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내전과 자유에의 욕망(下) [톡,톡,씨네톡]

이 글은 2018년 5월 9일 이대 철학과 영화제에서 상영한 <토지와 자유>를 보고, 20분 정도 스페인 혁명의 사상적 의의에 대해 발표하고, ‘예스터데이’ 뒤풀이 자리에서 간략하게 토론한 글을 수정한 것이다.

 

스페인 내전과 자유에의 욕망()

 

이규성(한철연 회원, 이화여대 철학과 명예교수)

 

2. 무정부주의와 가장 현실적인 욕망

 

무정부주의는 원래 민중의 협동심과 공감능력을 믿는 성선설을 선호한다. 특히 개체의 자발성과 활력을 강조하며, 생명에 대한 외경심도 존중한다. 자발성을 누르는 모든 권력을 비난한다는 의미에서 아나키즘은 초월적 지배자나 권력 혹은 제일 원리를 의미하는 아르케(arche)를 부정한다는 反권력주의(Anarchism)를 의미했다. 이에 비해 레닌주의는 민중의 혁명성을 찬양하면서도, 자발성의 한계를 강조하고, 합리적 조직능력과 지도력을 갖춘 주체적 의식성을 강조한다. 무정부주의자는 이를 퇴행적 부패의 원인으로 규정했다. 《토지와 자유》에 나오는 무정부주의와 공산주의자와의 갈등에는 두 이념 간의 사상적 차이가 연관되어 있다. 한국의 독립운동사에서도 유사한 사건이 있었다. 무정부주의자들과도 교류한 한국 민족 해방군 일 천명{지도자는 대한독립군 총재인 大倧敎 宗師 서일(徐一, 1881~1921)}이 이르쿠츠크에서 공산주의 군대에 포위되어 무장해제를 강요받아 교전 끝에 반절이상 사상자가 발생하고, 후퇴하는 중 만주 군벌 친일 마적 떼의 습격으로 거의 괴멸되자 자결한다.(자유시 사변).

 

스페인 내전은 1934년 선거에 의해 민주 세력이 집권하자 프랑코 장군을 중심으로 한 군부 가 독일과 이태리의 군사 지원에 힘입어 일으킨 쿠데타로 시작한 내란이다. 우익 세력은 군부와 왕당파 및 스페인 가톨릭으로 구성되며, 이들은 모두 독일의 국가 사회주의(나치즘), 이태리의 파시즘과 같은 전체주의에 친화적. 이에 비해 민주 공화파(스페인 인민전선)는 개혁 자유주의자, 무정부주의자, 코민테른 산하의 공산주의자, 마르크스주의자, 트로츠키주의자 등으로 구성. 타국의 급진주의 행동가들도 혁명 운동에 참여하여 국제여단을 구성. 사회주의자인 헤밍웨이도 기자이자 전투원으로 참전. 스페인 내전은 거의 모든 현대적 이념들이 각축하는 가운데, 인류의 양심을 시험한 혁명운동. 그것은 국제전의 양상을 띠게 되었으며, 2차세계대전의 전초전이 되었다.

 

“스페인 사회혁명의 중심에는 세계의 다른 어느 곳보다도 스페인에서 꽃피었던 신념의 추종자들, 곧 무정부주의자들이 있었다. 자유주의적 공산주의, 혹은 국가 없는 공산주의를 믿는 무정부주의자들이었다. 이들은 경찰, 왕실, 돈, 세금, 정당, 가톨릭교회, 사유재산을 사라져야 할 것으로 보았다. 무정부주의자들은 상호부조에 대한 자연스러운 인간본능이 우리 모두에게 잠재되어 있다고 믿었고, 이러한 본능을 자유롭게 펼침으로써 공동체와 작업장을 민중이 직접 운영하면 된다고 믿었다.”1) 마르크스-레닌주의는 궁극적으로는 근대국가 폐지라는 무정부주의 이상을 채택하지만, 과도기로 설정된 당 중심의 국가체제를 인정한다. 혁명 초기에 레닌은 국유화를 통해 토지를 재분배하고, 시장경제를 용인하며, 주요 산업을 국유화했다.(이를 자본주의적 길이라고 명명). 모든 평의회(소비에트)는 당 정치 위원회에 종속되어야 했다. 후에 국가 주도로 집단농장화를 강제 시행하여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이라는 사회주의 목표를 이탈한다. 이에 따라 스탈린 체제에서 보는 바와 같이 하나의 당이 지배하고, 과도하게 정치화된 국가체제는 ‘전체주의적 관료주의’(트로츠키)를 닮게 되어, 급진주의 사상가들에게 큰 부담이 되었다.

 

무정부적 혁명 이념이 물물교환을 인정할 정도로 순진하여, 복잡한 고도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현실화되기는 어려운 측면이 있었다. 그러나 왜곡된 관료주의적 사회주의 이념을 수정할 수 있는 상상력을 자극할 것이다. “스페인을 달군 뜨거운 혁명의 시대가 이처럼 큰 호소력을 가질 수 있었던 이유를 알기란 어렵지 않다. 부를 공유하고, 공장도 노동자들이 소유하며, 토지의 주인 또한 농민이고, 비록 아직은 규칙이 정해지지 않은 방식일지라도 예전에 비해서는 한층 직접적이 된 민주주의를 시행하는, 요컨대 이상주의자들이 1세기 넘게 꿈꿔온 세계가 펼쳐진 시대였기 때문이다.”2) 소규모 연합체들의 연합체를 국가로 생각하는 무정부주의적 사회주의는 1910년대 이회영, 신채호, 유자명, 백정기 등 한국 독립 운동가들이 광복 이후 건국 방략으로 생각한 것이었다. 그것은 억압과 착취가 현존하고, 정치적 공포가 남아있는 한, 현실에서 완전히 주어질 수 없는 것일지라도 백일몽처럼 나타나 실천적 사상을 이끌어 갈 것이다. 헤밍웨이의 ‘노인’은 ‘바다’의 푸른 정신을 가지고 반동세력(상어)이 뜯어 먹어 가시만 남은 청새치(이념)를 잡아 가지고 돌아와 강건한 실천을 상징하는 사자의 꿈을 꾼다. 현실적 실패는 있어도 이상을 향한 의지는 패배를 모른다. 《누구를 위해 종을 울리나》, 《노인과 바다》의 메시지는 《토지와 자유》의 메시지와 유사하다. 《전쟁과 평화》에서의 톨스토이가 민중을 지나치게 이상화하여 역사의 주체라고 주장한 것도 초월적 지배 권력이 민중 속으로 사라져버리는 진실에 대한 욕망을 자극한다. 진실에 충실하고자 하는 욕망은 조직 권력에 대한 충실과 분리된다.

사진출처: 다음영화 https://t1.daumcdn.net/cfile/151C254B4DB580F433

박경리의 토지에서도 악의 세력에 저항하는 산하대지[山川]의 생명을 바탕 삼은 심성은 자유주의도 레닌의 공산주의도 아닌 제3의 민중적 생명 공생주의를 지향한다. 친일파에게 빼앗긴 토지를 되찾아 무상으로 재분배하는 서희를 통해 땅은 재물이 아니라 상생을 위한 일시적 공유물이라는 동학사상이 재천명된다. 생명의 사회적 실현[氣化]은 평등한 자유를 실현하는 생명주의 윤리이자 불교적 연민을 현세에서 구현하는 심미적 진실이었다. 恨의 정서는 악행으로 왜곡될 수도 있지만, 부정당한 인생을 다시 부정한다는 의미에서 진실을 품은 긍정의 정서이다. 이 또한 크로포트킨의 무정부주의의 생명 사상과도 상통한다. 유토피아를 향해 진격하는 세르반테스의 행동주의 정신인 돈키호테도 대지 품에서 공생하던 황금시대를 꿈꾸고, 그것을 부분적이나마 실현하는 제자 산초 판사를 남기고 죽는다. 스페인의 무정부주의자들은 이 산초 판사들이라 할 수 있다.

 

장발장의 고난과 사업을 통해 자본주의의 윤리적 책무를 강조하는 빅톨 유고는 레미제라블의 1장에서 라이프니츠와 같은 카발라적 생명철학으로 ‘지렁이와 소크라테스의 동일성’을 설파하고, 민주 공화파의 정치해방과 사회적 연대성을 옹호한다. 초인의 초월성[차이성]만을 본 니체와 하이데거는 다수성과 평등한 동일성의 진리를 대중적 가축 떼의 사상으로 폄하한다. 이에 비해 동학의 초인은 민중의 고통과 같아지는 내재적 동일성을 실현한다. 즉 생명에 대한 내적 자각과 세속성의 분별을 극복한 내외(자아와 세계)의 통일성에서 진실을 발견한다. 그것은 데카르트와 같은 인위적으로 고립시킨 자아의 자명성에 근거한 철학이 아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생각한다>는 민중적 지성을 발전시킬 필요성이 나온다. 스페인 내전기의 공화파의 자유를 향한 욕망은 부조리한 현실에 사는 모든 사람의 ‘희망’(스페인 내전을 다룬 앙드레 말로 소설의 제목)이다.

 

1905년 러시아 2월 혁명 전의 짜르 체제에서 사회모순에 대한 저항을 유대인에 전가하는 상황에서 무고하게 살인자로 몰린 야콥 복(Yakov Bog)의 재판과 저항을 그린 소설 《수리공The Fixer》(국내 번역: 김재현 옮김, 〈키에프의 신화〉, 한신문화사, 1987. 광주항쟁 직전에 영화가 방영된 적이 있음)은 스피노자 철학을 밤 세워 읽고 자신의 수난의 과정을 통해 자신의 내적 변화를 경험한다. 정치적인 것을 자신과 관계없는 특정 인간에 한정하던 이전의 비정치적 관점이 아무도 정치적인 것과 분리될 수 없다는 인간 조건을 인식하게 된다. “모두가 유대인이다.” 아울러 그는 자신이 ‘수동적’ 존재에서 ‘능동적’ 존재로 변화하여, 저항의 길을 가는 자유의 꿈을 꾸게 된다. 마르크스의 유물론적 인간관의 전신인 스피노자(Baruch Spinoza, 1632~1677)는 신체적 욕망이 공포와 슬픔이라는 수동성에서 기쁨이라는 능동적 구조로 변화되고, 아울러 이성을 통해 타인과의 유익한 관계를 확산해 가는 관계의 사상을 인식함으로써 자유의 길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을 설파한다. 공포와 슬픔은 폭정과 이를 축복하는 종교의 산물이라는 것이 그리스 유물론을 시로 표현한 루크레티우스(Lucretius, BC, 96~55)의 《De rerum natura사물의 본성에 관하여》(우주는 생명의 여신 비너스의 령으로 충만한 생명계임을 주장, 원자들은 그 안에서 존립)의 기본 주장이며, 이 명랑성의 회복은 스피노자와 마르크스의 인성론의 목표였다. 야곱 복은 감옥 속에서 자신의 내적 변화의 귀결을 간수장의 입을 통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유의 목적은 타인을 위해 자유를 창조하는 것이다(The purpose of freedom is to create it for others).”(《The Fixer》, Penquins Book, p. 286. / 〈키에프의 신화〉, 304쪽). 이제 철학은 자유에의 욕망을 도덕적 양심의 근원적 실재로 보는 관점을 우리의 역사적 교훈으로 설정할 필요가 있다. 맹자는 거지도 발로 차면서 발을 주면 받지 않는다 했다. 이 부정의 의지가 인간을 인간으로 만드는 인간 현실일 것이다.

 

【참고】 로베스피에르는 개인들의 정치적 자유의 이념을 제시했다. 그러나 현실의 경제적 사회관계에서 농민과 노동자는 엄연히 노예상태로 존속했다. 사회주의는 이 상황을 극복하려는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로베스피에르는 당시의 경제적 사회관계가 민주주의의 대의에 심각한 장애가 되며, 평민이 상공업자의 지배에 만족하거나 그것을 요구하는 한, 프랑스 혁명은 군사독재의 희생물이 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가 부르주아 세력에 의해 단두대로 사라진 다음, 귀족과 대 부르주아가 지배력을 회복하게 되면서, 로베스피에르의 예언은 들어맞게 된다. 그의 사후 이를 깨달은 사람들이 생기는데 바쿠닌과 같은 무정부주의자, 푸리에와 같은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은 인간의 노동영역에서의 사회적 관계가 갖는 불평등의 문제를 제기하기 시작한다.

 

마르크스는 무정부주의와 사회주의자들의 사회 이상(사회주의)을 <경제해방> 혹은 <사회해방>으로, 진보적 자유주의자가 말하는 개인의 정치적 권리를 <정치해방>으로 하는 두 해방의 이념을 제시했다. 민주주의는 이 두 가지 민주화를 목표로 갖는다. 전자는 기존 사회주의의 장점을 발전시키고, 후자는 기존의 부르주아 자유주의가 성취한 민주주의 정신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민주주의를 구체적으로 실현한다는 의미에서 자신들의 이념을 사회적 민주주의, 인민 민주주의, 구체적 민주주의로 불렀다. 레닌도 그것을 사회 민주주의로 불렀다. 러시아 혁명 이후 민주주의를 진부한 부르주아 사상으로 몰고, 사회주의와 대립시키는 왜곡이 일어나 양자는 분리되게 되었고, 사회 민주주의는 유럽의 점진적 사회당의 이념을 의미하는 것으로 좁혀지게 되었다.

 

1917년 러시아 10월 혁명 이후 유럽과 아시아에 퍼진 레닌주의는 경제해방과 정치해방에 프롤레타리아 독재론과 당 조직론을 더 한다. 그러나 이 레닌주의 체제는 파리코뮌의 자유정신을 계승하려는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형태의 근대국가인 억압적 기계 장치로 보일 수 있었다. 스탈린 체제에 대한 트로츠키의 비판은 민주화를 요구하는 마르크스주의자와 무정부주의자들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는 빌미가 되었다. 중국혁명사에서도 공산당의 창시자인 진독수(陳獨秀)의 민주주의 요구는 우경 기회주의자로 낙인찍혀 오늘의 시진핑 체제에 이르기까지도 복권되지 않고 있다.

 

스페인 내전에서는 무정부주의 전통이 강한 카탈로니아 지역과 그 수도인 바르셀로나에서는 무정부주의와 러시아와 연결되어 조직화되어 있는 공산주의자와의 대립으로 나타난다.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이라는 말은 무정부주의와 마르크스주의에 공통된 것이지만, 레닌주의는 당 권력의 군사적인 수직적 합리성에 대한 신앙 때문에 물리적 혁명에서는 성공할 수 있었지만, 국가 권력형 범죄를 양산했다. 레닌의 사상이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강고한 관료주의 국가 범죄 때문에 정신적으로 패배한 이념이 되었다. 중국에서는 코뮌은 인민공사(人民公社)로 불렸는데, 위로부터의 조직화는 광범위하게 이루어졌으나 실패로 끝나고, 진정한 민주적 사회주의를 요구하는 민간 급진주의가 문화혁명 기간에도 나타났다. 모택동과 보수적 당권파는 그것을 용납할 수 없었고, 민간 급진주의는 탄압의 대상이 되었다. 자본주의적 요소를 시회주의에 이르는 과도적 단계로 활용한다는 사회주의 초급 단계론을 따르는 현 중국 체제는 유교부흥 운동과 결합되어 관료주의적이고 전체주의적인 성격을 강화하고 있다. 민주주의는 여전히 심각한 과제로 대두되고 있다. 자본주의 체제 역시 정치민주화를 넘어서는 경제민주화의 과제를 안고 있다. 직접 민주주의를 향한 민중의 의지는 자유에의 욕망을 가진 개인들의 연합을 통해 자유를 실현하고자 한다.

 

1) Adam Hochschild, 이순호 옮김, 《스페인 내전, 우리가 그곳에 있었다》, 갈라파고스, 2016, 80쪽.

2) 위의 책, 312쪽.

스페인 내전과 자유에의 욕망(上) [톡,톡,씨네톡]

 

이 글은 2018년 5월 9일 이대 철학과 영화제에서 상영한 <토지와 자유>를 보고, 20분 정도 스페인 혁명의 사상적 의의에 대해 발표하고, ‘예스터데이’ 뒤풀이 자리에서 간략하게 토론한 글을 수정한 것이다.

 

스페인 내전과 자유에의 욕망(上)

이규성(한철연 회원, 이화여대 철학과 명예교수)

 

어느 누구도 하나의 섬은 아니다.

사람은 모두가 대지의 한 조각, 이 땅의 한 부분.

어떤 사람의 죽음 이건 나의 생명을 줄이는 것,

나 스스로 인류의 하나이기에.

그러므로 묻지를 말라.

누구를 위해 조종을 울리느냐고.

종은 그대를 위해 울리는 것이니.

[John Donne의 기도문(For whom the Bell tolls). / 헤밍웨이, 《누구를 위해 종은 울리나》, 題詞]

 

  1. 파리코뮌과 스페인 혁명전쟁

 

스페인 내전(1936~1939) 기간에 있었던 무정부주의 혁명은 파리코뮌(1871)에 이어 두 번째로 일어난 직접 민주주의를 위한 혁명적 사건이었다. 그것은 민중이 자신의 해방을 쟁취하여 자유와 평등을 실현해본 사건 중의 사건이다. 양자 모두 전쟁과 혁명이 결합되어 있었다. “전쟁은 혁명의 원동력(locomotive)”(마르크스)을 제공해 왔다. 바르셀로나를 중심으로 한 스페인 혁명은 프랑코를 중심으로 한 아프리카 주둔 군부가 선거에서 이긴 민주 정권에 대한 쿠데타를 일으켜 도처에서 학살극을 벌이면서 스페인에 진군하자 이에 민중이 봉기하여 일으킨 혁명전쟁이었다. 혁명전쟁은 인류 사상사에서 <우리는 생각한다>는 집단 지성의 필요성과 의의를 환기시킨다. 그 전쟁을 통해 우리의 양심의 승패가 시험받기 때문이다. 혁명전쟁과 유사한 상황은 민주제가 안착하지 못한 나라에서는 광주항쟁을 유발한 한국의 군사 쿠데타와 같이 정황이 되면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아버지를 숭상하는 박근혜 정권도 많은 사람의 우려와 같이 촛불시위를 타도하기 위한 은밀한 쿠데타 시도를 감행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파리코뮌을 보자.

 

파리코뮌은 독일(프로이센)과의 전쟁에 패하여 독일군에 포위를 당한 상황에서 파리 시민이 봉건 귀족세력과 지배적 부르주아 계급에 봉기하여 만든 직접민주 공동체이다. 이 체제는 두 달간의 짧은 시기이지만 최초로 주요 생산 수단을 사회화함으로써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체>라는 민주주의 이상을 실현했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 이후 프랑스는 민주주의 혁명파와 기존 지배세력(토지 귀족과 상공업 부르주아) 간의 근 100년간의 피 튀기는 투쟁 이후 제3공화국(1870~1940) 하에서의 1875년 헌법이 제정되면서, 이른바 자유민주주의라는 기묘한 이데올로기를 표방하는 헌정체제로 안착된다. 자유민주주의라는 말은 부르주아의 자유주의(귀족도 자유주의 흉내를 내야 했음)와 혁명적 민주주의 사이의 타협을 의미했다. 한국에서는 원래 자유민주주의라는 용어는 헌법에 없었으나, 독재를 옹호하는 유신헌법에 처음 등장하여, 반공 이데올로기로 남용되었다.1)  혁명파의 공화주의 정신이 반영된 프랑스 자유민주주의 체제는 철학적으로는 다수성과 통일성 간의 타협을 의미한다. 프랑스 제3공화국 헌정체제에서 다수성이라는 수와 통일적 일자 간의 대결이 의회 내의 논쟁으로 변화된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서 진정한 자유는 다수성이 초월적 통일성을 민중의 힘 안으로 내재화하여 그 억압성을 제거하는 실천을 통해 민중의 진리로 실현된다는 것이 자각되었다. 쇼펜하우어의 언급처럼 루소는 원래 지배자의 권리를 의미했던 주권이라는 말을 민중의 권리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전시켰다. 점차 <다수성>이 정치적 진리로 부상한다. 이 진리가 여러 한계에도 불구하고 파리코뮌과 스페인 내란기의 혁명에서 섬광처럼 드러났다. 이 빛을 마르크스는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체>로 표현했다.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이라는 말은 원래 무정부주의자로 분류되는 막스 슈티르너(Max Stirner, 1806~1856)가 ‘인간’, ‘국가’ 등과 같은 추상적 보편자를 거부하고, ‘특수한 개체들(singularity)’의 사회 이상으로 제시한 것이었는데, 마르크스가 파리코뮌의 특징을 묘사하는 데에 사용했다.

사진출처 : 네이버 영화 https://movie.naver.com/movie/bi/mi/photoViewPopup.nhn?movieCode=17874

파리코뮌은 파리시민이 농촌과 괴리된 상태에서 주요 생산수단의 사회화를 통해 개인의 자유와 연대를 실현했다. 스페인 내전에서의 인민전선가운데 혁명의 최대 세력이었던 자생적 무정부주의자들은 도시에서는 산업체의 노동자 경영, 농촌에서는 토지의 공유를 통해 사회주의를 실현한다는 이상을 갖고 있었다. 무정부주의 ‘전국노동연합(CNT)’이외에도 ‘마르크스주의 통일 노동자 당(POUM)’이 있었는데, 이 조직에 헤밍웨이, 오웰과 같은 문인들, 켄 로치(Ken Loach) 감독 《토지와 자유》에 나오는 데이빗도 가담한다. 그의 여자 친구는 담대한 자발성을 보여줌으로써 무정부주의적 인간상의 전형을 보여준다. 이들이 가담한 ‘포움’ 조직도 반스탈린주의적이고 무정부적인 사회주의자들로 구성된다. 이에 반해 스페인 공산당은 소련의 코민테른 조직의 일부가 되어야 했으며, 외국에서 참여한 ‘국제여단’도 소련의 코민테른 산하의 공산주의 조직과 연계되어 있었다 한다. 이들은 무정부주의자와 트로츠키주의자들을 숙청 토벌 대상으로 규정하게 된다. 러시아의 마르크스-레닌주의는 중앙 집중적 권력 조직인 당이 국가와 인민을 대표한다는 대표성(representation)을 숭상했다. 무정부주의는 민중의 직접적 참여성과 자발성(spontaneity)을 숭상하기 때문에 이를 용인하지 않는 스탈린주의와 대립했다.

 

파리코뮌을 엥겔스는 ‘최초의 프롤레타리아 독재’로도 묘사했다. 이는 대다수 인민이 극소수의 지배세력을 억제하고 주권을 실현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당시에도 인민, 시민, 프롤레타리아는 같은 의미로 사용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마르크스는 파리코뮌의 무정부성이 갖는 한계를 지적하면서, 이른바 중앙 지도체제를 갖춘 프롤레타리아 독재론을 제기한다. 훗날 레닌주의는 그 인민독재론을 엘리트 당 조직의 영도아래 공산사회로 가는 역사의 객관적인 과도 단계로 설정한다. 레닌주의는 당 조직의 민중 대표성과 초월적 지위를 강조함으로써 민중의 자발적 자각성을 의문시하여 억압하고, 민중과의 변증법적 소통능력을 상실하는 단점을 갖는다. 스페인 내전 기에 무기 원조를 통해 개입한 모스크바 중심의 국제공산주의(코민테른)는 중앙 집중제에 의거한 조직을 통해 무정부주의와 같은 자생적 급진주의 운동을 억압하거나 흡수하는 정책을 썼다. 《토지와 자유》라는 영화는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무정부주의 혁명 노선의 관점에서 당시 스탈린주의 조직과의 대립을 그렸다.

 

스탈린 지배하의 코민테른은 1920년에서 1930년대 중국혁명 과정에서도 공산당과 파시스트 국민당과의 합작을 통해, 약세의 공산당을 유지하고 혁명을 성공시킨다는 정책을 썼다. 중국 공산당의 창시자인 진독수(陳獨秀, 1879~1942)가 민주주의를 주장하다가 우경 기회주의로 몰려 축출되어, 지금까지 복권되지 않고 있는 것도 그러한 맥락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스페인 공산당도 대외적으로는 자유주의 국가와의 대립을 원치 않고 대내적으로는 민족주의를 표방한 우파 정당과의 노골적 대립을 원치 않았다. 사회개혁에서도 코민테른은 급진적 사회화를 반대하고, 부재지주 이외의 토지 몰수와 재분배를 반대했다.

 

스페인 내란기의 혁명 운동에서 좌파 세력의 분열은 혁명 실패의 한 원인으로 지적되었다. 그러나 무정부주의적 저항세력의 민중적 순수성은 그 후 모든 저항자들과 문학 및 예술의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 민중성을 결여한 니체주의적 탈근대주의 철학은 이러한 지적 원천을 경시함으로써 체제내적 이데올로기로 편입되고 말았다. 자유를 향한 개체의 욕망 해방이 연대적 활동성과 분리될 때, 민중적 민주주의는 이기적 합리주의(신고전경제학의 기본 전제)의 세련된 문화적 쾌락주의에 흡수되고 만다는 것이 오늘의 교훈일 것이다. 자유를 향한 욕망의 실현에 충실할 것을 명하는 것이 우리에게 가장 현실적인 것, 즉 인간현실이라면 바로 이 현실이야 말로 우리에게 진정한 실재일 수 있다. 수많은 문학 작품이 보여주듯 자유에의 욕망이라는 이 실재성에 충실한 도덕은 언제나 사회 정치적 저항과 함께 일어났다. 이러한 도덕이 진정으로 신성한 내적인 양심의 소리일 것이다. 이 양심을 부인하도록 하는 모든 체제는 인성 모독이다. 종교가 이러한 인성을 모독한다면, 스페인 혁명기의 가톨릭처럼 총통의 편에서 민중을 살해하는 신성모독의 광기를 행하는 것에 접근하는 것이 될 것이다.

 

1)  1948년 대한민국헌법 전문(前文)에는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라는 말은 없다. 1972년 제7차 유신헌법으로의 개헌에서부터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라는 말이 첨가된다. 이 말은 민주주의를 탄압하는 용어로 정착되었기 때문에 제거되어야 한다. 다음은 1987년 대한민국헌법 전문(12월 29일 9차 개헌):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 이념을 계승하고, 조국의 민주개혁과 평화적 통일의 사명에 입각하여 정의·인도와 동포애로써 민족의 단결을 공고히 하 고, 모든 사회적 폐습과 불의를 타파하며, 자율과 조화를 바탕으로 <자유 민주적 기본질서>를 더욱 확고히 하여 정치·경제· 사회·문화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각인의 기회를 균등히 하고, 능력을 최고도로 발휘하게 하며, 자유와 권리에 따르는 책임 과 의무를 완수하게 하여, 안으로는 국민생활의 균등한 향상 을 기하고 밖으로는 항구적인 세계평화와 인류공영에 이바지함으로써 우리들과 우리들의 자손의 안전과 자유와 행복을 영원히 확보할 것을 다짐하면서 1948년 7월 12일에 제정되고 8차에 걸쳐 개정된 헌법을 이제 국회의 의결을 거쳐 국민투표에 의하여 개정한다.”

 

스페인 내전과 자유에의 욕망(下)에서 계속됩니다…

 

섦 – 더(the) [별과 달과 바람의 노래] -43

더ㅡthe

 

김설미향(그림책 작가)

 

더 하고 싶고

더 있고 싶고

더 갖고 싶고

더를 한정하지 않는 세계는

더하고 더해도 끝이 없다.

더 할수록 너무 어렵고

더 하고 싶을수록 더 하지 못한 것은

무한정적으로 한정된다.

더하는 사랑과 사람과의 관계는

더 울수록 더 덥고 더 어려운 일이다.

 

무한정 세계에 살아가고

한정된 세계에 머무르며

갈피를 못 잡고

타협하지 못하는 사랑은

외부은하에 피어나

더 할 수 없이 빛으로 흩어져

안드로메다를 찾는 계절을 맞이한다.

거울 속의 거울의 나는

무한히 가슴에 담긴 별을

더하고 나누고 빼는 것처럼

더와 계속과 덜 사이에 차이를 찾아

은하수 숲으로 하루를 위하여 건너간다.

 

2017. 12.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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섦 – 내가 되는 것 [별과 달과 바람의 노래] -42

내가 되는 것

 

김설미향(그림책 작가)

 

내가 무엇을 바라보고

내가 무엇을 생각하고

내가 어떻게 생각하고

내가 어떤 것을 바라보느냐

지금의 내가 되고

미래의 내가 된다.

지금의 자신에 관하여

시간을 들여다보고 있다.

그 어떤 이유로 세상의 풍경에 머물지 않고

그 어떤 핑계로 삶을 포기하지 않고

그 어떤 변명으로 스스로의 삶을 타협하지 않고

내가 세상의 풍경이 되는 한 그루의 나무로

살아가기 위해 노력한다.

오늘의 나는 아마도 곧 내일의 내가 될 것이니까.

내가 바라보는 것이 내가 되는 그 곳이니까.

 

2017. 11.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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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노트

삶에 정형화하는 것은 타인의 정형화에 들어가는 것이라 생각이 듭니다. 내가 원하지 않은 것을 해야 할 때와 예상하지 못한 일은 언제나 일어나고 나는 그 정형화 된 삶 속에 끌려 갈 수밖에 없을 때를 만나기도 하니까요. 내 삶을 타협하는 것이 아니라 정형화된 타인의 이야기를 들어보는 것, 그 삶속에 들어가 보는 것에서 그의 세상을 만나 새로운 세계의 틀을 만듭니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하고 싶지 않을 일을 해야 할 때, 정형화가 되어 있는 작업을 한다는 것은 상당한 의무감으로 붓질 하나하나에 애정을 담아 정형화를 감내합니다. 삶은 모순의 연속으로 이어지기도 하고 그 모순에서 새로운 깨달음을 얻기도 합니다. 진정한 삶이 무엇인지, 지금 내가 바라보는 것이 무엇인지 문득 생각으로 생각을 들어가 봅니다. 삶의 불안정한 충돌 속에서 삶이 꼭 아름답지만은 않다고 하지만 그 아름다움을 발견하지 못하는 것도 그 내면에 있을 뿐입니다. 그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것, 그것은 곧 내가 향하는 곳이고 내가 바라보는 곳입니다. 나의 지금은 아마도 곧 내일의 내가 될 것입니다. 그저 아름다움은 아름다움 안에 있습니다.

섦 -열정의 시대 [별과 달과 바람의 노래] -41

열정의 시대

 

김설미향(그림책 작가)

 

무엇이든 때가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계획 없이 흐르고 있는

식지 않은 공기를 보고 있으면

아직 의미 없음에 대해 의미를 찾는다.

 

존재에 대한 절망적인 희망을 놓지 않고

계획 없이도 의미를 찾기 위해 힘을 쓰고

방향을 알 수 없이 흐르는 한 점 한 점 이어지는

길 위에 길을 찾으려고 힘쓰기도 한다.

 

무수한 에너지는 어디로 흘러가고

어디로 모여 함께 하는 것일까

부딪히는 섬광에 노을이 깨지면

아침 햇살이 반짝 떠오르듯

삶의 애틋함도 마련되는 것인가

 

전하의 온도를 느낄 수 없는

공기를 타고 온 바람의 온도가

뜨겁기만 할 것 같지만

나의 가슴에 차갑게 안긴다.

 

뜨거웠던 여름을

바람이 찾는다.

바람이 차다.

곧 가슴에 흰 눈이 내리겠지.

 

작은 방에 흐르는 곧 춥고 어려질

따뜻한 등이 그리워지면

계속해서 청춘의 봄을 맞이했던

그 열정은 찬 바닥에 내동댕이쳐질 것이다.

 

그리고 곧 뜨거워질 여름이 오겠지.

항상 가슴 속의 뜨겁지만은 않은 여름이 아쉽고

곧 식어갈 여름이 아쉽다.

 

2017. 10.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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섦 – 까만 밤의 생상 [별과 달과 바람의 노래] -40

까만 밤의 생상

 

김설미향(그림책 작가)

 

먼지가 되어 갖는 여유의 푸른 공기는

풀벌레 가득한 달을 바라본다.

그 해에, 그 달에 찬바람이 일어나

둥실둥실 산은 머리를 휘날리며

꺼져가는 우주를 우쭐하며 바라본다.

탁한 술에 달을 그리고 어둑한 얼굴은

나무 그림자에 바람을 일으키고

그리운 별 섬에 해가 어둑하게 지쳐 내린다.

검은 밤 뒷문 창으로 아버지의 그림자가 앉아 있고

먼 곳을 바라보는 그 곳에 나의 환영이 있다.

 

까만 밤, 마당에 앉아 무수한 별에

별을 바라보는 개가 웃는다.

음매 우는 소 없는 외양간에

쓸쓸한 별의 별 소리가 흩날린다.

 

우스개 같은 여름이 열리고

별의 바람이 있는 별일이 무수하게 열린다.

검은 개와 토실한 토끼가 잠자고

살구가 까만 밤에 둥실 떠오르고

모과도 밤도 감도 호박도 박도 땅콩도

달빛 향기에 취해 투정하는 까만 밤이다

생상스에 흐트러지는 소리가 흔들리고

별빛 누워 초승달을 지키는 산허리가 그립다.

 

2017. 10.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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섦 – 변절자 [별과 달과 바람의 노래] -39

변절자

 

김설미향(그림책 작가)

 

수십만의 우주 속에서

수백만의 변화의 물길을 가르고

수천억만의 물은 변화를 일으킨다.

 

시끄러운 감정의 폭풍은

뭉게뭉게 하얗게 피어나는

유혹의 무지개를 일으킨다.

 

색은 형용할 수 없지만

형용할 수 있는 물질로 채워져

심장을 가르는 통증으로

우리의 뜨거웠던 가슴은

차갑게 표정을 바꾼다.

 

흘러가는 구름은 그렇게

아무 의미 없이 흘러가고

기억나지 않을 시간을 준다.

시간은 한없이 춤을 추고

우리의 색깔은 붉은 낙타위에

고개를 목 놓아 울고 있다.

붉은 태양에 흩날리는 모래는

붉은 피를 흡수하고

찬란하게 빛날 푸른 공기에 흩뿌린다.

 

어디로 흘러가는가.

어디로 짙어 가는가.

어디로 무색해지는가.

 

2017. 9.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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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노트

살아가는 동안 1분 1초를 쪼개어 사는 이 시간의 공간 속에 수많은, 수억의 물질의 형태는 변화를 일으키고 물질로 이루어진 인간도 수없는 변화와 수많은 감정을 일으키고 변화합니다. 그래서 순간의 현상을 바라보면서 쉽게도 변화하는 형태의 오묘한 모습이 마음과도 같이 느껴집니다. 물은 수많은 형태로 변화하고 수많은 형질로 표현되고 수없는 색으로 짙어지고 또 흘러가고 또 색이 없는 형태로 돌아갑니다. 그런 무형과도 같은 유형의 물질은 마음을 닮아 있어 알 수 없는 수백만의 공전과 자전을 하는 우주의 행성만큼 있는 그대로 존재하지만 항상 변하는 변절자이기도 합니다. 변화는 것은 그대로가 아니어도, 변화 그 자체로 아름답게 느껴집니다. 이 세상이 무엇인지 여전히 물음표로 사색하지만 밤하늘의 셀 수 없는 별만큼 신비롭고 아름답습니다. 인간이 자생하는 자연의 물질로 생명을 얻는 것 자체의 행위는 삶을 얻고 우주를 얻고 신비로운 이 세상의 발자취를 남기는 온전하지 않지만 온전한 행위에 한 걸음 다가가는 변절자와도 같습니다. 그래서 변하는 변화는 아름답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