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라토리엄의 곁에서 [톡,톡,씨네톡]
모라토리엄의 곁에서
박근형(전북대 철학과 대학원)
함박눈이 쏟아지던 1월 초, 거실에 상추를 심었다. 흐린 겨울날이 계속되면서 우중충해진 집안 분위기를 환기하기 위해서는 신록이 필요하다는 이유였다. 이미 다육식물 등의 화분이 있었지만, 식물 키우는 재미를 느끼려면 한 달이면 쑥쑥 자라서 따먹을 정도가 된다는 상추가 제격이지 싶었다. 큼지막한 화분에 인터넷 쇼핑몰에서 구입한 배양토를 붓고 씨앗을 심은 뒤 물을 흠뻑 주었다. 새싹이 돋을 때만 해도 초록이 주는 설렘에 기대가 만발했다. 그러나 웬걸. 날이 한참 따사로워진 4월 말에도 상추는 이제 겨우 엄지손톱 크기만큼 자랐을 뿐이다. 성장이 멈추어 버린 상추를 두고 나는 20대의 어느 날에 보았던 영화 한 편을 떠올렸다.
2014년 개봉한 야마시타 노부히로 감독의 영화, <모라토리움기의 다마코>(이하 <다마코>)의 마지막 장면은 이렇다. 코후 스포츠샵 딸내미 다마코와 사진관 아들내미 히로시는 코후 스포츠샵의 벤치에 늘어지게 앉아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다. 올해 23세인 다마코는 대학을 졸업하고 아버지 곁에서 놀고먹으며 1년을 보낸 상태다. 여름이 끝나면 아버지에게서 독립해야 하지만, 어디로 갈지는 정해지지 않았다. 농구부 활동을 하는 중학생 히로시에게 다마코는 주전이 될 수 있을지 여부와 여자친구와의 안부를 묻는다. 히로시는 주전 선발 여부는 “미묘”하며, 여자친구와의 관계는 “자연 소멸”했다고 답한다. 그는 내일 다마코를 다시 만날 것처럼 간단한 인사로 떠나고, 홀로 남은 다마코는 기지개를 켠다. 그녀는 자연 소멸이라는 단어를 오랜만에 들어보았다며 웃으며 프레임을 벗어나고 이후 엔딩 크레딧이 오른다. 거창한 것 없는 이 2분 18초간의 엔딩 장면에 87분의 러닝타임 동안 영화가 줄곧 이야기한 것이 압축되어 있다. <다마코>는 말한다. ‘사계절이 자연스럽게 변화하듯, 청춘의 모라토리엄도 자연스럽게 소멸한다. 누구나 자신만의 속도와 방향이 있다.’
모라토리엄은 본디 국가나 지자체가 빌린 돈에 대해 상환을 유예하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모라토리엄 증후군이라는 단어가 파생되었다. 젊은 세대가 충분히 경제적 책임을 다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음에도, 사회적 진출을 꺼리고 두려워하여 학생이나 무직 상태로 남아있는 현상을 의미한다. <다마코>는 다마코가 놓인 모라토리엄의 시작과 끝을 잔잔히 담는다. 그녀의 모라토리엄은 구직활동은 제대로 하고 있냐는 아버지의 일갈에 “지금은 아니야!”라며 버럭 대들면서 현시되고, 여름이 끝나면 독립하라는 아버지의 통보에 ‘좋은 아버지 합격’을 주면서 ‘자연 소멸’한다.
<다마코>를 처음 접했던 20대 후반의 어느 시기, 나는 다마코보다 훨씬 긴 모라토리엄을 보내고 있었다. 이 영화에 대한 많은 감상평은 “유예”에 방점을 찍었고 나도 그랬다. 꿈이 있다는 핑계로 모라토리엄을 선언해 놓고 그 꿈조차 유예하고 있던 날들이 있었다. 현실을 직시할 용기도, 포기할 용기도 나지 않아 모든 걸 회피하고 있으면서도 양심은 남아있어서 어영부영 이런저런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던 시기였다. 부모님이 어려운 마음으로 전세자금을 지원해 준 노량진의 원룸에는 햇빛이 들지 않았다. 화장실은 가건물이었다. 여름에는 비가 샜고 겨울에는 세탁기와 변기가 얼었다. 에어컨은 당연히 없었다. 20대 중반의 두 자매가 반나절 만에 구한 집이었으니 좋은 집일 리 만무했다. 학자금 대출도 없었고 묵묵히 기다려 주는 부모님이 계셨으니 경제적인 사정이 어렵다고는 할 수 없고, 그저 미래가 궁핍했던 시기였다. 와중, 아르바이트 구직구인 앱을 통해 노량진의 슈퍼마켓 아르바이트를 지원했다. 평일에는 다른 아르바이트를 하고, 슈퍼는 주말 아침 8시부터 오후 4시까지 일하면 되었다. 노량진의 아침은 새벽 시장만큼이나 이르게 시작해서, 유명한 강사의 수업을 앞자리에서 듣고 싶으면 수험생들은 동이 트기 전에 일어나 강의실 앞에 번호를 적은 노트 등을 놓는 방식으로 줄을 미리 서 놓아야 했다. 그들은 카페에서 제일 저렴한 아메리카노를 시키고 몇 시간씩 공부를 하므로, 공부하기 좋은 카페들은 ‘음료 주문 시 4시간까지 착석 가능’ 등의 문구를 미리 표기해 두었다. 노량진 마트나 슈퍼에서는 초코파이 1개 200원, 두루마리 휴지 1개 500원, 커피 믹스 스틱 1개 100원, 이런 식으로 생필품을 쪼개 팔았다. 그러면 트레이닝복에 슬리퍼를 신은 공시생들이 그것들을 사 갔다. 천이백 원에 세 개인 휴지를 사지 않고 오백 원에 하나인 것을 사 가는 경우도 많았다.
그해의 겨울은 길었다. 슈퍼 안까지 햇빛이 들 리는 만무하니 집에서도, 슈퍼 안에서도 모든 시간이 항상 밤 같았다. 고독을 이겨보려고 유튜브에서 철학 강좌를 검색해서 틀어두었더니 공시생들이 나도 같은 공시생인 줄 알고 음료수와 인사를 건네는 일도 더러 있었다. 몇백 원짜리 간식도 셈해서 사야 하는 처지를 알기에, 나는 그것을 거절하지도 못하고 기꺼이 받지도 못한 채 우물쭈물하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들의 격려는 언어로 구체화되지 못한 일련의 연대 행위이자 동질감의 표현이었다.
엔딩크레딧이 오른 후 다마코가 취업을 할 수 있을지, 코후 스포츠샵을 떠나 어디로 갈지, 관객은 알 수 없다. 그녀는 언제까지나 아빠로만 존재할 것 같았던 아버지에게 여자친구가 생길 수 있다는 것도 수용할 수 있고, 피하고만 싶었던 동창생에게 또 보자는 인사를 건넬 수 있을 만큼 성장했다. <다마코>는 밑도 끝도 없는 유예에 대한 영화가 아니며, 무책임한 힐링을 제공하지도 않는다. 힐링은 순간적인 위로가 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상황 개선에는 어떠한 영향력도 발휘하지 못한다. “힐링에는 힘이 없다. … 끝없는 위로만을 보내며 우리 청춘을 같은 자리에 유예시킨다. 스스로의 연민에 빠진 청춘들은 현실에 대한 인식이 마비된다. 나는 ‘아프니까’ 라고. ”1 애초에 다마코는 스스로에 대해 어떠한 이유도 제시하지 않았다. “아직은 아니다”라고 주장했을 뿐이다.
<다마코>는 주관적인 서정을 형성하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주변의 어른들은 그녀에게 무조건적인 위로와 양보를 해주지 않는다. 각자에게는 각자의 인생과 몫이 있다. 기약 없는 기다림은 다마코의 성장을 위한 바람직한 방법이 아니므로, 아버지는 그녀를 지지하고 응원하지만, 그녀의 도약과 자신의 삶을 위해 그가 지원할 수 있는 분명한 한계선을 제시한다. 태생적으로 재원과 권력 구조가 균형을 이루지 못하는 가족 내 헤게모니에서 백수인 다마코는 약자의 입장이지만, 그녀는 아버지에 대해 “합격” 선언을 통해 삶을 선택하는 주체로서의 위치를 유지한다. 그럼으로써 <다마코>는 ‘고달픈 청춘’이라는 소재가 빠지기 쉬운 자기 연민이라는 함정을 피해 가는 영리한 영화다. 기지개와, 앵글에서 스스로 벗어나는 행위는 새로운 시작의 직관적인 메타포다. 좁은 방에 누워있던 장면으로 시작한 <다마코>는 필연적으로 집이라는 닫힌 구조의 외부에서 모라토리엄의 종기를 맞이한다.
그리하여 <다마코> 이후에 무엇을 이야기할 수 있는가? 모라토리엄을 보내고 있는 청춘에 대한 개인적인 공감인가? 최근 발표된 결과에 따르면, 취업난 속에서 학자금 상환 개시 소득에 이르지 못한 저소득 청년 수는 갈수록 늘어가고 있으며, 취업 후 상환을 시작했다가 중도에 감소하는 바람에 상환이 중단된 사례는 2017년(4만 7천여 명)에 비해 2021년(9만 8천여 명)에 2배 가까이 늘었다.2 개인적인 공감은 이러한 국가 전반적인 경제·사회적 현실에 어떤 영향력을 갖기에는 미약한 수단이다. 한국 현대 수필 문학에 대해 비평하고 반성한 <수필의 자폐성을 넘어서>에서는 현대수필의 문제점으로 “세계의 자아화”를 꼽았으며, ‘외적 사물, 사건, 현실을 자아의 몽롱하고 주관적인 내면으로 끌어와 ’주정主情‘으로 몰아간다.’고 비판하였다.3 비단 현대 수필의 문제가 아니라, 현대 시 등 모든 예술 작품이 빠질 수 있는 위험성에 대한 직언이었다. 창작자뿐 아니라 수용자 역시 <다마코>를 자기 경험이나, 가족 및 주변인에 투사하고 감성적으로 해석하는 데에 그친다면 이 또한 ‘세계의 자아화’에 불과할 것이다.
사계절을 거치면서 다마코의 영역은 조금씩 확장되어 간다. 영화가 처음 시작하는 ‘가을’ 파트의 등장인물은 다마코와 아버지뿐이며 카메라 역시 집 밖을 벗어나지 않지만, 계절이 진행되어 갈수록 다마코의 관계의 영역은 확장되고 등장인물도 증가하며 공간적 배경도 다채해진다. 우리의 경계도 이처럼 조금씩 확장되어 가야 한다. 나에게서, 가족과 주변인에게로, 동시대 사람들에게로, 그리고 마침내 사회와 역사로. 청년뿐 아니라 여러 이유로, 여러 부분에서 누군가는 모라토리엄을 겪고 있다. <다마코>에서 청년 취업률의 감소, 캥거루족의 증가 등의 사회적 현상을 직접적으로 겨냥하고 있지 않는다고 해서 ‘청년기의 모라토리엄은 왜 발생하며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가?’라는 의문까지 사라지지는 않는다. “우리가 목격하는 개인의 불행을 사적인 것으로만 돌려서는 안 되는 이유는 많든 적든 그것은 시대적 악몽을 그림자처럼 지니기 때문이다.”4
8년가량의 세월이 지나 <다마코>를 다시 감상하는 지금, 이번에는 ‘기다림’에 포커스를 둔다. 새해 전날 다마코는 엄마의 전화와 결혼한 언니의 방문을 기다리고 다마코의 아버지는 그런 다마코의 독립을 기다린다. 이런 류의 기다림을 가능케 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애정이다. ‘기다림’은 다른 방향에서도 드러난다. 다른 영화였다면 속도감 있는 전개를 위해 생략되었을 법한 장면을 <다마코>는 편집하지 않았다. 다마코가 자전거를 타고 화면을 가로지르는 장면, 무료하게 떡을 먹는 장면, 아버지가 보일러 석유를 교체하는 장면… 카메라는 묵묵히 그들의 일상을 지켜보고 기다린다. 기승전결에 필수적인 장면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래도 모든 순간이 소중하다는 것을 명심하라는 듯이, 어쩌면 다시는 오지 못할 모라토리엄의 이 순간마저 언젠가는 추억하게 될 것이라는 듯이 <다마코>는 그런 장면도 애정을 담아 기록한다. 감독이 의도했는지 와 무관하게, 결과적으로 기다림이라는 상태는 느리다는 행위에 잇따르고, 느림은 근본적으로 사유를 낳게 되어있다. 영화가 기다림을 보여주었다면 프레임 너머를 사유하는 일은 관객의 몫이다.
<다마코>는 느린 호흡으로 배우와 상황 곁에 서있다. 카메라는 역동적인 로우앵글이나 하이앵글로 장면을 담지 않는다. 이 영화가 전반적으로 정면각에 가까운, 아이레벨숏으로 촬영된 것은 극적인 드라마가 아닌, ‘당신의 눈높이에서 함께 바라보는 일상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라는 연출된 메시지로 읽힌다. 눈높이를 맞추고 눈동자를 들여다보고 소소한 안부와 일상을 주고받는 것. 그 겨울 노량진에서 건네받았던 음료수에 담겨있던 마음을 돌이켜본다. 확장할 수 있는 힘은 공감에서 비롯하여 연대에서 출발한다. 다마코의 이야기를 나의 경험담과 겹쳐보는 데서 그치지 않고, 누군가 내게 건네주었던 격려를 잊지 않고 다른이에게 전해주는 것, 누구나 유예기를 겪을 수 있으며 그럴 수도 있다고 공감해 주는 것, 그렇게 손을 맞잡고 나면 한 발짝 더 나아가 목소리를 내어보는 것. 대단한 일은 아니어도 그런 마음들이 모이면 반드시 “좀 더 괜찮은 세상”의 실마리가 되리라고 믿는다.
퇴근하면 나는 제일 먼저 상추를 찾는다. 오늘은 어제보다 조금 더 컸는지, 새싹 하나하나를 들여다본다. 언젠가는 자랄 것이라고 믿는 마음으로 마른 흙을 적셔준다. 몇 달 만에 이제야 싹을 틔우는 씨앗도 있다. 너무 일찍 자란 싹은 줄기가 웃자라 힘이 없지만 느지막이 기지개를 켠 싹은 작은 몸뚱어리를 흙에 단단히 박았다. 잎사귀 색도 웃자란 싹보다 훨씬 선명하다. 모두가 같은 속도로 같은 시기를 보낼 수는 없다는 삶의 진리를 늦게 움트는 상추 새싹에서 만난다. 16세기 프랑스 사상가 몽테뉴는 평범하고 소박한 삶을 중시하였다. 그는 “삶이란 마치 조각모음과 같”아, “일관된 자기 모습을 구성하기란 무망”한 일이라고 보았다. “일관된 모습이 없으니 후회스런 삶이 있을 까닭이 없다. 모든 삶이 예외 없이 존귀할 따름이다.”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