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벤저스》, 《저스티스 리그》, 《왓치맨》과 《불안한 현대 사회》: 현대의 불안, 약자의 연대? <벙커1> 1

《어벤저스》,?《저스티스 리그》,?《왓치맨》과?《불안한 현대 사회》:?현대의 불안,?약자의 연대??<벙커1> 1

유현상(숭실대 강사)

 

 

 

 

1. B급 문화로서의 슈퍼 히어로 영화

-?코믹스 혹은 만화는 판타지나?SF?장르와 더불어 전형적인?B급 문화에 속하는 영역

어벤져스-?한동안?B급 문화는 일부 매니아들의 문화로 여겨지기도 했으나 최근에는 대중들의 적극적인 관심을 받고 있음

– B급 문화의 부각은 대중들의 눈높이를 고려하면 자연스러운 현상

-?아이들이나 청소년만이 아니라 성인들이 즐기기 위한 판타지로도 적절

-?만화를 원작으로 한 슈퍼 히어로 영화들은?B급 문화의 복합적 요소 구비

– B급 문화의 한 장르로서 슈퍼 히어로 영화들은 대체로 선악의 구도가 단순

-?슈퍼 히어로들은 그들의 초능력과는 달리 정치적 이해관계에 무관심할 뿐 아니라 무능력하기까지 함

-?아동기적 상상은 한편 인간의 근원적 불안 의식을 원형적으로 보여 줌

-?슈퍼 히어로에 대한 상상은 불안 의식의 원형

-?슈퍼 히어로의 이중고는 현대인들이 처한 이중고와 다르지 않음

-?정체성에 대한 혼란으로부터 야기되는 내부의 적과 그들이 물리쳐야 할 거대 악(惡)

-?그들의 연대(solidarity)는 거대 악을 넘어서는 악,?혹은 거대 악들의 연합에 상응하는 전술

-?그들의 연대가 전략이 아니고 전술인 이유는 일시적인 연대이기 때문

-?슈퍼 히어로들의 캐릭터는 본질적으로 연대에 맞지 않음

-?이타적이고 공동선을 실현하기 위한 할약을 하지만 공동체 구성원으로서의 일상적 삶은 외면

-?슈퍼 히어로들의 고립된 일상은 현대인들의 삶의 방식을 연상하게 함

 

?2.?초능력 인간을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가?

-?슈퍼 히어로의 등장에 대한 근원적 관심은 최초의 표현 방식이 아니라 상상의 문제

-?인간의 능력과 힘으로 대응할 수 없는 삶의 문제에 대한 위기의식의 한 형태

-?자연 현상에 대한 신화적 설명과 유사성을 갖춤

-?플라톤의?『국가』에 등장하는 전설?‘기게스의 반지’와 우리나라의 전래 동화인?‘도깨비 감투’?이야기는 일종의 초능력을 얻게 되는 인간이 슈퍼 히어로가 아닌 인간의 욕망을 지적하는 내용

– <반지의 제왕>의 절대 반지 역시 이와 유사한 맥락을 상징

-?초능력은 그 자체로는 가치 중립적

-?초능력은 슈퍼 히어로들의 능력이자 슈퍼 악당들의 능력

-?슈퍼 히어로에 대한 요청은 거대 악,?즉 슈퍼 악당의 존재에 의해 설득력을 갖춤

-?인간의 무력과 한계 상황에 대한 원초적인 두려움은 맞서야 할 대상을 더욱 강력한 것으로 인지하게 함

-?슈퍼 히어로에 대한 요청은 상상 속에서 바로 그러한 불안을 극복하기 위한 일종의 판타지

-?슈퍼맨의 경우 자연마저도 변화시켜 인간을 구원

 

3.?슈퍼 히어로,?하지만 소외된 약자

-?슈퍼 히어로라는 존재는 거대 악이 사라지는 순간 불필요한 존재로 전락

-?슈퍼 히어로들을 끝까지 응원하는 것은 아이들과 직접적인 도움을 받은 여성

-?대개의 영화에서 슈퍼 히어로의 진정한 적은 정치권력

-?근원적으로 영화 속 슈퍼 히어로들 역시 소외로부터 자유롭지 않음

-?현대의 소외된 현실은 모든 이들의 삶에서 근원적인 문제

-?슈퍼 히어로들에게 초능력은 동경의 대상이자 소외의 원인

-?소외는 환대받거나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승인을 받지 못하는 경우에 발생

-?역할의 상실,?존재감의 무시,?성과에 대한 불인정 등등은 모두 그 구체적인 형태

-?인간의 수단화를 보여 주는 가장 일반적인 형태

-?소외 문제를 가장 본격적으로 제기한 것은 독일 철학자 칼 마르크스

-?하지만 그 이전에 역시 독일의 철학자 칸트는?“인간을 오직 목적으로만 대하고 수단으로 대하지 말라”라는 언명을 함

-?칸트의 언명은 직접적으로 소외를 경계하는 것은 아니지만 인간을 도구적으로 대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선구적으로 주장

-?슈퍼 히어로들은 현대인들이 처한 불안을 더욱 분명하게 보여 줌

-?슈퍼 히어로들의 소외는 그들이 평범한 인간들과 함께 할 수 없다는 것

 

4. 현대 사회의 상황

-?캐나다의 철학자이자?『불안한 현대 사회(2001)』(The Ethics of Authenticity, 2000)의 저자인 찰스 테일러는 현대의 상황에 대해?‘불안’이라는 말로 함축

-?테일러는 불안의 원인으로?‘개인주의’, ‘도구적 이성의 지배’, ‘개인의 자유와 자기결정권의 상실’?등을 제시

-?현대가 안고 있는 불안의 원인들은 인정을 방해하고 소외를 초래

-?인정의 문제는 근대 철학 이후에 등장한 중요한 주제 중 하나

-?타자가 나를 인정하는 것이 유의미하기 위해서는 그 타자가 나와 대등한 존재이상이어야 한다.?따라서 인정의 문제가 개개인의 생존과 구체적으로 결부된 역사적 조건은 근대 이후

 

5. 인정의 정치

-?테일러는?[자아의 원천들]에서 근대적 자아의 정체성이 지니는 특징적인 구성요소를 타인들의 복지를 고려하는 가치를 소중하게 여기는 것과 모든 사람이 권리를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간주

-?근대적 자아,?혹은 근대 이후 인류가 지니게 된 이러한 생각들은 개인주의적인 배경과 더불어 인정의 문제를 구체화시키는 배경

-?자본주의의 고도화가 이루어지고 시장의 지배가 강화될수록 인정의 문제는 더욱 절실한 문제

-?현대 사회가 다문화하고 다양성이 증가하고 있다는 점도 인정의 문제에 대한 적극적 접근을 요청

-?테일러는 인정(recognition)의 문제를 현대 정치의 핵심으로 보았다.

-?인정은 관계적 개념이라는 점에서 개인들 간의 문제이며 공동체와 개인의 문제다.

-?인정의 문제에 대해서 테일러가 핵심적인 것으로 보고 있는 것은 마땅한 인정이 생존에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테일러는 인정의 문제는 정체성의 문제와 결부되어 있으며,?현대에서의 정체성의 문제는 진정성의 개념과 더불어 고찰해야 한다고 보았다.

-?정체성이 인정의 문제와 연관되는 이유는 마땅한 인정에의 결여가 정체성의 왜곡에서 비롯되기 때문

-?정체성 왜곡의 형태는 인정에의 요구를 주장하는 다양한 현대 정치의 진영에서 제시

-?여성주의 입장에서는 가부장제 문화가 여성의 정체성을 왜곡하고,?흑인 인권운동을 주도하는 그룹에서는 백인 우월주의가 흑인의 정체성에 대한 왜곡된 이미지를 강요

-?정체성의 왜곡이 마땅한 인정의 결여를 초래

-?테일러는 마땅한 인정과 정체성의 요구는?‘평등한 품위의 정치’와?‘차이의 정치’에 의해서 발전되었다고 이해

-?평등한 품위의 정치는 차이의 정치에 대해 비차별의 원리를 위배한다고 비판하며,?차이의 정치는 평등한 품위의 정치가 사람들을 참되지 않은 동질성의 틀로 밀어 넣어 정체성을 부정

-?평등한 품위의 정치를 보여주는 절차적인 자유주의는 개인적인 목적과 소수의 집단적인 목적 사이에서 중립적일 수 없다는 것이 테일러의 생각

-?다민족 사회에서 상이한 문화에 대해서 테일러는 상이한 문화들을 살려 두는 것만이 아니라 그 가치를 승인해야 한다고 주장

-?승인의 방식이나 태도가 결코 시혜적이거나 평등한 존경의 관점은 배척

-?테일러는 다른 문화에 대한 가치 평가 혹은 마땅한 인정을 위해서는 지평 융해의 접근을 역설

-?다른 문화에 대한 섣부른 존경이나 호의적인 태도 역시 오만한 태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그러한 태도는 또한 이미 그러한 호의적인 평가를 할 기준을 가지고 있다고 전제하는 것이며 이러한 입장에서의 평가는 다분히 균질화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이러한 위험을 피하기 위해 테일러는 가다머의 지평 융해의 방법을 끌어들이는 것이다.

-?테일러의 표현대로?‘세계적인 차원과 뒤섞인 각각의 개인주의적인 사회에서 모두 함께 살아가야 한다’?고 한다면 우리는 다른 문화에 대해서 좀더 개방적인 입장에서 연구를 착수해야만 할 것이다.

-?테일러는 헤르더의 말을 빌어 다양한 문화는 우연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더 위대한 조화를 이루기 위한 수단이라는 점에 동의

-?테일러가 말하는?‘인정의 정치’는 크게 다양한 개인의 정체성과 인정에 관한 문제와 다양한 문화의 정체성과 인정의 문제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다.?개인의 경우에 정체성과 인정의 문제가 자기 표현을 바탕으로 한 대화적인 진정성이 핵심이라면,?문화의 경우에는 지평 융해를 통한 비교문화 연구가 핵심

 

6.슈퍼 히어로의 연대와 약자들의 연대

-?모든 형태의 연대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연대가 결코 쉽지 않다는 것

희망 버스-?초기 자본주의 시대의 노동자 연대는 단순한 일차적 연대

-?현대 사회에서는 연대의 주체들이 처한 상황과 문제의식이 모두 차이를 보일 수 있다.?적대적이거나 우호적인 관계의 양상도 빠르게 변화한다.?하지만 다르기 때문에 연대의 현실적 요청은 더욱 증가

-?슈퍼 히어로들의 연대는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현실의 연대는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테일러는 진정한 연대는 자발성의 기초 위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파악

-자발성을 보장하기 위한 기초는 개인들이 자기 결정의 자유를 행사할 수 있어야 함

-개인적인 자기실현만을 도모하려는 삶의 태도에서는 진정성이 출현할 수 없고 진정성이 없는 개인은 자기 결정의 자유를 행사하지 못함

-연대는 물질적 삶의 조건 만이 아니라 모든 정치적 문화적 정체성에 대한 인정의 획득을 필요로 하는 사람 혹은 공동체가 취할 수 있는 인정 투쟁의 효과적인 전략

-연대란 서로 다른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이 동일한 정치적인 삶의 이슈에 대해서 공동의 행동을 결의하는 것이다.?여기서의 결의는 각오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천을 약속하는 정치적 판단의 공표

-?여성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진정한 연대성은 삶의 고통에 대한 일정한 거리두기를 가능하게 하여 객관적 해결책을 가능하게 한다고 보았다.

-“ ‘연대감’에 대한 인식은,?다양하게 규범화된 역할들을 통해 우리가 서로에게 관련되는 방식을 넘어서 우리는 다양한 측면을 지녔지만 함께 결합되고 근본적으로 평등한 인간 존재로 이루어진 공동체라는,?우리 모두가 공유하는 직관이다.?약자의 권력에 합법성을 부여하고,?뒤바뀜과 위반의 순간에 돌발적으로 형성되는 것은 이와 같은 근원적 공동체이다.”(찰스 테일러)

 

 

 

나비의 삶인지 나의 삶인지? : 『장자』에서 보는 인간의 삶 <도봉도서관 나이듦의 철학> 4

나비의 삶인지 나의 삶인지? :?『장자』에서 보는 인간의 삶 <도봉도서관 나이듦의 철학> 4

전호근(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우언의 철학자,?장자

 

 

왜 우언인가?

[장자]는 전편의 대부분이 우언으로 채워져 있기 때문에 우언의 맥락을 이해하지 못하면 장자를 이해하기 어렵습니다.?그렇다면 장자는 왜 이런 식의 우언 형식을 택했는가??우언은 이렇게 해석될 수도 있고,?저렇게 해석될 수도 있기 때문에 정치적 박해로부터 비교적 안전하기 때문입니다.?장자 텍스트의 행간에는 물음표가 많이 있습니다.?장자가 던지는 질문이 도처에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피(彼)와 시(是)를 주제로 한 이야기에서 장자는?‘저것’과?‘이것’이 각자의 관점에 따라 바뀐다고 지적합니다.?이것의 입장에서는 이것이 이것이고 저것이 저것이지만,?저것의 입장에서는 이것이 저것이 되고 저것이 이것이 된다는 거죠.?그리곤 다시 이것과 저것을 말하고 있는?‘나’에 대해 질문을 던집니다.?여기서 나는 피(彼)인가,?시(是)인가??이처럼 세상에서 원칙이라고 받아들이는 것들에 대해 근본적으로 회의할 뿐만 아니라 그런 회의를 하고 있는 자신마저도 의심하는 치열한 사유를 보여줍니다.

제물론의 유명한 호접몽 이야기도 그래서 가능한 것입니다.?장자가 꿈에 나비가 되어 가볍게 날아다녔는데 그렇게 날아다니는 나비가 워낙 꼭 맞아서 전혀 장자인줄 몰랐다지요.?그리고는 나비와 장주는 반드시 구분이 있을 터인데,?장자가 나비의 꿈을 꾼 것인지 아니면 나비가 장자의 꿈을 꾸는 것인지 모르겠다고 이야기합니다.?이처럼 꿈을 통해서 현실까지 의심하는 방식은 장자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서사구조입니다.?심지어 꿈 속의 꿈 이야기를 하지요.?한자?‘覺’은 잠에서 깬다는 뜻으로 읽을 때는?‘교’로 발음하고 깨달음을 얻는다는 뜻으로 읽을 때는 것은?‘각’으로 발음하는데요,?장자는 잠에서 깨는?‘교’를 통해서 잠에서 깬 사람이 꿈을 비로소 허상인 줄 알게 되는 것처럼,?깨우침 곧?‘각’을 통해서 우리가 의심의 여지없이 현실이라고 여기는 삶도 사실은 허상일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합니다.?우리가 사는 세상을 꿈이라고 말하는 것은 세상이 추구하는 올바른 것이 사실 거짓일 수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그렇지만 장자는 이조차도?‘거짓일까?’하고 빠져나감으로써 끝까지 우리에게 생각거리를 던져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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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어느 편이야?

장자가 문헌이나 학자들에 따라 송나라 사람이나 위나라사람,?또는 초나라이라고 기록이나 주장이 엇갈리는 것은 장자가 활동한?‘몽(蒙)’이라는 지역이 이들 세 나라가 번갈아 가며 점령한 지역이기 때문입니다.?그런 특수한 조건은 해당 지역에 사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때그때 정치적 판단을 내릴 수밖에 없는 상황을 조성하게 됩니다.?초나라가 다스리는 상황에서?‘초나라 고홈’이라고 외치면 생존하기 어렵겠지요??그렇다고 무작정?‘초나라 만세!’를 외치면 위나라가 점령할 때 어떻게 살겠어요.?생각이 많아질 수밖에요.?초나라가 들어와서 초나라가 좋으냐고 물어보면 좋다고 할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이처럼 여러 나라가 번갈아 지배하다 보니 한 나라를 꼬집어 좋다고 말할 수 없고 그저?‘좋은가?’하고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죠.

사실 이런 경험은 우리에게는 그다지 생소한 것이 아닙니다.?많은 분들이 이 나라의 불행한 현대사에서 장자와 같은 경험을 해 봤을 겁니다.?예를 들어 이청준 작가의 단편작품 중에서 점령군이 어둠 속에서 주민에게 총을 들이대며 어느 편이냐고 묻는 장면이 나옵니다.?상대방이 어둠 속에 있기 때문에 국군인지,?인민군인지 알 수 없는 절박한 상황에서 목숨이 걸린 대답을 해야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여러분이라면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칸트의 정언명령처럼 거짓말은 하면 안 되니까 사실대로 대답하시겠습니까??아니면 그냥 총든 편이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사실 요즘도 달라진 건 없습니다.?다만 요즘은 총 들고 묻는 게 아니라 돈 들고?“너 어느 편이냐고”묻지요.?그러면 많은 사람들이?‘돈든 편’이라고 대답하지요.?총보다 돈이 더 무서운 시대에 살아남기 위해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요?

이런 고민이 장자가 우언을 창작하게 된 배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장자가 살았던 시대는 시공간적으로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명확하게 드러낼 수 없을 뿐 더러 때로는 말을 바꾸기도 해야 살아남는 세상이었던 겁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자는 자신이 하고 싶었던 말을 해야만 했습니다.?바로 이런 이유로 고도의?‘문학적 장치’가 필요하게 됩니다.?그러므로?[장자]는 글쓴이의 정치적 입장에 따라 얼마든지 새롭게 해석할 수 있는?‘열려 있는 텍스트’로 보고 그 맥락을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지식인의 운명

이처럼 장자의 우언은 지극히?‘정치적’인 이유로 탄생한 것입니다.?그러므로 단순히 재미를 위한 문학적 장치로서의 우스갯소리가 아니라 생존을 건 정치적 고민이 담겨 있는 이야기로 받아들여야 합니다.?참 어렵지요.?예부터 자신이 쓴 글 때문에 죽은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습니다.?이른바?‘문자옥’이라고 하죠.?공자나 맹자처럼 하고 싶은 말 다하면서 천하를 돌아다니는 것은 지식인의 입장에서 보면 정말 대단한 것입니다.?당시 권력자들은 사람을 너무나 쉽게 죽였거든요.?예를 들어 진나라 헌공은 음식에 독이 들었는지 확인하기 위해 음식을 개에게 먹인 후 개가 죽자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았던 모양입니다.?그 음식을 기어이 사람에게도 먹어보게 한 후 사람이 죽자 비로소 독이 들었다는 것을 인정했다는 얘기가 있습니다.?후대의 현군으로 알려진 당나라 태종도 아끼던 신하이자 당시의 문장가였던 장온고를 순간의 오해로 하루아침에 죽이고 말지요.?물론 그 뒤에 크게 후회하고서는 사형을 청할 때에는 반드시 세 번 주청하도록 한 이른바?‘삼복주제도’를 만들었다는 얘기가 전해오지요.

재주가 있는 사람이라고 해서 반드시 살아남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명망이 있는 사람의 경우는 오히려 늘 시대의 시험을 받아야 했습니다.?후한말기의 채옹은 동탁의 부름을 받고 몸이 더럽혀 지는 것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그의 사람이 됩니다.?그런 시대에 태어나지 않으면 좋겠지만 그런 시대에 살게 되면 어떻게 할 것인지 스스로에게 늘 질문을 하게 됩니다.?나는 과연 보편적 가치관을 지키면서 시대의 시험을 견뎌낼 수 있는가하는 물음을 갖게 되지요.?일제강점기 이 나라의 지식인들 중에서는 어쩔 수 없이 친일행위를 했다고 한 사람들이 많지요.?그런 지식인은 아주 작은 지식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시대적 상황에 대한 변명을 이해한다손 쳐도 그렇게 변절하면서 살아남든가,?아니면 죽든가 둘 중 하나밖에 선택할 수 없는 것입니다.?그것은 선택입니다.?물론 그 시대에 독립운동 자금도 조금씩 대주고,일본에 비행기도 만들어 바치고 하면서 살아남은 사람도 있지요.?지금에 와서 그러한 친일행적을 처벌하느냐 마느냐의 문제 이전에 그런 사실은 반드시 기록으로 남겨야지요.

장자는 자신의 이야기를 그런 시대적 배경 하에서?‘우언’의 방식으로 남겼습니다.?그런데 말씀드린 것처럼 우언은 이렇게 이해할 수도 있고 저렇게 이해할 수도 있기 때문에 장자의 의도가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 알기 어렵습니다.?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장자는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는 경우가 많습니다.한 마디만 하고 끝내면 알 수 없는데 같은 이야기를 두 번,?세 번 반복해서 다루고 있기 때문에 우언의 방식을 취했더라도 자세히 읽으면 장자의 의도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장자]의 제1편 첫 장에 등장하는 우언은 물고기가 새가 되는 이야기입니다.?첫편의 제목은?‘소요유(逍遙遊)’인데?‘유(游)’는?‘논다’는 뜻입니다.?온 천하가 전쟁에 미쳐 날 뛰는 시대에 어떻게 노는 가치를 이야기할 수 있었을까요??놀 뿐만 아니라 낮잠 자는 이야기를 합니다.?장자는 소요유편에서?‘소요’를?‘침와(寢臥)’?즉, ‘낮잠 잔다’는 말과 짝을 이루어 쓰고 있거든요.?결국 장자는 첫 편부터 낮잠 자면서 노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노는 것’이 어떤 가치를 지니고 있는지 이해하려면 먼저 우리가 갖고 있는 기존의 가치 기준을 바꿔야만 가능해집니다.?만약 맹자라면 백성이 도탄에 빠져 있는데 무슨 노는 얘기인가하고 비판했을 것입니다.?맹자는 절대로 노는 이야기는 하지 않을 사람이거든요.?소요유편에 나오는 첫 번째 이야기는 대붕(大鵬)의 이야기입니다.?이 이야기는 장자에 세 번 등장합니다.?그러므로 대붕의 이야기를 세 번에 걸쳐 읽다 보면 장자의 생각을 함께 즐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림자의 그림자가 그림자에게 묻다

 

허망하고 또 허망한 존재 이야기

[장자]?제물론편 제5장의 주인공은 그림자입니다.?아니 그림자의 그림자입니다.?그림자는 영(景)이고 그림자의 그림자는 망량(罔兩)입니다.?망량의 경우는 비슷한 명칭인 이매망량(?魅??)이 춘추좌씨전에 나오는데 이매는 산귀신이고 망량은 물귀신으로 풀이됩니다.?장자의 망량은 발음만 같고 장자가 그림자의 우의를 담아서 만든 말입니다.?망량(罔兩)의 망(罔)은 허망하다는 뜻인 망(亡)의 가차입니다.?양(兩)은 둘이라는 뜻이죠.?그러니 망량은 망이우망(亡而又亡),?허망하고 또 허망한 존재입니다.?그림자는 실체의 입장에서 보면 허망한 존재입니다.?그런데 그 그림자에 붙어 있는 곁그림자는 더더욱 허망한 존재라는 것입니다.?마치 꿈속의 꿈처럼요.

곁그림자가 그림자에게 물었다.

“조금 전에는 그대가 걸어가다가 지금은 멈추고,?또 조금 전에는 앉아 있다가 지금은 일어서 있으니,?어찌 그다지도 일정한 지조가 없는가?”

그림자가 말했다.

“나 또한 무언가 의지하는 것이 있어 그리 된 것인가??내가 의지하고 있는 것은 또 다른 무언가에 의지하여 그리된 것인가??나는 뱀의 비늘이나 매미의 날개 같은 것에 의지하는가??어떻게 그런 줄 알겠으며,?어떻게 그렇지 않은 줄 알겠는가?”

[罔兩이?問景曰 ?에?子行하다가?今에?子止하며??에?子坐하다가?今에?子起하니?何其無特操與요?景曰 吾는?有待而然者邪아?吾所待는?又有待而然者邪아?吾는?待蛇??翼邪아?惡識所以然하며?惡識所以不然이리오]

장자는 즐겨 여러 동식물을 의인화하여 주인공으로 내세웁니다.?나무나 새종류가 자주 등장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사람의 신체 일부를 의인화하기도 하죠 소요유의?‘견오와 연숙’의 예도 그렇죠.?견오는 사람의 어깨를,?연숙은 도와 이어져 있는 사람을 뜻한다고 말씀드렸지요.?바로 앞서 읽었던?‘구작자와 장오자’의 예도 까치와 오동나무를 의인화한 것입니다.?여기서는 그림자를 의인화한 것입니다.?그림자는 실체가 아니라 실체의 허상입니다.?그런데 이 이야기에는 그림자가 실체로 등장합니다.?이 실체에는 그림자가 붙어 있습니다.?바로?‘그림자의 그림자’가 그림자에게?‘일정한 지조[특조(特操)]’가 없다고 따집니다.?특조(特操)의 조(操)는 조행(操行),?곧 행실을 일정하게 지키는 것입니다.?흔히 조심(操心)이라는 말을 쓰는데 요즘은 조심이라는 말이 그저 신중한 태도를 뜻하지만 본래 조심은 맹자에 나오는 존심(存心)과 같이 마음을 붙들어 둔다는 뜻으로 쓰입니다.?존심이나 조심의 결과가 조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일정한 마음의 결과 일정한 행실이 있게 되는 것이니까요.?곁그림자는 그림자에게?왜 이렇게 일정한 지조없이 가다가 말다가 앉았다 일어섰다 하냐고요.?결국 당신을 따라하려니 피곤하다는 것이죠.?그러자 그림자가 이렇게 대답합니다.?어디 난들 그러고 싶어서 그러겠는가.나 또한 내가 의지하고 있는 그 무엇이 움직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런다고 말이죠.?사실 그림자니까 당연히 실물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죠.?그래서 실물이 움직이면 그림자도 따라서 움직이는 것이 당연합니다.

장자가?‘그림자의 그림자’를 등장시킨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보통 그림자는 부수적인 것이고 실물은 알맹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림자의 그림자’,곧 곁그림자 입장에서 보면 그림자가 실체입니다.?곁그림자의 존재의 근거는 그림자라는 것이죠.?그런데 사실은 그림자는 실체가 아니라 실물의 허상에 지나지 않지요.?그렇다면 같은 논리로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실체라고 생각했던 그림자가 사실은 실물의 허상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우리가 실체라고 생각하는 실물,?곧 우리의 몸뚱이 또한 또 다른 실체의 허상이 아니겠느냐는 거지요.?우리가 생각하고 욕망하고 행동하는 기준이라고 할 수 있는 우리라는 주체가 사실은 허상에 지나지 않는 것일 수 있다는 것을 장자는 말하고 있는 겁니다.?제4장에서 장오자가 꿈에 술 마시고 즐겁게 놀던 자가 아침에 잠에서 깨면 슬피 운다는 이야기를 했죠.?그리고 그 꿈을 깨어나는 것이 생리적인 깨어남이라면 우리의 현실,?곧 인생이라는 것 자체가 꿈같은 허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대각’이라고 했습니다.?꿈 속의 꿈과 마찬 가지로 그림자의 그림자 또한 우리가 확실하다고 믿고 있는 우리의 존재를 뿌리째 흔들어 놓기 위한 장자의 설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장자는 궁극적으로 실체와 허상을 마주 세우기 위한 기획으로 우리가 실체라고 생각하는 실물조차 허상일 수도 있다는 것을 지적한 것입니다.

어떤 분은 여기서 빛이 등장하지 않는 이유를 따져 묻습니다.?하지만 그림자라고 하면 빛은 이미 전제되어 있는 것입니다.?빛이 없고 그림자가 없다면 우리는 빛을 인식할 수 없을 겁니다.?마찬 가지로 그림자만 있다면 그림자를 인식할 수 없는 것처럼요.?그리고 빛과 그림자의 관계를 따지는 과학적 사유는 이 대목을 이해하는데 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과학적으로 따지면 실물이나 그림자나 곁그림자나 모두 실체입니다.?모두 현상이니까요.그러니 과학적 사유는 잠시 내려놓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 이야기는 존재의 근거를 따져 묻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곁그림자→그림자→실물의 입장을 모두 성찰하는 내용입니다.?우리는 어떤 것을 존재의 근거라고 규정짓지만 그런 규정을 짓는 순간 그 존재의 근거라는 하는 존재의 근거를 또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존재의 근거,?존재의 근거의 근거,?존재의 근거의 근거의 근거,?이런 식으로요.?그런데 곁그림자는 허망하고 또 허망한 존재라서 망량,?곧 망이 두 번 겹치는 존재로 그려집니다.?망망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하지만 그보다 더 허망한 존재를 얼마든지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망망망,?망망망망,?이런 식으로요.?이런 식의 수많은 허망과 허망의 연속을 장자는 자생자화(自生自化)라고 하였습니다.?그런 자생자화의 또 다른 표현이 물화(物化)입니다.?장자의 다음 이야기는 스스로 체험한 물화의 경험담인 호접몽(胡蝶夢),?나비의 꿈입니다.

 

나비의 꿈

 

내가 나비의 꿈을 꾸는가,?나비가 내 꿈을 꾸는가

111제물론편 제6장의 주인공은 장자 자신입니다.?아니 나비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어떤 학자는 장자가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장주라는 이름까지 나오는 것으로 보아 이 대목은 장자의 작품이 아니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사실?[논어]가 공자의 저작이 아닌 것은?‘자왈(子曰)’이라는 표현에서부터 알 수 있습니다. ‘자왈’은 선생께서 말씀하셨다는 뜻인데 공자가 스스로 자기 자신을 그런 식으로 표현했을 리는 없으니까요.?그런데?[맹자]가 되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어떤 사람은 맹자가 스스로?‘맹선생’이라고 호칭했을 리 없으니?[맹자]는 맹자가 직접 지은 것이 아니라 맹자 사후에 제자들이 스승의 말을 기록한 것이라고요. [맹자]가 맹자의 자저가 아니라는 근거 중의 하나입니다.?하지만?[맹자]를 읽어보면?[맹자]는 아무래도 맹자가 직접 지은 부분이 더 많은 것 같습니다. [맹자]의 문장은 직접 기술하지 않으면 도저히 불가능하다 싶을 정도의 생생함이 있거든요.?아무튼 장자가 직접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대목이?[장자]에는 여러 차례 나오고 그 때문에[장자]?또한 장자의 자저가 아니라는 주장도 있습니다.?그러나 자연사물은 말할 것도 없이 인간 신체의 일부까지 의인화하여 즐겨 주인공으로 등장시키는 것이 장자입니다.?장자는 단순한 대화록이 아니라 문학 작품입니다.따라서 얼마든지 자신이 주인공으로 등장할 수 있습니다.?그렇다면 이 대목만 굳이 다른 이야기와 달리 볼 필요는 없겠지요.

사실 이런 식의 다양한 문학 장치가 등장하는 이유는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장자는 공자나 맹자와는 처지가 달랐기 때문입니다.?공맹처럼 하고 싶은 이야기 다 하면서 잡혀 가지 않으면 좋은데,?장자는 자칫 잡혀가기 쉬운 처지였기 때문에 보호 장치가 필요했던 것입다.?그 중의 하나가 꿈입니다.?자신의 삶을 안전하게 지키면서 의도를 전달할 수 있는 손쉬운 방법이지요.이후 남가일몽,?일장춘몽,?구운몽 등과 같이 꿈을 매개로 신분차별이나 남녀의 차별 등 여러 가지 사회적 억압을 넘어설 수 있는 해방구로 삼은 이야기들이 많이 창작되었습니다.?꿈이라는 장치를 자유로운 공간으로 삼은 것입니다.?그래서 호접몽은 꿈 이야기의 원조라 할 수 있습니다.

흔히 이 대목을 데카르트의 방법적 회의와 연관지어 풀이하는 경우가 있습니다만 데카르트의 경우는 애초에 회의가 목적이 아니라 회의를 어떻게 하면 끊어버릴까 하는 아주 불순한(?)?목적을 가지고 회의한 사이비 회의주의자입니다.?장자와는 다릅니다.?아니 반대편에 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또 주체를 강조했던 데카르트는 인간 이외의 동물은 기계와 같다고 보았습니다.?동물을 발로 차면 소리를 내며 우는 것은 종을 쳤을 때 소리가 나는 것과 같다고 생각했던 사람입니다.?장자와는 많이 다르지요.?일단 장자에게는 불순한 목적의 회의라든가 그런 게 없습니다.?동물을 기계로 보지도 않고요.둘을 비교하면 아마 서로 화를 낼 겁니다.?장자는 자신마저도 상대적인 세계에서는 나비와 같은 존재라고 보는 겁니다.?이야기의 말미에 등장하는?‘물화(物化)’는 장자의 세계관을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개념입니다.?물화란 내가 주체고 상대가 대상이라는 인식을 넘어선 결과입니다.?내가 온전히 상대와 같아진다는 것은 곧 나의 소멸을 의미합니다.?나를 버려서 상대를 이루는 것,?그것이 장자의 물화(物化)?개념에 가깝습니다. ‘물화(物化)’에서‘물(物)’자를 빼고?‘화(化)’자만 남기면 오히려 이해하기가 쉽습니다.?소요유 제1장에서?‘화(化)’는 살아 있는 존재가 사멸하고 완전히 새로운 존재가 되는 것이라고 풀이했던 것을 돌이켜보시기 바랍니다.

어젯밤 장주는 꿈에 나비가 되었다.?팔랑팔랑 가볍게 나비였는데 스스로 즐겁고 뜻에 꼭 맞았는지라 장주인 것을 알지 못했다.?이윽고 화들짝 깨어 보니 갑자기 장주였다.?알 수 없구나.?장주의 꿈에 나비가 된 것인가 나비의 꿈에 장주가 된 것인가.?장주와 나비는 분명한 구별이 있을 테지만 이처럼 장주가 나비가 되고 나비가 장주가 되는 것,?이것을 물화(物化)라고 한다.[昔者에?莊周夢爲胡蝶호니???然胡蝶也러니?自喩適志與라?不知周也호라?俄然覺하니?則??然周也러라?不知케라?周之夢에?爲胡蝶與아?胡蝶之夢에?爲周與아?周與胡蝶은?則必有分矣니?此之謂物化니라]

장자가 꿈을 꿉니다.?유명한 호접몽(胡蝶夢)입니다.?꿈에 나비가 되어 날아다닙니다.?사람이 날아다니는 상상을 하게 된다면 아무래도 떨어질까 두려워하지 않을까요??그런데?‘적지(適志)’라고 표현한 데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뜻에 꼭 맞아서 전혀 두려움이 느껴지지 않습니다.?자기가 장자라는 사실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나비가 된 것이죠.?사실?난다는 표현은 인간에게는 이룰 수 없는 꿈을 이루었다는 뜻으로 쓰이지요.?장자의 첫 이야기가 대붕의 플라잉 신으로 시작한다는 사실을 상기하시기 바랍니다.?그리고 이 대목은 바로 장자 자신의 플라잉 신입니다.?대붕은 구만 리의 하늘을 타고 납니다.?그리고 장자는?‘물화’,?곧 나비가 됨으로써 하늘을 납니다.?구만 리의 하늘이 필요하지 않습니다.?나비의 날개는 아주 가벼우니까요.

날 수 없는 인간에게 난다는 것은 자유의 획득을 뜻합니다.?빌리 엘리어트라는 소년이 춤추는 것을 보고 로열 발레단 심사위원이 묻죠. “너 춤 출 때 기분이 어떠니?”?하고요.?그러자 소년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하늘을 나는 것 같아요.”?영국 영화 빌리 엘리어트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난다는 것은 춤의 가장 높은 경지가 아닐까요??두 개의 다리와 두 개의 팔 그리고 하나의 몸뚱이라는 육체적 속박을 벗어나는 것이 춤의 궁극적 경지임을 암시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제물론의 마지막 이야기 나비꿈은 소요유와 마찬가지로 자유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바로 앞에서 장자는 그림자와 꿈 이야기를 통해서?‘곁그림자→그림자→실물’, ‘꿈속의 꿈→꿈→현실’의 대비를 통해서 모든 사물이 서로 종속적으로 연속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그리고 그런 종속의 맨 위에 있는 실물과 현실을 부정합니다.?겉으로 보기에 더 이상 종속이 아닌 것처럼 보이는 것들도 사실은 종속의 굴레에 얽매여 있다는 겁니다.?힘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힘이 약한 자가 자유롭지 못한 것은 당연한 일이지요.?그렇다고 힘이 센 자가 자유로우냐하면 그렇지 않습니다.?힘의 지배를 정당화하는 순간 더 큰 힘에 의한 지배를 부정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논리적으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죠.

이를 테면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 아테네는 섬나라 멜로스를 정복했죠.?침공하기 전에 만약 항복하지 않으면 여자와 어린 아이들까지 모두 죽이겠다고 최후통첩을 합니다.?하지만 멜로스의 지도자들은 항복하지 않고 저항합니다.?그 결과 멜로스는 아테네의 공격에 의해 멸망당합니다.?멜로스 사람들은 죽어가면서 너희는 너희가 우리를 대한 방식대로 또 다른 침략자에게 멸망당할 것이라고 외칩니다.?실제 그렇게 되었죠.?스파르타가 아테네를 멸망시켰으니까요.?적어도 멜로스 사람들은 아테네가 부당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하지만 아테네 사람들은 그런 말을 할 수 없습니다.?자기들이 멜로스를 대한 방식대로 멸망당했으니까요.?이처럼 강약의 논리를 따르면 강자 또한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죠.

그럼 어떻게 해야 자유로울 수 있을까요??장자는 자유란?‘상대를 대등한 존재로 받아들일 때’?가능하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나비의 꿈에서 장자는 앞의 두 경우와는 다른 플롯을 제시합니다.?서로 종속되는 것으로 그렸던 그림자와 꿈 이야기와는 달리 나비꿈에서는?‘장자의 꿈↔나비의 꿈’?이라는 식으로 둘을 마주 세우고 있습니다.?제물론에서 자주 등장하는?‘저것’과?‘이것’의 논리를 문학적 장치로 활용한 것입니다.?저게 허상이면 이것도 허상이고 상대가 부정되면 나도 부정된다는 말입니다.?이 대목에 등장하는 장주인 줄 몰랐다[不知周也]?든지 알 수 없다[不知]는 식의 말은 우리가 확신하는?‘주체’라는 것이 사실은 언제든지 부정될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표현입니다.?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장자는 주체고 나비는 대상입니다.?그런데 장자는 나비꿈으로 주체와 대상을 마주 세우더니 결국에는?“장주의 꿈에 나비가 된 것인가 나비의 꿈에 장주가 된 것인가.”라는 물음을 통해 주체와 대상의 역할을 전도시킴으로써 현실의 질서와 가치관의 전복을 시도한 것이지요.

이 대목을 감상할 때는?‘나’와?‘나비’를 짝으로 마주 세우는 장자의 방식과 함께 소요유와 제물론을 짝으로 놓고 읽어보는 것도 재미있습니다.?붕새의 어마어마한 비상과 나비의 가벼운 날갯짓을 함께 느끼는 것이지요.

번역을 살짝 바꿔서 읽어보겠습니다.?앞의 번역은 장자라는 인물을 삼인칭으로 놓고 번역한 것이고,?다음은 그것을 나라는 일인칭으로 바꿔서 번역한 것입니다.?나로 바꿔서 번역해야 주체와 대상의 관계를 마주 세우려는 장자의 의도가 더 잘 읽힙니다.

 

어젯밤 꿈에 나는 나비가 되었다.

팔랑팔랑 가볍게 잘도 날아다니는 나비였는데

나에게 꼭 맞았는지라 내가 나인 줄 전혀 몰랐다.

이윽고 깨어보니 틀림없는 나였다.

알 수 없구나.

내가 꿈에 나비가 된 것인가?

나비가 꿈에 내가 된 것인가?

 

끝.

삶의 고통에 대처하는 법: 에피쿠로스의『쾌락』<도봉도서관 나이듦의 철학> 3

삶의 고통에 대처하는 법:?에피쿠로스의『쾌락』<도봉도서관 나이듦의 철학> 3

한길석(한양대)

 

 

아래 글은 앙드레 보나르의?『그리스인 이야기』를 바탕으로 하여 구성한 것이다.?

 

편견과 오해

에피쿠로스(Epikouros,?기원전?341년~기원전?271년)는 종종 사람들에게 무분별한 쾌락에 빠지도록 유혹한 악마로 여겨진다.?이러한 생각에 의하면 그는 유물론을 가르치고,?신에 대한 믿음을 조롱했으며,?즐거움의 교리를 가르치는?‘돼지들의 학교’를 만들었다.?그러나 이것은 심각한 오해다.?그는 난봉꾼의 성자라기보다는 오히려 금욕적 삶을 추구한 인물에 가깝기 때문이다.?물론 그가 인간 삶에 있어서 쾌락을 추구한 것은 사실이다.?하지만 그가 말하는 쾌락이란 말초적 즐거움이라기보다는 거듭된 고통에 흔들리지 않고 굳건히 살아가며 얻게 되는 기품있는 쾌락이다.?그런 까닭에 루크레티우스(Titus Lucretius Carus,?기원전?99년~기원전?55년)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는 인간의 실존을 수많은 폭풍과 암흑에서 끌어내어,?이루 말할 수 없는 평온 속에,?이루 말할 수 없는 빛의 세계 속에 정착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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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의 시대

에피쿠로스가 쾌락주의자가 된 까닭은 그의 시대와 삶이 고통으로 가득했기 때문이다.?그가 생애 대부분을 보낸 아테나이는 그리스의 맹주에서 알렉산드로스 왕의 지배를 받는 속국으로 전락하고 말았다.?필립포스와 알렉산드로스 왕에 의해 폴리스 체제가 붕괴되었기 때문이다.?기원전?307년~261년까지 아테나이는?46년 간 전쟁과 폭동이 끊이지 않았다.?이 혼돈의 시기에 면면히 유지되었던 시민적 연대의 정신은 대부분 사라졌다.?칼과 강간의 시대였으며,?살육과 방화,?살해와 약탈이 일상화되던 폭력의 시대였다.

하지만 폭력의 시대는 이미 펠로폰네스 전쟁기부터 시작되었다.?전쟁은 중산층의 삶을 무너뜨렸고 양극화는 극심해졌다.?전쟁으로 인해 노예는 증가했고 자유시민의 삶의 터전은 좁아지기만 했다.?수많은 노예를 거느린 이들의 거대한 생산력에 경쟁할 수 있는 중산 시민이란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중산층에서 날품팔이 노동을 하는 자유시민으로 전락하는 경우는 늘어나기만 했다.?이들의 삶은 점점 더 어려워졌다.?무료 노동을 하는 노예가 흔한데 굳이 노임을 지급하면서 자유시민에게 노동을 시킬 이유는 없었기 때문이다.?이리하여 아무 것도 가지지 못하고 아무 일도 얻지 못한 채 떠도는 빈민이 늘어나기만 했다.?한 때 폴리스는 빈곤한 자유시민들의 생계를 위해 식량과 임금을 보전해주었다.?그러나 국가의 재정은 곧 고갈되었다.?아테나이는 인구 압박을 해결하기 위해 늘어나는 빈민들을 강제로 다른 곳으로 이주시키는 기민정책을 취하기도 했다.?이민을 강요받은 이들 중 일부는 할 수 없이 무장 조직을 만들어 노략질을 일삼는 해적이 되기도 했다.?이 모든 일의 근원에는 제국주의적 확장 정책과 노예제가 있었다.?그중에서도 노예제는 폴리스를 유지하는 중요한 원천이기도 했지만 그것을 좀먹는 재앙이기도 했다.

아테나이의 위기에 결정타를 날린 것은 마케도니아의 그리스 점령이었다.?그리스 세계에 존재하던 폴리스적 삶의 문화를 붕괴시킨 마케도니아는 노예제 폐지 금지 정책을 관철시켰다.?이는 그리스 민족이 처한 재앙적 위기를 타개할 마지막 탈출구마저 봉쇄해버린 조치였다.?이로써 양극화는 돌이킬 수없이 악화되었다.?폴리스의 붕괴와 함께 그들의 인생을 지탱해주던 모든 가치와 삶의 문화들이 무너지자 사람들은 혼란스러워하기 시작했다.전쟁과 폭력,?기아와 기근을 막아주던 폴리스라는 보호처가 사라지자 사람들은 공적 시민으로서의 연대적 삶을 지속할 수 없었다.?이제는 각자가 알아서 자신의 목숨을 보존하고 안정적 삶을 유지해야 하는 것이다.?공적 시민으로서의 연대 의식은 사적 개인의 각자도생 의식으로 대체되었다.

폴리스 체제의 멸망과 경제 위기로 인해 발생한 모든 불행 앞에 인간의 삶은 너무나도 불확실한 것으로 여겨졌다.?모든 것은 인간의 판단과 행위에 의해서가 아니라 인간을 넘어선 우연의 손에 좌우되는 것 같았다.?그리하여 신에 대한 맹목적 숭배와 두려움이 기승을 부렸으며,?우연의 여신인 튀케(tyche)를 숭앙하는 풍조가 일반화되었다.?얼마전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대체로 자연과 사회를 움직이는 법칙을 인간의 이성을 통해 이해하고자 했는데,?이제 인간들은 그러한 태도를 버리고 세계와 인간의 삶을 신적 힘과 우연에 기대 해명하고자 했다.?삶의 안전판이 결여되자 불안의 고통에 휩싸인 사람들은 종교적 미망에 걷잡을 수 없이 빠져들게 되었고 어리석음은 세상을 뒤덮게 된 것이다.

 

개인의 구원

에피쿠로스의 철학은 바로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 대한 응답이라고 할 수 있다.?하지만 그는 고통의 시대를 건너기 위한 처방으로 사회 개혁 보다는 개인적 구원을 제시했다.?이것은 그의 시대에 대한 냉정한 인식에서 비롯한 것이다.?이미 시대의 역사는 너무도 참혹한 처지에 있어 사회적 진보나 정의의 회복을 통해 타개할 수 없는 지경에 빠져 있었다.?사회적 개혁과 정의를 외쳐도 호응해줄 사람들과 가치는 소멸한 지 오래였다.?사람들은 불안에 휩싸여 있어 나 아닌 타인의 삶에 관심을 기울일 수 없었고,?공동체적 삶의 연관 속에서 자신의 삶을 인식할 수도 없는 상태에 빠져 있었다.?사람들은 그저 저마다의 극심한 고통과 비참에서 해방되고 싶었다.?각자도생의 사회에서 꿈꿀 수 있는 해방이란 애석하게도 이처럼 개인적인 것이다.

 

죽음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법

에피쿠로스에 따르면 인간은 기쁜 인생을 살기 위해 태어났다.?하지만 인간은 두려움 때문에 기쁜 인생을 향유하지 못한다.?인생이 기쁘지 않은 까닭은 자기 삶에 대한 불안감이다.?불안의 고통은 두려움으로부터 온다.인간의 가장 근원적 두려움은 자기 삶의 최종적 파멸로서의 죽음이다.?그런데 죽음이란 살아있는 우리 인간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고 아무런 작용도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죽음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다.?왜냐하면 모든 좋고 나쁨에 대한 판단은 감각에 의존하는데,?죽으면 이러한 감각을 잃게 된다.”?즉 죽으면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기쁘게 되지도 않고,?고통스러워하지도 않게 된다.?우리가 죽게 되면 죽음으로 인해 느껴지는 고통은 아무것도 없다.?그러니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우리가 살아있을 때는 죽음에 대한 고통은 느껴지지 않는다.?죽음에 대한 고통이란 죽음을 경험해야 비로소 얻을 수 있는 것인데 살아있는 동안에는 죽음에 대한 고통을 경험할 수 없기 때문이다.?따라서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우리가 살아있는 한 죽음은 우리와 함께 있지 않으며,?죽음이 닥쳤을 때라도 우리는 이미 이 세상에 살아있지 않”기에 죽음이 두려운지 조차도 느낄 수 없다.?그러니 죽음이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우리는 한순간도 죽음을 경험할 수 없으니 죽음 앞에서 우리가 느끼는 공포와 동요란 귀신을 두려워하는 어린아이의 공포만큼이나 어리석은 것이다.

 

신에 대한 두려움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법

죽음 다음가는 공포는 신에 대한 공포다.?모두 인간이 어쩔 수 없는 것들이기 때문이다.?사람들은 자기 인생이 불행해진 이유가 신이 불경한 자기 행동에 분노하여 징벌을 내렸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그래서 인간들은 제사장들에게 재물을 제공하면서 신의 전조를 읽어줄 것을 요청한다.?그리하여 엄청난 비합리성이 판을 치는 불의한 사회가 되어버린다.?종교적 권고는 심지어 자기 자식을 신에게 공양하는 범죄를 신성한 의례로 여기게 하는 미혹을 유포시키기도 했다.?루크레티우스의 말처럼?“종교로 인해 우리가 이르게 되는 악의 심연(Tantum religio potuit suadere malorum)”은 인간의 삶을 고통에 휩싸이게 만든다.

하지만 에피쿠로스는 신이 인간의 행위에 분노하거나 기뻐하는 등의 감정을 함부로 남발하는 존재가 아니라고 말한다. “신은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존재한다.”?신은 불멸의 축복을 받은 존재다.따라서 그의 불멸성과 축복에 어울리지 않는 속성들,?즉 걱정,?근심,?분노 등을 신에게 갖다 붙이는 태도는 잘못된 것이다.?신은 인간과 같이 근심하거나 걱정에 휩싸이고 분노하는 존재가 아니다.?그런데 우리 인간들은 자기에게 악한 자들은 신의 징벌을 통해 불행해지고,?자기에게 선한 자들은 신의 축복에 의해 행복해진다는 잘못된 생각을 하고 있다.?하지만 이런 사고는 모든 것을 자기중심적으로 해석하려는 인간이나 하는 것이지 지성적 존재인 신이 취하는 것일 수 없다.?따라서 신은 우리 인간이 무슨 짓을 하든지 아무런 감정을 내보이지 않으며,?아무런 징벌도 상도 내리지 않는다.?그러므로 인간은 신을 두려워 할 이유가 없다.

 

오직 지상의 일에만 관심을 기울인 유물론자

에피쿠로스는 자연의 변화에 대해 신의 개입이나 영혼의 작용 등의 설명 방식을 거부하고 오직 물질적 관계로만 설명한다.?그는 원자론을 받아들여 원자들의 이합집산과 상호 작용에 의해 자연의 변화가 일어난다고 주장하였다.?이와 같은 주장은 당시 사람들에게 신에 대한 불경으로 이해되었을 것이다.?이 과격한 입장은 고대 유물론자인 데모크리토스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에피쿠로스는 신에 대한 관심보다는 오히려 우리 인간이 살고 있는 세계에 대한 이해가 우리의 인생을 즐겁게 만드는 데에 훨씬 중요한 일임을 강조하였다.?우리가 살고 있는 자연 세계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이루어져야 자연 변화에 제대로 대처하면서 우리의 문명 세계를 발전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그래서 그는?“자연학이 없다면,?우리는 순수한 쾌락을 얻을 수 없다”고 말한다.?자연의 느닷없는 변화를 이성적 연구를 통해 합리적으로 해명하려 하지 않고 신의 분노로만 해석한다면 우리는 두려움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쾌락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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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박한 쾌락주의자

죽음의 고통에서 벗어났다 해서 죽음에 이르기 전에 겪게 되는 신체적 고통을 부정할 수는 없다.?하지만 에피쿠로스는 신체적 고통은 결코 이겨낼 수 없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왜냐하면?“고통은 육체에 지속적으로 머무르지 않는다.?가장 심한 고통은 아주 잠시 머물 뿐이다.?극심한 육체적 고통도 여러 날 지속되는 것은 아니다.”?그러니 참으면서 살아가게 된다.?설사 고질적인 질병이 있어서 고통이 계속 된다하더라도 그러한 고통은 그것보다 큰 쾌락의 경험에 의해 잊혀질 수 있는 것이다.?격심한 고통이 찾아오더라도 그것에 집착하여 마음이 흔들리도록 놔두지 않고 그것이 지나가도록 의연히 기다린다면,?어느덧 다른 육체적 쾌감에 의해 그 고통에서 놓여나게 된다.?한번쯤 그러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우리가 겪는 고통이 그 정도의 것이라면,?우리는 충분히 그것을 견뎌낼 역량이 있지 않은가??그렇다면 필요한 것은 고통의 순간을 견뎌내고 다가올 쾌락을 기다리는 의연함과 용기일 것이다.

에피쿠로스의 이러한 초연함은 결코 관념적인 허세에서 비롯한 것이 아니다.?그는 평생동안 극심한 위장 장애를 앓았으며(하루에 음식을 두 번씩 토하곤 했다),?오랫동안 방광염에 시달리다가 결국 심한 결석 질환으로 인해 절명했다.?너무나 병약한 나머지 하루 종일 침대에 누워지내야만 한 적도 많았다.?육체적 고통에서 자유로운 적이 거의 없었던 그였기에 쾌락에 대한 의지는 강할 수밖에 없었다.?극심한 고통의 순간이 잦아들 때 불현 듯 경험하는 싱그러운 바람과 향긋한 공기,?그리고 갈증과 허기를 채워주는 한모금의 물과 한조각의 빵은 그 어떤 기물과 성찬이 주는 쾌감보다도 컸을 것이다.?끊임없이 찾아오는 고통에서 해방되는 데에는 그러한 소박한 쾌감으로도 충분했다.?그래서 그는 신체의 단순한 필요,?기초적 욕구를 충족시킴으로써 얻게 되는 쾌감 이상의 것을 추구하지 않았다. “결핍으로 인한 고통이 일단 제거되면,?육체적 쾌락은 더 이상 증가하지 않고,?단지 형태만 바뀔 뿐”이기 때문이다.

허기와 갈증과 추위와 더위에 시달릴 때 그것의 욕구를 채워주면서 더 이상 배고프지도,?목마르지도,?춥지도,?덥지도 않게 한다면 우리는 분명히 더할 나위없는 쾌감을 느끼게 된다.?고통이 사라지는 것 그것이 곧 쾌락이다.시시해보이지만 결코 부정할 수 없는 소박한 사실이다.?우리가 커다란 기쁨을 경험할 수 있으려면 사는데 반드시 필요한 것에 단호히 응답할 줄 알아야 한다.?진정으로 배고플 때 먹고,?정말로 목마를 때 마셔야만 한다.?자연적 필요가 아니라 인위적 충동에 의해 쾌락을 추구할 때는 즐거움뿐만 아니라 그에 따른 고통의 대가도 치러야 한다.

에피쿠로스에 의하면 육체의 자연적 욕구를 충족시킨 이후에는 더 나은 생계를 위해 필요한 수단을 확보하느라 노력할 이유가 없다.?이러한 삶은 인위적 욕구를 충족시키려는 삶이다.?하지만 그것은 삶의 균형을 상실한 사람들이나 할 만한 어리석은 짓이다.?현자는 삶이 내일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바로 이날,?이날의 매 순간을 위한 것임을 아는 이다.?자연적 필요를 채우는 데에는 그리 많은 것이 요구되지 않는다.?단지 소박한 몇몇의 것들만 있으면 된다.?이러한 사실을 강렬히 깨달은 사람이라면 욕망의 어리석은 타력에 제 몸과 정신을 맡기지 않고 자기 절제의 의식을 가지면서 살아갈 수 있다.?에피쿠로스에 의하면 기쁨과 쾌락은 오직 인위적 욕구의 절제를 알고,?의연함으로 스스로를 제어하는 이만이 얻게 되는 보상이다.

그래서 한 고인은 에피쿠로스의 삶을 이렇게 평하였다. “밥 한 술 뜨고,물 한 모금 마시고,?등짝을 눕히고 자는 것,?이것이 바로 에피쿠로스다.?그는 새벽이 되면 벌써 비단 친구들뿐만 아니라 제우스 신하고도 토론할 태세를 갖추었다.”?이것이 적잖은 사람들이 방탕의 화신이자 난봉꾼으로 몰아세운 이의 진면목이다.

 

우정,?최고의 기쁨

“행복을 얻기 위해 지혜가 일생동안 확보하는 것 중 지금껏 가장 큰 것은 우정을 얻는 것이다.”

에피쿠로스와 제자들은 그의 작은 안뜰에 모여 우정을 나누었다.?에피쿠로스의 안뜰은 폴리스의 몰락으로 인해 고립되어 버린 인간들에게 새로운 우정의 공동체를 선사하였다.?모름지기 인간은 누구나 고통의 삶을 경험하다가 끝내 죽음을 맞이한다. “대지 전체가 고통 속에서 산다.?그렇기 때문에,?이렇게 고통스러운 삶 때문에,?우리 인간들은 가장 많은 선물을 선사받았다.”?그것이 바로 우정이다.?고통의 보편성에 대한 각성은 모든 인간을 친구로 삼게 하는 동기가 되기 때문이다.

에피쿠로스의 우정이 살아 움직이는 공간인 그의 정원에서는 어떠한 차별도 존재하지 않았다.?수많은 여성들도 남성들과 마찬가지로 동등하게 즐거움을 나누었다.?여성은 더 이상 남성들의 노예로 취급되지 않았다.?그의 정원에서는 노예들도 친구로 대우받았다.

우정은?“도움을 필요로 하는 데에서 출발한다” “삶의 필요가 우정을 탄생”시키는 것이다.?우정은 이렇게 이익의 기쁨을 주는 것이다.?하지만 그렇게 탄생한 우정이 반드시 자기 이익을 추구하려는 사적 필요의 요구에 머무는 것만은 아니다.?우정은?“이로움을 얻는 것보다 이로움을 주는 것이 더 즐겁기 때문에”?추구될 수 있다.?그런 면에서 우정은?“그 자체를 위해서 추구될 수 있다.”?이러한 상승은 친구에 대한 믿음의 관계를 공고히 한다.?우정이 소중히 여겨지는 까닭은 흔히 우리는 친구들이 반드시 우리를 직접적으로 도와주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다.?그보다는?“친구들이 우리를 도와주리라는 믿음 때문이다.”?이 도움의 믿음이 깨지면 세상은 고립의 고통으로 넘쳐난다.

“우정이 춤추면서 세상의 주위를 돈다.?그리고 소리친다.?모두 일어나라!?그리고 노래하자!?우리의 행복한 삶을 위하여.”-에피쿠로스-

 

주인으로 살아가기 : 맹자의 호통 <도봉도서관 나이듦의 철학> 2

주인으로 살아가기?:?맹자의 호통?<도봉도서관 나이듦의 철학> 2

송종서(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지식인과 대장부

고금동서를 막론하고 지식과 권력은 불가분한 관계를 맺는다.?어떤 지식이 어떤 권력을 위해 역량을 발휘하는가 하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세월호’사건이 발생한 뒤 한국이라는 국가 전반의 무능과 부조리가 세계적 관심사가 되었다.?이 시각에도 정부는 여전히 중심을 못 잡고 그에 따라 민심은 심상치 않게 동요한다.?이 속에서도?‘지식인(지성인)’들은 무시 못 할 작용을 한다.?대다수 지식인이 정부의?‘재난관리 및 위기대처’의 총체적 부실을 비판한다.?특히 근본적 대책,?곧 정치,?사회,?교육,?문화,?심지어 경제까지 그 밑바탕부터 성찰하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발언도 지식인들의 입을 통해 자주 나온다.?한 마디로,?철학과 사상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그런데 그 반성이 잘 될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지식은 생활에 유용할 뿐 아니라 그것 자체가 잠재적 권력이다. “배워야 사람구실을 할 수 있다.”는 말조차 하나의 권력이다.?그런데?‘사람구실’을 하는 사람은 대체 어떤 사람인가? ‘가방끈’?긴 지식인인가??아무리?‘지성인’으로 어여삐 치장해도?‘전문지식’을 앵벌이 수단으로 먹고사는 사람의 인생은 비루하다.?수입의 많고 적음을 떠나 지식인 스스로 초라한 인생을 살고 있다는 자괴감에 눌려 지내기 마련이다.?이런 자괴감조차 못 느끼는 동업자도 많다.?여기서 다룰 맹자(孟子)라는 인물도 전국시대 그 당시에 자유 직업인으로서 지식인[士]에 속했던 사람이다.?그런데 그는 비루하거나 굴욕적이지 않고?‘대장부’로 살다 죽었다.?어찌 그런 일이…??사람구실에 대한 성찰부터 나라 기초를 다시 놓는 일까지, 2,300년 전 맹가(孟軻)?선생의 호통을 들어보는 것도 도움이 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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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가(儒家)의 원류

유가(儒家)의 학문적 맥락은 은상(殷商)시기 이래의 무(巫)?사(史)?문화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유가는 서주(西周)시기의?‘예악(禮樂)’의 전통을 이어받았고,?하?은(상)?주?3대의 선왕(先王)을 가치의 표준으로 삼았다.?언필칭 요순(堯舜)이요 문왕(文王)?무왕(武王)?주공(周公)을 추존했다.?아울러 혈연에 뿌리를 둔 인륜을 중시하고 현세에서의?‘일의 성취[事功]’를 추구했다.

은상 및 서주시기에?“학술은 왕실에 있었다.[學在官府]”?전적(典籍)과 문헌을 비롯해 천문역학,?의학?약학,?역사,?복서(卜筮)?같은 전문지식이 모두 왕실-관부에 속해 있었다.?전문지식을 도맡은 관원들은 무(巫)?사(史)?축(祝)?복(卜)으로 불린 문화 전문가들이다.?이들은 지위를 세습하면서 전문지식을 백성들에게 알려주지 않고 독점했다.

이후 동주(東周)?시기에 철기문명이 본격적으로 전개하면서 사회경제적 대변동이 일어난다.?이 변동은?“학술이 민간의 전문가에게 있는[學在私門]”?결과를 낳는다.?서주시기 귀족계층의 말단인 사(士)들 가운데 일부는 봉지(封地)가 상징하는 계급질서로부터 일탈해 봉록(俸祿)을 받는 자유직업인이 된다.?이전까지 벼슬아치들[卿,?大夫]의 가신(家臣)이자 식전(食田)에 묶였지만 이제는 여섯 과목의 기예[六藝:?예(禮)?악(樂)?사(射)?어(御)?서(書)?수(數)]를 배워서 무사 또는 문사로 일하며 봉록을 받았다.?예컨대 공자 아버지 숙량흘(叔梁紇)은 무사의 기예를 배워서 하급군관이 되었고,?노담(老聃;?老子)은 문사의 기예를 배워서 주나라 왕실의 도서관 관장[守藏史]을 했다.?공구(孔丘:?孔子)는 회계[委吏]?일을 보았다.

주지하다시피 공자(孔丘:?서기전551-서기전479)는 유가를 창시했고,?그 학설은 제자들과 재전제자들이 정리한『논어』에 기록되어 있다.?공자의 사상은 흔히?‘예(禮)’와?‘인(仁)’으로 요약된다. (지난 시간에 공자를 다루었으니 자세한 내용은 생략.)?맹자(孟軻:?전371?-전238?)는 증자(曾參:전505-전436)?및 자사(子思:?전483-전402)의 사상을 이어받고 공자의 인학(仁學)을 사회적으로 발휘하는 데 주력했다.?또?“선왕을 본보기로 삼기[法先王]”를 힘써 주장하고?“왕도정치(王道政治)”와?“인정(仁政)”의 이상을 부르짖었다.?아울러 인간의 본성은 선(善)하다는 자신의 논지를 인정설의 기초로 삼았다.?맹자는 또?『상서(尙書)』에 보이는?“백성이 나라의 근본이다.(民爲邦本)”라는 말,?그리고?『좌전(左傳)』의 중민경신(重民輕神:백성을 무겁게 여기고 신을 가볍게 여긴다.)의 사상을 자신의 논리로 흡수해서?“백성이 귀하고 군주는 가볍다(民貴君輕)”라는 너무도 유명한 말을 했다.?유학의 민본주의는 맹자로부터 시작되었다.

 

국가가 이익에 몰두한다면

맹자(孟子)가 양혜왕을 만났다.?왕이 말했다. “노인께서 천릿길을 멀다 않고 오셨으니 장차 우리나라를 이롭게 할 만한 것이 있습니까?”?맹자가 대답했다. “왕은 하필 이익(利)을 말씀하십니까??오직 인의(仁義)만이 있을 뿐입니다.?왕께서?‘어떻게 하면 우리나라를 이롭게 할까’?하시면 대부(大夫)들은?‘어떻게 하면 우리 집안을 이롭게 할까’?하고,?선비나 평민들은?‘어떻게 하면 나 자신을 이롭게 할까’?하여,?윗사람과 아랫사람이 서로 이(利)를 취한다면 나라가 위태로울 것입니다.?만승(萬乘)의 나라(역자:?만 대의 전차를 가진 나라.?天子國)에서 그 군주를 시해하는 자는 반드시 천승(千乘)을 가진 제후(諸侯)의 집안이요,?천승의 나라(역자:?諸侯國)에서 그 군주를 시해하는 자는 반드시 백승(百乘)을 가진 대부(大夫)의 집안이니,?만승에 천승을 취하고 천승에 백승을 취하는 것이 적지 않은 것인데,?만일 의(義)를 뒤로 하고 이(利)를 앞세운다면?(군주의 것을)?빼앗지 않으면 만족스럽지 못할 것입니다.?어질면서 어버이를 버리는 자는 없고,?의로우면서 군주를 뒤로 하는 자는 없습니다.?왕께서는 인의(仁義)만을 말씀하실 것이지 하필 이익을 말씀하십니까?”

(孟子見梁惠王 王曰:???不遠千里而來,?亦將有以利吾國乎???孟子對曰:?王何必曰利??亦有仁義而已矣.?王曰『何以利吾國』??大夫曰 『何以利吾家』??士庶人曰 『何以利吾身』??上下交征利而國危矣.?萬乘之國弑其君者,?必千乘之家;?千乘之國弑其君者,?必百乘之家.?萬取千焉,?千取百焉,?不爲不多矣.?苟爲後義而先利,?不奪不?.?未有仁而遺其親者也,?未有義而後其君者也.?王亦曰仁義而已矣,?何必曰利???<梁惠王 上?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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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경이 초(楚)나라에 가던 길에 석구(石丘)에서 맹자와 만났다. (…)?송경이 말했다. “내 들으니 진나라와 초나라가 교전을 벌이고 있다네.?초왕을 만나보고 달래어 싸움을 그만두게 하려고 하네. (…) ”?맹자가 말했다. “상세한 내용은 여쭙지 않겠지만 그 취지는 들어보고 싶습니요.?달래기를 장차 어찌하려 하십니까?” “교전의 불리함을 말하려 하네.” “선생의 뜻은 크지만 말씀은 안 될 말입니다..?선생이 이익을 가지고 진?초의 왕을 달래면 진?초의 왕이 이익을 좋아하여 삼군의 군대를 물릴 것인데,?이는 삼군의 군사가 기꺼이 군사를 물리되 이익을 기뻐하는 것입니다.?신하 된 자가 이익을 생각하여 군주를 섬기고 자식 된 자가 이익을 생각하여 부모를 섬기며 아우 된 자가 이익을 생각하여 형을 섬긴다면,?이는 군신과 부자와 형제가 마침내 인의를 버리고 이익을 생각하여 서로 대하는 것이니 이렇게 하고도 망하지 않는 자는 없습니다. (…)?하필 이익을 말씀합니까?”

(宋?將之楚,?孟子遇於石丘. (…)?曰:??吾聞秦楚構兵,?我將見楚王說而罷之. (…)???曰:??軻也請無問其詳,?願聞其指.?說之將何如????曰:??我將言其不利也.???曰:??先生之志則大矣,?先生之號則不可.?先生以利說秦楚之王,?秦楚之王悅於利,?以罷三軍之師,?是三軍之士樂罷而悅於利也.?爲人臣者懷利以事其君,?爲人子者懷利以事其父,?爲人弟者懷利以事其兄.?是君臣??父子??兄弟終去仁義,?懷利以相接,?然而不亡者,?未之有也. (…)?何必曰利????<告子 下?4>

 

민심은 곧 천하다.

맹자가 말했다. “걸주가 천하를 잃은 것은 백성을 잃었기 때문이다.?백성을 잃었다는 것은 그 마음을 잃은 것이다.?천하를 얻는 데는 방도가 있으니 백성을 얻으면 천하를 얻을 것이다.?백성을 얻는 데는 방도가 있으니 그 마음을 얻으면 백성을 얻을 것이다.?마음을 얻는 데는 방도가 있으니 원하는 바를 주어서 모이게 하고,?싫어하는 바를 베풀지 말아야 한다.

(孟子曰:??桀紂之失天下也,?失其民也;?失其民者,?失其心也.?得天下有道:得其民,?斯得天下矣;?得其民有道:?得其心,?斯得民矣;?得其心有道:?所欲與之聚之,?所惡勿施爾也….?) <離婁 上?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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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자가 양혜왕에게 말했다.) “(…)?산 자를 봉양하고 죽은 자를 장례 지냄에 유감이 없게 하는 것이 왕도의 시작입니다. (…) 70살 먹은 사람이 비단옷을 입고 고기를 먹으며,?젊은이들이 굶주리지 않고 춥지 않게 하고서도 왕 노릇 하지 못할 자는 없습니다. (…)?

(?(…)?養生喪死無憾,?王道之始也. (…)?七十者衣帛食肉,?黎民不飢不寒,然而不王者未之有也. (…)?) <梁惠王 上?3>

 

왕도와 패도

맹자가 말했다. “힘으로 인(仁)을 가장하는 자는 패자(覇者)이니,?패자는 반드시 대국을 소유해야 하고,?덕(德)으로써 인을 실행하는 자는 왕자(王者)이니,?왕자는 대국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탕왕(湯王)은?70리를 가지고 하셨고,?문왕(文王)은?100리를 가지고 하셨다.?힘으로써 사람들을 복종시키는 자는 사람들이 진심으로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힘이 부족해서요,?덕으로써 남을 복종시키는 자는 마음속에서 기뻐하여 진실로 복종하는 것이다. 70명의 제자가 공자(孔子)에게 심복(心腹)한 것과 같은 것이다. (…)”

孟子曰:??以力假仁者?,??必有大國,?以德行仁者王,?王不待大.?湯以七十里,?文王以百里.?以力服人者,?非心服也,?力不贍也;?以德服人者,?中心悅而誠服也,?如七十子之服孔子也. (…)?

<公孫丑 上?3>

 

인정(仁政)의 근거:?성선설

맹자가 말했다. “사람들은 모두 사람을 차마 해치지 못하는 마음(仁心)을 갖고 있다.?선왕들이 사람을 차마 해치지 못하는 마음을 갖고 계셨기에 사람을 차마 해치지 못하는 정치(仁政)를 행하셨으니 사람을 차마 해치지 못하는 마음으로 사람을 차마 해치지 못하는 DSC09068-1정치를 행한다면 천하를 다스림은 손바닥 위에 놓고 움직일 수 있을 것이다.?사람들이 모두 사람을 차마 해치지 못하는 마음을 갖고 있다고 말하는 까닭은,?지금에 사람들이 갑자기 어린아이가 우물로 들어가려는 것을 보고는 모두 깜짝 놀라고 측은해 하는 마음을 가지니,?이는 어린아이의 부모와 교분을 맺으려고 해서도 아니고,마을 사람들과 벗들에게 명예를 구해서도 아니며, (잔인하다는)?소리가 듣기 싫어서 그러한 것도 아니다.?이로 말미암아 보건대 측은지심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며,?수오지심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며,?사양지심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며,?시비지심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다.?측은지심은 인의 단서요,수오지심은 의의 단서요,?사양지심은 예의 단서요,?시비지심은 지의 단서다.?사람이 이 네 단서를 가지고 있음은 사지를 갖고 있음과 같으니 사지를 갖고 있으면서도 스스로 인의를 행할 수 없다고 말하는 자는 자신을 해치는 자요,?자기 군주가 인의를 행할 수 없다고 말하는 자는 군주를 해치는 자이다.?무릇 사단이 나에게 있는 것을 다 넓혀서 채울[擴充]?줄 알면 마치 불이 처음 타오르고 샘물이 처음 나오는 것과 같을 것이니,?만일 능히 이것(=사단)을 채운다면 족히 사해를 보호할 수 있고,?만일 채우지 못한다면 부모도 섬길 수 없을 것이다.

(孟子曰:??人皆有不忍人之心.?先王有不忍人之心,?斯有不忍人之政矣.?以不忍人之心,?行不忍人之政,?治天下可運之掌上.?所以謂人皆有不忍人之心者,今人乍見孺子將入於井,?皆有??惻隱之心.?非所以內交於孺子之父母也,非所以要譽於鄕黨朋友也,?非惡其聲而然也.?由是觀之,?無惻隱之心,?非人也;?無羞惡之心,?非人也;?無辭讓之心,?非人也;?無是非之心,?非人也.?惻隱之心,?仁之端也;?羞惡之心,?義之端也;?辭讓之心,?禮之端也;?是非之心,?智之端也.?人之有是四端也,?猶其有四體也.?有是四端而自謂不能者,?自賊者也;?謂其君不能者,?賊其君者也.?凡有四端於我者,?知皆擴而充之矣,?若火之始然,泉之始達.?苟能充之,?足以保四海;?苟不充之,?不足以事父母.?)

<公孫丑 上?6>

 

군자는 도(道)에 뜻을 둔 사람이다.

맹자가 말했다. “공자께서 노나라 동산(東山)에 올라가시어 노나라를 작게 여기셨고,?태산(泰山)에 올라가시어 천하를 작게 여기셨다.?그러므로 바다를 구경한 사람은 큰 물 되기가 어렵고 성인의 문하에서 공부한 사람은 훌륭한 말 되기가 어려운 것이다.?물을 구경하는 데에 방법이 있으니,?반드시 그 여울목을 보아야 한다.?해와 달이 밝음이 있으니 빛을 받아들이는 곳은 반드시 비추는 것이다.?흐르는 물의 물건 됨은 웅덩이를 채우지 않고는 흘러가지 않는다.?군자가 도에 뜻을 둔 이상 문장(역자:?훌륭한 성취)을 이루지 못하면?(세상에)?나아가지(역자:?벼슬하지)?않는다.

(孟子曰:??孔子登東山而小魯,?登太山而小天下.?故觀於海者難爲水,?遊於聖人之門者難爲言.?觀水有術,?必觀其瀾.?日月有明,?容光必照焉.?流水之爲物也,?不盈科不行;?君子之志於道也,?不成章不達.?) <盡心 上?24>

 

영예와 치욕[榮辱]

맹자가 말했다. “인하면 영화롭고 인하지 못하면 치욕을 받나니,?지금에 치욕을 싫어하면서도 불인에 처함은,?이는 마치 습한 것을 싫어하면서도 낮은 곳에 처함과 같은 것이다.?만일 치욕을 싫어할진댄 덕을 귀히 여기고 선비를 높이는 것만 못하니,?현자가 지위에 있으며,?재능이 있는 자가 직책에 있어서 국가가 한가하거든 이때에 미처 그 정사와 형벌을 밝힌다면,?비록 강대국이라도 반드시 그를 두려워할 것이다…”

孟子曰:??仁則榮,?不仁則辱.?今惡辱而居不仁,?是猶惡?而居下也.?如惡之,莫如貴德而尊士,?賢者在位,?能者在職.?國家閒暇,?及是時明其政刑.?雖大國,必畏之矣…??<公孫丑 上?4>

자포자기(自暴自棄)

맹자가 말했다. “스스로 해치는 자는 더불어 말할 수 없고,?스스로 버리는 자는 더불어 일할 수 없다.?말할 때 예의를 비방하는 것을 자포라 하고,?내 몸은 인에 거하고 의를 따를 수 없다 하는 것을 자기라 한다.?인은 사람의 편안한 집이요 의는 사람의 바른 길이다.?편안한 집을 비워두고 거처하지 않으며,?바른 길을 버려두고 따르지 않으니,?애처롭다.”

(孟子曰:??自暴者,?不可與有言也;?自棄者,?不可與有爲也.?言非禮義,?謂之自暴也;?吾身不能居仁由義,?謂之自棄也.?仁,?人之安宅也;?義,?人之正路也.曠安宅而弗居,?舍正路而不由,?哀哉!??<離婁 上?10>

 

대인과 소인

맹자가 말했다. “대인이란 자는 말은 믿게 하기를 기필하지 않으며,?해설은 과단성 있게 하기를 기필하지 않고,?오직 의가 있는 데로 하는 것이다.”

(孟子曰:??大人者,?言不必信,?行不必果,?惟義所在.??<離婁 下?11>)

맹자가 말했다. “대인이란 적자의 마음을 잃지 않은 자이다.”

孟子曰:??大人者,?不失其赤子之心者也.??<離婁 下?12>

맹자가 말했다. “예가 아닌 예와 의가 아닌 의를 대인은 하지 않는다.”

孟子曰:??非禮之禮,?非義之義,?大人弗爲.???<離婁 下?6>

맹자가 말했다. “(…)?몸에는 귀천이 있고 소대가 있다.?작은 것을 가지고 큰 것을 해치지 말며,?천한 것을 가지고 귀한 것을 해치지 말아야 하니,?작은 것을 기르는 자는 소인이 되고,?큰 것을 기르는 자는 대인이 되는 것이다. (…)”

孟子曰:??…?體有貴賤,?有小大.?無以小害大,?無以賤害貴.?養其小者爲小人,養其大者爲大人. (…)???<告子 上?14>

공도자가 물었다. “똑같이 사람인데 혹은 대인이 되며,?혹은 소인이 되는 것은 어째서입니까?”?맹자께서 말했다. “그 대체를 따르는 사람은 대인이 되고,?그 소체를 따르는 사람은 소인이 되는 것이다.” “똑같이 사람인데,?혹은 그 대체를 따르며 혹은 그 소체를 따름은 어째서입니까?”?맹자가 말했다. “귀와 눈의 기능은 생각하지 못하여 물건에 가리어지니,?물건(外物)이 물건(耳目)과 사귀면 거기에 끌려갈 뿐이요,?마음의 기능은 생각할 수 있으니,?생각하면 얻고,?생각하지 못하면 얻지 못한다.?이것은 하늘이 우리 인간에게 부여해 주신 것이니,?먼저 그 큰 것에 선다면 그 작은 것이 능히 빼앗지 못할 것이니,?이것이 대인이 되는 이유일 뿐이다.”

公都子問曰:??鈞是人也,?或爲大人,?或爲小人,?何也????孟子曰:??從其大體爲大人,?從其小體爲小人.???曰:??鈞是人也,?或從其大體,?或從其小體,?何也???曰:??耳目之官不思,?而蔽於物,?物交物,?則引之而已矣.?心之官則思,?思則得之,?不思則不得也.?此天之所與我者,?先立乎其大者,?則其小者弗能奪也.此爲大人而已矣.???<告子 上?15>

 

호연지기(浩然之氣)

(공손추가 맹자에게 질문한다.) “(…)?감히 묻겠습니다.?선생님께서는 어디에 장점이 있으십니까?”?맹자가 말했다. “나는 말을 알고,?나는 나의 호연지기를 잘 기른다.” “감히 묻겠습니다.?무엇을 호연지기라 합니까?”?맹자가 말했다. “말하기 어렵다.?그 기(氣)?됨이 지극히 크고 지극히 강하니,정직함으로써 잘 기르고 해침이 없으면?(이 호연지기가)?천지(天地)?사이에 꽉 차게 된다.?그 기 됨이 의(義)와 도(道)에 배합하니,?이것이 없으면 굶주리게(역자:?기운이 축소)?된다.?이 호연지기는 의리를 많이 축적하여 생겨나는 것이다.?의DSC09066-1가 하루아침에 갑자기 엄습해 취해지는 것은 아니니 행하고서 마음에 부족하게 여기는 바가 있으면?(호연지기가)?굶주리게 된다.?내 그러므로?‘告子가 의(義)를 알지 못한다.’고 말한 것이니,?이는 의를 밖이라고 하기 때문이다.?반드시 호연지기를 기르는 데 종사하고,?효과를 미리 기대하지 말아서 마음에 잊지도 말며 억지로 조장하지도 말아서 송나라 사람과 같이 하지 말지어다. (…)

(…)??敢問夫子惡乎長????曰:??我知言,?我善養吾浩然之氣.?? ?敢問何謂浩然之氣????曰:??難言也.?其爲氣也,?至大至剛,?以直養而無害,?則塞于天地之閒.?其爲氣也,?配義與道;?無是,??也.?是集義所生者,?非義襲而取之也.?行有不慊於心,?則?矣.?我故曰,?告子未嘗知義,?以其外之也.?必有事焉而勿正,心勿忘,?勿助長也.?無若宋人然?(…) <공손추 상?2>

 

대장부(大丈夫)

(맹자가?景春에게 말했다.) “(…)?천하의 넓은 집(仁)에 거처하며,?천하의 바른 자리(禮)에 서며,?천하의 대도(義)를 행하여,?뜻을 얻으면 백성과 함께 도를 행하고,?뜻을 얻지 못하면 홀로 그 도를 행하며,?부귀가 마음을 방탕하게 하지 못하며,?빈천이 절개를 옮겨놓지 못하며,?위무가 지조를 굽히게 할 수 없는 것,?이를 대장부라 이르는 것이다.”

?(…)?居天下之廣居,?立天下之正位,?行天下之大道.?得志與民由之,?不得志獨行其道.?富貴不能淫,?貧賤不能移,?威武不能屈.?此之謂大丈夫.???<?文公 下?2>

 

 

 

 

영혼의 돌봄 : 플라톤의 [파이돈] <도봉도서관 나이듦의 철학> 1

영혼의 돌봄: 플라톤의 [파이돈] <도봉도서관 나이듦의 철학> 1

조은평(건국대 강사)

 

 

 

  1.  상처받은 슬픈 영혼의 자화상

 

-이번 시리즈 강의의 목적은 고전을 통해 우리 삶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마련하는 것.

-?그렇다면 고전이란??누군가 고전이란 이런 거라고 말하더군요.?모두가 읽었다고 생각하지만 뜻밖에 별로 많이 읽지 않는 책(장식용),?또는 친구가‘요즘 무슨 책 읽어?’라고 물어올 때?[논어]를?‘다시 읽고 있어!’라고 말하듯이?‘다시 읽는다’고 말하는 책.(당연히 읽어야하는 것으로 치부되는 게 고전이기에 처음 읽는다고 말했을 때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명예에 손상이 가지는 않을까 하는 데서 기인하는 방어기제)

-?그럼 오늘 함께 검토해 볼,?플라톤의?[파이돈]을 읽어보신 분?

-?또한 이번 시리즈 강의의 큰 주제가?‘나이듦의 철학’인데요.?뭐 어떤 의도로 기획된 것일까요?

-?나이를 먹어 간다는 건,?사실 이중적이죠.?한편으로 세상에 대해 이제야 비로소 잘 알게 된다는 긍정적인 의미도 있는 반면에,?살면서 경험하고 판단한 삶에 대한 자신만의 가치관이 탄탄해지면서 도리어 그런 관점에 매몰될 수 있다는 점에서 부정적인 의미도 지니고 있죠.

-?그럼에도 여러분들은 나름 삶에서 마주하게 되는 여러 상황들 속에서 때론 충격을 받으면서 나름의 질문들을 던지게 되죠.

-?그렇다면 여러분이 나이가 들면서 점차 고민하게 되는 삶의 문제들과 질문들에는 어떤 것들이 있으신가요?

-?과연 바쁘게 주어진 과제들을 수행하면서 살아온 인생의 중년.?중년의 우리들을 뒤흔드는 삶의 충격들을 무엇일까요??또 그런 충격들 앞에서 어떤 고민과 질문들을 갖게 되나요?

-?누군가 말하더군요.?갑자기 내 삶이 하찮게 느껴지고 내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지는 순간은 바로 내 옆에 있는 친구가 먼저 성공한 모습을 절실히 직면하게 될 때라고요.

-?이런 순간,?우리는 한없이 비참해 지면서,?이렇게 비참함을 느끼는 자기 자신을 더 한심하게 여기게 되죠.?정말 친했던 친구가,?선배가 후배가 먼저 잘 되는 모습을 보면서 사실 축하하고 칭찬해 주어야 하는데,?그러지 못하고 그야말로 쪼잔한 마음을 갖게 되는 우리의 슬픈 영혼의 자화상.

-?대체 이런 영혼의 상처를 어떻게 치유해야 할까요??아니 이런 영혼의 상처는 왜 생기는 걸까요??아니 대체 영혼이란 뭘까요??그저 과거의 유물에 불과한 개념은 아닐까요?

-?지금과 같은 현대 사회에서도?‘영혼’에 대한 논의가 유의미할까요??더구나 오늘 강의의 주제인?‘영혼의 돌봄’이라는 논의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오늘 바로 여러분들과 우리들의 이 슬픈 영혼의 자화상에 대해 이야기해 보려 합니다.?이를 위해 플라톤이?[파이돈]에서 묘사한 소크라테스의 의연한 죽음과 영혼에 대한 논의를 함께 검토해 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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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영혼 불멸’과?‘영혼의 돌봄’

 

1) ‘소크라테스의 죽음’에 대한 단상들

– ‘악법도 법이다!’라고 인정하며 독배를 든 소크라테스??과연?

– NO!?소크라테스는 절대로 이렇게 생각하지는 않았다.?그저?‘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오히려 적극적으로 좋은 것으로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인다.

-?그렇다면 왜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죽음 앞에서도 그렇게 태연하게 삶을 마감할 수 있었을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삶과 철학에 대한 소크라테스 자신의 생각을 좀 더 알아볼 필요가 있다.

2)?소크라테스의 삶과 철학

-?소크라테스에게?‘좋은 삶’= ‘지혜를 추구하는 삶’

-?아울러 지혜란?‘상기’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앎.

-?그리고?‘상기’가 가능하다면 영혼은 이미 이전에 존재했을 수밖에 없다.

-?아울러 죽음 이후에도 영혼은 불멸,?불사한다.?더구나 삶을 사는 동안 영혼을 잘 돌본 사람들은 죽음 이후에도 더 좋은 곳을 가는 반면에,?영혼을 잘 돌보지 못한 사람들은 하데스에서 심판을 받는다!

-?그렇다면 소크라테스가 이처럼?‘영혼의 불멸,?불사’를 논증하는 이유는 뭘까요?

-?여러 논란이 있겠지만,?일단 분명한 것은?‘영혼의 돌봄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것은 철학자들 뿐 아니라 일반사람들도 좋은 삶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해야되는 일’이라는 점을 역설하기 위해서.

-?바로 자신의 죽음 앞에서도 이러한 입장을 의연하게 전개하고 있는 소크라테스의 마지막 모습을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는 작품이 바로 플라톤의?[파이돈]!

3)?플라톤의?[파이돈]

:?소크라테스가 그의 벗들과 나눈 마지막 철학적 대화와 소크라테스의 죽음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는 대화편.?플라톤은?‘소크라테스의 죽음’이라는 극적인 상황을 배경으로 선택함으로써,?소크라테스가 행한 것들과 이야기한 것들에 특별한 중요성과 무게를 부여하고 있다.

이 대화편의 중심 주제는 영혼의 불멸.?하지만 영혼 불멸을 증명하는 것이[파이돈]을 저술한 플라톤의 목표였던 것은 아니다.?오히려 이 작품을 통해 그가 전하고자 했던 메시지는 다른 데 있었다.?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자신의 영혼을 돌보는 일이라는 것,?그리고 이것은 오직 철학함을 통해서,?즉 영혼을 육체적인 것들로부터 가능한 한 분리시키고,?순수한 지적 파악의 대상들을 오로지 이성의 힘으로 추구함으로써 성취될 수 있다는 것이 그것이다.?플라톤은 이 메시지를 단순히 소크라테스의 입을 통해 전하고 있지 않다.?그것은 오히려 그가 묘사하는 소크라테스의 태도화 행위들을 통해 구체화된다.?죽음을 앞둔 상황에서도 결코 노여워하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오로지 정확한 사태의 진실을 알기 위해 토론에 몰두하는 모습은 플라톤이 전하고자 하는 진정한 철학자의 상,?바로 그것이었다.?플라톤,?전헌상 올김, [파이돈],?정암학당 플라톤 전집,?이제이북스, 2013. 9-10쪽.?작품해설 참조.

(참조.?플라톤의 대화편들은 보통 저술 시기에 따라 전기,?중기,?후기 대화편으로 구분. [파이돈]은 중기에 속하는 작품. [메논], [향연], [파이드로스], [국가]가 중기 작품들.?대략?[메논] -> [파이돈] -> [국가]?순서로 저술된 것으로 추정.)

 

-?영혼에 대한?[파이돈]의 논의에서 두드러진 특징

1)?영혼과 몸의 확고한 이분법

:?인식론적 측면에서,?영혼과 몸의 이분법은 오로기 순수한 이성 작용에 의해서만 진리가 포착될 수 있으며,?몸에 속한 감각기관들을 통한 모든 인식은 기만적이라는 주장으로 이어진다. (플라톤의?‘동굴의 비유’,?이데아론)

:?또한 종교적인 측면에서,?이 이분법은 영혼이 몸으로부터 유래하는 모든 욕망들로부터 해방되지 않는 한 정화될 수 없고 행복해질 수 없다는 주장과 맞닿아 있다. (금욕주의적 특성)

2)?다른 대화편들보다 종교적 색채가 강하다는 점.

:?몸이 영혼의 감옥이라는 관점,?육체적 욕망에 대한 비판과 거부,?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영혼의 정화라는 테마,?상기와 연결된 윤회 사상,?사후세계에서 일어나는 죽은 자의 심판과 그에 따르는 보상과 처벌. (이런 특징들은 주로 피타고라스 학파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해석)

 

– [파이돈]의 대략적인 내용

<도입부(57a-61c)>

– [파이돈]편 제목이 파이돈인 이유??소크라테스의 마지막 이야기를 전해주는 전달자가 파이돈.?일종의 액자구조.?파이돈의 이야기는 소크라테스가 사형선고를 받은 후 왜 곧바로 형의 집행이 이루어지지 않았는가에 대한 설명으로부터 시작.

-?사형 집행이 늦어진 이유는 테세우스를 기념하기 위해 델로스 섬으로 떠난 배가 돌아오기 전까지는 도시를 정결히 해야 한다는 법 때문.?드디어 델로스로 떠났던 배가 귀환한다는 소식을 듣고,?마침내 소크라테스의 사형 집행이 임박했음을 알게 된 제자들과 친구들이 평소보다 일찍 감옥에 찾아가 마지막 시간을 보내며 나눴던 이야기를 전해주게 된다.

<철학자와 죽음(61c-69e)>

-?본격적인 철학적 토론의 시작?:?제자들과 친구들은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앞두고 한 없이 침울한데,?정작 소크라테스는 의연한 태도를 보이는 모습!심지어?“분별이 있다면 최대한 빨리 나를 따라오라”(61c)고 누군가에게 전해달라는 농담까지.

DSC09172-1-?제자들 입장에서는 당연히 이런 태도가 의아해서 질문을 한다. “소크라테스,?스스로를 해쳐서는 안 되는 법인데 철학자는 죽은 사람을 따르려 할 거라고 어떻게 말씀하실 수 있는 거지요?”

-?이에 소크라테스는 철학자(지혜를 사랑하는 자)라면 임박한 죽음에 대해 노여워하지 않고 태연히 그것을 맞이할 것이라고 주장.

-?심지어?‘진정한 철학자들은 전 생애를 통해 죽음을 열망하고 추구한다’는 놀라운 주장을 제기한다.

-?그렇다면 소크라테스는 왜 이렇게 생각한 것일까??우선 그는?‘죽음이란 몸으로부터의 영혼의 해방’이라는 점에서 논의를 진행.?몸과 그에 결부된 감각지각을 통해서는 참된 존재들에 대한 앎이 획득될 수 없음을 지적한다.오로지 참된 앎은 오직 순수한 사고와 추론에 의해서만 획득될 수 있다.?그런데 순수한 사고와 추론은 오직 영혼이 몸의 영향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된 상태에서만 가능하다.?따라서 만일 죽음이 몸으로부터의 영혼의 해방을 의미한다면,?참된 존재에 대한 앎을 추구하는 철학자들은 결국 죽음의 상태를 추구하고 열망하는 셈이다.(‘동굴의 비유’?참조)

-?그렇다면 평생 이러한 상태를 염원하던 사람이 막상 그렇게 될 수 있는 상황,?즉 죽음을 앞두고 노여워한다는 것은 지극히 우스꽝스러운 일일 것이다.

<영혼 불멸에 대해 옹호하는 논증들(69e-107b)>

-?이처럼?‘철학자는 죽음을 태연히 맞이할 것’이라는 소크라테스의 주장은 사실상?‘영혼이 죽은 다음에도,?즉 몸과 분리된 뒤에도 소멸하지 않고 계속 존재할 것’이라는 입장을 전제하고 있다.

-?이제 제자들은 과연 영혼 불멸이라는 전제가 참인지에 대해서도 논란이 많기에 해명이 필요하다고 요구한다.

-?결국 이후부터 소크라테스는 영혼 불멸에 대한 일련의 증명들을 선보이고,?다시 제기되는 제자들에 반론에 또 다시 자신의 입장을 해명하는 논의가 이어진다. ( 1)?순환 논증?/ 2)?상기 논증?/ 3)?유사성 논증, 4)?심미아스와 케베스의 반론?/ 5)?심미아스에 대한 답변?/ 6)?마지막 논증?)

-?이런 여러 논증 중에서 세 가지만을 간략하게 살펴보면,

1)?순환 논증(삶과 죽음의 순환)

-?소크라테스의 첫 논변은 변화에 관한 일반 법칙을 근거로 삼는다.?어떤 사물?x가?F라는 속성을 가지게 되었다면,?그리고?F에 반대되는 속성?-F가 존재한다면, F를 가지게 됨이라는 변화는?-F로부터의 변화이다.?말하자면?‘모든 만물은 반대되는 것에서부터 생겨난다’는 점에서 출발하는 셈이다.

-?예를 들어, ‘잠을 자는 것’과?‘깨어있는 것’은 서로 반대되는 속성이다.?그러나?‘잠을 자는 것’은?‘깨어있는 것’에서부터 시작되며, ‘깨어있는 것’?또한‘잠을 자는 것’에서 생겨난다.?이와 마찬가지로?‘강하게 됨’은?‘약한 것으로부터 강하게 되는 것’이고, ‘나빠짐’은?‘좋은 것으로부터 나쁘게 되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이런 원칙을?‘죽음과 삶’에도 똑같이 적용한다.?죽음은 삶의 반대이다.?어떤 것이 살게 되는 것은 죽어 있는 것으로부터 살게 되는 것이고,?역으로 죽게 되는 것은 살아 있는 것으로부터 죽게 되는 것이다.?이러한 변화는 양”눰袖막??균형 있게 일어나야만 한다.?즉?F로부터?-F로의 변화는 반드시?-F로부터?F로의 변화와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그렇지 않으면 모든 것이 두 반대항 중 한 쪽의 성질을 지니게 되고,?더 이상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원칙이 앞서 제시된?‘반대항으로부터의 변화’라는 원칙과 결합하면,?죽은 자들이 산 자들로부터 생겨나는 것 못지않게 산 자들이 죽은 자들로부터 생겨난다는 결론이 따라 나온다.?그런데 산 자들이 죽은 자들로부터 생겨나기 위해서는 죽은 자들의 영혼이 몸과 결합하기 이전에도 이미 존재해야 한다.

2)?상기 논증(상기설을 통해 태어나기 이전에도 영혼이 존재한다는 점을 논증)

-?무언가를 알게 되는 것은 결국 상기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그런데 상기(anamnesis)란?:?어떤?a라는 사람이?X를 통해?Y를 기억해 내는 것!

-?예를 들어,?누군가(a)가 사랑하는 사람의 물건이나 사진(X)을 보고 그 사랑하는 사람(Y)을 기억해 내는 것 같은 방식이 상기라는 것.?기본적인 논증의 구조는 다음과 같다.

1. a는?Y를 이전의 어느 시점에 알고 있어야 한다.

2. a는?X를 감각지각을 통해 인지할 뿐만 아니라?Y를 떠올려야 한다.

3. X와?Y는?(유사하지만)?서로 다른 지식의 대상이어야 한다.

4. a가?Y와 유사한?X에 의해서?Y를 상기했다면, a는?X가?Y에 유사성에 있어서 뭔가 부족한지 그렇지 않은지를 떠올린다.

-?그런데,

5.?우리는?‘같은 것들’(X)로부터?‘같음 자체(Y)’에 대한 지식을 떠올린다.

– 5와 같은 기억도 역시 상기.

-?따라서 감각지각을 통해?‘같은 것들’로부터?‘같음 자체’를 떠올리고,?또 이 둘이 유사성에서 있어서도 서로 다르다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이미 감각지각을 갖게 되기 이전에,?다시 말해 태어나기 이전에 이미?‘같은 자체’를 알고 있어야 한다.

-?결국?‘같은 자체’에 대한 앎은 태어나기 전에 이미 영혼이 가지고 있어야하면,?이는 우리의 영혼은 태어나기 전에 이미 존재해야 함을 함축한다.

(?참조)?예를 들어?[메논]편에서 노예소년에게 삼각형에 대해 상기시키는 논의.

삼각형 모양의 그림,?현실에서는 완벽한 삼각형은 없지만 유사한 삼각형의 모양을 통해?‘완벽한 삼각형’에 대해 떠올릴 수 있다.?노예소년도 그럴 수 있다면 누구나 그럴 수 있다.

그렇다면 누구나 태어나기 이전부터 이런 완벽한?‘아름다움 자체’에 대해 알 수 있다. )

3)?유사성 논증

-?이제 상기 논증에서 밝혀지는 것은 결국 영혼이 태어나기 전에도 존재한다는 점.

-?하지만 그럼에도 죽고 난 다음에도 그것이 계속 존재하고 불멸한다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는 반론 제기. ‘몸으로부터 빠져나온 영혼이 바람에 흩어져 사라져 버리는 것은 아닐까’라는 우려 제기.

-?이에 소크라테스는 다음과 같이 답변

-?우선 존재하는 것들을?‘가시적인 종류’와?‘비가시적인 종류’로 구분하고,그 각각이 가지는 특징들을 열거한다. ‘가시적인 것’들은 결합적이고 결코 동일한 상태를 유지하지 못하는 반면, ‘비가시적인 것들’은 비결합적이고 항상 동일한 상태를 유지한다. (예를 들어?:?같은 것들/같은 자체,?아름다운 것들/아름다움 자체,?사랑하는 것들/사랑 자체?,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그렇다면 몸과 영혼은 각각 둘 중 어떤 종류의 것들과 유사한지를 묻는다.당연히 몸은 가시적인 것들과 유사하고,?영혼은 비가시적인 것들과 유사하다는 동의를 얻어낸다.?이로부터,?결합적인 성질을 지니는 몸은 쉽게 해체되기 마련이지만,?비결합적인 성질을 지니는 영혼은 해체되지 않고 늘 자신의 상태를 유지할 것이라는 결론이 도출된다.?따라서 우리는 죽은 뒤에 우리의 영혼이 바람에 흩어져 날아가 버리지나 않을까하고 어린아이처럼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이런 논증에 뒤이어?“철학함이 영혼을 돌보는 최선의 길”이라는 관점이 생동감 넘치는 비유를 통해 제시.

 

<신화?(107c-115a)>

-?영혼 불멸에 관한 논변이 종료된 이후,?소크라테스는 영혼이 사후에 겪게 되는 일에 관한 신화적인 이야기를 들려준다.

 

<소크라테스의 죽음?(115a-118a)>

-?소크라테스가 의연하게 독약을 마시고 죽음을 맞이하는 모습에 대한 묘사.

 

 

3. ‘영혼의 돌봄’은 어떻게 가능할까??또 어떤 식으로 실천해야 할까?

 

-?결국 플라톤의?[파이돈]이 전하는 메시지는?‘영혼의 돌봄’

-?아울러 이는?‘아름다움 자체’, ‘좋음 자체’를 추구하기 위해 몸이라는 감옥에 갇힌 영혼을 늘 돌보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

-?하지만 아마 영혼의 불멸과 정화되지 못한 영혼의 심판이라는 테마는 우리 현대인들에게는 그저 낯선 신화에 불과할 것.

-?그럼에도?‘영혼의 돌봄’이라는 테마는?‘어떻게 살아야하는가’라는 삶의 근본적인 물음과 관련해서는 여전히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준다.?왜냐하면 영혼이 정말 존재하고 불멸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우리는 또 한편으로는 여전히?‘좋은 삶’과?‘아름다운 삶’이란 어떤 것인지 여전히 고민하면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오늘날?‘영혼을 돌보면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갖는 걸까??또 그런 삶을 사는 것은 어떤 식으로 가능할까?

 

1)?자신의 영혼을 잘 돌보는 개인들로 이루어진 사회?

-?악마에게 영혼을 팔지 않도록 항상 자신의 영혼을 돌보는 사회?

-?사회가 아무리 각박하고 경쟁적으로 이루어지더라도?‘아름다운 영혼’을 유지하기 위해 정말 필사적으로 자신의 영혼을 돌보는 개인들의 사회?

-?하지만 우리 자신들도 잘 알고 있듯이,?때때로 내 영혼을 팔아버린 것 같은 느낌을 갖게 될 수밖에 없는 사회가 우리들의 사회이지 않을까?

(예를 들어 드라마?[빅맨]?속의 이야기?:?주인공 김지혁?VS?강동석?/?영혼을 팔 수밖에 없는 강동석의 부하직원!?그렇다면 이에 비해 주인공 김지혁이 자신의 영혼을 지킬 수 있었던 비법은??타고난 천성??시장 사람들에게 받은 돌봄의 관계,?그 관계가 만들어준 인성이지 않을까!)

-?말하자면, ‘영혼의 돌봄’이라는 과제는 어쩌면 우리 모두 늘 추구하고 싶은 삶의 목표일지도 모르지만,?사회적 현실에서 생존하기 위해 또 어쩔 수 없이 내 영혼을 그 무언가에 팔아버릴 수밖에 없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이지 않을까??그렇다면 더 중요한 과제는?

2) ‘영혼의 돌봄’을 방해하는 현실에 대한 인식과 실천?

– [피로사회](한병철)의 테마를 생각해 보자.

-?끊임없이 성과를 강요하는 사회(성과사회),?무엇이든 할 수 있다!?또 그래야만 나도 성공할 수 있다!라는 사회적인 강요 속에서 자기 자신도 착취하는 사회에 대한 비판.

-?또한?‘민주주의’가 만들어내는 주체들의 어리숙함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자.

 

<알랭 바디우의 민주주의적 주체에 대한 비판>

-?플라톤은 당시의?‘민주주의’를 비판하면서?‘철인정치’를 내세운다.?당연히 오늘날 보기에 귀족주의적이고 보수적인 입장처럼 보인다.

-?하지만 알랭 바디우는 이런 플라톤의 논의에서?‘민주주의’가 지닌 문제점들을 이끌어 낸다.?그것은 민주주의가 만들어 내는 주체의 유형에 대한 비판이다.

-?바디우는 이렇게 언급한다.( [민주주의는 죽었는가],?난장, 2010?중에서)

“민주주의라는 상징이 사람들에게 끼치는 해로운 힘은 그것이 만들어내는 주체의 유형에 집중된다.?그런 유형의 핵심적인 성격은 한마디로 말해 이기주의,?하찮은 향락을 추구하는 욕망이다.”(31쪽)

-?바디우에 따르면,?민주주의적 주체는 젊은 시절에는?‘구속받지 말로 즐겨라’는 식으로?“자유로워지기를 상상하는 헤픈 탐욕”을 누리다가 늙어서는“예산을 따지고 안전을 추구하는 구두쇠”로 변모한다.(34쪽)?따라서 현재의 민주주의가 이처럼 끊임없이 이기적인 욕망만을 추구하고 자본주의 체제 자체의 안전만을 추구하는 주체를 양산한다면,?이런 식의 순환의 질서에서 빠져나오게 하는 것이야말로 제대로 된 정치다.?따라서 지금처럼 상징화된?“‘민주주의’라는 단어의 모든 권위를 중지시키면서 플라톤의 비판을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연습을 하고난 뒤에야 우리는 결국 그 단어를 본래 의미대로 복원할 수 있다.?민주주의란 인민들이 스스로에 대해 권력을 갖는 것으로 간주된 실존이다.?민주주의란 국가를 고사시키는 열린 과정,?인민에 내재적인 정치이다.”(41쪽)

-?아울러 플라톤의?[국가]편의 일부를 현대판으로 각색해서 이렇게 번역한다.

조은평 도봉 그림1

-?그렇다면 결국 문제는 이런 정치적 현실에 벗어나는 길을 모색하는 것이야말로 제대로 된?‘영혼의 돌봄’을 가능하게 하는 방식이 될 것.

-?이는?‘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고민,?즉?‘좋은 삶’과?‘아름다운 삶’을 그저 혼자 고민하며 시지프스처럼 외롭게 돌을 굴리는 것이 아니라, ‘좋은 삶’과?‘아름다운 삶’을 모두가 누릴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길을 모색할 과정 속에서 비로소 가능할 것이다.

 

행복에 이르는 길-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론<논현정보도서관 행복한 고전읽기>4

행복에 이르는 길-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론<논현정보도서관 행복한 고전읽기> 4

김성우(兀人고전학당 연구소장, ⓔ시대와 철학 편집위원장)

 

 

덕 윤리란 무엇인가?

‘세월호 참사’ 와중에서도 칭찬과 명예를 듣는 분들이 있습니다. 반면에 비난과 불명예로 시달리는 자들도 있습니다. 20대의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승객들을 끝까지 구하고 자신을 희생한 여승무원이나 여선생님의 용기와 희생은 사람들의 귀감이 됩니다. 반면에 칠순을 바라보는 연륜에도 승객과 배를 버리고 도망간 선장이나 희생자 명단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은 고위 공직자, 피해자인 어린 학생의 마음에 상처를 주더라도 조난 구조에 방해가 되더라도 취재경쟁에 열을 올리는 기자들이 비판의 도마 위에 올랐습니다.

이처럼 관련자들의 용기와 비겁, 칭찬과 비난, 명예와 불명예, 한마디로 미덕과 악덕이 화제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됨, 성품이 문제의 중심이 되고 있습니다. 또한 문창극 국무총리 후보자의 역사관이나 애국심 논란도 이러한 미덕과 악덕의 범주에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악덕과 미덕의 논란은 개인의 물질적 행복을 추구하는 현대적인 가치관이 아니라 전통적인 가치관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우리의 전통에 유교가 있다면 서양의 전통에 덕 윤리가 있습니다. 이러한 덕 윤리를 대표하는 고전이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입니다. 이 책은 기독교 이전에 서양 시민의 윤리관을 대표하고 있습니다. 그 요지는 신이 없어도 엄격한 도덕법칙이나 이기심에 호소하지 않고도 인간이라면 누구나 지닌 지성(정신)과 좋은 습관을 바탕으로 윤리적인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강연에서 추천하고 싶은 책은 우선 고전 그리스어를 우리말로 훌륭하게 번역한 ?<니코마코스 윤리학>(이창우·김재홍·강상진 옮김, 이제이북스, 2006)입니다. 그 시대적 배경과 철학적 분위기를 알고 싶다면 <지중해 철학 기행>(클라우스 헬트, 이강서 옮김, 효형출판, 2007)을 추천합니다.
 
 

어떻게 살 것인가(소크라테스)

서양 고대의 그리스 문화에서 윤리학의 중심 주제는 행동이 아니라 사람됨이며 더 나아가 삶 자체입니다. 다시 말하면 칸트처럼 도덕률에 합치하는 올바른 행동이나 벤덤처럼 쾌락의 양을 늘리는 행동이 아니라 ‘좋은 삶’이 주제입니다. 인간이 산다는 것은 단순히 생존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좋은 것을 추구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아버지가 마케도니아 궁전의 시의였던 아리스토텔레스는 의학과 생물학에 밝았습니다. 동식물에 정통했던 그는 동물적인 생명(zoe)과 인간다운 삶(bios)을 구분했습니다. 그에 따르면 “산다는 것은 심지어 식물에게까지 공통되는 것으로 보이지만, 우리는 (인간에게만) 고유한 것을 찾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므로 영양을 섭취하고 성장하는 삶은 갈라내야 할 것이다. 다음으로는 감각을 동반하는 삶이 뒤따를 것이지만 이것 또한 분명 말과 소, 모든 동물들에 공통되는 삶이다.” 그러면 남는 것은 무엇인가요? “이성(logos)을 가진 자의 실천적 삶”입니다.

이러한 인간다운 삶과 관련해서 클라우스 헬트는 <지중해 철학 기행>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이 비오스, 즉 삶의 영위는 일정한 습관에 토대를 둔다. 이 습관은 우리에게 본성으로 부여된 것일 수도 있지만 획득될 수도 있다. 특정한 습관을 갖는 것이 과연 좋으냐를 두고 인간은 다른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고 근거를 댈 수 있다. 이처럼 대화를 나누고 근거를 대는 능력을 그리스어로 ‘로고스’라고 한다. 인간은 로고스를 지닌 동물, 로고스를 지닌 생명체이다. 이것이 바로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한 고전적인 인간의 정의로서, 2000년이 넘도록 끊임없이 인용되고 있다.”

좋은 삶은 좋은 것을 겨냥합니다. 그런데 가장 좋은 것(최고선)을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eudaimonia)이라고 부릅니다. 이와는 반대의 의견도 있습니다. 칸트의 도덕철학을 현대 민주적 절차주의로 발전시킨 존 롤스는 그의 유명한 저서인 <정의론>에서 행복보다는 정의가 더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진리가 사상 체계의 제일 덕목인 것처럼 정의는 사회 제도의 제일 덕목이다. 이론이 아무리 정교하고 간명하다 할지라도 그것이 진리가 아니라면 기각되거나 교정되어야 하듯이, 법이나 제도가 아무리 효율적이고 질서정연한 것일지라도 그것이 정의롭지 못하면 개혁되거나 폐지되어야 한다. 각 사람은 사회 전체의 행복이라도 능가할 수 없는, 정의에 기초를 둔 침해불가능성을 갖는다.”
 

아리스토텔레스/ 출처: hpservisi.net

아리스토텔레스/ 출처: hpservisi.net


 
통상적으로 행복은 개인적이라면 정의는 사회적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아리스토텔레스는 개인주의적 행복을 이야기한 것에 그치고 만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의 윤리학은 정치학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그가 말하는 행복은 폴리스(그리스 도시국가)의 구성원으로서의 시민의 행복에 해당합니다. “그것은 으뜸가는 학문, 가장 총 기획적인 학문에 속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정치학이 바로 그러한 학문인 것 같다. 왜냐하면 폴리스 안에 어떤 학문들이 있어야만 하는지, 또 각각의 시민들이 어떤 종류의 학문을 얼마나 배워야 하는지를 정치학이 규정하기 때문이다.” “또 정치학은 나머지 실천적인 학문들을 이용하면서, 더 나아가 무엇을 행해야만 하고 무엇을 삼가야만 하는지를 입법하기에 그것의 목적은 다른 학문들의 목적을 포함할 것이며, 따라서 정치학은 목적은 ‘인간적인 좋음’일 것이다. 왜냐하면 설령 그 좋음이 한 개인과 한 폴리스에 대해서 동일한 것이라 할지라도, 폴리스의 좋음이 취하고 보존하는 데 있어서 더 크고 더 완전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 좋음을 취하고 보존하는 일이 단 한 사람의 개인에게 있어서도 만족스러운 일이라면, 한 종족과 폴리스에 있어서는 더 고귀하고 한층 더 신적인 일이니까. 따라서 우리의 탐구는 일종의 정치학적인 것으로서 이런 것을 추구하는 것이다.”

이 길게 인용된 글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러한 자신의 탐구를 윤리학(?thik?)이라고 부릅니다. 에티케는 성품과 습관을 의미하는 에토스(ethos)라는 말에서 온 것입니다. 즉, 좋은 성품의 사람이 되려면 좋은 행동을 하도록 습관이 길러져야 한다는 뜻이지요. 그렇지만 그의 윤리학은 개인의 행복에 그치지 않습니다. 좋은 사람이 되고 좋은 삶을 산다는 것은 혼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적인 국가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에 따르면 어린 시절부터 미덕(탁월함, aret?)을 향한 올바른 지도를 받으려면 올바른 법률에 의해 길러지지 않고서는 어려운 일입니다. 성인이 된 후에도 계속에서 올바른 일을 하고 좋은 습관을 들이는 데에 강제적인 규제가 필요합니다. 다시 말해서 이렇게 좋은 사람이 되고 좋은 삶을 사는 데는 국가에 의한 강제적인 법률이 있어야 합니다. 그에 따르면 “다중은 말에 따르기보다 강제에 따르고, 고귀한 것에 설복되기보다 벌에 설복되기 때문이다.” 폴리스의 입법자들은 시민들의 교육과 종사할 일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각자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아갈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공동의 보살핌이 폴리스가 제정한 법률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이를 고려하면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치학의 목적을 ‘인간적인 좋음’(agathon)이라고 한 이유가 명백해집니다. 그래서 그에게 인간은 정치적(사회적, politikon) 동물인 것입니다. 이런 까닭에 그에게 좋은 삶은 국가 안에서의 시민적인 삶이지 국가에서 벗어난 개인의 삶이 아닙니다. 따라서 그가 말하는 좋은 사람은 시민의 의무를 다하는 덕을 갖춘 사람이지 자신만의 안녕과 평온을 추구하는 무책임한 개인이 아닙니다. 여기서 우리는 현대 철학자 중에서 개인주의적인 자유주의 윤리학과 정치철학을 비판하면서 등장한 공동체주의 철학자들이 아리스토텔레스의 덕 윤리를 바탕으로 하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공동체주의를 대표하는 철학자로는 <덕의 상실>의 저자인 알래스데어 매킨타이어와 <다문화주의>를 주창한 찰스 테일러, 그리고 <정의란 무엇인가>로 우리에게 너무나 유명해진 마이클 샌델이 있습니다. 요즘 우리 사회의 논란이 되고 있는 문제들을 고려하면 마이클 샌델이 왜 시민의 미덕을 강조했는지가 분명해집니다. (승객을 버리고 도망간 선장과 무책임한 고위공무원들은 시민의 미덕, 특히 사회적 리더로서의 의무를 저버렸기에 그토록 지탄과 원망의 소리를 듣는 것입니다.)

이런 점들을 고려하면 정치적인 것을 가르친다고 선전하는 소피스트들은, 실은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정치적 행위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정치학은 수사학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와는 반대로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정치학은 목적은 지식(앎)이 아니라 행위입니다. 마찬가지로 윤리적인 덕도 지식이 아니라 활동(ergon)입니다. 이러한 주장을 통해 그는 자신의 스승인 플라톤 선생님과 스승의 스승인 소크라테스를 비판하고 있는 것입니다. 플라톤의 대화편인 <프로라고라스>에서 소크라테스는 덕은 앎(인식)이라고 규정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무엇이 최선인지를 아는 자가 가장 좋은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한 최선자가 통치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 리더를 플라톤은 철인왕(哲人王)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인간적인 좋음은 덕에 따른 영혼의 활동”입니다. 그 좋음이라는 것도 완전한 삶 안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런 그에게 아는 것보다 좋은 행동을 하고 좋은 사람이 되어 좋은 삶을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그는 지식 중심의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을 비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에게 “친구와 진리 둘 다 소중하지만, 진리를 더 존중하는 것이 경건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좋은 사람이 되고 행복한 사람이 되는 데는 지식보다는 좋은 습관이 요구됩니다. “한 마리의 제비가 봄을 만드는 것도 아니며 하루가 봄을 만드는 것도 아니니까. 그렇듯 하루나 짧은 시간이 지극히 복되고 행복한 사람을 만드는 것도 아니다.” 덕은 행위의 축적에 의해, 다시 말해서 습관에 의해 획득됩니다. “정의로운 일들을 행함으로써 우리는 정의로운 사람이 되며, 절제 있는 일들을 행함으로써 절제 있는 사람이 되고, 용감한 일들을 행함으로써 용감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만약 폴리스에서 입법자들이 시민들에게 좋은 습관을 들이게 하면 좋은 시민들이 육성될 것입니다. 이러한 폴리스는 ‘좋은 정치체제’(politeia)를 갖춘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에게 행복한 사람은 잘 행위하는 사람이고 잘 사는 사람이다. 행복은 덕에 따른 영혼의 활동입니다. 따라서 행복은 단순히 외적인 운명이나 우연에 의해 주어지지 않습니다. 이러한 요소들은 인간적 삶에 추가적으로 필요할 뿐이고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누구나 배움과 노력을 통해 인간적인 덕을 획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연이나 운명에 의해 주어지는 것과 달리 이러한 행복은 많은 사람들에게 공통적일 수 있습니다. 소나 말 등 동물을 행복하다고 말하지 않은 것이 당연합니다. 이런 점에서 아직 어린이도 행복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아직 그 나이에는 덕에 따른 행동을 ‘완전하게’(성숙하게) 실천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좋은 습관을 쌓지 못한다면 나이가 반드시 성숙을 보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더 처참하게 물욕만 남은 비겁한 늙은이로 전락할 수 있습니다. 혹시 운이 좋지 않더라도 활동이 결정적이라면 “지극히 복된 사람들 중에서 누구도 비참하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결코 가증스러운 일이나 비열한 행위들을 하지 않을 테니까. 또 우리는 진정으로 좋고 분별 있는 사람은 모둔 운들을 품위 있게 견뎌 낼 것이라고, 현존하는 것으로부터 언제나 가장 훌륭한 것들 행위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지혜는 연습과 훈련을 통해 습관을 들이고 경험을 쌓아야 얻을 수 있으므로, 경험이 부족한 청년이 아니라 성숙한 어른의 덕목입니다. 성숙한 어른은 경험 많은 의사처럼 최고의 규범이나 이론을 곧바로 현재 상태에 적용하지 않고, 복잡한 상황을 고려하여 여기에 알맞게 규범을 적용합니다. 레시피대로가 아니라 손맛으로 요리하는 숙련된 요리사처럼 지혜로운 사람은 그 상황에 어긋나는 극단적인 행동 방식을 억제하고 중용(中庸)의 태도를 취합니다. 다시 말해서 중용이란 과함이나 부족함의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가운데(mesotes)’입니다. 이 가운데를 수학적인 도식으로 계산해낼 수 있는 평균값이 아닙니다. 중용은 그 상황에 맞게 새롭게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용은 지혜로운 사람만이 할 수 있는 탁월함(미덕)입니다. 초보자와 달리 원숙한 지혜로운 어른이야말로 원칙과 상황의 절묘한 조화를 이루어냅니다. 이는 새로운 이상에 사로잡혀 조급한 마음으로 당장이라도 세상을 바꾸려고 하는 미숙한 청년의 태도는 아닙니다. 그렇지만 중용이 타락하면 이 말은 자기 세력을 강화하는 데 비범한 지적 능력을 발휘하는 노회한 정치가나 상황에 따라 이리저리 변신하는 영리한 기회주의자, 그리고 나서지 않고 엎드려 복종하는 비겁한 사람들의 처신을 치장하는 데 쓰일 뿐입니다.
 
 

행복한 삶이란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과 관련해서 세 가지 종류의 삶을 제시합니다. 감각적인 쾌락을 추구하는 삶, 정치적인 성취를 이루는 삶, 지성적인 관조(명상)를 하는 삶이 그것입니다. 감각적인 쾌락을 추구하는 삶은 짐승의 삶을 선택하는 것이며 완전히 노예와 다를 바 없는 삶입니다. 정치적인 명예나 덕을 추구하는 삶 역시 불완전할 뿐입니다. 명예는 다른 사람들의 평판에 의존할 뿐이며 덕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아무런 활동도 하지 못하고 큰 불행을 겪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본질적으로 정치권력과 이성은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이 외에도 그는 부를 추구하는 삶을 언급하다가 이를 재빨리 취소합니다. 그가 보기에 부를 추구하는 삶은 일종의 강제된 삶일 뿐이며, 부란 다른 것을 위해 수단일 뿐이니 진정으로 좋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관조적 삶이 가장 행복한 삶인 이유는 “무엇보다도 지성이 ‘인간’인 한에서, 인간에게 있어서도 지성을 따르는 삶이 가장 좋고 가장 즐거운 것이다. 그러므로 이 삶이 가장 행복한 삶”이기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지혜에 대한 사랑, 즉 철학(philosophia)하는 삶이 그런 삶에 해당합니다.

하지만 그의 덕 윤리에도 한계가 있습니다. 그의 시민에는 노예와 여자가 제외됩니다. 당연히 그리스어를 하지 못하는 야만인도 제외됩니다. 그의 시민이란 좋은 집안에 태어나, 잘 양육을 받고, 행운이 뒷받침되는 남성 어른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장유유서(長幼有序)를 강조하는 유교도 같은 문제점을 앉고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오늘날 공동체주의자들은 전통적 공동체주의에서 수직성과 배타성을 제거한 새로운 공동체 창출을 목표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소비와 인간의 삶: ‘나는 왜 쇼핑몰에서 해방감을 느끼는가?’<광진정보도서관 아주 사소한 물음에서 시작하는 철학> 3-2

소비와 인간의 삶: ‘나는 왜 쇼핑몰에서 해방감을 느끼는가?’<광진정보도서관 아주 사소한 물음에서 시작하는 철학> 3-2

조은평(건국대)

 

 

3. ‘소비의 사회’와 현대인 : ‘나는 소비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소비사회’라는 규정에 대해>

– 소비사회의 문제는 오늘날 여러 철학자나 사회학자들에 의해서 주목을 받고 있다. 예를 들어 지그문트 바우만 같은 사회학자는 오늘날의 소비사회를 자본주의가 만들어 낸 일종의 환상의 공동체라고 보고 있다.

조은평 표4

– 일단 ‘소비사회’라는 규정은 ‘상품을 대량으로 소비할 수 있게 된 사회’를 의미한다. 2차 세계 대전 이후 세계 경제의 고도성장은 기존의 자본주의와 다른 새로운 자본주의를 탄생시켰는데, 프랑스 사회학자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는 이것을 ‘소비의 사회’라고 지칭한다.
– 하지만 단순히 대량생산에 기초해서 대량소비가 경제적으로 가능해진 풍요한 자본주의 사회라는 의미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보드리야르는 경제학에서 정의하는 소비개념과는 다른 소비개념을 통해 현대사회를 분석한다. 그에 따르면 상품(사물)의 소비란 ‘사용가치’의 소비를 포함하면서도 그것을 뛰어 넘는 어떤 행위이다. 그는 사물을 기호로 파악하고, 사회를 의미작용의 체계로 해석하면서 소비 행위를 특정한 상품(사물)에 대한 욕구가 아닌 차이에 대한 욕구로 규정한다.(‘사용가치’에서 ‘기호가치’로!)

<소비사회가 개인에게 가져온 변화>

1) 상품미의 무한 추구.
– 현대 소비 사회에서 사람의 취미를 형성하는 것은 ‘예술미’라기 보다는 ‘상품미’다. 상품은 이런 미적 가상을 불러일으키는 형식이자 자본의 수단이며, 소비자는 상품미에 현혹되어 욕망을 가상적으로 충족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끊임없이 욕망의 허기가 생긴다.

2) 개인의 욕망구조도 변화.
– 근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욕망 구조는 일과 생산을 통해 채우는 것이 기본 전략이었지만 현대 사회에서 욕망 구조는 놀이와 소비를 채우는 전략으로 변모했다. 놀이를 통해 채우는 욕망은 이성이 아니라 감성, 의식이 아니라 무의식에서 생겨난다. (일과 생산 -> 놀이와 소비)
– 소비 사회에서 사람들은 상품의 ‘사용 가치’가 아니라 ‘기호 가치’를 소비한다. 사용 가치는 필요를 충족하는 수단이지만 기호 가치는 지위나 심리의 차이를 표시하는 수단이다.
– 그렇기에 소비 사회에서 욕망의 논리도 차이의 논리다. 소비 사회에서 욕망은 특정 사물에 대한 욕망이 아니라 차이에 대한 욕망이다.

< ‘소비사회’라는 현실을 가장 잘 보여주는 몇 가지 사례들>

1) 미국의 세계 지배를 상징하던 세계무역센터 쌍둥이 빌딩이 구멍이 뻥 뚫려 산산이 부서지는 것을 목격하고는 충격을 받아 얼이 빠져 버린 미국인들에게 당시 조지 부시 대통령이 보냈던 첫 메시지. -> “다시 (평상시처럼) 쇼핑하는 일로 되돌아가라to go back shopping!”
(cf 2014년 세월호 참사 이후의 한국정부 관련 기사 “정부, 세월호 참사후 처음 ‘소비 둔화’ 우려 진단, 파이낸셜뉴스, 2014. 5. 6 / 현오석 부총리, “세월호 참사 후 서비스업 다소 부정적영향”, 아시아경제, 2014. 5. 6)

2) 아이 여성(child-women)의 출현 : 아동기에 대한 상업화!
– 대부분의 시간을 자기 침실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옷을 입어보거나 엄청나게 많이 수집해 놓은 구두나 핸드백을 신어보거나 걸쳐보면서 보내는 어느 소녀의 이야기. 더구나 당시 그녀는 가슴 성형수술을 위해 돈을 모으는 중이었지만, 좀 더 자신의 우상인 모델 조던처럼 되기를 꿈꾸면서 그 수술을 기다리는 일조차도 무척 힘들어했다는 이야기.
– 익숙하게 들었을 법한 이야기. 그러나 당시 그 소녀의 나이가 10살!
– 더구나 한 영국의 한 통계에 따르면 대다수의 10세 소녀들은 ‘헤어스타일이나 패션, 화장에 사로잡혀 있다’는 점. 또한 그 소녀들 중 26퍼센트는 ‘자신들이 별로 날씬하지 않다고 느끼면서 몸무게 때문에 고민’. 말하자면 점차 어린 소녀들은 ‘자신들이 충분히 날씬하지도 않으며, 충분히 아름답지도 않다’고 느끼면서 ‘자신들의 모습을 잡지 속에 인쇄된 우상(아이돌)들의 그 불가능한 이미지’와 비교한다.

3) 어린 시절부터 너무나 익숙해지는 쇼핑과 쇼핑몰 문화?
– 어린 시절부터 갖고 노는 쇼핑카트!(뽀로로 쇼핑카트)

4) 쇼핑몰이라는 공간의 전략.
– 백화점과 쇼핑몰 건물에서 상품이 본격적으로 진열된 곳에 공통적으로 없는 그 무엇은 뭘까?
– 광고처럼 모든 쇼핑몰의 공간(인터넷이라는 가상공간도 포함해서)은 철저하게 이성적이고 전략적으로 구성된 공간. 그처럼 마케팅 원칙에 따라 구성된 공간에 들어선 소비자는 당연히 포획당할 수밖에 없다. (참조 EBS 다큐프라임 ?자본주의? 5부작 중 2부 ‘소비는 감정이다’)

조은평 사진2-1

 

4. ‘소비 사회라는 동굴’에서 빠져나오는 것은 가능할까?

– 그렇다면 이런 동굴과도 같은 쇼핑의 약국 속에서 탈출할 수 있을까? 아니 왜 탈출해야 할까? 이렇게 좋은 자유로운 약국에서 말이다. 당연히 이런 의문이 들 듯.

1) 우선 ‘왜 탈출해야 할까?’
– 사실 소비를 하지 않고 살아간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지금의 소비사회처럼 결국에서는 구매력에 따라 위계가 정해져 있을 수밖에 없고, 또 ‘소비의 자유’를 누릴 수 없는 그 누군가의 희생에 기초해서 사회가 유지되고 있다면, 이러한 사회는 ‘소비의 자유’라는 이데올로기에 지탱되는 정의롭지 못한 사회일 것이다. 보다 정의로운 사회를 위해 ‘다른 세계’를 꿈꾸기 위해서도 탈출을 고민해야 한다.
– 또한 ‘소비의 자유’를 충분히 누리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사실 스스로 주체적이고 자유롭다고 느끼지만, 이는 그저 이데올로기적인 환상일 뿐이다. (환상의 공동체) 좀 더 다른 형태의 주체적이고 자유로운 삶을 고민하기 위해서도 탈출을 고민할 필요가 있다.

2) 그렇다면 과연 어떻게 탈출할 수 있을까?
– 소비사회라는 동굴, 쇼핑몰이라는 동굴에서 빠져나오기(?)
: 그냥 소비를 줄이고 검소하게 살기? 과연 가능할까?
: 합리적 소비자로 생활하기?
: 소비자 운동을 통해 저항해보기. 불매 운동(예. 광고 불매 운동, 녹색 소비자 연대 등등)
: 소비 하지 않기? 아마도 가장 두려운 현상일 것!! 예) 9.11 이후 부시 대통령의 말!
자본 – 상품 – (불려진) 자본( M-C-M’ / C-W-C’)
– 말하자면 ‘소비사회’를 지탱하는 ‘자본의 순환 운동’에서 탈출하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 아마도 대부분 회의적일 것. 아니면 너무 이상적이고 공상적인 이야기로 여길 듯.
– 하지만 분명한 것은 ‘소비사회’를 유지하고 만들어 낸 ‘자본의 흐름’을 변혁하는 문제를 생각하지 않고서는 근본적인 탈출은 불가능하다는 점.
– 결국 이것은 ‘정치적으로 앞으로의 세계를 어떻게 바꿔나가야 하는가’라는 실천적인 문제와 연결될 수밖에 없다.

– 그럼에도 일단 ‘탈출을 가능하게 해줄 지점’을 생각해 볼 수는 있지 않을까?
– 사실 우리는 자본주의 생산-소비 체계를 정말로 어쩔 수 없는 당연한 현실로 받아들일 뿐 아니라 그런 현실을 그대로 따라 쫓아가야만 생존할 수도 있고, 어쩌다 성공도 할 수 있는 그런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인류의 역사 500만년을 하루 24시간으로 환산했을 때 자본주의가 출현한 시간은 23:59:56! EBS 다큐프라임)
– 이데올로기는 이제 더 이상 자본주의 시대에서는 그저 잘못된 현실 인식이나 단순한 오해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허위의식’이라는 과거의 이데올로기 개념처럼 말이다.
– 오히려 슬라보예 지젝의 말대로, ‘이데올로기의 수행성’에 주목해야 한다. 믿음은 그냥 생기는 것이 아니다. 마치 티벳 승려들이 기도할 때 기구를 돌리는 것처럼, 교회에서 기도하고 예배하는 의식을 수행하면서 우리는 믿음을 형성하고 확고히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자본의 시스템이나 위계질서의 시스템 속에서 살아가면서(또 여러 역할을 수행하면서) 우리는 현재의 동굴 상황이 어쩔 수 없는 현실이라는 믿음과 확신을 얻는다.
– 다시 말해 현재의 소비 시스템(소비사회의 전략)을 따라 소비를 수행하면서, 우리는 되풀이해서 ‘소비사회’라는 신화를 받아들이게 되는 셈이다.
– 그렇다면 역으로 우리는 다시 이런 ‘이데올로기의 수행성’에 주목해 볼 수 있지 않을까? 결국에는 기존의 시스템이 요구하는 삶의 방식과는 전혀 다른 삶의 형태, 삶의 관계들을 형성하려는(수행하려는) 노력 속에서 또 다른 탈출구를 찾을 수도 있지 않을까?

 

 

소비와 인간의 삶: ‘나는 왜 쇼핑몰에서 해방감을 느끼는가?’<광진정보도서관 아주 사소한 물음에서 시작하는 철학> 3-1

소비와 인간의 삶: ‘나는 왜 쇼핑몰에서 해방감을 느끼는가?’<광진정보도서관 아주 사소한 물음에서 시작하는 철학> 3-1

조은평(건국대)

 

 

조은평 사진1-1

 

‘긍정의 힘’과?‘힐링’!?곳곳에서 상처받고 삶에 시달리는 우리들을 유혹하는 말들입니다.?게다가 인생의?‘멘토’를 자처하는 온갖 전문가들이?‘멘붕’에 빠진 우리들에게 삶의 나침반이 돼주겠다고 외쳐댑니다.?물론 이 복잡하고 유동적이며 불안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런 노력들은 어쩌면 절망적인 삶에서 헤쳐 나오려는 나름의 노력일 것입니다.

하지만 과연 누가 누구에게 인생의 멘토가 될 수 있을까요??대체 누가 어떤 권리로 내 삶의 나침반을 자처하며 내 상처를 치유할 수 있을까요??사실 우리는 너무나 힘든 삶에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바로 이런 전문가들에게 기대려 합니다.?그럼에도 이처럼 전문가들에게 기대려는 충동은 결국 스스로 삶을 반성할 수 있는 자신의 지적 능력을 망각하게 하는 것 같습니다.

이에 비해 인문학,?특히 철학은 언제나 스스로 자신의 능력으로 자신의 삶을 되돌아볼 것을 요구합니다.?어쩌면 누구나 스스로 삶을 돌아보며 주변을 진지하게 고민한다면,?누구나 철학을 할 수 있습니다.?더구나 그런 자신의 고민들을 주변 지인들과 나누며 치열하게 토론한다면,?누구나 우리 삶을 억누르며 방해하는 요인들과 사회 환경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아마도 철학은 이런 스스로의 노력들이 만나 소통하는 공간이자 함께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려는 시도일지도 모르겠습니다.?짧은 시간이지만 함께 각자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서로 소통해 보는 기회가 되길 바랍니다.

 

1.?철학이란? : ‘일상에서 솟아나는 질문들’로부터 출발하는 철학함

“스스로의 철학함(Philosophieren)?없는 철학은,?다시 말해 자신의 철학적 체험이 없는 철학은 빈껍데기에 불과하다.”

1)?일상에서 솟아나는 철학

-?철학이란??과연 인간이 생각하는 이유는? ‘철학이란 결국 비-철학,?철학의 외부’?때문에!

조은평 표1

2)?그럼에도 일상에 거리두기를 하는 철학(비판/반성/낯설게 보기)

-?일상에서 많은 철학적 질문들을 하지만 동시에 일상에 매몰되는 우리들.

-?말하자면?‘일상에서 솟아나는 질문’들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미 우리는 철학을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이런 면에서 누구나 각자 자신만의 철학을 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물론 이처럼 일상에서부터 출발하지 않는,?즉 자신의 삶에 대한 진지한 고민 속에서 출발하지 않는 철학적 물음을 당연히 공허하다.?하지만 반대로 일상에서의 삶에만 매몰되고,?그 속에서 자신이 던진 질문들과 대답들 속에만 갇혀 있게 될 경우에는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철학은 이러한 이유 때문에?일상에서 솟아나는 질문으로부터 시작하지만,?동시에?일상에 매몰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서고 고민한다.

-?바로 플라톤의?‘동굴의 비유’는?‘일상에 매몰될 수 있는 상황’에 대해 경계하고 비판해야 한다는 점을 일깨워준다. :?일상???철학?(일상에서 솟아나는 동시에,?일상에 거리두기)

조은평 표2

 

2.?오늘의 주제이자?‘일상에서 솟아나는 사소한 질문’

:?소비와 인간의 삶?- ‘나는 왜 쇼핑몰에서 해방감을 느끼는가?’

-?나는 왜 쇼핑몰을 갈까??또 쇼핑을 하면 왜 즐거운 걸까??특히 기분이 우울하거나 짜증날 때,?대형 쇼핑몰에 가면 왜 갑자기 즐거워지는 걸까??뭐 여러 가지 질문들을 떠올려 볼 수 있을 듯.

-?그럼 왜 쇼핑몰에서 나는 즐거움을 느끼는 걸까??당연히 내가 그 공간에서 만큼은 주체적으로 자유롭게 소비하면서 만족감을 느끼기 때문일 것.

-?그러면 일단 우리 삶에서 쇼핑이 이루어지는 몇 가지 상황을 생각해 보자.

1)?쇼핑할 때 느끼는 자유와 해방감(?)

조은평 표3

– 우리가 느끼는 자유와 해방의 상황은 아마 이렇게 정리해 볼 수 있지 않을까?

– 말하자면 다른 일상에서의 삶은 내 뜻대로, 내 의지대로, 자유롭게 누릴 수 없더라도, 쇼핑을 하는 순간만큼은 자유롭고 주체적으로 그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해방감을 느끼며 쇼핑몰을 산책하게 된다고 할 수 있을 듯.

– 이런 측면에서 쇼핑의 공간은 마치 ‘약국’과도 같은 곳.(아래 바우만 참조). 다시 말해 모든 일상의 괴로움을 훌훌 털어버리고 나의 무한한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곳. (물론 나의 구매력이 허락하는 한!)

2) 쇼핑몰이라는 동굴의 비밀(?)

– 하지만, 사실 우리도 잘 알고 있다. 우리가 즐기는 쇼핑의 순간은 그저 잠깐일 뿐이고 그때 느끼는 주체적이고 자유로운 해방의 감정도 결국에는 나의 구매력에 의해 좌우된다는 점을.

– 이렇듯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쇼핑을 할 때, 또 쇼핑몰을 구경할 때 우리는 그럼에도 자유롭고 주체적이라고 생각한다. (자율성이라는 환상 : 독립적인 소비자. 합리적인 소비자. 주체적인 소비자) 말하자면 그 무엇에 의해(광고든, 마케팅이든 간에) 영향을 받아 소비를 한다고 하더라고(그렇다고 잘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사실상 그런 선택을 하는 건 나의 결정이니까 나의 자유라고. 그렇기에 난 자유롭고 합리적인 소비자라고. 뭐 이런 식으로 우린 스스로의 자율성을 이데올로기적으로, 사후적으로 정당화한다. (이데올로기적인 환상 : 이데올로기적인 원환성)

–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다른 공간에서는 너무나 부자유스럽기 때문에. 예를 들어 일터에서는 상사의 눈치를 봐야하고, 정치 영역에서는 늘 전문 정치인들에게 지겹게 끌려 다녀야 하기 때문에, 바로 그런 일상의 부자유 공간에서 벗어나 쇼핑할 때만큼은 나의 자유를 누린다고도 할 수 있을 듯.

– 하지만 쇼핑의 공간과 쇼핑의 상황은 어쩌면 ‘플라톤의 동굴’과도 흡사하다. 마치 동굴 속 죄수들이 자신들 앞에 펼쳐지는 이미지들의 세계를 바라보며 자신들의 삶이 자율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고 상상하듯이, 현대의 소비자들도 쇼핑몰에서 펼쳐지는 현란한 이미지의 상품 세계를 바라보면서 자신들이 주체적이고 자율적으로 소비하고 있다고 착각한다는 점에서.

( ‘동굴’ 벽면에 펼쳐지는 이미지 세계 = 쇼핑몰에서 펼쳐지는 현란한 이미지의 상품 세계)

– 어쩌면 이렇게도 말할 수 있겠다. 푸코가 ‘현실에 감옥이 왜 존재하는지 아는가? 현실이 감옥 같은 곳이라는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저기 감옥이 존재한다’고 말했던 것처럼, 쇼핑몰이 우리 주변에 멋지게 펼쳐져 있는 이유는 우리 사회가 이미 쇼핑몰과 같은 곳이라는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서라고’.

– 말하자면 우리들이 사는 사회는 이미 소비를 통해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소비지상주의 사회’라는 점을 은폐하기 위해서.

– 그렇다면 이런 동굴과도 같은 쇼핑몰에서 주체적이고 자율적으로 소비를 하며 살고 있다고 믿게 하는 사회는 어떤 식으로 지탱되고 있는 것일까?

– 바로 이런 논의가 ‘소비의 사회’라는 이름으로 진행되는 철학적, 사회적 논의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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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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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고 익힘에서 기쁨을 찾다-인생을말하는『논어』 <논현정보도서관 행복한 고전읽기>3

배우고 익힘에서 기쁨을 찾다-인생을말하는『논어』?<논현정보도서관 행복한 고전읽기>3

구태환(상지대 강사)

 

이 글은 5월 20일?7시에 열린?<논현정보도서관 행복한 고전읽기> 세번째 강연 원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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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고 익힘,?그리고 공자와?『논어』

우리나라의 성인들 대부분은 『논어』라는 책을 한 번은 접해봤을 것이다.그래서인지 『논어』의 첫 구절인?“學而時習之,?不亦說乎.?有朋自遠方來,?不亦樂乎.(배우고 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벗이 먼 곳에서 찾아오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라는 구절은 대부분 알고 있다.?그리고 이렇게 생각한다. ‘벗이 먼 곳에서 찾아오면 즐겁다는 것은 맞아.?하지만 공부가 얼마나 지겨운데.?배우고 익히는 게 기쁘다는 것이 말이 돼?’라고 말이다.?물론 멀리 있는 벗이 나를 보고자 찾아왔는데,?즐거워하지 않을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그런데 배우고 익히는 것,?즉 학습(學習)은 진정으로 기쁘지 않은 것일까??여기에서 우리는『논어』 의 내용을 오해하고 있다.?여기에서‘배우고 익히는 것’은 반드시 교과서를 달달 외우고,?읽기 싫은 책을 읽는 것만이 아니다.?영어,?수학을 배우는 것도 배우는 것이지만,?수영,?오락,?기타,스케이트보드,?스키,?춤,?노래,?축구,?심지어는 화투를 배우는 것 역시 배우는 것이다.?그것이 재미있고 기쁘지 않다는 말인가??실제로 공자는 소(韶)라는 음악을 듣고서 그것을 배우는 과정에서 석 달간 고기 맛을 모를 정도로 심취했었다고 고백한다.

이처럼 『논어』에는 언뜻 봐서는 말도 안 되는 것 같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의미심장한 내용이 제법 있다.?물론 『논어』에 담긴 모든 말을 시공을 초월하는 진리라고 생각하는 것도 바람직한 태도가 아니다.

『논어』는 공자의 제자와 재전(再傳)?제자들이 공자와 그 제자들의 말과 행동을 기록한 책이다.?공자(이름은 구丘)는 늙은 아버지와 어린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기에 경제적으로 힘든 어린 시절을 보냈을 것으로 추정된다.그가 살았던 시기는 중국의 춘추시대였다.?춘추시대는 주나라의 종법제도(宗法制度)가 붕괴되고 힘을 상실한 천자를 대신해서 각국의 제후들이 중국 천하의 권력을 장악하려고 다투던 혼란기이다.?공자는 이러한 혼란을 잠재우고 종법적 질서가 회복되는 세상을 만들고자 했다.?이러한 공자의 노력은 각국을 돌아다니던 공자의 모습에서 엿볼 수 있다.?그는?56세부터?68세까지 고국인 노나라를 떠나 각국을 돌아다니면서 자기 나름의 천하를 평정할 방도를 역설한다.

그렇지만 세상은 그리 녹록하지 않았고,?공자는 자신의 뜻이 이뤄지지 않는 현실에 낙담할 수밖에 없었다.?오죽하면?‘도가 실행되지 않는 세상을 떠나 뗏목을 타고 바다에 떠다니고 싶다’고까지 한다.?그리고 자신의 뜻을 펼치기 위해서 임금을 배신하고 반란을 일으킨 조나라의 필힐이 부르자 그를 만나려 하고,?남존여비 사상이 지배하던 당시에 국정을 좌우하는 여인으로서 평판이 좋지 않았던 위나라 군주의 아내인 남자(南子)를 만나기도 한다.?그리고 이런 행동 때문에 제자 자로(子路)로부터 욕을 먹고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기도 한다.

공자는 이처럼 자신의 뜻을 펼치고자 노력했지만 자신의 뜻이 이뤄지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며,?결국?68세의 나이에 조국 노나라에 돌아와 학문과 교육에 힘쓰다.

 

학습의 내용

그렇다면 공자가 말하는 학습의 내용은 무엇일까??사마천의『사기』?에 의하면,?공자의 제자는 약?3,000명이고 그 가운데?‘육예(六藝)’에 통달한(通)이가?72명이었다고 한다.?그렇다면 공자의 학습 내용은?‘육예’였던 셈인데, ‘육예’는 예(禮,?예의범절),?악(樂,?음악),?사(射,?활쏘기),?어(御,?말이나 수레 몰기),?서(書,?글쓰기),?수(數,?셈하기)를 말한다.?이 여섯 가지는 당시의 지배층이 습득해야 교양이었다고 할 수 있다.?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주의해서 봐야 할 것이 있다.?육예에?‘통달했다’는 것이다.

통달했다는 것은 단순하게 어떤 것을 배우고 익혔다는 것에서 더 나아가 그것의 원리까지 체득했다는 것을 의미한다.?즉 학습의 궁극의 경지이다.?예컨대 조상에 대한 제사나 부모에 대한 삼년상은 예의 중요한 항목이다.?그런데 대다수의 사람들은 제례나 상례를 치룰 때 그러한 의식을 왜 거행하는지를 생각하지 않고 답습한 대로 실행할 뿐이다.?하지만 공자는 제례나 상례가 조상과 부모의 은혜에 대해 감사하는 의식임을 밝히고 있다.?어떤 의식에 통달했다는 것은 그것을 실천할 뿐 아니라 그러한 의식의 연원이 무엇인지를 궁구하여 밝히고 이해하는 것이다.?그리고 겉모습으로서의 예의만이 아니라 그 예를 실행할 때의 마음가짐까지 갖추게 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그리고 이러한 교양은 지배층이 습득해야 할 것이다.

 

배움의 목적,?군자

DSC09035-1사실 공자가 개창한 유가 사상은 일반 백성들을 위한 사상이 아니다.?지금과는 달리 신분제 사회였던 과거에 일반 백성은 그 사회의 주인이 아니었다.그 사회의 주인은 임금을 비롯한 소수의 지배층이었던 것이다.?그리고 유가 사상은 사회의 주인인 이들 지배층이 어떻게 하면 일반 백성들을 바르게 다스려나갈 수 있는가를 말하고 있다.?공자가 보기에는 이들 지배층이 도덕적으로 올바르고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 무엇보다도 우선되어야 했다.?그리고 배움이라는 것도 결국은 이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었다.

이들 지배층을 가리키는 말이 바로?‘군자(君子)’이다.?우리는 흔히?‘군자’라고 하면, ‘도덕군자’, ‘성인군자’를 연상하며,?도덕적 인격체를 가리키는 개념으로 이해한다.?하지만?‘군자’는 글자 그대로 임금(君)의 아들(子),?즉 지배층이다.?그런데 공자는 이 용어를 지배층을 가리키는 개념으로만 사용하지는 않는다. 『논어』에 나오는 군자는 크게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

하나는 말 그대로 지배층이다.?계강자라는 사람이 공자에게 정치를 묻자 공자가 이렇게 대답한다. “당신이 선해지고자 하면 백성들이 선해질 것입니다.?군자의 덕은 바람과 같고 소인의 덕은 풀과 같으니,?풀 위에 바람이 불면(풀은)?반드시 눕게 됩니다.”?지배층이 도덕적으로 모범이 되면,?바람이 불면 풀이 눕듯이,?백성들도 그를 모델로 하여 선해질 것이라는 말이다.?이처럼 군자를 지배층을 가리키는 개념으로 사용하는 것은 공자 이전에는 당연한 것이었다.?그런데 공자는 이 개념을 변용한다.

공자는 지배층을 가리키는?‘군자’를 군자다운 덕목을 가진 이를 지칭하는 개념으로 바꿔놓은 것이다.?그는 군자를 이야기할 때 원래는 피지배층을 가리키는 개념인?‘소인(小人)’과 대비해서 말하고 있는데,?그 중 하나가?“군자는 옳음에 밝고,?소인은 이익에 밝다”는 말이다.?이것을 현대어로 바꾸면, ‘지배층은 무엇이 옳은가에 관심을 갖고,?피지배층은 무엇이 이익이 되는가에 관심을 갖는다’가 된다.

그런데 공자의 이러한 언명은 사실을 말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당위를 말하고 있다. ‘착한 어린이는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가 실제로는?‘착한 어린이가 되기 위해서는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는 의미를 갖는 것처럼 말이다.?위의 언명도?“군자(지배층)는 옳음에 밝고,?소인(피지배층)은 이익에 밝다”라는 사실을 가리키는 문장으로 해석될 수도 있겠지만, “지배층은 옳음에 밝아야 하고,?피지배층은 이익에 밝아야 한다”로 읽힐 수 있다.?더 적극적으로 해석한다면, “옳음에 밝아야 지배층 자격이 있고,?이익에 밝은 이는 피지배층일 뿐이다”?라는 말이 된다.?이는 옳음,?사회적 정의에는 관심이 없고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당시의 지배층에 대한 공자의 질타이다.

 

군자의 모습

공자가 말하는 배움이 진정

DSC09029-1한 군자가 되기 위한 것이라면,?그러한 군자는 어떤 모습을 띠고 있을까??비교적 잘 알려진 구절로는?“君子和而不同,?小人同而不和”(군자는 화합하되 부화뇌동하지 않고,?소인은 부화뇌동하되 화합하지는 못한다)를 들 수 있다.?여기에서
의?‘화’는 조화나 화합으로 해석될 수 있는데,?이러한 조화나 화합은 기본적으로 다른 것들 사이에 가능하다.마치 오케스트라의 여러 다른 악기들이 각각의 음을 내면서도 아름다운 음악을 만들어내듯이,?지배층다운 덕목을 가진 사람들은 각기 다른 입장을 갖고 있으면서도 타인과 조화하여 바람직한 사회를 만들어낸다.?이처럼 서로 화합하고 조화하는 그들이지만,?결코 권력과 이익이 있는 곳으로 몰려가서 힘 있는 이의 견해에 무조건 동조하는 소인배 같은 행위는 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처럼 각기 다른 입장을 갖는 이들을 조화시키기 위해서는 어떤 커다란 원칙이 필요할 것이다.?즉 이들도 서로간에 다름 속에서도 공통적인 무엇인가가 있어야 그 안에서 조화할 수 있을 것이다.?공자의 사상에서 그러한 원칙은 인(仁)과 예(禮)라고 할 수 있다.?내면에는 인간에 대한 사랑(인)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 사랑을 표현해내는 수단(예)을 적절히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이것을 공자는 꾸밈과 바탕의 적절한 조화라고 한다. “子曰,?質勝文則野,?文

勝質則史.?文質彬彬,?然後君子.(공자가 말했다.바탕이 꾸밈을 넘어서면 야만인이고,?꾸밈이 바탕을 넘어서면 문서를 다루는 관료이다.?꾸밈과 바탕이 아름답게 조화된 다음에야 군자가 된다)”는 문장에서 바탕(질)이란 바로 인간에 대한 사랑,?즉 인이고,?꾸밈(문)이란 사랑의 표현,?즉 예이다.?이처럼 내면에는 인간에 대한 사랑을 갖고 있으면서 그것을 적절하게 표현해내는 것이 군자인 것이다.

이러한 군자,?즉 지배층다운 덕목을 가진 사람이 현실에서 지배층이 되어 백성들을 다스린다면,?우선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질 것이다.?그리고 그 사랑을 적절히 표현할 제도를 마련할 것이다.?만약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을 갖고 있다면 백성의 삶에 관심을 갖게 될 것이고 백성들의 삶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서 그것을 제도로써 표현해야 할 것이다.?백성을 사랑하는 마음 없이 제도만 내놓는다면,?그 제도는 아마도 백성들의 마음을 일시적으로 얻기 위한 것이거나 눈앞에 닥친 정치적 곤경을 순간적으로 모면하기 위한 수단일 것이다.?하지만 그러한 제도가 백성들의 삶에 도움이 될 리는 만무하다.

 

군자가 다스리는 세상을 꿈꾸다

앞에서 보았듯이 공자가 말하는 학습은 바로 군자가 되기 위한 것이다.?공자는 그러한 군자가 세상을 다스리기를 바랐으며,?그러한 군자가 다스리는 세상은 평화롭고 도덕적일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시대의 군자는 누구인가??우리 시대는 신분제를 거부한다.모든 사람이 평등하며,?헌법에도 나와 있듯이?‘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즉 민주주의를 채택하고 있으며,?민주주의는 모든 사람이 주인인 사회를 지향한다.?신분상으로 봤을 때 우리 사회의 모든 성원이 군자,?즉 이 사회의 지배층인 것이다.?그렇다면 우리 사회의 군자들은 누구를 다스리는가?바로 우리다.?우리는 각자가 군자이면서 소인이다.?이제는 신분상의 군자,소인은 무의미해졌다.?다만 각자의 관심에 따라,?즉 각자의 이익을 추구할 것인가 사회의 정의를 추구할 것인가에 따라 소인과 군자가 나뉠 뿐이다.어찌 보면 공자가 생각했던 것이 실현된 사회이다.

자기들을 지배층이라고 생각하는 소수의 사람들을 지배층으로 인정하고 그들의 지배에 따라 사는 소인이 될 것인지,?스스로가 군자인 지배층이 되어 소수의 관료들을 심부름꾼으로 부리고 살 것인지를 신중하게 선택해야 할 시대이다.

 

 

논현정보도서관 다음 강의는 6월 17일 주인으로 살아가기-맹자의 『호통』?:?구태환(상지대 강사)입니다. ?

 

노동소외-왜 아침에 출근하기 싫은 걸까?<광진정보도서관 아주 사소한 물음에서 시작하는 철학>2

노동소외-왜 아침에 출근하기 싫은 걸까?<광진정보도서관 아주 사소한 물음에서 시작하는 철학>2

이재유(건국대)

 

 

1.?나는 월요병에 걸려 있다!

2강1-1우리의 노래 중에?<일요일이 다 가는 소리>라는 노래가 있다.?일요일이 다 가는 소리/?아쉬움이 쌓이는 소리/?내 마음 무거워지는 소리…….?우리는 금요일 저녁이 되면 홀가분해지고,?일요일 저녁이 되면 뭔가 불안하고 마음이 찝찝하다.이것은 평일에도 비슷하다.?이른 아침에 일어나서 출근하기가 참으로 힘들다.?그렇지만 저녁 퇴근 무렵이면 생기가 난다.?학생들일 경우에 수업시간만 되면 졸리다가 쉬는 시간만 되면 얼굴에 생기가 돋는다.

우리는 언제부터 이렇게 살아왔을까??원시시대부터 이렇게 살아왔을까??아니다.?이런 삶의 모습은 다름 아닌 현대인들의 모습이다.?우리는 왜 일이나 공부하러 갈 때는 불안하고 끔찍하다고 생각하고,?쉬거나 노는 시간에는 편안하고 안락함을 느끼는 것일까??이에 대한 해답의 실마리는 시인 엘리엇(T. S. Eliot)의 시‘텅 빈 인간(The Hollow Men)’에서 찾아볼 수 있다.

우리는 텅 빈 인간

우리는 짚으로 채워진 인간

서로 기대고 있지만

아!?머리통은 짚으로 가득 차 있네

우리가 모여 수근대면

메마른 목소리가

소리 없고 의미 없다

마치 마른 풀섶 지나는 바람

또는 메마른 지하창고에서

깨어진 유리 위를 밟는 쥐 소리

형체 없는 모양,?빛 없는 그늘

마비된 힘,?동작 없는 몸짓.

곧장 바라보고 죽음의 다른 왕국으로

바다 건너간 자들이

우리를 기억하고 있다 한들

지옥에 떨어진 맹렬한 혼으로서가 아니라,?다만

텅 빈 인간으로서

짚으로 채워진 인간으로서.

이 시는?‘텅 빈 인간’의?Ⅰ부의 내용이다.?시인이며 철학자이기도 했던 그는 크게 다섯 부분으로 이루어진 이 시에서 자아를 모르는 현대인들을?‘텅 빈 인간’이라 부르고 그들의 모습을 읊었다. ‘이렇게 세계가 끝나는구나’로 결말의 첫머리를 시작하는 이 시는 세계가 총이 아니라 인간의 흐느낌으로 멸망한다고 끝을 맺는다.

이 시를 통해 우리는 우리의 정체성,?즉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을 어디에서건 발견할 수 없음을,?우리가 아무 생각 없는 기계나 좀비가 된 것은 아닌가를 의심해 본다.?이제 우리는 아침에 일하러 가기 싫은 이유를 이렇게 연결시켜 볼 수 있지 않을까싶다.?즉 우리가 일하러 갈 때 불안감과 끔찍함을 느끼는 이유가 인간으로서의 우리의 정체성을 냉장고에 보관해 두고 갈 수밖에 없는 강요를 당하는 때문일 수 있다는 것이다.

 

2.?노동과 자유란 무엇인가?

오늘날 우리가 일을 할 때 인간으로서 우리의 정체성이 상실된다는 것은 일,?즉 노동이 인간다움을 느끼지 못하도록 하는 특성을 지니고 있음을 뜻한다 할 수 있다.?근대 이후 인간다움의 기초는 바로?‘자유’에 있다고 할 수 있으며,?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자유권은 인간의 기본권으로서 헌법에 명시되어 있다.?그러므로 현대 사회에서 일을 할 때,?즉 노동을 할 때,?현대인들은?‘자유’를 상실한 느낌을 가진다는 것이다.?이때?‘자유’란 동물처럼 자연법칙이라는 타자의 압력이나 강제에 따라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존재한다는 것을 뜻한다.?그러므로 자유를 상실한다는 것은 이른바 동물적으로 생존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자유는 자기 스스로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하는데,과연 인간은 오로지 자기 스스로에 의해서만 존재할 수 있을까??인간도 동물처럼 자연법칙의 영향을 받으며,?자연을 벗어나서는 살 수 없는 존재이다.?그렇다면 자기 스스로 존재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이에 대해 철학자 마르크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유란 자연법칙으로부터 공상적인 독립에 있는 것이 아니라,?오히려 이 법칙을 인식하고?일정한 목적을 위해 계획적으로 작동시킬 수 있다는 데 있다…….?그러므로 자유는 자연의 필연성들에 대한 인식을 기초로 우리 자신과 외부 세계를 지배하는 데 있다(엥겔스,?『반뒤링론』).”

결국 자기 스스로 존재한다는 것은 자연법칙을?‘일정한 목적을 위해 계획적으로 작동’시키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그리고 자연법칙을 계획적으로 작동시켜 자신의 삶의 목적을 실현시키는 활동 또는 행위가 바로?‘노동’이라고 할 수 있다.?이 노동을 통해 인간은 자연을?‘인간화시키는 것’이며,따라서 인간은 자연의 주체로 등장할 수 있게 된다.

 

3.?자본주의 사회에서 왜,?어떻게 소외가 발생하는가?

1)?자본주의 사회란 무엇인가?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한마디로 말해 자본주의 사회이다.?그렇다면 자본주의 사회란 어떤 사회인가??자본주의 사회는 봉건사회 등 이전의 사회와는 달리 인간의 노동력이 상품으로 판매되는 사회이다.?그리고 인간의 살아 있는 노동을 통해 새로운 가치가 생산되는 사회이다.

인간은 자신이 만들어 낸 모든 상품들과 구별되는,?상품을 만들어 낸 창조주이자 주체이다.?그리고 이것을 가능하게 해 주는 인간의 주요 특성이 바로?‘노동’?자체이고,?이러한 사실로부터 인간 노동 자체를 다른 모든 상품처럼 시장에서 판매할 수 없으며,?다만 이러한 노동의 구현체로서의 노동력(다른 모든 상품들도 노동의 구현체이다)이 다른 모든 상품들처럼 시장에서 판매될 수 있다.

그러므로?<노동>과?<노동력>의 가치를 반드시 구분해야 한다(노동은 그 자체로 가치를 가질 수 없는 것인데,?왜냐하면 시장에 내다 팔 수 있는 상품이 아니기 때문이다).?그렇지만 이 노동력은 이 노동력을 만들어 내는 창조주,?주체로서의 인간과 현실적으로 분리될 수 없는 특수한 상품이다.?다시 말하자면 시장에서 판매되긴 하였지만 아직 추상적이고 가능적인 형태에 머물러 있는 노동력이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것으로 되기 위해서는,?즉 노동력이 발휘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인간의 노동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 인간의 노동을 마르크스는?‘인간의 살아 있는 노동’이라 하는데,?노동력과 기계,?원료 등을 결합하여 새로운 상품을 만들어 내고,?이는 종전보다 더 많은 가치를 만들어 내는데,?이 새로운 가치 부분이 바로 잉여가치이다.?그렇게 해서 잉여가치는 바로 인간 노동에서 나오는 것이다.?자본가가 노동자에게 주는 임금은 노동의 가치가 아니라 노동력의 가치이다.

또한 단순가격과 생산가격이 시장의 경쟁이라는 개념을 통해 서로 다르게 나타난다는 것을 설명하였다.?아래의 도표를 보면서 이야기를 해 보도록 하자.

이재유 그립파일

C(불변자본, Constant capital):기계,?공장부지,?원료 등을 뜻하는데,?새로운 가치를 만들어 낼 수 없는 자본을 뜻한다.

V(가변자본, Variable capital):노동자의 노동력을 뜻하는데,?새로운 가치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자본을 뜻한다.

S(잉여노동 또는 잉여가치, Surplus)

C+V+S:단순가격으로서 하나의 상품을 만드는 데 들어간 비용을 뜻하는데,?시장에 나오기 전의 그 상품의 가치를 나타낸다.

P(이윤, Profit):시장에서 그 상품이 팔렸을 때 실제 남는 이윤을 뜻한다.

C+V+P:생산가격으로서 단순가격이 시장에서 가격 경쟁을 통해 현실화된 가격이다.

표에서 자본가Ⅰ,Ⅱ,Ⅲ?모두 하나의 상품을 만드는 데 총100원(C+V)을 투자하고,?잉여가치율(S`=V/S)이 모두?100%라고 가정한다.?이때 상품은 단순가격으로 팔리는 것이 아니라 자본가들의 경쟁에 따라 단순가격들의 평균으로?120원에 팔리게 된다.?그러면 자본가?Ⅰ,Ⅱ,Ⅲ?중 자본가Ⅰ이 가장 많은 이득을 취한다.?즉 단순가격에?10원의 이득이 더 붙는다는 것이다.?그 다음에는 자본가Ⅱ이고,?그 다음에는 자본가Ⅲ이다.?자본가Ⅱ는 단순가격과 생산가격이 같고,?자본가Ⅲ은 단순가격에서?-10원을 손해보고 있다.?가격경쟁에서 자본가Ⅰ이 우위를 점하면서 더 많은 이윤을 창출하고 있다.

그런데 우위를 점하고 있으면서 더 많은 이윤을 창출하는 요인이 무엇일까??그것은 자본가Ⅰ이 자본가Ⅱ,Ⅲ보다 자본의 유기적 구성도(C/V)가 높다는 것이다.?자본의 유기적 구성도가 높다는 것은 가변자본이 적어진다는 것,?즉 노동자의 임금이 차지하고 있는 부분이 적어지고,?불변자본이 많아진다는 것,?다시 말해 사람이 일하던 것을 기계로 대체한다는 것이며,?그 기계의 효율을 최대한 높여서 노동 강도를 엄청나게 강하게 한다는 것이다.?이러한 것은 오늘날 우리가?‘구조조정’이라고 일컫는 것이다.

그런데 가변자본이 줄어든다는 것은 곧 가변자본에 의하여 생겨난 잉여가치(S)가 줄어든다는 것을 의미한다.?또한 잉여가치가 줄어든다는 것은 이윤율(S/C+V)이 줄어든다는 것이다.?이 이윤율은 경제성장률 지수의 척도이다.?위 표에서 보다시피 자본Ⅲ의 이윤율은?30/100인데 자본Ⅰ의 이윤율은?10/100이다.?서구선진국의 경제성장률이?1~2%대에 머무르는 것은 이와 무관하지 않다.

이러한 이윤율 저하 경향은 자본의 이윤 증대를 꾀한 결과이며,?이는 곧 노동력을 감소시킨다.?그리고 이 노동력의 감소는 다시 이윤율의 저하 경향을 가져와서 자본의 이윤 증대를 꾀하게 되며,?다시 노동력을 감소시킨다.?다시 말하자면 이러한 순환과정은?<이윤율의 저하 경향?→?자본의 이윤 증대를 꾀한 결과?→?노동력의 감소?→?이윤율의 저하 경향?→자본의 이윤 증대를 꾀한 결과?→?노동력의 감소?→?이윤율의 저하 경향?→ ……>이다.?노동력의 감소는 노동자의 임금 전체가 상대적으로 줄어든다는 것이며,?비정규직과 실직자가 늘어난다는 것이다.?이러한 순화과정이 계속 되풀이되면서 대다수 일하는 사람들의 삶은 피폐해지고 황폐해진다.

2) <노동의 소외>는?<노동력의 가치>로 나타난다.

우리가 주의해서 보아야 할 것은?<노동>과?<노동력>을 구분해야 한다는 점이다.?소외가 발생하는 것은?<노동>이 아니라 물적인 형태로서의?<노동력>으로부터 발생한다.

노동력이란 자연과의 관계,?나아가 사회적 관계를 실현시키는 인간의 구체적 실천활동 일반이 아니라,?자본가와 관계 맺는,?즉 자본에게 종속되고 착취되는 관계로서 노동자가 판매하는 상품의 실체이다.?그러나 이와 반대로 노동은 자연과의 관계,?나아가 사회적 관계,?즉 세계 전체와의 관계를 실현시키는 인간의 구체적인 실천적이고 변혁적인 활동일 뿐만 아니라 자신과 세계를 변혁시키는 실천활동이다.

가치란 자본주의 하에서의 역사적 개념으로서 모든 인간관계를 상품관계로 변환시키는 척도이다.?그리고 이때의 가치는 노동의 가치가 아니라?<노동력>의 가치이다.?이 노동력의 가치는 그 자체로 인간 노동의 소외 형태이다.?왜냐하면 인간 삶의 목적이 이 가치에 종속당하게 되며,?결과적으로 이 가치로서는 인간 자신의 삶의 목적을 실현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그리고 이 노동력 가치의 현상 형태가 가격인데,?가격은 구체적으로 임금의 형태로서 우리 눈에 나타나게 된다.?가격 또는 임금은 노동력의 가치와는 다르게 나타나는데,?그 이유는 경쟁 개념이 도입되기 때문이다.?또한 임금은 사회적 평균 노동시간(이것도 동일 부문의 노동자의 노동시간 단축이라는 경쟁을 통해 이루어진다)과 직접적으로 연관을 가지고 있다.?예를 들자면 최저임금제는 바로 사회적 평균 노동시간에 근거해 책정된다.?결론적으로 말하면 노동력의 가치의 현상 형태인 가격 또는 임금은 인간 노동이 소외된 형태이다.?그렇기 때문에 단순히 개별 노동자의 임금인상에 매달리거나 생산성을 담보로 하는 임금인상은 인간 노동 소외를 더욱 부채질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철학자 마르크스는?『경제학-철학 초고』에서 자본주의 사회의 인간 노동 소외를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실로 노동 자체는 노동자가 온갖 노력을 기울이고 가장 변칙적인 범죄를 저질러야 비로소 자기 것으로 차지할 수 있는 하나의 대상으로 된다.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을 통해서 자신을 긍정하지 않고 부정하며,?행복을 느끼지 않고 불행을 느끼며,?자유로운 신체적·정신적 에너지를 계발하지 못하고,?자신의 신체를 채찍질하며 자신의 정신을 황폐화한다.?따라서 노동자는 노동 바깥에 있을 때 비로소 안도감을 느끼며 노동을 할 때 탈아감(脫我感, ausser sich)을 느낀다.?그는 노동을 하지 않을 때 편안한 느낌을 갖고,?노동을 할 때에는 편안한 느낌을 가지지 못한다.

??소외된 노동은 자기 활동 곧 자유로운 활동을 수단으로 격하시킴으로써 인간의 유적(類的)?생활을 인간의 신체적 생존을 위한 수단으로 만들어 버린다.

??인간의 소외 곧 인간이 자기 자신에 맞서 있는 상태는 인간이 다른 인간에 대해 맞서 있는 상태 속에서 비로소 현실화되고 분명히 표현된다.

 

2강-1

 

4.?인간 노동 소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노동자의 일자리가 줄어들어 노동자의 생계가 엄청 위협받음과 동시에 부익부빈익빈이라는 사회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다른 방식이 존재한다.?이 다른 방식은 다름 아니라 맑스가 말하는?“각자의 필요에 따라”,?즉 각자의 욕구에 따라 분배,?교환,?소통되는 방식이다.?이 방식 속에서는 그 누구도 이익을 보거나 손해를 볼 수 없다.?왜냐하면 누구나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 방식을 대단히 현실과 동떨어진,?유토피아적이고 이상적인 것으로 생각한다.?그러나 이러한 방식은 이미 알게 모르게 우리의 삶의 방식에 움터 있다.?친구들과의 관계,?가족과의 관계,?연인,?동아리 등등의 관계에서 말이다.?이들과의 관계 속에서는 이익이나 손해 등을 따지지 않는다.?우리는 이러한 관계 속에서 각자가 필요로 하는 것을 주고받는다.?그러므로 이 방식은 현실에서 실현 가능성이 있다.?문제는 이 방식을 어떻게 의식적으로 사회 전체에 적용시킬 수 있는가이다.?그렇지만 이것도 실현가능함을 우리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다.?국내적으로 보면 광우병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 집회에 가면 서로가 서로에게 먹을 것과 담요,?음료수 등을 아무런 이해관계 없이 주고받는다.?서로에게 격려와 희망,?연대의 벅참을 주고받는다.

국외로 보면 쿠바,?베네수엘라,?볼리비아 등이 민중무역협정(PTA)(미국을 축으로 하는 자유무역협정(FTA)에 반대해서 만든 협정)이라는 것을 체결하였다.?자유무역협정은 사회적 평균 노동시간(이것은 화폐의 양으로 나타난다)에 따라 분배,?교환,?소통하는 방식이다.?그러나 민중무역협정은 각 국가가 필요로 하는 물자의 양에 따라 분배,?교환,?소통하는 방식이다.?쿠바는 베네수엘라로부터 석유를,?볼리비아로부터 천연가스와 콩을,?베네수엘라는 쿠바로부터 의사를 비롯한 선진 의료제도를,?볼리비아로부터는 천연가스와 콩,?밀을,?볼리비아는 쿠바로부터 의사를 비롯한 선진 의료제도를,?베네수엘라로부터는 석유 등을 필요한 만큼 서로 주고받는다.

우리가 노동하는 것은 각자가 필요한 것을 얻고 충족시키는 데 그 목적이 있다.?이것이 바로 노동이 가지고 있는 진정한 가치라고 할 수 있다.?결국 중요한 것은?<생산양식>이 문제이다.?필요한 만큼만 생산하는 생산양식,?즉 계획 생산 양식은 자본주의의 무정부적인 생산 양식의 대안이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