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석춘의 <그대 무엇을 위해 억척같이 살고 있는가?>[철학자의 서재]
손석춘의 <그대 무엇을 위해 억척같이 살고 있는가?>[철학자의 서재]
박민철(동남보건대학교 강사)
?* 이 글은 <프레시안>의 기사를 재게재 한 것임을 알립니다.
진보에게 묻는다. ‘그대, 지금 무엇을 위해 억척같이 살고 있는가?’
고 3에 진입한 1997년 봄쯤이었다. 칼럼니스트가 되고 싶다는 꿈을 아주 잠깐 꾼 적이 있었다. 입시 관련 책보다는 다른 책을 보고자 동네 구립 도서관을 어슬렁거리던 그때, 손에 잡아든 책이 <신문 읽기의 혁명>(손석춘 지음, 개마고원 펴냄)이었다. 대학에 들어와서도 보잘것없던 내 서재에서 가장 중앙에 꽂아둔 책이었다. 하지만 십여 년의 시간이 흘러 내 삶의 전환기를 함께 했던 그 책은 수백 권의 전공 책과 원서에 밀려 책장 맨 끝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그대 무엇을 위해 억척같이 살고 있는가?>(손석춘 지음, 철수와영희 펴냄)라는 책을 읽게 되었고, 나는 그 옛날 나에게 강력하게 영향을 주었던 저자를 다시 만나게 되었다.
이 책의 제목을 보는 순간, 뭐라 딱 꼬집어 설명할 수 없던 마음 속 불만을 대변해주는 것처럼 느껴졌기에 기뻤다. 제목만 보고 이 책이 나의 사소한 고민을 덜어주길 바랐다. 솔직하게 말해 <여보게, 저승 갈 때 무얼 가지고 가지?>(석용산 지음, 고려원 펴냄)식의 통속적인 수양서 내지 에세이를 기대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한국 사회로의 적응을 위해 ‘억척스럽게’ 살아가는 나에게 조그마한 위안이 되길 바랐다. 하지만 이것은 큰 오산이었다. <신문 읽기의 혁명>의 저자이기도 한 이 책의 저자가 신문 논설문과 칼럼으로 잔뼈가 굵은, 한국 언론 운동을 이끌어 온 ‘손석춘’이라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이 책은 어떤 특정한 문제들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과 제안을 담고 있는 냉철한 논설문이다. 짧은 책이지만 여기에 담긴 질문의 무게감은 꽤나 묵직하다. 이 책은 한국 사회의 진보적 운동 그리고 이를 이끌고 있는 진보 세력에 대해 ‘돌직구’를 던진다.
‘국격’이 높아지고 ‘세계 7대강국’에 진입했다는 찬가가 울려 퍼지던 2012년 6월 어느 날, 달동네 월셋방에서 15만 900원의 노인 수당으로 살아왔던 노부부가 생활고로 자살했다. 노부부가 남긴 유서의 첫 문장은 ‘그동안 무엇을 위해 억척같이 살아왔는지 모르겠다’였다. 자신들이 살아온 삶에 대한 후회는 참으로 어려웠고 그래서 단호했다. 삶을 부정하는 후회는 스스로의 목숨을 포기할 만큼 힘이 크다. 문제는 이렇게 자신의 삶을 부정하는 후회들이 크게 번지고 있다는, 특히 ‘진보’들에게도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 젊은 날의 정의롭고 깨끗한 꿈을 꾸던 진보들은 일상 속에 매몰되어 패배감과 무력감에 빠져있다. 저자는 현실에 무력감과 회의를 느끼는 진보에게 다음과 같이 묻는다.
“그대, 지금 무엇을 위해 억척같이 살고 있는가?”(16쪽)
진보를 후회와 패배감으로 옭아매는 몇 가지 프레임
여기서 중요한 것은 진보의 스펙트럼을 규정하는 저자의 시선이다. 저자가 규정한 진보의 스펙트럼은 상당히 넓다. ‘4월 혁명, 5월 항쟁, 6월 항쟁과 7~8월 노동자대투쟁, 그리고 8월 연세대항쟁에 몸으로 참여했거나 마음으로 지지한 모든 사람’을 진보라 정의한다. 이렇게 보면 나도 ‘진보’다. 저자의 폭넓은 규정 덕분에, 실천력이 부족했다는 과거 선배들의 비판에 조금은 마음의 짐을 내려놓을 수 있을 듯하다. 그런데 저자가 진보를 생각보다 광범위한 범주로 규정한 이유는 단순히 자신이 자조적으로 말하는 ‘대동단결론자’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오히려 진보의 ‘가치’를 폭넓게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에 따르면 진보는, 보다 구체적으로 진보 세력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와 분단체제에 고통 받는 민중의 아픔에 공감하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자유·평등·자주·평화·복지·생태·인권·소수자 권리 등 다양한 진보적 가치에 대해 공감하거나 이를 이룩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다.
세계사적으로 볼 때 한국 사회만큼 진보적 운동이 끊임없이 이어져온 사회는 드물다. 저자의 말에 따르면 진보 운동이 활발하던 그때는 ‘별이 빛나는 시대’였다. 루카치의 저 유명한 문장, “별이 빛나는 창공을 보고, 갈수가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처럼, 별이 빛나는 시대는 암울했지만 행복했다. 하지만 별이 빛나는 시대는 이미 과거완료형이다. 구체적인 증거는 진보가 집권할 객관적 조건이 형성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지 못한 현실이다. 저자가 지적하듯 진보 세력의 집권에 필요한 1200만 표라는 기준은 비정규직 850만 명과 농민 300만 명, 청년실업자 100만 명, 정규직 노동자까지 포함하면 2000만 명의 유권자로 이미 넘어설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은 아직도 변화되지 않았다.
이렇듯 폭넓은 진보의 스펙트럼에도 불구하고 ‘별이 없는 시대’가 오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저자가 내놓은 이유는 크게 세 가지이다. 조중동으로 대표되는 언론 권력의 프레임은 현실을 왜곡하고 여론을 비틀어왔으며, 결과적으로 진보 세력이 대다수의 민중과 결합하지 못하게 만들었음이 첫 번째 이유이다. 현실 권력에 대한 아집 때문에 2010년 ‘진보 대통합’이 분열로 나아갔으며, 결과적으로 진보 세력의 제도 정치권으로의 진입이 무산된 것이 두 번째이다. 2000년 이후 우리 민중의 삶은 더욱 고달프게 만드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확고하게 자리 잡게 된 것이 세 번째 이유이다. 여기서 첫 번째 이유는 언론 권력의 작동과 연관되며, 두 번째 이유는 정치 권력, 세 번째 이유는 경제 권력의 교묘한 술책과 연관된다. 이른바, ‘철의 3각 동맹’인 정치 권력·경제 권력·언론 권력이 만들어내고 조종하는 각종 권력 프레임이 진보의 후퇴를, 진보의 멀어짐을, 진보의 패배감을 불러왔다.
일상에 매몰된 진보들에 묻는 또 다른 질문, ‘그 깨끗한 꿈, 무덤까지 가져갈 셈인가?’
별이 저물어버린 시대는 별이 빛나는 시대를 살았던 진보 세력 자신들에게 삶에 대한 후회를 가져온다. 저자의 진단처럼 진보의 위기를 지나 진보에 대한 조롱어린 사망 선고가 내려졌음에도 불구하고, 진보 세력은 깊은 패배감에서 벗어나올 줄 모른다. 별을 잃어버린 그들은 어떠한 목적도 없이 단순히 억척스러운 일상적인 삶을 살고 있을 뿐이다.
“4월을, 5월을, 6월을, 7~8월을, 8월을 감동과 보람으로 받아들였던 사람들도 더는 자본주의의 대안이 없다며 자신의 경제생활에 몰입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이 진보는 대안이 없다며 정치 현실 또는 정치 생활에서 눈 돌리고 경제생활에만 억척스럽게 매몰되어도 좋은가.”(103쪽)
이는 젊은 날의 깨끗한 꿈에 대한 자조적인 자포자기이거나, 몰감성적인 외면이다. 저자는 진보의 패배감이 커질수록 더 큰 문제가 발생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진보의 꿈이 포기되는 순간, 나를 포함한 민중의 고통은 커져만 간다. 진보는 마침내 막다른 길에 내몰린 노동자, 농민, 빈민이 스스로의 삶을 포기하게 만드는 ‘사회적 타살’의 공범이 된다.
“4월에서 8월까지 모든 진보가 자신의 꿈을 무덤까지 가져갈 듯이 지레 자포자기하고 있는 것은 민중과의 소통에 실패했고 더 원천적으로는 자신과의 소통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맞아 죽거나 분신자살한 노동자와 농민, 스스로 목숨을 끊는 빈민을 떠올리면, 오늘 진보정치 세력은 고통 받는 민중 앞에 도덕적 나태를 넘어 ‘사회적 타살’의 공범이다. 그런데 과연 ‘나태한 공범’이라는 비판의 과녁은 진보정치 세력만일까? 혹시 모든 진보가 성찰해야 마땅한 자기 가슴의 ‘화살’이 아닐까.” (30~31쪽)
그렇다. 저자의 인식은 옳다. 자기 가슴으로 날아온 화살은 몸서리가 쳐질 정도로 아프다. 분명 나 그리고 우리는 사회적 타살의 공범이라는 ‘사실’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않다. 1970년의 ‘전태일’은 2000년대에도 여전히 나타나고 있다. 하지만 차이는 분명하다. 1970년의 ‘전태일’이 1980년대의 진보를 살아있게 만들었다면, 2000년대의 진보는 ‘전태일’에 무감각하다. 저자가 가슴 시리게 기억하는 고(故) 허세욱·박영재 동지는 2000년대의 ‘전태일’이다. 이렇듯 진보의 무력감은 타인의 고통에 대한 연대적 감수성을 잃게 만들었다. 여전히 신자유주의 체제와 분단 체제는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대다수 국민의 삶에 고통을 증가시키고 있다. 그리고 오늘날 진보는 별을 찾는 마음으로 이 둘 체제에 저항하기 보다는, 자신의 일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에게 보이는 진보에 대한 애정은 분명하다. 그러한 애정에 나는 감사한다. 저자는 젊은 날의 정의롭고 깨끗한 꿈을 무덤까지 가져가지 않으려면 개인적 무력감부터 벗어나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 시작은 객관적인 현실 파악과 그에 기반을 둔 냉철한 자기반성이다. 그러한 자기반성이 목표로 삼고 있는 것은 어느 순간 진보 세력이 잊고 있었던 문제, 다름 아닌 냉철한 현실 인식에 따른 ‘대중적인 소통’이다. 그렇다고 소통을 수구-기득권 세력 또는 집권 세력이 쓰는 그것과 혼동하지 말자. 우리들의 소통은 그네들과는 다르다. 그것은 ‘사람에 대한 존중’이다.
“무엇보다 진보가 할 일은 사람에 대한 존중이다.”(97쪽)
우리는 무엇을 가져갈 것인가?
저자가 말하는 사람에 대한 존중은 이제 마지막 질문을 던진다. 아니 이것은 저자의 두 가지 질문에 호응하는 우리 자신들의 자문(自問)이다. 우리는 무덤에 무엇을 가져갈 것인가? 하늘에 빛나는 별과 같이 젊은 날의 그 정의롭고 깨끗한 꿈을 가져갈 것인가? 아니면 단순한 패배감과 우울감을 가져갈 것인가?
“더러는 세월의 이끼 탓에 정의롭고 깨끗했던 꿈에 곰팡이가 피거나 아예 잊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체념에 잠기거나 우울할 일은 결코 아니다. 정반대다. 정의롭고 깨끗한 꿈을 잊었기에 우울했던 나날에서 벗어나 체념의 곰팡이를 툴툴 털어내고 일상의 정치경제생활부터 마음을 다잡아야 옳다. 세월은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는다.”(138쪽)
이 글을 마무리하면서 한 가지 밝혀야 할 사항이 있다. 나는 이 글을 쓰면서 진보 위기론에 대한 저자의 논리적 응답과 진보의 내적 성찰을 위한 냉철한 제안을 의도적으로 소개하지 않았다. 역사적 사실과 객관적 지표에 근거한 구체적인 분석 및 정책들을 제외했다. 그것이 정의로운 꿈을 꾸었던 모든 사람들과 가슴으로 나누고 싶은 이야기라는 저자의 저술 의도에 보다 가까워질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나는 오늘 <그대 무엇을 위해 억척같이 살고 있는가?>와 더불어 한편에 밀어놨던 <신문 읽기의 혁명>을 책장 가운데로 가져왔다. 다시금 꿈을 꿀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