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지는 패턴과 수신인 미상 / 나의 다이애나에게 [유운의 전개도 접기]

    무너지는 패턴과 수신인 미상

 

이유운

 

들립니까? 말하겠습니다

지금은 계속해서 무너지는 중입니다

괴기하고 아름다운 모양으로 무너지는 저를 구경하러 사람들이 모이고 있습니다

아주 많이요

다들 불안한 표정을 하고 있는데 나에게는 좀 우습기도 해요

무너지고 나면 나는 더 이상 금이 갈 수가 없으니 내가 여기서 가장 단단한 존재일 텐데

나를 타고 넘어가는 연인들이 있습니다

내 핏줄을 우두둑 뜯어내며 철골로 된 반지를 만들어주겠다고 속삭여요 “이건 끊어지지도 죽지도 사라지지도 않을거야”

다 거짓말이죠 제가 바로 그 증거니까

이상하게 나와 당신을 닮았어요 그 연인들

서로를 부르는 이름을 듣고 싶은데 이름 없이 입만 맞추고 있어요 그 축축하고 슬픈 소리…….

무너질 때 우는 건 부끄럽고 못된 일이라서 입술 안 쪽을 꼭 깨물고 있어요 비린내가 나요 뭔가를 잡아 먹은 사람처럼

당신은 나에게 왜 이렇게 자주 무너지고 있느냐고 물었었지요 부스러기와 먼지가 너무 많이 날린다고 코를 풀면서 무너지는 나 때문에 비염이 도무지 낫지를 않는다고

그냥 그런 거 있잖아요, 나도 낫지 않는 병이 있을 수도 있고

내가 그런 병일수도 있고

있고

없고

방금 무너지고 있는 나의 가장 내밀한 곳으로 연인들이 들어와 앉았어요

서로 이름을 부르기 위해서는 그래, 이런 곳이 필요하지

나는 귀를 기울이는데 내가 무너지는 소리가 너무 커서 잘 들리지가 않아요

마지막 연인 같아, 부럽다 우리도 저럴 때가 있었는데. 우리도 무너지는 누군가 안에 들어 앉아서 서로 이름을 최초로 부르고 좋아하는 색깔을 물었어요 그거 엄청난 비밀이잖아요, 당신은 파란색을 좋아한다고 했고

눈을 감았다 떠요 그때 눈동자가 파란색이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깨지기 쉬운 유리 거품처럼

거품 바깥으로 연인을 봐요

우리가 함께 모욕하고 돌 던질 수 있는 유일한 과거

그런데 그 때 우리가 앉아 있던, 무너지던 사람은 누구였을까요

이제야 이런 게 궁금하다니 나도 참 못됐어요 물론 당신도 마찬가지

우리는 닮았으니까

입술을 뒤집고 네모난 이를 모두 드러내 보여줘요

나는 그렇게 웃을 줄 몰라서 일부러 입술을 누르는 그 장난이 좋았어요

이렇게 웃을 때 뭔가가 한꺼번에 와장창 깨지는 소리가 납니다

푸른 소리

들려요?

이 소리가 부럽고 궁금했지요?

내가 무너져야 이런 소리가 납니다

이제

다 무너졌습니다

도망쳐도 좋아요

또 편지할게요

 

 

 

  

나의 다이애나에게

 

 

    잠깐 인천에 살았을 때의 이야기이다. 동네 근처에는 해체 작업 중인 건물들이 많았다. 삼사층 짜리의 작은 빌라들을 부수고 아파트들을 짓는 작업이 한창이었기 때문이었는데, 어린 내가 다 알 수 없는 이유들 때문에 공사는 빨리 진행되지 않았다. 나는 그 황폐한 풍경이 좋았다. 도시 한복판에 시간이 멈춘 것처럼 황량하게 뼈를 드러내고 있는 건물들. 나는 반쯤 무너진 건물들이 아무것도 입지 않은 사람 같았다.

    그런 건물들은 아이들에게 좋은 아지트가 되었다. 어느 건물에 들어가도 바닥에는 본드와 봉투, 그리고 브랜드가 다른 몽당만한 담배 꽁초들이 어지럽게 버려져 있었다. 손톱보다 짧아진 담배 꽁초를 보면서 나는 신기해했다. 이렇게까지 짧게 태운 담배는 처음 본다. 나는 아빠나 삼촌이 버리는 담배보다 훨씬 짧은 담배 꽁초들을 보면서 그 꽁초에 입술을 댄 사람을 상상하기도 했다.

    나는 보통 햇빛이 사선으로 들어오는 오전 즈음에 그런 건물 안에 들어가 앉아 있는 걸 좋아했다. 조용했다. 내가 이 세계의 마지막 생존자 같았다. 그 때 읽은 책이 참 이상하게도 기억에 오래 남는다. 예를 들면 최승자의 ‘내 청춘의 영원한.’ 나는 이 시를 모두 외울 수 있다.

 

이것이 아닌 다른 것을 갖고 싶다

여기가 아닌 다른 곳으로 가고 싶다

 

    나는 이 시를 읽으면서 아무도 없는 무너진 건물의 뱃속에서 연극배우처럼 서서 눈을 감았다. 감은 눈꺼풀 위로 햇빛이 내려앉았다. 간지럽고 따뜻했다. 세상이 멸망해도 햇빛은 여전히 따뜻할 거라고 생각하면 멸망이나 죽음 같은 것들이 두렵지 않았다.

 

괴로움

외로움

그리움

 

    나는 이 세 가지를 잘 알지도 못하면서 담배가 입술을 델 정도로 짧게 피우는 자들이 이런 세 가지 움을 가지고 있을 거라고 상상했다. 나는 어린 자가 그렇듯 그 세 가지 움을 가지고 있을 나를 상상했고 그 상상 속의 나는 언제나 사랑을 하고 있어서 좋았다. 그러니까 나는 비참한 어른이 되기를 꿈꿨던 것이다.

 

청춘의 영원한 트라이앵글.

 

    트라이앵글. 나는 그 발음을 좋아했다. 입이 쫙 벌어지는 그 발음. 나는 이 시를 외우고 무너지는 건물 안을 빙글빙글 돌았다. 부서지는 계단에 누워서 바나나 우유를 마시고 옥상 문 앞에서 책을 읽었다. 그리고 점심 즈음이 지나면 그 곳에서 나왔다. 옷에 묻은 먼지를 털고 집으로 돌아가면서 나는 살인마처럼 깊은 비밀을 간직한 것 같은 쾌감에 빠졌다.

    나는 그걸 ‘건물’이라고 부르지는 않았다. 건물보다는 어떤 다른 이름이 필요할 것 같았다. 이건 정말 처음 말하는 내 비밀인데, 나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그 무너지는 건물에 ‘다이애나’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인천 부평구의 황폐한 건물에 멋들어진 아가씨 같은 ‘다이애나’라는 이름을 붙여준 이유는 그때 내가『빨간 머리 앤』을 열심히 읽었기 때문이다. 나는 끝에 e가 붙은 앤처럼 발랄하거나 다른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게 만드는 재주는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팔꿈치 끝이 포동포동한’ 귀엽고 예쁜 친구인 다이애나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갈까마귀 같은 검은 철골을 드러내고 있는 건물에 다이애나라는 이름을 붙이고 그가 나의 가장 친한 벗이라고 여겼다. 조금 부끄럽고 웃긴 일이다. 하지만 그건 멋진 일이었다. 나는 다이애나의 품 안에서 처음 시를 읽었다. 내가 막역하다고 생각하는 존재의 안에서 처음으로 시를 읽는다는 건, 아무튼 멋진 일 중에 하나니까 말이다.

    그리고 어른이 된 나는 이 때를 떠올린다. 어린 내가 함부로 꿈꿨던 비참한 어른이 되지 않아서 다행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부드러운 목에 대고 숨을 오래 그리고 느리게 쉰다. 어른이 된 나는 비참한 어른보다 이런 방식으로 숨을 쉬는 고대 생물이 되는 것을 꿈꾸기로 한다. 이것도 처음 말하는 비밀이다. 나는 최근에도 종종 다이애나의 안에 들어가 있는 것을 자주 상상했다. 다이애나와 나는 함께 폐건물이 되어 있다. 그리고 그곳에 숨어드는 사람들을 지켜본다. 그들은 대부분 추방자들이다. 이방인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같은 얼굴과 눈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사랑이나 젊음을 이유로 어디에도 속하지 않으려고 뛰어내린 자들이다. 나와 다이애나에게로. 나는 내가 쓴 것이 분명한 편지들을 그들의 어깨 너머로 훔쳐본다. 나를 이렇게나 멀리서 바라본다. 이런 것들이 보통 어른이 하는 일인지는 잘 모르지만 이런 것을 편지에 모두 적어 넣는 일은 어른의 일일 수 있다.

 


필자 이유운은 시인이자 동양철학도. 2020 경인일보 신춘문예 시부문에서 <당신의 뼈를 생각하며>로 등단했다. ‘유운(油雲)’은 『맹자』에서 가져온 이름. 별일 없으면 2주에 한 번씩 자작시와 짧은 노트 내용을 올리려 한다. 유운의 글은 언젠가는 ‘沛然下雨’로 상쾌히 변화될 세상을 늠연히 꿈꾸는 자들을 위해 있다.

화분 / 분갈이 [유운의 전개도 접기]

화분 / 분갈이

 

이유운

 

화분

 

 

    아이를 낳아본 적은 없었고 살아 있는 것을 가지고 싶었다 마음껏 미워할 수 있도록, 되도록 끊임없이 자라는 것으로 이런 마음은 숨기고 제안을 한다 화분 좀 사러 갈까 꽃이 피는 걸로, 알잖아, 집에 녹색이 없어서

 

    잎과 뿌리를 매만지고 구운 화분이 정말로 숨을 쉬는지 손바닥으로 그것을 쥐어보고 나의 방을 위해 골몰하는 너의 옆얼굴 만약 내가 작은 식물을 데려와 네 이름을 붙이고 너를 기르는 것처럼 그것을 사랑하게 된다면 그래도 우리는 부서지는 것을 사랑할 수 있을까

 

    둥글고 앞으로 휜 꽃받침

    이 꽃 너랑 닮았다

    네가 기울여 열중하는 모습 같아,

    너는 아무렇지 않게 나의 비밀을 말하고

 

    이런 걸 바란 건 아니었는데, 왜 모든 일은 다 이렇게 노력해야만 하는 결말이 될까 책상에 엎드려서 어린 잎맥을 매만진다

 

    여기

    던져져 있는 나

    그 앞의 어린 식물

 

    장마에는 물을 주지 않아도 된대, 공기가 습해서. 간편한 생활 방식에 나는 경악하고 나는 얼마나 복잡한 방법으로 비슷하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가늠한다

 

    창문을 연다

    베란다 주변에 빗물이 고여서 썩기를 바라고

 

    곧 무언가가 사라질 것이다

 

 

 

분갈이

 

 

    분갈이를 했다. 위 사진은 ‘하트호야’ 고 물론 개별적이고 사적인 이름 또한 가지고 있는 나의 식물친구다. 이 식물은 아주 느리게 자란다고 했는데, 그래도 두 마디나 자라서 분갈이를 할 때를 맞이했다. 화분을 퍽 오랫동안 세심하게 골라서 분갈이를 해줬다. 얇은 플라스틱 화분에서 하트호야를 위로 쭉 뽑아낼 때, 뿌리에서 흙이 후두둑 떨어졌다. 뭔갈 잘못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하고 마치 피를 처음 본 의사처럼 긴장했다.

    화분에 흙을 꾹꾹 눌러 채우며 어떤 생명을 책임지는 일에 대해서 생각했다. 슬프고 무섭고 무거운 일이다.

    내가 어렸을 때부터 할머니가 계속 강아지며 고양이를 키웠기 때문에 생명이 내 주변에 있는 게 어색하지 않다. 오히려 좋아한다. 그 보드라운 털과 나만 바라보는 이성 이전의 사랑을 사랑하지 않고서 나는 배길 수 없다. 그 순박하고 순진한 눈동자에 내가 비치는 모습을 보면 너무 좋다. 평온하다.

    그 생명들이 십 년 전후로 죽을 때, 나는 단 한 번도 울지 않았다. 슬프고 마음이 아렸지만 그게 전부였다. 주 보호자가 아니라서 나는 슬픔의 책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들이 나의 뺨을 핥을 때 내가 이들의 죽음을 책임지지 않아도 되어서, 그래서 나는 간편하게 그들을 사랑할 수 있었다. 그들이 늙어서 병원에 다니고 치매에 걸려 가리지 못하는 배설물을 치우는 것은 주 보호자인 할머니의 몫이었기 때문에, 나는 그들과 산책을 하고 예쁘다고 끌어 안아 주는 피상적인 사랑만 하면 그만이었다. 그런 사랑은 누구나 할 수 있다.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사랑은 즐거운 취미에 가깝다.

    서울로 올라오고 혼자 살면서 나는 나의 주 보호자가 되었다. 아직 아무것도 키워보지 못했던 내가 정말 까다롭고 거슬리는 생명인 나를 키워야 했다. 제때 밥을 먹이고 적당한 때에 운동을 시켜주고 좋아하는 책과 음악을 제공해주고 적절히 사랑해주고 세심하게 살펴야 했다. 나와 너무 가까이 있는 나는 너무 괴롭다. 이 생명은 나에게 너무 컸다. 무거웠다. 귀찮았다. 전부 내던지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할머니가 나를 데리고 뒷산 수녀원에 올라가서 오디를 따고 가르쳐주는 식물들의 이름만으로 살고 싶었다. ‘싶었다’ 라고 말하는 이유는 결국 단 한 번도 그러지 못했고 앞으로도 그러지 못할 거라는 증거다.

    그래서 다른 생명을 책임질 생각은 절대 하지 않으려 했다. 세심함은 어디까지 책임질 수 있는가에 대한 증거라고 생각한다. 나는 그 면에서 두 번 실패했다. 나는 자주 다른 생명과 내가 함께 살기를 바라고, 그러면서도 그것에 대한 깊고 끈질긴 책임감에 대해서는 쉽사리 잊어버리곤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새 화분을 들일 때는 조금 달랐다. 나를 위해 골라준 식물친구를 받아들면서 나는, 이런 어린 식물을 나에게 골라주는 마음을 상상할 수 있었다. 나는 새 화분을 들이며 점을 치지는 않았지만1 이 식물이 죽지 않고 오래 자라는 동안 나는 어디까지 자랄 수 있는지를 생각했다.

 

    사랑이 나에게 주는 넓은 시야를 상상한다.

    그러므로 아직 내가 갈 수 있는 곳은

 

    아직 멀었고

    모두 닿지 않았다.

 

    비가 온다.

    잠시 후 만날 나의 연인에게

 

    나는 너의 이름을 붙인 화분의 흙 밑둥을 눌러주며 네 이마 사이를 입술로 누르는 상상을 했다 아주 많이

 


필자 이유운은 시인이자 동양철학도. 2020 경인일보 신춘문예 시부문에서 <당신의 뼈를 생각하며>로 등단했다. ‘유운(油雲)’은 『맹자』에서 가져온 이름. 별일 없으면 2주에 한 번씩 자작시와 짧은 노트 내용을 올리려 한다. 유운의 글은 언젠가는 ‘沛然下雨’로 상쾌히 변화될 세상을 늠연히 꿈꾸는 자들을 위해 있다.


  1. 권나무, 화분

예스터데이 / 어제에서 언제나 어제가 되는 오늘 [유운의 전개도 접기]

예스터데이 / 어제에서 언제나 어제가 되는 오늘

 

이유운

 

예스터데이

 

전화가 오랫동안 울리지 않으면

차라리 전보를 치던 때가 사랑하기 편했을 것이라 생각했다

 

예스터데이에 갔다

아득한 창가에 앉아 있는 사람을 보러

 

내가 전화를 기다렸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내가 이 곳으로 올 것을 알고 있었고

내가 자신의 바지 밑단이 말린 모양 때문에 고장나기를 원한다는 것도 알고 있는 사람

 

그는 머리를 풀고 셔츠를 벗으면서

나의 얼굴을 보고 있었다

 

내 이름도 모르고 얼굴을 보고 있었다

 

나는 앉기 전에 휴대폰 배터리를 충전해야겠다고 말한다

휴대폰 따위는 만지지 않아야 사랑하는 사이니까

 

반들거리는 창가에서

금방 튀긴 팝콘을 먹고 맥주를 따고 오프너를 만지면서

생각

했다

 

일기장을 너무 함부로 펼쳐놨다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으려던 뒷목의 문신도 너무 헐렁한 옷을 입고 있다

 

이런 고통을 이야기하려면 알콜중독자가 되어야 할지도 모른다

상담을 위해 그리고 다시 술을 마실 수 있기 위해 구걸을 하기 위해

철 지난 스키복을 덮고 길거리에 누워야 하는 결말이 정해져 있을지도

 

그래도 위인들의 일기장은 언제나 출간되니까

 

위인이 되려면 뭐든 해야 하잖아

레몬을 먹고 인상을 찌푸리지 않거나

동시에 스물여덟 명과 연애를 하거나

혀로 체리꼭지를 묶거나

 

예스터데이가 흘러나온다

 

그는 휴대폰을 충전하는 나의 등 뒤에 있고

나는 발뒤꿈치로 그의 앞까지 걸어가고

불 좀 빌립시다 라고 말하고 싶다

사실은 사랑 좀 빌립시다, 목숨 좀 빌립시다 구걸하고 싶었지만

 

녹내장에 걸린 늙은 고양이와

슬개골이 다친 강아지 사이에서

나는 언제나 가장이었으므로

한 번도 나를 가여워해보지도 못했고

나를 가여워해달라고 구걸해보지도 못했다

 

뒤에서 그가 부른다 아직 멀었어요?

 

아직 멀었어요 내겐 사랑도 구걸 같아요

어떻게 걸어야 할 지도 모르겠고

자기소개를 할 때는 여전히 지옥 같아요

그러니까 아직 멀었어요

 

하지만 아직도 먼 사람은 아무도 사랑해주지 않기 때문에

등을 돌리면서 고고하게 웃는다

기다렸어요? 하고서

 

 

 

 

어제에서 언제나 어제가 되는 오늘

 

 

오래된 공간을 좋아한다. 그 공간에 얽힌 이야기들을 좋아한다. 그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을 좋아한다. 그런 사람들은 오래된 엽서처럼 나에게 오래 있다. 오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한다. 서대문구에서 내게 가장 친숙하고 오래된 장소는 ‘예스터데이’다. 카카오맵에 따르면‘예스터데이’는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성산로 531, 2층에 위치한 호프, 요리주점이다. 원래는 경양식집이었고, 카페로 바뀌었다. 그리고 내가 처음 그 곳에 갔을 땐, 지금처럼 호가든 여섯 병과 나초를 한 세트로 엮어 파는 곳이었다. 깊이 안 쪽으로 몸을 둥글게 말고 앉아야 하는 커다란 소파 같은 의자, 언제 와도 비슷한 플레이리스트, 베티가 찍혀 있는 냅킨들. 나에게 가장 오래된 예스터데이의 장면들이다.

나는 이 곳에서 처음으로 나의 언니들과 선생님을 만났다. 축하할 일이나 함께 만날 일이 있으면, 자연스럽게 이 곳에서 만났다. 나는 이 곳에서 환풍구 아래에서 담배를 피우며 많은 것들을 싫어하는 법을 배웠다. 병을 빙글빙글 흔들어 적당하게 호가든을 따르는 법을 배웠다. 어떤 혁명은 누군가를 지독하게 죽일 수 있다는 것을 배웠고 이렇게나 슬프고 험난한 세상에서도 명랑하게 살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배웠다. 그것은 언니들과 선생님이 나 대신 슬픔을 먼저 맞아주기 때문에 그랬다.

대학원에 와서 가장 신기한 것은 ‘세미나’였다. 세미나에서 더듬더듬 낯선 말들을 손가락으로 짚으며 읽는 법을 배우는 것도 신기했지만 제일 신기한 것은 다들 나를 먹인다는 것이었다. 커피를 사주고, 밥을 사주고, 술을 사주고, 책을 사주고, 연필을 깎아줬다. 보답은 공부를 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 물론 나는 가끔 세미나에서 도망을 쳤고 ‘훌륭한 사람’이라는 말이 마음 어딘가에 뻑적지근하게 걸려서 불편했던 적도 있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아무튼 나는 성실한 학생은 절대 되지 못하기 때문에…….

생각해보면 언니들이 나보다 엄청나게 넉넉했을 리도 없는데, 그들은 나를 먹이는 데에 절대로 인색하지 않았다. 밝고 너른 눈으로 나를 봐주는 언니들의 둥근 눈동자를 생각하면 힘이 난다. 내게 아무것도 포기하지 않으려는 고집과 태도를 만들어준, 성실하고 그래서 생각하면 조금 슬퍼지는 언니들에게 무한한 사랑과 신뢰를 보낸다. 그들이 많이 슬프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들을 슬프게 만드는 것이 예스터데이에서 마감 시간에 나오는 ‘예스터데이’ 노래 외에는 없었으면 좋겠다.

엽서처럼 오래 된 사람들을 떠올릴 때 그들과 자주 있었던 장소는 아주 중요하다. 눈치 챘는 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 글에서 일부러 ‘공간’과 ‘장소’라는 말을 번갈아 혼용해서 썼다. 적확하게 단어를 골라 쓰지 않는다는 것은 사실, 철학 연구자가 최대한 빨리 타파해야 할 아주 나쁜 버릇이다. 하지만 나는 비슷한 결을 가지고 있는 단어들을 여러 개 늘어놓은 다음 그 단어를 상상하기 좋은 다른 나라의 언어나 옛날 사람들의 목소리를 떠올리는 고약한 취미가 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나는 ‘공간’이라는 단어의 한자 표기를 좋아한다. 空間. 빈 것 사이. 숲을 가득 채우고 있는 바람 소리가 사실 나무가 흔들리는 소리가 아니라, 나무 사이의 빈 공간이 흔들리는 소리라고 생각하고 무서울 정도로 짙은 초록색 나무들이 가득한 숲을 상상한다. ‘장소’ 라는 단어에는 유난히 일본어가 어울린다. 장소(場所). ばしょ. 조금 웃긴 말이지만 그 발음을 할 때마다 모아지는 입술의 모양이 귀여워서 그렇다.

 

장소란 말은 슬프다. 가변적이니까.

버스를 타고 서대문구를 지날 때마다 꼭 예스터데이의 간판을 확인한다. 야자수가 반짝거리는 촌스러운 간판에 불이 들어와 있는 것을 확인해야 마음이 놓인다. 예스터데이가 몇 번 변했다는 사실은 나에게 약간의 불안을 야기한다. 저 곳에서 손가락 사이에 담배를 끼우고 “너는 말이다, 좀 우울하지 않느냐. 희망을 가진 존재는 명랑해야 한다. 명랑함에서 희망이 나온다! 혁명이라는 것도, 영원이라는 것도. 생의영원이라는 말이 있다. 그 말이 어디서 온 것 같으냐. 명랑한 눈! 명랑한 태도에서 온 것이다.” 라고 말했던 선생님의 목소리를 떠올린다. 그리고 선생님의 손에 자꾸 땅콩이며 안주를 쥐어주고 “네가 벌써 스물아홉이야? 나는 아직두 네가 스물다섯 같애.”하고 웃는 언니의 얼굴. 내 손등을 손가락으로 긁으며 고개를 숙이고 몰래 웃던 연인의 얼굴. 내 사랑의 형태들을 모두 이해했던 그들의 얼굴을 떠올리면 예스터데이가 내가 기억하는 모습 그대로 남아 있기를 바라게 된다.

 

장소란 말은 즐겁다. 가변적이니까.

「예스터데이」는 정말로 예스터데이에서 썼다. 사랑의 앞에 있을 때 어쩔 줄 모르던 마음을 담아 썼다. 술을 마시면 솔직해진다고들 하지만 나는 오히려 더 거짓말을 하고 싶어진다. 아무렇지 않은 척, 내게 사랑이 별 것 아닌 척, 그에게 내가 목매지 않은 척. 다 거짓말이다. 사랑이 별 것 아닐 리가 없다. 나는 그런 것들도 누가 가르쳐 주었으면 하고 바랐지만 이런 것은 내가 스스로 나아가 먼저 맞아야 할 슬픔이나 두려움이었다.

나는 사랑을 시작할 때 못된 버릇이 있다. 자꾸 그와 함께 할 영원을 상상한다. 오래 참는 사랑이 온유할 거라는 오랜 가르침 때문이다. 하지만 영원을 생각하다 보면 순간을 놓친다. 소홀해진 순간들이 결국 깨지는 것은 나 때문인데 나는 그것을 견디질 못한다. 사랑이 나에게 이와 같은 무서운 얼굴로 다가올 때 이 시를 썼다. 내게 가장 사랑스러운 공간에서 이토록 나에게 무서운 시를 썼다는 것이 모순적이다.

하지만 예스터데이는 내게 언제나 무언갈 배울 수 있는 공간이므로 나는 이 무서운 시에 기꺼이 예스터데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지금의 나는 연인에게서 성실하게 순간을 잡고 사랑하는 법을 배우고 있다. 이 배움의 과정에서는 누구보다 성실하고 탁월한 학생이 되기를 원한다.

「예스터데이」가 너무 슬픈 시라는 벗의 말에 나는 정성껏 내가 좋아하는 시인의 시 구절을, 베티가 인쇄된 예스터데이의 냅킨 뒤에 써서 주었다.

 

“너는 슬픈 시를 쓰는구나.

슬픔이 시가 되었으니 안 슬퍼야 할 텐데.

시가 된 슬픔은 어느 다른 나라로

잠시 여행을 간 거야.

어느 날 건강히 다시 돌아올 거란다.”

 

                                                                                  ― 박시하, 「일요일」

 

 

너무 슬픈 시라는 것은 없다. 영원한 슬픔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그렇게 믿는다. 어떤 것들은 영원할 거라고 쉽게 믿었다. 믿는다는 건 어떤 태도니까. 그런 태도를 오래 취하고 있으면 그런 행동을 하게 되고 시간이 오래 지나면 정말로 그런 사람이 된다. 그래서 나는 신실하게 무언가가 영원할 것이라고 믿었다.

믿음이 깨진다는 말은 너무 무책임하다. 믿음은 잠깐 멈출 수 있다. 같은 자세도 오래 취하면 온 몸이 저리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모든 것이 산산조각난다고 하면, 그건 너무 쉽고 게으른 설명이다. 조금씩 자세와 태도를 바꾸어 가면서 믿음을 지속한다.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면 처음의 태도와 퍽 달라져 있지만 그것도 믿음이다. 오디세우스의 배 모순 논리 같지만 사실이다. 믿음은 사실이니까.

 

명랑한 태도.

어떤 것들은 영원할 거라고 믿는 태도로.

어떤 것들은 영원하고

영원하다고 믿는 태도는 신실하다.

나는 너무 염려하지 않는 삶을 믿는다.

 

 

작가의 말

twt @writecloudpen

6월 13일을 기억하며.

 


필자 이유운은 시인이자 동양철학도. 2020 경인일보 신춘문예 시부문에서 <당신의 뼈를 생각하며>로 등단했다. ‘유운(油雲)’은 『맹자』에서 가져온 이름. 별일 없으면 2주에 한 번씩 자작시와 짧은 노트 내용을 올리려 한다. 유운의 글은 언젠가는 ‘沛然下雨’로 상쾌히 변화될 세상을 늠연히 꿈꾸는 자들을 위해 있다.

가난의 현실적인 미묘함에 관하여, <기생충> [톡,톡,시네톡]

 

가난의 현실적인 미묘함에 관하여, <기생충>

 

양윤영(한국방송통신대학교 재학)

 

우리 집은 가난했다. 내가 성인이 되면서부터는 조금 나아졌지만, 학창 시절 내내 나에겐 차상위라는 꼬리표가 달려 있었다. 그게 부끄러웠냐면 꼭 그렇진 않았다. 차상위여서 지원받는 것도 있었고, 공부에는 관심이 없던 내가 집이 가난해 학원을 못 가는 것을 핑계로 하고 싶은 것만 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고등학교를 특성화로 간 이유도 빨리 취업을 해서 돈을 벌기 위해서였다. 대학을 갈 필요가 없어서 수능을 준비하지도 않았고, 집에 돌아와서는 온종일 텔레비전을 봤다. 나는 가난한 가운데에 제법 즐겁게 살았다. 마치 영화 <기생충>에 나오는 기택네 집이랑 비슷했다. 가장 완벽한 계획은 무계획이라는 기택의 말처럼 나는 특별히 계획을 세우거나 뭘 바라지 않고 살았던 것 같다. 어차피 그래봤자 이룰 수 없을 테니까.

 

그러다 내게 꿈이 생겼다. 웹툰 작가가 되는 것이었다. 내가 중·고등학교를 보내는 동안 한국만화계는 웹툰으로 넘어가면서 시장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 그전까지 만화가를 꿈꾸는 것이 내게는 사치라고 생각했는데, 점차 커지는 웹툰 시장을 보니 이곳이라면 충분히 뛰어들어도 괜찮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그림을 배울 돈이 없었다. 입시학원만 해도 한 달에 50만 원은 드는데, 우리 집은 그 돈을 낼 형편이 안 되었다. 혼자서 연습하기엔 재능이 없었다. 선을 어떻게 그어야 하는지, 색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도서관에서 빌린 만화 작법서를 아무리 읽어봐도 알 수가 없었다. 다행히 다른 쪽으로는 재능이 있었는데, 이야기를 쓰는 능력이었다. 내가 만든 이야기를 친구들에게 들려주면, 다들 재밌다고 했다. 하지만 이번엔 다른 문제가 내 발목을 잡았다. 만화를 공부하거나 그릴 시간이 부족해진 것이다. 스무 살이 되면서 나는 회사에 다녀야만 했다. 내가 일을 그만둔다고 집안이 힘들어지는 건 아니었지만, 내가 벌어야 더 나아지는 것은 분명했다. 만화에 신경 쓸 시간은 당연히 줄어들었다. 그래도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했지만, 내가 봐도 내 만화의 작품 수준은 너무 낮았다. 나는 계속 투고했고, 계속 떨어졌다. 그 과정을 겪으면서 나는 내게 시간과 돈이 충분했다면 어땠을까 계속 가정해보았다. 그건 좀, 비참한 일이었다. 그런데 이건 비단 나만의 일이 아니었다. 주변에 재능이 아주 뛰어난 사람들을 제외하고, 그림이라는 기술을 익히기 위해 돈을 지불하기 어려운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비해 점점 더 뒤처진 것이다. 그 차이는 처음엔 별거 아닌 것 같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가속되었다. 그리고 결국 깨달았다. 가난한 게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던 건, 그냥 내가 스스로를 속이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었다는 것을.

 

영화 <기생충>에서 기택의 가족들이 박 사장의 집에 하나하나 들어갈 때, 처음에는 그 상황이 코믹하고 재밌게 그려진다. 기택네는 박 사장네를 놀리기도 하고, 착하고 멍청하다며 비웃기도 한다. 그러나 박 사장네는 부자다. 비가와도 공기가 맑아질 테니 좋다고 생각해도 되는, 멍청해도 문제없이 살아갈 수 있는 그런 지위에 있다. 그에 비해 기택네는 생각해야 하고, 남을 속여야 한다. 그것이 가난의 속성이다. 비가 와 집이 침수되었을 때, 기정의 표정은 씁쓸하다. 그전까지 기정은 남을 비웃을 여유가 있었지만, 비가 오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온통 난리가 난 집, 구정물이 역류하는 변기에 앉았을 때야 자신에게 솔직해진 것이다. 자신이 사는 곳, 그곳의 사라지지 않는 냄새, 올라오는 변기 물. 기정은 박 사장네 식구들을 속인 동시에 스스로를 속이고 있었을지 모른다. 자신이 정말 제시카라고 말이다. 행복한 꿈에서 깨어나는 순간, 현실은 늘 더 끔찍하다.

 

<기생충>이 가난을 다룬 다른 작품들에 비해 더욱 주목받은 이유는 바로 이 점이 아닐까. 진짜 가난한 사람들만이 느낄 수 있는 현실적인 미묘함을 잘 잡아내는 것은 무척 어렵지 않은가. 영화의 마지막을 보며, 나는 기우가 기택에게 보내는 편지가 이루어질 법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영화가 다 끝나고 나서는 그게 어떤 것보다도 비참한 소망이라는 생각에 조금 슬퍼졌다. 가난은 그 무엇보다도 사람을 무기력하게 만든다. 물론 나는 그 감정에서 벗어나 앞으로 걸어 나가고 있지만, 뒤를 돌아보면 20대 초 돈과 시간을 만화에 투자하고 싶어도 그러지 못해 속상해하는 지망생이 있다. 거기서 벗어날 수 있었던 건 사실, 우리 집의 재정이 그 이후 나아졌기 때문이었다. 만약 그렇지 않고 가세가 더욱 기울어졌다면 아마 나는 만화를 완전히 포기해야 했을지도 모른다. 이런 생각을 하면 씁쓸해질 수밖엔 없다. <기생충>의 그 결말처럼.


 

투명하고 무거운 / 사랑의 모양은 네모 [유운의 전개도 접기]

필자 이유운은 시인이자 동양철학도. 2020 경인일보 신춘문예 시부문에서 <당신의 뼈를 생각하며>로 등단했다. ‘油雲’은 『맹자』에서 가져왔다. 별일 없으면 2주에 한 번씩 자작시와 짧은 노트 내용을 올리려 한다. 유운의 글은 언젠가는 ‘沛然下雨’로 상쾌히 변화될 세상을 늠연히 꿈꾸는 자들을 위해 있다.

 

투명하고 무거운 / 사랑의 모양은 네모

 

이유운

 

투명하고 무거운

 

 

그러면 우리는 도래하자

이해할 수 없는 시제와 선언

 

    “나는 나의 기원 이런 말들은 자주 소리내어 말할 필요가 있었다 사랑하는 입술을 매만져본다 아직 멸망이 오지 않았다는 증거를 찾아서 멍든 복숭아와 풋내가 나는 무화과의 껍질을 벗기는 네 손을 본다 춤추는 나무나 빛무리 같아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

아무것도 미워하지 않아

 

    네가 만진 나의 부분들은 아주 단단해졌어 나는 이걸 사랑이라고 자랑하고 다닌단다 이제 네가 만지지 않은 부분은 눈동자 뿐 연약하고 언제나 젖어 있는 이 검은 동그라미

 

돌아가는 테이프

오토리버스

또 돌아가는 테이프

멈추는 장면마다

어디선가 자라온 사랑으로 불거진 네 손가락 마디

 

손이 데일 것 같이 차갑기도 한

너무 가깝게 있어서 만지기가 어려워

 

    둥근 어깨. 깨무는 둥근 이. 남는 둥근 자국. 모두 만지며 사랑이 둥글다고 배우는. 둥글고 슬픈 학습

 

무릎을 꼭 붙이고 함께 앉아 있다

기울어진 모양으로

내기 하자. 더 사랑하는 사람이 먼저 일어나기로.

 

 

 

    사랑의 모양은 네모

 

 

    어렸을 적 가장 좋아하던 영화 세 편을 나열하면 지금의 인생과 취향을 알 수 있다는 말이 한창 트위터에 돌았었다. 나는 그 말이 조금 꺼림직하고 소름이 끼쳤다. 뭐, 당연하게도 그 명제의 결과가 마음에 들지 않으니까 그런 거다.

    그 말이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렸을 때부터 내가 좋아하는 영화 세 편을 꼽아 보자면 《8월의 크리스마스(1998년, 허진호 감독)》, 《클래식(2003년, 곽재용 감독)》,《해피투게더(1997년, 왕가위 감독)》다. 너그럽게 다섯 편까지 허락해준다면 《퐁네프의 연인들(1991년, 레오스 카락스 감독)》과《쉬리(1999년, 강제규 감독)》도. 이 영화들로만 보면, 지금의 나는 내가 농담처럼(사실 아니지만) 자주 하는 말인, 나를 ‘사랑의 헐값에 팔아넘기는’ 어른처럼 자란 것 같다.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지원이 정원에게 ‘왜 결혼 안 했어?’ 라고 물었을 때, 정원이 웃으면서 ‘너 기다리느라고.’하고 대답하는 장면이다. 미소를 지으며 이 말이 꼭 사랑 고백이 아니라는 것처럼 가볍게 대답하는 정원의 얼굴. 나는 정원의 그 얼굴과 목소리에서 진한 사랑과 그리움을, 그토록 짙고 무거운 마음을 가지고 투명하게 말할 수 있는 표정을 보았다. 그때부터 나는 그런 어른이 되고 싶었던 것 같다. 오래도록 투명하고 무거운 사랑의 모양을 가질 수 있는 어른. 하트 모양이 아니라 네모난 사랑의 모양을 가지고 있는 어른.

 

    나는 나에게 처음으로 사랑의 모양을 알려 준 어른과 그가 나를 사랑한 풍경을 떠올린다.

 

    정성스레 닦고 말린 오래된 선풍기가 돌아가는 사아악, 사아악 소리. 꼭 숲 한가운데에 서 있는 것 같다. 비가 오고 있다. 축축한 여름. 바람과 나를 찾는 숨이 함께 분다. 손톱을 깎고 버린다. 저것을 주워 먹고 내가 될 다른 존재들에 대해서 아직 걱정하지 않아도 될 만큼 어린 내가 있다. 마루에 볼을 대고 눕는다. 차가운 바람. 햇빛이 따갑지 않아서 눈을 가늘게 뜨면 그 사이로 나뭇잎과 창문 살의 모양과 색으로 빛이 들어온다. 나보다 먼저 태어난 손이 내 눈꺼풀 위로 손차양을 만들어준다.

 

    내 눈가에 얼룩처럼 남은 기미와 주근깨를 만져본다. 그렇게 그 손이 나를 자주 가려주었는데도 햇빛과 시간의 자국은 생겼다. 아무리 내가 어딘가 숨는다 하더라도 사랑이 나를 찾아내듯.

 

    나는 이렇게 사랑받고 컸다. 이 때는 아직 사랑의 모양이 없었다. 빛무리처럼 춤을 추고 있을 뿐이었다.

 

    어렸을 때 살던 오래된 동네의 그보다 더 오래된 건물에는 유호철물이 있었다. 일층에는 유호철물, 이층에 진실다방과 당구장이 있었고 삼층에는 전당포와 창문에 검은 종이를 바른 알 수 없는 방이 있었다. 그 위로는 철문이 항상 굳게 닫혀 있어서 한 번도 올라가 보지 못했다. 가끔 그 위로 올라가려고 하면 이층의 진실다방 이모가 고개를 내밀고 나를 불렀다.

거기 가면 안 돼.

뭐 있는데?

    진실다방 이모는 대답 대신 모나카를 줬다. 어른들은 진실을 감추는 댓가로 나에게 단 것들을 줬다. 진실다방 이모만 그런 건 아니었지만 나는 거짓말을 할 때마다 진실다방 이모의 멋쩍은 웃음과 그가 주었던 모나카의 단 맛이 떠오른다. 혀가 떫다. 진실다방 이모의 기울어진 아몬드 모양의 눈. 움켜쥐면 타원 모양으로 우그러질 것 같은 그 모양이 사랑의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유호철물은 주인 아저씨 아들의 이름이 유호라서 유호철물이었다. 유호는 나보다 아홉 살이 많았고 차이나 칼라 교복을 입었다. 유호는 종종 나를 자전거 뒷좌석에 태워줬다. 유호의 자전거는 쌀집 자전거여서 뒷좌석이 판판하고 바른 모양이었다. 그 뒷좌석에 앉아 유호의 등에 얼굴을 대면 햇빛 냄새가 났다. 나는 유호가 햇빛으로 만들어진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유호는 내가 종종, ‘난 커서 너랑 살 거야.’라고 말하면 곤란한 것처럼 웃었다. 어린 내 앞에서 거짓말은 하기 싫고 솔직해질 필요도 없는, 나이가 많은 사람이 나를 볼 때 보통 유호 같은 표정을 지었다. 내가 《8월의 크리스마스》를 좋아하는 이유는 유호와 정원이 닮아서였는지도 모르겠다. 둘 다 살구비누를 쓸 것 같다. 비누로 머리를 감아 뻣뻣해진 머리카락 끝에서 여름 냄새가 날 것만 같다.

 

    유호의 등에서 나던 햇빛 냄새가 이상할 정도로 나이가 들면서 점점 뚜렷해진다. 나는 시력이 나빠서 안경을 쓰지 않으면 나뭇잎 사이로 들어오는 햇빛이 둥근 알사탕 모양처럼 보인다. 그런 모양으로 내가 기억할 수 있는 사랑이 처음 만들어졌다.

 

    나는 언제나 누군가를 사랑했고 무언가를 사랑했다. 쉽게 사랑하고 자주 사랑했지만 어떤 사랑의 형태에도 능숙해본 적은 없다. 그래서 내가 받아온 사랑의 연원을 떠올릴 때마다, 이토록 희고 단단한 사랑을 받아왔는데 왜 지금의 나는 그런 사랑의 모양을 가지지 못했는지 나를 탓하고는 한다. 어린 눈 위로 손차양을 만들어주는, 거짓말 대신 모나카를 주는, 등에서 햇빛 냄새가 나는 그런 사랑과 내 마음의 모양이 달라서 가끔 놀란다.

 

    아직까지는 둥근 모양이 되는 사랑을 배우고 있다. 학습의 과정은 자주 슬프고 오래 사랑스럽다. 점차 네모낳게 단단해질 것이라고 믿는다. 지금 나의 마음은 자외선 차단제를 바르지 않고 바닷가에 한참 서 있던 사람의 어깨처럼 엉망으로 껍질이 벗겨진 모양이다. 하지만 이렇게 훼손된 마음도 섬세하게 마련할 수 있다. 나는 이 훼손된 마음을, 섬세하게 마련한 모양을, 시라고 부른다.

 

 

 

 

 

이유운 withwho_@naver.com

그렇다고 해서 온종일 사랑만 생각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이화여대에서 철학을 공부했다.

시가 필요한 스물일곱 번째 시간, 꽃 [시가 필요한 시간]

시가 필요한 스물일곱 번째 시간, 꽃

 

마리횬

 

오늘은 봄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꽃’에 관한 시를 함께 읽어볼까 합니다. 국내에 발표된 꽃에 관한 시는 정말 많습니다. 김춘수 시인의 시 <꽃>이 가장 먼저 생각나고, 나태주 시인의 동명의 시 <꽃>도 있죠. 복효근 시인의 <안개꽃>이라는 시도 생각납니다. 좋은 시들이 참 많이 있는데 다 소개해드리지 못해서 아쉽네요.

 오늘 소개해 드릴 시는 <사람의 꽃이 되고 싶다>라는 제목의 시로, ‘이채’라는 필명을 쓰는 시인의 작품입니다. 저는 이 시를 통해 처음 만나는 시인인데요, ‘꽃을 보면서 이런 생각도 할 수 있구나’ 하는 새로운 관점을 갖게 해 준 시라서 가져와 봤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 인간관계, 우리가 사는 세상에 대해서 한번쯤 되돌아보게 하는 시라는 생각이 듭니다. 함께 듣고 올까요?

 

  사람의 꽃이 되고 싶다

                                                    이채

 

그대와 내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얼굴로

우연히 길에서 마주친다 해도 서로의 꽃이 될 수 있을까

꽃집으로 들어설 때의 설레임과

한아름 꽃을 안고 집으로 오는 동안

한 잎 한 잎 고운 향기 맡으며

상큼한 웃음 감추지 못하던 그 표정으로

 

나는 그대에게 어떤 꽃으로 기억되고 싶은 걸까

발을 밟은 그대라면

어깨를 부딪친 그대라면

길을 묻는 그대라면

서로의 이름은 몰라도 은은한 들꽃 같은 향기로

미소가 예쁜 친절한 꽃으로

사슴의 눈망울을 닮은 착한 꽃으로 기억되고 싶은 걸까

 

저마다 뜰은 있어도 가꾸지 않고

꽃병은 있어도 꽃이 없는 창가에서

아름다운 호수를 바라본다 한들

시끄러운 귀로는 물소리를 들을 수 없고

불만의 목소리로 백조의 노래를 부를 수 없으며

비우지 못한 욕심으로 어떻게 새들의 자유를 이해할 수 있을까

 

부족함 속에서도 늘 감사하는 행복의 꽃

작은 것에서도 소중함을 느끼는 기쁨의 꽃

보이지 않는 숨결에도 귀 기울이는 관심의 꽃

누구에게나 자신을 낮추는 겸손의 꽃

사막에서도 물을 길어 올리는 지혜의 꽃

사람의 뜰에는 만 가지 마음의 꽃이 있어도

어느 꽃도 피우지 못하는 나를 발견하네…

 

우연히 길에서 이름모를 들꽃들을 마주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 꽃의 이름이 뭔지도 모르지만, 꽃들은 우리가 누구든 간에 만나는 모두에게 자신의 빛깔과 향기로 친절히 미소를 지어줍니다. 그에 비해서 우리 인간은 어떤 가요? 서로 잘 아는 사이거나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굉장히 너그럽죠. 특히 나와 어떤 이해관계가 있다거나, 내가 도움을 받아야 하는 사람과의 관계에서는 굉장히 친밀합니다. ‘학연’, ‘지연’이라는 말이 괜히 만들어지지는 않았겠죠.

하지만 반대로 나와 그다지 상관이 없는 사람이거나 잘 모르는 사람, 시인이 시에서 말하듯 버스에서 실수로 부딪히거나 발을 밟은 사람, 길에서 방향을 묻는 사람을 마주칠 때, 괜스레 무관심하게 되고, 그 관계에서 ‘나’와 ‘내 기분’이 우선 되어 가끔 무례하게 행동할 때도 있습니다.

시인은 내가 좋아하는 누군가에게 꽃을 선물하기 위해 꽃집에 가서 한아름 꽃을 포장해 나설 때의 그 기분과 행복한 표정으로 다른 사람들을 대할 수 있는가 반문합니다. 꽃은 우연히 마주친 누구에게나 차별없이 아름다운 향기와 빛깔로 행복감을 나누는데, 우리는 우연히 만난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하고 말이죠.

‘전혀 모르는 사람, 우연히 만난 사람을 어떻게 ‘행복한’ 표정으로 대할 수 있다는 말이지?’라고 고개를 갸우뚱 하고 계신가요?

저는 호주에서 2년간 거주했던 경험이 있는데요, 이 시를 읽으면서 호주에서 마주친 수많은 사람들이 생각났습니다. 외국에서 거주하면서 많이 놀랐던 것 중 하나가, 서로 전혀 모르는 관계임에도 불구하고 길에서 우연히 눈이 마주치면 서로 웃으면서 인사한다는 것이었어요. 버스에서 부딪히거나 우연히 스치는 경우, 엘리베이터를 같이 타고 움직이다가 눈이 마주친 경우에도, 한국에서라면 눈을 피해버리거나 무표정으로 넘어가기 일쑤인데, 호주 사람들은 서로 가볍게 눈인사를 하고 얼굴에 미소를 지어 줍니다. “오늘 날씨가 참 좋네요”라고 한마디 건네기도 하고 말이죠.

일부러 억지로 하지 않아도 누구 하나 예외 없이 한 마음으로 서로를 위하고 있다는 여유와 따뜻함을 느꼈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저마다 뜰은 있어도 가꾸지 않고

꽃병은 있어도 꽃이 없는 창가에서

아름다운 호수를 바라본다 한들

시끄러운 귀로는 물소리를 들을 수 없고

불만의 목소리로는 백조의 노래를 부를 수 없으며

비우지 못한 욕심으로는 새들의 자유를 이해할 수 없다

 

저는 이 대목을 읽으면서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2021년 대한민국의 국제적 위상은 향상되었고, 경제가 발전하면서 기술적으로도 많은 나라를 앞지르는 그야말로 ‘선진국’을 향하고 있죠. 이 시의 표현을 빌리면, 이제 “저마다 뜰”, “꽃병”, “아름다운 호수”가 갖추어진 셈입니다.

하지만 시인은 말합니다. 서로를 위하는 여유와 따뜻함이 없는 삶이라면, 저마다 뜰이 있더라도 그것을 가꾸지 않는 삶이며, 꽃병은 있지만 꽃이 없는 쓸쓸한 창가라고 말이죠.

당장 ‘뜰’도 없고 ‘꽃병’도 없는 사람에게는 이런 이야기와 요구가 필요가 없을 겁니다. 그들에게는 뜰을 갖추고 꽃병을 마련하기 위해 애쓰는 것이 더 중요할 테니까요. 하지만 이제 저마다의 뜰과 예쁜 화병까지 가지게 된 우리라면, 시인은 한 걸음 더 나아가길 권하고 있습니다. 이제 그 뜰을 가꾸고, 꽃병에 꽃을 꽂으라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꽃을 가꿔야 할까요?

 

부족함 속에서도 감사하는 행복의 꽃

작은 것에서도 소중함을 느끼는 기쁨의 꽃

보이지 않는 숨결에도 귀 기울이는 관심의 꽃

누구에게나 자신을 낮추는 겸손의 꽃

사막에서도 물을 길어 올리는 지혜의 꽃

 

이것이 바로 우리가 꽃에게서 배워야 하는 부분이 아닌가 싶습니다. 꽃들은 비바람이 불더라도 햇빛이 쨍쨍하더라도, 어떤 부족한 것이 있어도 늘 그 자리에 피어나요. 찌는 듯한 무더운 날씨 속에서도 잠깐 내리는 소나기에 감사하며 아름다운 빛깔을 만들어 내죠. 물이 한 방울도 없을 것만 같은 절벽에서도 지혜롭게 물을 찾아서 자기 자신을 피워내는 꽃을 보면, 내게 부족한 것을 탓하거나 원망하지 않고 겸손히 자기의 역할을 다 해내는 꽃의 덕목을 발견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작은 꽃송이라도 저마다 아름다운 빛깔과 지워지지 않는 향기를 가질 수 있는 것 아닐까요.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기쁜 일이 있을 때 꽃으로 축하하고, 사랑의 마음, 감사의 마음도 꽃으로 표현하고, 슬픈 일이 있을 때에 꽃으로 위로할 수 있는 것이겠죠. 아마도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의 많은 의미를 담고 있는 존재가 ‘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시인은 어느 꽃도 피우지 못하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고 겸손하게 고백하면서 시를 마치고 있습니다. 행복의 꽃, 기쁨의 꽃, 관심의 꽃을 피워 내는 것이 쉽지는 않지만, 포기하지 않고 사소한 것부터 목표를 정해 하나씩 고치고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겠습니다.

오늘 함께 들으면 좋을 노래로 나태주 시인의 <꽃>이라는 시에 노랫말을 붙여서 만든 노래 가져왔습니다. 가수 정밀아가 부른 <꽃> 들으시면서, 이번 한 주간 내 마음에 어떤 꽃을 피울지 다짐해보시면 어떨지요.

정밀아 – 꽃, 주소: https://youtu.be/r1QVbQtwrko

 

 

 

시가 필요한 스물여섯 번째 시간, 채움과 비움(2) – ‘비움’ [시가 필요한 시간]

시가 필요한 스물여섯 번째 시간, 채움과 비움(2) – ‘비움’

 

마리횬

 

지난 시간에 우리는 도종환 시인의 시 <깊은 물>을 함께 읽었습니다. <깊은 물>을 통해 내면의 강물을 깊이 채워야 한다는 ‘채움’의 메시지를 읽었는데요, 오늘은 ‘채움과 비움’ 두 번째 시간으로 ‘비움’에 관한 메시지를 읽어보려고 합니다.

‘비움’은 ‘채움’과 정 반대의 행위를 말하는 것 같지만, 오늘 함께 읽을 시를 통해 우리가 살아가는 데에 있어 채움과 비움의 두 행위가 만나는 지점이 분명히 있음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오늘도 도종환 시인의 시를 만나 보실 텐데요, 바로 <여백>입니다.

 

 

  여백

                                 도종환

 

언덕 위에 줄지어 선 나무들이 아름다운 건

나무 뒤에서 말없이 나무들을 받아

안고 있는 여백 때문이다

 

나뭇가지들이 살아온 길과

세세한 잔가지 하나 하나의 흔들림까지

다 보여주는 넉넉한 허공 때문이다

 

빽빽한 숲에서는 보이지 않는

나뭇가지들끼리의 균형

가장 자연스럽게 뻗어 있는 생명의 손가락을

일일이 쓰다듬어 주고 있는 빈 하늘 때문이다

 

여백이 없는 풍경은 아름답지 않다

비어 있는 곳이 없는 사람은 아름답지 않다

여백을 가장 든든한 배경으로

삼을 줄 모르는 사람은

 

네, 도종환 시인의 시 <여백> 듣고 왔습니다. 차를 타고 숲길 높은 곳을 달릴 때, 산 능선을 따라 뻗어 있는 나뭇가지들의 실루엣을 보신 적 있을 겁니다. 참 아름답죠. 특히 해 질 녘에 해가 지는 하늘을 배경으로 곧게 뻗은 나무들이 만들어내는 뾰족뾰족한 그림자는 노을을 더 운치 있게 만들어 줍니다. 그런 자연의 풍경들을 머릿속에 그리면서 시를 읽으면 더 좋겠습니다.

같은 풍경을 보더라도 시인의 시각은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느낍니다. 시인은 높이 솟은 나뭇가지들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 뒤의 여백, 허공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언덕 위에 줄지어 선 나무들이 아름다운 건

나무 뒤에서 말없이 나무들을 받아

안고 있는 여백 때문이다

 

나뭇가지들이 살아온 길과

세세한 잔가지 하나 하나의 흔들림까지

다 보여주는 넉넉한 허공 때문이다

 

빽빽한 숲에서는 세세한 나무의 가지들을 보기가 쉽지 않지만, 하늘의 빈 여백이 있는 공간에서는 나무의 잔가지들이 다 보이죠. 시인은 그 모습을 가리켜 ‘자연스럽게 뻗어 있는 생명의 손가락을 쓰다듬어 주고 있는 빈 하늘’이라고 표현합니다.

 

빽빽한 숲에서는 보이지 않는

나뭇가지들끼리의 균형

가장 자연스럽게 뻗어 있는 생명의 손가락을

일일이 쓰다듬어 주고 있는 빈 하늘 때문이다

 

가지를 뻗어 곧은 나무로 자라나기까지 나무는 무수한 세월을 견뎠을 것이고, 수 백 번의 겨울을 보냈을 겁니다. 그 살아온 길이 잔가지 하나하나에 담겨 있는 것이죠. 그리고 정말 신기하게도, 마구잡이로 자라나는 것처럼 보이지만 가까이에 있는 나무끼리 서로 겹치지 않게 균형을 잡고 멋들어지게 가지를 뻗어 내고 있는 것을 봅니다. 시인의 말처럼 나무의 가지는 나무의 생명의 손가락인 것이죠.

 

나뭇가지들이 살아온 길과

세세한 잔가지 하나 하나의 흔들림까지

다 보여주는 넉넉한 허공 때문이다

 

하지만 빽빽하게 채워져 있는 배경 속에서는 잔가지들의 모양이나 그 균형, 흔들림을 볼 수 없죠. 그렇기 때문에 시인은 여백이 없는 풍경은 아름답지 않은 법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도시의 풍경이 그렇지 않나요? 고층 건물에, 건물마다의 요란하고 휘황찬란한 간판들.. 정말 눈이 쉴 곳이 없지요. 그런 꽉 찬 배경은 나무의 생명의 손가락을 쓰다듬어 줄 수 없습니다.

무언가로 지나치게 꽉 차 있어 여백이 하나도 없는 풍경이 그 어느 것도 품지 못하듯, 우리의 내면에도 여유롭게 비워 놓은 여백이 있어야 누군가를 품어줄 수 있겠죠. 그렇기에 시인은 때로는 텅 빈 여백을 가장 든든한 배경으로 삼을 줄 알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백이 없는 풍경은 아름답지 않다

비어 있는 곳이 없는 사람은 아름답지 않다

여백을 가장 든든한 배경으로

삼을 줄 모르는 사람은

 

‘채움’과 ‘비움’은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가져야 할 자세를 말해줍니다. 나 스스로는 중심에 깊은 물을 채우듯 무게를 잡고 작은 것에 흔들리지 않는 깊은 자세를 가져야 하며, 나 아닌 다른 사람을 대하는 데에 있어서는, 작고 연약한 나뭇가지부터 큰 산까지 넉넉하게 품을 수 있는 넓은 비움의 자세가 필요하다고 생각해 볼 수 있겠습니다.

가볍게 인생을 살지 말되, 너무 꽉 채운 삶을 살지 말 것. 쉽지 않은 삶의 태도이지만, 그럼에도 채움과 비움의 메세지를 통해 다시 한 번 다짐할 수 있는 시간이 되었기를 바랍니다.

오늘 이 시와 함께 들을 노래는 ‘여백’이라는 말이 참 잘 어울리는 가수, 곽진언의 노래 <자랑>이라는 곡을 가져왔습니다. 추운 날씨에 건강 조심하시구요, 저는 다음 시간에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곽진언 – 자랑, 주소: https://youtu.be/aSD5Xx3f8do»

 

☞ 채움과 비움(1) 보러가기


아이폰 팟케스트 <마리횬의 시와 음악공간(2012)>에서 러시아의 시와 노래를 직접 번역하여 소개하는 방송을 진행하였고, 호주 퀸즐랜드주 유일의 한인라디오방송국에서 시를 읽고 생각을 나누는 <시가 필요한 시간(2016-2018)>을 진행하며 많은 사랑을 받았다. 연세대학교에서 노어노문학을 전공하였고, 현재 동대학원에서 러시아 문학을 공부하고 있다. 

시가 필요한 스물다섯 번째 시간, 채움과 비움(1) – ‘채움’ [시가 필요한 시간]

시가 필요한 스물다섯 번째 시간, 채움과 비움(1) – ‘채움’

 

마리횬

 

무언가를 비워내는 행위와 채우는 행위는 정 반대의 것처럼 보입니다. 보통 무언가가 비어 있다는 것은 채워진 게 하나도 없다는 뜻이고, 반대로 뭔가를 채우려면 그 채울 만한 공간을 만들기 위해 가득 차 있는 것을 비워 내야만 하니 의미적으로만 보면 완전히 다른 개념입니다. 하지만 앞으로 소개해드릴 두 편의 시를 읽어 보면서 전혀 달라 보였던 두 가지 행위가 한 지점에서 만나고 있음을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오늘은 먼저 ‘채움’에 대한 시를 읽어보겠는데요, 도종환 시인의 <깊은 물>입니다.

 

 

  깊은 물
                                       도종환

 

물이 깊어야 큰 배가 뜬다 얕은 물에는
술잔 하나 뜨지 못한다.
이 저녁 가슴엔 종이배 하나라도 뜨는가
돌아오는 길에도 시간의 물살에 쫓기는 그대는

 

얕은 물은 잔돌만 만나도 소란스러운데
큰물은 깊어서 소리가 없다.
그대 오늘은 또 얼마나 소리치며 흘러갔던가
굽이 많은 이 세상의 시냇가 여울을

 

우리 가슴 속에는 저마다의 강물이 흐르고 있는데요, 도종환 시인은 이 시에서 우리 모두에게 마음 속 강물에 물을 깊이 채우기를 권하고 있습니다. 큰 배가 뜨려면 바다나 강물이 충분히 깊어야 한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상식인데, 시인은 그 사실에 덧붙여 우리에게 질문하고 있습니다. “당신의 가슴엔, 그대의 가슴에는 큰 배커녕 종이배 하나라도 뜰 만큼의 깊은 물이 있는가?”라고 말입니다.

‘시간의 물살의 쫓기는 그대’라는 대목은 바쁘게 살아가는 분주한 우리들의 모습을 가리키고 있죠. 이 시가 발표된 1994년에도 사람들은 바쁘게 살았겠지만, 그때보다 과학이 더 발전하고 편리한 기술들이 개발된 지금, 우리는 여전히, 아니 오히려 예전보다 훨씬 더 바쁘게 사는 것 같아요. 마음의 강물이 잔잔할 틈이 없죠.

특별히 시인은 ‘돌아오는 길에도 시간의 물살에 쫓기는 그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건 무슨 의미일까요? 모든 일과를 마치고 집에 돌아온 시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아침에는 모두가 바쁠 수밖에 없어요. 출근을 하고 학교 수업을 준비해야 하죠. 모두가 시간의 물결에 쫓기기 마련입니다. 그렇다면 하루를 마무리하고 집에 돌아오는 저녁에는 어떤 가요? 잔잔하게 머물며 하루를 마무리하고, 나 자신을 비춰보고 되돌아 볼 시간조차 없이 여전히 분주하고 시간의 물살에 쫓기고 있지는 않은 가요? 시인은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내 마음 속 강물은 충분히 깊은지, 그 물살은 잔잔한지 말입니다.

 

얕은 물은 잔돌만 만나도 소란스러운데
큰물은 깊어서 소리가 없다.

 

우리 주변에는 ‘잔돌’들이 참 많습니다. 작아서 위험하지는 않지만 유독 거슬리고 나를 건드리는 사소한 문제들이 있죠. 잔소리 많은 직장 상사, 항상 말에 뼈를 넣어서 말하는 후배, 하기 싫은 잡다한 업무, 해도 티 안 나는 집안일 등.. 인생에서 정말 자잘한 문제들이 있습니다. 그런 ‘잔돌’과 같은 문제와 상황을 만났을 때 내 자신이 어떻게 대처하는지를 스스로 돌아본다면, 내 마음 속의 강물이 얕은 물인지 깊은 물인지 알 수 있지 않을까요? 하나하나 다 스치고 건드리며 소란스럽게 지나가는 얕은 물인지, 아니면 묵직하게 그 돌들을 품어 내며 묵묵히 소리 없이 지나가는 깊은 물인지 말입니다.

 

그대 오늘은 또 얼마나 소리치며 흘러갔던가
굽이 많은 이 세상의 시냇가 여울을

 

시인은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을 ‘굽이 많은 시냇가 여울’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이 그렇죠? 내가 있고 싶은 곳에만 있을 수 없고, 늘 마음에 꼭 맞는 사람들과 생활할 수도 없고, 언제나 나에게 편안한 상황들만 생기지는 않아요. 굽이굽이 굴곡이 있고 잔돌들이 놓여 있죠. 그런 것들에 일일이 반응하며 사사건건 내 목소리를 내려고 했던 ‘소리치며 흐르는’ 모습이 나에게도 있지는 않은지.. 이 시를 읽으며 반성하게 됩니다. 작은 것 하나에 일희일비 하는 가벼운 삶이 아니라, 때로는 깊이 품어낼 줄도 아는 무게감을 가지기를, ‘채움’으로 흔들리지 않는 중심을 가지기를 충고하는 시인의 메시지를 <깊은 물>에서 읽어냅니다.

이 시와 함께 들으면 좋을 노래로 짧은 가곡을 한 곡 준비했습니다. 며칠 전에 우연히 한 방송 프로그램을 통해서 우리나라 가곡에 대한 강연을 보게 되었는데요, 여러 곡들이 소개되는 가운데 2014년 화천비목콩쿨에서 창작가곡 부문 1위를 한 <마중>이라는 곡이 너무 아름답더라구요. 그래서 여러분과 함께 나누려고 가져왔습니다. 묵직한 울림을 주는 이 곡의 가사와 멜로디를 듣고 있노라면 왠지 마음 속에 깊은 물이 채워지는 것만 같습니다. 여러분도 같은 감동을 느끼실 수 있기를 바라며, 저는 다음 시간에 ‘비움’에 관한 시 들고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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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채훈 – 마중 주소: https://youtu.be/yI3G7u7-6S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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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채움과 비움(2) 보러가기

 


아이폰 팟케스트 <마리횬의 시와 음악공간(2012)>에서 러시아의 시와 노래를 직접 번역하여 소개하는 방송을 진행하였고, 호주 퀸즐랜드주 유일의 한인라디오방송국에서 시를 읽고 생각을 나누는 <시가 필요한 시간(2016-2018)>을 진행하며 많은 사랑을 받았다. 연세대학교에서 노어노문학을 전공하였고, 현재 동대학원에서 러시아 문학을 공부하고 있다. 

시가 필요한 스물네 번째 시간 [시가 필요한 시간]

시가 필요한 스물네 번째 시간

 

마리횬

 

안녕하세요, 시가 필요한 시간의 마리횬입니다. 오랜만에 다시 찾아 뵙네요. 2020년,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로 전 세계가 한번도 겪어보지 못한 신세계를 경험해야 했고, 지금도 여전히 겪어내고 있는데요, 한 해를 보내면서 여러분은 어떤 기억들을 간직하셨는지, 또 2021년을 맞이하면서 어떤 계획들을 세우셨는지 궁금합니다.

연말과 신년은 여러 가족들, 친구들과 함께 모여서 시끌벅적하게 보내기 마련인데, 코로나 바이러스로 서로 떨어져 있어야만 했습니다. 그 거리두기의 시간이 길어지다 보니 사람들이 고독해지고 우울해지는 것 같아요. 2021년도 어김없이 코로나와 함께 살게 될 텐데요, 한 번 살아봤으니 2년차에는 조금 나아질 수 있을까요? 걱정이 많이 앞섭니다.

오늘 여러분과 함께 나눌 시는 용혜원 시인의 <나를 불러주는 사람>이라는 제목의 시입니다. 용혜원 시인은 1952년 서울에서 태어났고, 1992년에 계간지 <문학과 의식>을 통해 문단에 데뷔한 시인입니다. 용혜원 시인의 시는 순수하고 어렵지 않아서, 누가 읽어도 편하게 읽을 수 있는 것 같아요. 특별히 오늘 제가 가져온 <나를 불러주는 사람>은 곁에 있는 사람들의 소중함을 느낄 수 있는 시로, 요즘 같은 때에 읽으면 더 큰 감동이 느껴질 수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됩니다. 마리횬의 목소리로 듣고 오시죠.

 

 

나를 불러주는 사람

                                  용혜원

 

까닭도 없이 이유도 없이 외로운 날 

기적이라도 일어난 듯

보고 싶은 사람이

나를 불러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숨이 막힐 듯 답답하던 생각지 않은 날에

곱게 피어나는 사랑을

나눌 시간이 있다면

행운이라도 잡은 듯 기쁠 것이다

 

목마른 그리움 탓에

엄청난 거리감을 느끼고 있는데

한 순간 가까워질 수 있다면

마음의 짐을 풀어 놓아도 좋다

 

내 눈동자에 내 마음에

사랑을 꽃피워 줄 사람이 나를 불러준다면

아무도 몰래 내 마음 꺼내

사랑을 고백하고 싶다

 

서로 토닥이고 다독여준다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추억을 한 아름 만들 수 있기에

후회는 전혀 없다

 

네, 용혜원 시인의 시 <나를 불러주는 사람> 듣고 왔습니다. 이 시의 첫 줄처럼 “까닭도 없이 이유도 없이 외로운 날..” 이런 날이 한 번씩 찾아옵니다. 특별한 일도 없고 누가 스트레스 주는 상황이 아님에도 갑자기 훅 우울한 기분이 드는 날이 있죠. 요즘처럼 거리두기가 계속되어 주변 사람들과 만날 수 없는 날에는 더욱 그렇습니다.

 

까닭도 없이 이유도 없이 외로운 날 

기적이라도 일어난 듯

보고 싶은 사람이

나를 불러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숨이 막힐 듯 답답하던 생각지 않은 날에

곱게 피어나는 사랑을

나눌 시간이 있다면

행운이라도 잡은 듯 기쁠 것이다

 

그런데 그럴 때! 마침 보고 싶은 누군가가 다정스레 내 이름을 불러 준다면 어떨까요? 직접 만나지 않더라도, 생각지 못한 날에 보고 싶었던 누군가로부터 전화를 받거나 짧은 메시지 한 통 받는다면 어떨까요? 반가움에 얼굴 가득 미소가 지어지면서, 한 순간에 마음이 따뜻해지지 않을까요?

 

목마른 그리움 탓에

엄청난 거리감을 느끼고 있는데

한 순간 가까워 질 수 있다면

마음의 짐을 풀어 놓아도 좋다

 

[…]

 

서로 토닥이고 다독여준다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추억을 한 아름 만들 수 있기에

후회는 전혀 없다

 

며칠 전에 미국에 사는 친구로부터 보이스톡을 받았어요. 신년을 앞두고 문득 오랜만에 생각이 났다며 안부를 전해주었는데요, 예전에 함께 학교 다니던 생각이 나면서 너무 반갑고 좋았습니다. 생각해보면 한동안 연락이 뜸했던 사이에서 아무 특별한 일없이 먼저 연락을 취하기란 사실 쉽지 않아요. 보통은 무언가 용건이 있어야만 연락을 하게 되죠. ‘너무 갑작스럽게 연락해서 상대방이 놀라면 어쩌지?’ ‘내 연락을 불편해하면 어쩌지?’ 하는 걱정에 머뭇거리기 일쑤이고, 또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별탈없이 잘 지내고 있겠지’ 싶어 선뜻 연락하지 못했던 적이 있으실 겁니다. 저도 그것을 잘 알기에, 먼저 연락을 준 친구에게 너무나 고마웠습니다. 친구와 전화를 끊고, 저도 메시지 창을 열어 그간 연락하지 못했던 다른 지인의 이름을 찾았습니다. 내 친구가 그러했듯 나도 먼저 용기를 내자! 이 따뜻한 마음을 다른 사람들도 느끼게 해 주자! 하고 말이죠.

비록 물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고 자주 만날 수 없는 환경에 있더라도, 문득 생각이 나는 날에 잠시나마 안부를 전할 수 있다면, 멀게만 보였던 서로의 간격은 한 순간에 허물어질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새해’는 우리에게 더없이 좋은 기회죠. 오랜 기간 연락하지 못했던 사람들에게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인사말로 내 마음을 살포시 담아 보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미 1월 1일을 놓치셨다구요? 그래도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우리에겐 또 한번의 새해인 ‘설날’이 곧 찾아오니까요^^ 한동안 만나지 못했던 가족들, 친구들에게 “잘 지내?” “내가 좋은 시 한 편을 읽었는데 네 생각이 났어”라며 먼저 연락해보세요. 그 사람 역시 여러분의 연락을 받고 ‘아 나를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 있구나’ 하는 위로와 격려를 한아름 누리게 될 겁니다.

이 시와 함께 들으면 좋을 노래로, 이적의 <당연한 것들>을 가져왔습니다. 이 노래는 가수 이적씨가 SNS에 개인적으로 만들어 올렸던 곡이었는데요, 2020년 제56회 백상예술대상 특별공연에서 아역배우들이 이 노래를 부르면서 많은 사랑을 받게 된 곡입니다. 코로나 여파가 계속되면서 그동안 우리가 당연하게만 여겼던 모든 사소한 것들이 사실은 얼마나 소중한 것이었는지를 돌아보게 됩니다. 그것을 깨닫고 하루하루를 보낸다면, 어려움 속에서도 감사함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고, 우울함 속에서도 밝은 미소를 지어낼 수 있을 거라고 말하는 노랫말이 용혜원 시인의 시와 참 잘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오늘 하루도 따뜻하게 보내시구요, 저는 2주 후에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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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적 – 당연한 것들 / 주소: https://youtu.be/LYSR0iAF8iw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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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폰 팟케스트 <마리횬의 시와 음악공간(2012)>에서 러시아의 시와 노래를 직접 번역하여 소개하는 방송을 진행하였고, 호주 퀸즐랜드주 유일의 한인라디오방송국에서 시를 읽고 생각을 나누는 <시가 필요한 시간(2016-2018)>을 진행하며 많은 사랑을 받았다. 연세대학교에서 노어노문학을 전공하였고, 현재 동대학원에서 러시아 문학을 공부하고 있다. 

스물세 번째 시간, ‘포기’란 없다 [시가 필요한 시간]

시가 필요한 스물세 번째 시간, ‘포기’란 없다

 

마리횬

 

♦ 귀로 읽는 시간-하나(재생버튼을 눌러주세요~)

어제 오랜 친구를 만났어요. 처음 알게 된 때부터로 계산하면 13년, 마지막으로 만난 때부터로 계산하면 약 9년 만에 연락이 되어 만나는 셈이었는데요, 어떤 모습이 되어 있을까 궁금했습니다. 어렴풋이 상상을 해보기도 했죠. 하지만 친구는 제가 예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전공을 다시 공부했고, 제가 생각지도 못한 분야의 전문인이 되어 있더라구요. 그렇게 되기까지의 친구의 방황과 고민의 시간, 쉽지 않았을 선택의 과정 등을 들으며 한편으로 너무나 신기하기도 했고, 한편으로 이 단계에 오기까지 중간에 포기하지 않고 그 많은 어려움을 견뎌낸 친구가 참 대견하기도 했습니다.

친구를 만나고 집에 들어오자마자 생각난 시 한 편이 있었습니다. 그 시를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 싶어서 가져왔습니다. 송경동 시인의 시 <먼저 가는 것들은 없다>입니다.

 

 

먼저 가는 것들은 없다

                                   송경동

 

몇 번이나 세월에게 속아보니

요령이 생긴다 내가 너무

오래 산 계절이라 생각될 때

그때가 가장 여린 초록

바늘귀만 한 출구도 안 보인다고

포기하고 싶을 때, 매번 등 뒤에

다른 광야의 세계가 다가와 있었다

 

두 번 다시는 속지 말자

그만 생을 꺾어버리고 싶을 때

그때가 가장 아름답게 피어나보라는

여름의 시간 기회의 시간

사랑은 한 번도 늙은 채 오지 않고

단 하루가 남았더라도

우린 다시 진실해질 수 있다

 

♦ 귀로 읽는 시간-둘(재생버튼을 눌러주세요~)

이 시의 화자는 아마 어느 정도 나이가 든, 중년의 한 사람일 것으로 생각됩니다. 시를 읽으면 이 화자는 살면서 여러 번의 시행착오를 겪으며 적잖이 굴곡진 인생을 산 사람으로 보입니다. 바늘귀만 한 출구도 안보여서 포기하고 싶었을 때, 그만 생을 꺾어버리고 싶었을 때가 있었다고 표현하고 있죠.

우리도 이런 순간들이 있지 않나요? 어쩌면 지금 이 시간에도,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도 그런 녹록치 않은 삶을 살아야만 하는 분들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시인은 말합니다. 내가 너무 오래 살았다고 생각 될 때, 생을 꺾어버리고 싶을 때가 있지만 그 때가 가장 여린 초록, 그 때가 가장 아름답게 피어나보라는 여름의 시간, 기회의 시간이라고 말입니다.

소나무를 한 그루 생각해볼까요? 모든 나무들 중에 특히 소나무는 무수한 세월을 살아가죠. 어느 날, 소나무가 “너무 오래” 살았다고 느끼는 순간이 찾아왔다고 생각해 봅시다. 몇 백 년을 살고 있으니, 이제 왠지 이파리도 좀 시든 것 같고, 볼 품 없다고 느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사실은 그 때가 그 나무에게는 가장 여린 초록의 시간이겠죠. 앞으로 살아갈 날들에 비하면 말이죠.

시인은 그것을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이야기 해 주고 있습니다. 오년 후, 십년 후의 너의 모습에 비하면 지금이 “가장 여린 초록빛”이라고 말입니다.

 

바늘귀만 한 출구도 안 보인다고

포기하고 싶을 때, 매번 등 뒤에

다른 광야의 세계가 다가와 있었다

 

이 시인의 시처럼, 앞이 꽉 막힌 상황에서 나에게는 도대체 출구가 없다고 불평할 때, 사실은 등 뒤에 그저 작은 ‘출입문’과는 비교할 수 없는 광활한 길이 열려 있는데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어쩌면 쉽고 편하고 안전한 길을 ‘출구’라고 정의해 놓고, 진정한 출구인 ‘광야의 세계’를 너무 쉽게 놓쳐버렸던 것은 아닐까요?

 

두 번 다시는 속지 말자

그만 생을 꺾어버리고 싶을 때

그때가 가장 아름답게 피어나보라는

여름의 시간 기회의 시간

사랑은 한 번도 늙은 채 오지 않고

단 하루가 남았더라도

우린 다시 진실해질 수 있다

 

이 시를 읽으면서 예전에 버스에서 들었던 한 라디오 사연이 기억났습니다. 어느 95세 할머니의 사연이었는데, 듣다가 깜짝 놀랐던 기억이 납니다. 95세 할머니가 자신의 인생 목표로 지금 제2외국어 공부를 시작했다는 사연이었거든요. ‘아니 그 늦은 나이에 무슨 외국어를 공부하시려고 하지?’ 싶었는데, 이 분의 사연을 끝까지 듣고는 더 놀랐습니다. 30년 전, 당신이 65세 생일을 맞이했을 때, 그 때는 자신이 이렇게 30년이나 더 살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었고, 이젠 늙었다고 생각하고 그냥 하루하루를 의미 없이 보냈다는 겁니다. 그 때 미리 알았더라면 아마 자신은 지금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95세 생일을 맞이했을 거라고.. 그러면서, 이제 10년 후, 자신의 105세 생일이 왔을 때 또 지금처럼 10년 전을 아쉬워하며 후회하지 않기 위해, 지금 새로운 인생을 시작 하련다는 내용의 사연이었습니다. 대단하죠?

이 시의 표현처럼, 세상은 우리를 자주 속이려고 합니다. “넌 안 돼,” “이젠 너무 늦었어,” “네 나이를 생각해라,” “네 나이또래 친구들은 벌써…,” “이제 와서 무슨!” “네가 그럴 능력이 되니” 등등 힘 빠지게 만드는 직접적인 말, 암묵적인 사회적 분위기에 어깨가 짓눌릴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두 번 다시는 속지 말자는 이 시인의 다짐처럼, 그만 생을 꺾어버리고 싶을 때, 그 때가 가장 아름답게 피어나보라는 기회의 시간이라는 것, 그리고 뒤를 돌아보면 진짜 내가 가야할 ‘출구’가 있다는 것. 기억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이 시와 함께 들으면 좋을 노래 소개해 드릴게요. <팬텀싱어>라는 프로그램 기억하시는 분이 있을지 모르겠는데요, 성악가, 뮤지컬 배우, 일반인들이 모여 노래경연을 하는 프로그램이었습니다. 그 프로그램에서 들었던 곡 중에 한 곡 가져 왔습니다. 이탈리아의 국민가수라고 불리는 Renato Zero 원곡의 “L’impossibile Vivere” 라는 제목의 곡인데요, 번역하면 ‘불가능한 삶’이라는 뜻이 됩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이 노래는 “불가능해 보일지라도 살아내야지”라고 다짐하고 있습니다. 시인의 시를 그대로 옮겨 놓은 듯 힘 있는 가사가 가슴을 울리는 곡입니다. 어제 만났던 친구에게도 들려주고 싶네요. “살아있음을 느끼는 삶을 살자. 너보다 더 잘해내는 사람은 없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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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impossibile Vivere – https://youtu.be/HOhsVSmqKuQ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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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폰 팟케스트 <마리횬의 시와 음악공간(2012)>에서 러시아의 시와 노래를 직접 번역하여 소개하는 방송을 진행하였고, 호주 퀸즐랜드주 유일의 한인라디오방송국에서 시를 읽고 생각을 나누는 <시가 필요한 시간(2016-2018)>을 진행하며 많은 사랑을 받았다. 연세대학교에서 노어노문학을 전공하였고, 현재 동대학원에서 러시아 문학을 공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