닌가? 그러다 보면 결국 이 생명은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본다면 모든 고통은 이 몸을 타고 나는 데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이런 자연법칙과 같은 필연성을 우리는 종종 잊고 사물의 한 면만 보는 것이 아닌가? 아름다운 꽃이 영원히 피워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불교는 이런 생명의 고통을 해결하려 한 것이다. 난세에 몸과 생명을 보존하려 했던 중국의 도가들은 산속으로 숨어 들어가 양생을 위한 수련에 힘쓴다. 하지만 열심히 수련해 동안을 유지하고 장생불사의 건강하던 도인의 몸도 한 순간에 호랑이의 먹이가 될 수 있지 않은가? 양생법이 해답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이 몸과 생명이 낳고 죽는 그 까닭을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장자』 외편에는 부인상을 당한 장자가 죽은 부인의 시신을 앞에 두고 덩실 덩실 춤을 추는 이야기가 나온다. 친구 혜자가 문상을 왔다가 그 모습을 보고 어이없어 한다. 아무리 부인이 죽으면 사내들은 뒷간에 가서 웃는다는 말도 있지만 그래도 이렇게 춤까지 추는 것은 심하지 않은가? 이 때 장자가 말을 한다. “그렇지 않네, 아내가 죽었을 때 나라고 어찌 슬퍼하는 마음이 없었겠나? 그러나 그 시작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지. 본래 삶이란 게 없었네. 없었을 뿐만 아니라 본래 형체도 없었던 것이지. 그저 흐릿하고 어두운 속에 섞여 있다가 그것이 변하여 기(氣)가 되고, 기가 변하여 형체가 되었고 형체가 변하여 삶이 되었지. 이제 다시 죽음이 된 것인데, 이것은 마치 봄 여름 가을 겨울 사철의 흐름과 맞먹는 일. 아내는 지금 ‘큰 방’에 편안히 누워 있지.”(『장자』) 삶과 죽음에 관한 우주의 영원한 이치와 작용을 깨달은 장자가 어찌 곡을 할 것이고, 어찌 춤을 추지 않을 수 있겠는가? 스토아의 현인들도 죽음에 대한 이런 깨달음을 통해 극복하고자 했다. 하지만 기독교는 인간의 유한성이라는 엄연한 진실과 그로 인한 고통의 감정을 강조한다. 사도 바울은 어두운 사망의 골짜기를 헤맬 수밖에 없는 인간의 유한성을 통렬하게 일깨운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모든 생명은 곧 죽을 수밖에 없다는 엄연한 사실, 이 고통을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가? 오직 우리를 창조한 신에 귀의할 때만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모든 철학과 종교는 죽음이라는 엄연한 사실과 그로 인한 고통을 해결하려는 몸짓의 표현이리라. 아침 이슬과 같은 이 생명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법을 깨닫게 하거나, 이 유한한 생명을 창조한 무한한 신의 존재에 귀의하거나 이다. 혹은 우주의 영원한 이법 속에서 삶과 죽음의 물리적 법칙을 깨닫는 것이다. 가을 날 낙엽이 떨어지는 것을 보면 당신은 눈물이 흐르는가? 돌이 위에서 아래로 낙하하는 모습을 보면 당신은 슬픈가?
 
2. 죽음은 어떻게 오는가? (죽음의 우발성과 우연성) “나는 간다는 말도 못다 하고 가버렸느냐.” 천수를 누리다가 돌아가신 분을 문상 갈 때는 비교적 마음이 가볍다. 모든 죽음의 이별이 쉬운 것은 아니다. 그래도 천수를 누리고, 갈 때를 알면서 돌아가신 경우에 우리는 호상이라는 말을 한다. 이런 호상을 맞이할 때는 산 사람들의 마음도 무겁지는 않다.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죽음을 예측한단 말인가? 아침에 잘 다녀오겠다고 나간 사람이 사고로 갑자기 죽을 때처럼 죽음은 종종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 갑자기 들이닥친다. 독일의 사회학자 울리히 벡은 현대를 ‘위험 사회’로 규정한다. 이런 위험은 곳곳에 널려 있다. 거대 도시에서 교통사고, 건물 붕괴, 화재 등의 재난은 다반사다. 재난 사고에 취약한 우리의 경우는 이런 사고가 전혀 낯설지 않다. 그래서 더 위험한 것이다. 지진이나 해일 같은 자연 재해도 기후 변화와 환경 파괴로 더 빈발해진다. 미국 같은 경우는 종종 총기 사고로 많은 사람들이 죽는다.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테러 행위로 멀쩡한 시민들이 다치거나 죽는 경우도 많다. 이런 사고는 늘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우리로부터 빼앗아 간다. 우발적인 죽음으로 인한 갑작스런 이별을 대할 때 우리는 어떤가? 벌써 두 달이 넘도록 전국을 난타하고 있는 세월 호 대 참사는 갑작스럽게 닥쳤기 때문에 더 고통스럽다. 죽음을 대하면서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는 시간이 없었기 때문에 산자들은 더 고통스러운 것이다. 산자들은 자신들의 이 비통한 마음을 죽은 자들에게 투사를 한다. 그래서 억울하고 원통하게 죽은 영들은 필시 구천을 떠돌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서 영혼결혼식도 하고 천도 제를 지내기도 한다.
 

울리히 벡/ 출처: blog.joins.com

울리히 벡/ 출처: blog.joins.com

 
이런 우발적인 죽음과 달리 자발적인 죽음도 있다. 물론 우리나라가 세계 제 1위의 오명을 뒤집어쓰고 있는 자살을 자발적인 죽음이라 할 수는 없다. 그것은 비록 자신이 선택한다 할지라도 엄밀한 의미에서의 자기 결정은 아니다. 자살은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떠밀려 선택할 수밖에 없는 타살의 한 형태로 보아야 할 것이다. 자유로운 선택에 관한 라캉의 유명한 예가 있다. 밤길 골목에서 강도를 마주친 어떤 사람이 “죽을래 돈을 내 놓을래”라는 말을 들었을 때,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외양은 선택의 형식을 취했지만 내용상으로 그가 선택할 다른 여지는 없다. 돈을 내놓기 싫다고 하면 죽을 수도 있고, 죽고 나면 돈도 뺏길 수밖에 없지 않은가? 많은 사람들이 최후의 수단으로 자살을 선택할 때는 그것 외에는 달리 선택할 도리가 없기 때문에 자살하는 것으로 봐야 옳다. 때문에 높은 자살 율은 우리 사회의 여러 문제와 깊은 연관이 있다고 하겠다.
 
이처럼 자율의 형식을 가장한 타율이 아닌 진정한 의미에서 자발적인 죽음도 있다. 이른바 영웅적인 죽음이 그렇다. 설령 죽을 수밖에 없다 하더라도 죽음을 무릅쓰고 감히 죽음과 대결하고 그 죽음을 넘어서는 죽음이다. 자기 생을 통해 타인들의 생명을 구하려는 영웅들의 죽음이 그렇다. 생명보존의 욕구는 모든 생명체의 자연적 본능이다. 그런데 자신이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타인들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 위험한 상황으로 들어가는 것은 죽음에 대한 본능적 두려움을 극복하면서 이루어지는 영웅적 선택이다. 하이데거는 이런 형태의 죽음은 죽음을 미리 앞서 예비하는, ‘죽음에 대한 선구적 결단’으로 묘사한다. 이런 결단은 오직 자유로운 존재인 인간에게만 가능하다. 인간만이 자신의 신체가 소멸되는 두려움을 넘어설 수 있다. 아마도 인간 정신의 위대함은 이런 자발적이고 영웅적인 죽음에서 드러나지 않겠는가? 그의 신체는 소멸해도, 그의 정신은 산자들의 기억 속에서 생명을 유지하지 않겠는가?
 
 

사람들은 왜 월드컵에 열광하는가? [가동(可洞)선생의 삶의 철학]

?사람들은 왜 월드컵에 열광하는가??[가동(可洞)선생의 삶의 철학]

 

 

이종철(연세대학교 철학연구소)

 

 

 

요즈음은 월드컵 시즌이다.?월드컵은 전 세계인들이 열광적으로 환호하는 경기다.?지난 두 달 동안 짓눌렀던 세월호의 슬픔도 이 열광을 감출 수는 없다.?사람이 어찌 슬퍼만 할 수 있겠는가??월드컵의 열기가 전 세계를 덮고 있고,?지구 반대편의 경기를 보기 위해 사람들은 밤과 낮을 거꾸로 살고 있다.?특정 사건을 가지고 이념이나 인종,?빈부의 격차를 넘어서 열광하는 경우는 드물다.?올림픽 경기를 제외한다면,?단일 구기 종목으로 전 세계의 국가가 고루 예선과 본선에 대표 팀을 파견하는 경우는 축구가 유일하다.?야구는 미국과 동아시아 국가,?그리고 유럽 일부 국가를 제외한다면 지구를 대표하는 종목은 아니다.?배구나 하키,?골프 등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왜 사람들은 이렇게 축구에 열광을 할까??축구에는 인종적?·문화적 차이와 상관없이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그 무엇이 있을까??공을 차는 것은 인간의 본능적 행위와도 깊은 연관이 있을 것이다.?우리나라의 경우도 격구(擊毬)라고 해서 사람들이 모여 공을 차는 경기가 있었다.?멕시코의 마야 인들도 공을 가지고 노는 오랜 경기 전통이 있다.?이런 전통은 다른 많은 민족이나 문화권에서도 찾아보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그렇다면 공을 발을 가지고 노는 이런 행동의 어떤 면이 인간의 보편적 본능에 충실한가??축구는 아주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한다면 오직 발로만 하는 운동이다.?골을 막는 골키퍼만이 손을 사용할 수 있으며,?공이 장외로 나가 경기장 안으로 공을 집어넣을 때만 예외적으로 손의 사용이 허락된다.?경기장에서 손을 사용하면 바로 프리킥 벌칙을 받고,?패널티 애리어 안에서 골 키퍼가 아닌 다른 선수들이 손을 사용하면 패널티 킥이라는 최고의 벌칙을 받는다.?혹시 손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고 오직 발과 머리만 사용하게 하는 것이 이런 본능적 행위와 깊은 연관을 맺고 있는 것은 아닌가?

손은 인간 문명의 발전과 깊은 연관이 있다.?인류가 직립 원인으로 서면서 비로소 손이 해방된다.?손이 대지로부터 해방된 사건은 문명사의 발전에서 획기적 사건일 수도 있다.?이 손은 나무의 과일을 따고,?도구를 제작할 때 사용된다.?도구의 사용은 인간이 직접 몸을 사용하지 않고서도 대상을 조작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도구를 사용하면서 인간은 다른 동물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사회 진화를 할 수 있게 되었다.또 손은 손가락을 활용하여 셈을 세는 데도 사용된다.?하나 둘로 시작하는 셈은 추상 활동의 시작이다.?이 셈으로부터 숫자의 발견이 이루어진다.?숫자는 자연 대상을 단순하게 계산하는 추상 도구이다.?이 수자로부터 수들의 관계와 비율이 발견되고,?이를 통해 음들의 관계,?물리적 사건들의 관계,?천체의 운동의 법칙 등이 숫자를 통해 확인되는 것이다.?도구를 제작하고 추상 활동이 발전하는데 있어 그 출발은 손이 대지로부터 해방되는 사건이다.

그런데 축구에서는 이 손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핵심적인 규칙이다.?오직 발과 머리만을 사용하고,?그 발의 재간과 헤딩 기술만을 이용해서 공을 골대로 집어넣는 것이다.?이 발은 대지와 연결되어 있다.?가장 원초적인 대지를 딛고서 이 대지로부터 에너지를 받는 수단이다.?때문에 발은 이런 원초적인 본능과 에너지에 가장 깊게 연결되어 있지 않을까??축구가 동서고금의 인종과 문화,?노소와 경제적 빈부 차와 상관없이 고루 환영을 받는 것은 아마도 이런 원시적 본능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 아닌가??야구의 경우 홈런을 치면 관중들의 환호를 받고 누상을 한 바퀴 돈 홈런 타자는 다른 선수들과 손을 마주치는 세리모니를 한다.?그 장면은 상당히 절제된 문화 의식과 같다.?하지만 축구에서 골을 넣는 순간 그 선수의 포효를 보라.그는 막장으로부터 올라오는 괴성을 지르면서 온갖 몸동작이 복합된 세리모니를 하면서 동료들의 축하를 받는다.?다른 어떤 경기보다도 축구의 경우 이런 괴성과 몸동작이 심한 편이다.그것은 원시적 에너지의 발산과 연관이 있지 않은가?

수 만 명의 사라들이 운집해 있는 거대한 경기장을 보라.?과거 로마의 콜로세움을 연상시키지 않는가??아니 그 이상이다.?로마인들은 콜로세움에서 검투사들끼리 피를 흘리는 대결을 보면서 환호했다.?어떤 경우는 사자와 같은 야수와 싸우는 것을 보고 열광하고,?네로 황제 시절에는 기독교인들이 야수들의 밥이 되는 모습에 광분하기도 했다.?그들은 콜로세움에서 이런 원시적이고 야수적인 결투 장면의 피를 보면서 야수적 본능을 대리 충족한다.?아마도 현대의 축구경기는 그런 원시적 본능과 욕구를 대리 경험할 수 있는 데 가장 가깝지 않을까??그런데 이런 원시적 본능과 욕구를 발산할 기회를 주지 않는다면 어떨까??사회학적으로는 이런 에너지나 정념의 발산 장치를?‘안전도관’이라고 말한다.?이런 도관은 내부의 에너지를 외부로 배출하는 도관의 역할을 한다.

고대 그리스 사회는 이런 안전도관으로 디오니소스 축제를 활용했다.?니체는?『비극의 탄생』이란 작품에서 그리스 사회를 본적으로 두 가지 판이한 정신이 지배하고 있다고 본다.?이 작품은 니체가?28살에 써서 그의 천재성을 인정받기도 했지만,동시에 문헌학의 일반적 전통을 벗어나 비판을 받기도 했다.유명한 미학자 빈켈만은 그리스 정신을?‘아름다움의 정신’으로 간주한다.?아름다움은 무엇보다 수적 황금 비례에 기초한 통일성과 단순성의 미이다.?그에 따르면 그리스 사회는 이 아름답고 밝은?“아폴론적 정신”으로 대변된다.?그런데 니체는 빈켈만의 이런 일반화된 분류를 거부한 것이다.?그리스 사회는 밝은“아폴론적 정신”뿐만 아니라 어두운?“디오니소스적 정신”도 있다는 것이다.?빈켈만이 밝은 아름다움의 정신을 조형예술의 아름다움 속에서 보았다면,?니체는 어두운?“디오니소스적 정신”을 주로 비극의 축제에서 확인한다.?비극은 그리스 사회가 페르시아와의 전쟁을 거치면서 민주주의가 정착하고 경제가 발전하는 등 최전성기에 유행한 드라마이다.?그리스의 시민들은 이 비극 공연에 열광하면서 공동체의 유대를 확인하고 정서적인 카타르시스를 체험하기도 한다.?이런 비극축제는 중세의 카니발로 이어진다.?니체에 따르면 밝은?“아폴론적 정신”은“개체화의 원리”이고,?어두운?“디오니소스적 정신”은?“전체와 집단의 원리”이다.?전자는 조형예술의 아름다움 속에 구현되고,?후자는 비극이 공연되는 집단 축제(디오니소스 축제/중세의 카니발)에서 드러난다.?축구와 같은 운동경기나 혹은 대규모 집단 응원 행위도 이런 축제와 연관이 깊다.?니체는 디오니소스적 정신이 세 가지 장벽을 무너뜨린다고 한다.?즉 인간과 자연의 벽,?개체와 공동체의 벽,?의식과 무의식의 벽이 그것이다.?말하자면 디오니소스적 정신은 인간을 자연(무기물)으로 되돌리고,?개체를 공동체와 연결하고,?의식을 무의식의 세계로 환원하는 것이다.?그렇다면 원시적 본능의 발산과 집단 에너지를 하나로 묶는 월드컵 축구를 현대판 디오니소스적 축제라고 보아도 무방하지 않겠는가? 2002년 월드컵 당시 수만의 인파가 거리에서?‘대~한민국,?따단 따 딴단’을 외칠 때 보여주었던 집단 에너지의 일체감은 그리스의 디오니소스 축제나 로마의 콜로세움 경기를 능가할 정도이다.?이런 원시적 에너지의 발산은 신화의 세계와 연결될 터인데,?그 당시 동아시아의 오랜 전쟁의 신?‘치우 황제’가 마스코트로 등장한 것도 우연은 아닐 터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축구를 원시적이고 본능적인 운동으로 보거나 축구를 몸만으로 하는 경기라고 단순화하기에는 힘들다.?외형적으로 보기에는 발과 머리를 사용하고 있어 머리와는 상관이 없는 몸의 운동으로 보인다.?하지만 개인들의 기량을 쌓는 과정에서 발재간과 헤딩 기술은 몸에 기억된다.?몸은 의식이나 정신활동과는 차이가 있겠지만 그것 역시 두뇌의 활동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현대 뇌 과학에 따르면 몸이 두뇌의 활동이고,?두뇌는 몸을 기억한다.?뇌의 발달은 다른 육체기관과 별도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손이 기억을 하고 몸이 기억을 하는 것이다.?예를 들어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들은 복잡하고 현란한 기교를 요하기 때문에 전문 피아니스트라도 연주가 쉽지가 않다.?그는 훌륭한 연주를 위해 반복적인 훈련을 하지만,?그렇다고 악보 전체가 그대로 머릿속에 암기되는 것은 아니다.?설령 암기가 이루어진다 하더라도,?지휘자의 손동작과 오케스트라의 연주에 맞춰 정확히 어떤 순간에 어떤 건반을 터치하는 것은 암기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거의 무의식적인 동작이라고 할 수 있는 이런 터치는 기억하는 뇌의 독립적인 명령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말하자면 뛰어난 피아니스트는 반복적인 훈련을 통해 의식적으로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손으로 기억하며,?정교한 손동작이 이루어지는 만큼 뇌의 발달도 이루어지는 것이다.?기억은 손과 뇌,?그리고 환경이라는 특수한 맥락의 합작품인 것이다.?이런 사정은 축구에서 주로 사용하는 발재간과 헤딩 기술의 경우에도 동일하게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축구 선수는 오랜 반복 훈련에 따라 복잡하고 변화무쌍한 상황에서 대처하는 능력을 몸과 뇌에 각인시킨 것이다.

그러므로 축구를 본능적 활동과 에너지의 발산으로만 보는 것은 지나친 왜곡이 될 수 있을 것이다.?축구에서는 다른 모든 경기와 마찬가지로 전술을 이해하고 훈련하는 것이 중요하다.?이 과정은 두뇌 플레이가 많이 이루어지는 것 같지만 반드시 그런 것도 아니다.?반복적으로 훈련하면서 몸으로 익히는 것이기 때문이다.?토탈 사커를 지향하는 현대 축구에서는 고정된 포지션 속에서 주어진 역할만 수행할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다른 어떤 경기보다 상황에 따른 임기웅변의 역할이 필요한 복잡한 경기라고 할 수 있다.?게다가 축구는 심판의 엄격한 규칙과 지도하에 진행되는 경기이다.?전술을 훈련하는 과정에서는 무엇보다 다른 동료들과의 커뮤니케이션이 중요하다.?이런 커뮤니케이션은 단순한 인지과정만이 아니고,?규칙을 내면화하고 적응하고,?더 나아가서 그것을 응용하는 과정이다.?그것은 끊임없이 어떤 상황과 조건 속에서 타자와 소통하면서 몸으로 체득하는 고도의 훈련이라 할 수 있다.?더욱이 상업화된 프로 축구에서는 선수들은 다른 문화권과 언어권 출신의 다른 선수들과 소통하는 어려움도 필수적으로 겪게 된다.?이런 복잡한 커뮤니케이션의 과정은 몸으로 익힌 고도의 두뇌 활동을 요구한다.?때문에 이런 경험을 거친 뛰어난 선수들이 은퇴 후 해설 경기를 별다른 어려움 없이 맡는 것을 보면 그들의 지능이 일반인들을 상회한다고 말해도 틀린 것은 아니다.?이렇게 본다면 축구가 단순히 발재간과 헤딩기술을 활용한 원시적 운동이라는 말은 전혀 맞지 않는다고 하겠다.

오늘 날 현대 축구는 다른 어떤 경기들보다 대표적으로 상업화된 경기이다.?선수들의 몸값으로 천문학적인 돈이 오가고,?축구팀을 운영하기 위해서는 웬만큼 재정이 뒷받침되기 전까지는 엄두도 내기 힘들다.?스타 선수의 몸값은 웬만한 중견기업의 수익을 넘어설 정도이다.?지역 간 격차도 심해 리그별 수준 차는 무엇보다 경제력을 반영하고 있다.?세계축구협회(FIFA)가 유엔 못지않게 권력기관이 된 것은 이미 오래된 일이고, FIFA의 수장은 세계 정치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월드컵을 유치하는 과정은 올림픽 유치 못지않게 국가 간에 사활을 건 경쟁을 통해 이루어진다.?이렇게 보면 축구는 가장 자본의 영향을 받는 현대적인 운동 산업의 하나라 할 ??? 있다.?동시에 축구는 가장 원시적인 본능에 기초한 경기,?몸과 뇌 그리고 상황이 집적된 고도의 기억 메카니즘에 기초해 있고,?적과 아군으로 나누어진 변화무쌍한 상황 속에서 이루어지는 고도의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지는 게임이다.?그렇다면 축구는 원시와 현대,?본능과 이성,?몸과 정신,?자기와 타자,?선수와 관중 등이 종합적으로 집적된 경기라고 할 수 있지 않은가??가장 상업화되고 현대화된 경기 속에 여전히 감추어져 있는 가장 원시적 본능과 에너지로 인해 사람들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축구를 보기 위해 일상의 스캐쥴을 무시하고,?축구를 보면서 열광을 하고,?이 축구의 승패에 실의와 환희를 표현하는 것은 아닌가?

 

과거 역사를 현재 역사에 써 먹지 못한다면 역사책 덮어라!: 김 갑수가 쓴『전쟁과 운명』

과거 역사를 현재 역사에 써 먹지 못한다면 역사책 덮어라!:?김 갑수가 쓴『전쟁과 운명』

 

나태영(한철연 회원)

 

 

김갑수와 최장집

이명박 정권 초기에 전국 수만 명 대학교수가 시국선언을 했다.이명박 정권 비판하는 시국선언을 했다.?바로 이 순간 이명박 도우미가 나타났다.?최장집이 나타났다.?최장집이 말했다.

‘이명박 정부가 민주주의가 아니라고 말할 수 없다.’?

틀린 말은 아니다.?선거로 이명박이 대통령이 되었으니 말이다.?히틀러도 선거로 총통 자리에 올랐다.?최장집이 헛소리해도 최장집 비판하는 사람이 없었다.?그만큼 최장집 인맥과 학맥이 두텁다.?손호철,?정청래,?박상훈이 최장집 폐인이다.?김갑수 혼자서?<오마이뉴스>에서 최장집을 비판했다.

 

근대사를 통해 현대를 읽다.

김갑수는 백범 김구 선생을 존경한다.?인정한다.?다만 백범 김구 선생이 잘못한 것에 대해서는 비판한다.?한독당 김구가 한민당 이승만 생각을 받아들인 사실을 비판한다.?김구 선생이 친일파 청산을 먼저 하고 국가 건설했어야 했는데 국가 건설을 먼저 하고 친일파 청산하자는 이승만 꼬임에 넘어간 사실을 비판한다.?결국 이승만 의도대로 친일파 청산은 물거품이 되었다.?김구 한독당은 사라지는 비운을 당했다.?김구 선생도 암살당하는 비운을 당했다.?이런 사실을 꿰뚫고 있는 김갑수는 함부로 통합하는 것을 반대한다.?민주노동당이 국민참여당과 억지로 합치는 것을 반대했다.?김갑수 말대로 민주노동당이 국민참여당과 억지로 합치다가 좋지 않은 결과를 낳았다.?과거 역사를 오늘 우리 문제를 푸는데 사용할 줄 아는 김갑수 안목을 높이 살만한 부분이다.

김갑수는 통합보다는 한 세력이 강해지면 다른 세력이 강한 세력으로 빨려 들어오는 게 낫다고 말한다.?한독당 김구 선생 실패를 보고서 품은 생각이다.?나는 속 마음으로 김갑수 의견에 반대했다.?나는 진보당과 노동당이 합쳐져야 한다는 생각을 품었다.?까닭은 보통 사람들 눈에는 두 당이 똑같은 당이라는 것이다.?괜히 쪼개져서 보통 사람들이 볼 때 진보는 세력이 작으면서도 왜 쪼개지냐는 비난을 받기 때문이다.?조금 다르더라도 합쳐야 한다고 나는 주장했다.?그래서 진보정당 지지율을 높여야 된다고 생각했다.?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내 생각보다는 김갑수 생각이 더 옳고 현실적이라는 생각을 한다.?민주노동당(진보당)과 진보신당(노동당)이 쪼개질 때 앙금이 크다.?북조선 관련 사건이 터질 때 입장 차이가 생긴다.?특히 북조선 핵 문제가 생기면 입장 차이가 두드러진다.

그래도 노동당은 정의당 보다는 낫다.?국정원 내란음모 조작 사건이 터졌을 때 노동당은 정의당처럼 국정원이 원하는 대로 행동하지 않았다.?국정원을 비판하고 진보당 편을 들어줬다.?다행이다.?어쨌든 두 당이 서로를 비난하지 않고 상식적으로 비판적 지지 관계를 맺었으면 좋겠다.?두 진보정당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정책 경쟁을 하면 좋겠다.?너무 급하게 통합을 밀어붙이면 일을 그르칠 것이다.

‘8·15?직후 김준연은 한민당 간부가 되어 이승만의 단정수립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인사 중의 하나가 되었다.?그는 한민당의 선전부장이었다.?우리가 익히 알듯이 한민당은 친일지주와 친일 부역배들이 주축이 된 사이비 야당이었다.

같은 한민당 내에 장덕수라는 경쟁자가 있었다.?물론 장덕수는 화려한(?)?친일경력의 소유자였다.?하지만 장덕수는 미국 컬럼비아대학 정치학 박사로서 세속적인 실력 면에서 김준연보다 우월했다.?장덕수는 한민당의 요직인 정치부장과 외교부장을 겸직했다.?동시에 장덕수는 김구와 황해도 동향으로서 김구의 총애를 받았기 때문에 한민당과 한독당을 연결하는 가교 역할도 하고 있었다.’

‘내부의 정적 장덕수도 제거하고 단정수립에 반대하는 임정 주도의 한독당까지 와해시킨다면?’?김준연으로서는 이보다 더 좋은 일은 없었을 것이다.?그는 수도경찰청장 장택상을 만났다.?얼마 후 장덕수는 혜화동 자택에 카빈을 들고 찾아온 경찰에게 피살되었다.?김구가 미군정 재판정에 나가 미군 장교에게 모욕적인 심문을 받은 것은 장덕수 암살 배후 혐의를 받았기 때문이다.?이어 미군정 재판부는 한독당의 핵심인물인 김석황 조상항 손정수 등에게 사형을 언도했다.

이것은 한독당의 와해와 김구의 죽음,?그리고 친일청산 실패로 귀결되었다.?결국 단정수립에 반대하던 통일세력,?요즘으로 말하면?‘종북세력’인 한독당과 지도자 김구를 거세한 것은 미군정과 이승만이지만 그 앞잡이에 야당을 자임하던 김준연이 있었던 것이다.

김준연은 오늘의 누구와 닮았는가.?아니 오늘의 누가 김준연과 닮았는가.?최고학부,?독일유학,?운동권 장식 이력,?제1야당 출신,?반공단정세력,?미군정·독재정권을 배후로 하여 경쟁자와?‘종북정당’을 파괴한 이가 누구인가??공히 김준연 그리고 유시민이 아니었던가?’‘우리는?1950년대 진보당 파괴와 조봉암 법살의 역사를 알고 있다.?이것은 조봉암과 라이벌 관계에 있던 서상일계의 배신으로부터 비롯되었다.?서상일(1887~1962)은 언제나 조봉암에게 날카로운 경쟁의식을 느꼈고‘진보?1인자’를 향한 야심이 만만치 않았다.?보성전문 출신인 그는 사사건건 조봉암에게 시비를 걸었다.

당권 장악을 위한 서상일계의 쿠데타가 벌어진 것은?1956년 대선 이후였다.?대선에서 조봉암의 진보당이 민주당 세력과의 연대를 통해 수권정당으로 도약하자 미국과 이승만 집단은 진보당을 적출하려 들었다.?서상일은 여기에 앞잡이로 나섰다.?그는“조봉암의 주장은 너무 강하다(북에 가깝다)”고 하면서 진보의 혁신과 대중화를 표방, ‘혁신대동추진위원회’를 만들었다.’ ‘서상일과 그 추종자들은 내부 쿠데타에 실패하자,?곧’민주혁신당’?창당에 나선다.?그러나 민주혁신당은 조봉암이 지향했던?’피해대중의 구제‘에는 관심이 없었다.?아무튼 민주혁신당의 창당은 조봉암 등의 진보세력을 고립시켰고 진보정당의 명맥을 끊어놓는 역할을 담당했다.

조봉암은 체포되었다.?서상일과?‘혁신’?세력들은?‘진보당 사건’?피의자들에 대한 재판에서,?조봉암과 진보당 인사들에게 교묘하게 불리한 증언만을 내놓는다.?즉?“진보당은 좌경사회주의 정당이라 할 수 있다” “우리 민주혁신당은 사회민주주의를 표방하나 진보당에 비해선 우경화한 정당이다” “그들이 평화통일을 이룬 후 노동자,?농민들이 주도권을 잡도록 하기 위해 공산당과 합작 내지 같은 행동을 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미래의 일이므로 나는 모르겠다”등이었다.

민주혁신당은 오늘의 어느 정당과 닮아 있으며 서상일의 정체는 과연 무엇인가.?그의 배후에는 누가 있었는가.?서상일은 오늘의 누구와 닮았는가??아니 오늘의 누가 서상일과 닮았는가.?진보의 선두주자 조봉암도 제거하고?‘종북정당’?진보당도 와해시키는 데 앞잡이 역을 자임한 사람은 공히 서상일과 심상정이 아니던가?’‘민주혁신당은 오늘의 어느 정당과 닮아 있으며 서상일의 정체는 과연 무엇인가.?그의 배후에는 누가 있었는가.?서상일은 오늘의 누구와 닮았는가??아니 오늘의 누가 서상일과 닮았는가.?진보의 선두주자 조봉암도 제거하고?‘종북정당’?진보당도 와해시키는 데 앞잡이 역을 자임한 사람은 공히 서상일과 심상정이 아니던가?’?(김갑수, <주권방송>?페이스북 단상, 2013년?10월?16일)

김갑수는?『전쟁과 운명』?이 책에서 우리나라 근대사라는 거울에 오늘 우리를 비춘다.?누가 진국인지 도대체 누가 껍데기인지 보여준다.?진국은 통합진보당이다.?껍데기는 민주당이다.?정의당이다.?새누리당은 껍데기 메카이다.?껍데기 생산공장이다.?아니다.?작것이다.?철학자 윤구병이 말했다. ‘있어야 할 것이 있고 없어져야 할 것이 없어진 세상이 제대로 된 세상이다.’

껍데기는 더 있다. <오마이뉴스>에서 통합진보당과 이석기를 비난하는 인간들이 껍데기이다.?저들은 국정원이 만든 놀이터에서 열심히 논다.?국정원이 원하는 대로 논다.?국정원은 평범한 사람을 간첩으로 만들었다.?평범한 사람을 억지로 감옥에 가두었다.?국정원이 저지른 나쁜 짓이 이 땅 현대사를 도배질한다.?국정원이 조작해서 만든?‘짜깁기 녹취록’은 절대로 증거가 될 수 없다.?그런데도 그?‘짜깁기 녹취록’을 근거로 통합진보당과 이석기를 비난하는 인간들이 많다.

아직도 이해되지 않는 점이 있다. <오마이뉴스>는 진보언론이다.?그런 진보언론에서 증거가 되지도 않는?‘짜깁기 녹취록’을 근거로 터무니없는 연속 인터뷰 기사를?1면에 올렸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손호철은 스스로를 진보교수라고 말한다.최소한 손호철은 박사학위를 딴 사람이다.?책도 여러 권 쓴 사람이다.?그런 과정에서 많은 논쟁을 했을 것이다.?자주 자기 생각을 다듬었을 것이다.?그런 손호철이 증거가 되지도 않는?’짜깁기 녹취록’을 근거로 통합진보당과 이석기를 비난한다.?착잡한 상황이다.?배움이 무엇인지 물음표를 던지고 싶다.

결론부터 말한다.?통합진보당은 김구 한독당처럼 죽지 않는다.조봉암 진보당처럼 죽지 않는다.

1970년대, 1980년대 이 땅에서 행해졌던 일이 이미 일제 강점기 때 행해졌다.?박정희는 친일파이다.?이런 박정희를 존경하는50대 이상 분들이 너무도 많다.?그 분들께 이 책?『전쟁과 운명』과?『중경의 편지』,?『압록강을 넘어서』를 선물하고 싶다.

 

이재유 선생 한 번 찾아 뵙고 싶다.

그 당시에 이런 멋진 분이 계셨다니 기쁘다. ‘그는 이념보다는 민족의 생존권과 독립을 당면 과제로 삼았다.’는 부분과?’그는 조직원들을 지도 감독하는 것이 아니라 조직원들과 수평적 관계를 유지하면서 그들을 지원하는 투쟁 방식을 실천했다.’는 부분이 내게 많은 깨달음을 준다.?통합진보당과 노동당 사람들이 이 분한테서 많은 것을 배워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전쟁과 운명』을 읽고 외친다.

 

박근혜는 물러나라!?

『친일파는 살아있다』!
남한과 북조선은 단군 자손 국가이다!
발해와 신라가 싸운 전철을 밟지 말라!
주한미군 물러가라!
국가보안법 폐지하라!

한미서민패죽이기협정 폐기하라!

 

이반의 사랑 [가동(可洞)선생의 삶의 철학]

이반의 사랑 [가동(可洞)선생의 삶의 철학]

 

 

이종철(연세대학교 철학연구소)

 

 

살다 보면 바뀌는 것도 있고,?안 바뀌는 것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한국사회가 지난 한 세대 동안 너무 숨 가쁘게 달려 왔기 때문에 당연히 외형적인 변화는 말할 필요도 없다.?너무 다이나믹하다 보니 한?2-3년만 지나도 도시의 외관이 달라지고 도로가 달라지고 건물이 달라지는 경우가 숱하다.그러다 보니 그 도시에 사는 사람들의 생각이나 마음도 당연히 크게 바뀐 것 같다.?크게 달라진 것 중 하나가 동성애에 대한 태도이다.?종종 토론 주제로 동성애를 다루는 경우가 있는데,?의외로 학생들이 남녀 불문하고 동성애에 대해서는 대단히 관대하다는 것이다.?우리가 대학 다닐 때는 게이나 레즈비언이란 이름만 들어도 소름이 돋고 외계인 취급을 했던 것과는 천양지차다.내가 대학 시험에 합격을 하고 겨울에 고대 타임 반 동계 특강을 다닌 적이 있다.?이 타임 반은 상당히 유명해서 동계 강좌인데도 불구하고 참가자들이 많았던 것으로 기억했다. <타임>지를 선배들이 읽고 설명해주는 형태로 진행된다.?그런데 그 때 타임지 표지 모델로 여자?2명이 팔짱을 끼고 걷는 모습이 나온 적이 있다.?그 중의 한 여자는 가방을 들고 바지를 입고,?다른 여자는 선글라스를 끼고 스커트를 입은 것으로 기억된다.?타임즈 표지 모델이 레즈비언을 처음 화두로 올렸던 것이다. 1976년이니까 미국 사회에서도 동성애자들이 사회의 주목을 받던 초기였으리라.?그 때 강독을 이끌던 고 학번 선배가 이 중에 누가 여자 역할을 하고 누가 남자 역할을 하는가를 맞추어 보라고 주문하는 것이다.?그 당시 나는 그런 장면이 너무나 희한하고,?또 그런 것들이 논쟁거리가 된다는 것이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그럼에도 거진?40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기억을 하는 것을 보면 그만큼 그 장면이 인상적이었음을 반증한다.?그 뒤로 별로 그 문제를 생각하지 않았다.?그러다 박통이?10.26?사태로 죽고 나서 교회를 내 발로 찾아간 적이 있다.?지금도 인상적인데 그 교회의 남성 반주자가 피아노도 잘치고 얼굴도 이쁘장한 사람이었다.?신앙생활도 아주 잘해서 교회에서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인기가 많았던 사람이다.?그 사람이 당시 중 고등학교 남학생들을 여러 명 건드렸다는 소문이 돈 적이 있다.?혈기방장하던 시절이라 그 문제를 덮지 못하고 교회와 각을 세우다가 혼자 나온 경험이 있다.

그런데?90년대 중반 이른바?PC?통신이 한창 유행할 때였다.?알 만한 사람들은 알겠지만 그 당시 하이텔이나 나우누리 같은 통신망들의 대화 방은 밤만 되면 북적거리던 시절이다.?대화 방에 가면 숱하게 많은 남자와 여자들이 밤을 새워 밀담을 즐긴다.?입담 좋으면 여자 만나기도 쉬워 이른바 번개도 유행했던 것으로 안다.?그런데 어느 날?’이반’이라 이름붙인 대화 방에 들어가려니까 일반인지 이반인지 묻는 것이다.?그래서 나는 모 몇 학년 몇 반 정도로 생각해서 그냥 일반이라고 하니까 일반은 안 된다고 하면서 입장 불허하는 것이다.?하도 이상해서 나중에 다른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그곳은 동성애자들의 방이라고 한다.?일반은 일반인을 말하고,?이반은 그냥?2반이 아니라 일반을 일탈한?’이반’이라는 의미를 갖는다는 것이다.?그 사정을 알고는 그 방 근처만 가도 머리가 쭈뼛 서는 느낌을 받았다.?그만큼 당시의 우리 세대에게는 동성애는 여전히 낯선 코드이고,?그만큼 편견도 적지 않다.?이런 편견을 극복하는 데는 시간이 많이 지나서이다.?이 당시?e-Mail을 통한 소통과 연애는 톰 행크스와 맥 라이언의?’You’ve got a mail’에 잘 나타나 있고,?대화 방은 전도연이 주연한?’접속’처럼 아름다운 추억의 장소로 기억되고 있다.

그런데 동성애에 대한 호불호는 문화적 영향을 많이 받는 것 같다.?서구에서 유대 기독교의 영향을 받던 시기는 동성애에 대한 거부감이 크다.?가부장적이고 남성적인 중심적인 사회에서 동성애는 악마적이고 자연에 거슬리는 것으로 취급된다.?서구에서도 지금까지 가장 동성애에 대해 반대가 심한 곳은 기독교적 전통이 큰 곳에서이다.?기독교가 서구의 중심에 자리 잡기 전만 해도 동성애에 대해 대단히 관대한 문화가 유지되고 있었다.?특히 그리스 문화에서는 성인 남자가 어린 미소년과 사귀는 일종의 원조교제가 유행처럼 번지고 사회적으로도 인정을 받았다.?이런 문화는 철학적 정당성도 얻고 있었다.?남녀 간의 사랑은 육체를 매개로 하는 저급한 욕망에 기초해 있지만,?성인 남자와 미소년의 관계는 순수한 영혼의 교류라는 것이다.?그 만큼 더 사랑의 이데아에 가깝다는 이야기일 터인데,?일찍부터 이성이 가방 들고 감성의 욕망을 쫓아다녔다는 증좌일터이리라.?소크라테스의 주변에 늘 젊은이들이 함께 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다.?그 중에 한 사람이 나중에 그리스의 유명한 정치인이 되었던 알키비아데스이다.?그는 명문가 출신이고 용모도 수월하고 명민한 두뇌의 소유자이다.?그런 그가 소크라테스를 대단히 연모한 것이다.?한 번은 둘이서 해변 가에서 밤을 지새운 적이 있었다.?하지만 이 사랑은 짝사랑이다.?파도소리가 들리고,?별이 보석처럼 밤하늘을 장식한 해변 가에서 사랑하는 연인이 밤을 새운다고 상상해보라.?얼마나 가슴이 설레 이겠는가??알키비아데스도 그런 대단한 썸씽을 기대했을 것이다.?그런데 돌부처 같은 우리의 소크라테스는 동이 틀 때까지 우뚝 서서 꿈쩍도 안하고 동쪽 하늘만 바라다보았다고 한다.?그러니 이제 막 사랑에 눈뜬 젊은 알키비아데스의 실망이 말할 수 없이 컸다는 것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플라톤의?『향연』에 보면 그가 여러 사람들이 토론하는 곳에서 노골적으로 소크라테스에 대한 연정을 토로하는 장면들이 나온다.?그만큼 동성애가 일반화되어 있다고 할 것이다.

20세기의 가장 뛰어난 철학자의 한 사람인 비트겐슈타인이 동성애자라는 이야기도 낯선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이 집안사람들은 대단한 천재들이고 예술적 재능도 타고 났다.?오스트리아 철강 재벌인 탓에 그의 집에는 늘 당대의 뛰어난 재사와 예술가들이 북적거렸다.?하지만 그의 형제들 대부분은 비극적 운명으로 일찍 죽거나 자살을 하고 또 사고를 당하기도 했다.?클림트의 에로틱한 그림에는 그의 누이동생이 모델로도 나온다.?유명한?’볼레로,?왼손을 위한 피아노 협주곡’은 전쟁에서 오른 팔을 잃고 돌아온 그의 형인 피아니스트를 위해 작곡가 라벨이 헌정한 곡이다.?약관?21살에?1차 세계대전 당시 포로수용소에서 틈틈이 메모로 썼던?『논리-철학 논고』라는 책은?20세기 영미 분석철학의 성전 역할을 하기도 했다.?철학 도들의 입에서 끊임없이 회자되는 이 책의 명제 몇 가지. “언어는 세계의 그림이다.” “언어의 한계는 세계의 한계이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하라.”?거의 잠언 수준이다.?집안 내력 때문인지 비트겐슈타인은 평생을 독신으로 살면서 우울한 감정을 떨치지 못했다.?하지만 그가 캠브리지 대학의 강의를 마치고 집으로 오는 도중에 사창가가 있었는데 종종 그곳을 들렀다는 보고도 있는 것을 보면 동성애자라는 것은 확증된 사실만은 아닌 것 같다.?이 문제는 지금도 논란이 많다.?한 때 포스트모던 철학의 기수로 한국에서도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미셸 푸코도 동성애자이다.?그는 친 동성애자 운동,?소수자 차별 반대 운동을 주도하던 행동하는 철학자이기도 했다.?그는 예일 대 교환교수로 있을 때 종종 게이 바를 들렀는데 결국?1984년에?AIDS에 걸려 죽기도 했다.?그는 근대의 정신과 몸을 지배하는 지식과 권력 체계를 비판하는 일에 주력했다.?근대의 합리적 이성이 이성과 반이성을 나누고,?광기를 추방하고,?의학적 지식이 이런 지배의 도구 역할을 한다는 것을 고발했다.?감옥과 병원의 탄생,?그리고 학교의 탄생이 근대적 지식의 담론 속에서 동일한 출생지를 갖고 있다는 것을 밝히기도 했다.?미시 권력의 네트워크와 생산적 권력의 개념은 한국 사회를 분석하는 좋은 도구가 될 수 있다.『광기의 역사』,?『감옥의 탄생』,?『감옥의 탄생』등은 많이 읽히는 그의 주저들이다.

80년대 후반에 나온 영화?<필라델피아>는 동성애자에 대한 사회적 차별을 고발한 빼어난 법정 영화이다.?로펌의 잘나가는 변호사인 주인공 톰 행크스가 동성애자라는 것이 밝혀지자 업무 미숙을 이유로 부당 해고 당한다.?그 당시만 해도?AIDS?환자에 대한 무지와 불신이 커서 동료 변호사들도 그의 소송을 대리하려고 하지 않는다.?편견으로 주저하던 흑인 변호사 댄젤 워싱턴이 사건을 맡으면서 톰 행크스와 함께 로펌을 상대로 진행하는 법정 공방은 법과 정의가 무엇인가를 강렬하게 일깨워준다.?배심원 측이 회사 측의 부당 해고를 인정하면서 원고의 손을 들어주자 법원은 원고에 대한 피해배상 외에 우월적 지위를 남용하던 피고에 천문학적인 징벌적 손해 배상을 선고한다.?왜 한국의 법정에서는 이 징벌적 손해 배상 제도가 도입되지 않는가??이 영화를 보다 보면 동성애자를 감싸주는 가족들의 태도가 인상적이다.?한국의 가족에서 동성애자임을 커밍 아웃하면 여전히 맞아 죽을 일이고 쫓겨날 일이다.?사실 그들도 우리와 다르지 않은 사람이고,?다만 성적 기호만이 다를 뿐이다.?이러한 차이가 차별의 근거가 될 수 없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데 종종 우리들의 편견은 그것을 잊고 있다.?이 영화의 빼어난 장면 중의 하나가 최종 판결 전에 죽음을 예감한 톰 행크스가 변호사 워싱턴 앞에서 마리아 칼라스의?”La mamma morta”(어머니는 돌아가시고)를 들으면서 몸으로 연기하는 장면이다.?안 본 사람은 꼭 한 번은 볼 일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3b0p9mTJOJI?변호사가 동성애자 의뢰인에 진정 마음을 열고 공감하는 계기가 되는 아리아다.?동성애자들의 빼어난 예술적 취향을 보여주려는 뜻도 없지 않은 것 같다.

사랑의 종착역은 결혼이다.?사랑이 사랑으로만 끝나면 너무 무책임하지 않은가??모든 인륜지 대사의 기초는 사랑하는 사람끼리 가정을 이루는 일이다.?나는 굳이 남자와 여자라는 표현을 쓰지 않고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했다.?동성 결혼이 우리나라에서는 인정이 되지 않고 있고,?세계적으로도 네덜란드와 벨기에,?그리고 미국의 매서츄세츠 주 등 아직은 소수이다.?문화적으로 진보적이라고 생각되는 파리에서도 동성결혼을 반대하는 시위가 몇 달 전에 격렬하게 일어난 적이 있을 만큼 아직은 거부감도 크다.?하지만 동성결혼의 합법화를 인정하는 것은 세계적 추세이다.?멀지 않은 미래에는 우리 역시 이 추세를 거부하기 힘들지 모르겠다.?이미 영화감독 김조광수는 공개적으로 동성결혼을 선언한 적이 있다.?그렇다면 결혼을 남녀로 국한시키는 혼인법이나 가족법,?기타 이와 관련된 친족 상속법,?민법 등 많은 법 개정도 불가피할지 모르겠다.?미래의 가족은 우리가 그간 알아 왔던 형태와는 상당히 달라질 것이란 생각이 크다.?일단 결혼이란 이성간의 일이라는 것만이 아님을 받아들여야 될 때가 올 것이다.?이 부분은 문화적인 인정과 사회적인 합의가 있기 까지 진통도 클 것이다.?특히 기독교는 신의 섭리,?창조 질서 등을 앞세우면서 반대가 심할 것이다.?동성 간의 결혼을 인정할 때2세 생산도 과거와는 크게 다르게 이루어질 수 있다.?입양과 시험관 아기,정자와 난자의 기증 및 매매, 2중 대리모와 대리부 등 이성 간의 결혼에서 생각하기 힘든 방식이 일상화될 것이다.?무엇보다 자식에 대한 부모들의 과도한 집착과 교육에 대한 태도도 많이 달라질 것이다.?미래에는 교육과 관련한 한국사회의 고질적인 병폐가 동성결혼으로 인해 충격을 받을 수도 있다고 본다.?이러한 변화가 긍정적이 될지 아니면 부정적이 될지는 지금 예단하기는 힘들겠다.?덕분에 우리 시대는 죽을 때까지 새로운 변화를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위해 고민해야 할지 모르겠다.?무조건 귀를 닫으면 꼴통 보수요,?꼰대 소리를 듣지 않겠는가?

 

거짓 원인의 오류 [가동(可洞)선생의 삶의 철학]

거짓 원인의 오류 [가동(可洞)선생의 삶의 철학]

 

 

이종철(연세대학교 철학연구소)

 

 

학생들에게?Argumentation Theory를 가르치다 보면 논리학의?’오류론’을 한 번은 꼭 다룬다.?그런데 이 오류 론에는?’형식적 오류’와?’비형식적 오류’가 다 포함된다.?형식적 오류는 형식적 규칙을 위배했는가 여부를 판단하는 것이니까 그 규칙만 알면 비교적 판별하기가 쉽다.?마치 도로 교통에서 신호 위반이나 과속의 경우 규칙 위반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과 같다.?그런데 일상 언어에서는 형식이 아닌 내용과 관련해서 문제가 생기는 경우가 다반사다.?겉으로 보기에는 그럴듯한데 곰곰이 따져보면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다.?때로는 이 오류를 일정한 효과를 내기 위해 의도적으로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재판정에서 피의자가 눈물 흘리면서 동정심에 호소하는 경우가 전형적이다.?그가 한 행위와 그의 처지는 별개지만 눈물은 이 둘을 연결시켜줘서 정상참작에 도움이 되는 경우도 종종 있을 것이다.?소크라테스도?『변명』에 보면 이런?’연민에의 호소’를 한다. “친구여,?저도 사람입니다.?다른 사람과 똑같습니다.?저도 호머의 말처럼 목석으로 된 인간이 아니라 피와 살을 가진 인간이고,?식구도 있고,?아들도 셋 이예요.”?찔러도 피한방울 나올 것 같지 않은 소크라테스 조차 마누라와 자식새끼를 앞세우며 선처를 구하는 것이다.?김 시습의?’자지는 만지고,?보지는 조지라'(自知晩知 補知早知)는 표의문자와 표음문자로 혼용되는 우리 일상어의 애매성을 노린 위트 효과다.?서당에서 열심히 글을 읽는 아이들 모습이 기특해 큰 소리로 한 수 읊었더니 서당의 훈장 이하 아이들이 욕하는 줄 알고 달려들었다는 것이다.?사실은 김 시습 자신이 왔는데도 내다보지도 않는 모습에 부아가 나서 야유를 한 것이리라.?스스로 알려고 하면 늦게 알고,?도움을 받아 알려고 하면 일찍 안다는 말이다.?선거철만 되면 흑색선전이 난무하고,?온갖 비리들이 폭로되는 경우가 있다.?전형적인 물 타기 방식이요,?피장파장의 오류이다.?종종?’예수 믿으시오’?하면서 확성기로 떠들고 앞뒤로는?’불신지옥’?간판을 달고 다니는데 이는 흑백논리의 오류이다.?신이 이 아름다운 세계를 창조했는데 그들은 흑과 백이라는 두 가지 색깔로만 보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신의 창조물을 왜곡하는 저들이 오히려 불신하는 것은 아닐까??이런 단순화가 합당하지 못하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하지만 그 효과가 강력하기 때문에 종종 정치인들이나 대중을 선동하는 사람들이 쉽게 유혹을 뿌리치지 못한다.?때문에 이런 형태의 오류는 무조건 틀렸으니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만 말하기 어렵다.?그 중에 하나가?’거짓 원인의 오류’이다.

이 오류는 원인과 결과 사이의 관계가 필연성이 없음에도 마치 있는 것처럼 상정하는 오류다.?예전에 마당이 있던 시절 여름날 열심히 빨래를 해서 마당에 널었는데 소나기가 내린다고 생각해 보라.?또 그런 불편한 경험을 두 어 차례 반복해보라.?그러니까 나오는 엄마들의 소리가?’빨래만 하면 비가 온다’는 것이다.?여러분들은 세차를 할 때 그런 기분을 느끼지 않는가??세차만 하면 비가 온다고…사실 빨래를 널거나 세차를 하는 사건과 비가 온다는 사건 사이에 인과 관계가 없음에도 우리의 연상 속에서는 자연스럽게 연결된다.?개들만 조건 반사하는 것이 아니다.?전라도 사람이 어떻고,?경상도 사람이 어떻고 하는 것도 사실 그 사람 자체와 그의 출신 지역 사이에 필연적 인과관계가 없음에도 자연스럽게 편견으로 자리 잡고 있다.?중세의 마녀사냥이나 나치가 유대인을 희생양으로 삼은 것,?한국 정치에서 늘 반복이 되는 종북 놀이도 그 한 예이다.?과거 왕조시대에 여름 날 가뭄이 심하면 왕이 나서서 기우제를 지냈다.?자연재해와 인간의 도덕적 책임 간에 어떤 연관이 있다고 믿는가??동양의 전통적인 천인합일의 사상에서는 양자는 연결되어 있고 상호 조응한다고 본다.?이 형이상학적 가설을 장황하게 설명하고 은근슬쩍 학생들한테 이런 질문을 던진다. “기우제를 지내면 실제로 비가 올까요 안 올까요?”?학생들은 당연히 연관이 없다고 생각하지만 막상 질문을 받으면 당황 하면서 여러 가지 답변을 내놓는다. ‘안 옵니다.’?사실 이런 답변이 합리적이다.?그런데 배운 것이 죄라고,?어떤 학생은 기우제를 지내면 연기가 하늘로 많이 올라가 비가 내린다고 나름 과학적으로 답변하는 경우도 있다.?마른하늘에 그 한 조각구름이 무슨 큰 역할을 하겠는가??하지만 정답은 기우제를 지내면 비가 반드시 온다는 것이다.?왜 그럴까??비가 내릴 때까지 기우제를 지내니까…

일전에 송 강호,?김 혜수가 주연한?<관상>이라는 영화가 히트를 친 적이 있다.?병약한 문종이 관상쟁이를 통해 역모의 상을 미리 알아 단종의 보위를 지키려다 실패하는 이야기다.?수양의 상은 전형적으로 역모의 상이라고 한다.?역모는 당시 정치 상황을 꿰뚫고 있다면 충분히 예측 가능할 것이다.?관상쟁이의 판단은 다만 사람들에게 합리적 예측에 대해 신념과 확신을 불어넣어 주는 데 적격이다.?꿈보다 해몽이고 후행적 정당화에 가깝다고 할 것이다.?관상은 얼굴에 드러난 상을 통해 그 사람의 과거/현재/미래를 본다는 것인데 사실 가당찮은 이야기일까??드러난 상은 과거를 일정하게 반영할 수 있고,?그 과거를 통해 미래를 미루어 짐작은 할 수 있다.?그리고 이런 판단은 상당히 경험적이고 통계적이다.?게다가 오랜 숙련을 통해 통계예측의 정확도를 높일 수 있을 것이다.?과학적인 통계가 부족하던 시절의 경험적 통계학이다.?사람들을 많이 대하는 직업에서는 외양을 통해 그 사람을 판단하는 것이 어느 정도는 신뢰도가 있다.?나도 그렇게 판단하는 방법이 있다.?동양의?12지 이론을 가지고 사람들을 일정하게 그 유형에 포함시켜 판단하는 것이다.?예전에 노무현과 이회창이 대통령 선거로 대립할 때 다들 이 회창을 독수리 상이라고 했는데,?나는 쥐 상이다고 하고 노 무현 상이 호랑이 상이다고 어거지 부린 적이 있다.?사실 이런 포괄적 분류가 전혀 근거 없는 것은 아니다.?아무튼 이걸 가지고 학생들이 많이 떠들면?”?너희들 다 보인다.?미래가”?라고 엄포주면 서로 봐달라고 하면서 조용해진다.?학생들은 나의 합리적 이론보다는 그런 불합리하고 비합리적인 속설에 더 반응한다.?학자가 하는 애기보다 사주 봐주는 점쟁이 이야기를 더 귀담아 듣지 않는가??일종의 심리적 효과이고 플라세보 효과?(placebo effect)이다.?서양에서도?19세기 초에 이런 형태의 관상학과 골상학이 유행한 적이 있다.?용모와 안색,?얼굴에 드러난 특성 등을 통해 그 사람의 마음을 읽는다는 것이다.?외면이 내면을 반영한다는 생각이다.?특히 범죄인의 성향과 유형을 판단하는 데 골상학이 상당히 이용되기도 했다.?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사이비 과학으로 더는 과학의 반열을 유지하지 못하게 된다.?외면으로 드러난 특질,?뼈의 구조와 배치 등이 내면의 정신과 필연적 연관이 없다는 것이다.동양에서는 관상보다는 골상이요,?골상 보다는 심상이라고 겉으로 드러난 것보다 안에 감추어진 마음을 더 높이 사고 있다.?나는 아직도?”정신은 뼈다”라는 말의 의미를 묻고 있다.

현 정부 들어 크고 작은 사건이 빈발하고 있다.?그 중에서도 세월 호 사건은 너무도 큰 참사인데다 현재까지도 진행형의 사건이다.?얼마 전에는 내가 사는 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고양 터미널에서 화재가 나?7명이 죽고 수 십 명이 큰 부상을 당했다.?시민들이 일상으로 이용하는 시설에서 이런 사고가 벌어졌다는 것은 큰 충격이 될 수 있다.?전남 장성의 한 요양원에서는 화재가 놔 요양 노인들?21명이 불에 타고 연기에 질식돼서 죽는 사고도 났다.?그런데 이처럼 빈발하는 사고의 형태가 과거 김 영삼 대통령 시절을 연상케 하고 있다.?당시의 대형사고 몇 가지만 손꼽아도 서해 페리호 침몰사고(사망292명),?대구 지하철 가스 사고(98명 사명),?삼풍 백화점 붕괴 사고(사망500여명), KAL기 괌 추락사고(228명 사망),?성수대교 붕괴사고(32명 사망)이다.?하나 만으로도 엄청난 데 이런 대형 사고가 부지기수로 터지니까 국민들이 받는 체감 충격이 얼마나 컸겠는가??그러니까 영부인의 상이 곡상(哭象)이라 국민들의 눈물을 많이 뺀다는 말이 돌았다.?영부인의 얼굴을 자세히 보면 들어가고 나온 굴곡(屈谷)이 없지는 않다.?뒤의 곡(谷)을 앞의 곡(哭)으로 치환한 것이다.?어느 유명한 관상가의 말이라고 했다.?물리적인 사고와 대통령 영부인의 상간에 인과관계를 어떻게 찾을 수 있겠는가마는 관상가들의 그런 자다가 봉창 두들기는 소리가 대중들의 마음속에는 아무런 저항 없이 자리 잡기도 한다.?김 영삼 정부 말에 초유의?IMF?위기를 맞았으니 더 그 말의 울림이 더 크다.?전형적인?‘거짓 원인의 오류’이지만 국민들의 집단 연상의 메카니즘 속에서는 필연성이 있다는 믿음이다.?혹세무민은 바로 이런 틈을 파고든다. “어,?그러고 보니 박 근혜 상도 만만찮아.?눈물 꽤 짜내게 생겼네.?편안한 상이 아니여…”

 

미디어 오디세이는 미디어의 역사다 [보고듣고생각하기]

미디어 오디세이는 미디어의 역사다:?김동민이 쓴?『미디어 오디세이』

 

나태영(한철연 회원)

 

 

강준만과 김동민

강준만은 무림고수이다.?강준만은 실명비판 대명사이다.?강준만은 공정한 평가를 추구한다.?무림고수 강준만한테 뼈도 뭇 추린 인간들이 많다.?강준만은 비판만 하지 않는다.?칭찬도 한다.?강준만한테 칭찬 들을 정도인 사람은 지성인이다.?강준만은 이 책?『미디어 오디세이』를 쓴 김동민을 칭찬한다.?자신은 글만 쓰는 데 김동민은 글도 쓰고 실천도 한다고 칭찬한다.?강준만은 김동민을 부러워 한다.?강준만이 부러워 하는 김동민 사상을 차분하게 들여다 보자.

미디어 오디세이는 미디어의 역사다

이 책 내용을 두 문장으로 줄이면?‘미디어 오디세이는 미디어의 역사다.’(16쪽)?‘미디어의 역사는 역사 속의 미디어를 조망하는 것이어야 한다.’(17쪽)란 문장이다.?언론학자 김동민이 이 책에서 역사를 다루는 이유는 당연하다.?역사를 다루지 않고 언론사를 다룰 수 없다.?언론사를 다루지 않고 언론에 대해 말 할 수 없다는 게 김동민이 주장하는 말이다.?이 책은 우선 대학 언론학 교재로 쓰려고 만들었다고 김동민은 말한다.?이 책에서는 한국 대학,?특히 한국 언론학과가 지니고 있는 문제를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한국 언론학과가 지닌 문제를 해결해 보려는 뜻에서 김동민이 이 책을 썼다고 나는 생각한다.

‘내가 대학을 다닐 때는 한국 언론사도 배우고 세계 언론사도 배웠다.?그러나 세계 언론사는 언제부턴가 종적을 감췄고 한국 언론사만 남았다.?그마저도 가르치지 않는 대학도 있고,?언론사 전공자는 찾아보기 어렵다.?대학이 상업주의에 물들어 기업처럼 운영되는 현실에서 역사교육을 소홀히 하는 풍토가 언론학계에도 만연해 있다.?미디어가 인류 공동체 속에서 생성되고 인류사회를 변화시켜온 역사를 모르고 미디어를 공부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7쪽)

대학을 거부하는 학생이 있다.?김예슬이 대학을 거부했다.?다니던 대학을 그만 두었다.?그리고?『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 둔다,?아니 거부한다.』란 책을 썼다.?물론 대학 다니기를 거부하는 사람들 수는 극소수이다.?대한민국 사회에서 대학 나오지 않고 살아가기 힘들기 때문이다.?대학총장,?대학교수들,?대학생들 분발을 기대한다. ‘대학이 상업주의에 물들어 기업처럼 운영되는 현실’을 비판하는 김동민 말이 큰 울림을 준다.

한국언론사와 한국역사를 왜 공부해야 하는지 우리는 다음 글에서 알 수 있다.?이 땅에서 서재필이 과대평가 받았다.?우리는 서재필을 있는 그대로 평가할 필요가 있다.

‘미국인 신분의 서재필을 선택한 데서 오는 한계도 명백하다.’ ‘고종은 서재필에게’ ‘연봉으로?3천?5백환을 책정해주었다.?당시 소?1마리가?20원?40원이었으니 소?100마리 가격이 넘어 지금 가격으로?1마리에?2백 만원만 치더라도 연봉?24억 원이 된다.’ ‘나라가 어려워지자 남은 기간의 급여를 한꺼번에 받아 미국으로 돌아간 것만 보아도 그의 진정성을 의심할 만하다. <독립신문>의 한계는 창간주체의 한계인 동시에 서재필의 한계다.’ ‘서재필은 자신이 미국인임을 늘 강조했다.?제국주의 미국이 조선에서 이권을 강탈해가는 현실을 옹호하는 입장이었다.?심지어 미국이?1896년?3월 일본에?1백만 달러를 받고 이권을 팔아넘긴 경인철도 부설권,?평안북도 운산금광 채굴권(1896년?4월)의 강탈에 대해서도 환영하였다. “속마음을 의심할 필요가 없는 나라와 맺은 것이며 지금까지 어느 열강과 맺은 조약보다 유리한 계약”(The Independent, 1896. 4. 16.)이라는 것이다.’ ‘1898년 당시 그의 출국을 만류하는 독립협회 회원들에게 보낸 답장에는 조선 정부를?‘귀 정부’(貴 政府)라고 칭했다.(<독립신문>, 1898. 5. 5.).’(182, 183쪽)

김동민은 통섭형 학자이다

미디어 오디세이뒤풀이 자리에서 김동민이 자신은 맑스주의자라고 말했다.?그래서 그런지 이 책에서 칼 맑스 목소리가 언뜻 언뜻 들린다.?지금 정치학과 경제학이 쪼개졌다.?정치경제학으로 합쳐질 필요가 있다.?이 땅에서 경제문제는 중요하다.?하지만 경제정책을 만드는 곳은 국회이다.?경제전문가와 정치가는 대화를 많이 해야 한다.?일반인들도 정치뿐만 아니라 경제 공부도 열심히 해야 한다.

‘오늘날의 미디어의 진화와 자본주의의 등장 및 전개와 긴밀한 관련을 맺기 때문에 정치경제학의 관점은 필수적이다.’(6쪽)

‘자본주의를 사는 우리는 자본주의의 생산관계를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언론학의 입장에서는 연구대상인 언론매체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작동하기 때문에 그 원리를 이해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자본주의 사회의 원리를 배제한 상태에서 미디어와 커뮤니케이션 현상만을 관찰해서는 그마저도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역사연구도 예외일 수 없다.?매스미디어 시대를 연 신문만 하더라도 그것은 상품으로 존재하며,?그 내용은 상품성을 추구한다.상품으로서의 신문을 규명하는 것이 기본이다.?마르크스는 상품을 세포에 비유했다.’(135쪽)

‘세포가 단백질로 구성되어 있듯이 상품은 자연의 물질로 구성된다.?자연에서 얻은 재료 및 노동도구 등(생산수단)을 확보한 자본과 인간 노동력의 지출(노동)이 결합하여 상품이 된다.?그래서 상품의 핵은 상품에 체화된 노동이다.?상품은 자연에서 얻은 물질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핵은 노동이라는 것이다.’(136쪽)

김동민은 언론학,?역사학,?철학,?정치경제학 고수이다.?아이엠에프(외환위기)?사태에 대해서 핵심체크 해주는 김동민 내공 대단하다.

‘외환위기 가운데 김대중 정부가 탄생했다.?김대중 정부는?IMF의 요구대로 거시경제 안정화 정책,?강력한 긴축정책,?금리의 대폭 인상, “외국인투자 촉진법”?제정 등을 시행에 옮겼다.?그러나 실물경제가 침체되면서 금리를 인하하자 주식투자로 돈이 몰렸다.?정부는 거시경제 안정화 정책 차원에서 구조조정을 실시했다.?금융산업 구조조정으로 규제철폐,?외국인 투자한도 폐지,?부동산 시장 전면 개방,?모든?M&A(인수합병)?허용,?외환거래 자유화 조치,?기업 구조조정으로 기업경영의 투명성 제고,?선진국 수준의 재무구조 추진,?핵심업종 중심의 강한 기업 유도,?계열회사 간 빚보증 관행 불식,책임경영,?노동시장 구조조정으로 정리해고제,?근로자파견제,?노사정위원회,?공공부문 구조조정으로 공기업 민영화 등이 추진되었다.?이로 인해?KT가 정부기구로부터 독립하여 민영화되었고, SK텔레콤,?포스코,?삼성전자 등 기업의 외국인 지분율이 상승했다.’(298쪽)

‘모든 신흥공업국의 은행들이 위기를 맞을지도 모른다.?이러한 불안이 심화되면 일본의 은행들도 위기를 맞을 가능성이 있다.?이렇게 될 경우 금융체계에 미치는 결과는 매우 심각할 것이다.?각국의 중앙은행들은 우애를 발휘하여 은행 간 자금시장에서 커다란 문제들(한국의 금융위기로부터 비롯되어 파급되는)이 일어나는 사태를 방지하는 데 시급히 만전을 기해야 한다.그러나?<조선일보>는?8월?21일자?“불안하지만 위기상황 아니다”라는 사설에서?“외환시장이 살얼음판을 걷고 있으나?‘외환위기’라는 표현을 써야 할 만큼 심각한 조짐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고 보도했다. <조선일보>는 다음날에도?1면 머리기사로?“한국 성장률 높아진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올렸다.’(297쪽)

조선일보는 아이엠에프 사태 예측을 제대로 못했다.?오히려 예측하지 못하도록 사실을 왜곡했다.?그런 조선일보가 반성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여전히 조선일보는 사실 왜곡하는 짓을 계속하고 있다.?조선일보는 친일파 신문이다.?친미파 신문이다. 1프로 종 역할 하는 신문이다. 1프로한테서 광고 받으려고 안달하는 신문이다.?조선일보는 다뤄야 할 것은 다루지 않는다.?부산 한진중공업으로 김진숙 만나러 가는 희망버스 다루지 않았다.?아니다.?조선일보는 신문이 아니다.?조선일보는 수구 언론기관일 뿐이다.?조선일보가 끄트머리 언론기관이 되어야 한다.?김동민은 조선일보 안 보기 운동을 현장에서 실천한 실천가이다.?이 책이 널리 읽혀 조선일보가 끄트머리 언론기관이 되길 기도한다.

이 책은 미디어 역사를 다룬다.?동서양 역사를 다룬다.?동서양 철학을 다룬다.?한국근현대사를 다룬다.?다루는 내용이 다양하다.?내용이 실하다.?이 책 한 권을 다 이해한다면 대단한 실력 소유자가 될 것이다.?그렇다고 해서 이 책이 어렵지만은 않다.?대체로 글이 쉽다.?동서양 철학 다루는 부분과 칼 맑스 철학 다루는 부분이 일반인이 보기에 조금 어려울 뿐이다.?이 세상 언론문제에 울분을 토하는 사람들이 읽기에 맞춤한 책이다.?지적 욕구가 높은 사람들이 읽기에 맞춤한 책이다.?여럿이 모여서 함께 읽고 토론하기에 맞춤한 책이다.?대학 언론학과 교재로 맞춤한 책이다.?벌써 세 대학에서 이 책을 대학교재로 쓰고 있다.(2014년 현재)

 

한철연 맑스분과 MT-파주이야기[지미갤러리]

한철연 맑스분과 MT-파주이야기[지미갤러리]

 

글/사진 윤지미(한철연 회원)

 

맑스분과가 4월 11일부터 1박 2일 동안 MT를 다녀왔다.

한철연에서는 각 분과의 엠티비를 1년에 두 번에 한하여 일정액을 지원하고 있다. 단 참여인원이 7인 이상일 경우이다.

공식적인 엠티 기간은 11일부터 1박 2일이었지만 10일 밤 9시 30분, 선발대가 충남 서산의 삼길포항으로 출발했다.

낚시터의 좋은 자리를 일찍부터 선점하기 위해서였다.

금요일인 11일 오후 1시 MT 참여를 밝힌 맑스분과원과 그 가족들이 모두 합류하여,

충남 서산 삼길포 바다에서 낚시를 하고 근처 왜목마을 바닷가에서 휴식을 취했다.

아직도 이원혁 분과원이 끓여준 도다리 매운탕 맛을 잊을 수가 없다.

도다리를 낚아 올린 이는 조배준 분과원이었고,

그 도다리를 요리하기 좋게 손질한 사람은 김종곤 분과원이었다.

박영균 분과원은 작은 물고기에 속한다며 놓아주자고 낮은 소리로 거듭 외쳤지만, 그의 호소는 우리의 귓전에서 사라졌다.

새벽부터 오후 5시까지 벌벌 떨며 겨우 잡은 고기였기 때문이다.

7개의 낚싯대로 잡은 수확량은 작은 도다리 세 마리.

낚시터 관계자의 말에 따르면 수온이 낮아 물고기들이 움직이지 않는 날이라고 한다.

결국, 우리도 움직이지 않기로 했다.

낚싯대를 걸쳐만 놓은 채, 바닷가의 추위를 견디기 위해 술잔만을 비웠다.

 

▲삼길포항

▲삼길포항

▲왜목마을 바닷가

▲왜목마을 바닷가

▲맑스분과 MT

▲맑스분과 MT

▲분과장과 분과원들

▲분과장과 분과원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