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 박물관[별과 달과 바람의 노래]- 11
그림자 박물관[별과 달과 바람의 노래]- 11
김설미향(그림책 작가)
매일 밤 할아버지는 박물관 열쇠를 꼭꼭 숨겨 두었지.
할아버지가 잠이 들고 나루는 열쇠 꾸러미를 찾아냈어.
작가의 블로그 http://dandron.blog.me
2010년부터 (e)시대와철학에 실렸던 글들 중에서 편집자가 다시 뽑아올린 글
매일 밤 할아버지는 박물관 열쇠를 꼭꼭 숨겨 두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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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민족주의의 계보와 정치>(신기욱 지음, 이진준 옮김, 창비 펴냄)는 미국에서 한국학 연구의 중심인물로 활동하고 있는 스탠포드대학교 신기욱 교수의 2006년 저서(『Ethnic Nationalism in Korea: Genealogy, Politics, and Legacy』)를 2009년 창비에서 번역 출간한 책이다.
저자 신기욱은 서문에서 “한국사회를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원리는 혈연에 기초한 단일민족주의 내지는 의식”이며 “한국인의 단일민족주의를 이해하지 않고는 20세기 한국사회와 정치의 변화를 제대로 읽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전제에서 출발한 저자는 단일한 민족의식이 도대체 어디에서 기원한 것인가를 질문하면서 그 역사적 형성과정을 확인하고자 한다. 다시 말해 20세기 한반도의 역사를 통해 다양한 집합적 정체성들 가운데 어째서 공통의 혈통을 강조하는 종족적 민족주의로 귀착했느냐를 탐문한다.
요컨대 저자는 이 책에서 한국사회를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원리를 혈연에 기반을 둔 종족적 민족주의로 보면서, 종족적 민족주의의 역사적 기원과 형성, 그리고 기능에 대해 총체적으로 고찰하고 있다.
1990년대 이래 한국 민족주의의 억압적, 배타적 기능에 대한 문제제기가 본격화되면서 민족주의 논쟁이 전개되었지만 한국 민족주의를 역사적인 맥락에서 실증적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시도는 드물었다. 그러나 이 책은 단순히 서구의 민족이론에 의존하지 않고, 19세기 말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한반도의 근현대사의 구체적인 전개과정에 기반을 두고 한국 민족주의를 논하고 있다. 서구의 민족이론에 더불어 한반도 근현대사의 역사적 경험들을 동시에 섭렵함으로써 이론적 고찰과 경험적 자료의 활용이 적절한 조화를 이루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서구의 주류 민족이론들의 한반도적 적합성에 대해서도 진지한 고민을 담고 있다. 이는 특히 민족의 기원에 대한 원초주의적 견해와 근대주의적 견해의 한계점들을 극복하려는 저자의 시도에서 잘 드러난다.
저자는 한민족의 기원에 대한 국내학자들의 견해를, 첫째 단일한 혈통을 자연적이고 운명적으로 간주하는 원초주의적 견해, 둘째 한민족을 조선왕조 말기에 도입된 근대 민족주의 이데올로기의 산물로 보는 근대주의적 견해, 셋째 두 입장을 논박하며 서구와는 다른 한민족의 역사적 경험의 특수성(장기간의 중앙집권적 국가 등선재하는 역사적 유산)을 강조하는 견해 세 가지로 정리한다. 그는 세 입장이 모두 한계를 지닌 것으로 보면서 새로운 분석틀을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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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저자는 무엇을 민족 형성의 “결정적 요소”로 보는가? 저자에 따르면 우연한 민족의 구성에서 결정적 요소는 경쟁적인 정치의 결과다. 따라서 저자는 자신의 분석틀을 “민족은 특히 대내외의 논쟁적인 정치의 결과, 역사적으로 각인되고 구조적으로 우연한 상황에 놓여 있는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구조의 산물”로 요약한다.
요컨대 저자의 입장은 전근대적 유래를 지닌 종족적 유산의 규정력을 인정한다는 측면에서(역사적 각인) 위의 두 번째 견해와 차이가 나며, 그 규정력을 약화시켜 우연적으로 본다는 측면에서(우연한 상황) 세 번째 견해와 차이가 난다. 그리고 이 역사적 각인과 우연한 상황을 정당화하는 민족 형성의 결정적 요소가 “이중적인 경쟁적 논쟁”이다.
그는 민족개념이 처음부터 혈통에 기반을 두었다고 가정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보면서 한국의 민족주의가 종족적으로 되어가는 역사과정을 이중적 경쟁의 과정으로 설명한다. 민족은 인종, 계급 등 초민족적인 집단 정체성과의 경쟁에서 승리하고, 민족개념에 대한 여러 해석들 가운데 종족적 민족개념이 경쟁에서 이겨 지배적인 것으로 정착되었다고 본다. 즉, “20세기에 인종지향적인 한민족 개념이 출현하고 지배하게 된 것은 민족세력과 초민족 세력 사이의 논쟁과 민족 개념에 대한 논쟁이라는 이원적 논쟁과정의 결과”라는 것이다.
이 책의 1부와 2부는 민족적인 것과 초민족적인 것의 경쟁, 민족개념 자체를 둘러싼 경쟁이라는 이중적인 경쟁의 틀에 따라 서술되어 있다. 저자의 “역사적으로 각인된, 우연한, 경쟁적”이라는 분석틀은 매력적이지만 그 분석틀의 성공 유무는 일차적으로 이런 이중적 논쟁이 한반도 근현대의 역사적 사실과 합치하는가에 달려 있을 것이다. 이 글에서는 역사적 사실과의 합치 여부보다는 이 책의 핵심 개념이라 할 수 있는 “종족적 민족주의”에 대한 규정과 “종족성과 시민성의 관계”에 대한 저자의 관점, 두 가지 문제에 대해서만 짚어본다.
우선 저자는 종족적 민족주의를 혈통에 바탕을 둔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는 민족개념에 대한 우리의 통념적 이해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현재 우리의 종족성이 어떻게 규정되고 있는지는 강한 혈통주의적 특징(더불어 대한민국 중심주의)을 지닌 재외동포재단법에서 찾을 수 있다.
“‘재외동포’란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외국에 장기체류하거나 외국의 영주권을 취득한 사람이거나 국적에 관계없이 한민족(韓民族)의 혈통을 지닌 사람으로서 외국에서 거주, 생활하는 사람”을 말한다.(재외동포재단법, 제2조)
그러나 식민지 시기 민족담론은 아직 혈통적 단일성에로 한정된 민족주의적 지향성을 갖는 것이 아니었고, 오히려 학자들은 다종족설을 상식으로 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다종족 구성, 주종족 주도론’은 일찍이 한말에 신채호가 ‘독사신론’에서 말한 바 있다. 단일한 혈통에 기초한 민족이라는 ‘단일민족론’은 해방 이후에 비로소 본격적으로 대두된다. 이는 해방 후 국내외적 정세가 민족분단의 가능성을 높이는 가운데 단일민족은 결코 분단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나온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혈연을 중심으로 한 단일민족설보다는 문화적 측면에서 볼 때 같은 종족의 후손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상식적이다. 한국의 민족주의가 종족적 민족주의의 성격이 강하다고 표현할 경우, 그것은 혈연보다는 풍속·습관과 같은 문화에 기반을 둔 민족주의를 뜻하는 방향에서 사용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
다음으로, 저자는 종족적 민족주의를 통해 20세기 한반도에서 등장한 다양한 민족주의를 통시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종족성의 전일적 지배를 강조하는 저자는 역사적으로 나타나는 다양한 형태의 민족주의적 현상을 획일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다시 말해 다양한 형태의 민족주의를 종족적 민족주의와 동일시하는 과도한 환원주의적 경향을 보이고 있다. 예컨대 백남운, 이광수, 김일성, 박정희의 민족주의는 혈연에 기반을 둔 종족성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등가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민족주의가 자기완결적인 논리구조를 갖추지 못한 채 다른 이데올로기와 결합하는 이차적 이데올로기이며, 진보성과 아울러 침략성의 양면성을 갖는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우리의 근현대사에서도 민족주의의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특징이 유감없이 드러난다. 해방 후 한반도에는 남북한 각각의 국가에 의해 주도된 두 개의 국가주의적 민족주의, 그에 반대하고 자유민주주의의 실현을 목표로 한 자유주의적 민족주의, 민중이 주체가 된 민중주의적 민족주의 등 다양한 민족담론이 존재한다.
이처럼 종족적 민족개념은 사회주의, 자유주의, 국가주의와 모두 결합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종족적 민족개념이 마치 불변적으로 지속되는 것처럼 다루고 있다. 정치적, 이념적 지향성을 무시한 채 혈연적 종족성이라는 유사성을 근거로 20세기 한반도에 등장한 다양한 민족주의를 통시적으로 적용, 평가하는 시각은 역사적 다양성을 배제하는 과도한 환원주의로 여겨진다.
셋째, 저자는 종족 민족주의의 역사적 기능을 축복이자 저주인 “양날의 칼”로 설명하면서 서구의 주요 민족주의 이론들의 한반도적 적합성 문제를 제기한다. 저자에 따르면 한스 콘 이래 서구의 민족주의 연구자들은 정치적 민족주의를 시민적, 통합적, 건설적인 것으로 보는 반면, 종족민족주의를 위험하고, 분열적이고, 파괴적인 것으로 보는 강한 전통이 있다. 저자는 유럽적 경험에 바탕을 둔 이러한 이분법적인 본질주의 시각이 한국의 종족 민족주의가 지닌 다양하고 복잡한 역할과 기능을 간과한다고 본다. 그에 따르면 20세기 한반도 역사에서 종족 민족주의는 일제하 반식민주의의 기능을 했고, 남북의 근대화 과정에서 통합적 기능을 수행했으며, 나아가 통일과정의 초기 단계에서 두 체제의 부드러운 통합을 촉진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축복) 그러나 동시에 경쟁관계에 있는 다른 중요한 정체성들을 억압했고, 자유주의의 빈곤을 초래했으며, 남북갈등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저주)
‘민족’은 순전히 언어, 역사 등의 문화적 단위로도, 순전히 정치적 단위로도 정의될 수 없으며, 양자가 결합한 범주로 이해될 수 있다. 민족의 역사는 정치공동체의 역사와 분리될 수 없지만, 민족은 정치 공동체로 환원되지 않는 종족적 기반을 지니고 있다. 오늘날 현실에서 모든 민족은 종족적 특성들과 시민적 특성들을 동시에 갖게 마련이다. 종족성과 시민성은 서구의 민족국가에서도 한 번도 완전히 분리된 적이 없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양자가 완전히 분리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종족성을 배제하고 시민성을 중심으로 민족 정체성을 구성하려는 시도가 지닌 한계는 분명하다. ‘시민 민족주의’에서와 같이 시민성을 중심으로 민족 정체성을 형성하려는 전략이 현실적 차원에서 불가능에 가까운 이유는 종족적인 기반에 의한 동기부여 없이는 자유롭고 평등한 시민들의 연합은 추진력을 갖고 실천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종족적 민족”(ethnic nations)과 “시민적 민족”(civic nations)의 구분 시도는 우리 학계의 민족논의에서 종족적 민족개념이 한국 민족주의의 성격을 강력히 주조(배타성과 획일성)했다는 점만 부각시키는 경향과 관련이 깊다. 하지만 종족성이 중요한 행위의 원천이라고 할지라도 그 자체로 어떤 정치적 행위를 낳는 것은 아니다. 종족성은 당대의 정치적 조건과 불가분하게 엮여 있으며 다른 이데올로기들과 결합할 때에만 효과를 발휘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자는 여러 민족주의의 정치적, 이념적 지향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종족적 민족개념이 지배적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것처럼 다루고 있다. 예컨대 지배세력의 공식적 민족 개념과 1980년대의 민중적 민족주의는 “민족의 종족적 토대에는 동의했지만, 민족에 대한 정치적 개념이 전혀 달랐”다. 정치적 민족 개념이 달랐을지라도 종족적 민족성의 토대를 건드리지 못했다는 것이다. 오직 정치적 양상만이 논쟁의 대상이었을 뿐, 양자는 동일한 종족적 개념을 수용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종족성과 정치 공동체가 한 번도 일치해 본적이 없는 20세기 한반도의 역사는 특정 민족주의 개념의 지배를 위협하는 근본 요인이자 시민적 민족과 종족적 민족의 이분법의 적용불가능성을 보여준다. 20세기 한반도의 종족 정체성은 특정한 정치 경제적 조건 속에서 다양하게 변용되었다. 따라서 남북 그리고 디아스포라는 기존의 민족 정체성 모델에 딱 들어맞게 이해될 수 없다. 문화적 다양성과 민주적 권리를 강조하는 시민적 정체성이나 혈연 언어 전통 등을 강조하는 종족적 정체성은 그 어느 것도 20세기 한반도 역사에서 진행되어온 다양한 국적, 법적 지위, 언어차이, 관습의 현지화 등 민족 정체성의 다양한 변용을 설명하기 어렵다. 한반도의 민족 정체성은 종족적 요소를 기반으로 하면서도 해당 거주국(남과 북 그리고 해외 디아스포라)의 정치 경제적 조건에 따라 다양하게 변용된 정체성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남과 북은 과거의 문화전통 가운데에서 각자의 정치 경제적 체제에 맞는 국민적, 인민적 서사들을 교육과 언론매체를 활용한 국가주의적 기획 아래 동원하였다. 분단은 남북 모두 민족 내부의 적대적 타자라는 의미를 상대에게 부여하였고, 민족 서사와 민족 문화의 정체성에 균열을 가져왔다. 북은 사회주의 대가족 제도를 주장하면서 한민족의 혈통을 강조해 김일성에 대한 충효 그리고 김정일로의 권력 승계를 위한 도구로 민족주의를 활용했다. 남 역시 민주화와 경제발전에 힘입어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의 국가적 정체성을 강조하는 ‘대한민국 민족주의’가 강화되어왔다. 해외 디아스포라 역시 해당 거주국의 정치 경제적 조건 속에서 종족 정체성의 상당한 변용을 겪었다. 거주국 정치 경제 체제의 객관적 조건에 제약되면서 디아스포라는 자신의 생존과 적응을 위해 특정 전통을 선별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과정을 통해 종족 정체성을 재구성하였다.
따라서 개인의 자유와 시민적 성장을 억압한다는 이유로 민족 이해에서 종족성을 배제하려는 논리는 한반도와 해외 디아스포라의의 복합적 현실을 고려하지 않은 일면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민족을 정치 공동체로만 규정할 경우, 중국 조선족은 중국민족이며, 일본으로 귀화한 재일 조선인은 일본민족이며, 한국 국적을 취득한 필리핀 이주 여성은 한국 민족이며, 북한 주민은 한 때 같은 민족이었지만 정치 공동체가 상이한 이상, 더 이상 한국 민족이 아니게 된다. 이런 논리가 복합적 정체성 때문에 실존적 고민과 사회적 갈등을 겪고 있는 남과 북의 주민 그리고 디아스포라 당사자들에게 과연 납득될 수 있을까?
시민적 민족은 자유와 평등의 보편적 가치를 지니며, 종족적 민족은 피해의식과 인종주의적 폐쇄성을 지닌다는 이분법적인 접근이 아니라, 복합적으로 교차하고 있는 종족 정체성의 현실 속에서 새로운 정치 경제 공동체를 사유하는 것이 필요하다. 중요한 것은 종족성을 부인하고 시민적 연대를 긍정하는 것이 아니라 종족성과 시민성을 결합하려는 사유이다.
종족적 정체성과 정치적 정체성의 결합을 사유하기 위해서는 이처럼 한반도의 종족 정체성이 특정한 정치 경제적 조건 속에서 다양하게 변용된 사실을 우선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20세기의 한반도 역사에서 비롯된 종족 정체성의 다양한 변용들을 단일 정체성으로 통합해야 할 정체성의 분열상태가 아니라, 오히려 새로운 민족 개념을 사유하는 출발점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새로운 민족개념을 사유한다는 것은 단일한 민족국가를 추구하는 기존 민족주의의 틀이나 민족국가를 해체하는 탈민족주의의 틀이 아니라, 식민주의적 억압과 남북의 적대로 인한 상처를 극복하는 자주적 민족국가를 지향하면서도 인류 보편적인 가치를 담은 정치 공동체를 사유하는 사회 철학적 과제와 근본적으로 맞닿아 있다. 달리 말해 이는 남과 북이든 특정 공동체에 의한 민족개념의 일방적 전유가 아니라, 해당 국가의 정치 경제적 틀을 넘어 남과 북 그리고 디아스포라를 아우를 수 있는 새로운 공동체에 대한 전망과 관련된다.
1.?나는 월요병에 걸려 있다!
우리의 노래 중에?<일요일이 다 가는 소리>라는 노래가 있다.?일요일이 다 가는 소리/?아쉬움이 쌓이는 소리/?내 마음 무거워지는 소리…….?우리는 금요일 저녁이 되면 홀가분해지고,?일요일 저녁이 되면 뭔가 불안하고 마음이 찝찝하다.이것은 평일에도 비슷하다.?이른 아침에 일어나서 출근하기가 참으로 힘들다.?그렇지만 저녁 퇴근 무렵이면 생기가 난다.?학생들일 경우에 수업시간만 되면 졸리다가 쉬는 시간만 되면 얼굴에 생기가 돋는다.
우리는 언제부터 이렇게 살아왔을까??원시시대부터 이렇게 살아왔을까??아니다.?이런 삶의 모습은 다름 아닌 현대인들의 모습이다.?우리는 왜 일이나 공부하러 갈 때는 불안하고 끔찍하다고 생각하고,?쉬거나 노는 시간에는 편안하고 안락함을 느끼는 것일까??이에 대한 해답의 실마리는 시인 엘리엇(T. S. Eliot)의 시‘텅 빈 인간(The Hollow Men)’에서 찾아볼 수 있다.
우리는 텅 빈 인간
우리는 짚으로 채워진 인간
서로 기대고 있지만
아!?머리통은 짚으로 가득 차 있네
우리가 모여 수근대면
메마른 목소리가
소리 없고 의미 없다
마치 마른 풀섶 지나는 바람
또는 메마른 지하창고에서
깨어진 유리 위를 밟는 쥐 소리
형체 없는 모양,?빛 없는 그늘
마비된 힘,?동작 없는 몸짓.
곧장 바라보고 죽음의 다른 왕국으로
바다 건너간 자들이
우리를 기억하고 있다 한들
지옥에 떨어진 맹렬한 혼으로서가 아니라,?다만
텅 빈 인간으로서
짚으로 채워진 인간으로서.
이 시는?‘텅 빈 인간’의?Ⅰ부의 내용이다.?시인이며 철학자이기도 했던 그는 크게 다섯 부분으로 이루어진 이 시에서 자아를 모르는 현대인들을?‘텅 빈 인간’이라 부르고 그들의 모습을 읊었다. ‘이렇게 세계가 끝나는구나’로 결말의 첫머리를 시작하는 이 시는 세계가 총이 아니라 인간의 흐느낌으로 멸망한다고 끝을 맺는다.
이 시를 통해 우리는 우리의 정체성,?즉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을 어디에서건 발견할 수 없음을,?우리가 아무 생각 없는 기계나 좀비가 된 것은 아닌가를 의심해 본다.?이제 우리는 아침에 일하러 가기 싫은 이유를 이렇게 연결시켜 볼 수 있지 않을까싶다.?즉 우리가 일하러 갈 때 불안감과 끔찍함을 느끼는 이유가 인간으로서의 우리의 정체성을 냉장고에 보관해 두고 갈 수밖에 없는 강요를 당하는 때문일 수 있다는 것이다.
2.?노동과 자유란 무엇인가?
오늘날 우리가 일을 할 때 인간으로서 우리의 정체성이 상실된다는 것은 일,?즉 노동이 인간다움을 느끼지 못하도록 하는 특성을 지니고 있음을 뜻한다 할 수 있다.?근대 이후 인간다움의 기초는 바로?‘자유’에 있다고 할 수 있으며,?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자유권은 인간의 기본권으로서 헌법에 명시되어 있다.?그러므로 현대 사회에서 일을 할 때,?즉 노동을 할 때,?현대인들은?‘자유’를 상실한 느낌을 가진다는 것이다.?이때?‘자유’란 동물처럼 자연법칙이라는 타자의 압력이나 강제에 따라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존재한다는 것을 뜻한다.?그러므로 자유를 상실한다는 것은 이른바 동물적으로 생존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자유는 자기 스스로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하는데,과연 인간은 오로지 자기 스스로에 의해서만 존재할 수 있을까??인간도 동물처럼 자연법칙의 영향을 받으며,?자연을 벗어나서는 살 수 없는 존재이다.?그렇다면 자기 스스로 존재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이에 대해 철학자 마르크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유란 자연법칙으로부터 공상적인 독립에 있는 것이 아니라,?오히려 이 법칙을 인식하고?일정한 목적을 위해 계획적으로 작동시킬 수 있다는 데 있다…….?그러므로 자유는 자연의 필연성들에 대한 인식을 기초로 우리 자신과 외부 세계를 지배하는 데 있다(엥겔스,?『반뒤링론』).”
결국 자기 스스로 존재한다는 것은 자연법칙을?‘일정한 목적을 위해 계획적으로 작동’시키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그리고 자연법칙을 계획적으로 작동시켜 자신의 삶의 목적을 실현시키는 활동 또는 행위가 바로?‘노동’이라고 할 수 있다.?이 노동을 통해 인간은 자연을?‘인간화시키는 것’이며,따라서 인간은 자연의 주체로 등장할 수 있게 된다.
3.?자본주의 사회에서 왜,?어떻게 소외가 발생하는가?
1)?자본주의 사회란 무엇인가?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한마디로 말해 자본주의 사회이다.?그렇다면 자본주의 사회란 어떤 사회인가??자본주의 사회는 봉건사회 등 이전의 사회와는 달리 인간의 노동력이 상품으로 판매되는 사회이다.?그리고 인간의 살아 있는 노동을 통해 새로운 가치가 생산되는 사회이다.
인간은 자신이 만들어 낸 모든 상품들과 구별되는,?상품을 만들어 낸 창조주이자 주체이다.?그리고 이것을 가능하게 해 주는 인간의 주요 특성이 바로?‘노동’?자체이고,?이러한 사실로부터 인간 노동 자체를 다른 모든 상품처럼 시장에서 판매할 수 없으며,?다만 이러한 노동의 구현체로서의 노동력(다른 모든 상품들도 노동의 구현체이다)이 다른 모든 상품들처럼 시장에서 판매될 수 있다.
그러므로?<노동>과?<노동력>의 가치를 반드시 구분해야 한다(노동은 그 자체로 가치를 가질 수 없는 것인데,?왜냐하면 시장에 내다 팔 수 있는 상품이 아니기 때문이다).?그렇지만 이 노동력은 이 노동력을 만들어 내는 창조주,?주체로서의 인간과 현실적으로 분리될 수 없는 특수한 상품이다.?다시 말하자면 시장에서 판매되긴 하였지만 아직 추상적이고 가능적인 형태에 머물러 있는 노동력이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것으로 되기 위해서는,?즉 노동력이 발휘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인간의 노동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 인간의 노동을 마르크스는?‘인간의 살아 있는 노동’이라 하는데,?노동력과 기계,?원료 등을 결합하여 새로운 상품을 만들어 내고,?이는 종전보다 더 많은 가치를 만들어 내는데,?이 새로운 가치 부분이 바로 잉여가치이다.?그렇게 해서 잉여가치는 바로 인간 노동에서 나오는 것이다.?자본가가 노동자에게 주는 임금은 노동의 가치가 아니라 노동력의 가치이다.
또한 단순가격과 생산가격이 시장의 경쟁이라는 개념을 통해 서로 다르게 나타난다는 것을 설명하였다.?아래의 도표를 보면서 이야기를 해 보도록 하자.
C(불변자본, Constant capital):기계,?공장부지,?원료 등을 뜻하는데,?새로운 가치를 만들어 낼 수 없는 자본을 뜻한다.
V(가변자본, Variable capital):노동자의 노동력을 뜻하는데,?새로운 가치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자본을 뜻한다.
S(잉여노동 또는 잉여가치, Surplus)
C+V+S:단순가격으로서 하나의 상품을 만드는 데 들어간 비용을 뜻하는데,?시장에 나오기 전의 그 상품의 가치를 나타낸다.
P(이윤, Profit):시장에서 그 상품이 팔렸을 때 실제 남는 이윤을 뜻한다.
C+V+P:생산가격으로서 단순가격이 시장에서 가격 경쟁을 통해 현실화된 가격이다.
표에서 자본가Ⅰ,Ⅱ,Ⅲ?모두 하나의 상품을 만드는 데 총100원(C+V)을 투자하고,?잉여가치율(S`=V/S)이 모두?100%라고 가정한다.?이때 상품은 단순가격으로 팔리는 것이 아니라 자본가들의 경쟁에 따라 단순가격들의 평균으로?120원에 팔리게 된다.?그러면 자본가?Ⅰ,Ⅱ,Ⅲ?중 자본가Ⅰ이 가장 많은 이득을 취한다.?즉 단순가격에?10원의 이득이 더 붙는다는 것이다.?그 다음에는 자본가Ⅱ이고,?그 다음에는 자본가Ⅲ이다.?자본가Ⅱ는 단순가격과 생산가격이 같고,?자본가Ⅲ은 단순가격에서?-10원을 손해보고 있다.?가격경쟁에서 자본가Ⅰ이 우위를 점하면서 더 많은 이윤을 창출하고 있다.
그런데 우위를 점하고 있으면서 더 많은 이윤을 창출하는 요인이 무엇일까??그것은 자본가Ⅰ이 자본가Ⅱ,Ⅲ보다 자본의 유기적 구성도(C/V)가 높다는 것이다.?자본의 유기적 구성도가 높다는 것은 가변자본이 적어진다는 것,?즉 노동자의 임금이 차지하고 있는 부분이 적어지고,?불변자본이 많아진다는 것,?다시 말해 사람이 일하던 것을 기계로 대체한다는 것이며,?그 기계의 효율을 최대한 높여서 노동 강도를 엄청나게 강하게 한다는 것이다.?이러한 것은 오늘날 우리가?‘구조조정’이라고 일컫는 것이다.
그런데 가변자본이 줄어든다는 것은 곧 가변자본에 의하여 생겨난 잉여가치(S)가 줄어든다는 것을 의미한다.?또한 잉여가치가 줄어든다는 것은 이윤율(S/C+V)이 줄어든다는 것이다.?이 이윤율은 경제성장률 지수의 척도이다.?위 표에서 보다시피 자본Ⅲ의 이윤율은?30/100인데 자본Ⅰ의 이윤율은?10/100이다.?서구선진국의 경제성장률이?1~2%대에 머무르는 것은 이와 무관하지 않다.
이러한 이윤율 저하 경향은 자본의 이윤 증대를 꾀한 결과이며,?이는 곧 노동력을 감소시킨다.?그리고 이 노동력의 감소는 다시 이윤율의 저하 경향을 가져와서 자본의 이윤 증대를 꾀하게 되며,?다시 노동력을 감소시킨다.?다시 말하자면 이러한 순환과정은?<이윤율의 저하 경향?→?자본의 이윤 증대를 꾀한 결과?→?노동력의 감소?→?이윤율의 저하 경향?→자본의 이윤 증대를 꾀한 결과?→?노동력의 감소?→?이윤율의 저하 경향?→ ……>이다.?노동력의 감소는 노동자의 임금 전체가 상대적으로 줄어든다는 것이며,?비정규직과 실직자가 늘어난다는 것이다.?이러한 순화과정이 계속 되풀이되면서 대다수 일하는 사람들의 삶은 피폐해지고 황폐해진다.
2) <노동의 소외>는?<노동력의 가치>로 나타난다.
우리가 주의해서 보아야 할 것은?<노동>과?<노동력>을 구분해야 한다는 점이다.?소외가 발생하는 것은?<노동>이 아니라 물적인 형태로서의?<노동력>으로부터 발생한다.
노동력이란 자연과의 관계,?나아가 사회적 관계를 실현시키는 인간의 구체적 실천활동 일반이 아니라,?자본가와 관계 맺는,?즉 자본에게 종속되고 착취되는 관계로서 노동자가 판매하는 상품의 실체이다.?그러나 이와 반대로 노동은 자연과의 관계,?나아가 사회적 관계,?즉 세계 전체와의 관계를 실현시키는 인간의 구체적인 실천적이고 변혁적인 활동일 뿐만 아니라 자신과 세계를 변혁시키는 실천활동이다.
가치란 자본주의 하에서의 역사적 개념으로서 모든 인간관계를 상품관계로 변환시키는 척도이다.?그리고 이때의 가치는 노동의 가치가 아니라?<노동력>의 가치이다.?이 노동력의 가치는 그 자체로 인간 노동의 소외 형태이다.?왜냐하면 인간 삶의 목적이 이 가치에 종속당하게 되며,?결과적으로 이 가치로서는 인간 자신의 삶의 목적을 실현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그리고 이 노동력 가치의 현상 형태가 가격인데,?가격은 구체적으로 임금의 형태로서 우리 눈에 나타나게 된다.?가격 또는 임금은 노동력의 가치와는 다르게 나타나는데,?그 이유는 경쟁 개념이 도입되기 때문이다.?또한 임금은 사회적 평균 노동시간(이것도 동일 부문의 노동자의 노동시간 단축이라는 경쟁을 통해 이루어진다)과 직접적으로 연관을 가지고 있다.?예를 들자면 최저임금제는 바로 사회적 평균 노동시간에 근거해 책정된다.?결론적으로 말하면 노동력의 가치의 현상 형태인 가격 또는 임금은 인간 노동이 소외된 형태이다.?그렇기 때문에 단순히 개별 노동자의 임금인상에 매달리거나 생산성을 담보로 하는 임금인상은 인간 노동 소외를 더욱 부채질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철학자 마르크스는?『경제학-철학 초고』에서 자본주의 사회의 인간 노동 소외를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실로 노동 자체는 노동자가 온갖 노력을 기울이고 가장 변칙적인 범죄를 저질러야 비로소 자기 것으로 차지할 수 있는 하나의 대상으로 된다.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을 통해서 자신을 긍정하지 않고 부정하며,?행복을 느끼지 않고 불행을 느끼며,?자유로운 신체적·정신적 에너지를 계발하지 못하고,?자신의 신체를 채찍질하며 자신의 정신을 황폐화한다.?따라서 노동자는 노동 바깥에 있을 때 비로소 안도감을 느끼며 노동을 할 때 탈아감(脫我感, ausser sich)을 느낀다.?그는 노동을 하지 않을 때 편안한 느낌을 갖고,?노동을 할 때에는 편안한 느낌을 가지지 못한다.
??소외된 노동은 자기 활동 곧 자유로운 활동을 수단으로 격하시킴으로써 인간의 유적(類的)?생활을 인간의 신체적 생존을 위한 수단으로 만들어 버린다.
??인간의 소외 곧 인간이 자기 자신에 맞서 있는 상태는 인간이 다른 인간에 대해 맞서 있는 상태 속에서 비로소 현실화되고 분명히 표현된다.
4.?인간 노동 소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노동자의 일자리가 줄어들어 노동자의 생계가 엄청 위협받음과 동시에 부익부빈익빈이라는 사회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다른 방식이 존재한다.?이 다른 방식은 다름 아니라 맑스가 말하는?“각자의 필요에 따라”,?즉 각자의 욕구에 따라 분배,?교환,?소통되는 방식이다.?이 방식 속에서는 그 누구도 이익을 보거나 손해를 볼 수 없다.?왜냐하면 누구나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 방식을 대단히 현실과 동떨어진,?유토피아적이고 이상적인 것으로 생각한다.?그러나 이러한 방식은 이미 알게 모르게 우리의 삶의 방식에 움터 있다.?친구들과의 관계,?가족과의 관계,?연인,?동아리 등등의 관계에서 말이다.?이들과의 관계 속에서는 이익이나 손해 등을 따지지 않는다.?우리는 이러한 관계 속에서 각자가 필요로 하는 것을 주고받는다.?그러므로 이 방식은 현실에서 실현 가능성이 있다.?문제는 이 방식을 어떻게 의식적으로 사회 전체에 적용시킬 수 있는가이다.?그렇지만 이것도 실현가능함을 우리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다.?국내적으로 보면 광우병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 집회에 가면 서로가 서로에게 먹을 것과 담요,?음료수 등을 아무런 이해관계 없이 주고받는다.?서로에게 격려와 희망,?연대의 벅참을 주고받는다.
국외로 보면 쿠바,?베네수엘라,?볼리비아 등이 민중무역협정(PTA)(미국을 축으로 하는 자유무역협정(FTA)에 반대해서 만든 협정)이라는 것을 체결하였다.?자유무역협정은 사회적 평균 노동시간(이것은 화폐의 양으로 나타난다)에 따라 분배,?교환,?소통하는 방식이다.?그러나 민중무역협정은 각 국가가 필요로 하는 물자의 양에 따라 분배,?교환,?소통하는 방식이다.?쿠바는 베네수엘라로부터 석유를,?볼리비아로부터 천연가스와 콩을,?베네수엘라는 쿠바로부터 의사를 비롯한 선진 의료제도를,?볼리비아로부터는 천연가스와 콩,?밀을,?볼리비아는 쿠바로부터 의사를 비롯한 선진 의료제도를,?베네수엘라로부터는 석유 등을 필요한 만큼 서로 주고받는다.
우리가 노동하는 것은 각자가 필요한 것을 얻고 충족시키는 데 그 목적이 있다.?이것이 바로 노동이 가지고 있는 진정한 가치라고 할 수 있다.?결국 중요한 것은?<생산양식>이 문제이다.?필요한 만큼만 생산하는 생산양식,?즉 계획 생산 양식은 자본주의의 무정부적인 생산 양식의 대안이 될 수 있다.
*베를린에서 유학 중인 한상원 회원이 인문학 동향이나 정치 소식을 연재합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맑스는 그의 생애에 걸쳐 총 4차례 베를린을 방문한다. 첫 방문은 그가 베를린 대학교, 즉 프리드리히 빌헬름 대학교(Friedrich-Wilhelm-Universit?t, 오늘날의 베를린 훔볼트 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하기 위함이었다. 처음 본에서 학업을 시작한 그는 1년 뒤인 1836년에 베를린을 방문해 1841년까지 머문다. (맑스는 베를린 대학에서 학업을 마치지 못했고, 그의 박사학위 논문을 예나 대학에 제출했다.) 그 후 1848년에 잠시 기차 환승을 위해 베를린에 들른 기록이 있다. 1861년에는 당시 프로이센의 국왕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 사망과 빌헬름 1세로의 왕위계승을 계기로 기존의 정치범들에 대한 대대적인 사면이 이뤄졌는데, 맑스는 이 당시 망명생활을 청산하고 프로이센 시민권을 얻고자 했다. 때마침 페르디난트 라쌀레의 제안으로 베를린에서 공동의 신문을 창설할 계획으로 일주일간 라쌀레의 집에서 머물렀다. (그러나 복잡한 법적 문제로 맑스의 프로이센 시민권 취득은 실패했고 그는 다시 런던으로 돌아가야 했다.) 1874년 말에는 막내 딸 엘리노어와 함께 베를린을 여행했다. 그의 마지막 방문이었다.
맑스는 베를린 대학교 법학과 학생이었지만 그의 주된 관심은 철학, 특히 베를린 대학교 총장을 역임하다 1831년 사망한 헤겔 철학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는 당시 베를린 대학교 법학과 교수이며 헤겔 법철학을 편집, 출간한 에두아르트 간스(Eduard Gans) 교수 밑에서 헤겔 철학을 공부한다. 또 1838년에는 브루노 바우어의 소개로 ‘박사 클럽(Doktorklub)’에 가입해 청년헤겔학파의 일원이 되기도 한다.
맑스가 살던 당시 왕립 도서관이 있던 자리에 현재 베를린 훔볼트 대학 법학과 건물이 있으며, 앞에는 베벨 광장(Bebel Platz)이 있는데, 이곳은 1933년 권력을 장악한 나치 세력이 유태인들과 사회주의자들의 책을 쌓아놓고 불태워버린 곳으로 유명하다. <공산당 선언>을 비롯한 맑스의 서적들 역시 당시 대거 불태워졌다. 현재 이곳에는 텅 빈 서고만 남아 있는 지하 도서관을 땅 위에서 볼 수 있도록 해놓았는데, 이는 나치에 의한 분서갱유 사건으로 학문이 탄압받았다는 것을 기념하기 위한 전시물이다.
참고로 이 법학과 건물의 도서관에는 동독 정부 시절 제작된 6미터 높이의 거대하고 화려한 스테인드 글라스가 아직 남아 있는데, 그 중심에는 레닌이 서 있고 그 옆에 맑스와 엥겔스의 얼굴이 보인다. 이곳은 레닌이 1894년 이 건물(당시에는 왕립 도서관)에서 공부했다는 것을 기념하기 위해 제작된 것이다.
그가 공부했던 베를린 대학교의 명칭은 이후 베를린 훔볼트 대학교로 바뀌는데, 훔볼트 대학교는 냉전 시절 동베를린 지역으로 편입되어 동독 정부의 지배를 받았다. 동독 정부는 맑스주의를 홍보할 목적으로 훔볼트 대학 본관에 맑스의 <포이어바흐 테제>의 마지막 문구인 “이제까지 철학자들은 세계를 변혁해 왔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그것을 변혁하는 것이다.”라는 문장을 금속으로 제작해 벽에 전시하였다. 통일 직후 이 글귀를 벽에서 철거할지 말지에 대해 격렬한 논쟁이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대학 측은 이 글귀의 역사적 가치를 인정하며 그대로 보존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베를린에 공부하며 거주지를 총 6차례 옮겼는데, 그중 그가 그의 약혼자 예니 폰 베스트팔렌의 오빠이자 맑스의 정치적 동료인 에드가 폰 베스트팔렌과 함께 거주했던 3번째 집이 가장 유명하다. 루이제 거리 60번지(Luisenstraße. 60)에 위치한 이 집에 동독 정부는 맑스가 살았던 곳임을 표시하는 현판을 걸어두었는데, 지금은 이 건물이 예술 아카데미 기록관(Das Archiv der Akademie der K?nste)으로 편입되면서 현판이 철거되었다. 현재 베를린의 맑스 엥겔스 전집 편찬위원회는 맑스라는 인물의 역사적 의미를 감안해 이 현판을 다시 제작해 전시하자고 당국에 건의하고 있다.
엥겔스는 언제 베를린에 머물렀을까? 맑스가 베를린을 떠난 지 수개월 뒤인 1841년 9월 엥겔스가 베를린에 온다. 군대에 자원한 엥겔스는 포병으로서 베를린 대학 근처에 있는 Am Kupfergraben에 주둔한 병영에 거주하며 종종 베를린 대학의 철학 수업을 청강했으며, 브루노 바우어가 이끄는 청년 헤겔학파와도 교류했다. 동독 정부 시절엔 시내 중심에 위치한 그가 살던 집에 커다란 현판이 붙어있었지만, 지금은 재개발이 진행되어 건물이 소실되어버렸다. 1년 뒤 엥겔스는 쾰른을 거쳐 맨체스터로 이주해 아버지가 운영하는 사업을 물려받기 위한 교육을 받으며 그곳의 노동자들의 생활을 관찰한 뒤 정치적으로 급진화하기 시작한다.
베를린에 남아 있던 맑스의 흔적들은 대부분 동독 정권 시절 정권 홍보 수단으로 전락한 것이 사실이다. 이 때문에 그러한 흔적들 중 상당수는 오늘날 소실되어 더 이상 기념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비록 동독이 무너졌지만 맑스에 대한 독일인들의 자부심은 여전히 대단해서, 베를린에만 칼 맑스 거리(Karl Marx Straße), 칼 맑스 대로(Karl Marx Allee) 등 맑스의 이름을 딴 지명들이 여전히 남아 있고 곳곳에 맑스의 흉상과 얼굴 조각상들이 남아 있다. 그러나 여전히 이러한 맑스를 기념하는 장소들과 지명들을 다른 것으로 대체하자는 주장들도 우파들로부터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이들은 맑스와 독재를 동일시하며, 동독이 사라진 현재 맑스를 기념하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가 하고 묻는다. 그러나 이들의 주장과 달리 맑스의 사상은 동독 정권의 독재로 환원될 수 없는 것이다. 동독 정권의 국가 이데올로기가 아닌 맑스 사상의 비판적이고 변혁적인 핵심을 연구하고 실천적으로 계승하려는 노력들은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다. 현재 독일의 연구자들은 맑스 엥겔스 전집(MEGA)을 발간하며 동독 국가 이데올로기와 다른 맑스 사상의 새로운 내용들을 세상에 공개하고 있다.
맑스가 죽은지 130여 년이 흘렀지만 여전히 불평등과 착취, 억압이 지배하며, 새로운 형태의 위기가 재생산되는 이 시대에는 오히려 더 많은 사람들이 맑스의 사상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여전히 베를린에 “더 많은” 맑스 기념시설들이 필요한 이유다.
고향
?
빨간 색 뽈통 소쿠리 가득 담기면
주물러 붉은 물 빼고
남은 씨는 고운 햇살에 말려
찧으면 나오는 붉은 가루로
개떡 만들어 주던 이웃은 어디로 갔을까.
?
어머니 몰래 가져간 밥 한 그릇과
바꾸었던 칡수제비 한 그릇 먹고
함께 놀던 친구들은 잘 있을까.
?
목화송이마냥 하얗게 부풀어
베어 먹으면 새콤달콤한 동백꽃
구름이라도 끼이면
끝도 없이 가물거리던 그 작은 섬들
?
산이라도 그대로
바다라도 그대로
날 기다리며 있을 것 같은
한번은 가보고 싶은
잊을 수 없는 그 곳!!
-양추자, 2014년 2월 18일 구술한 것을 수정-
참말로 이상하고 얄궂다. 무신 시를 쓰고 읽자고 자꾸 찾아 오노? 말은 하는데 시는 모린다. 뭐 안 쓰도 된다하이 한번 해 보자. 내 이야기 들어가꼬 뭐 할끼고? 나는 서럽고 서러워서 그라고 억울해서 말하고 싶지 않다. 그란데 또 이야기하고 싶기도 하다. 내 맘을 나도 모리제. 이래 뵈도 내가 노래는 참 잘한다. 소록도에 있을 때에도 사람들이 노래를 부르라 하모 뜻도 모르는 유행가를 몇 곡씩 불어 제낐다.
고향? 우리 겉은 사람한테 고향이 어딨노. 태어나서 8살 묵을 때까지 살았다. 나는 거제도 바닷가 동네에서 태어났제. 위로 언니가 둘 있었고 아래로 남동생이 하나 있었다. 내 고향은 앞에 바다가 있었고 뒤에는 산이 있었는데, 그 산에는 참꽃이 얼매나 붉게 피었는지 모린다. 참꽃 피몬 벚꽃도 피제. 아참, 머루도 참 많았다.
머루보다 뽈통이 더 많았는데, 그 뽈통은 워나게 커서 몇 개만 따 묵어도 금방 배가 부르고는 했다. 뽈통 알제? 큰 거는 손가락 마디만 하다. 없는 집에서는 그 뽈통으로 개떡을 만들어 묵었제. 산이라고 해도 바다 가까이에 있는데, 뽈통나무를 타고 올라가 흔들모 열매가 우두둑 떨어진다. 금방 소쿠리가 찬다 아이가. 참 재미있었다. 뽈통은 약간 떫으면서도 단맛이 난다.
우리 옆에 집에 살던 아가 그 뽈통을 한 소쿠리 따 가모 그 집 어매는 소쿠리 채 뽈통을 주무르는 기라. 그러면 뽈통 살은 빠지고 포루스럼한 씨가 남아. 씨는 포루스럼하고 하얗는데 그 씨를 빻으모 벌건 가리가 나오는 기라. 하모, 가리 색깔이 벌겋제. 그 가리를 체에 몇 번씩 거르모 밀가루 같다. 그게다가 쑥을 찧어 섞어 버무리서 커다랗게 만들어 찌거든. 그게 쑥개떡이라. 그게 너무 맛있어 보이제. 그래서 우리 어매 몰래 솥에 있는 밥을 한 그릇 가져가서 개떡하고 바까서 묵었다 아이가. 참 맞을 짓 했제.
어떤 때는 칡가리 수제비하고 밥하고 바까 묵기도 하고…… 아이고, 칡은 크기가 내 다리만 하다. 큰 칡을 도구통에 넣고 찧어서 물에 담가 놓거든. 시간이 지나모 밑에 칡가리가 가라앉는다. 그라모 물은 버리고 가라앉은 것을 돗자리 펴고 그 위에서 말린다. 그기 칡가리다. 그 말린 가리를 반죽해서 밭에서 나는 푸성귀를 섞기도 하고 그냥 칡가리만 갖고 반죽해서 뚝뚝 뜯어 끓는 물에 넣어 끓이모 수제비 아이가. 칡수제비는 시커멓다. 암만 생각해도 그리 맛있는 거는 요새까지도 별로 없는 것 같네.
칡 알제? 그 칡이 가리 칡도 있고 물 칡도 있다. 가리 칡은 꼭 생긴 게 고구마 같다. 이 칡이 큰 거는 참 크다. 웬만한 사람 다리만 한 것도 있고, 더 큰 것도 있다. 큰 칡은 손으로는 못 떼내고 톱으로 자르는데, 그때 옆에서 보모 칡가리 날리는 게 보인다. 이 가리 칡은 가리가 많아서 묵고 나모 입안이 터분한데 달착지근한 게 맛은 있다.
물 칡은 가리 칡보다 좀 작은데, 이거는 그냥 손으로 죽죽 찢으모 찢기거든. 입에 넣고 씹으모 물하고 찌꺼기가 입안에서 따로 논다. 단물만 빨아묵고 찌꺼기는 뱉아 내지. 그때는 묵는 게 귀해서 그런 것도 맛있었다. 요게 성심원의 클라라의 집에 있을 때 박군이 칡을 참 잘 캤다. 바로 그 옆이 산이거든. 툭하면 산에 가서 칡을 캐오는데, 참 잘 캐오더라.
우리 집이 있던 거기는 한 열대여섯 가구가 살고 있었다. 내가 시방도 한 집 두 집 셀 수 있다. 논이 거의 없었는데, 아마 한 집 정도 논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란데 우리집에는 쌀밥이든 보리밥이든 항시 밥이 있었다. 그 때는 몰랐는데 지금 생각하니 우리 부모님이 얼마나 애를 썼겠노 싶다. 논이 거의 없다보니 주로 강냉이하고 고구마를 마이 키웠다. 강냉이랑 고구마 참 마이 묵었다. 지금은 고구마 안 묵는다. 안 묵고 싶다.
바닷가에는 언제나 염소가 있었다. 그 염소들은 바닷가 바위 위를 폴짝폴짝 다님시로 여게저게 풀을 뜯어 묵다가 희한하게 해 지모 들어오는 기라. 산에는 소가 있고 바닷가에는 염소가 있는데, 해가 안 떨어져도 비가 오모 들어온다. 짐승도 생각은 있는 기라. 비라도 올라고 구름이 끼이모 섬들이 끝도 없이 가물가물하제. 실눈을 뜨고 봐도 섬은 기냥 가물거리고 있는 기라. 날이 맑으모 대마도가 아른아른 비치고, 어떤 때는 훤하게 보이기도 하고……
그 산이라도 그대로, 그 바다라도 그대로 있겄제. 나는 이리 변해도 그 산은 그 바다는 안 변하고 그대로 있겄제. 사람들은 나를 모린 척 해도 그 산은 그 바다는 나를 기다릴 것 같다. 내 친구들은 아즉도 살아있을까. 이때쯤 되몬 동백꽃도 따 묵고 했는데…… 커다란 동백꽃을 따서 빨아 묵으모 새콤달콤하다. 동백꽃 안에 고인 물을 빨아 묵으모 새콤달콤해.
미처 꽃이 되다 만 동백꽃은 뒤꽁지가 목화솜처럼 부풀어 있거든. 말하자모 사람으로 치모 장애자라. 씨가 온전하게 못돼서 장애자가 된 기라. 거기를 베어 묵으모 참 달다. 좀 새콤하기도 하고, 그 맛이 생각난다. 같이 꽃을 따 먹고 뛰놀던 내 친구들, 영이, 성이, 동열이, 재열이 다 거기 살고 있겄제. 나만 여게 있다. 친구들 이름은 그대로 적지마라. 갸들한테 해가 가모 어짤기고. 친구들 이름은 바리게 적지 마라.
우리 동네에 나무소년이 있었다. 그 이름은 내가 그냥 그리 불렀다. 열서너 살 쯤 우리 동네로 이사를 왔는데, 지지리 가난했다. 맨날 지게 지고 산에 가서 나무 해 와서 그 많은 식구를 멕여 살렸다. 나는 학교에 갈 때 갸를 만나고는 했는데, 내가 머리를 푹 숙이고 지나치고는 했다. 마음이 참 안 됐더라고. 아부지는 병들어 누워있고 어매는 능력이 없고, 어린 여동생만 둘이 있었다. 그리하니 땅뙈기도 하나 없고 맨날 산에 가서 나무 주워 와서 묵고 사니 얼매나 가난하겄노.
그런데 세상에는 법이 없다. 남의 산에 가서 나무하다가 들키모 두드려 맞고 나무도 뺏기고, 그래도 다음 날에는 또 남의 산에 가는 기라. 내가 소록도에 있을 때 우리 어매가 와서 갸가 죽었다고 안 하나. 남의 산에 가서 땅에 떨어져 있는 나무를 주워오다가 들켜서 얼매나 맞았는지 집에 와서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단다.
세상에 무슨 법이 있노. 그게 법이가? 땅에 떨어진 나무 좀 주워 그 많은 식구 멕여 살리는 그 얼라가 무슨 죄가 있다고 죽을 만치 때리노. 땅에 떨어진 나무도 임자가 있는 갑다. 나는 그 아가 안 잊어진다. 자꾸 생각이 안 나나. 이상하제. 울 언니가 전에 와서 말해주는데 여동생 둘이는 그대로 그게 살고 있다카더라.
그래도 참 가보고 싶다. 근데 그기 왜 그리 안 되노. 아이고, 잊을 수가 없다. 얄궂게 왜 안 잊혀질고. 생각이 자꾸 난다. 내 고향은 거제도 함목이다. 동부면 갈고지 함목이다. 산양도 기억나고 도당포도 기억나고 구조라, 장승포도 놀러 다녔다. 쌍나리라고 있었는데…… 쌍나리는 내 외갓집 동네 이름이다. 통영다리를 지나서 한참 가모 나온다. 산을 타고 돌아가야 나오는데 산비탈이라서 돌이 떨어지모 그대로 바다에 첨벙하고 떨어진다. 그리 멀고 험한 동네도 외갓집이라고 힘든 줄 모리고 걸어서 놀러 다녔다.
건강하던 그 때의 내 이름은 막딸이었다. 언니 둘하고 나까지 연달아 딸이 태어나니까 우리 집에서는 이제 딸은 그만 놓으라고 막딸이라고 불렀는데, 내 밑으로 남동생이 태어났다. 나는 이름을 막딸로만 알고 있었는데, 울언니하고 소록도에 가서 아부지가 서류에다가 ‘추자’라고 적더라. 그때 알았다. 내가 추자, 양추자인 걸. 모리제, 원래 추잔데 아들 놓으라고 막딸이라 한긴지 이름이 없는데 적으라 하니까 ‘추자’라고 적은 긴지.
지난 호에 이어서
셋째, 강사들은 자신들의 허위의식을 깨뜨릴 수 있습니다. 강사들은 머리는 하늘의 별을 향해 있지만 몸은 시궁창 속에 빠져 있는, 이 시대의 가장 분열된 존재입니다. 학생들을 가르칠 때 그들의 정신은 한 없이 숭고합니다. 하지만 강의실을 벗어나는 순간 품위와 명예를 존중하던 그들은 한없는 굴욕감과 분노를 곱씹을 뿐입니다. 이런 현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그들은 속으로 끊임없이 “이곳은 내가 있을 곳이 아냐, 나에게는 이상이 있어. 전임만 되면 이 모든 굴욕을 한꺼번에 벗어던질 수 있어”라고 자위합니다. 하지만 그 이상이 현실 속에서 좌절될 때 그들은 또 다시 허탈해하고 좌절하다가 삶을 포기하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때로는 이 시궁창 같은 구조를 벗어나기 위해 교수들의 수족 같은 노예 역할을 하고, 또 때로는 교수나 재단이 채용을 이유로 비정상적인 금품을 요구하는 것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도 합니다. 생계를 위해 지식 보따리를 들고 이 대학 저 대학을 떠돌고, 오전에는 이 도시 오후에는 저 도시로 미친 듯이 차를 몰고 다니며 강의를 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열심히 뛰어 다니면서도 최소한의 경제적 삶을 보장받기가 힘들고, 그런 세월이 반복되다 보면 연구할 시간도 확보하지 못해 나중에는 학자로서 자긍심마저 잃게 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이미 수많은 강사들이 그런 전철을 밟아가면서 상아탑을 쌓는 무덤들이 되었습니다. 사실이지 오늘날 강사 문제는 개인의 역량과 크게 상관없는 구조적인 문제입니다. 대학교육의 40% 이상을 담당하고, 수많은 연구 단체, 학회 등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인력의 60-70%가 강사와 무늬만 교수인 강의 전담, 비 정년 트랙 등 입니다. 그런데 오늘 날 한국의 대학은 그들을 사회적 루저(Loser)로 취급하고 굴욕감을 강요하고 있습니다. 책 읽는 것을 좋아하고, 지적 호기심으로 연구에 몰두하고,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을 천직으로 삼고 있는 이 땅의 강사들과 연구자들이 그런 취급을 받을 이유는 결코 없습니다. 그것은 오직 이러한 수탈구조를 통해 자신들의 성장과 발전을 꾀하려는 대학들의 부도덕과 불공정에 있습니다. 그럼에도 정작 피해 당사자인 대학 강사들이 이런 현실이 드러나는 것에 대해 불편해 하고 있습니다.
대학 안에서 가장 착취 받는 그들이 자신들의 현실을 정확히 인식하고 비판하고 개혁하려 들지 않는 한 누구도 이 시궁창 같은 현실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권리 위에 잠자는 자들은 보호받지 못한다는 말처럼, 자신들의 비참한 현실과 허위의식을 깨뜨리려 하지 않고서는 지금의 강사문제, 대학문제가 해결될 수 없습니다. 강의실에서 학생들에게 적극적으로 ‘나는 강사’라고 밝힌다고 해서, 아니 그렇게까지 나서지 않더라도 학생들이 강사라는 사실을 안다고 해서 무엇이 달라지나요. 이미 학생들도 강의하는 선생이 강사인지 아닌지 다 알고 있습니다. 다만 이 불편한 진실을 외면할 뿐이지요. 그렇지만 분명한 차이는 있습니다. 학생들이 강사의 수업을 들을 때는 그에 해당하는 수업료를 차별 지급하라고 하는 것이고 그 혜택은 고스란히 학생들에게 돌아가는 것입니다. 만약 이 운동이 현실화된다면 강사들은 이 왜곡된 대학 현실 속에서 학생들을 참으로 위하는 진정한 스승으로, 저임금과 신분차별 속에서도 학생들에 대한 열정과 책임을 다하는 진정한 스승으로 우뚝 설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이지 강의실에서 만나는 선생과 학생의 관계는 저임금이나 신분 차별과는 상관없습니다. 오로지 배우려는 열의와 가르치려는 열정으로 만나는, 순수한 영혼과 영혼의 불꽃 튀는 만남이 있을 뿐입니다. 필자가 강의하는 대학의 토론 관련 수업에서는 수강생들이 전국 단위의 토론대회에서 내리 2년간 3연속 우승하는 진기록을 낳기도 했습니다. 강사냐 교수냐는 수업의 질과 크게 상관없습니다. 문제는 야바위꾼 같은 대학들이 이런 순수한 열정을 악용해서 현재의 착취구조를 영속화하려는 기도에 있고, 이 착취 구조 하에서 자신들이 대단한 역량을 가진 듯 당연히 이 착취의 수혜 물을 향유하고 동료 학자들의 비참한 현실을 방관하는 교수들에 책임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날 한국의 대학 교수들은 대학에서 부당 차별을 받고 있는 동료 학자이자 강사들에 대해 분명한 책임이 있습니다. 한정된 파이에서 한 쪽이 다른 쪽에 비해 현저하게 많이 가져간다면 결과의 부정의를 야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게다가 지금처럼 강사들의 비참하고 불공정한 현실이 대학의 왜곡된 착취구조에 기인한 바가 크다고 한다면, 이 구조의 수혜집단인 대학교수들도 큰 책임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 운동은 합리적인 시장 논리에 의해 교수들 역시 현재의 수탈 구조 하에서 그들 역시 수탈의 하수인 역할을 하고 있고, 그 수혜 집단임을 드러내고자 합니다. 물론 지금의 상황을 비판하고 개선하고자 노력하는 양심적인 소수의 대학교수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개개인들의 양심과는 별도의 문제입니다. 대다수의 교수들은 그들이 누리는 향유와 특권이 그들 자신의 개인적 역량 때문이라고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그들은 적극적이든 소극적이든, 의도적이든 그렇지 않든 간에 현재 대학들에서 자행되고 있는 부도덕과 불공정의 하수인이고 협력자들입니다. 그들 역시 동료 학자들의 비참한 상황을 유지·존속한 것에 대한 도덕적 책임을 면할 수 없습니다. 마치 식민지 체제의 안정과 유지에 성실하게 노력한 자들이 그 체제 하에서 고통 받던 대다수의 주민들의 고통에 책임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의 고액 연봉, 그들이 안식년을 가서 편안하게 즐기는 여유, 그들이 우아하게 연구실에서 차를 마시며 하는 작업의 이면에는 저임금에 시달리는 강사들의 피와 땀, 그리고 눈물로 점철된 고통이 있습니다. 때문에 교수들 역시 이런 현실을 분명하게 깨닫고 작금의 강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대학 사회에서는 강사들을 동료 학자로 존중하지 않고 한낱 하수인 정도로 생각하는 철부지 부도덕한 교수들도 많습니다.
지금까지 강사들은 법적 지위를 개선하고 강사료 문제를 현실화시켜 달라고 부단히 요구해왔습니다. 하지만 사회는 오히려 강사들의 비참한 현실만을 부각시켜 그들을 루저로 만들고 시혜의 대상 정도로만 생각합니다. 강사 문제는 결코 시혜의 문제가 아니라 대학 교육의 정상화 문제와 직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런 파행적이고 불공정한 현실이 온존함으로써 그 피해는 고스란히 대학생들에게 가고 있고, 대학의 미래, 사회의 미래, 나아가서는 국가의 미래에도 그대로 악영향을 줄 것입니다. “강의 실라버스 직급 공개와 수업료 차등 지불 운동”은 부도덕하고 불공정한 대학의 기형적 구조의 진실을 밝히고 대학을 혁신하는 문제와도 직결되어 있습니다. 이 운동은 왜곡된 구조의 원인 제공자라고 할 대학들이 실제로 얼마나 부도덕하고 불공정한 행태를 일삼고 있는가를 깨닫게 하자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행태를 합법적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이것은 법 이전에 도덕과 정의의 문제입니다. 대학의 건물은 30년 전에 비해 엄청 늘어났지만, 강사들에게는 최소한의 연구와 휴식 공간마저 허용이 되지 않고 있습니다. 대학의 고도성장의 당당한 주역이라고 할 강사들의 흔적은 대학 발전사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들은 다만 무한 희생과 무한 고통만 강요당하는 소모품으로 취급될 뿐입니다. 학자로서의 최소한의 품위와 존엄도, 최소한의 경제적 삶과 행복도 인정되지 않고 있습니다. 강사들에게는 방학 중에는 연구를 위해 필수 요소인 도서관 출입과 접속도 끊어버리는 실정입니다. 이렇게 학생들을 가르치는 강사들을 헌신짝 취급하는 대학들이 과연 이 땅의 인재들의 미래 교육을 말할 수 있을까요? 대학의 교직원들도 이 기막힌 현실의 부역자이자 수혜자라는 진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들이 얼마나 불공정하고 부도덕한 주체였던가를 깨닫고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더는 이런 현실을 관행으로 덮어서는 안 됩니다. 이런 부정의와 부도덕이 온존해 있는 한 대학은 결코 자유를 외칠 수 없고, 진리와 양심의 상아탑을 자처할 수 없습니다. 대학사회는 이제 비판의 화살을 자신들의 심장으로 돌려야 할 것입니다. 대학 사회의 힘 있는 주체들은 분명하게 자신들의 부도덕하고 불공정한 현실을 깨닫고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지난 수 십 년 간 대학들은 이 땅의 경제 발전을 위해 귀중한 인재들을 배출해왔습니다. 또 사회 민주화를 위해 대학 사회의 수많은 주체들이 용감한 목소리를 내왔고 헌신적으로 희생을 감수해왔습니다. 이 땅의 강사들은 이 모든 공로와 희생에 절반 이상의 기여를 해왔다고 자부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쌓아 올린 대학이 지금은 사회 어느 곳보다 극심한 차별을 당연시하고, 발전이라는 명목으로 온갖 편법과 불법을 감행하는, 가장 부도덕하고 부정의한 집단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제 이런 부끄러운 고리를 끊기 위해 결단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현실적으로 당장 그것이 불가능해 보이겠지만, “강의 실라버스 직급 공개와 수업료 차등 지불하자!”는 우리의 운동은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첫 걸음이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참으로 시작은 미미하겠지만, 대학과 사회의 도덕적 공분과 정의에 대한 열망이 들불처럼 타오를 것입니다. 강사 여러분들, 대학생 여러분들, 학부모 여러분들, 비정규직 노동자 여러분들, 정의로운 사회를 건설하고자 애쓰는 이 땅의 모든 양심적 시민들, 우리들 스스로가 이 들불을 당기는 횃불을 높이 치켜듭시다!
-끝-
지난 호에 이어서 게재합니다
대학들은 오랫동안 이런 부당행위들을 통해 엄청난 폭리를 취해 왔습니다. IMF 이후 우리 사회 곳곳이 생존의 고통을 겪고 있을 때도 한국의 대학들, 특히 메이저 대학들의 양적인 규모는 비약적으로 성장해왔습니다. 비싼 등록금을 내고 들어온 학생들은 4년 내내 공사 판 같은 대학 캠퍼스에서 소음에 시달리며 학습권을 침해받고 있습니다. 이는 어떤 특정 대학에 국한된 현상이 아닙니다. 대학이 이런 양적 성장을 할 수 있었던 중요한 이유는 비싼 등록금으로 인한 학부모들의 고통과 저렴한 강사료로 무자비하게 착취당하는 강사들, 그리고 용역 회사로 넘겨진 학내 비정규 저임금 노동자들에 대한 착취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대학들의 간판급 연구소들도 실정을 알고 보면 놀라움을 금치 못합니다. 대학의 모든 연구소 시스템은 기본적으로 앵벌이 시스템에 가깝습니다. 연구원들은 거의 대부분이 비정규직 강사들로 채워져 있고, 그들이 국가 기관이나 기타 등등에서 연구비 지원받는 프로젝트를 따와야만 돌아가는 형태입니다. 이 프로젝트가 끝나면 연구원들은 앵벌이들처럼 다시 밖으로 나가서 연구 프로젝트를 따와야 합니다. 대학은 그 수수료를 펀딩 받아 운영하고, 그 연구 업적을 대학의 이름으로 자랑합니다. 대학의 대부분의 연구소들에 대학 자체적으로 지급하는 유급 연구원들이 거의 없다는 사실이 바로 이런 앵벌이 시스템 때문이라는 것은 그렇게 놀랄만한 것도 아니지요. 이렇게 강사들의 절대적인 도움을 받고 있으면서도 대학들은 강사들을 소모품처럼 활용하는 데만 급급하다가 아무런 통보 없이도 해고해버리고 대체품을 찾습니다. 강사들은 수 십 년 동안 한국 대학들의 고도성장의 가장 큰 역군을 담당해왔으면서도 그들의 공적이나 흔적은 대학의 발전사 어디에도 없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이 성장의 역사의 뒤안길에서 오직 사회적 루저(Loser)로만 기억되고 있을 뿐입니다. 시장을 감시 감독해야할 공정거래 위원회 같은 교육부는 오히려 법적으로 하자가 없다고 하면서 대학의 그런 관행들을 오랫동안 방치하고 두둔해왔습니다. 만약 소비자들이 그 내막을 안다면 어떻게 반응할까요? 당연히 분노하고 그런 부당거래의 관행을 용납하지 않을 것입니다. 대학은 오랫동안 학생들의 순수한 구매 욕구를 이용해왔고, 연구와 강의 외에는 아무 것도 못하는, 너무나 멍청할 정도로 순수한 딸깍발이 서생(書生)들의 처지를 악용해왔습니다. 멍청하게도 그들은 자신들의 비참한 현실이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하면서 전전 긍긍할 뿐이었습니다. 몇몇 용감한 강사들이 부당한 현실을 고발하기도 했지만 그들의 몸짓은 메아리 없는 광야의 외침으로 그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요? 그동안 이처럼 불공정하고 부당한 처사에 대해 곳곳에서 문제제기도 하고 항의도 해봤지만 판매업자들이나 관리 감독청들은 외면하고 묵살해 왔습니다. 너무 큰 폭리가 그들의 도덕 감정을 막고 있기 때문에 결코 해결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런 제안을 해보고 싶습니다. 소비자가 알고 결정하도록 하자는 것이지요. 시장이 자율적으로 적정 가격을 찾아가도록 하자는 것, 불공정한 대학에서 분배 정의를 찾을 수 있도록 만들자는 것이죠. 모두가 짐작하고 있는 불편한 진실을 백일하에 드러내자는 것입니다. 모든 상품은 원산지 증명이라는 것이 따라가고, 하다못해 음식점에서 먹는 고기 한 점, 반찬 한 가지에도 호주산인지 칠레 산인지 아니면 중국산인지 밝혀야 됩니다. 원산지 증명은 소비자들에게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한 때 광우병 우려로 미국 산 소고기와 관련해 촛불 시위가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킨 적이 있었는데, 그것은 무엇보다 소비자들의 건강과 직결되어 있기 때문이지요. 마찬가지로 비싼 등록금을 지불하는 대학의 강의에서도 강사들 강의인지 교수들 강의인지를 밝힐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그래서 아주 저렴하게 고용한 강사들의 수업을 듣는 학생들은 당연히 저렴하게 수업료를 지불하고, 교수들의 강의에는 고 비용의 대가에 대해 당연히 높은 수준의 수업권을 요구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이제는 더 이상 대학의 기만적이고 야비한 술책이 불공정하고 부도덕하게 실행될 수 있도록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끊임없이 예산 타령을 하고 경제 논리를 앞세우는 대학 당국과 교육부의 요구대로 투명하게 시장의 논리에 맡기는 것입니다. 이 시장에서 부당 거래가 어떻게 이루어지고 착취와 폭리가 어떻게 발생하고, 그 모순이 누구에게 전가되는지를 아주 투명하게 시장 논리대로 밝혀서 해결하자는 것입니다. 실라버스 직급 공개는 원산지 증명과 원가 공개를 요구하고, 차등 구매 비용에 따른 차등 지불을 요구하는 소비자들의 당연한 권리와 같습니다. 그렇다면 실라버스 직급 공개와 수업료 차등 지불 요구 운동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고 또 어떤 파장을 일으킬 수 있을까요?
첫째는 강의 실라버스에 직급을 공개하고 수강료를 차등화하자고 했을 때 그 혜택은 무엇보다 소비자들인 학생들에게 돌아갈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더 강조하지만, 앞서 예로 든 중국산 덤핑 물건과 달리 대학에서 이루어지는 강사들의 강의 상품은 상품 자체의 질(質) 면에서 결코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질(質) 좋은 똑 같은 상품이 1/10 가격도 안 되게 팔릴 수밖에 없는 이 부도덕하고 불공정한 현실이 기가 막힐 뿐입니다.)
교육 상품의 소비자라고 할 수 있는 대학생들이 비싼 수업료를 지불하고 구매한 상품이 떨이 덤핑으로 구입한 상품이고, 도덕적으로도 불공정한 상품이라는 현실을 알게 된다면 어떨까요? 대학들은 법적으로 하자가 없다고 할지 몰라도 말하자면, 법 이전에 상 도덕적으로 불공정하고 부당하다는 비난을 벗어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커피나 양탄자의 생산과정에서 아동 노동력이 심하게 착취되는 현실을 알 때, 혹은 여성들이 아름다움을 과시하기 위해 걸치는 값비싼 모피가 동물의 고통과 희생이라는 것을 알 때 소비자들은 분노하고 불매 운동을 펼치기도 합니다. 그와 비슷한 행태가 대학 안에서, 자신들을 가르치는 선생들에게 가해지는 현실에 대해 대학생들도, 그리고 비싼 등록금으로 등골이 휘는 학부모들도 똑 같이 분노하고 또 개선을 요구할 수 있어야 합니다. 현재의 대학 구조상 강사들이 수탈당하는 고통은 고스란히 학생들에게 이전되고 있습니다. 학생들은 이 기형적인 착취 구조 하에서 강사들 및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똑 같이 피해를 당하고 있는 당사자의 한 편입니다. 현재 자녀 1인을 4년제 대학 졸업시키기 위해서는 최소한 1억 이상이 소요됩니다. OECD 국가들 중 네 번째로 높은 한국 대학의 등록금은 가계 부채의 가장 큰 이유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비싼 등록금은 앞서 이야기했듯 대단히 불공정하게 책정된 것입니다. 가계부채가 국가 경제를 위협하는 현실에서도 적립금과 부동산을 산처럼 쌓아 놓고 있는 대학들이 정작 학생들의 비싼 등록금과 강사들의 저임금을 외면하는 이 기형적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실라버스 직급 공개와 수업료 차등 지불 운동은 학생들과 학부모들의 반값 등록금 운동이 결코 허무맹랑한 것이 아니라 정당하고도 합리적인 요구임을 드러내줄 것입니다.
둘째, 이 운동은 무엇보다 대학들의 부도덕한 정책에 큰 타격을 입힐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 대학의 학생들을 가르치는 강사들에게 법적 교원의 자격을 부여하는 것조차 거부합니다. 아무런 법적 자격도 없는 사람들한테 어떻게 학생들을 가르치게 할 수 있을까요? 강사들의 강의 역량이나 학문적 능력이 미덥지 못해서 그럴까요? 아닙니다. 오늘 날 대부분의 대학들은 넘치는 박사 인력으로 인해 박사학위 소지자를 강사 자격의 기본 요건으로 삼고 있습니다. 게다가 강사 문제가 개인의 학문적 역량과 별 상관없이 하나의 구조적인 문제가 되고 있어 이제는 오랜 경력 강사가 강사로 정년퇴임 한다는 이야기가 낯설지 않을 정도입니다. 그럼에도 그들이 법적 자격 부여를 거부하는 것은 오로지 1/10도 안 되는 저렴한 비용으로 고용하기 위해서, 강의 외에 어떤 비용도 지불하지 않기 위해서, 아무 때나 저들 마음에 들지 않을 경우 해고를 쉽게 하기 위해서일 뿐입니다. 맹자(孟子)는 제 아무리 좋은 명분과 허울을 두르고 있는 자들이라도 인(仁)을 해치는 자는 그저 도적에 불과하고, 의(義)를 해치는 자는 한낱 강도일 뿐이라고 말했습니다. 오늘날 한국의 대학들은 대학 강사들을 싸구려 소모품 정도로 취급하고 착취함으로써 인(仁)을 해치는 도적이 되었고, 강사와 교수 간에 불평등과 신분차별을 구조화함으로써 의(義)를 해친 강도가 되고 말았습니다. 만일 한국의 대학들이 이런 부도덕과 불공정을 개선하려 하지 않는다면, 이제 그들을 대학 도적이고 대학 강도로 불러도 틀린 말은 아닐 것입니다. 일반인들의 상식으로 보아도 어떻게 이런 부도덕하고 불공정한 일이 진리와 자유를 추구한다는 상아탑 안에서 일어날 수 있을까 도무지 이해가 안 갈 것입니다.
다음호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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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스마트폰은 그저 흥미로운 첨단 기계이다?
스마트폰이 처음 상용화되었을 당시 사람들은 진화된 휴대폰이 등장하였다고 환호하였다.?사람들에게 스마트폰은 기존의 휴대폰과 달리 엄청난 기능을 지닌 기계로 인식되었지만 여전히 진화된 휴대폰으로 여겨졌다.?그러나 아이폰을 소개하면서 스티브 잡스는 그것을 단순히 하나의 새로운 기계가 아닌 새로운 사회를 알리는 메시지임을 강조하였다.?그에게 새로운 기계란 단지 새로운 물건이 아닌 그 이상의 것,?즉 새로운 세상을 의미하였다.
이는 캐나다 매체이론가 매클루언(Marshall McLuhan)의 말을 빌자면“미디어는 메시지이다.”라는 명제로 요약될 수 있다.?이 명제는 미디어가 메시지를 전달하는 수단이나 도구가 아닌 미디어 자체가 곧 메시지라는 말을 의미한다.?한 예를 들어보자.?영화라는 미디어를 예로 들자면,?가령 헝가리의 영화감독이자 이론가인 벨라 발라즈(Bela Balazs)는 사라진 인간의 얼굴 표정을 되찾아주었고 말하였다.?이 말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영화가 나오기 이전의 대표적인 미디어라고 할 수 있는 인쇄매체와 비교해보아야 한다.
또 다른 하나의 사례를 들어보자면 에디슨이 발명한 축음기(grammaphone, 1877)도 미디어가 메시지라는 매클루언의 명제를 잘 설명하는 사례로 볼 수 있다.?이전에는 소리를 정신적인 현상으로 이해하였다.?인간의 언어나 음성은 어떤 정신적인 현상으로 간주되었다.?소리를 정신적인 현상으로 간주하는 한 그것을 기록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지만,헬름홀츠의 경우처럼 소리를 단순히 진동으로 파악함으로써 소리를 기록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다.?말하자면 축음기는 소리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이 변했음을 암시한다.?소리가 단순히 진동으로 간주되면서 이제 소음과 음의 구분은 급격하게 소멸되며,?음악 자체도 커다란 변화를 겪는다.
또 하나의 사례를 들어보자.?미술이론가 노먼 브라이슨(Norman Bryson)은 서양 근대회화와 전통적인 동아시아 회화의 차이를 매체의 차이에서 찾는다.?그에 따르면 유화는 소거적인 매체로서 매체 자체의 흔적을 지우는 투명한 매체임에 반해,?동아시아 회화는 매체 자체의 흔적을 드러내는 지시적 매체이다.?그는 매체의 차이가 두 그림의 세계관이나 양식적 차이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았다.
2.?디지털 세계는 가짜의 세계이다?
사람들은 디지털 기술은 세상의 거의 모든 복제가 가능한 복제기술이므로 현실을 대체할 수 있는 가짜를 만드는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고 경고한다.?물론 이러한 경고가 전혀 터무니없는 것은 아니다.?사진만 하더라도 그러하다.?우리는 자연적인 것(natural)이 아닌 인위적인 것을 표현할 때?‘합성’(synthesis)이라는 말을 많이 쓴다.?이때 합성이란 인위적으로 어떤 것들을 화학적으로 혹은 물리적으로 결합한 것을 의미하는데,?오늘날 디지털 시대에는 간혹 가짜라는 말의 대용어로 사용되기도 한다.?가령 디지털 사진이 나오기전까지만 하더라도 사진은 현실의 충실한 재현,?진정성 등을 암시하는 대표적인 미디어였지만,?오늘날 사진은 가짜나 변형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증명사진 또한?‘증명’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이러한 현실은 디지털 세계가 가짜의 세계를 만들 수 있다는 위험의 메시지일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위해서 사진의 예를 좀더 꼼꼼하게 살펴보자. 1839년 다게르에 의해서 발명된 것으로 공식화된 사진은?19세기 말에 이르러 사람들에게 널리 보급되었다.?일부 사람들에게 사진은 회화를 대체하는 새로운 매체로 각광받았지만,?결코 사진이 회화를 대체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사진과 회화가 다르다는 것이 분명하게 각인되기 시작하였으며,이때부터 오히려 회화는 사진과 명백하게 구분되는 경향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더군다나 사진이 예술로 인정받으면서 예술은 어떤 정신적인 것의 표현이라는 전통적인 예술관마저도 위협받게 되었다.?벤야민은 이러한 사실을‘사진의 작은 역사’라는 논문형태의 글에서 잘 설명하고 있다.?사진이 회화와 다른 점은 회화가 아무리 현실과 똑같은 이미지를 만들려고 해도 작가의 관점에 의해서 코드화되는 특성이 있는 반면,?사진은 작가가 사진속의 이미지를 모두 통제하려 해도 셔터만 누르면 자동적으로 현실세계를 복제한다는 점에서 코드화되지 않는 특성이 있다는 것이다.?이 점이 바로 사진을 진실한 미디어로 만드는 특성인 것이다.?말하자면 사진가가 사진속의 이미지를 통제,?즉 조작하거나 합성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그러나 디지털 사진의 경우에는 상황이 전혀 다르다.?디지털 사진은 얼마든지 합성될(synthesized)?수 있다.?그런 탓에 디지털 사진은 사진에서 진실성이라는 권위를 박탈시켰다고 할 수 있다.?그렇다면 과연 디지털 사진은 사진이 지닌 이 위대한 권위를 박탈시킴으로서 사진의 몰락을 가져온 것일까?
물론 아니다.?디지털 사진의 변형은 주로 레이어들을 중첩함으로서 이루어진다.?이른바 합성과정을 거치는 것이다.?이러한 합성이 그럴듯한 가짜 현실을 만들고 이를 현실처럼 착각하게 만드는데 사용되는 것일까??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디지털 사진은 합성을 통해서 진짜같은 가짜를 만들어 속이는 것을 목표로 하기 보다는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의 모습을 보여주고자 한다.?이를 칸트의 철학을 빗대서 표현하자면 디지털 사진이 세상에 대한 새로운 도식(scheme)을 창출함으로써 사람들에게 새로운 지식을 자극하는 것이다.
3.?진리란 변형가능한 것이다!
디지털 미디어의 가장 큰 특성은 변형가능성이다.?계속 예술의 경우를 들어 설명해보자면 디지털 이미지와 전통적인 회화 이미지의 가장 큰 차이는 디지털 이미지가 정보화된 이미지라는 점이다.?이는 타자기나 손으로 쓴 글씨와 디지털 워드프로세서로 쓴 글씨가 전적으로 다른 것과 마찬가지이다.?컴퓨터 모니터에 비친 글자는 손으로 쓴 글씨나 혹은 타자기로 찍은 글씨와 형태상으로는 크게 다르지 않지만 중요한 사실은 워드프로세서로 작성된 글씨는 정보화된(궁극적으로는?0과1로 이루어진 비트 단위로 기록된 데이터이다)?데이터이므로 얼마든지 변형이 가능하다는 것이다.?누군가가 컴퓨터 파일로 유서를 작성하였다면 그 진위는 매우 의심스러울 것이다.?필체를 흉내 내지 않고도 조작이 가능할테니까.
이렇게 변형이 용이하다는 것은 어떤 항구성이나 진실성의 상실을 의미하며 이는 우리의 소통에 대한 믿음의 상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디지털 미디어를 통한 소통이란 진정한 소통이 아니라는 수도 없이 반복되는 이 경고의 메시지는 너무나도 당연한 것은 아닐까??물론 변형이 용이하다는 말을 우리는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많이 들어보았겠지만,?백남준의 티브이 예술은 바로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사람들은 텔레비전을 수동적인 미디어로 생각하였다.?대중매체나 예술이 사람들을 획일화시키고 천박하게 만든다는 믿음처럼 이러한 생각은 광범위하고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다.?백남준의 텔레비전 예술은 이러한 믿음에 대한 저항이다.?매체이론가 엔첸스버거는 매우 간단한 조작을 통해서 수신기인 라디오는 송신기로 개조될 수 있다고 보았다.?수신장치나 송신장치는 원리상 동일하기 때문이다.
디지털 미디어는 소통의 형태를 정보전달에서 의사소통이라는 급진적 전환을 이루었다.?기존의 미디어(인쇄매체,?그리고 텔레비전과 같은 전기매체 등)에서 정보는 이미 만들어진 것으로 발신자가 수신자에게 정보를 전달하는 수단으로 간주되었으나,?인터넷과 같은 디지털 미디어는 대화자를 연결하는 인터페이스의 특성을 지닌다.?이와 맞물려 진리론 또한 대상이나 현실에 대한 참된 명제가 진리라는 대응설(correspondence)의 입장에서 소통과 합의에 의한 대화적 모델로 변경되는 경향이 있다.
독일의 매체 예술가이자 이론가인 바이벨(Peter Weibel)은 이러한 변화를 디지털 예술에 적용하여,?변형가능성을 전제한 디지털 이미지는 어떤 정태적인 상황에 대한 묘사를 거부하는 역동적인 이미지로 묘사한다.?흔히 디지털 예술에서 강조하는?‘상호작용’은 이러한 특성이 잘 구현된 것으로 볼 수 있다.?디지털 예술에서 작품은 예술가가 완벽하게 미리 완성하여 관객에게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정보가 아니다.?디지털 예술작품은 관객이 작품에 참여하고 자신의 몸을 개입시키고 작품을 변형시킴으로써 실현되는 일종의 인터페이스인 셈이다.?이는 마치 머드게임이 유저들을 연결시키는 하나의 인터페이스 역할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얼마 전, 큰 충격을 준 세월호 사고(2014.4.16)는 우리사회의 총체적 난국을 보여준 국가 시스템의 구조적인 부조리가 그대로 드러난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희생자 가족뿐만 아니라 결코 잊지 못할 국가적 재앙으로 국민 모두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세월호 사고는 분명히 인재였다.
사고의 근본적인 원인은 ‘자본의 논리에 입각한 경영체계’와 자본가와 국가가 결탁한 부산물이라고 볼 수 있다. 더구나 사고 수습과정에서 보인 정부의 태도를 보면 자본주의 모순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대대적인 시민단체가 연합하여 ‘세월호 참사 국민대책회의’를 꾸리고 국민들은 슬픔과 분노를 함께하며 ‘노란 리본달기 ’등으로 자발적 시민운동에 참여하고 있다. 그러나 정부에서는 사고원인에 대한 근본 대책을 마련하지 않고 해양수산부를 폐지하는 등 저급한 대중요법을 처방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6.4 전국동시 지방선거의 공식 선거운동이 시작되었다.
세월호 사태의 책임에서 자유로울 정치인은 없을 것이다. 정치인들은 세월호 사고를 선거 공세나 정쟁의 소재로 삼아 정치적 이득을 추구할 것이 아니라 반성과 성찰하는 자세로 이 문제를 바라봐야 한다.
국가는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보호해야 한다. 그럼에도 이번 세월호 사고는 국가의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
국민들은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담보하지 못한 진도 앞바다에서의 세월호 침몰 사고를 잊지 못할 것이다.
안산 단원고 2학년 학생들의 명복을 빈다. ‘미처 피워보지도 못한 꽃망울들아, 너무 미안하다.’
지리산 자락에 성심원이 있습니다. 한센인들이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수도자들과 수녀, 그리고 사회복지사들의 보살핌을 받으며 모여 살고 있는 곳입니다. 마을이 한창 번성할 때에는 한센인만 600여 명에 이르렀지만, 지금은 생의 끝에서 150여 명의 한센인과 수십 명의 장애인이 모여 함께 살아갑니다. 성심원이 있는 곳의 원래 지명은 ‘풍현마을’입니다. 뒤로는 지리산이 있고 앞으로는 경호강이 흐른답니다. 그리고 성심원 내의 그 어딘가에는 지리산 둘레길로 들어가는 오르막 길이 있습니다. 대성당 앞에는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벚나무가 있지요. 성심원의 옛모습을 보려면 조금은 가파른 지리산 자락을 잡고 올라가야 하지만, 이 벚나무는 성심원 입구에 있는 철선과 함께 성심원의 오랜 시간을 말해줍니다.
이 글들은 성심원에 계신 한센인들의 구술을 옮긴 것입니다. 그 분들의 삶은 좀 더 건강하고 좀 더 편안한 삶을 추구했던 비한센인들과 전체 국민의 안녕을 염려했던 정부 정책에 의해 훼손되고 소실되었지요. 그럼에도 그 분들은 가파른 지리산 자락에 몸을 숨기기도 하고 경호강물에 울음을 삼키기도 하면서 모진 세월을 견뎌 왔습니다. 이제 그 분들에게 남겨진 시간이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분들의 삶을 기억하고자 이 글들을 씁니다. 기억하는 이 없이 마치 처음부터 있지 않았던 사람들처럼 그렇게 그 분들을 떠나보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