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돌봄 : 플라톤의 [파이돈] <도봉도서관 나이듦의 철학> 1

영혼의 돌봄: 플라톤의 [파이돈] <도봉도서관 나이듦의 철학> 1

조은평(건국대 강사)

 

 

 

  1.  상처받은 슬픈 영혼의 자화상

 

-이번 시리즈 강의의 목적은 고전을 통해 우리 삶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마련하는 것.

-?그렇다면 고전이란??누군가 고전이란 이런 거라고 말하더군요.?모두가 읽었다고 생각하지만 뜻밖에 별로 많이 읽지 않는 책(장식용),?또는 친구가‘요즘 무슨 책 읽어?’라고 물어올 때?[논어]를?‘다시 읽고 있어!’라고 말하듯이?‘다시 읽는다’고 말하는 책.(당연히 읽어야하는 것으로 치부되는 게 고전이기에 처음 읽는다고 말했을 때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명예에 손상이 가지는 않을까 하는 데서 기인하는 방어기제)

-?그럼 오늘 함께 검토해 볼,?플라톤의?[파이돈]을 읽어보신 분?

-?또한 이번 시리즈 강의의 큰 주제가?‘나이듦의 철학’인데요.?뭐 어떤 의도로 기획된 것일까요?

-?나이를 먹어 간다는 건,?사실 이중적이죠.?한편으로 세상에 대해 이제야 비로소 잘 알게 된다는 긍정적인 의미도 있는 반면에,?살면서 경험하고 판단한 삶에 대한 자신만의 가치관이 탄탄해지면서 도리어 그런 관점에 매몰될 수 있다는 점에서 부정적인 의미도 지니고 있죠.

-?그럼에도 여러분들은 나름 삶에서 마주하게 되는 여러 상황들 속에서 때론 충격을 받으면서 나름의 질문들을 던지게 되죠.

-?그렇다면 여러분이 나이가 들면서 점차 고민하게 되는 삶의 문제들과 질문들에는 어떤 것들이 있으신가요?

-?과연 바쁘게 주어진 과제들을 수행하면서 살아온 인생의 중년.?중년의 우리들을 뒤흔드는 삶의 충격들을 무엇일까요??또 그런 충격들 앞에서 어떤 고민과 질문들을 갖게 되나요?

-?누군가 말하더군요.?갑자기 내 삶이 하찮게 느껴지고 내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지는 순간은 바로 내 옆에 있는 친구가 먼저 성공한 모습을 절실히 직면하게 될 때라고요.

-?이런 순간,?우리는 한없이 비참해 지면서,?이렇게 비참함을 느끼는 자기 자신을 더 한심하게 여기게 되죠.?정말 친했던 친구가,?선배가 후배가 먼저 잘 되는 모습을 보면서 사실 축하하고 칭찬해 주어야 하는데,?그러지 못하고 그야말로 쪼잔한 마음을 갖게 되는 우리의 슬픈 영혼의 자화상.

-?대체 이런 영혼의 상처를 어떻게 치유해야 할까요??아니 이런 영혼의 상처는 왜 생기는 걸까요??아니 대체 영혼이란 뭘까요??그저 과거의 유물에 불과한 개념은 아닐까요?

-?지금과 같은 현대 사회에서도?‘영혼’에 대한 논의가 유의미할까요??더구나 오늘 강의의 주제인?‘영혼의 돌봄’이라는 논의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오늘 바로 여러분들과 우리들의 이 슬픈 영혼의 자화상에 대해 이야기해 보려 합니다.?이를 위해 플라톤이?[파이돈]에서 묘사한 소크라테스의 의연한 죽음과 영혼에 대한 논의를 함께 검토해 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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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영혼 불멸’과?‘영혼의 돌봄’

 

1) ‘소크라테스의 죽음’에 대한 단상들

– ‘악법도 법이다!’라고 인정하며 독배를 든 소크라테스??과연?

– NO!?소크라테스는 절대로 이렇게 생각하지는 않았다.?그저?‘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오히려 적극적으로 좋은 것으로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인다.

-?그렇다면 왜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죽음 앞에서도 그렇게 태연하게 삶을 마감할 수 있었을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삶과 철학에 대한 소크라테스 자신의 생각을 좀 더 알아볼 필요가 있다.

2)?소크라테스의 삶과 철학

-?소크라테스에게?‘좋은 삶’= ‘지혜를 추구하는 삶’

-?아울러 지혜란?‘상기’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앎.

-?그리고?‘상기’가 가능하다면 영혼은 이미 이전에 존재했을 수밖에 없다.

-?아울러 죽음 이후에도 영혼은 불멸,?불사한다.?더구나 삶을 사는 동안 영혼을 잘 돌본 사람들은 죽음 이후에도 더 좋은 곳을 가는 반면에,?영혼을 잘 돌보지 못한 사람들은 하데스에서 심판을 받는다!

-?그렇다면 소크라테스가 이처럼?‘영혼의 불멸,?불사’를 논증하는 이유는 뭘까요?

-?여러 논란이 있겠지만,?일단 분명한 것은?‘영혼의 돌봄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것은 철학자들 뿐 아니라 일반사람들도 좋은 삶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해야되는 일’이라는 점을 역설하기 위해서.

-?바로 자신의 죽음 앞에서도 이러한 입장을 의연하게 전개하고 있는 소크라테스의 마지막 모습을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는 작품이 바로 플라톤의?[파이돈]!

3)?플라톤의?[파이돈]

:?소크라테스가 그의 벗들과 나눈 마지막 철학적 대화와 소크라테스의 죽음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는 대화편.?플라톤은?‘소크라테스의 죽음’이라는 극적인 상황을 배경으로 선택함으로써,?소크라테스가 행한 것들과 이야기한 것들에 특별한 중요성과 무게를 부여하고 있다.

이 대화편의 중심 주제는 영혼의 불멸.?하지만 영혼 불멸을 증명하는 것이[파이돈]을 저술한 플라톤의 목표였던 것은 아니다.?오히려 이 작품을 통해 그가 전하고자 했던 메시지는 다른 데 있었다.?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자신의 영혼을 돌보는 일이라는 것,?그리고 이것은 오직 철학함을 통해서,?즉 영혼을 육체적인 것들로부터 가능한 한 분리시키고,?순수한 지적 파악의 대상들을 오로지 이성의 힘으로 추구함으로써 성취될 수 있다는 것이 그것이다.?플라톤은 이 메시지를 단순히 소크라테스의 입을 통해 전하고 있지 않다.?그것은 오히려 그가 묘사하는 소크라테스의 태도화 행위들을 통해 구체화된다.?죽음을 앞둔 상황에서도 결코 노여워하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오로지 정확한 사태의 진실을 알기 위해 토론에 몰두하는 모습은 플라톤이 전하고자 하는 진정한 철학자의 상,?바로 그것이었다.?플라톤,?전헌상 올김, [파이돈],?정암학당 플라톤 전집,?이제이북스, 2013. 9-10쪽.?작품해설 참조.

(참조.?플라톤의 대화편들은 보통 저술 시기에 따라 전기,?중기,?후기 대화편으로 구분. [파이돈]은 중기에 속하는 작품. [메논], [향연], [파이드로스], [국가]가 중기 작품들.?대략?[메논] -> [파이돈] -> [국가]?순서로 저술된 것으로 추정.)

 

-?영혼에 대한?[파이돈]의 논의에서 두드러진 특징

1)?영혼과 몸의 확고한 이분법

:?인식론적 측면에서,?영혼과 몸의 이분법은 오로기 순수한 이성 작용에 의해서만 진리가 포착될 수 있으며,?몸에 속한 감각기관들을 통한 모든 인식은 기만적이라는 주장으로 이어진다. (플라톤의?‘동굴의 비유’,?이데아론)

:?또한 종교적인 측면에서,?이 이분법은 영혼이 몸으로부터 유래하는 모든 욕망들로부터 해방되지 않는 한 정화될 수 없고 행복해질 수 없다는 주장과 맞닿아 있다. (금욕주의적 특성)

2)?다른 대화편들보다 종교적 색채가 강하다는 점.

:?몸이 영혼의 감옥이라는 관점,?육체적 욕망에 대한 비판과 거부,?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영혼의 정화라는 테마,?상기와 연결된 윤회 사상,?사후세계에서 일어나는 죽은 자의 심판과 그에 따르는 보상과 처벌. (이런 특징들은 주로 피타고라스 학파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해석)

 

– [파이돈]의 대략적인 내용

<도입부(57a-61c)>

– [파이돈]편 제목이 파이돈인 이유??소크라테스의 마지막 이야기를 전해주는 전달자가 파이돈.?일종의 액자구조.?파이돈의 이야기는 소크라테스가 사형선고를 받은 후 왜 곧바로 형의 집행이 이루어지지 않았는가에 대한 설명으로부터 시작.

-?사형 집행이 늦어진 이유는 테세우스를 기념하기 위해 델로스 섬으로 떠난 배가 돌아오기 전까지는 도시를 정결히 해야 한다는 법 때문.?드디어 델로스로 떠났던 배가 귀환한다는 소식을 듣고,?마침내 소크라테스의 사형 집행이 임박했음을 알게 된 제자들과 친구들이 평소보다 일찍 감옥에 찾아가 마지막 시간을 보내며 나눴던 이야기를 전해주게 된다.

<철학자와 죽음(61c-69e)>

-?본격적인 철학적 토론의 시작?:?제자들과 친구들은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앞두고 한 없이 침울한데,?정작 소크라테스는 의연한 태도를 보이는 모습!심지어?“분별이 있다면 최대한 빨리 나를 따라오라”(61c)고 누군가에게 전해달라는 농담까지.

DSC09172-1-?제자들 입장에서는 당연히 이런 태도가 의아해서 질문을 한다. “소크라테스,?스스로를 해쳐서는 안 되는 법인데 철학자는 죽은 사람을 따르려 할 거라고 어떻게 말씀하실 수 있는 거지요?”

-?이에 소크라테스는 철학자(지혜를 사랑하는 자)라면 임박한 죽음에 대해 노여워하지 않고 태연히 그것을 맞이할 것이라고 주장.

-?심지어?‘진정한 철학자들은 전 생애를 통해 죽음을 열망하고 추구한다’는 놀라운 주장을 제기한다.

-?그렇다면 소크라테스는 왜 이렇게 생각한 것일까??우선 그는?‘죽음이란 몸으로부터의 영혼의 해방’이라는 점에서 논의를 진행.?몸과 그에 결부된 감각지각을 통해서는 참된 존재들에 대한 앎이 획득될 수 없음을 지적한다.오로지 참된 앎은 오직 순수한 사고와 추론에 의해서만 획득될 수 있다.?그런데 순수한 사고와 추론은 오직 영혼이 몸의 영향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된 상태에서만 가능하다.?따라서 만일 죽음이 몸으로부터의 영혼의 해방을 의미한다면,?참된 존재에 대한 앎을 추구하는 철학자들은 결국 죽음의 상태를 추구하고 열망하는 셈이다.(‘동굴의 비유’?참조)

-?그렇다면 평생 이러한 상태를 염원하던 사람이 막상 그렇게 될 수 있는 상황,?즉 죽음을 앞두고 노여워한다는 것은 지극히 우스꽝스러운 일일 것이다.

<영혼 불멸에 대해 옹호하는 논증들(69e-107b)>

-?이처럼?‘철학자는 죽음을 태연히 맞이할 것’이라는 소크라테스의 주장은 사실상?‘영혼이 죽은 다음에도,?즉 몸과 분리된 뒤에도 소멸하지 않고 계속 존재할 것’이라는 입장을 전제하고 있다.

-?이제 제자들은 과연 영혼 불멸이라는 전제가 참인지에 대해서도 논란이 많기에 해명이 필요하다고 요구한다.

-?결국 이후부터 소크라테스는 영혼 불멸에 대한 일련의 증명들을 선보이고,?다시 제기되는 제자들에 반론에 또 다시 자신의 입장을 해명하는 논의가 이어진다. ( 1)?순환 논증?/ 2)?상기 논증?/ 3)?유사성 논증, 4)?심미아스와 케베스의 반론?/ 5)?심미아스에 대한 답변?/ 6)?마지막 논증?)

-?이런 여러 논증 중에서 세 가지만을 간략하게 살펴보면,

1)?순환 논증(삶과 죽음의 순환)

-?소크라테스의 첫 논변은 변화에 관한 일반 법칙을 근거로 삼는다.?어떤 사물?x가?F라는 속성을 가지게 되었다면,?그리고?F에 반대되는 속성?-F가 존재한다면, F를 가지게 됨이라는 변화는?-F로부터의 변화이다.?말하자면?‘모든 만물은 반대되는 것에서부터 생겨난다’는 점에서 출발하는 셈이다.

-?예를 들어, ‘잠을 자는 것’과?‘깨어있는 것’은 서로 반대되는 속성이다.?그러나?‘잠을 자는 것’은?‘깨어있는 것’에서부터 시작되며, ‘깨어있는 것’?또한‘잠을 자는 것’에서 생겨난다.?이와 마찬가지로?‘강하게 됨’은?‘약한 것으로부터 강하게 되는 것’이고, ‘나빠짐’은?‘좋은 것으로부터 나쁘게 되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이런 원칙을?‘죽음과 삶’에도 똑같이 적용한다.?죽음은 삶의 반대이다.?어떤 것이 살게 되는 것은 죽어 있는 것으로부터 살게 되는 것이고,?역으로 죽게 되는 것은 살아 있는 것으로부터 죽게 되는 것이다.?이러한 변화는 양”눰袖막??균형 있게 일어나야만 한다.?즉?F로부터?-F로의 변화는 반드시?-F로부터?F로의 변화와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그렇지 않으면 모든 것이 두 반대항 중 한 쪽의 성질을 지니게 되고,?더 이상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원칙이 앞서 제시된?‘반대항으로부터의 변화’라는 원칙과 결합하면,?죽은 자들이 산 자들로부터 생겨나는 것 못지않게 산 자들이 죽은 자들로부터 생겨난다는 결론이 따라 나온다.?그런데 산 자들이 죽은 자들로부터 생겨나기 위해서는 죽은 자들의 영혼이 몸과 결합하기 이전에도 이미 존재해야 한다.

2)?상기 논증(상기설을 통해 태어나기 이전에도 영혼이 존재한다는 점을 논증)

-?무언가를 알게 되는 것은 결국 상기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그런데 상기(anamnesis)란?:?어떤?a라는 사람이?X를 통해?Y를 기억해 내는 것!

-?예를 들어,?누군가(a)가 사랑하는 사람의 물건이나 사진(X)을 보고 그 사랑하는 사람(Y)을 기억해 내는 것 같은 방식이 상기라는 것.?기본적인 논증의 구조는 다음과 같다.

1. a는?Y를 이전의 어느 시점에 알고 있어야 한다.

2. a는?X를 감각지각을 통해 인지할 뿐만 아니라?Y를 떠올려야 한다.

3. X와?Y는?(유사하지만)?서로 다른 지식의 대상이어야 한다.

4. a가?Y와 유사한?X에 의해서?Y를 상기했다면, a는?X가?Y에 유사성에 있어서 뭔가 부족한지 그렇지 않은지를 떠올린다.

-?그런데,

5.?우리는?‘같은 것들’(X)로부터?‘같음 자체(Y)’에 대한 지식을 떠올린다.

– 5와 같은 기억도 역시 상기.

-?따라서 감각지각을 통해?‘같은 것들’로부터?‘같음 자체’를 떠올리고,?또 이 둘이 유사성에서 있어서도 서로 다르다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이미 감각지각을 갖게 되기 이전에,?다시 말해 태어나기 이전에 이미?‘같은 자체’를 알고 있어야 한다.

-?결국?‘같은 자체’에 대한 앎은 태어나기 전에 이미 영혼이 가지고 있어야하면,?이는 우리의 영혼은 태어나기 전에 이미 존재해야 함을 함축한다.

(?참조)?예를 들어?[메논]편에서 노예소년에게 삼각형에 대해 상기시키는 논의.

삼각형 모양의 그림,?현실에서는 완벽한 삼각형은 없지만 유사한 삼각형의 모양을 통해?‘완벽한 삼각형’에 대해 떠올릴 수 있다.?노예소년도 그럴 수 있다면 누구나 그럴 수 있다.

그렇다면 누구나 태어나기 이전부터 이런 완벽한?‘아름다움 자체’에 대해 알 수 있다. )

3)?유사성 논증

-?이제 상기 논증에서 밝혀지는 것은 결국 영혼이 태어나기 전에도 존재한다는 점.

-?하지만 그럼에도 죽고 난 다음에도 그것이 계속 존재하고 불멸한다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는 반론 제기. ‘몸으로부터 빠져나온 영혼이 바람에 흩어져 사라져 버리는 것은 아닐까’라는 우려 제기.

-?이에 소크라테스는 다음과 같이 답변

-?우선 존재하는 것들을?‘가시적인 종류’와?‘비가시적인 종류’로 구분하고,그 각각이 가지는 특징들을 열거한다. ‘가시적인 것’들은 결합적이고 결코 동일한 상태를 유지하지 못하는 반면, ‘비가시적인 것들’은 비결합적이고 항상 동일한 상태를 유지한다. (예를 들어?:?같은 것들/같은 자체,?아름다운 것들/아름다움 자체,?사랑하는 것들/사랑 자체?,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그렇다면 몸과 영혼은 각각 둘 중 어떤 종류의 것들과 유사한지를 묻는다.당연히 몸은 가시적인 것들과 유사하고,?영혼은 비가시적인 것들과 유사하다는 동의를 얻어낸다.?이로부터,?결합적인 성질을 지니는 몸은 쉽게 해체되기 마련이지만,?비결합적인 성질을 지니는 영혼은 해체되지 않고 늘 자신의 상태를 유지할 것이라는 결론이 도출된다.?따라서 우리는 죽은 뒤에 우리의 영혼이 바람에 흩어져 날아가 버리지나 않을까하고 어린아이처럼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이런 논증에 뒤이어?“철학함이 영혼을 돌보는 최선의 길”이라는 관점이 생동감 넘치는 비유를 통해 제시.

 

<신화?(107c-115a)>

-?영혼 불멸에 관한 논변이 종료된 이후,?소크라테스는 영혼이 사후에 겪게 되는 일에 관한 신화적인 이야기를 들려준다.

 

<소크라테스의 죽음?(115a-118a)>

-?소크라테스가 의연하게 독약을 마시고 죽음을 맞이하는 모습에 대한 묘사.

 

 

3. ‘영혼의 돌봄’은 어떻게 가능할까??또 어떤 식으로 실천해야 할까?

 

-?결국 플라톤의?[파이돈]이 전하는 메시지는?‘영혼의 돌봄’

-?아울러 이는?‘아름다움 자체’, ‘좋음 자체’를 추구하기 위해 몸이라는 감옥에 갇힌 영혼을 늘 돌보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

-?하지만 아마 영혼의 불멸과 정화되지 못한 영혼의 심판이라는 테마는 우리 현대인들에게는 그저 낯선 신화에 불과할 것.

-?그럼에도?‘영혼의 돌봄’이라는 테마는?‘어떻게 살아야하는가’라는 삶의 근본적인 물음과 관련해서는 여전히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준다.?왜냐하면 영혼이 정말 존재하고 불멸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우리는 또 한편으로는 여전히?‘좋은 삶’과?‘아름다운 삶’이란 어떤 것인지 여전히 고민하면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오늘날?‘영혼을 돌보면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갖는 걸까??또 그런 삶을 사는 것은 어떤 식으로 가능할까?

 

1)?자신의 영혼을 잘 돌보는 개인들로 이루어진 사회?

-?악마에게 영혼을 팔지 않도록 항상 자신의 영혼을 돌보는 사회?

-?사회가 아무리 각박하고 경쟁적으로 이루어지더라도?‘아름다운 영혼’을 유지하기 위해 정말 필사적으로 자신의 영혼을 돌보는 개인들의 사회?

-?하지만 우리 자신들도 잘 알고 있듯이,?때때로 내 영혼을 팔아버린 것 같은 느낌을 갖게 될 수밖에 없는 사회가 우리들의 사회이지 않을까?

(예를 들어 드라마?[빅맨]?속의 이야기?:?주인공 김지혁?VS?강동석?/?영혼을 팔 수밖에 없는 강동석의 부하직원!?그렇다면 이에 비해 주인공 김지혁이 자신의 영혼을 지킬 수 있었던 비법은??타고난 천성??시장 사람들에게 받은 돌봄의 관계,?그 관계가 만들어준 인성이지 않을까!)

-?말하자면, ‘영혼의 돌봄’이라는 과제는 어쩌면 우리 모두 늘 추구하고 싶은 삶의 목표일지도 모르지만,?사회적 현실에서 생존하기 위해 또 어쩔 수 없이 내 영혼을 그 무언가에 팔아버릴 수밖에 없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이지 않을까??그렇다면 더 중요한 과제는?

2) ‘영혼의 돌봄’을 방해하는 현실에 대한 인식과 실천?

– [피로사회](한병철)의 테마를 생각해 보자.

-?끊임없이 성과를 강요하는 사회(성과사회),?무엇이든 할 수 있다!?또 그래야만 나도 성공할 수 있다!라는 사회적인 강요 속에서 자기 자신도 착취하는 사회에 대한 비판.

-?또한?‘민주주의’가 만들어내는 주체들의 어리숙함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자.

 

<알랭 바디우의 민주주의적 주체에 대한 비판>

-?플라톤은 당시의?‘민주주의’를 비판하면서?‘철인정치’를 내세운다.?당연히 오늘날 보기에 귀족주의적이고 보수적인 입장처럼 보인다.

-?하지만 알랭 바디우는 이런 플라톤의 논의에서?‘민주주의’가 지닌 문제점들을 이끌어 낸다.?그것은 민주주의가 만들어 내는 주체의 유형에 대한 비판이다.

-?바디우는 이렇게 언급한다.( [민주주의는 죽었는가],?난장, 2010?중에서)

“민주주의라는 상징이 사람들에게 끼치는 해로운 힘은 그것이 만들어내는 주체의 유형에 집중된다.?그런 유형의 핵심적인 성격은 한마디로 말해 이기주의,?하찮은 향락을 추구하는 욕망이다.”(31쪽)

-?바디우에 따르면,?민주주의적 주체는 젊은 시절에는?‘구속받지 말로 즐겨라’는 식으로?“자유로워지기를 상상하는 헤픈 탐욕”을 누리다가 늙어서는“예산을 따지고 안전을 추구하는 구두쇠”로 변모한다.(34쪽)?따라서 현재의 민주주의가 이처럼 끊임없이 이기적인 욕망만을 추구하고 자본주의 체제 자체의 안전만을 추구하는 주체를 양산한다면,?이런 식의 순환의 질서에서 빠져나오게 하는 것이야말로 제대로 된 정치다.?따라서 지금처럼 상징화된?“‘민주주의’라는 단어의 모든 권위를 중지시키면서 플라톤의 비판을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연습을 하고난 뒤에야 우리는 결국 그 단어를 본래 의미대로 복원할 수 있다.?민주주의란 인민들이 스스로에 대해 권력을 갖는 것으로 간주된 실존이다.?민주주의란 국가를 고사시키는 열린 과정,?인민에 내재적인 정치이다.”(41쪽)

-?아울러 플라톤의?[국가]편의 일부를 현대판으로 각색해서 이렇게 번역한다.

조은평 도봉 그림1

-?그렇다면 결국 문제는 이런 정치적 현실에 벗어나는 길을 모색하는 것이야말로 제대로 된?‘영혼의 돌봄’을 가능하게 하는 방식이 될 것.

-?이는?‘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고민,?즉?‘좋은 삶’과?‘아름다운 삶’을 그저 혼자 고민하며 시지프스처럼 외롭게 돌을 굴리는 것이 아니라, ‘좋은 삶’과?‘아름다운 삶’을 모두가 누릴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길을 모색할 과정 속에서 비로소 가능할 것이다.

 

행복에 이르는 길-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론<논현정보도서관 행복한 고전읽기>4

행복에 이르는 길-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론<논현정보도서관 행복한 고전읽기> 4

김성우(兀人고전학당 연구소장, ⓔ시대와 철학 편집위원장)

 

 

덕 윤리란 무엇인가?

‘세월호 참사’ 와중에서도 칭찬과 명예를 듣는 분들이 있습니다. 반면에 비난과 불명예로 시달리는 자들도 있습니다. 20대의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승객들을 끝까지 구하고 자신을 희생한 여승무원이나 여선생님의 용기와 희생은 사람들의 귀감이 됩니다. 반면에 칠순을 바라보는 연륜에도 승객과 배를 버리고 도망간 선장이나 희생자 명단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은 고위 공직자, 피해자인 어린 학생의 마음에 상처를 주더라도 조난 구조에 방해가 되더라도 취재경쟁에 열을 올리는 기자들이 비판의 도마 위에 올랐습니다.

이처럼 관련자들의 용기와 비겁, 칭찬과 비난, 명예와 불명예, 한마디로 미덕과 악덕이 화제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됨, 성품이 문제의 중심이 되고 있습니다. 또한 문창극 국무총리 후보자의 역사관이나 애국심 논란도 이러한 미덕과 악덕의 범주에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악덕과 미덕의 논란은 개인의 물질적 행복을 추구하는 현대적인 가치관이 아니라 전통적인 가치관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우리의 전통에 유교가 있다면 서양의 전통에 덕 윤리가 있습니다. 이러한 덕 윤리를 대표하는 고전이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입니다. 이 책은 기독교 이전에 서양 시민의 윤리관을 대표하고 있습니다. 그 요지는 신이 없어도 엄격한 도덕법칙이나 이기심에 호소하지 않고도 인간이라면 누구나 지닌 지성(정신)과 좋은 습관을 바탕으로 윤리적인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강연에서 추천하고 싶은 책은 우선 고전 그리스어를 우리말로 훌륭하게 번역한 ?<니코마코스 윤리학>(이창우·김재홍·강상진 옮김, 이제이북스, 2006)입니다. 그 시대적 배경과 철학적 분위기를 알고 싶다면 <지중해 철학 기행>(클라우스 헬트, 이강서 옮김, 효형출판, 2007)을 추천합니다.
 
 

어떻게 살 것인가(소크라테스)

서양 고대의 그리스 문화에서 윤리학의 중심 주제는 행동이 아니라 사람됨이며 더 나아가 삶 자체입니다. 다시 말하면 칸트처럼 도덕률에 합치하는 올바른 행동이나 벤덤처럼 쾌락의 양을 늘리는 행동이 아니라 ‘좋은 삶’이 주제입니다. 인간이 산다는 것은 단순히 생존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좋은 것을 추구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아버지가 마케도니아 궁전의 시의였던 아리스토텔레스는 의학과 생물학에 밝았습니다. 동식물에 정통했던 그는 동물적인 생명(zoe)과 인간다운 삶(bios)을 구분했습니다. 그에 따르면 “산다는 것은 심지어 식물에게까지 공통되는 것으로 보이지만, 우리는 (인간에게만) 고유한 것을 찾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므로 영양을 섭취하고 성장하는 삶은 갈라내야 할 것이다. 다음으로는 감각을 동반하는 삶이 뒤따를 것이지만 이것 또한 분명 말과 소, 모든 동물들에 공통되는 삶이다.” 그러면 남는 것은 무엇인가요? “이성(logos)을 가진 자의 실천적 삶”입니다.

이러한 인간다운 삶과 관련해서 클라우스 헬트는 <지중해 철학 기행>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이 비오스, 즉 삶의 영위는 일정한 습관에 토대를 둔다. 이 습관은 우리에게 본성으로 부여된 것일 수도 있지만 획득될 수도 있다. 특정한 습관을 갖는 것이 과연 좋으냐를 두고 인간은 다른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고 근거를 댈 수 있다. 이처럼 대화를 나누고 근거를 대는 능력을 그리스어로 ‘로고스’라고 한다. 인간은 로고스를 지닌 동물, 로고스를 지닌 생명체이다. 이것이 바로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한 고전적인 인간의 정의로서, 2000년이 넘도록 끊임없이 인용되고 있다.”

좋은 삶은 좋은 것을 겨냥합니다. 그런데 가장 좋은 것(최고선)을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eudaimonia)이라고 부릅니다. 이와는 반대의 의견도 있습니다. 칸트의 도덕철학을 현대 민주적 절차주의로 발전시킨 존 롤스는 그의 유명한 저서인 <정의론>에서 행복보다는 정의가 더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진리가 사상 체계의 제일 덕목인 것처럼 정의는 사회 제도의 제일 덕목이다. 이론이 아무리 정교하고 간명하다 할지라도 그것이 진리가 아니라면 기각되거나 교정되어야 하듯이, 법이나 제도가 아무리 효율적이고 질서정연한 것일지라도 그것이 정의롭지 못하면 개혁되거나 폐지되어야 한다. 각 사람은 사회 전체의 행복이라도 능가할 수 없는, 정의에 기초를 둔 침해불가능성을 갖는다.”
 

아리스토텔레스/ 출처: hpservisi.net

아리스토텔레스/ 출처: hpservisi.net


 
통상적으로 행복은 개인적이라면 정의는 사회적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아리스토텔레스는 개인주의적 행복을 이야기한 것에 그치고 만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의 윤리학은 정치학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그가 말하는 행복은 폴리스(그리스 도시국가)의 구성원으로서의 시민의 행복에 해당합니다. “그것은 으뜸가는 학문, 가장 총 기획적인 학문에 속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정치학이 바로 그러한 학문인 것 같다. 왜냐하면 폴리스 안에 어떤 학문들이 있어야만 하는지, 또 각각의 시민들이 어떤 종류의 학문을 얼마나 배워야 하는지를 정치학이 규정하기 때문이다.” “또 정치학은 나머지 실천적인 학문들을 이용하면서, 더 나아가 무엇을 행해야만 하고 무엇을 삼가야만 하는지를 입법하기에 그것의 목적은 다른 학문들의 목적을 포함할 것이며, 따라서 정치학은 목적은 ‘인간적인 좋음’일 것이다. 왜냐하면 설령 그 좋음이 한 개인과 한 폴리스에 대해서 동일한 것이라 할지라도, 폴리스의 좋음이 취하고 보존하는 데 있어서 더 크고 더 완전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 좋음을 취하고 보존하는 일이 단 한 사람의 개인에게 있어서도 만족스러운 일이라면, 한 종족과 폴리스에 있어서는 더 고귀하고 한층 더 신적인 일이니까. 따라서 우리의 탐구는 일종의 정치학적인 것으로서 이런 것을 추구하는 것이다.”

이 길게 인용된 글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러한 자신의 탐구를 윤리학(?thik?)이라고 부릅니다. 에티케는 성품과 습관을 의미하는 에토스(ethos)라는 말에서 온 것입니다. 즉, 좋은 성품의 사람이 되려면 좋은 행동을 하도록 습관이 길러져야 한다는 뜻이지요. 그렇지만 그의 윤리학은 개인의 행복에 그치지 않습니다. 좋은 사람이 되고 좋은 삶을 산다는 것은 혼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적인 국가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에 따르면 어린 시절부터 미덕(탁월함, aret?)을 향한 올바른 지도를 받으려면 올바른 법률에 의해 길러지지 않고서는 어려운 일입니다. 성인이 된 후에도 계속에서 올바른 일을 하고 좋은 습관을 들이는 데에 강제적인 규제가 필요합니다. 다시 말해서 이렇게 좋은 사람이 되고 좋은 삶을 사는 데는 국가에 의한 강제적인 법률이 있어야 합니다. 그에 따르면 “다중은 말에 따르기보다 강제에 따르고, 고귀한 것에 설복되기보다 벌에 설복되기 때문이다.” 폴리스의 입법자들은 시민들의 교육과 종사할 일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각자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아갈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공동의 보살핌이 폴리스가 제정한 법률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이를 고려하면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치학의 목적을 ‘인간적인 좋음’(agathon)이라고 한 이유가 명백해집니다. 그래서 그에게 인간은 정치적(사회적, politikon) 동물인 것입니다. 이런 까닭에 그에게 좋은 삶은 국가 안에서의 시민적인 삶이지 국가에서 벗어난 개인의 삶이 아닙니다. 따라서 그가 말하는 좋은 사람은 시민의 의무를 다하는 덕을 갖춘 사람이지 자신만의 안녕과 평온을 추구하는 무책임한 개인이 아닙니다. 여기서 우리는 현대 철학자 중에서 개인주의적인 자유주의 윤리학과 정치철학을 비판하면서 등장한 공동체주의 철학자들이 아리스토텔레스의 덕 윤리를 바탕으로 하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공동체주의를 대표하는 철학자로는 <덕의 상실>의 저자인 알래스데어 매킨타이어와 <다문화주의>를 주창한 찰스 테일러, 그리고 <정의란 무엇인가>로 우리에게 너무나 유명해진 마이클 샌델이 있습니다. 요즘 우리 사회의 논란이 되고 있는 문제들을 고려하면 마이클 샌델이 왜 시민의 미덕을 강조했는지가 분명해집니다. (승객을 버리고 도망간 선장과 무책임한 고위공무원들은 시민의 미덕, 특히 사회적 리더로서의 의무를 저버렸기에 그토록 지탄과 원망의 소리를 듣는 것입니다.)

이런 점들을 고려하면 정치적인 것을 가르친다고 선전하는 소피스트들은, 실은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정치적 행위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정치학은 수사학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와는 반대로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정치학은 목적은 지식(앎)이 아니라 행위입니다. 마찬가지로 윤리적인 덕도 지식이 아니라 활동(ergon)입니다. 이러한 주장을 통해 그는 자신의 스승인 플라톤 선생님과 스승의 스승인 소크라테스를 비판하고 있는 것입니다. 플라톤의 대화편인 <프로라고라스>에서 소크라테스는 덕은 앎(인식)이라고 규정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무엇이 최선인지를 아는 자가 가장 좋은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한 최선자가 통치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 리더를 플라톤은 철인왕(哲人王)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인간적인 좋음은 덕에 따른 영혼의 활동”입니다. 그 좋음이라는 것도 완전한 삶 안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런 그에게 아는 것보다 좋은 행동을 하고 좋은 사람이 되어 좋은 삶을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그는 지식 중심의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을 비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에게 “친구와 진리 둘 다 소중하지만, 진리를 더 존중하는 것이 경건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좋은 사람이 되고 행복한 사람이 되는 데는 지식보다는 좋은 습관이 요구됩니다. “한 마리의 제비가 봄을 만드는 것도 아니며 하루가 봄을 만드는 것도 아니니까. 그렇듯 하루나 짧은 시간이 지극히 복되고 행복한 사람을 만드는 것도 아니다.” 덕은 행위의 축적에 의해, 다시 말해서 습관에 의해 획득됩니다. “정의로운 일들을 행함으로써 우리는 정의로운 사람이 되며, 절제 있는 일들을 행함으로써 절제 있는 사람이 되고, 용감한 일들을 행함으로써 용감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만약 폴리스에서 입법자들이 시민들에게 좋은 습관을 들이게 하면 좋은 시민들이 육성될 것입니다. 이러한 폴리스는 ‘좋은 정치체제’(politeia)를 갖춘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에게 행복한 사람은 잘 행위하는 사람이고 잘 사는 사람이다. 행복은 덕에 따른 영혼의 활동입니다. 따라서 행복은 단순히 외적인 운명이나 우연에 의해 주어지지 않습니다. 이러한 요소들은 인간적 삶에 추가적으로 필요할 뿐이고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누구나 배움과 노력을 통해 인간적인 덕을 획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연이나 운명에 의해 주어지는 것과 달리 이러한 행복은 많은 사람들에게 공통적일 수 있습니다. 소나 말 등 동물을 행복하다고 말하지 않은 것이 당연합니다. 이런 점에서 아직 어린이도 행복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아직 그 나이에는 덕에 따른 행동을 ‘완전하게’(성숙하게) 실천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좋은 습관을 쌓지 못한다면 나이가 반드시 성숙을 보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더 처참하게 물욕만 남은 비겁한 늙은이로 전락할 수 있습니다. 혹시 운이 좋지 않더라도 활동이 결정적이라면 “지극히 복된 사람들 중에서 누구도 비참하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결코 가증스러운 일이나 비열한 행위들을 하지 않을 테니까. 또 우리는 진정으로 좋고 분별 있는 사람은 모둔 운들을 품위 있게 견뎌 낼 것이라고, 현존하는 것으로부터 언제나 가장 훌륭한 것들 행위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지혜는 연습과 훈련을 통해 습관을 들이고 경험을 쌓아야 얻을 수 있으므로, 경험이 부족한 청년이 아니라 성숙한 어른의 덕목입니다. 성숙한 어른은 경험 많은 의사처럼 최고의 규범이나 이론을 곧바로 현재 상태에 적용하지 않고, 복잡한 상황을 고려하여 여기에 알맞게 규범을 적용합니다. 레시피대로가 아니라 손맛으로 요리하는 숙련된 요리사처럼 지혜로운 사람은 그 상황에 어긋나는 극단적인 행동 방식을 억제하고 중용(中庸)의 태도를 취합니다. 다시 말해서 중용이란 과함이나 부족함의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가운데(mesotes)’입니다. 이 가운데를 수학적인 도식으로 계산해낼 수 있는 평균값이 아닙니다. 중용은 그 상황에 맞게 새롭게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용은 지혜로운 사람만이 할 수 있는 탁월함(미덕)입니다. 초보자와 달리 원숙한 지혜로운 어른이야말로 원칙과 상황의 절묘한 조화를 이루어냅니다. 이는 새로운 이상에 사로잡혀 조급한 마음으로 당장이라도 세상을 바꾸려고 하는 미숙한 청년의 태도는 아닙니다. 그렇지만 중용이 타락하면 이 말은 자기 세력을 강화하는 데 비범한 지적 능력을 발휘하는 노회한 정치가나 상황에 따라 이리저리 변신하는 영리한 기회주의자, 그리고 나서지 않고 엎드려 복종하는 비겁한 사람들의 처신을 치장하는 데 쓰일 뿐입니다.
 
 

행복한 삶이란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과 관련해서 세 가지 종류의 삶을 제시합니다. 감각적인 쾌락을 추구하는 삶, 정치적인 성취를 이루는 삶, 지성적인 관조(명상)를 하는 삶이 그것입니다. 감각적인 쾌락을 추구하는 삶은 짐승의 삶을 선택하는 것이며 완전히 노예와 다를 바 없는 삶입니다. 정치적인 명예나 덕을 추구하는 삶 역시 불완전할 뿐입니다. 명예는 다른 사람들의 평판에 의존할 뿐이며 덕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아무런 활동도 하지 못하고 큰 불행을 겪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본질적으로 정치권력과 이성은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이 외에도 그는 부를 추구하는 삶을 언급하다가 이를 재빨리 취소합니다. 그가 보기에 부를 추구하는 삶은 일종의 강제된 삶일 뿐이며, 부란 다른 것을 위해 수단일 뿐이니 진정으로 좋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관조적 삶이 가장 행복한 삶인 이유는 “무엇보다도 지성이 ‘인간’인 한에서, 인간에게 있어서도 지성을 따르는 삶이 가장 좋고 가장 즐거운 것이다. 그러므로 이 삶이 가장 행복한 삶”이기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지혜에 대한 사랑, 즉 철학(philosophia)하는 삶이 그런 삶에 해당합니다.

하지만 그의 덕 윤리에도 한계가 있습니다. 그의 시민에는 노예와 여자가 제외됩니다. 당연히 그리스어를 하지 못하는 야만인도 제외됩니다. 그의 시민이란 좋은 집안에 태어나, 잘 양육을 받고, 행운이 뒷받침되는 남성 어른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장유유서(長幼有序)를 강조하는 유교도 같은 문제점을 앉고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오늘날 공동체주의자들은 전통적 공동체주의에서 수직성과 배타성을 제거한 새로운 공동체 창출을 목표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소비와 인간의 삶: ‘나는 왜 쇼핑몰에서 해방감을 느끼는가?’<광진정보도서관 아주 사소한 물음에서 시작하는 철학> 3-2

소비와 인간의 삶: ‘나는 왜 쇼핑몰에서 해방감을 느끼는가?’<광진정보도서관 아주 사소한 물음에서 시작하는 철학> 3-2

조은평(건국대)

 

 

3. ‘소비의 사회’와 현대인 : ‘나는 소비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소비사회’라는 규정에 대해>

– 소비사회의 문제는 오늘날 여러 철학자나 사회학자들에 의해서 주목을 받고 있다. 예를 들어 지그문트 바우만 같은 사회학자는 오늘날의 소비사회를 자본주의가 만들어 낸 일종의 환상의 공동체라고 보고 있다.

조은평 표4

– 일단 ‘소비사회’라는 규정은 ‘상품을 대량으로 소비할 수 있게 된 사회’를 의미한다. 2차 세계 대전 이후 세계 경제의 고도성장은 기존의 자본주의와 다른 새로운 자본주의를 탄생시켰는데, 프랑스 사회학자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는 이것을 ‘소비의 사회’라고 지칭한다.
– 하지만 단순히 대량생산에 기초해서 대량소비가 경제적으로 가능해진 풍요한 자본주의 사회라는 의미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보드리야르는 경제학에서 정의하는 소비개념과는 다른 소비개념을 통해 현대사회를 분석한다. 그에 따르면 상품(사물)의 소비란 ‘사용가치’의 소비를 포함하면서도 그것을 뛰어 넘는 어떤 행위이다. 그는 사물을 기호로 파악하고, 사회를 의미작용의 체계로 해석하면서 소비 행위를 특정한 상품(사물)에 대한 욕구가 아닌 차이에 대한 욕구로 규정한다.(‘사용가치’에서 ‘기호가치’로!)

<소비사회가 개인에게 가져온 변화>

1) 상품미의 무한 추구.
– 현대 소비 사회에서 사람의 취미를 형성하는 것은 ‘예술미’라기 보다는 ‘상품미’다. 상품은 이런 미적 가상을 불러일으키는 형식이자 자본의 수단이며, 소비자는 상품미에 현혹되어 욕망을 가상적으로 충족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끊임없이 욕망의 허기가 생긴다.

2) 개인의 욕망구조도 변화.
– 근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욕망 구조는 일과 생산을 통해 채우는 것이 기본 전략이었지만 현대 사회에서 욕망 구조는 놀이와 소비를 채우는 전략으로 변모했다. 놀이를 통해 채우는 욕망은 이성이 아니라 감성, 의식이 아니라 무의식에서 생겨난다. (일과 생산 -> 놀이와 소비)
– 소비 사회에서 사람들은 상품의 ‘사용 가치’가 아니라 ‘기호 가치’를 소비한다. 사용 가치는 필요를 충족하는 수단이지만 기호 가치는 지위나 심리의 차이를 표시하는 수단이다.
– 그렇기에 소비 사회에서 욕망의 논리도 차이의 논리다. 소비 사회에서 욕망은 특정 사물에 대한 욕망이 아니라 차이에 대한 욕망이다.

< ‘소비사회’라는 현실을 가장 잘 보여주는 몇 가지 사례들>

1) 미국의 세계 지배를 상징하던 세계무역센터 쌍둥이 빌딩이 구멍이 뻥 뚫려 산산이 부서지는 것을 목격하고는 충격을 받아 얼이 빠져 버린 미국인들에게 당시 조지 부시 대통령이 보냈던 첫 메시지. -> “다시 (평상시처럼) 쇼핑하는 일로 되돌아가라to go back shopping!”
(cf 2014년 세월호 참사 이후의 한국정부 관련 기사 “정부, 세월호 참사후 처음 ‘소비 둔화’ 우려 진단, 파이낸셜뉴스, 2014. 5. 6 / 현오석 부총리, “세월호 참사 후 서비스업 다소 부정적영향”, 아시아경제, 2014. 5. 6)

2) 아이 여성(child-women)의 출현 : 아동기에 대한 상업화!
– 대부분의 시간을 자기 침실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옷을 입어보거나 엄청나게 많이 수집해 놓은 구두나 핸드백을 신어보거나 걸쳐보면서 보내는 어느 소녀의 이야기. 더구나 당시 그녀는 가슴 성형수술을 위해 돈을 모으는 중이었지만, 좀 더 자신의 우상인 모델 조던처럼 되기를 꿈꾸면서 그 수술을 기다리는 일조차도 무척 힘들어했다는 이야기.
– 익숙하게 들었을 법한 이야기. 그러나 당시 그 소녀의 나이가 10살!
– 더구나 한 영국의 한 통계에 따르면 대다수의 10세 소녀들은 ‘헤어스타일이나 패션, 화장에 사로잡혀 있다’는 점. 또한 그 소녀들 중 26퍼센트는 ‘자신들이 별로 날씬하지 않다고 느끼면서 몸무게 때문에 고민’. 말하자면 점차 어린 소녀들은 ‘자신들이 충분히 날씬하지도 않으며, 충분히 아름답지도 않다’고 느끼면서 ‘자신들의 모습을 잡지 속에 인쇄된 우상(아이돌)들의 그 불가능한 이미지’와 비교한다.

3) 어린 시절부터 너무나 익숙해지는 쇼핑과 쇼핑몰 문화?
– 어린 시절부터 갖고 노는 쇼핑카트!(뽀로로 쇼핑카트)

4) 쇼핑몰이라는 공간의 전략.
– 백화점과 쇼핑몰 건물에서 상품이 본격적으로 진열된 곳에 공통적으로 없는 그 무엇은 뭘까?
– 광고처럼 모든 쇼핑몰의 공간(인터넷이라는 가상공간도 포함해서)은 철저하게 이성적이고 전략적으로 구성된 공간. 그처럼 마케팅 원칙에 따라 구성된 공간에 들어선 소비자는 당연히 포획당할 수밖에 없다. (참조 EBS 다큐프라임 ?자본주의? 5부작 중 2부 ‘소비는 감정이다’)

조은평 사진2-1

 

4. ‘소비 사회라는 동굴’에서 빠져나오는 것은 가능할까?

– 그렇다면 이런 동굴과도 같은 쇼핑의 약국 속에서 탈출할 수 있을까? 아니 왜 탈출해야 할까? 이렇게 좋은 자유로운 약국에서 말이다. 당연히 이런 의문이 들 듯.

1) 우선 ‘왜 탈출해야 할까?’
– 사실 소비를 하지 않고 살아간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지금의 소비사회처럼 결국에서는 구매력에 따라 위계가 정해져 있을 수밖에 없고, 또 ‘소비의 자유’를 누릴 수 없는 그 누군가의 희생에 기초해서 사회가 유지되고 있다면, 이러한 사회는 ‘소비의 자유’라는 이데올로기에 지탱되는 정의롭지 못한 사회일 것이다. 보다 정의로운 사회를 위해 ‘다른 세계’를 꿈꾸기 위해서도 탈출을 고민해야 한다.
– 또한 ‘소비의 자유’를 충분히 누리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사실 스스로 주체적이고 자유롭다고 느끼지만, 이는 그저 이데올로기적인 환상일 뿐이다. (환상의 공동체) 좀 더 다른 형태의 주체적이고 자유로운 삶을 고민하기 위해서도 탈출을 고민할 필요가 있다.

2) 그렇다면 과연 어떻게 탈출할 수 있을까?
– 소비사회라는 동굴, 쇼핑몰이라는 동굴에서 빠져나오기(?)
: 그냥 소비를 줄이고 검소하게 살기? 과연 가능할까?
: 합리적 소비자로 생활하기?
: 소비자 운동을 통해 저항해보기. 불매 운동(예. 광고 불매 운동, 녹색 소비자 연대 등등)
: 소비 하지 않기? 아마도 가장 두려운 현상일 것!! 예) 9.11 이후 부시 대통령의 말!
자본 – 상품 – (불려진) 자본( M-C-M’ / C-W-C’)
– 말하자면 ‘소비사회’를 지탱하는 ‘자본의 순환 운동’에서 탈출하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 아마도 대부분 회의적일 것. 아니면 너무 이상적이고 공상적인 이야기로 여길 듯.
– 하지만 분명한 것은 ‘소비사회’를 유지하고 만들어 낸 ‘자본의 흐름’을 변혁하는 문제를 생각하지 않고서는 근본적인 탈출은 불가능하다는 점.
– 결국 이것은 ‘정치적으로 앞으로의 세계를 어떻게 바꿔나가야 하는가’라는 실천적인 문제와 연결될 수밖에 없다.

– 그럼에도 일단 ‘탈출을 가능하게 해줄 지점’을 생각해 볼 수는 있지 않을까?
– 사실 우리는 자본주의 생산-소비 체계를 정말로 어쩔 수 없는 당연한 현실로 받아들일 뿐 아니라 그런 현실을 그대로 따라 쫓아가야만 생존할 수도 있고, 어쩌다 성공도 할 수 있는 그런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인류의 역사 500만년을 하루 24시간으로 환산했을 때 자본주의가 출현한 시간은 23:59:56! EBS 다큐프라임)
– 이데올로기는 이제 더 이상 자본주의 시대에서는 그저 잘못된 현실 인식이나 단순한 오해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허위의식’이라는 과거의 이데올로기 개념처럼 말이다.
– 오히려 슬라보예 지젝의 말대로, ‘이데올로기의 수행성’에 주목해야 한다. 믿음은 그냥 생기는 것이 아니다. 마치 티벳 승려들이 기도할 때 기구를 돌리는 것처럼, 교회에서 기도하고 예배하는 의식을 수행하면서 우리는 믿음을 형성하고 확고히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자본의 시스템이나 위계질서의 시스템 속에서 살아가면서(또 여러 역할을 수행하면서) 우리는 현재의 동굴 상황이 어쩔 수 없는 현실이라는 믿음과 확신을 얻는다.
– 다시 말해 현재의 소비 시스템(소비사회의 전략)을 따라 소비를 수행하면서, 우리는 되풀이해서 ‘소비사회’라는 신화를 받아들이게 되는 셈이다.
– 그렇다면 역으로 우리는 다시 이런 ‘이데올로기의 수행성’에 주목해 볼 수 있지 않을까? 결국에는 기존의 시스템이 요구하는 삶의 방식과는 전혀 다른 삶의 형태, 삶의 관계들을 형성하려는(수행하려는) 노력 속에서 또 다른 탈출구를 찾을 수도 있지 않을까?

 

 

소비와 인간의 삶: ‘나는 왜 쇼핑몰에서 해방감을 느끼는가?’<광진정보도서관 아주 사소한 물음에서 시작하는 철학> 3-1

소비와 인간의 삶: ‘나는 왜 쇼핑몰에서 해방감을 느끼는가?’<광진정보도서관 아주 사소한 물음에서 시작하는 철학> 3-1

조은평(건국대)

 

 

조은평 사진1-1

 

‘긍정의 힘’과?‘힐링’!?곳곳에서 상처받고 삶에 시달리는 우리들을 유혹하는 말들입니다.?게다가 인생의?‘멘토’를 자처하는 온갖 전문가들이?‘멘붕’에 빠진 우리들에게 삶의 나침반이 돼주겠다고 외쳐댑니다.?물론 이 복잡하고 유동적이며 불안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런 노력들은 어쩌면 절망적인 삶에서 헤쳐 나오려는 나름의 노력일 것입니다.

하지만 과연 누가 누구에게 인생의 멘토가 될 수 있을까요??대체 누가 어떤 권리로 내 삶의 나침반을 자처하며 내 상처를 치유할 수 있을까요??사실 우리는 너무나 힘든 삶에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바로 이런 전문가들에게 기대려 합니다.?그럼에도 이처럼 전문가들에게 기대려는 충동은 결국 스스로 삶을 반성할 수 있는 자신의 지적 능력을 망각하게 하는 것 같습니다.

이에 비해 인문학,?특히 철학은 언제나 스스로 자신의 능력으로 자신의 삶을 되돌아볼 것을 요구합니다.?어쩌면 누구나 스스로 삶을 돌아보며 주변을 진지하게 고민한다면,?누구나 철학을 할 수 있습니다.?더구나 그런 자신의 고민들을 주변 지인들과 나누며 치열하게 토론한다면,?누구나 우리 삶을 억누르며 방해하는 요인들과 사회 환경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아마도 철학은 이런 스스로의 노력들이 만나 소통하는 공간이자 함께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려는 시도일지도 모르겠습니다.?짧은 시간이지만 함께 각자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서로 소통해 보는 기회가 되길 바랍니다.

 

1.?철학이란? : ‘일상에서 솟아나는 질문들’로부터 출발하는 철학함

“스스로의 철학함(Philosophieren)?없는 철학은,?다시 말해 자신의 철학적 체험이 없는 철학은 빈껍데기에 불과하다.”

1)?일상에서 솟아나는 철학

-?철학이란??과연 인간이 생각하는 이유는? ‘철학이란 결국 비-철학,?철학의 외부’?때문에!

조은평 표1

2)?그럼에도 일상에 거리두기를 하는 철학(비판/반성/낯설게 보기)

-?일상에서 많은 철학적 질문들을 하지만 동시에 일상에 매몰되는 우리들.

-?말하자면?‘일상에서 솟아나는 질문’들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미 우리는 철학을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이런 면에서 누구나 각자 자신만의 철학을 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물론 이처럼 일상에서부터 출발하지 않는,?즉 자신의 삶에 대한 진지한 고민 속에서 출발하지 않는 철학적 물음을 당연히 공허하다.?하지만 반대로 일상에서의 삶에만 매몰되고,?그 속에서 자신이 던진 질문들과 대답들 속에만 갇혀 있게 될 경우에는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철학은 이러한 이유 때문에?일상에서 솟아나는 질문으로부터 시작하지만,?동시에?일상에 매몰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서고 고민한다.

-?바로 플라톤의?‘동굴의 비유’는?‘일상에 매몰될 수 있는 상황’에 대해 경계하고 비판해야 한다는 점을 일깨워준다. :?일상???철학?(일상에서 솟아나는 동시에,?일상에 거리두기)

조은평 표2

 

2.?오늘의 주제이자?‘일상에서 솟아나는 사소한 질문’

:?소비와 인간의 삶?- ‘나는 왜 쇼핑몰에서 해방감을 느끼는가?’

-?나는 왜 쇼핑몰을 갈까??또 쇼핑을 하면 왜 즐거운 걸까??특히 기분이 우울하거나 짜증날 때,?대형 쇼핑몰에 가면 왜 갑자기 즐거워지는 걸까??뭐 여러 가지 질문들을 떠올려 볼 수 있을 듯.

-?그럼 왜 쇼핑몰에서 나는 즐거움을 느끼는 걸까??당연히 내가 그 공간에서 만큼은 주체적으로 자유롭게 소비하면서 만족감을 느끼기 때문일 것.

-?그러면 일단 우리 삶에서 쇼핑이 이루어지는 몇 가지 상황을 생각해 보자.

1)?쇼핑할 때 느끼는 자유와 해방감(?)

조은평 표3

– 우리가 느끼는 자유와 해방의 상황은 아마 이렇게 정리해 볼 수 있지 않을까?

– 말하자면 다른 일상에서의 삶은 내 뜻대로, 내 의지대로, 자유롭게 누릴 수 없더라도, 쇼핑을 하는 순간만큼은 자유롭고 주체적으로 그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해방감을 느끼며 쇼핑몰을 산책하게 된다고 할 수 있을 듯.

– 이런 측면에서 쇼핑의 공간은 마치 ‘약국’과도 같은 곳.(아래 바우만 참조). 다시 말해 모든 일상의 괴로움을 훌훌 털어버리고 나의 무한한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곳. (물론 나의 구매력이 허락하는 한!)

2) 쇼핑몰이라는 동굴의 비밀(?)

– 하지만, 사실 우리도 잘 알고 있다. 우리가 즐기는 쇼핑의 순간은 그저 잠깐일 뿐이고 그때 느끼는 주체적이고 자유로운 해방의 감정도 결국에는 나의 구매력에 의해 좌우된다는 점을.

– 이렇듯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쇼핑을 할 때, 또 쇼핑몰을 구경할 때 우리는 그럼에도 자유롭고 주체적이라고 생각한다. (자율성이라는 환상 : 독립적인 소비자. 합리적인 소비자. 주체적인 소비자) 말하자면 그 무엇에 의해(광고든, 마케팅이든 간에) 영향을 받아 소비를 한다고 하더라고(그렇다고 잘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사실상 그런 선택을 하는 건 나의 결정이니까 나의 자유라고. 그렇기에 난 자유롭고 합리적인 소비자라고. 뭐 이런 식으로 우린 스스로의 자율성을 이데올로기적으로, 사후적으로 정당화한다. (이데올로기적인 환상 : 이데올로기적인 원환성)

–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다른 공간에서는 너무나 부자유스럽기 때문에. 예를 들어 일터에서는 상사의 눈치를 봐야하고, 정치 영역에서는 늘 전문 정치인들에게 지겹게 끌려 다녀야 하기 때문에, 바로 그런 일상의 부자유 공간에서 벗어나 쇼핑할 때만큼은 나의 자유를 누린다고도 할 수 있을 듯.

– 하지만 쇼핑의 공간과 쇼핑의 상황은 어쩌면 ‘플라톤의 동굴’과도 흡사하다. 마치 동굴 속 죄수들이 자신들 앞에 펼쳐지는 이미지들의 세계를 바라보며 자신들의 삶이 자율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고 상상하듯이, 현대의 소비자들도 쇼핑몰에서 펼쳐지는 현란한 이미지의 상품 세계를 바라보면서 자신들이 주체적이고 자율적으로 소비하고 있다고 착각한다는 점에서.

( ‘동굴’ 벽면에 펼쳐지는 이미지 세계 = 쇼핑몰에서 펼쳐지는 현란한 이미지의 상품 세계)

– 어쩌면 이렇게도 말할 수 있겠다. 푸코가 ‘현실에 감옥이 왜 존재하는지 아는가? 현실이 감옥 같은 곳이라는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저기 감옥이 존재한다’고 말했던 것처럼, 쇼핑몰이 우리 주변에 멋지게 펼쳐져 있는 이유는 우리 사회가 이미 쇼핑몰과 같은 곳이라는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서라고’.

– 말하자면 우리들이 사는 사회는 이미 소비를 통해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소비지상주의 사회’라는 점을 은폐하기 위해서.

– 그렇다면 이런 동굴과도 같은 쇼핑몰에서 주체적이고 자율적으로 소비를 하며 살고 있다고 믿게 하는 사회는 어떤 식으로 지탱되고 있는 것일까?

– 바로 이런 논의가 ‘소비의 사회’라는 이름으로 진행되는 철학적, 사회적 논의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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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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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고 익힘에서 기쁨을 찾다-인생을말하는『논어』 <논현정보도서관 행복한 고전읽기>3

배우고 익힘에서 기쁨을 찾다-인생을말하는『논어』?<논현정보도서관 행복한 고전읽기>3

구태환(상지대 강사)

 

이 글은 5월 20일?7시에 열린?<논현정보도서관 행복한 고전읽기> 세번째 강연 원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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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고 익힘,?그리고 공자와?『논어』

우리나라의 성인들 대부분은 『논어』라는 책을 한 번은 접해봤을 것이다.그래서인지 『논어』의 첫 구절인?“學而時習之,?不亦說乎.?有朋自遠方來,?不亦樂乎.(배우고 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벗이 먼 곳에서 찾아오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라는 구절은 대부분 알고 있다.?그리고 이렇게 생각한다. ‘벗이 먼 곳에서 찾아오면 즐겁다는 것은 맞아.?하지만 공부가 얼마나 지겨운데.?배우고 익히는 게 기쁘다는 것이 말이 돼?’라고 말이다.?물론 멀리 있는 벗이 나를 보고자 찾아왔는데,?즐거워하지 않을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그런데 배우고 익히는 것,?즉 학습(學習)은 진정으로 기쁘지 않은 것일까??여기에서 우리는『논어』 의 내용을 오해하고 있다.?여기에서‘배우고 익히는 것’은 반드시 교과서를 달달 외우고,?읽기 싫은 책을 읽는 것만이 아니다.?영어,?수학을 배우는 것도 배우는 것이지만,?수영,?오락,?기타,스케이트보드,?스키,?춤,?노래,?축구,?심지어는 화투를 배우는 것 역시 배우는 것이다.?그것이 재미있고 기쁘지 않다는 말인가??실제로 공자는 소(韶)라는 음악을 듣고서 그것을 배우는 과정에서 석 달간 고기 맛을 모를 정도로 심취했었다고 고백한다.

이처럼 『논어』에는 언뜻 봐서는 말도 안 되는 것 같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의미심장한 내용이 제법 있다.?물론 『논어』에 담긴 모든 말을 시공을 초월하는 진리라고 생각하는 것도 바람직한 태도가 아니다.

『논어』는 공자의 제자와 재전(再傳)?제자들이 공자와 그 제자들의 말과 행동을 기록한 책이다.?공자(이름은 구丘)는 늙은 아버지와 어린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기에 경제적으로 힘든 어린 시절을 보냈을 것으로 추정된다.그가 살았던 시기는 중국의 춘추시대였다.?춘추시대는 주나라의 종법제도(宗法制度)가 붕괴되고 힘을 상실한 천자를 대신해서 각국의 제후들이 중국 천하의 권력을 장악하려고 다투던 혼란기이다.?공자는 이러한 혼란을 잠재우고 종법적 질서가 회복되는 세상을 만들고자 했다.?이러한 공자의 노력은 각국을 돌아다니던 공자의 모습에서 엿볼 수 있다.?그는?56세부터?68세까지 고국인 노나라를 떠나 각국을 돌아다니면서 자기 나름의 천하를 평정할 방도를 역설한다.

그렇지만 세상은 그리 녹록하지 않았고,?공자는 자신의 뜻이 이뤄지지 않는 현실에 낙담할 수밖에 없었다.?오죽하면?‘도가 실행되지 않는 세상을 떠나 뗏목을 타고 바다에 떠다니고 싶다’고까지 한다.?그리고 자신의 뜻을 펼치기 위해서 임금을 배신하고 반란을 일으킨 조나라의 필힐이 부르자 그를 만나려 하고,?남존여비 사상이 지배하던 당시에 국정을 좌우하는 여인으로서 평판이 좋지 않았던 위나라 군주의 아내인 남자(南子)를 만나기도 한다.?그리고 이런 행동 때문에 제자 자로(子路)로부터 욕을 먹고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기도 한다.

공자는 이처럼 자신의 뜻을 펼치고자 노력했지만 자신의 뜻이 이뤄지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며,?결국?68세의 나이에 조국 노나라에 돌아와 학문과 교육에 힘쓰다.

 

학습의 내용

그렇다면 공자가 말하는 학습의 내용은 무엇일까??사마천의『사기』?에 의하면,?공자의 제자는 약?3,000명이고 그 가운데?‘육예(六藝)’에 통달한(通)이가?72명이었다고 한다.?그렇다면 공자의 학습 내용은?‘육예’였던 셈인데, ‘육예’는 예(禮,?예의범절),?악(樂,?음악),?사(射,?활쏘기),?어(御,?말이나 수레 몰기),?서(書,?글쓰기),?수(數,?셈하기)를 말한다.?이 여섯 가지는 당시의 지배층이 습득해야 교양이었다고 할 수 있다.?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주의해서 봐야 할 것이 있다.?육예에?‘통달했다’는 것이다.

통달했다는 것은 단순하게 어떤 것을 배우고 익혔다는 것에서 더 나아가 그것의 원리까지 체득했다는 것을 의미한다.?즉 학습의 궁극의 경지이다.?예컨대 조상에 대한 제사나 부모에 대한 삼년상은 예의 중요한 항목이다.?그런데 대다수의 사람들은 제례나 상례를 치룰 때 그러한 의식을 왜 거행하는지를 생각하지 않고 답습한 대로 실행할 뿐이다.?하지만 공자는 제례나 상례가 조상과 부모의 은혜에 대해 감사하는 의식임을 밝히고 있다.?어떤 의식에 통달했다는 것은 그것을 실천할 뿐 아니라 그러한 의식의 연원이 무엇인지를 궁구하여 밝히고 이해하는 것이다.?그리고 겉모습으로서의 예의만이 아니라 그 예를 실행할 때의 마음가짐까지 갖추게 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그리고 이러한 교양은 지배층이 습득해야 할 것이다.

 

배움의 목적,?군자

DSC09035-1사실 공자가 개창한 유가 사상은 일반 백성들을 위한 사상이 아니다.?지금과는 달리 신분제 사회였던 과거에 일반 백성은 그 사회의 주인이 아니었다.그 사회의 주인은 임금을 비롯한 소수의 지배층이었던 것이다.?그리고 유가 사상은 사회의 주인인 이들 지배층이 어떻게 하면 일반 백성들을 바르게 다스려나갈 수 있는가를 말하고 있다.?공자가 보기에는 이들 지배층이 도덕적으로 올바르고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 무엇보다도 우선되어야 했다.?그리고 배움이라는 것도 결국은 이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었다.

이들 지배층을 가리키는 말이 바로?‘군자(君子)’이다.?우리는 흔히?‘군자’라고 하면, ‘도덕군자’, ‘성인군자’를 연상하며,?도덕적 인격체를 가리키는 개념으로 이해한다.?하지만?‘군자’는 글자 그대로 임금(君)의 아들(子),?즉 지배층이다.?그런데 공자는 이 용어를 지배층을 가리키는 개념으로만 사용하지는 않는다. 『논어』에 나오는 군자는 크게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

하나는 말 그대로 지배층이다.?계강자라는 사람이 공자에게 정치를 묻자 공자가 이렇게 대답한다. “당신이 선해지고자 하면 백성들이 선해질 것입니다.?군자의 덕은 바람과 같고 소인의 덕은 풀과 같으니,?풀 위에 바람이 불면(풀은)?반드시 눕게 됩니다.”?지배층이 도덕적으로 모범이 되면,?바람이 불면 풀이 눕듯이,?백성들도 그를 모델로 하여 선해질 것이라는 말이다.?이처럼 군자를 지배층을 가리키는 개념으로 사용하는 것은 공자 이전에는 당연한 것이었다.?그런데 공자는 이 개념을 변용한다.

공자는 지배층을 가리키는?‘군자’를 군자다운 덕목을 가진 이를 지칭하는 개념으로 바꿔놓은 것이다.?그는 군자를 이야기할 때 원래는 피지배층을 가리키는 개념인?‘소인(小人)’과 대비해서 말하고 있는데,?그 중 하나가?“군자는 옳음에 밝고,?소인은 이익에 밝다”는 말이다.?이것을 현대어로 바꾸면, ‘지배층은 무엇이 옳은가에 관심을 갖고,?피지배층은 무엇이 이익이 되는가에 관심을 갖는다’가 된다.

그런데 공자의 이러한 언명은 사실을 말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당위를 말하고 있다. ‘착한 어린이는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가 실제로는?‘착한 어린이가 되기 위해서는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는 의미를 갖는 것처럼 말이다.?위의 언명도?“군자(지배층)는 옳음에 밝고,?소인(피지배층)은 이익에 밝다”라는 사실을 가리키는 문장으로 해석될 수도 있겠지만, “지배층은 옳음에 밝아야 하고,?피지배층은 이익에 밝아야 한다”로 읽힐 수 있다.?더 적극적으로 해석한다면, “옳음에 밝아야 지배층 자격이 있고,?이익에 밝은 이는 피지배층일 뿐이다”?라는 말이 된다.?이는 옳음,?사회적 정의에는 관심이 없고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당시의 지배층에 대한 공자의 질타이다.

 

군자의 모습

공자가 말하는 배움이 진정

DSC09029-1한 군자가 되기 위한 것이라면,?그러한 군자는 어떤 모습을 띠고 있을까??비교적 잘 알려진 구절로는?“君子和而不同,?小人同而不和”(군자는 화합하되 부화뇌동하지 않고,?소인은 부화뇌동하되 화합하지는 못한다)를 들 수 있다.?여기에서
의?‘화’는 조화나 화합으로 해석될 수 있는데,?이러한 조화나 화합은 기본적으로 다른 것들 사이에 가능하다.마치 오케스트라의 여러 다른 악기들이 각각의 음을 내면서도 아름다운 음악을 만들어내듯이,?지배층다운 덕목을 가진 사람들은 각기 다른 입장을 갖고 있으면서도 타인과 조화하여 바람직한 사회를 만들어낸다.?이처럼 서로 화합하고 조화하는 그들이지만,?결코 권력과 이익이 있는 곳으로 몰려가서 힘 있는 이의 견해에 무조건 동조하는 소인배 같은 행위는 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처럼 각기 다른 입장을 갖는 이들을 조화시키기 위해서는 어떤 커다란 원칙이 필요할 것이다.?즉 이들도 서로간에 다름 속에서도 공통적인 무엇인가가 있어야 그 안에서 조화할 수 있을 것이다.?공자의 사상에서 그러한 원칙은 인(仁)과 예(禮)라고 할 수 있다.?내면에는 인간에 대한 사랑(인)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 사랑을 표현해내는 수단(예)을 적절히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이것을 공자는 꾸밈과 바탕의 적절한 조화라고 한다. “子曰,?質勝文則野,?文

勝質則史.?文質彬彬,?然後君子.(공자가 말했다.바탕이 꾸밈을 넘어서면 야만인이고,?꾸밈이 바탕을 넘어서면 문서를 다루는 관료이다.?꾸밈과 바탕이 아름답게 조화된 다음에야 군자가 된다)”는 문장에서 바탕(질)이란 바로 인간에 대한 사랑,?즉 인이고,?꾸밈(문)이란 사랑의 표현,?즉 예이다.?이처럼 내면에는 인간에 대한 사랑을 갖고 있으면서 그것을 적절하게 표현해내는 것이 군자인 것이다.

이러한 군자,?즉 지배층다운 덕목을 가진 사람이 현실에서 지배층이 되어 백성들을 다스린다면,?우선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질 것이다.?그리고 그 사랑을 적절히 표현할 제도를 마련할 것이다.?만약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을 갖고 있다면 백성의 삶에 관심을 갖게 될 것이고 백성들의 삶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서 그것을 제도로써 표현해야 할 것이다.?백성을 사랑하는 마음 없이 제도만 내놓는다면,?그 제도는 아마도 백성들의 마음을 일시적으로 얻기 위한 것이거나 눈앞에 닥친 정치적 곤경을 순간적으로 모면하기 위한 수단일 것이다.?하지만 그러한 제도가 백성들의 삶에 도움이 될 리는 만무하다.

 

군자가 다스리는 세상을 꿈꾸다

앞에서 보았듯이 공자가 말하는 학습은 바로 군자가 되기 위한 것이다.?공자는 그러한 군자가 세상을 다스리기를 바랐으며,?그러한 군자가 다스리는 세상은 평화롭고 도덕적일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시대의 군자는 누구인가??우리 시대는 신분제를 거부한다.모든 사람이 평등하며,?헌법에도 나와 있듯이?‘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즉 민주주의를 채택하고 있으며,?민주주의는 모든 사람이 주인인 사회를 지향한다.?신분상으로 봤을 때 우리 사회의 모든 성원이 군자,?즉 이 사회의 지배층인 것이다.?그렇다면 우리 사회의 군자들은 누구를 다스리는가?바로 우리다.?우리는 각자가 군자이면서 소인이다.?이제는 신분상의 군자,소인은 무의미해졌다.?다만 각자의 관심에 따라,?즉 각자의 이익을 추구할 것인가 사회의 정의를 추구할 것인가에 따라 소인과 군자가 나뉠 뿐이다.어찌 보면 공자가 생각했던 것이 실현된 사회이다.

자기들을 지배층이라고 생각하는 소수의 사람들을 지배층으로 인정하고 그들의 지배에 따라 사는 소인이 될 것인지,?스스로가 군자인 지배층이 되어 소수의 관료들을 심부름꾼으로 부리고 살 것인지를 신중하게 선택해야 할 시대이다.

 

 

논현정보도서관 다음 강의는 6월 17일 주인으로 살아가기-맹자의 『호통』?:?구태환(상지대 강사)입니다. ?

 

노동소외-왜 아침에 출근하기 싫은 걸까?<광진정보도서관 아주 사소한 물음에서 시작하는 철학>2

노동소외-왜 아침에 출근하기 싫은 걸까?<광진정보도서관 아주 사소한 물음에서 시작하는 철학>2

이재유(건국대)

 

 

1.?나는 월요병에 걸려 있다!

2강1-1우리의 노래 중에?<일요일이 다 가는 소리>라는 노래가 있다.?일요일이 다 가는 소리/?아쉬움이 쌓이는 소리/?내 마음 무거워지는 소리…….?우리는 금요일 저녁이 되면 홀가분해지고,?일요일 저녁이 되면 뭔가 불안하고 마음이 찝찝하다.이것은 평일에도 비슷하다.?이른 아침에 일어나서 출근하기가 참으로 힘들다.?그렇지만 저녁 퇴근 무렵이면 생기가 난다.?학생들일 경우에 수업시간만 되면 졸리다가 쉬는 시간만 되면 얼굴에 생기가 돋는다.

우리는 언제부터 이렇게 살아왔을까??원시시대부터 이렇게 살아왔을까??아니다.?이런 삶의 모습은 다름 아닌 현대인들의 모습이다.?우리는 왜 일이나 공부하러 갈 때는 불안하고 끔찍하다고 생각하고,?쉬거나 노는 시간에는 편안하고 안락함을 느끼는 것일까??이에 대한 해답의 실마리는 시인 엘리엇(T. S. Eliot)의 시‘텅 빈 인간(The Hollow Men)’에서 찾아볼 수 있다.

우리는 텅 빈 인간

우리는 짚으로 채워진 인간

서로 기대고 있지만

아!?머리통은 짚으로 가득 차 있네

우리가 모여 수근대면

메마른 목소리가

소리 없고 의미 없다

마치 마른 풀섶 지나는 바람

또는 메마른 지하창고에서

깨어진 유리 위를 밟는 쥐 소리

형체 없는 모양,?빛 없는 그늘

마비된 힘,?동작 없는 몸짓.

곧장 바라보고 죽음의 다른 왕국으로

바다 건너간 자들이

우리를 기억하고 있다 한들

지옥에 떨어진 맹렬한 혼으로서가 아니라,?다만

텅 빈 인간으로서

짚으로 채워진 인간으로서.

이 시는?‘텅 빈 인간’의?Ⅰ부의 내용이다.?시인이며 철학자이기도 했던 그는 크게 다섯 부분으로 이루어진 이 시에서 자아를 모르는 현대인들을?‘텅 빈 인간’이라 부르고 그들의 모습을 읊었다. ‘이렇게 세계가 끝나는구나’로 결말의 첫머리를 시작하는 이 시는 세계가 총이 아니라 인간의 흐느낌으로 멸망한다고 끝을 맺는다.

이 시를 통해 우리는 우리의 정체성,?즉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을 어디에서건 발견할 수 없음을,?우리가 아무 생각 없는 기계나 좀비가 된 것은 아닌가를 의심해 본다.?이제 우리는 아침에 일하러 가기 싫은 이유를 이렇게 연결시켜 볼 수 있지 않을까싶다.?즉 우리가 일하러 갈 때 불안감과 끔찍함을 느끼는 이유가 인간으로서의 우리의 정체성을 냉장고에 보관해 두고 갈 수밖에 없는 강요를 당하는 때문일 수 있다는 것이다.

 

2.?노동과 자유란 무엇인가?

오늘날 우리가 일을 할 때 인간으로서 우리의 정체성이 상실된다는 것은 일,?즉 노동이 인간다움을 느끼지 못하도록 하는 특성을 지니고 있음을 뜻한다 할 수 있다.?근대 이후 인간다움의 기초는 바로?‘자유’에 있다고 할 수 있으며,?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자유권은 인간의 기본권으로서 헌법에 명시되어 있다.?그러므로 현대 사회에서 일을 할 때,?즉 노동을 할 때,?현대인들은?‘자유’를 상실한 느낌을 가진다는 것이다.?이때?‘자유’란 동물처럼 자연법칙이라는 타자의 압력이나 강제에 따라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존재한다는 것을 뜻한다.?그러므로 자유를 상실한다는 것은 이른바 동물적으로 생존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자유는 자기 스스로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하는데,과연 인간은 오로지 자기 스스로에 의해서만 존재할 수 있을까??인간도 동물처럼 자연법칙의 영향을 받으며,?자연을 벗어나서는 살 수 없는 존재이다.?그렇다면 자기 스스로 존재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이에 대해 철학자 마르크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유란 자연법칙으로부터 공상적인 독립에 있는 것이 아니라,?오히려 이 법칙을 인식하고?일정한 목적을 위해 계획적으로 작동시킬 수 있다는 데 있다…….?그러므로 자유는 자연의 필연성들에 대한 인식을 기초로 우리 자신과 외부 세계를 지배하는 데 있다(엥겔스,?『반뒤링론』).”

결국 자기 스스로 존재한다는 것은 자연법칙을?‘일정한 목적을 위해 계획적으로 작동’시키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그리고 자연법칙을 계획적으로 작동시켜 자신의 삶의 목적을 실현시키는 활동 또는 행위가 바로?‘노동’이라고 할 수 있다.?이 노동을 통해 인간은 자연을?‘인간화시키는 것’이며,따라서 인간은 자연의 주체로 등장할 수 있게 된다.

 

3.?자본주의 사회에서 왜,?어떻게 소외가 발생하는가?

1)?자본주의 사회란 무엇인가?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한마디로 말해 자본주의 사회이다.?그렇다면 자본주의 사회란 어떤 사회인가??자본주의 사회는 봉건사회 등 이전의 사회와는 달리 인간의 노동력이 상품으로 판매되는 사회이다.?그리고 인간의 살아 있는 노동을 통해 새로운 가치가 생산되는 사회이다.

인간은 자신이 만들어 낸 모든 상품들과 구별되는,?상품을 만들어 낸 창조주이자 주체이다.?그리고 이것을 가능하게 해 주는 인간의 주요 특성이 바로?‘노동’?자체이고,?이러한 사실로부터 인간 노동 자체를 다른 모든 상품처럼 시장에서 판매할 수 없으며,?다만 이러한 노동의 구현체로서의 노동력(다른 모든 상품들도 노동의 구현체이다)이 다른 모든 상품들처럼 시장에서 판매될 수 있다.

그러므로?<노동>과?<노동력>의 가치를 반드시 구분해야 한다(노동은 그 자체로 가치를 가질 수 없는 것인데,?왜냐하면 시장에 내다 팔 수 있는 상품이 아니기 때문이다).?그렇지만 이 노동력은 이 노동력을 만들어 내는 창조주,?주체로서의 인간과 현실적으로 분리될 수 없는 특수한 상품이다.?다시 말하자면 시장에서 판매되긴 하였지만 아직 추상적이고 가능적인 형태에 머물러 있는 노동력이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것으로 되기 위해서는,?즉 노동력이 발휘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인간의 노동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 인간의 노동을 마르크스는?‘인간의 살아 있는 노동’이라 하는데,?노동력과 기계,?원료 등을 결합하여 새로운 상품을 만들어 내고,?이는 종전보다 더 많은 가치를 만들어 내는데,?이 새로운 가치 부분이 바로 잉여가치이다.?그렇게 해서 잉여가치는 바로 인간 노동에서 나오는 것이다.?자본가가 노동자에게 주는 임금은 노동의 가치가 아니라 노동력의 가치이다.

또한 단순가격과 생산가격이 시장의 경쟁이라는 개념을 통해 서로 다르게 나타난다는 것을 설명하였다.?아래의 도표를 보면서 이야기를 해 보도록 하자.

이재유 그립파일

C(불변자본, Constant capital):기계,?공장부지,?원료 등을 뜻하는데,?새로운 가치를 만들어 낼 수 없는 자본을 뜻한다.

V(가변자본, Variable capital):노동자의 노동력을 뜻하는데,?새로운 가치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자본을 뜻한다.

S(잉여노동 또는 잉여가치, Surplus)

C+V+S:단순가격으로서 하나의 상품을 만드는 데 들어간 비용을 뜻하는데,?시장에 나오기 전의 그 상품의 가치를 나타낸다.

P(이윤, Profit):시장에서 그 상품이 팔렸을 때 실제 남는 이윤을 뜻한다.

C+V+P:생산가격으로서 단순가격이 시장에서 가격 경쟁을 통해 현실화된 가격이다.

표에서 자본가Ⅰ,Ⅱ,Ⅲ?모두 하나의 상품을 만드는 데 총100원(C+V)을 투자하고,?잉여가치율(S`=V/S)이 모두?100%라고 가정한다.?이때 상품은 단순가격으로 팔리는 것이 아니라 자본가들의 경쟁에 따라 단순가격들의 평균으로?120원에 팔리게 된다.?그러면 자본가?Ⅰ,Ⅱ,Ⅲ?중 자본가Ⅰ이 가장 많은 이득을 취한다.?즉 단순가격에?10원의 이득이 더 붙는다는 것이다.?그 다음에는 자본가Ⅱ이고,?그 다음에는 자본가Ⅲ이다.?자본가Ⅱ는 단순가격과 생산가격이 같고,?자본가Ⅲ은 단순가격에서?-10원을 손해보고 있다.?가격경쟁에서 자본가Ⅰ이 우위를 점하면서 더 많은 이윤을 창출하고 있다.

그런데 우위를 점하고 있으면서 더 많은 이윤을 창출하는 요인이 무엇일까??그것은 자본가Ⅰ이 자본가Ⅱ,Ⅲ보다 자본의 유기적 구성도(C/V)가 높다는 것이다.?자본의 유기적 구성도가 높다는 것은 가변자본이 적어진다는 것,?즉 노동자의 임금이 차지하고 있는 부분이 적어지고,?불변자본이 많아진다는 것,?다시 말해 사람이 일하던 것을 기계로 대체한다는 것이며,?그 기계의 효율을 최대한 높여서 노동 강도를 엄청나게 강하게 한다는 것이다.?이러한 것은 오늘날 우리가?‘구조조정’이라고 일컫는 것이다.

그런데 가변자본이 줄어든다는 것은 곧 가변자본에 의하여 생겨난 잉여가치(S)가 줄어든다는 것을 의미한다.?또한 잉여가치가 줄어든다는 것은 이윤율(S/C+V)이 줄어든다는 것이다.?이 이윤율은 경제성장률 지수의 척도이다.?위 표에서 보다시피 자본Ⅲ의 이윤율은?30/100인데 자본Ⅰ의 이윤율은?10/100이다.?서구선진국의 경제성장률이?1~2%대에 머무르는 것은 이와 무관하지 않다.

이러한 이윤율 저하 경향은 자본의 이윤 증대를 꾀한 결과이며,?이는 곧 노동력을 감소시킨다.?그리고 이 노동력의 감소는 다시 이윤율의 저하 경향을 가져와서 자본의 이윤 증대를 꾀하게 되며,?다시 노동력을 감소시킨다.?다시 말하자면 이러한 순환과정은?<이윤율의 저하 경향?→?자본의 이윤 증대를 꾀한 결과?→?노동력의 감소?→?이윤율의 저하 경향?→자본의 이윤 증대를 꾀한 결과?→?노동력의 감소?→?이윤율의 저하 경향?→ ……>이다.?노동력의 감소는 노동자의 임금 전체가 상대적으로 줄어든다는 것이며,?비정규직과 실직자가 늘어난다는 것이다.?이러한 순화과정이 계속 되풀이되면서 대다수 일하는 사람들의 삶은 피폐해지고 황폐해진다.

2) <노동의 소외>는?<노동력의 가치>로 나타난다.

우리가 주의해서 보아야 할 것은?<노동>과?<노동력>을 구분해야 한다는 점이다.?소외가 발생하는 것은?<노동>이 아니라 물적인 형태로서의?<노동력>으로부터 발생한다.

노동력이란 자연과의 관계,?나아가 사회적 관계를 실현시키는 인간의 구체적 실천활동 일반이 아니라,?자본가와 관계 맺는,?즉 자본에게 종속되고 착취되는 관계로서 노동자가 판매하는 상품의 실체이다.?그러나 이와 반대로 노동은 자연과의 관계,?나아가 사회적 관계,?즉 세계 전체와의 관계를 실현시키는 인간의 구체적인 실천적이고 변혁적인 활동일 뿐만 아니라 자신과 세계를 변혁시키는 실천활동이다.

가치란 자본주의 하에서의 역사적 개념으로서 모든 인간관계를 상품관계로 변환시키는 척도이다.?그리고 이때의 가치는 노동의 가치가 아니라?<노동력>의 가치이다.?이 노동력의 가치는 그 자체로 인간 노동의 소외 형태이다.?왜냐하면 인간 삶의 목적이 이 가치에 종속당하게 되며,?결과적으로 이 가치로서는 인간 자신의 삶의 목적을 실현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그리고 이 노동력 가치의 현상 형태가 가격인데,?가격은 구체적으로 임금의 형태로서 우리 눈에 나타나게 된다.?가격 또는 임금은 노동력의 가치와는 다르게 나타나는데,?그 이유는 경쟁 개념이 도입되기 때문이다.?또한 임금은 사회적 평균 노동시간(이것도 동일 부문의 노동자의 노동시간 단축이라는 경쟁을 통해 이루어진다)과 직접적으로 연관을 가지고 있다.?예를 들자면 최저임금제는 바로 사회적 평균 노동시간에 근거해 책정된다.?결론적으로 말하면 노동력의 가치의 현상 형태인 가격 또는 임금은 인간 노동이 소외된 형태이다.?그렇기 때문에 단순히 개별 노동자의 임금인상에 매달리거나 생산성을 담보로 하는 임금인상은 인간 노동 소외를 더욱 부채질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철학자 마르크스는?『경제학-철학 초고』에서 자본주의 사회의 인간 노동 소외를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실로 노동 자체는 노동자가 온갖 노력을 기울이고 가장 변칙적인 범죄를 저질러야 비로소 자기 것으로 차지할 수 있는 하나의 대상으로 된다.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을 통해서 자신을 긍정하지 않고 부정하며,?행복을 느끼지 않고 불행을 느끼며,?자유로운 신체적·정신적 에너지를 계발하지 못하고,?자신의 신체를 채찍질하며 자신의 정신을 황폐화한다.?따라서 노동자는 노동 바깥에 있을 때 비로소 안도감을 느끼며 노동을 할 때 탈아감(脫我感, ausser sich)을 느낀다.?그는 노동을 하지 않을 때 편안한 느낌을 갖고,?노동을 할 때에는 편안한 느낌을 가지지 못한다.

??소외된 노동은 자기 활동 곧 자유로운 활동을 수단으로 격하시킴으로써 인간의 유적(類的)?생활을 인간의 신체적 생존을 위한 수단으로 만들어 버린다.

??인간의 소외 곧 인간이 자기 자신에 맞서 있는 상태는 인간이 다른 인간에 대해 맞서 있는 상태 속에서 비로소 현실화되고 분명히 표현된다.

 

2강-1

 

4.?인간 노동 소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노동자의 일자리가 줄어들어 노동자의 생계가 엄청 위협받음과 동시에 부익부빈익빈이라는 사회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다른 방식이 존재한다.?이 다른 방식은 다름 아니라 맑스가 말하는?“각자의 필요에 따라”,?즉 각자의 욕구에 따라 분배,?교환,?소통되는 방식이다.?이 방식 속에서는 그 누구도 이익을 보거나 손해를 볼 수 없다.?왜냐하면 누구나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 방식을 대단히 현실과 동떨어진,?유토피아적이고 이상적인 것으로 생각한다.?그러나 이러한 방식은 이미 알게 모르게 우리의 삶의 방식에 움터 있다.?친구들과의 관계,?가족과의 관계,?연인,?동아리 등등의 관계에서 말이다.?이들과의 관계 속에서는 이익이나 손해 등을 따지지 않는다.?우리는 이러한 관계 속에서 각자가 필요로 하는 것을 주고받는다.?그러므로 이 방식은 현실에서 실현 가능성이 있다.?문제는 이 방식을 어떻게 의식적으로 사회 전체에 적용시킬 수 있는가이다.?그렇지만 이것도 실현가능함을 우리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다.?국내적으로 보면 광우병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 집회에 가면 서로가 서로에게 먹을 것과 담요,?음료수 등을 아무런 이해관계 없이 주고받는다.?서로에게 격려와 희망,?연대의 벅참을 주고받는다.

국외로 보면 쿠바,?베네수엘라,?볼리비아 등이 민중무역협정(PTA)(미국을 축으로 하는 자유무역협정(FTA)에 반대해서 만든 협정)이라는 것을 체결하였다.?자유무역협정은 사회적 평균 노동시간(이것은 화폐의 양으로 나타난다)에 따라 분배,?교환,?소통하는 방식이다.?그러나 민중무역협정은 각 국가가 필요로 하는 물자의 양에 따라 분배,?교환,?소통하는 방식이다.?쿠바는 베네수엘라로부터 석유를,?볼리비아로부터 천연가스와 콩을,?베네수엘라는 쿠바로부터 의사를 비롯한 선진 의료제도를,?볼리비아로부터는 천연가스와 콩,?밀을,?볼리비아는 쿠바로부터 의사를 비롯한 선진 의료제도를,?베네수엘라로부터는 석유 등을 필요한 만큼 서로 주고받는다.

우리가 노동하는 것은 각자가 필요한 것을 얻고 충족시키는 데 그 목적이 있다.?이것이 바로 노동이 가지고 있는 진정한 가치라고 할 수 있다.?결국 중요한 것은?<생산양식>이 문제이다.?필요한 만큼만 생산하는 생산양식,?즉 계획 생산 양식은 자본주의의 무정부적인 생산 양식의 대안이 될 수 있다.

 

 

 

 

사람들은 왜 스마트폰에 몰두하는가? <광진정보도서관 아주 사소한 물음에서 시작하는 철학>1

사람들은 왜 스마트폰에 몰두하는가??<광진정보도서관 아주 사소한 물음에서 시작하는 철학>1

박영욱(숙명여대 교수)

 

1.?스마트폰은 그저 흥미로운 첨단 기계이다?

1강-1스마트폰이 처음 상용화되었을 당시 사람들은 진화된 휴대폰이 등장하였다고 환호하였다.?사람들에게 스마트폰은 기존의 휴대폰과 달리 엄청난 기능을 지닌 기계로 인식되었지만 여전히 진화된 휴대폰으로 여겨졌다.?그러나 아이폰을 소개하면서 스티브 잡스는 그것을 단순히 하나의 새로운 기계가 아닌 새로운 사회를 알리는 메시지임을 강조하였다.?그에게 새로운 기계란 단지 새로운 물건이 아닌 그 이상의 것,?즉 새로운 세상을 의미하였다.

이는 캐나다 매체이론가 매클루언(Marshall McLuhan)의 말을 빌자면“미디어는 메시지이다.”라는 명제로 요약될 수 있다.?이 명제는 미디어가 메시지를 전달하는 수단이나 도구가 아닌 미디어 자체가 곧 메시지라는 말을 의미한다.?한 예를 들어보자.?영화라는 미디어를 예로 들자면,?가령 헝가리의 영화감독이자 이론가인 벨라 발라즈(Bela Balazs)는 사라진 인간의 얼굴 표정을 되찾아주었고 말하였다.?이 말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영화가 나오기 이전의 대표적인 미디어라고 할 수 있는 인쇄매체와 비교해보아야 한다.

또 다른 하나의 사례를 들어보자면 에디슨이 발명한 축음기(grammaphone, 1877)도 미디어가 메시지라는 매클루언의 명제를 잘 설명하는 사례로 볼 수 있다.?이전에는 소리를 정신적인 현상으로 이해하였다.?인간의 언어나 음성은 어떤 정신적인 현상으로 간주되었다.?소리를 정신적인 현상으로 간주하는 한 그것을 기록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지만,헬름홀츠의 경우처럼 소리를 단순히 진동으로 파악함으로써 소리를 기록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다.?말하자면 축음기는 소리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이 변했음을 암시한다.?소리가 단순히 진동으로 간주되면서 이제 소음과 음의 구분은 급격하게 소멸되며,?음악 자체도 커다란 변화를 겪는다.

또 하나의 사례를 들어보자.?미술이론가 노먼 브라이슨(Norman Bryson)은 서양 근대회화와 전통적인 동아시아 회화의 차이를 매체의 차이에서 찾는다.?그에 따르면 유화는 소거적인 매체로서 매체 자체의 흔적을 지우는 투명한 매체임에 반해,?동아시아 회화는 매체 자체의 흔적을 드러내는 지시적 매체이다.?그는 매체의 차이가 두 그림의 세계관이나 양식적 차이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았다.

 

2.?디지털 세계는 가짜의 세계이다?

사람들은 디지털 기술은 세상의 거의 모든 복제가 가능한 복제기술이므로 현실을 대체할 수 있는 가짜를 만드는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고 경고한다.?물론 이러한 경고가 전혀 터무니없는 것은 아니다.?사진만 하더라도 그러하다.?우리는 자연적인 것(natural)이 아닌 인위적인 것을 표현할 때?‘합성’(synthesis)이라는 말을 많이 쓴다.?이때 합성이란 인위적으로 어떤 것들을 화학적으로 혹은 물리적으로 결합한 것을 의미하는데,?오늘날 디지털 시대에는 간혹 가짜라는 말의 대용어로 사용되기도 한다.?가령 디지털 사진이 나오기전까지만 하더라도 사진은 현실의 충실한 재현,?진정성 등을 암시하는 대표적인 미디어였지만,?오늘날 사진은 가짜나 변형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증명사진 또한?‘증명’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이러한 현실은 디지털 세계가 가짜의 세계를 만들 수 있다는 위험의 메시지일까?

1강2-1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위해서 사진의 예를 좀더 꼼꼼하게 살펴보자. 1839년 다게르에 의해서 발명된 것으로 공식화된 사진은?19세기 말에 이르러 사람들에게 널리 보급되었다.?일부 사람들에게 사진은 회화를 대체하는 새로운 매체로 각광받았지만,?결코 사진이 회화를 대체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사진과 회화가 다르다는 것이 분명하게 각인되기 시작하였으며,이때부터 오히려 회화는 사진과 명백하게 구분되는 경향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더군다나 사진이 예술로 인정받으면서 예술은 어떤 정신적인 것의 표현이라는 전통적인 예술관마저도 위협받게 되었다.?벤야민은 이러한 사실을‘사진의 작은 역사’라는 논문형태의 글에서 잘 설명하고 있다.?사진이 회화와 다른 점은 회화가 아무리 현실과 똑같은 이미지를 만들려고 해도 작가의 관점에 의해서 코드화되는 특성이 있는 반면,?사진은 작가가 사진속의 이미지를 모두 통제하려 해도 셔터만 누르면 자동적으로 현실세계를 복제한다는 점에서 코드화되지 않는 특성이 있다는 것이다.?이 점이 바로 사진을 진실한 미디어로 만드는 특성인 것이다.?말하자면 사진가가 사진속의 이미지를 통제,?즉 조작하거나 합성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그러나 디지털 사진의 경우에는 상황이 전혀 다르다.?디지털 사진은 얼마든지 합성될(synthesized)?수 있다.?그런 탓에 디지털 사진은 사진에서 진실성이라는 권위를 박탈시켰다고 할 수 있다.?그렇다면 과연 디지털 사진은 사진이 지닌 이 위대한 권위를 박탈시킴으로서 사진의 몰락을 가져온 것일까?

물론 아니다.?디지털 사진의 변형은 주로 레이어들을 중첩함으로서 이루어진다.?이른바 합성과정을 거치는 것이다.?이러한 합성이 그럴듯한 가짜 현실을 만들고 이를 현실처럼 착각하게 만드는데 사용되는 것일까??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디지털 사진은 합성을 통해서 진짜같은 가짜를 만들어 속이는 것을 목표로 하기 보다는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의 모습을 보여주고자 한다.?이를 칸트의 철학을 빗대서 표현하자면 디지털 사진이 세상에 대한 새로운 도식(scheme)을 창출함으로써 사람들에게 새로운 지식을 자극하는 것이다.

 

3.?진리란 변형가능한 것이다!

디지털 미디어의 가장 큰 특성은 변형가능성이다.?계속 예술의 경우를 들어 설명해보자면 디지털 이미지와 전통적인 회화 이미지의 가장 큰 차이는 디지털 이미지가 정보화된 이미지라는 점이다.?이는 타자기나 손으로 쓴 글씨와 디지털 워드프로세서로 쓴 글씨가 전적으로 다른 것과 마찬가지이다.?컴퓨터 모니터에 비친 글자는 손으로 쓴 글씨나 혹은 타자기로 찍은 글씨와 형태상으로는 크게 다르지 않지만 중요한 사실은 워드프로세서로 작성된 글씨는 정보화된(궁극적으로는?0과1로 이루어진 비트 단위로 기록된 데이터이다)?데이터이므로 얼마든지 변형이 가능하다는 것이다.?누군가가 컴퓨터 파일로 유서를 작성하였다면 그 진위는 매우 의심스러울 것이다.?필체를 흉내 내지 않고도 조작이 가능할테니까.

이렇게 변형이 용이하다는 것은 어떤 항구성이나 진실성의 상실을 의미하며 이는 우리의 소통에 대한 믿음의 상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디지털 미디어를 통한 소통이란 진정한 소통이 아니라는 수도 없이 반복되는 이 경고의 메시지는 너무나도 당연한 것은 아닐까??물론 변형이 용이하다는 말을 우리는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많이 들어보았겠지만,?백남준의 티브이 예술은 바로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사람들은 텔레비전을 수동적인 미디어로 생각하였다.?대중매체나 예술이 사람들을 획일화시키고 천박하게 만든다는 믿음처럼 이러한 생각은 광범위하고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다.?백남준의 텔레비전 예술은 이러한 믿음에 대한 저항이다.?매체이론가 엔첸스버거는 매우 간단한 조작을 통해서 수신기인 라디오는 송신기로 개조될 수 있다고 보았다.?수신장치나 송신장치는 원리상 동일하기 때문이다.

디지털 미디어는 소통의 형태를 정보전달에서 의사소통이라는 급진적 전환을 이루었다.?기존의 미디어(인쇄매체,?그리고 텔레비전과 같은 전기매체 등)에서 정보는 이미 만들어진 것으로 발신자가 수신자에게 정보를 전달하는 수단으로 간주되었으나,?인터넷과 같은 디지털 미디어는 대화자를 연결하는 인터페이스의 특성을 지닌다.?이와 맞물려 진리론 또한 대상이나 현실에 대한 참된 명제가 진리라는 대응설(correspondence)의 입장에서 소통과 합의에 의한 대화적 모델로 변경되는 경향이 있다.

독일의 매체 예술가이자 이론가인 바이벨(Peter Weibel)은 이러한 변화를 디지털 예술에 적용하여,?변형가능성을 전제한 디지털 이미지는 어떤 정태적인 상황에 대한 묘사를 거부하는 역동적인 이미지로 묘사한다.?흔히 디지털 예술에서 강조하는?‘상호작용’은 이러한 특성이 잘 구현된 것으로 볼 수 있다.?디지털 예술에서 작품은 예술가가 완벽하게 미리 완성하여 관객에게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정보가 아니다.?디지털 예술작품은 관객이 작품에 참여하고 자신의 몸을 개입시키고 작품을 변형시킴으로써 실현되는 일종의 인터페이스인 셈이다.?이는 마치 머드게임이 유저들을 연결시키는 하나의 인터페이스 역할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왜 고상한 ‘존재’와 ‘무’가 아니고 흔해빠진 ‘있다’, ‘없다’인가?[철학을다시 쓴다]-28-4

왜 고상한?‘존재’와?‘무’가 아니고 흔해빠진?‘있다’, ‘없다’인가?[철학을다시 쓴다]-28-4

 

 

윤구병(도서출판 보리 대표)

 

*이 글은 보리출판사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료와 형상 이론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낱말이 있다면 그것은 가능태(可能態)와 현실태(現實態)라는 끔찍한 낱말로 번역된?‘뒤나미스(dynamis)’와?‘에네르게이아(energeia)’입니다.?죄송합니다.?갑자기 생전 듣도 보도 못한 도깨비 같은 낱말들이 마구 튀어나오기 시작하는데 이 낱말 설명을 먼저 합시다.?아리스토텔레스가 이야기하는?‘질료(質料)’라는 말은 그리스어로?‘힐레(hyle)’인데 이것은 본디 집 짓는 데도 쓰이고 배를 만드는 데도 쓰이는 나무,?곧 여러 용도로 쓰이는 목재라는 말에서 나왔습니다.?그리고?‘형상(形相)’이라는 말은 그리스어로?‘에이도스(eidos)’인데 이 말은?‘눈으로 본다’는 그리스 동사?‘에이도(eido)’에서 나온 것으로?‘본 것’, ‘모습’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그리고?‘가능태’라고 서툴기 짝이 없게 번역된?‘뒤나미스’는 그것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또는 무엇이 될 수 있는?‘힘’이라고 보면 됩니다.?다만 그것으로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이 될 수 있는지가 드러나지 않았다는 점에서 크게 보아 무규정적인 것[apeiron]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또?‘현실태’라고 번역된 말(이런 말을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쓰나요?), ‘에네르게이아’는 그리스 동사?‘에네르게오(energeo)’에서 나온 말로 무엇을?‘한다’는 동사의 뜻을 그대로 이어받아 무엇을?‘함’,?또는?‘작용’이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저라면 조금 무리를 해서라도 아리스토텔레스의?‘뒤나미스’를?‘됨’으로,?또?‘에네르게이아’를‘함’으로 번역하고 싶습니다만 주제넘은 것 같아서 이 이야기는 길게 하지 않겠습니다.)?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形而上學?:?형이상학??이건 또 무슨 개뼈다귀 같은 번역입니까??아리스토텔레스가 쓴?‘메타피지카(metaphysica)’라는 글은 본래 제목이 붙어 있지 않았는데 뒤에 로도스의 안드로니코스라는 사람이 아리스토텔레스가 남긴 글들을 정리하다가?‘피지카(physica)’,?곧?‘자연학’이라는 글 뒤에 이 글의 원고가 있었기 때문에 쉽게 그냥?‘자연학의 뒤에 있는 것’이라고 분류한 것이 그만 책 이름이 되었다는 것이 보통 하는 이야기입니다만 박홍규 선생님은 이 책 제목까지도 허투루 받아들이지 않고, ‘우리에게 이른바 형이상학(메타피지카)은 자연학(피지카)을 모르면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따라서 형이상학을 공부하려는 사람은 반드시 먼저 자연학을 공부하라는 뜻에서 자연학 뒤에 이 글이 붙어 있는 것이다.’라고 힘주어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을 저는 그냥 메타피지카라고 부르겠습니다.?이 메타피지카에 나오는 중심되는 낱말로?‘뒤나미스’와‘에네르게이아’를 든 까닭은 다른 데 있지 않고,?이 낱말들,?이 개념들을 통해서 플라톤의 형이상학과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사이에 가로놓인 거리를 재 보자는 뜻에서입니다.?그리고 이 일은 우리가 지금까지 이야기한 있는 것과 없는 것과 무규정적인 것이 이 철학계의 사부님들 머릿속에서 무엇으로 둔갑하는지를 아는 데도 큰 도움이 됩니다.”

이제 고백하지만,?이 강의들은 한두 시간에 한 것이 아니라 여러 날을 두고 한 것입니다.?학생들의 골을 빠개지 않고,?저도 숨가빠 헐떡거리지 않기 위해 쉬엄쉬엄 하는 것이 필요했다고 말하면 거짓말이 되겠지요.?옛 그리스 철학자들의 생각과 박홍규 선생님의 생각과 제 어쭙잖은 생각이 제 작은 머리통 속에 뒤범벅이 되어 있어서 이것을 풀어내는 데도 적잖은 시간이 필요했던 것입니다.?아무튼 저는 학생들에게 플라톤 철학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 어떻게 다른지를 설명하고,?피타고라스학파의 입에서 나온?‘끝(한계?: peras)’과?‘끝없는 것(무규정적인 것?: apeiron)’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어떻게 다르게 받아들여졌으며,?아리스토텔레스가 자기 철학 안에 노동(작업,?함?: energeia)을 받아들여 이것,?저것을 어떻게 쪼개고(분석하고),?울타리를 두르고(범주화하고),?빚어냈는지,?그리고 이 사부님들의 노력이 베르그송이라는 프랑스 형이상학자(?)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제가 알고 있다고 믿는 대로 이야기하고자 했습니다.?이런 생각이 얼마나 황당한 것이었는지는 앞으로 밝혀질 것입니다.?그러나 저에게도 할 말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박홍규 선생님 밑에서 정신 없이 휘둘리는 동안 마치 메피스토펠레스 손에 놀아난 파우스트처럼(비유가 너무 거창했나요?)?제 간덩이가 저도 모르게 한껏 부어올랐으니 말입니다.?존재론이라는 걸 이야기한다면서 이런 시덥지 않은 객담을 사이사이 시시콜콜 늘어놓는 걸 보면 저도 누구를 닮아 가는 모양입니다.

각설하고,?저는 학생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여러분,?이제 꽤 어려운 길에 접어들었습니다.?제가 샛길로 빠지거나 길을 잃거나 발을 헛디디지 않도록 여러분들이 믿는 분에게 두 손을 모으기 바랍니다.?단군 할아버지,?예수님,?부처님,?마호메트님,?조왕신,?호구마마 아무라도 좋습니다.

먼저 플라톤에게 덤벼 보기로 하지요.?제가 지금부터 하려는 이야기와 관련된 정보가 가장 많이 들어 있는 플라톤의 글은?〈티마이오스〉(Timaios :흔히?‘우주론’으로 번역됩니다.)입니다.?플라톤이 남긴 글은 대체로 몇 사람이 이야기를 주고받는 대화로 이루어져 있고,?주인공은 소크라테스로 되어 있는데,?이 글만은 거의 티마이오스라는 사람의 독백으로 이루어져 있고,소크라테스는 입도 벙긋하지 못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아마 이 글에 나오는 내용이 소크라테스가 평소에 입에 올리던 화제와는 너무도 달라서 짐짓 플라톤이 사부님은 한쪽으로 제쳐놓고 자기 이야기를 한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도 듭니다.?어쨌거나 이 글을 보면 데미우르고스(Demiourgos :이 이름은 그리스어 동사?demo[짓는다]를 의인화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라는?‘일하는 하나님’(?)이 나옵니다.?이 우주 밖에 사는 우주마왕은 머리를 짜내서 우리가 사는 이 우주를 만들어 내는데,?대충 스치면서 훑어보자면 이렇게 만들어 냅니다.?먼저 건축 자재가 있어야 하겠지요.?이 건축 재료가 무엇인지 압니까??놀라지 마십시오. ‘같은 것[tauton]’과?‘다른 것[heteron]’입니다.?왜 엠페도클레스처럼 우주를 이루는 네 개의 원소[原素?:?이 말도 사실 그리스어로는?‘맨 처음 것’이라는 뜻을 지닌?‘아르케(arche)’나?‘뿌리’, ‘근원적인 것’의 뜻을 지닌?‘리조마타(rhizomata)’를 멋대가리 없이 번역해 놓은 것입니다.]인 물,?불,?공기,?흙 같은 것으로 만들지 않고 추상적이기 짝이 없는?‘같은 것’, ‘다른 것’?따위로 만들겠다고 설쳤느냐고요??잠깐!?여기에는 그만한 까닭이 있습니다.?그리고 네 개의 원소 이야기는 나중에 또 나옵니다.?앞에서 우리는?‘같다’, ‘다르다’는 말이 논리적으로 참과 거짓을 가리는 문장에서는?‘이다’, ‘아니다’와 같은 뜻으로 쓰이며, ‘이다’, ‘아니다’를 뒷받침하는 근거는 바로?‘있다’, ‘없다’에 있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이 말을 실마리 삼아 플라톤이?‘같은 것’과?‘다른 것’이라는 말로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제 나름대로 한번 미루어 짐작해 보기로 하지요.”

윤구병 그림 1-7

“자,?이제 그림?7을 다시 한 번 보기로 할까요??있는 것과 없는 것이 서로 맞닿자마자 그 사이에 줄을 서기 시작한 그 한없이 많은 괴물들 말입니다.?이 괴물들은 모두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무규정적인 것이라는 점에서 겉모습은 같아 보입니다만 꼼꼼히 얼굴을 뜯어보면 하나도 같은 것이 없습니다.?마치 하나의 기타 줄에 숨어 있는 소리가?‘숨어 있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을지라도 짚어 가면서 튀겨 내면 저마다 다른 소리로 떠오르는 것과도 같습니다.?그러나 기타 줄에 숨어 있는 소리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나,?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차례차례 짚어 가면서 튀겨 내면 높은 소리에서 낮은 소리에 이르기까지 질서 있게 배열되어 있듯이,?무규정적인 것도 그것이 있는 것과 없는 것 사이의 어느 자리에 있느냐에 따라?‘있는 것과 맞닿아 있는 놈’, ‘그 다음 놈’, ‘그 다음 놈’,?……?‘있는 것’과 가장 멀리 떨어져 있고‘없는 것’에 맞닿아 있는 놈’─이렇게 순서에 따라 이름을 붙일 수 있습니다.다시 말해서 무규정적인 것의 무규정성에는 단계가 있다는 뜻입니다.?있는 것 쪽에서 보면 자기와 맞닿아 있는 놈이 가장 자기와 같은 것이고 없는 것에 맞닿아 있는 놈이 자기와 가장?‘다른 것’이고,?거꾸로 없는 것 쪽에서 보면 자기와 맞닿아 있는 놈이 가장 자기와?‘같은 것’,?있는 것과 맞닿아 있는 놈이 가장 자기와?‘다른 것’입니다.?그러니까 무규정적인 것에는 있으나 다름없는 것에서부터 없으나 다름없는 것에 이르기까지 별의별 놈이 다 있는데 있는 것을 기준으로 삼으면?‘있음으로 거의 꽉 차 있는 놈’, ‘있음이 조금 빠져 있는 놈’, ‘조금 더 빠져 있는 놈’?……?‘있음이 거의 다 빠져 나간 놈’으로 짚어 나갈 수 있고,?없는 것을 기준으로 삼으면?‘있으나마나 한 놈’, ‘있음이 조금 들어간 놈’, ‘있음이 조금 더 들어간 놈’?……?‘거의 있음으로 가득 차 있는 놈’으로 이름 붙일 수 있습니다.?여러분,?우리가 첫머리에서?‘없는 것이 있다.’는 말이?‘빠진 것이 있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고 이야기한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또 어떤 신혼부부가 살림살이를 장만하는데 남편이 이것저것 사들이다가 아내를 돌아다보면서?‘여보,?이제 없는 것이 뭐지?’?하고 물었을 때 아내가?‘어제까지만 해도 없는 것이 많았는데 이제 빠진 것이 거의 없는 것 같아요.’라고 대답한다면 이 말에도 같은 뜻이 담겨 있습니다.”

 

미디어 오디세이는 미디어의 역사다 [보고듣고생각하기]

미디어 오디세이는 미디어의 역사다:?김동민이 쓴?『미디어 오디세이』

 

나태영(한철연 회원)

 

 

강준만과 김동민

강준만은 무림고수이다.?강준만은 실명비판 대명사이다.?강준만은 공정한 평가를 추구한다.?무림고수 강준만한테 뼈도 뭇 추린 인간들이 많다.?강준만은 비판만 하지 않는다.?칭찬도 한다.?강준만한테 칭찬 들을 정도인 사람은 지성인이다.?강준만은 이 책?『미디어 오디세이』를 쓴 김동민을 칭찬한다.?자신은 글만 쓰는 데 김동민은 글도 쓰고 실천도 한다고 칭찬한다.?강준만은 김동민을 부러워 한다.?강준만이 부러워 하는 김동민 사상을 차분하게 들여다 보자.

미디어 오디세이는 미디어의 역사다

이 책 내용을 두 문장으로 줄이면?‘미디어 오디세이는 미디어의 역사다.’(16쪽)?‘미디어의 역사는 역사 속의 미디어를 조망하는 것이어야 한다.’(17쪽)란 문장이다.?언론학자 김동민이 이 책에서 역사를 다루는 이유는 당연하다.?역사를 다루지 않고 언론사를 다룰 수 없다.?언론사를 다루지 않고 언론에 대해 말 할 수 없다는 게 김동민이 주장하는 말이다.?이 책은 우선 대학 언론학 교재로 쓰려고 만들었다고 김동민은 말한다.?이 책에서는 한국 대학,?특히 한국 언론학과가 지니고 있는 문제를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한국 언론학과가 지닌 문제를 해결해 보려는 뜻에서 김동민이 이 책을 썼다고 나는 생각한다.

‘내가 대학을 다닐 때는 한국 언론사도 배우고 세계 언론사도 배웠다.?그러나 세계 언론사는 언제부턴가 종적을 감췄고 한국 언론사만 남았다.?그마저도 가르치지 않는 대학도 있고,?언론사 전공자는 찾아보기 어렵다.?대학이 상업주의에 물들어 기업처럼 운영되는 현실에서 역사교육을 소홀히 하는 풍토가 언론학계에도 만연해 있다.?미디어가 인류 공동체 속에서 생성되고 인류사회를 변화시켜온 역사를 모르고 미디어를 공부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7쪽)

대학을 거부하는 학생이 있다.?김예슬이 대학을 거부했다.?다니던 대학을 그만 두었다.?그리고?『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 둔다,?아니 거부한다.』란 책을 썼다.?물론 대학 다니기를 거부하는 사람들 수는 극소수이다.?대한민국 사회에서 대학 나오지 않고 살아가기 힘들기 때문이다.?대학총장,?대학교수들,?대학생들 분발을 기대한다. ‘대학이 상업주의에 물들어 기업처럼 운영되는 현실’을 비판하는 김동민 말이 큰 울림을 준다.

한국언론사와 한국역사를 왜 공부해야 하는지 우리는 다음 글에서 알 수 있다.?이 땅에서 서재필이 과대평가 받았다.?우리는 서재필을 있는 그대로 평가할 필요가 있다.

‘미국인 신분의 서재필을 선택한 데서 오는 한계도 명백하다.’ ‘고종은 서재필에게’ ‘연봉으로?3천?5백환을 책정해주었다.?당시 소?1마리가?20원?40원이었으니 소?100마리 가격이 넘어 지금 가격으로?1마리에?2백 만원만 치더라도 연봉?24억 원이 된다.’ ‘나라가 어려워지자 남은 기간의 급여를 한꺼번에 받아 미국으로 돌아간 것만 보아도 그의 진정성을 의심할 만하다. <독립신문>의 한계는 창간주체의 한계인 동시에 서재필의 한계다.’ ‘서재필은 자신이 미국인임을 늘 강조했다.?제국주의 미국이 조선에서 이권을 강탈해가는 현실을 옹호하는 입장이었다.?심지어 미국이?1896년?3월 일본에?1백만 달러를 받고 이권을 팔아넘긴 경인철도 부설권,?평안북도 운산금광 채굴권(1896년?4월)의 강탈에 대해서도 환영하였다. “속마음을 의심할 필요가 없는 나라와 맺은 것이며 지금까지 어느 열강과 맺은 조약보다 유리한 계약”(The Independent, 1896. 4. 16.)이라는 것이다.’ ‘1898년 당시 그의 출국을 만류하는 독립협회 회원들에게 보낸 답장에는 조선 정부를?‘귀 정부’(貴 政府)라고 칭했다.(<독립신문>, 1898. 5. 5.).’(182, 183쪽)

김동민은 통섭형 학자이다

미디어 오디세이뒤풀이 자리에서 김동민이 자신은 맑스주의자라고 말했다.?그래서 그런지 이 책에서 칼 맑스 목소리가 언뜻 언뜻 들린다.?지금 정치학과 경제학이 쪼개졌다.?정치경제학으로 합쳐질 필요가 있다.?이 땅에서 경제문제는 중요하다.?하지만 경제정책을 만드는 곳은 국회이다.?경제전문가와 정치가는 대화를 많이 해야 한다.?일반인들도 정치뿐만 아니라 경제 공부도 열심히 해야 한다.

‘오늘날의 미디어의 진화와 자본주의의 등장 및 전개와 긴밀한 관련을 맺기 때문에 정치경제학의 관점은 필수적이다.’(6쪽)

‘자본주의를 사는 우리는 자본주의의 생산관계를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언론학의 입장에서는 연구대상인 언론매체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작동하기 때문에 그 원리를 이해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자본주의 사회의 원리를 배제한 상태에서 미디어와 커뮤니케이션 현상만을 관찰해서는 그마저도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역사연구도 예외일 수 없다.?매스미디어 시대를 연 신문만 하더라도 그것은 상품으로 존재하며,?그 내용은 상품성을 추구한다.상품으로서의 신문을 규명하는 것이 기본이다.?마르크스는 상품을 세포에 비유했다.’(135쪽)

‘세포가 단백질로 구성되어 있듯이 상품은 자연의 물질로 구성된다.?자연에서 얻은 재료 및 노동도구 등(생산수단)을 확보한 자본과 인간 노동력의 지출(노동)이 결합하여 상품이 된다.?그래서 상품의 핵은 상품에 체화된 노동이다.?상품은 자연에서 얻은 물질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핵은 노동이라는 것이다.’(136쪽)

김동민은 언론학,?역사학,?철학,?정치경제학 고수이다.?아이엠에프(외환위기)?사태에 대해서 핵심체크 해주는 김동민 내공 대단하다.

‘외환위기 가운데 김대중 정부가 탄생했다.?김대중 정부는?IMF의 요구대로 거시경제 안정화 정책,?강력한 긴축정책,?금리의 대폭 인상, “외국인투자 촉진법”?제정 등을 시행에 옮겼다.?그러나 실물경제가 침체되면서 금리를 인하하자 주식투자로 돈이 몰렸다.?정부는 거시경제 안정화 정책 차원에서 구조조정을 실시했다.?금융산업 구조조정으로 규제철폐,?외국인 투자한도 폐지,?부동산 시장 전면 개방,?모든?M&A(인수합병)?허용,?외환거래 자유화 조치,?기업 구조조정으로 기업경영의 투명성 제고,?선진국 수준의 재무구조 추진,?핵심업종 중심의 강한 기업 유도,?계열회사 간 빚보증 관행 불식,책임경영,?노동시장 구조조정으로 정리해고제,?근로자파견제,?노사정위원회,?공공부문 구조조정으로 공기업 민영화 등이 추진되었다.?이로 인해?KT가 정부기구로부터 독립하여 민영화되었고, SK텔레콤,?포스코,?삼성전자 등 기업의 외국인 지분율이 상승했다.’(298쪽)

‘모든 신흥공업국의 은행들이 위기를 맞을지도 모른다.?이러한 불안이 심화되면 일본의 은행들도 위기를 맞을 가능성이 있다.?이렇게 될 경우 금융체계에 미치는 결과는 매우 심각할 것이다.?각국의 중앙은행들은 우애를 발휘하여 은행 간 자금시장에서 커다란 문제들(한국의 금융위기로부터 비롯되어 파급되는)이 일어나는 사태를 방지하는 데 시급히 만전을 기해야 한다.그러나?<조선일보>는?8월?21일자?“불안하지만 위기상황 아니다”라는 사설에서?“외환시장이 살얼음판을 걷고 있으나?‘외환위기’라는 표현을 써야 할 만큼 심각한 조짐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고 보도했다. <조선일보>는 다음날에도?1면 머리기사로?“한국 성장률 높아진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올렸다.’(297쪽)

조선일보는 아이엠에프 사태 예측을 제대로 못했다.?오히려 예측하지 못하도록 사실을 왜곡했다.?그런 조선일보가 반성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여전히 조선일보는 사실 왜곡하는 짓을 계속하고 있다.?조선일보는 친일파 신문이다.?친미파 신문이다. 1프로 종 역할 하는 신문이다. 1프로한테서 광고 받으려고 안달하는 신문이다.?조선일보는 다뤄야 할 것은 다루지 않는다.?부산 한진중공업으로 김진숙 만나러 가는 희망버스 다루지 않았다.?아니다.?조선일보는 신문이 아니다.?조선일보는 수구 언론기관일 뿐이다.?조선일보가 끄트머리 언론기관이 되어야 한다.?김동민은 조선일보 안 보기 운동을 현장에서 실천한 실천가이다.?이 책이 널리 읽혀 조선일보가 끄트머리 언론기관이 되길 기도한다.

이 책은 미디어 역사를 다룬다.?동서양 역사를 다룬다.?동서양 철학을 다룬다.?한국근현대사를 다룬다.?다루는 내용이 다양하다.?내용이 실하다.?이 책 한 권을 다 이해한다면 대단한 실력 소유자가 될 것이다.?그렇다고 해서 이 책이 어렵지만은 않다.?대체로 글이 쉽다.?동서양 철학 다루는 부분과 칼 맑스 철학 다루는 부분이 일반인이 보기에 조금 어려울 뿐이다.?이 세상 언론문제에 울분을 토하는 사람들이 읽기에 맞춤한 책이다.?지적 욕구가 높은 사람들이 읽기에 맞춤한 책이다.?여럿이 모여서 함께 읽고 토론하기에 맞춤한 책이다.?대학 언론학과 교재로 맞춤한 책이다.?벌써 세 대학에서 이 책을 대학교재로 쓰고 있다.(2014년 현재)

 

왜 고상한 ‘존재’와 ‘무’가 아니고 흔해빠진 ‘있다’, ‘없다’인가?[철학을다시 쓴다]-28-3

왜 고상한?‘존재’와?‘무’가 아니고 흔해빠진?‘있다’, ‘없다’인가?[철학을다시 쓴다]-28-3

 

 

윤구병(도서출판 보리 대표)

 

*이 글은 보리출판사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없는 것과 관련해서 저는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기 있는 이 교탁이 보이지요??이 교탁은 크기가 있습니다.?그런데 크기가 있는 것은 모두 쪼개질 수 있다고 했지요??이제부터 우리 머릿속에 있는 칼날로 이 교탁을 한번 쪼개 봅시다.?쪼개고 또 쪼개고……?한없이 쪼개지지요??이제 잠깐만 칼날을 멈추세요.?그리고 생각해 봅시다.?왜 이렇게 크기를 가진 것은 한없이 쪼개질 수 있지요??왜 우리는 크기가 있는 것은 무한히 쪼갤 수 있다고 생각할까요??쪼개고 또 쪼개도,?크기가 있는 한,?우리의 의식 속에 있는 칼날이 무디어지지 않는 까닭은 어디에 있을까요??우리가 쪼개는 작업은 물리학으로 말하면 작용입니다.?이렇게 무한히 계속되는 작용에 아무런 반작용도 하지 않고 작용을 받아들이기만 하는 이 신기한 것은 무엇일까요??순수하게 수동성만 지니고 있는 이 신기한 것,?크기를 가진 것 속에 숨어 있는 이것,?바로 이것이 없는 것입니다.?없는 것만이 아무 저항도 하지 않습니다.?있는 것은 쪼개지지 않습니다.(있는 것에 작용을 하면,?작용도 있는 것이므로 있는 것과 하나가 되어 버립니다.)?좀 어려운 말이기는 하지만 저는 없는 것을 순수하고 절대적인 수용 가능성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이쯤 해 두고 이제 쪼갤 때 생기는 다른 현상을 살펴보기로 할까요?크기를 가진 것은 아무리 쪼개고 또 쪼개도 크기가 아예 없어져 버리지는 않습니다.?그러면 아무리 작용을 해도 끝끝내 그 작용에 맞서서 저됨(자체성)을 잃지 않는 것은 무엇일까요??있는 것만이 저됨을 잃지 않습니다.?있는 것이 저됨을 잃고 바뀌면 없는 것이 되어 버립니다.?그러나 있는 것은 없는 것이 될 수 없고,?없는 것도 있는 것이 될 수 없습니다.?다시 말해서 끝끝내 저됨을 잃지 않고 지키는 것은 크기 속에 있는 있음의 측면입니다.?여기에서 우리는 하나의 결론을 이끌어 낼 수 있습니다.?그것은 크기를 가진 것은 모두 그 안에 순수 수동성과 자기 동일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곧 크기 속에는 있음과 없음이 함께 있다는 것입니다.?우리는 이제까지 있는 것과 없는 것은 한 자리에 있을 수 없다고 배웠습니다. ‘여기에 분필이 있다.’고 말하면서 동시에?‘여기에 분필이 없다.’고 말하면 저는 모순된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그러므로 크기 안에 있음과 없음이 함께 있다고 하는 것은 우리가 보는 이 교탁에 모순이 있다는 말이고,?이 말을 넓히면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 모순이 있다는 말이 됩니다.?그리고 우리의 생각은 이 세상에 있는 모순을 반영해서 있는 것도 파악하고 없는 것도 파악하여?‘있다’, ‘없다’는 말을 밥 먹듯이 할 수 있다는 말이 됩니다.”

이렇게 해서 저는 없는 것을 받아들여?‘없는 것이 있다.’는 말을 거짓에 이르는 함정이 아니라 세상살이와 주고받는 이야기와 그 말들을 뒷받침하는 우리 생각에 꼭 필요한 것으로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저는 칠판에 다음과 같은 두 개의 그림을 그렸습니다.

윤구병 그림 1-4

 

윤구병 그림 1-5

그리고 학생들에게 설명하기 시작했습니다.(여기에서 고백할 말이 있습니다.?그것은 이 그림은 제가 생각해 내서 그린 것이 아니고 제 스승인 박홍규 선생님이 그려 주신 것을 본딴 것이라는 사실입니다.?물론 그분은 있는 것,없는 것이라는 말 대신에 존재와 무라는 말을 썼습니다만.)

“앞의 그림?4를 보십시오.?보다시피 있는 것과 없는 것이 함께 있습니다.?이 세상에 처음으로 모순이 선을 보인 것입니다.?여럿〔多〕의 최소 단위인 둘〔2〕은 이렇게 모순과 함께 태어납니다.?있는 것과 없는 것 사이에 있는 금〔line〕에 주의를 기울여 주십시오.?앞에서 했던 질문과 꼭 같은 질문을 하겠습니다.?이 금은 있는 것에 속하는 것입니까??없는 것에 속하는 것입니까?”

“있는 것이요.”

어떤 학생이 대답했습니다.

“그럴까요??그렇다면 금도 있는 것이므로 이 그림의 왼쪽 칸에 있는 있는 것에 달라붙어서 있는 것과 하나가 되어 버려 금 구실을 못 하게 되고,?그에 따라 없는 것은 없어져 버리게 되겠네요.”

“그럼,?없는 것에 속하겠네요.”

다른 학생이 잽싸게 대답했습니다.

“그럴까요??그렇다면 금도 없는 것이므로 오른쪽 칸에 있는 없는 것과 구별이 안 되어 금 구실을 못 하게 되겠네요.?그리고 그 결과 없는 것만 남게 되어 있는 것은 없어져 버리게 되겠는데요.”

그러면서 저는 칠판에 금을 잔뜩 그어서 한 번은 없는 것을 뭉개 버리고 또 한 번은 있는 것을 뭉개 버렸습니다.

윤구병 그림 1-6

“이렇게 되면 곤란하지요??그러니까 달리 한번 생각해 봅시다.?있는 것과 없는 것을 갈라 주는 금은 동시에 있는 것과도 떨어져 있어야 하고 없는 것과도 떨어져 있어야 하므로 있는 것도 아니고,?없는 것도 아닌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그리스 철학에서 아페이론(apeiron)이라고 부르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아페이론은?‘규정할 수 없는 것〔indefinite〕’이고?‘한계가 없는 것〔infinite〕’입니다.?피타고라스가 그처럼이나 중요하게 여겼던 페라스(peras), ‘한계’, ‘끝’의 반대말이 바로 이것입니다.?여기에서 잠깐 옆길로 들어서서 페라스,?곧 한계이자 끝이라는 말이 어떤 뜻을 지니고 있는지 살펴봅시다.?아다시피 피타고라스는 페라스가 하나뿐인 것을 점〔point〕으로 규정했습니다.?두 개인 것을 선으로 보고,?세 개인 것을 면〔plane〕,?곧 삼각형으로 보고,?네 개인 것을 입체로 보았습니다.?그러니까 이렇게 됩니다.

●─점?●●─선?●●─면?●●─입체(세 개의 점 위에 점을 하나 올려놓은 것).?피타고라스가?1, 2, 3, 4라는 숫자를 그처럼이나 애지중지하고?1+2+3+4에서 나온?10이라는 숫자를 신성하게 여긴 것은 우리가 감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이 세상 모든 것은 점이나 선이나 면이나 입체로 되어 있어 이 네 개의 숫자 속에 우주의 구성 원리가 담겨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사실 이 끝이라는 낱말(개념)은 아주 중요합니다.?우리가 어떤 것을 보고 그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은 그것의 끝을 보기 때문입니다.?이를테면 여기 있는 이 교탁을 여러분은 눈으로 보고 있는데,?여러분의 망막에 나타나는 것은 이 교탁의 끝,?다시 말해서 이 교탁이 끝나는 표면입니다.?겉모습이지요.?우리는 투시력을 지니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이 교탁의 속을 꿰뚫어 볼 수 없습니다.?우리는 늘 어떤 것이 그것이 아닌 것과 만나는 한계를 보고 그것이 무엇인지를 압니다.?다른 예를 하나 더 들지요.?여기 칠판이 있는데,?여러분이 이 칠판에 아주 가까이 서서 이 칠판 안쪽에 있는 어느 지점만을 볼 때는 그것이 칠판인지 아닌지 잘 모릅니다.?멀찌감치 떨어져서 이 칠판의 테두리까지 보아야만 비로소 이것이 칠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끝이 얼마나 중요한지 보기를 하나만 더 들겠습니다.?기타를 가지고 있는 학생 없습니까??좋습니다.?여기에 기타 줄이 하나 있습니다.?이 줄은?50센티미터쯤 되어 보이는데 이 줄 속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무한한 끝이 숨어 있습니다.?기타를 잘 치는 사람은 이 숨어 있는 끝〔peras〕?가운데 자기가 바라는 끝을 아주 잘 찾아냅니다.?손가락으로 줄을 길게 또는 짧게 짚고 튀길 때마다 서로 다른 소리가 들리는데 그 까닭은 이 기타 줄에 숨어 있는 끝이 저마다 다른 소리의 특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우리는?‘끝이 없는 것〔apeiron〕’은 그것이 무엇인지 알 길이 없어집니다.?무엇인 것도 아니고 무엇이 아닌 것도 아닌 것,?더 정확하게 말해서 있는 것도 아니고,?없는 것도 아닌 것은 끝이 없는 것입니다.?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런 것을 규정할 수 없는 것,?끝도 갓도 없는 것,?한없는 것이라고 부릅니다.”

윤구병 그림 1-5

“자,?이제 그림?5를 다시 한 번 봅시다.?이것을 당구공이라고 합시다.?있는 것은 하얀 공을 가리키고 없는 것은 빨간 공이라고 칩시다.?보다시피 이 당구공 둘은 서로 맞닿아 있습니다.?둘이 붙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붙어 있으면 하나가 되어서 뗄 수가 없지요.?그렇다고 떨어져 있는 것도 아닙니다.?떨어져 있으면 이 두 당구공은 서로 독립되어 있어서 관계를 맺지 못합니다.다시 말해서 모순을 일으키지 않습니다.?문제는 이 두 개의 공이 서로 맞닿아 있다는 데 있습니다. ‘서로 맞닿아 있다.’는 말을 수학에서는 탄젠트(tangent),?곧 접선(接線)이라는 낱말을 써서 나타냅니다.?이 탄젠트라는 말은 라틴어 탄게레(tangere)에서 유래한 말인데?‘닿는다’, ‘만진다’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영어의 콘택트(contact)도 어원이 같습니다.?함께〔con〕+닿아 있는 것〔tactus〕이 콘택트이지요.?같은 어원에서 나온 말로는 영어에 컨틴젠시(contingency)라는 낱말이 있습니다.?프랑스어로는 콩텡장스(contingence)이지요.?그런데 이 낱말의 뜻을 살펴보면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연’, ‘우연성’, ‘우발성’이 이 낱말의 뜻입니다.그러면 맞닿아 있다는 말이 어떻게 해서 우연을 가리키는 말로 탈바꿈했을까요??우리는 존재론의 영역에서 맨 처음 나타나는 두 괴물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이며 이 둘이 몸을 맞대서 모순을 일으키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이 두 괴물이 서로 몸을 맞대야 할 아무런 필연적인 까닭이 없습니다.우리는 있는 것이 없어지는 것,?다시 말해서 있는 것이 없는 것이 되는 것을 보통 사라진다,?파괴된다고 말하고,?거꾸로 없는 것이 새로 생겨나는 것,?다시 말해서 없는 것이 있는 것으로 바뀌는 것을 생겨난다,?창조된다고 말하는데,?엄밀하게 말하자면 있는 것은 있는 것이고 없는 것은 없는 것이어서 있는 것이 없는 것이 되거나,?없는 것이 있는 것이 되는 일은 결코 없습니다.정확하기로 소문이 난 물리학자들도 아예 아무것도 없는 것에서 무엇인가 있는 것이 생겨난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무엇인가 새로운 것이 나타난다면 이미 있는 것,?아원자나,?원자나 분자의 수가 늘어나거나 줄어들거나 자리를 바꾸기 때문에 그렇게 된다고 이야기합니다.?만일에 정말 있는 것이 없는 것으로 되거나 없는 것이 있는 것으로 바뀐다면,?이런 사태는 우리가 머리로 이치를 따질 수 없다는 점에서 그야말로 우연입니다.?기독교의?‘하나님’이 무(無)로부터〔ex nihilo〕?이 세상을 창조한 것〔creatio〕이 우연이듯이.?하나님이 무에서 다른 세상을 창조해 내지 않고 왜 우리가 살고 있는 이런 세상을 만들어 냈는지 그야말로?‘하나님’만이 아는 일,?다시 말해서 아무도 모르는 일입니다.”

“처음 이야기로 되돌아가서 맞닿아 있는 당구공 두 개를 다시 살펴봅시다.있는 것이라는 흰 당구공과 없는 것이라는 빨간 당구공이 맞닿아 있는 점을 우리는 접점이라고 부릅니다.?접촉하고 있는 점〔point〕이라는 뜻이지요.?이 접점은 있는 것에 속하지도 않고 없는 것에도 속하지 않는 것이라는 점에서?‘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것’이라는 말은 앞에서 했습니다.실제로 당구장에서 맞닿아 있는 두 개의 당구공이 붙었다 떨어졌다 해서 그 사이를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실금 같은 공간이 있어 보이기도 하고 없어 보이기도 해서 종잡을 수 없는 것처럼 이?‘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것’(규정할 수 없다는 점에서 앞으로는 무규정적인 것이라고 부르겠습니다.)은 어떤 때는 있는 것과 붙어 있어서 있다고 할 수 있는 것〔可能的 存在〕이 되는가 하면,?또 어떤 때는 없는 것과 붙어 있어서 없다고 할 수 있는 것〔可能的 無〕이 되기도 합니다.?다시 말해서 무규정적인 것〔apeiron〕은 있는 것과 없는 것 사이에서 끊임없이 흔들리고 있고,?그런 점에서 운동하고 있는 것입니다.?이제 그림을 다시 하나 그려 보겠습니다.”

윤구병 그림 1-7

① ㄱ에서 점점 있는 것에 가까워지고 있는?ㄱ′,?ㄱ′′,?ㄱ′′′ ……

② ㄱ에서 점점 없는 것에 가까워지고 있는?-ㄱ′, -ㄱ′′, -ㄱ′′′ ……

저는 칠판에 위와 같은 그림을 그렸습니다.(이 그림과 비슷한 것을 우리에게 그려 보여 주신 분도 박홍규 선생님이었습니다.)

“자,?보십시오.?있는 것과 없는 것이라는 두 괴물이 서로 나란히 몸을 맞대자마자(관계를 맺자마자)?곧 두 괴물 사이를 갈라놓는 세 번째 괴물(무규정적인 것)이 나타나고 이 세 번째 괴물이 나타나자마자,?첫 번째 괴물과 세 번째 괴물 사이를 갈라놓는 또 하나의 괴물(있는 것과 최초의 무규정적인 것 사이에 들어 이 둘을 구별해 주는?‘있는 것 쪽으로 한 걸음 더 다가선 무규정적인 것’ : apeiron?ㄱ′)이 나타났습니다.?그리고 동시에 두 번째 괴물과 세 번째 괴물 사이를 갈라놓는 또 하나의 괴물(없는 것과 최초의 무규정적인 것 사이에 들어 이 둘을 구별해 주는?‘없는 것 쪽으로 한 걸음 더 다가선 무규정적인 것’ : apeiron -ㄱ′?)이 나타났습니다.?그리고 같은 방식으로 한없이 많은 괴물들(ㄱ′,?ㄱ′′,?ㄱ′′′ ……-ㄱ′, -ㄱ′′, -ㄱ′′′)이 있는 것과 없는 것 사이에 들어섰는데 이것들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것,?곧 무규정적인 것이라는 점에서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으나 자세히 살펴보면 서 있는 자리에 따라 저마다 다른 특성을 지니고 있습니다.?보기를 들어 설명하지요.?이?50센티미터 남짓한 기타 줄 안에는 무한히 많은 소리들이 숨어 있어서 이 줄의 어느 지점을 짚고 줄을 튀기느냐에 따라 저마다 다른 소리가 날 수 있는 것도 같은 이치입니다.?기타 줄에 숨어 있는 무한히 많은 소리들은 아직은 울려 퍼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무규정적인 소리들입니다.?다른 보기를 들어 설명해도 마찬가지입니다.?한 무더기의 진흙 속에는 그것을 빚어서 찻잔을 만들 수도 있고,?벽돌을 만들 수도 있고,?화분에 담아 꽃을 키울 수도 있다는 점에서 무한히 많은 것이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이야기가 나온 김에 오해가 생기지 않도록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을 빌려서 이 문제를 조금 더 설명하고 넘어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