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왜 스마트폰에 몰두하는가? <광진정보도서관 아주 사소한 물음에서 시작하는 철학>1

사람들은 왜 스마트폰에 몰두하는가??<광진정보도서관 아주 사소한 물음에서 시작하는 철학>1

박영욱(숙명여대 교수)

 

1.?스마트폰은 그저 흥미로운 첨단 기계이다?

1강-1스마트폰이 처음 상용화되었을 당시 사람들은 진화된 휴대폰이 등장하였다고 환호하였다.?사람들에게 스마트폰은 기존의 휴대폰과 달리 엄청난 기능을 지닌 기계로 인식되었지만 여전히 진화된 휴대폰으로 여겨졌다.?그러나 아이폰을 소개하면서 스티브 잡스는 그것을 단순히 하나의 새로운 기계가 아닌 새로운 사회를 알리는 메시지임을 강조하였다.?그에게 새로운 기계란 단지 새로운 물건이 아닌 그 이상의 것,?즉 새로운 세상을 의미하였다.

이는 캐나다 매체이론가 매클루언(Marshall McLuhan)의 말을 빌자면“미디어는 메시지이다.”라는 명제로 요약될 수 있다.?이 명제는 미디어가 메시지를 전달하는 수단이나 도구가 아닌 미디어 자체가 곧 메시지라는 말을 의미한다.?한 예를 들어보자.?영화라는 미디어를 예로 들자면,?가령 헝가리의 영화감독이자 이론가인 벨라 발라즈(Bela Balazs)는 사라진 인간의 얼굴 표정을 되찾아주었고 말하였다.?이 말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영화가 나오기 이전의 대표적인 미디어라고 할 수 있는 인쇄매체와 비교해보아야 한다.

또 다른 하나의 사례를 들어보자면 에디슨이 발명한 축음기(grammaphone, 1877)도 미디어가 메시지라는 매클루언의 명제를 잘 설명하는 사례로 볼 수 있다.?이전에는 소리를 정신적인 현상으로 이해하였다.?인간의 언어나 음성은 어떤 정신적인 현상으로 간주되었다.?소리를 정신적인 현상으로 간주하는 한 그것을 기록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지만,헬름홀츠의 경우처럼 소리를 단순히 진동으로 파악함으로써 소리를 기록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다.?말하자면 축음기는 소리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이 변했음을 암시한다.?소리가 단순히 진동으로 간주되면서 이제 소음과 음의 구분은 급격하게 소멸되며,?음악 자체도 커다란 변화를 겪는다.

또 하나의 사례를 들어보자.?미술이론가 노먼 브라이슨(Norman Bryson)은 서양 근대회화와 전통적인 동아시아 회화의 차이를 매체의 차이에서 찾는다.?그에 따르면 유화는 소거적인 매체로서 매체 자체의 흔적을 지우는 투명한 매체임에 반해,?동아시아 회화는 매체 자체의 흔적을 드러내는 지시적 매체이다.?그는 매체의 차이가 두 그림의 세계관이나 양식적 차이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았다.

 

2.?디지털 세계는 가짜의 세계이다?

사람들은 디지털 기술은 세상의 거의 모든 복제가 가능한 복제기술이므로 현실을 대체할 수 있는 가짜를 만드는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고 경고한다.?물론 이러한 경고가 전혀 터무니없는 것은 아니다.?사진만 하더라도 그러하다.?우리는 자연적인 것(natural)이 아닌 인위적인 것을 표현할 때?‘합성’(synthesis)이라는 말을 많이 쓴다.?이때 합성이란 인위적으로 어떤 것들을 화학적으로 혹은 물리적으로 결합한 것을 의미하는데,?오늘날 디지털 시대에는 간혹 가짜라는 말의 대용어로 사용되기도 한다.?가령 디지털 사진이 나오기전까지만 하더라도 사진은 현실의 충실한 재현,?진정성 등을 암시하는 대표적인 미디어였지만,?오늘날 사진은 가짜나 변형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증명사진 또한?‘증명’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이러한 현실은 디지털 세계가 가짜의 세계를 만들 수 있다는 위험의 메시지일까?

1강2-1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위해서 사진의 예를 좀더 꼼꼼하게 살펴보자. 1839년 다게르에 의해서 발명된 것으로 공식화된 사진은?19세기 말에 이르러 사람들에게 널리 보급되었다.?일부 사람들에게 사진은 회화를 대체하는 새로운 매체로 각광받았지만,?결코 사진이 회화를 대체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사진과 회화가 다르다는 것이 분명하게 각인되기 시작하였으며,이때부터 오히려 회화는 사진과 명백하게 구분되는 경향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더군다나 사진이 예술로 인정받으면서 예술은 어떤 정신적인 것의 표현이라는 전통적인 예술관마저도 위협받게 되었다.?벤야민은 이러한 사실을‘사진의 작은 역사’라는 논문형태의 글에서 잘 설명하고 있다.?사진이 회화와 다른 점은 회화가 아무리 현실과 똑같은 이미지를 만들려고 해도 작가의 관점에 의해서 코드화되는 특성이 있는 반면,?사진은 작가가 사진속의 이미지를 모두 통제하려 해도 셔터만 누르면 자동적으로 현실세계를 복제한다는 점에서 코드화되지 않는 특성이 있다는 것이다.?이 점이 바로 사진을 진실한 미디어로 만드는 특성인 것이다.?말하자면 사진가가 사진속의 이미지를 통제,?즉 조작하거나 합성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그러나 디지털 사진의 경우에는 상황이 전혀 다르다.?디지털 사진은 얼마든지 합성될(synthesized)?수 있다.?그런 탓에 디지털 사진은 사진에서 진실성이라는 권위를 박탈시켰다고 할 수 있다.?그렇다면 과연 디지털 사진은 사진이 지닌 이 위대한 권위를 박탈시킴으로서 사진의 몰락을 가져온 것일까?

물론 아니다.?디지털 사진의 변형은 주로 레이어들을 중첩함으로서 이루어진다.?이른바 합성과정을 거치는 것이다.?이러한 합성이 그럴듯한 가짜 현실을 만들고 이를 현실처럼 착각하게 만드는데 사용되는 것일까??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디지털 사진은 합성을 통해서 진짜같은 가짜를 만들어 속이는 것을 목표로 하기 보다는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의 모습을 보여주고자 한다.?이를 칸트의 철학을 빗대서 표현하자면 디지털 사진이 세상에 대한 새로운 도식(scheme)을 창출함으로써 사람들에게 새로운 지식을 자극하는 것이다.

 

3.?진리란 변형가능한 것이다!

디지털 미디어의 가장 큰 특성은 변형가능성이다.?계속 예술의 경우를 들어 설명해보자면 디지털 이미지와 전통적인 회화 이미지의 가장 큰 차이는 디지털 이미지가 정보화된 이미지라는 점이다.?이는 타자기나 손으로 쓴 글씨와 디지털 워드프로세서로 쓴 글씨가 전적으로 다른 것과 마찬가지이다.?컴퓨터 모니터에 비친 글자는 손으로 쓴 글씨나 혹은 타자기로 찍은 글씨와 형태상으로는 크게 다르지 않지만 중요한 사실은 워드프로세서로 작성된 글씨는 정보화된(궁극적으로는?0과1로 이루어진 비트 단위로 기록된 데이터이다)?데이터이므로 얼마든지 변형이 가능하다는 것이다.?누군가가 컴퓨터 파일로 유서를 작성하였다면 그 진위는 매우 의심스러울 것이다.?필체를 흉내 내지 않고도 조작이 가능할테니까.

이렇게 변형이 용이하다는 것은 어떤 항구성이나 진실성의 상실을 의미하며 이는 우리의 소통에 대한 믿음의 상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디지털 미디어를 통한 소통이란 진정한 소통이 아니라는 수도 없이 반복되는 이 경고의 메시지는 너무나도 당연한 것은 아닐까??물론 변형이 용이하다는 말을 우리는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많이 들어보았겠지만,?백남준의 티브이 예술은 바로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사람들은 텔레비전을 수동적인 미디어로 생각하였다.?대중매체나 예술이 사람들을 획일화시키고 천박하게 만든다는 믿음처럼 이러한 생각은 광범위하고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다.?백남준의 텔레비전 예술은 이러한 믿음에 대한 저항이다.?매체이론가 엔첸스버거는 매우 간단한 조작을 통해서 수신기인 라디오는 송신기로 개조될 수 있다고 보았다.?수신장치나 송신장치는 원리상 동일하기 때문이다.

디지털 미디어는 소통의 형태를 정보전달에서 의사소통이라는 급진적 전환을 이루었다.?기존의 미디어(인쇄매체,?그리고 텔레비전과 같은 전기매체 등)에서 정보는 이미 만들어진 것으로 발신자가 수신자에게 정보를 전달하는 수단으로 간주되었으나,?인터넷과 같은 디지털 미디어는 대화자를 연결하는 인터페이스의 특성을 지닌다.?이와 맞물려 진리론 또한 대상이나 현실에 대한 참된 명제가 진리라는 대응설(correspondence)의 입장에서 소통과 합의에 의한 대화적 모델로 변경되는 경향이 있다.

독일의 매체 예술가이자 이론가인 바이벨(Peter Weibel)은 이러한 변화를 디지털 예술에 적용하여,?변형가능성을 전제한 디지털 이미지는 어떤 정태적인 상황에 대한 묘사를 거부하는 역동적인 이미지로 묘사한다.?흔히 디지털 예술에서 강조하는?‘상호작용’은 이러한 특성이 잘 구현된 것으로 볼 수 있다.?디지털 예술에서 작품은 예술가가 완벽하게 미리 완성하여 관객에게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정보가 아니다.?디지털 예술작품은 관객이 작품에 참여하고 자신의 몸을 개입시키고 작품을 변형시킴으로써 실현되는 일종의 인터페이스인 셈이다.?이는 마치 머드게임이 유저들을 연결시키는 하나의 인터페이스 역할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왜 고상한 ‘존재’와 ‘무’가 아니고 흔해빠진 ‘있다’, ‘없다’인가?[철학을다시 쓴다]-28-4

왜 고상한?‘존재’와?‘무’가 아니고 흔해빠진?‘있다’, ‘없다’인가?[철학을다시 쓴다]-28-4

 

 

윤구병(도서출판 보리 대표)

 

*이 글은 보리출판사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료와 형상 이론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낱말이 있다면 그것은 가능태(可能態)와 현실태(現實態)라는 끔찍한 낱말로 번역된?‘뒤나미스(dynamis)’와?‘에네르게이아(energeia)’입니다.?죄송합니다.?갑자기 생전 듣도 보도 못한 도깨비 같은 낱말들이 마구 튀어나오기 시작하는데 이 낱말 설명을 먼저 합시다.?아리스토텔레스가 이야기하는?‘질료(質料)’라는 말은 그리스어로?‘힐레(hyle)’인데 이것은 본디 집 짓는 데도 쓰이고 배를 만드는 데도 쓰이는 나무,?곧 여러 용도로 쓰이는 목재라는 말에서 나왔습니다.?그리고?‘형상(形相)’이라는 말은 그리스어로?‘에이도스(eidos)’인데 이 말은?‘눈으로 본다’는 그리스 동사?‘에이도(eido)’에서 나온 것으로?‘본 것’, ‘모습’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그리고?‘가능태’라고 서툴기 짝이 없게 번역된?‘뒤나미스’는 그것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또는 무엇이 될 수 있는?‘힘’이라고 보면 됩니다.?다만 그것으로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이 될 수 있는지가 드러나지 않았다는 점에서 크게 보아 무규정적인 것[apeiron]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또?‘현실태’라고 번역된 말(이런 말을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쓰나요?), ‘에네르게이아’는 그리스 동사?‘에네르게오(energeo)’에서 나온 말로 무엇을?‘한다’는 동사의 뜻을 그대로 이어받아 무엇을?‘함’,?또는?‘작용’이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저라면 조금 무리를 해서라도 아리스토텔레스의?‘뒤나미스’를?‘됨’으로,?또?‘에네르게이아’를‘함’으로 번역하고 싶습니다만 주제넘은 것 같아서 이 이야기는 길게 하지 않겠습니다.)?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形而上學?:?형이상학??이건 또 무슨 개뼈다귀 같은 번역입니까??아리스토텔레스가 쓴?‘메타피지카(metaphysica)’라는 글은 본래 제목이 붙어 있지 않았는데 뒤에 로도스의 안드로니코스라는 사람이 아리스토텔레스가 남긴 글들을 정리하다가?‘피지카(physica)’,?곧?‘자연학’이라는 글 뒤에 이 글의 원고가 있었기 때문에 쉽게 그냥?‘자연학의 뒤에 있는 것’이라고 분류한 것이 그만 책 이름이 되었다는 것이 보통 하는 이야기입니다만 박홍규 선생님은 이 책 제목까지도 허투루 받아들이지 않고, ‘우리에게 이른바 형이상학(메타피지카)은 자연학(피지카)을 모르면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따라서 형이상학을 공부하려는 사람은 반드시 먼저 자연학을 공부하라는 뜻에서 자연학 뒤에 이 글이 붙어 있는 것이다.’라고 힘주어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을 저는 그냥 메타피지카라고 부르겠습니다.?이 메타피지카에 나오는 중심되는 낱말로?‘뒤나미스’와‘에네르게이아’를 든 까닭은 다른 데 있지 않고,?이 낱말들,?이 개념들을 통해서 플라톤의 형이상학과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사이에 가로놓인 거리를 재 보자는 뜻에서입니다.?그리고 이 일은 우리가 지금까지 이야기한 있는 것과 없는 것과 무규정적인 것이 이 철학계의 사부님들 머릿속에서 무엇으로 둔갑하는지를 아는 데도 큰 도움이 됩니다.”

이제 고백하지만,?이 강의들은 한두 시간에 한 것이 아니라 여러 날을 두고 한 것입니다.?학생들의 골을 빠개지 않고,?저도 숨가빠 헐떡거리지 않기 위해 쉬엄쉬엄 하는 것이 필요했다고 말하면 거짓말이 되겠지요.?옛 그리스 철학자들의 생각과 박홍규 선생님의 생각과 제 어쭙잖은 생각이 제 작은 머리통 속에 뒤범벅이 되어 있어서 이것을 풀어내는 데도 적잖은 시간이 필요했던 것입니다.?아무튼 저는 학생들에게 플라톤 철학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 어떻게 다른지를 설명하고,?피타고라스학파의 입에서 나온?‘끝(한계?: peras)’과?‘끝없는 것(무규정적인 것?: apeiron)’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어떻게 다르게 받아들여졌으며,?아리스토텔레스가 자기 철학 안에 노동(작업,?함?: energeia)을 받아들여 이것,?저것을 어떻게 쪼개고(분석하고),?울타리를 두르고(범주화하고),?빚어냈는지,?그리고 이 사부님들의 노력이 베르그송이라는 프랑스 형이상학자(?)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제가 알고 있다고 믿는 대로 이야기하고자 했습니다.?이런 생각이 얼마나 황당한 것이었는지는 앞으로 밝혀질 것입니다.?그러나 저에게도 할 말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박홍규 선생님 밑에서 정신 없이 휘둘리는 동안 마치 메피스토펠레스 손에 놀아난 파우스트처럼(비유가 너무 거창했나요?)?제 간덩이가 저도 모르게 한껏 부어올랐으니 말입니다.?존재론이라는 걸 이야기한다면서 이런 시덥지 않은 객담을 사이사이 시시콜콜 늘어놓는 걸 보면 저도 누구를 닮아 가는 모양입니다.

각설하고,?저는 학생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여러분,?이제 꽤 어려운 길에 접어들었습니다.?제가 샛길로 빠지거나 길을 잃거나 발을 헛디디지 않도록 여러분들이 믿는 분에게 두 손을 모으기 바랍니다.?단군 할아버지,?예수님,?부처님,?마호메트님,?조왕신,?호구마마 아무라도 좋습니다.

먼저 플라톤에게 덤벼 보기로 하지요.?제가 지금부터 하려는 이야기와 관련된 정보가 가장 많이 들어 있는 플라톤의 글은?〈티마이오스〉(Timaios :흔히?‘우주론’으로 번역됩니다.)입니다.?플라톤이 남긴 글은 대체로 몇 사람이 이야기를 주고받는 대화로 이루어져 있고,?주인공은 소크라테스로 되어 있는데,?이 글만은 거의 티마이오스라는 사람의 독백으로 이루어져 있고,소크라테스는 입도 벙긋하지 못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아마 이 글에 나오는 내용이 소크라테스가 평소에 입에 올리던 화제와는 너무도 달라서 짐짓 플라톤이 사부님은 한쪽으로 제쳐놓고 자기 이야기를 한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도 듭니다.?어쨌거나 이 글을 보면 데미우르고스(Demiourgos :이 이름은 그리스어 동사?demo[짓는다]를 의인화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라는?‘일하는 하나님’(?)이 나옵니다.?이 우주 밖에 사는 우주마왕은 머리를 짜내서 우리가 사는 이 우주를 만들어 내는데,?대충 스치면서 훑어보자면 이렇게 만들어 냅니다.?먼저 건축 자재가 있어야 하겠지요.?이 건축 재료가 무엇인지 압니까??놀라지 마십시오. ‘같은 것[tauton]’과?‘다른 것[heteron]’입니다.?왜 엠페도클레스처럼 우주를 이루는 네 개의 원소[原素?:?이 말도 사실 그리스어로는?‘맨 처음 것’이라는 뜻을 지닌?‘아르케(arche)’나?‘뿌리’, ‘근원적인 것’의 뜻을 지닌?‘리조마타(rhizomata)’를 멋대가리 없이 번역해 놓은 것입니다.]인 물,?불,?공기,?흙 같은 것으로 만들지 않고 추상적이기 짝이 없는?‘같은 것’, ‘다른 것’?따위로 만들겠다고 설쳤느냐고요??잠깐!?여기에는 그만한 까닭이 있습니다.?그리고 네 개의 원소 이야기는 나중에 또 나옵니다.?앞에서 우리는?‘같다’, ‘다르다’는 말이 논리적으로 참과 거짓을 가리는 문장에서는?‘이다’, ‘아니다’와 같은 뜻으로 쓰이며, ‘이다’, ‘아니다’를 뒷받침하는 근거는 바로?‘있다’, ‘없다’에 있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이 말을 실마리 삼아 플라톤이?‘같은 것’과?‘다른 것’이라는 말로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제 나름대로 한번 미루어 짐작해 보기로 하지요.”

윤구병 그림 1-7

“자,?이제 그림?7을 다시 한 번 보기로 할까요??있는 것과 없는 것이 서로 맞닿자마자 그 사이에 줄을 서기 시작한 그 한없이 많은 괴물들 말입니다.?이 괴물들은 모두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무규정적인 것이라는 점에서 겉모습은 같아 보입니다만 꼼꼼히 얼굴을 뜯어보면 하나도 같은 것이 없습니다.?마치 하나의 기타 줄에 숨어 있는 소리가?‘숨어 있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을지라도 짚어 가면서 튀겨 내면 저마다 다른 소리로 떠오르는 것과도 같습니다.?그러나 기타 줄에 숨어 있는 소리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나,?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차례차례 짚어 가면서 튀겨 내면 높은 소리에서 낮은 소리에 이르기까지 질서 있게 배열되어 있듯이,?무규정적인 것도 그것이 있는 것과 없는 것 사이의 어느 자리에 있느냐에 따라?‘있는 것과 맞닿아 있는 놈’, ‘그 다음 놈’, ‘그 다음 놈’,?……?‘있는 것’과 가장 멀리 떨어져 있고‘없는 것’에 맞닿아 있는 놈’─이렇게 순서에 따라 이름을 붙일 수 있습니다.다시 말해서 무규정적인 것의 무규정성에는 단계가 있다는 뜻입니다.?있는 것 쪽에서 보면 자기와 맞닿아 있는 놈이 가장 자기와 같은 것이고 없는 것에 맞닿아 있는 놈이 자기와 가장?‘다른 것’이고,?거꾸로 없는 것 쪽에서 보면 자기와 맞닿아 있는 놈이 가장 자기와?‘같은 것’,?있는 것과 맞닿아 있는 놈이 가장 자기와?‘다른 것’입니다.?그러니까 무규정적인 것에는 있으나 다름없는 것에서부터 없으나 다름없는 것에 이르기까지 별의별 놈이 다 있는데 있는 것을 기준으로 삼으면?‘있음으로 거의 꽉 차 있는 놈’, ‘있음이 조금 빠져 있는 놈’, ‘조금 더 빠져 있는 놈’?……?‘있음이 거의 다 빠져 나간 놈’으로 짚어 나갈 수 있고,?없는 것을 기준으로 삼으면?‘있으나마나 한 놈’, ‘있음이 조금 들어간 놈’, ‘있음이 조금 더 들어간 놈’?……?‘거의 있음으로 가득 차 있는 놈’으로 이름 붙일 수 있습니다.?여러분,?우리가 첫머리에서?‘없는 것이 있다.’는 말이?‘빠진 것이 있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고 이야기한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또 어떤 신혼부부가 살림살이를 장만하는데 남편이 이것저것 사들이다가 아내를 돌아다보면서?‘여보,?이제 없는 것이 뭐지?’?하고 물었을 때 아내가?‘어제까지만 해도 없는 것이 많았는데 이제 빠진 것이 거의 없는 것 같아요.’라고 대답한다면 이 말에도 같은 뜻이 담겨 있습니다.”

 

미디어 오디세이는 미디어의 역사다 [보고듣고생각하기]

미디어 오디세이는 미디어의 역사다:?김동민이 쓴?『미디어 오디세이』

 

나태영(한철연 회원)

 

 

강준만과 김동민

강준만은 무림고수이다.?강준만은 실명비판 대명사이다.?강준만은 공정한 평가를 추구한다.?무림고수 강준만한테 뼈도 뭇 추린 인간들이 많다.?강준만은 비판만 하지 않는다.?칭찬도 한다.?강준만한테 칭찬 들을 정도인 사람은 지성인이다.?강준만은 이 책?『미디어 오디세이』를 쓴 김동민을 칭찬한다.?자신은 글만 쓰는 데 김동민은 글도 쓰고 실천도 한다고 칭찬한다.?강준만은 김동민을 부러워 한다.?강준만이 부러워 하는 김동민 사상을 차분하게 들여다 보자.

미디어 오디세이는 미디어의 역사다

이 책 내용을 두 문장으로 줄이면?‘미디어 오디세이는 미디어의 역사다.’(16쪽)?‘미디어의 역사는 역사 속의 미디어를 조망하는 것이어야 한다.’(17쪽)란 문장이다.?언론학자 김동민이 이 책에서 역사를 다루는 이유는 당연하다.?역사를 다루지 않고 언론사를 다룰 수 없다.?언론사를 다루지 않고 언론에 대해 말 할 수 없다는 게 김동민이 주장하는 말이다.?이 책은 우선 대학 언론학 교재로 쓰려고 만들었다고 김동민은 말한다.?이 책에서는 한국 대학,?특히 한국 언론학과가 지니고 있는 문제를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한국 언론학과가 지닌 문제를 해결해 보려는 뜻에서 김동민이 이 책을 썼다고 나는 생각한다.

‘내가 대학을 다닐 때는 한국 언론사도 배우고 세계 언론사도 배웠다.?그러나 세계 언론사는 언제부턴가 종적을 감췄고 한국 언론사만 남았다.?그마저도 가르치지 않는 대학도 있고,?언론사 전공자는 찾아보기 어렵다.?대학이 상업주의에 물들어 기업처럼 운영되는 현실에서 역사교육을 소홀히 하는 풍토가 언론학계에도 만연해 있다.?미디어가 인류 공동체 속에서 생성되고 인류사회를 변화시켜온 역사를 모르고 미디어를 공부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7쪽)

대학을 거부하는 학생이 있다.?김예슬이 대학을 거부했다.?다니던 대학을 그만 두었다.?그리고?『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 둔다,?아니 거부한다.』란 책을 썼다.?물론 대학 다니기를 거부하는 사람들 수는 극소수이다.?대한민국 사회에서 대학 나오지 않고 살아가기 힘들기 때문이다.?대학총장,?대학교수들,?대학생들 분발을 기대한다. ‘대학이 상업주의에 물들어 기업처럼 운영되는 현실’을 비판하는 김동민 말이 큰 울림을 준다.

한국언론사와 한국역사를 왜 공부해야 하는지 우리는 다음 글에서 알 수 있다.?이 땅에서 서재필이 과대평가 받았다.?우리는 서재필을 있는 그대로 평가할 필요가 있다.

‘미국인 신분의 서재필을 선택한 데서 오는 한계도 명백하다.’ ‘고종은 서재필에게’ ‘연봉으로?3천?5백환을 책정해주었다.?당시 소?1마리가?20원?40원이었으니 소?100마리 가격이 넘어 지금 가격으로?1마리에?2백 만원만 치더라도 연봉?24억 원이 된다.’ ‘나라가 어려워지자 남은 기간의 급여를 한꺼번에 받아 미국으로 돌아간 것만 보아도 그의 진정성을 의심할 만하다. <독립신문>의 한계는 창간주체의 한계인 동시에 서재필의 한계다.’ ‘서재필은 자신이 미국인임을 늘 강조했다.?제국주의 미국이 조선에서 이권을 강탈해가는 현실을 옹호하는 입장이었다.?심지어 미국이?1896년?3월 일본에?1백만 달러를 받고 이권을 팔아넘긴 경인철도 부설권,?평안북도 운산금광 채굴권(1896년?4월)의 강탈에 대해서도 환영하였다. “속마음을 의심할 필요가 없는 나라와 맺은 것이며 지금까지 어느 열강과 맺은 조약보다 유리한 계약”(The Independent, 1896. 4. 16.)이라는 것이다.’ ‘1898년 당시 그의 출국을 만류하는 독립협회 회원들에게 보낸 답장에는 조선 정부를?‘귀 정부’(貴 政府)라고 칭했다.(<독립신문>, 1898. 5. 5.).’(182, 183쪽)

김동민은 통섭형 학자이다

미디어 오디세이뒤풀이 자리에서 김동민이 자신은 맑스주의자라고 말했다.?그래서 그런지 이 책에서 칼 맑스 목소리가 언뜻 언뜻 들린다.?지금 정치학과 경제학이 쪼개졌다.?정치경제학으로 합쳐질 필요가 있다.?이 땅에서 경제문제는 중요하다.?하지만 경제정책을 만드는 곳은 국회이다.?경제전문가와 정치가는 대화를 많이 해야 한다.?일반인들도 정치뿐만 아니라 경제 공부도 열심히 해야 한다.

‘오늘날의 미디어의 진화와 자본주의의 등장 및 전개와 긴밀한 관련을 맺기 때문에 정치경제학의 관점은 필수적이다.’(6쪽)

‘자본주의를 사는 우리는 자본주의의 생산관계를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언론학의 입장에서는 연구대상인 언론매체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작동하기 때문에 그 원리를 이해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자본주의 사회의 원리를 배제한 상태에서 미디어와 커뮤니케이션 현상만을 관찰해서는 그마저도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역사연구도 예외일 수 없다.?매스미디어 시대를 연 신문만 하더라도 그것은 상품으로 존재하며,?그 내용은 상품성을 추구한다.상품으로서의 신문을 규명하는 것이 기본이다.?마르크스는 상품을 세포에 비유했다.’(135쪽)

‘세포가 단백질로 구성되어 있듯이 상품은 자연의 물질로 구성된다.?자연에서 얻은 재료 및 노동도구 등(생산수단)을 확보한 자본과 인간 노동력의 지출(노동)이 결합하여 상품이 된다.?그래서 상품의 핵은 상품에 체화된 노동이다.?상품은 자연에서 얻은 물질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핵은 노동이라는 것이다.’(136쪽)

김동민은 언론학,?역사학,?철학,?정치경제학 고수이다.?아이엠에프(외환위기)?사태에 대해서 핵심체크 해주는 김동민 내공 대단하다.

‘외환위기 가운데 김대중 정부가 탄생했다.?김대중 정부는?IMF의 요구대로 거시경제 안정화 정책,?강력한 긴축정책,?금리의 대폭 인상, “외국인투자 촉진법”?제정 등을 시행에 옮겼다.?그러나 실물경제가 침체되면서 금리를 인하하자 주식투자로 돈이 몰렸다.?정부는 거시경제 안정화 정책 차원에서 구조조정을 실시했다.?금융산업 구조조정으로 규제철폐,?외국인 투자한도 폐지,?부동산 시장 전면 개방,?모든?M&A(인수합병)?허용,?외환거래 자유화 조치,?기업 구조조정으로 기업경영의 투명성 제고,?선진국 수준의 재무구조 추진,?핵심업종 중심의 강한 기업 유도,?계열회사 간 빚보증 관행 불식,책임경영,?노동시장 구조조정으로 정리해고제,?근로자파견제,?노사정위원회,?공공부문 구조조정으로 공기업 민영화 등이 추진되었다.?이로 인해?KT가 정부기구로부터 독립하여 민영화되었고, SK텔레콤,?포스코,?삼성전자 등 기업의 외국인 지분율이 상승했다.’(298쪽)

‘모든 신흥공업국의 은행들이 위기를 맞을지도 모른다.?이러한 불안이 심화되면 일본의 은행들도 위기를 맞을 가능성이 있다.?이렇게 될 경우 금융체계에 미치는 결과는 매우 심각할 것이다.?각국의 중앙은행들은 우애를 발휘하여 은행 간 자금시장에서 커다란 문제들(한국의 금융위기로부터 비롯되어 파급되는)이 일어나는 사태를 방지하는 데 시급히 만전을 기해야 한다.그러나?<조선일보>는?8월?21일자?“불안하지만 위기상황 아니다”라는 사설에서?“외환시장이 살얼음판을 걷고 있으나?‘외환위기’라는 표현을 써야 할 만큼 심각한 조짐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고 보도했다. <조선일보>는 다음날에도?1면 머리기사로?“한국 성장률 높아진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올렸다.’(297쪽)

조선일보는 아이엠에프 사태 예측을 제대로 못했다.?오히려 예측하지 못하도록 사실을 왜곡했다.?그런 조선일보가 반성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여전히 조선일보는 사실 왜곡하는 짓을 계속하고 있다.?조선일보는 친일파 신문이다.?친미파 신문이다. 1프로 종 역할 하는 신문이다. 1프로한테서 광고 받으려고 안달하는 신문이다.?조선일보는 다뤄야 할 것은 다루지 않는다.?부산 한진중공업으로 김진숙 만나러 가는 희망버스 다루지 않았다.?아니다.?조선일보는 신문이 아니다.?조선일보는 수구 언론기관일 뿐이다.?조선일보가 끄트머리 언론기관이 되어야 한다.?김동민은 조선일보 안 보기 운동을 현장에서 실천한 실천가이다.?이 책이 널리 읽혀 조선일보가 끄트머리 언론기관이 되길 기도한다.

이 책은 미디어 역사를 다룬다.?동서양 역사를 다룬다.?동서양 철학을 다룬다.?한국근현대사를 다룬다.?다루는 내용이 다양하다.?내용이 실하다.?이 책 한 권을 다 이해한다면 대단한 실력 소유자가 될 것이다.?그렇다고 해서 이 책이 어렵지만은 않다.?대체로 글이 쉽다.?동서양 철학 다루는 부분과 칼 맑스 철학 다루는 부분이 일반인이 보기에 조금 어려울 뿐이다.?이 세상 언론문제에 울분을 토하는 사람들이 읽기에 맞춤한 책이다.?지적 욕구가 높은 사람들이 읽기에 맞춤한 책이다.?여럿이 모여서 함께 읽고 토론하기에 맞춤한 책이다.?대학 언론학과 교재로 맞춤한 책이다.?벌써 세 대학에서 이 책을 대학교재로 쓰고 있다.(2014년 현재)

 

왜 고상한 ‘존재’와 ‘무’가 아니고 흔해빠진 ‘있다’, ‘없다’인가?[철학을다시 쓴다]-28-3

왜 고상한?‘존재’와?‘무’가 아니고 흔해빠진?‘있다’, ‘없다’인가?[철학을다시 쓴다]-28-3

 

 

윤구병(도서출판 보리 대표)

 

*이 글은 보리출판사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없는 것과 관련해서 저는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기 있는 이 교탁이 보이지요??이 교탁은 크기가 있습니다.?그런데 크기가 있는 것은 모두 쪼개질 수 있다고 했지요??이제부터 우리 머릿속에 있는 칼날로 이 교탁을 한번 쪼개 봅시다.?쪼개고 또 쪼개고……?한없이 쪼개지지요??이제 잠깐만 칼날을 멈추세요.?그리고 생각해 봅시다.?왜 이렇게 크기를 가진 것은 한없이 쪼개질 수 있지요??왜 우리는 크기가 있는 것은 무한히 쪼갤 수 있다고 생각할까요??쪼개고 또 쪼개도,?크기가 있는 한,?우리의 의식 속에 있는 칼날이 무디어지지 않는 까닭은 어디에 있을까요??우리가 쪼개는 작업은 물리학으로 말하면 작용입니다.?이렇게 무한히 계속되는 작용에 아무런 반작용도 하지 않고 작용을 받아들이기만 하는 이 신기한 것은 무엇일까요??순수하게 수동성만 지니고 있는 이 신기한 것,?크기를 가진 것 속에 숨어 있는 이것,?바로 이것이 없는 것입니다.?없는 것만이 아무 저항도 하지 않습니다.?있는 것은 쪼개지지 않습니다.(있는 것에 작용을 하면,?작용도 있는 것이므로 있는 것과 하나가 되어 버립니다.)?좀 어려운 말이기는 하지만 저는 없는 것을 순수하고 절대적인 수용 가능성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이쯤 해 두고 이제 쪼갤 때 생기는 다른 현상을 살펴보기로 할까요?크기를 가진 것은 아무리 쪼개고 또 쪼개도 크기가 아예 없어져 버리지는 않습니다.?그러면 아무리 작용을 해도 끝끝내 그 작용에 맞서서 저됨(자체성)을 잃지 않는 것은 무엇일까요??있는 것만이 저됨을 잃지 않습니다.?있는 것이 저됨을 잃고 바뀌면 없는 것이 되어 버립니다.?그러나 있는 것은 없는 것이 될 수 없고,?없는 것도 있는 것이 될 수 없습니다.?다시 말해서 끝끝내 저됨을 잃지 않고 지키는 것은 크기 속에 있는 있음의 측면입니다.?여기에서 우리는 하나의 결론을 이끌어 낼 수 있습니다.?그것은 크기를 가진 것은 모두 그 안에 순수 수동성과 자기 동일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곧 크기 속에는 있음과 없음이 함께 있다는 것입니다.?우리는 이제까지 있는 것과 없는 것은 한 자리에 있을 수 없다고 배웠습니다. ‘여기에 분필이 있다.’고 말하면서 동시에?‘여기에 분필이 없다.’고 말하면 저는 모순된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그러므로 크기 안에 있음과 없음이 함께 있다고 하는 것은 우리가 보는 이 교탁에 모순이 있다는 말이고,?이 말을 넓히면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 모순이 있다는 말이 됩니다.?그리고 우리의 생각은 이 세상에 있는 모순을 반영해서 있는 것도 파악하고 없는 것도 파악하여?‘있다’, ‘없다’는 말을 밥 먹듯이 할 수 있다는 말이 됩니다.”

이렇게 해서 저는 없는 것을 받아들여?‘없는 것이 있다.’는 말을 거짓에 이르는 함정이 아니라 세상살이와 주고받는 이야기와 그 말들을 뒷받침하는 우리 생각에 꼭 필요한 것으로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저는 칠판에 다음과 같은 두 개의 그림을 그렸습니다.

윤구병 그림 1-4

 

윤구병 그림 1-5

그리고 학생들에게 설명하기 시작했습니다.(여기에서 고백할 말이 있습니다.?그것은 이 그림은 제가 생각해 내서 그린 것이 아니고 제 스승인 박홍규 선생님이 그려 주신 것을 본딴 것이라는 사실입니다.?물론 그분은 있는 것,없는 것이라는 말 대신에 존재와 무라는 말을 썼습니다만.)

“앞의 그림?4를 보십시오.?보다시피 있는 것과 없는 것이 함께 있습니다.?이 세상에 처음으로 모순이 선을 보인 것입니다.?여럿〔多〕의 최소 단위인 둘〔2〕은 이렇게 모순과 함께 태어납니다.?있는 것과 없는 것 사이에 있는 금〔line〕에 주의를 기울여 주십시오.?앞에서 했던 질문과 꼭 같은 질문을 하겠습니다.?이 금은 있는 것에 속하는 것입니까??없는 것에 속하는 것입니까?”

“있는 것이요.”

어떤 학생이 대답했습니다.

“그럴까요??그렇다면 금도 있는 것이므로 이 그림의 왼쪽 칸에 있는 있는 것에 달라붙어서 있는 것과 하나가 되어 버려 금 구실을 못 하게 되고,?그에 따라 없는 것은 없어져 버리게 되겠네요.”

“그럼,?없는 것에 속하겠네요.”

다른 학생이 잽싸게 대답했습니다.

“그럴까요??그렇다면 금도 없는 것이므로 오른쪽 칸에 있는 없는 것과 구별이 안 되어 금 구실을 못 하게 되겠네요.?그리고 그 결과 없는 것만 남게 되어 있는 것은 없어져 버리게 되겠는데요.”

그러면서 저는 칠판에 금을 잔뜩 그어서 한 번은 없는 것을 뭉개 버리고 또 한 번은 있는 것을 뭉개 버렸습니다.

윤구병 그림 1-6

“이렇게 되면 곤란하지요??그러니까 달리 한번 생각해 봅시다.?있는 것과 없는 것을 갈라 주는 금은 동시에 있는 것과도 떨어져 있어야 하고 없는 것과도 떨어져 있어야 하므로 있는 것도 아니고,?없는 것도 아닌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그리스 철학에서 아페이론(apeiron)이라고 부르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아페이론은?‘규정할 수 없는 것〔indefinite〕’이고?‘한계가 없는 것〔infinite〕’입니다.?피타고라스가 그처럼이나 중요하게 여겼던 페라스(peras), ‘한계’, ‘끝’의 반대말이 바로 이것입니다.?여기에서 잠깐 옆길로 들어서서 페라스,?곧 한계이자 끝이라는 말이 어떤 뜻을 지니고 있는지 살펴봅시다.?아다시피 피타고라스는 페라스가 하나뿐인 것을 점〔point〕으로 규정했습니다.?두 개인 것을 선으로 보고,?세 개인 것을 면〔plane〕,?곧 삼각형으로 보고,?네 개인 것을 입체로 보았습니다.?그러니까 이렇게 됩니다.

●─점?●●─선?●●─면?●●─입체(세 개의 점 위에 점을 하나 올려놓은 것).?피타고라스가?1, 2, 3, 4라는 숫자를 그처럼이나 애지중지하고?1+2+3+4에서 나온?10이라는 숫자를 신성하게 여긴 것은 우리가 감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이 세상 모든 것은 점이나 선이나 면이나 입체로 되어 있어 이 네 개의 숫자 속에 우주의 구성 원리가 담겨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사실 이 끝이라는 낱말(개념)은 아주 중요합니다.?우리가 어떤 것을 보고 그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은 그것의 끝을 보기 때문입니다.?이를테면 여기 있는 이 교탁을 여러분은 눈으로 보고 있는데,?여러분의 망막에 나타나는 것은 이 교탁의 끝,?다시 말해서 이 교탁이 끝나는 표면입니다.?겉모습이지요.?우리는 투시력을 지니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이 교탁의 속을 꿰뚫어 볼 수 없습니다.?우리는 늘 어떤 것이 그것이 아닌 것과 만나는 한계를 보고 그것이 무엇인지를 압니다.?다른 예를 하나 더 들지요.?여기 칠판이 있는데,?여러분이 이 칠판에 아주 가까이 서서 이 칠판 안쪽에 있는 어느 지점만을 볼 때는 그것이 칠판인지 아닌지 잘 모릅니다.?멀찌감치 떨어져서 이 칠판의 테두리까지 보아야만 비로소 이것이 칠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끝이 얼마나 중요한지 보기를 하나만 더 들겠습니다.?기타를 가지고 있는 학생 없습니까??좋습니다.?여기에 기타 줄이 하나 있습니다.?이 줄은?50센티미터쯤 되어 보이는데 이 줄 속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무한한 끝이 숨어 있습니다.?기타를 잘 치는 사람은 이 숨어 있는 끝〔peras〕?가운데 자기가 바라는 끝을 아주 잘 찾아냅니다.?손가락으로 줄을 길게 또는 짧게 짚고 튀길 때마다 서로 다른 소리가 들리는데 그 까닭은 이 기타 줄에 숨어 있는 끝이 저마다 다른 소리의 특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우리는?‘끝이 없는 것〔apeiron〕’은 그것이 무엇인지 알 길이 없어집니다.?무엇인 것도 아니고 무엇이 아닌 것도 아닌 것,?더 정확하게 말해서 있는 것도 아니고,?없는 것도 아닌 것은 끝이 없는 것입니다.?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런 것을 규정할 수 없는 것,?끝도 갓도 없는 것,?한없는 것이라고 부릅니다.”

윤구병 그림 1-5

“자,?이제 그림?5를 다시 한 번 봅시다.?이것을 당구공이라고 합시다.?있는 것은 하얀 공을 가리키고 없는 것은 빨간 공이라고 칩시다.?보다시피 이 당구공 둘은 서로 맞닿아 있습니다.?둘이 붙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붙어 있으면 하나가 되어서 뗄 수가 없지요.?그렇다고 떨어져 있는 것도 아닙니다.?떨어져 있으면 이 두 당구공은 서로 독립되어 있어서 관계를 맺지 못합니다.다시 말해서 모순을 일으키지 않습니다.?문제는 이 두 개의 공이 서로 맞닿아 있다는 데 있습니다. ‘서로 맞닿아 있다.’는 말을 수학에서는 탄젠트(tangent),?곧 접선(接線)이라는 낱말을 써서 나타냅니다.?이 탄젠트라는 말은 라틴어 탄게레(tangere)에서 유래한 말인데?‘닿는다’, ‘만진다’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영어의 콘택트(contact)도 어원이 같습니다.?함께〔con〕+닿아 있는 것〔tactus〕이 콘택트이지요.?같은 어원에서 나온 말로는 영어에 컨틴젠시(contingency)라는 낱말이 있습니다.?프랑스어로는 콩텡장스(contingence)이지요.?그런데 이 낱말의 뜻을 살펴보면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연’, ‘우연성’, ‘우발성’이 이 낱말의 뜻입니다.그러면 맞닿아 있다는 말이 어떻게 해서 우연을 가리키는 말로 탈바꿈했을까요??우리는 존재론의 영역에서 맨 처음 나타나는 두 괴물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이며 이 둘이 몸을 맞대서 모순을 일으키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이 두 괴물이 서로 몸을 맞대야 할 아무런 필연적인 까닭이 없습니다.우리는 있는 것이 없어지는 것,?다시 말해서 있는 것이 없는 것이 되는 것을 보통 사라진다,?파괴된다고 말하고,?거꾸로 없는 것이 새로 생겨나는 것,?다시 말해서 없는 것이 있는 것으로 바뀌는 것을 생겨난다,?창조된다고 말하는데,?엄밀하게 말하자면 있는 것은 있는 것이고 없는 것은 없는 것이어서 있는 것이 없는 것이 되거나,?없는 것이 있는 것이 되는 일은 결코 없습니다.정확하기로 소문이 난 물리학자들도 아예 아무것도 없는 것에서 무엇인가 있는 것이 생겨난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무엇인가 새로운 것이 나타난다면 이미 있는 것,?아원자나,?원자나 분자의 수가 늘어나거나 줄어들거나 자리를 바꾸기 때문에 그렇게 된다고 이야기합니다.?만일에 정말 있는 것이 없는 것으로 되거나 없는 것이 있는 것으로 바뀐다면,?이런 사태는 우리가 머리로 이치를 따질 수 없다는 점에서 그야말로 우연입니다.?기독교의?‘하나님’이 무(無)로부터〔ex nihilo〕?이 세상을 창조한 것〔creatio〕이 우연이듯이.?하나님이 무에서 다른 세상을 창조해 내지 않고 왜 우리가 살고 있는 이런 세상을 만들어 냈는지 그야말로?‘하나님’만이 아는 일,?다시 말해서 아무도 모르는 일입니다.”

“처음 이야기로 되돌아가서 맞닿아 있는 당구공 두 개를 다시 살펴봅시다.있는 것이라는 흰 당구공과 없는 것이라는 빨간 당구공이 맞닿아 있는 점을 우리는 접점이라고 부릅니다.?접촉하고 있는 점〔point〕이라는 뜻이지요.?이 접점은 있는 것에 속하지도 않고 없는 것에도 속하지 않는 것이라는 점에서?‘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것’이라는 말은 앞에서 했습니다.실제로 당구장에서 맞닿아 있는 두 개의 당구공이 붙었다 떨어졌다 해서 그 사이를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실금 같은 공간이 있어 보이기도 하고 없어 보이기도 해서 종잡을 수 없는 것처럼 이?‘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것’(규정할 수 없다는 점에서 앞으로는 무규정적인 것이라고 부르겠습니다.)은 어떤 때는 있는 것과 붙어 있어서 있다고 할 수 있는 것〔可能的 存在〕이 되는가 하면,?또 어떤 때는 없는 것과 붙어 있어서 없다고 할 수 있는 것〔可能的 無〕이 되기도 합니다.?다시 말해서 무규정적인 것〔apeiron〕은 있는 것과 없는 것 사이에서 끊임없이 흔들리고 있고,?그런 점에서 운동하고 있는 것입니다.?이제 그림을 다시 하나 그려 보겠습니다.”

윤구병 그림 1-7

① ㄱ에서 점점 있는 것에 가까워지고 있는?ㄱ′,?ㄱ′′,?ㄱ′′′ ……

② ㄱ에서 점점 없는 것에 가까워지고 있는?-ㄱ′, -ㄱ′′, -ㄱ′′′ ……

저는 칠판에 위와 같은 그림을 그렸습니다.(이 그림과 비슷한 것을 우리에게 그려 보여 주신 분도 박홍규 선생님이었습니다.)

“자,?보십시오.?있는 것과 없는 것이라는 두 괴물이 서로 나란히 몸을 맞대자마자(관계를 맺자마자)?곧 두 괴물 사이를 갈라놓는 세 번째 괴물(무규정적인 것)이 나타나고 이 세 번째 괴물이 나타나자마자,?첫 번째 괴물과 세 번째 괴물 사이를 갈라놓는 또 하나의 괴물(있는 것과 최초의 무규정적인 것 사이에 들어 이 둘을 구별해 주는?‘있는 것 쪽으로 한 걸음 더 다가선 무규정적인 것’ : apeiron?ㄱ′)이 나타났습니다.?그리고 동시에 두 번째 괴물과 세 번째 괴물 사이를 갈라놓는 또 하나의 괴물(없는 것과 최초의 무규정적인 것 사이에 들어 이 둘을 구별해 주는?‘없는 것 쪽으로 한 걸음 더 다가선 무규정적인 것’ : apeiron -ㄱ′?)이 나타났습니다.?그리고 같은 방식으로 한없이 많은 괴물들(ㄱ′,?ㄱ′′,?ㄱ′′′ ……-ㄱ′, -ㄱ′′, -ㄱ′′′)이 있는 것과 없는 것 사이에 들어섰는데 이것들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것,?곧 무규정적인 것이라는 점에서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으나 자세히 살펴보면 서 있는 자리에 따라 저마다 다른 특성을 지니고 있습니다.?보기를 들어 설명하지요.?이?50센티미터 남짓한 기타 줄 안에는 무한히 많은 소리들이 숨어 있어서 이 줄의 어느 지점을 짚고 줄을 튀기느냐에 따라 저마다 다른 소리가 날 수 있는 것도 같은 이치입니다.?기타 줄에 숨어 있는 무한히 많은 소리들은 아직은 울려 퍼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무규정적인 소리들입니다.?다른 보기를 들어 설명해도 마찬가지입니다.?한 무더기의 진흙 속에는 그것을 빚어서 찻잔을 만들 수도 있고,?벽돌을 만들 수도 있고,?화분에 담아 꽃을 키울 수도 있다는 점에서 무한히 많은 것이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이야기가 나온 김에 오해가 생기지 않도록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을 빌려서 이 문제를 조금 더 설명하고 넘어가겠습니다.”

 

왜 고상한 ‘존재’와 ‘무’가 아니고 흔해빠진 ‘있다’, ‘없다’인가?[철학을다시 쓴다]-28-2

왜 고상한?‘존재’와?‘무’가 아니고 흔해빠진?‘있다’, ‘없다’인가?[철학을다시 쓴다]-28-2

 

 

윤구병(도서출판 보리 대표)

 

*이 글은 보리출판사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자,?자,?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아들었어요.?그러나 지금 우리가 따져 보려는 건 어느 낱말의 울타리 속에 더 많은 것들이 들어가느냐가 아니고 낱말이 지닌 틀이 어떻게 달라지는가이니까,?잠깐 마음을 가라앉히고 조금만 더 제 이야기를 들어 보세요.?제가 알고 싶었던 건?‘있는 것’이라는 낱말이 그 안에 담길 수 있는,?더 그릇이 큰 낱말이 따로 있느냐는 것입니다.?그러니까?‘사람’보다는?‘동물’이 더 그릇이 큰 낱말이고, ‘생물’보다는?‘있는 것’이 더 그릇이 크지요??그럼?‘있는 것’?다음에?‘있는 것’까지 담을 수 있는 더 그릇이 큰 낱말이 있나요,?없나요?”

“글쎄요??없는 것 같은데요.”

학생들의 시큰둥한 대답이었습니다.

“그러면,?이제 이 그릇이 가장 큰 괴물 단지〔논리학에서는 이것보다 더 울타리가 넓은 낱말이 없다고 해서 잔뜩 어려운 말로?‘존재라는 개념은 최고의 유개념(類槪念)이다.’라고 게거품을 무는데,?그런 말은 잊어버리고〕?‘있는 것’이라는 낱말에만 주의를 기울여 봅시다.?그리고 여러분 말대로?‘있는 것’이라는 이 괴물이 한 마리가 아니라 여러 마리라고 칩시다.?그런데 여럿의 가장 작은 수(이것을 여럿[多]의 최소 단위라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만)는 몇이지요??그렇습니다.?둘이지요??하나,?둘의 둘.?그러면 이제?‘있는 것’이 두 마리라고 치고 그놈들을 나란히 놓아 보기로 할까요?”

그림1

그림1

“앞에 있는?‘있는 것(ㄱ)’과 뒤에 있는?‘있는 것(ㄴ)’이 서로 다른 것이 되려면 떨어져 있어야 하겠지요??만일에 이 두 놈이 한데 붙어 있으면 우리는 두 마리라고 할 수가 없잖아요??그런데 이 두 마리가 떨어져 있으려면 둘을 떼어 놓는 무엇인가가 사이에 있어야 하지 않겠어요??여러분과 저 사이에 공간이 있듯이 말입니다.”

학생들은 제 말에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럼,?앞에?‘있는 것(ㄱ)’과 뒤에?‘있는 것(ㄴ)’을 갈라놓는 이 금은?‘있는 것’입니까, ‘없는 것’입니까?”

학생들은 갑자기 어리둥절해진 것 같았습니다.

“‘있는 것’이요.”

한 학생이 대답했습니다.

“‘있는 것’이라고요??그럼?‘있는 것(ㄱ)’, ‘있는 것(금)’, ‘있는 것(ㄴ)’?죄다‘있는 것’이네요.?구별이 안 되네요.?따라서?‘있는 것’?두 마리를 갈라 놓는 금도?‘있는 것’이라는 괴물이라면 이 괴물을 구태여 셋이라고 할 필요가 없지 않겠어요??죄다?‘있는 것’이니?‘있는 것’은 하나이지요.”

야바위 노름에서 잠시 딴전을 피우다가 헛짚었다고 생각했는지 다른 학생이 얼른 대답했습니다.

“그럼, ‘없는 것’이요.”

“그럴까요??그런데?‘없는 것’이 뭐지요??그거 그냥 없는 것 아니에요? ‘없는 것’이니까 없지요??그럼?‘있는 것’?둘을 갈라 놓을 수 있다는 금은?‘없는 것’이네요.?그러니까 금은 없네요.?따라서?‘있는 것’이라는 괴물은 여전히 하나로 있네요.”

학생들은 야바위 노름에서 호주머니를 죄다 털려서 빈털터리가 된 풋내기 도박꾼처럼 씩씩댔습니다.

“이건 제가 꾸며 낸 야바위 노름이 아니고,?서양 고대 철학자 파르메니데스라는 사람의 생각입니다.?그 사람은 이 세상에는 있는 것만 있고 없는 것은 없는데 있는 것은 이렇게 모두 달라붙어서 하나로 있다고 주장했어요.?그런데 이상한 것은 우리 나라 사람들도 모두 그렇게 생각한다는 거예요.?특별히 철학을 공부하지 않은 두메 산골 할머니에게 물어 봐도?‘그래,?이 할멈은 학교 문턱도 밟아 보지 못해서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제 잉,?그래도?‘있는 것이 없네.’?이 말이?‘하나도 없네.’라는 말이라는 것까지 모르까 잉.?그것이 뭣이 그렇고롬 어렵다고 그래들 해쌓는지 모르겠어 잉.’?하고 대답할 것입니다.?그러니까,?있는 것이 없어지면 조금씩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도 남김없이 깡그리 없어진다는 건데,?그것은 있는 것이 하나로 뭉쳐 있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조금씩 떼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지요.”

뒤이어 저는 파르메니데스라는 괴짜가?‘시간도 없고 공간도 없다.’는 말까지 했다는 것도 학생들에게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선생님,?서양 철학의 특징 하나는 자기가 한 말에 대해서는 끝까지 책임지고 까닭을 밝히는 것이라고 들었습니다.?그런데 파르메니데스인지 허여무레데스인지 하는 자가 그렇게 주장한 까닭이 뭡니까?”

한 학생이 당돌하게 묻더군요.?그래서 믿거나 말거나라는 생각으로 이렇게 대답했지요.

“우리는 흔히 시간이 과거에서 현재를 거쳐 미래로 흐른다고 믿고 있잖아요??그런데 파르메니데스인지 누르무레데스인지 하는 사람은 이렇게 생각했던 것 같아요. ‘과거란 뭐냐??그것은 이미 없는 것이다.?또 미래란 뭐냐?그것은 아직 없는 것이다.?이미 없거나 아직 없거나,?없는 것은 없는 것이다.?따라서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다.?그러니 시간이라는 게 있을 게 뭐냐?있는 것은 현재뿐이다.’?어때요??그럴 듯하지 않나요??그럴 듯하지 않다고요?”

그러니 별수 있나요??저는 자기 선생의 이 이상한(?)?이론을 뒷받침하려고 갖은 애를 다 썼던 파르메니데스의 제자 제논(Zenon)까지 들먹여야 했습니다.

“파르메니데스가 시간이 없다고 하자 사람들은 벌집을 쑤셔 놓은 것처럼 그게 말이나 되느냐고 들고 일어섰어요.?그러자 제논이 나섰지요.?제논이 그 사람들에게 한 이야기는 대강 이런 것이었어요. ‘당신들 말대로 시간이 있다고 치자.?그러면 시간의 최소 단위가 있을 것 아니냐??그 최소 단위를 시간의 원자로 치고 그것을 순간이나 찰나라고 부르기로 하자.?그런데 그것이 시간의 가장 작은 구성단위이니까 더 이상 쪼개질 수 없는 것이어야 하겠지.?그리고 시간은 그 구성단위들이 보태져서 생겨난 것이겠지.?그럼 내가 여기에 그림을 하나 그려 보마.

그림2

그림2

이 그림에서 한 칸 한 칸은 시간의 최소 단위인 찰나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치자.?그림의?ㄱ은 정거장을 나타낸다.?그리고?ㄴ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들어오는 기차를 나타낸다.?이 기차는 한 찰나에 정거장 한 칸을 지나간다.?ㄷ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들어오는 기차를 나타낸다.?이 기차도 마찬가지로 한 찰나에 정거장 한 칸을 지나간다.?ㄴ과?ㄷ의 한 칸 한 칸도 마찬가지로 한 찰나를 나타낸다.?두 찰나가 지나면 이 두 기차는 동시에 정거장에 들어와서 그림?3과 같이 바뀐다.

윤구병 그림 1-3

정거장?ㄱ을 중심으로 보면?ㄴ과?ㄷ은 두 찰나에 모두 정거장에 들어왔다.그러나?ㄴ과?ㄷ을 비교해 보자.?그러면?ㄴ과?ㄷ은 두 찰나에 네 칸을 서로 지나 왔다는 것을 볼 수 있다.?우리는 앞에서 시간의 최소 단위는 찰나이고,기차는 한 찰나에 한 칸밖에 갈 수가 없다고 했다.?그런데 이게 웬일인가?두 찰나가 네 찰나로 둔갑한 것이 아닌가??다시 말하면 더 이상 쪼개질 수 없다고 믿었던 시간의 최소 단위가 둘로 쪼개진 것이다.?따라서 더 이상 쪼개질 수 없는 시간의 최소 단위가 있다는 말은 헛소리고,?시간의 최소 단위가 없으므로 그 최소 단위들이 모여서 이루는 시간도 없다는 게 맞는 이야기다.?그렇지 않은가?’?제논은 공간이 없다는 것도 비슷한 방법으로 증명하려고 들었어요.?파르메니데스는 그저?‘공간이 있다면 여기,?저기라는 말을 쓸 수 있어야 하는데 잘 아다시피 여기는 저기에 없는 것이고 저기는 여기에 없는 것이다.?그런데 없는 것은 없으므로 저기 없는 것인 여기도 없고,?여기 없는 것인 저기도 없다.’는 식으로 말했는데,?제논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런 이야기를 해요. ‘공간은 일정한 크기를 가진 것이 놓인 자리이거나 일정한 크기를 지닌 빈 자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그런데 크기를 가진 것은 쪼개질 수 있다.?우리가 크기를 가진 것이 있다고 말하려면 크기를 이루는 최소 단위가 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여기에 일정한 크기를 가진 줄〔line〕이 하나 있다고 치자.?그리고 우리가 머릿속에 칼을 가지고 있어서 그 줄을 쪼개고 또 쪼갠다고 치자.?크기를 가진 것은 아다시피 무한히 쪼개질 수 있으니까 우리는 이 줄을 무한히 쪼개 갔다고 보고,?그 결과로 크기의 가장 작은 알맹이를 얻었다고 하자.?그런데 그 크기의 가장 작은 구성 단위는 크기가 없거나 크기를 가진 것이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만일에 그 가장 작은 구성 단위가 크기를 가지지 않은 것이라면 크기가 없는 것을 무한히 더해 봤자 거기서 크기가 있는 것이 나오지 않는다.?마치 수학에서?0을 아무리 보태 보았자?0밖에 안 되는 것처럼.?반대로 만일에 그 가장 작은 단위가 크기를 가지고 있고 모두 꼭 같은 크기를 지니고 있다면 크기를 가진 것을 무한히 더하면 처음에 가정했던 일정한 크기를 지닌 줄이 되는 것이 아니라 무한히 긴 줄이 나오게 된다.?이 두 가지 모순되는 결과가 나오는데 어떻게 크기의 가장 작은 단위가 있다고 할 수 있겠으며,?크기의 최소 단위를 찾을 수 없는데 어떻게 크기로 이루어진 공간이 있다고 할 수 있겠느냐?’?이렇게 해서 파르메니데스와 제논은 시간과 공간마저 없는 것으로 치부해 버리고 말았지요.”

그러고 나서 저는 마치 제가 파르메니데스라도 되는 것처럼 학생들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여러분,?여러분은 없는 것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나요?”

“없는 것을 생각할 수 있느냐고요??왜 못 해요??황금산,?우주마왕,?춘향이와 이 도령,?이렇게 우리는 현실에 없는 것도 얼마든지 상상할 수 있잖아요?”

“그것은 없는 것에 들어가지 않아요.?상상 속에 있든지,?소설 속에 있든지 그것도 있는 것은 있는 것이에요.?아예 없는 것,?흔히 허무라고 하잖아요?그런 것을 생각할 수 있느냐고 묻는 겁니다.”

“글쎄요.?그건 생각할 수 없는데요.”

한 학생이 마지못해 뾰로통하게 대답하더군요.

“그러면 생각할 수 없는 것은 말할 수도 없지요??그렇지요?”

제가 다시 물었습니다.

“예.”

학생들이 불만스럽다는 듯 대답했습니다.

“정말 우리는 없는 것에 대해서는 생각할 수도 없고 말할 수도 없나요?”

저는 다시 다짐을 했습니다.

“예에―.”

모두 고삐에 묶인 소처럼 대답을 길게 뺐습니다.?자,?이렇게 해서 우리는‘있는 것만 있고 없는 것은 없다.?시간도 공간도 없는 것이다.’라는 파르메니데스의 덫에 치이고 말았습니다.?마침 서양 중세 철학사 시간이었기 때문에,?그리고 저는 그리스 철학이 아우구스티누스나 토마스 아퀴나스 같은 중세 철학자(신학자라고 해도 무리는 없겠지요.)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설명하려고 이런 이야기를 꺼낸 참이기에 내친김에 이런 말을 덧붙였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파르메니데스인지 까마무레데스인지 하는 괴짜와 그 사람 제자인 제논인지 남의 논인지 하는 자의 세 치 혀끝에 녹아나 시간도 공간도 없는 곳,?모두가 달라붙어서 하나가 되어 버린 있는 것만 있는 세계까지 와 버리고 말았습니다.?이 하나뿐인 있는 것,?시간도 공간도 없으므로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 영원한 세계에 있는 것이 바로 기독교의 유일신?‘하나님’입니다.?시간이 없으므로?‘하나님’은 영원하고,?공간이 없으므로?‘하나님’은 여기나 저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두루 있는 것,?곧 편재하는 것입니다.따라서 중세 신학자들이 머릿속에 그리고 있던 신은 히브리의?‘하느님’이 아니라 그리스의?‘하나님’인 파르메니데스의 있는 것,?곧 하나입니다.”

제 말이 얼마나 맞아떨어질지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그러나 저를 가르치신 선생님의 말씀에 따르면 파르메니데스와 제논은 플라톤의 정신적인 부모이고,?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정신적인 자식인데,?중세 철학자들,그 가운데 특히 아우구스티누스나 토마스 아퀴나스 같은 사람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기둥으로 삼아 자기들의 신학을 세웠다고 하니,전혀 터무니없는 생각은 아닐 듯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발붙이고 사는 이 세상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시간도 공간도 없고,?따라서 이것,?저것도 없고,?과거도 미래도 없다면,?이 세상도 말짱 헛것이겠네요.”

제 이야기를 듣던 학생 하나가 한숨을 포옥 내쉬면서 이렇게 뇌까렸습니다.

“물론이지요.?파르메니데스에 따르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것을 현상 세계라고 하는데,?시간과 공간에 얽매여 있는 이 세상은 말짱 덧없는 그림자 같은 것입니다.”

“되게 허무하네요.”

“어떻게 생각하면 그렇지요.?중세 기독교 신학에 젖어든 많은 기독교도들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일을?‘헛되고 또 헛되도다.’?하고 중얼거리는 것도 파르메니데스의 탓이 아니라고는 할 수 없어요.?그러나 여러분,?그렇다고 해서 파르메니데스나 제논을 허무주의자나 허무 사상을 퍼뜨리고 다닌 사람들이라고만 생각해서는 안 돼요.?여담이지만 제논에 대해서는 이런 말도 있습니다.?제논이 살던 엘레아에 네아르코스라는 독재자가 있었는데,제논은 네아르코스의 독재 정부를 무너뜨리기 위해서 지하 활동을 했다고 합니다.?그런데 어쩌다 들통이 나서 제논은 동료들과 같이 붙들리게 되었다는 겁니다.?그런데 네아르코스의 혹독한 고문에 못 이겨 다른 동료들이 전부 자백을 했는데도 제논은 끝까지 동료들을 팔지 않고 버텼대요.?그리고 제논을 죽이기 전에 네아르코스가 직접 고문을 하면서 이제 그만 털어놓으라고 하자 네아르코스에게?‘아직도 나는 내 혀의 주인이다.’라고 마지막 한 마디를 남기고는 자기 이빨로 제 혀를 끊어서 네아르코스의 얼굴에 내뱉었다고 합니다.”

한참 지껄였다고 생각했는데,?이제 보니?‘있는 것이 없다.’는 말에서만 곁가지를 친 셈이군요.?그러면 다음으로?‘없는 것이 있다.’는 말로 넘어가기로 하지요.?이 말은 파르메니데스에 따르면 우리를 거짓의 세계로 이끌어 가는 함정입니다.?그리고 어느 면에서는 파르메니데스의 말이 사실이기도 합니다.?구태여 파르메니데스를 들먹이지 않더라도,?있는 것을 있다고 하고 없는 것을 없다고 하는 것이 참말이고,?없는 것을 있다고 하거나 있는 것을 없다고 하는 것이 거짓말이 아니던가요??그러나 따지고 보면 이제까지 우리는?‘없는 것은 없다.’라고 하면서,?따라서 없는 것에 대해서는 생각할 수도 없고,?말할 수도 없다고 하면서 줄곧 없는 것이라는 말과 없다는 말을 입에 달고 있지 않았습니까??그러고 보니,?없는 것에 대해서는 생각할 수도 없고 말할 수도 없는 것이 아니라,?없는 것을 빼면 생각할 수도 없고 말할 수도 없는 것이 아닐까요?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서 생각할 수 없다는 없는 것을 생각하고 말할 수 없다는 없다라는 말을 쓸 수 있게 되었을까요??이 세상 어딘가에 없는 것이 있는 것이나 아닐까요??왜냐하면 우리의 생각 속에 있는 것은 세상에 있는 것을 되비추고 있다고 봐야 하기 때문입니다.?우리가 없는 것을 생각하고 없다는 말을 할 수 있다면 이 세상 어딘가에 없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따라서?‘없는 것이 있다.’는 말을 단순한 거짓말로 돌려 버릴 수 없습니다.

 

한철연과 함께하는 철학 세미나 3기를 모집합니다. [ⓔ시대와철학 알림]

한철연과 함께하는 철학 세미나?3기를 모집합니다.?[ⓔ시대와철학 알림]

 

한철연과 함께하는 철학 세미나?3

 

?정치철학과 예술철학

 

()한국철학사상연구회(이하 한철연)는 다양한 정치적 견해를 가지고 있는 진보적 철학자들이 자유롭게 공존하는 모임입니다.?철학을 기반으로 연구자의 길에 들어선 사람들을 위한 철학 세미나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개설 강좌

 

독일어 원전 강독 연습

강사😕서유석?(호원대 교수)

강독 교재: Max Stirner, Der Einzige und sein Eigentum (유일자와 그의 소유)

기간: 5월?16일?~ 8월?22일?(12)?매주 금요일 저녁?7– 10?

*?독어 철학텍스트 강독(독일어 초보자도 환영,?문법 강의 함께 진행)

*?대학원생 이상 수강 가능

?

고전한문 강독 연습

강사😕구태환?(상지대 강사)

강독 교재😕맹자집주(孟子集註)

기간: 5월?22일?~ 8월?21일?(12)?매주 목요일 저녁?7– 10?

*?한문 텍스트 강독(초보자?위주로 진행)

*?학부?3~4학년 및 대학원생 수강 가능

 

분과연합 세미나(공통강좌)??정치철학과 예술철학

기간:??5월?17~8월?2일 매주 토요일?2~5

대상:?학부?3~4학년 및 대학원생 수강 가능

 

1.?정치철학

?맑스 분과

강사:?김종곤?(건국대?연구교수,?맑스분과 회원)

5월?17():?맑스의?<자본론>?상품장 읽기

5월?24():?알튀세르의??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읽기

 

?여성과 철학 분과

강사😕이현재(서울시립대?HK?교수,?여성과 철학분과 회원)

5월?31():?버틀러와 젠더의 해체적 재구성(주디스 버틀러, <젠더 트러블>)

6월?7일?():?깁슨그래함과 여성주의 정치경제학(깁슨그래함, <그따위 자본주의>)

 

?변증법과 해체론 분과

강사😕서영화(서울대,?변증법과 해체론 분과 회원),

? ? ? ??김성우(兀人?고전학당 연구소장,?변증법과 해체론 분과 회원)

6월?21():?지젝의?투쟁,?역사성,?의지그리고 무위자연Gelassenheit의 사중주

(Less Than Nothing?4부?13)

6월?28():?지젝의?스피노자,?칸트,?헤겔 그리고?바디우!”

(http://www.lacan.com/zizphilosophy1.htm)

 

2.?예술철학

?헤겔 분과

강사😕이정은(연세대 외래교수,?헤겔분과 회원)

이관형(경기개발연구원,?헤겔분과 회원)

7월?5() 😕헤겔미학 강의(1)

7월?19():?헤겔미학 강의(2)

 

?라캉 분과

강사😕이병창(동아대 명예교수,?라캉분과 회원)

7월?26():?라캉의 정신분석학(1)

8월?2일?():?라캉의 정신분석학(2)

 

* 6??14, 7월 둘째 주는 한철연 봄 학술대회와 전체 모꼬지 행사 관계로 휴강

대 상😕대학원 재학생 및 수료생,?학부?3~4학년,?한철연 신진회원

(철학을 토대로 연구자의 길을 걷고자 하는 사람)

*?독일어 강독의 경우,?철학과 대학원생

*?강좌 수료 이후에는 일정 절차를 통해 정회원으로 가입하여 각 분과에서 활동 할 수 있음.

*?분과연합세미나의 경우,?전 강좌에 참여해야 함.(부분 수강 불가)

수업 방식😕세미나(필요한 경우 강의 방식 병행)

신청 방식😕메일?(pipjc11@naver.com)로 자기소개서를 보내주세요.

(자기소개서 다운로드😕한철연 홈페이지(hanphil.or.kr)?→?공지사항)

수 강 료?😕없음?(과목당 최대 수강 인원?10,?최소 수강인원?2, 2명 미만 시 폐강)

문 의: 02-332-4301, pipjc11@naver.com

기 간: 2014년?5월 중순-7월 말(8월 말)

욕망과 감정, 그리고 마음의 절제(3)[대안도덕교과서]-4

욕망과 감정, 그리고 마음의 절제(3)[대안도덕교과서]-4

 

 

최종덕(상지대학교)

 

*이 글은 삼인출판사에서 출판 될 대안도덕교과서(가제)의 일부를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7. 분노와 절제

 
욕망은 어떤 때는 충동적이기도 하고 어떤 때는 습관적으로 나타납니다. 이런 욕망의 특성을 충동적 욕망 혹은 중독성 욕망이라고 표현합니다. 절제란 그런 욕망의 마음을 행동으로 쉽게 옮기지 못하도록 하는 행동의 습관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설명하지 않아도 누구나 절제의 뜻을 직감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음식을 너무 좋아해서, 먹기를 자제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친구는 대화할 때 욕설이 습관처럼 배어서 욕이 아니면 대화를 못할 지경에 사람도 있습니다. 음식을 먹으려는 욕심은 나의 배가 아니라 나의 마음입니다. 욕을 하는 습관은 나의 혀가 아니라 나의 마음입니다. 포르노 동영상을 보려는 욕구은 나의 눈이 아니라 나의 마음입니다. 더 진한 화장을 하려는 욕구는 나의 얼굴이 아니라 나의 마음인 것입니다. 나의 배, 나의 혀, 나의 눈, 나의 얼굴이 요구하는 욕구는 채워질 수 있지만, 나의 마음은 아무리 채우려 해도 채워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마음을 다스리는 것을 우리는 절제라고 합니다. 절제된 마음에서 비로소 행동 습관이 멈춰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마음의 무절제에 시달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즉 자기감정을 다스리는 절제력이 부족하다고 많이 느낍니다. 느끼지만 쉽게 고쳐지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특히 분노에 대한 절제는 매우 중요합니다. 분노는 일종의 심리적 고통으로서 몸의 고통이 있으면 이를 진통제 등으로 치료해야 하듯이 심리적 고통인 분노도 치료의 대상입니다. 분노를 치료하는 방법은 분노를 일으킨 원인을 제거하는 방법이 있지만 현대사회에서 그 원인을 피해가기는 실제로 쉽지 않습니다. 일상적으로 술먹고 들어와 가족들을 못살게 하는 아버지에 대한 분노, 한 번 실수한 것 때문에 일 년 내내 나를 무시하는 담임선생님에 대한 분노, 집에 가는 밤길에 내 돈을 뺐어간 깡패들에게 대한 분노, 나를 왕따시키는 학우들에 대한 분노 등등, 이 모든 분노의 원인들을 헤아릴 수도 없고 적절히 대처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분노를 일으키는 나 자신만 손해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분노를 절제하는 나 자신의 연습이 필요한 것입니다. 아침에 학교를 가다가 지나가는 나와 모르는 자전거에 우연히 부딪쳤습니다. 그래서 학교에 지각하고 선생님에게 야단을 맞았습니다. 그렇다면 누구에게 화를 풀어야 할까요? 이처럼 의도가 없는 행동에 의해 피해를 보고 짜증내고 화를 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면 결국 내 마음만 상처받고 풀리지 않은 채 나의 화만 더 깊어지는 것입니다. 결국 누가 손해일까요? 어느 누구도 나의 화, 나의 짜증냄을 풀어줄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부모님조차도 겉으로만 위안이 될 뿐 나의 화낸 나의 짜증냄을 풀어 줄 수 없다는 사실을 냉정하게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자율적이고 주체적인 절제의 마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또한 내 마음속에 일어난 분노를 무작정 참는 것만이 문제해결의 전부는 아닐 것입니다. 분노를 적절하고 합리적으로 표출하는 감정조절을 배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분노를 일시에 폭발시킬 경우 본인과 주변 사람들에게 큰 피해를 가져다주기 때문에 분노의 적절한 표출은 매우 중요한 삶의 지혜입니다. 어떤 때는 화가 나서 혼자서 교실 뒤에 걸린 거울을 부수기도 합니다. 유리에 다쳐서 피가 나는 그런 몸서리쳐지는 뻔한 결과가 예상되지만, 그런 예후를 고려하지 않고 분노를 표출할 때가 있습니다. 이런 모습은 청소년의 또 다른 모습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분노를 표출하는 방법으로 불특정 다수에게 무차별한 폭력을 가하기도 하는데, 이런 끔찍한 소식을 우리는 가끔 뉴스에서 접하기도 합니다. 정도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누구나 이런 마음의 고통으로서 분노를 내 안에 품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적절히 화를 풀고 짜증을 내지 않는 마음의 윤리학이 필요한 것입니다.

화를 내고 짜증을 내는 것은 고통의 감정에 해당합니다. 분노의 마음은 개인의 고통이기도 하지만 사회의 고통이라는 점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대부분의 분노는 사회적 약자에게 돌아오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에 대하여 자식, 선생님에 대하여 학생, 기업주에 대하여 고용인, 독재자에 대하여 국민들, 이 모두 사회적 약자입니다. 권력에 대하여 느끼는 분노를 풀 행동의 탈출구가 약자에게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더욱더 분노가 증폭될 수 있습니다. 이런 분노를 적절한 곳 적절한 때에 풀지 못하면 엉뚱한 곳에서 터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터트린 분노의 책임은 그 공동체 즉 가족이나 학교 아니면 지역공동체나 국가가 대신 지지 않으며 고스란히 개인에게 되돌아옵니다. 청소년도 사회적 약자입니다. 부모에 대하여 약자이며 학교 선생님에 대하여 사회적 약자입니다. 사회적 약자로서 생긴 분노는 그 공동체에서 책임을 공유해야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어느 누구도 책임지지 않습니다. 모든 책임은 바로 청소년인 나 자신에게 돌아옵니다. 이러한 뼈아픈 현실을 인정하는 것이 바로 청소년기 성장의 과정입니다. 결국 분노를 제어하는 방법을 청소년기에 터득해야 합니다. 불행히도 청소년은 그런 교육을 받아본 적이 없습니다. 단지 ‘분노를 터뜨리는 것은 나쁜 것이니 스스로 잘 통제해야 한다’는 명령적 윤리만 있었고, 왜 내가 분노를 갖게 되었는지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찾기 어렵습니다.

나의 분노는 곧 내 마음의 고통이라는 사실을 알아주는 사람이 없다는 점이다. 절제가 안 되면 방탕이 됩니다. 물질적 방탕이 방탕의 전부가 아닙니다. 정신적 방탕은 우리 청소년에게 다가온 가장 큰 고통입니다. 그렇다면 나의 정신적 방탕, 심리적 무절제를 스스로 어떻게 극복할 수 있습니까? 이에 대하여 부모님이나 선생님 혹은 인생의 선배가 형식적으로 답변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답은 스스로 찾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실제로 자신의 무절제함을 절제심으로 나를 변화시키는 묘수는 없습니다. 단지 꾸준한 일상생활의 연습을 통해 행동습관을 바꾸는 데 있을 뿐입니다. 그 연습의 하나로서 자신의 감정을 표출하는 데 한 순간씩 늦추는 방법이 있습니다. 분노의 감정을 표출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표출을 하되 표출방법을 가장 효율적으로 그리고 적절하게 또한 제삼자가 피해를 보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어쨌든 마음의 절제로 찾아가는 뾰족한 정답은 없지만, 자신의 무절제함을 관찰하고 반성하는 일상적인 연습만이 가장 가까운 정답인 것입니다.
 
 

8. 욕망과 주체적 윤리학

 
청소년 시기는 자기존재감을 확인하는 시간입니다. 그래서 저항적 감정을 쉽게 폭발하기도 하고 혹은 나쁜 감정에 휘말리어 평생 눌려서 살 수도 있습니다. 한편 타인의 강요가 아니라 나의 동기를 세워서 끝내는 무엇이든지 이뤄낼 수 있는 잠재성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 점은 청소년의 징표입니다. 청소년이라면 누구나 거치는 생물학적 보편성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내안에 욕망의 감정을 직시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자신의 욕망을 다스리는 것은 단순히 마음의 결단으로만 되는 것은 아닙니다. 부족하지만 연습하고 또 연습하는 과정에서 나의 행복이 열리게 됩니다. 그러기 위하여 나의 감정을 피해가서는 안 됩니다. 행복에 이르기 위하여 감정들 특히 욕망의 감정을 피하지 말고 정면으로 마주해야 하는 것입니다. 욕망의 감정을 무조건 잘 통제해야 한다는 말과 다릅니다.

이제 감정을 어떻게 다스리느냐의 문제를 이야기하려 합니다. 욕망은 나쁜 것이니만큼 그런 욕망을 싹둑 잘라버려야 한다는 강요된 윤리학을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게임은 나쁜 것이고 영어공부는 좋은 것이니, 나쁜 일을 하지 말고 좋은 일만 하라는 식의 획일적인 윤리학은 찐정한 윤리적 실천과 동떨어져 있습니다. 윤리학은 욕망의 감정을 무조건 배제하는 것이 아닙니다. 청소년이나 어른이나 할 것 없이 누구나 욕망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욕망 때문에 갈등이 생기기도 합니다. 욕망은 감정으로 나타나고 행동으로 옮기고 싶어 합니다. 배가 고프면 밥을 먹고 싶고 그리고 밥을 먹으려는 준비행동을 준비합니다. 추우면 옷을 입고 따듯한 방에 들어가고 싶으며 또한 그런 행동을 옮기려 합니다. 이런 행동이 지나쳐서 남의 밥을 훔치고 남의 집을 빼앗는다면 그것은 윤리적으로 부당한 행동일 것입니다. 그러나 욕망은 나의 행동을 증진시키는 원동력이기도 합니다. 욕망은 세상을 다른 색깔로 칠하는 예술과 과학을 탄생하게 하는 원동력이라는 뜻입니다.

다시 정리하여 말해봅시다. 욕망이 감정으로 나타나며 이를 행동으로 옮겨지기까지 어떤 적절한 조절이 필요합니다. 감정의 조절입니다. 그런 감정의 조절을 규범화한 것이 바로 기존의 윤리학입니다. 감정의 조절은 개인의 책무이기도 하지만 법이나 문화 같은 사회적 관습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내가 화가 났다고 칩시다. 나의 화를 조절하기 위하여 나의 개인적인 마음의 수양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개인의 수양말고도 화를 나게 만든 이 사회의 관습이 과연 옳은 것인지도 관찰해야 합니다. 물론 사회적 윤리가 필요한 만큼 자신의 감정을 다루는 마음의 윤리도 필요합니다. 이런 마음의 윤리는 나 자신을 되돌아보고 반성하는데서 시작합니다. 침팬지는 거울에 비춰진 자신의 모습을 보고 당황해 합니다. 15개월 이전의 아이들은 거울에 비춰진 모습을 보고 울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거울에 비춰진 나의 모습을 보고 빗질도 여드름도 짜며 옷매무새를 잡아봅니다. 거울을 통해 머리모양만 비춰보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을 비춰보는 것, 그것이 바로 반성인 것입니다. 선생님으로부터 명령받아 억지로 쓰는 반성문의 그런 반성이라는 말을 이제부터 싹 잊도록 합시다. 그런 반성이 아니라 내 마음을 되돌아보는 반성입니다. 어려운 말로는 성찰이라고도 하는데, 자기 성찰이라는 거창한 표현보다는 그저 반성이라는 소박한 말이 더 좋습니다. 반성을 억지로 할 필요 없습니다. 단지 일기를 쓰거나 블로그에 나를 표현하는 글을 올리거나 깊이 숨을 들이 쉬면서 잠시라도 어제 일을 회상하는 등등, 이런 차분한 시간을 갖는 일이 곧 반성의 시간입니다. 그런 반성으로부터 이미 마음의 윤리학은 여러분의 것입니다. 어떻게 그런 반성을 할 수 있을는지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사람에게는 마음의 윤리적 본능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음의 윤리학, 좀 더 쉽게 말해서 감정조절의 윤리학이 가능한 것입니다. 어렵지 않습니다. 우리는 침팬지가 아니라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감정조절이란 뜻은 욕망이라는 감정을 어떻게 다스리느냐의 문제입니다. 욕망을 무조건 나쁜 것이라고 단순히 말할 수 없습니다. 욕망은 오히려 나의 삶을 창조적으로 만드는 마음의 힘입니다. 기존의 금지의 윤리학에서는 욕망은 무조건 나쁜 것이어서, 욕망은 제거되어야 할 나쁜 감정이었습니다. “이거 해라, 저거는 하면 안 된다”라는 식의 금지의 윤리학에서 욕망의 창조성을 찾을 수 없습니다. 앞서도 여러 번 말했듯이 청소년의 가장 큰 장점은 미래를 나름대로 설계할 수 있다는 데 있습니다. 비록 그 미래는 불확실한 미지의 세계이지만 바로 그런 불확실성 때문에 나는 나의 미래를 창조적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욕망을 무조건 거절하는 것이 아니라, 내 속에 깊이 들어와 있는 나의 욕망을 나의 친구삼아 배려하고 귀기울이며 공감하며 협조하면서 공존하는 연습이 소중합니다. 그런 일상생활 속의 연습이 바로 청소년 윤리학의 기초이며 이를 앞에서 자유의 윤리학이라고 불렀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욕망의 제어를 자율적으로 즉 스스로 할 수 있도록 나의 감정을 연습하는 일이 바로 청소년 윤리학의 조건입니다. 타인의 규제가 작용되는 금지의 윤리학과 달리 자유의 윤리학은 나 스스로 자신의 감정을 다스리는 윤리적 자율성을 제시합니다. 그런 자율성은 법적이거나 통제적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감정 조절을 학습하는 마음의 원리들입니다. 자율성의 조건은 행동에 대한 결과를 실현시키기 위하여 먼저 자기 스스로 판단하고 선택하고 결정하는 행동습관을 형성한다는 점입니다. 그러한 행동습관이 구체적인 마음의 준칙으로 자리잡기 위하여 앞서 말한 긍지의 마음, 겸양의 마음, 정의로운 마음, 관심을 두는 마음, 분노를 조절하는 마음을 키워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을 갖추게 된다면 우리에게 ‘금지의 윤리학’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을 것이며 ‘주체의 윤리학’ 그리고 ‘자유의 윤리학’이 자리 잡게 될 것입니다. 욕망의 유혹이라는 큰 장벽이 있지만, ‘자유와 주체의 윤리학’을 가능하게 하는 도덕감정은 이미 여러분 마음속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스스로 끄집어내면 되는 것입니다.

행복에 이르는 길-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론』 <논현정보도서관 행복한 고전읽기>2

행복에 이르는 길-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론』?<논현정보도서관 행복한 고전읽기>2

김성우(兀人고전학당 연구소장)

 

이 글은 4월 22일?7시에 열린?<논현정보도서관 행복한 고전읽기>?두번째 강연 원고입니다.

 

참혹한 마음에 바치는 서(序)

오호라!?지금 이 순간에도 불행에 빠진 동료시민들이 울부짖고 있습니다.지극히 황당한 인재로 인해 사랑하는 아이와 가족을 잃었기 때문입니다.?삼가 애도를 표합니다.?이 강연을 마음 상처 입은 모든 사람들에게 받칩니다.

이 참사와 연관된 사람들 중에서 칭찬과 명예를 듣는 분들이 있습니다.?반면에 비난과 불명예로 시달리는 자들도 있습니다. 20대의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승객들을 끝까지 구하고 자신을 희생한 여승무원이나 여선생님의 용기와 희생은 사람들의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반면에 칠순을 바라보는 연륜에도 승객과 배를 버리고 도망간 된 선장과 희생자 명단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은 고위 공직자,?피해자인 어린 학생의 마음에 상처를 주더라도 조난 구조에 방해가 되더라도 취재경쟁에 열을 올리는 기자가 비판의 도마 위에 오르고 있습니다.

이처럼 관련자들의 용기와 비겁,?칭찬과 비난,?명예와 불명예,?한마디로 미덕과 악덕이 화제로 떠오르고 있습니다.?다시 말해서 사람됨,?성품이 문제의 중심이 되고 있습니다.?이런 논란은 개인의 물질적 행복을 추구하는 현대적인 가치관이 아니라 전통적인 가치관에서 비롯된 것입니다.?우리의 전통에 유교가 있다면 서양의 전통에 덕 윤리가 있습니다.?이러한 덕 윤리를 대표하는 고전이 아리스토텔레스의?<니코마코스 윤리학>입니다.?이 책은 기독교 이전에 서양 시민의 윤리관을 대표하고 있습니다.?그 요지는 신이 없어도 엄격한 도덕법칙이나 이기심에 호소하지 않고도 인간이라면 누구나 지닌 지성(정신)과 좋은 습관을 바탕으로 윤리적인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강연에서 추천하고 싶은 책은 우선 고전 그리스어를 우리말로 훌륭하게 번역한?<니코마코스 윤리학>(이창우·김재홍·강상진 옮김,?이제이북스, 2006)입니다.?그 시대적 배경과 철학적 분위기를 알고 싶다면?<지중해 철학 기행>(클라우스 헬트,?이강서 옮김,?효형출판, 2007)을 추천합니다.

김성우 사진2

 

어떻게 살 것인가(소크라테스)

서양 고대의 그리스 문화에서 윤리학의 중심 주제는 행동이 아니라 사람됨이며 더 나아가 삶 자체입니다.?다시 말하면 칸트처럼 도덕률에 합치하는 올바른 행동이나 벤덤처럼 쾌락의 양을 늘리는 행동이 아니라?‘좋은 삶’이 주제입니다.?인간이 산다는 것은 단순히 생존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좋은 것을 추구해야 한다는 뜻입니다.?아버지가 마케도니아 궁전의 시의였던 아리스토텔레스는 의학과 생물학에 밝았습니다.?동식물에 정통했던 그는 동물적인 생명(zoe)과 인간다운 삶(bios)을 구분했습니다.?그에 따르면?“산다는 것은 심지어 식물에게까지 공통되는 것으로 보이지만,?우리는?(인간에게만)?고유한 것을 찾고 있으니 말이다.?그러므로 영양을 섭취하고 성장하는 삶은 갈라내야 할 것이다.?다음으로는 감각을 동반하는 삶이 뒤따를 것이지만 이것 또한 분명 말과 소,?모든 동물들에 공통되는 삶이다.”?그러면 남는 것은 무엇인가요? “이성(logos)을 가진 것의 실천적 삶”입니다.

이러한 인간다운 삶과 관련해서 클라우스 헬트는 <지중해 철학 기행>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이 비오스,?즉 삶의 영위는 일정한 습관에 토대를 둔다.?이 습관은 우리에게 본성으로 부여된 것일 수도 있지만 획득될 수도 있다.?특정한 습관을 갖는 것이 과연 좋으냐를 두고 인간은 다른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고 근거를 댈 수 있다.?이처럼 대화를 나누고 근거를 대는 능력을 그리스어로?‘로고스’라고 한다.?인간은 로고스를 지닌 동물,?로고스를 지닌 생명체이다.?이것이 바로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한 고전적인 인간의 정의로서, 2000년이 넘도록 끊임없이 인용되고 있다.”

좋은 삶은 좋은 것에 겨냥합니다.?그런데 가장 좋은 것(최고선)을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eudaimonia)이라고 부릅니다.?이와는 반대의 의견도 있습니다.?칸트의 도덕철학을 현대 민주적 절차주의로 발전시킨 존 롤스는 그의 유명한 저서인 <정의론>에서 행복보다는 정의가 더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진리가 사상 체계의 제일 덕목인 것처럼 정의는 사회 제도의 제일 덕목이다.?이론이 아무리 정교하고 간명하다 할지라도 그것이 진리가 아니라면 기각되거나 교정되어야 하듯이,?법이나 제도가 아무리 효율적이고 질서정연한 것일지라도 그것이 정의롭지 못하면 개혁되거나 폐지되어야 한다.?각 사람은 사회 전체의 행복이라도 능가할 수 없는,?정의에 기초를 둔 침해불가능성을 갖는다.”

통상적으로 행복은 개인적이라면 정의는 사회적인 것입니다.?그렇다면 아리스토텔레스는 개인주의적 행복을 이야기한 것에 그치고 만 것입니까??아닙니다.?그의 윤리학은 정치학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그가 말하는 행복은 폴리스(그리스 도시국가)의 구성원으로서의 시민의 행복에 해당합니다. “그것은 으뜸가는 학문,?가장 총 기획적인 학문에 속하는 것처럼 보인다.그런데 정치학이 바로 그러한 학문인 것 같다.?왜냐하면 폴리스 안에 어떤 학문들이 있어야만 하는지,?또 각각의 시민들이 어떤 종류의 학문을 얼마나 배워야 하는지를 정치학이 규정하기 때문이다.” “또 정치학은 나머지 실천적인 학문들을 이용하면서,?더 나아가 무엇을 행해야만 하고 무엇을 삼가야만 하는지를 입법하기에 그것의 목적은 다른 학문들의 목적을 포함할 것이며,?따라서 정치학은 목적은?‘인간적인 좋음’일 것이다.?왜냐하면 설령 그 좋음이 한 개인과 한 폴리스에 대해서 동일한 것이라 할지라도,?폴리스의 좋음이 취하고 보존하는 데 있어서 거 크고 더 완전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그 좋음을 취하고 보존하는 일이 단 한 사람의 개인에게 있어서도 만족스러운 일이라면,?한 종족과 폴리스에 있어서는 더 고귀하고 한층 더 신적인 일이니까.?따라서 우리의 탐구는 일종의 정치학적인 것으로서 이런 것들 추구하는 것이다.”

이 길게 인용된 글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러한 자신의 탐구를 윤리학(?thik?)이라고 부릅니다.?에티케는 성품과 습관을 의미하는 에토스(ethos)라는 말에서 온 것입니다.?즉,?좋은 성품의 사람이 되려면 좋은 행동을 하도록 습관이 길러져야 한다는 뜻이지요.?그렇지만 그의 윤리학은 개인의 행복에 그치지 않습니다.?좋은 사람이 되고 좋은 삶을 산다는 것은 혼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적인 국가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그에 따르면 어린 시절부터 미덕(탁월함, aret?)을 향한 올바른 지도를 받으려면 올바른 법률에 의해 길러지지 않고서는 어려운 일입니다.?성인이 된 후에도 계속에서 올바른 일을 하고 좋은 습관을 들어야 하기에 법률이 필요합니다.?이렇게 좋은 사람이 되고 좋은 삶을 사는 데는 국가에 의한 강제적인 법률이 있어야 합니다.?그에 따르면?“다중은 말에 따르기보다 강제에 따르고,?고귀한 것에 설복되기보다 벌에 설복되기 때문이다.”?폴리스의 입법자들은 시민들의 교육과 종사할 일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그렇지 않으면 각자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아갈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공동의 보살핌이 폴리스가 제정한 법률을 통해 이루어집니다.?이를 고려하면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치학의 목적을?‘인간적인 좋음’(agathon)이라고 한 이유가 명백해집니다.?그래서 그에게 인간은 정치적(사회적, politikon)?동물입니다.?이런 까닭에 그에게 좋은 삶은 국가 안에서의 시민적인 삶이지 국가에서 벗어난 개인의 삶이 아닙니다.?따라서 그가 말하는 좋은 사람은 시민의 의무를 다하는 덕을 갖춘 사람이지 자신만의 안녕과 평온을 추구하는 무책임한 개인이 아닙니다.?이런 점에서 현대 철학자 중에서 개인주의적인 자유주의 윤리학과 정치철학을 비판하면서 등장한 공동체주의 철학자들이 아리스토텔레스의 덕 윤리를 바탕으로 하는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공동체주의를 대표하는 철학자로는?<덕의 상실>의 저자인 알래스데어 매킨타이어와?<다문화주의>를 주창한 찰스 테일러,?그리고?<정의란 무엇인가>로 우리에게 너무나 유명해진 마이클 샌델이 있습니다.마이클 샌델이 왜 시민의 미덕을 강조했는지가 분명해집니다. (승객을 버리고 도망간 선장과 무책임한 고위공무원들은 시민의 미덕,?특히 사회적 리더로서의 의무를 저버렸기에 그토록 지탄과 원망의 소리를 듣는 것입니다.)

이런 점들을 고려하면 정치적인 것을 가르친다고 선전하는 소피스트들은,실은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정치적 행위를 하고 있지 않고 있습니다.?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정치학은 수사학이 아니기 때문입니다.?이와는 반대로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정치학은 목적은 지식(앎)이 아니라 행위입니다.?마찬가지로 윤리적인 덕도 지식이 아니라 활동(ergon)입니다.?이는 자신의 스승인 플라톤 선생님과 스승의 스승인 소크라테스를 비판하고 있는 것입니다.플라톤의 대화편인?<프로라고라스>에서 소크라테스는 덕은 앎(인식)이라고 규정했습니다.?다시 말해서 무엇이 최선인지를 아는 자가 가장 좋은 사람인 것입니다.?그러한 최선자가 통치자가 되어야 합니다.?그런 리더를 플라톤은 철인왕이라고 불렀습니다.?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에게?“인간적인 좋음은 덕에 따른 영혼의 활동”입니다.?그 좋음이라는 것도 완전한 삶 안에 존재하는 것입니다.?이런 그에게 아는 것보다 좋은 행동을 하고 좋은 사람이 되어 좋은 삶을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그래서 그는 지식 중심의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을 비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그에게?“친구와 진리 둘 다 소중하지만,?진리를 더 존중하는 것이 경건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좋은 사람이 되고 행복한 사람이 되는 데는 지식보다는 좋은 습관이 요구됩니다. “한 마리의 제비가 봄을 만드는 것도 아니며 하루가 봄을 만드는 것도 아니니까.?그렇듯 하루나 짧은 시간이 지극히 복되고 행복한 사람을 만드는 것도 아니다.”?덕은 행위의 축적에 의해 즉 습관에 의해 획득됩니다. “정의로운 일들을 행함으로써 우리는 정의로운 사람이 되며,?절제 있는 일들을 행함으로써 절제 있는 사람이 되고,?용감한 일들을 행함으로써 용감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만약 폴리스에서 입법자들이 시민들에게 좋은 습관을 들이게 하면 좋은 시민들이 육성될 것입니다.?이러한 폴리스는 좋은 정치체제를 갖춘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에게 행복한 사람은 잘 행위하는 사람이고 잘 사는 사람이다.?행복은 덕에 따른 영혼의 활동입니다.?따라서 행복은 단순히 외적인 운명이나 우연에 의해 주어지지 않습니다.?이러한 요소들은 인간적 삶에 추가적으로 필요할 뿐이고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누구나 배움과 노력을 통해 인간적인 덕을 획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그래서 우연이나 운명에 의해 주어지는 것과 달리 이러한 행복은 많은 사람들에게 공통적일 수 있습니다.?소나 말 등 동물을 행복하다고 말하지 않은 것이 당연합니다.?이런 점에서 아직 어린이도 행복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아직 그 나이에는 덕에 따른 행동을?‘완전하게’(성숙하게)?실천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그렇다고 좋은 습관을 쌓지 못한다면 나이가 반드시 성숙을 보장하는 것이 아닙니다.?더 처참하게 물욕만 남은 비겁한 늙은이로 전락할 수 있습니다.?혹시 운이 좋지 않더라도 활동이 결정적이라면?“지극히 복된 사람들 중에서 누구도 비참하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그는 결코 가증스러운 일이나 비열한 행위들을 하지 않을 테니까.또 우리는 진정으로 좋고 분별 있는 사람은 모둔 운들을 품위 있게 견뎌 낼 것이라고,?현존하는 것으로부터 언제나 가장 훌륭한 것들 행위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는 행복과 관련해서 세 가지 종류의 삶을 제시합니다.?감각적인 쾌락을 추구하는 삶,?정치적인 성취를 이루는 삶,?지성적인 관조를 하는 삶이 그것입니다.?감각적인 쾌락을 추구하는 삶은 짐승의 삶을 선택하는 것이며 완전히 노예와 다를 바 없는 삶입니다.?정치적인 명예나 덕을 추구하는 삶도 역시 불완전할 뿐입니다.?명예는 다른 사람들의 평판에 의존할 뿐이며 덕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아무런 활동도 하지 못하고 큰 불행을 겪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본질적으로 정치권력과 이성은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이 외에도 그는 부를 추구하는 삶을 언급하다가 이를 재빨리 취소합니다.?그가 보기에 부를 추구하는 삶은 일종의 강제된 삶일 뿐이며,?부란 다른 것을 위해 수단일 뿐이니 진정으로 좋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관조적 삶이 가장 행복한 삶인 이유는?“무엇보다도 지성이?‘인간’인 한에서,?인간에게 있어서도 지성을 따르는 삶이 가장 좋고 가장 즐거운 것이다.?그러므로 이 삶이 가장 행복한 삶이기기도 하”기 때문입니다.?지혜에 대한 사랑,?즉 철학(philosophia)하는 삶이 그런 삶에 해당합니다.

하지만 그의 덕 윤리에도 한계가 있습니다.?그의 시민에는 노예와 여자가 제외됩니다.?당연히 그리스어를 하지 못하는 야만인도 제외됩니다.?그의 시민이란 좋은 집안에 태어나,?잘 양육을 받고,?행운이 뒷받침되는 남성 어른에 해당되는 것입니다.?이런 이유로 오늘날 공동체주의자들은 전통적 공동체주의에서 수직성과 배타성을 제거한 새로운 공동체 창출을 목표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논현정보도서관 다음 강의는?5월?20일 배우고 익힘에서 기쁨을 찾다?-?인생을 말하는?『논어』?:?구태환(상지대 강사)입니다. ?

 

 

왜 고상한 ‘존재’와 ‘무’가 아니고 흔해빠진 ‘있다’, ‘없다’인가?[철학을다시 쓴다]-28-1

왜 고상한?‘존재’와?‘무’가 아니고 흔해빠진?‘있다’, ‘없다’인가?[철학을다시 쓴다]-28-1

 

 

윤구병(도서출판 보리 대표)

 

*이 글은 보리출판사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지금부터 제가 이야기하려는 것은 이른바 서양에서?‘존재론(存在論?: ontology)’이라고 부르는 철학의 한 분야에 대한 것입니다.?이 분야는 전통적으로 존재와 무를 다루는 분야로 알려져 있습니다.?존재(存在)와 무(無)라니!?여기에서 잠깐 제가 강의실에서 학생들과 한 이야기를 끼워 넣겠습니다.

“여러분,?장 폴 사르트르라는 프랑스 철학자를 잘 아시지요?”

“예,?그분 소설가이기도 하지요?”

“그렇습니다.?그런데 그분이 비교적 초기에 썼던 유명한 철학책이 있습니다.?그 책 이름을 아는 분 계십니까?”

“예.”

“뭐지요?”

“《존재와 무》?아닙니까?”

학생들은 입을 모아 대답했습니다.

“존재와 무라??대단히 어렵고 심오한 말인 것 같은데,?여러분은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 이런 말 자주 씁니까?”

“가끔 씁니다.”

“그럼,?여러분들 가운데서 지난 한 주일 동안 날마다 한 차례 이상 존재나 무라는 낱말을 입 밖에 내본 사람이 있으면,?한번 손을 들어 보시겠습니까?”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러면 지난 한 주일 동안 이 낱말들을 한 번도 써 본 기억이 없는 학생이 있으면 손을 들어 보십시오.”

강의실에 앉아 있던 학생들 거의 모두가 쭈뼛쭈뼛 손을 들었습니다!?이것은 바로 제 강의를 듣는 철학과 학생들과 저 사이에 있었던 일입니다.?제 강의실에서나 있었던 특수한 경우일까요??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그러면 사르트르가 붙인 원래 제목을 써 보겠습니다.?《Letre et le Neant》입니다.?이 프랑스 말을 토박이 우리말로 바꾸면 어떻게 될까요?”

아무 대답이 없었습니다.

“L’etre et le neant =?있음과 없음(또는 임과 아님)입니다.?다시 물어 보겠습니다.?여러분 가운데 있다,?없다,?이다,?아니다라는 말을 빼고 단 일 분간이라도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나눌 자신이 있는 분은 한번 손을 들어 보십시오.”

제?‘존재론’?강의는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저는 칠판에 문장 하나를 썼습니다.

“사람은 개와 다르다.”

그리고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지금 쓴 글은 우리가 보통 하는 말을 옮겨 적은 것입니다.?이 말을 참과 거짓이 구별되는 문장,?곧 논리학에서 말하는 명제(命題?: proposition.?참 끔찍한 말이기는 합니다만 논리학 책을 보면 이런 낱말이 나옵니다.)로 바꾸면 어떻게 될까요?”

“사람은 개가 아니다.”

학생들이 외쳤습니다.?저는 그것을 그대로 받아 적었습니다.

사람은 개와 다르다. (일상 언어)?→?사람은 개가 아니다. (참말,?논리적 명제)

“그런데 왜 우리는?‘사람은 개가 아니다.’라고 말하고 그것을 참말이라고 하지요?”

제가 물었습니다.

“사람은 개와 다르게 생겼잖아요.”

“개는 네 발로 걷고 사람은 두 발로 걷잖아요.”

“개는 냄새를 잘 맡는데 사람은 그렇지 못하잖아요.”

“…….”

강의실이 온통 시끌벅적해졌습니다.

“잠깐,?사람과 개가 서로 다르니까 사람은 개가 아니라는 말은 아까 나왔던 말이고,?이제 한 단계 더 높여서 이른바?‘존재론’답게 말해 봅시다.?다시 말해서?‘있다’, ‘없다’는 말을 써서 사람이 개가 아니라는 사실을 밝혀 보자는 거지요.”

여기까지 이르면 학생들은 거의 잠잠해지기 마련입니다.?저는 칠판에 이렇게 썼습니다.

일상 언어의 차원?:?사람은 개와 다르다.

논리 언어의 차원?:?사람은 개가 아니다.

존재 언어의 차원?:?사람에게 있는?(어떤)?것이 개에게는 없고,?사람에게 없는?(어떤)?것이 개에게는 있다.

“여기에서 보다시피?‘같다’, ‘다르다’는 말은?‘이다’, ‘아니다’는 말로 바꿀 수 있고,?또 이 말은?‘있다’, ‘없다’는 말로 바꿀 수 있습니다.?다시 말하자면,?우리 둘레에 있는 서로 다른 온갖 것들을 가르는 기준이 있음과 없음에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곧 이어서 저는 네 개의 문장을 칠판에 써 내려갔습니다.

1.?있는 것이 있다.

2.?있는 것이 없다.

3.?없는 것이 있다.

4.?없는 것이 없다.

“자,?이 네 개의 글 가운데 어느 것이 참말이고 어느 것이 거짓말입니까?”

학생들은 문장 네 개를 꼼꼼히 뜯어보고 있더니 고개를 흔들었습니다.

“구별하기 힘든데요.”

“왜,?왜 그렇지요?”

“글쎄요.?참과 거짓을 가릴 수 있는 문장은?‘ㄱ은?ㄴ이다.’나?‘ㄱ은?ㄷ이 아니다.’라는 틀을 가지고 있잖아요.?그러니까?‘사람은 동물이다.’나?‘사람은 개가 아니다.’와 같이?‘이다’, ‘아니다’로 앞에 있는 말과 뒤에 있는 말이 이어져 있어야 참말인지 거짓말인지 알 수 있는데,?이 문장들은 그냥 있다,?없다로 끝나잖아요.?그래서 참말인지 거짓말인지 알쏭달쏭한데요.”

“맞습니다. ‘저기 사람이 있다.’나?‘여기에는 아무것도 없다.’?같은 말은 그 말만 보아서는 그것이 참말인지 거짓말인지 알 도리가 없습니다.?따라서 이런 말은 일반적으로 논리적인 명제라고 하지 않습니다.”

때로는 이렇게 모른다는 말이 참말이 될 수도 있습니다.?저는 다시 물었습니다.

“그런데 칠판에 적혀 있는 이 네 마디 말들은 모두 뜻이 있는 말인가요??다시 말해서 여러분은 이 말들이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있나요?”

“예,?알아들을 수 있겠는데요.”

“그럼 지금부터 우리 그 뜻을 한번 캐 보기로 하지요.”

학생들과 제가 머리를 짜내서 캐낸 뜻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1.?있는 것이 있다.?→?달리 이 말을 바꿀 필요가 없다.?이를테면 우리는?‘있는 것은 있고,?없는 것은 없는 거야.’라고 할 때 이런 표현을 쓸 수 있다.

2.?있는 것이 없다.?→?하나도 없다. (눈여겨볼 낱말?: ‘하나’)

3.?없는 것이 있다.?→?빠진 것이 있다. (눈여겨볼 낱말?: ‘빠진 것’)

4.?없는 것이 없다.?→?다 있다. (눈여겨볼 낱말?: ‘다’)

자,?여기서부터 어려워지기 시작했습니다.?첫 번째 말이야 그냥 넘어갈 수 있다 치더라도 두 번째부터는 그럴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있는 것이 없다.’는 말이 어떻게 해서?‘하나도 없다.’는 뜻을 지니게 될까??배운 도둑질이라고 저는 서양 고대 철학자 파르메니데스(Parmenides)의 생각을 빌려 이 문제를 해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있는 것은 하나일까요,?여럿일까요?”

제가 이렇게 물었더니,?학생들은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었습니다.?틀림없이?‘저 선생 어떻게 된 거 아냐?’?하고 머릿속으로 내 머리를 향해 손가락을 서너 바퀴쯤 돌렸음직한 표정들이었습니다.

“에이,?선생님도!?있는 것은 당연히 여러 개지요.?저도 있고 선생님도 있고,여기 책상도 있고,?가방도 있잖아요.”

“잠깐,?잠깐만요.?제 말을 잘못 알아들은 것 같은데 그게 아니라,?제가 조금 설명을 하고 나서 다시 묻지요.?저기 있는 예쁜 여학생,?학생은 여자가 분명하지요?”

와그르르 웃음소리.

“요즈음에는 겉모습만 보아서는 도무지 남자인지 여자인지 모를 때가 많아서 한 말이니 노엽게 듣지 말아요.?그럼 제가 칠판에 몇 개의 낱말을 적어 볼 테니까 이 낱말들 사이에 무슨 연관이 있는지 알아맞혀 보세요.”

여자―사람―동물―생물―있는 것

학생들은 이 낱말들을 연결시켜 문장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여자는 사람이다. (여자 수보다 사람 수가 더 많다.)

사람은 동물이다. (사람 수보다 동물 수가 더 많다.)

동물은 생물이다. (동물 수보다 생물 수가 더 많다.)

생물은 있는 것이다. (생물 수보다 있는 것 수가 더 많다(?))

“어때요,?한 방 먹으셨지요??있는 것은 헤아릴 수 없이 많잖아요.?있는 것이 하나뿐이라니 말이나 돼요?”

아이고 골치야.?그야말로 제가 여우처럼 제 꾀에 넘어가고 만 셈이었습니다.

 

있음과 없음의 연속성[철학을다시 쓴다]-27

있음과 없음의 연속성[철학을다시 쓴다]-27

 

 

윤구병(도서출판 보리 대표)

 

*이 글은 보리출판사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여러분들 가운데 혹시 파르메니데스(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존재론 및 인식론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고 존재의 철학자라 불림)나 고르기아스 같은 사람 이름을 들어보신 분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사실 파르메니데스는 아까 제가 했던 이야기의 뼈대를 세운 분입니다.?파르메니데스는 어떻게 이야기하느냐면, ‘있다’, ‘없는 것은 없다.’?있는 것은 굳이 형상화하자면 하나로 있고,?뭉쳐 있고,?구(球)형태, ‘스파이로에이데스’(sphairoeides)로 있다,이런 식 이야기를 합니다.?만일에 없는 것이 있다고 치자,?있는 것은 공간 속에 있거나 시간 속에 있어야 한다,?공간을 놓고 보면 여기 있는 것은 저기에 없고 저기 있는 것은 여기에 없다,?그런데,?없는 것은 없다,?따라서 공간은 없다.?아주 불친절하지만은 훨씬 더 정교한 논리를 그 제자인 제논이 개발을 해서 스승의 말을 뒷받침합니다.

다음으로 시간이 실제로 있다고 해 보자.?시간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로 나누어지는데,?있는 것은 오직 현재뿐이고 과거는 이미 없는 것이오,?미래는 아직 없는 것이다,?따라서 시간도 없다,?이 말도 충분히 뒷받침할 수 있는 논리적인 근거를 그 제자 제논이 만들어냅니다.?그런데 제논은 얼마나 우직한 사람이냐 하면 파르메니데스도 그렇고 제논도 그렇고,?여러분들이 잘 아는 피타고라스도 그렇고,?어떤 사람은 유클리드까지 여기에 포함시킵니다.(피타고라스도 유클리드도 이탈리아반도 사람이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습니다.?전부 이태리학파들입니다.?파르메니데스,?티마이오스,?제논 이 사람들이 전부 명석한 이태리학파 사람들이다,?그다음에 운동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질적인 운동을 뒤집어버린 사람인 갈릴레오까지 이태리 사람입니다.)?워낙 명석한 사람들입니다.

파르메니데스와 고르기아스는 같은 이태리 사람들인데,?이 두 사람이 내세우는 주장은 정반대입니다.?이 파르메니데스는?‘있다/?없는 것이 없다’,?이렇게 주장을 하고 있죠.

이 말에 고르기아스가 정면으로 치받습니다. ‘없다.?있는 것이 없다’?반대죠.?파르메니데스는?‘있다’고 하는데,?고르기아스는 없다,?무엇인가 있다고 치더라도 우리는 그것을 알 수 없다,?무엇인가 그 없는 것을 우리가 안다 치더라도 그걸 다른 사람한테 전달할 길이 없다,?입 밖에 낼 수도 없다,?이렇게 얘기합니다.

“한 사람은 있다고 하고,?한 사람은 없다고 하고.?그런데?‘있는 것’이?‘하나’라 하면 우리가 도대체 이런 말을 입 밖에 낼 수 있어요,?없어요?(대답 못하고 일동 웃음.)?조금 생략을 하려고 했는데 여러분들 표정을 보니까 생략을 못할 지점들이 자꾸 생겨납니다.?아까?‘있는 것이 있는 것이다’라고 했죠??이것이 참말이라고 그랬죠,?그렇죠?”

“네.”

“그리고 이것이 참과 거짓을 가리는 기준에도 들어맞죠??앞에 있는 것과 뒤에 있는 것이?‘이다’라는 잇는 말로 연결돼 있으니까.?그런데,?가만 있자, ‘앞에 있는 것’과?‘뒤에 있는 것’이라…….?그럼 있는 것이 둘로 있네요.?우선 있는 자리가 다르지 않습니까??하나는 주어의 자리에 있고 하나는 서술어 자리에 있지 않습니까??하나는 임자말 자리를 차지하고 있고,?하나는 풀이말 자리에 있는데 이게?‘이다’로 연결이 되네요.?둘 이상이 되어야?‘이다/?아니다’로 연결시킬 수 있지 않습니까??그렇죠? ‘있는 것이 있는 것이다’??이게 말이 되요??아까 있는 것은 둘로 있을 수 없다고 그랬잖아요.?그런데 지금‘있는 것’이 둘로 나뉘어 멀쩡하게 저마다 자리 하나씩을 차지하고 있잖아요.?이게 말이 되냐고요.?말이 안 되죠.?이건?‘거짓말’이다. ‘참말’임을 보장해주는 가장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근거라고 생각했던 게?‘거짓말’이 돼 버리네요. ‘둘’이 있으면?‘둘’이 차지하는 자리가 있기 때문에?‘이어짐’?곧 연장성이 나온다고 합니다. ‘공간’이 곧 거기에 딱 나와 버립니다.?아까?‘있는 것’과‘없는 것’?둘을 놨을 때?‘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것’이 이 둘을 나누는 경계가 되어서 이 세 개가 관계를 맺게 되지요??다 이어져 버리죠??그래서 연장선이 생겼는데…….

말하자면 이런 겁니다.?여러분들 가운데 수학을 잘 하시는 분 계시죠??뭘 기준으로 해서?‘하나’라 하죠??피타고라스는?‘하나’를 뭘로 봤습니까??점(point). ‘하나’?하면 한계가 하나인 것이죠.?한계가 하나인 것은 보입니까,안보입니까?”

“보여요.”

“연장성이 없는 것도 보입니까?”

“아,?아뇨 안 보여요.”

“안 보이죠??그렇죠??안 보여야 합니다.?그러면?‘둘’은요??점이 둘이 모이면 이건?‘선’(line)이라고 하는데 선분에는 한계가 둘 있죠.?양쪽에.?그렇죠?그런데 두 한계도 안 보이지만 그 사이에 있는 것도 안 보이죠??우리의 눈에 들어오는 것은 연장성을 가진 것입니다.?그래서 눈에 들어오죠??그 다음에 이제?‘셋’?하면 무엇이 되죠?”

“면.”

“그렇죠. ‘면’,?한 계가 셋인 것은 면(plane).?삼각형.?삼각형이 최소의 한계로 이루어진 면이죠.?그러면?‘넷.’?한계점이 네 개 있는 것은 뭐죠??입체!?이렇게 한계가 넷이 있는 것을 입체라고 그러죠.?우주에 있는 삼라만상을 다 살펴봐라,?한계가 하나가 있거나 둘로 있거나 셋으로 있거나 넷으로 있거나 하지 않으냐, ‘점’, ‘선’, ‘면’, ‘입체’로 모두 이루어져 있다,?이 모든 것을 전부 보태면 몇입니까,?점이??열 개죠? 1+2+3+4는?‘열’이 되는데 이것은 신성한 숫자다,?테트락티스(tetraktys)는?‘신성한 수다’라고 피타고라스학파 사람들은 주장합니다.?피타고라스학파 사람들은 수로 이 세상의 모든 다(多)와 운동을 규정하려고 들었습니다. ‘결혼’이란 건 수로 나타낼 때 몇이냐??이를테면?24다. ‘행동’이란 건 뭐냐? 36이다라든지 이렇게 모든 것을 수로 규정하려고 들었습니다.?여기서 합리적인 핵심을 여러분들께서 이해해야 합니다.?수와 비례관계로 삼라만상을 파악하려고 했다는 거.?이 말이 무슨 말이냐 하면 이 우주를 지배하는 합리적인 법칙을 찾아내려고 그 나름으로 무척 애를 썼다는 것이죠.”

그런데 실제로 우리 사고 내용을 들여다보자,?하나만 있으면 거기에 대해서 우리는 입도 벙긋할 수 없다,?왜 그러냐면 우리가 무슨 말을 하게 될 때 참과 거짓이 구별되려면 꼭 주어와 술어의 형태로 나와야 하는데,?같음과 다름을 구별하려는 순간에 있는 것이 여러 조각으로 깨어져 버린다,?또는?‘있는 것’이 아닌?‘없는 것’을 있다고 받아들여야 한다,?없는 것을 있다고 한다는 게 거짓말이라고 했죠.?그런데 없는 것을 있다고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다와 운동을 설명할 길이 없고,?이것과 저것을 가려볼 길도 없고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이게?‘거짓말’의 여러 모습인 오류,?실수,?사기…….?이런 모든 것의 존재론적인 근거가 되는 겁니다.?우리가 말을 하면서 이 세상 살아가려면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절반쯤 거짓말을 깔고 들어간다는 것을 이해하면 됩니다.?온전한?‘참말’은 입 밖에 낼 수가 없습니다.?온전한 참말이라는 것은 침묵밖에 없다고 생각됩니다.?그래서 선불교에서 면벽수련하는 수좌들이?‘개구즉착’,?입만 벙긋하면 틀린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제 제가 입만 열면 제 입에서 나오는 말이 거짓말이라고 한 이유를 이해하겠죠??이게 죄다 거짓말입니다.?귀가 왜 두 개 있느냐 하면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리라고 양쪽에 있는 겁니다.?절대로 외우지 마세요.?여러분들에게 솔깃했던 말들도 다시 한 번 의심해 보십시오.?제가 아까 이야기했죠? ‘설득술’이라고.?제가 이제까지 했던 말이 바로 그?‘설득술’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제부터 저도 모르는 영역으로 들어갑니다.

*국어: ‘뭐 하지?’?독일어: ‘Was tun?’?불어: ‘Que faire?’?영어: ‘What do?’

시제는 현재로 되어 있죠,?그렇죠??그런데 이게 현재입니까? (대답 없음.)현재라면 여러분께 이런 의문을 제기하지 않습니다.?여러분들 멀쩡하게 제 강의 듣고 있잖아요.?뭐 하지??하고 질문 던질 시간도 없어요.?그렇죠??이것은 앞으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뭐지??이 이야기죠??미래와 연관되어 있습니다.?그렇죠??올 날하고 연결이 되어 있는데…….

저도 사실은?‘할’?일은 많은 거 같은데?‘하는’?일 없이?‘되는’?대로 살아가는 경우가 많습니다.?그래서 그냥 실제로 뭐 할 일이 없을까??되는 대로 살지 않으려면 조금 정신 바짝 차리고 할 일을 찾아야지,?이런 생각을 해서 그 가운데서 골라낸 것이 시골 가서 농사짓는 일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