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번째 시간, 안녕(이별과 만남) [시가 필요한 시간]

일곱 번째 시간, 안녕(이별과 만남)

 

마리횬

 

시가 필요한 시간, 일곱 번째 시간이 되었습니다. 오늘은 ‘안녕’이라는 주제로 이야기를 나눠볼까 하는데요, 여러분은 ‘안녕’이라는 말을 들으면, 어떤 ‘안녕’이 떠오르시나요? 우리는 친한 누군가와 만났을 때 ‘안녕’이라고 말하죠? 그리고 친한 누군가와 헤어질 때도 역시 ‘안녕’이라고 말합니다. ‘안녕’이라는 이 친근한 말 속에 만남도 있고, 헤어짐도 있는 것이죠. 여러분은 제일 먼저 어떤 안녕이 떠오르셨을까요?

제가 알고 있는 몇 개 나라의 언어만 살펴보아도, 만날 때의 인사와 헤어질 때의 인사가 같은 나라가 없었습니다. 영어는 ‘헬로(Hello)’와 ‘굿바이(Good bye)’로 서로 다르죠. 중국어로도 니하오(你好)와 짜이찌엔(再见)이 다르고, 일본어도 만났을 때 ‘사요나라(さようなら)’하면서 만나지는 않습니다.

러시아어로도 친구끼리 서로 만났을 때 “안녕?”하고 인사하는 말은 ‘쁘리벳(Привет)’이구요, 헤어질 때는 ‘빠까(Пока)’라고 인사합니다. 완전히 다르죠. 이렇게 몇 가지 예시만 찾아 봤는데도, 신기하게 우리나라만 ‘안녕’이라는 하나의 말로 다른 뉘앙스를 나타내며 사용하고 있는 걸 볼 수 있습니다.

편안할 안(安)에 편안할 녕(寧)이라는 한자로 구성되어 있는 이 ‘안녕’이라는 말 속에는, 서로 얼굴을 마주하고 만났을 때 ‘그 동안 편안했는가!’라고 안부를 확인하는 반가운 마음, 그리고 서로 헤어질 때 ‘다음에 만날 때까지 편안하고 편안하길 바란다!’는 다음 번 만남에 대한 소망까지 함축된 말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얼핏 헤어질 때에 말하는 인사로서만 생각했었는데, 만남과 헤어짐이 함께 깃들어 있는 말이라는 걸 알 수 있죠.

오늘 ‘안녕’이라는 주제로 이별에 대한 시를 두 편 준비 했는데요, 오늘 준비한 시 모두 완전한 이별을 노래한 시라기 보다, 방금 이야기했던 ‘안녕’이라는 두 가지 의미의 말처럼, 이별하지만 여전히 곁에 머무는 마음, 곧 다시 만나리라는 소망을 담아 이별을 노래하는 시로 준비해보았습니다.

첫 번째로 소개해드릴 시는 정호승 시인의 시 <이별 노래>입니다. 시를 들어보시면,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을 앞두고 있는 시적 화자의 애잔한 마음이 잘 느껴지실 겁니다. 시 먼저 듣고 오겠습니다.

 

이별 노래

                               정호승

떠나는 그대

조금만 더 늦게 떠나준다면

그대 떠난 뒤에도 내 그대를

사랑하기에 아직 늦지 않으리

 

그대 떠나는 곳

내 먼저 떠나가서

그대의 뒷모습에 깔리는

노을이 되리니

 

옷깃을 여미고 어둠 속에서

사람의 집들이 어두워지면

내 그대 위해 노래하는

별이 되리니

 

떠나는 그대

조금만 더 늦게 떠나준다면

그대 떠난 뒤에도 내 그대를

사랑하기에 아직 늦지 않으리

 

 

정호승 시인의 시 ‘이별노래’ 들어보았습니다. 시 속의 화자는 사랑하는 누군가와의 이별을 앞두고 있어요. 상대방이 곧 떠날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떠날 사람에게 조금만 더 늦게 떠나주기를 부탁하고 있는 것이죠.

 

떠나는 그대

조금만 더 늦게 떠나준다면

그대 떠난 뒤에도 내 그대를

사랑하기에 아직 늦지 않으리

 

조금만 늦게 떠나준다면 그대가 떠난 후에 그대를 사랑하겠다… 음… 이 시는 무슨 의미일까요? 누군가가 ‘떠난 후’에도 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면, 그건 어떤 사랑일까요? 시인은 그 사랑의 방식을 ‘노을이 되는 것’ 그리고 ‘별이 되는 것’으로 비유 합니다.

 

그대 떠나는 곳

내 먼저 떠나가서

그대의 뒷모습에 깔리는

노을이 되리니

 

옷깃을 여미고 어둠 속에서

사람의 집들이 어두워지면

내 그대 위해 노래하는

별이 되리니

 

떠나는 사람에게 조금만 늦게 떠나주기를 바라면서, 그 사이에 내가 먼저 그 곳에 가서 그대 뒷모습에 배경이 되는 노을이 되겠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옷깃을 여밀 만큼 추운 날, 주위가 어둡고 아무도 없는 것 같은 때에도 그대를 위해서 노래하는 밤하늘의 별이 되리라고 고백하고 있죠.

노을과 별은 모두 내가 인식하지 않는 순간에도 여전히 그 시간에 늘 그 자리에 있는 존재들이죠. 노을과 별처럼 그렇게 그대와 함께 하고 싶다고, 그렇게 늘 그 자리에서 그대를 사랑하리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 ‘이별 노래’를 들은 사람은, 아마도 노을을 볼 때마다 이 사람을 생각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밤에 별을 보더라도 그냥 별이 아니라, 나를 사랑하겠다고 고백했던 그 사람이 왠지 생각날 것 같습니다.

이 시는 처음에 시작했던 연이 마지막에 한번 더 반복되면서 끝나고 있습니다.

 

떠나는 그대

조금만 더 늦게 떠나준다면

그대 떠난 뒤에도 내 그대를

사랑하기에 아직 늦지 않으리

 

어떤 이유에서 맞이하게 된 이별인지 시에 드러나있지는 않아요. 하지만 화자의 목소리를 통해서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이 헤어질 수 밖에 없는 상황, 물리적으로 멀리 떨어지는 이별을 해야만 하는 상황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육체적으로는 서로 떨어져 있지만, 아마 마음으로는 늘 함께이지 않을까요? 주황빛의 노을과 밤하늘의 별을 볼 때마다, 노을이 되겠다고 고백했던, 그리고 별이 되어 노래하리라고 고백했던 그 상대방을 떠올리게 될 테니까요. 이 시야말로 헤어졌지만 그럼에도 함께 있는 그런 ‘안녕’이지 않을까 싶네요.

 

이번에 이 시를 여러 번 읽으면서 생각난 노래가 있습니다. 가야금 연주자인 정민아가 작사작곡하고 직접 부른 <무엇이 되어>라는 곡인데요, 실제로 가야금을 연주하면서 부른 노래입니다. 멜로디도 인상적이고, 가사도 독특해서 여러 번 듣게 되었던 곡이에요. 이 노래의 가사에는 “그대가 무엇이 되었어도 난 그대 가까이 있는 무엇이 되고 싶네”, 그리고 “그대가 무엇이 되었어도 난 그대와 나 사이 이별 안에 있네”라는 내용이 나옵니다. 역설적이면서도 반복되는 이 가사가 비록 헤어지지만 늘 함께 있겠다는 정호승 시인의 시를 생각나게 했습니다. 함께 들어보시죠.

 

♫ 정민아_무엇이 되어: https://youtu.be/eA2WhHHdDg0

 

네, ‘안녕’을 주제로 시가 필요한 시간 함께 하고 있습니다. 오늘 ‘안녕’을 주제로, 이별과 만남에 대해서 생각하면서 여러분께 들려드리고 싶었던 두 번째 시는 마종기 시인의 시 <바람의 말>입니다.

‘바람의 말’.. 뭔가 바람이 전하는 메시지가 있을 것 같은데요, 시를 먼저 듣고 이야기 더 나누겠습니다.

 

바람의 말

                       마종기

우리가 모두 떠난 뒤

내 영혼이 당신 옆을 스치면

설마라도 봄 나뭇가지 흔드는

바람이라고 생각지는 마

 

나 오늘 그대 알았던

땅 그림자 한 모서리에

꽃나무 하나 심어놓으려니

그 나무 자라서 꽃 피우면

우리가 알아서 얻은 모든 괴로움이

꽃잎 되어서 날아가버릴 거야

 

꽃잎 되어서 날아가 버린다.

참을 수 없게 아득하고 헛된 일이지만

어쩌면 세상 모든 일을

지척의 자로만 재고 살 건가

가끔 바람 부는 쪽으로 귀 기울이면

착한 당신, 피곤해져도 잊지 마,

아득하게 멀리서 오는 바람의 말을

 

이 시는 마종기 시인에게도 의미가 있는 시라고 합니다. 마종기 시인은 의사이면서 동시에 시인인데요, 어느 날 병원에서 예순 살 정도 되신 분이 자신의 사연을 적어 마종기 시인에게 편지 한 통을 보냈는데 바로 이 <바람의 말>과 관련이 있는 사연이었다고 합니다.

그 분은 1년전 사랑하는 남편을 폐암으로 떠나 보냈던 보호자였다고 해요. 긴 투병 기간 중 점점 쇠약해지던 남편이 어느 날 종이 한 장을 내밀면서, 아내에게 시간 날 때 읽어보라고 했대요. 그런데 그 때는 정신도 없고 피곤해서 ‘그러겠다’고 하고 잊고 지냈었는데, 얼마 후 남편이 죽고 장례를 치른 후 유품을 정리하던 중에, 남편이 죽기 전에 전해주었던 그 종이가 나온 겁니다. 그 종이에는 시 한편이 적혀 있었는데, 그 시가 바로 이 마종기 시인의 시 <바람의 말> 이었다고 해요. 이 사연을 듣고 다시 시를 보면, 이 시가 실제로 떠나는(혹은 이미 떠난) 누군가의 메시지로 들리기도 합니다.

바람은 나뭇가지도 흔들고, 꽃나무의 꽃잎도 날아가게 하는데, 시적 화자는 그게 그저 단순한 바람이 아니라 너의 곁에 머물고자 하는 나의 사랑의 마음이라는 것을 잊지 말기를 바라고 있죠. 두 번째 연에는 이러한 시 구절이 나옵니다.

 

나 오늘 그대 알았던

땅 그림자 한 모서리에

꽃나무 하나 심어놓으려니

그 나무 자라서 꽃 피우면

우리가 알아서 얻은 모든 괴로움이

꽃잎 되어서 날아가버릴 거야

 

그대를 알았던 자리에 꽃나무를 심고, 그 꽃나무가 자라서 꽃을 피우면, 우리가 얻은 모든 괴로움이 꽃잎이 되어서 날아가버릴 거다…. 이건 무슨 의미일까요?

내가 심었던 꽃나무가 꽃을 피울 때쯤엔, 우리가 서로 안다는 이유로 생겼던 괴로움들이 사라질 거라는 말인데… 그런데 한 번 생각해보세요. 괴로움이 사라지는 건 좋지만… 이제 막 꽃나무를 심었는데, 그 나무가 언제 자라서 언제 꽃을 피우겠어요? 그건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리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꽃이 피고 꽃잎이 날리게 될 때까지의 그 오랜 시간은 계속 괴로움을 안고 살아가라는 말일까요?

그 물음에 대한 답이 바로 세 번째 연에서 나옵니다. 시인은 마치 그 질문을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이야기하죠.

 

꽃잎 되어서 날아가 버린다.

참을 수 없게 아득하고 헛된 일이지만

어쩌면 세상 모든 일을

지척의 자로만 재고 살 건가

 

이제 막 심은 나무에서 싹이 나고, 나무가 자라 꽃을 피울 날이 과연 언제 도래할 것인가.. 그게 참 아득한 일인 것 같지만, 시인은 말합니다. 세상일은 우리의 생각으로 다 알 수가 없다고…

어렸을 때는 이해하지 못했던 어떤 것이, 오랜 시간이 지나 내게 성숙의 시기가 찾아봤을 때, 즉 어떤 ‘때’가 되었을 때에 비로소 이해되는 것을 경험하기도 하죠. “왜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왜 나는 이런 아픔을 겪어야 하는가?” “왜 우리는 헤어져야 하는가?” 등, 현재는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많지만, 시간이 지나 내가 깨달을 수 있을 때가 되면, 이 시의 표현대로 나무에 꽃이 필 때가 되면, 그 때에는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거다라고 위로합니다. 그 기다림의 시간에는 고통도 따르겠죠. 그럴 때, 시인은 귀 기울여 바람의 말을 들어보라고 이야기합니다.

 

가끔 바람 부는 쪽으로 귀 기울이면

착한 당신, 피곤해져도 잊지 마,

아득하게 멀리서 오는 바람의 말을

 

 ‘착한 당신’, 너무나 착하기 때문에 홀로 남아 이별을 괴로워하고 있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마치 바람처럼 보이지는 않지만 늘 곁에 있을 테니 힘내라고 위로하고 있는 것처럼 들립니다.

저는 이 시를 읽고 또 듣는 동안에, ‘세월호 사건’으로 희생된 아이들하고 그 팽목항에 매여있던 노란 리본이 자꾸만 생각이 났습니다. 바람에 꽃잎이 날린다는 시 구절과, 바람에 날리고 있는 노란 리본의 이미지가 오버랩 되는 것 같았고, 시를 여러 번 읽으면서 왠지 모르게 세월호 아이들과 유가족들이 많이 생각이 났던 것 같습니다. 어쩌면 가장 아프고 괴로운 사람들이 아닐까.. 언제쯤 꽃잎이 되어 이 괴로움이 다 날아갈 수 있을까 싶습니다.

오늘은 만남과 헤어짐이 함께 있는 ‘안녕’이라는 말과 함께 생각해 볼 수 있는 두 편의 시 만나 봤습니다. 정호승 시인의 시가 노을과 별로 함께 머물겠다는 고백이었다면, 마종기 시인의 시는 이별하지만 여전히 ‘바람’으로 곁에 머물겠다고 고백하고 있는 시였습니다.

오늘 마무리하면서 마종기 시인의 <바람의 말>과 함께 들으면 좋은 곡 소개해드릴게요. 김효근이 작곡하고 뮤지컬배우 양준모가 부른 <내 영혼 바람 되어>라는 곡입니다. 아메리칸 인디언들에게 구전되던 작자미상의 시 ‘A Thousand Winds’라는 시를 김효근씨가 직접 번역하고 곡을 붙인 노래라고 해요.

저는 사실 이 노래를 2006-2007년쯤에 알게 되었는데, 양준모씨의 목소리가 너무 좋아서 즐겨 들었던 기억이 나요. 그런데 이 곡이 지금은 세월호 추모곡이 되어 있네요. 그 이유와는 상관 없이, 가사의 내용과 멜로디가 마종기 시인의 시와 너무 잘 어울리는 곡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한 편으로는 정호승 시인의 시와도 잘 어울리는 노래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요즘 추운 날씨 탓에 움츠러들기 쉬운데요, 따뜻한 시와 좋은 노래와 함께 포근한 하루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2주 후에 돌아올게요.

 

♫ 양준모_내 영혼 바람 되어: https://youtu.be/Oa0cpu5N5a0

 


필자 마리횬

아이폰 팟케스트 <마리횬의 시와 음악공간(2012)>에서 러시아의 시와 노래를 직접 번역하여 소개하는 방송을 진행하였고, 호주 퀸즐랜드주 유일의 한인라디오방송국에서 시를 읽고 생각을 나누는 <시가 필요한 시간(2016-2018)>을 진행하며 많은 사랑을 받았다. 연세대학교에서 노어노문학을 전공하였고, 현재 동대학원에서 러시아 문학을 공부하고 있다.  

여섯 번째 시간, 기다림 [시가 필요한 시간]

여섯 번째 시간, 기다림

 

마리횬

 

안녕하세요, 시가 필요한 시간입니다. 여러분은 누군가를 오래 기다려보신 적 있으세요? 누군가를 기다릴 때의 그 감정을 뭐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요? 누군가는 설렘으로 느끼겠지만, 짜증으로 여기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제가 한 번은 친구랑 대학로에 가기로 하고 근처 카페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한 적이 있어요. 제가 길을 몰라서 그 친구와 꼭 같이 가야만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친구가 10분 후면 도착한다고 해서 카페에 있는 푹신한 쇼파에 자리를 잡고 앉아 친구를 기다렸죠.

 

그런데, 자꾸만 문을 보게 되는 거예요. 문이 열릴 때 ‘그 친구인가?’ 하고 보면 아니고, 또 누가 들어오길래 ‘내 친구인가?’ 하고 보면 아니더라구요.

막상 문이 열리면 다른 사람들만 들어오고, 그럴 때마다 오래 기다린 것도 아닌데 ‘아 왜 안 나오지’하고 ‘빨리 왔으면’ 하고 생각했던 적이 있어요. 여러분도 이런 경험 있으시죠? 가만히 있어도 어련히 알아서 도착 할 텐데, 왠지 모르게 자꾸만 문으로 눈이 가던 경험. 내가 쳐다 본다고 상대방이 더 빨리 나오는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그렇게 기다리다가 얼마쯤 지났을까, 진짜로 그 친구 얼굴이 딱 들어오는데, 세상에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어요.

그 때 문득 어떤 시 한 편이 생각이 났습니다. 그 시가 바로 오늘 첫 번째로 들려드릴 시인데요, 직접 누군가를 기다려 보니까, 이 시만큼 이렇게 누군가를 기다리는 마음을 잘 표현한 시가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누군가를 기다려보지 않은 사람은 절대 알 수 없는 마음, 너를 기다리는 동안의 나의 마음의 심경 고백입니다. 너무나 유명한 시인데요, 황지우 시인의 시 ‘너를 기다리는 동안’입니다.

 

너를 기다리는 동안

                                                황지우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기다려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에리는 일이 있을까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곳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사랑하는 이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아주 먼 데서 나는 너에게 가고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너는 지금 오고 있다

아주 먼 데서 지금도 천천히 오고 있는 너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

남들이 열고 들어오는 문을 통해

내 가슴에 쿵쿵거리는 모든 발자국 따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에게 가고 있다.

 

 

황지우 시인의 시 ‘너를 기다리는 동안’ 들어 보았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이 대목이 참 공감이 됩니다. 약속 장소에 먼저 도착해서 친구를 기다리고 있을 때, 문이 열릴 때마다 나도 모르게 자꾸 문 쪽으로 눈이 갔던 그 경험과 참 비슷하죠.

 ‘사랑하는 이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이 부분도 참 멋진 표현이에요. 이 시 속의 ‘나’는 사실 계속 한 자리에 앉아서 상대방을 기다리는 중이지, 실제로 일어나서 움직이는 건 아니에요. 직접 간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 말은 상대방을 향하는 나의 마음을 표현한 말이 아닐까 싶어요. ‘기다리다 지쳐서 차라리 내가 간다’ 그런 말이 아니라, 몸은 여기서 계속 기다리고 있는데, 내 마음은 이미 오고 있는 너에게 가있다는 거죠. 그만큼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는 표현이죠. 그래서 마지막에 ‘너를 기다리는 동안’이라고 말하면서 ‘남들이 열고 들어오는 문을 통해’서 너에게로 ‘가고’ 있고, ‘가슴에 쿵쿵거림’을 따라 너에게로 ‘가고 있다’ 라는 표현을 쓰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또한 시인은 사람과 사람의 만남, 두 사람의 인연이라는 것 역시,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도 시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아주 데서 나는 너에게 가고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너는 지금 오고 있다

 

아주 먼 데서부터 아주 오랜 세월을 다 해서 와야지만 서로가 만날 수 있다는 말인데요, 생각해보면 정말 그렇지 않나요? 내가 지금 알고 있는 주변의 친구들, 지인들을 생각해 봐도, 그들과 ‘지금’ ‘이 시점’에 ‘이 곳’에서 만나고 있다는 것이 엄청난 확률이죠.

제가 한국에서 알게 된 스웨덴 친구가 한 명 있는데, 사실 50대 아주머니셔서 우리 문화에서 친구라고 하기는 조금 멋쩍지만, 한국을 좋아하고, 한국어를 좋아하는 분이어서 서로 좋은 ‘친구’로 지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이 친구는 스웨덴에 있었어요. 아주 먼 데서 왔죠. 그리고 이 친구에게는 50년이 넘는 세월이, 저에게는 30년이 넘는 세월이 흐른 뒤인 2019년이 되어서야, 우리가 한국에서 서로 이렇게 만나고 있는 거니까,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우리가 만난 것이겠죠.

학교에서, 직장에서, 이웃에서 알고 만나게 된 모든 사람들과의 인연을 생각해 봐도, 한 사람과 사람이 인연으로 만난다는 것이 이 시 구절이 잘 말해주듯 얼마나 어렵고 놀라운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주변의 누군가와의 만남을 기다릴 때, 그 사람과의 인연을 이렇게 생각을 해 본다면, 아무리 오래 기다리더라도 결코 그 시간이 길게 느껴지지 않을 겁니다. 그 사람을 만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소중한 시간일 테니까요.

그리고 어쩌면 만남과 기다림이 결코 다른 말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만남이 있으려면 오랜 기다림이 있어야 하고, 또 오래 기다린 만큼 그 만남이 값질 테니까요.

 

이 시와 함께 들려드릴 노래는 러블리벗이라는 프로젝트팀이 작사 작곡하고, 홍재목이 부른 ‘그늘 같은 늘 같은’이라는 곡입니다. 지금은 겨울이라 따뜻한 곳만 찾게 되지만, 여름 한 낮은 그늘이 정말 필요한 시간이죠. 여름에 햇빛이 뜨거울 때는 짧은 그늘도 얼마나 반가운지 모릅니다. 이 곡에서는 한 겨울에 여름이 되길 기다리면서, 여름이 되면 다시 그늘을 찾듯이 나를 잊지 말고 다시 찾아주기를 기다리노라고 노래하는 곡입니다. 오늘 읽은 기다림의 시와 함께 들으면 좋을 노래, 홍재목의 <그늘 같은 늘 같은> 듣고 오겠습니다.

 

홍재목 – 그늘 같은 늘 같은: https://youtu.be/TvuEKuMx6sM

 

 

 

시가 필요한 시간, 오늘은 기다림을 주제로 함께 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로 들려드릴 시는 문병란 시인의 ‘호수’라는 시입니다. 사실 저는 이 시의 텍스트를 먼저 읽고 난 후에 제목이 ‘호수’라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요, 제목이 왜 호수일까 좀 생각을 하게 되는 시 였습니다. 시가 길지 않은데, 여러분도 시를 들어보시고, 왜 제목이 호수일까 함께 생각해 보면 좋겠어요. 그럼, 시 먼저 듣고 오겠습니다.

 

호수

                   문병란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온 밤에

꼭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다

무수한 어깨들 사이에서

무수한 눈길의 번득임 사이에서

무수한 더 가슴 저미는 고독을 안고

시간의 변두리로 밀려나면

비로소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다

수많은 사람들 사이를 지나고

수많은 사람을 사랑해 버린 다음

비로소 만나야 할 사람

비로소 사랑해야 할 사람

이 긴 기다림은 무엇인가

바람 같은 목마름을 안고

모든 사람과 헤어진 다음

모든 사랑이 끝난 다음

비로소 사랑하고 싶은 사람이여

이 어쩔 수 없는 그리움이여

 

 

문병란 시인의 ‘호수’ 들어보았습니다. 이미 수 많은 사람을 만나고 난 후, 집에 돌아온 밤. 하루를 마무리 할 시간이 되었을 때.. 이 때는 아마도 혼자 있을 때겠죠? 그런데 많은 사람을 다 만나고 난 후, 혼자가 되었을 때, 그때야 비로소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다… 이런 고백은 흔하지 않죠. 그리고 이 시의 화자는 그런 사람을 지금 오래 기다리고 있다는 말을 하고 있는 듯합니다. ‘이 긴 기다림은 무엇인가’라고 표현하고 있죠. 이것은 아직 그런 사람을 만나지 않았다는 이야기로도 들립니다.

‘모든 사랑이 끝난 다음’에 비로소 사랑하고 싶다고 하는 이 고백은, 그냥 스쳐 지나가는 사람, 여러 거쳐가는 사랑 중에 한 사람이 아니라, 더 이상의 어떤 시행착오 없이, 가장 마지막으로 만날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시를 들으면 ‘끝사랑’이라는 말이 생각이 나요. 첫사랑은 여러 명 일 수 있는데, 끝사랑은 딱 한 사람뿐이잖아요. 헤어지고 또 다른 사람을 만나는 그런 지나가는 사랑이 아니라, 진짜 마지막 사랑이라는 건, 그 사람을 평생 사랑하고 살겠다는 이야기겠죠. 이 시의 표현을 빌리면, ‘수많은 사람’ 또는 ‘모든 사람’에 속하는 게 아니라 마지막으로 ‘비로소 사랑하고 싶은 사람’에 속할 누군가를 기다린다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어쩌면 정말 긴 기다림이기에, 시인은 ‘이 어쩔 수 없는 그리움이여’라고 표현할 수 밖에 없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시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읽어주면 정말 좋을 것 같아요. ‘나에게는 너가 바로 그 사람이다’ 이런 의미로 읽어주면 좋을 것 같은데요? 나의 모든 사랑의 마지막이 너다. 내가 하루 종일 수 많은 사람들을 만나지만, 나의 고독의 시간에 생각나고 그리워지는 존재는 너다. 와, 이런 고백은 참 멋지죠.

 

그런데 왜 제목이 ‘호수’일까요? ‘바다’도 아니고, ‘강’도 아니고.

저도 나름 열심히 고민해보고 유추해낸 결과가 있긴 한데, 제가 미리 말씀은 안 드리고, 처음으로 “애독자 퀴즈”를 내볼까 합니다.

​이 문병란 시인의 시 ‘호수’를 다시 한 번 읽어보시고, 왜 제목이 ‘호수’일까에 대한 나름의 생각들을 댓글로 적어주시면 돼요.

시와 문학에는 정답이 있는 게 아니니까, 너무 부담 갖지 마시고 본인의 감상, 느낌 생각들을 짧게라도 적어주세요. 적어주신 분들에 한해서 소정의 상품을 드리겠습니다.

​저에게는 여러분들의 댓글을 기다리는 2주가 되겠네요. ^_^

 

많은 시인들이 사랑을 ‘외로움’이다, 혹은 ‘그리움’이다라고 이야기하는데, 문병란 시인은 사랑을 ‘기다림’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아요. 한 사람을 만나기 위한 긴 여정, 그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것이고, 그런 깨달음은 아무 때나 오는 게 아니라, 무수한 사람들의 어깨와 무수한 눈길을 다 지나고 시간의 변두리로 물러나 혼자 있게 되었을 때, 가슴 저미는 고독을 안고 서 있는 그런 순간에 비로소 만나게 되는 것이라고 이야기 하고 있죠. 기다림과 고독이 만나는 순간이네요. 지난 글에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고독의 시간, 누군가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것만 같은 그 외로움의 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가 우리 삶에서 중요한 시간이라는 것, 다시 한 번 기억하게 됩니다.

 

오늘 끝 곡으로는 심규선 작사 작곡의 심규선이 부른 ‘강’이라는 곡 들려드릴게요. 이 노래는 심규선씨가 갑작스럽게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난 후 그 감정을 담아 쓴 곡이라고 소개되어 있는데요, 이미 이 세상을 떠나고 다시는 만날 수 없다는 것만큼 긴 기다림이 있을까, 그것만큼 어쩔 수 없는 그리움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문병란 시인의 시를 읽으면서 많이 생각났던 곡이었는데, 여러분께도 나눌게요.

 오늘도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2주 후에 다시 돌아올게요.

 

심규선 – 강https://youtu.be/mDSO6bfk2x8

 


필자 마리횬

아이폰 팟케스트 <마리횬의 시와 음악공간(2012)>에서 러시아의 시와 노래를 직접 번역하여 소개하는 방송을 진행하였고, 호주 퀸즐랜드주 유일의 한인라디오방송국에서 시를 읽고 생각을 나누는 <시가 필요한 시간(2016-2018)>을 진행하며 많은 사랑을 받았다. 연세대학교에서 노어노문학을 전공하였고, 현재 동대학원에서 러시아 문학을 공부하고 있다.  

응! 어서 와~ 볼드모트는 처음이지? 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톡,톡,씨네톡]

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전태일을 잘 몰랐던 20대 청춘이 영화로 전태일을 만나고 돌아본 지금 우리 삶에 대한 단상 – 편집자 주

 

! 어서 와~ 볼드모트는 처음이지?

 

도시인

 

아직 11월 말인데 거리는 벌써 크리스마스 분위기에 빠져있다. 크리스마스 캐럴이 길가와 카페를 채우고 방금 커피 주문을 받던 점원은 루돌프 뿔을 머리에 이고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할로윈 데이였는데… 올해 할로윈의 주인공은 조커와 할리퀸이다. 영화의 힘일까? 귀신을 기리지 않고 캐릭터 인기투표의 장이 돼가고 있다.

마침 라떼가 나왔으니, 한잔 들이키고 내 어릴 적 이야기를 해보겠다. 그때는 세계가 해리포터에 빠졌었다. 모두 마법사 망토를 두르고 나무 막대기를 휘두르며 “윙가르디움 레비오사”라고 외치고 다녔었지. 물론, 지금처럼 활발한 행사는 아니었지만 할로윈 데이 때는 다들 해리가 돼 이마 한편에 번갯불을 이고 다녔었다. 그런데 할로윈 데이에 볼드모트 분장을 한 사람은 본 적이 없다. 너무나도 두려운 존재였기에 이름조차 부르면 안 되는 사람 분장을 하는 건 너무 끔찍해서일까?

하지만 이건 내 라떼의 이야기고 요즘 이야기를 하자. 이제 한국은 제법 문화적으로 풍부해진 것 같다. 할리우드, 일본 애니메이션을 들여오기만 하는 게 아니라, 우리의 문화도 수출하고 있다. 가장 잘나가는 것 중 하나가 방탄소년단일 것이다. 여기 카페에서도 방탄소년단의 캐릭터가 새겨진 굿즈를 팔고 있다.

사실 난 보이그룹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지만, 뇌리에 깊숙이 박힌 한 장면이 있다. 음악프로에서 노래가 시작하기 전에 한 멤버가 말했다. “응! 어서 와~ 방탄은 처음이지?” 남자에게는 조금 부담스러울 수 있지만 여자 아이들에게는 충분히 매혹적인 표현으로 속삭인다. 그 어떤 자기소개보다 짜릿했다.

 

전태일, 너는 나에게 부담감을 줬어.

 

최근에 본 영화 중 나에게 방탄소년단의 부담스럽고 낯부끄러운 인사와 같은 짜릿함을 준 게 뭘까?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이다.

나에게는 옛사람인 전태일(1948.8.26~1970.11.13)은 한국 현대사에서 큰 인상을 주고 떠나간 사람이지만, 정규 역사 수업에서는 배운 기억이 없다. 어르신들 얘기를 엿듣거나 책이나, 유튜브에서 가끔 튀어나오기는 하지만 클릭해 본 적이 없어, 이름은 들어봤지만, 정작 옛날에 뭘 한 인물인지는 잘 몰랐다. 이러던 내가 그의 전기를 다룬 영화를 보게 됐다.

영화에서 말하는 그의 이미지를 한 문장으로 요약해볼까? ‘세상과 대척점에 서서 노동자의 삶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희생한 인물’ 물론, 한 인물을 단 한 문장으로 요약하는 건 위험한 일반화지만 이 글은 전태일에 관한 글이 아니니 이 정도면 충분할 것 같다.

사실 나는 전태일이란 이름을 들으면 볼드모트와 비슷한 느낌을 받는다. 뭔가 큰일을 했지만, 지금 그 사람 이야기를 하면 분위기가 묘해질 수 있으니까 굳이 그 이름을 꺼내면 안 되는 사람 정도? 이른바 금기어에 갇혔다고나 할까.

어른들이 공통으로 하는 조언 중 하나가 ‘정치·종교·집안 문제는 말하는 게 아니여~’인데, 전태일은 이 중 정치 이데올로기와 관련된 이야기 주제일 것이다. 이 세 주제는 개인의 바뀔 수 없는 신념과 관련된 문제라서 이야기해서는 안 되는 걸까? 반면에 신변잡기 같은 ‘small talk’이 누구에게나 인기 있는 이유는 누구에게나 재미있으면서 이렇든 저렇든 누구에게나 큰 상관 없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정치적인 문제를 일면식도 없는 사람과 나누면서 공감하는 건 도박에 가깝다. 모 아니면 도, 아니 마이너스 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 하나 모든 사람은 아니더라도 사람들 대부분이 공감하는, 해야 하는 주제가 있긴 하다. 바로 정치적 올바름(PC)이다.

사실 정치적 올바름의 문제는 표면적으로는 옳지만, 현대에는 약간 변질되지 않았던가. 이 문제의 뿌리는 언어적 제국주의에 바탕을 두고 있다. 약자를 보호해야 함은 옳지만, 왜 약자를 보호해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는 사실상 금기되어 있다. 강자가 강해진 이유는 크게 중요하지 않고 논의의 대상이 되지도 않는다.

이데올로기의 시대는 종말을 고했다는 말이 있지만, 나는 그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현대까지 살아남은 이데올로기는 생활에 녹아내릴 수 있는 이데올로기일 뿐이다. 식어버린 체다치즈 감자튀김처럼 우리는 무언가에 둘러싸여 끈끈하게 굳혀졌다.

굳혀진 끈끈함 중 하나는 쉬이 공감 받고 싶은 열망일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진정 나누고 싶고 나누어야 할 이야기가 아닌 쉽게 공감 받을 수 있는 이야기만 하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 사이에서 예측 가능한 대화들은 늘 같은 자리를 빙글빙글 돌고 있다.

 

갑자기 분위기 미스터 션샤인

 

김태리와 이병헌을 필두로 <미스터 션샤인>이 대한민국을 휩쓸었을 때가 있었다. 어쩌면 고리타분한 소재인 일제강점기의 이야기를 아주 멋들어지게 드라마는 그려냈고, 이 드라마는 지금도 커지고 있는 반일본 정서의 기점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왜 우리는 갑자기 <미스터 션샤인>에 매료됐던 걸까?

역사적 사건들은 과거의 일이다. 과거의 일은 현대를 사는 우리에겐 발효된, 묵은 옛날의 이야기다. 그래서 다시 새길만 하다. 시대가 지날수록 정치·사회·문화 모두가 변해가므로 그 당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잘 다듬어진 교두보가 필요하다. 일제강점기를 이해하기에 <미스터 션샤인>은 매혹적인 교두보였다. 세대 차이가 나는 현대와 과거의 중간 지점에서 서로를 잊는 다리의 역할을 한다는 것은 문화 예술의 중요한 기능 중 하나일 것이다.

세상은 너무나도 빨리 변한다. 조선말부터 한반도의 사람들은 그 세상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채 부적응의 대가를 너무나도 아프게 치러왔다. 이러한 과거의 역사를 생각지 않고 지금 현실의 삶에 만족한다고 대화의 구심점이 되는 주제가 무미건조하게 언제나 듣기 좋은 이야기가 되는 게 과연 우리 자신에게 좋을지 의구심이 생긴다.

금기어라고 느낄 수 있는 토론 논제가 어쩌면 우리 생활에서 서로를 단절하고 고립시키는 깊숙이 박힌 악순환의 고리와 맞물려 있는지도 모른다. 내 의견이 옳다고 말할 수 있는 자유는, 나는 당신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다고 말하는 피드백을 동반한다. 진정한 자유는 다른 사람은 나와 다를 수 있다는 이해심과 스스로 충분히 가치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자신을 사랑하는 자존감에서 나오는 것이다.

또 금기어는 누군가에겐 상처일 수 있는 민감한 소재일 것이다. 아무리 자신이 옳다고 해도 타인의 아픔을 무시한 채 자만심만으로 대화를 만들어가는 건 옳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문제를 지금부터 이야기해야 할까? 사실 너무나도 많다. 비싼 점심 메뉴, 비싼 커피값, 의미 없는 학교 수업, 실업 문제 등 과연 지금 우리의 생생한 삶을 둘러싼 이야깃거리는 아주 많다. 코를 뚫은 남자, 무릎 꿇고 구걸하는 걸인, 어제 세상을 떠난 누군가를 보라. 생각보다 우리는 대단한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러니 한 가지 문제만 골라보자. 그리고 그 문제에 대해 충분히 생각해 보자. 내 의견뿐만 아니라 구글 선생님에게도 물어보고 책도 읽어보자. 겹겹이 자료를 쌓고 준비가 끝났으면 주변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자.

 

“응! 어서 와~ 볼드모트는 처음이지?”

 

연말 특집 – 한국 인디씬을 위하여 [악(樂)인열전]⑤

연말 특집 – 한국 인디씬을 위하여

 

이 현 (건국대학교 철학과)

 

항상 외국 아티스트를 소개하고 공부하면서, 한국 아티스트들을 소개하고 싶다는 갈증이 있었다. 그런데 뭐랄까. 나에게 있어서 한국 인디씬은 참 아픈 손가락이다. 실망과 기대가 공존하고 있다라고 해야하나. 개인적으로 2000년대부터 다시 한국 인디씬이 대중들에게 주목 받고 장기하, 십센치, 혁오 등이 대중음악에 안착한 것은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 물론 진성 덕후들은 난색을 보이겠지만, 이러한 성공 사례는 대중음악 전반의 퀄리티를 높여주는 중요한 요소이고 이러한 성공은 인디씬 활성에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성공사례가 한편으로는 인디씬의 개성을 사라지게 만들고 흔히 ‘돈이 되는 인디’가 생겨나면서, 예전에 비하면 인디의 중요한 핵심인 ‘다양성’이 사라진 것도 사실이다.

 

나의 기대가 지나치게 큰 걸까? 물론 어느 시대에나 주류 흐름이라는 것이 있고, 인디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흐름을 부정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흐름 속에서도 자기의 색을 찾고 차별화를 줄 수 있는 음악들이 많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은 아쉬울 뿐이다.

 

좋은 인디 음악을 하고 있는 아티스트들을 찾기가 쉽지 않다. 좋은 인디음악이란 무엇일까? 완벽한 사운드 메이킹? 멋있는 가사 스토리텔링? 이러한 기술적인 부분들은 메이저 음악을 이길 수도 없으며, 이길 필요도 없다. 이미 하나의 거대한 산업이 되어버린 ‘음악’의 조류 속에서 한낫 물고기 한 마리가 파도를 거스를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 수는 적지만 그 파도 속에서 힘차게 자기의 길을 해엄치는 ‘대어’들이 있고, 우리는 그 대어를 낚을 때 월척이라고 부를 것이다.

 

나는 현재 인디씬에 머물러 있는 아티스트들을 응원하고 있다. 인디씬의 침체는 아티스트들의 역량들을 떠나서 환경적으로 너무나 열악하고, 음원 수익의 불공정한 구조가 그것을 더욱 가속화시키고 있다. 솔직히 한국에 인디씬의 활성화를 떠나서, 살아남아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따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 한국 인디씬에서 꾸준히 자신들의 색을 찾고 있는 아티스트들은 분명히 있다. 연말도 됐으니, 이런 반골들에게 감사함을 표하며, 음악 덕후로서 앞으로 주목할 만한 한국 아티스트들 소개하고자한다.

 

O.O.O(오오오)

이미지 출처, O.O.O 공식 페이스북

 

2018년 11월에 첫 정규앨범을 낸 4인조 밴드이다. 이들의 음악세계는 한 외로운 개인의 시선으로부터 시작한다. 이들의 전 미니앨범들인 [HOME] [CLOSET], [GARDEN]은 한 개인의 우울한 내면에 집중했다. 그들의 섬세하고 몽환적인 사운드는 갇혀있는 한 개인의 감정의 미묘함을 표현하고 있다. 이들의 앨범 제목들은 ‘집’, ‘정원’과 같이 외부와 내부를 구분하는 공간이다. 이 공간들은 외부로부터 자신을 소외시키는 내면적인 공간이며, 떠나고 싶은 곳이었던 HOME에서부터 떠나기 전 마지막 준비를 하는 곳 CLOSET. 그리고 집 밖으로 나왔으나 완전한 밖은 아닌, 안이라고도 밖이라고도 할 수 없는 공간, 그 경계에 있는 GARDEN에 나왔고, 정규앨범 [PLAYGROUND]에 이르면서, 외부와 소통하기 시작한다. 이들은 외로운 ‘나’와 ‘타인’ 사이에 있는 ‘우리’라는 흐름을 타고 나아가고 있다.

 

O.O.O – [PLAYGROUND]

https://www.youtube.com/playlist?list=OLAK5uy_kye2HmUFurYW0LSa0KYu0rFKDqPZGP7tl

 

O.O.O – [GARDEN]

https://www.youtube.com/playlist?list=OLAK5uy_lNjNRswUtyxAX7ImrpC61Z3SEfshxrUD4

 

O.O.O – 푸른달

https://youtu.be/b7fkx4VZuXg

 

 

최항석과 부기몬스터

이미지출처, 한국대중음악상

 

2018년부터 개최된 <서울블루스페스티벌>을 기점으로 재야의 블루스 뮤지션들이 참여하며 한국 블루스의 기준을 바꿔가고 있다. 이때 새롭게 등장한 뮤지션이 ‘최항석과 부기몬스터’이다. 2019년 ‘난 뚱뚱해’로 한국대중음악상 ‘최우수 록 부분’ 후보에 오르면서 한국 블루스 부활의 신호탄을 날렸다. 그가 만들어가고 있는 블루스는 기존 미국정서에 벗어나 예스러운 한국 정서의 블루스이다. 유머와 위트 대신 해학과 풍자를 전면으로 내세우면서, 흔히 ‘아재감성’이 물씬 풍긴다. 블루스의 핵심적인 정서라면 특유의 끈적함인데, 그것의 근원은 멜랑꼴리한 감정에 있다. 그러나 이러한 멜랑꼴리는 한국인들이 느끼기 힘든 정서이고 결국 블루스는 미국에서만 먹히는 음악인가 싶었다. 그러나 최항석은 멜랑꼴리 대신 ‘한’으로 끈적임을 만들어 벌렸다. 블루스하고 어울리는 것은 진한 커피였지만, 최항석에게 어울리는 것은 뜨끈한 국밥이다. 한국 블루스가 새롭게 정의되고 있다.

 

최항석과 부기몬스터 – <난 뚱뚱해>

https://youtu.be/QblUiRdp3Ek

 

최항석과 부기몬스터 – [Good man but Blues man]

https://www.youtube.com/playlist?list=PLZnZnYMM0GS7XqM2Vbm3soRTp49dFKZq_

 

최항석과 부기몬스터 x 엄인호 – <푸들푸들 블루스>

https://youtu.be/VBKjQAz1kwc

 

 

보수동쿨러

이미지 출처, 포크라노스

 

이 밴드는 2019년 최고의 발견이자, 극찬이 전혀 아깝지 않은 밴드이다. 부산에서 활동하는 인디 밴드로서 그들은 쟁글 팝에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했다. 복고적이면서 세련된 사운드는 익숙하면서 새롭다. 기존 독법에 새로운 해석은 그들의 음악관을 잘 보여준다. 몽환적이면서 동시에 명료한 문제작 <3080>의 가사처럼, “삶은 누구에게나 실험이고 중독의 연속”이다. 그리고 그 ”실험은 경계를 부풀리는 새로움”을 전해줄 것이다. 이 가사말은 그들의 음악을 대변하고 있다. 익숙함에 멀어지고 벗어나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영원한 것은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들의 음악은 익숙한 독법 속에서 그 익숙함을 벗어나고자 한다. 일상은 늘 반복되지만 영원하지 않는 것처럼, 익숙함은 영원할거 같지만 영원하지 않다. 그들의 음악은 익숙한 장르 안에서 이질적인 부분은 계속 끄집어낸다. 그렇기에 그들의 음악은 익숙하면서 이질적인 모순이다. 한마디로 그들은 “규정되지 않는, 구분하지 않는 끝없는 감정의 재생산”이다.

 

보수동쿨러 – <3080>

https://youtu.be/WHhbac6PVqs

 

보수동쿨러 – <목화>

https://youtu.be/wyJcV_V82Bw

 

보수동쿨러 – <죽여줘>

https://youtu.be/FwjWwRCA860

 

인디의 가치는 무엇인가? 사실 함부로 독단할 수 없는 영역이다. 왜냐하면 정의함 그 자체가 인디에게는 맞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음악덕후로서 인디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일상 속에서 나에게 새로움을 전달해주기 때문이다. 투박하지만 신선한 충격. 모두가 좋아하지는 않지만 나에게 너무나도 잘 맞는 음악. 나에게 너무나도 와 닿는 음악. 그것이 인디의 매력이 아닐까.

연말을 기념할 당신만의 음악을 찾아보는 것도 좋은 경험일 것이다. 모두가 다 알고 있지 않지만 좋은 노래를 찾는 것만큼 즐거운 것도 없으니 말이다. 세상에는 들을 수 있는 노래는 많지만 나에게 다가오고 와 닿는 노래는 쉽게 오지 않는 법이니 말이다.

 

다섯 번째 시간, 고독 [시가 필요한 시간]

다섯 번째 시간, 고독

 

마리횬

 

오늘도 역시나 시 읽기 참 좋은 고독한 밤입니다. 오늘 함께 이야기 해 볼 주제는 ‘고독’인데요, 외로울 고(孤)에 홀로 독(獨), 이 두 한자로 이루어진 말입니다. 중국어로는 구두(GuDu)라고 발음하고, 일본어로는 고도끄(こどく) 라고 한다고 하네요. 같은 한자를 써서 발음도 비슷한가 봅니다. 러시아어로는 아진노체스트보(Одиночество)라고 하는데, 아진(один)이란 숫자 하나(1)를 뜻하고, 뒤에 어떤 ‘상태’를 나타내는 추상명사형 어미 체스트보(чество)라는 어미가 붙어서 ‘혼자 있는 상태’라는 뜻이 되죠. 어느 나라에서든 고독이란 외로이 홀로 있는 상태를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저는 오늘, 이 고독이란 것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라고 이야기 하고 싶습니다. 고독이 필요하다!

사람은 아무도 없는 공간에 홀로 있을 때에 그 사람의 진면목이 나온다고 하죠? 많은 사람들 틈에서, 그 복잡한 인간관계 속에서는 쉽게 드러나지 않는 어떤 나만의 모습이 있기 마련이죠. 사람들 만나서 얘기 듣는 걸 좋아하고, 왁자지껄 사람들이랑 모여서 놀면서 시간 보내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혼자 방에 돌아와서 조용히 생각도 정리하고 할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사람들 틈에서는 내 개인적인 생각을 정리하거나, 하루를 곱씹어보거나 하는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기가 어렵죠. 쉴 새 없이 일만 하는 쳇바퀴 도는 일상 속에서도 사실은 앞으로의 계획이나 자기 개발적인 생각들을 하기 힘듭니다.

그런 의미에서 고독이라는 게 꼭 나쁜 것만은 아닐 겁니다. 고독하지 않고서는 시를 쓰기도 어려울 거에요.

오늘 첫 번째로 소개해드릴 시도 고독해 보지 않고는 절대 쓸 수 없는 시입니다. 오늘 먼저 만나 볼 시, 정진규 시인의 ‘연필로 쓰기’라는 시입니다. 혹시… “사랑을 쓰려거든 연필로 쓰세요”가 생각나시나요? 하하.

이 시를 읽으면, 홀로 있는 것의 힘이랄까, 고독한 사람만이 느끼고 생각할 수 있는 어떤 특별한 감정들을 느끼실 수 있을 겁니다. 시는 조금 길지만 천천히 한 번 감상해보시기 바랍니다.

 

연필로 쓰기

                                정진규

한 밤에 홀로 연필을 깎으면 향그런 영혼의 냄새가 방 안 가득 넘치더라고 말씀하셨다는 그 분처럼 이제 나도 연필로만 시를 쓰고자 합니다. 한 번 쓰고 나면 그뿐 지워버릴 수 없는 나의 생애 그것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연필로 쓰고 지워버릴 수 있는 나의 생애 다시 고쳐 쓸 수 있는 나의 생애 용서받고자 하는 자의 서러운 예비 그렇게 살고 싶기 때문입니다. 연필로 쓰기 잘못 간 서로의 길은 서로가 지워드릴 수 있기를 나는 바랍니다. 떳떳했던 나의 길 진실의 길 그것 마저 누가 지워버린다 해도 나는 섭섭할 것 같지 않습니다. 나는 남기고자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감추고자 하는 자의 비겁함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오직 향그런 영혼의 냄새로 만나고 싶기 때문입니다.

 

 

정진규 시인의 시 ‘연필로 쓰기’ 들어 보았습니다. 연필로 쓰기와 우리 인생을 대비시켜서 표현을 하고 있죠. ‘연필로 글씨를 쓰다가 틀리면 지우개로 지우면 된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사실일 겁니다. 시를 쓸 때도 마찬가지로, 연필로 시를 쓰다가 시어 하나를 잘못 쓰거나 하면, 지우고 다른 단어로 고쳐 쓸 수가 있죠. 그런데 우리가 사는 삶은 실수했다고 해서 그걸 지워내고 다시 그 시간을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아마도 시인은 연필로 쓴 시를 고쳐 쓰다가 ‘내 삶도 이러했으면..’ 하는 생각을 하게 된 것 같습니다. 사실 시 한 편 쓰는 것도 정말 쉬운 게 아니죠. 물론 시인마다 좀 다르겠지만, 창작의 고통이라는 게 거의 해산의 고통이랑 맞먹는, 그런 엄청난 노력으로 시 한 편이 쓰여진다고 하던데, 그렇게 어렵게 쓰여지는 시도, 쓰다가 틀리면 지우고 처음부터 다시 쓸 수 있다는 거죠. 그런데 우리의 삶은 그것조차도 안되니까, 생각해보면 산다는 게 정말 쉬운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하루하루 지워버릴 수 없는 생애를 차곡차곡 살아내고 있는 거니까요.

그래서 시인은 연필처럼 지우고 다시 쓸 수 있는 생애를 꿈꿉니다. 그런데 내가 잘못간 길을 지울 수 있다는 얘기는, “떳떳했던 나의 길, 내가 살아온 진실의 길” 마저도 지워질 수 있다는 이야기가 되어 버린다는 것을 시인은 말하고 있어요. 삶이 연필로 쓰는 것과 같다면, 잘못만 지우는 게 아니라 긍정적인 것들도 같이 지워질 수 있겠죠. 그렇게 된다면 여러분은 어떨 것 같으세요? 잘못은 지워지면 좋겠지만, 내가 이뤄낸 성과와 명성들까지 같이 지워진다면..? 그렇게 생각하니까 또 지우고 다시 살 수 있다는 것이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닌 것 같이 들립니다.

하지만 시인은 그럴지라도 괜찮다고 고백합니다. 잘못간 서로의 길을 고쳐서 다시 누군가를 만날 수 있다면, ‘내가 살아왔던 길이 지워져도 좋다’ 라고 고백하고 있죠.

불가능한 것이지만 어쩌면 그 불가능함 때문에 계속해서 시를 써 나갈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껏 살아온 삶은 다시 쓸 수 없기에, 이제라도 연필로 시를 쓰겠다, 시를 쓰듯 내 삶을 살겠다, 시가 곧 내 삶이다. 이러한 고백으로도 들립니다.

오늘, 고독에 관한 시 첫 번째 시로, 정진규 시인의 ‘연필로 쓰기’ 만나 봤는데요, 이 시와 함께 들으면 좋을 노래로 임재범의 <비상>이라는 곡 가져 왔습니다. 지금은 잠시 혼자만의 시간, 혼자만의 공간에 머물러 있지만, 그 고독을 원동력 삼아 이제 날개를 펴고 비상하리라 하고 노래하는 곡입니다. ‘고독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야’라는 가사가 나오는데요, 고독한 시간을 보내고 계신 분들, 그 시간을 에너지로 삼아서 힘내시라는 의미로 들려 드리고 싶습니다.

 

임재범 비상 _ https://youtu.be/5LxGzSFnucE

 

 

 

시가 필요한 시간, 오늘 ‘고독’을 주제로 함께 하고 계신데요, 두 번째로 소개해드릴 시는 오세영 시인의 ‘바닷가에서’라는 제목의 시입니다. 여러분은 혼자 바닷가에 나가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사람들과 다 같이 함께 바닷가에서 한 시간 노는 것과, 홀로 조용히 한 시간 바닷가를 거니는 것에는, 똑같이 한 시간을 머무는 것이지만 아마 확연한 차이가 있을 겁니다. 오늘 두 번째 시는 홀로 바닷가에 나갔을 때에만 느낄 수 있고 생각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닐까 싶습니다. 오세영 시인의 ‘바닷가에서’ 듣고 오겠습니다.

 

바닷가에서

                               오세영

사는 길이 높고 가파르거든

바닷가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를 보아라

 

아래로 아래로 흐르는 물이

하나 되어 가득히 차오르는 수평선,

스스로 자신을 낮추는 자가 얻는

평안이 거기 있다

 

사는 길이 어둡고 막막하거든

바닷가

아득히 지는 일몰을 보아라

 

어둠 속에서 어둠 속으로 고이는 빛이

마침내 밝히는 여명,

스스로 자신을 포기하는 자가 얻는

충족이 거기 있다

 

사는 길이 슬프고 외롭거든

바닷가

가물가물 멀리 떠 있는 섬을 보아라

 

홀로 견디는 것은 순결한 것,

멀리 있는 것은 아름다운 것,

스스로 자신을 감내하는 자의 의지가

거기 있다

 

 

오세영 시인의 시 ‘바닷가에서’ 읽어 보았습니다. 홀로 나간 바닷가라고 해서 뭔가 굉장히 쓸쓸한 분위기일 것 같았는데요, 막상 시를 읽어보니 시 구절 하나 하나가 다 감동으로 다가옵니다.

파도, 수평선, 일몰, 그리고 바다에 떠 있는 섬. 이 모든 것들은 바닷가에 가면 흔히 마주하는 것들인데, 그것을 바라보면서 시인은 ‘스스로 낮추는 자의 평안’, ‘스스로 포기하는 자의 충족’, 그리고 ‘스스로 감내하는 자의 의지’를 읽어냅니다.

 

오늘 주제가 고독인 만큼, 이 시는 고독의 힘을 잘 얘기해 주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사실, 사는 길이 높고 가파르지 않은 사람은 없거든요. 돈이 많든 적든, 얼굴이 예쁘든 그렇지 않든, 누구나 한 번씩은 사는 길이 어둡고 막막할 때가 있고, 사는 길이 슬프고 외로울 때가 분명 있는 법이죠.

외로움이 아예 없을 순 없겠지만, 하지만 그런 시간들을 그냥 외로움에 몸부림치면서 흘려 보낼 게 아니라, 자신에게 좀 더 몰입하는 시간으로, 그리고 자기 자신의 가치를 더 발견하는 시간으로 충분히 사용할 수 있지 않을까요? 혼자 가만히 생각하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갖지 않으면, 아무 성찰 없이 하루를 살게 될 겁니다.

그런 고독의 시간이 뜻하지 않게 찾아오는 이유가 분명히 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곽재구 시인이 쓴 여행 에세이 중에, ‘곽재구의 포구기행’이라는 책이 있는데요, 그 책에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인생이 아름다운 것은, 우리들 삶의 골목골목에 예정도 없이 찾아오는 외로움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외로움이 찾아올 때, 그것을 충분히 견뎌내며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다들 아파하고 방황한다. 이 점이 사랑이 찾아올 때와는 확연히 다르다. 외로움이 찾아올 때, 사실은 그 순간이 인생에 있어 사랑이 찾아올 때보다 더 귀한 시간이다. 쓴 외로움을 받아들이는 방식에 따라 한 인간의 삶의 깊이, 삶의 우아한 형상들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요즘 쌀쌀한 날씨 탓에 고독에 찬 밤을 보내고 계신 분들! 내 인생에 귀한 시간이 찾아왔다 생각하시고, 견뎌 내면서 힘 내시기 바랍니다.

오늘 두 번째로 들려드릴 노래로 박효신의 ‘숨’을 가져왔어요. 가사와 멜로디가 참 위로가 되는 곡입니다. 이 노래에 이런 가사가 있어요.

 

“힘 없이 멈춰있던 세상에 비가 내리고, 다시 자라난 오늘, 그 하루를 살아.”

 

여러분! 외롭고 힘들 때가 있습니다. 다 멈춰버린 것만 같은, 겨울 같은 때가 있죠. 하지만 그 시간들이 찾아왔을 때, 오늘 하루 쉴 숨이 있다는 것, 오늘 하루 쉴 곳이 있다는 것에 감사할 수 있기를. 그리고 내 곁에 언제나 나를 변함없이 지켜주고 응원해주는 바다 같은 존재, 봄비 같은 존재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고 힘내시기 바랍니다.

오늘 함께 나눈 고독의 힘! 꼭 기억하시면서 하루 잘 마무리 하시길 바랄게요. 저는 2주 후에 찾아오겠습니다.

 

박효신 숨https://youtu.be/oBKpJiVEcnU

 

 


필자 마리횬

아이폰 팟케스트 <마리횬의 시와 음악공간(2012)>에서 러시아의 시와 노래를 직접 번역하여 소개하는 방송을 진행하였고, 호주 퀸즐랜드주 유일의 한인라디오방송국에서 시를 읽고 생각을 나누는 <시가 필요한 시간(2016-2018)>을 진행하며 많은 사랑을 받았다. 연세대학교에서 노어노문학을 전공하였고, 현재 동대학원에서 러시아 문학을 공부하고 있다.  

 

간지나는 사춘기 찌질이들의 탄생/소외된 사춘기적 주체 – 더 스미스 [악(樂)인열전]④

간지나는 사춘기 찌질이들의 탄생/소외된 사춘기적 주체 – 더 스미스

 

이 현(건국대학교 철학과)

 

출처 : The Smiths, back in the glory days (Picture: Stills Press Agency/REX/Shutterstock) Read more: https://metro.co.uk/2017/09/21/the-smiths-30-years-since-the-split-and-still-the-best-british-band-ever-6904839/?ito=cbshare Twitter: https://twitter.com/MetroUK | Facebook: https://www.facebook.com/MetroUK/

 

비틀즈 다음으로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영국 밴드는 더 스미스(The Smiths)이다. 스미스는 오늘날 브릿팝(BritPop)이라고 정의 내려지는 장르의 아버지격이 되는 밴드이다. 오늘날 ‘락’을 논하면서 ‘브릿팝’을 논하지 않을 수 없다. 사이키델릭과 함께 브릿팝은 좋든 싫든 많은 이들에게 영향을 주었고, 요즘 인디씬의 주류는 브릿팝의 영향 아래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단지 음악적 스타일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브릿팝이 가지고 있는 주제의식, 감성이 (어쩌면 음악적 스타일보다) 후대 음악인들에게 영감을 줬다.

더 스미스는 비록 활동기간 동안 영국 이외에 지역에서 큰 인기를 얻지 못했지만, 1990년대에 본격적으로 블러나 오아시스로 대표되는 브릿팝 열풍 속에서, 모두들 자신들이 제 2의 스미스라고 자처했으며, ‘스미스’라는 망령은 다시 주위를 맴돌고 있고,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현재 한국에서 대중들에게 주목 받고 있는 인디 밴드들인 ‘잔나비’나 ‘새소년’ 역시 브릿팝적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브릿팝적인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왜 브릿팝은 오늘날까 힘을 가지고 있는가? 어쩌면 ‘브릿팝’스러움은 ‘스미스’스러움의 동의어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브릿팝의 힘은 ‘스미스’에서 온 것일지도 모른다.

출처: albumism

1984년 그들의 데뷔앨범 [The Smiths]가 발표될 때만 해도 스미스가 이토록 큰 영향력을 행사할 것이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스미스의 최고의 앨범을 한 장의 앨범을 뽑으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규 3집 음반 [The Queen Is Dead](1986)를 선택할 것이다. 하지만 ‘밴드 스미스의 힘’은 오히려 [The Smiths]에서 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이유는 앨범의 완성도 때문도, 사춘기 정서로 가득한 때문도 아니다. [The Smiths]의 힘은 당시 주류 팝으로부터 소외 되어왔던 ‘침묵한 다수’가 수면 위로 등장한 첫 시점이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스미스는 복고적 측면이 강하다. 그들이 데뷔한 80년대는 락의 인기가 예전만큼 좋지 못했고, 신디의 발전으로 기타를 베이스로 한 전통적인 락 사운드가 외면받기 시작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니 마(Johnny Marr)의 징글쟁글(jingle-jangle)1) 주법은 기타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했다. 스미스의 노래들은 대체로 보컬이 아닌 기타를 통해 곡의 맬로디를 만들어간다. 그들의 작곡 방식은 먼저 기타로 주선율을 잡고 그 위에 보컬을 입히는 방식이다. 결국 노래이기 이전에 연주곡으로 완성된 이들의 곡에서 모리세이의 보컬은 상당히 제한된다. 하지만 모리세이의 보컬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 가장 효과적으로 자신의 개성을 드러낸다. 보컬의 테크닉을 심하게 요구하지 않기 때문에 모리세이의 보컬 그 자체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된다. 덕분에 그의 혀짧은 발음과 중성적인 목소리 톤은 성숙하지 않은 유아적인 웅얼거림으로 표출된다. 찰랑거리고 밝은 기타 톤과, 아이의 투정 같은 음색, 그리고 문학적이고 자기비하적인 가사는 모리세이를 ‘사춘기적 주체’로 재탄생한다.

모리세이의 ‘사춘기적 주체’는 나 자신 안에 있는 ‘소외된 자아’를 전면으로 세운다. [The Smiths]의 화자는 성적으로 미숙한 사춘기 남자의 ‘여성에 대한 두려움'(“Reel Around the Fountain”, “Pretty Girls Make Graves”)으로 대변된다. 이는 타자에 대한 근본적 두려움에 기인한다. 이는 80년대 영국의 분위기와 맥을 같이한다. 새로운 세계질서 속에서 영국은 한 순간에 추락하게 되고, 새로운 질서를 마주하게 된 영국의 두려움이 이 곡에서 반영된다. 이는 자신의 자책감으로 드러낸다(“You’ve Got Everything Now”, “Still Ill”). 그리고 이 자책감은 완성되지 못한 나 자신(성인)에 대한 자책감이다. 그리고 어린 아이가 혼자 살기 힘든 이 더러운 세상에 대한 비난과 조소(“You’ve Got Everything Now”, “This Charming Man”), 나의 사랑을 받아주지 않는 이에 대한 원망, 내 마음대로 되는 것 하나 없는 세상에 대한 불만(“What Difference Does It Make?”, “I Don’t Owe You Anything”), 아무것도 아무것도 못하는 자기 자신에 대한 자기비하(“The Hand That Rocks the Cradle”)를 통해 자신의 소외감을 표출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자는 이러한 더러운 세상을 한편으로 긍정하며, 누군가 자신을 이해하고 함께 해줄 사람이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진다.(“Hands in Glove”). 이는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어른이 될 수 없었던 아이들’에 대한 ‘동일시’에 이른다(“Suffer Little Children”). 사춘기적 주체는 이 ‘동일시’에서 등장한다. 물론 과거 대영제국의 영광에 대한 동일시라고 해석할 수도 있지만, 자신 안에 변하지 않는 ‘유아성’에 대한 동일시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출처 : UNCUT

 

라캉이 말했듯이, 상상계에서 상징계로 진입하면서 자아는 주체로서 자리를 잡는다. 하지만 이러한 상징계 진입하면서 인간은 자신을 ‘언어’로서 드러내면서 동시에 (존재적 측면에서) 언어 뒤에 숨는다. (아마 라캉이라면, 정신병으로 규정하겠지만) 유아적 상태를 주체에 자리에 놓는다. 성인도 아니고 유아도 아닌 상태, 사춘기적 주체는 상징계로 진입하면서 잃어버린 존재를 복원하는 또다른 매듭으로서 기능한다. 사춘기적 주체는 원초적 자아의 주체화이며, 나의 원초적인 모습, 남들이 보기에 찌질한 모습, 숨기고 싶은 모습을 오히려 드러낸다. 가식을 던져버리는 행위, 자기비하를 당당하게 드러내기, 자신의 치부를 드러냄은 ‘비하로서 긍정함’이다. 이러한 ‘비관적 긍정’은 스미스 이후 블러, 오아시스로 이어진다. 자신의 약점을 숨기는 성인적 숨김을 버리고 무분별한 사춘기적 드러냄은 브릿팝의 당당함의 시원이 된다.

스미스의 앨범은 ‘숨어있던 어른이 영혼’들을 위한 앨범이다. ‘어른’들은 스미스(와 모리시에의 가사)를 철부지들의 투정일 뿐이라고 할 것이다. 하지만 스미스는 ‘미성숙’의 의미밖에 지니지 않았던, ‘사춘기’라는 시기를 그자체로 삶의 한 형태임을, 그리고 그 시기의 예민함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 엄연히 존재함을 당당히 선언한다. 사춘기의 변덕스러움은 성인이 되면서 자제한다. 그러나 인간이 가지고 있는 변덕스러운 감정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한편으로는 즐겁다고 우울해지는 감정은 우리와 늘 함께한다. 삶에 대한 긍정과 비관이라는 이중성은 삶 그 자체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것을 정면으로 받아내는 질풍노도의 시기가 사춘기이다. 그럼으로써 스미스의 음악은 ‘누구나 겪고 지나갈 수밖에 없는 시기’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했다.

 

어쩌면 우리는 영원한 사춘기를 살고 있을지도.

 

The Smiths – The Smiths, 1984, Full Album

https://www.youtube.com/playlist?list=PLdlKjfbzZGdkZf-GN9RcAFVQFkPaWn9At

 

The Smiths – The Queen Is Dead, 1986, Full Album

https://www.youtube.com/playlist?list=PLdlKjfbzZGdnN_prwsxZUf745SVUz88MX


1) 짤랑거리는 소리가 나서 징글쟁글이라고 부른다.

네 번째 시간, 인내 [시가 필요한 시간]

네 번째 시간, 인내

 

마리횬

 

지난 시간에 달에 대한 시와 별에 대한 시를 읽었었는데, 지난 한 주 동안 얼만큼 밤하늘의 별과 달을 챙겨 보셨나요? 시가 별 거 아닌 거 같아도, 아마 읽을수록 뭔가 조금씩 달라지는 것을 느끼실 겁니다. 사실 우리가 읽는 건 한 페이지도 안 되는 몇 줄 정도의 시인데, 그 시 한편이 주는 힘이 어마어마할 때가 있죠. 저도 그걸 가끔 느끼곤 해요.

 저는 ‘얼마나 유명한 시인이 쓴 시인가’ 하는 것보다는, 저 스스로 먼저 공감이 되는 시들을 좋아합니다. 그리고 그 후에 그런 시들을 사람들에게 소개하죠. 누군가에게 소개하기 이전에 제가 먼저 ‘아 좋다’라고 느껴야, 그것에 관해서 글을 쓸 때 저도 더 감정을 실을 수 있게 되는 것 같아요. 각자가 선호하는 스타일이 있을 텐데, 저는 우리 주변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는 것들, 사소한 일상들을 바탕으로 쓴 시를 선호하는 편인 것 같아요. 일상 속에 그냥 지나쳐버렸던 어떤 작은 것들이 시인의 눈을 통과하면 얼마나 값진 것으로 변화 되는지를 느낄 수 있어서 너무 좋습니다.

 오늘 ‘인내’라는 주제로 소개해 드릴 시 역시, 어떤 작고 소소한 것에 대한 시인데요, ‘담쟁이’에 관한 시 두 편을 가져 왔습니다. 담쟁이 넝쿨 아시죠? 벽을 타고 오르고 벽면을 다 덮으면서 피는 담쟁이.

그 담쟁이와 인내가 과연 어떤 연관이 있을지 궁금하시죠? 첫 번째로 들려드릴 시는, 나혜경 시인의 ‘담쟁이 덩굴의 독법’이라는 시입니다. 눈 앞에 담쟁이 넝쿨로 가득한 푸른 벽이 있다고 상상하시면서 시를 들으시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담쟁이 덩굴의 독법

                                           나혜경

 

손끝으로 점자를 읽는 맹인이 저랬던가

붉은 벽돌을 완독해 보겠다고

지문이 닳도록 아픈 독법으로 기어오른다

한번에 다 읽지는 못하고

지난해 읽다 만 곳이 어디였더라

매번 초심으로 돌아가

다시 시작하다 보면 여러 번 손 닿는 곳은

달달 외우기도 하겠다

세상을 등지고 읽기에 집중하는 동안

내가 그랬듯이 등 뒤 세상은 점점 멀어져

올려다보기에도 아찔한 거리다

푸른 손끝에 피멍이 들고 시들어버릴 때쯤엔

다음 구절이 궁금하여도

그쯤에선 책을 덮어야겠지

아픔도 씻는 듯 가시는 새봄이 오면

지붕까지는 독파해 졸 양으로

맨 처음부터 다시 더듬어 읽기 시작하겠지

 

 

나혜경 시인의 시 ‘담쟁이 덩굴의 독법’ 들어 보았는데요, 담쟁이가 피어 오르는 것을, 담쟁이가 벽 구석 구석 한 땀 한 땀 읽어가는 것처럼 표현을 했죠. 미세하게 한 잎 한 잎 벽을 타고 자라나는 담쟁이 덩굴의 모습을 보고 시인은 마치 손끝으로 점자를 읽는 것 같다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사실 저는 담쟁이를 보면서도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는데, 시를 듣고 나니까 그렇게 노력하며 자라나는 담장이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여기서 시인은 그냥 ‘읽는다’라고 하지 않고, ‘지문이 닳도록’ 읽는다고 하고, 또 ‘아픈 독법으로’, ‘기어 오른다’라는 표현을 쓰면서 뭔가 애쓰고 성취하려고 노력하는 담쟁이의 모습을 읽어내죠. 그렇게 자신의 감정을 이입하고 있습니다. ‘푸른 손끝에 피멍이 든다’라는 표현도, 사실은 초록색 잎에 가을이 되면서 자연스럽게 붉은 단풍이 드는걸 묘사하고 있는 건데, 그걸 ‘피멍이 든다’고 표현을 했어요. 벽을 오르기 위해서 인내하며 노력하는 것이 느껴지시나요?

 

푸른 손 끝에 피멍이 들고 시들어버릴 때쯤엔

다음 구절이 궁금하여도 그쯤에서 책을 덮어야겠지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면서 과한 욕심을 부리지 않는 모습, 이번에 다 성공하지 못했어도 다음 기회를 기다리면서 인내하고 참아내는 그런 모습이 보이죠. 다음해 새 봄이 오면 또 다시 맨 처음부터 읽기 시작해야 할 테고, 어쩌면 또다시 다 읽어내지 못한 채로 시들 테지만, 그래도 봄이 되면 포기하지 않고 또 다시 올라가는 담쟁이의 모습. 그 모습에서 인내가 느껴지시나요?

어떻게 보면, 인간은 담쟁이보다 더 많은걸 가지고서도 조금만 힘들면 쉽게 포기해버리는데.. 이 시를 통해서 나약한 인간들에게 담쟁이가 큰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혹시 여러 상황으로 힘든 시기를 겪는 분들 있다면, 이 시 들으시고 조금 더 힘 내시기 바랍니다. ‘아픔도 씻는 듯 가시는 새 봄’이 올 테니까요.

 이 시와 함께 들으면 좋을 노래로, 제이슨 므라즈의 <I Won’t Give Up>이라는 곡 가져왔습니다. 너무 유명한 곡이죠. 사랑하는 사람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고백의 가사이기도 하지만, 가만히 들어보면 우리의 ‘인생’을 놓고 말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우린 아직 배워야 할 것들이 많기에, 나는 포기하지 않겠다, 여전히 하늘을 바라보고 저 높은 곳을 바라보겠다’라고 고백하는 가사가 마음에 와 닿는 노래입니다. 나혜경 시인의 시 속의 다짐과도 잘 어울리는 곡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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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시가 필요한 시간, 두 번째로 준비한 담쟁이 시는 도종환 시인의 시인데요, ‘담쟁이’라는 제목의 시 준비해 보았습니다. 이 시는 시인이 전교조 활동으로 인해서 학교에서 해직된 후 무직의 상태로 머물러 있던 시기, 그러니까 경제적으로 또 심리적으로 힘들고 막막했던 시절에 쓰여진 시로 알려져 있어요. 당시에 도종환 시인은 이 어려운 상황을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할지 여러 선생님들과 모여서 논의를 하고 있었는데, 마땅히 해결책도 보이지 않고 답답하기만 한 때에 우연히 창문 밖을 내다보게 되었다고 해요.

그런데 창 밖의 옆 건물 벽에 담쟁이 잎이 가득 붙어 있는 게 보인 것이죠. 그 벽을 보면서, ‘저 벽에는 물 한 방울 마실 곳도 없고, 뿌리를 내릴 흙도 없는데, 처음부터 저런 담벼락에서 살도록 던져진 담쟁이는 얼마나 절망스러웠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시인도 자신이 현재 겪고 있는 상황에 힘들어하고 있는데, 담쟁이는 애초부터 그런 척박한 환경에 살도록 던져진 거니까, 어떻게 보면 담쟁이가 더 불쌍하다고도 볼 수도 있는 거죠. 하지만 시인은 불쌍한 눈으로 담쟁이를 보고 있지 않습니다. 비옥한 땅과 숲에서 자라는 다른 식물들에 비하면, 담쟁이는 자라는 속도도 느리고 처한 환경도 훨씬 더 척박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코 서두르지 않는 모습, 인내하며 여럿이 함께 힘을 내어 어려움을 헤쳐나가는 모습을 시인의 눈은 발견하게 된 것이죠. 그런 담쟁이를 보면서, ‘와.. 저런 상황에서도 담쟁이는 포기하지 않고 다른 담쟁이 잎들과 손 잡고 함께 벽을 기어올라가는구나’하는 생각을 하게 된 시인은, 가지고 있던 회의 서류 뒷면에 자신의 생각을 시로 써 나갔다고 해요. 그렇게 해서 쓰여진 시가 바로 이 ‘담쟁이’입니다. 그럼, 한번 시를 읽어 볼까요?

 

담쟁이

                               도종환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느낄 때

그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저것이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한 뼘이라도 꼭 함께 손잡고 올라간다.

푸른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

바로

그 절망을 잡고 절대 놓지 않는다.

저것을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네, 도종환 시인의 시 ‘담쟁이’ 읽어 보았습니다. 이 시는 아까 읽었던 나혜경 시인의 시와는 또 다른 감동을 느낄 수 있습니다. 같은 담쟁이를 보고, 같은 인내와 끈기를 이야기 하고 있지만, 시인마다 이야기하고자 하는 메시지와 감동이 또 다르죠. 앞서 읽었던 나혜경 시인의 ‘담쟁이 덩굴의 독법’이, 어떤 한 사람의 포기하지 않는 끈기와 인내를 말해주고 있었다면, 두 번째로 읽은 도종환 시인의 시는 ‘함께’ 포기하지 않고 나아가는 누군가가 있기 때문에 나도 이 절망을 넘어설 수 있는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누군가는 저것을 ‘벽’이라고, ‘절망의 벽’이라고 말하며 주저앉아 있지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르잖아요? 때로는 여러 말보다도 함께 손 잡아주고, 말없이 이끌어줄 때, 그것이 누군가에게 더 위로가 되는 법이기도 합니다.

지금 여러분이 혹 힘든 시기에 놓여있다고 생각하시는 분들, 뭔가 다 포기해야만 할 것 같은 절망에 빠져 있는 분들 계시다면, 이 시와 함께 위로를 얻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물 한 방울 없고 뿌리 내릴 흙도 전혀 없는 벽에서도 담쟁이는 푸르게 자라납니다. 여러분도 힘 내세요!

오늘 이 시와 함께 들으면 좋을 노래로 제이슨 므라즈의 노래 <93 Million miles>라는 곡 가져 왔습니다. 가사 중에 이런 대목이 있어요.

 

“아들아 살면서 어두워 보일 때가 있을 테지만, 빛이 없는 것도 때론 필요한 법이란다. 단지 이것만 기억하렴, 넌 절대 혼자가 아니야. 넌 언제든지 집에 돌아올 수 있단다. 모든 길이 위험한 비탈이어도 거기엔 언제나 네가 의지할 손이 있단다. 이것만 기억하렴, 네가 어디에 가든지 넌 절대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모든 길이 가파르게만 보이지만, 거기에는 언제나 의지할 손이 있다는 말, 기억하시고 힘내시기 바랍니다. 저는 2주 후에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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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마리횬

아이폰 팟케스트 <마리횬의 시와 음악공간(2012)>에서 러시아의 시와 노래를 직접 번역하여 소개하는 방송을 진행하였고, 호주 퀸즐랜드주 유일의 한인라디오방송국에서 시를 읽고 생각을 나누는 <시가 필요한 시간(2016-2018)>을 진행하며 많은 사랑을 받았다. 연세대학교에서 노어노문학을 전공하였고, 현재 동대학원에서 러시아 문학을 공부하고 있다.  

“음악은 침묵의 잔을 채우는 와인이다.” – 소리의 가능 조건으로서 침묵, 로버트 프립에 대한 단상 [악(樂)인열전]③

 

“음악은 침묵의 잔을 채우는 와인이다.”

– 소리의 가능 조건으로서 침묵, 로버트 프립에 대한 단상

 

이 현(건국대학교 철학과)

 

“고요함은 소리의 부재다. 침묵은 침묵의 존재다.”

– 로버트 프립 Robert Fripp

 

1951년 현대 음악의 선구자인 존 케이지는 하버드 대학의 무향실을 간 적이 있었다. 그는 무향실을 다녀오고, 이렇게 썼다.

 

“높은 소리와 낮은 소리, 두 개의 소리를 들었다. 공학자한테 이 이야기를 하자 그는 나에게 높은 소리는 내 신경계가 돌아가는 소리이고, 낮은 것은 혈액이 순환하는 소리라고 말했다.”

 

존 케이지는 완전한 무음 상태를 기대했다. 그러나 그가 들은 것은 ‘무음’이 아니라 ‘자신의 소리’였다. 들뢰즈가 “회화가 얼굴의 탈영토화이듯 음악은 목소리의 탈영토화”라고 말했듯이, 음악은 언어(라는 문법적 규칙)를 벗어난 음-기계들 생산의 과정이고, 음의 배치이다. 완전한 무음은 없다. 그때 존 케이지는 이렇게 선언한다. “음악의 종말은 없다.” 왜냐하면 음악은 존재의 원초적인 소리에서 기인하기 때문이다. 모든 존재들은 저마다 자신의 소리를 가지고 있다. 일정한 반복을 유지하고 심장 박동수는 최초의 리듬이다. 그 소리의 근원은 지상의 원소들의 소리이며, 리비도의 ‘울음소리’는 일체 세계의 울림이다. 그리고 이 울림은 존재 그 자체이다. 존 케이지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죽을 때까지도 소리는 남아 있을 것이다. 내가 죽은 후에도 그것은 계속 있을 것이다. 음악의 미래에 대해서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절대적인 무음은 없다는 발견이 존 케이지로 하여금 〈4분 33초〉를 쓰게 한 계기가 되었다.

엄밀한 의미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 완전한 무음은 있을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침묵의 순간을 경험한다. 클래식 공연이 시작하기 바로 직전의 순간처럼, 모두가 소리를 내지 않는 순간, 그때 우리는 침묵을 경험한다. 그러나 그 침묵의 순간에도 미묘한 잔음들은 청각기관을 자극하고 있다. 소리는 우리가 피할 수 없는 존재의 필연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침묵이라고 말하는가? 우리에게 침묵이란 없다. 단지 우리는 ‘침묵을 듣는 것’이다. 침묵도 하나의 소리인데, 비-소리로서의 소리이고, 우리로 하여금 소리를 인지할 수 있게 해주는 소리이다. 침묵이 없다면 음악도 없다. 와인을 담아 둘 와인잔이 필요하듯, 침묵은 소리를 받아주는 그릇이고, 음악을 가능케 해주는 또 다른 소리이다.

갑자기 존 케이지의 이야기가 왜 나왔을까? 존 케이지의 일화는 침묵 역시 음악의 영역이라는 점을 알려준다. 그리고 그 침묵은 음악에 있어서 우연성에 해당한다. 클래식 공연이 시작하기 직전의 상황을 상상해보자. 누군가는 기침을 할 것이고, 누군가는 자세를 바로잡기 위해 움직일 것이며, 이 모든 행동들은 소리를 만들어 낸다. 그리고 이 소리들은 연주자가 제어할 수 없는 우연적인 것들이다. 연주자 역시 마찬가지이다. 연주자는 연주를 하기 위해 자세를 잡고, 심호흡을 하며, 소리를 만들고 있다. 연주자가 내고 있는 이 소리들은 연주자의 소리이지만 제어할 수 있는 소리가 아니다. 침묵의 순간은 소리의 필연성과 우연성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순간이고, 아이러니하게 침묵은 ‘소리의 존재’를 보여준다.

[In the Court of the Crimson King], 1969, King Crimson

이러한 소리의 우연성의 발견은 현대음악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고, 그 세례를 받은 인물 중에 하나가 로버트 프립(Robert Fripp)이다. 로버트 프립은 킹 크림슨(King Crimson)의 기타 연주자로 잘 알려졌다. 킹 크림슨은 69년에 [In the Court of the Crimson King] 희대의 명반과 함께 등장했으며, 70년대 락의 황금기를 풍미했다. 70년대는 락의 테크닉이 최고 절정에 도달했던 시기이고, 대부분의 락의 형식이 이 시기에 정리되었다. 20세기 초 미술의 모든 실험적 방법이 아방가르드 시기에 구축되었다면, 80년대 락의 모든 실험적 방법은 프로그레시브 락 장르에 의해 완성된다. 킹 크림슨을 빼고 프로그레시브 락을 논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할 정도로 킹 크림슨은 락 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그 중심에는 로버트 프립이 있다.

 

사진출처: 위키피디아https://en.wikipedia.org/wiki/List_of_King_Crimson_members

 

킹 크림슨은 로버트 프립을 제외한 멤버 교체만 20명이 넘는다. 프립의 극단적 진보성향은 그의 인간관계에서도 보인다. 그는 새로운 멤버들과 새로운 음악에 도전했고, 그것을 극한까지 몰아세웠다. 그 고행을 견뎌내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늘 변화를 추구했던 그는 매번 기상천외한 음악적 시도를 했고, 그 시도들은 마니아를 열광시키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그의 밴드는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모래성처럼 불안하게 유지되고 있었다. 프립과 다른 멤버들이 늘 대립했고, 불협화음을 만들어 냈다. 이 불협화음은 그들의 음악에서도 그대로 적용됐다. 늘 우발적이고 우연적인 음악을 추구했던 그였기에, 그의 밴드 역시 늘 우발적으로 모였다가 흩어졌다.

 

그의 진가는 킹 크림슨에 한정되지 않는다. 킹 크림슨 얘기만 해도 많지만, 이번에는 로버트 프립에 집중하기로 하자. 프립은 킹 크림슨 이외에도 다양한 프로젝트에 참여하면서 자신의 커리어를 쌓았다. 그 중 73년 브라이언 이노(Brian Eno)의 명반 [No Pussyfooting]에 참여하면서 본격적으로 자신의 음악 세계를 구축하기 시작한다.

FRIPP & ENO [No Pussyfooting]

https://youtu.be/ZwHH7XECJLg

앨범 아트 역시 하나의 작품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지금 거울 방 안에 있는 거울이 재현하고 있는 것은 또 다른 거울인데, 그 거울 역시 반대편 거울을 재현하고 있다. 엘리베이터 거울을 상상해보자. 우리가 엘리베이터 안에서 거울을 볼 때, 우리가 보고 있는 거울이 반사하고 있는 것은 반대편 거울이고, 반대편의 거울이 반사하고 있는 것은 우리가 보고 있는 거울이다. 거울 속 이미지들 사이에서 선후관계는 없고 계속 반복되는 자기복제, 모방의 모방들 밖에 없다. 끝없이 펼쳐지는 거울 방은 마치 소리의 파장과 같다. 무한히 같은 소리를 반복하면서 점점 퍼져나가는 음파처럼, 거울 속 이미지들은 계속 자신을 재현하면서 확장한다. 거울을 이용한 이 앨범 아트는 자신들의 음악 세계를 효과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음들이 계속 중첩되면서 무한히 반복되는데, 반복되고 중첩될수록 새로운 소리가 탄생한다. 우연적 음들의 배합과 자기복제. 그들이 추구하는 사운드 메이킹을 거울을 통해 제시하고 있다.

브라이언 이노로부터 프립은 많은 영감을 얻고 자신만의 연주 기법을 발명한다. 초기의 형태는 2대의 아날로그 녹음기(Revox A77)를 이용하여 한번 연주된 소리를 녹음과 재생을 여러 번 반복하는 일종의 딜레이 효과를 발전시킨 것이다. 이러한 기법은 70년대 말부터 “Frippertronics”라는 명칭을 얻는다.

https://youtu.be/4Xjtm-RZaek – Montreal, North American tour in 1979

프립퍼트로니스(Frippertronics)와 로버트 프립(Robert Fripp)

프립퍼트로니스의 원리

 

Frippertronics는 시대를 거치면서 과학 기술의 발전과 함께 더욱 성능이 향상되었다. 2대의 아날로그 녹음기는 디지털 장비로 대체되고 각종 이펙터가 추가됐다. 이 시기부터 프립의 기법은 “Soundscape”라는 명칭을 얻었다. Soundscape 역시 Frippertronics과 마찬가지로 사운드에 반복, 연장 효과를 준다. 이 효과는 마치 넓게 퍼진 풍경(Scape)처럼, 환상적인 분위기를 만들었다. 프립은 Soundscape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Soundscape에 의한 나의 연주는 음의 지연(delay), 반복(repetition), 우연적인 효과(hazard)를 기본으로 한다. 주로 즉흥연주(Improvisation)이기 때문에 때와 장소, 청중들과 청중들에 대한 연주자의 반응에 따라 달라진다. Soundscape은 기타 한 개로 수많은 다양한 소리를 만들어 내는 가능성을 가진 내가 아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https://youtu.be/lr8SR_bzayk

David Sylvian & Robert Fripp [The First Day] – Bringing Down the Light

사운드스케이프를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곡이다. 92년 발표된 데이빗 실비안(David Sylvian)과 함께 발표한 이 곡은 완전히 사운드스케이프만으로 이루어졌다. 몽환적인 사운드가 일품이다.

 

프립을 소개하는 작업은 어려운 일이다. 그의 음악을 듣는 것 자체가 너무나도 어렵다. 그는 저작권에 대단히 민감한데, 그래서인지 음원사이트를 통해서 그의 음악을 다운로드할 수가 없다. 그의 음악을 듣고 싶으면 수고스럽게 시디를 직접 사서 들어야 한다. 21세기에 너무나도 불편하지만 그의 고집스러운 장인정신을 어찌 말리겠는가. 혹시라도 프립에 관심이 생겨서 시디를 직접 구하기로 마음을 먹었다면, 다음에 앨범은 꼭 구매하기를 추천한다.

 

<King Crimson>

[In The Court of the Crimson King], 1969

킹 크림슨의 ‘불쾌하리만큼 완벽한 걸작’ 21st Century Schizoid Man을 시작으로 Epitaph까지 전곡을 처음부터 끝까지 듣기를 권장한다. 킹 크림슨 1기를 대표하는 앨범

[Islands], 1969

킹 크림슨 2기에 해당하는 앨범이다. 본격적으로 오케스트라와 협연하기 시작하면서, 좀 더 웅장한 사운드를 만들어내던 시기. 킹 크림슨 앨범들 중에 가장 따뜻하고 부드러운 사운드를 만들어 내던 시기이다.

[Larks’ Tongues In Aspic], 1973

3기 중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앨범이다. 재즈, 클래식, 헤비메탈 등등 한 앨범이 아니라 한 곡에 다 섞여 들어가 있다. 그리고 이 시기 예스의 드러머였던 빌 브루포드가 참여했다. 굉음과 침묵이 서로 핑퐁하듯이 왔다갔다 하는데, 킹 크림슨이 음악적 실험을 가장 극한으로 밀어붙였던 시기이다.

[Red]

3기의 마지막 앨범. 여러 멤버들이 탈퇴하고 3인 체제로 낸 앨범이다. 보통 킹 크림슨의 앨범 중 [In The Court Of The Crimson King] 다음으로 걸작으로 뽑히는 앨범이다. <Starless>에서의 프립의 독주는 정말 환상적이다.

 

<프로젝트>

FRIPP & ENO [No Pussyfooting], 1973

명 프로듀서 브라이언 이노와의 합작, 프립의 알파이자 오메가이다. 사실상 프립의 진가는 여기에 다 녹아 들어가 있다.

David Sylvian & Robert Fripp [The First Day], 1992

제펜의 데이비드 실비앙과의 합작, 사운드스케이브가 가장 잘 드러나는 앨범

David Bowie [Heroes], 1977

동명의 타이틀곡에 프립이 기타 세션으로 참여했다.

 

<솔로>

[The Last of the Great New York Heart Throbs], 1978

 

[Exposure], 1979

프립의 음악세계가 나를 매혹시킨 이유는 무엇일까. 내가 프립을 좋아하는 이유는 어느 누구보다 소리 그 자체에 집중한다는 점이다. 그가 가지고 있는 ‘소리’에 대한 철학이 나에게는 매우 인상 깊었다. 많은 아티스트들이 소리를 만들어 내고 있지만, 그들의 소리는 왜 소음이 아니라 음악이 되는 것인가. 음악의 핵심은 반복과 변화이다. 리듬은 반복이지만, 동시의 변화이다. 우리가 반복인 것을 알기 위해서는 잠깐의 텀이 필요하다. 반복이라는 의미 안에는 움직임과 멈춤이라는 두 가지 의미가 함께 있는 것이다. 소리 다음에 침묵. 그리고 침묵 이후에 등장하는 소리로의 변화. 이 모순적인 요소들의 순환이 바로 음악이다.

비단 음악뿐이겠는가. 삶 역시 반복과 변화의 나열 아니겠는가. 늘 일상은 반복되지만 그 반복된 일상 속에서 작은 변화가 삶을 작은 예술로 만들어주기에, 조금이라도 삶의 무게를 견딜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아닐까.

존 케이지와 로버트 프립. 우리는 침묵 역시 듣고 있다. 소리는 침묵 덕분에 음악이 될 수 있었다. 그 침묵은 음악의 이정표 역할이 되어준다. 와인을 마시기 위해 와인잔이 필요하듯, 우리의 삶이 음악이 되기 위해서는 그 잠깐 찾아오는 침묵의 소리를 찾고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것이 자기에서 자기와 다른 자기에로 ‘변화'(transformation)가 아닐까.

 

세 번째 시간, 밤하늘 [시가 필요한 시간]

세 번째 시간, 밤하늘

 

마리횬

 

안녕하세요, 시가 필요한 시간의 마리횬입니다. 시 읽기 참 좋은 밤이네요. 최근에 저녁 날씨가 조금 쌀쌀해졌죠. 이제 곧 겨울인가 싶습니다. 제가 호주에서 2년 정도 있었는데, 호주에 살 때는 밤마다 하늘에 떠 있는 별 보는 그 순간이 얼마나 좋았는지 모릅니다. 날씨가 쌀쌀해질수록 별이 많아졌던 기억이 나는데요, 한국에서는 밤에 하늘을 보고 별을 찾아봤던 게 언제였는지.. 기억이 가물가물 하네요.

오늘 여러분과 함께 나눌 시의 주제는 ‘밤하늘’인데요, ‘밤’이라고 하면 어떤 느낌이 드나요? 뭔가 어둡고 고독..하다고 할까? 흡사 어떤 ‘암흑기’와 같은 이미지가 먼저 다가올 수도 있겠고, 다른 한 편으로는 그 나름의 낭만과 매력이 있는 시간이라는 느낌도 들지 않나 싶어요.

오늘 주제가 밤하늘이다 보니까 문득 생각이 나는 에피소드가 있어요. 예전에 어느 토요일 저녁이었는데, 한 7시 반쯤 되었던 것 같아요. 집에 돌아오는 길에 하늘을 봤는데, 구름이 조각조각 흩어져 있는 사이에 엄청 큰 달이 떠 있더라구요.

그 달빛에 비춰진 구름과 밤하늘이 너무 환상적이고 예뻤어요. 그래서 그 때 제가 속해있는 그룹 채팅방에다가 달 사진을 찍어서 올리고, 하늘의 달을 보라고 연락을 했었던 기억이 납니다. 여러분도 그런 경험이 혹시 있나요?

꼭 달이 아니더라도, 어느 맛집에 가서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누군가가 생각나고 ‘아, 그 사람이 여기 같이 왔으면 좋았을 텐데’하는 생각이 들었던 경험, 분명 한번쯤은 있으시죠? 그렇게 머릿속에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아마도 내가 꽤나 좋아하는 사람일 가능성이 높을 겁니다. 반대로 누군가가 그런 상황에서 나를 마음속에 떠올려준다면? 누군가 맛있는 음식을 먹다가 내 생각이 났다고 연락을 준다면! 아마도 꽤 감동을 받겠죠. 뭔가 그 사람에게 내가 특별한 대상이 된듯한 느낌이 들 테니까요. 무엇이든 좋은 것이 있으면 나누고 싶은 마음, 그리고 그런 마음이 상대방에게 그대로 잘 전달이 된다면 꽤 근사한 감동이 있을 겁니다.

그런 서로의 사랑의 마음을 잘 표현한 시가 있어서 오늘 첫 번째로 소개해드릴까 합니다. 바로 김용택 시인의 시 ‘달이 떴다고 전화를 주시다니요’ 인데요, 시 먼저 읽고 이야기 나누도록 할게요.

 

달이 떴다고 전화를 주시다니요

                                                   김용택

 

달이 떴다고 전화를 주시다니요

이 밤 너무 신나고 근사해요

내 마음에도 생전 처음 보는

환한 달이 떠오르고

산 아래 작은 마을이 그려집니다

간절한 이 그리움들을

사무쳐오는 이 연정들을

달빛에 실어

당신께 보냅니다

 

세상에

강변에 달빛이 곱다고

전화를 다 주시다니요

흐르는 물 어디쯤 눈부시게 부서지는 소리

문득 들려옵니다

 

김용택 시인의 시 ‘달이 떴다고 전화를 주시다니요’ 읽어 보았습니다. 이 시를 읽으면 문득 한가지 궁금한 게 생기죠. 과연.. 진짜로 달이 예쁘게 떴기 ‘때문에’ 전화를 한 걸까? 어쩌면 그냥 달은 핑계고, 그 사람 목소리가 듣고 싶었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죠. 달을 보고 누군가가 생각이 났다는 건, 이미 그 사람 마음 속에 상대방에 대한 생각으로 꽉 차있었다는 거 아닐까요? 아무렇지 않은 듯이 전화해서 ‘달이 너무 예쁘게 떴으니까 한번 봐봐’라고 툭 던지지만, 그 말 속에는 그만큼의 애정이 분명히 담겨 있겠죠. 그리고 이 시 속에서 그 전화를 받은 사람도, 달 얘기를 툭 꺼내는 말 속에서 상대방의 마음을 딱 느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전화를 받은 사람이, 자기 마음에도 생전 처음 보는 달이 뜬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죠.

생전 처음 보는 환한 달이 떠오른다… 무슨 뜻일까요? 평소 늘 보던 달빛이 아니라 태어나서 처음 보는 것처럼 밝고 환한 달이 마음 속에 떠오른다는 건, 어쩌면 수화기 너머로 상대방의 마음이 느껴지는 그 순간의 감정, 뜨겁게 느껴지는 어떤 고마움, 감동, 그리움, 그런 느낌을 표현한 게 아닐까 싶어요. 그리고 중요한 건, 그 순간 함께 있지 못하기 때문에 전화로 밖에는 전할 수 없다는 사실이겠죠. 이 시의 표현을 빌리면 나의 마음을 ‘달빛에 실어 보내’면서 표현할 수 밖에 없는 ‘그리움’이겠죠. 멀리 떨어져 있기에 더 애틋한 마음이 드는 것 같아요.

하늘에 뜬 환한 달을 보고 생각이 나서 전화를 걸었고, 그 전화를 받은 사람의 마음 속에도 또 하나의 달이 떠오른다는 이 시적 표현은, 물리적으로는 먼 거리에 있지만, 마음만으로는 서로 맞닿아 있는 두 사람의 사랑이 느껴지는 표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참 멋지네요.

이 시와 함께 들으면 좋을 노래로, 홍이삭의 ‘산 넘어 그대는’이라는 곡 소개 해드릴게요. 이 곡은 ‘차곡차곡’이라는 유튜브 채널에서 가수 홍이삭과 더블베이스 연주자 송인섭이 작곡하고, 일반 구독자들이 직접 댓글로 작사에 참여해서 만들어진 곡이라고 해요. 지금 곁에 함께 있지 않은 사랑하는 누군가를 향한 그리움이 홍이삭 특유의 밝은 멜로디를 만나 아름답게 표현된 노래입니다. 여러분은 이 노래를 들으시면서 누구를 마음 속에 떠올리실지 궁금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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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필요한 시간, 오늘 밤하늘이라는 주제로 함께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 어느 칼럼에서 이런 글을 읽은 적이 있어요. ‘다른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사랑할 때 우리는 비로소 인간다워질 수 있다’라는 글이었는데요, 요즘 시를 읽으면서 점점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사랑하는 법을 좀 더 배워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시가 필요한 시간’이죠!

 앞서 이야기 했지만, 호주에 가서 가장 놀랐던 게, 밤하늘에 별이 정말 많이 보이는 거였어요. 한국에서는 사실 다른 별은 잘 안보이고, 눈에 띄게 밝은 별이 딱 하나 있어서 ‘저게 북극성이다!’라고 바로 알 수 있죠. 그런데 호주는 별이 전부 다 밝으니까 뭐 하나를 딱 찾아낼 필요가 없더라구요. 낮에는 구름이 너무 예쁘고 또 밤에는 별이 너무 예뻤던 호주의 하늘이 지금도 기억이 납니다.

도종환이라는 시인이 쓴 시 중에 ‘사람들이 착하게 사는 마을에 별들이 많이 뜬다’라는 구절이 나오는 시가 있는데, 호주가 딱 그런 곳인 것 같아요. 도종환 시인은 자신의 책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사람들이 모두 바쁘다는 이유로 제 발 밑만 쳐다보며 사는 동안, 그리하여 하늘을 올려다보는 일을 잊어가는 동안,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별들도 알았던 것일까, 언제부터인가 별들도 도시의 하늘을 떠나기 시작했다

 

도시의 밤이 밝을수록 별이 도시의 하늘을 떠나간다. 시적인 표현이죠. 낮이고 밤이고 바쁘게 치이는 도시의 삶, 밤에도 불을 밝힐 수 밖에 없으니 밤 하늘에는 당연히 별이 보이지 않겠죠. 시인은 그런 삶을 가리켜 ‘별들도 떠나버리는 삶’이라고 표현합니다.

하늘을 올려다 볼 여유도 없이 살아간다는 것 역시, 그만큼 모두 자기 사는 일에 급급해서 남을 돌아다 볼 여유가 없다는 말이나 다름 없을 겁니다. 처음 언급했던, ‘다른 누군가를 사랑하고 그리워할 때 비로소 인간다워질 수 있다’는 말과 같은 맥락에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우리의 인간다운 삶을 위해서, 내 주변의 사람들도 다시 돌아보고 사랑하는 마음을 가져야겠습니다.

 오늘 두 번째로 만나 볼 시는 바로 별에 대한 시입니다. 이성선 시인의 시 ‘사랑하는 별 하나’ 함께 만나 보시죠.

 

사랑하는 별 하나

                                이성선

 

나도 별과 같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외로워 쳐다보면

눈 마주쳐 마음 비쳐주는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나도 꽃이 될 수 있을까.

세상 일이 괴로워 쓸쓸히 밖으로 나서는 날에

가슴에 화안히 안기어

눈물짓듯 웃어주는

하얀 들꽃이 될 수 있을까.

 

가슴에 사랑하는 별 하나를 갖고 싶다.

외로울 때 부르면 다가오는

별 하나를 갖고 싶다.

 

마음 어두운 밤 깊을수록

우러러 쳐다보면

반짝이는 그 맑은 눈빛으로 나를 씻어

길을 비추는

그런 사람 하나 갖고 싶다.

 

하늘에 떠 있는 하얗고 노란 별이 있다면, 이 땅에도 하얗고 노란 별들이 있습니다. 바로 들판에 핀 들꽃들이지요. 밤에 보는 별들과 낮에 마주하는 들꽃의 공통점이 있다면, 바로 늘 같은 자리에서 한결같이 누군가를 바라봐주고 있는 존재들이라는 점일 겁니다.

사람은 서로 오해도 하고 또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서 곁에 있을 때도 있고, 곁을 떠날 때도 있죠. 하지만 자연은 늘 그 자리에 있어요. 그런 자연을 보고 시인은 참 많은 위로를 받은 것 같습니다. 외로운 밤에 고개를 들면, 별이 그 자리에서 눈을 마주쳐주고, 세상일이 괴로워 고개를 푹 숙일 때, 그 자리에서 들꽃이 미소를 지어주며 위안을 주고 있음을 느껴냅니다. 그 흔한 별과 들꽃을 보고 위로를 받고, 그리고 ‘나도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을까?’라고 시를 쓸 수 있는 이 시인의 눈이 참 부럽습니다.

이런 별과 들꽃처럼 위로와 위안이 되는 사람을 곁에 두고 있다면 정말 든든하겠죠. 그리고 나도 누군가에게 이런 존재가 되어 줄 수 있다면 그것으로도 정말 감사할 것 같습니다. 이 시의 마지막의 ‘나도 그런 사람 하나 갖고 싶다’라는 구절은, 마치 ‘나도 누군가에게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라고 들리면서, 어떤 다짐으로도 다가옵니다. 여러분도 누군가에게 이런 위안의 존재가 되어 줄 수 있기를 바라요.

이 시와 함께 들으면 좋을 노래. 스탠딩 에그의 <Starry Night>이라는 곡 준비해보았습니다. 이 곡은 스탠딩 에그가 호주를 여행하던 중에, 울룰루(Uluru)에서 별이 가득한 밤하늘을 보고 그 자리에서 바로 쓴 곡이라고 소개가 되어 있어요. 이 노래 들으시면서 밤하늘의 별도 감상하시고, 또 그리운 누군가를 떠올리면서 하루를 마무리 하시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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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는 마음이다. 로이 부캐넌 [악(樂)인열전]②

기타는 마음이다. 로이 부캐넌

 

이 현(건국대 철학과)

만약 블루스가 당신의 플레이리스트에 없다면 그건 둘 중의 하나이다. 블루스가 필요한 삶을 살아본 적이 없거나, 블루스가 제시간에 도착하지 않은 사람이다.1)

이번에는 블루스 음악에 대해서 좀 다뤄보고자 한다. 블루스는 들으면 들을수록 어려운 음악이다. 그런데도 블루스는 사람을 당기는 힘이 있다. 이해하기는 어려워도 계속 듣게 되는 음악이다. 그 힘은 어쩌면 음악이 아니라 듣는 이의 마음속에 있는 것이 아닐까? 블루스라는 음악이 좀 그렇다. 마치 평양냉면과 같아서 처음 접하면 그 매력을 느끼기 힘들다. 그런데 만약 당신이 처음 듣자마자 블루스가 맞았다면, 그만큼 당신의 속이 쓰라렸다는 것이다. 그 쓰라림을 씻어 내려줄 음악이 블루스이다.

오늘의 동행자는 로이 부캐넌(Roy Buchanan)이다. 그는 1939년 미국 아칸소주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릴 적부터 흑인음악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는 일찍부터 스틸 기타의 재능을 보였고, 15살 때부터 직업적인 기타리스트 생활을 했다. 그는 19살에 나이에 〈Suzie Q〉로 잘 알려진 데일 호킨스 밑에서 세션 활동을 했고, 그 후에 수많은 아티스트들과 협업을 하면서 경력을 쌓아 갔다.

 

그는 1971년 미국의 한 공영방송에서 방영한 “세계 최고의 언더그라운드 기타리스트(The Best Unknown Guitarist In The World)”라는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전국적인 파장을 일으킴으로써, 존 레논을 비롯하여 저명한 컨트리 뮤지션 멀 해가드(Merle Haggard) 등으로부터 극찬을 받았다. 그리고 72년 블루스 역사에서 기념비적인 그의 데뷔 앨범 [Roy Buchanan]이 나온다. 그리고 그 앨범에는 명곡 이 실려있다.

“나는 나의 연주에 대해 그렇게 많은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나는 (이미) 충분했다.”

“기타는 마음이고 성격이다. 기분이 울적할 땐 기타도 울적하고 기쁠 땐 기타도 노래를 한다. 자기의 마음 기분을 잘 반영할 줄 아는 연주인이 결국은 끝까지 남는 법이다.”

– 로이 부캐넌

 

부캐넌의 말은 의미심장하다. 특히 블루스는 감정의 격정을 연주하는 장르이다. 인간의 감정은 아주 미묘하고 섬세하다. 우리가 흔히 감정을 ‘희로애락’이라고 구분하고 있지만, 그것들 사이의 경계는 매우 희미하다. 우리의 분노는 한편으로 슬픔이 섞여 있고, 우리의 슬픔 역시 분노가 섞여 있다. 그렇기에 우리의 마음은 0과 1로 이루어진 디지털이 아니라, 수많은 겹침으로 얽혀 있는 아날로그이다.

블루스는 음악적 재능만으로 할 수 있는 장르는 아니다. 왜냐하면 블루스의 세계에서 훌륭한 연주자는 자신의 감정을 잘 연주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블루스에서는 싱어(singer)는 없고 오직 연주자(player) 밖에 없다. 블루스는 오직 삶과 고통으로부터 빚어지는 연주(play the blues)만이 있을 뿐이다. 부캐넌의 재능도 그의 음악을 완성시키는 요소는 맞지만, 부캐넌의 삶 그 자체가 그의 음악을 완성시킨다. 삶의 깊이를 얼마나 끌어 올릴 수 있는가. 그 과정은 심히 고통스러운 작업이다.

연주자로서 그가 선택한 기타는 무엇인가. 그가 연주했던 기타는 펜더의 텔레케스터 2324모델(Fender Telecaster SN 2324), 일명 낸시(Nancy)다. 그는 텔레케스터의 선구자이다. 텔레케스터는 상당히 다루기 까다로운 기타이다. 특유의 비음 소리와 깽깽거리는 음색은 매력적이지만, 개성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곡의 조화를 맞추기 어렵고, 펜더사 역시 블루스에는 어울리지 않는 기타라고 말했다. 그러나 낸시는 부캐넌의 특유의 심플하면서 그루지한 치킨피킹 주법과 궁합이 잘 맞았다. 그는 연주 시 볼륨 패드를 사용하지 않는데, 이러한 연주 방식은 음향을 통일시킴으로써 텔레케스터 특유의 음색을 잘 살리면서 곡 전체를 조화롭게 만들었다. 텔레케스터의 음색은 부캐넌 특유의 담백함을 살려주는 소금과 같은 역할을 했다.

그의 레코드사 Polygram은 그에게 상업적 성공을 강요했다. Polygram은 그가 좀 더 대중적인 음악을 하길 원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원치 않았고, 이러한 의견 차이 때문에 레코드사와 다툼이 심했다. 그는 점차 술과 약물에 빠져들었고, 1988년 8월 14일 아내와 크게 다투다가 경찰서로 연행됐고, 유치장에서 셔츠로 목매달아 생을 마감했다. 일세를 풍미했던 음악가로서는 참으로 비극적인 최후였다. 블루스 아티스트들 중에서는 삶의 고독과 고통을 이겨내지 못한 사람들이 많다. 제니스 조플린, 스티브 레이 본이 그러했고, 로이 부캐넌 역시 마찬가지였다.

블루스는 고통스러운 자기 삶의 깊이를 끌어올려 드러난 그 감정을 마주하는 것이다. 블루스에서 부르고 응답하기(Call and Response)가 음악적 핵심이다. 여기서 부르고 응답하는 것은 단순히 음악적인 코드를 주고받는 것을 넘어서 자신의 감정에 대한 응답이다. 나는 블루스라는 장르를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삶의 고독을 소리로 조각하는 것. 그 고독 속에서 자신의 감정을 끊임없이 불러 세우고 그 감정에 응답하는 것. 그래서 아티스트의 고독이 깊어질수록 그 소리는 더욱 빛난다. 그는 에릭 클랩튼, 제프 백, 지미 페이지 등 유명 기타리스트들의 찬사와 인정을 받았음에도, 대중들로부터는 소외당했다. 그는 늘 외로웠고, 그에게는 누구보다 블루스가 필요했다. 자신의 고독을 위해서. 그의 고독을 연주함으로써 찬란한 고독으로 승화시키기 위해서 말이다.

https://youtu.be/v4e2VgycfSw

Roy Buchanan – Live from Austin TX, 1976

 

위의 1976년 텍사스 오스틴 라이브는 블루스 역사상 최고의 라이브 중 하나로 꼽힌다.

라이브의 시작을 알리는 <Roy’s Bluz>는 등장부터 사람들을 사로잡는다. 로커빌리2)적 요소가 가미된 이 곡은 상당히 경쾌하면서 간명하다. 로커빌리적 요소는 백인 블루스의 특징 중에 하나이다. 백인 블루스의 매력은 흑인 음악의 특징인 그루브함 위에 컨트리 특유의 간명함과 통통 튀는 감성이다.

<Roy’s Bluz>는 1972년 앨범 [That’s What I Am Here For]에 수록되어 있다. 그리고 이 앨범에는 라이브의 4번째 곡인 <Hey Joe>가 실려있다. <Hey Joe>는 원래 지미 헨드릭스(Jimi Hendrix)의 곡으로서 부캐넌이 자신만의 스타일로 리메이크한 헌정곡이다. 둘이 비교하면서 들어도 좋은 청음 포인트다.

 

https://youtu.be/8mr9I7g1A7o

Roy Buchanan – Roy’s Bluz

 

https://youtu.be/fe82eYRjiBU

Jimi Hendrix – Hey Joe, 1967 Monterey Pop Festival

(상당한 명연이다. 기회가 되면 꼭 지미 헨드릭스도 꼭 다뤄보고 싶다.)

 

두번째 <Soul dressing>은 Malcolm Lukens과의 협주가 인상적이다. 블루스의 Call and Response를 잘 보여주고 있다.

 

https://youtu.be/ClRHx5FJ9yA

Roy Buchanan – Sweet Dreams

 

나머지 두 곡 와 은 그의 데뷔 앨범인 [Roy Buchanan]에 실려 있는 곡들이다. 는 그의 부드러운 기타 연주가 만들어 내는 아름다운 선율이 특징이다. 블루스곡이지만 상당히 컨트리적인 따뜻함이 담겨 있는 곡이다. 애절한 벤딩은 분명 엄청나게 화려한 스킬은 아니지만, 마음을 녹인다. 기타는 손이 아닌 마음으로 친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곡.

 

https://youtu.be/XgOLDAWu6OY

Roy Buchanan – The Messiah Will Come Again

 

누가 뭐라 그래도 그의 대표곡은 <The Messiah Will Come Again>이다. 환상적인 트레몰로와 처절한 벤딩은 사람들을 진한 감성 속으로 녹여버린다. 부캐넌의 연주 특징이라고 하면 충실함에 있다. 엄청나게 화려하지는 않지만, 그의 연주에는 빈틈이 없다. 그의 연주는 촘촘히 직조된 직물과 같아서, 별거 아닌 것 같지만 들으면 들을수록 놀라움을 자아낸다.

The messiah will come again

– Roy Buchanan

 

Just a smile

Just a glance

The Prince of Darkness

he just walked past

 

There’s been a lot of people

they’ve had a lot to say

But this time

I’m gonna tell it my way…

 

There was a town

It was a strange little town they called the world

It was a lonely, lonely little town

 

Till one day a stranger appeared

Their hearts rejoiced

and this sad little town was happy again

 

But there were some that doubted

They disbelieved, so they mocked Him

And the stranged He went away

and the said little town that was sad yesterday

It’s a lot sadder today

 

I walked in a lot of places I never should have been

But I know that the Messiah,

He will come again…

 

“많은 사람이 있었고 그들 저마다 할 얘기가 많았지만 이번엔 내가 내 방식대로 얘기해보겠다(There’s been a lot of people they’ve had a lot to say But this time I’m gonna tell it my way…)”는 부캐넌이 자신의 방식(my way)으로 ‘세계라는 작은 마을(little town they called the world)’에 다녀간 ‘이방인(stranger)’, 예수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부캐넌이 말하는 세계, 즉 작은 마을은 ‘외로운 작은 마을(lonely little town)’이다. 그러나 홀로 찾아온 이방인이 작은 마을에 도착하자, 사람들은 크게 기뻐했고(rejoiced), 그 작은 마을은 아주 행복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이방인을 의심하고(doubted) 불신하며(disbelieved) 조롱했다(mocked). 그런데 그가 떠나자 그 마을은 점점 슬픔에 잠겼다. 외로운 세계의 찾아온 이방인 덕분에 사람들은 행복했고, 그런 이방인을 떠나 보낸 것은 그 외로운 사람들이었다. 기독교적인 세계관에서 메시아, 예수는 인간의 죄를 사하고 떠나버린 존재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인간들이 떠나보낸 것에 가깝다. 그래서 누구는 그가 영원히 떠났다고 말한다. 어둠의 왕자(The Prince of Darkness). 그는 어두운 과거로 떠나가 버렸다고(he just walked past) 말이다. 이 가사의 내용을 종교적인 의미로만 해석할 필요는 없다. 메시아라는 매개를 통해서 결국 부캐넌은 인간의 실존적 상태, 고독 그 자체를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고독 속에서 희망을 찾고 있다.

부캐넌은 무엇 때문에 과거로 떠나버린 이방인이 돌아올 것이라 믿고 있는 것일까? 벤야민이 말했던 것처럼 “과거는 그것을 구원으로 지시하는 어떤 은밀한 지침을 지니고 있다.” 우리는 늘 현재를 살아간다고 믿지만, 현재라고 생각하는 순간, 그 현재는 과거가 되어버린다. 우리는 매 순간 ‘지금’을 잃어가는 고독의 순간에 살고 있다. 어쩌면 우리가 생각하기에 늘 곁에 있는 것은 사실 없을 수도 있다. 마치 바람처럼 말이다. 우리가 맞고 있는 바람은 우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이며, 잡을 수 없는 바람이다. 그러나 이러한 고독 속에서 마주하는 바람은 ‘현재의 나’와 마찬가지로 예전에 다른 누군가를 스치고 지나갔던 바람이다. 즉, 우리가 ‘지금’ 맞고 있는 바람은 ‘누군가의 과거’였다.

파울 클레 : 새로운 천사 Angelus Novus, 1920

그렇기에 과거와 지금에는 ‘은밀한 약속’이 놓여 있으며, ‘지금시간Jetztzeit’에는 앞서 간 모든 과거와 마찬가지로 ‘희미한 메시아적 힘’이 깃들어 있다. 벤야민이 자신의 철학적 작업을 “예기치 않게 나타나는 과거의 이미지를 붙드는 일”로 여겼던 것처럼, 부캐넌 역시 마찬가지 아닐까? 부캐넌에게 있어서 고독은 오히려 메시아를 받아들이는 준비, 즉 구원을 받아들일 준비가 아닐까? 그리고 그 구원은 과거로부터 온 것, ‘파울 클레의 천사’ 발 앞에 쌓여있는 잔햇더미 속에서 온 것이 아닐까? 그리고 잔햇더미는 우리의 마음에 쌓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우리가 안타깝게 떠나버린 이들을 가슴 속에 묻어 두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가 떠나 보냈다고 생각하는 메시아, 즉 구원은 어쩌면 나의 마음속에 묻어 둔 것일 수도 있다.

현재 부캐넌은 우리 곁에 없다. 그러나 적어도 누군가의 마음속에는 부캐넌의 메아리가 깃들어 있다. 마음을 울리는 힘은 기억이고, 우리가 느끼는 향수병은 마음 한편에 쌓여있는 추억의 내음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닐까.

우리가 삶을 살아가면서 외롭고 힘들 때, 단 한 명이라도 그의 소리를 기억하고 살아가고 있다면, 우리를 위로해주기 위해 늘 과거로부터 우리와 함께 있다. 그의 텔레케스터 소리와 함께.


1) 정성일 평론가의 <영웅본색> 평론의 패러디이다.

 

2) 1960년대 등장한 로큰롤과 힐빌리(hillbilly:컨트리송의 다른 명칭)가 결합된 형태의 음악장르이다. 로큰롤이 태동하던 초기에는 많은 컨트리가수들이 로큰롤로 진출했다. 그러면서 로큰롤에 컨트리적 요소가 많이 섞이게 되는데, 나중에 이러한 특징이 하나의 음악장르로 정립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