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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서구 지성의 원천 ? 고대 그리스 문화 대 탐험(18)

[기획연재] 서구 지성의 원천 ? 고대 그리스 문화 대 탐험(18)

글: 이정호 (방송통신대학교 교수)

 
* 주제 3에서는 부르크하르트의 『그리스 문화사』제8장 “Zur Philosophie, Wissenschaft und Redekunst”(Gesammelte Werke, Band VII, s. 275-421)의 내용을 수회에 걸쳐 발췌 요약하는 방식으로 소개한다.
 

주제 3 : 부르크하르트의 『그리스 문화사』: 그리스 철학과 과학의 지성사적 기원과 의미

 

2. 신화와의 결별

가. 현인들의 등장

철학의 시초로 여겨지는 이오니아학파가 등장하기 이전에는 잠언들이 지혜의 옷이었다. 이른바 7현인으로 일컬어지는 사람들은 이 잠언들을 만들어 낸 사람들 중 가장 알려진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아직 신화와 결별 하지는 않았지만 신화에 비의존적인 사유 세계를 들고 나왔다. 이들 일곱 명의 이름들은 늘 하나같지는 않았다. 언제나 거론되었던 사람은 탈레스(Thales), 핏타코스(Pittakos), 비아스(Bias) 그리고 솔론(Solon)이고, 나머지 3사람으로는 코린도스의 클레오불로스(Kleobulos), 스파르타 사람 케일론(Keilon), 페레퀴데스(Pherekydes), 아나카르시스(Anacharsis), 에피메니데스(Epimenides) 등이 각기 다른 조합으로 함께 거론되었다. 이 현인들에 참주가 포함되어서는 안 된다는 후대의 견해 때문에 그리스의 솔로몬이라고 일컬어지는 코린토스의 페리안드로스(Periandros) 대신 세상에 별로 알려지지 않은 라코니아(혹은 크레테) 출신 뮈손(Mys?n)이 거론되기도 하였다. 플루타르코스는 ‘현인(sophos)’이라는 호칭이 대부분 정치영역에서의 탁월한 능력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었고 탈레스만이 그러한 실제적인 요구를 넘어선 인물이라는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실제로 탈레스는 현인인 동시에 이오니아 철학의 창시자로 알려져 왔고 헤로도토스의 책에서는(『역사』 제1권 74-75) 일식(日蝕)을 산정해내거나 할뤼스(Halys) 강의 흐름을 바꾸는 등 다방면으로 다재다능한 사람으로 나타나 있다. 하지만 그리스 사람들은 이러한 현인들 모두를 아직은 얼마간 신화적이고 일정한 유형적 특색을 가진 인물들로 파악하고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면, 연대 상 태어난 해가 백년 이상이나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모두 델포이 혹은 코린토스에서 열리는 페리안드로스의 향연 모임에 함께 자리하게 한 들 조금도 이상할 게 없다. 이들의 위대함을 나타내는 특별한 신화적 표현이 바다 속으로부터 주워 올려진 “황금 솥” 이야기에서 발견된다. 델포이의 신탁에 의하면, 이 솥은 가장 영리한 사람(신을 경애하는 마음이 가장 열렬한 사람이 아니라)에게 하사되었던 까닭에 소유권이 우선 탈레스(혹은 비아스)로부터 시작되어 다른 사람들에게 차례차례로 돌아가게 되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누구도 이것을 영구적으로 소유할 수 없었고 그래서 마침내 이 솥은 델포이 혹은 이스메네스강의 아폴론에게 헌납되었다.

탈레스 (기원전 624-526년)

델포이 신전의 벽에는 이들 일곱 명의 현인들의 잠언들이 황금 문자로 각각 적혀있었다. 이것이 언제, 어떻게 또 누구의 손에 의해서 만들어졌는지 알 수는 없지만 우리들에게 이러한 잠언들 중 일부가 전해지고 있다. 그것들 중에는 잠언뿐만이 아니라 잠언풍의 경구( Apophthegmen) 및 일화도 들어 있다. 대부분은 윤리적 성격을 띠고 있지만 그 중 아주 짧으면서 의미가 숨겨져 있는 것들이 가장 비중 있게 여겨졌다. 또 담긴 내용들이 항상 사람들의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었다. 예를 들어 그곳에는 “다수(die Mehrzahl)는 나쁘다”라는 말도 있다.

잠언투의 말이 어느 모로나 예전부터 있어왔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것은 이미 헤시오도스의 『일과 나날』에서도 많이 발견되고, 다른 한편 스파르타 사람들 역시 스파르타식 간결한 표현으로 잠언투로 말하는 형색을 계속 유지해오고 있었다. 이 점에서는 그리스인들과 오리엔트 사람들 모두 다를 것이 없었다. 다만 오리엔트 사람들의 경우는, 인도는 예외이긴 하지만, 격언적인 것(즉, 개인적이고 윤리적인 것) 이상으로, 그것도 비유적 이야기의 단계 이상으로 나가지는 못했고 어떤 윤리학도 전체적으로 이러한 것들과 관계를 끊는 일이 없었다.

7현인들에 병행해서 그들과는 다른 계열의 사람들이기는 하지만 그들과 동시대에 살면서 그들과 접촉했던 또 한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다. 우리는 이 사람들을 기인(奇人)들(die wunderlichen Heiligen)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으나 그들을 하나의 명칭으로 거론하기는 쉽지 않다. 그리스인들은 아주 특별할 정도의 뛰어난 사유 능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특히 다음과 같은 제약 또한 가지고 있었다. 즉 그리스의 민족종교가 형이상학적으로 견실하지 못하고 게다가 부정합적인 요소를 많이 포함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스 민족 종교는 우주 만물에 대한 설명으로서도 불충분한데다가 사람들에게 어떤 것을 분명하게 설명하는데도 힘을 발휘하지 못했고 아무런 윤리적 규정에도 이르지 못했다. 그리고 이 종교에서는 일부 오리엔트 민족 종교에서 압도적으로 나타난 것과 같은 신관에 의한 조직적인 변혁이 일어나지도 않았다. 브라만교의 조직, 조로아스터, 모세 등등의 이름으로 불리고 있는 종교들이 거쳐 온 변혁의 과정이 이 종교에서도 있었을 거라고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고 실제로 일어나지도 않았다. 그러한 까닭에 천성적으로 사유능력을 타고 난 이 기인 내지 괴짜들이 자기들의 민족 종교에 대해서 일시적으로 제기 했었던 특별한 이념조차도 여전히 종교적인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표현에 있어서도 비유적이고 신화적인 모습을 취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이들에게 조차 모든 사태를 나타냄에 있어 (더 이상 비할 데가 없었던) 신화적인 표현법을 포기한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큰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어쨌거나 이와 같이 자력으로 자기들의 생각을 신화화해가면서, 다른 한편에서 이미 활동을 시작한 철학과 더불어 그 경쟁자로서 이윽고 아폴론적인 사람들이 등장했던 것이다. 게다가 이 사람들은 금욕에 의해, 마음의 망아적 상태에 의해, 격정으로 들끓고 있는 그리스 전 국토에 속죄의 위로를 주는 정화 의식에 의해, 기적에 의해, 그리고 영혼 윤회라는 교설을 내세워 이상한 빛을 주위사람들에게 비추어가면서 교세를 넓히고 있었다. 하지만 이 사람들은 그 후 전승에 의해서 다채로운 모습으로 만들어 졌고 공상의 인물이 되어, 그들 자신이 다시 신화적이 되었다. 특히 주목할 것은 그들이 스스로 자신의 육체를 떠날 수 있는 사람들로 알려졌다는 점이다.

페레퀴데스(기원전 580-520)

이런 사람들의 한 명으로서 누구보다도 먼저 크레테 출신 에피메니데스(Epimenides)를 들 수 있다. 그의 생존연대는 참주 퀼론(kylon)의 피살로 인해 쇠퇴한 아테나이를 그가 정화시켰다(기원전 612년 또는 596년)는 전승에 의해서 확실하게 알려져 있다. 어쨌든 그는 속죄의 신관이고 예언자로서 우주생성론을 썼고 또 그 자신의 주장에 의하면 수차례 윤회전생 했다고 한다. 모든 사태를 유형적으로 파악하고 존재하는 모든 것의 특징을 한 명의 인물 위에 겹쳐 쌓으려고 하는 그리스인들의 강한 의지는 벌써 이 에피메니데스를 마침내 그리스적 감각이나 사고로부터 생긴 자신들의 공상과 대체로 일치하는 인물 중 한 사람으로 만들어낸 것이다. 다음으로 아바리스(Abaris)를 들 수 있는데, 이 사람은 휘페르보로스(Hyperboros) 즉 아폴론신을 숭배하는 민족이 사는 전설상의 나라에 사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는(기원전 600년 이후) 실제로 생존하고 있었던 사람으로서 정화(淨化) 신탁이나 예언을 행하면서 그리스 본토 전역을 돌아다녔던 사람이다. 후대의 전하는 바에 의하면 그는 아폴론신에게서 받은 한 개의 화살에 몸을 싣고 공중으로까지 날아다녔다고 한다. 아바리스와는 반대로, 프로콘네소스 출신 아리스테아스(Aristeas)는 북쪽지방으로 가서 그곳에서 휘페르보로스를 찾아다녔다고 알려진 사람인데, 헤로도토스에 의하면 그는 아리마스포이(Arimaspoi) 사람 이야기를 쓴 서사시의 작자이고 포이보스(Phoibos : ‘빛나는’의 의미로 주로 아폴론을 가리키는 수식어)에 의해 접신 상태가 되어 아리마스포이 사람의 이웃인 잇세도네스(Issedones) 사람들의 나라로 갔다고 한다. 그는 자신이 원하면 언제라도 자신의 육체를 분리시켰다. 메타폰티온(Metapontion: 타렌툼 해안에 위치한 도시)에서 그가 아폴론신의 수행자로서 까마귀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 역시 영혼 윤회의 일단이 겉으로 드러난 것으로 생각된다. 그 후 이 영혼 윤회 사상을 그리스 본토에서 처음 가르친 사람은 페레퀴데스였다. 그는 퓌타고라스의 스승으로 페니키아의 신비의 책을 알고 있었다고 한다. 그 역시 특히 지금 전해지고 있는 그의 책(『신들의 탄생』)이 실증하고 있듯이, 사물의 본성에 대한 그의 관념과 예측(Ahnung)을 여전히 신화적 형식으로 포장하고 있다. 그는 점술가이자 천문학자로서 생활하고 있었다.

앞서 우리가 살핀 사람들 각각은 분명 극히 다양한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그들에 더해서 그야말로 아폴론적이지 않고 오히려 디오뉘소스적인 종파 혹은 당파가 처음으로 출현하기에 이르는데 그들이 곧 오르페우스(Orpheus) 교도라고 불리는 사람들이다. 이 오르페우스 교도는 아마도 이미, 앞서 이야기한 사람들로부터 당연히 예상될 수 있는 어떤 상념들을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어 잘 이용했다고 생각된다. 또 그들은 처음부터 오르페우스와 결부되었다고 거짓으로 꾸민 문헌을 내세워 정화를 통한 행복을 보증하고, 자신들만의 고유한 우주생성론을 주장하였으며 금욕과 채식주의를 실천하였고 행복에 이르는 저 세상에서의 생활을 언급하면서 영혼 윤회의 가르침을 설파하였다. 육식을 금해야 한다는 그들의 생각도 아마 이 영혼 윤회 사상과 관련되어 있을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오르페우스 교도들이 그리스적 삶에 속죄(Buβe)라는 개념을 끌어 들여, 현세의 생활이란 무덤에서의 생활과 서로 닮았다(to s?ma s?ma. 육체는 묘지이다)고 여기면서 이 땅에서 반복되는 탄생의 연쇄(kyklos genese?s)로부터 벗어나는 삶을 추구했다는 점이다. 진정한 삶은 그들에게 있어서 육체성(Leiblichkeit)을 넘어서 있는 저 피안에서 드디어 시작되었던 것이다. 어쨌든 오르페우스 교도의 조직은 새롭고도 특별한 종교로서 나타나 그 교세를 넓히려고 노력했지만 그러나 그 특수한 내용이 실제로 어느 정도까지 전파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2. 신화와의 결별. 다음에 계속)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릴레이 시국선언⑥-잔적(殘賊)의 도당은 전복된다

잔적(殘賊)의 도당은 전복된다

 

진보성(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국정원 대선개입 사건에 대한 국정감사가 끝났다. 결과는 뻔했다. 누구는 할 말을 당당하게 했지만 한 톨의 거짓 없이 사실을 실토해야 할 사람은 장막 뒤에 숨어, 있던 일은 없다하고 없던 일은 있다했다. 영혼 없는 공복(公僕)이라고 했던가. 영혼 없는 공복은 사복(私僕)이다. 이들은 이제 충성스런 사복을 자임하며 자신들의 과오를 한 여름 이슈로 마감하려 한다. 하지만 아직 추억의 사건이 되기에는 이르다. 누가 그만두라고 했나?

국정원 심판에 대한 국민들의 의지는 아직 불탄다. 시내거리에 촛불을 든 시민들, 언론?지식인들, 각 처의 운동가들, 정치관계자들까지 모두 지난 대선의 진실을 폭로하고 이를 통해 상식을 벗어난 행정수반과 정치권의 행태를 리셋시켜 그들이 초심으로 귀환함을 확인해야 할 것이다. 물론 앞으로 벌어질 수많은 정치공작들과 교묘한 장난질에 실로 감탄(?)을 표할 일이 많아질 것은 예상되는 바이다.

그런데 그 장난질이 도를 넘었다. 고인을 관에서 끄집어내 시정에서 조리돌리듯 하는 것도 모자라 검증이라는 이유로 남북 국가정상의 회담내용까지 공개해버리고 이제는 유신정권에서 자행되었던 내란음모죄까지 부활시키고 있다. 그러나 정작 대한민국 내부의 혼란을 조장하고 국가를 전복의 위기로 몰아가는 것은 국정원의 행태다. 국정원이 자행한 결과로 발생한 조직 내부의 불안과 위기를 민주주의와 사회의 진보를 지향하는 시민, 인사들에게 떠넘기고 있다.

맹자는 “인(仁)을 헤치는 것을 잔(殘)이라 하고 의(義)를 헤치는 것을 적(賊)이라 일컫는다.”고 했다. 지금 국정원은 국민들 사이의 믿음과 신뢰를 잃어버리게 했으니 인을 헤쳤고, 헌법을 유린하며 자행한 불법을 스스로 묵과하고 또 다른 정치공작을 벌이고 있으니 의를 헤쳤다. 인의를 뭉개버린 무리는 ‘시정잡배’일뿐이며 전복의 대상이다. 또한 그 사태를 관망만 하고 있는 박 대통령은 맹자의 말대로라면 필요 없는 지도자이다. 이런 상황에서 민생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은 한낱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

국가의 기강을 문란하게 하고 헌법질서를 뿌리째 뒤흔들고 있는 것은 국정원과 청와대이다. 지금이라도 다시 조속히 대선개입 의혹에 대한 정확한 수사와 진실 규명이 이루어져야 한다. 민주주의의 주체는 국민이고 시민이다. 민주주의에서 개혁의 대상이 개혁을 요구하는 주체를 역으로 공격한다면 맹자가 말한 잔적(殘賊)을 헛갈려 아는 것이다. 잔적은 민생을 돌보지 않고 국민을 기만하며 국론분열을 조장하는 교활한 권력에게 붙이는 말이다. 잔학하고 교활한 권력은 개혁의 대상에서 곧 전복의 대상이 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릴레이 시국선언⑤-‘민주주의’라는 유령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

‘민주주의’라는 유령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

 

조은평(건국대 비정규직 교수 노동자)

 

‘민주주의’라는 하나의 유령이 배회하고 있다. 이 유령에 맞서 집권세력들은 ‘종북’과 ‘안보’라는 낡아빠진 카드를 들이밀며 이 유령의 출몰에 대응하고 있다. 아니 오히려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한다는 허울 좋은 명목을 내세워 낡고 늙은 보수주의자들의 결집을 호소한다.

하지만 정작 ‘민주주의’라는 유령의 출몰을 초래한 것은 바로 집권세력 자신들이다. 국정원의 대선개입 사건이 국정조사를 통해 어느 정도 그 실체가 드러나면서, 곳곳에서 민주주의의 죽음을 애도하며 분노하는 외침이 시작되었다. 가장 기본적인 민주주의적 절차에 국가 기관이 개입한 사건. 그래서 대통령 선거라는 중요한 민주주의적 절차를 훼손한 사건.

이런 민주주의의 죽음을 애도하며 전국에서 촛불이 타오르고 있다. 그 긴 세월을 거쳐 비로소 민주주의 공화국을 탄생시킨 시민들은 민주화의 역사를 과거로 되돌리려는 현실에 분노하고 있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민주주의’라는 유령이 배회하게 된 것은 바로 이런 상황 때문이다. 그러나 어쩌면 이미 ‘민주주의’는 죽어 있었다. 우리 모두는 그저 ‘민주공화국’에 살고 있다고 믿으면서, 보다 민주적인 현실이 실현되리라 기대하고만 있었을 뿐이다. 민주주의라는 실재는 단지 ‘지연된 미래’에 불과하다는 걸 우린 잘 알고 있었다.

언론이 제대로 된 말을 전하지 않고 노동자들이 일터에서 무참히 쫓겨나 자살을 택했을 때, 빈민들이 거리로 내몰리고 교육 현장이 더 이상 제대로 된 현실을 가르치지 않게 되었을 때, 이미 ‘민주주의’는 한 걸음 씩 뒤로 밀려나 죽어가고 있었다는 걸 말이다.

그럼에도 이런 ‘지연된 미래’에 대한 기대감마저 철저히 무너져 내렸을 때, 오늘날처럼 ‘민주주의’라는 유령은 다시금 그 봉합된 틈새를 뚫고 출몰하는 법이다. 어쩌면 그렇기에 그 유령이 배회하는 오늘날의 상황은 더 의미심장하다.

집권 세력은 점점 더 초조해 하며, 이 유령의 출몰을 어떻게든 봉쇄하려할 것이다. 하지만 일단 출몰한 유령은 사람들에게 우리의 현실을 되돌아보게 한다. 거리를 채우고 있는 촛불의 물결은 이제 점점 더 큰 물결로 넘쳐날 것이다. 그리고 그 물결 속에서 사람들은 민주주의라는 사건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사건을 경험한 우리들이 단지 책임 있는 사과나 국정원의 개혁만을 요구하며 머뭇거릴 때, 앞으로 또 다시 새로운 ‘민주주의’의 유령은 언제든 다시 출몰할 것이다. 그러니 이렇게 말하고 싶다. ‘만국의 민주주의자들이여 단결하라! 각자의 민주주의 슬로건으로 이 유령의 출몰에 함께하라!’고. 아마 누군가는 말할 것이다. 민주주의자들은 너무나 복잡하고 다양하기에 이 슬로건은 터무니없다고.

하지만 한편으로 우리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민주주의’라는 유령의 요구가 무엇인지. 어쩌면 바디우가 말한 ‘모두의 귀족되기!’, 그래서 우리 모두가 우리 삶을 좌우하는 현실에 관여할 수 있기를 요구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유령이 요구하는 민주주의다. 당신들은 무엇을 원하는가? 이게 아닌가? 그렇다면 당신들이 원하는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명확히 드러내라! 그리고 함께 이 유령의 출몰을 맞이하자!

 

 

나태영의 간도답사여행기[보고 듣고 생각하기]

나태영의 간도답사여행기[보고 듣고 생각하기]

 

나태영(한철연 회원)

 

 

나는 1997년 8월 31일 결혼했다. 인도네시아 발리로 신혼여행 갔다. 발리 사람들은 종교가 생활 속에 깊이 들어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발리 사람들이 전통 옷 입는 것 보고 큰 감명 받았다. 그 영향으로 나는 7년간 생활한복 입고 출퇴근 했다. 4계절 열 세벌 생활한복 입고 출퇴근 했다. 아내와 약속 했었다. 결혼 10주년에 쿠바 여행 가자고 약속 했었다. 밥벌이에 허덕이다가 그리 못 했다. 결혼 한 지도 벌써 16년이 되었다. 그 뒤 해외여행을 못했다.

그러다가 얼숲(페이스북) 김갑수 작가 담벼락에서 정보를 보게 되었다. 성서중학교 2학년 딸 쌍둥이 나은진, 나은성과 함께 여행 가면 좋겠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감수성이 예민한 때 독립운동하신 선열 발자취를 밟아가며 생각하며 깨닫는 좋은 기회가 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딸들이 고구려 기상을 배우길 기대했다. 중국여행 경험 있는 아내에게도 큰 기쁨이 되리란 생각에 생명보험 약관대출 받아서 길벗투어에 네 사람 여행 신청했다. 내가 실수했다. 당사자 세 사람한테 물어보지 않고 여행 신청했다. 당연히 세 사람이 좋아하리란 생각에 그리 했다.

은성이가 그런다. “아빠 행동은 가부장제 모습이야! 민주주의 방식으로 의논을 먼저 했어야지!” ‘여든 살 노인도 세 살짜리한테 배울 것이 있다’는 속담이 맞다. 내가 딸한테 한 수 배웠다. 결국 나 혼자 중국 간도답사여행 다녀왔다.

?나태영

2013년 7월 19일부터 21일까지 여행했다. 광개토태왕 비는 작았다. 당신이 일찍 돌아가셔서 크게 짓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광개토태왕 아들 장수왕 비는 크고 우람했다. 당신이 오래 사셔서 시간과 공을 더 들여서 크고 우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두울 때 봐서 그 모습을 온전히 볼 수 없었던 게 아쉬웠다. 광개토태왕비에 절을 했다. 중국 공안이 뭐라고 말하며 화를 냈다. 어이가 없었다.

“아니 내가 내 조상한테 절을 올리는 데 왜? 화를 내지?”

지금 중국이 억지로 밀어붙이는 하상주단대공정, 동북공정 한계를 절실히 느끼게 하는 경험이었다. ‘공정’ 이란 두 글자에는 이미 ‘거짓으로 꾸며댄다’는 뜻이 들어있다. 아침에 호텔 로비에서 김갑수 작가한테 물었다.

“우리가 간도 땅을 되찾아야 하지 않나요?”

김갑수 작가가 답했다.

“우리에게 힘이 있어야지요!”

21세기 대한민국에 서희 장군이 없다. 앞으로 이 땅에서 서희 장군이 나와야 한다. 전쟁으로 간도 땅을 되찾는 것은 우리에게도 중국에게도 재앙이다. 간도답사 여행은 흥청망청 여행이 아니었다. 공부가 곁들인 여행이었다. 김갑수 작가는 한국 근현대사 전문가이다. 한홍구 교수와 견줄만한 전문가이다. 나는 한국독립운동사에 대해 어는 정도 안다고 생각했다. 한홍구 교수 책을 읽었기에 그리 생각했다. 김갑수 작가 강연을 듣고 내 생각이 틀렸음을 정확히 알았다. 내가 모르는 게 너무도 많음을 깨달았다.

김일성은 대단했다. 체 게바라도 김일성을 극구 칭찬했다.

“우리는 날씨도 좋고 먹을 것이 풍부하고 지원도 많이 받았소. 당신들은 추운 날씨에 먹을 것도 없고 지원도 받지 못한 환경에서 싸웠으니 당신이 나보다 더 뛰어납니다.”

당시 만주에 일본군이 75만명 있었다. 그런 악 조건 속에서 김일성은 대단한 전과를 올렸다. 김일성이 ‘신출귀몰’했다는 평을 들은 게 헛말은 아니다. 보천보전투에 대해서는 한홍구 교수 글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잘 알고 있다. 언론에서도 자주 다뤄서 잘 알고 있다. 김일성이 이끄는 유격대가 국내로 들어와서 일본군을 쳐부순 전투였다. 이 전투로 말미암아 기운 빠진 독립군이 힘을 냈다.

간삼봉전투는 아는 사람이 드물다. 나도 김갑수 작가를 통해서 처음 알았다. 일본군 시체가 산을 이룬 전투였다. 일본군이 시체를 리어커에 싣고 갔다. 지나가던 사람이 거 뭐요? 물으니 일본군이 갑오자(호박)요 말했다

왜? 너무도 부끄러워서!

소덕수, 대덕수 전투에 대해서도 나는 처음 배웠다. 중고등학교 국사 시간에 배우지 못했다. 일본군이 김일성 유격대를 양쪽에서 공격했다. 김일성 유격대가 살금 살금 빠져나갔다. 일본군끼리 서로에게 총질했다. 일본군 피가 바다를 이루었다. 남북통일이 이루어지길 고대한다. 이 땅에서, 전 세계에서 체게바라보다 김일성이 더 인정받는 날이 오기를 고대한다. 넬슨 만델라보다 김대중이 이 땅에서 전 세계에서 더 인정받는 날이 오기를 고대한다.

갈 길이 멀다.
그래도 길을 찾아 걸어가야지!

뚜벅 뚜벅!

?나태영

구보 씨, 철학을 생각하다.[철학자 구보씨의 세상생각]

구보 씨, 철학을 생각하다.[철학자 구보씨의 세상생각]

 

문성원(부산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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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구보 씨는 최근 수강생들이 써 놓은 강의 평을 보고 약간 충격을 받았다. 스스로 강의를 잘한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적어도 엉터리는 아니라고 자부하고 있었는데, 그런 자만심에 금이 간 셈이다. 짤막짤막하게 한두 줄씩 써 놓은 강의 평을 훑어보다가 구보 씨의 눈이 멎은 곳은 다음과 같은 글귀에서였다.

“쉬운 얘기를 너무 어렵게 한다.”

아니, 이럴 수가… 이건 이전부터 익히 들어왔던 평가와 좀 다르다. 어렵다는 얘기보다, 졸린다는 얘기보다 더 충격적이다. 물론 어렵다거나 졸린다는 평도 마음에 걸리지 않는 건 아니다. 그러나 거기에 대해선 나름의 변명거리가 있다. 우선, 어렵다는 거야, 원래 철학이 어려운 학문이 아닌가. 아직 분명한 해답이 없는 문제에 대해 생각하고 궁리하는 게 철학이니, 어렵고 골치 아픈 건 철학의 숙명인지도 모른다.

생각하기 싫어해서는 철학을 잘 할 수 없다. 또 설사 생각하기 싫다고 해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처지에 몰리지 않는다면 철학을 시작할 수조차 없다. 그러니 철학 공부를 하기로 마음먹은 이상, 여러분은 골치 아플 각오를 해야 한다. 대신, 철학자들의 사유를 따라 평상시 깊게 따져보지 못했던 문제들을 들추고 파헤치다 보면 세상을 바라보는 색다른 시야가 열릴지 모른다. 구보 씨는 처음부터 이렇게 수강생들에게 당부를 하곤 했다.

강의가 졸린다는 점에 대해서는 책임을 다른 곳에 돌리기가 쉽지 않다. 워낙 말이 좀 느린 편에다 밋밋한 어투이고 보니, 잠깐 내용을 놓치면 목소리가 졸음을 부르는 알파파의 리듬과 맞아 들어가기 십상이다. 때로 억지로 목소리를 높이려 해 보지만 괜히 어색하기만 한 경우가 많다. 그래서 구보 씨는 아예 졸리는 목소리라는 걸 인정하기로 했다. 좋게 생각하면 편안함을 주는 목소리라는 것 아닌가. 조분조분하고 느릿느릿하며 모가 나지 않은 부드러운 음색의 목소리. 어쩌면 심야 음악방송에 어울릴 법한 목소리.

“불면증 있는 분들은 제 강의를 녹음해 가서 잠 안 올 때 들으세요. 효과는 확실히 보장할 수 있어요. 정말이에요. 저도 잠 안 올 땐 혼잣말을 한답니다.”

구보 씨가 강의 때 곧잘 써먹는 자못 애처로운 유머다. 그렇다고 구보 씨의 강의실에는 조는 수강생들 투성이일 것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집에서는 졸되, 강의실에서는 졸지 말라고 구보 씨는 매번 부탁을 한다. 그래도 조는 사람이 있으면 다가가 깨운다. 졸린 목소리를 들으면서도 졸지 않는다는 데 철학을 향한 여러분의 의지가 있습니다. 목소리의 외피에 가려진 각성(覺醒)의 알맹이에 주목하시기 바랍니다…그래도 다시 졸려는 사람이 있으면 이런 슬라이드를 띄우기도 한다.

김어준 ⓒ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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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고투(苦鬪)를 해 가면서라도 구보 씨가 살리려는 것은 강의의 내용이다. 무엇보다 철학적 문제의식과 개념들이 어떤 배경에서 나온 것이고 또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설명하는 데 중점을 둔다. 어려운 내용을 가능한 한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하려고 나름 애를 쓰는 것이다. 그런데 쉬운 얘기를 너무 어렵게 한다니…맥 빠지는 평이 아닐 수 없다.

익명(匿名)의 지적 하나에 그렇게 괘념할 필요가 있나 싶지만, 막상 신경이 쓰이는 것을 보면 구보 씨 스스로도 내심 미심쩍은 구석이 있었나 보다. 어쩌면 구보 씨 강의만이 아니고 철학 자체의 처지가 마음에 걸렸는지도 모른다.

근래 대학에선 철학과가 폐지되거나 다른 과와 통폐합되는 일이 드물지 않다. 한남대와 경남대의 경우에는 철학과를 없애겠다는 결정을 내려져, 여기에 항의하는 교수와 학생들이 대학 당국과 맞서고 있다. 졸업생의 취업률이 떨어지고 입학생도 줄고 있다는 것이 주된 이유다. 이런 일은 국내에만 그치지 않는다. 대표적인 예로, 영국의 미들섹스 대학의 철학과는 그 명성이 상당했는데도 최근 폐지되고 말았다. 아직 항의하는 운동이 그치지 않고 있지만, 역시 돈의 논리에 밀린 이 사태를 쉽게 되돌릴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철학이 중요하지 않다거나 불필요한 학문이라고 대놓고 말하는 경우는 별로 없다. 오히려 우리 사회는 철학적 기초가 부족해서 문제라거나, 우리 사회의 발전을 위해서는 인문학과 철학적 사유가 절실히 필요하다고 강조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몇몇 상업적 기획물이 아니면 철학적 저작들은 잘 팔리지 않는다. 중요한 고전이 번역되어 나와도 초판 천부를 넘기기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니까 너희 철학자들이 더 정신 차려야 한다는 거야. 철학자들 자신이 변하지 않으면 안 된다구. 쉬운 얘길 어렵게 한다는 평은 내가 보기엔 정곡을 찌른 거 같아.”

“그래? 어째서?”

“철학자라는 사람들은 대개 텍스트에 갇혀 살잖아. 그러다 보니 쉽게 할 수 있는 말도 이런저런 개념을 통해서 하려고 하고 그 덕택에 얘기가 쓸데없이 어려워지는 거라구. 구보, 네가 좀 심하긴 하지만, 너만 그런 건 아닐 거야.”

“Y야, 개념적 사고란 중요한 거야. 개념은 말하자면, 생각의 다발을 엮는 얼개 같은 거거든. 왜, 우린 분명한 생각의 줄기가 없이 말하는 사람을 두고 흔히 ‘그 사람 개념이 없다’고 하잖아. 철학적 개념은 그런 개념들 가운데서도 아주 근본적인 것들이니까, 보기에 따라선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지. 근데 그건 우리가 일상적으론 근본적 사유를 잘 하지 않는다는 반증 아닐까.”

“푸… 구보야, 문제는 니들이 말하는 그 근본적이라는 게 대부분 낡고 비현실적이라는 거야. 대체 뭐가 근본적인데? 옛날에 근본적으로 여겨졌던 게 지금도 그렇다고 생각하는 게 니들의 병폐라구. 그거 내가 보기엔 아무래도 직업병 같애.”

“직업병?”

“그래, 철학자라는 오래된 직업 때문에 생기는 직업병. 철학의 역사가 길고 훌륭한 철학자가 많은 건 자랑거리겠지만, 니들은 그 역사와 전통에 따라야 깊이 있는 생각을 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것 같아. 그래서 결국 너네가 하는 게 뭐야? 헤겔이니, 칸트니, 플라톤이니, 공자니, 주자니 하는 사람들의 생각 속에서 헤매는 게 주 업무잖아. 그런데 그 사람들 생각이 오늘날에도 그렇게 중요해?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런 거 모르고도 잘 지내고, 그런 거랑 상관없이 생각하고 고민한다구.”

“Y야, 그건 오해야. 그렇게 따지자면, 우린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원리나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를 몰라도 그런대로 잘 지내고 그런 거 없이도 그럭저럭 생각하고 살거든. 게다가 철학자들이 옛날 개념에만 빠져 있는 건 아니야. 오히려 우리 시대에 맞는 적절한 개념들을 찾아내려거나 만들려고 노력한다구. 그게 쉬운 일이 아니라서 그렇지…그래서 더더욱 옛 개념들을 참조하는 게 중요한 거야…”

“혹시 너무 많이 참조하는 거 아냐? 그러니까 괜히 어려워지지. 그러다가 제 풀에 지쳐서 그런 참조 자체가 가치로운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고…”

어쩌면 Y 말이 맞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눈앞의 것만 보아서야 눈앞의 것도 제대로 보지 못하는 법이다. 때로는 돌아가는 것이 가장 빠른 길일 수도 있다. 우리의 현실 자체가 다면적이고 다층적이며 다양한 잠재성을 안고 있는 것인데, 어떻게 거기에 적합한 문제의식이나 개념이 단번에 나올 수가 있는가. 야구선수가 안타나 홈런을 치기 위해서는 무수한 연습과 헛방망이질이 있어야 하지 않는가.

물론 오늘의 현실은 옛날과 같지 않다. 과거에 중요하게 여겨졌던 철학적 문제들 가운데는 이미 해결되었거나 그 탐구 영역이 다른 분야로 넘겨진 것들도 많다. 이를테면, 우주의 본성이나 됨됨이에 관한 문제들은 이제 천체 물리학이나 미립자 물리학이 다루고 있고, 근세의 중요한 철학적 주제였던 인식론적 문제들의 많은 부분은 이제 심리학과 생리학의 소관 사항이 되었다. 인간 사유의 본성에 관한 문제들조차 오늘날은 진화심리학이나 뇌생리학 등에서 다루어 많은 성과를 내고 있다.

철학에 남은 것은 이제 사실의 문제들이 아니라 가치의 문제, 규범의 문제들이라고 할 만하다. 사고의 규범을 다루는 논리학, 행위의 규범을 다루는 윤리학이 아직 철학의 고유한 영역으로 남아 있다. 그것마저도 규범적 사고의 현상, 규범적 행위의 현상이 문제될 때면 그것들을 데이터로서 다루는 심리학이나 사회학 따위의 대상이 되고 만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철학은 결국 사유의 내적 연결을 문제 삼는 도구적 학문이라거나, 사회역사적 상황에 따른 규범적 행위양식과 가치체계를 정당화하거나 비판하는 이데올로기적 분야라는 규정이 나오기도 한다.

그렇지만 철학의 어깨가 마냥 가벼워지기만 한 것은 아니다. 가치의 문제는 의미의 문제와 엮이어 오랜 숙제처럼 철학을 겨냥한다. 모름지기 철학자란 여전히 삶의 의미나 세상의 존재 의미 같은 거창한 문제에 답을 내놓아야 한다는 듯이 말이다. 이런 면에서 철학은 예술이나 종교와 같은 전선에 선다. 물론 예술이나 종교의 무기가 감성이나 신앙인 것과는 달리, 철학의 무기는 사유다. 이전에는 이 사유가 종교적 믿음이나 과학의 성과에 기대어 의미를 길어 올렸다면, 오늘날은 예술적 감성을 가까운 파트너로 삼는 경우가 많아 보인다.

구보 씨가 구보 씨가 된 것도 사실 그런 탓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구보 씨는 원래, 박태원의 구보 씨에서부터 최인훈의 구보 씨, 주인석의 구보 씨에 이르기까지 소설가가 아니었던가. 그런데 철학자 구보 씨라는 뒤떨어진 변용(變容)이 등장하게 된 것은 알게 모르게 문학이나 예술에 대한 철학의 친화적 쏠림이 작용한 결과가 아니겠는가.

“구보야, 너 또 얼버무리려고 하는구나. 네가 구보씨가 된 건 그저 개인적인 빌붙음 때문 아냐? 그걸 어떤 추세나 경향 탓으로 돌리려 하면 곤란하지.”

“하하, Y야, 꼭 그런 건 아냐. 말하자면 그와 같은 면도 있다는 거지. 그리고 그게 철학의 현황이나 궁지를 보여준다는 얘기고.”

“글쎄, 내 생각에 그건 별로 당당하지 못한 태도 같아. 현황이니 궁지니 하면서 그 뒤로 숨으려는 것처럼 보여. 언제 철학이나 인문학의 처지가 어렵지 않은 때가 있었니? 진짜 철학자라면 거기에 당당하게 맞서야 하지 않을까?”

“허…진짜 철학자라…그런데, 그게…”

“왜, 자신 없어?”

“Y야, 그렇게 윽박지를 일은 아니라고 봐. 모든 사람이 전사(戰士)가 될 수는 없는 일 아냐? 나도 나름대로 노력 중이라구. 어설프고 부족해 보이겠지만, 이 구보 씨 이야기도 그 일환이고 말이야. 기왕이면 좀 너그럽게 봐 주라.”

“….”

“안 돼?”

“구보야, 되고 안 되고가 어딨니? 네 말대로 다양한 게 세상산데… 어쨌든 이제 네 얘기에서 나는 그만 빼 줘.”

“어, 그럼 곤란해. 네가 빠지면 사람들이 그나마 무슨 재미로 이걸 보겠냐.”

“그거야 구보 네 사정이고…”

“Y야, 그렇게 말하지 마. 네 사정이 곧 내 사정이지. 네가 정 그렇게 나온다면 나도 당분간 쉬는 수밖에…사실, 나도 그럴까 생각 중이었어. 쉬면서 다른 가능성을 생각해 볼께. 이를테면 구보씨의 철학 강의 같은 거 어때? 역사철학이나 문화철학 같은 거. 조분조분한 목소리로 하는 도저히 졸 수 없는 강의, 쉬운 얘기를 어렵게 하는 것이 아니라 어려운 얘기를 쉽게 하는 강의…그게 언제부터 가능할지 모르지만, 하여튼 그런 거 시작할 때면 너도 다시 도와줄 거지?”

한국 사회의 특수한 병적 상태들은 치유될 수 있을 것인가[시대와 철학]

예외상태와 합리성의 신화적 퇴행 : 한국 사회의 심리적 병리상태에 대하여

 

?한상원(베를린 대학)

 

예외상태의 일상화. 벤야민과 슈미트를 이어받아 아감벤이 사용한 개념이다. 아감벤은 일상, 즉 규칙이 되어버린 예외상태 속에서 법의 지배가 실현된다고 주장한다. 나는 이 개념이 한국사회만큼 잘 적용되는 곳도 없다고 생각한다. 모든 정치적 영역부터 사적 영역까지 우리의 사고를 규정하는 건 일상이 아니라 일상이 되어버린 예외상태가 아닐까? 현직 국회의원이 간첩이었고 내란을 준비하고 있었다고 선동하면, 국정원이 선거에 개입하고 호남인들을 죽이자고 선동해도 정상참작이 된다. 일상이 예외를 규정하는 게 아니라 예외가 일상을 지배한다.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일상이 된 예외상태의 사례는 분단이다. 한국은 70년 가까이 남북간 준전시상황이고, 성인 남성은 2년간 전쟁훈련을 받으며, 실제로 북한정권은 핵무기 쏘겠다고 툭하면 협박해온다. 이러한 일상적 위기를 계기로 삼아 국가권력은 아래로부터의 힘으로 쟁취한 형식적 민주주의의 원칙에 대해 공격을 감행한다. 2010년 북한이 연평도에 미사일 공격을 하자, 이 패닉상태 속에서 여당은 과감하게 예산안 날치기를 감행한 바 있다. 국정원의 대선 개입 비판이 일자, 여당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NLL 포기발언을 했다면서 쟁점 전환을 시도했다. 툭 하면 등장하는 맹목적인 ‘종북’ 여론몰이를 보면, 이러한 낯선 타자에 대한 공포와 적개심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자기반성적 이성의 목소리를 요구하는 것 자체가 무리인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북한 트위터 계정을 리트윗했다는 이유로 누군가가 몇 년간 구속과 압수수색 그리고 재판에 시달려야 하는 이 상황은 온라인 매체까지 스며든 일상화된 예외상태의 사례다.

분단 문제는 한국인들의 일상 속에 숨어든 병리적 심리항태의 사례 중 하나다. 외부의 적(북한)에 대한 공포와 이로 인한 내부의 적(우리 안의 간첩)에 대한 광기 외에도, 양적 경제성장에 대한 비이성적 집착, 외적인 국가적 상징(한류, 김치, IT 등)에 대한 과도한 우월의식 등, 한국인들의 심리상태는 그야말로 병적이다.

이런 이유에서인지, 한국에서 야당을 지지하는 정치적 경향의 사람들은 흔히 ‘상식이 통하는 사회’라는 모토를 즐겨 사용한다. 이 용어는 한국 사회를 상식(형식적 민주주의와 법치)이 아니라 비상식(부패, 학벌, 권위주의, 지역감정 등)이 지배한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했을 것이다. 여기서 ‘상식’이라는 단어는 철학적으로 볼 때 ‘합리성’이라는 단어와 조응하는 듯하다. 즉 이성적인 견지에서 볼 때, 한국 사회는 합리성이 아닌 비합리성에 의해 지배된다는 비판이다. 이런 비판이 겨냥하는 궁극적 목표는 따라서 ‘합리성이 그 순수한 형태로 관철되는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자본주의’일 것이다.

그런데 이런 비판이 놓치고 있는 점은,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비상식’, 즉 ‘비합리성’이 실은 그 대립물인 ‘합리성’의 산물이라는 점에 있다. 한국 사회에 있어서 합리성의 기획, 근대적 계몽의 기획은 매우 늦게 추진될 수밖에 없었는데, 그것은 5?16 쿠데타 이후 등장한 박정희와 군부세력에 의해서였다. 여기서 말하는 합리성이란 물론 르네상스적 인문적 의미의 계몽주의와도, 유럽에서 시민사회와 보편선거권 이후 도입된 정치적 의미와도 구분되는, 산업혁명 이후 유럽을 지배한 경제적, 양적 합리성과 유사한 개념이다. 다시 말 해, 군부정권이 추진한 ‘위로부터의’ 합리성 기획은 합리성 개념이 포괄하는 다양한 맥락을 추상해버리고, 오로지 양적 성장을 지상과제로 설정한 일면적인 합리성인 셈이다.

4?19 혁명의 주요한 요구 중 하나는 ‘자립경제 건설’ 이었다. 이것은 곧 미국의 원조에 종속된 국가를 근대적 자주국가로 만들어야 한다는 요구를 반영한다. 쿠데타 이후 집권한 박정희와 군부세력은 이승만의 자유당도, 4?19혁명 이후 정권을 잡은 민주당도 수행하지 못한 급속한 근대화를 추진하여 원조경제에서 탈출하고, 자립적인 근대적 산업국가를 만든다. 이 점에서 5?16은 4?19의 계승이라는 우파들의 역사관은 일부나마 타당성을 인정받는다. (물론 그것이 5?16과 독재를 정당화하지 않는다는 점은 이 글에서 논하지 않겠다.) 이 점에서 박정희는 한국 사회에서 유럽의 17~18세기 절대왕정 내지 계몽군주에 상응하는 위치를 차지한다.

그러나 일종의 합리성 기획이라고 볼 수 있는 박정희의 근대화 프로젝트는 동시에 한국사회의 병리적 퇴행을 낳는 원인이기도 했다. 양적 성장에 대한 집착과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결과론적 규범론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성장에 이바지하지 못하는 모든 것은 쓸모없는 것으로 배척당한다. 민주주의와 인권의 담론은 성장의 논리 속에서 사라져버렸다. 오늘날 국정원이 대선에 개입했으며, 이를 무마하고 여당 후보에게 유리한 국면을 조성하기 위해 경찰 수뇌부가 수사를 방해했다는 증거와 증언들이 등장함에도 박근혜 정부의 지지율이 고공행진을 유지하고 있는 이유도 멀리 보면 이러한 한국 근대화의 실패에 기원을 두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한국 사회의 ‘계몽군주’ 박정희는 ‘신화'(일인숭배, 딸로 권력세습)로 퇴행했다. 이 퇴행은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계몽의 변증법]에 등장하는 ‘신화가 된 계몽’ 개념과 놀라울 정도로 부합한다. 합리성(자본축적과 경제성장)은 비합리(박정희 신화와 독재 정당화)로 변증법적으로 전화된다. 이러한 설명도식은, 한국사회의 비합리적, 병리적 심리상태를 설명해줄 수 있는 여러 각도의 이론적 설명 중 하나로 자리할 수 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나는 한국 사회 구성원들의 심리적 병리상태를 “비합리성으로 전도된 합리성”으로 규정하고 그 배경에 1. 일상화된 예외상태로서 분단, 2. 지난 세기 이뤄진 합리성 프로젝트의 실패가 있다고 규정한다. 이를 개념규정하기 위해 나는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계몽의 변증법]을 차용하였다. 그런데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비판이 지적하는 급진적인 핵심은 합리성이 양적이고 도구적인 성격으로 후퇴하는 것이 근대 자본주의 사회의 합리성 프로젝트(계몽)의 필연적 귀결이라는 점에 있다. 교환원칙과 이윤축적 원칙에 기반을 둔 근대 자본주의 사회는 합리성이 지닌 여러가지 잠재력을 하나의 것 ? 경제적, 양적, 도구적 이성 ? 으로 환원하는 근본적 배경이다. 위로부터의 근대화라는 합리성 기획이 신화로 퇴행한 것은 애초에 합리성을 하나의 축을 중심으로만 사고하게 만든 교환원칙과 이윤축적의 메커니즘이었다. 따라서 한국사회의 특수한 심리적 병리상태에 대한 진단은 교환원칙과 이윤축적이라는 보편적 구조에 대한 변화와 결부되어 있음은 자명하다. 그러나 보편적 구조의 근본적 변화가 당장 실현될 수 있는 과제가 아닌 한에서, 어떻게 제한된 조건 하에서 한국 사회의 특수한 병적 상태들이 치유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물음은 여전히 우리를 무거운 고민 속으로 이끌고 있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릴레이 시국선언④-국가폭력의 완성 ? 민주주의에 대한 공격

국가폭력의 완성 ? 민주주의에 대한 공격

 

이원혁(한철연 회원)

 

국정원 선거개입 사건에 대해 연일 계속되는 각계각층의 시국선언이나 촛불집회에도 불구하고 전·현직 정보당국의 책임자들과 또 그 연계가 의심되는 전·현직 대통령들은 그 어떤 책임 있는 행동이나 발언 없이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오히려 여당은 대선불복이니 국론분열이니 하면서 적반하장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이런 뻔뻔함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그들을 지지하는 소위 콘크리트지지층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믿고 있는 국가권력의 강고함에서 기인하는 것 같다. 국가라는 이름과 힘에 의해서라면 그 어떠한 행위도 정당화될 수 있으며 또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는 믿음이 그들의 행동과 언행을 가능하게 하는 것 같다. 이것이 이번 사건이 유신시대를 연상시킨다고 말하는 이유기도 하다. 국가에 의해 진행되는 강압과 음모에 대해 그것을 행한 이들이 도덕적, 양심적 가책을 받지 않고 카메라와 국민 앞에서 저토록 당당한 것은 국가권력은 그래도 되고 그럴 힘이 있으며 그 힘이 자신을 보호해 줄 것이라는 믿음 덕분에 가능하다. 이는 과거 권위주의시대의 권력층의 전형적인 모습이며 민주주의 정치와 가장 동떨어진 의식이다.

근대 사회계약론의 환상과는 달리 국가는 사람들의 합의로 구성,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국가 자신의 거대한 폭력성에 의해 국민을 구성하고 포섭하여 국가의 체계를 유지시켜온 것은 자명해 보인다. 그러나 지난 세월 지난한 민주주의 투쟁은 이러한 국가 폭력을 견제해 왔으며 이를 통해 사회 공동체의 붕괴를 막아왔다. 근대 이후의 국가는 사회와 국민에 대한 수많은 폭력과 강제를 진행해왔지만 민주주의 본질에 대해서는 감히 범하지 못했다. 설령 범하는 국가권력이 있었더라도 패망하는 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라 그 국가권력이었다는 점은 역사가 명백히 보여줘 왔다. 즉 국가권력과 그것에 심취한 권력자는 전제적 권력을 완성하기 위해 국민을 넘어 민주주의에 대한 공격까지 진행하지만 그것의 말로는 손에 잡히는 역사책 한권만 펼쳐 보아도 쉽게 알 수 있다.

지금 여당과 청와대는 부정선거 발언이나 대선불복은 금도를 넘은 것이라 말하지만 정작 금도를 넘은 것은 정보기관을 통해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근간인 보통선거의 근간을 흔든 권력이다. 이번 사건은 여당의 표현대로 금도를 넘은 사건이며 사회적 금기의 파기는 묻혀 질래야 묻혀질 수 없는 것이다. 무능한 야당의 무능한 대응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파장이 날이 갈수록 더욱 커져가는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또 책임 당사자의 뻔뻔함이 이대로 계속간다면 뿌리가 흔들리던 민주주의는 오히려 들풀처럼 일어나 뻔뻔하게 흔들던 손을 날카롭게 베어버릴 것이다.

 

평생 ‘을’인 운명, 우리는 벌레다![철학자의 서재]

?카프카의 <변신>[철학자의 서재]

 

윤지선 (한철연 회원·프랑스 파리8대학 철학박사)

 

* 이 글은 <프레시안>의 기사를 재게재 한 것임을 알립니다.
 
 

갑을관계 속, 을의 퇴행 관찰기

 

2013년 남양유업 사태를 시발점으로 하여 불평등하고 위압적이던 갑을관계에 대한 폭로와 비판이 대한민국 사회의 뜨거운 논쟁점으로 부각되었다. 약육강식의 논리가 팽배한 갑의 공화국, 대한민국을 비롯한 자본주의 사회는 전근대 불평등한 신분 사회로부터 얼마만큼 나아갔는가? 갑을관계란 본래 계약서에 명시되어 있는 자율적인 두 계약 주체의 관계를 일컫는 말이었는데, 이들 사이를 규정짓는 힘의 관계가 출발선에서부터 절대 강자와 절대 약자의 구도로 불평등하게 설정됨으로써 거기에서 파생되는 일체의 이익과 권리의 배분 또한 불합리한 방식으로 한쪽에만 편중되는 현상을 낳았다. 대한민국의 갑을관계 논쟁은 우리 사회 전반에 걸쳐 나타난 상하종속의 위압적이고 불공정한 권력 구도 관계에 대한 충격적인 폭로로서, 과연 대한민국은 과거 전근대 신분 사회의 불평등을 갑을관계란 자본주의적 프레임을 통해 또 다른 방식으로 재생산·재편성하고 있진 않는지 심각히 되물어야 할 것이다.

프란츠 카프카(1883~1924)의 <변신>은 폭력적 갑을관계 속에서 고군분투하던 노동자, 을-외판원 그레고르 잠자의 퇴행 관찰일지에 해당된다. 프란츠 카프카는 생전에 노동자 상해 보험회사에서 보험담당관으로 일하며 노동자들의 육체적·심적 고통을 생생히 목도해 왔으며 상해를 입은 그들이 망치를 들고 가서 회사에 항의하는 대신 오히려 회사 측에 감사를 표하는 것을 보고 놀라움을 표시했다고 한다. 자본주의라는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약자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한 그 어떠한 사회적 안전장치도 보장되지 않을 때 과연 어떤 일이 일어날까? 카프카는 노동 소외와 관료주의의 폐해를 신랄하게 비판하며 자신의 작품들을 통해 사회경제적 약자들의 생지옥을 발현하며 현대 자본주의의 묵시록을 써내려간 예언자이기도 하다.

▲ <변신·시골의사>(프란츠 카프카 지음, 전영애 옮김, 민음사 펴냄). ⓒ민음사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고용주와 노동자, 임대주와 세입자, 남성과 여성, 프랜차이즈 대기업과 대리점주들 간의 비대칭적 권력관계는 탐욕스러운 속도로 강자는 더 강하게 약자는 더 약하게 진화시킨다. 이러한 의미에서 카프카의 <변신>은 약자, 을들의 도태·퇴화관찰지인 동시에 강자, 갑들의 괴물적인 몸 불리기에 관한 이면의 기록서이기도 하다. 매일 이른 새벽 출장시간을 맞추기 위해 선잠을 설치며 깨어난 외판원 그레고르 잠자는 벌레로 변신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 갑의 갖은 감시와 억압, 부당한 권력행위로 인해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의 무게마저 초경량화되어 취급되는 을의 처지가 점차 퇴화되고 도태되는 벌레로의 퇴행으로 그려지고 있다. 재벌 대기업들의 비대한 문어발식 확장과 가진 자들의 폭식증적 몸 불리기와는 반대로 뼈와 살이 노골노골해질 정도로 착취당하는 약자들에겐 뼈와 살이 한 겹으로 녹아든 것 같은 딱딱한 껍질만으로 이루어진 벌레로의 진화만이 남은 것인가? 일하는 벌레, 돈 버는 벌레, 착취당하는 벌레로의 고단한 삶에 두 눈을 꿈벅이며 곪은 상처를 핥으며 ‘억울하면 갑이 되어라’라는 문구에 세뇌되어 사회구조적 불평등을 다만 나약한 자기 탓-못 배운 탓, 못 가진 탓, 못난 탓-으로 여기며 자기분노를 되삼키게 하는, 이 멋진 자본주의 정글에서의 약자 수난기가 우화적으로 펼쳐지고 있는 것이 카프카의 <변신>이다.

사회경제적 생존게임에서 착취되고 도태된 약자가 유일하게 돌아갈 수밖에 없는 공간은 자신의 방이며 가정이다. 자기 방 안에 유폐되어 일체의 사회적 관계로부터 고립된 히키코모리도 카프카적 의미의 벌레로의 퇴행의 한 형태이다. 벌레로 변한 그레고르 잠자에게 유일하게 허락된 영역인 자신의 방은 취업준비생, 비정규직 아르바이트생, 명예퇴직자, 장애인, 노인들의 쉼터인 동시에 외부 활동 영역이 철저히 제한된 감옥으로서 기능한다. 벌레가 되어 피할 도리 없이 가족 구조 내에 산재한 문제들과 맞닥뜨리게 된 그레고르 잠자의 위기는 곧 현대사회를 살고 있는 우리 자신의 위기와도 맥을 같이한다.
 
 

가계부채의 덫, 가족구성원의 무덤

 

“부모님이 지고 있는 빚만 갚아드릴 수 있는 돈만 모아진다면, 아마도 5~6년쯤 지나야 될 일이지만, 그렇게만 된다면 나는 반드시 (직장을 그만두는 것을) 결행할 것이다! 그것은 내 인생의 전환점이 되겠지? 그건 그렇다 치고, 지금은 일어나야만 한다. 기차가 5시에 출발하니까” (<변신·심판-세계명작131>(유한준 옮김, 대일출판사 펴냄) 16쪽)

벌레로 변하여 거동조차 불편한 그레고르 잠자의 고뇌에 찬 되뇌임을 읽으며 마치 현재 대한민국의 소시민의 걱정거리를 듣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국내 가계부채가 1000조를 육박하고 있는 대한민국은 그야말로 부채를 권하는 사회, 부채가 필수악인 된 사회이다. 자녀 사교육을 위해, 대학 등록금을 위해, 내집 마련을 위해, 장가를 가기 위해, 노후 대책을 위한 사업을 하기 위해… 이른바 대한민국 사회에서 ‘인간답게 살아남기 위해’, 영원한 약자로 도태되지 않기 위해 오늘도 우리는 대출을 감행한다. 그레고르 잠자의 출근을 채근하러 온 지배인의 가정방문에 온 집안 식구들은 잠자의 결근으로 인해 행여 그가 해고를 당하여, 사장에게 진 부채를 갚지 못해 모두가 괴롭힘을 당하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한다. 부채의 도식은 포식자의 덫의 도식과도 유사하다. 포식자, 가진 자가 던져놓은 미끼인 고리대금을 자신을 위한 달콤한 미래의 양식으로 착각하여 다가오는 피식자, 못 가진 자들의 헛된 희망은 단시간 내 죽음과도 같은 깊은 절망으로 바뀐다.
 

프란츠 카프카(1883~1924)/ 출처: louisien.com


 

그레고르 잠자는 부채의 덫에서 온 가족을 살려내기 위해 사력을 다하여 앙상한 다리들과 더듬이로 이루어진 낯선 몸뚱이를 이끌며, 가장으로서의 책임감과 직원으로서의 사명감에 대한 자기변호를 쉴새 없이 읊조리며 자기 방문을 열고 지배인과 가족들 앞에 출몰한다. 더 이상 쓸모 없게된 앙상한 벌레로 퇴화한 그의 출몰에 지배인은 아연실색하여 도망치고 가족들은 힘겹게 기어 나온 그를 다시 방 안으로 쫓아버린다. 그는 하루 아침에 한 집안의 가장에서 일할 수 없는 불구자로 바뀌어 방 안에 감금되어 버리고 만다. 벌레로서의 낯선 사지조차 제대로 움직일 수 없는 그레고르에게 과연 어떠한 일이 기다리고 있을까?
 
 

우리는 모두 다 퇴화한다. 그러나 복지 사각지대는 오롯이 가족이 책임진다?

 
‘인간은 항상 진화하고 성장하며 소통하는 존재’라는 믿음은 환상에 불과하다. 인간은 25세를 기점으로 노화를 시작하며 시간의 흐름에 따라 신체적·정신적으로 퇴화하며 그렇게 서서히 소멸의 시점으로 다가간다. 젊은이로 사는 것보다 노인으로 인생을 사는 시기가 훨씬 길어진 인간에게 육체적·지적인 퇴행은 명백한 자연의 이치이다. 소위 ‘정상인’으로 판명된 자들에게 신체적 운동 능력이 둔화되고 지적인 활성화가 더뎌지는 퇴행의 시기가 도래한다는 사실은 참으로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더구나 대한민국은 더디게 진화하는 자들에게 유난히 혹독한 나라이다. 장애인들, 노인들, 무직자들, 알츠하이머 환자들은 우리사회에서 철저히 비가시화되고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방 안에만 숨어산다.

타인들과 소통하는 언어를 잃고 소위 ‘정상인’의 습성들을 망각해나가는 벌레로 퇴행한 그레고르 잠자는 현대 사회가 소외시키고 있는, 진화의 속도에서 이탈된 사람들의 처지를 빗대고 있다. 그레고르의 누이와 어머니는 벌레로 변한 그레고르가 방의 벽과 천장을 기어 다니는 데 불편함이 없도록 하기위해 방안의 모든 가구들을 들어내는데, 그레고르는 필사적으로 초상화 액자 하나만은 사수하고자 고군분투한다. 비록 모든 사회적 소통 수단-상호 대화와 자기 실현 가능성을 잃고 직립보행에서 기어 다니는 처지로 바뀐 그이지만, 문화를 향유하고자 하는 욕망은 그가 가진 존엄성의 마지막 보루로서 포기하지 않으려고 애쓰다가 그만 아버지가 던진 사과에 등을 가격당하고 만다. 진화의 속도를 거스르는 이들에게 허락된 것은 오로지 주는 먹이를 먹고 조용히 순응하는 밥벌레로서 충실한 것이다.

절대적 사회적 약자인 그들은 이렇게 일체의 사회적 삶에서 유리된 채 복지 사각지대에 내던져 진다. 오로지 가족 구성원의 희생과 조력 없이는 생존마저 위협받는 장애인들과 알츠하이머 환자, 노인들은 가족들과의 소통에서도 철저히 제외된 채 방목과 사육을 당한다. 그레고르의 늙은 아비는 수위로 재취업하고 눈이 어두운 어머니는 바느질삯으로 가정을 돕고 어린 누이는 학업을 이어나가지 않고 가게 점원으로 취직을 해서 빚을 갚고 가정 생계를 꾸려 나가기 위해 사력을 다하는 동시에 벌레가 된 그레고르를 돌보야만 한다. 방 안에 유폐된 그레고르가 누이의 바이올린 연주에 홀린 듯 기어 나와 거실에서 음악을 향유하다가 집 안의 하숙인들에게 발각되었을 때, 벼랑끝으로 내몰린 가족들은 그레고르의 존재 자체가 가족 공동의 평안과 미래를 좀먹는 위협 요소임을 절실히 깨닫는다. 예전에 아버지가 던진 사과가 그레고르의 등에 박혀 곪고 부패하여 그가 숨을 거두게 되었을 때, 온가족은 오랜만에 나들이를 떠나고 한결 가벼워진 미래를 향해 기지개를 키는 것으로 이야기는 막을 내린다.

한 사회가 사회 구성원 개개인의 안위와 복지에 무관심하고 방관자적 입장을 취할 때 사회적 약자들의 마지막 보루인 가족은 그들과 함께 몰락하고 만다. 끝내는 가족조차 서로가 서로를 증오하고 몰락하게 만드는 사회를 그린 카프카의 작품은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묵시록과도 같다. 약육강식의 사회, 가계 부채의 덫, 복지 사각지대의 유일한 보루로서의 가족의 희생, 사회적 약자들의 도태 등과 같은 화두는 탐욕스런 자본주의 사회를 관통하는 문제들이기에, 카프카의 <변신>은 오늘도 여전히 현대적이다.

 

‘함과 됨’의 차이[철학을다시 쓴다]-⑧

‘함과 됨’의 차이[철학을다시 쓴다]-⑧

 

윤구병(도서출판 보리 대표)

 

* 이 글은 보리출판사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이번 강의 주제는 ‘함과 됨’입니다. ‘무엇을 할 것인가’ 하는 질문이 한 개인의 자각으로부터 싹트는 것은 도시사회에서입니다. 농경사회에서나 유목사회에서는 이런 질문을 머릿속에 떠올리지 않습니다. 무엇을 할 것인가 하는 것은 농경사회에서는 노인들이 결정해주고, 유목사회에서는 유목민들을 이끌고 목초지를 찾아서 앞장서는 사람들이 결정해 줍니다. 도시사회에 들어서면서 비로소 한 개인에게 이 질문이 구체적으로 떠오릅니다. ‘뭘 할까?’ 레닌의 책으로 유명해진 질문이지요. ‘무엇을 할 것인가?’

‘함과 됨’은 둘 다 철학적으로 아주 중요한 개념입니다.

“우리는 어떤 때 ‘한다’ 하고, 어떤 때 ‘된다’고 하지요? ‘함’과 ‘됨’이 운동의 서로 다른 두 가지 형태라는 것은 분명하죠. 사람이 하는 것이든, 아니면 다른 것이 하는 것이든, 또 무엇이 어떻게 되든 ‘하는 것’, ‘되는 것’은 모두 운동을 나타내는데 이 가운데 하나는 능동성이 크고, 하나는 수동성이 큰 운동 형태입니다. 베르그송 같은 사람들은 ‘태초에 운동이 있었다’고 이야기하는데, 운동이 뭡니까?”

“시간과 공간에서 뭔가 바뀌는 것이요.”

“원자론에서는 운동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습니까? 이를테면 고대물리학자들이 이야기하는 운동과 현대 물리학자들이 이야기하는 운동은 어떻게 다릅니까? 조금 더 쉬운 문제부터 접근을 할까요? 고대원자론자들에 대해서 잠깐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고대원자론자들 전통이 로이키푸스(Leucippus)에서 시작해서 데모크리토스(Democritus), 에피쿠로스(Epicuros), 루크레티우스(Lucretius)……이렇게 이어져 내려오는데, 이 사람들이 밑에 깔고 있는 가장 큰 가정이 무엇입니까? ‘이 세상은 원자와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겁니다. 그 외에는 없다, 원자는 수적으로 무한하고 공간은 외연으로 무한하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운동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죠?”

“원자들의 충돌로.”

“예, 충돌과 반동으로 이 세상이 생겨났다 그러는데, 그러면 원자들이 왜 충돌하게 됐는가? 원자에 무게가 있습니까? 있지요? 그런데 무게가 있는 것들은 현상계에서 모두 수직 하강 운동을 하고 있잖아요. 그렇죠?

우리가 현상적으로 보면 원자는 무게가 있고 무게가 있는 것은 외부의 간섭이 없으면 수직하강운동을 한다, 그런데 무한한 공간 어디에 앞, 뒤, 좌, 우가 있느냐? 그 질문에는 어떻게 대답을 하죠?”

“사방으로 낙하한다.”

“사방으로 낙하한다는 거, 제 갈 길이 있어서 뿔뿔이 흩어지게 되면 거기서 충돌을 하게 되나요?”

“빨리 떨어지게 되면…….”

“저 친구는 지금 갈릴레오 이전의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질의 물리학은 갈릴레오가 피사의 사탑에서 실험한 뒤로 다 사라졌습니다. 지금 말씀하신 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질의 물리학인데, 현상계를 이루는 중요한 것들에는 저마다 제 자리가 있다, 불은 위로 올라가는 상승운동을 하고, 돌이나 흙은 밑으로 떨어지는 하강운동을 하는데 그 이유는 그 운동체의 본성상 그렇게 되어 있다고 질로 설명을 하는데, 갈릴레오의 실험이 있은 뒤로 그게 다 사라져 버립니다.”

말하자면 등질적인 운동이 나타나면서 이른바 ‘고전물리학’이 자리 잡게 됩니다. 뉴턴(Newton)이 앞장섰고 라플라스(Laplace)가 철학이론으로 뒷받침을 하죠. 등질적인 운동을 뒷받침하기 위한 전제가 뭡니까? 등질적인 공간과 등질적인 시간이 나와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우주에 등질적인 것이 어디 있습니까? 시공을 통틀어 꼭 같은 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최초로 우주 공간을 등질적으로 보고 원자를 등질적인 실체로 본 것은 고대원자론자들입니다. 대단히 큰 혁명입니다. 등질적인 시간과 등질적인 공간이 어떻게 확보되는가? 그리고 정말 자연계에 등질적인 시간과 등질적인 공간이 실재하는가? 혹시 우리 의식에만 있는 시간과 공간은 아닌가?

아이작 뉴턴(1642~1727) / 출처: www.bbc.co.uk

데모크리토스 같은 사람은 원자들이 이합집산을 해서 이 우주가 생성된다고 이야기할 때 우연히 그 가운데 하나가 충돌을 하게 되면서, 여러 놈이 그에 대한 반작용을 하여 복합체들이 생겨났다, 없어졌다 하게 된다고 이야기합니다. 중요한 발언 가운데 하나입니다. 원자가 운동의 주체다 하는 말이 겉보기엔 가장 무책임한 이야기 같고 어쩌다 그렇게 됐다는 말도 무책임한 말 같지만, ‘우연’이라는 것을 끌어들인 것은 서구 ‘운동’ 이론을 뒷받침하는 주춧돌을 놓은 것이라고 보아도 됩니다. 처음에 제가 여러분들에게 설명하려다가 곧 포기하고 말았는데, ‘컨틴젠시’(contingency)라는 말 생각나요? 당구공을 예로 들어서 얘기했죠. 원자론도 로이키푸스에서 데모크리토스, 에피쿠로스에서 루크레티우스로 오는 동안 그 나름대로 진화를 합니다. 이 이론이 날이 갈수록 세련된 모습을 띠는데, 루크레티우스는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De Rerum Natura)》(로마의 시인이자 유물론 철학자인 루크레티우스의 철학시)라는 책에서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우리가 현상계에서 바람 없는 날 빗방울이 떨어지는 것을 보듯이 원자가 위에서 아래로 수직 하강운동을 하는데, 정해지지 않은 시간에 정해지지 않은 곳에서 경사운동을 한다, 무수히 많은 원자가 무한한 공간 속에서 수직 하강운동을 하는데 그중에 한 놈이 살짝 휜다, 그렇게 해서 충돌이 일어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 결과로 이 우주 삼라만상이 모두 충돌과 반동을 일으켜서 형성되고 해체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아주 복잡한 증명들을 합니다. 우주공간이 무한하고 원자가 유한하다고 할 때 어떤 결론이 나오느냐, 우주공간이 유한하고 원자가 무한하다고 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느냐, 우주공간과 원자가 둘 다 유한하다고 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느냐에 대해 질문하고 그런 경우에는 이런 일이 생길 것이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서양 철학의 전통이 그리스 철학에 기원을 두고 있고, 그리스 철학은 인도철학과 중국철학과는 다릅니다. 물론 인도철학과 중국철학에도 자기가 한 말에 대해서 이론적으로 증명하는 전통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대체로 동양철학의 전통은 증명에 약하고, 또 굳이 증명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큽니다.

그러나 서양철학에서는 자기가 하는 말에 대해서 책임지고 증명을 해서 다른 사람이 수긍을 해야 그 다음 단계로 진행을 합니다.

정지해 있는 것은 정지해 있는 것이고, 운동하고 있는 것은 운동하고 있는 것이다, 외부에서 힘이 가해지지 않는 한 정지해 있는 것은 영원히 정지해 있고, 운동하고 있는 것은 그대로 운동한다, 그 운동은 등질적인 수평운동이다, 수직으로 하는 중력에 의한 운동은 가속이 붙지요. 이 운동 관념이 교과서에 나오는 거의 의심할 수 없는 진리로 우리 머리 속에 박혀 있는 운동 관념인데, 운동과 정지는 다르고 운동하는 것은 정지하지 않고 정지하는 것은 외부 힘이 가해지지 않는 한 정지한다는 식입니다. 여러분 공간은 운동을 해요, 안 해요? (대답 없음) 공간이 운동하지 않는다는 것이 사실인가요? 여러분들 여기서 수학이나 자연과학, 물리학 하는 분 계십니까? 없어요? 실제로 등질적인 공간이란 측면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공간관념이란 것은 유클리드기하학 공간입니다. 이를테면 삼각형을 내각의 합이 180도인 세 직선으로 이루어진 폐쇄된 평면공간이라고 말할 때, 우리는 유클리드 기하학 공간을 받아들이고 있는 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