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스턴크래프트 (上) [페미니즘 고전들을 찾아서]

<페미니즘 고전들을 찾아서>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여성과 철학 분과에서 <페미니즘 고전들을 찾아서>라는 제목으로 페미니즘 이론과 사상을 발전하고 확대하는 데에 기여한 철학자와 그 저서를 소개하는 글을 연재합니다. 한 달에 두 번씩 (매달 초와 중순) 연재할 예정이며, 매달 한 철학자와 그 저서를 다룰 것입니다. 많은 기대와 관심 부탁드립니다! (편집 및 업로드 담당: 서누)

 

1. <여권의 옹호>, 메리 울스턴크래프트(Mary Wollstonecraft) (1759-1797) (上)

 

김은주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여성과 철학 분과)

 

“나는 여성이 처한 비굴한 의존 상태를 위장하기 위해 남성이 선심 쓰듯 내뱉는 귀엽고 여성스러운 어구들과, 여성의 성적 특징으로 간주되어온 나약하고 부드러운 정신, 예민한 감성, 유순한 행동거지 등을 거부하고, 아름다움보다 덕성이 낫다는 걸 밝히려고 한다. 남자든 여자든 한 인간으로서 자기만의 개성을 만들어가는 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목표이므로, 모든 것이 이를 기준으로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 가부장제에 핍박받는 여성들을 목격하다

 

여권의 옹호의 저자 메리 울스턴크래프트는 1759년 영국 런던 근교의 스피털필즈에서 에드워드 울스턴크래프트의 6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그는 사회생활 실패의 울분을 어머니에게 폭력으로 푸는 아버지와 모습과 불행한 부모의 결혼 생활을 목격하면서 남자에게 여성을 종시키는 불합리한 결혼제도에 대해 의문을 품었다. 당시 여성은 결혼과 함께 모든 법적 책임과 권리를 남편에게 양도하게 되었기에, 폭력 앞에서 저항할 길이 없었다. 기혼 여성은 채무의 책임은 없었지만 대신 계약서에 서명도 할 수 없었고, 소송도 불가능했으며 심지어 법률적 효력이 있는 유언을 남길 수도 없었다. 당연히 그 어떤 경제활동도 불가능했고 가정의 모든 경제권만이 아니라, 유산으로 물려받은 아내의 재산과 함께 자식마저도 모두 법적으로 남편에게 속해 있었다.

울스턴크래프트는 이러한 여성의 비참한 처지를 어머니의 경우만이 아니라 아버지의 폭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일찍 결혼한 동생 일라이저마저도 가정 폭력에 시달리는 것을 목도하면서, 사회경제적으로 남편에게 의탁하는 여성의 고달픈 처지와 결혼 생활의 비참함을 재확인한다. 그는 일라이저를 탈출시켜 자신이 돌보았고, 여성이 독립적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경제력과 교육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절실히 느낀다. 이러한 각성은 울스턴크래프트를 경제적으로 독립적이면서 교육받은 여성으로서 삶을 살도록 만든다. 그는 가정교사와 귀족 부인의 비서로 일하고, 이후 1784년 이슬링턴에 여학교를 설립한다.

학교 경영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첫 저작인  『여성 교육론』 저술 후 런던에서 머물다 혁명의 와중에 있는 프랑스로 건너가 계몽주의 세계를 몸소 체험한다. 울스턴크래프트의 삶은 당시의 통념과 관습에서 벗어났을 뿐 아니라 역동적이었다. 울스턴크래프트는 파리에서 만난 미국인 길버트 임레이(Gilbert Imlay)와 결혼하지 않은 채 첫딸을 낳는다. 그러나 임레이의 새로운 애인으로 파탄이 난 관계는 울스턴크래프트를 절망하게 만들었다. 그는 강물로 뛰어들어 목숨을 끊으려 했지만 다행히 선원들의 구조로 살아난다. 그리고 몇 개월 후에 울스턴크래프트는 영국인 아나키스트 철학자 윌리엄 고드윈(William Godwin)을 만난다.  울스턴크래프트와 고드윈은 평등한 관계를 실험하고 실천했으며, 두 번째 아이를 임신했을 때 그들은 결혼한다.

울스턴크래프트의 본격적인 저술 활동은 1788년부터는 런던의 저명한 출판업자 조지프 존슨이 발간하던 당대의 대표적인 급진주의 계열 잡지 『어낼리티컬 리뷰』에 서평, 번역문, 에세이 등을 기고하면서 시작된다. 토머스 페인, 윌리엄 고드윈, 윌리엄 블레이크 등 당대의 진보적 지식인들과 교류하면서 존슨의 출판사에 근무하는 동안 첫 소설 『메리』와 『창작 동화집』을 저술한다. 그 중 울스턴크래프트를 유명하게 한 책은 바로  1792년 출간한 『여권의 옹호』이다.

『여권의 옹호』는 큰 반향을 일으켰다. 세상에 이름을 알린, 울스턴크래프트는 프랑스 혁명과 공포정치를 직접 경험한 후 『프랑스 혁명의 기원과 진전에 관한 역사적·도덕적 견해』를 저술한다. 영국으로 돌아온 뒤 1796년에는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에서의 짧은 체류 동안 쓴 편지』를 펴낸다. 그러나 그의 저술 활동은 더 이상 계속될 수 없었다. 울스턴크래프트는 두 번째 딸을 출산한 뒤, 열흘 후에 불행히도 산욕열로 세상을 떠난다. 남겨진 울스턴크래프트의 딸 역시 세계 문학사에 이름을 남겼는데, 그는 바로 『프랑켄슈타인 : 현대의 프로메테우스(Frankenstein : or, The Modern Prometheus)』의 작가 메리 셸리(Merry Shelly)이다.

 

 

  • 이성(reason)에 남녀는 없다

 

1792년  『여권의 옹호』는 단 6주 만에 쓰였다. 울스턴크래프트는 1789년 혁명 후 프랑스 의회에 제출된 샤를 모리스 드  탈레랑 페리고르의 1971년 프랑스 제헌국민의회의 대한 보고서를 읽고 탈레랑의 교육 법안에 반대하는 이 책을 쓰기로 결심하였다. 교육 법안은 공화국의 모든 소년에게 국민교육을 시행한다는 내용을 담았지만, 교육의 대상에 소녀는 포함되지 않았다.

인간의 이성과 권리에 대해 그 어느 시기보다도 진보적이었던 18세기 계몽주의 사상가들은 여성에 대해서는 기존의 습속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18세기에 계몽주의가 부르짖던 ‘인간의 권리’라는 말 속에 인간은 오로지 ‘남성’만을 의미했다. 당대 가장 진보적이라 불린 로크나 루소 같은 사상가들조차도 여성은 자연적으로 남성보다 약한 존재이기에 남성과는 절대로 평등해질 수 없다는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진보적 남성 지식인들이 주장하는 인권의 범위 속에 여성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여성은 그저 남성의 보호 아래 보조적인 역할을 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이성이나 인권이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남성 지식인들 중 아무도 여성이 남성과 평등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던 것이다.

그러나 급진적 민주주의자인 울스턴크래프트는 인간에게는 누구나 이성과 불멸의 영혼이 있고, 이성을 지닌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계몽주의적 신념을 가졌다. 그 누구보다 계몽주의 사상사인 울스턴크래프트는 남성만을 인간으로 상정한 계몽주의의 한계를 계몽주의로 맞섰다. 울스턴크래프트는 책을 통해 남성 계몽주의 지식인들의 사회개혁 이론 속에 배제한 여성문제를 논쟁에 포함시키면서, 여성도 인간이며 당연히 누려야 할 인권이 있음을 주장한다.

책에서 울스턴크래프트는 여성을 남성의 보조적 역할로만 보는 기존 사회의 관념에 도전하고 비판한다.

“나는 루소부터 그레고리까지 여성교육과 풍속에 대해 글을 써온 모든 작가들은 분명히 여성을 더 부자연스럽고 나약한 존재, 그래서 사회에 더 무익한 존재로 만드는데 일조해왔다고 단언하는 바이다.”

울스턴크래프트는 여러 사상가를 비판하고 최초의 엄마인 이브를 나약하게 그린 밀턴을 향해 “유순한 가축 같은 존재로 살아가라니, 그런 모욕이 어디 있는가?”라고  반문한다. 또한 그는 여성을 이렇게 수동적인 존재이자 같은 인간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루소를 비롯한 많은 사상가들의 여성 비하의 풍조를 정면에서 조목조목 분석하며 문제시 한다.

특히 울스턴크래프트는 당시 베스트셀러였던 루소의 『에밀』을 “여성의 매력을 찬미하면서도 그들을 억압하는 저 해로운 책”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하고 “열등한 이성을 지닌 여성이 남성에게 종속되는 것이 곧 자연법”이라는 루소의 의견에 반대한다. 『에밀』에서 루소는 아이들의 교육에 대해 서술하면서 여자아이의 교육에 대해서도 다룬다. 에밀은 시민으로 성장을 고무 받는 반면 소피의 교육은 이후 성인으로 성장할 에밀의 배우자인 이상적 부인을 목표로 한다. 소피는 인내심과 수동성을 특징으로 지니고 주어진 환경을 변화시키기 보다는 적응을 잘하는 존재로 설명된다. 루소는 소피를 스스로 생각하기 보다는 자기 자신의 심신의 약함을 알고 자연의 목소리를 따르고 오직 사랑하는 남자의 생각에 자신을 의탁하는 존재로 제시한다.

처음에 『여권의 옹호』는 익명으로 출간되지만, 폭발적인 반응과 책의 유명세에 응답하며, 울스턴크래프트는 2판에서 자신의 이름을 밝힌다. 하지만 호응만큼이나 반발도 거세 울스턴크래프트를 ‘사색하는 뱀’, ‘페티코트를 입은 하이에나’라 부르기도 했다.

 

(하편에서 계속됩니다-)

서일- 잊혀진 어느 무장투쟁 사상가의 초상 [길 위의 우리 철학] – 9

김정철

 

1.

흔히 “강을 건넌다.”는 말은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난다는 뜻으로 쓰이는 경우가 많다. 이미 결정이 되어 돌이킬 수 없거나, 더 이상 물러날 수 없는 상황에서 마지막 수단으로 “강을 건넌다.”라고 말한다. 일제의 탄압 앞에 수많은 사람들이 독립을 위해, 생계를 위하여 국경의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갔다. 특히 함경도 지역은 예로부터 척박하고 살기 힘든 땅이었다. 조선시대에는 서울에서 2천리나 떨어진 이곳에 귀양을 보내거나 이 지역 출신 사람들을 차별한 사례도 보인다.

도리이 류조(鳥居龍蔵)가 1910년 무렵 경원 동림고성에서 촬영한 두만강의 모습. 이 무렵 많은 사람들이 이 강을 건너 만주지역으로 넘어갔다.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http://dryplate.museum.go.kr)

 

특히 경원(慶源)은 조선시대에 6진으로 개척한 최북단 지역이다. 이성계의 조상이 묻혀있는 곳이라 하여 “경사의 근원”이라는 뜻으로 붙인 이름인데, 두만강만 건너면 바로 중국으로 이어지는 국경에 위치한 탓에 군사적으로도 중요한 땅이었다. 그럼에도 이 지역은 “산세가 높고 척박하며, 춥고 곡식이 자라기 힘든 곳이었다. 가끔씩 호인(오랑캐)들과 소금이나 고기를 거래하여 겨우 삶을 유지하는데, 이마저 없으면 굶으며 떠돌기 십상”이라며, 갖가지 지원을 요청하는 상소를 올리기도 하였다.

 

일제의 지배 이후에도 이 곳은 여전히 살기 힘든 지역이었지만, 독립투쟁을 전개하고자 했던 이들에게는 기회의 땅이기도 했다. 생존을 위해 북간도로 건너간 사람들이 이미 마을을 이루어 살고 있었고, 국내에서 더 이상 활동이 어려워진 독립운동가들은 북간도로 넘어가 다음 기회를 노리고자 하였다. 무장투쟁을 주도한 다수의 인물들이 북간도 지역을 거점으로 삼았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2.

필자가 소개할 서일(徐一, 1881~1921) 역시 경원 지역 출신으로 두만강을 건너간 사람들 가운데 하나였다. 서일은 어렸을 때 한문을 배우고 함일사범학교의 전신인 경원유지의숙을 졸업한 뒤 교육활동에 종사하였다. 동서양을 가리지 않는 해박한 지식과 설명방식은 이 시기에 길러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1910년 국내활동이 어려워지자, 서일은 가족들과 함께 두만강을 건너가 명동학교를 세웠다. 그러다 1911년 무렵 대종교를 접하고 입교한 뒤 북로군정서의 전신인 중광단을 조직하였다. ‘중광(重光)’은 나철이 잊혀진 한얼의 정신을 “다시 드러내 밝혔다”는 뜻으로 쓴 말이다. 서일이 죽을 때까지 지속한 무장투쟁과 종교적 수행의 시작이었다.

백포(白圃) 서일(徐一, 1881~1921)의 초상화

 

그는 나철의 가르침을 빠르게 깨우치며 대종교의 중심인물이 되었고 교세 확장에 앞장섰다. 여기까지의 행적만 보면 서일은 교육자 출신으로 대종교에서도 그 능력을 인정받아 대종교를 이끄는 길로 나갈 듯하다. 실제로 나철이 죽은 뒤 대종교의 2세 교주 김교헌은 1919년 대종교의 도통을 서일에게 물려주려 하기도 했다. 하지만 서일은 이를 거절하고 5년을 보류하였다. 종교적 지도자가 되는 길보다 독립을 위한 무장투쟁이 더 우선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본이나 종교적인 권력을 세습하려고 애쓰는 오늘날 보기에는 참으로 낯선 광경이다.

 

우리가 가장 잘 알고 있는 무장투쟁의 성과가 바로 청산리 전투이다. 서일은 이 청산리 전투를 주도한 북로군정서의 총재였다. 북로군정서는 서일이 만든 중광단에서 시작된 조직이었다. 여기에는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김좌진과 이범석 등이 소속되어 있었는데, 당시 만주 지역에서 활동하던 독립군 중에서도 최정예로 꼽혔다.

 

놀라운 것은 서일이 무장투쟁에 임하던 중에도 종교적 수행과 교리 연구를 병행했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그는 군영 안에 수도실을 따로 설치하여, 매일 수행과 연구를 거듭했다고 전해진다. 그 성과는 <오대종지강연五大宗旨講演>(1914) <회삼경會三經>(1917) <삼문일답三問一答>(1921) <진리도설眞理圖說>(1921) <구변도설九變圖說>(1921) 등의 저술로 나타났다.

 

1918년 당시 편집된 대종교 경전 <사책합부四冊合附>를 살펴보면(「사책합부(四冊合附)」, 『국학연구』, 국학연구소, 2012 참조) 기본 경전인 <신사기神事記>, 나철이 지은 <신리대전神理大全>을 제외하고는 <회삼경會三經>과 <도해삼일신고강의(圖解三一神語講義)>가 거의 대부분의 분량을 서일의 저작이 차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분량만으로 그 중요도를 따지기는 어렵고, 서일의 저작이 기본 경전들에 대한 상세한 주석의 성격을 지닌다는 점도 감안해야 한다. 하지만 이것은 서일에게 뛰어난 교리 해석 능력은 물론 교육활동에 매진했던 이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 아니었을까? 서일이 그만큼 대종교의 교리를 명확히 이해했고, 완성도 있는 저술을 했다는 뜻이다.

 

3.

그렇다면 대종교는 사상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을까? 먼저 대종교를 다시 드러내 밝힌[重光] 나철은 <신리대전>을 지어 최고의 존재인 한얼이 이 세계의 인간과 어떤 관계로 연결되어 있는지 ‘삼일三一’의 원리를 통해 밝혔다. 곧 나철은 한얼(一)과 인간이 하나가 될 수 있는 원리를 드러낸 것이다. 나철의 중광은 사상적으로도 의미가 크다. 개인적인 깨달음이나 외래 사상에 의존하지 않고 역사적으로 가려져 있던 고유정신을 ‘재발견’해 낸 점은 대종교 특유의 주체의식을 잘 보여준다.

 

서일의 <회삼경> 역시 나철이 드러낸 주체의식을 더욱 구체화시킨 결과였다. <회삼경>에 대해 대종교의 3세 교주 윤세복은 “철리(哲理)를 인생철학으로 집대성한 책”이라고 평하였는데, 그의 말대로 <회삼경>은 인간이 왜 이 세계에서 방황하고 길을 잃게 되었는지, 또 어떻게 하면 다시 한얼과 하나가 될 수 있는지 당시의 말로 풀어서 설명하고 있다. 곧 한얼과 하나가 될 수 있는 회삼귀일(會三歸一)의 구체적 과정을 제시한 것이다.

 

<회삼경>에서 서일은 인간을 느끼고[感] 숨쉬며[息] 부딪히는[觸] 세 길(三途) 위에서 방황하며 고통 받는 존재로 설명하였다. 그는 이러한 방황과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은 오직 한얼의 정신을 회복하는 것뿐이라고 이해했다. 한얼 정신의 회복이란 곧 우리가 어디로부터 나왔는지에 대한 깨달음을 말한다. 깨달음은 감정을 절제하고(止感), 호흡을 조절하며(調息), 신체의 정결함을 유지하는(禁觸) 개인적인 세 가지 수행법에 그치지 않는다. 역사적으로는 세 검(三神)을 거쳐 이 세계를 창조한 최고의 존재인 한얼(一)로 향하고, 문화적으로는 외래의 정신인 세 나(三我), 곧 유불도(儒佛道)를 아우를 수 있는 근본정신인 한얼(一)로 향하게 된다.

 

이렇게 <회삼경>에 드러난 대종교의 주체의식은 매우 중요하다. 일제의 침략에 나라를 잃고, 외래의 각종 사상이 범람하던 무렵 서일을 비롯한 대종교인들은 주체의식을 외부가 아닌 근원적인 정신에서 찾고자 하였다. 대종교 계열의 지식인들이 역사연구(김교헌)와 한글연구(주시경, 김두봉)에 적극적이었던 이유도 대종교 특유의 주체의식과 관련이 깊다고 할 수 있다.

 

서일이 일제와의 치열한 무장투쟁 속에서도 교리 연구를 병행해야만 했던 배경은 무엇일까? 독립군을 양성하고 운용하는데 있어 대종교의 교세 확장은 매우 중요했다. 철저히 무장한 일제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군비와 무기를 꾸준히 조달해야 했고, 독립군을 양성하는 과정에서도 강력한 주체의식을 고취할 필요가 있었다.

 

대종교의 교세가 불과 몇 년 사이에 크게 확장될 수 있었던 이유는 대종교의 주체의식 속에 조국의 독립과 새로운 민족국가의 건설이라는 분명한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만주는 단군이 처음으로 민족을 다스린 지역이나 다름없었기에 이 지역 주민들은 대종교에 자발적으로 협력할 수 있었다. 실제로 서일의 활동 시기는 대종교의 전성기로 표현된다. 서일의 교리 연구 병행도 이러한 맥락에서 평가할 수 있다.

 

4.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의 승리 이후 일제의 토벌작전은 더욱 집요해졌고, 만주지역의 독립군들은 서일과 홍범도를 주축으로 ‘대한독립군’을 구성하여 시베리아로 떠났다. 이때 노령 자유시에는 대한독립군단 외에도 여러 독립군 집단이 집결해있었는데, 러시아는 자유시에 집결한 독립군들에게 무장해제를 요구했다. 이를 거부하는 과정에서 독립군 내부에서도 군통수권 갈등이 일어났고, 결국 공산당에 포위되어 사살되거나 포로로 잡혔다. 대한독립군의 상당수를 잃자, 서일은 조직을 재정비하려고 했으나 밀산에서 다시 마적의 습격을 받으며 결국 자결하고 말았다. 무장투쟁과 종교적 교리 연구를 쉼 없이 병행했던 서일은 이렇듯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였다.

중국 길림성 청파호에 있는 대종교 삼종사 묘역. 나철(羅喆), 김교헌, (金敎獻) 서일(徐一)이 안장되어 있다.

(출처: 통일뉴스 http://www.tongilnews.com/)

 

이 모든 일들은 서일이 대종교에 입교한 뒤 불과 10년 사이에 일어났다. 북로군정서의 총재로서 무장투쟁의 선봉에 섰던 모습과 대종교의 교리 연구와 교세 확장에 힘쓰던 두 가지 모습은 지금 생각해보면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서일이 대종교의 주체의식을 몸소 실천한 결과였다.

 

불과 100년 전에 있었던 일임에도 오늘날 우리가 서일을 직접 접할 수 있는 공간은 중국 길림성 청파호에 있는 삼종사 묘역(사진) 뿐이다. 경전의 형태로나마 그의 목소리가 전해진 것을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대종교의 존재 자체가 낯설어진 현실은 안타깝지만, 서일이 보여준 사상가로서의 면모와 실천적 행보는 지금 생각해도 놀라울 따름이다.

 

40년 남짓한 세월동안 서일은 같은 시기 일제강점기를 살았던 지식인들과 비교해보더라도 지극히 어려운 길만을 선택하며 살아갔다. 처음 가족들과 두만강을 건너는 길에 서일은 앞으로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고 있었을까? 매순간 거리낌 없이 어려운 선택과 실천의 길을 걸어간 그의 모습에, 실천의 순간마다 머뭇거리며 방황하는 자신이 부끄러워진다.

 

기고자: 김정철(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현재 17세기 조선의 예학사상과 관련된 박사논문을 준비하고 있다. 음악 없이는 하루도 살지 못하며, 역사와 문화 전반에 관심이 많다.

 

블로그진 ‘길 위의 우리철학’은 한국현대철학을 함께 공부하고 토론하는 한국철학사상연구회의 ‘한국현대철학분과’에서 만든다. ‘길’은 과거로부터의 역사이기도 하고, 오늘의 삶이기도 하고, 미래로 열린 희망이기도 하다. 그 위에 서서 우리는 언제나 어느 길이 더 나은 길인지, 바른 길인지 생각하고 선택한다. 그렇게 ‘길’은 지향志向이기도 하고, 그래서 철학이기도 하다. 한국현대철학분과는 앞으로 월 2회 블로그진을 통해 우리철학이 서 있었던 길, 우리철학이 만들었던 길을 이야기 하려고 한다.

 

  1. 광장에 서다 – 촛불의 승리 그리고 박정희 시대의 종언 [길 위의 우리 철학] -1 : 박영미
  2. 대통령 탄핵, 그 후 – 박은식(朴殷植)의 개혁론, 독립운동, 임시정부 [길 위의 우리 철학] – 2 : 이지
  3. 송곡의 길가에서 최시형을 만나다 [길 위의 우리 철학] –3 : 구태환
  4. 붉은 얼굴의 경계인(境界人), 신남철 [길 위의 우리 철학] – 4 : 이병태
  5. 어린이를 노래하는 방정환을 만나다[길 위의 우리 철학] – 5 : 김세리
  6. 국가의 철학, 철학의 부재(不在), 안호상 – [길 위의 우리 철학] – 6 : 박민철
  7. 정치의 중심에서 주변을 배회한 타고난 근대인 몽양(夢陽) 여운형 [길 위의 우리 철학] – 7 : 유현상
  8. 우리, 나라, 사랑 – 윤치호와 관련한 애국에 대한 단상 [길 위의 우리 철학] – 8 : 배기호

 

 

 

 

 

 

 

 

 

[안내]한철연 2016년 가을 제51회 정기학술대회(12월3일,토)

(사)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16년 가을 제51회 정기학술대회

주제: 21세기 유교의 향방―탈경계시대, 유교 부흥과 전유
일시: 2016년 12월 3일 (토) 오후 12:30 ∼ 6:00
장소: 경희대학교(서울) 본관 2층 대회의실
 

  안녕하세요? 한철연 학술2부입니다.
  이제 가을의 막바지에서 어느 때 보다 황량하게 느껴지는 겨울의 문턱에 서 있습니다. 올해도 어김없이 한철연 가을 정기학술대회(심포지엄)가 열립니다. 이번에는 ‘21세기 유교의 향방─탈경계시대, 유교 부흥과 전유’라는 주제로 동양철학 연구자들의 연구 성과를 발표하고 토론하는 장을 만들었습니다.

  20세기 전반기, 전통사회의 토대였던 유교는 몰락의 길을 걷는가 싶었으나, 20세기 후반 유교는 동아시아에서 열띤 열기 속에서 부활하였습니다. 하지만 유교가 현대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할 것인가에 대한 의미 있는 토론보다 ‘동아시아의 특수한 근대화’를 설명하는 논리, 또는 정당화의 논의에 머물렀습니다.

  90년대 아시아적 가치 논쟁을 필두로 세계적인 관심의 대상이 되기도 했으나, 국제적인 호소력을 갖기에는 미진합니다. 하지만 최근 중국의 부상과 더불어 ‘유교’는 새로운 화두로 등장하고 있다. 이는 중국과 한국 모두에 해당하는 이야기입니다.

  이에 (사)한국철학사상연구회는 과거 80년대 중국에서 일어난 문화열에 관한 객관적 조망과 현대신유가에 대한 비판적 토론을 한 바 있습니다. 그러한 연구의 연장선상에서 이제 다시 소리 없이 확산되어가는 탈경계시대 ‘유교’의 다양한 흐름과 방향을 점검하는 학술대회를 개최하고자 합니다.

  아무쪼록 부디 많은 회원들께서 참석하시어 우리의 학술 얘기와 지금의 현실 얘기를 같이 논할 수 있는 치열한 토론 자리를 만들어주시길 바라마지 않습니다.

  학술2부 드림

 

학술대회 일정

일 시 발 표 및 내 용 비 고
제 1부

12:30~

14:30

12:50~

13:00

개회사

축사

회장

이사장

13:00~

13:30

1부 다시 유교의 시대가 도래하는가?

발표주제 1

21세기 중국, 제국인가 민주인가-소프트 파워와 모더니티의 문제

발표자: 조경란(연세대학교)

논평자: 이지(이화여자대학교)

1부 사회자 :

이병태(경희대학교)

13:30~

14:00

발표주제 2

 21세기 유교,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경계를 넘을 수 있는가?      – 어울림의 공동체 사회 건설의 논리를 중심으로

발표자: 이철승(조선대학교)

논평자: 김원열(한국철학사상연구회)

14:00~

14:30

발표주제 3

  유교와 현자 지배 체제 – 현대 중국의 정치 체제

발표자: 손영식(울산대학교)

논평자: 김동민(한밭대학교)

  14:30~

14:40

쉬는 시간  
제 2 부

14:40~

16:50

14:40~

15:10

2부 탈경계시대의 유교, 회고와 전망

발표주제 4

  유학과 서양철학의 만남은 어떻게 이뤄졌나?

발표자: 박영미(한양대학교)

논평자: 김재현(경남대학교)

2부 사회자 :

박민철(건국대학교)

15:10~

15:40

발표주제 5

  탈경계시대, 여성주의 유교는 가능한가?

발표자: 김세서리아(이화여자대학교)

논평자: 한영희(전북대학교)

15:40~

15:50

쉬는 시간
15:50~

16:20

발표주제 6

  유학과 서학: 유학의 변용과 확장

발표자: 김선희(이화여자대학교)

논평자: 김갑수(호원대학교)

16:20~

16:50

발표주제 7

 안회의 눈물 – 도통(道統)은 정말 계승되었는가?

발표자: 김시천(숭실대학교)

논평자: 심의용(숭실대학교)

16:50~

17:00

쉬는 시간  
종합

토론

17:00~

18:00

전체 집담회 및 종합 토론 종합토론 사회자:

김교빈(호서대학교)

종합토론 이후에는 약 30분 가량 총회가 있을 예정입니다.

 

오시는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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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시는 길 위치와 교통편 자세한 안내(홈페이지 접속)

http://www.khu.ac.kr/university/campus/seoulcam_location.do

주차료 : 학회, 행사 참석자 1,500원/4시간

오딧세이적 주체, 오이디푸스적 주체, 사드적 주체: 영화 ‘아가씨’와 주체의 담론들 [나인당케의 단상들]

박찬욱 감독의 영화 <아가씨>에서 우리가 만날 수 있는 것은 상이한 형태의 주체들이다. 영화는 각기 다른 권력관계 속에서 자신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주체들의 관계의 형태들을 보여줄 뿐 아니라, 이 관계들이 전복되며, 하나의 주체가 다른 형태의 주체로 거듭나는 과정, 즉 주체의 고양 과정 역시 보여준다. 즉 영화 곳곳에는 주체의 위치변경과 고양을 암시하는 장치들이 곳곳에 배치되어 있다. 이런 점에서 <아가씨>는 한 편의 성장드라마이자, 계몽주의 시기에 연원을 두고 있는 ‘교양(Bildung)소설’의 현대적 버전으로 읽히기도 한다. 다만 이러한 주체의 고양의 귀결이 주인공이 속한 하나의 세계(한 평생 밖으로 나가보지 못한 집)의 붕괴와 성공한 탈주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영화가 관객에게 주는 즐거움은 극대화된다.

 

여러 가지로 <아가씨>의 전편과 같은 느낌을 주는 <친절한 금자씨> 역시 이러한 주체의 고양을 화두로 던진다. 그런데 금자의 변신이 배신과 감옥생활 속에서 얻은 스스로의 깨우침에 의한 것이라면, 그리고 복수라는 달성해야 할 분명한 목적에 의한 것이라면, <아가씨>에서 두 여성의 각성은 서로가 서로의 삶을 관찰하고 이해하는 과정을 통한 것이다. 즉, 주체의 각성이 가능한 조건에 대한 물음은 주체들 사이의 새로운 관계설정에 대한 물음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친절한 금자씨>에서 새로운 관계설정은 금자가 자신의 딸 앞에서 죄를 고백함으로써, 즉 내러티브의 결과로 도달한 지점이다. 그러나 <아가씨>에서는 이러한 관계의 전도가 그 자체로 사건을 촉발시킨다.

 

이 점은 서로를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한 희생물로 대하던 두 사람이 어떻게 이 관계를 전도시키고 소통에 이르렀는가에 대한 고찰 속에서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질문을 이렇게 요약해 보자. 오딧세이적 계략의 두 주체는 어떻게 타자에게 자신을 개방하는가?

 

오딧세이적 주체

 

호메로스의 <오딧세이아>에 등장하는 신화 속 오딧세이의 모험과 귀향 과정을 “주체의 근원사”로 파악하여, 그 안에서 근대적 주체의 원형을 발견하는 것이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계몽의 변증법>, 그 중에서도 아도르노가 작성한 오딧세우스에 대한 보론의 핵심이다. 그에 따르면 오디세우스는 자신의 목적(이타카로의 귀향)을 달성하기 위해 자신의 지략을 도구적 합리성으로 사용하는 근대적 부르주아 주체의 원형이다.

 

02691_D잘 알려진 시레네의 노랫소리에 관한 에피소드에서 오딧세우스는 부하 병사들이 시레네의 유혹을 듣지 못하도록 그들의 귀를 밀랍으로 막은 뒤 자신은 배의 돗대에 몸을 묶어 이 유혹을 통과한다. 키르케의 유혹과 외눈박이 거인 폴리페모스의 위협을 물리치기 위한 과정에서도 오딧세우스는 지략을 발휘해 위기를 극복한다. 자신의 지략을 통해 상대를 물리치고 목적을 달성하는 주체의 모습 속에서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부르주아적 차가움(bürgerliche Kälte)”의 원형을 발견한다. 오로지 자신의 이익을 실현하기 위해 타자를 희생시키는 근대적 주체의 유아론적인 태도 속에는 먹잇감을 희생시켜 자신을 보존하려는 맹수의 냉혹함이 내포해 있다. 이타카에 도달한 오딧세우스는 아들과 함께, 자신의 아내를 유혹하던 구혼자들을 잔혹하게 살해한다. 물론 서사시인 호메로스는 이 과정을 모험담이자 영웅담으로 미화한다. 부르주아적 주체의 영웅담을 ‘기업가 신화’로 포장해 미화하는 것은 오늘날에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눈에 간계를 사용해 목적을 달성하는 오딧세우스의 모험담은 그 자체로 근대 부르주아 주체의 냉혹함의 원형일 뿐이다.

 

히데코와 숙희는 모두 이루고 싶은 자신의 이상을 위해 상대를 희생시키려는 계략의 주체였다. 숙희는 히데코를 백작과 결혼시킨 뒤 정신병원에 보내 그녀의 재산 중 일부를 가로채 신분상승을 이루려는 목표가 있었다. 히데코는 거꾸로, 그러한 숙희를 속여 자기 대신 병원에 가두고, 자신은 숙희의 이름을 빌려 이모부 코우즈키의 집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삶을 누리려고 했다. 둘은 모두 백작이라는 고리의 매듭과 공모하여 서로를 희생시키고자 했던 오딧세우스적 계략의 주체들이었던 것이다. 히데코가 백작과 결혼하도록 앞장서는 숙희의 모습과, 숙희의 어리숙함을 확인한 뒤 안도하는 히데코의 모습은 그러한 계산적 주체의 냉혹한 모습을 드러낸다.

 

이 계략적 태도의 반전은 어떻게 이뤄지는가? 아가씨와 하녀. 서로 양 극을 이루는 두 주체는 서로의 모습에서 자기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 일찍 부모를 잃고 외톨이로 살아가는 히데코를 씻기고 입혀서 아름다운 공주로 만드는 것에 보람을 느낀 숙희는 히데코의 어머니가 된다. 그녀는 모든 것을 가진 히데코에게서, 아무 것도 갖지 못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 소문난 미인이었던 어머니의 사진을 보여주며 ‘난 엄마만 못하다는데…’ 하고 하소연하는 히데코의 모습은 전설적인 소매치기였던 어머니의 모습을 소문으로만 기억하는 숙희 자신의 모습의 투영이다. 모든 지각은 투사 과정이라고 <계몽의 변증법>의 저자들은 말한다. 히데코의 모습에 자신을 투영한 숙희의 마음은 그러나 대상을 자기화하려는 동일성원칙의 주체와는 다르다. 그것은 오히려 상대의 아픔을 자신의 것으로 알고 함께 아파하는 미메시스적 주체의 모습에 가깝다.

 

‘난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나봐’라는 히데코에 말에 ‘어머니는 아가씨에게 널 낳고 죽으니 괜찮다고 하실 거에요’라고 말해주는 숙희. 이 말은 그 자신이 여두목에게 직접 들은 말이기도 하다. 자신의 아픔을 위로해주는 말로 상대를 위로하는 숙희와, 그러한 위로의 말로 상처를 달래는 히데코의 동병상련은 이 두 주체가 서로를 희생물로 보지 않고 또 다른 나의 모습으로 느끼는 계기가 된다. ‘넌 내가 불쌍하니? 난 네가 불쌍해’ 하고 자살을 시도하던 히데코는 말한다. 한 쪽이 다른 한 쪽을 연민하는 관계는 불행하다. 그러한 관계는 연민하는 자와 연민을 받는 자 사이의 위계를 전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로가 각자의 아픔에 공감하면서 이뤄지는 아픔의 공유는 둘의 관계를 수평적으로 만든다. 연대는 그러한 수평적 관계에서 비로소 가능하다.

 

두 주체는 이제 여성적 연대를 이룬다. 계략을 통한 주체에서 연대하는 주체로 고양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연대의 계기는 상대의 고통에 대한 연민, 그리고 타자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이해하는 공감이다. 그러나 두 주체의 관계는 공감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두 여성은 자신들이 각기 다른 남성적 주체들 – 이모부와 백작 – 의 또 다른 희생물이라는 자각에 이른다. 이제 이 상호 연대는 또 다른 주체들에 대한 대항의 관계로 전화된다. 고통받는 자들의 연대는 그러한 고통을 자신의 양분으로 삼는 다른 주체들의 지배에 대한 거부의 원천이다. 이 또 다른 주체들, 그들은 극도의 거세컴플렉스를 지배본능으로 전화시킨 남성들이다.

 

오이디푸스적 주체

 

IngresOdipusAndSphinx잘 잘려져 있듯이,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유아가 겪는 최초의 성애가 어머니를 대상으로 한 근친적인 성격을 가지며, 아이는 어머니를 소유한 아버지의 존재로부터 자신의 존재 위협을 느끼고, 이 관계를 내면화함으로써, 즉 아버지의 지배권을 인정함으로써 오이디푸스기를 극복한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오이디푸스적 주체는 그의 근원적 사랑의 대상을 상실했다는 결여감을 무의식 속에 간직하고, 내면화된 아버지의 권위(초자아Überich)에 복종함으로써 자신의 욕망(이드Es)을 희생시켜야 하는 불완전한 존재다.

 

프로이트는 남자 아이와 여자 아이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오이디푸스를 극복하는 과정을 서술한다. 그에 따르면, 남자 아이는 처음에는 여자들도 자신과 같은 남근이 있을 것이라고 가정한다. 그러나 우연히 보게 된 다른 여자아이의 성기에 남근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 뒤, 아이는 자신의 남근도 거세될 수 있다는 공포를 겪는다. 아버지의 지배질서는 이러한 거세위협을 가하는 존재로 체험된다. 이는 아이가 그토록 쉽게 원초적 사랑의 대상인 어머니를 포기하고 아버지의 규범을 받아들이는 이유로 설명된다. 오이디푸스적 주체는 동시에 거세위협을 겪는 주체이며, 그러한 위협 앞에 자신을 희생시킨 주체다. 이 위협의 공포를 해소하기 위해 아이는 스스로 아버지가 되는 길을 택한다. 즉 스스로 지배자의 위치에 오른다면 남근이 거세되지 않을 것이라는 상상 속에서 자신을 아버지와 동일시하게 된다. 남성적 리비도가 지배본능과 결합하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반면, 여자 아이는 자신에게는 없는 남근을 남자는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된 뒤 그것을 부정하거나 거세 위협에 시달리지 않는다. 그들은 이 사실을 즉각적으로 수용하고 남근선망에 빠진다. 즉 남자가 되고 싶고, 남근을 갖고 싶다는 불가능한 소망을 갖게 된다. 이제 아버지에 대한 사랑과 맞물려, 여아는 자신을 결여된 존재로 자각한다. 이는 여자 아이가 수동적인 존재로 자라나는 이유로 설명된다.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서, 신경증의 발병은 이 두 콤플렉스, 즉 거세콤플렉스와 남근선망의 극복과 관련되어 있다.

 

왼 손의 다섯 손가락이 모두 잘리고, 오른 손에도 구멍이 뚫리는 극한의 고통을 경험하고 죽음에 이르는 최후의 순간 백작의 입에서 발화된 말은 “자지를 지키고 죽을 수 있어서 다행이다”는 것이다. 이 순간은 실제로 히데코의 이모부가 그의 성기를 거세시키기 직전에 벌어진 상황이다. 남근을 지키고 죽는 것이 다행이라는 그의 말 속에서 백작은 극단적인 거세콤플렉스를 겪는 오이디푸스적 주체로서 자신의 모습을 보여준다. 박찬욱의 이전작 <올드보이>의 오대수 역시 혀를 희생시킴으로써 남근을 지킨 인물이다. 누나의 죽음에 복수하려는 이유진이 그에게 ‘이유진의 자지가 아니라 오대수의 혀가’ 자신의 누나를 (상상) 임신시켰다고 분개하자, 오대수는 그에게 무릎을 꿇고 자신의 혀를 스스로 절단한다. 이처럼 누나를 임신시킨 ‘상징적’ 남근을 제거함으로써 그는 자신의 실제적 남근을 지킬 수 있었고, 딸인 미도와의 근친적 관계를 이어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백작과 오대수는 모두 남근을 지키려는 남성 주체들의 거세공포를 재현한다.

 

백작의 거세공포는 거꾸로 그로 하여금 자신의 남근이 갖는 ‘권위’에 집착하게 만든다. 숙희를 협박할 때 그는 그녀의 손을 자신의 성기에 강제로 접촉시킨다. 이것은 자신의 말에 ‘남근’이라는 권위를 부여하기 위한 것이었다. ‘남근에 맹세하건데’ 나의 말은 장난이 아니라는 위협이다. 그는 여성의 남근선망을 교묘하게 이용한다. 그러나 숙희는 그의 위협에 순종하지 않는다. 그녀는 그에게 ‘어린애 장난감 같은 X대가리’를 치우라고 함으로써 이 남근의 권위를 조롱해버린다.

 

히데코의 이모부 코우즈키 역시 남근의 형상을 자신의 권위의 지표로 삼는다. 남근의 권위를 상징하는 뱀의 형상은 넘어서는 안 될 금기를 지시한다. 이 비밀 장서관에서 행해지는 일들을 알려고 해서도 안 되고, 여기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자의에 의해 도망쳐서도 안 된다. 뱀 조각은 넘지 말아야 할 한계를 지칭한다. 뱀은 그의 장서관에서 행해지는 음란한 독서회를 지키는 수호신이다. 히데코와 함께 도주하는 날, 숙희는 히데코가 강제로 낭독해야 했던 책들을 내다버리고 이 뱀 조각을 잘라버린다. 그것은 오이디푸스적 주체들이 만들어 놓은 남근의 권위와 금기에 대한 도전이며, 동시에 ‘남근선망은 없다’는 것을 반항적 행위로 표현한 것이다.

 

영화의 엔딩 장면에서 두 여성은 남성의 고환을 상징하는 방울들을 주고받으며 사랑의 유희를 나눈다. 권위와 금기를 상징했던, 목숨을 걸고 지키고자 했던 남근은 이제 남성들의 질서에서 벗어난 두 여성들의 유희의 대상이 된다. 남근은 선망의 대상이기를 중단하고, 그 권위적 역할은 상대화되며 가치저하된다. 이제 두 여성은 오이디푸스적 주체를 극복하는 안티고네적 주체로 거듭난다. 오이디푸스의 (누이이자) 딸인 안티고네는 테베의 새로운 왕 크레온이 내린 금기, 즉 자신의 오빠 폴리네이케스의 시신을 매장하지도, 장례를 치러주지도 말라는 명을 어기고 그의 시신을 매장한다. 지배자의 금기를 어긴 안티고네의 행위는 ‘인간의 법’과 ‘신의 법’의 이항대립이라는 사고를 낳았다. 인간의 법은 죽은 자에 대한 원한으로 그의 시신 매장을 금지했지만, 신이 내린 법은 사랑이라는 원초적 감정이 실정법보다 우선시되어야 한다는 계명을 뜻한다. 이 계명을 지키기 위해 안티고네는 죽음을 자초한다. 히데코와 숙희는 남근의 권위가 부여하는 법을 어김으로써 신의 법을 실행에 옮긴 안티고네의 후예들임을 드러낸다.

 

‘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 나의 타마코, 나의 숙희.’ 귀족 집안의 상속녀 히데코의 삶을 망치는 것은 동시에 그녀를 구속에서 해방시켜 주는 행위이기도 하다. 좁은 삶의 울타리에서 벗어나기 위한 시도는 남근이 부여한 금기와 질서에 순응해 왔던 삶을 붕괴하는 것과 동일한 일이다. 그런데 이러한 붕괴는 기존의 주체가 새로운 주체로, 즉 자기 욕망에 대한 무한한 긍정의 주체로 탄생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무한한 욕망을 즐기는 사드적 주체 말이다.

 

사드적 주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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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우즈키의 비밀 장서관에서 열리는 낭독회에서는 사드를 흉내낸 일본인 작가의 포르노 소설이 낭독된다. 코우즈키는 실제로 사드의 <소돔 120일>에 등장하는 사악한 주인공들을 연상시킨다. 자신의 욕정을 실행하기 위해 닥치는대로 살인을 하고 음모를 벌는 사드의 인물들과, 아내를 버리고 새로 맞은 일본인 아내를 죽음에 이르게 하며 조카를 자신의 욕망에 동원하는, 그리고 관음증적인 성적 도착에 탐닉하는 코우즈키는 유사한 모습을 보인다. 그는 선과 악의 경계 따위는 신경쓰지 않는, 원하는 것은 어떤 방식으로든 얻으려 하는, 악덕의 관능을 예찬하는 사드적 인물이다. 그의 대저택과 비밀장서관은 <소돔 120일>에서 6개월 간 향락과 폭력의 잔치가 벌어진 블랑지스 공장의 대저택을 연상시킨다.

 

<소돔 120일>은 사드가 12년간의 감옥 생활중 쓴 책으로, 이 책에서 묘사된 악덕과 폭력, 광기, 온갖 종류의 도착적 성행위들은 악덕을 지지하고 도덕에 분개했던 작가 사드의 상상력의 결정체였다. 그러나 1789년 프랑스 혁명이 발발하고, 바스티유 감옥이 습격을 받아 그가 풀려난 뒤, 그는 좀 더 절제되고 명료한 언어로 자신의 사상을 가다듬는다. 그의 성과 정치에 대한 관점이 집약적으로 서술되어 있는 <규방철학>에서 사드는 프랑스혁명이 몰고 온 악습에 대한 대대적인 철폐작업이 일상을 구속하는 구 시대의 성도덕에 대한 폐지와 해방으로 한발 더 나아가야 함을 강조한다.

 

생땅쥬 부인의 별장 규방에서 벌어지는 향락은 이제 새로운 시대 리베르탱이 지녀야 할 철학적 입장을 배우고 그것을 몸소 구현하기 위한 교육의 역할을 맡는다. 구 시대가 강요하는 성도덕에서 벗어나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는 데 모든 힘을 기울이라는 돌망세와 쌩땅쥬 부인의 가르침은 새 시대의 리베르탱들에게 전달하는 사드의 호소였다. “한 마디로, 성교하고 성교해라. 바로 그것이 네가 세상에 나온 이유다. 네가 가진 힘과 의지 말고는 네 쾌락에 구속될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새 시대의 도덕은 성과 욕망을 규제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욕망이 제기하는 충동과 그 흐름이 곧 도덕이 되는 것이다. 이 도덕은 인간이 종교의 허울을 쓰고 만들어낸 관습이 아니다. 새로운 도덕, 즉 향유하라는 도덕은 자연이 우리에게 욕망을 부여하고 그것을 실현할 신체적 에너지를 줌으로써 명령한 우리의 존재 목적을 실현하는 일이다. 즉 자연이 부여한 목적이 바로 입법의 원리가 된다.

 

집 밖으로는 한 번도 나가본 적이 없는 히데코는 <규방철학>에서 모친의 강요로 수녀원에 가야 했던 소녀 으제니를 닮아 있다. 돌망세와 생땅쥬 부인의 교육을 받는 학생 으제니는 넘쳐나는 호기심과 놀라운 습득력으로 그들의 스승들을 들뜨게 만든다. 히데코는 숙희의 제자가 되어 그녀에게 성적 욕망을 해소하는 법을, 그리고 사랑하는 법을 배운다. 자신의 욕망을 위해 스스로를 기꺼이 ‘나를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에게 내맡기고 탈주를 실행하는 히데코는 자신의 충동 외에 그 어떤 도덕적 규칙에도 순응하지 말라는 사드의 계명에 충실한 사드적 주체다. 즉 <아가씨>에는 두 가지 사드적 주체가 등장하는 것이다. 하나는 <소돔 120일>의 사드적 주체인 코우즈키이고, 다른 하나는 <규방철학>의 사드적 주체인 히데코다. 이들 중 누가 진정한 사드적 주체인가라는 물음을 던지는 것은 의미가 없을 것이다. 사드는 도덕적 판단에 무관심했던 인물이고, 누가 ‘진정한’ 주체냐는 식의 물음에는 하품을 했을 것이다.

 

다만 우리가 어떤 욕망의 주체를 긍정할 것인가 하는 물음은 던져볼 수 있을 것이다. 히데코와 숙희는 오딧세이적 계략의 주체에서 연대하는 미메시스적 주체로, 오이디푸스적 남근선망을 거부하는 안티고네적 주체로 고양되는 과정에서 으제니의 모범에 따라 자신의 욕망을 긍정하는 사드적 주체에 도달한 어떤 주체의 전형을 보여준다. 이런 의미에서 <아가씨>는 주체의 담론에 대한 영화로 이해될 수 있다.

 

섦 [별과 달과 바람의 노래]-17

 길

김설미향(그림책 작가)

한없이 낯선, 한없이 내려가는 그 길을 가면
체를 걸러 면을 만들라고 하고
한없이 위를 보라한다.
위를 보면 길을 걸을 수도 없다.
아래를 보고 한발한발 걸을 때
구멍송송 걸른 체 사이로 버려질 것은 버려지고
사이로 들어오는 바램은 얼굴에 맞닿아 바람을 일으킨다.
그 곳에는 굳이 채워야 할 것도
내세워야 할 것도 필요하지 않다.
바람 한점 없는 굽은 땅에
저절로 바람은 분다.
바람은 항상, 언제나 기다리고 있다.
내가 머무는 곳에, 내가 가는 곳에.

2016-6-29

작가의 블로그 http://dandron.blog.me

이시대와철학2016-6-29 길 copy


작업노트

아직 푸른 잎이 제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고 앙상한 나무를 마주할 때
나무의 선을 따라 그려지는 가지의 선은 사람들의 발길 닿는대로
만든 길과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가지는 조금씩 조금씩 변화하여 무수한 길을 만들어내듯
우리의 삶 깊숙이 들어가 있는 인위가 만들어낸 복잡한 공간 현상에서
새로운 곳으로 떠나 자연이 숨쉬는 산을 오르고 내려가며
아무것도 없었을 그 곳에 많은 사람이 밟고 지나갔을 새 길이 다져져 있음을 봅니다.
자연의 한숨 한숨과 이웃하며 사람들의 공간을 내려다보면
삶을 너무 틀에 가둬 살았다는 생각이 들고 가슴 한 곳의 무거움이
어느 한 순간 가벼움으로 바뀝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참으로 시원해지는 순간입니다.
어렵지 않게 스스로의 발이 가는 길을 바라보기도 하며
노래하는 새들을 바라보기도 하며, 척박한 공기에 어느 순간 바람이 불어오면
어지럽게 춤을 추는 나무를 보기도 하며, 세상의 소리도 듣기도 하며
바람의 노래를 듣기도 하며 자신이 만들어가는 길에서 가는 방향에 따라
새롭고 다른 형태의 길이 만들어지는 것을 보면 밟아가는 그 모두의 여정은
아름다운 길이 되는 것 같습니다.

영화 [나쁜나라] 공동체 상영 후기

영화 [나쁜나라] 공동체 상영 후기

이지영(학술1부 부장)

 

다시 4월이 왔다. 4월은 얼었던 황무지에서 생명을 키워내는 잔인한 달이라고 영국의 한 시인은 노래했다. 새로운 생명이 움트는 찬란한 일에는 고통이 따르는 법이다. 그러나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침몰 사고 이후 우리에게 4월은 힘들게 움튼 생명이 만개하기도 전에 속절없이 사라지는 것을 그저 바라보아야만 했기에 잔인한 달이 되어버렸다. 생명의 존귀함에 경중이 있겠느냐마는 300여 명의 세월호 희생자들 중 상당수가 세월호를 타고 수학 여행길에 올랐던 고등학교 2학년 어린 학생들이었기에 그 아픔은 더욱 배가 되었다. 세월호 침몰 사고 2주기를 앞둔 2016년 3월 26일 토요일 오후 3시, 영화 “나쁜 나라” 한국철학사상연구회 공동체 상영 및 김진열 감독과의 토론을 위해 회원들 및 그 친구들이 하나 둘 씩 연구회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서기 시작했다. “나쁜 나라”는 세월호 침몰 사고 이후 이 사고로 가장 많은 희생자가 나온 단원고 희생 학생 유가족들의 대정부 진상 규명 요구의 진행 과정을 다룬 다큐멘터리다.

보다 좋은 질의 영상을 함께 보기 위해 공동체 상영을 기획한 이들은 1시부터 한철연 사무실에 나와 영사기를 설치하고 영상과 음질을 체크하는 등 공을 들였다. 정성이 헛되지 않았는지 상영은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사고 이후 50일이 지난 시점에서 영화는 시작한다. 카메라의 눈은 팽목항, 진도 체육관, 광화문 광장, 국회 등에서 ‘세월호 침몰의 진실을 밝혀 달라’고, ‘다만 내 아이가 왜, 어떻게 죽었는지 알려달라’고 외치는 유가족들의 모습을 따라간다. 뭐든 해줄 것 같았던 정부는 책임을 회피하거나 축소하려하고, 언제든지 청와대로 찾아오라는 대통령은 끝내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진상 규명을 요구하는 유가족들의 아픈 몸짓과 절규가 차가운 청와대의 거대한 침묵과 대비를 이룬다. 영화가 진행됨에 따라 정숙했던 관람 분위기는 무겁게 가라앉기 시작했다. 청와대 진입을 막는 이들을 향해 ‘아이들이 죽어갈 때 마지막에 엄마를 불렀을 것이라고, 내가 바로 엄마라고’라고 외치는 한 어머니의 뒷모습에 여기저기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영화가 끝나고 김진열 감독과의 대담이 시작되었다.

긴 시간 세월호 유가족들과 밀착 동행해 내부 사정을 잘 알고 있던 김진열 감독에게 참석자들은 여러 가지 질문을 던졌다. 세월호 유가족을 만나면 어떻게 대하는 것이 좋은가, 유족들이 국가에 바라는 구체적인 요구 사항은 무엇인가, 영화가 sns 인터넷 뉴스 보도 등과 달리 극적인 면이 떨어지는데 의도가 있었는가, 인문학 연구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등으로 이어졌다. 김진열 감독은 차분하게 질문 하나 하나에 응했다. 유가족을 만나면 최대한 자연스럽게 대하는 것이 좋겠다, 타인들의 시선에 감시당하는 듯한 느낌에서 벗어나고 싶어한다. 유가족들은 다만 진실을 원한다, 정부가 진상 규명을 회피한다는 정황을 만들기 때문에 의혹도 깊어지는 것이다. 이 영화는 세월호 유가족들의 동의 아래 만들어졌다. 유가족들은 자극적인 사고 사진이나 증언들을 접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분들의 정신적 고통의 깊이를 감안하여 자극적인 면은 피하고 최대한 객관적 시선으로 자취를 쫒았다. 인문학자들이 유가족들을 만나러 와서 시민 학교를 열었던 적이 있는데 유가족 반응이 좋았던 것으로 안다. 인문학자들은 인문학자대로 자신들이 할 역할을 찾아서 해주면 좋겠다 등의 답변이 있었다. 그러나 영화를 보며 침울해진 분위기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1시간 반에 걸친 대담이 끝나고 김진열 감독이 참석한 뒷풀이가 이어졌다. 오히려 대화는 참석자들 대다수가 참여한 뒷풀이 장에서 활봘하게 오갔다. 김진열 감독이 오프 더 레코드를 요구한 이야기도 오갔다. 밤이 술과 함께 깊어질수록, 세월호 참화에 대한 울분과 분노 반성의 말들이 격렬하게 오갔다. 단원고 학생만한 자식을 둔 부모로서, 참사에 객관적으로 접근하고자 하는 인문학자로서, 사회의 부조리에 분노하는 젊은 학도로서 우리는 어우러져 함께 생각을 나누고 아직은 함께 무엇인가를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가졌다. 침묵하는 정부가 숨기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거짓은 진실을 요구하는 민중의 열망을 이긴 적이 없다. 시간과 함께 우리의 기억이 사라지지 않는다면 말이다. 숨기고 싶어하는 이가 있는 진실을 밝히는 힘은 오래 지속되는 기억과 정의의 요구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너희를 잊지 않을 것이다.

공동체상영2

섦[별과 달과 바람의 노래]-12

 

김설미향(그림책 작가)

 

수 많은 별들 가운데 빛나는 수는 하나이다.

하나의 수와 하나의 수는 이어져 길이되고

길은 공간에 수를 채우고 채워진 벽에

수 많은 사람 안에 띄우는 수의 수는 붉은 심장이 된다.

빼어난 수는 수 안의 수 아닌 수의 결합이다.

 

작가의 블로그 http://dandron.blog.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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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한중일의 유교문화담론

김예호 신간

 

출판사 서평

동아시아 사회 전통문화의 중심축인 유교가 한중일 삼국에서 어떻게 형성 발전되어 왔고, 어떤 특징이 있으며, 유교와 유교문화를 둘러싼 담론이 어떻게 전개되어 왔는지, 이러한 논의들이 현 시점에 어떤 의미를 시사하는지 전반적으로 개괄한 책

 

▣ 책의 출간 의의

이 책의 기획 의도는 한중일의 유교담론과 유교문화의 정체성 연구에 필요한 자료를 제공하는 데 있다. 글의 내용은 한중일 3국의 근대전환기 즉 동양과 서양의 문화가 무력으로 충돌한 시기를 논의의 출발점으로 삼고, 근대 전환기 이후 한중일 삼국에서 발생한 유교와 유교문화 담론을 개괄하고 있다.

이 책은 한중일 3국의 전통사회 유교문화에 대한 특징을 서술한 후, 근대 이후 각 국가의 사회·정치·경제의 흐름과 이에 대응하는 유교문화담론의 특징을 고찰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글의 구성도 주요 유교 지식인들의 주장이나 각 시기에 유행한 유교담론의 요지를 소개해 빠른 시간 안에 근대 이래의 한중일 유교담론의 흐름을 파악하는 데 초점을 두었고, 글의 성격은 중국과 일본보다 한국 분야의 유교문화담론에 더욱 엄격한 평가기준을 적용했다.

한중일 각 나라의 문화담론의 중심에는 언제나 유교가 위치한다. 이는 최근까지 중국적인 것과 중국 정체성, 일본적인 것과 일본 정체성, 한국적인 것과 한국 정체성 등 지속적으로 다루어지는 주제들을 살펴봐도 알 수 있다. 또한 각 나라의 사회정치적 상황 등과 관련한 다양한 문화담론을 통해서도 유교가 아직도 동아시아 사회에서 중요한 논거가 된다는 점은 부인하기 어렵다. 따라서 한국의 유교도 미래 사회의 가치에 부응할 수 있게 역할과 위상을 재정립할 필요가 있고, 더 나아가 한국의 유교가 아시아의 도덕적, 문화적 가치를 선도하는 역할을 자임할 수 있을 정도로 환골탈태할 필요가 있음을 저자는 역설한다.

 

▣ 한중일 삼국의 유교문화 들여다 보기

 

ㆍ 중국 더 나아가 중국 공산당에게 오늘의 ‘유교’는 어떤 의미를 가질까?

중국 사상계나 문화계에서 지속적으로 논의되는 것은 ‘중국적인 것이 과연 무엇인가’라는 중국의 정체성에 대한 문제인데, 덩샤오핑 체제의 중국 공산당이 들어선 이후에 이 문제에 부쩍 더 관심을 기울였다. 특히 국학 논의의 중심에 있는 전통 유교문화는 중국 문화 부흥론자들은 물론이고 중국 공산당의 입장에서도 현재 뿌리칠 수 없는 매력적인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현재 중국 공산당의 주요 관심사는, ‘아시아적 가치’가 아닌 ‘중국적 가치’, ‘유교 민주주의’를 포함한 ‘민주주의’보다는 여전히 경제성장으로 인한 사회적 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사회통합방안에 있다. 이는 1989년 천안문 민주화 운동 이후 중국 공산당이 한편으로 개혁개방을 지속적으로 추진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국학’이란 이름 하에 유교연구를 지원하는 것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즉, 중국 공산당의 입장에서 유교는 한편으로 대외적으로 화교의 자본력을 유인하기 위한 훌륭한 문화 수단이면서도 대내적으로는 성장 과정에서 발생하는 사회적 모순을 중화주의의 민족의식 코드로 희석시키는 수단으로 인식하려는 경향이 있다. 무엇보다 향후 중국인의 문화적 자존심은 중국의 경제성장에 편승해 중국을 대표하고 부흥시킬 수 있는 문화적 코드로서 유교부흥을 내세울 가능성은 농후하다.

 

ㆍ 일본 고유의 정체성의 중심축으로 작용하는 ‘화혼’의식과 유교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일본의 ‘화혼’의식은 과거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일본 사회에 지속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가치로 근대 전환기 이후로도 일본이 자신만의 고유한 사회문화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데 중심축으로 작용한다. 즉, 일본의 ‘화혼’의식은, 막부시대에 중국과 한국으로부터 수입한 원시유교와 성리학을 일본화해 정착시키는 과정, 근대 전환기에 들어서는 탈아입구의 기치 아래 서양철학을 수용하는 과정, 메이지유신 중반 이후로는 화혼(和魂)이 양재(洋才)를 주도하는 과정, 현대에 이르러서는 일본식 자본주의를 견지하는 과정에서 지속적으로 일본 사회의 정신적 구심점으로 작용한다. 특히 현대 일본 사회에 이르러서는 자국의 침체된 경제위기 상황 하에서 전후 일본 경제의 고도성장을 향수하는 극우세력의 등장과 이를 방조하는 상부의 정책 과정을 통해서도 이러한 화혼의식은 확인할 수 있다.

일본 문화의 특수성은 무엇보다도 유교를 포함한 타자를 부정하면서도 부정하는 대상을 통섭하는 가운데 그것에 대항하는 이론체계를 새롭게 만들어낸다는 점이다. 즉, 일본은 유학을 수용한 이후 한국과는 달리 중국 고전의 교설을 최고의 권위로 삼는 유교에서 벗어나 일본만의 유교를 만들고 또 새로운 학문을 창출해냈다.

이와 같이 일본식 사회문화는 전통문화와 새롭게 유입되는 문화가 긍정과 부정의 작용과 반작용을 통해 중첩되는 과정을 거쳐 형성되며, 이러한 중첩 과정의 중심에는 의식적 내지 무의식적으로 항상 ‘화혼(和魂)’의 가치가 존재한다. 그리고 이것은 일본의 근대화 과정에서도 일본 사회를 평가하는 내부의 자체적인 기준으로 작용한다.

 

ㆍ 한국의 ‘공동체 의식’에 대한 애착은 어떻게 형성되었을까?

한국 사회는 어떤 측면에서 볼 때 일본은 말할 것도 없고 유교의 본고장인 중국보다도 더 모범적인 유교사회로 나아갔다고 할 수 있다. 한국의 유교문화는 ‘도덕과 정치의 결합’, ‘가족주의적 서열의 강조’ 등의 중국 유교문화의 내용을 전반적으로 수용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 중국 유교문화와는 달리 더욱 철저하게 성리학에 대한 교조적 입장을 견지하며 수양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중국 유교문화와는 차별성을 지닌다. 이 점에서 조선은 ‘개량된 중국형’의 유교사회 내지 동북아시아 국가 중 가장 모범적인 유교사회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 사회는 일본의 식민 지배를 경험하는 동안 황도유학의 본격적인 공세를 받는다. 즉, 일본의 지배 기간 동안 천황 내지 국가 공동체를 강조한 일본식 유교문화의 강력한 영향을 받음으로써 한국의 전통 유교문화는 고유한 자기수양의 형이상학적 색채가 완전히 탈색되는데 이러한 현상은 이승만 정권의 독재를 위한 유교문화 정략과 메이지유신을 모방한 박정희 정권의 충효 일본(一本)의 일본식 유교문화의 선전 작업을 통해 해방 후 한국 사회에 지속적인 영향력을 행사한다. 특히 학문적으로는 최근까지 ‘공동체’ 의식의 강화라는 미명하에 ‘대동(大同)’ 이상의 실현이 한국 유교문화의 중요한 본질이라고 논의하는 자리를 어렵지 않게 접한다. 일본 유학에 경도된 한국 유교문화의 공동체 의식에 대한 애착은 IMF 이후 사회 구성원 개개인의 자존적 문제나 자아실현의 문제보다는 한동안 한국 사회에 유행한 공동체라는 집단 곧 국가의 전체적인 부(富)만을 중시한 유교자본주의를 통해서도 쉽게 확인된다.

 

 

“이 노래만 들으모 지금도 눈물이 난다” [김성리의 성심원 이야기]-8

“이 노래만 들으모 지금도 눈물이 난다”

 

김성리(인제대 인문의학연구소 연구교수)

 

아아들 아버지는 애락원에서 만났다. 애락원은 개신교다. 개신교 플래처 목사가 세웠는데, 대구나병원이라고 한다. 애락원 거기는 병원이었다. 아매 지금 동산병원과 연결되어 있을 거다. 그때는 나환자들만 보는 병원이라 다른 환자들은 없었던 것 같다. 아마 격리시키는 거제. 산위에 고아원이 있었다. 후문으로 가면 기념관이 있었제. 전에 보니까 애락원 나무들은 별로 안 변한 것 같더라. 그 집들이 지금도 있을까 모르겄네.

그때 애락원에는 겉으로 보기에는 병 표가 안 나서 시장꾼으로 밖으로 다니는 사람이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 멀쩡하니까 밖에 나가서 필요한 물건도 사 오고, 간혹 환자들에게 오는 돈이 있으모 가서 찾아오고 하는 일을 했다. 병표 나는 사람이 밖에 가서 일을 볼 수 없고, 환자는 함부로 밖에 못 나가지만, 그 사람은 겉으로 보모 워낙 멀쩡해 보이니까 일이 있으모 수시로 다녔지.

애락원에는 평옥과 구이층집으로 불리는 건물이 있었다. 평옥은 단층집인데 여자 환자들이 지낸다. 구이층집은 오래된 2층집이라서 그리 불렀는데 남자들이 살았다. 사는 곳은 달라도 애락원 마당은 같이 쓰니까 마주치고 했지. 그 사람은 발이 좀 시원찮았다. 나는 사람들이 오물짜 같다고 했다. 지금 이쁘기는 뭐가 이쁘노? 니도 거짓말 참 잘한다. 그 때도 이쁜 기 아이라 얼굴이 하얗고 작다고 그리 부르더라.

성심원 들어가는, 눈쌓인 다리 사진 촬영 엄삼영 수사

성심원 들어가는, 눈쌓인 다리
사진 촬영 엄삼용 수사

그 남자 누나가 자꾸 나를 불러내는 기라. 그래 밖으로 나가모 그 남자가 기다리고 있고 그러대. 응, 뭐 연애라면 연애지. 좋았지. 시간이 지나니까 옆에 있는 사람들도 다 알고. 그 사람은 밖에 나갔다 들어오면 나한테 꼭 뭔가 사오고는 했다. 둘이서 철문을 타고 살짝 넘어가서 영화관도 가고, 손도 잡고 그랬다. 대구 극장에서 영화 봤다. 내가 원에 허락받고 외박 나가는 날에는 역전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 사람은 병표가 없으께, 그리고 원에는 이런 저런 일들이 많으니까 내가 외박 나가는 날에는 지도 뭔 핑계를 만들어서 나오는 거지. 오빠 집에 가서 저녁 먹고 나오면 서문시장가에서 기다리고 있거든. 거기 가서 만났다. 내가 오빠 집에 가는 날이모 그 사람은 서문시장가에서 항상 기다리고 있었거든. 어떤 때는 둘이서 시장에서 저녁 먹고 대구극장 가서 영화보고 했지.

그렇게 지내는데, 애락원에 김진옥이라는 친구가 있었다. 함흥 사람인데 우찌우찌해서 애락원에서 지내고 있었다. 그 친구가 그러는 기라. “흥남으로 가라. 니 정도면 흥남 가서 살모 아무도 나환자로 안 본다. 니는 손만 표가 좀 나니까 그리로 가모 아무도 모른다.” 그러는 기라. 그 위쪽에는 손에 화상 입은 아아들이 많아서 나도 화상입어서 그리 된 줄 알거라고 하더라.

그래서 그리 가기로 했다. 그 사람은 한 달 먼저 함흥으로 가서 기다리고, 나는 원에서 수속 밟아서 엄마하고 오빠하고 기차타고 한 달 후에 갔다. 나 시집 보낸다고 우리 엄마랑 오빠가 이것저것 좀 장만해서 같이 간 거라. 그 사람은 나 기다리면서 한 달 내내 하루도 안 빠지고 흥남 역에 나와서 하루 종일 기다렸다더라. 내가 언제 올지 정확하게 모르니까 그리 한 거지. 매일 나와서 기차가 올 때마다 뛰어와서 찾다가 없으면 다음 기차가 올 때까지 노래를 부르며 왔다 갔다 하면서 기다렸다 카더라.

“오늘도 걷는다 마는 정처 없는 이 발길 지나온 자죽마다 눈물 고였네 선창가 고동소리 옛님이 그리워도 나그네 흐를 길은 한이 없어라 타관땅 밟아서 보니…” 아이고, 이 노래만 들으모 지금도 눈물이 난다. 허허허, 내가 안 올까봐 불안해서 노래를 불렀다고 하더라. 혹시 가요무대에 이 노래가 나오모 그리 좋다. 옛 추억이 생각나고, 그때가 꼭 지금처럼 생생하고 그렇다. 애락원에 15살에 들어가서 23살에 나왔다. 24살에 결혼했다.

우리 오빠가 그 사람을 흥남지서에 취직 시켜줘서 먹고 사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았다. 그게 웃지방은 너무 추운 기라. 방과 부엌에 벽이 없다. 아이고, 참, 그 말을 그리 못 알아 듣노. 너무 추우니까 솥이 방안에 있는 기라. 그러니까 아궁이 불 넣는 데는 부엌에 있고 솥은 방안에 있는 거지. 불 때서 방을 뜨겁게 하는 거로는 난방이 제대로 다 안 되는 기라. 부엌에서 불을 때면 자연히 난로가 되고, 방은 뜨거워도 밖이 워낙 추우니까 방안이 썰렁해. 그래서 방안에 솥이 있는 거지. 방안에 솥이 있으니까 추워서 솥을 안고 자다가 어린 아아들이 손을 데이기도 하고, 어린 아이가 뽈뽈 기어 다니다가 솥에 손을 데이기도 하는 거지. 밖에서 방으로 들어올라 하면 부엌으로 들어와서 방으로 온다. 부엌이 참 깨끗타.

그래 보니까 거기에는 나처럼 손이 오그라든 사람들이 많아. 나는 심한 것도 아이라. 시장에라도 가면 사람들이? “아이고, 새댁이 욕 봤겄네.” 하고, 또 “어쩌다 이랬을고, 쯧쯧쯧”하지 내가 이 병에 걸렸다고는 생각을 안 하더라. 그러니 마음 편하게 살았다. 좋았지. 좋은 사람하고 사니까…… 그 사람도 겉으로 표가 안 나니까 아무도 우리를 그리 안 봤거든. 그러니 밖에도 맘대로 다니고, 그랬다.

해방이 되고 고향도 가고 싶제. 오늘 내일 하고 있는데 사람들이 남으로 갈라모 빨리 가라하는 거라. 삼팔 선이 그어져서 시간이 지나면 못 간다고 하대. 그래서 안 되겠다 싶어 서둘러 갈라고 보니까 이미 사람은 삼팔 선을 못 넘는 거라. 할 수 없이 남편 먼저 가고, 속초에서 만나기로 했다. 그때 딸이 3살이고 아들은 뱃속에 있었다. 아니다. 남편만 먼저 갈라고 간 게 아이라.

사람이 삼팔 선을 못 넘으니까 배를 타고 가는데, 사람은 배에 탈 수가 없고, 짐만 실어 가는 거지. 응, 화물선 쯤 되는 갑다. 사람들이 그 짐 보따리 안에 숨어서 가는 거지. 근데 나는 그때 임신 7~8개월 때라 배도 부르지만 3 살배기 딸을 짐 속에 숨길 수가 없지. 얼라가 울기라도 하고 보채기라도 하면 숨어 있는 사람 다 들켜서 바다 귀신이 될 판이니 나하고 딸은 어찌하든지 육로로 해서 남쪽으로 내려와야 하는 기라.

함흥에서 일부러 옷을 남루하게 해서 떨어진 광목치마를 입고 보따리를 이고 딸 손잡고 연천까지 왔다. 연천에서 밥을 사 묵으러 들어가서 이남 가는 길을 물었다. 그러니까 주인이 이남 갈려면 논둑을 타고 가야 한다고 길을 요리조리 가서 어찌 어찌 가라고 가르쳐 주더라. 그러면서 하는 말이 저기 가다보모 꼭 지나야 하는 다리가 나오는데, 그 다리 밑에는 소련 군인들이 지키고 있는데, 들키모 그 자리에서 바로 총알 맞는다고 조심하라고 일러 주는 기라.

하이고 참, 밥을 시켜 묵고 해는 지고 ‘어찌할꼬’ 하고 앉아 있는데 웬 여자들이 커다란 보따리를 이고 여남은 살 먹은 머스마를 데리고 들어오는 거라. 주인이 저 사람들이 이남으로 장사를 다니는 사람들이니까 따라 가면 될 거라고 일러 주더라. 그래 그 사람들에게 나도 이남 가야한다고 데려가 달라고 했지. 어린 머스마가 딸려 있어서 말을 했지, 어른들만 있었으면 말 못했다.

알고 보니까 그 사람들은 이남에 없거나 귀한 것들을 떼서 이고지고 이남으로 가서 팔고, 거기서는 또 이북에 귀한 거를 사 와서 파는 보따리 장사들인 기라. 그 사람들이 데리고 있던 머스마는 저거 아아가 아니고, 그 사람들도 부탁 받고 머스마를 이남으로 데려다 주는 기라. 같이 가기로 하고 잠이 살짝 들었는데, 그 사람들이 깨워 보니 캄캄한 밤중이라. 해뜨기 전에 임진강에 가서 배를 타야 된다고 하더라.

너무나 작은, 그러나 너무나 소중한 할머니의 서재 사진촬영 김성리

너무나 작은, 그러나 너무나 소중한 할머니의 서재
사진촬영 김성리

새벽 두 시에 자는 애 깨워서 밥 먹고 장사꾼들을 따라 나섰다. 캄캄한 밤에 어데가 어딘지도 모르겠는데, 그 사람들은 여러 번 다녀 놓으니까 잘 가대. 나는 배는 부르고 보따리는 이고 딸애 손을 잡고 한 번도 가 본적이 없는 길을 죽을 동 살 동 따라 갔다. 그 사람들을 놓치모 오도 가도 못 하는 기라. “새댁이 걸음이 와 그리 느리네”하면서 어서 가자고 재촉은 해도 나를 두고 가지는 않더라. 근데 그 머스마 덕분에 내가 따라 붙었지. 여남은 살 먹은 아아가 얼마나 잘 걸을 수 있겄노. 허허허 그 머스마 덕을 좀 봤다.

밤새 걷고 또 걸었다. 참 산길이 끝이 없더만. 저 멀리서 해가 떠오르려고 하니까 뿌옇게 주변이 보이는데, 옆에 보따리 장사가 한탄을 하는 거라. 알고 보이 밤새 동네 뒷산만 뱅뱅 돌았던 거라. 출발했던 그게 와 있는 기라. 하하하, 참 지금은 웃음이 나온다. 그때는 앞이 캄캄했지. 임진강으로 가서 배를 타야 하는데, 그 배를 못타면 이남으로 못 가는 거야. 육로로 걸어서는 소련군 총알에 죽을 판이고.

“아이고, 큰일 났네. 어서 갑시다. 어서” 아주머이들이 난리가 났지. 참말로 죽을 힘을 다 해서 산길을 걸었다. 밤중에 산으로 산으로 얼마나 걸었을꼬. 인자 해가 떠올라서 사방이 훤하지. 말하자면 배를 몰래 타고 임진강을 건너 이남으로 가는 거지. 그 사공은 우리를 태워주고 다시 이북으로 와야 하는데, 우리가 늦으면 그 사공이 그만 집으로 돌아가는 기라. 배 삯은 벌써 줘놨지. 그러니 전부 애가 타는 거라.

죽어라고 따라갔다. 하이고, 말 못한다. 고무신을 신고 있었는데 발은 부르트고 퉁퉁 붓고, 그래도 그 발로 죽어라고 따라 붙었다. 딸아를 업었다. 보따리를 이고 죽는지 사는지도 모르고, 어데가 어딘지도 모르고 그 보따리 장사꾼들을 안 놓치려고 허겁지겁 따라 붙었다. 배는 부르지 아아는 업었지 보따리는 이고, 참말로 그 머스마가 은인이라. 갸는 지금 어데서 우찌 살고 있을꼬.

저 멀리 임진강이 보이고, 사공이 우리를 알아보고 어서 오라고 손짓을 하대. 허겁지겁 배에 올라탔는데, 사방이 너무 훤해서 간이 쪼그라들데. “하이고, 인자 오면 어짜요. 갈까말까 했소. 왜 이리 늦었소?”하면서 사공이 한탄을 하더라. 사공도 사방이 그리 훤한데, 지도 들키모 총살이니 암만 돈이 좋아도 목숨보다 귀한가. 그때는 아무도 못 넘어가. 육지는 군데군데 소련군이 지키고 섰제, 바다는 화물선만 다닐 수 있었어. 참 살벌한 시대였다.

배를 타고 건너 편 임진강에 도착하니까 이남에서 보고 있던 순경들이 고생했다, 어서 오시오 하면서 환영을 하더라고. 참말로 이남에 왔다 싶대. 인자 거기서 화폐교환을 해 주더라. 북쪽 돈하고 남쪽 돈하고 다르니까 교환을 해야지. 북쪽으로 가는 사람하고 남쪽으로 온 사람들하고 서로 갖고 있던 돈을 다 바꿨다. 그리고는 동두천으로 갔다. 거기 수용소가 있는데, 예방주사도 맞고 어디로 갈 건지 물어도 보고 하더라.

동두천으로 가는 길은 꼭 가리마 같은 길을 걸어서 갔다. 비가 왔다. 고무신 안에 물이 차서 걸을 때마다 철컥철컥 하고, 이미 퉁퉁 부어 있는 발은 인자 고무신 안에서 불어터져서 피고름이 신 안에 흥건했다. 애기 업은 두데기(포대기)까지 물이 줄줄 흐르고, 힘든 거는 말로 다 못한다. 그래도 가야지. 동두천 수용소에서 전국으로 흩어지는 기라. 나는 일단은 대구로 가기로 했다. 친정에 가서 순천으로 갈라고 했지.

기차역에는 사람들이 억수로 많아. 기차는 자주 없고 사람은 많으니까 빨리 표부터 끊어 놔야지. 그래서 딸아를 보고 “엄마 올 때까지 꼼짝하지 말고 여게 있어라. 이 보따리 꼭 잡고 있어라.” 하고 나는 표를 끊으러 갔다. 남대문으로 가야 부산 가는 기차를 타고 대구로 가지. 겨우 표를 끊어 갖고 오니까 보따리가 없는 기라. 보따리 어데 갔냐 하고 물어도 딸아는 말이 없고, 옆에 있던 사람들이 어떤 할매가 와서 보따리 달라고 하니까 그만 주더란다. 그래서 저거 할매인 줄 알았다 안 카나. 그 보따리 안에 옷하고 돈이랑 다 들어있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