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을 보는 하나의 창 – 『차이나 붐』 서평 (2)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 비평]

중국을 보는 하나의 창 – 『차이나 붐』 서평 (2)

 

이병창(한철연 회원)

 

1)

앞의 글에서 ‘차이나 붐’ 1부를 소개했다. 1부의 내용은 중국의 개혁 개방 정책이 어떻게 전개되었는가 이다. 두 가지가 핵심인데, 하나는 사회주의 시대 축적된 자본과 노동력이 있어서 개혁 개방 이후 남미 식의 파국에 처하지 않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개혁 개방은 두 단계로 나뉘는데, 89년 천안문 사건 이후 2단계 개혁 개방 정책이 펼쳐졌다는 것이다. 이때부터 한마디로 박정희식 수출 정책이 중국에 이식되었다고 한다. 저임금, 저가 농산물, 저금리 정책 대출, 고환율 정책 등이 그 핵심이다.

저자 흥호펑은 이 책의 2부에서는 중국 자본주의와 미국(여기에 유럽도 포함된다) 자본주의 사이의 연관 즉 세계 체제의 문제에 집중한다. 월러스타인은 70년대 서구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국가 사이에 공존 관계를 세계 체제로 설명한 적이 있는데, 저자는 중국과 미국의 관계도 그와 같은 세계 체제라는 개념을 통해 이해할 수 있다고 본다. 저자는 중국과 미국의 세계 체제에 신자유주의 체제라는 이름을 부여한다.

신자유주의 세계 체제는 구체적으로는 중국의 수출 기업과 미의 금융 자본이 결합한 체제이다. 중국은 미국에 못지않게 서구나 한국 일본 등과 같은 아시아 국가 그리고 남미, 중동과도 관계 한다.  저자는 중,미 관계를 핵심에 놓고 나머지 세계는 이 관계를 둘러싸고 있다고 본다. 서구(독일 등)와 아시아 국가는 중국과 경쟁하거나 중국에 부품을 제공하는 제조업 국가이며 남미의 경우 주로 원료를 공급 기지가 된다.

2)

저자는 5장에서 1980년대 이후 미국은 제조업 국가에서 금융 자본주의 국가로 발전했다고 설명한다. 이런 전환의 한쪽 축은 중국의 저가 수출이다. 중국의 저가 수출로 미국 제조업이 붕괴했다. 다른 쪽 축은 달러 기축 통화 체제이다. 미국은 그 덕분으로 금융 자본주의 국가로 전환했다. 이 과정에서 미국은 70년대 말 달러를 저 평가하여 제조업을 보호하려 했으나 높은 인플레이션으로 주저앉았다. 이 때문에 중국의 저가 수출을 수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결과 미국은 쌍둥이 적자 즉 막대한 무역 적자와 재정 적자에 빠지게 되었다. 이 재정 적자는 제조업 붕괴하면서 세수가 부족하게 되고, 거꾸로 실업자가 증대하면서 사회 보장 비용이 증가한 데 원인이 있다.

쌍둥이 적자에 시달리는 미국이 어떻게 파국에 처하지 않게 되었을까? 그 미스테리는 중국의 미국 국채 투자에 있다고 한다. 중국은 고 환율 정책으로 저 평가된 상품을 미국에 수출하면서 막대한 수출 이윤을 얻었는데 중국은 미국 국채에 투자하면서 획득한 달러를 미국으로 돌려주었다.

중국의 수출 이윤의 미 국채 투자는 여러 가지 효과를 낳았다. 우선 미국은 무역 적자와 재정 적자에도 불구하고 국채를 통해 ➀ 정부 지출을 유지했다. 또한, 국채 금리를 낮게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은행은 저금리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은행은 ➁ 국민에게 신용 대출을 강화하면서 미국은 부채에 기반을 둔 과잉 소비 체제를 이루게 된다.

국채 투자로 달러가 환수 되면서 미국은 달러가 고 평가되면서 불가피하게 일어날 인플레이션은 ➂ 싼값으로 수입되는 소비 상품으로 막을 수 있었다.

저자의 이런 설명은 저자 자신의 견해라기보다 2008년 금융 위기 이후 경제학에서 일반화된 주장으로 보인다. 이런 일반화된 주장은 80년대 이후 미국의 정치적 사회적 변화를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과도한 은행 대출은 80년대 이후 미국에서 금융 자본과 미국 고급 기술 노동자 사이의 유착 관계의 원인이 된다. 미 국민 특히 고급 기술 노동자는 마구잡이로 쏟아내는 은행 대출을 통해 부채 파티를 즐겼으니 그 결과가 곧 2000년대 초반 전개된 부동산 투기였다. 이런 틀로부터 신자유주의 시대를 주도한 민주당 클린턴 체제가 충분히 설명된다.

3)

경제학에서 일반화된 주장은 주로 신자유주의 체제 가운데 미국 측에 대한 분석에 한정되었다면 저자 흥호펑의 설명은 이 체제의 상대편인 중국 측에 집중된다. 중국 측에 대한 설명은 지금까지 볼 수 없었으니 저자의 설명은 이런 관점에서 굉장한 도움이 된다.

이제 중국 측으로 가 보자. 저자의 물음은 여기에 있다. 즉 중국은 미 국채 투자를 왜 지속하는가? 국채 투자는 결과적으로는 일종의 조공에 불과한데도 중국이 이를 지속하는가에 대해 저자는 두 가지 이유를 들고 있다.

그 하나는 수출로 벌어 들인 달러를 미 국채에 투자함으로써 ➀ 위안화 가격 상승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위안화 상승은 저가 수출 전략을 파탄시키는 것이다. 인위적인 위안화 저 평가 방식(페그제)은 미국의 압력으로 유지할 수 없었다. 중국은 달러를 미국으로 되돌려주는 미 국채 투자 정책을 수용했다.

다른 하나는 중국의 국채 투자로 미국은 재정 적자에도 불구하고 재정 지출과 신용 대출을 지속하면서 ➁ 중국의 수출품에 대한 수요를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저자는 이런 중국의 미 국채 투자를 통해 중국의 수출 기업과 미국의 금융 자본은 공생할 수 있었고 이런 공생 관계가 신자유주의적 세계 체제를 지탱하는 핵심축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런 신자유주의적 세계 체제가 지속할 수 있는 것인가? 저자는 그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평가한다. 저자는 이런 저가 수출 체제가 중국 내부에서 어떤 문제점을 불러 일으키는가를 설명한다. 이런 문제점은 2부 4장과 6장의 중요한 내용을 이루고 있다. 저자는 그 문제점을 여러 통계 자료를 통해 논증하려 하는데, 여기서는 그런 논증을 빼고 간단하게 그 결과만 들어보기로 하자. 박정희 식 수출 체제에 익숙한 우리로서는 쉽게 이해되는 대목이다. 저자에 의하면 저가 수출을 통한 경제 성장은 두 가지 한계에 부딪힌다.

첫째는 저 임금, 저 농산물 가격, 고 환율 등으로 국내 소비 감소로 내부 성장이 한계에 부딪힌다. 한편으로 기업의 채산성 악화를 지원하기 위한 정부 지출로 재정이 고갈된다. 다른 한편으로 노동자의 상황은 악화하는데, 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한 사회주의적 보장 정책이 대폭 후퇴한다. 그 결과 200년대 초반 중국에서는 대규모 노동자 저항이 일어났다.

둘째는 중국 경제를 견인하는 수출은 구미의 점차 수요 부족(예를 들어 2008년, 2013년 미국과 유럽 경제 위기에서처럼)과 신흥 개발 국가 사이의 경쟁으로 한계에 부딪히기 때문이다. 위기 시마다 중국은 막대한 재정 투자로 위기에 처한 부실 기업을 지원했으나 덕분에 기업은 저가 수출로 이윤을 낳지 못하니 막대한 부채를 짊어지고 있다.

이런 사정은 80년대 노동자의 저항과 90년대 IMF위기에 처한 우리로서 충분히 짐작 가는 일이다. 악화된 노동자 상황, 부실한 기업이라는 이중 위기가 낳는 증상이 부동산 투자이다.

저평가된 위안화로 중국은 높은 인플레이션에 시달리니 이 때문에 부동산 투자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된다. 은행은 부실에 시달리는 기업보다 부동산에 투자된다. 은행은 대출을 통해 부동산 투기를 조장하지만, 점차 악화하는 노동자 상황은 대출을 갚을 수 없으니 부동산 투기는 언젠가는 끝날 수밖에 없었다.

저자는 초 현실적으로 사치스러운 지방 정부 건물, 중복되는 지하철 노선, 불필요한 공항, 수요가 없는 고급 아파트, 쓸모없는 건축물이나 시설 등, 유령 도시나 유령 쇼핑몰 등을 들고 있는데, 저자는 이 현상 자체가 중국 경제 성장의 한계를 잘 보여주는 것으로 본다.

그런 점에서 서문에서 잠시 언급했던 헝다 사태는 단순한 부실 기업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저가 수출에 한계에 부딪히면서 필연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결과이다.

4)

중국은 저가 수출 정책을 언제까지 지속할 수는 없었다. 우선 1990년대 후반부터 노동자가 저항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중국에는 새로운 정권이 들어서게 되었다. 그게 바로 2003년 후진타오 정부이다.

후진타오는 내륙 개발과 농산물 수매가 인상, 새로운 노동 계약법을 실시하여 국내 불평등을 축소하고 국내 수요를 증가시켜 내부 성장을 확산시키려 했다. 그러나 후진타오의 이런 정책은 2008년 미국의 경제 위기로 중국의 수출이 축소되자, 황급히 중단되고 말았다.

2012년 새로 등장한 시진평 정부는 후진타오의 정책을 계승하고 있지만, 저자는 이런 개혁 정책의 효과에 대해 회의한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저자의 결론을 무조건 수용하기는 어렵다. 저자의 이런 회의적인 관점은 너무 성급한 것이 아닐까? 저자는 중국의 공산당 내부의 민주주의 과정을 너무 과소평가하는 것이 아닐까?

서방 언론에 의하면 지금 중국에서는 시진평의 독재 체제가 강화된다고 하지만 실제 이것은 중국의 개혁 개방의 결과인 노동자 상황 악화와 부실 기업을 해소하려는 정치적 노력의 결과로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중국을 보는 하나의 창 – 『차이나 붐』 서평 (1)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 비평]

중국을 보는 하나의 창 – 『차이나 붐』 서평 (1)

 

이병창(한철연 회원)

 

1)

요즈음은 좀 뜸해졌는데, 작년 년 말에 언론은 중국 부동산 기업 헝다의 파산 위기를 연속해 보도했고 세계의 이목이 일시에 헝다 사태로 집중했다. 일개 기업의 부채 규모가 자그마치 약 3000억 달러라니, 놀랄 만하다. 이 정도는 중국 총 경제 규모에 비하면 그리 크지 않다고 하지만, 어디 이게 헝다에만 한정된 일일까?

2012년 경인가 중국 동북 지방을 여행한 적이 있었는데 도시마다 엄청난 규모로 아파트가 세워져 있는 것을 보고 감탄했는데 그 많은 아파트 대부분이 비어 있다는 사실에 또 한 번 충격을 받았다. 이런 식으로 언제까지 지속할 수 있을까, 속으로 의아했지만, 중국은 큰 나라니 무한 세계 앞에서 유한 세계에 적용되는 법칙이 무력한 모양이라고 생각하고 웃었다. 헝다 사태를 보니 중국 역시 무한한 나라는 아닌 것 같다.

헝다 사태를 계기로 중국 사회 경제를 이해할 수 있는 책을 찾았다. 이때 우연히 눈에 뜨인 책이 ‘차이나 붐’이라는 책이다. 이 책은 저자 훙호펑의 2015년 저서이다. 부제 ‘왜중국은 세계를 지배할 수 없는가?’라는 제목에 이끌려 구입해 읽었다.

훙호펑은 1980-90년대 후기 식민 시대의 홍콩에서 성장했으며 외가와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서 친중국적이었으나  1989년 천안문 사건 이후 비판적 입장으로 전환했다. 그는 그 후 미국 존스 홉킨스 대학에 유학하였으며, 현재는 존스 홉킨스 대학 사회학과에 재직하고 있다.

그는 스스로 지금까지 두 가지 연구 프로젝트에 종사했다고 말한다. 하나는 중국의 정치적 근대성의 기원과 특수성을 설명하는 것이며 그 산물로 ‘중국 특색의 저항’(2011) 책을 저술했다. 다른 하나는 중국 경제 부흥의 기원과 핵심 동학을 규명하는 것이며, 그 결과가 이 책이다.

2)

이 책은 서문과 결론에서 보듯이 두 가지 논제에 도전한다. 하나는 등소평 이후 중국의 경제 성장은 오직 자본주의 시장에 편입된 결과이다는 주장이다. 저자는 이에 반대하며 사회주의적 유산이 중국 자본주의가 라틴 아메리카식으로 몰락하지 않은 주요 지주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다른 하나는 중국이 성장하면서 자본주의 헤게모니가 미국에서 중국으로 이동할 것이라는 예언이다. 이에 반해서 저자는 중국은 미국 중심의 신자유주의 체제에 편입되어서 상호 의존적으로 되었다고 한다. 신자유주의 체제는 중국과 미국에 상호 이익을 줌으로써 세계 경제를 지탱하고 있으니, 그는 미국의 몰락은 중국의 몰락이 될 뿐이라고 주장한다.

저자의 전체적 관점은 월러스틴의 세계 체제라는 개념으로 보인다. 월러스틴은 자본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이 세계 체제 속에 공생하고 있다고 말했는데, 저자가 미국과 중국의 관계를 보는 관점도 그와 유사하다.

3)

이 책 전체는 1부와 2부로 이루어져 있는데 1부에서는 주로 중국에서 자본주의 발전 과정을 서술하고 있다. 1부에서 그는 명, 청 시대 이미 상업과 무역이 발달했음에도 자본주의적 발전이 이루어지지 않은 이유를 탐구하고, 이어서 사회주의 시대 자본의 축적이 어떻게 일어났는가를 서술한다. 이 부분은 역사적 서술로 흥미롭기는 하지만 당장 우리가 관심을 기울이는 부분은 아니므로 생략하기로 하자.

다만 사회주의 시대 이루어진 경제적 유산이 1980년대 이후 중국의 자본주의화를 성공시켰다는 그의 주장만은 기억할 필요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이런 유산으로 축적된 자본[국유 기업과 시설]과 우수하고 훈련된 노동력 그리고 자율적 정부를 들고 있다. 이런 유산 때문에 중국은 라틴 아메리카의 저주를 피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4)

1부에서 우리가 관심을 가지는 것은 중국의 개혁 개방이다. 그는 이런 중국의 개혁 개방을 두 단계로 나누고 있다. 그의 입장을 간략하게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첫 번째 단계는 1978년부터 1989년까지다. 이 시기에 중국은 일부 화교 자본을 끌어들이기는 했지만 주로 지방에 있었던 기존의 사회주의적 국유 기업(또는 집체 기업)이 자본주의적 기업으로 전환하면서 중국의 자본주의화가 시작했다.

사회주의 시대 농촌에 저장되어 있었던 과잉 인구가 노동자로 제공되었으며, 인플레이션 아래서 기업은 시장 가격과 국정 가격이라는 ‘쌍궤제’를 통해 국정 가격으로 물자를 공급 받아 시장 가격으로 판매하면서 이윤을 축적했다.

사회주의 시대 노동자를 보호해 왔던 사회 보장 제도가 이 시기 폐지되면서 노동자는 저임금에 시달리게 되었으며 관료와 기업의 유착 관계가 발전하면서 부패가 증가했다.

저자는 이 때문에 1989년 천안문 사태가 벌어졌다고 한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이 천안문 사태의 두 축이었던 학생과 노동자가 분열했다 한다. 학생은 정치적 민주화를 통해 관료의 부패를 척결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노동자는 정부의 저임금 정책에 반대하면서 사회주의적 사회보장 정책을 회복하기를 요구했다. 그는 양자의 분열 때문에 천안문 사태는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고 한다.

5)

저자는 1992년 등소평의 남순 이후 2003년 장택민이 물러나기까지가 개혁 개방의 두 번째 단계라 한다. 오늘날 중국의 사회 경제를 지배하는 기본 틀이 마련한 것이 바로 이 시기다. 이때 중국은 미국 금융회사의 조언으로 신자유주의적 정책을 실행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그 주요 내용은 아래와 같다.

➀ 국유 기업을 개혁하여 수출 기업화 했으며 ➁ 해외 자본을 끌어들여, 사영 기업이 출현했다. ➂ 호구제를 폐지하여 싼값으로 무제한 노동자를 공급했으며 복지 체계를 완전히 해체했다. ➃ 노동자를 지원하기 위해 저가 농산물 정책을 실행했다. ➄ 국유 은행의 저금리 대출, 정부의 고환율 정책으로 값싼 상품을 해외에 수출했다. ➅ 정치적으로 대학 졸업자, 기업가를 당으로 흡수했으며, 수출 기업이 존재하는 연안 지역 출신이 당을 지배했다.

이상의 정책을 본다면 경제적으로는 대체로 한국의 군부 독재 시대 수출 산업화 정책과 무척 닮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한국의 경우 주로 차관의 형태로 외국 자본을 끌어들였으나 중국의 경우 외국 자본의 직접 투자에 의존했다는 점에 차이가 있다.

중국은 이상과 같은 개혁으로 세계적인 신자유주의 체제로 편입했다. 중국은 해외 금융 자본과 국내 과소 소비[저임금, 값싼 농산물]에 기초하여 저가 상품을 생산하여 미국과 서구로 수출했으며 여기서 쌓인 막대한 수출 이윤을 다시 미국의 국채에 투자했다. 미국은 부채에 기반을 두고 낮은 인플레이션과 저금리를 통하여 과잉 소비 체제를 형성했으며, 그 결과가 미국 부동산 투자였다. 부채를 통해 형성된 미국 금융 자본은 다시 중국의 수출 기업에 투자되어 미국 금융 자본에 높은 이윤을 주었다.

6) 여기까지가 1부의 주요 내용이다. 지금까지 서술된 주요 내용은 개혁 개방 정책이 전개된 역사적 과정이다. 이에 대해 필자로서는 충실하게 소개할 뿐 옳고 그름에 대해 평가하기 어렵다. 다만 헝다 사태에서 보듯이 중국의 주요 기업이 지고 있는 막대한 부채가 어떻게 형성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저자의 설명을 통해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

부채에 기반한 성장이란 신흥 개발도상국으로서는 피할 수 없는 길이다. 부족한 자본을 마련하는 길은 곧 부채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부채는 성장을 통해 갚아나가야 한다. 남미의 경우는 외자 도입을 통해 개발 정책을 펼쳤으나 결국 부채 위기로 파산하고 말았다. 그렇다면 중국의 경우는 어떻게 될까? 저자는 이 문제를 2부에서 다루고 있다. 2부의 주요 내용은 다음에 다루기로 하자.


올가 토카르추크 『방랑자들』 (4) – 날뛰는 여인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 비평]

1)

올가 토카르추크의 소설 방랑자들은 여러 단편이 모인 작품이다. 이야기, 논문, 콩트 등이 결합한 이 작품은 프리드리히 슐레겔의 낭만 문학의 이념인 보편 문학의 개념에 가장 적절한 예가 될 수 있겠다.

이 작품 속에 포함된 많은 단편 가운데 가장 핵심은 아마도 책의 제목을 따온 것으로 보이는 ‘방랑자들’이라는 단편이다. 이 단편의 주인공은 아누쉬카이다. 그녀는 모스크바에 살고 있다. 그녀가 모스크바 지하철 입구, 케르베로스의 개(즉 지옥의 문을 지키는 개)가 지키는 입구에서 만난 여인이 날뛰는 여인이다.

아누쉬카의 아들은 유전적 질병으로 거동할 수 없는 병을 앓고 있다. 이 질병은 아누쉬카와 그의 남편이 체르노바에서 방사선을 쏘였기 때문에 얻은 질병이다. 그녀는 아들과 함께 정신적 고통을 겪는 남편을 돌본다.

그녀의 남편은 감옥에 갔다 온 모양이다. 아들 병의 원인에 대해 입을 잘못 놀렸던 모양이다. 그 뒤 남편 역시 침대에 누워 매일 술로 세월을 보낸다. 국가에서 주는 보조금으로 살아가는 데 큰 지장은 없다. 단편의 서두는 이렇게 시작한다.

“밤이 되면 세상 위로 지옥이 떠오른다.”

모든 것이 밤에는 “형태를 읽어버린 몸뚱이처럼 이전에 과연 어떤 의미가 있었는지 짐작조차 하기 힘든 상태가 된다.” 이런 밤에 아누쉬카는 꿈을 꾼다. “목을 자른다든지, 사랑하는 이의 몸을 핏물에 담근다든지…”하는 꿈이다. 아누쉬카에게 이것이 세상의 진면목이다.

작가의 관심은 아들이나 남편, 사회에 있지 않지만, 사회적 문제가 이 단편 전체에 절망적인 분위기로 깔려있다. 작가는 오직 아누쉬카의 내면에만 주목한다.

2)

아누쉬카는 일주일에 하루는 휴가를 얻는다. 그 하루는 그녀의 시어머니가 자기의 아들과 손자를 돌본다. 아누쉬카는 그 하루에 약국에 들르거나 음식물을 사거나 하는데, 그날 그녀가 어기지 않고 하는 한 가지 일이 있다. 그것은 마음껏 우는 일이다.

그녀는 대개 대성당에 가서 기도하면서 운다. 그녀는 꼭 아버지같이 인자한 모습을 지닌 성상 앞에서 운다. 그녀가 울기 위해서는 주변이 고즈넉해야 하지만 성상의 눈이 그녀를 반드시 지켜보아야 한다.

그날도 휴가를 얻어 평소 가던 대성당에 갔지만, 그날따라 관광객이 많아서 아누쉬카는 울음을 터뜨릴 기회를 잡지 못했다. 아누쉬카는 도시 주변에 사람이 거의 없는 작은 성당으로 갔다. 이번에는 성상의 모습이 “물에 빠진 사람의 얼굴” 같았기에 도대체 울음이 나오지 않았다. 아누쉬카는 이렇게 생각한다. “신이 약하며 패배자라는 것을 보고 싶지 않다.”

성상을 올려보던 아누쉬카는 성상의 모습에 충격을 받는다. 성상의 시선이 그녀의 정수리에 꽂히면서 그녀의 먼 곳의 천둥소리를 듣는다. “마치 뭔가를 체험한 듯했고, 무언가 그녀를 관통하고 지나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 느낌은 충격이었지만 어두운 절망적 느낌이 아니었다. 이 느낌을 작가는 “몸에서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는 어떤 맑은소리가 흘러나오는 것 같았다고” 서술한다. 아누쉬카에게 어떤 근본적 전회가 일어난 것이다.

끝내 울음을 울지 못한 아누쉬카는 지하철과 버스를 갈아타서 집 앞에 도착했지만 돌연 멈추어 선다. 다시 집에 불이 켜져 있는 것을 보고 또 앞으로 걸어간다. 이러기를 몇 번 반복하다, 그녀는 이윽고 발걸음을 돌려 지하철로 돌아간다.

불면증에 시달리는 것처럼, 그녀는 울음을 울지 못한 상태에 시달리며 마침내 현실을 떠난다. 그녀는 그때부터 지하철의 지하 세계에 산다. 매일 이런저런 지하철 노선을 갈아타면서 끝없이 움직인다. 아누쉬카는 노숙자, 아니 방랑자가 된 것이다.

3)

물에 빠진 자의 얼굴은 어떤 모습일까? 공포로 악을 쓰는 파랗게 질린 얼굴이 아닐까? 성상의 얼굴이 아누쉬카에게 왜 그런 모습으로 비추어졌을까?

언젠가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 있다. 성철 스님이 10년 면벽 수도 끝에 깨달았다. 그때 그의 눈에 비친 세상은 피투성이의 세계였다고 한다. 아누시카 역시 어떤 깨달음을 얻었는지 모르겠다. 이 세계 속에서 그녀는 행복했다. 아무런 “생각도, 근심도, 기대도, 희망도 없었기에, 그것은 안락한 느낌이었다.”

아누쉬카가 지하철 노숙자의 세계에서 만난 여인이 날뛰는 여인이다. 그녀는 덕지덕지 옷을 껴입고 있다. 머리는 수건과 모자로 둘러싸고 지하철역 앞에서 8자를 맴돌면서 입으로는 욕을 쏟아낸다. 누구도 듣지 않지만 아누쉬카는 날뛰는 여인에게 다가가 밤이면 함께 머무른다.

그리고 어느 날(몇 달이 지났는지를 작가는 말하지 않는다) 지하철역에 청년들이 모이고 그 가운데는 말을 몰고 온 처녀도 있다. 이 청년들을 보면서 아누쉬카는 마침내 울음을 터트리게 된다. 그들이 그의 아들 피에티아[‘피에타’와 같은 말로 보인다)를 생각나게 했기 때문이다.

“바위처럼 무겁고 고통스럽다. 그녀의 안에서 피에티아가 부풀어 오르고 점점 자라났다. 아마 다시 그를 출산해야 할 것 같았다. … 피에티아가 어느 틈에 그녀의 폐에 달라붙고 목구멍까지 솟았다. 흐니느는 것 말고 다른 방법으로는 도저히 그를 꺼낼 수 없을 것이다.”

아누쉬카가 지켜보던 중, 무리 속의 한 처녀가 말이 도망치려 하자, 채찍으로 등을 내리친다. 그것을 보고 아누쉬카와 날뛰는 여인이 달려간다. 그리고 짓눌린 목구멍을 짜내어 소리친다. “(말을) 내버려 두라고!!”

이것은 니체의 일화를 연상시킨다. 니체는 토리노 시장에서 채찍을 얻어맞는 나귀를 껴안고 울었다고 한다. 그 이후로 니체는 정신적 어둠 속에 살았다고 한다.

4)

청년들과 싸움을 벌인 덕분에 경찰서에 끌려갔으나 곧 방면된 아누쉬카는 마침내 자기 집으로 돌아간다. 이야기는 이것으로 그치지만 이어지는 단편에서 날뛰는 여인이 무슨 욕을 했는지가 나온다. 날뛰는 여인의 말이다.

“몸을 흔들어, 움직여, 움직이라고, 그래야만 그에게서 도망칠 수 있어. 이 세상을 다스리는 존재에겐 움직임을 지배할 능력은 없어. 우리의 몸은 움직일 때 비로소 신성하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어. 움직여야만 그에게서 벗어날 수 있는 거야.”

세상의 지배자와 싸우는 힘은 움직임에 있다. 작가가 소설 방랑자에서 말하려는 것이 그것이다. 이 말을 통해 아누쉬카가 집과 아들과 남편을 모두 떠나 지하의 세계로 간 이유가 설명된다. 밤의 세계, 지옥의 지배자, 케르베로스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작가는 아누쉬카로 하여금 다시 집으로 돌아가게 했다. 그건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말에게 채찍질하는 것과 울음의 터뜨리는 것 사이의 연관이 무엇일까? 주인공에게 마침내 때가 다가온 것인가? 때 즉 카이로스 말이다.

올가 토르카추크의 신비한 철학이 시종 나의 뇌리에 떠나지 않는다. 아뉘시카는 울음을 터뜨릴 때를 얻었지만 나는 철학의 때를 얻었다.

올가 토카르추크 『방랑자들』 (3) – 블라우 박사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 비평]

올가 토카르추크 『방랑자들』 (3) – 블라우 박사

 

이병창(한철연 회원)

 

1)

올가 토카르추크의 소설 <방랑자>의 핵심 키워드는 ‘방랑’이다. 작품 속에는 이 방랑의 문제와 연관된 여러 인물이 등장한다. 쿠니츠키, 블라우 박사, 날뛰는 여인 등이다.

왜 집을 떠나는가? 앞의 글에서 소개한 쿠니츠키라는 인물은 방랑자가 영원히 방랑하게 된 동기를 설명해 준다.

쿠니츠키가 여행 중 들렀던 어느 섬에서 아내와 아이가 사라진다. 그는 아내의 흔적을 찾아 뒤지던 중 아내의 핸드백에서 카이로스라는 글자를 발견한다. 그다음부터 그에게 세계는 카이로스를 가리키는 편집증적 신호이다. 그는 이 카이로스를 찾아 떠난다. 아니 거꾸로 카이로스가 그를 끝없는 방랑의 한 가운데로 불러냈다.

이번에는 블라우 박사라는 두 번째 인물을 보자.

2)

올카 토카르추크의 이 소설에는 생체를 고정하는 기술에 대한 호기심이 이상하리 만큼 집요하게 등장한다. 예를 들어 밀납인형이라든가 미이라, 포르말린 용기에 담긴 동물이나 인간의 신체 부분, 분더카세(Wunderkasse: 기이한 물건의 수집해 놓은 방), 미니아처, 신체를 순간적으로 영원히 얼리는 플라시티네이션(Placitination: 특수 고형화 기술), 사진술 등이다.

이런 호기심은 처음엔 독자들에게 마치 컬트 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을 자아낸다. 심지어 그 끔찍한 아름다움 때문에 어떤 섹슈얼한 느낌조차도 발생한다. 아래 인용문을 읽어보라.

“마치 피 묻은 커다란 입술처럼 간이 위를 에워싸고 있다. 자궁의 위쪽으로 연결된 콩팥과 수뇨관도 보인다. 그것들은 맨드레이크의 뿌리를 연상시킨다. 자궁은 눈으로 감상하기에 즐거운 근육이다.”

그러나 작가에게 이런 기술들은 단순한 호기심은 아니다. 그것은 그에게 철학적 의미가 있다. 그것은 카이로스, 방랑이라는 개념과 연관된다. 방랑은 모든 고정된 것, 법칙적인 것, 기계적인 것을 파괴하면서 카이로스를 즉 흐름이고 우연적 만남이며 개별적인 것을 찾아 떠나게 만드는 힘이다.

이런 방랑의 힘에 대립하는 것이 생체를 고정하려는 기술이다. 이 기술은 모든 개별적이고 우연하고 흘러가는 것을 다시 영원히 얼어붙게 만든다.

3)

작가는 마침내 움직이는 것을 영원히 고정하고자 하는 인간의 광기를 형상화한다. 블라우 박사가 그런 인물이다. 작가는 2개의 단편에 나누어서 블라우 박사를 서술한다.

블라우 박사는 플라시티네이션 전문 학자이다. 박사는 플라시티네이션 분야에서 지금 최고의 학자로 알려져 있다. 그는 의대를 나와 의학 박물관에 들어가 유리병에 보관된 신체 장기를 연구한다. 그의 관심은 의학적인 것이 아니라 신체 장기를 어떤 방식으로 보존했는가에 있다.

그의 목표는 인간의 육체를 완전하게 보관하는 것이다. 고대의 미이라는 인간의 표면만 남기는 것이니 오히려 온전한 육체를 파괴하는 것이다. 현대의 플라시티네이션 기술의 발전은 그의 희망을 실현하게 해 주었다.

그의 취미는 사진을 찍는 것이다. 사진 역시 순간을 영원히 보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과 관계 한 여성의 질을 사진으로 찍어 보존한다. 그의 희망은 실제의 질을 수집해 유리병에 보존하는 것이다.

“신체의 모든 부위는 기억할 만한 가치가 있다. 모든 인간의 몸은 보존해야 마땅하다. … 만약 블라우박사에게 세상을 창조하도록 했다면 우리에게 별 필요도 없는 영혼은 필멸로 만들고 아마도 육체에 불멸을 허용했을 것이다.”

단편 1은 블라우 박사가 플라시티네이션에 흥미를 느끼게 된 과정을 서술한다. 단편 2에서는 블라우 박사가 몰 교수 부인의 초대를 받아 그의 집으로 찾아가면서 전개된다. 몰 교수는 이 분야에서 블라우 박사를 능가하는 인물이다. 몰 교수의 기법은 같은 동료 학자들에게 비밀이었다.

4)

몰 교수는 사고로 죽었지만 블라우 박사는 그가 남긴 보존 기법을 통해 무언가 배우고자 한다. 몰 교수의 집은 바닷가에 있고 그를 맞이한 부인은 바다에서 수영하다 물에 젖은 몸으로 그를 맞이한다.

하지만 블라우 박사는 그녀의 몸에 무관심하다. 그의 관심은 온통 몰 교수의 집에 있다. 그는 몰 교수의 서재와 실험실을 방문하면서 그 기억을 잊지 않기 위해 몰래 기록한다.

블라우박사는 몰 교수가 남긴 고양이 플라시티네이션 작품을 보게 된다. 이 고양이는 마치 살아 있을 때와 똑 같이 부드러운 털을 갖고 가볍고 따뜻하다. 마치 살아 있는 고양이가 그렇게 하듯 건드리면 온몸을 웅크리고 펼치고 한다.

몰 교수 부인은 그를 성적으로 유혹하지만, 그는 그런 부인의 유혹이 오히려 불편하다. 부인이 그에게 바다에서 수영하자고 하자 그는 달갑지 않지만, 하는 수 없이 함께 나체로 수영한다. 이야기 마지막에 저녁에 식사 후 와인을 마시며 부인이 그의 손을 잡아 끌자 그는 이를 거부하고 부인의 집을 나간다. 그는 이렇게 생각한다.

“대체 무엇 때문에 살아서 꿈틀대는 늙고 뜨끈뜨끈한 몸뚱이에 자신의 신체 일부를 쑤셔 넣어 가며 따분한 짓을 견뎌야 한단 말인가?”

5)

작가가 창조한 블라우 박사라는 인물은 흥미롭다. 이 인물은 살바도르 달리가 만든 서랍이 달린 비너스라는 조각품을 연상시킨다. 또는 오늘날 자신의 신체를 완벽한 칼날처럼 가다듬는 선남선녀와도 닮았다.

그는 무엇 때문에 살아 있는 육체와의 접촉이 아니라 죽어 있는 신체의 영원한 보존에 관심 가지게 된 것일까? 에리히 프롬이라면 이런 인물을 저장형 성격이라고 하면서 자본가의 성격으로 파악했을 법하다.

작가는 주인공 블라우 박사가 몰 교수 부인의 집으로 날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떠올렸던 생각을 소개한다. 혹 이 생각과 블라우 박사의 성격이 연관된 것이 아닐까?

“그의 손은 여성의 몸을 통해 수천 번이나 확인한 끝에 그 안에서 어떤 균열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이미 포기한 상태였다. …. 어쩌면 인체의 내부는 전혀 복잡하지 않고 단순할지도 모른다. …. 세상에서 가장 영리한 여행자도 자신의 짐 가방을 이처럼 [우리 몸 안의 장기처럼] 완벽하게 정리하여 꾸릴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블라우 박사는 비행기 안에서 잠에 빠져들었다고 했다. 신체에 균열이 없다는 사실이 블라우 박사에게 편안함과 행복감일 주었다는 것이다.


올가 토카르추크의 『방랑자들』 (2) – 구멍 뚫린 사내 쿠니츠키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 비평]

올가 토카르추크의 소설 『방랑자들』을 읽고 (2) – 구멍 뚫린 사내 쿠니츠키

 

이병창(한철연 회원)

 

1)

올가 토카르추크의 소설 방랑자들 속에는 여러 인물이 나온다. 지하철을 통해 끊임없이 이동하는 노숙자, 인간의 육체를 영원히 보존하려는 집념을 지닌 권력자, 오래전의 첫사랑을 안락사 해 주러 고향으로 돌아가는 여인 등.

그 가운데 쿠니츠키는 소설 속에 등장하는 방랑자가 방랑을 떠나는 이유를 설명해 준다. 이 인물은 소설의 앞 부분에 연속된 두 편의 단편에 걸쳐 등장하고 한참을 뛰어넘어 소설 끝날 무렵 한 편의 단편에 다시 등장한다. 앞의 두 단편의 제목은 <쿠니츠키-물1, 2>이고 마지막 단편의 제목은 <쿠니츠키-대지>이다.

물과 대지라는 대비가 흥미롭다. 물의 이미지는 이 작품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

2)

첫 번째 단편에서 쿠니츠키는 아내와 세 살 아이와 함께 크로티아를 가로질러 비스섬으로 여행을 갔다. 거기서 아내와 아이가 함께 사라진다. 그는 사흘을 작은 섬에 머무르며 아내와 아이를 찾지만 찾지 못한다.

아내와 아이가 실종된 곳이 섬이라는 사실이 흥미롭다. 섬이란 물, 바다에 갇혀 위태롭게 떠 있는 존재가 아닌가? 그런 섬이라면 언제라도 실종이 일어날 수 있다. 그곳은 세상에 구멍이 뚫리는 약한 곳이다.

두 번째 단편은 아내와 아이를 찾는 그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그는 그 흔적을 찾는다. 그는 아내가 남긴 소지품을 뒤진다. 그리고 핸드백 속에 우연히 남아 있는 ‘카이로스’라는 글자를 발견한다. 이 글자는 그에게 갑작스러운 빛을 비추어준다.

이 글자를 발견한 이후 그는 아내의 소지품을 뒤지면서 마구 내 던진 물품들이 어떤 형상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는 거기에 어떤 의미가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때 그는 “역겨운 공포의 냄새”를 맡는다.

알 수 없는 존재가 그에게 보내는 신호, 그 신호를 통해 드러나는 시꺼먼 허무의 세계, 세계는 이제 무너졌다. 그 앞에서 그는 공포에 떤다. 이 공포가 역겨운 냄새로 표현된 것이 독특하다.

3)

세 번째 단편에서 밝혀지는 일이지만 그는 편집증 환자로 환상을 보고 있다. 아내와 아이를 잃고 돌아온 다음 어느 날 그가 잠에서 깨어났을 때 그의 아파트 벽은 흥건하게 물이 젖는다.

“그는 발목까지 차오르는 물속을 걸어서 자동차로 다가갔다. 차를 타고 좀 더 높은 지역에 있는 이웃 마을로 도망쳐 보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알고 보니 그곳 역시 물의 덫에 갇혀 버렸다.”(504쪽)

물이란 이미지가 이렇게 섬뜩하게 그려진 소설을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물이 자주 자살자를 끌어당기는 이유를 알겠다.

그의 환상 속에서 아내와 아이는 돌아와 그에게 그 섬에서 실제 일어났던 일에 대해 감춘다. 처음에 이게 사실인 것처럼 독자는 속는다. 하지만 마지막 장면에서 이것이 그의 환상이라는 것이 드러난다.

4)

환상 속에서, 그는 아내에게 실종이 일어난 다음의 일에 대해 집요하게 캐묻지만, 아내는 그의 말을 무시한다. 그럴수록 그의 의심은 더 강해진다. 그는 아이를 정신분석학자에게 데려가 무의식을 탐구하려 한다. 하지만 그는 정신분석학자의 음모(?) 때문에 실패한다.

그는 도서관에 들러 사전을 뒤지고 인터넷에 물어 아내의 소지품에서 발견한 ‘카이로스’라는 말의 의미를 탐구한다. 여기에 무슨 단서가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카이로스, 이 말은 그에게 만물에는 보이지 않는 의미가 있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그가 탐구할수록 그의 만물은 의미를 잃어버리고 무언가 보이지 않는 어떤 존재가 보내는 신호가 된다.

“표시 너머에 다른 표시를 가리키는 표시가 있고 다른 표시에서 야기된 표시들이 있었다. 표시의 음모, 표시의 네트워크, 그의 등 뒤에서 표시들끼리 서로 합의가 이루어졌다. 무관한 것은 아무것도 없고 모든 게 다 중요했다. 전부 끊임없이 이어지는 커다란 퍼즐이었다.”(515쪽)

5)

아내를 미행했다가 들켜서 아내와 함께 돌아와 집에 들어오는 순간, 현관을 열면서 갑자기 그의 환상이 중단된다. 그의 집에는 아내도, 아이도 없다. 오직 아내가 남겨놓은 옷가지, 아이의 장난감만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다. 그는 그 흔적 사이를 유령처럼 돌아다닌다. 그는 “스스로 벽을 통과하고 있다고” 느꼈다.

그리고 그는 마침내 방랑을 떠난다. 알 수 없는 존재가 보내는 그 의미, 그때를 찾아서 말이다. 소설의 마지막은 이렇게 끝난다.

“9시쯤 그가 진하게 커피를 탄다. 그리고 나서 욕실에 있던 면도용품 일부와 옷장 안에 있던 셔츠 몇 벌, 그리고 바지를 챙겨서 가방에 넣었다. …. 그는 체코와의 국경을 향해 화살처럼 똑바로 꼿꼿하게 남쪽으로 향했다.”(539쪽)

그저 간단한 여행을 떠나는 듯 그는 떠났다. 체코를 지나야 비스섬으로 갈 수 있다. 세계가 구멍 뚫린, 그 섬 말이다.

6)

여기서 우리는 갑자기 혼란에 빠진다. 마지막 단편 끝에서 그가 비스섬으로 떠난다는 사건은 어쩌면 처음 단편에서 그가 처음 아내와 아이와 함께 비스섬에 도착했다는 사실과 이어지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그가 아내와 아이를 심문하는 것이 환상이듯이 비스섬에서 아내와 아이가 실종되었다는 사실도 환상이 아닐까?

갑자기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어디에서 환상인지 모호해진다. 이런 모호성 때문에 그에게 역겨운 냄새가 등장한 것이 아닐까? 하이데거라면 이를 불안이라 했을 것이고 사르트르라면 이를 구토라 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에게는 역겨운 냄새를 맡는다.

이 차이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 하이데거나 사르트르에서 새로운 세계는 진리의 세계이다. 하지만 쿠니츠키 앞에 역겨운 공포의 냄새로 떠오른 세계는 그저 알 수 없는 세계다. 이전의 세계와 새로운 세계 가운데 어느 세계가 현실이고 어느 세계가 환상인지도 알 수 없다.

불안과 구토에서 사람은 구원의 세계로 들어간다. 하지만 역겨운 냄새가 풍기는 모호한 세계에서 그는 방향이 없이 다만 방랑할 뿐이다. 그는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그는 노숙자 되고, 세계를 여행하는 여행자가 될 것이다.

이렇게 해서 소설이 끝나는 곳에서 소설은 시작된다. 이제부터 소설은 방랑하는 인물, 물과 같은 존재와 그런 방랑을 고정하려 드는 존재, 대지와 같은 존재를 탐구하는 서사시가 될 것이다.

이 소설에서 끔찍한 이미지는 흘러가는 존재를 고정하려는 자의 집요한 노력이다. 그는 이를 인체를 투명하게 보존하려는 자의 노력 속에서 발견한다. 다음엔 이 이야기를 들어보자.


 

올가 토카르추크의 『방랑자들』 (1) – 카이로스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 비평]

올가 토카르추크의 소설 『방랑자들』을 읽고 (1) – 카이로스

 

이병창(한철연 회원)

 

올가 토카르추크의 소설 『방랑자들』을 읽었다. 이 소설은 2019년에 노벨상을 받은 작품이다. 그는 폴란드 태생의 작가라는 것밖에 자세한 것은 알지 못하지만, 이 소설은 내게 정신적인 충격을 주었다.

소설은 낭만주의 철학자 프리드리히 슐레겔이 그의 철학 단편에서 이상으로 삼았던 문학 형식인 ‘보편 문학’의 원리에 따른다. 이 소설은 수많은 단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심지어 한 인물을 다루는 이야기조차 소설의 여러 부분에 흩어져 있다. 이 소설에 포함된 단편은 그 형식도 갖가지이니, 본래의 소설 즉 이야기도 있고 심리학적 연구나 철학적 단상도 있다. 전체적으로 하나의 중심이 보이지 않으니 슐레겔이 ‘중심이 무한한 소설’이라고 말한 것에 적합하다.

억지로 하나의 중심을 찾으라 하면 아마도 카이로스[kairos]라는 개념이 아닐까 한다. 카이로스는 그리스어로 ‘때’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흘러가는 시간이라는 개념과 다른 또 하나의 시간 개념이다. 예수가 “아직 내 때가 되지 아니 하였나이다”라고 말할 경우 또는 시인 릴케가 ‘가을의 시’에서 “주여 때가 왔습니다”라고 기도할 경우 사용되는 개념이다. 한자어로는 기회라고 번역될 수 있겠다.

이 ‘때’라는 개념은 그리스에서 신격화되었다. 소설의 마지막 쯤에 작가는 그리스 연구자인 한 교수를 등장시킨다. 그는 은퇴한 후 그리스 유적지를 오가는 유람선에서 그리스에 대해 강의하면서 이 카이로스라는 신을 소개한다. 교수는 실제 모델이 되는 이탈리아 토리노 박물관에 소장된 리시포스의 부조를 소개하면서 그 부조와 연관된 포세이디포스의 시를 소개한다. 그 시는 이렇다.

 

“모든 것을 길들이는 카이로스

왜 항상 발돋움을 하고 있는가?

쉼 없이 세상을 뛰어다니고 있으니까.

무엇 때문에 당신의 두 발에는 날개가 달렸는가?

바람과 함께 날아다니기 때문이지.

당신의 오른 손은 무엇 때문에 면도칼을 들었는가?

세상의 모든 날카로운 것보다 더 날카롭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알려 주기 위한 표시지.

머리카락은 왜 눈을 가렸는가?

나와 정면으로 마주치는 사람이 내 앞머리를 붙잡을 수 있게 하기 위해서지.

세상에, 당신의 뒷머리는 왜 하나도 없는가?

한번 지나치면 날개 달린 발로 빠르게 달아나 버리기 때문에

아무리 원해도 그 누구도 날 뒤에서 붙잡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지.”

 

소설에서 교수는 이 시를 읊고 나서 마침내 그의 때를 얻었다. 그는 발작을 일으켜 죽음에 이르렀다.

이 시는 때, 기회라는 개념에 대한 적절한 설명이라 하겠다. 눈앞에 보고도 놓친 수많은 기회, 이미 떠나가면 아무리 한탄해도 다시 돌아오지 않는 기회를 생각하면 이해될 것이다.

때라는 개념이 이 작품에서 중요한 것은 그 개념이 방랑자 개념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위의 시에도 카이로스 신은 쉼 없이 세상을 돌아다닌다. 마찬가지로 이 카이로스를 만나기 위해서는 온 세상을 돌아다녀야 하지 않을까? 아마 잠들 수도 없을 것이다. 그가 잠든 사이에 신부가 왔다 갈지 모르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니 젊은 시절, 방황했던 적이 있다. 무언가를 만나기 위해 그리하여 때를 얻기 위해 잠들지 못하고 늘 거리를 서성거렸다. 지금은 이미 포기했고 병든 삶에 안주한다. 이런 나 앞에서 소설은 그만큼 정신적 충격이었다.

이 작품에서 카이로스가 등장하는 것은 이 작품 중에 세 군데 걸쳐 나누어져 등장한 한 쿠니츠키라는 인물의 이야기를 통해서 이다. 이제 쿠니츠키 이야기를 해 보자.


연재를 마치며 [유운의 전개도 접기]

연재를 마치며

 

이유운

 

저는 지금껏, 이런 연재를 마치는 마지막 글로 ‘연재를 마치며’ 라는 제목을 다는 게 참 멋없고 촌스럽고 성의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마지막 글을 쓰게 되니까, 이 제목만큼 담담하고 모든 걸 말할 수 있는 제목이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마지막 연재를 편지 형식으로 대신한다는 것도요. 뻔한 결말이 되어서 아쉽습니다만, 뻔한 게 아니라 구관이 명관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편지라는 건 정말 내밀한 형식의 글이죠. 편지가 의미가 있기 위해서는 하나의 조건이 필요합니다. 바로 유일의 독자. 물론 저도 카프카나 생로랑이 친구들, 연인들, 사랑과 주고받은 편지가 책으로 나왔을 때 환호했지만, 그 글들은 유일의 수신자가 아니라 제게 읽혔다는 점에서 이미 편지가 아니게 된 셈입니다. 편지의 형식을 가지고 있는 다른 글이 되는 거죠. 그러니까 지금 제가 쓰는 편지도, 제가 수신자를 모르고 있으며 그 수신자가 유일이 아니라는 점에서 편지가 아니게 되는 셈이지요. 이런 구구절절한 변명을 모두 대면서도 편지로 마지막 인사를 드리려고 합니다. 그 방법이 저와 지금 이 글을 읽는 당신 간의 거리를 좁히고, 또 아주 친한 벗인 척 할 수 있는 가장 편리하고도 빠른 것이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마지막 편지로는 이런 말을 하려고 합니다. 저는 사랑시를 자주 씁니다. 제 「전개도 접기」라는 연재를 꾸준히 보아준 성실하고 다정한 독자들이 얼마나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제 시가 대부분 사랑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는 것은 숨겨진 비유 같은 건 아닙니다. 필름을 덮지 않은 새 휴대폰 화면에 덕지덕지 묻은 지문처럼 그대로 드러나 있으니까요.

사랑이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저는 데뷔하고 나서 이런 질문을 많이 받았습니다. 사랑에 대해 많이 이야기하니까 그런 것 같아요. 글쎄요, 그건 참 어려운 질문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말할 수는 있겠습니다. 저는 엉망이 된 세계에서 자꾸 허물어지고 다시 자신을 세우는 인류가 좋습니다. 제가 그런 특성을 가진 종의 한 일원이라고 생각하면 퍽 즐거워집니다. 생물에는 종마다의 특성이 있지 않습니까? 인류의 종적 특성은 허물어지고 다시 서는 것 같아서요. 그리고 저는 그 허물어지는 이유도, 세우는 힘도 모두 사랑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살아남기 위한 방법으로 사랑을 선택한 인류, 전 그런 걸 좋아합니다. (물론 그런 인류 중 한 개체가 저에게 다가와 말을 거는 건 좀, 별개의 일입니다.) 저는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게 정말정말 좋아요. 술을 마시면 저는 이런 이야기들을 자주 합니다. 얇고 흑심이 여기저기 묻은 더러운 손을 흔들며 담배를 피우는 오래 전의 사람을 기억하기도 하고, 저를 연필로만 덧그리는 사람을 생각하기도 합니다. 이런 다른 결의 생각들이 모두 제 안에서 시작된다는 건, 논리적인 사고로는 아무래도 불가능하지 않겠습니까? 그 논리 바깥에 있는(뛰어넘는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 뭉글뭉글한 것, 시각보단 촉각에 가까운 것, 아폴론보다는 디오니소스에 가까운 그 무언가를 사랑이라고 지칭합니다. 연애로 축소하지 않는 사랑이라는 단어가 어디까지 포괄할 수 있을지, 그런 것들을 상상하는 건 퍽 즐겁지 않습니까? 적어도 저는 그래서 시를 쓴답니다.

신기한 건, 전 아무에게도 이 질문을 되돌려 준 적은 없어요. 사랑이 뭐라고 생각하니? 그 질문을 했을 때 사실 그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대답할까봐 두렵기도 했고, 그가 한 대답이 저를 실망시키게 되면, 제가 또 뭐라고 그에게 실망했다는 점 때문에 슬퍼질 것 같기도 했고, 정말 솔직히 말하자면 궁금하지 않기도 했습니다. 다른 사람이 사랑을 뭐라고 정의하는 게 대체 저랑 무슨 상관이란 말입니까? (사랑과 다정이라는 건 아주 다른 결입니다. 그렇지요?) 아마 저와 같은 정의로 사랑을 공유하는 사람은 없을테고 바로 그런 점이 재미있는 건데요. 그래서 사실 전 이런 질문을 하는 게 치사하다고 생각합니다. 대답하는 저는 아주 많은 위험부담을 감수해야 하는 거니까요. 그렇다고 그간 한 많은 인터뷰들을 싫어했다는 건 아닙니다. 치사하다는 건 못된 건 아니잖아요.

오히려 ‘치사하다’는 어감도 귀엽다고 생각하거든요. 이건 다른 이야긴데, 저는 가끔 ‘내 맘도 몰라주고 정말 치사해.’ 라고 제게 누군가 써준 쪽지를 읽어봅니다. 제가 아주 어렸을 때 짝꿍을 같이 하지 않은 어떤 친구에게 받은 쪽지인데요, 옆에는 야무지게 악마도 그려뒀습니다. 왼손잡이였는지 옆으로 죄다 글씨가 번져 있어요. 이렇게 솔직하면서도 하나도 해롭지 않은 애정이 필요할 때 가끔 이 쪽지를 읽어봅니다. 귀엽지요. 사족이 길었습니다. 아무튼, 그래도 가끔, 물어보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때면, 내가 지금 사랑이 궁금한 게 맞나? 내가 누군지 궁금해서 물어보고 싶은 게 아닌가? 라는 의문이 들어요. 사랑과 저를 혼동한다는 건 슬픈 일이니까, 아무래도 질문하지 않는 편이 좋은 것 같습니다.

그저께 벗과 한철연에서 연재한 시 중에 가장 최근의 시, 「서울극장-인디아 송-」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사실 이것은 제가 퍽 공을 들이고 있는 『서울극장』 연작시 시리즈 중에 하나인데요, 서울극장은 제가 상경해서 처음으로 마음을 붙인 장소입니다. 사람이 별로 없는, 3시간이 넘는 영화를 보면 허리가 아픈, 단차가 높은 극장에서 타인의 고통이나 슬픔을 멀리서 관찰하면 제가 겪고 있는 일들은 가짜가 되었거든요. 그 순간이 소중했어요. 그래서 누구는 영화 감독을 꿈꿀 때, 저는 ‘돈을 많이 벌어서 서울극장을 인수해야겠다’ 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제가 적당한 돈을 모으기도 전에 문을 닫았네요. 애석하기 그지 없습니다. 그래서 서울극장에 관련된 시들을 많이 썼습니다. 팝콘 기름 때문에 영화를 보고 나면 손이 반질거리던 사람은 어디로 갔을까, 언제나 로맨스 영화만 고르던 사람은 어떤 결말을 원해서 자꾸 그런 영화들만 골랐을까, 사실 그 결말에 내가 없는 걸 원했기 때문에 쉼없이 그런 영화들을 골랐던 게 아닐까, 영화를 보고 나오면 길거리에 돌아다니던 술에 취한 늙은 남자들의 얼굴은 어디서 연원했을까, 서울극장이 허물어지고 나면 내가 자주 앉던 의자는 어디에서 소각될까, 이런 질문들이 자꾸 머릿속에 맴돌면 슬퍼지니까요, 오래 슬퍼하지 않기 위해서 시를 썼습니다. 시를 쓰고 나면 둥그렇게 헐어버린 마음이 남습니다. 슬픔은 잠시 없어지고요. 저를 슬픔이라는 감정에 한해서 소강 상태로 만들어주는 건, 서울극장 다음으로는 시를 쓰는 순간이 있겠네요.

최근에 자주 꾸는 꿈이 있습니다. 제가 시에서 만들어낸 생명들이 태어나 저를 공격하는 꿈입니다. 보통 사랑하는 마음으로 쓴 시들은 저의 편에 서고, 제가 증오하는 마음으로 쓴 시들은 저를 죽이고 잡아먹으려 들어요. 그 시들이 서로 싸우고 피가 발목까지 고일 정도로 끔찍한 전쟁에서 저는 좀 못되게도, 그걸 바라보고만 있습니다. 마음이 찢어지는 고통은 실제로 아무것도 찢지 않으니까요. 그 꿈을 꾸고 나면 항상 생각합니다. 사랑은 정말 증오보다 강한 걸까? 대부분 사랑시들이 지기 때문이지요. 그렇게 허물어진 마음을 세워서 다시 시를 쓰게 하는 건 아무튼 사랑의 일이지만…….

아무튼 제가 여기저기서 허물어지는 과정과 다시 세우는 일들을 시로 썼습니다. 이런 시들을 올리며 저는 꽤 행복했던 것 같은데요, 작가와 독자의 마음은 분리되어야 하니까요. 제가 행복했다는 사실이, 당신의 행복을 보장하지는 않는 거잖습니까? 그래도 즐거웠다면 더할 나위 없이 기쁘겠습니다. 마지막 인사는 이렇게 하는 게 좋겠습니다. 저는 다음 계절, 책이라는 물성을 가지고 여기저기서 만날 수 있을 겁니다. 저는 당신의 얼굴을 모르지만, 당신은 나의 얼굴을 알게 될 겁니다. 저는 당신의 글을 모르지만, 당신은 제 목소리도 알게 될 겁니다. 저는 아주 멀리도 있고 바로 곁에도 있습니다. 참 멋진 일이지요. ■

 

지금까지 이유운 작가의 코너 [유운의 전개도 접기]를 애독해 주신 독자들께 감사드립니다. 개인적으로 작가의 글들을 또 다른 곳에서 만나보길 고대합니다. 너무 멀리 있지는 말기로~   – 편집주간 –

 


지난 작가 소개 글: 필자 이유운은 시인이자 동양철학도. 2020 경인일보 신춘문예 시부문에서 <당신의 뼈를 생각하며>로 등단했다. ‘유운(油雲)’은 『맹자』에서 가져온 이름. 별일 없으면 2주에 한 번씩 자작시와 짧은 노트 내용을 올리려 한다. 유운의 글은 언젠가는 ‘沛然下雨’로 상쾌히 변화될 세상을 늠연히 꿈꾸는 자들을 위해 있다.

서울극장 ― 인디아 송(1975) / 어둠이 닿기 전에 [유운의 전개도 접기]

서울극장

― 인디아 송(1975)

이유운

 

 

글자의 단위로 해체된 영원의 풍경 앞에

우리가 있다

 

이 사이에서 서로의 배역을 침범할 수 있다

우리는 깨진 단어들을 주워서 서로에게 이름을 붙였지

 

나는 너를 위해 이교도의 신에게 고해하는 자

미움을 가지고 네게 도박을 하고 있어

 

우리는 결국 서로를 세 번 부정할 것이다

 

그런데도

손을 나누어 잡고 팝콘 통에서 가끔 손등을 부딪히고 비슷한 장면에서 자세를 고쳐 앉는 것도 가능했다

 

영화가 끝나면 사이도 배역도 없어지겠지

 

차가운 물에 뺨을 댄 채로

이방인을 예감했다

 

새로 켜진 얼굴이 나를 보고 있었다

네 뺨은 결말도 모르고 훌쩍 자랐지

 

헐어 쓰고 버린 마음처럼 매끄럽게

 

너는 그걸 무심하게 바라보는 게 사랑이라고 했지만 글쎄 나는 잘 모르겠어, 새로운 슬픔이나 기쁨, 사랑이나 전쟁을 마음에 더 이상 들이지 않는 것도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렇게 연약한 것을

 

우리는 사랑의 정의에 대해 토론을 하는 대신

서로의 뺨을 만지며 유일이라고 말을 하면서

무심결에 사랑을 너무나 잘 해낼 수도 있었다

 

저기 봐,

우리가 포개진 장면이 나온다

 

애써 익힌 사랑을 다음 세대로 전달하지 않는다는 동물에 대한 이야기를 알고 있니

 

내가 배운 건 영화를 위해 진실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

 

너는 입맞춤을 받기 위해 새롭게 만든 이마를 내게 보여준다

검정색 머리카락을 커튼처럼 걷어올리고

 

너는 사라진 것들을 많이 닮았어

너는 대답 대신 웃고 있지

 

희미한 빛 속에서 네 모양을 본다

 

왜 사랑의 장면은 이토록 희고 푸르러야 하는 걸까

 

 

어둠이 닿기 전에

 

 

사랑에 대해 오래 생각한다는 건 나 자신에 대해 오래 생각한다는 말과도 같다. 자신에 대해 오래 생각하는 것은 큰 고통과 두려움을 동반한다. 종이접기를 하면 손톱으로 꼭꼭 모서리를 눌러 접어도 뒤집으면 언제나 하얗게 벌어진 부분이 있었다. 내가 내 안으로 들어가 나를 뒤집으면 그런 흰 부분이 너무 많았다. 이기적인 마음, 사랑에 대해 욕심을 부리는 마음, 겁이 많아 이기심과 욕심을 사랑이라고 거짓말을 하는 마음, 그 거짓말이 남긴 흰 자국을 보면서 나는 절대로 누군갈 사랑하지 않을 거라고 다짐했던 마음. 그런 마음들은 항상 뒤엉키고 함께 자란다. 아무리 예리한 칼로도 그것을 도려낼 수 없다. 나를 들여다 보는 마음에서 나를 죽이고 싶은 마음이 자란다는 건 애석하고 슬픈 일이다. 시시한 사람이 되기 싫어서 그랬다. 나는 대단하고 비범한 사람이고 싶었는데 나를 뒤집었다가 다시 덮을 때마다 여러 자국이 생기고 나는 조금씩 비참하고 구겨질 뿐 조금도 대단한 사람이 되지 못했다. 하지만 이런 자국이 남은 종이들은 점차 부드러워지기 마련이다. 뺨에 닿을 정도로 부드러워지면 나는 종이로 태어나 광목이 될 수도 있다. 그런 가능성은 멋진 것이다. 나는 이런 생각을, 나의 선생님께 자주 편지로 보냈다. 나는 이 편지들을 오래 읽어본다. 그리고 어떤 사람에게도 이 글이 위로가 될 것이라고 믿는다.

 

[2018년 11월 15일 오전 2시 49분] 난들 뾰족한 수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학창 시절은 미래가 자신에게 다가와 있기 때문에 장래의 입장에서 자신이 만나는 사람이나 제도를 진부한 것이고 형편없는 것이라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또 한편 기존의 언어와 생활 관습을 익히거나 알지 않으면 그들을 넘어설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마치 어린이가 부모의 언어를 배우다가 부모에 항의하는 것과 같을 것이다. …… 그러니 아무 염려 말고 하고 싶은 연구를 끝까지 해야 한다. 단절은 연속이 없이는 있을 수 없다. 기존의 진부한 습관을 모르는 사람은 창조적 실천도 할 수 없다. 너는 늙은 세대가 아니니 너그러운 유연성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미래는 삼류 정객들의 시대, 덜 떨어진 학자들의 시대가 아닐 것이다. 우리 모두 새로움을 바라보고 있다. 너무 심각하니 그냥 웃어 넘겨도 된다. 지나치게 신경 쓰면 건강에 해로우니 항상 명랑하여라.

 

항상 명랑하여라. 이 어려운 말을 위해 마음을 털어내고 키운다.

 


필자 이유운은 시인이자 동양철학도. 2020 경인일보 신춘문예 시부문에서 <당신의 뼈를 생각하며>로 등단했다. ‘유운(油雲)’은 『맹자』에서 가져온 이름. 별일 없으면 2주에 한 번씩 자작시와 짧은 노트 내용을 올리려 한다. 유운의 글은 언젠가는 ‘沛然下雨’로 상쾌히 변화될 세상을 늠연히 꿈꾸는 자들을 위해 있다.

 

 

 

영화 <디태치먼트>와 우리 사회의 무심함에 대해 [톡,톡,씨네톡]

영화 <디태치먼트>와 우리 사회의 무심함에 대해

 

김다혜(상지대학교 재학)

 

‘디태치먼트(Detachment)’는 무관심, 고립, 분리, 거리를 둠이라는 의미로 정의된다.

영화 <디태치먼트>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문제를 가지고 있다. 밀려드는 문제들 속에 고립된 그들은 각자 고통의 바다에서 표류 중이다. 모두가 고통 속에서 울부짖고 있지만, 모두가 서로에게 무관심하다. 그들은 왜 서로 돕지 않는 걸까?

 

영화는 “어느 하나에 이러한 깊이를 느끼지 못했고 내 스스로 격리되어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느낌이다.”라는 알베르 카뮈(Albert Camus)의 소설 속 한 문장을 인용하며 시작한다. 영화가 시작된 지 1분도 채 되지 않아 등장하는 이 문장은 내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나의 20대는 딱 그런 식이었다. 스스로 고립되어 누구에게도 먼저 다가가는 법이 없었다. 그 누구도 나에게 쉽게 다가오지 못할 정도로 예민했다. 눈앞에 세상이 있는데도, 내가 섞여들지 못하는 이 세상이 나에게는 한없이 멀게만 느껴졌다.

출처 https://sprdthemssg.wordpress.com/2018/07/13/%EB%B6%84%EB%A6%AC/

나는 차가움이 싫었다. 살면서 만난 모든 사람이 차갑지는 않았지만, 차가움은 항상 내 마음에 시리도록 큰 상처를 남겼다.

김경미 시인이 쓴 <다정이 나를>이라는 시가 있다. “누가 다정하면 죽을 것 같았다. (…) 다정이 나를 죽일 것만 같았다.” 라고 이야기하는 시다. 누군가의 냉소가 나를 휩쓸고 간 후에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는 사람이 있으면 나는 이 시처럼 마냥 서러웠다.

어른의 차가움을 가장 크게 느꼈던 그 날은, 벌써 20년이나 지났는데도 여전히 선명하다. 내 나이 열 살 때, 아빠가 큰 빚을 지고 말 그대로 야반도주를 했다. 엄마와 동생들은 외할머니가 계신 시골에 들어갔고, 학교에 다녀야 했던 나는 가족들과 떨어져 홀로 시내의 삼촌 댁에 맡겨졌다. 당시엔 소위 말하는 ‘놀토’가 없었던지라 내가 엄마를 볼 수 있는 시간은 일주일에 하루, 일요일 오전 몇 시간이 고작이었다. 삼촌 차를 타고 다시 시내로 나갈 때마다 나는 뒷좌석에서 혼자 숨죽여 울곤 했었다. 사건이 있던 날은 엄마와 두 시간이라도 더 함께 있고 싶은 마음에 삼촌 차를 타는 대신 몇 시간 뒤 버스를 타고 시내로 나가신다는 숙모와 함께하기로 했던 날이다. 숙모는 화가 많은 사람이었고, 나는 혼날까 봐 무서워 버스를 기다리며 숙모에게 물었다. 제가 귀찮게 해서 집에 가면 저를 혼내실 거냐고. 버스 정류장에서 숙모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집에 들어가는 순간 바로 내 멱살을 잡고는 그대로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한참을 날 향해 온갖 삿대질과 입에 담지 못할 말을 쏟아붓는데, 그 자리에서 나를 도와주는 이는 한 명도 없었다. 삼촌은 숙모 옆에 서서 그저 멀뚱히 쳐다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그때의 그 얼굴들, 눈빛들, 나를 향한 그 사람의 말도 안 되는 뜨거운 분노, 그 차가움을 도저히 잊을 수가 없다. 나는 너무 어렸다.

왜 그랬을까? 좀 더 따뜻하게 대해 줄 수는 없었던 걸까? 하루아침에 가족들과 뿔뿔이 흩어져버린 외로운 아이를 가만히 안아줄 수는 없었던 걸까.

 

차가운 사람들을 보면 나는 화가 났다. 왜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지, 왜 서로에게 좀 더 다정할 수는 없는지 의문이었다. 무엇보다도 내가 그들을 이해하기 어려웠던 가장 큰 이유는 남의 불행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는 그들 모두가 불행해 보인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그들은 다정함이 결핍된 무심한 사회의 모습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그런 면에서 영화 <디태치먼트>는 20대의 내 시선으로 본 세상과 많이 닮아있다.

영화 속의 인물들이 모두 그러하듯 주인공인 헨리 역시 많은 문제를 가진 미성숙한 인물이다. 그는 겉보기에 감정을 잘 다스리는 성숙한 어른처럼 보이지만, 스위치가 눌리면 걷잡을 수 없이 폭발해버리고 만다. 하지만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노력한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고통에 잠겨 절규하는 이들의 외침을 외면하지 않기 위해 그는 노력한다. 거리에서 매춘생활을 하며 사는 여자아이를 데려와 보살펴주고,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의 이야기를 들어주며, 모두가 투명인간 취급하는 동료에게 다가가 말을 건네기도 한다. 거리 생활을 하던 여자아이는 누군가의 도움을 받는 게 태어나서 처음 겪는 일이었던지 고맙다는 인사 대신 “왜 이래요.”라고 말한다.

철조망에 매달려 온몸으로 고독함과 고통스러움에 매일 몸부림치는 같은 학교의 동료 선생에게 주인공 헨리가 다가가 괜찮냐고 물어보는 장면은, 내가 지금까지 봤던 모든 영화를 통틀어 가장 좋아하는 영화 속 장면이다. 단지 이 장면 하나 때문에 굳이 이 어려운 영화를 인용하며 이 글을 쓰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금 전까지 투명인간이었던 선생은 의아한 듯 되묻는다. “내가 보여요?”라고. 헨리가 다시 “네, 보여요.”라 답하자 선생은 “세상에 드디어… 고마워요. 고마워요.” 연신 고맙다 인사하며 가벼운 발걸음으로 그 자리를 떠난다.

나는 이 장면이 이 영화의 핵심이라고 생각했다. 타인에 대한 무관심이 관심으로 변하는 순간.

출처 https://wpalss.tistory.com/765

20대의 나는 상처 받지 않기 위해 긴 시간 벽을 쌓고 잔뜩 날을 세운 채로 고립된 삶을 살았다. 마르틴 부버(Martin Buber)의 말을 빌리자면 당시 내 인간관계는 모두 ‘나-그것’이었다. 그때 만난 모든 사람에게 나는 ‘그것’ 정도밖에 되지 않았을 것이다.

참 많은 실수를 했다. 그저 시간이 지나가기 만을 바라며 살았다. 지나가라, 얼른 지나가. 지나가면 이 고통이 끝날 줄로만 알고. 그러나 20년이 흘렀어도 선명한 그 날의 기억처럼 어떤 상처는 시간도 해결해주지 못했다. 나의 실수를 가만히 감싸준 어른이 단 한 명이라도 있었더라면 나는 달라질 수 있었을까? 모르겠다. 내가 나에게 박했던 건지, 세상이 나에게 박했던 건지 그 순서조차 이제는 모르겠다. 단지 그 시간이 쌓이고 쌓여 내가 지금의 내가 되었다는 사실만은 정확히 알 수 있다. 과정이야 어찌 됐든 그 시간을 지나온 지금의 나는 제법 성장했다. 적어도 항상 화가 나 있는 상태는 아니다. 지금은 화를 내는 대신 냉소적인 사람들에 대해 오히려 어떤 연민의 정을 느낀다. 고통 속에 스스로 고립되어 사는 사람인 것만 같아서.

최근에 『사는 게 고통일 때, 쇼펜하우어』라는 책을 읽고 있는데, 쇼펜하우어는 “삶이 고통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사람들에게 너그러워진다.”고 말했다고 한다. 나는 그 정도로 성숙한 인간은 아니지만, 어쩌면 그 비슷한 단계에 와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법정 스님이 생전 남기신 글 중에서는 더운 날 나무의 그늘이 얼마나 시원한 쉴 곳이 되는지에 대한 이야기와 함께 “사람의 그늘은 덕인데, 눈앞의 사소한 이해타산에 걸려 덕의 그늘을 펼칠 줄 모른다. 나무의 그늘에 견줄 때 우리들 사람의 그늘은 얼마나 엷고 빈약한가.”라는 내용을 담은 글이 있다.

나는 아직 누군가의 그늘이 되어줄 만큼 큰 사람은 아니다. 나 한 사람은 너무 작다. 그러나 적어도 내 세상을 조금씩 바꿔가려는 노력은 계속 진행 중이다.

오늘은 이런 일이 있었다. 아파트를 청소해주시는 분과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게 되어 인사를 나눈 후, 마침 점심때라 식사는 하셨는지 여쭈어보았다. 그랬더니 자기는 먹었다면서 자신의 안부를 물어봐 줘서 고맙다고 마음을 다해 몇 번이나 말씀하시는 게 아닌가. 나는 덕분에 아파트가 깨끗하게 유지되고 있으니 오히려 제가 더 감사드린다고 인사를 드렸다.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가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시며 마지막으로 “좋은 하루 보내세요.”라는 말씀을 해주셨는데 나는 그게 참 마음에 남았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몫만큼 감당해야 할 문제들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고립된 채로는 오래 버틸 수 없다. 상대방이 무심코 내뱉는 말과 행동에 상처받기도 하지만, 또 별거 아닌 일에 크게 감동하기도 하는 게 사람이다. 따뜻한 말 한마디가 누군가에겐 오늘을 버틸 힘이 되어줄 수도 있다. 한 사람이 고립되지 않도록 돕는 것도 마땅히 우리 사람이 할 일이 아니겠는가.

무조건 타인을 도우며 살아야 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남을 돕기 전에 우리는 먼저 자기 자신을 구원해야만 한다. 그게 순서다. 어떤 상황에서도 내 마음을 지키는 일이 우선시 되어야 한다. 나를 돕지 못하는 사람이 남을 도울 수는 없다.

 

영화 <디태치먼트>의 주인공 헨리는 마음을 지키기 위해서 책을 읽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학생들 앞에서 이렇게 설교한다.

“하루는 24시간이고 삶의 대부분을 죽도록 일하다가 끝마칠 거야.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를 보호하고 무뎌지는 것과 싸우기 위해서 배우는 거야. 상상력을 자극하고 의식과 신념을 발전시키기 위해 이 모든 기술이 필요하지. 우리 마음을 지키기 위해서.”

소설가 김영하는 독서를 왜 하느냐는 물음에 ‘내면을 구축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그는 “나, 고유한 나, 누구에게도 털리지 않는 내면을 가진 나를 만들고 지키는 것으로서의 독서. 그렇게 단단하고 고유한 내면을 가진 존재들, 자기 세계를 가진 이들이 타인을 존중하면서 살아가는 세계가 제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세계의 모습입니다.”라고 이야기한다.

마음을 지키는 데 책이 정말 중요한 역할을 하는가? 누군가 나에게 묻는다면 나는 기꺼이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다. 내가 그랬다. 사람들과 어울리는 대신 책을 읽으며 마음을 달래던 시절이 있었다. ‘내가 이상한 사람인가?’ 따위의 고민에 빠져있을 때 책 속 문장들은 한결같이 “너만 그런 거 아니야. 나도 그래.”라고 말해주는 것만 같았다. 책은 나에게 가장 많은 위로와 용기를 주었다.

 

드라마 <로맨스는 별책부록>에는 이런 대사가 있다.

 

“은호야. 한 권의 책이 세상을 바꾼다는 말 난 믿지 않는단다. 그럼에도 난 은호 너에게 한 권의 책 같은 사람이 되라고 그 말을 남기고 싶구나. 책이 세상을 바꿀 수 없어도 한 사람의 마음에 다정한 자국 정도는 남길 수 있지 않겠니. 네가 힘들 때 책의 문장과 문장 사이에 숨었듯이, 내가 은호 너라는 책을 만나 생의 막바지에 가장 따뜻한 위로를 받았듯이. 그러니 은호야. 앞으로도 누군가에게 한 권의 책이 되는 인생을 살아라. 네 안에 있는 한 줄의 진심으로 사람을 만나고 세상을 살아. 한 권의 책이 세상을 바꾸거나, 누군가의 인생을 완전히 바꾸지는 못해도, 좋은 책은 언젠가는 꼭 누구에게나 읽히는 법이니까.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따뜻해지는 거 아니겠니.”

 

나 역시 누군가에게 다정한 자국 정도는 남길 수 있는, 그런 한 권의 책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바람은 그러한데 형편없는 사람이라 아직 갈 길이 멀다.

 

우리는 모두 다양한 고통 속에서 살고 있다. 고통의 종류와 형태는 매우 다양해서 전부 헤아릴 수가 없다. 그러나 “불행이란 설국열차 머리칸의 악당들이 아니라 열차 밖에 늘 내리고 있는 눈과 같아 치명적이지만 언제나 함께할 수밖에 없다.”는 허지웅 작가의 말처럼 우리는 우리 마음대로 삶에서 고통을 뺄 수도, 그렇다고 외면할 수도 없다.

 

안 그래도 힘든 세상이다. 적어도 서로 괴롭히지는 말자.

타인의 고통을 덜어주지는 못할지라도, 타인에게 고통을 더해주지는 말자. 타인의 실수를 그냥 덮어줄 줄도 아는 인간이 되자. 누구나 실수하고 산다. 내가 그러하듯이.

나는 앞으로 더 다정한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서툴지라도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친절할 것이다. 무엇을 기대하거나 바라는 것 없이 타인을 도와주고, 또 타인에게 도움을 청할 줄도 아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그렇게 나와 너의 거리가 조금 더 가까워지기를 바란다.

나는 우리 사회가 서로 돕고, 의지하고, 서로에게 조금 더 다정한 사회가 되기를 염원한다.

 

출처 네이버 영화 https://movie.naver.com/movie/bi/mi/photoView.naver?code=82239

가장 보편적인 시 / 〈작가 노트〉 [유운의 전개도 접기]

가장 보편적인 시

 

이유운

 

아무것도 모독하지 않고 문장을 끝내는 법

짐승이 되어가는 사랑을 견디는 법

 

수많은 개론서들 앞에서 자주 마음이 나빠지기 위해

학교에 다녔다

성실하게

 

이마에 붉게 찍힌 낙인을 문지르며

나의 마음을 읽고 쓰는 방법에 대해 물었지만

아무래도 그런 것들은 가르치기 어려웠다

 

    이것은 시입니다. 저것은 예술이고요, 이 방 안에서 당신은 여자라고 규정됩니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걸어보세요. 걸음걸이마다 이름을 붙여봅시다. 그런 것을 우리는 문학이라고 부릅니다. 실제로, 실재로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는 중요하지 않아요. 생각 좀 해보세요, 누가 그런 걸 궁금해하겠습니까? 존재보다는 기분이 중요한 시대니까요. 자, 다같이 큰 소리로 읽어봅시다. 이것은 시, 저것은 예술, 당신은 여자.

 

잘 포장된 나

 

미래파적, 언어의 무용, 무해한 표현들, 상처받은 어린 화자, 탈피하고자 하는, 흰 공간……

대체로 시시했고 대부분 비슷했다

 

그러니까 진짜 웃기지 않니? 시라는 건

아무렇게나 말하고 이렇

행갈이만 하면 문학

지 않니

아주 문학 같다

퍽 예술 같기도 하지

 

뭉뚱그려 보편적인 시라고 거들먹거리며 걸어다닌다

 

 

작가 노트

 

어떤 행위에는 모종의 도덕성이 부여된다. 도덕성을 보유한 자와 도덕적인 행위를 하는 자는 퍽 다르며 둘 다 이런 시대에는 비겁한 자가 된다. 성실하고 도덕적인 자 보다 비겁하고 저열한 자가 되는 것이 훨씬 더 쉬운 세상이므로 파편적이고 주변적인 시보다 보편적이고 규범적인 시를 쓰는 게 훨씬 더 쉽다고도 말할 수 있다. 보편적인 시와 보편적인 학습. 그것들은 대체로 비슷한 말들을 하고 있다. 무해하고 하얗고 깨끗하고 상처받은 자들을 치유하고…… 이런 말들도 행갈이를 하면 시 같을 것이다 보편적이므로.


필자 이유운은 시인이자 동양철학도. 2020 경인일보 신춘문예 시부문에서 <당신의 뼈를 생각하며>로 등단했다. ‘유운(油雲)’은 『맹자』에서 가져온 이름. 별일 없으면 2주에 한 번씩 자작시와 짧은 노트 내용을 올리려 한다. 유운의 글은 언젠가는 ‘沛然下雨’로 상쾌히 변화될 세상을 늠연히 꿈꾸는 자들을 위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