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부터 (e)시대와철학에 실렸던 글들 중에서 편집자가 다시 뽑아올린 글

교수와 강사의 연봉차이….최악의 불공정 거래[세월호의 또다른 이름-대학]1

교수와 강사의 연봉차이…..최악의 불공정거래[세월호의 또다른 이름-대학]1

이종철(연세대학교 철학연구소)

김영곤 선생님, 안녕하세요.

불철주야, 풍찬 노숙하면서 이 땅의 대학 강사들을 위해, 대학 교육의 정상화를 위해 헌신하는 선생님 내외분에게 한없는 감사와 존경을 표합니다.

오늘 날 한국의 대학 강사들은 유례없이 수탈당하는 집단이라 생각됩니다. 21세기 현대판 지식 노예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입니다. 고급의 노동자이면서도 가장 저급한 대우를 받고 있고, 부당 처사에 대해 아무런 항변도 못하는 무력한 집단이지요. 지난 수 십 년 간 대학들이 양적으로 질적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전임 교수들 못지않은 기여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공과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고, 대학 교원이라는 최소한의 법적 지위도 부여받지 못한 유령 같은 존재입니다.

한국의 대학은 외형적 성장만 일삼는 거대한 괴물이 되었습니다. 재단의 소수 인물이 이끄는 그 괴물은 대학교수와 교직원들을 하수인으로 부리고 있지요. 그들은 하수인이면서도 기득권자라는 이율배반적인 지위를 누리고 있지요. 반면 대학 강사와 비정규직 노동자, 학생들은 이 거대 괴물의 피 수탈 집단이고요. 학생들은 이제 4년 동안 교육서비스를 구입할 수 있는 뜨내기 고객들로 취급될 뿐입니다. 대학 강사와 청소직등 비정규직 노동자는 거대 기계를 돌리는 부품이자 소모품 취급도 못 받고요. 대학 강사들은 실질적으로 대학 교육의 40%이상을 담당하면서도 법적으로는 무자격자입니다. 똑같이 학위를 받고 똑같이 연구를 하고 똑같이 논문을 쓰면서도 시급 알바보다 못한 대우를 받으면서 부당한 대우에 대해 전혀 항의도 못하고 경력 인정도 거의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선생님, 제가 작금의 부당한 강사제도의 개선을 위해 제안을 하나 하고 싶습니다. 이 제안은 강사의 현실적 지위 뿐 아니라 대학생들의 가장 큰 관심사인 반값 등록금 운동과도 밀접한 연관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름 아니라 강의 실라버스에 직급 실명제를 도입하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학생들이 교수의 강의를 들을 때와 강사의 강의를 들을 때 등록금을 차등 지불하자는 겁니다. 소비자 입장에서 값싼 물건과 값비싼 물건에 대해 똑 같은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는 것은 시장 논리에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제안의 이면에 놓인 논리는 현재와 같은 대학의 기만적이고 부도덕한 수탈 정책을 폭로함으로써 교수와 강사 간의 형평을 찾자는 것이고, 대학교육에 기여한 강사들의 정당한 노고를 인정받자는 것입니다. 게다가 대학생들도 자신들의 비싼 등록금이 어떻게 쓰이는지를 알아야 하고, 정당한 수업권의 보장을 요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대학 강사들의 열악한 상황이 외부로 알려지면서 다음 세대의 학문을 담당해야할 젊은 연구자들의 학문적 전망은 더욱 더 불투명하고 불안해져 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학은 현재의 강사 제도와 강사료가 합법적이라고 강변하면서 후안무치를 일삼고 있습니다.하지만 이것은 법 이전에 정의와 형평의 문제이고 도덕적 정당성의 문제입니다.

현재 대학교수 1명을 채용할 때 들어가는 비용에 대한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적어도 강사10명 이상의 비용이 들어갈 것입니다. 예를 들어 7천만 원의 연봉을 받는 대학 교수와 시간 당 5만원의 강사가 주당 9시간을 강의하는 경우를 단순 비교해보지요. 강사의 경우는 45만*4=180만원이고, 1년을 똑 같이 강의한다고 할 경우 강사들은 한 학기 4개월이므로 1년이면 8개월이고, 따라서 1,440만원이 됩니다. 매학기 강의 확보의 불안에 시달리는 강사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런 정도의 강사는 거의 A급이라 해도 과언이 아님을 알 것입니다. 그런데 교수의 경우 7천만 원 연봉 외에도 연구실 운영비용, 6년 강의 후 7년째 주어지는 안식년 비용, 연금과 퇴직금 정립,방학 중 연수비용, 4대 보험 그리고 입시철마다 떨어지는 특별 수당 등까지 합친다면 거의 1억4천만 원 정도로 계산해도 많지 않다고 할 수 있죠. 그렇다면 강사1인을 고용할 때 들어가는 비용에 비해 거의 10배 수준이 될 것입니다. 며칠 전 트위터에 프랑스에서 언어학 박사 학위를 받고 명문 이화여대에서 대단위 강좌를 운영한 모 강사의 11년 간 총 수령액이 7천만이었다고 하던데, 이는 해당 대학 교수 1년 치 연봉도 안 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강사 10명이 교수 한 명 수준도 안 된다는 계산이 틀리지 않죠. 명문 사립대학이 이 정도이니 다른 대학은 이보다 못하면 못하지 결코 더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렇게 10배 이상의 수입 차이가 나는 대학교수와 강사들이 대학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함께 공존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그들의 격차는 경제적인 것뿐이 아닙니다. 오히려 비경제적인 차이, 봉건시대도 아닌 21세기의 대학에서의 신분적 차별이 더 심각할 수가 있습니다.

예, 자본주의 사회에서 연봉 차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회사의 평사원과 CEO의 연봉이 같을 수 없겠죠.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연봉 격차가 커서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오죽하면 동일 노동에 동일 임금을 적용하자는 비정규직의 노동자들의 한 맺힌 구호가 나올까요? 그런데 이런 격차도 사회에서는 평균적으로 70%이고, 더 크게 잡아도 50%수준을 넘지 못하죠. 만약 특별한 사유가 없이 그 이상이 된다면 그것은 착취이고 수탈에 가깝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지성의 전당이라고 하는 대학 사회에서는 똑 같은 학생들을 데리고 한 학기, 1년을 강의하면서, 그리고 똑 같은 강의 평가 기준을 적용하면서도 무려 10배 이상의 임금 차별과 신분 차별을 받고 있습니다. 대학교수들과 강사들의 임금 산정 방식이 다르고,또 교수들은 과 행정, 학교 행정 등의 일도 담당한다고 강변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 점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그런 행정과 관련된 일이 현재의 임금 차별을 정당화할 수 있을까요? 교수들의 행정과 관련된 일은 보직과 출세에 도움 되는 것이고, 또 연봉 외 수당도 받는 일입니다. 그것이 강사들의 현저한 부당 차별을 정당화할 수 있는 논리가 될 수는 없습니다. 사실 이 정도 임금 차별은 사회에서는 시급 알바 생 하고 임원들의 차이에서나 있을 수 있지 않을까요? 하지만 그들 사이에서는 일하는 방식이나 내용, 그리고 책임 정도가 전혀 다르기 때문에 우리는 그 차이를 문제 삼지 않지요. 그런데 대학에서 가르치는 일은 전혀 그런 차이가 없습니다. 강의실에 들어오는 학생도 동일 대학 학생이고, 강의 내용의 수준도 강사라고 해서 봐주는 것 없습니다. 오히려 강사들은 교양과 관련한 대단위 강좌를 운영하는 경우가 많아 학생들 관리도 힘들고 성적 처리나 리포트 피드백 등을 감안한다면 소규모 전공 강의를 운영하는 교수들의 노고에 비할 바가 아니지요. 어떤 이들은 전공과 교양 수업 간에 강의 준비와 운영상의 난이도가 크다고 주장할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대학 강의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 저학년 교양 강의이고 그 다음이 전공 강의이며, 끝으로 대학원생들 데리고 하는 세미나 강의가 가장 쉬운 강의라는 사실은 대학 사회에서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는 사실이죠. 그런데도 강의 평가 기준을 똑 같이 적용하고, 교수들과 달리 평가가 나쁜 강사들은 바로 해고해버립니다. 학생들은 자신들을 가르치는 사람을 강사로 생각하고 강의실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사실상 학생들에게는 강사나 교수라는 것은 큰 의미가 없고, 다만 강의 내용이 좋고 들을만한가 또 들어서 자신들에게 도움이 되는 강의인가만이 중요할 것입니다. 한 마디로 강의와 관련해서는 임금 수준에 관계없이 똑 같이 강의하고, 대학도 유독 강의와 관련해서는 교수나 강사를 똑 같이 취급하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학생들하고 관련된 강의 및 평가에서는 교수와 강사 간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임금과 신분상에서, 경제적으로나 법적으로 큰 차이와 차별이 존재할까요??이렇게 한 치의 차이가 없음에도 교수와 강사 간의 연봉 차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이유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동일 노동에 대해 어떻게 이런 엄청난 차별,?부당하고 불공정한 차별이 있을 수 있을까요? 학생들 입장에서도 비싼 등록금을 내고 구입한 교육 상품(?)이 이렇게 불공정하게 가격이 책정되었다는 사실을 안다고 하면 놀랍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할 것입니다. 학생들은 어렵사리 구매의 자격을 얻어 고급의 매장에서 고급의 브랜드가 붙은 상품을 비싸게 구입했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구매를 하는 과정은 너무 경쟁이 심해 눈물겹기도 합니다. 해서 구매가 확인되는 순간 학생들은 자신들의 현명한 결정에 대해 감격해하기 까지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구매한 상품이 하나는 정상적인 통로를 통해 정상 가격으로 책정된 상품이지만 다른 하나는 전혀 비상식적인 방식으로(법적인 교원 자격도 부여하지 않고 달랑 4개월짜리 계약서 하나를 가지고), 전혀 터무니없는 가격으로 매집한 상품에다가 자신들의 브랜드를 붙여 판매한 상품인 것입니다. 좀 거친 비유를 든다면 부도 직전의 회사나 값싼 노동력으로 만든 중국산 덤핑 물건을 뒷골목 시장에서 구입 해다가 신세계나 롯데 등의 고급 백화점 매장에서 고급 브랜드를 붙여 판매하는 것과 별 차이가 없습니다. 그 과정에서 판매업자인 대학들은 무려 10배 이상의 폭리를 취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도처에 널려 있는 이처럼 싸구려 덤핑 물건들을 값싸게 사들여 자신들의 매장의 거의 40%이상을, 더 심한 곳은 70%까지 진열해 놓고 있습니다. (예, 거친 비유이겠지만 오늘날 한국의 대학 강사들의 질(質)은 전혀 그렇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가격 면에서는 중국산 싸구려 수입품이나 부도 회사의 덤핑 물건 취급을 받고 있습니다. 강사 문제가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자 교육부는 점차적으로 강사 비율을 줄이고 교수 비중을 늘리겠다고 합니다. 교원 비율에 따라 대학 평가와 지원을 달리하겠다고 압박도 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편법의 달인들인 한국의 대학들은 비 정년 트랙, 강의 전담 전임 계약직 교원들을 대거 뽑아 들여 이전에 강사가 담당하는 강의를 비슷하거나 낮은 비용으로 훨씬 많은 강의를 떠넘기고 있습니다. 명색이 대학의 전임 교수인데 월150만원도 받지 못하는 현실이 서울의 종합 대학들에서도 비일비재합니다. 어떤 경우는 2학점짜리 80명 단위의 수업을 8개씩이나 강의하면서도[한 학기에 80*8=640명] 연봉이 3천이 되지 않고, 그것도 2년 지나면 재계약을 빌미로 용도 폐기시킵니다. 그러니까 대학의 입장에서는 시간 강사들에 들어가는 정도의 비용으로 무늬만 전임들을 고용할 수 있으니까 교육부 평가도 높이고 지원책도 높일 수 있는 것입니다.손 안대고 코푸는 야바위꾼들의 사기행위와 같은 이런 편법을 이용해서 대학들은 그야말로 꿩 먹고 알 먹는 행태를 진리의 상아탑 속에서 부끄럼 없이 일삼고 있습니다. 이런 사정을 뻔히 알고 있는 교육부는 전임 비율만 강조하고 있습니다. 유달리 한국의 대학에는 초빙, 외래, 대우, 강의 전담, 비정년 트랙 등 당사자들도 헷갈리는 직급이 많지만 본질은 하나입니다. 그들은 모두가 시간 강사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죠. 이런 원천적 착취와 수탈 구조 속에서 오늘 날 한국 대학에서 강사들, 비 정년 트랙 전임들,계약직 강의 전담들의 강의 비중은 40%를 훨씬 상회합니다.) 이런 실정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들이 취하는 폭리를 그들의 탁월한 장사 솜씨 덕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대학의 탁월한 솜씨가 아니라 기만이고 사취이고 협잡일 뿐입니다.

아주 예외적인 사정이 아니라면 모든 시장가격에는 상품과 관련한 어느 정도의 공정 가격이 형성됩니다. 그런데 다른 진열대에 있는 똑 같은 상품들에 비해 무려 1/10일 수준으로 구입해서 똑 같이 판매한다면 이것은 상도덕 상으로도 있을 수 없는 사기이자 기만입니다. 그것도 고급 백화점들과 같은 대학들이 말입니다. 만일 신세계나 롯데 백화점에서 이런 상행위가 있었다고 한다면 그날로 문을 닫아야 할 만큼 여론의 질타와 비난을 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얼마 전 이마트에서 직원들의 노동행위를 규제하기 위해 불법 감시를 하다가 언론에 노출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 이마트에 대한 사회적 비난으로 인해 최고 책임자까지 앞장서서 사죄하는 상황이 벌어진 적이 있었습니다. 이런 행위들은 법 이전에 도덕적 공분의 대상이며, 우리 사회가 그런 불공정과 부도덕을 묵인할 만큼 불감증에 빠져 있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유독 지성과 진리의 상아탑이라고 하는 대학에서는 이런 야바위꾼들의 협잡과 같은 행위들이 지금까지도 낯 뜨겁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런 대학들과 그 부역자들이 과연 사회를 향해 비판과 양심의 소리를 낼 수 있을까요?

– 다음에 계속됩니다.

모리스 블랑쇼의 <문학의 공간>[철학자의 서재]

모리스 블랑쇼의 <문학의 공간>[철학자의 서재]

신우현(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 이 글은 <프레시안>의 기사를 재게재 한 것임을 알립니다.

 

사물놀이의 무아지경

 

이제는 오래된 이야기처럼 보인다. 70년대부터 시작해서 90년대 중반까지 대학에서는 민족문화를 보급하기 위해 무척이나 노력했다. 각 대학 동아리에는 민요를 부를 수 있는 노래패가 만들어지고 풍물패가 만들어졌다. 이제 대학 축제의 메인 무대는 당연히 아이돌이지만, 그때는 달랐다. 연예인을 부르는 것이 아니라 그들만의 축제가 열렸던 것이다. 본격적인 공연의 전조는 풍물패가 어김없이 차지했다. 모든 사람들을 한 곳에 모으는, 요즘 식으로 말하면 낚시질을 하는 것이지만 어깨춤이 절로 묻어나는 신명나는 한 판 놀이였다. 이제는 그런 모습을 찾을 수 없다.

 

김덕수사물놀이ⓒJinho.Jung

김덕수사물놀이ⓒJinho.Jung

사물놀이에 대해서 좀 더 말하고 싶다. 김덕수 사물놀이패의 공연이 TV를 통해 방영된 적이 있었다. TV를 통해서 보지만 그 짧은 공연은 사람들의 넋을 빼놓기 안성맞춤이다. 리듬은 변주를 거듭한다. 느리게, 빠르게, 때에 따라서는 휘몰아치는 번개처럼 청중을 압도해 버린다. 그렇게 한참을 넋을 놓고 있으면 어김없이 뒤통수를 치듯 징이 울리며 청중을 흔들어 깨운다. 현장에서 그 공연을 본다면 김덕수를 비롯한 사물놀이 공연단의 모습은 무아(無我)에 빠져 있는 듯할 것이다. 실제로 김덕수는 공연하고 있을 때 자신은 꽹과리에 몸을 빌려줄 뿐, 자신이 연주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악기가 자신의 소리를 내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런 모습은 자신은 잊고 다른 사람과 협연하면서 일종의 공명을 일으킨다. 최소한 그 연주동안 모든 성원들은 자신을 잊는다. 그러면서 타자들과 만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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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그런 공연은 무대에서 펼쳐지지만 원래는 장터를 비롯한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어우러지는 대동놀이였다. 대동놀이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신분을 말할 필요가 없다. 어떤 사람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곳에서 화합하면서 어우러진다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모습은 지워지고 타자와 소통하는 대동의 춤. 블랑쇼의 글을 읽고 있으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바로 이런 대동놀이다.?

 

▲ (모리스 블랑쇼 지음, 이달승 옮김, 그린비 펴냄). ⓒ그린비

▲ <문학의 공간>(모리스 블랑쇼 지음, 이달승 옮김, 그린비 펴냄). ⓒ그린비

프랑스의 문학자인 모리스 블랑쇼가 사물놀이에서 시작된 대동놀이를 본다면 뭐라고 했을까? 이번에 소개할 책은 블랑쇼의 <문학의 공간>(이달승 옮김, 그린비 펴냄)이다. 이 책은 무척이나 어렵다는 평판을 듣는다. 이 책 뿐 아니라 블랑쇼의 모든 책이 어렵다. 혹독하게 문장도 길고, 중요하게 다루지 않은 개념을 중심 개념에 놓고 있으니 어렵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비록 그는 자신의 이해지평에서 어렵게 사태나 개념을 설명할 수밖에 없지만, 그 내용은 우리에게 매우 친숙하고 정감이 간다. 만일 그가 우리의 대동놀이 모습을 보고 있었다면 경탄을 했을 것이라고 본다. 서구에서는 무아의 경지라는 말도, 윤회에서 비롯되는 죽음에 대한 인식도 낯설고 어려울 수밖에 없다. 블랑쇼 역시 이런 개념 자체가 낯선 환경에서 이와 유사한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어려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강강술래와 같은 공동체의 놀이를 경험하고 그것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블랑쇼의 얘기가 정겹게 느껴질 것이다.

 

예술가의 고독

 

그가 <문학의 공간>에서 처음으로 제시하고 있는 개념은 고독이다. 고독감은 다른 사람과 떨어져서 홀론 존재한다는 느낌에서 비롯된다. 과연 혼자서 무엇을 할까? 혼자서 하는 놀이가 있어야 시간이 잘 간다. 블랑쇼는 이 부분을 잘 파악했다. 그에게 고독이란 무엇에 대한 몰입으로 나타난다. 문학가의 경우 작품에 몰입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술가의 작품은 독자들에게 본질적인 고독을 드러내는 것이다.

 

또한 거의 모든 예술가들은 고독에서부터 시작해서 자신의 창작 활동에 몰입하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그 몰입으로 완성된 고독을 통해 치유를 시작한다. 말하자면 고독은 더 이상 고립이 아니라 세상과 소통하는 하나의 열쇠가 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우에도 예술가에게는 우울함이 있어야 한다고 얘기했다. 우울함은 자신 안으로 들어가서 자신과 대화를 나누면서 극대화된다. 그 과정을 통해서 예술가들은 작품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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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onny Rollins. ⓒWikipedia

▲ Sonny Rollins. ⓒWikipedia

이와 관련해서 꼭 얘기하고 싶은 사람이 소니 롤린스(Sonny Rollins, 1930~)라는 재즈 뮤지션이다. 소니 롤린스는 1950년대 데뷔한 미국의 유명한 재즈 색소폰 연주자이다. 그 시대는 춤을 추기 위한 재즈에서 벗어나서 갑자기 어려운 멜로디가 나오는 시대이기도 하다. 그때 많은 재즈 뮤지션들이 별처럼 쏟아졌다가 한꺼번에 사라졌다. 그 이유는 약물 때문이다. 재즈 뮤지션들은 마약을 하고 즉흥 연주를 하면서 재즈의 매력을 한껏 발산하다가도 약물 부작용으로 소리 없이 사라져 갔다. 거의 유일하게 약물에 의존하지 않은 사람이 소니 롤린스이다. 물론 그도 젊은 시절 마약에 손을 댔지만, 보석기간 중 약물 복용 혐의로 강제로 재활원에 갇히게 된다. 이를 계기로 그는 약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고, 다른 뮤지션과는 달리 아직까지도 활동할 수 있게 됐다.

그의 활동 중에 독특한 이력이 있다. 1950년대 그는 이미 최고의 뮤지션 대열에 합류했다. 그런데 갑자기 1959년부터 3년 동안 잠적해 버린다. 새로운 동갑내기 라이벌인 오넷 콜먼(Ornette Coleman, 1930~)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잠적기간 동안 롤린스는 요가를 통해 명상하면서 밤이면 인적이 드문 뉴욕의 다리 위에서 색소폰의 매혹에 빠져 연습을 거듭했다. 아마도 그 시간은 그에게 가장 고독한 시간이었을 것이다. 그 혹독한 고독의 시간 속으로 빠져드는 동안 그는 아마도 세상이 자신의 존재마저 망각하고 있을 것이라고 느꼈을지도 모른다. 블랑쇼는 이런 말을 했다.

?“글을 쓴다는 것은 시간의 부재의 매혹에 자신을 맡기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분명 고독의 본질에 다가서고 있다. 시간의 부재란 순전히 부정적인 양상이 아니다. 그것은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는, 주도를 할 수 없는, 긍정 이전에 이미 긍정이 되돌아와 있는 그러한 시간이다.”(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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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랑쇼가 문학에 대해서 말하듯이 음악에 대해서, 혹은 소니 롤린스가 잠적한 사건을 말한다면 위와 같은 맥락에서 말했을 것이다. 롤린스가 잠적한 사건은 세상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롤린스가 부재한 시간을 의미한다. 즉 롤린스는 색소폰의 매혹 속에서 다른 사람들과는 차이가 있는 시간을 보냈다. 철저한 고립은 작품을 만들어내는 몰입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한편으로 세상 속에서 자신의 존재가 망각되는 부재의 시간을 경험하는 것이기도 하다. 세상의 시간과는 떨어져 있는 시간은 과거로 기억되는 시간도 아니고 현재의 상태로 남아 있는 것도 아니다. 세상의 시간에서 한걸음 떨어진 깊이의 시간을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는 과거, 현재, 미래라는 도식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렇지만 몰입된 시간은 그런 계열화된 시간과는 다르다. 물리적으로 같은 것이 반복되는 과거, 현재, 미래의 시간과는 다르게 양으로 표현할 수 없는 질적인 시간도 존재한다. 질적인 시간은 같은 시간이라도 심리적으로 다르게 느껴지는 시간과 유사하다. 예를 들어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1시간과 재밌는 영화를 볼 때의 1시간은 물리적으로는 같지만 심리적으로 완전히 다르다. 전자의 시간은 매우 지루하지만, 후자는 매우 빠르게 지나간다. 그런데 후자와 같은 시간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반드시 시간을 잊고 무엇엔가 몰입해 있어야 한다. 이처럼 몰입은 시간의 부재를 경험하는 예가 된다. 마찬가지로 소니 롤린스가 몰입한 시간은 계기적으로 주어지는 시간과는 다르게 자신의 내면을 파고드는 깊이의 시간이자 나를 잃어버리는 무아의 시간이기도 하다. 또한 블랑쇼가 말하는 현전을 위한 ‘자발적 죽음’이기도 하다.

 

아무튼 그렇게 보낸 공백의 시간은 그로 하여금 다시 최고의 작품을 탄생시키게 한다. 물론 예로 든 롤린스만 그런 것이 아니라 많은 예술가들이 그런 몰입을 통해서 작품을 만들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예술과 전혀 관계없는 사람들에게조차, 몰입은 자신 안에 있는 새로운 나를 만드는 작업이다. 블랑쇼가 <문학의 공간>에서 말한 고독과 몰입은 시간과 연결되어 작품을 탄생시키는 원동력이 되는 것임과 동시에 누구에게도 해당될 수 있는 새로운 소통의 방식을 주장하는 것이다. 예술가의 작품이 더 이상 예술가의 것이 아니라 감상자의 것이 되는 것과도 마찬가지이다.?

 

죽음 앞에서

 

이렇게 정리하면 특별히 어려울 것도, 그다지 새로울 것도 없는 내용처럼 보이지만, 현대 프랑스의 사상계는 블랑쇼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다. <문학의 공간> 뿐 아니라 그의 모든 저작을 관통하고 있는 화두는 ‘바깥’이다. ‘바깥’이란 말은 상식적으로 보면 ‘안’과 대립된다. 그런데 블랑쇼가 말하는 바깥은 이런 의미와는 다르다. 그에게 바깥은 타자와 소통하는 공간이다. 흔히 소통을 한다는 것은 내가 다른 사람과 만나서 대화를 주고받는다는 의미로 이해된다. 하지만 블랑쇼에게는 복잡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불행과 고통의 연속이다. 가장 자유롭고자 하는 욕망은 이 세계에서 고통과 함께 부조리함을 느끼게 해준다.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방법은 타자와의 소통이다. 그런데 이 과정을 블랑쇼의 생애와 연결해서 살펴보자.

 

블랑쇼의 삶을 살펴보면 무척이나 흥미로운 경험들을 발견하게 된다. 그 경험 중 눈에 띄는 두 가지 사건을 제시해 보자. 먼저 2차 대전 중 죽음의 공포 속에서 극적으로 생존했던,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일화가 있다. 1944년, 2차 대전이 막바지에 이르면서 나치의 퇴각이 이루어지는 시기, 블랑쇼는 자신의 집 앞에서 총살형을 당할 위기에 놓여있었다. 그런데 아주 극적으로 레지스탕스가 그 일대를 선제공격하기 시작했다. 블랑쇼는 이 전투 때문에 극적으로 살아남을 수 있게 된다. 이 경험을 바탕으로 이후의 생은 덤으로 생존한다고 간주했다.

 

“당신은 이미 이 년 전에 죽었어야 할 사람이므로 앞으로 남은 수명은 모두 덤으로 사는 것입니다.”(<죽음의 선고>(고재정 옮김, 그린비 펴냄) 중에서)

 

그리고 그는 저작에서 끊임없이 ‘죽음’의 문제를 분석하고 있다. 물론 이 죽음의 문제는 당시 유행했던 실존주의 철학, 혹은 현상학의 영향력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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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다른 하나의 특이한 경력은 68 혁명 중 ‘학생-작가 행동위원회’에 참여했다는 점이다. 여기서 그는 잡지 <위원회>에 익명으로 글을 남기게 된다. 이미 당대의 유명한 문필가였던 그가 자신의 이름조차 버리고 평등한 위치에서, 그것도 자신의 제자밖에 되지 않는 학생들과 동등하게 ‘익명’으로 활동했다는 것은 놀라운 경험이다.

 

“68년 5월의 행동위원회와 시위대에서는 친구는 아니지만 나이차도 이전의 명성도 무시한 채 너와 나로 말하는 동지들이 있었다.”(“Pour l’amiti?” 중에서)

 

행동위원회에서 블랑쇼는 익명을 주장했지만, 대다수의 작가들은 익명의 동지 관계를 포기했다. 그렇지만 블랑쇼는 익명성을 마치 문학적 체험으로 느꼈다. 문학적 체험은 작가의 체험이 더 이상 작가의 것이 아니라 타자에게 무한하게 열리는 것이다. 간단하게 말하면 작가는 깊은 사색의 시간을 통해서 작품을 만들지만, 그 작품은 더 이상 작가의 것으로 남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온전히 작가의 체험을 공유하는 독자의 것이고, 모든 이의 것이 된다. 이런 블랑쇼의 경험은 모든 권력을 포기하고, 주체의 익명성을 지속적으로 주장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두 가지 경험은 그의 주요 테마인 ‘바깥’을 설명하는 중요한 단서로 작동한다. 프랑스 철학에서 ‘바깥’이라는 말은 푸코와 데리다 철학의 주요 테마가 된다. 또한 이 용어는 그대로 들뢰즈에게서 다시 사용된다. 뿐만 아니라 낭시나 아감벤과 같은 당대 철학자에게도 끊임없이 회자되는 개념이기도 하다. 앞서 바깥은 소통의 공간이라는 말을 했다. 그런데 그 소통의 공간은 완전한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은 채 고통과 좌절을 경험하는 곳이다. 오히려 완전한 바깥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자아의 죽음을 경험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완전한 소통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죽음’이라는 테마와 만나야 하는 것이다.

 

‘죽음’이라는 상황을 <문학의 공간>에서는 키릴로프의 사례로 분석한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자신의 소설 <악령>에서 신의 죽음을 알리는 인물로 키릴로프를 등장시킨다. 키릴로프는 신이 없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공개 자살을 선택한다. 이는 자기의식의 순수한 현전 가능성을 분명하게 밝히는 예에 해당한다. 이로부터 블랑쇼는 죽음 안에 놓여 있는 자아의 분열을 분석한다. 자신 안에 놓여 있는 타자. 이 타자는 소통을 위한 근원적 공간이 된다.

 

이 근원적 공간은 마치 문학 혹은 글쓰기의 시원을 이루는 역할을 한다. 앞서 사례로 제시했던 김덕수나 소니 롤린스의 경우처럼 물리적인 죽음이 아닌 자신의 세계로 빠지는 무아지경은 어쩌면 블랑쇼가 말하는 바깥을 가장 정확하게 지적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즉 타자와의 근원적 공간은 현전을 위한 죽음이라는 내밀성으로부터 시작해서 타자의 내밀성과 만나는 지점이 바로 소통의 공간이고, 바로 예술의 공간이 된다는 의미이다.

 

 

 

 

왜 고상한 ‘존재’와 ‘무’가 아니고 흔해빠진 ‘있다’, ‘없다’인가?[철학을다시 쓴다]-28-4

왜 고상한?‘존재’와?‘무’가 아니고 흔해빠진?‘있다’, ‘없다’인가?[철학을다시 쓴다]-28-4

 

 

윤구병(도서출판 보리 대표)

 

*이 글은 보리출판사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료와 형상 이론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낱말이 있다면 그것은 가능태(可能態)와 현실태(現實態)라는 끔찍한 낱말로 번역된?‘뒤나미스(dynamis)’와?‘에네르게이아(energeia)’입니다.?죄송합니다.?갑자기 생전 듣도 보도 못한 도깨비 같은 낱말들이 마구 튀어나오기 시작하는데 이 낱말 설명을 먼저 합시다.?아리스토텔레스가 이야기하는?‘질료(質料)’라는 말은 그리스어로?‘힐레(hyle)’인데 이것은 본디 집 짓는 데도 쓰이고 배를 만드는 데도 쓰이는 나무,?곧 여러 용도로 쓰이는 목재라는 말에서 나왔습니다.?그리고?‘형상(形相)’이라는 말은 그리스어로?‘에이도스(eidos)’인데 이 말은?‘눈으로 본다’는 그리스 동사?‘에이도(eido)’에서 나온 것으로?‘본 것’, ‘모습’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그리고?‘가능태’라고 서툴기 짝이 없게 번역된?‘뒤나미스’는 그것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또는 무엇이 될 수 있는?‘힘’이라고 보면 됩니다.?다만 그것으로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이 될 수 있는지가 드러나지 않았다는 점에서 크게 보아 무규정적인 것[apeiron]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또?‘현실태’라고 번역된 말(이런 말을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쓰나요?), ‘에네르게이아’는 그리스 동사?‘에네르게오(energeo)’에서 나온 말로 무엇을?‘한다’는 동사의 뜻을 그대로 이어받아 무엇을?‘함’,?또는?‘작용’이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저라면 조금 무리를 해서라도 아리스토텔레스의?‘뒤나미스’를?‘됨’으로,?또?‘에네르게이아’를‘함’으로 번역하고 싶습니다만 주제넘은 것 같아서 이 이야기는 길게 하지 않겠습니다.)?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形而上學?:?형이상학??이건 또 무슨 개뼈다귀 같은 번역입니까??아리스토텔레스가 쓴?‘메타피지카(metaphysica)’라는 글은 본래 제목이 붙어 있지 않았는데 뒤에 로도스의 안드로니코스라는 사람이 아리스토텔레스가 남긴 글들을 정리하다가?‘피지카(physica)’,?곧?‘자연학’이라는 글 뒤에 이 글의 원고가 있었기 때문에 쉽게 그냥?‘자연학의 뒤에 있는 것’이라고 분류한 것이 그만 책 이름이 되었다는 것이 보통 하는 이야기입니다만 박홍규 선생님은 이 책 제목까지도 허투루 받아들이지 않고, ‘우리에게 이른바 형이상학(메타피지카)은 자연학(피지카)을 모르면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따라서 형이상학을 공부하려는 사람은 반드시 먼저 자연학을 공부하라는 뜻에서 자연학 뒤에 이 글이 붙어 있는 것이다.’라고 힘주어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을 저는 그냥 메타피지카라고 부르겠습니다.?이 메타피지카에 나오는 중심되는 낱말로?‘뒤나미스’와‘에네르게이아’를 든 까닭은 다른 데 있지 않고,?이 낱말들,?이 개념들을 통해서 플라톤의 형이상학과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사이에 가로놓인 거리를 재 보자는 뜻에서입니다.?그리고 이 일은 우리가 지금까지 이야기한 있는 것과 없는 것과 무규정적인 것이 이 철학계의 사부님들 머릿속에서 무엇으로 둔갑하는지를 아는 데도 큰 도움이 됩니다.”

이제 고백하지만,?이 강의들은 한두 시간에 한 것이 아니라 여러 날을 두고 한 것입니다.?학생들의 골을 빠개지 않고,?저도 숨가빠 헐떡거리지 않기 위해 쉬엄쉬엄 하는 것이 필요했다고 말하면 거짓말이 되겠지요.?옛 그리스 철학자들의 생각과 박홍규 선생님의 생각과 제 어쭙잖은 생각이 제 작은 머리통 속에 뒤범벅이 되어 있어서 이것을 풀어내는 데도 적잖은 시간이 필요했던 것입니다.?아무튼 저는 학생들에게 플라톤 철학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 어떻게 다른지를 설명하고,?피타고라스학파의 입에서 나온?‘끝(한계?: peras)’과?‘끝없는 것(무규정적인 것?: apeiron)’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어떻게 다르게 받아들여졌으며,?아리스토텔레스가 자기 철학 안에 노동(작업,?함?: energeia)을 받아들여 이것,?저것을 어떻게 쪼개고(분석하고),?울타리를 두르고(범주화하고),?빚어냈는지,?그리고 이 사부님들의 노력이 베르그송이라는 프랑스 형이상학자(?)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제가 알고 있다고 믿는 대로 이야기하고자 했습니다.?이런 생각이 얼마나 황당한 것이었는지는 앞으로 밝혀질 것입니다.?그러나 저에게도 할 말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박홍규 선생님 밑에서 정신 없이 휘둘리는 동안 마치 메피스토펠레스 손에 놀아난 파우스트처럼(비유가 너무 거창했나요?)?제 간덩이가 저도 모르게 한껏 부어올랐으니 말입니다.?존재론이라는 걸 이야기한다면서 이런 시덥지 않은 객담을 사이사이 시시콜콜 늘어놓는 걸 보면 저도 누구를 닮아 가는 모양입니다.

각설하고,?저는 학생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여러분,?이제 꽤 어려운 길에 접어들었습니다.?제가 샛길로 빠지거나 길을 잃거나 발을 헛디디지 않도록 여러분들이 믿는 분에게 두 손을 모으기 바랍니다.?단군 할아버지,?예수님,?부처님,?마호메트님,?조왕신,?호구마마 아무라도 좋습니다.

먼저 플라톤에게 덤벼 보기로 하지요.?제가 지금부터 하려는 이야기와 관련된 정보가 가장 많이 들어 있는 플라톤의 글은?〈티마이오스〉(Timaios :흔히?‘우주론’으로 번역됩니다.)입니다.?플라톤이 남긴 글은 대체로 몇 사람이 이야기를 주고받는 대화로 이루어져 있고,?주인공은 소크라테스로 되어 있는데,?이 글만은 거의 티마이오스라는 사람의 독백으로 이루어져 있고,소크라테스는 입도 벙긋하지 못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아마 이 글에 나오는 내용이 소크라테스가 평소에 입에 올리던 화제와는 너무도 달라서 짐짓 플라톤이 사부님은 한쪽으로 제쳐놓고 자기 이야기를 한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도 듭니다.?어쨌거나 이 글을 보면 데미우르고스(Demiourgos :이 이름은 그리스어 동사?demo[짓는다]를 의인화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라는?‘일하는 하나님’(?)이 나옵니다.?이 우주 밖에 사는 우주마왕은 머리를 짜내서 우리가 사는 이 우주를 만들어 내는데,?대충 스치면서 훑어보자면 이렇게 만들어 냅니다.?먼저 건축 자재가 있어야 하겠지요.?이 건축 재료가 무엇인지 압니까??놀라지 마십시오. ‘같은 것[tauton]’과?‘다른 것[heteron]’입니다.?왜 엠페도클레스처럼 우주를 이루는 네 개의 원소[原素?:?이 말도 사실 그리스어로는?‘맨 처음 것’이라는 뜻을 지닌?‘아르케(arche)’나?‘뿌리’, ‘근원적인 것’의 뜻을 지닌?‘리조마타(rhizomata)’를 멋대가리 없이 번역해 놓은 것입니다.]인 물,?불,?공기,?흙 같은 것으로 만들지 않고 추상적이기 짝이 없는?‘같은 것’, ‘다른 것’?따위로 만들겠다고 설쳤느냐고요??잠깐!?여기에는 그만한 까닭이 있습니다.?그리고 네 개의 원소 이야기는 나중에 또 나옵니다.?앞에서 우리는?‘같다’, ‘다르다’는 말이 논리적으로 참과 거짓을 가리는 문장에서는?‘이다’, ‘아니다’와 같은 뜻으로 쓰이며, ‘이다’, ‘아니다’를 뒷받침하는 근거는 바로?‘있다’, ‘없다’에 있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이 말을 실마리 삼아 플라톤이?‘같은 것’과?‘다른 것’이라는 말로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제 나름대로 한번 미루어 짐작해 보기로 하지요.”

윤구병 그림 1-7

“자,?이제 그림?7을 다시 한 번 보기로 할까요??있는 것과 없는 것이 서로 맞닿자마자 그 사이에 줄을 서기 시작한 그 한없이 많은 괴물들 말입니다.?이 괴물들은 모두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무규정적인 것이라는 점에서 겉모습은 같아 보입니다만 꼼꼼히 얼굴을 뜯어보면 하나도 같은 것이 없습니다.?마치 하나의 기타 줄에 숨어 있는 소리가?‘숨어 있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을지라도 짚어 가면서 튀겨 내면 저마다 다른 소리로 떠오르는 것과도 같습니다.?그러나 기타 줄에 숨어 있는 소리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나,?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차례차례 짚어 가면서 튀겨 내면 높은 소리에서 낮은 소리에 이르기까지 질서 있게 배열되어 있듯이,?무규정적인 것도 그것이 있는 것과 없는 것 사이의 어느 자리에 있느냐에 따라?‘있는 것과 맞닿아 있는 놈’, ‘그 다음 놈’, ‘그 다음 놈’,?……?‘있는 것’과 가장 멀리 떨어져 있고‘없는 것’에 맞닿아 있는 놈’─이렇게 순서에 따라 이름을 붙일 수 있습니다.다시 말해서 무규정적인 것의 무규정성에는 단계가 있다는 뜻입니다.?있는 것 쪽에서 보면 자기와 맞닿아 있는 놈이 가장 자기와 같은 것이고 없는 것에 맞닿아 있는 놈이 자기와 가장?‘다른 것’이고,?거꾸로 없는 것 쪽에서 보면 자기와 맞닿아 있는 놈이 가장 자기와?‘같은 것’,?있는 것과 맞닿아 있는 놈이 가장 자기와?‘다른 것’입니다.?그러니까 무규정적인 것에는 있으나 다름없는 것에서부터 없으나 다름없는 것에 이르기까지 별의별 놈이 다 있는데 있는 것을 기준으로 삼으면?‘있음으로 거의 꽉 차 있는 놈’, ‘있음이 조금 빠져 있는 놈’, ‘조금 더 빠져 있는 놈’?……?‘있음이 거의 다 빠져 나간 놈’으로 짚어 나갈 수 있고,?없는 것을 기준으로 삼으면?‘있으나마나 한 놈’, ‘있음이 조금 들어간 놈’, ‘있음이 조금 더 들어간 놈’?……?‘거의 있음으로 가득 차 있는 놈’으로 이름 붙일 수 있습니다.?여러분,?우리가 첫머리에서?‘없는 것이 있다.’는 말이?‘빠진 것이 있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고 이야기한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또 어떤 신혼부부가 살림살이를 장만하는데 남편이 이것저것 사들이다가 아내를 돌아다보면서?‘여보,?이제 없는 것이 뭐지?’?하고 물었을 때 아내가?‘어제까지만 해도 없는 것이 많았는데 이제 빠진 것이 거의 없는 것 같아요.’라고 대답한다면 이 말에도 같은 뜻이 담겨 있습니다.”

 

자식이 부모보다 먼저 죽는 것은 크나큰 불효(不孝)이다[침몰한 세월호, 침몰한 대한민국]-4

자식이 부모보다 먼저 죽는 것은 크나큰 불효(不孝)이다[침몰한 세월호, 침몰한 대한민국]-4

나태영(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수 백 명 고등학생들이 부모에게 불효를 범했다. 부모 가슴이 숯처럼 타 들어가게 했다. 부모 가슴을 송곳으로 후벼 팠다. 국가는 제대로 저들의 불효를 막지 못했다. 선거개표조작으로 대통령 자리 훔친 박근혜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뭔지 구분하지 못했다. 자신이 아르바이트도 해 본 적이 없었기에 나타난 현상이다.

박성미 감독이 말한 것처럼

‘돈은 걱정하지 말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세월호에 탄 사람 모두를 구하라!’

박근혜가 이리 말했으면 현장에 있는 사람들이 군함 몇 척, 다이빙벨, 바지선, 크레인을 모두 동원해서 사람들을 구했을 것이다. 군함 몇 척이 동원 되었으면 세월호에 밧줄을 매달아 약 1.6키로 떨어진 육지로 세월호를 끌고 갔을 것이다.

 

하지만 박근혜는 ‘책임 묻겠다. 엄단하겠다.’ 이런 말을 해서 오히려 현장에서 구조하는 공무원들을 주눅들게 만들었다. 그 결과는 불을 보듯 뻔했다. 겁먹은 공무원들은 구하는 하는 시늉만 했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

‘윗물이 지혜로울 때 아랫물이 속 편하다.’

 

‘국가가 국민을 보호하지 못한다면

그건 국가가 아니다.

우리 국민 한사람을 못 지켜낸

노무현 대통령은 자격이 없으며

나는 용서할 수가 없다’

– 박근혜가 했던 말

(알카에다에게 김선일 씨가 피살당했을 때)

 

 

 

세월호의 침몰과 더불어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도 몰락하다![침몰한 세월호, 침몰한 대한민국]-3

세월호의 침몰과 더불어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도 몰락하다![침몰한 세월호, 침몰한 대한민국]-3

 

김성우(ⓔ시대와철학 편집위원장)

 

세월호 침몰 속에서 자유 민주주의의 민낯이 드러났다.?자유 민주주의에서 자유와 민주는 언제나 실현되는 이념이 아니라 구실이나 핑계일 뿐이다.?자유는 시장과 재벌의 자유로 전락하고 민주는 일정 기간 동안 정해진 대로 부여된 투표권으로 나타난다.?언론의 자유는 자본과 권력에 종속되어 자유 민주주의의 불편한 진실을 은폐하고 관심의 방향을 다른 쪽으로 돌린다.?지금 우리나라의 자유 민주주의는 정치적 민주화와 경제적 민주화의 모든 노력과 성과를 뒤로 하고 자유와 민주의 장애물이 되었다.

이러한 자유 민주주의에 포퓰리즘이 더해지면 대중독재의 파시즘이 출현한다.?자유 민주주의는 선거가 경쟁적이지만 파시즘은 대단히 일방적이고 공세적이다.?파시즘은 이를 위해 언론과 방송의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극도로 이데올로기 작업에 매진한다.?예를 들어 나치 정권의 히틀러는 [나의 투쟁]이라는 저서에서 독일인들에게 닥친 패배,?경제위기,?도덕적?‘타락’과 같은 모든 불행 뒤에는 단 하나의 악의 원인이 있다고 단언한다.?모든 것을 설명해주는 단 하나의 원인은 유대인의 음모이다.?마찬가지로 군사독재정권인 유신 정부에서도?‘빨갱이의 음모’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미국에서도 전후에는 매카시가 부추긴?‘공산주의자의 음모’가 부시 정권에서는?‘테러리스트의 음모’가 존재했다.

이와 같이 사회적 불행의 모든 현상을 다 설명해주는 단 하나의 언어(순수한 시니피앙)가 바로 라캉과 지젝이 명명한?‘누빔점’이다.?지젝은 [가장 숭고한 히스테리 환자]에서 프랑스의 보수와 진보 진영 사이에서 뜨거운 논란이 된?‘드레퓌스 사건’을 통해 이 누빔점의 효과를 언급한다.?누빔점은 소급효과를 통해 혼란과 우연의 역사에 의미와 필연성을 부여한다.

1898년?8월?30일 프랑스 정보부(우리나라로 말하면 국정원)의 새 책임자인 앙리 중령이 체포된다.?그가 드레퓌스를 국가반역죄로 기소하기 위해 하나의 비밀문서를 조작했다는 혐의를 받았기 때문이다.?그는 다음날 구치소에서 자살했다.?이로써 드레퓌스에 대한 재판이 다시 열리고 무죄가 선언될 분위기였다.?이때 하나의 신문 기사로 인해?‘기적적 반전’이 일어난다.?그 기사의 제목은?‘첫 번째 피’이고 글쓴이는?30세의 젊은 무명작가 샤를르 모라스였다.?그가 한 것은 보충적 정보를 제공한 것도 아니고 반박도 제시하지 않은 채 모든 사건이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게 만든 전체적인 재해석뿐이었다.

모라스에 의하면 자살한 앙리는 추상적인 정의보다 애국적 의무를 다한 영웅적 희생자가 된다.?유대인의?‘배신 집단’이?‘날조가 아닌 위조와 같은 작은 사법적 실수’를 물고 늘어져 프랑스의 삶의 기반을 파괴하고 군대를 무력하게 만든 것을 참지 못한 앙리는 나라가 파국으로 치닫는 것을 막기 위해 소소한 애국적 잘못한 저지른 것뿐이다.?이제 사건의 초점은 판결의 정의나 합법성이 아니라 프랑스라는 나라의 국운이다.?결과적으로 진정한 희생자는 억울하게 기소된 유대인인 드레퓌스가 아니라?“프랑스의 안녕을 위해 모든 것을 건 고독한 애국자인 앙리 자신”인 것이다.

모라스에 의한 새로운 누빔점이 제시됨으로써 전체적인 논쟁의 장이 다시 구성되면서 여기에서 정의와 법치는 사라지고 애국심과 매국적인 음모만 남게 된다.?진보 진영은 분열되고 보수 진영은 단결한다.?보수적인 포퓰리즘이 등장하고 반유대주의가 증가한다.?이데올로기의 장에서 이렇게 누빔점의 역할은 대단한 것이다.?이러한 모라스를 본받아 우리나라에서도 역시 유신 잔당의 공안세력과 국정원이 주도하여 경제민주화라는 시대적 과제를 외면하고?‘종북 세력의 음모’라는 새로운 누빔점을 지난 일여 년 동안 열심히 세우려고 노력했다.?이들의 노력은 성과를 거의 거두는 듯했다.?올해?6월 지방선거에서 야당도 안보에 대해서 말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세월호가 침몰했다.?공안세력이 장악한 박근혜 정부는 세월호 희생자 가족들이 여전히 종북 세력의 음모에 휘말려 청와대와 정부에 대한 불신과 분열을 조장한다고 말하고 싶었다.?그러나 세월호 침몰은 단순한 사고나 실수가 아닌 기존의 이데올로기 장을 뒤집는 폭발력이 있는?‘사건’이다.?사건이란 바디우가 말하듯이 기존 존재 질서에 균열을 내는 진리의 도래이다.이 진리는 불편한 진리이다.?이번 사건을 통해서 지금까지 신봉된 신자유주의적인 국가시스템의 문제점과 박근혜 정부의 무능이라는 화장 안 한 얼굴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그렇게 애써서 작업한 공안세력이 역공에 휘말리게 된 것이다.

이 사건 앞에서 박근혜 정부의 살 길은?‘국가개조’가 아니라 청와대와 정부에서 공안세력을 내쫓고 감세와 규제쳘폐의 기조에서 벗어나 공약대로 경제민주화를 과감하게 추진해야 한다.?즉,?정권의 혁신과 정책의 기조의 환골탈태가 필요한 것이다.?만약 박근혜 정부가 사건의 도래로 알려진 시대적 과제를 외면하고 계속해서 공안세력의 보수적 포퓰리즘을 자극하는 누빔점을 다시 설정하려고 노력한다면 간헐적으로 들리기 시작한?‘하야’?목소리가 진짜로 커질 것이다.?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으려면 박근혜 정부는 파시즘으로 나아가는 보수적 포퓰리즘을 버리고 언론의 자유와 법치와 같은 자유 민주주의의 원칙이라도 제대로 실천해야 할 것이다.

 

대한민국을 절대 용서하지 말라![침몰한 세월호, 침몰한 대한민국]-2

대한민국을 절대 용서하지 말라![침몰한 세월호, 침몰한 대한민국]-2

유현상(숭실대학교 강사)

 

 

대한민국을 절대 용서하지 말라!

 

외면당한 꽃들이여!
너희들을 외면한 어른들을 절대 용서하지 말라.
쉽게 용서받은 자들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
그들은 지금껏 항상 누군가를 외면하면서 살아온 자들이다.

외면당한 꽃들이여!
너희들을 외면한 대한민국을 절대 용서하지 말라.
반성하지 않는, 과거로부터 배우지 못한 나라는 용서받을 자격도 없다.
이 땅은, 이 나라는 너희들에게 희망이 아니었고 삶의 터전도 아니었다.

외면당한 꽃들이여!
용서와 화합을 외치는 자들을 절대 용서하지 말라.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용서는 책임회피의 뜻이며,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화합은 은폐와 망각의 염원일 뿐이다.
이 땅은, 이 나라는 부끄럽게도 그러한 용서와 화합의 덮개로 살아가게 될 것이다.

외면당한 꽃들이여!
이 땅의 모든 어른들을 용서하지 말라.
이 땅의 모든 어른들은 너희들을 예전부터 외면해왔다.
이 땅의 모든 어른들은 너희들의 미래를 착취하면서 살아 왔다.
이 땅의 모든 어른들은 나라를 팔아먹은 자들을 너무 쉽게 용서하고,
이 땅의 모든 어른들은 백성을 압살한 대통령들을 너무 쉽게 용서하고,
황금에 눈이 멀어 노동자들을 죽음으로 내몬 자본들을 너무 쉽게 용서하고,
국민의 안전과 행복한 삶을 외면한 정치인들을 너무 쉽게 용서하고,
그들의 나팔수들을 너무 쉽게 용서했다.

외면당한 꽃들이여!
남아 있는 우리 모두를 절대 용서하지 말라!
사무친 원한을 품고 우리들을 매서운 칼바람으로 다그쳐라.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다시 수많은 꽃들을 외면하게 될 것이다.
수많은 꽃들을 짓밟을 것이다.
부디 남아 있는 우리 모두를 절대 용서하지 말라!

외면당한 꽃들이여!
너무나 아까운 그대들이여!
미안하다. 그대들을 그 어두운 곳에 그 차가운 곳에 버려두었구나.
정녕 미안하다. 그러나 부디 용서하지 마라.
이 땅의 누구에게고 용서의 마음이 생기지 않도록 하라.
분노하게 하라. 내일 또 다른 꽃들이 버려지고 짓밟힐 것이다.

외면당한 꽃들이여!
부디 너희들을 잃고 비탄에 잠긴 너희 부모들을 위로하라.
너희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을 부디 용서하고 위로하라.
그들은 너희가 차가운 바다에서 버려지는 동안 가슴을 쥐어뜯고 울부짖으며,
너희들을 진정 그리워하는 그들만을 용서하고 위로하라.

외면당한 꽃들이여!
살아 돌아온 꽃들이여!
이 땅의 수많은 꽃들이여!
죄스런 삶을 사는 이 땅의 모든 어른들을 용서하지 말라!
바라건대 대한민국을 절대 용서하지 말라!

<자기를 자기답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자>[진짜 나로 살 때 행복하다]-⑤

<자기를 자기답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자>[진짜 나로 살 때 행복하다]-⑤

박은미(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 이 글은 박은미의 <진짜 나로 살 때 행복하다(자기 자신과의 화해를 위한 철학 카운슬링), 2013, 소울메이트 출판사>의 내용을 개제한 것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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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들에게 거짓이 되고 싶지 않다면, 우선 자기 자신에게 진실해야 한다. – 셰익스피어

이현주목사ⓒegosio.com

이현주목사ⓒegosio.com

이현주 목사의 『이아무개의 마음공부』라는 책에는 인도철학책에 있는 다음의 내용이 인용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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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사람 안에는 모두 커다란 다이아몬드가 들어있다. 그 다이아몬드에는 깎여진 면이 수천 개 있는데 면마다 때와 먼지로 덮여 있다. 그 면들을 닦아서 맑게 하고 마침내 찬란한 무지개 색깔을 비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영(soul)이 할 일이다. … 사람들 간의 차이란 닦여진 면의 수가 다른 것일 뿐이다. 모든 다이아몬드는 다 같고 모든 다이아몬드가 다 완벽한 것이다.”

내가 수천 개의 면으로 된 다이아몬드라고? 다이아몬드라면 빛이 나야 하는데 나의 어디에서 빛이 난다는 거지? 그러면 그 수천 개나 되는 면에 모두 먼지가 앉아서 나는 내가 다이아몬드임도 모르고 산다는 말인가?

이 생각은 불교의 사유방식과도 연관된다. 불교에서는 중생이 중생인 이유는 스스로가 부처임을 모르기 때문이라고 한다. 중생이란 ‘무명에 휩싸인 부처’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 무명만 거두어내면 되는데 그 무명을 거두어내지 못해서 스스로를 중생이라고 생각해 괴로워하면서 산다는 것이다. 먹구름 뒤에는 푸른 하늘이 있는데 사람들은 먹구름만 보고 하늘이 검다고 말하고, 거울에 때가 끼었을 뿐인데 때를 닦아낼 생각은 하지 않고 더러운 거울이라며 버리려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고 보니 사람마다 빛이 나는 측면을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인 것 같다. 어떤 사람은 이러한 측면에서 빛이 나고 다른 사람은 저러한 측면에서 빛이 난다. 그리고 우리는 다른 사람이 빛이 나는 측면을 보고 ‘나는 왜 저러지 못하지?’ 하는 열등감에 시달린다. 그리고 어떤 때는 다른 사람의 먼지 앉은 면을 보며 안심한다. ‘봐 저 사람도 저런 면이 있지. 나만 이상한 것은 아니야.’ 하면서 안심하게 되기도 한다.

그러면 우리들 사이의 차이란 ‘닦여진 면의 차이’라는 말이 된다. 어떤 사람은 1020개 면의 먼지가 닦여 빛이 나고, 어떤 사람은 100개 면의 먼지가 닦여 있고, 어떤 사람은 10개 면의 먼지가 닦여 있고, 어떤 사람은 한 면도 닦이지 않은 상태에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닦여진 면이 많은 사람은 빛이 많이 날 것이고, 닦여진 면이 적은 사람은 빛이 적게 날 것이다.

그런데 어찌 되었든 다이아몬드라고 말해주니 기분이 좋기는 하다. 결국은 우리는 닦으면 되는 존재라는 말 아니겠는가? 이 말은 우리에게 희망을 준다. 한 면도 닦이지 않은 사람은 먼지만 뽀얗게 앉아 있어 빛이 전혀 나지 않기 때문에 본인도 옆 사람도 다이아몬드인 줄 모르고 살기는 하지만 기실은 우리 모두가 다이아몬드라는 말이 되니까 말이다. ‘나는 다이아몬드가 아니야.’ 하면서 괴로워하면서 사는 것보다는 ‘나는 다이아몬드일 거야.’ 하면서 자신을 닦으며 사는 쪽이 남는 장사일 것이다. 설사 다이아몬드가 아닐지라도 닦다보면 다이아몬드 비슷해질 테니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 스스로 다이아몬드임을 믿고 먼지를 열심히 닦는 선택을 하는 것이 현명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잠깐! 그러면 그 수천개면이 다 닦인 존재가 있을까? 만약에 있다면 그 후보는 예수나 석가모니쯤 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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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다이아몬드에 앉은 먼지에 신경 쓰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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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당신은 다른 사람에게서 먼지가 앉은 면을 보는가, 빛이 나는 면을 보는가? 타인에게서 단점을 보는가, 장점을 보는가? 우리의 마음에는 타인의 단점과 어두움에 대한 친화성이 있다. 타인의 단점을 봐야 내가 그 사람보다 못나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어 안심을 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선 일단 우리는 자기도 모르게 다른 사람의 단점부터 보게 된다. 인간 인식의 한계상 단점부터 보게 되지만 이 때 타인의 단점에 안심하는 자기 자신을 들여다볼 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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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열등감을 묻어버리기 위해 타인의 단점을 자꾸 보아 버릇하면 타인과의 관계가 엉킨다. 누가 자신의 단점을 보는 데에만 유능한 옆 사람을 좋아하겠는가? 우리가 타인의 단점을 보게 되면 마음 안에 은근히 그 사람을 무시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고, 자기도 모르게 그 사람을 무시하는 방식의 표정을 짓거나 행동을 하게 된다. 인간에게는 자신을 무시하는 기운을 기가 막히게 알아채는 능력이 있다. 그래서 당연한 결과로 인간관계가 나빠지게 된다.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다. 그나 나나 어느 만큼 못났고 어느 만큼 잘났을 뿐이다. 우리는 흔히?늘 어떤 사람의 못난 면을 보고 무시하거나 그게 아니면 잘난 면을 보고 주눅 든다. 인간에 대한 성숙한 이해란 그의 잘난 면과 못난 면을 함께 보고 통합해서 이해하는 것이다. 성숙한 인간은 자신의 잘난 면과 못난 면을 함께 보고 통합해서 이해한다. 그리하여 그러한 사람에게는 잘나고 못나고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게 된다.

그도 나도 수천면체 다이아몬드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몇 천개의 면을 열심히 잘 닦아내는 것뿐이다. 남의 다이아몬드에 얼마나 먼지가 앉아 있는지에 관심가지지 말자. 내가 거기에 관심 가진다고 내 다이아몬드에 빛이 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남의 빛나는 면들을 보며 부러워하는 데 그치지 말자. 타인의 빛나는 면들을 보면서 나의 먼지 앉은 면을 닦아내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하기만도 짧은 세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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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쉽고도 가장 어려운 질문, 나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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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나는 어떤 다이아몬드인가? 어떤 다이아몬드이고 싶은가? 어떻게 닦아야 나는 다이아몬드가 될 수 있을까? 이 질문은 결국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으로 귀결된다. 나다운 나여야 가장 아름다운 다이아몬드가 될 것이니 말이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세상에서 가장 쉬우면서도 가장 어려운 질문이다. 나의 직업? 나의 학력? 나의 나이? 나의 성별? 무엇이 나인가? 일단 ‘나’라고 했을 때 떠오르는 이미지가 나의 ‘자기개념’이다. 우리는 타인이 나를 무시할 때 이 자기개념이 손상되는 느낌을 받는다. 우리는 각자가 자기다울 때 편안함을 느낀다. 나에게 나 답지 않은 것이 강요될 때 소외감을 느낀다.

나는 나다울 때 행복을 느끼는데 도대체 어떤 때 내가 나다운 것인지를 알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 문제이다. 우리는 보통 타인의 인정을 받을 때 충족감과 행복감을 느낀다. 그런데 타인의 갈채를 받는 스타들은 타인의 갈채 속에서도 외로워한다. 그 외로움은 대중이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 이미지를 좋아하는 것을 알기 때문에 생겨난다. 내가 정말 나다울 때는 내가 나를 의식하지 않는다. 나에 대한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게 된다. 그 때는 그저 나일 뿐이다. 내가 정말 나다울 때는 나는 자유롭다. 내가 나다운 때에는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모른다.

내가 나다울 때는 나라는 존재도 잊고 시간도 잊는다. 그러나 거꾸로 나라는 존재를 잊고 시간을 잊었다고 해서 내가 나다운 시간을 보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게임이나 도박 등을 할 때 나라는 존재를 잊고 시간을 잊지만 그 때 ‘나답다’고 느끼는 사람은 별로 없다. 이 런 문제로 헷갈릴 경우에는 구분할 수 있는 기준이 있다. 나라는 존재도 잊고 시간의 흐름도 잊었는데 그 시간이 끝난 후 허무감이 엄습한다면 그 시간을 나는 중독현상으로 보낸 것이다. 그런데 그 시간이 끝난 후 설명하기 어려운 충만감이 느껴진다면 그 때 나는 나다운 시간을 보낸 것이다.

게임을 했는데 게임의 운영에 나의 고유성이 반영되어 게임이 끝난 후에 충족감을 느끼게 된다면 그 사람은 게임에서 자아실현을 하는 사람이다. 그 사람은 프로게이머가 되어야 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러한 특별한 소수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게임이 끝나고 나면 허무감을 이기기 힘들어질 것이다. 그리고 현실에서의 생활에 집중을 하지 못하고 다시 게임의 세계로 돌아가고 싶어 하게 된다. 현실에서는 성취감을 쉽게 얻을 수 없는데 게임은 중간 중간이라도 어느 정도의 성취감을 느낄 수 있게 해주니까 게임에서 손을 떼기가 어려워진다. 그리하여 게임이 끝난 후 느껴지는 허무감을 잊기 위해 다시 게임에 몰두하는 악순환이 일어난다. 이렇게 현실에서의 생활에 도움이 안 되는 집중현상은 중독일 가능성이 높다.

내가 나답지 않은 행동을 할 때 마음 안에서는 어떠한 불편의 신호가 울려 퍼진다. 무언가 ‘이게 아닌데’의 마음이 있다. 청소년들이 주목받지 못하고 사랑받지 못할 때 말썽을 피우고 폭력을 행사하면서 자신의 존재를 부모와 사회에 알리고자 하는 경우가 많다. 이때 청소년들은 친구들과 함께 있는 군중심리에 사회가 금하는 행동을 한다. 그러면서도 마음 안에는 ‘이게 아닌데’의 마음이 있다. 그래서 말썽 피운 학생들을 보면 도저히 그런 행동을 했을 것 같지 않은 착한 얼굴의 학생들이 꽤 있다.

나를 나답게 하는 일이 무엇인지, 내가 어떨 때 나다워서 충족감을 느끼는지는 다양한 경험을 해봄으로써 확인할 수 있다. 다양한 경험을 해보면서 어느 때 내가 가장 편안하고 자유롭게 느끼는지를 확인해볼 필요가 있다. 그 경험 속에서 이것을 평생 계속 한다고 해도 할 수 있겠는지를 물었을 때 “Yes”라는 대답이 나온다면 그것이 나답게 하는 일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노래에서 자신의 고유성을 잘 발휘하는 사람은 노래를 할 때 자유를 느끼고 시간을 잊는다. 손재주가 있는 사람은 무언가를 만들 때 시간을 잊고 무아지경에 빠진다. 그리고 그 물건을 잘 만든 자기 자신에 대해 뿌듯함을 느낀다.

나를 나답게 하는 일은 사회적 보상이 적게 주어져도(즉 보수가 적게 주어져도) 하고 싶어진다. 돈 때문에만 하는 일은 나를 나답게 하는 일이 아니다. 돈만 아니면 그 일을 하지 않고 싶다면 그 일은 나를 행복하게 하는 일이 아니다. 나답게 하는 일인지 아닌지를 구분하는 기준은 ‘그 일을 평생 해도 후회가 없겠느냐?(그 일을 하면서 스스로 보람을 느끼고 자기 자신을 발전시킬 수 있는가?)’와 ‘(생계 문제는 해결된다는 전제에서) 경제적 보상이 주어지지 않아도 그 일을 하고 싶은 마음이 있느냐?’라고 정리할 수 있다.

청년들의 경우에는 여러 종류의 아르바이트를 해보면 어떤 유형의 일에 자신의 재능이 잘 펼쳐지는지를 확인해볼 수 있다. 당연한 얘기지만 인간은 자신의 재능이 잘 펼쳐지는 영역에서 일을 신나게 잘 할 수 있다. 맥주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해도 다양한 술손님들을 만나면서 이런 유형의 손님들에게는 이런 식의 대응을 하는 것이 좋고 저런 유형의 손님들에게는 저런 식의 대응을 하는 것이 좋다는 것을 깨달아 아는 사람이 있다. 이런 사람은 사람 대하는 일을 하는 것이 적절할 수 있다.

다양한 책을 읽고 다양한 사람을 만나고 다양한 경험을 하면서 어떤 때 내가 나라는 존재까지 잊을 정도로 집중하는지 어떤 때 내가 가장 생기발랄해지는지를 확인해보는 것이 자기를 자기답게 하는 것을 알아가는 방법이다. 나의 경우에는 강의가 내가 원하는 대로 잘 되거나 글이 내가 원하는 대로 잘 써질 경우에, 대체로 나의 생각을 적절한 언어로 표현할 때 충족감을 느낀다. 그 언어가 타인에게 전달되어 의미를 낳으리라 믿어질 때, 의미를 낳을 수 있도록 전달하고 있다고 확신하게 될 때 충족감을 느낀다. 내가 추구하는 의미는 나의 강의를 듣거나 나의 글을 읽는 사람이 보다 더 자기 자신으로 살 수 있도록 돕는 것에 있다. 그 때 나는 내가 살아 있다고 느낀다. 내가 살아 있다고 느끼는 때, 그 때가 내가 나로 존재하는 순간이고 나다운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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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가 만들어가는 그 무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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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다운 나’와 관련된 철학 개념이 바로 실존이다. 실존은 기본적으로 ‘자기 자신을 문제 삼을 수 있는 인간 존재의 특성’이라고 할 수 있다. 동물은 ‘나는 왜 이렇게 생겨먹었지? 왜 이것밖에 안되지?’ 하는 고민을 하지 못한다. 인간만이 이러한 고민을 한다. 이러한 고민은 일차적으로는 굉장히 고통스러운 고민이라는 느낌이 들겠지만 역으로 인간이 이러한 생각을 할 수 있기에 꿈도 꿀 수 있는 것이다. 현재의 모습에 만족하지 않고 다른 모습을 지향하는 능력 때문에 꿈도 꿀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꿈이라고 하는 것은 ‘지금과 다르기를 기대하는 것’이므로 말이다.

인간이 다른 존재와 구분되는 특성은 자신의 삶 전체에 대해 반성하면서 어떻게 살아야할 것인지를 고뇌한다는 것이다. 인간에게만 이러한 실존적 성격이 있다. 사실 여러분들이 ‘진짜 나로 살 때 행복하다’라는 제목에 끌려서 이 책을 펼치게 되는 것 자체도 여러분 안에 실존으로서의 특성이 있기 때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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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 야스퍼스(Karl Jaspers, 1883~1969), 독일의 철학자ⓒbetterworldbooks.com

카를 야스퍼스(Karl Jaspers, 1883~1969), 독일의 철학자ⓒbetterworldbooks.com

인간 안에는 스스로의 결단을 통해 자기의 존재를 형성해나가는 측면이 있는데 이 측면을 실존철학에서는 ‘실존으로서의 자기’로 본다. ‘실존으로서의 자기’라고 표현하는 이유는 그냥 ‘실존’이라고 하면 ‘실존’이라는 존재자가 따로 있는 것 같은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물론 철학자들도 굳이 ‘실존으로서의 자기’라고 표현하지 않고 그냥 간편하게 ‘실존’으로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

앞에서 ‘이게 아닌데’의 느낌이 인간에게 있다는 말을 했다. ‘이게 아닌데’의 느낌은 내가 실존적으로 존재하지 않을 때 받게 되는 느낌이다. 인간에게는 실존으로서 존재하고자 하는 경향성이 있다. 실존으로서 존재할 때 나는 자아실현이 된다고 느낀다. 자아실현이라고는 하지만 이것이 내 안에 있는 것을 바깥으로 끄집어낸다는 의미는 아니다. 실존철학자 야스퍼스의 경우에는 ‘드러남으로서의 실현’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내 안에는 아직 실현되지 않은 가능성이 있고 그 가능성이 실현되는 방식은 ‘드러남’이라는 것이다. 야스퍼스는 이를 ‘존재를 일으키는 드러남’이라고 표현한다.

예를 들어 생각해보자. 당신은 내향적인가, 외향적인가? 자신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람일수록 이 두 성향이 섞여 있다고 느끼게 된다. 그런데 처음에 이 단어를 활용해 자신을 내향적이라거나 외향적이라고 규정할 때는 어땠는가? 아마도 스스로 내향적이라는 규정에 맞추어 외향적인 특성을 도외시하거나 외향적이라는 규정에 맞추어 자신 안에 있는 내향적인 특성을 무시해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점점 자기 자신을 알아가게 되면서 ‘어 나에게도 이런 면이 있었나? 이건 외향적 특성 아닌가? 내가 내향적인 것만은 아니네.’ 혹은 ‘이건 내향적 특성 아닌가? 내가 외향적인 것만은 아니네.’ 하는 느낌을 가지게 된다.

어떤 하나의 일관된 특성이 나에게 있어서 그 특성이 일정한 방식으로 표출되는 것이 아니라 나는 ‘알 수 없는 심연으로서의 나’이고 그 ‘나’가 세상과 만나는 방식에서 내향적인 특성으로 드러나는 때도 있고 외향적인 특성으로 드러나는 때도 있는 것이다. 오히려 그 ‘알 수 없는 심연으로서의 나’가 세상과 만나는 방식 자체가 내가 누구인지를 드러내준다. 그러니까 세상과 만나면서 만들어지는 나의 모습이 나를 구성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대체로 내향적이니 외향적이니 하는 규정 속에서 내향적 혹은 외향적인 방식으로 나를 만들어가려고 한다. 그 과정에서 무언가 불편해지면 더 편해지는 방식으로 행동한다. 즉 내향적으로 행동하려 했는데 그게 불편해서 외향적으로 행동하기도 하고 외향적으로 행동하려 했는데 그게 불편해져서 내향적으로 행동하게 된다. 여기서 ‘이건 아니다’라는 식으로 불편을 느끼는 것은 나의 ‘알 수 없는 심연’에서의 울림이다. 나의 마음의 결인 것이다.

나의 마음의 결이 어떻게 생겼는지, 나의 마음의 생김새가 어떠한지는 나도 다 알 수 없다. 세상과 만나는 방식에서 이러저러한 부딪침에서 나의 마음 생김새를 느껴갈 뿐이다. 나는 나의 마음 생김새를 느끼면서 또 행동들 속에서 나를 만들어가게 된다. 이것이 ‘존재를 일으키는 드러남’이다. 행동으로 존재를 구성해가기 때문에 ‘존재를 일으킨다’고 표현하는 것이고, 그것이 세상과 만나는 방식에서 표현되기 때문에 ‘드러남’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행동 하나 하나가 다시 나를 구성한다. 여기서 그 행동 하나 하나를 결정하는 것에 주목한 철학자들이 바로 실존철학자들이다.

장폴 사르트르(Jean-Paul Charles Aymard Sartre, 1905~1980), 프랑스 실존주의 철학자, 작가ⓒmirror.enha.kr

장폴 사르트르(Jean-Paul Charles Aymard Sartre, 1905~1980), 프랑스 실존주의 철학자, 작가ⓒmirror.enha.kr

인간존재의 본질이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개인이 자기 자신의 독자적 결단을 통해서 그 자신의 고유한 본질을 형성한다고 보는 데에 실존철학의 특징이 있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사르트르(J.P.Sartre)의 선언이나 “인간은 자유 그 자체이다.”는 야스퍼스의 선언은 실존철학의 근본입장을 잘 드러내준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것의 의미는 인간 실존은 이미 주어진 본질에 따라 그 본질을 실현하면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가 스스로를 만들어가는 존재라는 것이다. 인간의 본질이 어쩌니 저쩌니 해봐야 나의 실존이 가장 1차적인 것이라는 말이다. ‘인간은 자유 그 자체이다’는 야스퍼스의 선언은 말 그대로 인간은 스스로가 만들어가는 존재, 스스로를 결정하는 자유의 존재라는 의미이다.

나는 유전적 요인에 의해, 주어진 환경에 의해, 사회시스템에 의해 결정된 존재인 것처럼 느껴지지만 나는 내가 결정하는 존재이다. 유전적 요인과 주어진 환경, 사회시스템이 유사해도 각자 각자는 다르게 행동한다. 왜 다르게 행동했는가를 물으면 그 당사자도 대답하기 어려워진다. 자신이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를 무의식적 요인에 의한 것으로만 설명하기도 어렵다. 각자의 알 수 없는 심연의 고유성, 유전적 요인, 환경적 요인, 사회시스템 등의 변인이 만나 복합적으로 작용해 ‘나’가 구성된다.

나는 구성되는 동시에 스스로를 구성한다. 유전적 요인, 환경적 요인, 사회시스템 등의 변인은 나를 구성하기는 하지만 그 구성에 반기를 들고 저항하고 그 구성을 조직해 나가는 것은 ‘나의 알 수 없는 심연’이다. 그러니까 알 수 없는 심연의 고유성, 유전적 요인, 환경적 요인, 사회시스템 등의 변인의 복합체가 나인 것이다. 이 네 변인 사이의 역학관계가 어떠한지 까지는 알 수 없다. 우리는 여러 가지 학문이론으로 이 변인 사이의 역학관계를 알고자 노력할 뿐이다.

알 수 없는 심연의 고유성을 통해 인간을 이해하려는 학문이 실존철학이고 유전적 요인을 통해 인간을 설명하려는 학문이 생물학이고 환경적 요인과 사회시스템 등의 변인을 통해 인간을 설명하려는 학문이 각종 사회과학인 것이다. 이러한 학문을 통해 인간을 이해해도 여전히 남는 것은 ‘내가 원하는 나’로 살려면 ‘내가 원하는 나’가 되기 위한 각종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정신분석학의 경우에는 무의식이나 유아기의 애착관계를 통해 인간에 대해 설명한다. 그러나 정신분석을 통해 지금의 내가 왜 이러한 마음 생김새를 가졌는지가 밝혀진다 해도 여전히 남는 문제는 지금의 나는 ‘내가 원하는 나’가 아니라는 것이다. 지금의 나를 형성한 것이 유아기의 잘못된 애착관계라고 해도 내가 지금 유아기로 돌아갈 수 없는 바에야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 ‘유아기의 잘못된 애착관계’에 대해 내가 어떠한 태도를 취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뿐이다. 그 ‘유아기의 잘못된 애착관계’를 원망하면서 남은 인생을 낭비할 것인지, 그 ‘유아기의 잘못된 애착관계’에도 불구하고 앞으로의 삶을 어떻게 살 것인지를 고민해서 자신의 원하는 모습을 향해 나아갈 것인지의 결정 말이다. 더 많이 후회하면서 살 것인가, 아니면 후회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운 삶을 살 것인가는 나의 결정에 따른 일이다.

설사 생물학이 맞고 사회과학이 맞고 정신분석학이 맞다 해도 얼마만큼이나 맞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이 학문들을 신뢰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이 학문들의 결론으로 인해 결정당해서 우울해지지는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설사 이 학문들이 실제로 상당히 타당하다고 해도 나는 ‘그러한 요인들에 의해 결정된 존재’로 살 때보다 ‘내가 결정하는 나’로 살 때 더 행복하다. 그렇다면 우리가 취해야 할 태도는 분명하지 않은가? 나는 내가 만들어가는 존재로 살 때 행복하므로 열심히 나 자신을 ‘내가 원하는 나’로 만들어가면 되는 것이다. ‘내가 원하는 나’로 살기 위해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의 질문, 그것이 우리에게 필요한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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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오디세이는 미디어의 역사다 [보고듣고생각하기]

미디어 오디세이는 미디어의 역사다:?김동민이 쓴?『미디어 오디세이』

 

나태영(한철연 회원)

 

 

강준만과 김동민

강준만은 무림고수이다.?강준만은 실명비판 대명사이다.?강준만은 공정한 평가를 추구한다.?무림고수 강준만한테 뼈도 뭇 추린 인간들이 많다.?강준만은 비판만 하지 않는다.?칭찬도 한다.?강준만한테 칭찬 들을 정도인 사람은 지성인이다.?강준만은 이 책?『미디어 오디세이』를 쓴 김동민을 칭찬한다.?자신은 글만 쓰는 데 김동민은 글도 쓰고 실천도 한다고 칭찬한다.?강준만은 김동민을 부러워 한다.?강준만이 부러워 하는 김동민 사상을 차분하게 들여다 보자.

미디어 오디세이는 미디어의 역사다

이 책 내용을 두 문장으로 줄이면?‘미디어 오디세이는 미디어의 역사다.’(16쪽)?‘미디어의 역사는 역사 속의 미디어를 조망하는 것이어야 한다.’(17쪽)란 문장이다.?언론학자 김동민이 이 책에서 역사를 다루는 이유는 당연하다.?역사를 다루지 않고 언론사를 다룰 수 없다.?언론사를 다루지 않고 언론에 대해 말 할 수 없다는 게 김동민이 주장하는 말이다.?이 책은 우선 대학 언론학 교재로 쓰려고 만들었다고 김동민은 말한다.?이 책에서는 한국 대학,?특히 한국 언론학과가 지니고 있는 문제를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한국 언론학과가 지닌 문제를 해결해 보려는 뜻에서 김동민이 이 책을 썼다고 나는 생각한다.

‘내가 대학을 다닐 때는 한국 언론사도 배우고 세계 언론사도 배웠다.?그러나 세계 언론사는 언제부턴가 종적을 감췄고 한국 언론사만 남았다.?그마저도 가르치지 않는 대학도 있고,?언론사 전공자는 찾아보기 어렵다.?대학이 상업주의에 물들어 기업처럼 운영되는 현실에서 역사교육을 소홀히 하는 풍토가 언론학계에도 만연해 있다.?미디어가 인류 공동체 속에서 생성되고 인류사회를 변화시켜온 역사를 모르고 미디어를 공부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7쪽)

대학을 거부하는 학생이 있다.?김예슬이 대학을 거부했다.?다니던 대학을 그만 두었다.?그리고?『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 둔다,?아니 거부한다.』란 책을 썼다.?물론 대학 다니기를 거부하는 사람들 수는 극소수이다.?대한민국 사회에서 대학 나오지 않고 살아가기 힘들기 때문이다.?대학총장,?대학교수들,?대학생들 분발을 기대한다. ‘대학이 상업주의에 물들어 기업처럼 운영되는 현실’을 비판하는 김동민 말이 큰 울림을 준다.

한국언론사와 한국역사를 왜 공부해야 하는지 우리는 다음 글에서 알 수 있다.?이 땅에서 서재필이 과대평가 받았다.?우리는 서재필을 있는 그대로 평가할 필요가 있다.

‘미국인 신분의 서재필을 선택한 데서 오는 한계도 명백하다.’ ‘고종은 서재필에게’ ‘연봉으로?3천?5백환을 책정해주었다.?당시 소?1마리가?20원?40원이었으니 소?100마리 가격이 넘어 지금 가격으로?1마리에?2백 만원만 치더라도 연봉?24억 원이 된다.’ ‘나라가 어려워지자 남은 기간의 급여를 한꺼번에 받아 미국으로 돌아간 것만 보아도 그의 진정성을 의심할 만하다. <독립신문>의 한계는 창간주체의 한계인 동시에 서재필의 한계다.’ ‘서재필은 자신이 미국인임을 늘 강조했다.?제국주의 미국이 조선에서 이권을 강탈해가는 현실을 옹호하는 입장이었다.?심지어 미국이?1896년?3월 일본에?1백만 달러를 받고 이권을 팔아넘긴 경인철도 부설권,?평안북도 운산금광 채굴권(1896년?4월)의 강탈에 대해서도 환영하였다. “속마음을 의심할 필요가 없는 나라와 맺은 것이며 지금까지 어느 열강과 맺은 조약보다 유리한 계약”(The Independent, 1896. 4. 16.)이라는 것이다.’ ‘1898년 당시 그의 출국을 만류하는 독립협회 회원들에게 보낸 답장에는 조선 정부를?‘귀 정부’(貴 政府)라고 칭했다.(<독립신문>, 1898. 5. 5.).’(182, 183쪽)

김동민은 통섭형 학자이다

미디어 오디세이뒤풀이 자리에서 김동민이 자신은 맑스주의자라고 말했다.?그래서 그런지 이 책에서 칼 맑스 목소리가 언뜻 언뜻 들린다.?지금 정치학과 경제학이 쪼개졌다.?정치경제학으로 합쳐질 필요가 있다.?이 땅에서 경제문제는 중요하다.?하지만 경제정책을 만드는 곳은 국회이다.?경제전문가와 정치가는 대화를 많이 해야 한다.?일반인들도 정치뿐만 아니라 경제 공부도 열심히 해야 한다.

‘오늘날의 미디어의 진화와 자본주의의 등장 및 전개와 긴밀한 관련을 맺기 때문에 정치경제학의 관점은 필수적이다.’(6쪽)

‘자본주의를 사는 우리는 자본주의의 생산관계를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언론학의 입장에서는 연구대상인 언론매체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작동하기 때문에 그 원리를 이해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자본주의 사회의 원리를 배제한 상태에서 미디어와 커뮤니케이션 현상만을 관찰해서는 그마저도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역사연구도 예외일 수 없다.?매스미디어 시대를 연 신문만 하더라도 그것은 상품으로 존재하며,?그 내용은 상품성을 추구한다.상품으로서의 신문을 규명하는 것이 기본이다.?마르크스는 상품을 세포에 비유했다.’(135쪽)

‘세포가 단백질로 구성되어 있듯이 상품은 자연의 물질로 구성된다.?자연에서 얻은 재료 및 노동도구 등(생산수단)을 확보한 자본과 인간 노동력의 지출(노동)이 결합하여 상품이 된다.?그래서 상품의 핵은 상품에 체화된 노동이다.?상품은 자연에서 얻은 물질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핵은 노동이라는 것이다.’(136쪽)

김동민은 언론학,?역사학,?철학,?정치경제학 고수이다.?아이엠에프(외환위기)?사태에 대해서 핵심체크 해주는 김동민 내공 대단하다.

‘외환위기 가운데 김대중 정부가 탄생했다.?김대중 정부는?IMF의 요구대로 거시경제 안정화 정책,?강력한 긴축정책,?금리의 대폭 인상, “외국인투자 촉진법”?제정 등을 시행에 옮겼다.?그러나 실물경제가 침체되면서 금리를 인하하자 주식투자로 돈이 몰렸다.?정부는 거시경제 안정화 정책 차원에서 구조조정을 실시했다.?금융산업 구조조정으로 규제철폐,?외국인 투자한도 폐지,?부동산 시장 전면 개방,?모든?M&A(인수합병)?허용,?외환거래 자유화 조치,?기업 구조조정으로 기업경영의 투명성 제고,?선진국 수준의 재무구조 추진,?핵심업종 중심의 강한 기업 유도,?계열회사 간 빚보증 관행 불식,책임경영,?노동시장 구조조정으로 정리해고제,?근로자파견제,?노사정위원회,?공공부문 구조조정으로 공기업 민영화 등이 추진되었다.?이로 인해?KT가 정부기구로부터 독립하여 민영화되었고, SK텔레콤,?포스코,?삼성전자 등 기업의 외국인 지분율이 상승했다.’(298쪽)

‘모든 신흥공업국의 은행들이 위기를 맞을지도 모른다.?이러한 불안이 심화되면 일본의 은행들도 위기를 맞을 가능성이 있다.?이렇게 될 경우 금융체계에 미치는 결과는 매우 심각할 것이다.?각국의 중앙은행들은 우애를 발휘하여 은행 간 자금시장에서 커다란 문제들(한국의 금융위기로부터 비롯되어 파급되는)이 일어나는 사태를 방지하는 데 시급히 만전을 기해야 한다.그러나?<조선일보>는?8월?21일자?“불안하지만 위기상황 아니다”라는 사설에서?“외환시장이 살얼음판을 걷고 있으나?‘외환위기’라는 표현을 써야 할 만큼 심각한 조짐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고 보도했다. <조선일보>는 다음날에도?1면 머리기사로?“한국 성장률 높아진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올렸다.’(297쪽)

조선일보는 아이엠에프 사태 예측을 제대로 못했다.?오히려 예측하지 못하도록 사실을 왜곡했다.?그런 조선일보가 반성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여전히 조선일보는 사실 왜곡하는 짓을 계속하고 있다.?조선일보는 친일파 신문이다.?친미파 신문이다. 1프로 종 역할 하는 신문이다. 1프로한테서 광고 받으려고 안달하는 신문이다.?조선일보는 다뤄야 할 것은 다루지 않는다.?부산 한진중공업으로 김진숙 만나러 가는 희망버스 다루지 않았다.?아니다.?조선일보는 신문이 아니다.?조선일보는 수구 언론기관일 뿐이다.?조선일보가 끄트머리 언론기관이 되어야 한다.?김동민은 조선일보 안 보기 운동을 현장에서 실천한 실천가이다.?이 책이 널리 읽혀 조선일보가 끄트머리 언론기관이 되길 기도한다.

이 책은 미디어 역사를 다룬다.?동서양 역사를 다룬다.?동서양 철학을 다룬다.?한국근현대사를 다룬다.?다루는 내용이 다양하다.?내용이 실하다.?이 책 한 권을 다 이해한다면 대단한 실력 소유자가 될 것이다.?그렇다고 해서 이 책이 어렵지만은 않다.?대체로 글이 쉽다.?동서양 철학 다루는 부분과 칼 맑스 철학 다루는 부분이 일반인이 보기에 조금 어려울 뿐이다.?이 세상 언론문제에 울분을 토하는 사람들이 읽기에 맞춤한 책이다.?지적 욕구가 높은 사람들이 읽기에 맞춤한 책이다.?여럿이 모여서 함께 읽고 토론하기에 맞춤한 책이다.?대학 언론학과 교재로 맞춤한 책이다.?벌써 세 대학에서 이 책을 대학교재로 쓰고 있다.(2014년 현재)

 

왜 고상한 ‘존재’와 ‘무’가 아니고 흔해빠진 ‘있다’, ‘없다’인가?[철학을다시 쓴다]-28-3

왜 고상한?‘존재’와?‘무’가 아니고 흔해빠진?‘있다’, ‘없다’인가?[철학을다시 쓴다]-28-3

 

 

윤구병(도서출판 보리 대표)

 

*이 글은 보리출판사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없는 것과 관련해서 저는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기 있는 이 교탁이 보이지요??이 교탁은 크기가 있습니다.?그런데 크기가 있는 것은 모두 쪼개질 수 있다고 했지요??이제부터 우리 머릿속에 있는 칼날로 이 교탁을 한번 쪼개 봅시다.?쪼개고 또 쪼개고……?한없이 쪼개지지요??이제 잠깐만 칼날을 멈추세요.?그리고 생각해 봅시다.?왜 이렇게 크기를 가진 것은 한없이 쪼개질 수 있지요??왜 우리는 크기가 있는 것은 무한히 쪼갤 수 있다고 생각할까요??쪼개고 또 쪼개도,?크기가 있는 한,?우리의 의식 속에 있는 칼날이 무디어지지 않는 까닭은 어디에 있을까요??우리가 쪼개는 작업은 물리학으로 말하면 작용입니다.?이렇게 무한히 계속되는 작용에 아무런 반작용도 하지 않고 작용을 받아들이기만 하는 이 신기한 것은 무엇일까요??순수하게 수동성만 지니고 있는 이 신기한 것,?크기를 가진 것 속에 숨어 있는 이것,?바로 이것이 없는 것입니다.?없는 것만이 아무 저항도 하지 않습니다.?있는 것은 쪼개지지 않습니다.(있는 것에 작용을 하면,?작용도 있는 것이므로 있는 것과 하나가 되어 버립니다.)?좀 어려운 말이기는 하지만 저는 없는 것을 순수하고 절대적인 수용 가능성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이쯤 해 두고 이제 쪼갤 때 생기는 다른 현상을 살펴보기로 할까요?크기를 가진 것은 아무리 쪼개고 또 쪼개도 크기가 아예 없어져 버리지는 않습니다.?그러면 아무리 작용을 해도 끝끝내 그 작용에 맞서서 저됨(자체성)을 잃지 않는 것은 무엇일까요??있는 것만이 저됨을 잃지 않습니다.?있는 것이 저됨을 잃고 바뀌면 없는 것이 되어 버립니다.?그러나 있는 것은 없는 것이 될 수 없고,?없는 것도 있는 것이 될 수 없습니다.?다시 말해서 끝끝내 저됨을 잃지 않고 지키는 것은 크기 속에 있는 있음의 측면입니다.?여기에서 우리는 하나의 결론을 이끌어 낼 수 있습니다.?그것은 크기를 가진 것은 모두 그 안에 순수 수동성과 자기 동일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곧 크기 속에는 있음과 없음이 함께 있다는 것입니다.?우리는 이제까지 있는 것과 없는 것은 한 자리에 있을 수 없다고 배웠습니다. ‘여기에 분필이 있다.’고 말하면서 동시에?‘여기에 분필이 없다.’고 말하면 저는 모순된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그러므로 크기 안에 있음과 없음이 함께 있다고 하는 것은 우리가 보는 이 교탁에 모순이 있다는 말이고,?이 말을 넓히면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 모순이 있다는 말이 됩니다.?그리고 우리의 생각은 이 세상에 있는 모순을 반영해서 있는 것도 파악하고 없는 것도 파악하여?‘있다’, ‘없다’는 말을 밥 먹듯이 할 수 있다는 말이 됩니다.”

이렇게 해서 저는 없는 것을 받아들여?‘없는 것이 있다.’는 말을 거짓에 이르는 함정이 아니라 세상살이와 주고받는 이야기와 그 말들을 뒷받침하는 우리 생각에 꼭 필요한 것으로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저는 칠판에 다음과 같은 두 개의 그림을 그렸습니다.

윤구병 그림 1-4

 

윤구병 그림 1-5

그리고 학생들에게 설명하기 시작했습니다.(여기에서 고백할 말이 있습니다.?그것은 이 그림은 제가 생각해 내서 그린 것이 아니고 제 스승인 박홍규 선생님이 그려 주신 것을 본딴 것이라는 사실입니다.?물론 그분은 있는 것,없는 것이라는 말 대신에 존재와 무라는 말을 썼습니다만.)

“앞의 그림?4를 보십시오.?보다시피 있는 것과 없는 것이 함께 있습니다.?이 세상에 처음으로 모순이 선을 보인 것입니다.?여럿〔多〕의 최소 단위인 둘〔2〕은 이렇게 모순과 함께 태어납니다.?있는 것과 없는 것 사이에 있는 금〔line〕에 주의를 기울여 주십시오.?앞에서 했던 질문과 꼭 같은 질문을 하겠습니다.?이 금은 있는 것에 속하는 것입니까??없는 것에 속하는 것입니까?”

“있는 것이요.”

어떤 학생이 대답했습니다.

“그럴까요??그렇다면 금도 있는 것이므로 이 그림의 왼쪽 칸에 있는 있는 것에 달라붙어서 있는 것과 하나가 되어 버려 금 구실을 못 하게 되고,?그에 따라 없는 것은 없어져 버리게 되겠네요.”

“그럼,?없는 것에 속하겠네요.”

다른 학생이 잽싸게 대답했습니다.

“그럴까요??그렇다면 금도 없는 것이므로 오른쪽 칸에 있는 없는 것과 구별이 안 되어 금 구실을 못 하게 되겠네요.?그리고 그 결과 없는 것만 남게 되어 있는 것은 없어져 버리게 되겠는데요.”

그러면서 저는 칠판에 금을 잔뜩 그어서 한 번은 없는 것을 뭉개 버리고 또 한 번은 있는 것을 뭉개 버렸습니다.

윤구병 그림 1-6

“이렇게 되면 곤란하지요??그러니까 달리 한번 생각해 봅시다.?있는 것과 없는 것을 갈라 주는 금은 동시에 있는 것과도 떨어져 있어야 하고 없는 것과도 떨어져 있어야 하므로 있는 것도 아니고,?없는 것도 아닌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그리스 철학에서 아페이론(apeiron)이라고 부르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아페이론은?‘규정할 수 없는 것〔indefinite〕’이고?‘한계가 없는 것〔infinite〕’입니다.?피타고라스가 그처럼이나 중요하게 여겼던 페라스(peras), ‘한계’, ‘끝’의 반대말이 바로 이것입니다.?여기에서 잠깐 옆길로 들어서서 페라스,?곧 한계이자 끝이라는 말이 어떤 뜻을 지니고 있는지 살펴봅시다.?아다시피 피타고라스는 페라스가 하나뿐인 것을 점〔point〕으로 규정했습니다.?두 개인 것을 선으로 보고,?세 개인 것을 면〔plane〕,?곧 삼각형으로 보고,?네 개인 것을 입체로 보았습니다.?그러니까 이렇게 됩니다.

●─점?●●─선?●●─면?●●─입체(세 개의 점 위에 점을 하나 올려놓은 것).?피타고라스가?1, 2, 3, 4라는 숫자를 그처럼이나 애지중지하고?1+2+3+4에서 나온?10이라는 숫자를 신성하게 여긴 것은 우리가 감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이 세상 모든 것은 점이나 선이나 면이나 입체로 되어 있어 이 네 개의 숫자 속에 우주의 구성 원리가 담겨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사실 이 끝이라는 낱말(개념)은 아주 중요합니다.?우리가 어떤 것을 보고 그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은 그것의 끝을 보기 때문입니다.?이를테면 여기 있는 이 교탁을 여러분은 눈으로 보고 있는데,?여러분의 망막에 나타나는 것은 이 교탁의 끝,?다시 말해서 이 교탁이 끝나는 표면입니다.?겉모습이지요.?우리는 투시력을 지니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이 교탁의 속을 꿰뚫어 볼 수 없습니다.?우리는 늘 어떤 것이 그것이 아닌 것과 만나는 한계를 보고 그것이 무엇인지를 압니다.?다른 예를 하나 더 들지요.?여기 칠판이 있는데,?여러분이 이 칠판에 아주 가까이 서서 이 칠판 안쪽에 있는 어느 지점만을 볼 때는 그것이 칠판인지 아닌지 잘 모릅니다.?멀찌감치 떨어져서 이 칠판의 테두리까지 보아야만 비로소 이것이 칠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끝이 얼마나 중요한지 보기를 하나만 더 들겠습니다.?기타를 가지고 있는 학생 없습니까??좋습니다.?여기에 기타 줄이 하나 있습니다.?이 줄은?50센티미터쯤 되어 보이는데 이 줄 속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무한한 끝이 숨어 있습니다.?기타를 잘 치는 사람은 이 숨어 있는 끝〔peras〕?가운데 자기가 바라는 끝을 아주 잘 찾아냅니다.?손가락으로 줄을 길게 또는 짧게 짚고 튀길 때마다 서로 다른 소리가 들리는데 그 까닭은 이 기타 줄에 숨어 있는 끝이 저마다 다른 소리의 특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우리는?‘끝이 없는 것〔apeiron〕’은 그것이 무엇인지 알 길이 없어집니다.?무엇인 것도 아니고 무엇이 아닌 것도 아닌 것,?더 정확하게 말해서 있는 것도 아니고,?없는 것도 아닌 것은 끝이 없는 것입니다.?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런 것을 규정할 수 없는 것,?끝도 갓도 없는 것,?한없는 것이라고 부릅니다.”

윤구병 그림 1-5

“자,?이제 그림?5를 다시 한 번 봅시다.?이것을 당구공이라고 합시다.?있는 것은 하얀 공을 가리키고 없는 것은 빨간 공이라고 칩시다.?보다시피 이 당구공 둘은 서로 맞닿아 있습니다.?둘이 붙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붙어 있으면 하나가 되어서 뗄 수가 없지요.?그렇다고 떨어져 있는 것도 아닙니다.?떨어져 있으면 이 두 당구공은 서로 독립되어 있어서 관계를 맺지 못합니다.다시 말해서 모순을 일으키지 않습니다.?문제는 이 두 개의 공이 서로 맞닿아 있다는 데 있습니다. ‘서로 맞닿아 있다.’는 말을 수학에서는 탄젠트(tangent),?곧 접선(接線)이라는 낱말을 써서 나타냅니다.?이 탄젠트라는 말은 라틴어 탄게레(tangere)에서 유래한 말인데?‘닿는다’, ‘만진다’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영어의 콘택트(contact)도 어원이 같습니다.?함께〔con〕+닿아 있는 것〔tactus〕이 콘택트이지요.?같은 어원에서 나온 말로는 영어에 컨틴젠시(contingency)라는 낱말이 있습니다.?프랑스어로는 콩텡장스(contingence)이지요.?그런데 이 낱말의 뜻을 살펴보면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연’, ‘우연성’, ‘우발성’이 이 낱말의 뜻입니다.그러면 맞닿아 있다는 말이 어떻게 해서 우연을 가리키는 말로 탈바꿈했을까요??우리는 존재론의 영역에서 맨 처음 나타나는 두 괴물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이며 이 둘이 몸을 맞대서 모순을 일으키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이 두 괴물이 서로 몸을 맞대야 할 아무런 필연적인 까닭이 없습니다.우리는 있는 것이 없어지는 것,?다시 말해서 있는 것이 없는 것이 되는 것을 보통 사라진다,?파괴된다고 말하고,?거꾸로 없는 것이 새로 생겨나는 것,?다시 말해서 없는 것이 있는 것으로 바뀌는 것을 생겨난다,?창조된다고 말하는데,?엄밀하게 말하자면 있는 것은 있는 것이고 없는 것은 없는 것이어서 있는 것이 없는 것이 되거나,?없는 것이 있는 것이 되는 일은 결코 없습니다.정확하기로 소문이 난 물리학자들도 아예 아무것도 없는 것에서 무엇인가 있는 것이 생겨난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무엇인가 새로운 것이 나타난다면 이미 있는 것,?아원자나,?원자나 분자의 수가 늘어나거나 줄어들거나 자리를 바꾸기 때문에 그렇게 된다고 이야기합니다.?만일에 정말 있는 것이 없는 것으로 되거나 없는 것이 있는 것으로 바뀐다면,?이런 사태는 우리가 머리로 이치를 따질 수 없다는 점에서 그야말로 우연입니다.?기독교의?‘하나님’이 무(無)로부터〔ex nihilo〕?이 세상을 창조한 것〔creatio〕이 우연이듯이.?하나님이 무에서 다른 세상을 창조해 내지 않고 왜 우리가 살고 있는 이런 세상을 만들어 냈는지 그야말로?‘하나님’만이 아는 일,?다시 말해서 아무도 모르는 일입니다.”

“처음 이야기로 되돌아가서 맞닿아 있는 당구공 두 개를 다시 살펴봅시다.있는 것이라는 흰 당구공과 없는 것이라는 빨간 당구공이 맞닿아 있는 점을 우리는 접점이라고 부릅니다.?접촉하고 있는 점〔point〕이라는 뜻이지요.?이 접점은 있는 것에 속하지도 않고 없는 것에도 속하지 않는 것이라는 점에서?‘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것’이라는 말은 앞에서 했습니다.실제로 당구장에서 맞닿아 있는 두 개의 당구공이 붙었다 떨어졌다 해서 그 사이를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실금 같은 공간이 있어 보이기도 하고 없어 보이기도 해서 종잡을 수 없는 것처럼 이?‘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것’(규정할 수 없다는 점에서 앞으로는 무규정적인 것이라고 부르겠습니다.)은 어떤 때는 있는 것과 붙어 있어서 있다고 할 수 있는 것〔可能的 存在〕이 되는가 하면,?또 어떤 때는 없는 것과 붙어 있어서 없다고 할 수 있는 것〔可能的 無〕이 되기도 합니다.?다시 말해서 무규정적인 것〔apeiron〕은 있는 것과 없는 것 사이에서 끊임없이 흔들리고 있고,?그런 점에서 운동하고 있는 것입니다.?이제 그림을 다시 하나 그려 보겠습니다.”

윤구병 그림 1-7

① ㄱ에서 점점 있는 것에 가까워지고 있는?ㄱ′,?ㄱ′′,?ㄱ′′′ ……

② ㄱ에서 점점 없는 것에 가까워지고 있는?-ㄱ′, -ㄱ′′, -ㄱ′′′ ……

저는 칠판에 위와 같은 그림을 그렸습니다.(이 그림과 비슷한 것을 우리에게 그려 보여 주신 분도 박홍규 선생님이었습니다.)

“자,?보십시오.?있는 것과 없는 것이라는 두 괴물이 서로 나란히 몸을 맞대자마자(관계를 맺자마자)?곧 두 괴물 사이를 갈라놓는 세 번째 괴물(무규정적인 것)이 나타나고 이 세 번째 괴물이 나타나자마자,?첫 번째 괴물과 세 번째 괴물 사이를 갈라놓는 또 하나의 괴물(있는 것과 최초의 무규정적인 것 사이에 들어 이 둘을 구별해 주는?‘있는 것 쪽으로 한 걸음 더 다가선 무규정적인 것’ : apeiron?ㄱ′)이 나타났습니다.?그리고 동시에 두 번째 괴물과 세 번째 괴물 사이를 갈라놓는 또 하나의 괴물(없는 것과 최초의 무규정적인 것 사이에 들어 이 둘을 구별해 주는?‘없는 것 쪽으로 한 걸음 더 다가선 무규정적인 것’ : apeiron -ㄱ′?)이 나타났습니다.?그리고 같은 방식으로 한없이 많은 괴물들(ㄱ′,?ㄱ′′,?ㄱ′′′ ……-ㄱ′, -ㄱ′′, -ㄱ′′′)이 있는 것과 없는 것 사이에 들어섰는데 이것들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것,?곧 무규정적인 것이라는 점에서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으나 자세히 살펴보면 서 있는 자리에 따라 저마다 다른 특성을 지니고 있습니다.?보기를 들어 설명하지요.?이?50센티미터 남짓한 기타 줄 안에는 무한히 많은 소리들이 숨어 있어서 이 줄의 어느 지점을 짚고 줄을 튀기느냐에 따라 저마다 다른 소리가 날 수 있는 것도 같은 이치입니다.?기타 줄에 숨어 있는 무한히 많은 소리들은 아직은 울려 퍼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무규정적인 소리들입니다.?다른 보기를 들어 설명해도 마찬가지입니다.?한 무더기의 진흙 속에는 그것을 빚어서 찻잔을 만들 수도 있고,?벽돌을 만들 수도 있고,?화분에 담아 꽃을 키울 수도 있다는 점에서 무한히 많은 것이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이야기가 나온 김에 오해가 생기지 않도록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을 빌려서 이 문제를 조금 더 설명하고 넘어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