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의 좌절, 51%의 승리?; ‘어머니 박정희 혹은 박근혜 앓이’ 사성제(四聖諦) -①[시대와 철학]
48%의 좌절, 51%의 승리? ; ‘어머니 박정희 혹은 박근혜 앓이’ 사성제(四聖諦)-?①[시대와 철학]
한길석(한철연 교육부장)
이 글은 2012년 10월 19일에 열린 학술단체협의회 연합 심포지움 “2012년 오늘, 유신을 말하다”에서의 발표문을 수정한 것이다. 원래 이 글은 박정희 신드롬에 열광하는 대중의 망탈리테를 파악해보려는 의도에서 서술되었으나 대선이 끝난 지금에서는 그 반대편에 선 이들의 마음 상태도 가늠해봐야 할 것 같아서 조금 고쳐 써보았다. 채 익지 않은 생각의 파편들을 그러모은 것이라서 여러 곳에서 삐걱댈 듯하다. 눈 밝은 이들의 고언을 바란다.
(1) 고제(苦諦): 모두가 앓고 있다.
미신(?)에 홀린 대중
‘도대체 왜 대중은 박정희를 그리워하는가?’ ‘왜 51%는 박근혜를 선택했단 말인가?’ 이것은 단순한 의문문이 아니다. 여기에는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는 탄식과 ‘장군의 당집을 드나드는 대중’에 대한 지탄이 담겨 있다. 하지만 지식인들의 지탄에 아랑곳없이 대중은 갈 길을 갔고 아직도 가고 있다.
비판적 지식인들은 이 기이한 현상에 대해 ‘박정희 신드롬’이라는 병리학적 명칭을 부여하면서 치료를 시도했다. 그들은 ‘박정희 신드롬’이 주로 언론에 의해 왜곡된 역사 서술로 인한 것으로 보았다. 동원된 치료법은 역사적 실증에 의한 인지적 교정이었다. 유감스럽게도 효험은 없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실정을 증명하는 역사적 사실을 들이댈수록 ‘박정희 신드롬’은 격화될 뿐이었다. 치료 효과가 없다는 것은 그 질환의 원인과 작용 기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박정희 신드롬’은 단순히 잘못된 역사 인식에서만 비롯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의외로 인지적 의식 밑바닥에 단단히 뿌리내린 무의식적 심층에서 작동하는 질환일지도 모른다.
왼쪽으로 가는 의사, 오른쪽으로 가는 환자
무의식적 심층에 자리한 정신적 병리 증상을 치유하는 데에는 치료자의 태도가 무척 중요하다. 치료자는 환자를 도덕적으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치료에 나선 지식인들은 ‘박정희 신드롬’에 대해 도덕적 판단을 내린 채 계몽에 임했다. 그들의 관점에서 보자면 ‘박정희와 영애’에 대한 대중의 애정은 끔찍한 불륜으로 보인다. ‘제 정신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당신들이 독재자를 그리워한단 말인가?!’ 치료자가 환자의 잘못된 믿음을 도덕적으로 책망하면 환자는 치료를 거부한다. ‘당신들이 뭘 모르나 본데, 잘 봐라 박정희의 시대는 이랬어.’ 힐난조의 비판과 계몽은 대중을 토라지게 했다. 급기야 그들은 병원을 박차고 무당(?)에게 가버렸다.
있을 수 있는 일이 일어났을 뿐
이렇게 말해서 미안하지만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있을 수 있는 일이기 때문에 일어났을 뿐이다. 지식인들이 그리고 48%가 ‘박정희적인 것의 복권’을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보는 것은 당위적 기대에 기초하고 있다. 하지만 현실은 대체로 당위를 배반한다. 배반된 당위를 붙잡고 원망의 눈물을 뿌려봐야 현실에는 아무 도움도 안 된다. 일단 필요한 것은 당위적 비판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보는 태도다. 사람들은 박정희를 그리워한다. 그것도 ‘어머니화한 박정희’를 그리워한다. 이것이 우리 앞에 놓인 적나라한 사실이다. 일단 이 사실 자체를 받아들이자. 당위적 판단은 그 다음 문제다. 사람들이 착오 상태에 빠질 수 있으며 그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태도를 견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박정희 신드롬에 빠졌는가? 박정희 신드롬 혹은 어머니 박정희로서의 박근혜를 사랑하게 된 사람들의 망딸리떼는 과연 무엇에서 기인한 것일까?
이상한 고해성사
‘박정희 신드롬’이 대중적 현상으로 자리하게 된 계기는 15대 대선 무렵 부터였다. 구제금융 사태 등의 경제 위기를 겪으면서 당시 문민정부의 지지도는 최악이었고, 이것은 정권 교체를 이루었다. 한국은 IMF의 구제 금융에 목을 매고 있었다. 한보, 한라, 기아 등 대표적 기업들이 쓰러지거나 인수되고 수많은 사람들의 일자리가 사라졌다. 부족한 소득은 빚으로 돌려막으며 연명하는 이들이 늘어났다. 몇 해 전만 해도 자동차를 사고, 해외여행을 다니며, 소비문화를 즐기던 이들이었다. 하지만 뭐가 잘못됐는지 워크아웃과 구조조정과 정리해고라는 낯선 말들이 사람들을 위협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공포에 휩싸였다. 이제야 비로소 지긋지긋한 빈곤의 굴레로부터 헤어 나와 살만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대한민국은 부도가 나있었다. 빈곤의 재림이라는 불길한 소식은 사람들로 하여금 경제 회복을 지상 과제로 모시게끔 했다. ‘기업이 있어야 일자리도 있다’는 말이 슬그머니 ‘재벌 체제는 지속되어야 한다’는 주장으로 이어졌다. 국민의 세금은 재벌 생존 자금으로 사라졌다. 세금으로 살린 재벌 기업의 임자는 여전히 그들이었다. 재벌 개혁은 물 건너갔다. 정부 규제는 점점 약화되더니 껍데기만 남게 되었다.
때마침 15대와 16대 대선에서 연이어 패배한 수구 세력은 김대중, 노무현 정부의 세력과 개혁 정책을 약화시키고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정부의 약한 고리는 경제 위기였고 ‘빨갱이 대통령’이라는 이미지였다. 이 이미지를 극대화 시키려면 대항 캐릭터가 필요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안성맞춤이었다. 수구 언론에서 그는 반공투사이자 경제 성장의 아이콘으로만 부각되었다. 독재자 전력은 감추거나 경제 성장을 위한 불가피론으로 비껴갔다. 이상이 사람들이 지적했던, 박정희 신드롬이 수구 언론에 의해 가공되고 전파된 사정이다. ‘좌파 대통령’ 정부가 시도하려던 경제 정책은 무조건 좌경으로 몰렸다.
다급해진 국민의 정부는 과거 세력을 산업화의 초석을 다진 이들로 추켜세움으로써 ‘빨갱이 대통령’의 이미지를 상쇄시키려 했다. 사실 국민의 정부는 박정희 체제를 함께했던 세력과의 공조를 통해 집권한 덕에 구세력에게 면죄부를 발부해야 하는 악성 부채를 짊어지고 있었다. 가장 좋은 방법은 독재자 박정희의 자취를 없애고 ‘경제 건설자 박정희’로 이미지를 세탁하던 수구 언론의 작업에 장단을 맞춰주는 것이었다. 박정희 기념관 건립 지원 약속이 상징적 사례였다.
수구 언론과 정치 세력에게는 복음이 아닐 수 없었다. 박정희 신드롬에 의해 가공된 역사가 마침내 국민의 정부에 의해 승인된 셈이니 말이다. 죄의 고백 없이 이루어진 이상한 고해성사는 성공적이었다. 그것은 ‘토탈 리콜’의 한국적 적용, 즉 국민적 수준에서의 기억의 세척과 선택적 기억을 이루어냈다. 놀랍게도 ‘토탈 리콜’은 대중뿐만 아니라 박정희 체제에 대한 비판자들에게도 해당되었다. 1990년대 중반에서 현재까지 ‘경제에서는 좋았지만, 역시 정치에서는 나빴다’라든가, ‘쿠데타와 독선적 정국 운영은 경제발전을 위해서 감행한 불가피한 사정이 있었다’라는 평가가 진보적 지식인들의 입에서도 발설되고 있으니 말이다. 이른바 생계와 살림살이의 신화를 내세우는 ‘어머니화된 박정희’가 한국인 모두의 마음을 사기 시작한 때였다.
모의재판의 추억
필자가 박정희 신드롬을 인지하기 시작한 것은 대학시절인 1998년 무렵이었다. 수구세력이 주도한 박정희 복권의 노력은 ‘영애’의 국회 입성이라는 결실을 봤다.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에 필자는 학회원들과 함께 박정희 모의재판을 진행했다. 재판은 독재자 박정희의 행적을 강조하는 검사와 경제적 업적을 강조하는 변호사의 대결로 이루어졌다. 재판을 통해 박정희 옹호론의 허구성을 실증적으로 폭로하려는 생각으로 진행했는데, 다소 높았던 관심에 비해 반응은 의외로 냉랭했다. 당시 나는 그 이유를 역사적 사실에 대한 무지에서 찾았다. 참주의 폭압적 지배를 인식하지 못한 학우들의 어리석음이 학습의 부족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여긴 것이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는 무지에서 비롯한 것이 아니었다. 당시의 사회적 상황이 민주적 가치보다는 경제적 여유를 희구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실직과 부도를 맞은 집안은 부지기수였고, 취업 설명회는 어디에서도 열리지 않았다. 당장에 등록금과 생활비, 청년실업의 수난을 겪고 있는 이들에게 민주적 가치를 유린한 박정희보다는 경제적 발전을 이룩한 박정희의 이야기가 귀에 착착 감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검은 고양이 흰 고양이
이러한 사정은 한국의 시민들에게도 마찬가지였으리라. 실업과 부도, 얄팍한 소득과 과중한 채무에 시달리고 있는 시민들에게는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장땡이었다. 대중의 속마음을 짐작하지 못하던 박정희의 비판자들은 예의 이분법 논리로 박 전 대통령에 대한 비판적 평가를 진행하였다. 이는 의도와는 다르게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대중의 호감을 더욱 자극했다. 궁한 사정에서는 독재자로서의 박정희 이야기보다는 경제 건설자로서의 박정희 이야기가 훨씬 더 눈에 잘 들어왔기 때문이다. 대중은 학문적 논거의 타당성과 질에는 무관심했다. 그들은 이성적 청취자가 아니라 경제적 낙오의 공포감에 떠는 이들이었다. 논쟁이 심화될수록 경제 영웅으로서의 박정희 신드롬은 강화됐고, ‘어머니 박정희 앓이’는 이명박 신드롬으로 이어졌다. 17대 대선과 함께 박정희 신드롬은 이명박 후보의 불도저 이미지와 합체하면서 CEO 대통령이라는 기업형 완전체로 진화하였다. 대중에게 박정희는 이명박이고, 이명박은 박정희였다. 토건을 통한 성장은 둘의 합체를 가능하게 만든 매개체였다. ‘박정희 대통령이 경부고속도로를 뚫은 것처럼 이명박 대통령도 운하를 뚫어 우리 사회를 널리 풍요롭게 하리라.’ 마침내 사람들은 이명박이라는 검은 고양이를 선택했다.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든 말든 그저 돈만 잔뜩 벌어다 준다면 과거의 잘못은 용서될 수 있었다. 하지만 우리가 잊은 게 하나 있었다. 맡긴 건 생선 가게였다.
(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