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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그리스 정치철학의 기원과 의미-한철연 신년회 기념 강연회

고대 그리스 정치철학의 기원과 의미-한철연 신년회 기념 강연회

강연 : 이정호(한국철학사상연구회 이사장)

정리 : 강지은(ⓔ시대와철학 편집주간)

 

 

1월 9일 한국철학사상연구회의 정식 신년회 행사에 앞서 우리 학회 이정호 선생님의 강연이 진행되었다. 2시간여 걸쳐 진행된 이날 강연은 새로 단장한 학회의 강연장에서 개최되었으며 3시 시작부터 강연장을 가득 채운 사람들의 열기가 신년회의 마지막까지 이어졌다.

이정호 선생님의 고대 그리스 정치철학의 핵심은 ‘다의 공존과 조화의 추구’이다. 정치를 바라보는 이러한 입장은 놀랍게도 현대의 정치철학이 추구하는 이상과 일치한다. 그래서 고대 그리스 철학은 생명력 있는 모습으로 더욱 우리에게 다가온다. 강연 내용을 간단히 살펴보자.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의 신화를 통해 무엇보다도 주목해야 할 것은 자연을 비롯한 환경적 조건에 대한 그리스인의 운명의식이다. 신들조차 이 운명을 거스를 수 없다. 바다(水)는 포세이돈의 것이고 하데스에게는 그가 주재하는 사자(使者)들이 일몰지를 넘어가서 서쪽의 어두움 속에 거주하느냐 또는 지하에 거주하느냐에 따라 ‘안개 짙은 어둠’ 즉 대기(風)나 대지(地)가 배당된다. 이 모든 것이 거스를 수 없는 운명이자 그들 자신의 몫이다. 이와 같이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의 신화 속에서 우리는 인간이건 신이건 모든 개체의 능력과 실존을 한계 짓는 운명에 대한 심원한 믿음을 발견한다.

 

사진 : 강지은
새단장한 한철연 강연장에서

신화와 철학에서 발견되는 고대 그리스인의 정치사상적 단초

 

이와 같은 우주 탄생과 관련한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의 신화는 단순히 우주생성의 비밀 이상의 사회적 역사적 삶에 대한 고대 그리스인의 대응 의식을 내포하고 있다. 이러한 대응의식은 기원전 6세기 무렵에 이르러 점차 정교하게 되면서 마침내 신화적 단계를 넘어서 우주, 자연의 근본 구조를 그 자체로서 탐구하려는 움직임으로 발전하기에 이른다.

이정호 선생님은 신화적 세계관에 나타난 고대 그리스인들의 근본 의식은 철학사가들에 의해 최초의 철학자로서 재평가되고 있는 아낙시만드로스의 철학을 통해 놀라울 정도로 계승되고 있다고 강조한다. 아낙시만드로스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우주생성의 근원으로서 무한정자(apeiron)를 상정한다.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따뜻함과 차가움, 메마름과 습함(온냉건습)이라는 대립적인 원시 질료적 요소들이 생겨나고 그 요소들의 대립적 성질로 인한 상호침식과 운동 및 변화에 의해 가시적 세계만물이 생성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우주생성에 관한 신화적 서술을 철저히 질료적 힘에 의한 우주론적 논의로 치환하고 있을 뿐, 그 속에 내포되어 있는 전통 그리스의 정신은 온전한 모습 그대로 계승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아낙시만드로스의 철학에 나타난 자연철학적 세계관 역시 신화적 세계관과 마찬가지로 고대 그리스 인들의 삶과 의식을 지배하고 있는 운명의식과 연관되면서 자연학적 탐구의 윤리학적, 사회적 연관성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두 말할 나위 없이 그 운명의식이란 신화에서 운명의 신 모이라가 각 신에게 할당된 고유의 영역, 경계, 지위, 역할 및 권한의 분배를 표상하듯이, 사회공동체적인 측면에서도 분할, 영역, 할당된 몫의 불가침적 보존 내지 질서에 대한 의식을 의미한다.

 

고대 그리스의 독특한 ‘운명’의식

 

그런데 주목할 것은 여기서 말하는 할당된 몫이란 오늘날 개인주의 사회에서 개인들 간의 이해관계에서 성립하는 배타적 소유 내지 권리라기보다는 환경세계 속에서 구성원들의 공동체적 삶의 보존을 위한 역할과 능력의 분담과 그 분담된 다양한 역할의 상호존중과 수행을 의미한다는 점이다. 보다 적극적인 측면에서 해석하자면 그것은 고대적 삶의 기초로서 농업생산과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무엇보다도 중요한 협동적 질서(taxis)와 절제(sophrosyn?)의 구현 다시 말해 공동체에서 자신의 능력과 소질에 맞추어 할당된 역할의 적극적인 실현과 그것을 통한 공동체적 자치와 자기 보존 구현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것이 폴리스적 시민이 권리이자 의무로서 누릴 수 있는 진정한 명예와 자유의 의미이다.

이런 점에서도 고대 그리스의 자유는 근대가 지향하는 소극적 자유와 거리가 멀다. 이정호 선생님은 이런 관점에서 고대 그리스인들의 운명의식은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종교적 또는 역사적, 시간적 좌표 상에서 필연으로 묶여진 운명론적 개념이 아닌 가능성의 영역에서 능력을 다해 지켜야할 한계를 표시하고 당위를 견인하는 공간적 개념이자 윤리학적, 정치철학적 개념이라고 정리한다.

 

대규모 농업생산과 순수한 사유의 관계

 

사진 : 강지은

파르메니데스와 제논으로 대표되는 엘레아학파는 우리가 그동안 상식적으로 당연시되어온 운동과 여럿을 부정하고 자연세계를 그 자체로 정지된 하나로서 파악하고 있다. 이들의 주장은 자연세계를 운동과 변화과정의 총체로 여기던 기존의 자연관을 송두리째 뒤엎는 것이었다. 이러한 주장의 기초에는 순수한 사유에 의한 논리주의가 자리잡고 있었고 기존의 자연학과 자연철학적 성과는 논리주의 앞에서 모두 부정되었다.

이미 질료에서 분리된 순수사유는 오직 공간적 성격만 갖는 것이어서 시간성과 결합된 일체의 질료적 운동성과 변화는 그 자체로 순수 사유로 해명되지 않는 것이었다. 이제 사유로 해명되지 않는 것은 그 자체로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이들의 설명방식에 입각해 있는 한 토끼가 거북이를 따라잡거나, 화살이 날아가는 현실은 이미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즉 ‘사유가 곧 존재’인 순수사유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플라톤에 의해 운동이 공간적 사유로서 파악되지 않는다는 것이 밝혀질 때까지 이러한 논리주의의 위세는 상식적으로 경험적인 자연관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끊임없는 지적 열등감과 무력감을 안겨주면서 그리스의 지적 풍토를 한 동안 지배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추상적 사유의 배경은 농업생산에 있다. 엘레아학파가 태동한 크로톤 지방은 그리스 본토와는 달리 대평원지역에다 지중해 교통의 요지여서 대규모 관계농업이 발달했다. 이러한 농업생산량의 확대는 관리계층 및 상업계층을 발달시켰고 그 핵심에 속한 엘리트들은 소규모 농업생산사회의 엘리트보다 훨씬 복잡하고 추상적인 사유를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거북이를 따라잡을 수 없는 토끼에서 벗어나려는 그리스적 사유

 

기원전 5세기에 들어서자 아테네 지식인들이 지향해야 할 목표는 엘레아학파에 의해 파기된 질료적 자연 사물들과 그것들이 운동변화에 대한 해명이었다. 이러한 시대적 정황에서 대두된 대표적인 고전기 아테네 사상이 곧 레우키포스와 데모크리토스에 의해 주창된 원자론이다. 원자론자들의 기본적인 관심은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엘레아의 비판에 의해 운동도 변화도 없이 정지해버린 세계를 끊임없이 운동하면서도 없어지지 않는 현실로 구제해내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일단 엘레아적 논박을 피하기 위해 엘레아학파가 주장한 일자의 성격과 똑같은 분할자체가 불가능한 원자를 우선 상정하되, 동시에 엘레아학파들에 의해 파기된 다자성과 운동을 설명하기 위해 원자의 수를 무한하게 상정하고 그것들이 움직일 허공(kenon)을 상정하였다. 그리고 그 허공마저 비존재라는 논박을 피하기 위해 그들은 주저 없이 엘레아 기준으로 이른바 ‘없는 것(to m? on)’인 허공 또한 물체 못지 않게 모두 실제로 있는 것(ousia)이라고 선언하였다.

요컨대 운동과 질적 변화의 현실적 실재를 부정할 수 없었던 그들은 원자와 허공의 존재를 통해 다와 운동을 구제하였고 이미 엘레아 근본주의 앞에 치명적인 약점이 되어버린 성질의 실재성은 포기하되 그 성질을 원자들의 부대현상으로 대체하였다. 그리고 운동의 원인을 해명하기보다는, 허공의 도입을 통해 운동을 설명이 필요없는 당연한 사실로 받아들였던 전통적 확신을 복원하였던 것이다.

 

일자성과 다자성, 조화와 공존의 문제

 

신화적 세계관에서 플라톤에 이르기까지 고대 그리스의 자연적인 것(physis)과 인위적인 것(nomos) 내지 자연학적 관심과 윤리학적 관심을 정치철학적으로 추적해 볼 때 거기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발견된다. 그것은 우선 자연학적 논의의 측면에서 보면 자연의 본질에 관한 형이상학적 물음으로서 일관되게 일자성과 다자성에 관한 문제라고 할 수 있을 것이고, 사회 윤리학적 정치철학적 시각에서 보면 그리스 사회를 구성하는 다양한 도시국가들 간의 공존과 질서 또는 하나의 도시국가 내에서 각기 다른 계층 내지 사람들 간의 조화와 공존에 관한 문제라고 할 것이다.

고대 그리스의 형이상학과 존재론은 ‘생존의 존재론’이고 본질적으로 정치철학적 윤리학적 성격을 갖는다. 일과 다의 문제, 정지와 운동의 문제는 우주론과 자연학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이미 인간 사회에 존재하는 여러 상이한 세력들 간의 갈등과 조화, 분열과 통일이라는 정치 사회적 문제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고, 자연학과 윤리학을 통일하는 하나의 원리로서 제시된 다의 공존과 조화의 원리 또한 두말할 나위 없이 기원전 5세기 지중해 연안에 흩어져 살던 고대 그리스인들의 이상적 삶의 원리이자 사회적 관계형성의 근본 원리였던 것이다.

강연이 끝난 후 40여분간 진행된 질문과 응답 시간이 이어졌으며 예정된 시간을 넘겨서도 마치지 못하여 아쉬움이 많았다.

 

 

극좌 [노동이야기]-11

극좌 [노동이야기]-11

이 재 원(한철연 회원)

 

 

 

1. 극우와 극좌

아시시의 프랜시스의 경구를 실천할 수 있을까?? “필요한 것은 네가 써라. 남는 것은 타인의 몫이다.”

타인 지배와 관련한 또 다른 에피소드도 전해진다. 성가대에서 악기를 연주하는 한 젊은 수도사가 그에게, 공동으로 소유하고 있는 악보집을 자기 개인 소유로 하기를 청했다. 프랜시스가 말했다.

“그대는 지금은 책 한 권을 소유하기를 원한다. 그 다음에는 다른 것을 소유하기를 원할 것이다. 나중에 그대는 이렇게 말 할 것이다. ‘형제여, 이리 와서 이것을 나에게 집어 다오.'”

프랜시스는 소유욕이 지배욕과 상호 연결되어 있음을 꿰 뚫어본 셈이다.

지배와 소유의 원칙에 의해 작동되는 것이 극우적 성향이라면 소유와 지배에서 벗어나는 성향은 극우의 반대인 극좌가 틀림없다. 노동 현장에는 극우적 성향이 지배적이다. 만약에 극좌적 성향의 노동 현장을 만들 수만 있다면 좀 더 인간적인 노동세계에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2. 팀장들

겨울에 목수일 얻기란 대단히 어렵다. 팀장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들, 이를테면 일 잘 하고 고분고분 자기 말 잘 듣는 사람들만 뽑아 데리고 간다.

나는 팀장이 좋아할 목수는 못 된다. 일찌감치 인력회사 사장에게 조공일 하기를 지원했다. 월급소장보다는 어대충 귀여운 용역회사 여사장에게 부탁했다. 나보다 나이 한 참 어린 여 사장은 나를 “재원씨, 재원씨”하며 불러 일을 보냈다. 경우에 따라서는 이름 대신 내 옷깃을 끌어, 그것을 일 보내는 신호로 삼기도 한다. 가끔 농담도 한다. 이를테면 여사장이 나이 많은 사람에게 일 관계로 전화를 했으며, 그런 이야기가 화제에 오를 경우, 나는 “노인에게 전화해서 뭣에 써요? 젊은 남자에게 전화해야지–” 라는 식의 개그다. 성적 수치심을 주지 않는 한도에서 농담은 사람들에게 웃음을 줄 뿐만 아니라, 약간 즐거운 상상도 가능하게 한다.

목수만 팀장이 있는 것이 아니다. 조공도 팀장이 있다. 팀장을 지명하는 것은 대개 현장의 반장들, 또는 용역회사에서 팀장을 지명하기도 한다. 현장의 입장이든 용역회사의 입장이든 팀장을 지명해야만 인력 관리가 수월하기 때문이다. 용역회사는 팀장에게 “어디 현장 몇 명”이라고 알려주면 팀장은 자기 입맛에 맞는 사람을 뽑아 데리고 간다. 그런데 이 팀장에 임명된 사람들의 노동자를 대하는 태도가 심상치 않다. 두목노동자도 아니고 보수를 더 받는 것도 아닌데, 전횡을 휘두르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웃과 잘 지내야 하지만, 팀장들과 잘 지내기란 나로서는 어려웠다.

이곳저곳으로 일 하러 다녔다. 오피스텔, 학교 신축, 아파트 현장에서 조공으로 일했다. 조공 일은 목수 일에 비해 힘이 딱 절반밖에 들지 않는다. 목수 일은 진을 빼지만 조공 일은 수월하기 짝이 없어서 일 년 내내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사진-이재원

신축 22층 오피스텔은 분양가가 평당 천만 원이라 한다. 건물주는 전문으로 오피스텔을 짓는 사람이란다. 땅을 사고 자본 있으면 건물은 그야말로 저절로 올라간다. 건축회사 하나를 지정해서 건축 계약을 한다. 이 회사를 가리켜 원청이라고 한다. 원청회사는 5데마의 하청회사와 계약을 한다. 5데마는 토목과 목수, 철근과 콘크리트, 조적을 포함한 미장을 가리킨다. 원청회사는 다시 5데마와 하청 계약을 맺는다. 건축법에는 원청과 하청만 있다. 그런데 그게 애매해서, 특수한 경우에는 재하청도 허가하는 예외 조항을 두고 있다. 지금 모든 하청회사는 재하청을 준다. 직접 고용이란 건축 관련 분야에서 [없다]. 그리고 재하청은 회사 간의 제 살 깎아 먹기의 온상이다. 경쟁의 모든 하중은 개별 노동자들이 받는다.

JH 현장은 일할 만 했다. 눈 오면 눈 쓸고, 콘 타설하면 온도를 올리기 위해 난로 불을 피워야 한다. 회사의 반장은 나에게 매일 자기 현장에 일 나오기를 청했다 고분고분 시키는 대로 할 뿐만 아니라, 노가다 짬밥(경력)이 있어서 일머리를 알아 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용역회사 팀장 YH였다. 그의 행위 – 그는 타인을 지배하는 행위를 당연시했다 – 에 대해 바른말 하자, “너는 빠져라”고 했다. 나는 그가 일 안 나오는 주말에만 JH로 일 하러 갔다. 용역회사 사장이 “아저씨, JH가요”라고 말해도 YH가 있으면 뒷짐 지고 일 하러 가지 않았다. 보고 싶은 사람 못 보는 고통이 가슴을 에듯, 껄끄러운 사람과 함께 하루를 보낸다는 것 역시 지옥임을 다 알기 때문이다.

제임스 조이스가 말하듯, 이런저런 면에서 ‘흥미롭지 않은 사람은 없다’. 노동자들 간에 어린 아이 같은 일이 벌어진다. P 아파트 현장에 조공으로 갔다. 이곳에 몇 번 왔다. 어느 사이엔가 상황이 변했다. 전에는 용역 팀장을 지명하지 않고 일 했었다. 그런데 어느 사이엔가 이곳 용역팀장 X가 작업지시를 하고 있었다. 정화조 해체 작업과 자재정리였다.

나는 평소대로 자재 나올 분량을 예상하여 정리할 부재의 바닥 받침목을 깔고 그 위에 품을 쌓고 있었다. 용역 팀장이, 다시 받침목 깔 장소를 지정해 주었다. 그러나 그의 지적은 옳지 않았다. 그가 지정한 장소에도 받침목을 깔아야 한다. 그러나 내가 받침목 놓은 장소에도 역시 필요하다. 지하, 지금해체작업을 하는 공간에서 부재들이 많이 나올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이런 사정을 말하자, 그가 큰 소리로 말했다.

“아니, 내가 하는 작업 지시를 그렇게 고까워하면 나는 어떻게 작업을 시킨단 말이오?” 말 소리로 보아 X는 외국 동포였다. 이런, 사람들이 모두 나와 X를 쳐다보았다. 아하, 나만 몰랐을 뿐, 바로 옆에 회사 반장이 지켜보고 있었다. X팀장은 반장에게 나를 고자질한 셈이었다. 반장이 작업자 전원을 불러 모았다. 그리고 한 마디 훈시를 했다.

“내가 시키는 일이 못 마당하면 이 현장 안 나오면 됩니다.”

그리고 나를 지목해서 말했다.

“마찬가지로 아저씨도 팀장 지시하는 것이 맘에 안 들면 안 나오면 됩니다.”

나는 큰 소리로, “네” 라고 말했다.

Y는 경증 뇌성마비 장애인이다. 젊다. L은 고관절 환자이다. 늙었다. L은 아픈 몸을 이끌고 먹고 살기 위해 일하러 온다. 나는 두 사람 모두 함께 일 해 본 적이 있다. L과 함께 일하러 가면, 그가 힘들지 않는 일 하도록 도와주었다. 순전히 말풍선이기는 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L씨, 옆에 서 있어. 내가 다 하께”라고 말하기도 했다.

P현장에서는 오늘 따라 자재를 밑에서 위로 올리는, 일명 되치기 작업이었다. 하필 Y와 L이 한 조가 되어 일했다. L이 허리 아파서 자주 쉬었다. Y는 항상 쫓긴다. 자기 신체의 핸디캡도 있어, 일 해치운 분량이 늦어지면 일하러 오지 말라는 소리를 들을까 걱정이기 때문이다. 팀장이 채근하는 눈빛을 보이자 Y는 기어코 팀장에게 L을 고자질하고 말았다.

“저 아저씨가 일을 안 해요”라고.

밥그릇 싸움이라는 말이 아주 적절한 경우가 있다. 대개 일거리가 없는 겨울에는 교대로 일 나간다. 용역회사 소장이 일 나갈 사람을 지명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선착순으로 사람들을 태우는 차를 타면 일 나가는 경우도 있다. 75세의 월남 참전용사 김 노인은 아주 일찍 와서 노란봉고차에 올라타 있다. 나도 두 번 그 차에 타 보았다. 그러나 도저히 일찍 올라탈 수 없었다. 다른 사람의 밥그릇을 뺏는 셈이기 때문이다. 나중에 온 사람은 일을 못 나가게 된다.

일 못나가는 사람들의 스트레스는 크다. 김 노인의 가계부를 보자. 월세 30만원, 겨울 연료비 30만원, 부인 병원비, 약값, 생활비가 기본으로 필요하다. 그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일찍 와서는 노란 봉고차에 올라탄다.

3. 두 건축회사들

학교 신축현장, 국내 굴지의 전자회사 에어컨 설치 작업에 조공으로 배치 받아 갔다. 네 명이 갔다. 용역 소장은 내게, ‘아침밥을 사 먹고는 영

사진-이재원

수증을 회사에 제출하라’고 했다.

현장에 도착해서 두 명은 기초 안전교육을 받지 않았다는 이유로 쫓겨갔다. 그 기초안전교육을 받지 않았다는 것은 그들 신분이 불확실하다는 뜻이다. 한 명은 혈압이 높았다. 따라서 세 명 쫓겨오고, 나만 남아서 일했다. 늙은 것이 힘만 좋아서 노동하기란 어렵지 않았다. ‘다리 한 쪽 달아 매어놓는다 해도’ 하루를 보내는 것은 일도 아니다.

일이 끝나면 용역회사에서 주는 일일 공수 싸인을 받아가야 한다. 그것을 증거로 용역회사는 파견한 회사에서 돈을 받는다. 대기업 S전자 과장은 아침밥 영수증을 보고 말했다.

“이것은 내가 판단할 문제를 넘어서네요. 일은 한명 했는데 4인 밥값에 사인해 줄 수는 없어요. 현장소장님 오실 때가지 기다려 주세요.”

소장이 왔다. 문제를 설명 듣고는 내게 말했다.

“식사 한 명 분만 싸인해 줄께요.”

현장소장에게 말했다.

“일 못하고 간 사람들 차비는 못 주더라도, 부잣집에서 숟가락 하나 더 놓으십시오.”“부잣집을 떠나서, 기초 교육 안 받은 사람 보내면 안 되는 것, 혈압 환자 보내면 안 되는 것 알면서 보낸 용역회사 잘못입니다. 용역회사 가서 받으세요.”

나는 하릴없이 돌아오는 수밖에 없었다.

대기업 P건설에서 ‘안전기원제’를 올렸다. 작업자들은 세 시 반에 일을 마치고 강당으로 모였다. 성균관 집례관이 기원제를 주도했다. 봉행, 신위봉헌, 분향, 술 올리기, 축문독촉, 그리고 참석자들의 성의 표시와 배례 순서로 이어졌다. 나도 담배 한 가치(지갑을 집에 놓고 나왔다) 놓고 배례했다.

음식을 푸짐하게 차렸다. 한 200명 충분히 먹을 만한 양이었다. 떡은 작은 트럭으로 한 차정도? 되었다. 고기와 막걸리도 푸짐했다.

기원제는 내게 익숙하다. 현장을 돌아다니며 흔치 않게 보기 때문이고, 몇 십년 전, 매 해 농민과 공장 여공 조동조합 합동 기원제를 지냈기 때문이기도 했다. 간절히 바라는 것이 가장 진실한 것이다. 민주주의 염원 기원제는 당시의 우리들에게 가장 간절히 바라는 것이었다. 출근 투쟁으로 마루타처럼 매맞는 여공과 전경환이가 해 먹은 도입우 여파로 거덜 난 농민들에게 간절한 것은 민주주의였다.

젊은 농민들은 음복 후 여공들이 내 뿜는 막걸리 세례를 얼굴에 맞고는 오히려 희희낙락했다. 노-동 기원제는 가난한 사람들의 축제의 장이었고, 연대의 장이었다. 상호 위로와 치유의 장이었다. 이들의 기원제는 경직된 건축회사의 기원제와는 영 달랐다.

지금은 성균관 집례관이 기원제를 집도하지만, 예전이라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건축 현장에는 무당이 집도하는 ‘고사’를 지냈다. 고사 비용은 무척 비싸다. 현장 소장의 주머니 돈이 아니라, 하청 회사의 부조금들이다. 대기업 현장 소장은 돈을 지불한 대가를 받는다.

어렵게 인터뷰한 새끼무당의 이야기는 ‘을화’의 내용과 같았다. 고사를 집도하는 늙은 무당이 있다면 여러 명의 젊고 아리따운 새끼 무당들이 있다. 보수를 두둑이 받은 새끼무당 중 하나는 대개 몇 개월간 현장소장의 애인이 된다.

4. 여성 건축노동자들

H 건설현장에서 여자목수가 경량철골, 내장 일을 하고 있었다. 여성으로서는 조금 무겁게 여겨질 대형 타카를 어깨에 메고 작업하고 있었다. 두 사람이 한 팀이 되어 우께(도급노동)하면 도합 40만원 선일 것이다.

S 건설 현장에서 페인트 여공이 기둥에 테이핑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바삐 움직였다. 나는 기둥 주변의 장애물들을 치웠다. 감사하다는 인사를 받자마자 일당이 얼마인지 물었다. 그녀는 10년차, 9만원을 받는다고 했다.

여공들은 대개 타일 조공, 페인트, 도배, 드물게는 내장목수 조공도 있다. 방수, 마감청소, 이사 청소도 여성들의 몫이 크다. 타일 여공 일당이 가장 높다. 부부가 함께 일한다면 하루 도합 40-50 만원을 받는다. 그만큼 타일 일이 어렵다. 오랜 숙련 과정이 필요해서 기능을 익히기도 어렵다.

중년 여성들의 일거리라야 식당밖에 없다. 그러나 식당의 노동은 해 본 사람만 안다. 일 자체도 고단하지만 손님들 접대하기란 보통 일이 아니다. 감정노동까지 겸해야 하기 때문이다. 건축여공들은 이구동성으로 식당 노동은 할 게 못된다고, 끔찍하다고들 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여공은 H누나이다. 모든 면에서 나보다 나았기 때문에 연하이지만 누나라고 불렀다. 기능이 뛰어나서 반장을 제외하고는 임금이 가장 높았다. 그녀의 자랑은 지방대학 박사과정인 아들이었다. 아들이 학위를 받으면 아주 좋은 차를 사 주는 것이 그녀의 꿈이었다. 그녀의 집에도 가 보았는데, 동해안 큰 냇가 주변에 넓직한 단층 슬라브였다. 집은 가족들이 모이는 명절 때를 제외하고는 별로 쓰지도 않았다. 30여 년의 오랜 노동으로 그녀의 손마디 마다 관절염이 있었다. 아픈 손으로 아주 야무지게 작업했다. 그녀는 육체를 초월하는가?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히는가? 술 취한 동료가, 함께 일하던 동료가 성 추행하려는 바람에 그녀는 깊은 상처를 받았다. 제기랄, 그 뒷수습을 하러 내가 내려가서 고생했다. 피해 여성이 고소하면 회사가 책임져야 하기 때문이다. 가해 남성에게 술을 진탕 사 먹이자, 술술 뱉아냈다. 거대 현장이 마무리되어 가는 시점이라서 단 두 명만 일했단다.

“지가 내 마누라라도 되나, 모든 힘든 일은 다 내가 했다. 그러고도 품값이 나와 똑 같다. 떼돈 벌면서 내게 무엇을 해 주는가?”

술 취해 방어 능력이 없는 여성에게 그랬단 말이지? 너보다 힘없는 여성에게 그랬단 말이지?

나는 H누나의 경우에 대해 여러 가지를 생각했다. 가해자의 ‘욕망이 증오로 바뀌었는가, 증오가 욕망의 옷을 입었는가?’ 아니면 노동의 고통이 다른 식의 보상을 찾도록 했는가?

몇 십 년 전에는 건축 현장에 여성도 목수를 했다. 남자들과 똑 같이 못 주머니 차고 일했다. 여자라 해서 머뭇거리거나 ‘여자인 양’ 하는 법이 없었다. 남자들이 어깨에 메고 나른다면 그녀들은 판넬을 머리에 이고 날랐다.

미모는 죄가 아닌데도 여성들에게는 항상 천형처럼 붙어 다닌다. 아르바이트하던 미모의 외국 여성이 내게 털어놓은 이야기가 있다. 아주 친한 동료였다.

“배운 사람이나 못배운 사람이나 가난한 사람이나 돈 많은 사람이나 다 똑같아요. 왜 그렇죠?”

왜 그러냐는 물음은 만나는 남성들 모두 성을 요구한다거나 유혹한다는 뜻이다. 건설 현장에도 비슷한 이야기들이 많이 돌았다. 대개 여공들은 남편이 아파서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일하기 시작했다는 경우가 많다. 친척을 따라 일한다면 별 문제이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오야지들이 여공에게 성 상납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그것이 사실인 듯해서, 어떤? 부인이 여럿인 오야지들이 이었다.

합의와 동의하에, 사랑하는 사이라면 문제될 것 없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라면 성상납은 이 나라에 희망 없음의 상징이다.

다른 모든 사랑의 이야기처럼 아가서를 읽다 보면 사랑의 신비와 아름다움에 감탄을 금할 수 없다. 결코 성을 사소한 문제로 생각할 수 없다. 도대체 강제적 성 관계를 시도하는 것은 어떻게 된 일이란 말인가. 강제란 사랑하는 사이에서 있을 수 없다. 만약 폭력에 길들여진 관계라면 사디즘과 매저키즘으로 뒤엉킨 관계일 것이다. 사랑의 신비는 생 떽쥐베리가 말하듯, “그 사람을 향해 나아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그 사람을 품에 안으려는 욕구”이다. 이런 욕구만이 사랑은 너와 나만 아니라, “제3의 것”을 바라보게 한다. 사랑은 그 자체로 “초월적”힘이 되며 프랑스 60운동에서 보듯, 혁명을 가능하게 한다.

 

 

지식순환협동조합 노나메기 대안대학 시범강좌[ⓔ시대와철학 알림]

지식순환협동조합 노나메기 대안대학 시범강좌

 

안녕하세요, [지식순환협동조합 노나메기 대안대학]입니다.

 

[지식순환협동조합 노나메기 대안대학]은 분과학문으로 파편화되고 기업화된 낡은 대학의 틀을 벗어 던지고, 학문 간 통섭이라는 원리를 통하여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가 서로 평등하게 마주하는 새로운 대안대학의 플랫폼을 기획하고 있습니다.

 

2014년 새해를 맞이하여, [지식순환협동조합 노나메기 대안대학]이 앞으로 펼쳐나갈 교육의 방향을 가늠할 수 있는 시범강좌를 개최합니다. 이번 시범 강좌의 열쇠말은 [카오스와 비전 Chaos and Vision]입니다. 총 9강으로 이루어진 이번 시범강좌는 혼란스러운 사회 속에서 피어나는 새로운 대안적 가능성들에 주목하였습니다. 위세를 떨쳤던 신자유주의가 저물어가고 새로운 체제가 시작되는 이행기의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일어나는 나비효과를 통한 새로운 비전을 찾아보고자 합니다.

 

지식순환협동조합 노나메기 대안대학의 시작을 알리는 시범강좌에 많은 참여를 부탁드립니다.

[강좌 소개]

 

[3/11 후쿠시마, 끝에서 시작으로]

1/13(월) 19:00~22:00

최종덕(상지대 과학철학), 하승수(녹색당 공동운영위원장), 김익중(『한국탈핵』 저자, 동국대 의대 교수)

 

[인류의 위기와 대안에 대한 원효와 맑스의 대화]

1/14(화) 19:00~22:00

이도흠(한양대 국문과 교수)

 

[케이팝의 흉내내기는 어떻게 문화자본이 되었나]

1/15(수) 19:00~22:00

이동연(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교수)

 

[‘어린왕자’에서 보편종교성을 읽다]

1/16(목) 19:00~22:00

박규현(부산동래생협)

 

[대안세계는 적녹보라 연대로부터 온다]

1/17(금) 19:00~22:00

심광현(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교수)+박이은실(한신대 연구교수, 기본소득네트워크)

 

 

[21세기 변혁 존재론을 위하여]

1/20(월) 19:00~22:00

김성우(한국철학사상연구회)+서영화(한국철학사상연구회)

 

[위기의 청년들에게 ‘자본’이 일용한 양식인 이유]

1/21(화) 19:00~22:00

임승수(경희대학교 강사)

 

[기억하라 1980년대 : 칠수와 만수의 시대극장]

1/22(수) 19:00~22:00

김종길(미술평론가)+한홍구(역사학자, 성공회대 교수)

 

[혼돈 속에서 우리가 공부하는 이유]

1/24(금) 19:00~22:00

대안적 지식생산자들의 파티 (홍세화, 조희연, 이명원 등)

 

 

 

일시 : 2014.1.13(월) ~ 2014.1.24(금), 저녁 7시 ~ 10시

(총 9회, 1/23(금) 및 토, 일요일 강의 없음)

장소 : 중림종합사회복지관 (충정로역 4번 출구에서 도보 3분)

수강료 : 강의 당 5,000원

신청(링크) : http://www.freeuniv.net

https://freeuniv.typeform.com/to/iQHPyI

문의 : kcunion2013@gmail.com / www.freeuniv.net / 010-4721-5757(사무국장 강정석)

 

 

 

 

 

 

타이-마르크 르탄의 <알몸으로 학교 간 날> [철학자의 서재]

타이-마르크 르탄의 <알몸으로 학교 간 날>?[철학자의 서재]

 

신우현 (상지대학교 강사)

 

* 이 글은 <프레시안>의 기사를 재게재 한 것임을 알립니다.

 

알몸으로 학교가기

<알몸으로 학교 간 날>(타이-마르크 르탄 지음, 벵자맹 쇼 그림, 이주희 옮김, 아름다운사람들 펴냄)이라는 그림책을 소개하려한다. 주인공인 피에르는 어느 날 알몸으로 학교에 간다. 책가방은 챙겼지만 아이가 알몸인 것은 눈치 채지 못한 아빠 덕분이다. 말이 되지 않는다고 너무 심각하게 따지지는 말자. ‘아무리 이야기의 배경이 정신없는 아침이더라도 아이가 알몸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할 부모가 어디 있을까?’라든지 ‘도대체 엄마는 어디로 갔기에 아빠가 아이를 챙겨서 저런 어처구니없는 일을 만들었지?’라든가 하는 질문은 잠시 멈추기로 하자. 어쨌든 아이가 알몸으로 학교에 갔다. 아이가 알몸으로 학교에 간 뒤에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 저자의 말을 잠자코 들어보자.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빠는 신발을 잊진 않았다. 빨간 장화다. 신발은 신고 있어서 다행이지만, 덕분에 알몸인 것이 더욱 두드러진다.

운동장에 들어서자 친구들이 우르르 몰려와서 인사했어요. “피에르, 안녕” “피에르, 별일 없지?” “피에르, 오늘 좀 달라 보이는데?” “어, 그런데 피에르, 너 장화 예쁘다.” “아, 그래, 장화 아주 멋있네!” “예쁜 빨간색이다” 나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어요. 장화 속이 조금 갑갑했어요.(6쪽)

 

▲(타이-마르크 르탄 지음, 벵자맹 쇼 그림, 이주희 옮김, 아름다운사람들 펴냄). 출처: book.daum.net

 

알몸으로 등교한 피에르에 대한 친구들의 반응이다. 어느 누구도 알몸인 피에르에 대해 손가락질하거나 조롱하거나 질책하지 않는다. 다만, 단짝 친구만이 에둘러 배려하지 않고 “안 추워?”라고 질문한다. 그런데도 피에르는 아무 말 없이 갑갑함을 느낀다. 선생님 역시 빙그레 웃으며 맞이해주셔도 ‘나무 의자가 너무 딱딱했지만 몸을 비틀지는 않았어요. 눈에 띄고 싶지 않았으니까요’ 라며 위축된 마음을 드러낸다.

선생님 역시 선생님은 피에르를 배려한답시고 가리개로 몸을 덮어주거나 없는 듯이 내버려두지 않는다. 알몸 상태 그대로 수업에 참여하도록 피에르에게 발표를 많이 시킨다. 비록, “피에르, 피리새에 대해 아주 잘 설명했다. 꼭 이 교실 안에 피리새가 있는 것 같아” “피에르, 아주 잘 대답했다. 꼭 이 교실 안에 작은 수도꼭지가 있는 것 같구나”라는 칭찬을 덧붙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나는 체육시간에 두발을 모으고 뛸 때가 가장 좋아요. 그렇게 뛰다 보면 걱정을 잊을 수 있거든요. 오늘도 옷차림 때문에 걱정이 있으니까 열심히 뛰기로 했어요. 나는 깡충깡충 뛰었어요. 있는 힘껏 뛰었어요. 그리고 웃었어요. 마음껏 웃었어요. 웃을수록 더 높이 뛰어올랐어요. 바람처럼 자유로운 기분이었어요. 하지만 곧 멈춰 설 수밖에 없었어요. 다른 아이들이 모두 가만히 서서 이상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거든요. 다행히 종이 울렸어요. 이제 점심시간이에요. (17~18 쪽)

사실 피에르가 체육시간에 열심히 뛰어오른 것은 자신이 알몸이라는 사실로 크게 걱정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걱정을 잊을 수 있도록 열심히 뛰면서 웃고, 웃을수록 더 높이 뛰어올라 자유로운 기분을 느낀다. 하지만 다른 아이들이 이상하게 바라보자 곧 멈추고 만다. 결국 이어지는 점심시간에 친구들이 모두 왁자지껄 웃는 상황에서도 조금밖에 웃지 못한다.

더욱이 방학 때 가장 즐거웠던 일을 그리는 미술시간에 아이들은 모두 알몸으로 돌아다니는 특이한 바닷가를 그린 것을 보고 피에르는 더욱 마음 불편해한다. 쉬는 시간이 오자 친구들이 또 빨간 장화이야기를 할까봐 큰 덤불 뒤에 숨어서 시간이 가기를 기다리던 피에르는 나뭇잎과 줄기로 몸을 가려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곳에서 알몸인 채로 초록 장화만을 신고 있던 옆 반 여자아이를 만난다.

그 애 이름은 마리였어요. 나는 마리에게 내 나뭇잎을 보여주었어요. 마리도 나에게 제 나뭇잎을 보여주었어요. 우리는 깔깔 웃었어요. 우리는 함께 풀줄기를 찾았어요. 그러고는 각자 나뭇잎을 붙였어요. “고마워” 마리가 나에게 말했어요. “고마워” 나도 마리에게 말했어요. 우리는 또 웃었지만 아까처럼 실컷 웃지는 못했어요. 종이 울렸거든요. 쉬는 시간이 끝났어요. (27쪽)

마리와의 만남으로 이제 피에르는 자신감을 찾는다. 선생님이 천사에 관한 노래를 시키자 자신 있게 손을 들고 교단 위로 올라가 노래를 부른다. 노래가 끝나자 모두들 감탄한 얼굴로 피에르를 보고 있었고, 손뼉 치는 아이들까지 있었다. 피에르는 그 자리에서서 멋진 빨간 장화를 신고 작은 나뭇잎을 붙이고 아주 자랑스럽게 인사를 한다.

학교가 끝나고 집으로 걸어갔어요. 어찌된 일인지 길거리에서 가볍고 홀가분한 기분이 들었어요. 체육시간처럼 말이에요. 나는 날듯이 달려갔어요. 지나치는 사람마다 나를 보고 활짝 웃었어요. 알몸이 되니까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31쪽)

 

남과는 다른 피에르가 자유로워지기까지

‘알몸’은 이 세상의 수많은 ‘차이’이다. 그림책의 저자인 타이 마르크 르탄은 대부분의 사람과 다른 ‘차이’를 지닌 사람이 자유로워지기까지의 과정을 그리고 있다.

그림책은 피에르의 감정을 덤덤한 듯 세심하게 그려내고 있다. 벵자맹 쇼의 재치 있고 상큼한 그림은 이를 잘 보여준다. 처음 알몸으로 학교에 가게 되었을 때 피에르는 망설이듯 몸을 숨기고 운동장을 들여다본다. 쑥스러웠지만 피에르는 친구들 앞에 선다. 아무렇지도 않게 대해주는 친구들을 만났지만 아무렇지 않을 수는 없다. 갑갑해하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수업시간에도 눈에 띄지 않기 위해 몸을 비틀지도 못한다.

웃음으로 맞아주신 선생님은 수업시간에 아무렇지도 않게 피에르에게 발표를 시키지만, 피에르와 선생님은 당황함을 주고받는다. 그래도 체육시간에 피에르가 걱정을 잊기 위해 깡충깡충 뛰고 순간이나마 바람처럼 자유로운 기분을 느꼈던 것은 다름 아닌 친구들과 선생님의 이러한 배려 때문일 것이다.

아마도 어떤 사람은 카트린느 선생님이 피에르에게 여벌의 옷을 입혀주거나 다른 아이들처럼 옷을 입혀주었어야 했다고 지적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현실 상황에서 옷을 벗고 있는 아이가 어른들에게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한다면 그것은 아마도 아동학대일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이야기다. 상징이고 은유로 받아들이는 것이 더 맞을 것이다.

아이에게 옷을 주는 것은 다른 아이와 억지로 같아지라고 하는 것일 수 있다. 옷을 입지 않은 등교한 것도 선택일 수 있다. 친구들과 선생님은 피에르의 선택을 존중해준 것이다. 그런 선택을 왜 했느냐며 묻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피에르를 받아들여준 것이다.

하지만, 피에르의 갈등 상황은 선생님과 친구들의 배려만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체육시간에 피에르는 자유로움을 느끼지만, 이를 이상하게 보는 ‘시선’을 피에르가 의식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미술시간에 피에르를 제외한 모든 아이들의 그림에 벌거벗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 바닷가의 풍경이 있는 것을 보고 피에르는 더욱 불편해진다. 내색은 하지 않지만, 모든 아이들이 자신의 ‘차이’를 의식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결국 피에르가 진정으로 자유로워지는 것은 자신과 같은 ‘차이’를 지닌 옆 반 아이를 만나고 나서다. 피에르는 마리와 만나고 나서야 자신이 대부분의 사람과 다르지만,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나만 다르다고 생각했을 때 느꼈을 소외감과 불안함이 같은 처지의 마리와 만나고 해소되었을 테니 말이다. 마리를 만난 후 피에르는 친구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즐겁게 노래 부르고 그런 자신을 자랑스러워할 수 있게 되었다. 다른 사람과의 ‘차이’ 로 인한 다른 사람의 시선을 더 이상 의식하지 않고, 그 ‘차이’를 내가 지니고 있어서 좋다고 진심으로 여기게 되었다. 피에르는 ‘차이’로 인한 굴레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진 것이다.

피에르가 ‘차이’를 긍정하고 세상과 화해하여 자유로워지게 된 데에는 친구들과 선생님의 배려와 같은 처지인 마리와의 소통으로 혼자가 아니라는 깨달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차이를 받아들이는 태도

초등학교 1학년 아이들에게 이 책을 읽어주자, 상당수 아이들이 목소리를 높여서 “변태!!!”라고 외쳤다. 재치 있고 아름다운 그림으로 부끄러운 부분을 교묘하게 가린 그림에 순수하게 즐거워하며 이야기를 따라가는 아이들보다는 “말도 안 돼. 선생님한테는 혼나고 아이들한테는 놀림 받을 텐데, 다른 애들은 왜 아무 말도 안하지?”라며 이상하다는 반응을 보이는 어린이들이 더 많았다. 자기라면, 절대로 알몸으로는 학교에 가지 않을 거란다.

우리 사회는 ‘차이’에 너그럽지 않다. 나와 다른 점은 이상한 것으로 치부된다. 심한 경우에는 적으로 간주된다. 학교에서 벌어지는 왕따는 다른 아이들과는 조금 다른 ‘차이’를 핑계로 진행된다. 사회에는 치열한 생존경쟁이 벌어지므로 옆의 친구나 동료의 ‘차이’는 약점이 되고 공격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우리들에게 피에르의 친구들과 선생님의 배려는 다소 생경한 것이 된다.

‘동일성’만을 강조하면서 ‘차이’를 외면하거나 무시하는 것은 폭력이다. 대체로 ‘동일성’만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사회에서 대다수이고 기득권을 지니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이런 상황에서 ‘차이’는 ‘차별’이 되기 쉽다. 우리 사회는 남성이 아니라 여성이라는 이유로, 나이가 어리거나 많다는 이유로, 키가 작거나 못생겼거나 뚱뚱하다는 이유로, 출신지역이 다르다는 이유로, 학력이 짧다는 이유로, 결혼을 했거나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정치적 성향이 다르다는 이유로, 가치관이 다르다는 이유로 불합리한 차별을 받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사회는 정의로운 사회가 아니며 민주주의 사회라 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차이’에 대한 인식을 바로 하고 ‘차이’가 있는 사람들에게 적극적인 배려를 하는 것이 매우 필요하다. 배려는 다른 사람에 대한 공감능력과 상상력, 다른 사람을 시기하고 공격하려는 충동을 절제하려는 이성으로부터 온다. 상상력이 부족하면 다른 사람을 배려하기 힘들다. 여기서의 상상력은 다른 사람의 불편과 고통을 내 것으로 생각해보는 능력이다. 내가 저런 상황이라면 얼마나 불편하고, 힘들고, 고통스러울지 생각해볼 수 있는 능력이다. (사실 우리나라의 학부모들은 불편함과 고통을 최소화하는 환경이 아이를 기르는데 최고의 조건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아이들은 불편한 것은 조금도 참지 못하고, 고통스러움을 경험해보지 않으면서 자란다. 이런 상황에서 아이가 다른 사람의 불편함과 고통에 공감하는 능력이 떨어진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이러한 능력은 어렸을 때부터 계속 훈련될 필요가 있다.

용산 참사의 사건이 일어났을 때 대중은 얼마나 싸늘했는가. 대다수 사람들의 경제적 이익 이 예상되는 상황에서 소수의 인권 요구는 냉정하게 묵살되었다. 바로 옆에서 사람이 불에 타죽어도, 얼어 죽어도 무관심해하는 사람들이 점점 더 늘어날수록 배려는 찾아볼 수 없고, 우리의 삶은 더욱더 어려워질 것이다.

그 사회가 얼마나 정의롭고 민주적인지 알아보려면, 그 사회의 가장 약한 자들이 어떤 보호를 받고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으로 알 수 있다. 차이가 차별이 되지 않도록 하는 일은 그저 우아한 지식인이나 교양인의 제스처가 아니다. 우리들 자신이 살아남기 위한 생존의 문제다.

생각하는 게 달라도, 뚱뚱해도, 장애인이어도, 돈이 없어도, 외국인 노동자여도, 여자여도, 가방끈이 짧아도 주변의 배려로 자신이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고 생활하며 결국 나에게 있는 ‘차이’가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고 생각할 수 있는 사회가 유토피아다. 피에르처럼 알몸이니까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다고 외칠 수 있는 사회가 어서 오기를.

주체성과 자율성[철학을다시 쓴다]-⑮

주체성과 자율성[철학을다시 쓴다]-⑮

 

윤구병(도서출판 보리 대표)

 

* 이 글은 보리출판사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제가 ‘자유’를 이야기하면 ‘사회주의자인 줄 알았는데 자유주의자네?’ 이렇게 생각할 사람들이 있을 거예요. 자유에는 결이 여럿입니다. 노예소유주의 자유 개념이 있고, 부르주아 자유 개념이 있고, 지주들의 자유 개념이 있고, 자본가의 자유 개념이 있고… 저마다 내세우는 자유들이 서로 결이 달라요. 무엇을 ‘자유민주주의’라고 그러죠? 자본주의를 자본민주주의라고 말하는 대신에 이렇게 부르는 것입니다. ‘자유’가 하도 좋으니까, 저마다 자기 체제, 자기가 신봉하는 이념에 ‘민주’도 끌어다 놓고 ‘자유’도 끌어다 쓰고 그래요.

우리 헌법에 보장된 자유가 뭐죠? 신체의 자유, 사상의 자유, 집회의 자유, 언론출판의 자유, 거주이전의 자유, 이런 것들이 다 들어가죠? 추상적인 것 말고 거주이전의 자유, 신체의 자유, 여행의 자유, 이런 소박한 것들을 생각해봅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 없는 사람은 아무 자유도 없어요. 돈이 없으면 거주이전의 자유도 없고, 신체의 자유도 없고, 아무 것도 없어요. 헌법에 보장된 자유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 있는 사람만 누릴 수 있는 자유예요.

여러분들, 추석이나 설 때마다 도시에 붙들려 있는 아들딸이 ‘어머니, 미안해요. 회사일이 너무 바빠서 이번에는 못 내려가요.’ 하는 이야기를 텔레비전 화면을 통해 들어보셨죠? 그러고 철야하죠? 고향에 돈이 없어서 못 가는 거예요. 여행의 자유도 없고 고향 찾아 갈 자유도 없어요. 이 세상에는 두 부류의 인종만 있습니다.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 아주 명쾌하게 갈라지죠. 이건 제가 한 말이 아니라 <셰익스피어 이야기>를 쓴 유명한 찰스 램이 한 이야기입니다. 흑인, 백인, 황인, 이런 인종구별 없다, ‘있는 놈’과 ‘없는 놈’, 딱 두 종류로 구별이 된다. 있는 놈은 다 있고, 없는 놈은 아무것도 없고… 오죽하면 ‘없는 놈’이라 그래요? 재산이 없으면, 돈이 없으면 ‘존재’조차 없는 거예요.

‘스탠포드 엑스페리먼트’(Stanford Experiment) 이야기를 잠깐 떠올려 보지요. 이 이야기는 책으로도 나오고 영화로도 만들어져 있으니까 따로 긴 설명을 하지 않겠습니다. 아홉 명이 죄수 역할을 맡고, 열두 명이 간수 역할을 맡은 가상 감옥에서 벌어지는 실제 이야기입니다. 이 실험에 자원한 20대 젊은이 가운데 12명은 네 명씩 삼교대로 간수 역을 맡게 됩니다. 간수가 되는 사람은 죄수 역을 맡은 사람이 지닌 한 개인으로서의 자기 정체성, 상식적이고 건강한 시민으로서의 자기정체성을 없애야 하고, 등질적인 죄수 집단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지침을 받습니다. 죄수가 된 사람의 자기 정체성을 끊임없이 없애서 비인간화시키는 것이 간수의 임무예요. 감옥 체제에 무조건 복종하도록 하는 것이 임무이기 때문에 자기 역할을 충실히 수행할수록 죄수들을 비인간화시킬 수밖에 없어요. 그리고 그 정체성을 없앨 수밖에 없어요. 거기에서 죄수들에게서 심각한 시간 왜곡 현상이 나타납니다. 보통 사람의 경우 생명의 시간 가운데 자연의 시간이 우리 몸에 그대로 작동을 합니다.

 

영화 ‘The Stanford Prison Experiment’ 출처: http://folksonomy.co/?keyword=15274

 

쥐들에게 실험을 해봤는데, 같은 용량의 인슐린 주사를 시간을 바꾸어서 투여하면 어느 시간대에서는 백퍼센트 죽고, 똑같은 양인데도 어느 시간에 투여하면 한 마리도 죽지 않습니다. 우리 몸 안에 저항이 커지고 줄어드는 생명의 주기들이 있는 거예요. 시계로 측정되는 인간의 시간에는 이런 게 하나도 없는데, 복종을 끌어내기 위해선 생명체가 지닌 자연의 시간, 곧 생명의 시간을 등질화시킬 필요가 있어요.

감옥에서 간수 역을 맡은 사람은 교대시간에 무조건 호루라기를 불어서 죄수 역을 맡은 사람을 일으키고 팔굽혀펴기 등 체제에 순응하고 권위에 순종하도록 온갖 종류의 벌들을 부과하는 거예요. 너희들은 이제부터 사람이 아니다, 너희들은 개성이 없다, 감옥 안에서 일률적으로 밥은 몇 분 안에 먹고 소변보는 시간은 몇 분 만에 끝내라, 이렇게 모든 것을 통제하게 된단 말이죠.

이 상황 속에서 죄수로 자원했던 선량한 중산층 대학생이(처음에는 모두 죄수로 자원하겠다고 하고 간수하기 싫다고 했던 사람들인데), 자기가 돈을 받고 계약을 해서 감옥에 갇혀 있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진짜 감옥에 갇혀서 여기서 벗어날 수 없다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나 이제 그만하고 싶어요.’ 말하면 금방 나올 수 있는데, 못 나와요. 그리고 간수 역을 맡은 사람들은 점점 잔인해지고, 나중에는 취미 삼아서 성적인 학대까지 하게 됩니다.

이라크에서 자기들의 전리품으로 생각해서 붙잡힌 사람들 목에다 줄을 매서 끌고 다니고 성적인 모욕을 주고 그 행위를 사진으로 찍어서 자랑스럽게 공개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슬람 세계에서 성적인 모욕이라는 것은 엄청난 상처를 주는 일입니다. 목숨은 내놓을망정 그런 짓을 당하지는 못하겠다고 하는 사람들인데, 바로 그런 반응이 가장 큰 약점이니까 그 의지를 완전히 꺾어버리려고 그 잔혹한 짓을 태연하게 저지릅니다.

그 미군들이 ‘스탠포드 실험’에서 나오는 20대 초반의 젊은이들과 똑같은 사람이죠. 전혀 죄의식을 느끼지 못하고 ‘시스템’이, ‘매트릭스’가 작동하는 데 따라 그런 일을 태연하게 저지르는 거죠. 그러니까 자유 박탈은 인간에게 비인간화, 몰개성화로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자유 박탈 가운데 가장 광범위로 이루어지는 것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공간도 등질적인 공간으로 바꾸고 시간도 등질적인 시간으로 만들어 생명의 시간 가운데 자연의 시간을 죄다 없애버리고 모두 인공의 시간으로 바꿔 전체 우주 체계, 아주 작은 소립자 단계에서부터 아주 큰 우주까지 전부 등질적인 시공간으로 바꿔서, ‘인간의 의식’ 속에서만 형성되고 합의되는 세계, 수학공식을 통해서 확정된 세계를 진짜 우주로 감쪽같이 바꿔치기 하는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천체물리학이나 수학을 아무리 열심히 공부해도 이 덫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것이 휜 공간이 됐든, 무한히 확산되는 공간이 됐든 날마다 해가 뜨고 지는 시간이 달라지든, 달이 차고 기우는 시간이든, 지구가 해를 중심으로 공전하는 시간이든, 사람의 의식 속에서 가공되는 시간은 잘라내는 기준에 상관없이 내용을 채우는 것들은 다 빼버립니다. 그래야 계산할 수 있고, 측정할 수 있습니다.

‘아날로그’화 된 세계, 이어진 연속체는 늘 무규정성이 들어가 있어서, 이게 이렇다, 저게 저렇다 딱 잘라서 수치화되지 않아 끊어낼 수가 없습니다. 측정 가능한 것, 수치화된 것이 전제되지 않으면 도시사회에서 삶을 통제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도시사회에서는 저마다의 삶을 인간끼리 통제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길이 없습니다. 통제하는 세계에서는 맨 밑바닥에서 맨 위까지 위계질서가 반드시 성립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맨 위에는 ‘빅브라더’가 있고 맨 아래에는 ‘노바디’(아무것도 아닌 사람)로 위계질서가 생기는데 이런 위계질서를 세우는 작업을 우리 왼쪽 뇌가 맡습니다. 분석하고 조직하는 것은 왼쪽 뇌에서 하는데, 인간 수컷들이 ‘반편이’들이거든요, 언어와 추론의 중추가 왼쪽 뇌에만 몰려있어요. 여자들은 이야기할 때 양쪽 뇌가 작동하지만 남자들은 한쪽 뇌밖에 작동하지를 않아요. 그래서 수컷들은 조직하면 주욱 늘어서고, 정치 이야기하면 정신을 못 차립니다.

어쨌거나 자율성이란 것은 생명의 시간 속에서만 싹트고 꽃 피고 열매 맺습니다. 생명의 시간은 자연계의 여러 생명체와 함께 살아갈 때 가장 도드라지게 드러나게 됩니다. 지나가다 우연히 보게 되는 강아지풀도 누가 언제 싹터라, 꽃 피워라, 열매 맺어라 이렇게 명령하고, 간섭하고, 통제하지 않아도 스스로 자연스럽게 싹트고 꽃 피우고 열매 맺고 죽을 때는 알아서 죽고 또 땅에 묻힙니다.

그리스 사람들이 가장 경계했었던 말이 있습니다. 히브리스(hybris), ‘오만’이라는 뜻이죠. 현대 도시에서 ‘디지탈’화한 시간, 시 단위로, 분 단위로, 초 단위로 끊어낸 인간의 시간, 공간화된 시간은 인간의 오만이 극대화된 시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전자 조작을 통해 하느님 흉내를 내죠? 생명체를 자기 마음대로 변형시킬 수 있다고 믿고, 사기도 치죠? 돼지 장기로 사람 장기를 대신해서 프랑켄슈타인처럼 몸 전체를 잘라내고, 잇고, 기워도 끄떡없다고 여깁니다. 돼지 장기를 사람 몸에 꿰맞추면 사람이 돼지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왜 못하는지 몰라요. 물질체계에서는 상호교환이 가능하고 가역성이 성립이 되지만, 생명계에서는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물질과학에 기초를 둔 생명공학자들은 생체조직과 물질조직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생각 못합니다. 장기이식이라든지 유전자 조작이라는 것이 정말 아무 문제가 없는 것이냐 하는 것은 여러 세대를 거쳐서 지켜봐야 합니다.

저한테 누군가가 그런 질문을 합니다. 장기기증 하지 않을 거냐고, 제가 착해 보이는 모양이에요. (일동 웃음.) 저는 자신이 없다고 그랬습니다. 저도 저 자신을 못 믿는데 안구를 기증해서 눈을 번쩍 뜨게 만들면, 그 사람이 어느 순간 누구에게 갑자기 심한 증오심을 느끼게 될 때 칼로 푹 쑤셔 살인죄를 저지를지 어떻게 알아요? 장기 이식을 받은 사람이 꼭 그것을 고맙게 여기고, 착하게만 살라는 법 없잖아요. 제가 보기에는 기증된 장기를 나쁘게 쓰려고 준비하는 사람이 훨씬 더 많아요. 전 세계가 장기이식 시장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있는 나라 있는 사람들은 없는 나라 없는 사람 눈알도 빼고 콩팥도 빼는데 혈안이 돼 있는 세상입니다. 죽을 때 기증한 장기가 꼭 성냥팔이 소녀한테 가라는 법 없잖아요. 그래서 제가 죽어서 장기 기증하겠다고 하면 착하단 말 들을 줄 알고 있지만, 이미 죽은 사람에게 착하다는 칭찬이 무슨 소용 있겠습니까?

안식교 사람들은 수혈과 헌혈을 안 하잖아요. 그것을 이기적인 동기와 종교적인 편견 탓으로만 돌려서는 안 됩니다. 전엔 저도 걸핏하면 수혈하고 헌혈하고 그랬지만 나중에 B형 간염을 걸려서 자꾸 간염 걸린 흔적이 복제되는 게 있어서 헌혈해도 그 피 버리게 된다고 적십자병원에서 하지 말라고 연락이 와서 그 뒤로 그만두었습니다. 어쨌거나 우리가 어떤 일을 했을 때 사회가 전부 그것이 옳다고 해도 다시 한 번 살펴보고 사회가 전부 그르다 하더라도 다시 한 번 살펴보고, 정말 내가 이 일을 받아들이는데 내적인 확신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서 행동을 결정하는 것이 여러분들이 자기 몸과 마음을 자율적으로 이용하고, 상황과 체제에 맞서서 자유로운 공간과 시간을 열어가는 길이라고 믿습니다.

우리는 생명의 시간을 인공의 시간으로 바꿔치기 하려는 모든 통제에 대해서 의심의 눈길을 거두지 말아야 합니다.

‘어떻게 될 것인가’ 걱정 말고 ‘무엇을 할 것인가’ 다시 물읍시다.

중국의 지식(인)은 대안이 될 수 있을까? [10월 월례발표회 후기]

?[2013년 10월 월례발표회]

 

중국의 지식(인)은 대안이 될 수 있을까?

 

발표: 조경란(연세대)
후기: 진보성 (한국철학사상연구회)

 

동북아시아에서 센카쿠 열도(중국명:댜오위다오) 분쟁에 이어 이어도를 중심으로 한중일 3국의 방공식별구역(ADIZ) 갈등이 연일 고조되고 있다. 여기에 미국이 중재자로 개입하면서 동북아시아의 영토분쟁 문제는 결코 남의 일이 아닌 첨예한 상황이 되었다. 그런데 우리는 마치 제3자의 일인마냥 이 문제를 좌시하고 있지는 않은가? 이런 동북아 정세를 감안한다면 지난 10월에 있었던 월례발표회에서 장장 3시간 30분에 걸친 논의도 어찌 보면 부족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의 주제로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발표와 토론이 진행된 발표회는 근래에 없었던 것 같다. 그만큼 조경란 선생님이 들고 나온 문제의식은 단순 담론을 넘어 우리 주위 현실의 문제와 맞닿아 있는 것이었다. 반드시 우리의 가장 가까운 미래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급변하는 동아시아에서 그 중심 자리에 전 세계가 주목하는 나라가 있다. 바로 중국이다. 조경란 선생님의 이번 발표에는 현재 동북아시아의 정세와 직접적으로 관련 있는 중국의 부상에 대해 학자적 양심에 의한 견제와 비판이 담겨 있다. 특히 정치경제적인 중국의 부흥에 편승해 우러러 박수만치는 친중화주의적 태도가 아니라 인문학적 분석이라는데 의의가 있다.

앞으로 책으로 출간될 이번 논의에서 제기하는 중요한 문제의식은 3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하나는 동아시아의 역사궤적에서 중국의 서양에 대한 인식이 어떠했는지 던지는 질문이다. 바로 근대성 얘기이며 서구의 근대성과 동아시아에서 근대란 과연 무엇이었는지의 문제이다. 이를 바탕으로 우리는 중국사회주의를 어떻게 볼 것인가의 문제, 그리고 북경거리에서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오와 마주보게 된 부활한 공자를 우리는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이번 월례발표회는 중점적인 이 문제들을 심도 있게 다루기 위한 전초적인 과정의 일환이기도 하다.

현재 중국 내부에서 중국을 보는 관점은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중국의 경제성장 이후 양지에 주목하는 낙관론이다. 경제성장을 통한 중국인들 스스로 자신감의 소산이다. 또 하나는 비관론으로 중국의 현 상황을 비판적으로 보는 관점이다. 신좌파와 유교중국을 꿈꾸는 자들이 힘을 합해 세계문명으로써 바라마지 않는 제국주의를 경계하고 이런 모습에 거리를 둔다. 다시 말해 비관론자들은 세계를 지배해 왔던 유럽적 보편주의(근대성) 문제에 대해 중국이 새로운 보편으로서의 근대적 민주주의를 제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지젝은 이런 중국을 두고 “눈물의 계곡을 거쳤다”고 했다. 중국은 사회주의에서 자본주의로 가는 국가들의 실패를 반면교사로 삼았고 그 과정을 거치면서 중국의 국가능력은 이미 보통을 넘어섰다. 그러나 지금 중국에서 극명하게 드러나는 빈부의 차이와 화려한 도시에서 처참하게 죽어나가는 민공들의 모습을 보면서 과연 지금의 중국이 제대로 된 능력을 가졌다고 평가할 수 있는 것인지는 의문이다.

생각해보면 예전에 동양에서 능력(能)은 곧 덕(德)을 말하기도 하지 않았던가? 후진타오 전 국가 주석이 달성하자던 전면적 소강(小康)사회가 중국의 정치적 부흥과 경제적 성장만을 두고 말한 것이었다면, 또는 청중들이 이것을 염두하고 소강을 이해했다면 현대 중국에서 ‘인(仁)에 바탕을 둔 가족윤리’의 전면적이고 전방위적인 확장은 불가능하다. 그런 사회에서 ‘인(仁)’은 이미 사회의 최소단위에서 형성되지도 않는다. 그래서 내부에서 보는 중국은 굴기에 대해 고무적이지만, 외부에서 보는 중국은 위중해 보인다는 것이다. 내부에서는 외부에서 보이는 것들이 잘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21세기에 들어와 이제 중국은 자신들의 방식으로 자기의 길을 가겠다고 선언했다. 지금 중국의 정치사회권의 분위기를 보자면 신좌파는 극우가 되어가고 있고 이 신좌파와 대륙 신유가의 관계는 서로 밀접해지고 있다. 중국 정부는 유학의 ‘화(和)’개념을 통해 뒤에서 유가의 등을 밀고 있지만 동시에 통제하기도 한다. 이런 모습들은 지난날 중국의 사회주의가 중국 내부에서 제대로 기능하지 못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면서 지젝의 지적처럼 현재 중국 사회주의의 경제적 성공은 사회주의의 권위주의와 자본주의의 권위주의가 만나 결국 국가독점 자본주의를 형성했다는 것을 드러낸다. 중국은 과거 유교의 ‘천하’개념을 통해 국가독점 자본주의를 유지하면서 동시에 동아시아에 대한 수평적 인식을 포기한다. 아시아가 중국이고 중국이 곧 아시아인 것이다.

중국의 지식인들이 주장하는 중국모델론은 ‘문명-국가(civiliztion-state)’의 틀을 제시하는 것이라 볼 수 있고 이것이 중국 지식인들이 고민하는 핵심문제이다. 중국 이데올로기를 대표하는 위치에 있으면서 이른바 유교사회주의공화국을 주장하는 간양(甘陽)과 같은 사람은 ‘대중화문명-국가’ 개념을 제시하면서 이것이 21세기 중국 사상의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조경란 선생님은 이 대목에서 중국 21세기의 핵심개념인 ‘문명-국가’의 논리가 과거 유교적 천하통치주의였던 ‘천하-문명’과 과연 무엇이 다르냐고 반문한다. 만약 중국모델론이 그 내용에 있어서 인문학적 통찰에 근거한 합리적 상상력을 바탕으로 새로운 모더니티와 민주주의를 보여줄 수 있다면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정치적 헤게모니에 의해 국가와 ‘공모’한 중국모델론은 결국 중국의 국가 이데올로기를 표출할 수밖에 없다.

 

?박영미

 

마치 과거 중국 제국주의의 역사가 다시 반복되는 듯하다. 그런데 과거 동아시아 역사에서 중국은 19세기 말 서양의 제국주의의 형태와는 다르게 당시 조공제를 통해 어느 정도 평화적 체제를 유지했다고 보는 사람들이 있다. 왕후이(汪暉)는 자신의 분석을 통해 이 조공체제를 재구성하여 현대에도 재활용(?)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혹시 중화문명으로서 중국이 편제한 동아시아의 문명은 서구의 문명과는 다르기 때문에 과거 동아시아에서는 서구와 전혀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었고 이것은 지금도 유효하다는, 마치 B급 중화반점식 짬뽕논리와 같은 막무가내 낙관론은 아닐까? 조경란 선생님은 이런 입장에 대해서는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고 하면서 “역으로 서구도 중국과 같은 배경이었다면 국가 관계에 조공제를 썼을 것이고, 이 조공제라는 것 자체가 평화를 유지하는 방법이었다고는 하지만 상호필요에 의해 위선을 전제한 서로의 주고받기의 평화 유지 방법이었다.”고 지적한다.

이러한 논의들을 살펴보면 우리는 중국의 사회주의가 서구를 극복한 대안체제였는가? 라는 질문에 바로 ‘Yes’라고 대답할 수만은 없는 중요한 지점에 서 있음을 알 수 있다. 중국 사회주의는 서구 자본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나타났다고 할 수 있지만 결국 중국 사회주의도 근대성의 테두리 안에 갇혀 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은 현재 중국의 상황이 독립적인 지식인들의 윤리적 공동체가 만들어지기 쉽지 않고, 사회 안에서 일정한 공론장도 형성되기 어렵다고 본다. 다른 나라보다 오히려 국가와 자본의 지배가 강력하며 국방비 지출 보다 국가 통제 시스템을 위한 지출이 더 많다는 사실이 이것을 잘 말해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지식인이나 영향력 있는 인사들은 중국의 정치경제적 신장에만 기대하여 교류를 위해 중국의 긍정적인 면만을 보고 접근하면서 중국 내부의 문제나 중국과 우리 사이의 문제적 상황에 대해서는 얘기하려 하지 않는다. 이것은 새로운 소중화주의 아닌가.

실패한 서구의 극복 차원에서, 또는 서구의 대안으로써 근래 사람들은 중국을 주목한다. 이런 관심은 서방 중심의 세상은 이제 종결되었다는 전제 아래, 중국은 기존의 것들과는 뭔가 다르며 유럽적 보편주의와 미국적 보편의 가치를 뛰어넘은 새로운 보편을 제시할 수 있다는 기대에 기인한다. 하지만 이러한 기대는 서구의 좌파들이 중국의 좌파들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결국 중국의 모순적인 현 상황을 눈감고 지나갈 수 있는 여지를 남긴다. 한국에서 중국을 연구하는 학자들도 마찬가지 상황일 것이다. 조경란 선생님의 언급처럼 보편성은 가치로써 존재하는 것이고 현실을 견인해 내는 것이지만 보편적 보편주의는 세상 어디에도 없는 것 아닌가. 서양좌파들이 중국의 좌파들에게 기대하는 것 자체가 근거가 없다. 자기들의 사회와 체제는 문제제기하고 비판하면서 그 연장선상에서 중국에는 희망을 건다. 어떻게 중국에서는 이런 문제들이 보이지 않을까? 이들은 세계 중심의 힘이 중국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것은 확실히 보는 것 같다. 그들은 이를 문명의 전환이라고 본다. 그러나 이런 문명론은 매우 허구적일 수밖에 없다.

“우리가 보편주의라고 불렀던 서구식 지식구조가 동서양의 패권구도, 현실사회의 강약구도에서 불평등을 은폐할 뿐 아니라 양극화를 조장하고 유지해오는 데 어떤 작용을 했다는 사실을 알았고 그와 함께 현 중국 자본주의가 ‘괴물자본주의’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현실에서 중국 내부의 ‘민족-국가’ 지배체제와 자본의 이중지배, 그리고 그 아래에서 어느 때보다 주변화 되고 있는 민(民)과 이(夷)의 존재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 발표문 중에서 –

중국이 향후 50년 동안 어떤 새로운 대안적인 틀로써 ‘보편적 보편주의’를 제시할 수 있을지의 문제는 사실 어느 정도 지켜봐야할 문제이기도 하다. 하지만 앞서 논의한 내용들을 통해 현 동북아시아 정세를 두고 본다면 그다지 긍정적으로 생각되지는 않는다. 중국의 미래를 둘러싼 이해방식은 곧 한국의 미래에 대한 이해방식과 연결될 수 있다. 이것은 중국연구자로써 조경란 선생님 자신도 말한바 ‘또 하나의 도전’인 셈이다. 이 도전이 어떻게 진행될 지도 우리로써는 관심 있게 지켜볼만하다. 이번 발표회에서 논의된 내용들의 흥미진진함은 앞으로 출간될 책에서 더욱 풍부한 식견과 내용을 기대하기에 충분하다.

그림자 박물관[별과 달과 바람의 노래]-⑥

그림자 박물관[별과 달과 바람의 노래]-⑥

 

 

김설미향(그림책 작가)

 

 


나루는 힘센 왕이 된 황금빛 그림자를 상상했어.
그런데 개토할아버지의 미소 뒤로
감추어진 기다란 꼬리가 살짝 보이는 거야.
할아버지는 아이들의 그림자를 사서 영혼을 빼앗았어.

 

 

작가의 블로그 http://dandron.blog.me

 

삶과 생명체[철학을다시 쓴다]-⑭

삶과 생명체[철학을다시 쓴다]-⑭

 

윤구병(도서출판 보리 대표)

 

* 이 글은 보리출판사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우리가 당면한 문제는 미래가 없는 도시문명이 우리를 이끌어가는 대로, 그야말로 ‘되는’ 대로, ‘될 대로 되라’고 살아갈 것이냐, 그렇지 않으면 지속가능한 미래를 확보하기 위해서 이제부터라도 떨쳐 일어서서 무엇인가 ‘해야 한다’는 결단을 내려야 할 것이냐입니다.

도시에서 봉기해서 혁명이 성공한 예는 역사상 한 번도 없습니다. 의회주의에 기대서 세상을 바꾸어 보려는 시도는 이미 여러 차례 있었습니다. 가장 가까운 예로 전 세계의 주목을 받았던 아옌데 정권을 들 수 있는데 결국엔 미국이 뒷받침한 군부 쿠테타에 의해서 무너졌죠? 지금까지 인류 혁명의 거점은 늘 농촌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생산과 혁명의 거점이던 농촌이 다 무너져버리고 있습니다.

제가 변산에서 십여 년 이상 농사를 짓다 보니까, 이상하게 나무가 하는 말도 알아듣게 되고, 물고기가 하는 말도 알아듣게 되고, 들에 나가서 볍씨들이 수군거리는 말도 알아듣게 됩니다. 제가 사는 변산은 소나무가 많았던 지역입니다.

그런데 요즘에 변산 기후도 아열대성 기후로 바뀌면서 소나무가 급속도로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 자리에 참나무가 자라는데, 가을이 오면 많은 도토리 알을 떨굽니다. 한 해에도 수천 알의 도토리를 땅으로 떨구는데, 제가 참나무에게 물어봤습니다. ‘우리 나라 산지가 70%인데 거기에 모두 네 씨만 뿌리내리게 하려고 그래?’ 그랬더니 아니랍니다. ‘그러면 해마다 뭐하러 그렇게 많이 떨어뜨려?’ 물었더니 자기가 죽을 때쯤 떨어뜨린 씨앗 가운데 한두 그루 건강하게 자라서 자기를 대신해 종이 유지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해요.

 

?한겨레

 

볍씨도 마찬가지죠, 한번 심을 때 두 알 세 알 심으면 스무 포기로 늘어나는데 한 포기당 백 알 넘게 달리고 해서 풍년에는 볍씨 하나가 때로는 천 단위로, 때로는 만 단위로 열매를 맺죠. 그래서 볍씨한테 ‘야 들판 전부를 니 종자로 덮으려 그래?’ 물으니 아니라 그래요. 쥐도 먹고, 새도 먹고, 당신도 먹고 씨앗으로 남긴 것으로 우리 종 유지하면 그만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바다에 사는 숭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수억 개의 알을 낳아서 태평양, 대서양까지 온 바다를 전부 니 새끼로 덮을 생각이냐?’ 했더니 아니라 그러죠. ‘그중에 한두 마리만 남아서 자기 종을 유지시켜 주면 그만이다’ 해요. ‘그럼 나머지는 뭐하려고 그렇게 많은 알이 필요하니?’ 물으면 자기 몸을 던져 다른 생명체를 살리고, 자기 새끼들이 그 생명체에 기대 살기 위해서 그렇게 많은 알들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우리가 삼시 세끼 먹는 반찬들이 전부 다른 생명체가 밥상에 올리는 ‘생체보시’입니다.

유한한 세계에서 무한한 생산력이라는 건 없어요. 그것은 ‘신화’에 지나지 않습니다. 마르크스 시대의 신화죠. 씨 하나 뿌리면 수천수만 알을 얻을 수 있는 유기물의 세계에서도 무한이라는 건 없어요. 도시에서는 5%의 생산력만 늘어나도 ‘라인강의 기적’, ‘한강의 기적’ 이런 소리를 하는데 유기물은 무한축적이 안 돼요. 곡식의 씨앗을 이년만 묵혀버리면 발아율이 현저히 떨어져버려서 곡식 구실을 거의 못 합니다. 유기물이라 오래 두면 썩어버리니까 싫든 좋든 나눠야 해요.
그런데 ‘생산력의 무한한 발전’과 ‘생산물의 무한한 축적’에는 썩는다는 개념이 없어요. ‘무한축적’이 가능한 것도 무기물밖에 없는데 그것은 전부 ‘부동산’, ‘동산’으로, 화폐나 유가증권 같은 것으로 되면서 종이쪽지 하나에 수억, 수십억의 자산도 축적이 가능한 세상이 되었어요. 자본주의 체제가 지속되는 한 자손만대를 물려줄 ‘사유재산’으로 법적인 보호를 받아요. 폭력적인 국가기구가 이 사유재산을 보호해 주죠.

사람이 무엇으로 사는가? 이 질문을 던질 때, 도시 사람들은 답변할 길이 없어요. 도시공간에서는 사람들만 모여 사니까 ‘착취하고 살거나 착취당하면서 살지 뭐~’, ‘주인이나 노예로 살지 뭐~’ 이런 대답밖에 할 수 없어요. 전체 생명의 그물망 속에서 모든 생명체가 서로 도와 그물을 만들어가면서 살아야 하는데, 그렇게 살아갈 길이 없어서 도시사람들은 덫에 갇혀 있는 거예요. 그리고 환상 속의 세계를 실제 세계라고 자기최면을 겁니다. 정신적인 유목민들이 우글거리면서 ‘가상의 초원’, ‘의식의 평원’을 질주하고 있어요. 실재하는 평원이 아니라 등질화된 의식 공간을 질주하면서 나는 지금 말을 타고 달리고 있다고 상상을 해요. 어쨌든 밥상에 아침, 점심, 저녁으로 올라오는 것이 다른 생명체의 생명이다, 살아있는 몸을 나에게 제공하는 거니까 이것을 먹고 뭘 ‘해야 할지’ 성찰해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되는’ 대로 살 수밖에 없어요. ‘하면 된다’는 능동성은 사라지고, ‘되면 한다’는 수동적인 반응만 남아요.

앙리 르페브르의 <리듬 분석>[철학자의 서재]

앙리 르페브르의 <리듬 분석>?[철학자의 서재]

 

조현진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 이 글은 <프레시안>의 기사를 재게재 한 것임을 알립니다.
 
 

<리듬 분석>(앙리 르페브르 지음, 정기헌 옮김, 갈무리 펴냄)이라는 제목 때문에 이 책이 음악에 관한 책일 것이라 생각해 읽을 용기가 나지 않은 분들이 계셨다면, 그런 걱정은 떨쳐 버려도 될 듯하다. 이 책은 음악에 관한 책이 아니라 일상에 관한 책이며, 이론적 동기보다는 실천적인 관심에서 쓰인 책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 책은 현대 사회의 일상성에 대한 르페브르의 분석과 비판을 계승하고 보완하는 작업의 일환으로 쓰인 책이며, 이를 통해 나와 세계의 관계를 바라보는 관점을 변화시키려는 의도로 쓰인 책이다.

르페브르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인해 “리듬들을 분석하기 위한 하나의 과학을 (…) 정초”(한국어판 55쪽)하려는 그의 원대한 꿈은 미완의 기획으로 끝나고 말았지만, 그는 이 책 곳곳에서 사회를 접근하는 새로운 시각과 틀들을 제시하고 있다. 이런 시각과 틀을 특징짓는 키워드가 바로 ‘리듬’이다.

 

리듬에 입각한 새로운 사회 분석

그럼 르페브르는 왜 리듬에 주목하는 것일까? 먼저, 리듬은 일상생활에서 벌어지는 모순과 갈등, 곧 “거대 리듬들과 사회·경제적인 조직에 의해 부과된 프로세스 사이의 충돌이 벌어지는 장소이자 극장”(202쪽)이기 때문에 르페브르에게 주목의 대상이 된다. 예를 들어 기업에 의해 부과되는 야간 노동은 노동자의 신체 리듬을 깨뜨림으로써 일의 능률성을 저하시킬 뿐 아니라 노동자의 건강을 손상시킬 수 있다. 이처럼, 리듬 분석은 일상생활의 갈등과 모순을 드러냄으로써 일상성에 대한 르페브르의 비판 작업을 보완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앙리 르페브르 지음, 정기헌 옮김, 갈무리 펴냄). ⓒ갈무리

 

또한 르페브르는 리듬 개념을 통해 불변하는 정적 존재가 가변적인 동적 존재보다 우위에 있다는 존재론적 발상을 혁신할 수 있다고 보았다(56쪽 참조). “세계 안에 움직이지 않는 것은 아무 것도 없”(83쪽)으며, 결국 “느리거나 빠르고 매우 다양한 리듬들만이 있을 뿐”(앞과 같은 곳)이기 때문이다. 가령, 인간을 살아 있게 하는 것은 심장박동을 포함하는 전신체의 리듬들 간의 균형이다. 인간이 먼저 있고 전신체의 리듬들 간의 균형이 나중에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라고 말할 수 있다.

르페브르가 리듬 개념에 주목하는 세 번째 이유는 “각각의 리듬을 분리함으로써 무엇이 ‘자연’에서 왔고, 무엇이 후천적인 것, 관례적인 것, 정밀하게 만들어진 것인지를 이해”(86쪽)하고, 이를 통해 리듬의 기원과 성격에 대한 착각을 피하게 하기 위해서다. 그렇지 않을 경우, 후천적이고 관례적인 리듬을 선천적이고 자연적인 리듬으로 착각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르페브르에게 리듬은 일상생활에 대한 그의 분석과 비판을 보완하고, 존재에 대한 관점을 혁신시키며, 리듬의 기원과 성격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통해 우리의 삶의 방식을 바로잡는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에 분석 대상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순환적 반복과 선형적인 반복의 모순

르페브르는 거시적인 리듬들과 사회경제적인 조직에 의해 부과되는 절차간의 갈등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순환적 반복과 선형적인 반복이라는 개념 쌍을 도입한다. 순환적인 반복이란 “우주적·세계적·자연적인 것에서 오”(64쪽)는 것으로 “낮, 밤, 계절, 바다의 파도와 조수, 달 모양의 변화 등이 이에 해당한다.”(위와 같은 쪽). 반면, 선형적인 반복은 “인간의 활동에서 비롯된 것”(위와 같은 곳)으로 “주어진 틀에 따라 행위와 동작이 단조롭게 반복”(위와 같은 곳)되는 것을 말한다. 시계의 반복적인 똑딱거림이라는 선형적 반복이 낮과 밤의 순환이라는 자연적 반복을 측정가능하게 할 때처럼, 양자는 때로는 통일적인 관계를 맺는다. 하지만 인간의 휴식시간과 여가시간이 철저히 노동시간과의 관계에 의해 결정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선형적인 반복과 순환적인 반복은 갈등 관계를 맺는 경향이 있게 된다. 관행으로 굳어진 잔업이나 야근과 같은 근무 형태의 반복은 삶의 자연적 리듬을 깨뜨리고 파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리듬의 기원과 성격에 대한 르페브르의 분석은 이처럼 선형적이고 기계적인 반복 속에 갇혀 있는 우리의 삶의 리듬의 족쇄를 풀고, 우리의 삶의 생명력과 창조력을 복원시키기 위한 기획이라고 할 수 있다.

몸의 우선성과 고통을 통한 리듬의 지각의 필요성

이렇게 볼 때, 르페브르의 ‘리듬 분석’은 자연적이고 우주적인 리듬들과 사회적이고 선형적인 리듬들의 형태들을 분류하고, 이들이 각각 어떤 성질을 갖고 있으며, 서로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를 파악하려는 이론적 기획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듯이, <리듬 분석>은 미완의 저작이기에 이런 작업의 단초만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이런 웅장한 기획에 대한 분석과 평가는 필자의 능력을 벗어나는 과제이기에, 르페브르의 기획에서 특별히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두 가지 주제와 함께 르페브르 철학의 실천적 의의를 논하는 것으로 이 서평을 마무리할까 한다.

르페브르는 “우리가 어떤 문제로 고통을 겪는 순간에 이르러서야 우리 자신을 이루는 리듬들의 대부분을 파악할 수 있다”(210쪽)고 주장한다. 이는 리듬 분석이 제 3자에 대한 관조나 관찰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체험에 바탕을 두고 이루어지는 작업임을 시사한다. 그렇기 때문에 리듬 분석의 주체이자 대상이 되는 인간은 자신의 몸을 가지고 고통을 체험하는 인간이다. 다시 말해, 고통이 리듬을 파악할 수 있게 해 주는 인식 근거라면, 리듬은 고통을 존재할 수 있게 해 주는 존재 근거다. 신체의 리듬들 간의 균형이 깨져 고통을 느낄 때, 우리는 비로소 리듬의 존재를 자각하게 된다. 하지만 균형이 깨지는 것을 지각하기 전이나 후 모두, 우리를 우리로 존재하게 해 주는 것은 바로 리듬들 간의 균형이다.

이런 맥락에서 <리듬 분석>에서 고통의 문제는 두 가지 윤리적인 의미를 갖게 된다. 먼저 신체의 리듬들 간의 불균형을 극복하고 균형을 회복하라는 요구를 삶의 지상명령으로 설정하게 한다는 점에서 리듬 분석은 개인윤리적 의미를 갖게 된다. 또, 이런 개인적 차원의 신체 리듬들 간의 균형이 회복되기 위해서는 사회적·정치적·경제적 조건의 구비가 요구된다는 점에서, 리듬 분석은 사회윤리적인 의미 역시 함축하고 있다. 이러한 르페브르의 주장은 개인의 심리적·물리적 균형의 손상이나 파괴를 가져오는 고통이나 죽음은 악이며, 심리적·물리적 균형의 극대화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사회·정치적 조건이 갖추어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스피노자의 주장과 매우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르페브르의 실천적 의의

<리듬 분석>의 서론에서 르페브르가 공언하긴 했지만 명확하게 제시하지는 않은 실천적 방안 역시도 이런 스피노자적인 맥락 속에서 보다 명료하게 파악될 수 있다. 이 책 전체를 통해 제시되고 있는 리듬 분석의 실천적 방향은 크게 두 가지로 보이는데, 예술적 리듬을 통한 카타르시스(192쪽)와 조화리듬성의 회복(196쪽)이 그것이다. 이들 모두는 신체의 리듬들 간의 균형을 전제하고 있을 뿐 아니라 사회경제적이고 정치적인 조건을 필요로 하고 있다. 다시 말해, 리듬 분석의 실천적 효과가 좀 더 가시적인 것이 되기 위해서는, 리듬들 간의 균형을 위한 개인적인 조건뿐만 아니라 사회경제적이고 정치적인 조건들이 해명되고 제시되어야 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르페브르의 사유는 스피노자의 발상과 합류한다.

물론, 르페브르의 실천적 의의는 이에 국한되지 않는다. 환경 파괴와 기후 변화 등으로 인한 자연적이고 거시적인 리듬의 교란과 파괴가 그 어느 때보다도 심각한 상황에서, 이러한 리듬의 교란과 파괴가 미시적이고 인위적인 리듬의 반복에 기인한 것일 수 있음을 우리에게 끊임없이 환기시키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