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겔미학산책51-서사시적 슬픔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미학산책51-서사시적 슬픔
1) 서사시의 장르적 특징
헤겔은 그리스 서사시만을 다룬 것은 아니다. 동방의 서사시, 낭만적 서사시, 심지어 근대적 서사시라는 것을 소개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그리스 서사시를 개념적으로 파악한 다음에 이를 확장하여 다른 서사시의 형태로 전개했으니, 먼저 그리스 서사시 즉 헤겔이 본래의 서사시라고 말한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하겠다.
앞에서 간단하게 서사시 장르의 근본 특징을 소개했지만[1] 여기서 좀더 상세하게 설명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먼저 서사시는 개별적 사건들이 전개되어야 한다. 그것은 “민족이나 시대의 내적, 총체적 세계와 관련된 풍부한 사건으로서 가시화”[2]된다.
이런 사건들이 단순히 산만하게 전개되어서는 안 된다. 이런 사건들 내에 이 사건을 전체적으로 통일하는 중심적 목적, 일반적 목적이 있어야 하며, 모든 사건들은 이 목적과 필연적으로 연관되면서, 전체가 자체 안에 유기적인 전체성을 띄고 있어야 한다.
이런 유기적 전체성은 철학에서처럼 논리적인 방식으로 전개되는 것도 아니고, 목적 적합성을 지닌 수단으로서만 등장해서도 안 된다. 개별적인 사건은 그 자체가 생생하고 자립적인 것이며, 일반적 목적의 필연성은 개별적 사건 내부에 감추어져 있어야 한다. 독자는 이 개별적 사건 자체에 머무르면서 그것을 독자적으로 향유한다. 따라서 사건은 장황하고 느슨하지는 않더라도 진행은 매우 느리게 “평온하게 점진적으로” 나아간다.
“이 전체는 객관적 평온함 속에서 진행되며, 이로써 우리는 개별적인 것 자체와 생생한 현실의 이미지들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다.”[3]
일반적 목적은 추상적으로 제시되어서는 안되며, 어떤 개인적 영웅의 행위와 밀접하게 뒤얽혀서 등장하면서 서사시적인 활력이 등장한다. 여기서 일반적인 목적과 개인적 행위는 생동적인 연관성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호머의 일리아드에서 그리스 민족의 실체적 목적은 영웅 아킬레우스의 분노와 전체적으로 연관된다. 개인은 자신의 행위 속에 일반적 목적이 들어 있다는 것을 자각하지 않지만 그 관계를 무의식으로나마 또는 희미하게나마 의식하고 있다.
이는 서사시에서 인간의 행위와 신의 행위가 중첩되는 모습으로 표현된다. 시인은 “영웅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조차 객관적으로 신들의 개입에 의한 것이라고”[4] 설명한다. 예를 들자면 일리아드에서 분노하는 아킬레우스에게 신중함을 각성시키기 위해 아테네 여신이 나타나, 아킬레우스에게 신중을 명한다. 이것은 사실 아킬레우스 자신의 내면의 목소리이지만, 시인은 이를 신의 목소리로 표현한 것이다.
서사 시인은 전체적 사건을 굽어보면서 이를 서술할 때 개인적인 관점에서 서술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민족 정신의 관점에서 사건을 서술한다. 서사시의 화자는 뒤로 물러나서, 간접적으로 매개하는 화법을 통해 영웅의 역사적 사건을 회상한다. 그런 서술은 ‟단조롭고 기계적인 것에 가깝고 조용히 독자적으로 계속 굴러가듯이 흘러 나온다”[5]. 그는 “작품이 스스로 노래하는 듯이”[6] 서술하여야 한다. 이런 단순한 묘사는 그 사건을 어떤 운명의 힘에 의해 일어난 필연적 결과로 받아들여지게 하니, 여기서 서사시가 지닌 ‛서사적 슬픔’이 출현한다.
2) 서사시의 시대와 서사시인
서사시는 역사적으로 보면 어느 시대에나 출현하였다. 헤겔은 그리스 서사시를 최고의 완전한 서사시로 간주하지만, 그 이전 인도에도 서사시(예를 들어 라마야나, 마하바라타)가 있었으며, 기독교 시대나 근대에도 서사시(예를 들어 엘 시드와 신곡, 해방된 예루살렘 등)가 있었다[7]. 헤겔이 그리스 시대 서사시를 최고의 서사시로, 서사시의 원형으로 삼았던 것은 호메로스와 같은 탁월한 시인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서사시의 정신적 토대 때문이다.
헤겔은 그 정신적 토대를 민족국가가 출현하고 이를 영웅이 이끌던 영웅시대라는 말로 규정한다. 이 시대는 “민족이 둔중한 의식에서 깨어나, 정신이 자기의 고유한 세계를 산출하고 한 민족의 순진무구한 의식이 최초로 시적으로 언표되는”[8] 시대이다.
이 시대, 국가의 시민(공민)은 아직 국가를 자발적으로 구성한 것도 아니며 다만 정의감이나 공정의 감각, 습속이나 관습, 파토스, [자연적] 성격에 기초하여 국가에 결합할 뿐이다. 이 시대 국가의 실체적 목적이 영웅이라는 개인의 파토스, 자연적 성격을 통해 생동적으로 실현된다. 그러므로 이 시대 국가는 아직 자연성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민족 국가라는 형태를 취하게 된다. 다시 말하자면 여기서 국가와 개인, 민족과 영웅, 자연과 국가는 미분화된 통일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정의와 공정성의 감각, 습속, 심정, 성격이 인륜적 관계의 유일한 근원이며 그 버팀목으로 현상하니 어떤 지성도 그런 인륜적 삶의 관계를 산문적 현실의 형식으로 간주하면서 심정과 개인의 신조와 열정에 확고하게 대립시킬 수 없을 정도이다.”[9]
헤겔은 최초의 민족국가의 자연적 통일성이 분열하면, 사회 자체의 이원성, 개인과 사회의 대립이 생겨나면서 서사시는 그 정신적 토대를 잃고 서정시와 극시로 발전하게 된다고 한다.
영웅 시대 서사시가 등장하면서 민족은 이 서사시를 통해 자신의 정신을 자각하게 된다. 시인은 둔중한 의식에서 깨어나 “자유로운 정신으로서 구시대적 속박을 벗어 던지며”, 민족 내에 무의식적으로 존재하는 정신을 예민하게 자각함으로써 이를 서사시로 표현한다. 이로써 서사시는 민족의식의 바탕이 되어 모든 종교나 예술 철학의 원천이 된다.
서사시는 민족에게 하나의 경전을 제시한다. 이 경전은 종교적 의미에서 경전이 아니라 세속적 삶의 율법을 제시한다는 의미에서 경전이다. 서사시의 많은 내용은 신구 정신의 갈등이 포함하고 있으므로, 후일 비극의 소재가 되기도 하는데, 그렇다고 서사시가 비극과 동일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비극은 갈등 자체를 내용으로 삼지만 서사시에서 이런 갈등은 전체적 사건을 전개하는 하나의 계기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3) 서사시적인 사건
이상에서 헤겔은 서사시가 가지는 일반적 특성을 제시한다. 이어서 헤겔은 서사시의 구체적 내용을 상세하게 분석하는데, 이 가운데 몇 가지 중요한 것들만 살펴보기로 하자.
서사시에서 영웅의 모든 행동이 시적 서술의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니다. 서사시의 대상이 되는 것은 이런 영웅이 일으키는 사건[Begebenheit]인데, 이 사건은 곧 전 민족의 운명이 걸린 사건이다. 민족 내부의 갈등이 아니라 민족과 민족 간의 전쟁이 서사시의 대상이 된다. 더구나 이 사건은 민족이 구 시대적 상황을 벗어나 민족적 삶의 새로운 활로를 열어놓는 사건이며 이를 통해 하나의 민족이 세계사적인 의미를 획득하게 된다. 그러므로 영웅이 불러일으킨 사건을 통해 전 민족의 삶과 삶의 모든 측면이 끌어들여지며 서사시는 포괄적이고 풍부한 사건으로 가득하다.
영웅의 행동에서 중요한 것은 그의 정신적 도덕적 탁월함이 아니라 신체적인 강건함과 용감성이다. 왜냐하면 여기서 영웅의 행동을 지배하는 것은 영웅이 자연적으로 얻은 힘이기 때문이다. 사건은 전체적으로 영웅의 자연적 파토스에 의해 지배되므로 여기서 서정적 요소가 출현하기는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부차적 요소에 지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사건이 영웅의 파토스를 매개로 하더라도 실상 민족적 정신 자체에 의해 실현되는 것이라는 점이다. 영웅의 구체적 행동, 내적 목적과 열정은 민족 정신이 자기를 표현하는 수단이며 형식에 불과하다. 영웅 속에 “민족이 생동적이고 개별적 주관으로 응집”된다. 영웅은 “민족의 특성 속에 산재한 것을 자신 속에서 통합하는 총체적 개인이며”, 그러므로 “위대하고 자유롭고 인간적으로 아름다운 성격”[10]이다. 그는 민족의 정점에 서 있을 권리를 지니며, 주요 사건은 그의 개성과 결부된다.
서사시의 바탕이 되는 사건이 이처럼 자연적 파토스에서 나오는 것이므로 여기서 “인간은 아직 자연과의 생동적 관계로부터 다시 말해 자연과 관계하여 힘차고 신선하며 부분적으로는 친밀하며 부분적으로는 투쟁하는 공동성으로부터 벗어나서 현상하지 못한다.[11]”
이런 자연성 때문에 서사시적 사건에는 한편으로 영웅의 의지가 개입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현실과 관련된 많은 우연성이 개입한다. 이것은 극시와 반대되는 데 극시에서는 오직 등장인물의 행위로부터 사건이 발생하며 인물에 대립하면서 외적인 것으로 보이는 사건도 사실은 그 자신이 일으킨 사건이 된다.
[1] 헤겔이 서사시 장르에 포함시킨 것과 관련해 약간의 혼동이 생긴다. 문제는 경구, 격언, 교훈시나 철학적 교훈시(철학시, 우주 창조론, 신통기 등)와 같은 것 때문이다. 헤겔은 시와 산문을 구별하는 경우, 위에 든 것을 산문으로 분류한다. 이런 것은 개별적인 것(사건, 사물, 행위 등)이 일반적인 것(본질, 법칙, 도덕 등)을 말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개별적인 것은 자립적인 것이 아니며, 독자는 이 개별적인 것을 향유하지 않는다. 그런데 서사시 장르를 다루는 경우 헤겔은 이를 초기 서사시로 다루고 있다. 여기서 초기란 개념이 모호한데, 초기에 이미 서사시적 형식이 등장한 것이라 본다면, 이것도 서사시가 된다. 그 때문에 혼란이 생기는데, 여기서 초기란 서사시로 발전하는 과정 중에 나타난 것이라는 의미로 해석한다면, 혼란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위에 거론한 것들은 아직 시적인 것과 산문적인 것으로 구분하기 이전에 등장한 시적인 것이니, 비록 서사시적 가능성을 지니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은 서사시 자체는 아니다. 우리로서는 헤겔이 실제의 서사시라고 말한 것으로부터 서사시 장르의 특징을 파악해야 할 것이다.
[2] 미학강의 3권, 332쪽
[3] 미학강의 3권, 333쪽
[4] 미학강의 3권, 338쪽
[5] 미학강의 3권, 324쪽
[6] 미학강의 3권, 338쪽
[7] 헤겔이 서사시를 그리스에만 한정했다는 주장이 자주 등장한다. 헤겔이 그리스 서사시를 최고로 본격적인 서사시로 규정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리스 시대 이전이나 이후에 서사시가 없었던 것도 아니며, 헤겔이 이를 무시했던 것도 아니다.
[8] 미학강의 3권, 334쪽
[9] 미학강의 3권, 342쪽
[10] 미학강의 3권, 364쪽
[11] 미학강의 3권, 34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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