섦 [별과 달과 바람의 노래]-16

거짓과 환상

김설미향(그림책 작가)

매일매일 착각은
거짓된 진실이라는 거울과 마주하고

내 안에 담는 그릇은
휘어진 굴곡과 같이 왜곡된 진실을 담아
거짓된 상상은 하늘을 날아오르고

허영의 물체를 붙잡는 작은 문으로
광할한 허공에 흰 구름의 환상이
별빛처럼 쏟아진다.

작은 문틈 문틈 사이로
커다란 환상, 자그마한 환상이
발맞추어 날아오를 준비를 하고 있다.

2016-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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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대와철학2016-5-25 거짓과 환상 copy

영화 <아이, 로봇>과 인공지능의 미래 그리고 인간-1 [톡,톡,씨네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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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 : 나무위키

 

* 영화<아이, 로봇>(2004, 알렉스 프로야스 감독)의 줄거리

– 아이작 아시모프의 로봇 3원칙

법칙 1. 로봇은 인간을 다치게 해선 안 되며, 행동하지 않음으로써 인간이 다치도록 방관해서도 안 된다.

(Law I – A Robet May Not Injure A Human Being Or, Through Inaction, Allow A Human Being To Come To Harm)

법칙 2. 법칙 1에 위배되지 않는 한, 로봇은 인간의 명령에 복종해야만 한다.

(Law II – A Robot Must Obey Orders Given It By Human Beings Except Where Such Orders Would Conflict With The First Law)

법칙 3. 법칙 1, 2에 위배되지 않는 한 로봇은 스스로를 보호해야만 한다.

(Law III – A Robot Must Protect Its Own Existence As Long As Such Protection Does Not Conflict With The First Or Second Law).

근 미래인 2035년, 인간은 지능을 갖춘 로봇에게 생활의 모든 편의를 제공받으며 편리하게 살아가게 된다. 인간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하는 ‘로봇 3원칙’이 내장된 로봇은 인간을 위해 요리하고, 아이들을 돌보며 인간에게 없어서는 안될 신뢰 받는 동반자로 여겨진다.

NS-4에 이어 더 높은 지능과 많은 기능을 가진 로봇 NS-5의 출시를 하루 앞둔 어느 날, NS-5의 창시자인 래닝 박사가 미스터리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그의 죽음을 둘러싼 수많은 추측이 난무한 가운데, 시카고 경찰 델 스프너(윌 스미스)는 자살이 아니라는데 확신을 갖고 사건 조사에 착수한다. 끔찍한 사고 이후로 로봇에 대한 적대감을 갖고 있던 그는 이 사건 역시 로봇과 관련이 있다고 믿고 이 뒤에 숨은 음모를 파헤치려고 한다.

로봇 심리학자인 수잔 캘빈 박사(브리짓 모나한)의 도움으로 로봇 “써니”를 조사하기 시작한 스프너 형사는 로봇에 의한 범죄의 가능성을 확신하게 된다. 하지만 래닝 박사의 죽음은 자살로 종결 지어지고, 은밀하게 사건을 추적해 들어가던 스프너는 급기야 로봇들로부터 공격을 받게 되는데…

(출처 : 네이버 영화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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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 : 나무위키

 

1. 인공지능 알파고와 이세돌

사실 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ce, AI)은 생각보다 훨씬 일찍 우리 삶에 가까이 있었다. 인간이 명령을 하면 명령하는 것만 계산해서 토해내는 것이 단순 프로그램의 세계라면 인공지능은 그 과정에 자체 판단력이 들어간 컴퓨터 프로그램이다. 무엇이 우리 주변의 인공지능 시스템일까? 가장 단순한 가전제품이 바로 세탁기이다. 대부분의 세탁기는 일일이 물높이를 지정해주지 않아도 전원을 누르고 원하는 세탁코스를 선택하면 세탁기가 무게를 감지해 스스로 물높이를 맞춘다. 이런 원시적인 인공지능과 비슷하지만 한 단계 발전한 가전제품이 로봇청소기이다. 기존의 청소기는 인간이 방향을 맞춰 흡입구를 갖다 대면 먼지를 빨아들이는 시스템인데 로봇청소기는 센서를 통해 장애물을 인식해서 스스로 방향을 틀어 방 구석구석의 먼지를 흡입하고 돌아다니다 정해진 시간이 다 되면 스스로 충전기를 찾아가 접속한다. 여기에 상상력을 좀더 발휘한다면 가정부 일을 도맡아 알아서 척척하는 로봇 정도는 쉽게 머릿속에 그려진다. 하지만 아직 인공지능 가정부 로봇은 <아이, 로봇>(2004, 알렉스 프로야스)이나 <바이센테니얼 맨>(1999, 크리스 콜럼버스)에서나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모르는 사이 인공지능은 인간의 학습능력과 추론능력, 지각능력, 자연언어의 이해능력 등을 엄청나게 학습하고 인간에게 말을 건네고 있다.

2016년 3월 9일에서 15일까지 서울에서 벌어진 구글 딥마인드(Google DeepMind)의 바둑프로그램 알파고(AlphaGo)와 프로바둑기사 이세돌 9단의 대결은 ‘세기의’ 대결로서 전세계의 관심을 받았다. 컴퓨터 프로그램과 인간의 대결이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다. 이미 1990년 초반 퍼스널 컴퓨터(PC)의 대량보급으로 우리는 수많은 PC게임을 즐겼고 여전히 즐기고 있다. 오락실에 가야만 게임을 하던 시대에서 벗어나 손에 동전을 쥐지 않고도 게임을 하는 즐거움이란 요즘말로 꿀잼이었다. 밤새 몇 백 판의 게임을 해도 내가 지불하는 것은 전기세 정도로 거의 제로에 가까웠다. 그런데 왜 새삼스럽게 예전부터 있던 바둑프로그램과 프로바둑기사의 대결에 그리도 관심을 많이 가졌을까. 까짓 컴퓨터게임이야 질리면 컴퓨터의 전원만 꺼버리면 그만인 것을 말이다.

문제는 알파고가 기존의 컴퓨터 게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발전한 인공지능 시스템의 프로그램이라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사람들이 주목했던 것은 순간의 판단과 상상력이 동원되어야 하는 고도로 복잡한 인간의 세계를 알파고가 학습해 인간의 영역을 넘볼 수도 있겠다 싶은 데에 있는 것이다.

이미 유럽에서 2015년 10월 프로바둑 2단의 판후이와의 대결에서 알파고는 완승을 거둔 상황이었다. 최근까지 바둑은 컴퓨터에게 너무 어렵고 복잡한 세계였다. 그런데 알파고라는 인공지능이 그 복잡한 바둑의 세계를 정복할 가능성을 보인 것이다. 바둑이라는 것 자체가 인간의 역사 혹은 인간지능의 역사와 함께 해온 고도로 복잡한 게임이다. 바둑이 정확하게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으나 《박물지(博物誌)》에 ‘요(堯)나라 임금이 바둑을 만들어 아들 단주(丹朱)를 가르쳤다’, 또 말하기를 ‘순(舜)나라 임금이 아들 상균(商均)의 어리석음을 깨치기 위하여 바둑을 가르쳤다’, 또 ‘그 법이 지혜 있는 자가 아니면 잘 할 수가 없다’고 하였고,《논어(論語)》에 공자가 이르기를 ‘바둑 두는 것이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보다 어진 일이다(以奕爲爲之猶賢乎己)’라고 한 것으로 보아 고대 중국에서는 많이 보급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바둑의 시작이 요순시대라면 4천 년 이상 된 것이고 공자시대 역시 기원전 5~6세기이니 최소로 잡아도 2천 5백년 이상은 된 게임인 셈이다.

게다가 바둑은 서양의 체스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그 경우의 수가 엄청나다. 체스는 64칸 안에서 6종류의 말을 정해진 경로를 따라 움직이는데 특정한 위치에서 가능한 움직임이 약 12개이다. 그에 비해 361곳을 무작위로 둘 수 있는 바둑은 특정한 위치에서 가능한 움직임이 약 200개에 달한다. 체스의 경우 한 경기를 둘 때 고려해야 하는 경우의 수는 보통 10의 120승으로 계산된다. 하지만 바둑에 대한 경우의 수는 아직 명확하지 않다. 일반적으로 바둑 경기의 경우의 수가 10의 170제곱이라고 하지만 구글은 바둑에 대한 경우의 수가 250의 150승이라 했고, 혹자는 10의 360승이라고도 한다. 어떤 경우든 우주 전체의 원자 숫자보다 더 많은 조합과 배열이 가능하다는 의미가 된다.

그러니까 알파고가 이세돌과의 경기를 깨끗하게 이기지 못한 이유는 10의 170제곱 이상의 경우의 수를 아직 다 학습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대국을 할 때마다 상대방의 공격에 적절하게 대응하는 위기 대응 능력이 완벽하지 않다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알파고가 모든 경우의 수를 꿰뚫는 것은 시간문제일 것이다. 어쩌면 알파고를 이기기 위해서 머리 싸매고 대국을 연구하는 것 자체가 쓸데 없는 일일지도 모른다. 알파고는 시간이 지나도 지치지 않고 심리적으로 흔들리지도 않으니 말이다.

사진출처 : SBS 뉴스

사진출처 : SBS 뉴스

 

2. 알파고, 인공지능의 미래가 궁금하다

사람들의 관심은 알파고가 미래 진화한 인공지능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상징이라는 데에 있다. 그런데 그 인공지능의 가능성 중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지점은 ‘과연 인공지능이 인간의 영역을 어디까지 넘어올 것인가’에 있지 않을까 한다. 이 질문 속에는 여러 가지 복잡한 셈이 숨어 있다. 그 첫 번째는 인공지능이라도 그것은 기계인데 인간을 넘어서기는 어렵지 않겠느냐이고 둘째는 인공지능이 인간의 능력을 넘어섰을 때 인간의 입지가 대폭 줄어들지 않겠느냐이다. 마지막으로는 질문을 하는 인간도 설마하며 말하겠지만 인공지능이 인간을 지배하는 시대가 오는 것이 가능하겠느냐이다.

일단 알파고와 인간의 대결에서 사람들이 궁금해할만한 것들 세 가지 중에 첫 번째 것은 지금까지의 인공지능 발전수준이라면 고민 없이 답을 내도 좋을 것이다. 알파고가 비록 지금은 인간 이세돌에게 1패를 했지만 하루에도 수천 대국을 학습하고 있는 이상 어떤 인간바둑기사도 알파고를 이길 수는 없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두 번째 궁금한 것으로 설정한 ‘인공지능이 인간의 능력을 넘어섰을 때 인간의 입지가 대폭 줄어들지 않겠느냐’는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이미 언론에는 인공지능이 대체할 인간의 직업군에 대해 호들갑스럽게 떠들고 있다. UN이 내놓은 ‘미래직업보고서’는 2030년까지 20억 개의 일자리가 소멸하고 현존하는 80%가 사라진다고 하였다. 맥킨지 연구소가 일자리를 소멸시킬 신기술로 꼽은 것들은 ‘사물인터넷, 클라우드, 첨단로봇, 무인자동차, 차세대 유전자 지도, 3D프린터, 자원탐사 신기술, 신재생 에너지, 나노기술’ 등이다. 이 신기술들은 직간접적으로 모두 인공지능에 선을 대고 있다. 마이크로소프트의 창업자 빌게이츠는 “인공지능은 미래 인류에게 위협이 될 수 있다”고 말한 바 있고 영국의 물리학자 스티븐호킹 박사는 “인공지능의 완전한 발전은 인류의 종말을 불러올 수 있다”는 발언까지 한 상황이다.

2016년 1월 다보스포럼(세계경제포럼 연차총회)의 주제는 <로봇과 인공지능이 일으킬 ‘제4차 산업혁명’>이었다. 18세기 증기기관의 발명으로 근대화의 촉매가 된 1차 산업혁명, 19세기 전기, 화학 기술의 발전으로 대량생산이 가능해진 2차 산업혁명, 20세기 컴퓨터와 인터넷이 이끈 정보화 물결의 3차 산업혁명, 그리고 4차 산업혁명이 온다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산업혁명은 인간의 일자리를 기계에게 내주는 과정을 반복했다. 기술의 발전과 산업혁명 그리고 인간의 일자리 축소는 함께 해왔다. 분명 인공지능의 발전은 인간의 일자리를 빼앗아 갈 것이다. 자본은 다루기 어려운 인간을 통해 이윤을 얻기보다 다루기 쉬운 기계를 통해 이윤을 얻는 편이 훨씬 수월하다는 것을 역사적으로 학습했으니 말이다.

일자리를 인공지능에게 내주는 문제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 고유의 영역이라고 할 수 있는 예술창작의 영역마저 점차 인공지능에게 내주고 있다고 볼만한 현실이 눈앞에 있다. 영화 <아이, 로봇>에서 형사 스푸너는 NS-5, 즉 살인로봇으로 지목되어 체포된 써니에게 박사를 왜 죽였냐고 심문하지만 써니는 자신은 절대 죽이지 않았다고 분노하며 테이블을 내려친다. 분노는 인간의 감정이지 로봇의 영역이 아니다. 스푸너는 써니에게 분노를 흉내내는 것 뿐이라고 하며 로봇이 인간이 될 수 없는 증거로 인간 고유의 영역인 작곡, 명화 등을 만들어낼 수 없지 않느냐고 반문한다. 그 때 써니가 스푸너에게 한 질문은 “당신은 할 수 있어?”다. 자기도 할 수 없지만 보통인간인 형사도 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다. 다시 말해 예술창작의 영역도 인간과 로봇(인공지능)을 가르는 기준은 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최근 실재로 작곡 프로그램이 개발되어 놀라운 작곡실력을 보여주는가 하면 회화에서도 주목받는 작품들을 만들어내고 있다. 인간 예술가는 자신의 고유 영역 이외의 정보나 자료는 얻기 어렵다. 그러나 인공지능은 최고의 작곡가들의 작품을 모두 입력할 수 있고 그것을 일정한 알고리즘으로 재창작할 수 있다. 천재작곡가를 뛰어넘는 인공지능의 출현은 시간문제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마지막 남은 문제는 인공지능이 과연 인간을 지배할 수 있을까라는 다소 황당한 질문이다. 하지만 황당하다고 모른척 하기에는 찜찜한 구석이 너무나 많다. 인간은 스스로 만든 시스템에 지배당하는 아주 오래된 속성을 가지고 있다. 게다가 그 시스템이 어느 순간 스스로 진화해 인격 비슷한 것을 갖출 경우 인간이 아무리 온오프(ON OFF) 버튼을 쥐고 있다고 하더라도 이미 그것은 무용지물이 될 가능성이 매우 높을지도 모른다는 불안한 예감은 많은 SF 영화들에 짙게 깔려있다. 합리성을 대변하는 기계문명이 비합리성 투성이인 인간 세계를 리셋(reset)하려고 할 것이라는 예상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터미네이터> 시리즈에서 주요 악역으로 등장하는 가상의 인공 의식인 스카이넷(skynet)은 설정 자체가 인격화된 최첨단 인공지능이 인간을 말살하고 지구를 차지하려는 ‘야욕’ 때문에 벌어지는 사건들이다. 그러나 <아이, 로봇>의 첨단 인공지능 비키(VIKI)는 인간이 너무나도 비합리적으로 환경을 파괴하고 스스로를 파괴하는 시스템으로 살아가는 상황을 ‘교정’하기 위해 반란을 일으킨다. 오히려 <아이, 로봇>쪽의 인공지능이 사실 더 그럴듯한 인공지능의 미래가 아닐까. 세상을 독차지하려는 ‘야욕’ 역시 인간을 닮긴 했지만 기계문명의 생명은 합리성이므로 사실 <터미네이터>식의 스카이넷은 SF 영화의 재미 수준에 머물 수밖에 없다. 스카이넷은 마치 세상을 집어삼키려는 히틀러가 전쟁을 일으키는 것과 같은 모습을 한 가짜 인간일뿐이다.

이제 우리의 미래에 예상 가능한 최첨단 인공지능은 <아이, 로봇>의 비키(VIKI)이다. 비합리적으로 살아가는 인간을 합리적인 인공지능이 그냥 봐주지 않을지도 모른다. 최대한의 생산성을 지향하기 위해서 노동자를 쥐어짜왔던 자본의 역사처럼 인공지능 역시 생산성을 추구할 가능성이 많아 보인다. 역사적으로 서양의 근대를 이끌어온 합리성은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기계 시스템으로 최대한의 생산성을 내왔다. 그러나 인간은 본래부터 비합리적인 존재이다. 아무런 생산성을 가져오지 못할 것이 뻔한데도 빈둥거리고 그림그리고 음악을 듣는다. 심지어 거짓말을 밥먹듯이 하고 시간을 죽이기도 한다. 그런데 그게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특권이 아니겠는가. 인간은 비합리적으로 살면서 인간다움을 이루어왔다. 인공지능이 만약 거기까지 학습할 수 있다면 인공지능 역시 빈둥거리고 싶어하지 않을까. 알파고가 하루에도 수천 대국을 학습하고 있지만 스스로 딱 멈추는 경지까지 간다면, 그 때 알파고는 인간과 동등한 대우를 받아도 좋을 것이다.

강지은(전 웹진편집주간, 건국대 강사)

다음편에 계속…

섦[별과 달과 바람의 노래] -15

우주선

김설미향(그림책 작가)

 

아무 의미없는 것이 의미가 있을 때가 있고
의미있는 것이 의미 없을 때가 있고
비어 있는 것을 채워야 할 때가 있고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것이 있다.
모르는 것을 알고 싶어 할 때가 있고
알고 있어도 보이지 않을 때가 있고
보여도 보지 못할 때가 있다.
보고 있지만 보이지 않는 것을 믿을 때가 있고
믿고 싶은대로 볼 때가 있고
보이지 않는 것을 볼 때가 있고
보고 있지만 보고 싶은 것만 볼 때가 있다.
열려 있으면서 닫혀 있기도 하고
닫혀 있으면서 열리기도 하는
무한대로 영원할 것처럼 영원하지 않다.

2016-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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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대와철학2016-4-25 우주선 copy

 

작가 노트

눈은 어쩌면 오감 중에 가장 빠르고 민감하게 반응하는 감각기관일 것입니다.
익숙하지 않은 현상에 대해 문을 금방 닫기도 하고 열기도 합니다.
우리의 눈은 낯설음에 대해 이해의 속도가 더뎌질 때 조금 더 빠르게 정보를 인식하기 위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정보의 체계를 어떤 틀에 끼워 맞춰 그 현상을 이해하고 분석하는 것을 볼 때
자동기술법처럼, 의식하지 못하는 무의식의 세계를 기록하듯이 무의식적 지각을 통해 감각을 이해하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시각적인 정보를 받아들이는데 느끼는 감각은 수많은 사건과 경험의 반복적인 습관을 통해
정보를 이해하는 속도와 양적 수도 달라질 것입니다.
그림을 말로 설명하는 것, 사진을 글로 표현하는 것, 시를 말로 글로 표현하는 것은 어려운 일 입니다.
시각화한 사물을 읽는다는 것은 낯설고 어려움으로 다가오기도 하지만 시각적으로 익숙한 것은
낯설음에서 익숙함의 반복된 학습의 과정을 통해 정보 인식의 확장이 가능해져 곧 익숙함에 이른 것이라고 봅니다.

관객은 때로는 경험하지 못한 시각적 단편들과 때로는 익숙한 단편들을 통해 새로운 경험을 할 것이며
타인의 낯선 세계의 정보를 받아들임으로써 관객은 자신의 우주안에 정보의 회로를 새롭게 구성하고 재해석하는 단계의 과정을 거쳐
창의적인 상상력과 다양한 세계로 확장하는 힘을 만들어 곧 낯선 경험을 익숙함의 과정으로 만들 것입니다.

제가 표현하는 작업은 때로는 낯설기도 하고 때로는 경험하지 못한 시각적 현상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지금의 삶에서 순간적인 찰나와 영속적인 부분의 차이이며
사람이 감지하는 모든 사물의 시간의 순간성과 영속성에 대한 시간차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항상 지나가던 곳이거나 관심있게 보아야 보이는 것들, 자세히 관찰해야 보이는 것들,
그러한 공간, 물질, 현상에 대해 생명을 불어넣는 차근차근 한 과정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저것이 무엇일까? 도대체 모르겠는데? 하는 생각과 같이 시각적인 작업에 대해
관객은 그 자체를 모호한 상태로 받아들일 수도 있고 눈에 읽히는대로 읽을 수도 있고
다양한 다른 현상으로 이해할 수도 있으며,그 이해하는 방식 자체가 새로운 경험과 새로운 해석의 과정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섦[별과 달과 바람의 노래] -14

눈 내리는 마을

김설미향(그림책 작가)

 

상상의 동물을 만나는 그 곳에는
불꽃놀이 환영이 일어나고
벼슬이 있는 발이 큰 닭은 분주하게 흔들흔들  기뻐하고 있고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강아지는 훨훨 날고 있고
리듬에 맞춰 춤을 추는 고양이는 파릇파릇 걷고 있고
상상의 콧 노래를 부르는 멋진 코끼리는 날개짓을 하고 있고
신나게 물 뿌리는 망아지는 꾸벅꾸벅 졸고 있다.
흰 드레스를 입은 신부는 뽀득뽀드득하게 앉아
구두에 반짝반짝 유리알 빛을 내고 있다.

푸른 빛이 있는 나무가지 사이로
복슬복슬 흰 눈이 내리고 있는 마을에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모두가 열띤 침묵의 춤을 춘다.

2016-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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섦[별과 달과 바람의 노래]-13

바람

김설미향(그림책 작가)

 

지속적이지도 않고

영속적이지도 않은

잠깐의 시간을

영원하듯 바라보는 곳에

빛나는 겨울의 끝에

서있는 바람은

하얀 눈꽃에 꽃씨를 실어

하얗게 몽글몽글 터트린다.

그 시간에 잠깐을 붙잡거나

또는 긴 시간에 오래를 붙들거나

영원한 것은 없다.

있다가 오고 없다가 오는

잠깐의 바람은

상상과 현실을 오가며

하얗게 피어 검게 그을려가는

하얀 목련에

바람 주머니를 넣어

영원한 사랑을

크게 꿈꾸고 있을지 모른다.

 

2016-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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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대와철학2016-2-25 바람

 

섦[별과 달과 바람의 노래]-12

 

김설미향(그림책 작가)

 

수 많은 별들 가운데 빛나는 수는 하나이다.

하나의 수와 하나의 수는 이어져 길이되고

길은 공간에 수를 채우고 채워진 벽에

수 많은 사람 안에 띄우는 수의 수는 붉은 심장이 된다.

빼어난 수는 수 안의 수 아닌 수의 결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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섦[별과 달과 바람의 노래]-11

 

 김설미향(그림책 작가)

 

사각거리는 빛은 꿈을 담고

흥얼거리는 빛은 우리의 마음을 잠식한다.

고요하고 고요한 침묵의 방은 어둠을 헤치고

새롭게 뜨는 태양을 향해 또 다른 나의 모습을 갈구한다.

빛은 소리없이 우리에게 계속해서 말을 걸어온다.

하얀 빛은 똑하고 물보라를 일으키고

어둠은 사랑스럽게 빛에 의해 더더욱 찬란해져 빛으로 빛난다.

쉽게 내어주는 우리의 시간은 어둠과 빛의 무지개빛 공기로

가득해져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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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대와철학2015-12 꿈

섦[별과 달과 바람의 노래]-10

재밌는 상상

 

 김설미향(그림책 작가)

 

 

나의 머리는 나무 그늘 아래 바람을 훔치는 기타가 되고

나의 검은 상상은 희망으로 넘치는 목이 기다란 술병이 되고

나의 두 다리는 바다를 항해하는 검은 고래의 꼬리가 되고

나의 얼굴은 영원한 우주를 무한히 헤엄치는 비행기가 되고

나의 입은 복슬복슬 먹이를 찾는 절실하지도 않은 부리가 되고

그렇게 절실하고도 절실하지도 않은 나의 두 눈에 반짝이는 우주를 반짝반짝 담는다.

우리는 무엇을 닮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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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대와철학2015-11 재밌는 상상

 

섦[별과 달과 바람의 노래]-9

가을과 겨울의 중간 사이

 

 김설미향(그림책 작가)

 

가을과 겨울의 중간 사이

삶은 깊은 것도 얕은 것도 아닌 중간 사이다.

깊어질 것 같은 가을 위에 어느 사이 옅어지는 겨울이 하나둘씩 쌓이고

우리의  추상의 모호함은 눈 위에 소복히 쌓인다.

소리없는 외침의 갈망은 어디로 가는지 알수 없는 발자국을 남기고

남겨진 발자국 위에 흰  북소리가 덮는다.

표현할 수 없는 공기를 가두어 공기라고 하고

온데 간데 없는 흔적은 흔적조차 없는데 흔적이라고 하고

우리는  바람 사이로 흩어지는 가을과 겨울의 중간 사이를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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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대와철학2015-10-김설미향

섦[별과 달과 바람의 노래]-8

영혼

 

 김설미향(그림책 작가)

 

만질수도 없고 기억할 수도 없는

머나먼 고향의 길을 찾아가는

검은 새의 바람은 향기롭다.

자신이길 거부하는 날개짓은 고요하여

여전히 태양을 향해가는 식지 않은 열정으로

암흑속에 가물가물 춤을 추고 있다.

영원히 지지않는 깃털은

가볍게 흐르는 그의 생명을 불어 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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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대와철학2015-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