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적 시민의 애국주의-나는 왜 싸이의 성공을 자랑스러워하는가? <광진정보도서관 아주 사소한 물음에서 시작하는 철학> 5-1

근대적 시민의 애국주의-나는 왜 싸이의 성공을 자랑스러워하는가??<광진정보도서관 아주 사소한 물음에서 시작하는 철학> 5-1

 

김성우(兀人고전학당 연구소장, ⓔ시대와 철학 편집위원장)

 

 

들어가는 말

현대 사회는 통상적으로 개인주의 사회라고 불린다. 과거 백인이 흑인에게 저지른 잘못을 현재의 백인 후손이 왜 흑인 후손에게 사과하거나 흑인에 대한 우대정책에 동의해야 하는 것일까? 이 백인은 자신이 흑인 노예를 부리고 산 적이 없는데도 말이다. 또한 우리는 왜 월드컵이나 올림픽에서 우리나라 선수를 응원하고 메달이라도 따면 같이 기뻐하고 부당하게 메달을 빼앗기면 같이 분노하는 것일까? 한국 사회에서 대기업의 불공정한 행태를 비판하는 입장이라도 막상 외국에 나가서 한국 대기업의 로고를 볼 때 왜 가슴이 뭉클해지는 것일까? 싸이의 음악적 성공에 나의 가슴이 뛰는 이유는 뭘까? 이러한 현상들은 단순히 개인주의 차원에서는 이해되지 않는다. 따라서 이러한 현상을 이해하려면 개인주의 외에 국가주의=민족주의가 현대 사회의 또 다른 기본 특징임을 알지 않으면 안 된다.

 

1. 개별화와 전체화

푸코는 현 서구사회를 비판하기 위해 정치적 합리성을 탐구한다. “정치적 합리성은 서구사회의 역사 전체를 통해 자신을 성장시켜 왔으며 또 자신을 드러내 왔다. 그것은 처음에는 사제 권력이라는 사상에, 그 다음에는 국가 이성이라는 사상에 의존해 왔다. 그것의 필연적인 효과는 개별화와 전체화이다. 이 두 효과 중 어느 하나만이 아니라, 정치적 합리성의 뿌리 그 자체를 공격함으로써 자유가 온다.” 푸코가 보기에 계몽주의의 과업은 이성의 정치권력을 증대시키는 것이다. 권력 증대는 두 방향으로 발달한다. 즉 국가로 정치 권력이 중앙집권화되어 가는 방향과 개인들을 다루는 권력 기술의 출현이다. 대부분의 푸코 연구가들은 푸코가 “현대적 국가 양식과 그것이 어떻게 해서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에서 도출되었는지에 관한 연구는 소홀히 하고 지배가 생산력과 착취의 관계, 그리고 국가기구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사실을 무시했다.”고 비판한다. 즉 그가 두 방향 중 후자의 측면인 권력의 개별화 형태에만 강조점을 두었다는 것이다. 이 비판은 일면적으로 사실이긴 하지만 푸코의 진정한 의도를 못한 데서 생겨난다. 푸코는 국가가 가장 두드러지고, 가공할 인간통치의 형식중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국가는 앞 인용문에서 밝혀졌듯이 개별화하고 동시에 전체화시킨다. 따라서 그가 보기에 국가와 개인을 별도로 세우고 국가와 이익과 개인의 이익을 상충하는 것으로 보고 국가로부터 개인을 해방시키는 전략은 피상적이라는 것이다. 그의 의도는 ”근대 권력 구조들이 개별화시키고 또한 동시에 전체화시키는 이런 종류의 정치적 ‘이중구속’을 제거“하는 것이다. 그는 동시대의 국가나 국가기관들로부터 개인을 해방시키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국가와 그리고 국가에 관련되어 있는 개별화의 유형 둘 다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 핵심문제 생각한다. 그리고 둘 중에서 후자 즉 개별화의 유형이 더 많이 은폐되어 있고 간과되어 있으므로 이에 강조점을 둔 것이다.

 

2. 한국의 특수한 이념, 유교적인 가족주의

윤리나 도덕은 역사를 초월한 영원불변의 이념의 세계에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바로 현실의 구체적인 삶 속에서 명멸해 가는 역사적인 생명을 지닌다. 이는 시대가 변화하면 윤리와 도덕도 변화하기 마련이다. 특정한 도덕이나 윤리는 특정한 사회적 조건하에서만 타당하기 마련이다. 윤리는 그 성격상 보편적 구속력을 요구하기 마련이지만 이러한 보편성은 어디까지나 칸트적 의미에서의 윤리적 요청이지 사실적 의미의 진리성을 지니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지금 급격한 사회변동과 관성을 지닌 윤리 의식 사이의 갈등과 모순이라는 문제에 직면하고 있다. 우리의 사회는 전통적인 농업중심주의 사회에서 근대 공업사회로 변화했고 다시 미래의 정보사회로 돌진하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우리의 의식은 여전히 농업중심사회를 이끌어오던 기존의 가부장중심의 윤리와 이를 정당화한 유교의 윤리가 형해화된 채로 잔존하긴 하지만 여전히 우리의 윤리적 담론의 지배권을 행사하고 있다. 실제로 이 전통적인 윤리의 의의와 가치를 완전히 부정할 수 없을 만큼 이에 대해서 향수를 느끼는 사람들이 많은 존재하는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런 점을 고려하더라도 과연 이 가부장적이고 유교적인 윤리가 현재 우리가 앓고 있는 서구 합리적이고 개인주의(=국가주의) 사회적 딜레마와 문제점들을 해결하고 다가올 미래 사회의 윤리적 기초가 될 수 있을까?

이 물음에 답변을 할 수 있으려면 현재 우리 사회의 문제들과 이 전통 윤리가 과연 연관되어 있는지를 먼저 고찰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만약 이 문제들과 전통 윤리가 연관되어 있지 않다면 전통윤리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도구로 사용될 수도 있다. 하지만 만약 그것들 사이에 연관이 없다면 이 문제들을 발생시킨 병인(病因)과도 같은 윤리를 이 문제들에 대한 치료제로 쓸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한 일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새로운 치료제를 개발할 필요성이 있다. 다시 말해서 전통 윤리의 윤리적 기획과는 다른 윤리적 기획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2.1. 우리 사회의 병리적 현상, 연고주의

그러면 우리 사회가 몸살을 앓고 있고 한 공동체로서의 우리 민족을 갈가리 찍게 만든 병들이 무엇인지를 살펴보자. 이 병들을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이라는 큰 범주에 따라 구분하면 우리 사회 내적인 증상과 외적인 증상으로 나눌 수 있다. 내적인 것은 우리 사회의 통합성(integrity)과 관련되고 외적인 것은 우리의 정체성(identity)과 관련된다. 통합성이나 정체성은 모두 자아와 타자의 상호작용과 상호인지를 전제한다. 우리의 통합성은 연고주의 더 자세히 말하면 혈연에 기초한 가족이기주의, 학연에 기초한 학벌이기주의, 지연에 기초한 지역이기주의 때문에 그 토대가 흔들리고 있다. 이 삼연(三緣)주의로 생겨난 우리 사회의 ‘진입 금지’는 다수의 구성들의 생존과 존엄을 손상하면서 상대적 박탈감을 조장하여 구성원들 사이에 그 틈을 메울 수 없는 갈등의 심연을 만들어 왔다. 이는 구성원들이 한 공동체라는 상호인식이 부족한 데서 기인한 것이다. 이는 기존의 집단 정체성 확립에 문제가 있음을 의미한다. 이 문제는 단순히 같은 사회의 구성들 사이의 갈등뿐만 아니라 세계화 시대에서 우리사회와 다른 사회 사이의 갈등에서도 확인된다. 우리의 대외 의식은 우리보다 선진한 나라에 대한 사대주의와 우리보다 후진적인 나라들에 대한 졸부의식으로 드러난다. 이 또한 우리의 정체성 설정과 자아와 타자와의 상호인정에 문제가 있음을 극명히 보여준다.

 

2.2. 유교의 차별애

우리 사회의 잘못된 집단 정체성과 통합성에 유교와 가부장 윤리가 기여한 바는 없는가? 이에 대한 대답을 얻기 위해서 유교 윤리의 특징을 살펴보자. 유교 윤리의 특징을 살피려면 우선 고대에 유교와 대립되던 학파인 묵가가 유교 비판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묵자]의 ?겸애(兼愛)하편?에서 別(따로 노는 것)과 兼(함께 하는 것)을 구분한다. 그는 겸을 가지고 별을 비판한다. 이 비판의 대상이 바로 유교이다. 그는 유교를 별사(別士)라고 부른다. 별사란 별애를 주장하는 선비이다. 별사의 주장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내 어찌 자신을 위하는 만큼 적을 위하고 벗의 아버지를 나의 아버지만큼 위할 수 있을까?” 반면에 겸(함께)을 주장하는 선비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자신을 위하는 것만큼 친구를 보살펴 주어야 하겠으며, 친구의 어버이도 나의 어버이같이 위하여야겠다.” 이 주장은 겸애(더불어 사랑함)를 의미하고 있다. 이렇게 본다면 묵가의 사랑은 겸애이고 유교의 사랑은 별애(차별적으로 사랑함)로 뚜렷하게 대비된다.

과연 묵가의 비판대로 유교의 사랑이 별애인지를 알아보기 위해서 원시 유교의 핵심 사상가 중의 한 사람인 맹자의 논의를 살펴보자. 맹자는 양주학파와 묵가를 비판하는 것을 자신의 과제로 생각한 유학자이다. 맹자는 이 양자를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양씨는 자신만을 위하니, 이것은 왕이 없는 것이요, 묵씨는 겸애를 주장하니 이것은 아비가 없는 것이다. 아비도 없고 왕도 없으면 이는 금수와 다를 바가 없다. …… 이러한 사악한 설이 백성을 기만하고 인의(仁義)를 막히게 하였다.”1) 맹자의 묵가에 대한 비판은 겸애를 주장하면 자신의 아버지의 존재를 무화시킨다는 점이다. 겸애는 자신의 아버지와 다른 이의 아버지의 구분을 없애고 만다. 이는 유교가 바탕으로 하고 있는 仁의 정신에 어긋난다.

유교의 인의 출발점은 친함親이다. 즉 가장 친한 관계인 아버지와 아들 간에 이루어지는 자연스런 사랑의 감정이 바로 인이다. 인을 중심으로 하는 공자의 가족주의적 도덕은 주나라의 봉건제를 기본으로 하여 세워진 것이다. 주나라 봉건제는 천자는 아버지고 제후는 아들이라고 하는 혈연의식이 그 봉건제를 지탱하는 기둥이었다. 몇 대가 흐르자 그 혈연의식이 희박해져 가족주의의 정신이 상실되고 각 나라가 패권을 추구하는 춘추전국시대로 접어들게 되었다. 공자에게는 이러한 난세를 구하는 길은 단지 하나. 주나라 초기 봉건제의 정신이었던 가족주의 도덕을 부흥하는 길 이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어 보였다. 그러면 주초의 가족주의 도덕을 부흥시키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실로 천하의 정치는 이미 가족주의 도덕의 이념을 상실해 버렸다. 그러나 개개의 가족이나 촌락에는 여전히 가족제의 정신이 강하게 남아있었다. 이 현실을 바탕으로 하여서 그 가족애가 미치는 범위를 점차로 확대하여 이것을 하나의 나라에 미치게 하고 나라들의 모음인 천하에 확대하면 된다.2) 이는 “가까운 곳에서 먼 곳에까지 미친다.”라는 원리에 따르고 있다. 이러한 공자의 정신을 표준화한 것이 四書 중의 [大學]이다.

[대학]의 첫 부분은 3강령과 8조목으로 되어 있다. 3강령은 ‘明明德’과 ‘新民’과 ‘止於至善’이다. 명명덕이란 군자의 내면에 본유적으로 있는 밝은 덕을 밝힌다는 것이다. 이는 修身을 의미한다. 즉 좋은 통치자가 되어 왕도정치를 피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덕을 수양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러한 수양된 덕을 바탕으로 백성을 교화시키는 것이 바로 新民이다. 백성을 새롭게 한다는 것은 덕으로 감화하는 정치를 한다는 것이다. 이를 기본으로 해서 유교의 이상인 대동사회를 이룩하기 위한 도덕적 공동체를 만든다는 것이 ‘止於至善’이다. 이 삼강령은 유교의 기본 원리인 ‘修己治人’을 방법론적인 시각에서 재조명한 것에 불과하다. 이 삼강령을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 조목이 바로 8가지로 제시되어 있다. 8조목의 순서는 격물, 치지, 성의, 정심,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이다. 이는 도덕적 수양을 통해 가족주의 도덕을 내면화한 것이 덕이고 이 덕을 집, 국가, 세계로까지 확장하는 발산의 논리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이러한 논리의 문제점은 가족의 양적 확대가 국가가 되며 국가의 양적 확대가 천하가 된다는 추론 위에 도덕을 조직하였다. 이 경우 천하도 국가도 질적으로는 가족을 기본틀로 하는 가족의 확대형태가 된다. 여기에 조응하여 가족생활에 고유한 개인도덕도 그 영역을 공간적으로 연장함으로써 그것이 바로 사회도덕이 되어 버린다. 이 때문에 사회도덕은 개인도덕 안에서 해소된다. 이러한 유교의 윤리적 기획은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의 구분을 발달시키지 못하게 함으로써 사회적인 공공정신의 발달을 가로막는다.3)

유교의 윤리가 가족과 비가족을 구분하는 차별애임은 앞에서 인용한 묵자 비판에서 행한 맹자의 말에서 분명하게 드러났다. 가족과 비가족을 구분하지 않는 것은 아버지의 존재와 권위를 없애는 결과는 낳을 뿐이다. 이는 유교의 도덕적 기초인 仁이 성립할 근거를 말살하는 것으로 귀착된다. 앞에서 언급한 것을 다시 요약한다면 공자의 인은 가족애를 출발점으로 한다. 이는 그가 주나라 초기 가족주의에 기반을 둔 정치의 소생을 이상으로 삼은 데서 기인한 당연한 결론이다. 인은 무엇보다도 우선 자신의 부모형제를 사랑하는 것에서 비롯된다. 이 가족에 대한 사랑을 국가에, 그리고 국가들의 모임인 천하에 확장하는 것이 유교의 윤리적 전략이다. 하지만 이러한 연속성이 과연 성립할 수 있는 것인가? 이에 대한 대답을 위해서 다음의 말을 인용해보자.

본디 인류애는 가족애나 애국심과 같은 특정의 집단에 대한 애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특정 집단에 대한 애는 그것이 아무리 순수하다 해도 본질적으로 에고이즘의 확대라는 성격을 면할 수 없다. 에고이즘을 가진 애는 항상 ‘미워함’과 가깝다고 하는 사실 의해서 간단히 판별할 수 있다. 모성애는 어머니의 자기희생 위에 성립하지만, 그것은 이웃집 자식에 대한 미워함이 쉽게 생긴다. 따라서 모성애의 본질은 확대된 에고이즘이다. 애국심은 적국에 대한 증오심과 쉽게 연결된다. 따라서 애국심을 제아무리 양적으로 확대해도 인류애는 될 수 없다. 인류애는 가족애나 애국심과 같은 특정애의 애를 확대하는 것으로 얻어질 수는 없다. 도리어 그 완전한 부정 위에 성립한다. 이 점은 인류애를 역설한 종교를 보면 분명해질 것이다. 자비의 가르침을 설명한 불교는, 불도의 수행자를 ‘出家’라고 부른다. 그것은 가족으로부터 탈출함과 동시에 국가로부터 탈출하는 것이므로 ‘出國’이라고 부르는 것이 적합하다. 또 박애를 역설한 예수도 마찬가지이다.4)

특정한 집단에 대한 사랑과 인류 전체에 대한 사랑은 서로 질적으로 틀릴 뿐만 아니라 인류애는 특정한 집단에 사랑을 부정할 때에만 생겨난다. 이와는 달리 유교의 윤리는 특수성의 양적 확대에 불과하므로 진정한 의미의 보편성에 도달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추상적 보편성의 수준에 도달한 서구의 근대 보편주의적 윤리적 기획이 유교에 대한 대안으로 삼을 수 있는가?

 

-주석-

1) [孟子; 勝文公下 9]

2) 森三樹三郞, [중국사상사], 임병덕 역 (온누리, 1990), 41쪽.

3) 赤?忠 외, [중국사상개론], 조성을 역 (이론과 실천, 1987), 380-1쪽.

4) 森三樹三郞, [중국사상사], 임병덕 역 (온누리, 1990), 64-5쪽.

 

 

<상속자들>과 『논어』 <벙커1> 2

<상속자들>과 『논어』 <벙커1> 2

오상현(숭실대)

 

알림 : 『논어』 번역은 황희경 선생님의 번역이거나?필자가 수정한 것들이 섞여있습니다

들어가며…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배우고 때때로 (또는 때맞춰)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않겠는가? 벗이 먼 곳에서 찾아온다면 즐겁지 않겠는가?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성내지 않는다면 또한 군자답지 않겠는가?? 子曰, “學而時習之, 不亦說(悅)乎?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人不知而不?, 不亦君子乎?” 『논어』 「학이」 (0101)

 

1. 증삼(曾參) / 자여(子輿) / -49

질문 : “선생님, 저는 은상이와 갈라서게 된 탄이가 깨지고 다치면서 망가져가는 모습이 안타까웠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부모님께 물려받은 몸을 그렇게 함부로 대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효(孝)와 충(忠)에 대한 선생님의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 아울러 <상속자들> 속 은상이는 너무 착하기만 해서 바보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습니다. ‘착한 것’과 ‘착하기만 한 것’은 다른 것 같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사마천 『사기』

공자는 그가 효도에 능통하다고 여겨 가르침을 베풀었다. 그는 『효경(孝經)』을 지었으며 노나라에서 세상을 마치었다.

“나의 몸과 터럭, 그리고 피부마저 모두 부모로부터 받은 것이다. (身體髮膚 受之父母) 『효경』 1장.

[인물 엿보기]

증자가 말하였다. “부모의 상을 아주 진지하게 처리하고, 조상의 제사를 정성스럽게 모시면(愼終追遠) 사람들의 덕성이 한결 돈후해질 것이다.”? (0109)

증자가 병이 들어 제자들을 불러 놓고 말하였다. “(이불을 걷고) 내 발과 손을 보아라. 『시경』에 ‘깊은 못가에 서 있듯, 얇은 얼음판을 밟고 가듯 전전긍긍 조심한다.’고 하였는데 이제 와서야 이런 걱정을 면하게 되었음을 알겠구나, 제자들아!”? (0803)

증자가 말하였다. “나는 날마다 (다음과 같은) 세 가지를 반성한다. 남을 위해 일하면서 최선을 다하지 않았는가? 벗과 사귀면서 신의가 있지 않았는가? 선생님에게 전수받은 것을 익히지 않았는가?”? (0104)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삼(증삼)아! 나의 도는 하나로 꿰어 있다(吾道一以貫之).” 증자가 “예 알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공자께서 나가시자 다른 제자가 물었다. “무슨 뜻입니까?” 증자가 말하였다. “선생님의 도는 충서(忠恕)일 뿐입니다.”? (0415)

◎ 충(忠)의 의미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군자가 중후하지 않으면 위엄이 없고, 학문도 굳건하지 않게 된다. 진실함(忠)과 신의(信)를 위주로 하고, 자기보다 못한 사람과 벗하지 말며, 잘못을 고치기를 꺼려하지 말아야 한다.”? (0108)

“아름다운 자두꽃이 봄바람에 휘날리는구나. 어찌 그대를 그리워하지 않겠는가? (다만) 그대의 집이 멀고도 멀구나”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진실로 사랑(思)하지 않는 것이니 (사랑한다면) 먼 곳이 어디 있으리요?”? (0931)

정공이 물었다. “임금이 신하를 부리고 신하가 임금을 섬김에 어떻게 해야 하겠소?” 공자께서 대답하셨다. “임금은 예로써 신하를 부려야 하고 신하는 충성으로써 임금을 섬겨야 하는 것입니다.”? (0319)

제나라 경공이 공자에게 정치에 대해 물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임금이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고 아버지는 아버지다워야 하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합니다.(君君臣臣, 父父子子)” 경공이 말하였다. “좋은 말씀이오. 진실로 임금이 임금답지 못하고 신하가 신하답지 못하며 아버지가 아버지답지 못하고 자식이 자식답지 못하다면 비록 양식이 있다 한들 내가 먹을 수 있겠소?”? (1211)

제나라 경공이 공자에게 정치에 대해 물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임금이 임금다워야 신하가 신하다울 수 있고, 아버지가 아버지다워야 자식이 자식다울 수 있습니다.(君君臣臣, 父父子子)” 경공이 (알아듣지 못하고) 말하였다. “좋은 말씀이오. 진실로 임금이 임금답지 못하고 신하가 신하답지 못하며 아버지가 아버지답지 못하고 자식이 자식답지 못하다면 비록 양식이 있다 한들 내가 먹을 수 있겠소?”? (1211)

자공이 여쭈었다. “공문자는 무슨 이유로 문(文)이라는 시호(諡號)로 불리게 되었습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사람됨이 민첩하고 배우기를 좋아하며 아랫사람에게 묻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았으니 그런 까닭으로 문이라고 일컬은 것이다.”? (0515)

계강자가 정치에 대해 공자에게 물었다. “만약 무도한 자를 죽이고 (선을 행하는) 좋은 사람을 친근하게 대한다면 어떻소?” 공자께서 대답하셨다. “선생께서 정치를 하면서 어찌 살인의 방법을 쓰려고 하십니까? 선생께서 착해지고자 하면 백성들도 (자연스럽게) 착해질 것입니다. 군자의 도덕은 바람이요 소인의 도덕은 풀입니다. 풀은 바람이 불면 반드시 따라 쓰러지게 되어 있습니다.”? (1219)

◎ 효(孝)의 의미

맹무백이 효에 대해서 물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부모님으로 하여금 오직 자식의 병만을 걱정하게 하는 것이다.”? (0206)

자유가 효에 대해서 여쭙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오늘날은 효라는 것을 (물질적으로) 잘 봉양하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개와 말도 그 정도쯤은 한다. 공경하지 않는다면 (개나 말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0207)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부모를 섬길 때 (만약 부모에게 잘못이 있으면) 은근히 완곡하게 간해야 한다. 부모가 자기 말을 따르지 않는 것을 보더라도 더욱 공경하여 어기지 말 것이며 수고스럽더라도 원망하지 말아야 한다.”? (0418)

◎ 충(忠)과 효(孝)의 관계(?)

공자가 말씀하셨다. “효성스럽구나, 민자건이여. 다른 사람들이 〔그에 대한〕부모 형제의 〔칭찬의〕말에 동의하지 않을 수가 없다.”? (1104)

계씨가 민자건을 비(費)라는 땅의 현장(縣長)으로 삼고자 하였다. 민자건이 (사신으로 온 사람에게) 말하였다. “나를 대신해서 잘 거절하여 주시오. 다시 나를 부르는 일이 있다면 나는 반드시 문수(汶水) 가에 가 있을 것이오.”? (0609)

◎ 착한 것과 우둔한 것의 차이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공손하면서 예가 없으면 수고롭게 되고(恭而無禮則勞), 삼가면서 예가 없으면 두려운 일이 많게 되고, 용감하면서도 예가 없으면 난을 일으키고, 정직하면서도 예가 없으면 각박해진다. 군자가 친족들을 후대하면 백성들 사이에 어진 기풍이 생겨나고, 옛 친구를 버리지 않으면 백성들이 박절하게 된다.? (0802)

어떤 이가 말하였다. “덕으로 원한을 갚으면 어떻겠습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덕은 무엇으로 갚겠는가? 공정함으로 원한을 갚고 덕으로 덕을 갚는 것이다.”? 或曰, “以德報怨, 何如?” 子曰, “何以報德? 以直報怨, 以德報德.”? (1434)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누가 미생고를 솔직하다고 하는가? 어떤 사람이 식초를 얻으러 갔더니 이웃에서 얻어다가 주는구나.”? (0524)

 

2. 안회(顔回) / 자연(子淵) / -30

질문 : “선생님, 아시겠지만 저는 평생 없이 살아서 그런지 겉치레에 엄청난 돈을 써대는 그들이 내내 못마땅했습니다. 형식적인 겉모습에 치중하기 보다는 그 안에 내포된 내용이 더 중요한 게 아닐까요?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이미 약혼식을 치렀던 탄이와 라헬이가 안타까웠던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는 서로에 대한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이지 약혼반지처럼 눈에 보이는 것에서 나오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사마천 『사기』

안회는 29세의 나이에 백발이 되었으며 젊은 나이에 죽었다. 공자는 그가 죽자 매우 애통해했다.

[인물 엿보기]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안회와 종일토록 이야기해 보았는데 (내 말을) 어기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마치 어리석은 것 같더니, 그가 물러간 뒤에 그의 사생활을 살펴보면 (내 말 뜻을) 잘 발휘하고 있으니 안회는 어리석지 않구나.”? (0209)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참으로 어질구나(훌륭하구나), 회(안회)여! 다른 사람들은 한 그릇의 밥(一簞食)과 한 표주박의 물(一瓢飮)로 가난한 마을에 사는 것을, 그 고생을 견디어 내지 못하는데 회는 (가난 속의) 즐거움을 고치지 않으니 참으로 훌륭하구나, 회여!”? (0611)

공자께서 광 땅에서 구금당했을 때 안연이 뒤처졌다가 나중에 도착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네가 죽은 줄 알았다.” “선생님이 계시거늘 제가 어떻게 감히 죽겠습니까?” (1122)

안연이 죽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아! 하늘이 나를 버리는구나, 하늘이 나를 버리는구나.”? (1108)

애공이 물었다. “제자 가운데 누가 배우기를 좋아합니까?(好學)” 공자께서 대답하셨다. “안회라는 제자가 있는데 배우기를 좋아하였습니다. (그는) 노여움을 다른 사람에게 옮기지 않았고(不遷怒) 같은 잘못을 두 번 저지르지 않았는데(不貳過) 불행히 일찍 죽었습니다. 지금은 없습니다. (그 후로는) 배우기를 좋아하는 사람을 아직 들어 보지 못하였습니다.”? (0603)

◎ 형식에 너무 얽매이지 말아라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삼으로 짠 관을 쓰는 것이 예이지만 요즘은 실로 짠 것을 쓰니 검소하다. 나도 대중이 하는 바를 따르겠다. (당) 아래에서 절하는 것이 예인데 요즘은 (당) 위에서 하니 이는 교만한 일이다. 비록 대중이 하는 바와 어긋나지만 나는 아래에서 절하겠다.”? (0903)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예(禮)라고 예라고 말하지만 (그것이) 옥이나 비단을 바치는 것을 말하겠는가? 악(樂)이라고 악이라고 말하지만 종이나 북을 치는 것을 말하겠는가?”? (1711)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내면적인) 질박함(質)이 (외면적인) 문채(文)를 이기면 조야하고, 문채가 질박함을 이기면 겉만 화려한 것이다. 문채와 질박함이 고르게 잘 조화를 이룬 뒤에라야(文質彬彬) 군자라 할 수 있다.”? (0618)

◎ 홍동백서(紅東白西)를 허하라.

안연이 죽자 공자께서 아주 애통하게 곡을 하셨다. 따르는 사람이 말하였다. “선생님께서 지나치게 애통해하십니다.” 공자가 말씀하셨다. “〔내가〕너무 애통해하고 있는가? 이 사람을 위해 애통해하지 않고 누구를 위해 애통해하겠느냐?”? (1109)

임방이 예의 근본을 여쭈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훌륭하다. 질문이여! 예는 사치스럽기보다 차라리 검소해야 하고, 상사(喪事)는 (절차를 알아) 쉽게 치르는 것보다 차라리 (진정으로) 슬퍼해야 한다.”? (0304)

 

3. 단목사(端沐賜) / 자공(子貢) / -31

질문 : “선생님! 부자라고 꼭 나쁜 사람들이라고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훗날 조선의 선비들 중에는 처자식이 쫄쫄 굶고 있는데도 골방에 박혀서 글공부만 했던 한심한 후학들이 있었답니다. 그따위 공부가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남편과 아비 노릇도 못하면서 군자가 어쩌고 천하가 어쩌고는 거짓입니다. 또한 선생님께서 줄곧 말씀하신 공부가 앉아서 책만 보는 그런 게 아니지 않습니까?”

사마천 『사기』

자공이 한번 나섬에 노나라를 존속시키고 제나라를 혼란에 빠뜨렸으며, 오나라가 망하고 진(晉)나라가 강국이 되었으며 월나라가 패자가 되었으니, 즉 자공이 한번 뛰어다님으로써 국제간의 형세에 균열이 생겨 10년 사이에 다섯 나라에 각각 큰 변동이 생겼던 것이다.

자공은 시세를 보아 물건을 매매해 이익을 챙기는 것을 좋아해 때를 보아서 그때그때에 재물을 굴리었다. 그는 남의 장점을 드러내주는 것도 좋아했으나 남의 잘못을 숨겨주지도 못했다. 일찍이 노나라와 위(衛)나라에서 재상을 지냈으며 집안에 천금(千金)을 쌓아두기도 했다.

[인물 엿보기]

자공이 말하였다. “가난해도 아첨하지 않고 부유해도 교만하지 않는다면 어떻습니까?” 공자가 말씀하셨다. “괜찮기는 하나, 가난하면서도 즐기고, 부유하면서도 예를 좋아하는 것만은 못하다.” 자공이 말했다. “『시경』에서 ‘자르는 듯(如切), 다듬는 듯(如磋), 쪼는 듯(如琢), 가는 듯(如磨)이 한다.’고 했는데, 이 말은 지금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내용을 두고 한 것이겠죠?”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사(자공)야, 비로소 너와 『시경』을 논할 수 있게 되었구나. 지난 일을 일러 주었더니 앞으로 올 일을 이해하는구나.”? (0115)

자공이 말하였다. “여기에 아름다운 옥이 있다면 장 속에 감추어 두겠습니까, 좋은 상인을 찾아 팔겠습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팔아야지, 팔아야지, 나는 (물건 볼 줄 아는) 상인을 기다리는 사람이다.”? (0913)

공자께서 자공에게 말씀하셨다. “자네와 회(안회) 가운데 누가 나은가?” 자공이 대답하였다. “제가 어찌 회와 같기를 바라겠습니까? 회는 한 가지를 들으면 열 가지를 알고, 저는 한 가지를 들으면 둘을 알 뿐입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그녀석만 못하지, 너나 나나 그만 못하지.”? (0509)

자공이 정치에 대해 여쭈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식량을 풍족하게 하고(足食), 군비를 충분히 하고(去兵), 백성들이 믿도록(民信之矣) 해야 한다.” 자공이 말하였다. “부득이하게 하나를 버려야 한다면 이 세 가지 중에서 어느 것을 먼저 버려야 합니까?” “군비를 버려야지.” 자공이 말하였다. “부득이하게 하나를 더 버려야 한다면 (남은) 두 가지 중에서 어느 것을 먼저 버려야 합니까?” “식량을 버려야지. 예부터 사람은 누구나 죽지만, 백성의 믿음이 없다면 나라는 존립할 수 없다(無信不立).”? (1207)

자공이 다른 사람들에 대해 논평하였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사(자공)는 참으로 똑똑하구나. (그러나) 나는 그럴 겨를(시간)이 없다.”? (1429)

◎ 돈 버는 게 나쁜 것인가요?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부유하고 귀해지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지만 정당한 방법으로 얻는 것이 아니라면 받아들이지 않아야 하며, 가난하고 천해지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이지만 정당한 방법으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면 그걸 피하지 않아야 한다. 군자가 인을 버리면 어찌 군자라고 할 수 있겠느냐? 군자는 밥 먹을 동안에도 인에서 어긋남이 없어야 하는 것이니, 갑자기 황급한 일을 당했을 때에도 이같이 해야 하며 넘어지는 순간에도 이같이 해야 한다.”? (0405)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독실하게 믿고 배우기를 좋아하고, 죽어도 도를 지키고 보전해야 한다. (그러나) 위태로운 나라에는 들어가지 말고, 어지러운 나라에서는 살지 않는다. 천하에 올바른 도가 행해지면 나와 일하고, 도가 행해지지 않으면 숨는다. 나라에 올바른 도가 행해지는데도 가난하고 미천한 것은 치욕이요, 나라에 올바른 도가 행해지지 않는데도 부유하거나 귀한 것도 치욕이다.”? (0813)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부가 추구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라면 비록 채찍 잡는 사람이라도 해 보겠지만,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차라리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겠다.” (0712)

◎ 진짜 공부란? / 위기지학과 위인지학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옛날의 학인은 (진정한) 자기를 위해 공부했는데 지금의 학인은 남을 위해 공부한다.”? 子曰, “古之學者爲己, 今之學者爲人.”? (1424)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군자는 자기에게서 구하고 소인은 남에게서 구한다.”? (1521)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예들아, 집에서는 부모님께 효도하고 밖에서는 누구에게나 공손해야 한다. 삼가는 마음으로 뱉은 말은 지키고, 편 가르지 말고 사랑하여라. 또한 어진 사람과 가까이 지내도록 하여라. 이렇게 행하고도 혹여 남는 힘이 있다면(行有餘力), 비로소 (그때) 공부하여라.”? (0106)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배우고 때때로 (또는 때맞춰)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않겠는가? 벗이 먼 곳에서 찾아온다면 즐겁지 않겠는가?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성내지 않는다면 또한 군자답지 않겠는가?? (0101)

 

4. 중유(仲由) 자로(子路) / -9

질문 : “선생님, 저는 탄이 아빠나 영도 아빠, 그리고 라헬이 엄마나 효신이 엄마가 아이들에게 무조건 자기 말에 따르라고 윽박지르는 모습에 화가 좀 났습니다. 자기들은 부모이고 어른이니 무조건 옳다고 믿나 봅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아이들의 태도입니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절대로 안 된다.’는 부모님께 곱디고운 모래 한 줌, 눈가에 뿌려볼 용기가 왜 없을까요?”

사마천 『사기』

자로는 성질이 거칠고 용맹을 좋아하며 심지(心志)가 강직했다. 수탉의 꼬리로 관을 만들어 쓰고 수퇘지의 가죽으로 주머니를 만들어 허리에 찼다. 공자의 제자가 되기 전, 한때는 공자를 업신여기며 폭행하려 했다. 그러나 공자가 예로써 대하며 조금씩 바른 길로 인도해주자, 뒤에 유복(儒服)을 입고 폐백을 드리고서 문인들을 통해서 제자가 되기를 청했다.

공자가 위나라에서 난리가 일어났다는 이야기를 듣고, “아아, 유(由)가 죽겠구나!”라고 탄식했는데, 이윽고 과연 그가 죽었다. 공자는 그가 죽은 뒤 “내가 유를 얻은 뒤로부터는 다른 사람들의 험담이 나의 귀에 들리지 않았는데······”라고 탄식했다.

[인물 엿보기]

자로는 (가르침을) 듣고 그것을 충분히 실행치 못했으면 더 듣기를 두려워했다.? (0514)

공자께서 남자(南子)를 만났다. 자로가 기뻐하지 않았다. 공자께서 맹세하며 말씀하셨다. “내가 옳지 않다면 하늘이 나를 버릴 것이다. 하늘이 나를 버릴 것이다.”? (0628)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한두 마디의 말(片言)로 재판의 판결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유(자로)일 게야.” 자로는 승낙하는 일을 지체한 적이 없었다.? (1212)

◎ 지나친 용기는 위험하다.

공자께서 안연에게 말씀하셨다. “(세상이) 써 주면 나아가 행동하고, 버리면 재주를 감추고 들어앉을 수 있는 자는 오직 나와 너만이겠지.” 자로가 여쭈었다. “선생님께서 삼군을 통솔하신다면 누구와 함께 하시겠습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맨주먹으로 범을 잡고 맨몸으로 강물을 건너다가 죽어도 후회가 없는 사람과는 함께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반드시 큰 일을 당하여 두려워할 줄 알고 미리 계획을 세우기를 좋아하여 일을 성사시킬 수 있는 사람과 함께할 것이다.”? (0711)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주장한) 도가 행해지지 않는구나. 뗏목을 타고 바닷가를 떠다니고자 한다. (그때) 나를 따를 사람은 아마 유(자로)일 게야.” 자로가 (이 말을) 듣고 기뻐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유는 용기 좋아하는 것이 나보다 낫다. 다만 사리에 맞게 헤아릴 줄을 모른다.”? (0507)

자로가 여쭈었다. “군자는 용기를 숭상합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군자는 의로움을 으뜸으로 삼는다. 군자가 용기만 있고 의로움이 없으면 난을 일으키고, 소인이 용기만 있고 의로움이 없으면 도적질을 하게 된다.”? (1723)

◎ 변화무쌍한 군자가 되거라.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군자는 그릇과 같은 존재가 아니다,(君子不器)”? (0212)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군자는 천하의 일에 대해서 꼭 그래야 한다는 것도 없고 절대로 안 된다는 것도 없다. 단지 의로움만(義)을 좇을 뿐.”? (0410)

공자께서는 네 가지 잘못이 없으셨다. 미리 억측하지 않았고(毋意), 반드시 그래야 한다는 생각이 없었으며(毋必), 고집이 없었고(毋固), 내가 꼭 옳다고 생각하지 않으셨다(毋我).? (0904)

 

5. 공자가 들려주는 세상사는 법 3가지

◎ 단 하나의 규칙 – 서(恕)

자공이 여쭈었다. “한 마디 말 가운데 평생 동안 실천의 지침으로 삼을 만한 것이 있습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아마도 서(恕)라는 말일 것이다. 내가 하고자 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 베풀지 않는 것이다.”? 子貢問曰, “有一言而可以終身行之者乎?” 子曰, “其恕乎! 己所不欲, 勿施於人.”? (1524)

◎ 일단 시도하라. 포기는 그 이후에 생각하라.

염구가 말하였다. “제가 선생님의 사상을 좋아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힘이 모자라서 (못하겠습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힘이 모자라는 사람은 중도에 그만두게 마련이지만 지금 너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으면서) 자기 한계선을 긋고 있구나.”? ?求曰, “非不說子之道, 力不足也.” 子曰, “力不足者, 中道而廢. 今女畵.”? (0612)

◎ 더불어 사는 세상임을 잊지 말아라.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세 사람이 함께 길을 가면 반드시 그 가운데 나의 스승이 될 만한 이가 있다. 그중에 선한 사람을 택해 따르고, 선하지 못한 사람을 보면 (스스로 반성해) 고쳐야 한다.”? 子曰, “三人行, 必有我師焉, 擇其善者而從之, 其不善者而改之.”? (0722)

사마우가 근시하면서 말하였다. “남들은 모두 형제가 있는데 나만 홀로 없구나.” 자하가 말하였다. “나는 ‘생사와 부귀는 천명에 달려 있다.’고 들었다. (한 사람의) 군자로서 진지하게 행동하여 잘못이 없고, 공손하게 남을 대하여 예의가 있으면 사해의 동포가 모두 형제가 될 것이니 군자가 어찌 형제 없음을 근심하겠는가?”? 司馬牛憂曰, “人皆有兄弟, 我獨亡.” 子夏曰, “商聞之矣, 死生有命, 富貴在天. 君子敬而無失, 與人恭而有禮, 四海之內, 皆兄弟也, 君子何患乎無兄弟也?”? (1205)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덕은 외롭지 않다. 반드시 이웃이 있다.”? 子曰, “德不孤, 必有隣.”? (0425)

 

나가며…

안연과 계로(자로)가 (공자를) 모시고 있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너희는 각자의 뜻한 바를 말해 보거라!” 자로가 말하였다. “수레와 말과 가벼운 갖옷을 벗들과 함께 쓰다가 낡더라도 조금도 개의치 않기를 원합니다.” 안연이 말하였다. “저는 (자신의) 장점을 자랑하지 않고 (자신의) 공로를 드러내지 않고자 합니다.” 자로가 여쭈었다. “선생님의 뜻을 듣고 싶습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노인에게는 편안하게 해 드리고, 벗에게는 믿음을 주고, 젊은이는 품어주고 싶다.”? 顔淵季路侍. 子曰, “?各言爾志?” 子路曰, “願車馬衣輕?, 與朋友共, ?之而無憾.” 顔淵曰, “願無伐善, 無施勞.” 子路曰, “願聞子之志.” 子曰, “老者安之, 朋友信之, 少者懷之.”? (0526)

 

 

‘철학자의 서재 라이브’를 시작합니다[ⓔ시대와철학 알림]

“철학자의 서재 라이브”를 기획하며

 

 

4기 연구협력위원회 학술 1부에서 연락드립니다. 금번 2014년 2학기부터 월례발표회를 “철학자의 서재 라이브”라는 이름으로 운영해 보고자 합니다. 이제까지 월례발표회는 전문적인 논문 발표 형식을 취해 왔는데요, 그 덕분에 오랜 기간 동안 한철연 회원 간의 깊이 있는 학술 교류를 해 올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한철연이 여타 전공 학회와 성격이 다르다는 점을 고려해서 새로운 월례발표회 형식을 고려해 보면 어떨까 하는데 고민이 모아졌습니다. 한철연은 단일한 분야의 전공자들이 모인 여느 학회와 다르게 여러 분야의 전공자들이 함께 모여 있는 모임이다 보니, 전문적인 논문 발표 형식을 갖는 기존 월례발표회가 회원들 간의 학술 교류를 활발하게 하기에 제한이 있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금번 2학기에는 독서토론 모임의 형식을 취하는 월례발표회를 해 보면 어떨까 합니다. 방식은 추후에 진행하면서 더 고민해 봐야겠지만 우선은 하나의 책을 정하고, 그에 대한 발제자를 정해서 독서 토론을 진행했으면 합니다. 모임의 이름은 “철학자의 서재 라이브”로 정해 보았습니다. 앞으로 회원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과 참여 부탁드립니다. 마지막으로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좋은 아이디어를 내 주신 연구위 부장님들께 감사드립니다.

<8월 철학자의 서재 라이브>

발표자 : 조은평(건국대 외래교수)
철학자의 서재 : 랑시에르, 『무지한 스승』
일 시 : 2014년 8월 20일(수) 오후 3시 ~ 5시 30분
장 소 : 태복빌딩 302호 한철연 강의실

무지한스승

 

 

 

 

 
<무지한 스승>(자크 랑시에르 지음, 궁리 펴냄)

[프레시안]에 게재되었던 발표자의 서평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65218

8월 이후 일정
* 9월 19일(금) 김우철 선생님,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
*10월 24일(금) 진은영 선생님, 8월 진은영 신간 『문학의 아토포스』
*11월 21일(금) 강경표 선생님, 장하석의 『온도계의 철학』
*12월 한철연 정기 학술대회 관계로 월례발표회는 다음 달로 순연

● 2학기 “철학자의 서재 라이브” 시작 시간은 저녁 7시 30분입니다. 그리고 이후에 다루었으면 하는 책이나 주제가 있으시면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yhseo2001@hanmail.net

학술 1부 드림

 

놀이의 해방적 본질: 나는 왜 밤새 놀아도 또 놀고 싶은가? <광진정보도서관 아주 사소한 물음에서 시작하는 철학> 4

놀이의 해방적 본질:?나는 왜 밤새 놀아도 또 놀고 싶은가??<광진정보도서관 아주 사소한 물음에서 시작하는 철학> 4

 

강경표(중앙대)

 

1.?피로사회?-?우리에겐 박카스뿐인가?

나도 별반 다르지 않은 일상을 보낸다.?일을 마치고 집에 오면 밥을 먹고,소파에 눕는다.?마누라 눈치가 없을라치면 발도 안닦는다.?리모컨을 찾아 뉴스를 틀고 뒹굴뒹굴하다 잠이 들 때도 많다.?총각 때는 술자리도 많았지만 이제는 그마저도 드물다.?아니 사실 두렵다.?속된 말로,?체력이 달린다.

“철학은 사소한 물음으로부터 시작된다”는 말을 대학 첫 강의 때 들었다.?그리고 지금은 그 말을 학생들에게 되풀이하고 있다.?과연 그럴까??반문해 본다.?미안하다!?학생들에게 거짓말을 했다.?철학은 사소한 물음으로부터 시작할 수는 있다.?그러나 시작뿐이다.?사유의 치열함 속으로 한 걸음 내딛는 그 순간부터 철학자의 치밀한 사유를 따라가는 과정이 나도 버겁다.?그래서일까? “피곤하다”는 말을 할 때가 많다.?특히 마누라한테.

값이 싸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다른 사무실을 방문할 때 피로회복제를 사가는 경우가 많다.?그 피로회복제에는?“당신이 말하지 않아도 나는 당신의 피로를 알고 있다”는 묵시론이 깔려 있다.?무엇 때문에 당신이 피곤한지는 모른다.?중요한 것은 구체적 사실이 아니라 구조에 있다.?한병철은『피로사회』에서 그것을?“성과주체가 스스로를 착취하는 일상 속에서 살고 있기”때문이라고 분석한 바 있다. “괜찮아~?잘 될거야~”라는 노랫말처럼?‘긍정성의 과잉’?이 강요되고 강도 높은 자기 관리를 요구하는 세상에서 사노라면,?만성적으로 피곤한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호모 라보란스(Homo Laborans)가 인간의 본질이라 믿으며 살아간다.?게으름에는 비난의 눈초리를 보내고,?성실함은 당연시 한다.?당신의 성실함에 박카스를 권한다.?당신의 성실함에 보내는 작은 찬사다.?그러나 디오니소스(Dionysos)1)는 도취와 광기,?그리고 술이다.?회식 자리가 광란으로 치닫는 이유이기도 하다. ‘불금(불타는 금요일)’이 필요한 이유다.?밤새 놀아도 더 놀고 싶다.?놀이(play)가 인간만의 본질이기 때문일까??아니다!?놀이가 삶에서 철저하게 분리되었기 때문이다.

5-1-1

 

2.?놀이를 잊은,?그래서 동물만도 못한 삶

시간을 돌려보자.?당신이 성실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재미가 있어서 성실하게 보이던 시절이 있었다.?바로 어린시절-노는게 생활이었던 때였다.?노동과 구별할 필요도 없었다.?놀이가 곧 노동이고 놀다보니 피곤해서 잠이 들었다.?다음날도,?그 다음날도 놀면 됐다.?그것으로 족했다.?사실 당신은 놀이(play)로부터 성실함을 배우고 끈기도 길렀다.?그러나 이젠 어른이다.?놀면 안 된다.?놀면 백수고,?낙오자,?루저일 뿐이다.?간혹 놀기만 해도 되는 사람이 있긴 하다.?돈이 많은 경우에는 놀아도 된다.?그러니 대부분의 어른들은 놀 수가 없다.

놀이를 인간만의 본질로 규정한 사람들도 있다.?바로 호모루덴스(Homo Ludens)다.?그러나 우리 주변에 호모루덴스는 없는 것처럼 보인다.?사실 놀이가 인간만의 본질이라는 것도 틀린 것이다.?동물도 놀기 때문이다.?동물의 놀이와 인간의 놀이가 차이가 있다면,?동물은 커서도 잘 놀지만 인간은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인간이 놀 수 있는 것은 어릴 때로 한정된다. 그마저도 어른보다 더 바쁜 요즘 아이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것 같긴 하지만 말이다.

노는 것을 잊는 것이 어른이 되는 길이다.?놀이를 망각하라!?당신이 꿈꿔야 하는 것은 집,?자동차,?재테크뿐이다.?길어진 수명에 대비해야 하며,?노동하는 육체를 위해 건강을 챙겨야 한다.?당신이 정규직이라면 정년을 향해 달리면 되고,?비정규직이라면 정년을 찾아 달려가면 된다.?그렇게?65세까지는 놀지 말고 살아야 한다.?그러나 이런 삶의 지속은,?놀아야 할 때 놀이를 망각했기 때문에 순간순간 당혹스러운 문제로 다가온다.?당신은 아이처럼 노는 법을 잊어버렸기 때문에 아이와 놀아줄 수 없다.?나이가 들어 노동시장에서 쫓겨났음에도 불구하고 노동시장을 그리워할 수밖에 없다.?노동시장의 구조를 바꾸면 어떨까??놀면서 일할 수 있는 회사가 있다면,?우리도 노는 법을 잊지 않을 수 있을까??최소한 노동이 즐거워지지 않을까?

 

3.?노동?Vs?노동

고전에서 노동과 관련한 글귀를 찾아보자.?일반적으로 노동은 기피의 대상이지만 기원전?7세기 헤시오도스에게는 그렇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일하지 않으면서 사는 사람은 일벌이 모은 꿀을 먹기만 하며 그 수고를 착취하는 꼬리 뭉툭한 게으른 수벌과 기질이 같다.?이런 사람은 신도 인간도 인정하지 않는다.?사람은 자신에게 주어진 노동을 적당한 순서에 따라 받아들여 제철에 나는 곡식으로 곳간을 가득 채워야 한다.?사람은 노동을 통해 번식하고 부유해진다.?신들이 보기에도 일하는 사람이 더욱 사랑스럽다.?노동은 비난의 대상이 아니지만,?노동하지 않는 것은 비난의 대상이다.?일하는 사람은 부를 차지해서 일하기 싫어하는 사람들의 부러움을 살 것이다.

-헤시오도스『노동과 나날』中-

누군가 나에게 무슨 일을 하냐고 묻는다면 나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만약 내가 철학하는(philosophieren)?일을 한다고 말한다면 사람들은 비웃을 것이다.?내가 생각해도 우습다.?전문적으로 생각만 하는 사람이라는 것이 가당키나 한 말인가??그런데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도 있다.

다른 질문을 해보자.?구걸은 노동일까??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니라고 할 것이다.?그러나 조지 오웰은 생각이 달랐다.

거지는 노동을 하지 않는다고 말한다.?하지만 대체 노동이 뭘까??인부는 곡괭이를 휘두르며 일한다.?거지는 화창한 날씨에나,?궂은 날씨에나,?하지정맥이 툭툭 불거져 나와도,?만성 기관지염에 시달려도 문밖에서 일한다.?구걸도 다른 활동과 마찬가지로 노동이다.?물론 무익하기는 하지만 그럴싸한 노동 중에도 무익한 활동은 많다.?……?현실적으로 보면 거지는 수중에 들어오는 것으로 생계를 유지하기 때문에 여느 사업가와 다르지 않다.?거지는 대부분의 현대인에 못지않게 자신의 명예를 지킨다.?단지 부자가 될 수 없는 노동을 선택하는 실수를 저질렀을 뿐이다.

-조지 오웰『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中-

철학하는 것도 노동이다.?누군가는?‘잡다한 생각을 하는 것이 무슨 일인가 놀이지’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사실 철학자들이 치밀하게 생각을 탐구하는 것은 꽤나 머리 아픈 일이면서도 부자가 될 수 없는 노동 중 하나일 뿐이다.

 

4.?놀면서 일할 수 있는 회사 그러나 사실은 놀이 착취

놀면서 일하는 회사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대부분의 노동자들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모델의 회사들이 있다.?미국의 구글이 그렇고,?한국에도 제니퍼소프트가 그렇다.?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회사를 부러워한다.?최소한 노동시간만이라도?35시간으로 줄어든다면,?야근만 없다면,?주말 근무만 없다면,?우리는 더 놀 수 있지 않을까?

부러움을 뒤로 하고,?잠시 고민을 해보자.?대량생산체제에서 우리는 항상 노동 착취를 당해왔다.?지금은 금융자본과 함께 신용을 착취당하고 있다. 당신은 신용을 담보로 학자금 융자를 받았고,?전세자금 융자를 받았다.?그리고 당신은 그 신용을 지키기 위해 다시 당신의 노동을 팔고 있다.?놀면서 일하는 회사도 별반 다르지 않지 않을까??구글과 같은 회사는 새로운 착취의 유형을 보여줄 뿐이다.?놀면서 일한다는 회사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무한한 상상력과 창의력이다.

칸트는?“놀이가 상상력의 바탕”이라고 말한바 있다.?놀이는 상상력에 있어 필수적인 요소다.?당신에게서 무한한 상상력과 창의성을 원하기에 놀이(play)를 권할 뿐이다.?지금은 구글과 같은 회사가 적기 때문에 놀면서 일하는 것이 부러워 보일 수 있다.?놀이와 일을 병행 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꿈의 직장이라고 불릴 수 있다.?그러나 많은 회사가 구글과 같은 형태가 된다면 놀이 착취도 본격화될 것이다.

 

5.?놀이의 해방적 본질 그리고?『에코토피아 뉴스』

놀이란 무엇인가??놀이에 대한 다양한 연구들이 존재하고 놀이를 정의하려는 일련의 시도들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그러나 놀이를 연구하고 정의한다고 해서 놀이를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놀이는 현상으로 나타날 뿐이다.또한 감정으로 느낄 수 있을 뿐이다.?우리가 놀이를 통해 얻는 것은 즐거움이며,?때로는 그 즐거움에서 해방감을 느낀다.?나는 놀이의 본질은 놀이의 무목적성에 있다고 생각한다.?놀이에는 목적이 없다.?단지 즐거우면 된다.목적이 없다는 것은 무언가를 추구하기 위해 합리적·?논리적으로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놀이는 촘촘하게 짜인 이성의 그물을 벗어나게 해준다.?그 그물에서 벗어날 때 우리의 상상력과 창의력도 반짝하고 빛나는 게 아닐까?

문제는 놀이를 우리의 삶으로 어떻게 다시 끌어들일 수 있는가에 있다.?우리가 놀이를 삶에 두는 방식은 취미생활이다.?이런 방식의 놀이가?‘불금’을 즐기는 것보다 좀 더 건전해 보일 수는 있다.?그러나 이것도 결국 노동을 위한 활력을 재생산하는 도구에 불과하다.?나도 이 굴레를 벗어나지는 못했다.?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일과 놀이와 삶이 하나가 되는 시대를 살 수 있을까??희망을 품으면서도 아직은 절망적이다.『에코토피아 뉴스』의 글귀로 이 감정을 대신한다.

“아니 그렇게 되지는 않을 겁니다.?당신은 우리와 함께일 수 없습니다.?당신은 전적으로 과거의 불행한 시대에 속하므로 우리의 행복조차 당신을 지치게 만들 겁니다.?다시 돌아가세요.”

-윌리엄 모리스『에코토피아 뉴스』中-

 

-주석-

1) ?디오니소스를 로마 신화에서는 바카스라고 한다.

 

헤겔미학: 예술을 알지니 예술이 너희를 자유케 할 것 같으냐? <도봉도서관 나이듦의 철학> 5

헤겔미학:?예술을 알지니 예술이 너희를 자유케 할 것 같으냐? <도봉도서관 나이듦의 철학> 5

이관형(한국예술종합학교)

 

 

근대(modern)?혹은 근대성(modernity)에 대한 비판은 사상의 영역에서는 주로 동일성을 향한다.?이때 집중포화를 받은 것은 헤겔이다.?이 강의는“1)동일성이 무엇이며 동일성이 왜 문제가 되는가? 2)동일성에 기초한 철학이라고 비판 받는 헤겔의 예술관의 특징은 무엇인가?”를 주마간산(走馬看山)?격으로나마 살펴보고자 한다.?이를 살펴봄으로써 철학이 아니라 예술을 통해(개념적 파악이 아니라 미감을 통해)?동일성이 과연 극복 가능한지를,?숨이 막히도록 촘촘히 짜인 근대적 삶의 굴레에서 과연 벗어날 수 있는지를?(답을 내린다기 보다는 오히려)?되묻고자 한다.

DSC09010-2

 

1.헤겔 미학은 그의 철학체계에 대한 이해를 전제한다.?그런데 그의 철학체계를 이해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그의 체계를 흔히?‘동일성’의 체계라고 한다.?그러므로?‘동일성’이 무슨 말인지라도 알아봄으로써 그의 체계에 대한 이해를 갈음하고자 한다.?지나치게 피상적·도식적인 이야기가 되겠으나 체계에 대한 이해가 전제되지 않은 헤겔미학은?‘앙금없는 찐빵’, ‘소없는 만두’일 것이다.1)

1)?파르메니데스의 동일성 논리?-?존재의 옹호와?(개념을 통한)?존재 분할의 반대

-존재의 희미한 빛:?존재의 원초성을 옹호

“있는 것은 있는 것이고 없는 것은 없는 것이다.”

-존재의 찬란한 빛:?존재의 종국적 완성인 동일성,?평등성,?충만성의 옹호

“존재는 쪼갤 수 없다.?왜냐하면 모든 것이 같기 때문이다.?그리고 존재의 응집을 막을 수 있도록 여기 또는 저기에 보다 강한 존재가 있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또 덜 강한 것이 있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그것은 오히려 존재자에 의해 충만되어 있다.”

-“그것들(인간의 잘못된 견해들)에 따라 두 형식들을 명명한다.?이것들 중에 하나는 있으면 안 되는데 이 점에서 그것들은 오류에 빠지고 있다.?그리하여 그것들은 형태를 대립시키고 특징들을 서로서로 분리시킨다.”(파르메니데스 단편)

2)?플라톤의 동일성 논리?-?파르메니데스적 존재의 이데올로기화

플라톤은 파르메니데스 이후 자연철학의 전개-생성(헤라클레이토스),?양(피타고라스),?질(엠페도클레스),?원자들의 양적 결합(데모크리토스)-를 통해 그리고 마침내 아낙사고라스에 의한 존재의 운동에 대한 분리적 파악(운동주체nous와 운동내용)에 이르러 이러한 분리된 자연을 토대로 하여 자신의 철학을 전개한다.

파르메니데스의 존재(의 원초성)는 이데아가 된다.?즉 진,?선,?미 자체라는 이데아로 규정된다.?현실은 이데아의 모사이기 때문에 진선미의 원형과 같기도 하고(同)?다르기도(異)?하다.

인간은 현실 속에서 이데아와 같은 측면은 긍정·강화하고 다른 측면은 부정·억제하여 원형인 이데아로 부단히 다가갈 수 있다.?이 변증법적 운동을 이끄는 힘은 이데아가 지닌 에로스적 견인력이다.?에로스의 운동과정은 감성적 경험에서 출발하여 감성을 넘어서는 데에 있다.?이러한 운동이 일어나는 곳은 사회(polis)이며 사회는 통치자,?군인,?생산계급이 피라미드 구조로 조직된 노동 분업의 체제이다.?이에 대해 하이데거는?“파르메니데스에 의해 열림을 시작한 존재가 플라톤에 의해 망각되기 시작했다”고 비판한다.

3)헤겔의 동일성 논리?-?시민사회의 이데올로기?

독일관념론(Der deutsche Idealismus)은 이상주의로도 옮기지만 이데아주의로도 옮길 수 있다.?철학은 플라톤에 대한 주석의 역사라는 화이트헤드의 말이 생각난다.?헤겔은 훨씬 풍부하고 탁월한 안목을 가지고 자신의 철학체계를 완성시켰지만 그 골격은 플라톤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DSC09008-1헤겔의 논리학의 내용을 순서대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유와 무는 파르메니데스의 존재론을,?질은 엠페도클레스의 질개념을,?무한성은 아낙시만드로스의 개념을,?대자존재(F?rsichsein)는 아낙사고라스의 주관성개념을,?양은 피타고라스의 수와 데모크리토스의 양적 원자론을 다루고 있다?···여기까지가 존재론이다.?본질과 현상,?동일성과 비동일성의 카테고리는 플라톤의 철학을 서술한다.?이에 이르러 존재는 본질과 가상 사이의 반사관계로 발전한다.?이데아의 세계는 본질적 세계이며 현상의 세계는 이데아를 반사 또는 반성할 뿐이다.?이러한 논리의 전개는 이념(Idee)의 차원으로 고양된다.?헤겔은 이념이 생명,?인식(진과 선),?절대이념으로 나누어 전개한다고 본다. ···?생명의 이념은?···?인식의 이념으로 이행에 그 의미가 있다. ···?절대이념은 진과 선의 통일이며 생명은 절대이념에 이르기 위한 단계와?···?절대이념의 운동을 위한 장···이다.?헤겔의 절대이념은 주관성인 의지(선)와 객관성인 대상(진)?사이가 막힘없이 소통되는?···체계인 것이다.”2)

 

2.헤겔 미학의 특징3)

헤겔의 철학체계를 크게 논리학,?자연철학,?정신철학으로 구분할 수 있다.예술을 다루는 곳은 정신철학의 맨 뒷부분 절대정신에서이다.?즉 자연과 정신의 발전도정을 거치는 이념의 자기전개가 가장 최고점에 이르러서다.?플라톤 식으로라면 진선미의 이데아에 도달하는 것이다.?예술은 종교,?철학과 더불어 절대정신의 영역에 속한다.

1)예술은 이념의 감각적 현현(Scheinen)이다.

헤겔의 철학은 자유의 이념의 전개과정에 대한 서술이다.?그러므로 예술,종교,?철학은 자유의 이념이 실현되는 지점이다.?그렇지만 이 삼자 간에도 위계는 있다.?삼자 각각에 해당하는 정신능력은 직관,?표상,?사유이다.?예술은 직관을 통해 이루어지며 감각과 대상에 여전히 의존적이다.?그러므로 삼자 중 가장 하위의 것이다.?표상은 직관보다 우월한 것이지만 직관의 내면화일 뿐이다.?표상은 감각적·대상적 직관을 내면으로 옮겨 놓은 것일 뿐 표상의 내용에는 여전히 감각적인 상이 자리한다.?종교는 성경에 기록된 여러 사건들에 대한 표상을 믿는 데서 성립한다.?그러므로 아직 순수하게 정신적인 것은 아니다.?철학은 사유를 통해 절대자를 개념적으로 파악한다.철학에 이르러서야 신은 그것이 외적인 것(직관)이든 내적인 것(표상)이든 어떠한 감각성·대상성에 의존하지 않고 정신의 순수하고 내면적인 활동(사유)을 통해 파악된다.

2)미학은 예술철학이다.?즉 예술미만을 그 대상으로 한다.?헤겔은 자연미에 대한 예술미의 우위를 주장한다.?예술은 이념의 감각적 현현이므로 중요한 것은 그것이 정신적인 것이라는 점이며 정신적인 것이 자연 산물보다 아름답기 때문이라고 한다.

“예술미가 자연미보다?한층?고차적이라는 점만은 이미 주장할 수 있다.?왜냐하면 예술미는?정신으로부터 태어나고 또 거듭 태어난?미이며,?정신과 그 산물들은 그만큼 더 자연과 그 현상들보다 고차적이며,?또 그만큼 더 예술미가 자연미보다 우월하기 때문이다.?실로?형식적으로?보면,?인간 머리를 스치는 어떠한 저급한 착상이라도 그 어떤 자연 산물보다?우월하다.”4)

3)내용미학이다.?이념의 내용이 감각적 소재를 통해 실현되는 것이 예술이다.?그러므로 예술이 드러내고자 하는 아름다움(예술미)의 이념은 다른 말로 이념의 감각적 상,?즉 이상(das Ideal)이다.?각 시대별로 나타난 예술미의 이념,?즉 이상에 대한 개념적 파악이 미학 혹은 예술철학이다.

예술의 형식은 그 내용(즉 이념)에 따라 각 시대적으로 상이하게 규정된다.다른 한편 예술은 이념의 감각화이므로 감각화하는 질료(소재)의 차이에 따라서 각각의 장르를 형성한다.

4)예술형식론과 장르론

상징적 예술형식-이상의 추구,?정신이 자연에 못 미침.

고전적 예술형식-이상의 성취,?정신과 자연의 조화.

낭만적 예술형식-이상의 초월,?정신의 자유는 자연의 제한을 초월함.

①상징적 예술형식

예술형식의 역사는 상징,?고전,?낭만의 삼 단계로 발전해왔다.?상징적 예술형식의 시대는 이상을?‘추구’한다.?신적인 것(절대자)은 아직 분명하게 규정되지 못한다.?이념은 개별 예술작품 속으로 들어서지 못하고 있다.?신적인 것의?“구상화에 대한 한갓된 찾아 헤맴”?내지?“그것을 이루려는 분투와 애씀”만이 있을 뿐이다.?절대자는 개별성의 구체적인 형태 대신에,?정신의 제대로 된 표현이 될 수 없는 어떤 이질적인 자연대상으로 치환될 수 있을 뿐이다.?상장이란 본질적으로 이러한 부정합성을 통해 특징지어진다.?상징을 통해 표현된 것은 낯선 것,?이질적인 것에 머문다.?따라서 이 단계에서 지배적인 미적 범주는 미가 아니라 숭고이다.?왜냐하면 신적인 것을 질적으로 형상화할 수 없는 무능력은 양적인 극단으로,?즉 과도함으로 치닫기 때문이다.?상징적 예술형식의 전형적인 장르는 건축이다.?즉 상징적 예술은 신들을 위한 장소만을 제공할 뿐,?그 신들을 구체적인 형태로 구현하지 못한다.

②고전적 예술형식

상징적 예술형식은 내용에 적합한 형상화를 이룰 수 없는 무능력의 산물이다.?이에 반해 고전적 예술형식에서 이런 무능력은 극복된다.?아름다운 것 혹은 미적 이상은 비로소?‘성취’된다.?표현되어야 할 대상과 표현된 것이 완전하게 일치함으로써 고전적 예술형식은 미의 이상 내지 예술의 이상의 진정한 실현을 이룩한다.?따라서 이 단계는 예술의 정점,?미의 정점이다.?형태는 더 이상 낯선 것,?이질적인 것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방식으로 자기화된다.?절대자는 더 이상 생소한 자연적 형태를 통해서가 아니라 인간 신체의 형태를 통해 개별성으로 표현된다.?왜냐하면 그리스인들은 신들을‘절반의 인간’으로 여겼기 때문이다.?신들을 신체를 통해 표현하는 것은 따라서 가능한 최고의,?이념의 감각각 현현이며,?그러한 한에서 예술은 그리스인들에게 있어서 종교를 위한 어떤 부가물이 아니라 그 자체로 이미 종교이다.?이러한 그리스인들의 종교적 의식에 가장 잘 부합하는 예술 장르는 조각이다.?조각에서는 정신적인 것과 육체적인 것이 완전하게 조화를 이루기 때문이다.?이제 신적인 것은 건축에서와는 달리 그것이 거처하는 공간을 얻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그리스 신상들 속에서 자신을 위한 구체적인 형태를 얻는다.

③낭만적 예술형식

정신의 발전은 고전적 예술형식에서 성취한 미와 예술의 조화와 완성을 넘어서?‘초월’한다.?즉 낭만적 예술형식에서 예술은 완성이 아니라 해체된다.외견상 이러한 해체는 이미 상징적 예술형식에서 볼 수 있었던 내용과 형식의 대립 및 차이로 되돌아 가는 것이DSC09009-1다.?그렇지만 이러한 새로운 부조화는 예술 이전 단계로의 퇴행이 아니라 예술 일반의 한계를 돌파하는 것 내지 넘어서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상징적 예술형식에서와 마찬가지로 이념과 형상의 불일치와 분리,?부조화가 일어나지만 양자 간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상징에서는 이념의 결핍이 형상화의 결함을 수반하는 데 비하여 낭만적인 것에서 이념은 정신과 심정으로서 그 스스로 안에서 완성된 것으로 나타나야 하며 이와 같은 더 고차적인 완성에기반하여 이념은 자기의 진정한 실재성과 현상을 오로지 자기 자신 속에서 찾고 또 완성시킬 수 있음으로써 외적인 것과의 통일에서 벗어난다.?장르적으로 낭만적 예술형식은 삼차원적 자연성의 최초의 지양인 회화로 시작하여 시간성 안에서의 순수 내면의 울림인 음들의 질서인 음악을 거쳐,?정신적인 것을 말을 통하여 표상하게 하는 시문학(poesie)에 이르러 종국에는 해체되기에 이른다.

 

3.예술의 종언?

미의 추구인 예술은 이미 고전적 예술형식의 단계로서 종언을 고한다.?그렇다면 숭고로서의 예술은 어떻게 되는가??숭고로써 드러내고자 하는 절대자 역시 앞서 살펴본 대로 예술이 아니라 철학을 통해 더 잘 파악할 수 있다.?그렇지만 절대자에 대한 반성을 촉구하는 것으로서 예술은 사라지지도 사라질 수도 없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8:32)

“우리는 더 이상 예술작품을 신적으로 경배하지는 않는다.?여전히 고대희랍의 신상들을 탁월하다고 생각하고 하나님과 예수 그리고 마리아가 아무리 존귀하고 완벽하게 예술적으로 묘사되어 있다하더라도 별반 달라지는 것은 없다.?이제 우리는 그러한 예술작품 앞에 더 이상 무릎을 꿇지 않는다.”(헤겔)

“예술은 절대이념의 영역,?즉 자유의 영역이다.?그러나 그 자유는 철학적 사유의 그것에 필적할 수는 없다.”

 

1) ?동일성에 대한 논의는?“이준모,『밀알의 노동과 공진화의 교육』,?한국신학연구소(1994)”에 의한다.

2) ?이준모, 33쪽

3) ?권대중,?헤겔의 미학, (안에)?미학대계 제1권,?서울대출판부.?주로 이 글을 요약함.

4) ?Hegel,?『Vorlesungen ?ber die ?sthetik?Ⅰ』, in Werke in zwanzig B?nden 13, S.14,?이창환 역(미출간)

 

행복에 이르는 길-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론

행복에 이르는 길-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론

김성우(兀人고전학당 연구소장, ⓔ시대와 철학 편집위원장)

도봉도서관 인문독서아카데미 2014년 6월 27일 금요일

덕 윤리란 무엇인가?

‘세월호 참사’ 와중에서도 칭찬과 명예를 듣는 분들이 있습니다. 반면에 비난과 불명예로 시달리는 자들도 있습니다. 20대의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승객들을 끝까지 구하고 자신을 희생한 여승무원이나 여선생님의 용기와 희생은 사람들의 귀감이 됩니다. 반면에 칠순을 바라보는 연륜에도 승객과 배를 버리고 도망간 선장이나 희생자 명단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은 고위 공직자, 피해자인 어린 학생의 마음에 상처를 주더라도 조난 구조에 방해가 되더라도 취재경쟁에 열을 올리는 기자들이 비판의 도마 위에 올랐습니다.

세월호

이처럼 관련자들의 용기와 비겁, 칭찬과 비난, 명예와 불명예, 한마디로 미덕과 악덕이 화제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됨, 성품이 문제의 중심이 되고 있습니다. 또한 문창극 국무총리 후보자의 역사관이나 애국심 논란도 이러한 미덕과 악덕의 범주에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악덕과 미덕의 논란은 개인의 물질적 행복을 추구하는 현대적인 가치관이 아니라 전통적인 가치관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우리의 전통에 유교가 있다면 서양의 전통에 덕 윤리가 있습니다. 이러한 덕 윤리를 대표하는 고전이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입니다. 이 책은 기독교 이전에 서양 시민의 윤리관을 대표하고 있습니다. 그 요지는 신이 없어도 엄격한 도덕법칙이나 이기심에 호소하지 않고도 인간이라면 누구나 지닌 지성(정신)과 좋은 습관을 바탕으로 윤리적인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강연에서 추천하고 싶은 책은 우선 고전 그리스어를 우리말로 훌륭하게 번역한 <니코마코스 윤리학>(이창우·김재홍·강상진 옮김, 이제이북스, 2006)입니다. 그 시대적 배경과 철학적 분위기를 알고 싶다면 <지중해 철학 기행>(클라우스 헬트, 이강서 옮김, 효형출판, 2007)을 추천합니다.

어떻게 살 것인가(소크라테스)

 

서양 고대의 그리스 문화에서 윤리학의 중심 주제는 행동이 아니라 사람됨이며 더 나아가 삶 자체입니다. 다시 말하면 칸트처럼 도덕률에 합치하는 올바른 행동이나 벤덤처럼 쾌락의 양을 늘리는 행동이 아니라 ‘좋은 삶’이 주제입니다. 인간이 산다는 것은 단순히 생존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좋은 것을 추구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아버지가 마케도니아 궁전의 시의였던 아리스토텔레스는 의학과 생물학에 밝았습니다. 동식물에 정통했던 그는 동물적인 생명(zoe)과 인간다운 삶(bios)을 구분했습니다. 그에 따르면 “산다는 것은 심지어 식물에게까지 공통되는 것으로 보이지만, 우리는 (인간에게만) 고유한 것을 찾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므로 영양을 섭취하고 성장하는 삶은 갈라내야 할 것이다. 다음으로는 감각을 동반하는 삶이 뒤따를 것이지만 이것 또한 분명 말과 소, 모든 동물들에 공통되는 삶이다.” 그러면 남는 것은 무엇인가요? “이성(logos)을 가진 자의 실천적 삶”입니다.

60100605144621

<지중해 철학 기행>(클라우스 헬트, 이강서 옮김, 효형출판, 2007)

이러한 인간다운 삶과 관련해서 클라우스 헬트는 <지중해 철학 기행>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이 비오스, 즉 삶의 영위는 일정한 습관에 토대를 둔다. 이 습관은 우리에게 본성으로 부여된 것일 수도 있지만 획득될 수도 있다. 특정한 습관을 갖는 것이 과연 좋으냐를 두고 인간은 다른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고 근거를 댈 수 있다. 이처럼 대화를 나누고 근거를 대는 능력을 그리스어로 ‘로고스’라고 한다. 인간은 로고스를 지닌 동물, 로고스를 지닌 생명체이다. 이것이 바로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한 고전적인 인간의 정의로서, 2000년이 넘도록 끊임없이 인용되고 있다.”

좋은 삶은 좋은 것을 겨냥합니다. 그런데 가장 좋은 것(최고선)을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eudaimonia)이라고 부릅니다. 이와는 반대의 의견도 있습니다. 칸트의 도덕철학을 현대 민주적 절차주의로 발전시킨 존 롤스는 그의 유명한 저서인 <정의론>에서 행복보다는 정의가 더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진리가 사상 체계의 제일 덕목인 것처럼 정의는 사회 제도의 제일 덕목이다. 이론이 아무리 효율적이고 질서정연한 것일지라도 그것이 정의롭지 못하면 개혁되거나 폐지되어야 한다. 각 사람정교하고 간명하다 할지라도 그것이 진리가 아니라면 기각되거나 교정되어야 하듯이, 법이나 제도가 아무리 은 사회 전체의 행복이라도 능가할 수 없는, 정의에 기초를 둔 침해불가능성을 갖는다.”

통상적으로 행복은 개인적이라면 정의는 사회적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아리스토텔레스는 개인주의적 행복을 이야기한 것에 그치고 만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의 윤리학은 정치학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그가 말하는 행복은 폴리스(그리스 도시국가)의 구성원으로서의 시민의 행복에 해당합니다. “그것은 으뜸가는 학문, 가장 총 기획적인 학문에 속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정치학이 바로 그러한 학문인 것 같다. 왜냐하면 폴리스 안에 어떤 학문들이 있어야만 하는지, 또 각각의 시민들이 어떤 종류의 학문을 얼마나 배워야 하는지를 정치학이 규정하기 때문이다.”, “또 정치학은 나머지 실천적인 학문들을 이용하면서, 더 나아가 무엇을 행해야만 하고 무엇을 삼가야만 하는지를 입법하기에 그것의 목적은 다른 학문들의 목적을 포함할 것이며, 따라서 정치학은 목적은 ‘인간적인 좋음’일 것이다. 왜냐하면 설령 그 좋음이 한 개인과 한 폴리스에 대해서 동일한 것이라 할지라도, 폴리스의 좋음이 취하고 보존하는 데 있어서 더 크고 더 완전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 좋음을 취하고 보존하는 일이 단 한 사람의 개인에게 있어서도 만족스러운 일이라면, 한 종족과 폴리스에 있어서는 더 고귀하고 한층 더 신적인 일이니까. 따라서 우리의 탐구는 일종의 정치학적인 것으로서 이런 것을 추구하는 것이다.”

이 길게 인용된 글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러한 자신의 탐구를 윤리학(?thik?)이라고 부릅니다. 에티케는 성품과 습관을 의미하는 에토스(ethos)라는 말에서 온 것입니다. 즉, 좋은 성품의 사람이 되려면 좋은 행동을 하도록 습관이 길러져야 한다는 뜻이지요. 그렇지만 그의 윤리학은 개인의 행복에 그치지 않습니다. 좋은 사람이 되고 좋은 삶을 산다는 것은 혼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적인 국가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에 따르면 어린 시절부터 미덕(탁월함, aret?)을 향한 올바른 지도를 받으려면 올바른 법률에 의해 길러지지 않고서는 어려운 일입니다. 성인이 된 후에도 계속에서 올바른 일을 하고 좋은 습관을 들이는 데에 강제적인 규제가 필요합니다. 다시 말해서 이렇게 좋은 사람이 되고 좋은 삶을 사는 데는 국가에 의한 강제적인 법률이 있어야 합니다. 그에 따르면 “다중은 말에 따르기보다 강제에 따르고, 고귀한 것에 설복되기보다 벌에 설복되기 때문이다.” 폴리스의 입법자들은 시민들의 교육과 종사할 일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각자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아갈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공동의 보살핌이 폴리스가 제정한 법률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이를 고려하면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치학의 목적을 ‘인간적인 좋음’(agathon)이라고 한 이유가 명백해집니다. 그래서 그에게 인간은 정치적(사회적, politikon) 동물인 것입니다. 이런 까닭에 그에게 좋은 삶은 국가 안에서의 시민적인 삶이지 국가에서 벗어난 개인의 삶이 아닙니다. 따라서 그가 말하는 좋은 사람은 시민의 의무를 다하는 덕을 갖춘 사람이지 자신만의 안녕과 평온을 추구하는 무책임한 개인이 아닙니다. 여기서 우리는 현대 철학자 중에서 개인주의적인 자유주의 윤리학과 정치철학을 비판하면서 등장한 공동체주의 철학자들이 아리스토텔레스의 덕 윤리를 바탕으로 하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공동체주의를 대표하는 철학자로는 <덕의 상실>의 저자인 알래스데어 매킨타이어와 <다문화주의>를 주창한 찰스 테일러, 그리고 <정의란 무엇인가>로 우리에게 너무나 유명해진 마이클 샌델이 있습니다. 요즘 우리 사회의 논란이 되고 있는 문제들을 고려하면 마이클 샌델이 왜 시민의 미덕을 강조했는지가 분명해집니다. (승객을 버리고 도망간 선장과 무책임한 고위공무원들은 시민의 미덕, 특히 사회적 리더로서의 의무를 저버렸기에 그토록 지탄과 원망의 소리를 듣는 것입니다.)

이런 점들을 고려하면 정치적인 것을 가르친다고 선전하는 소피스트들은, 실은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정치적 행위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정치학은 수사학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와는 반대로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정치학은 목적은 지식(앎)이 아니라 행위입니다. 마찬가지로 윤리적인 덕도 지식이 아니라 활동(ergon)입니다. 이러한 주장을 통해 그는 자신의 스승인 플라톤 선생님과 스승의 스승인 소크라테스를 비판하고 있는 것입니다. 플라톤의 대화편인 <프로라고라스>에서 소크라테스는 덕은 앎(인식)이라고 규정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무엇이 최선인지를 아는 자가 가장 좋은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한 최선자가 통치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 리더를 플라톤은 철인왕(哲人王)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인간적인 좋음은 덕에 따른 영혼의 활동”입니다. 그 좋음이라는 것도 완전한 삶 안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런 그에게 아는 것보다 좋은 행동을 하고 좋은 사람이 되어 좋은 삶을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그는 지식 중심의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을 비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에게 “친구와 진리 둘 다 소중하지만, 진리를 더 존중하는 것이 경건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좋은 사람이 되고 행복한 사람이 되는 데는 지식보다는 좋은 습관이 요구됩니다. “한 마리의 제비가 봄을 만드는 것도 아니며 하루가 봄을 만드는 것도 아니니까. 그렇듯 하루나 짧은 시간이 지극히 복되고 행복한 사람을 만드는 것도 아니다.” 덕은 행위의 축적에 의해, 다시 말해서 습관에 의해 획득됩니다. “정의로운 일들을 행함으로써 우리는 정의로운 사람이 되며, 절제 있는 일들을 행함으로써 절제 있는 사람이 되고, 용감한 일들을 행함으로써 용감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만약 폴리스에서 입법자들이 시민들에게 좋은 습관을 들이게 하면 좋은 시민들이 육성될 것입니다. 이러한 폴리스는 ‘좋은 정치체제’(politeia)를 갖춘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에게 행복한 사람은 잘 행위하는 사람이고 잘 사는 사람이다. 행복은 덕에 따른 영혼의 활동입니다. 따라서 행복은 단순히 외적인 운명이나 우연에 의해 주어지지 않습니다. 이러한 요소들은 인간적 삶에 추가적으로 필요할 뿐이고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누구나 배움과 노력을 통해 인간적인 덕을 획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연이나 운명에 의해 주어지는 것과 달리 이러한 행복은 많은 사람들에게 공통적일 수 있습니다. 소나 말 등 동물을 행복하다고 말하지 않은 것이 당연합니다. 이런 점에서 아직 어린이도 행복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아직 그 나이에는 덕에 따른 행동을 ‘완전하게’(성숙하게) 실천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좋은 습관을 쌓지 못한다면 나이가 반드시 성숙을 보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더 처참하게 물욕만 남은 비겁한 늙은이로 전락할 수 있습니다. 혹시 운이 좋지 않더라도 활동이 결정적이라면 “지극히 복된 사람들 중에서 누구도 비참하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결코 가증스러운 일이나 비열한 행위들을 하지 않을 테니까. 또 우리는 진정으로 좋고 분별 있는 사람은 모둔 운들을 품위 있게 견뎌 낼 것이라고, 현존하는 것으로부터 언제나 가장 훌륭한 것들 행위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지혜는 연습과 훈련을 통해 습관을 들이고 경험을 쌓아야 얻을 수 있으므로, 경험이 부족한 청년이 아니라 성숙한 어른의 덕목입니다. 성숙한 어른은 경험 많은 의사처럼 최고의 규범이나 이론을 곧바로 현재 상태에 적용하지 않고, 복잡한 상황을 고려하여 여기에 알맞게 규범을 적용합니다. 레시피대로가 아니라 손맛으로 요리하는 숙련된 요리사처럼 지혜로운 사람은 그 상황에 어긋나는 극단적인 행동 방식을 억제하고 중용(中庸)의 태도를 취합니다. 다시 말해서 중용이란 과함이나 부족함의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가운데(mesotes)’입니다. 이 가운데를 수학적인 도식으로 계산해낼 수 있는 평균값이 아닙니다. 중용은 그 상황에 맞게 새롭게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용은 지혜로운 사람만이 할 수 있는 탁월함(미덕)입니다. 초보자와 달리 원숙한 지혜로운 어른이야말로 원칙과 상황의 절묘한 조화를 이루어냅니다. 이는 새로운 이상에 사로잡혀 조급한 마음으로 당장이라도 세상을 바꾸려고 하는 미숙한 청년의 태도는 아닙니다. 그렇지만 중용이 타락하면 이 말은 자기 세력을 강화하는 데 비범한 지적 능력을 발휘하는 노회한 정치가나 상황에 따라 이리저리 변신하는 영리한 기회주의자, 그리고 나서지 않고 엎드려 복종하는 비겁한 사람들의 처신을 치장하는 데 쓰일 뿐입니다.

행복한 삶이란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과 관련해서 세 가지 종류의 삶을 제시합니다. 감각적인 쾌락을 추구하는 삶, 정치적인 성취를 이루는 삶, 지성적인 관조(명상)를 하는 삶이 그것입니다. 감각적인 쾌락을 추구하는 삶은 짐승의 삶을 선택하는 것이며 완전히 노예와 다를 바 없는 삶입니다. 정치적인 명예나 덕을 추구하는 삶 역시 불완전할 뿐입니다. 명예는 다른 사람들의 평판에 의존할 뿐이며 덕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아무런 활동도 하지 못하고 큰 불행을 겪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본질적으로 정치권력과 이성은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이 외에도 그는 부를 추구하는 삶을 언급하다가 이를 재빨리 취소합니다. 그가 보기에 부를 추구하는 삶은 일종의 강제된 삶일 뿐이며, 부란 다른 것을 위해 수단일 뿐이니 진정으로 좋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관조적 삶이 가장 행복한 삶인 이유는 “무엇보다도 지성이 ‘인간’인 한에서, 인간에게 있어서도 지성을 따르는 삶이 가장 좋고 가장 즐거운 것이다. 그러므로 이 삶이 가장 행복한 삶”이기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지혜에 대한 사랑, 즉 철학(philosophia)하는 삶이 그런 삶에 해당합니다.

하지만 그의 덕 윤리에도 한계가 있습니다. 그의 시민에는 노예와 여자가 제외됩니다. 당연히 그리스어를 하지 못하는 야만인도 제외됩니다. 그의 시민이란 좋은 집안에 태어나, 잘 양육을 받고, 행운이 뒷받침되는 남성 어른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장유유서(長幼有序)를 강조하는 유교도 같은 문제점을 앉고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오늘날 공동체주의자들은 전통적 공동체주의에서 수직성과 배타성을 제거한 새로운 공동체 창출을 목표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벤저스》, 《저스티스 리그》, 《왓치맨》과 《불안한 현대 사회》: 현대의 불안, 약자의 연대? <벙커1> 1

《어벤저스》,?《저스티스 리그》,?《왓치맨》과?《불안한 현대 사회》:?현대의 불안,?약자의 연대??<벙커1> 1

유현상(숭실대 강사)

 

 

 

 

1. B급 문화로서의 슈퍼 히어로 영화

-?코믹스 혹은 만화는 판타지나?SF?장르와 더불어 전형적인?B급 문화에 속하는 영역

어벤져스-?한동안?B급 문화는 일부 매니아들의 문화로 여겨지기도 했으나 최근에는 대중들의 적극적인 관심을 받고 있음

– B급 문화의 부각은 대중들의 눈높이를 고려하면 자연스러운 현상

-?아이들이나 청소년만이 아니라 성인들이 즐기기 위한 판타지로도 적절

-?만화를 원작으로 한 슈퍼 히어로 영화들은?B급 문화의 복합적 요소 구비

– B급 문화의 한 장르로서 슈퍼 히어로 영화들은 대체로 선악의 구도가 단순

-?슈퍼 히어로들은 그들의 초능력과는 달리 정치적 이해관계에 무관심할 뿐 아니라 무능력하기까지 함

-?아동기적 상상은 한편 인간의 근원적 불안 의식을 원형적으로 보여 줌

-?슈퍼 히어로에 대한 상상은 불안 의식의 원형

-?슈퍼 히어로의 이중고는 현대인들이 처한 이중고와 다르지 않음

-?정체성에 대한 혼란으로부터 야기되는 내부의 적과 그들이 물리쳐야 할 거대 악(惡)

-?그들의 연대(solidarity)는 거대 악을 넘어서는 악,?혹은 거대 악들의 연합에 상응하는 전술

-?그들의 연대가 전략이 아니고 전술인 이유는 일시적인 연대이기 때문

-?슈퍼 히어로들의 캐릭터는 본질적으로 연대에 맞지 않음

-?이타적이고 공동선을 실현하기 위한 할약을 하지만 공동체 구성원으로서의 일상적 삶은 외면

-?슈퍼 히어로들의 고립된 일상은 현대인들의 삶의 방식을 연상하게 함

 

?2.?초능력 인간을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가?

-?슈퍼 히어로의 등장에 대한 근원적 관심은 최초의 표현 방식이 아니라 상상의 문제

-?인간의 능력과 힘으로 대응할 수 없는 삶의 문제에 대한 위기의식의 한 형태

-?자연 현상에 대한 신화적 설명과 유사성을 갖춤

-?플라톤의?『국가』에 등장하는 전설?‘기게스의 반지’와 우리나라의 전래 동화인?‘도깨비 감투’?이야기는 일종의 초능력을 얻게 되는 인간이 슈퍼 히어로가 아닌 인간의 욕망을 지적하는 내용

– <반지의 제왕>의 절대 반지 역시 이와 유사한 맥락을 상징

-?초능력은 그 자체로는 가치 중립적

-?초능력은 슈퍼 히어로들의 능력이자 슈퍼 악당들의 능력

-?슈퍼 히어로에 대한 요청은 거대 악,?즉 슈퍼 악당의 존재에 의해 설득력을 갖춤

-?인간의 무력과 한계 상황에 대한 원초적인 두려움은 맞서야 할 대상을 더욱 강력한 것으로 인지하게 함

-?슈퍼 히어로에 대한 요청은 상상 속에서 바로 그러한 불안을 극복하기 위한 일종의 판타지

-?슈퍼맨의 경우 자연마저도 변화시켜 인간을 구원

 

3.?슈퍼 히어로,?하지만 소외된 약자

-?슈퍼 히어로라는 존재는 거대 악이 사라지는 순간 불필요한 존재로 전락

-?슈퍼 히어로들을 끝까지 응원하는 것은 아이들과 직접적인 도움을 받은 여성

-?대개의 영화에서 슈퍼 히어로의 진정한 적은 정치권력

-?근원적으로 영화 속 슈퍼 히어로들 역시 소외로부터 자유롭지 않음

-?현대의 소외된 현실은 모든 이들의 삶에서 근원적인 문제

-?슈퍼 히어로들에게 초능력은 동경의 대상이자 소외의 원인

-?소외는 환대받거나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승인을 받지 못하는 경우에 발생

-?역할의 상실,?존재감의 무시,?성과에 대한 불인정 등등은 모두 그 구체적인 형태

-?인간의 수단화를 보여 주는 가장 일반적인 형태

-?소외 문제를 가장 본격적으로 제기한 것은 독일 철학자 칼 마르크스

-?하지만 그 이전에 역시 독일의 철학자 칸트는?“인간을 오직 목적으로만 대하고 수단으로 대하지 말라”라는 언명을 함

-?칸트의 언명은 직접적으로 소외를 경계하는 것은 아니지만 인간을 도구적으로 대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선구적으로 주장

-?슈퍼 히어로들은 현대인들이 처한 불안을 더욱 분명하게 보여 줌

-?슈퍼 히어로들의 소외는 그들이 평범한 인간들과 함께 할 수 없다는 것

 

4. 현대 사회의 상황

-?캐나다의 철학자이자?『불안한 현대 사회(2001)』(The Ethics of Authenticity, 2000)의 저자인 찰스 테일러는 현대의 상황에 대해?‘불안’이라는 말로 함축

-?테일러는 불안의 원인으로?‘개인주의’, ‘도구적 이성의 지배’, ‘개인의 자유와 자기결정권의 상실’?등을 제시

-?현대가 안고 있는 불안의 원인들은 인정을 방해하고 소외를 초래

-?인정의 문제는 근대 철학 이후에 등장한 중요한 주제 중 하나

-?타자가 나를 인정하는 것이 유의미하기 위해서는 그 타자가 나와 대등한 존재이상이어야 한다.?따라서 인정의 문제가 개개인의 생존과 구체적으로 결부된 역사적 조건은 근대 이후

 

5. 인정의 정치

-?테일러는?[자아의 원천들]에서 근대적 자아의 정체성이 지니는 특징적인 구성요소를 타인들의 복지를 고려하는 가치를 소중하게 여기는 것과 모든 사람이 권리를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간주

-?근대적 자아,?혹은 근대 이후 인류가 지니게 된 이러한 생각들은 개인주의적인 배경과 더불어 인정의 문제를 구체화시키는 배경

-?자본주의의 고도화가 이루어지고 시장의 지배가 강화될수록 인정의 문제는 더욱 절실한 문제

-?현대 사회가 다문화하고 다양성이 증가하고 있다는 점도 인정의 문제에 대한 적극적 접근을 요청

-?테일러는 인정(recognition)의 문제를 현대 정치의 핵심으로 보았다.

-?인정은 관계적 개념이라는 점에서 개인들 간의 문제이며 공동체와 개인의 문제다.

-?인정의 문제에 대해서 테일러가 핵심적인 것으로 보고 있는 것은 마땅한 인정이 생존에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테일러는 인정의 문제는 정체성의 문제와 결부되어 있으며,?현대에서의 정체성의 문제는 진정성의 개념과 더불어 고찰해야 한다고 보았다.

-?정체성이 인정의 문제와 연관되는 이유는 마땅한 인정에의 결여가 정체성의 왜곡에서 비롯되기 때문

-?정체성 왜곡의 형태는 인정에의 요구를 주장하는 다양한 현대 정치의 진영에서 제시

-?여성주의 입장에서는 가부장제 문화가 여성의 정체성을 왜곡하고,?흑인 인권운동을 주도하는 그룹에서는 백인 우월주의가 흑인의 정체성에 대한 왜곡된 이미지를 강요

-?정체성의 왜곡이 마땅한 인정의 결여를 초래

-?테일러는 마땅한 인정과 정체성의 요구는?‘평등한 품위의 정치’와?‘차이의 정치’에 의해서 발전되었다고 이해

-?평등한 품위의 정치는 차이의 정치에 대해 비차별의 원리를 위배한다고 비판하며,?차이의 정치는 평등한 품위의 정치가 사람들을 참되지 않은 동질성의 틀로 밀어 넣어 정체성을 부정

-?평등한 품위의 정치를 보여주는 절차적인 자유주의는 개인적인 목적과 소수의 집단적인 목적 사이에서 중립적일 수 없다는 것이 테일러의 생각

-?다민족 사회에서 상이한 문화에 대해서 테일러는 상이한 문화들을 살려 두는 것만이 아니라 그 가치를 승인해야 한다고 주장

-?승인의 방식이나 태도가 결코 시혜적이거나 평등한 존경의 관점은 배척

-?테일러는 다른 문화에 대한 가치 평가 혹은 마땅한 인정을 위해서는 지평 융해의 접근을 역설

-?다른 문화에 대한 섣부른 존경이나 호의적인 태도 역시 오만한 태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그러한 태도는 또한 이미 그러한 호의적인 평가를 할 기준을 가지고 있다고 전제하는 것이며 이러한 입장에서의 평가는 다분히 균질화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이러한 위험을 피하기 위해 테일러는 가다머의 지평 융해의 방법을 끌어들이는 것이다.

-?테일러의 표현대로?‘세계적인 차원과 뒤섞인 각각의 개인주의적인 사회에서 모두 함께 살아가야 한다’?고 한다면 우리는 다른 문화에 대해서 좀더 개방적인 입장에서 연구를 착수해야만 할 것이다.

-?테일러는 헤르더의 말을 빌어 다양한 문화는 우연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더 위대한 조화를 이루기 위한 수단이라는 점에 동의

-?테일러가 말하는?‘인정의 정치’는 크게 다양한 개인의 정체성과 인정에 관한 문제와 다양한 문화의 정체성과 인정의 문제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다.?개인의 경우에 정체성과 인정의 문제가 자기 표현을 바탕으로 한 대화적인 진정성이 핵심이라면,?문화의 경우에는 지평 융해를 통한 비교문화 연구가 핵심

 

6.슈퍼 히어로의 연대와 약자들의 연대

-?모든 형태의 연대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연대가 결코 쉽지 않다는 것

희망 버스-?초기 자본주의 시대의 노동자 연대는 단순한 일차적 연대

-?현대 사회에서는 연대의 주체들이 처한 상황과 문제의식이 모두 차이를 보일 수 있다.?적대적이거나 우호적인 관계의 양상도 빠르게 변화한다.?하지만 다르기 때문에 연대의 현실적 요청은 더욱 증가

-?슈퍼 히어로들의 연대는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현실의 연대는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테일러는 진정한 연대는 자발성의 기초 위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파악

-자발성을 보장하기 위한 기초는 개인들이 자기 결정의 자유를 행사할 수 있어야 함

-개인적인 자기실현만을 도모하려는 삶의 태도에서는 진정성이 출현할 수 없고 진정성이 없는 개인은 자기 결정의 자유를 행사하지 못함

-연대는 물질적 삶의 조건 만이 아니라 모든 정치적 문화적 정체성에 대한 인정의 획득을 필요로 하는 사람 혹은 공동체가 취할 수 있는 인정 투쟁의 효과적인 전략

-연대란 서로 다른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이 동일한 정치적인 삶의 이슈에 대해서 공동의 행동을 결의하는 것이다.?여기서의 결의는 각오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천을 약속하는 정치적 판단의 공표

-?여성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진정한 연대성은 삶의 고통에 대한 일정한 거리두기를 가능하게 하여 객관적 해결책을 가능하게 한다고 보았다.

-“ ‘연대감’에 대한 인식은,?다양하게 규범화된 역할들을 통해 우리가 서로에게 관련되는 방식을 넘어서 우리는 다양한 측면을 지녔지만 함께 결합되고 근본적으로 평등한 인간 존재로 이루어진 공동체라는,?우리 모두가 공유하는 직관이다.?약자의 권력에 합법성을 부여하고,?뒤바뀜과 위반의 순간에 돌발적으로 형성되는 것은 이와 같은 근원적 공동체이다.”(찰스 테일러)

 

 

 

나비의 삶인지 나의 삶인지? : 『장자』에서 보는 인간의 삶 <도봉도서관 나이듦의 철학> 4

나비의 삶인지 나의 삶인지? :?『장자』에서 보는 인간의 삶 <도봉도서관 나이듦의 철학> 4

전호근(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우언의 철학자,?장자

 

 

왜 우언인가?

[장자]는 전편의 대부분이 우언으로 채워져 있기 때문에 우언의 맥락을 이해하지 못하면 장자를 이해하기 어렵습니다.?그렇다면 장자는 왜 이런 식의 우언 형식을 택했는가??우언은 이렇게 해석될 수도 있고,?저렇게 해석될 수도 있기 때문에 정치적 박해로부터 비교적 안전하기 때문입니다.?장자 텍스트의 행간에는 물음표가 많이 있습니다.?장자가 던지는 질문이 도처에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피(彼)와 시(是)를 주제로 한 이야기에서 장자는?‘저것’과?‘이것’이 각자의 관점에 따라 바뀐다고 지적합니다.?이것의 입장에서는 이것이 이것이고 저것이 저것이지만,?저것의 입장에서는 이것이 저것이 되고 저것이 이것이 된다는 거죠.?그리곤 다시 이것과 저것을 말하고 있는?‘나’에 대해 질문을 던집니다.?여기서 나는 피(彼)인가,?시(是)인가??이처럼 세상에서 원칙이라고 받아들이는 것들에 대해 근본적으로 회의할 뿐만 아니라 그런 회의를 하고 있는 자신마저도 의심하는 치열한 사유를 보여줍니다.

제물론의 유명한 호접몽 이야기도 그래서 가능한 것입니다.?장자가 꿈에 나비가 되어 가볍게 날아다녔는데 그렇게 날아다니는 나비가 워낙 꼭 맞아서 전혀 장자인줄 몰랐다지요.?그리고는 나비와 장주는 반드시 구분이 있을 터인데,?장자가 나비의 꿈을 꾼 것인지 아니면 나비가 장자의 꿈을 꾸는 것인지 모르겠다고 이야기합니다.?이처럼 꿈을 통해서 현실까지 의심하는 방식은 장자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서사구조입니다.?심지어 꿈 속의 꿈 이야기를 하지요.?한자?‘覺’은 잠에서 깬다는 뜻으로 읽을 때는?‘교’로 발음하고 깨달음을 얻는다는 뜻으로 읽을 때는 것은?‘각’으로 발음하는데요,?장자는 잠에서 깨는?‘교’를 통해서 잠에서 깬 사람이 꿈을 비로소 허상인 줄 알게 되는 것처럼,?깨우침 곧?‘각’을 통해서 우리가 의심의 여지없이 현실이라고 여기는 삶도 사실은 허상일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합니다.?우리가 사는 세상을 꿈이라고 말하는 것은 세상이 추구하는 올바른 것이 사실 거짓일 수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그렇지만 장자는 이조차도?‘거짓일까?’하고 빠져나감으로써 끝까지 우리에게 생각거리를 던져줍니다.

 

DSC09185-1

 

너 어느 편이야?

장자가 문헌이나 학자들에 따라 송나라 사람이나 위나라사람,?또는 초나라이라고 기록이나 주장이 엇갈리는 것은 장자가 활동한?‘몽(蒙)’이라는 지역이 이들 세 나라가 번갈아 가며 점령한 지역이기 때문입니다.?그런 특수한 조건은 해당 지역에 사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때그때 정치적 판단을 내릴 수밖에 없는 상황을 조성하게 됩니다.?초나라가 다스리는 상황에서?‘초나라 고홈’이라고 외치면 생존하기 어렵겠지요??그렇다고 무작정?‘초나라 만세!’를 외치면 위나라가 점령할 때 어떻게 살겠어요.?생각이 많아질 수밖에요.?초나라가 들어와서 초나라가 좋으냐고 물어보면 좋다고 할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이처럼 여러 나라가 번갈아 지배하다 보니 한 나라를 꼬집어 좋다고 말할 수 없고 그저?‘좋은가?’하고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죠.

사실 이런 경험은 우리에게는 그다지 생소한 것이 아닙니다.?많은 분들이 이 나라의 불행한 현대사에서 장자와 같은 경험을 해 봤을 겁니다.?예를 들어 이청준 작가의 단편작품 중에서 점령군이 어둠 속에서 주민에게 총을 들이대며 어느 편이냐고 묻는 장면이 나옵니다.?상대방이 어둠 속에 있기 때문에 국군인지,?인민군인지 알 수 없는 절박한 상황에서 목숨이 걸린 대답을 해야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여러분이라면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칸트의 정언명령처럼 거짓말은 하면 안 되니까 사실대로 대답하시겠습니까??아니면 그냥 총든 편이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사실 요즘도 달라진 건 없습니다.?다만 요즘은 총 들고 묻는 게 아니라 돈 들고?“너 어느 편이냐고”묻지요.?그러면 많은 사람들이?‘돈든 편’이라고 대답하지요.?총보다 돈이 더 무서운 시대에 살아남기 위해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요?

이런 고민이 장자가 우언을 창작하게 된 배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장자가 살았던 시대는 시공간적으로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명확하게 드러낼 수 없을 뿐 더러 때로는 말을 바꾸기도 해야 살아남는 세상이었던 겁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자는 자신이 하고 싶었던 말을 해야만 했습니다.?바로 이런 이유로 고도의?‘문학적 장치’가 필요하게 됩니다.?그러므로?[장자]는 글쓴이의 정치적 입장에 따라 얼마든지 새롭게 해석할 수 있는?‘열려 있는 텍스트’로 보고 그 맥락을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지식인의 운명

이처럼 장자의 우언은 지극히?‘정치적’인 이유로 탄생한 것입니다.?그러므로 단순히 재미를 위한 문학적 장치로서의 우스갯소리가 아니라 생존을 건 정치적 고민이 담겨 있는 이야기로 받아들여야 합니다.?참 어렵지요.?예부터 자신이 쓴 글 때문에 죽은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습니다.?이른바?‘문자옥’이라고 하죠.?공자나 맹자처럼 하고 싶은 말 다하면서 천하를 돌아다니는 것은 지식인의 입장에서 보면 정말 대단한 것입니다.?당시 권력자들은 사람을 너무나 쉽게 죽였거든요.?예를 들어 진나라 헌공은 음식에 독이 들었는지 확인하기 위해 음식을 개에게 먹인 후 개가 죽자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았던 모양입니다.?그 음식을 기어이 사람에게도 먹어보게 한 후 사람이 죽자 비로소 독이 들었다는 것을 인정했다는 얘기가 있습니다.?후대의 현군으로 알려진 당나라 태종도 아끼던 신하이자 당시의 문장가였던 장온고를 순간의 오해로 하루아침에 죽이고 말지요.?물론 그 뒤에 크게 후회하고서는 사형을 청할 때에는 반드시 세 번 주청하도록 한 이른바?‘삼복주제도’를 만들었다는 얘기가 전해오지요.

재주가 있는 사람이라고 해서 반드시 살아남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명망이 있는 사람의 경우는 오히려 늘 시대의 시험을 받아야 했습니다.?후한말기의 채옹은 동탁의 부름을 받고 몸이 더럽혀 지는 것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그의 사람이 됩니다.?그런 시대에 태어나지 않으면 좋겠지만 그런 시대에 살게 되면 어떻게 할 것인지 스스로에게 늘 질문을 하게 됩니다.?나는 과연 보편적 가치관을 지키면서 시대의 시험을 견뎌낼 수 있는가하는 물음을 갖게 되지요.?일제강점기 이 나라의 지식인들 중에서는 어쩔 수 없이 친일행위를 했다고 한 사람들이 많지요.?그런 지식인은 아주 작은 지식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시대적 상황에 대한 변명을 이해한다손 쳐도 그렇게 변절하면서 살아남든가,?아니면 죽든가 둘 중 하나밖에 선택할 수 없는 것입니다.?그것은 선택입니다.?물론 그 시대에 독립운동 자금도 조금씩 대주고,일본에 비행기도 만들어 바치고 하면서 살아남은 사람도 있지요.?지금에 와서 그러한 친일행적을 처벌하느냐 마느냐의 문제 이전에 그런 사실은 반드시 기록으로 남겨야지요.

장자는 자신의 이야기를 그런 시대적 배경 하에서?‘우언’의 방식으로 남겼습니다.?그런데 말씀드린 것처럼 우언은 이렇게 이해할 수도 있고 저렇게 이해할 수도 있기 때문에 장자의 의도가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 알기 어렵습니다.?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장자는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는 경우가 많습니다.한 마디만 하고 끝내면 알 수 없는데 같은 이야기를 두 번,?세 번 반복해서 다루고 있기 때문에 우언의 방식을 취했더라도 자세히 읽으면 장자의 의도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장자]의 제1편 첫 장에 등장하는 우언은 물고기가 새가 되는 이야기입니다.?첫편의 제목은?‘소요유(逍遙遊)’인데?‘유(游)’는?‘논다’는 뜻입니다.?온 천하가 전쟁에 미쳐 날 뛰는 시대에 어떻게 노는 가치를 이야기할 수 있었을까요??놀 뿐만 아니라 낮잠 자는 이야기를 합니다.?장자는 소요유편에서?‘소요’를?‘침와(寢臥)’?즉, ‘낮잠 잔다’는 말과 짝을 이루어 쓰고 있거든요.?결국 장자는 첫 편부터 낮잠 자면서 노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노는 것’이 어떤 가치를 지니고 있는지 이해하려면 먼저 우리가 갖고 있는 기존의 가치 기준을 바꿔야만 가능해집니다.?만약 맹자라면 백성이 도탄에 빠져 있는데 무슨 노는 얘기인가하고 비판했을 것입니다.?맹자는 절대로 노는 이야기는 하지 않을 사람이거든요.?소요유편에 나오는 첫 번째 이야기는 대붕(大鵬)의 이야기입니다.?이 이야기는 장자에 세 번 등장합니다.?그러므로 대붕의 이야기를 세 번에 걸쳐 읽다 보면 장자의 생각을 함께 즐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림자의 그림자가 그림자에게 묻다

 

허망하고 또 허망한 존재 이야기

[장자]?제물론편 제5장의 주인공은 그림자입니다.?아니 그림자의 그림자입니다.?그림자는 영(景)이고 그림자의 그림자는 망량(罔兩)입니다.?망량의 경우는 비슷한 명칭인 이매망량(?魅??)이 춘추좌씨전에 나오는데 이매는 산귀신이고 망량은 물귀신으로 풀이됩니다.?장자의 망량은 발음만 같고 장자가 그림자의 우의를 담아서 만든 말입니다.?망량(罔兩)의 망(罔)은 허망하다는 뜻인 망(亡)의 가차입니다.?양(兩)은 둘이라는 뜻이죠.?그러니 망량은 망이우망(亡而又亡),?허망하고 또 허망한 존재입니다.?그림자는 실체의 입장에서 보면 허망한 존재입니다.?그런데 그 그림자에 붙어 있는 곁그림자는 더더욱 허망한 존재라는 것입니다.?마치 꿈속의 꿈처럼요.

곁그림자가 그림자에게 물었다.

“조금 전에는 그대가 걸어가다가 지금은 멈추고,?또 조금 전에는 앉아 있다가 지금은 일어서 있으니,?어찌 그다지도 일정한 지조가 없는가?”

그림자가 말했다.

“나 또한 무언가 의지하는 것이 있어 그리 된 것인가??내가 의지하고 있는 것은 또 다른 무언가에 의지하여 그리된 것인가??나는 뱀의 비늘이나 매미의 날개 같은 것에 의지하는가??어떻게 그런 줄 알겠으며,?어떻게 그렇지 않은 줄 알겠는가?”

[罔兩이?問景曰 ?에?子行하다가?今에?子止하며??에?子坐하다가?今에?子起하니?何其無特操與요?景曰 吾는?有待而然者邪아?吾所待는?又有待而然者邪아?吾는?待蛇??翼邪아?惡識所以然하며?惡識所以不然이리오]

장자는 즐겨 여러 동식물을 의인화하여 주인공으로 내세웁니다.?나무나 새종류가 자주 등장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사람의 신체 일부를 의인화하기도 하죠 소요유의?‘견오와 연숙’의 예도 그렇죠.?견오는 사람의 어깨를,?연숙은 도와 이어져 있는 사람을 뜻한다고 말씀드렸지요.?바로 앞서 읽었던?‘구작자와 장오자’의 예도 까치와 오동나무를 의인화한 것입니다.?여기서는 그림자를 의인화한 것입니다.?그림자는 실체가 아니라 실체의 허상입니다.?그런데 이 이야기에는 그림자가 실체로 등장합니다.?이 실체에는 그림자가 붙어 있습니다.?바로?‘그림자의 그림자’가 그림자에게?‘일정한 지조[특조(特操)]’가 없다고 따집니다.?특조(特操)의 조(操)는 조행(操行),?곧 행실을 일정하게 지키는 것입니다.?흔히 조심(操心)이라는 말을 쓰는데 요즘은 조심이라는 말이 그저 신중한 태도를 뜻하지만 본래 조심은 맹자에 나오는 존심(存心)과 같이 마음을 붙들어 둔다는 뜻으로 쓰입니다.?존심이나 조심의 결과가 조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일정한 마음의 결과 일정한 행실이 있게 되는 것이니까요.?곁그림자는 그림자에게?왜 이렇게 일정한 지조없이 가다가 말다가 앉았다 일어섰다 하냐고요.?결국 당신을 따라하려니 피곤하다는 것이죠.?그러자 그림자가 이렇게 대답합니다.?어디 난들 그러고 싶어서 그러겠는가.나 또한 내가 의지하고 있는 그 무엇이 움직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런다고 말이죠.?사실 그림자니까 당연히 실물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죠.?그래서 실물이 움직이면 그림자도 따라서 움직이는 것이 당연합니다.

장자가?‘그림자의 그림자’를 등장시킨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보통 그림자는 부수적인 것이고 실물은 알맹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림자의 그림자’,곧 곁그림자 입장에서 보면 그림자가 실체입니다.?곁그림자의 존재의 근거는 그림자라는 것이죠.?그런데 사실은 그림자는 실체가 아니라 실물의 허상에 지나지 않지요.?그렇다면 같은 논리로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실체라고 생각했던 그림자가 사실은 실물의 허상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우리가 실체라고 생각하는 실물,?곧 우리의 몸뚱이 또한 또 다른 실체의 허상이 아니겠느냐는 거지요.?우리가 생각하고 욕망하고 행동하는 기준이라고 할 수 있는 우리라는 주체가 사실은 허상에 지나지 않는 것일 수 있다는 것을 장자는 말하고 있는 겁니다.?제4장에서 장오자가 꿈에 술 마시고 즐겁게 놀던 자가 아침에 잠에서 깨면 슬피 운다는 이야기를 했죠.?그리고 그 꿈을 깨어나는 것이 생리적인 깨어남이라면 우리의 현실,?곧 인생이라는 것 자체가 꿈같은 허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대각’이라고 했습니다.?꿈 속의 꿈과 마찬 가지로 그림자의 그림자 또한 우리가 확실하다고 믿고 있는 우리의 존재를 뿌리째 흔들어 놓기 위한 장자의 설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장자는 궁극적으로 실체와 허상을 마주 세우기 위한 기획으로 우리가 실체라고 생각하는 실물조차 허상일 수도 있다는 것을 지적한 것입니다.

어떤 분은 여기서 빛이 등장하지 않는 이유를 따져 묻습니다.?하지만 그림자라고 하면 빛은 이미 전제되어 있는 것입니다.?빛이 없고 그림자가 없다면 우리는 빛을 인식할 수 없을 겁니다.?마찬 가지로 그림자만 있다면 그림자를 인식할 수 없는 것처럼요.?그리고 빛과 그림자의 관계를 따지는 과학적 사유는 이 대목을 이해하는데 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과학적으로 따지면 실물이나 그림자나 곁그림자나 모두 실체입니다.?모두 현상이니까요.그러니 과학적 사유는 잠시 내려놓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 이야기는 존재의 근거를 따져 묻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곁그림자→그림자→실물의 입장을 모두 성찰하는 내용입니다.?우리는 어떤 것을 존재의 근거라고 규정짓지만 그런 규정을 짓는 순간 그 존재의 근거라는 하는 존재의 근거를 또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존재의 근거,?존재의 근거의 근거,?존재의 근거의 근거의 근거,?이런 식으로요.?그런데 곁그림자는 허망하고 또 허망한 존재라서 망량,?곧 망이 두 번 겹치는 존재로 그려집니다.?망망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하지만 그보다 더 허망한 존재를 얼마든지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망망망,?망망망망,?이런 식으로요.?이런 식의 수많은 허망과 허망의 연속을 장자는 자생자화(自生自化)라고 하였습니다.?그런 자생자화의 또 다른 표현이 물화(物化)입니다.?장자의 다음 이야기는 스스로 체험한 물화의 경험담인 호접몽(胡蝶夢),?나비의 꿈입니다.

 

나비의 꿈

 

내가 나비의 꿈을 꾸는가,?나비가 내 꿈을 꾸는가

111제물론편 제6장의 주인공은 장자 자신입니다.?아니 나비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어떤 학자는 장자가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장주라는 이름까지 나오는 것으로 보아 이 대목은 장자의 작품이 아니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사실?[논어]가 공자의 저작이 아닌 것은?‘자왈(子曰)’이라는 표현에서부터 알 수 있습니다. ‘자왈’은 선생께서 말씀하셨다는 뜻인데 공자가 스스로 자기 자신을 그런 식으로 표현했을 리는 없으니까요.?그런데?[맹자]가 되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어떤 사람은 맹자가 스스로?‘맹선생’이라고 호칭했을 리 없으니?[맹자]는 맹자가 직접 지은 것이 아니라 맹자 사후에 제자들이 스승의 말을 기록한 것이라고요. [맹자]가 맹자의 자저가 아니라는 근거 중의 하나입니다.?하지만?[맹자]를 읽어보면?[맹자]는 아무래도 맹자가 직접 지은 부분이 더 많은 것 같습니다. [맹자]의 문장은 직접 기술하지 않으면 도저히 불가능하다 싶을 정도의 생생함이 있거든요.?아무튼 장자가 직접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대목이?[장자]에는 여러 차례 나오고 그 때문에[장자]?또한 장자의 자저가 아니라는 주장도 있습니다.?그러나 자연사물은 말할 것도 없이 인간 신체의 일부까지 의인화하여 즐겨 주인공으로 등장시키는 것이 장자입니다.?장자는 단순한 대화록이 아니라 문학 작품입니다.따라서 얼마든지 자신이 주인공으로 등장할 수 있습니다.?그렇다면 이 대목만 굳이 다른 이야기와 달리 볼 필요는 없겠지요.

사실 이런 식의 다양한 문학 장치가 등장하는 이유는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장자는 공자나 맹자와는 처지가 달랐기 때문입니다.?공맹처럼 하고 싶은 이야기 다 하면서 잡혀 가지 않으면 좋은데,?장자는 자칫 잡혀가기 쉬운 처지였기 때문에 보호 장치가 필요했던 것입다.?그 중의 하나가 꿈입니다.?자신의 삶을 안전하게 지키면서 의도를 전달할 수 있는 손쉬운 방법이지요.이후 남가일몽,?일장춘몽,?구운몽 등과 같이 꿈을 매개로 신분차별이나 남녀의 차별 등 여러 가지 사회적 억압을 넘어설 수 있는 해방구로 삼은 이야기들이 많이 창작되었습니다.?꿈이라는 장치를 자유로운 공간으로 삼은 것입니다.?그래서 호접몽은 꿈 이야기의 원조라 할 수 있습니다.

흔히 이 대목을 데카르트의 방법적 회의와 연관지어 풀이하는 경우가 있습니다만 데카르트의 경우는 애초에 회의가 목적이 아니라 회의를 어떻게 하면 끊어버릴까 하는 아주 불순한(?)?목적을 가지고 회의한 사이비 회의주의자입니다.?장자와는 다릅니다.?아니 반대편에 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또 주체를 강조했던 데카르트는 인간 이외의 동물은 기계와 같다고 보았습니다.?동물을 발로 차면 소리를 내며 우는 것은 종을 쳤을 때 소리가 나는 것과 같다고 생각했던 사람입니다.?장자와는 많이 다르지요.?일단 장자에게는 불순한 목적의 회의라든가 그런 게 없습니다.?동물을 기계로 보지도 않고요.둘을 비교하면 아마 서로 화를 낼 겁니다.?장자는 자신마저도 상대적인 세계에서는 나비와 같은 존재라고 보는 겁니다.?이야기의 말미에 등장하는?‘물화(物化)’는 장자의 세계관을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개념입니다.?물화란 내가 주체고 상대가 대상이라는 인식을 넘어선 결과입니다.?내가 온전히 상대와 같아진다는 것은 곧 나의 소멸을 의미합니다.?나를 버려서 상대를 이루는 것,?그것이 장자의 물화(物化)?개념에 가깝습니다. ‘물화(物化)’에서‘물(物)’자를 빼고?‘화(化)’자만 남기면 오히려 이해하기가 쉽습니다.?소요유 제1장에서?‘화(化)’는 살아 있는 존재가 사멸하고 완전히 새로운 존재가 되는 것이라고 풀이했던 것을 돌이켜보시기 바랍니다.

어젯밤 장주는 꿈에 나비가 되었다.?팔랑팔랑 가볍게 나비였는데 스스로 즐겁고 뜻에 꼭 맞았는지라 장주인 것을 알지 못했다.?이윽고 화들짝 깨어 보니 갑자기 장주였다.?알 수 없구나.?장주의 꿈에 나비가 된 것인가 나비의 꿈에 장주가 된 것인가.?장주와 나비는 분명한 구별이 있을 테지만 이처럼 장주가 나비가 되고 나비가 장주가 되는 것,?이것을 물화(物化)라고 한다.[昔者에?莊周夢爲胡蝶호니???然胡蝶也러니?自喩適志與라?不知周也호라?俄然覺하니?則??然周也러라?不知케라?周之夢에?爲胡蝶與아?胡蝶之夢에?爲周與아?周與胡蝶은?則必有分矣니?此之謂物化니라]

장자가 꿈을 꿉니다.?유명한 호접몽(胡蝶夢)입니다.?꿈에 나비가 되어 날아다닙니다.?사람이 날아다니는 상상을 하게 된다면 아무래도 떨어질까 두려워하지 않을까요??그런데?‘적지(適志)’라고 표현한 데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뜻에 꼭 맞아서 전혀 두려움이 느껴지지 않습니다.?자기가 장자라는 사실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나비가 된 것이죠.?사실?난다는 표현은 인간에게는 이룰 수 없는 꿈을 이루었다는 뜻으로 쓰이지요.?장자의 첫 이야기가 대붕의 플라잉 신으로 시작한다는 사실을 상기하시기 바랍니다.?그리고 이 대목은 바로 장자 자신의 플라잉 신입니다.?대붕은 구만 리의 하늘을 타고 납니다.?그리고 장자는?‘물화’,?곧 나비가 됨으로써 하늘을 납니다.?구만 리의 하늘이 필요하지 않습니다.?나비의 날개는 아주 가벼우니까요.

날 수 없는 인간에게 난다는 것은 자유의 획득을 뜻합니다.?빌리 엘리어트라는 소년이 춤추는 것을 보고 로열 발레단 심사위원이 묻죠. “너 춤 출 때 기분이 어떠니?”?하고요.?그러자 소년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하늘을 나는 것 같아요.”?영국 영화 빌리 엘리어트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난다는 것은 춤의 가장 높은 경지가 아닐까요??두 개의 다리와 두 개의 팔 그리고 하나의 몸뚱이라는 육체적 속박을 벗어나는 것이 춤의 궁극적 경지임을 암시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제물론의 마지막 이야기 나비꿈은 소요유와 마찬가지로 자유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바로 앞에서 장자는 그림자와 꿈 이야기를 통해서?‘곁그림자→그림자→실물’, ‘꿈속의 꿈→꿈→현실’의 대비를 통해서 모든 사물이 서로 종속적으로 연속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그리고 그런 종속의 맨 위에 있는 실물과 현실을 부정합니다.?겉으로 보기에 더 이상 종속이 아닌 것처럼 보이는 것들도 사실은 종속의 굴레에 얽매여 있다는 겁니다.?힘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힘이 약한 자가 자유롭지 못한 것은 당연한 일이지요.?그렇다고 힘이 센 자가 자유로우냐하면 그렇지 않습니다.?힘의 지배를 정당화하는 순간 더 큰 힘에 의한 지배를 부정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논리적으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죠.

이를 테면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 아테네는 섬나라 멜로스를 정복했죠.?침공하기 전에 만약 항복하지 않으면 여자와 어린 아이들까지 모두 죽이겠다고 최후통첩을 합니다.?하지만 멜로스의 지도자들은 항복하지 않고 저항합니다.?그 결과 멜로스는 아테네의 공격에 의해 멸망당합니다.?멜로스 사람들은 죽어가면서 너희는 너희가 우리를 대한 방식대로 또 다른 침략자에게 멸망당할 것이라고 외칩니다.?실제 그렇게 되었죠.?스파르타가 아테네를 멸망시켰으니까요.?적어도 멜로스 사람들은 아테네가 부당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하지만 아테네 사람들은 그런 말을 할 수 없습니다.?자기들이 멜로스를 대한 방식대로 멸망당했으니까요.?이처럼 강약의 논리를 따르면 강자 또한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죠.

그럼 어떻게 해야 자유로울 수 있을까요??장자는 자유란?‘상대를 대등한 존재로 받아들일 때’?가능하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나비의 꿈에서 장자는 앞의 두 경우와는 다른 플롯을 제시합니다.?서로 종속되는 것으로 그렸던 그림자와 꿈 이야기와는 달리 나비꿈에서는?‘장자의 꿈↔나비의 꿈’?이라는 식으로 둘을 마주 세우고 있습니다.?제물론에서 자주 등장하는?‘저것’과?‘이것’의 논리를 문학적 장치로 활용한 것입니다.?저게 허상이면 이것도 허상이고 상대가 부정되면 나도 부정된다는 말입니다.?이 대목에 등장하는 장주인 줄 몰랐다[不知周也]?든지 알 수 없다[不知]는 식의 말은 우리가 확신하는?‘주체’라는 것이 사실은 언제든지 부정될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표현입니다.?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장자는 주체고 나비는 대상입니다.?그런데 장자는 나비꿈으로 주체와 대상을 마주 세우더니 결국에는?“장주의 꿈에 나비가 된 것인가 나비의 꿈에 장주가 된 것인가.”라는 물음을 통해 주체와 대상의 역할을 전도시킴으로써 현실의 질서와 가치관의 전복을 시도한 것이지요.

이 대목을 감상할 때는?‘나’와?‘나비’를 짝으로 마주 세우는 장자의 방식과 함께 소요유와 제물론을 짝으로 놓고 읽어보는 것도 재미있습니다.?붕새의 어마어마한 비상과 나비의 가벼운 날갯짓을 함께 느끼는 것이지요.

번역을 살짝 바꿔서 읽어보겠습니다.?앞의 번역은 장자라는 인물을 삼인칭으로 놓고 번역한 것이고,?다음은 그것을 나라는 일인칭으로 바꿔서 번역한 것입니다.?나로 바꿔서 번역해야 주체와 대상의 관계를 마주 세우려는 장자의 의도가 더 잘 읽힙니다.

 

어젯밤 꿈에 나는 나비가 되었다.

팔랑팔랑 가볍게 잘도 날아다니는 나비였는데

나에게 꼭 맞았는지라 내가 나인 줄 전혀 몰랐다.

이윽고 깨어보니 틀림없는 나였다.

알 수 없구나.

내가 꿈에 나비가 된 것인가?

나비가 꿈에 내가 된 것인가?

 

끝.

삶의 고통에 대처하는 법: 에피쿠로스의『쾌락』<도봉도서관 나이듦의 철학> 3

삶의 고통에 대처하는 법:?에피쿠로스의『쾌락』<도봉도서관 나이듦의 철학> 3

한길석(한양대)

 

 

아래 글은 앙드레 보나르의?『그리스인 이야기』를 바탕으로 하여 구성한 것이다.?

 

편견과 오해

에피쿠로스(Epikouros,?기원전?341년~기원전?271년)는 종종 사람들에게 무분별한 쾌락에 빠지도록 유혹한 악마로 여겨진다.?이러한 생각에 의하면 그는 유물론을 가르치고,?신에 대한 믿음을 조롱했으며,?즐거움의 교리를 가르치는?‘돼지들의 학교’를 만들었다.?그러나 이것은 심각한 오해다.?그는 난봉꾼의 성자라기보다는 오히려 금욕적 삶을 추구한 인물에 가깝기 때문이다.?물론 그가 인간 삶에 있어서 쾌락을 추구한 것은 사실이다.?하지만 그가 말하는 쾌락이란 말초적 즐거움이라기보다는 거듭된 고통에 흔들리지 않고 굳건히 살아가며 얻게 되는 기품있는 쾌락이다.?그런 까닭에 루크레티우스(Titus Lucretius Carus,?기원전?99년~기원전?55년)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는 인간의 실존을 수많은 폭풍과 암흑에서 끌어내어,?이루 말할 수 없는 평온 속에,?이루 말할 수 없는 빛의 세계 속에 정착시켰다.”

DSC09113-1

 

고통의 시대

에피쿠로스가 쾌락주의자가 된 까닭은 그의 시대와 삶이 고통으로 가득했기 때문이다.?그가 생애 대부분을 보낸 아테나이는 그리스의 맹주에서 알렉산드로스 왕의 지배를 받는 속국으로 전락하고 말았다.?필립포스와 알렉산드로스 왕에 의해 폴리스 체제가 붕괴되었기 때문이다.?기원전?307년~261년까지 아테나이는?46년 간 전쟁과 폭동이 끊이지 않았다.?이 혼돈의 시기에 면면히 유지되었던 시민적 연대의 정신은 대부분 사라졌다.?칼과 강간의 시대였으며,?살육과 방화,?살해와 약탈이 일상화되던 폭력의 시대였다.

하지만 폭력의 시대는 이미 펠로폰네스 전쟁기부터 시작되었다.?전쟁은 중산층의 삶을 무너뜨렸고 양극화는 극심해졌다.?전쟁으로 인해 노예는 증가했고 자유시민의 삶의 터전은 좁아지기만 했다.?수많은 노예를 거느린 이들의 거대한 생산력에 경쟁할 수 있는 중산 시민이란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중산층에서 날품팔이 노동을 하는 자유시민으로 전락하는 경우는 늘어나기만 했다.?이들의 삶은 점점 더 어려워졌다.?무료 노동을 하는 노예가 흔한데 굳이 노임을 지급하면서 자유시민에게 노동을 시킬 이유는 없었기 때문이다.?이리하여 아무 것도 가지지 못하고 아무 일도 얻지 못한 채 떠도는 빈민이 늘어나기만 했다.?한 때 폴리스는 빈곤한 자유시민들의 생계를 위해 식량과 임금을 보전해주었다.?그러나 국가의 재정은 곧 고갈되었다.?아테나이는 인구 압박을 해결하기 위해 늘어나는 빈민들을 강제로 다른 곳으로 이주시키는 기민정책을 취하기도 했다.?이민을 강요받은 이들 중 일부는 할 수 없이 무장 조직을 만들어 노략질을 일삼는 해적이 되기도 했다.?이 모든 일의 근원에는 제국주의적 확장 정책과 노예제가 있었다.?그중에서도 노예제는 폴리스를 유지하는 중요한 원천이기도 했지만 그것을 좀먹는 재앙이기도 했다.

아테나이의 위기에 결정타를 날린 것은 마케도니아의 그리스 점령이었다.?그리스 세계에 존재하던 폴리스적 삶의 문화를 붕괴시킨 마케도니아는 노예제 폐지 금지 정책을 관철시켰다.?이는 그리스 민족이 처한 재앙적 위기를 타개할 마지막 탈출구마저 봉쇄해버린 조치였다.?이로써 양극화는 돌이킬 수없이 악화되었다.?폴리스의 붕괴와 함께 그들의 인생을 지탱해주던 모든 가치와 삶의 문화들이 무너지자 사람들은 혼란스러워하기 시작했다.전쟁과 폭력,?기아와 기근을 막아주던 폴리스라는 보호처가 사라지자 사람들은 공적 시민으로서의 연대적 삶을 지속할 수 없었다.?이제는 각자가 알아서 자신의 목숨을 보존하고 안정적 삶을 유지해야 하는 것이다.?공적 시민으로서의 연대 의식은 사적 개인의 각자도생 의식으로 대체되었다.

폴리스 체제의 멸망과 경제 위기로 인해 발생한 모든 불행 앞에 인간의 삶은 너무나도 불확실한 것으로 여겨졌다.?모든 것은 인간의 판단과 행위에 의해서가 아니라 인간을 넘어선 우연의 손에 좌우되는 것 같았다.?그리하여 신에 대한 맹목적 숭배와 두려움이 기승을 부렸으며,?우연의 여신인 튀케(tyche)를 숭앙하는 풍조가 일반화되었다.?얼마전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대체로 자연과 사회를 움직이는 법칙을 인간의 이성을 통해 이해하고자 했는데,?이제 인간들은 그러한 태도를 버리고 세계와 인간의 삶을 신적 힘과 우연에 기대 해명하고자 했다.?삶의 안전판이 결여되자 불안의 고통에 휩싸인 사람들은 종교적 미망에 걷잡을 수 없이 빠져들게 되었고 어리석음은 세상을 뒤덮게 된 것이다.

 

개인의 구원

에피쿠로스의 철학은 바로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 대한 응답이라고 할 수 있다.?하지만 그는 고통의 시대를 건너기 위한 처방으로 사회 개혁 보다는 개인적 구원을 제시했다.?이것은 그의 시대에 대한 냉정한 인식에서 비롯한 것이다.?이미 시대의 역사는 너무도 참혹한 처지에 있어 사회적 진보나 정의의 회복을 통해 타개할 수 없는 지경에 빠져 있었다.?사회적 개혁과 정의를 외쳐도 호응해줄 사람들과 가치는 소멸한 지 오래였다.?사람들은 불안에 휩싸여 있어 나 아닌 타인의 삶에 관심을 기울일 수 없었고,?공동체적 삶의 연관 속에서 자신의 삶을 인식할 수도 없는 상태에 빠져 있었다.?사람들은 그저 저마다의 극심한 고통과 비참에서 해방되고 싶었다.?각자도생의 사회에서 꿈꿀 수 있는 해방이란 애석하게도 이처럼 개인적인 것이다.

 

죽음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법

에피쿠로스에 따르면 인간은 기쁜 인생을 살기 위해 태어났다.?하지만 인간은 두려움 때문에 기쁜 인생을 향유하지 못한다.?인생이 기쁘지 않은 까닭은 자기 삶에 대한 불안감이다.?불안의 고통은 두려움으로부터 온다.인간의 가장 근원적 두려움은 자기 삶의 최종적 파멸로서의 죽음이다.?그런데 죽음이란 살아있는 우리 인간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고 아무런 작용도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죽음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다.?왜냐하면 모든 좋고 나쁨에 대한 판단은 감각에 의존하는데,?죽으면 이러한 감각을 잃게 된다.”?즉 죽으면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기쁘게 되지도 않고,?고통스러워하지도 않게 된다.?우리가 죽게 되면 죽음으로 인해 느껴지는 고통은 아무것도 없다.?그러니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우리가 살아있을 때는 죽음에 대한 고통은 느껴지지 않는다.?죽음에 대한 고통이란 죽음을 경험해야 비로소 얻을 수 있는 것인데 살아있는 동안에는 죽음에 대한 고통을 경험할 수 없기 때문이다.?따라서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우리가 살아있는 한 죽음은 우리와 함께 있지 않으며,?죽음이 닥쳤을 때라도 우리는 이미 이 세상에 살아있지 않”기에 죽음이 두려운지 조차도 느낄 수 없다.?그러니 죽음이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우리는 한순간도 죽음을 경험할 수 없으니 죽음 앞에서 우리가 느끼는 공포와 동요란 귀신을 두려워하는 어린아이의 공포만큼이나 어리석은 것이다.

 

신에 대한 두려움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법

죽음 다음가는 공포는 신에 대한 공포다.?모두 인간이 어쩔 수 없는 것들이기 때문이다.?사람들은 자기 인생이 불행해진 이유가 신이 불경한 자기 행동에 분노하여 징벌을 내렸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그래서 인간들은 제사장들에게 재물을 제공하면서 신의 전조를 읽어줄 것을 요청한다.?그리하여 엄청난 비합리성이 판을 치는 불의한 사회가 되어버린다.?종교적 권고는 심지어 자기 자식을 신에게 공양하는 범죄를 신성한 의례로 여기게 하는 미혹을 유포시키기도 했다.?루크레티우스의 말처럼?“종교로 인해 우리가 이르게 되는 악의 심연(Tantum religio potuit suadere malorum)”은 인간의 삶을 고통에 휩싸이게 만든다.

하지만 에피쿠로스는 신이 인간의 행위에 분노하거나 기뻐하는 등의 감정을 함부로 남발하는 존재가 아니라고 말한다. “신은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존재한다.”?신은 불멸의 축복을 받은 존재다.따라서 그의 불멸성과 축복에 어울리지 않는 속성들,?즉 걱정,?근심,?분노 등을 신에게 갖다 붙이는 태도는 잘못된 것이다.?신은 인간과 같이 근심하거나 걱정에 휩싸이고 분노하는 존재가 아니다.?그런데 우리 인간들은 자기에게 악한 자들은 신의 징벌을 통해 불행해지고,?자기에게 선한 자들은 신의 축복에 의해 행복해진다는 잘못된 생각을 하고 있다.?하지만 이런 사고는 모든 것을 자기중심적으로 해석하려는 인간이나 하는 것이지 지성적 존재인 신이 취하는 것일 수 없다.?따라서 신은 우리 인간이 무슨 짓을 하든지 아무런 감정을 내보이지 않으며,?아무런 징벌도 상도 내리지 않는다.?그러므로 인간은 신을 두려워 할 이유가 없다.

 

오직 지상의 일에만 관심을 기울인 유물론자

에피쿠로스는 자연의 변화에 대해 신의 개입이나 영혼의 작용 등의 설명 방식을 거부하고 오직 물질적 관계로만 설명한다.?그는 원자론을 받아들여 원자들의 이합집산과 상호 작용에 의해 자연의 변화가 일어난다고 주장하였다.?이와 같은 주장은 당시 사람들에게 신에 대한 불경으로 이해되었을 것이다.?이 과격한 입장은 고대 유물론자인 데모크리토스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에피쿠로스는 신에 대한 관심보다는 오히려 우리 인간이 살고 있는 세계에 대한 이해가 우리의 인생을 즐겁게 만드는 데에 훨씬 중요한 일임을 강조하였다.?우리가 살고 있는 자연 세계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이루어져야 자연 변화에 제대로 대처하면서 우리의 문명 세계를 발전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그래서 그는?“자연학이 없다면,?우리는 순수한 쾌락을 얻을 수 없다”고 말한다.?자연의 느닷없는 변화를 이성적 연구를 통해 합리적으로 해명하려 하지 않고 신의 분노로만 해석한다면 우리는 두려움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쾌락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DSC09111-1

 

소박한 쾌락주의자

죽음의 고통에서 벗어났다 해서 죽음에 이르기 전에 겪게 되는 신체적 고통을 부정할 수는 없다.?하지만 에피쿠로스는 신체적 고통은 결코 이겨낼 수 없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왜냐하면?“고통은 육체에 지속적으로 머무르지 않는다.?가장 심한 고통은 아주 잠시 머물 뿐이다.?극심한 육체적 고통도 여러 날 지속되는 것은 아니다.”?그러니 참으면서 살아가게 된다.?설사 고질적인 질병이 있어서 고통이 계속 된다하더라도 그러한 고통은 그것보다 큰 쾌락의 경험에 의해 잊혀질 수 있는 것이다.?격심한 고통이 찾아오더라도 그것에 집착하여 마음이 흔들리도록 놔두지 않고 그것이 지나가도록 의연히 기다린다면,?어느덧 다른 육체적 쾌감에 의해 그 고통에서 놓여나게 된다.?한번쯤 그러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우리가 겪는 고통이 그 정도의 것이라면,?우리는 충분히 그것을 견뎌낼 역량이 있지 않은가??그렇다면 필요한 것은 고통의 순간을 견뎌내고 다가올 쾌락을 기다리는 의연함과 용기일 것이다.

에피쿠로스의 이러한 초연함은 결코 관념적인 허세에서 비롯한 것이 아니다.?그는 평생동안 극심한 위장 장애를 앓았으며(하루에 음식을 두 번씩 토하곤 했다),?오랫동안 방광염에 시달리다가 결국 심한 결석 질환으로 인해 절명했다.?너무나 병약한 나머지 하루 종일 침대에 누워지내야만 한 적도 많았다.?육체적 고통에서 자유로운 적이 거의 없었던 그였기에 쾌락에 대한 의지는 강할 수밖에 없었다.?극심한 고통의 순간이 잦아들 때 불현 듯 경험하는 싱그러운 바람과 향긋한 공기,?그리고 갈증과 허기를 채워주는 한모금의 물과 한조각의 빵은 그 어떤 기물과 성찬이 주는 쾌감보다도 컸을 것이다.?끊임없이 찾아오는 고통에서 해방되는 데에는 그러한 소박한 쾌감으로도 충분했다.?그래서 그는 신체의 단순한 필요,?기초적 욕구를 충족시킴으로써 얻게 되는 쾌감 이상의 것을 추구하지 않았다. “결핍으로 인한 고통이 일단 제거되면,?육체적 쾌락은 더 이상 증가하지 않고,?단지 형태만 바뀔 뿐”이기 때문이다.

허기와 갈증과 추위와 더위에 시달릴 때 그것의 욕구를 채워주면서 더 이상 배고프지도,?목마르지도,?춥지도,?덥지도 않게 한다면 우리는 분명히 더할 나위없는 쾌감을 느끼게 된다.?고통이 사라지는 것 그것이 곧 쾌락이다.시시해보이지만 결코 부정할 수 없는 소박한 사실이다.?우리가 커다란 기쁨을 경험할 수 있으려면 사는데 반드시 필요한 것에 단호히 응답할 줄 알아야 한다.?진정으로 배고플 때 먹고,?정말로 목마를 때 마셔야만 한다.?자연적 필요가 아니라 인위적 충동에 의해 쾌락을 추구할 때는 즐거움뿐만 아니라 그에 따른 고통의 대가도 치러야 한다.

에피쿠로스에 의하면 육체의 자연적 욕구를 충족시킨 이후에는 더 나은 생계를 위해 필요한 수단을 확보하느라 노력할 이유가 없다.?이러한 삶은 인위적 욕구를 충족시키려는 삶이다.?하지만 그것은 삶의 균형을 상실한 사람들이나 할 만한 어리석은 짓이다.?현자는 삶이 내일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바로 이날,?이날의 매 순간을 위한 것임을 아는 이다.?자연적 필요를 채우는 데에는 그리 많은 것이 요구되지 않는다.?단지 소박한 몇몇의 것들만 있으면 된다.?이러한 사실을 강렬히 깨달은 사람이라면 욕망의 어리석은 타력에 제 몸과 정신을 맡기지 않고 자기 절제의 의식을 가지면서 살아갈 수 있다.?에피쿠로스에 의하면 기쁨과 쾌락은 오직 인위적 욕구의 절제를 알고,?의연함으로 스스로를 제어하는 이만이 얻게 되는 보상이다.

그래서 한 고인은 에피쿠로스의 삶을 이렇게 평하였다. “밥 한 술 뜨고,물 한 모금 마시고,?등짝을 눕히고 자는 것,?이것이 바로 에피쿠로스다.?그는 새벽이 되면 벌써 비단 친구들뿐만 아니라 제우스 신하고도 토론할 태세를 갖추었다.”?이것이 적잖은 사람들이 방탕의 화신이자 난봉꾼으로 몰아세운 이의 진면목이다.

 

우정,?최고의 기쁨

“행복을 얻기 위해 지혜가 일생동안 확보하는 것 중 지금껏 가장 큰 것은 우정을 얻는 것이다.”

에피쿠로스와 제자들은 그의 작은 안뜰에 모여 우정을 나누었다.?에피쿠로스의 안뜰은 폴리스의 몰락으로 인해 고립되어 버린 인간들에게 새로운 우정의 공동체를 선사하였다.?모름지기 인간은 누구나 고통의 삶을 경험하다가 끝내 죽음을 맞이한다. “대지 전체가 고통 속에서 산다.?그렇기 때문에,?이렇게 고통스러운 삶 때문에,?우리 인간들은 가장 많은 선물을 선사받았다.”?그것이 바로 우정이다.?고통의 보편성에 대한 각성은 모든 인간을 친구로 삼게 하는 동기가 되기 때문이다.

에피쿠로스의 우정이 살아 움직이는 공간인 그의 정원에서는 어떠한 차별도 존재하지 않았다.?수많은 여성들도 남성들과 마찬가지로 동등하게 즐거움을 나누었다.?여성은 더 이상 남성들의 노예로 취급되지 않았다.?그의 정원에서는 노예들도 친구로 대우받았다.

우정은?“도움을 필요로 하는 데에서 출발한다” “삶의 필요가 우정을 탄생”시키는 것이다.?우정은 이렇게 이익의 기쁨을 주는 것이다.?하지만 그렇게 탄생한 우정이 반드시 자기 이익을 추구하려는 사적 필요의 요구에 머무는 것만은 아니다.?우정은?“이로움을 얻는 것보다 이로움을 주는 것이 더 즐겁기 때문에”?추구될 수 있다.?그런 면에서 우정은?“그 자체를 위해서 추구될 수 있다.”?이러한 상승은 친구에 대한 믿음의 관계를 공고히 한다.?우정이 소중히 여겨지는 까닭은 흔히 우리는 친구들이 반드시 우리를 직접적으로 도와주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다.?그보다는?“친구들이 우리를 도와주리라는 믿음 때문이다.”?이 도움의 믿음이 깨지면 세상은 고립의 고통으로 넘쳐난다.

“우정이 춤추면서 세상의 주위를 돈다.?그리고 소리친다.?모두 일어나라!?그리고 노래하자!?우리의 행복한 삶을 위하여.”-에피쿠로스-

 

주인으로 살아가기 : 맹자의 호통 <도봉도서관 나이듦의 철학> 2

주인으로 살아가기?:?맹자의 호통?<도봉도서관 나이듦의 철학> 2

송종서(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지식인과 대장부

고금동서를 막론하고 지식과 권력은 불가분한 관계를 맺는다.?어떤 지식이 어떤 권력을 위해 역량을 발휘하는가 하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세월호’사건이 발생한 뒤 한국이라는 국가 전반의 무능과 부조리가 세계적 관심사가 되었다.?이 시각에도 정부는 여전히 중심을 못 잡고 그에 따라 민심은 심상치 않게 동요한다.?이 속에서도?‘지식인(지성인)’들은 무시 못 할 작용을 한다.?대다수 지식인이 정부의?‘재난관리 및 위기대처’의 총체적 부실을 비판한다.?특히 근본적 대책,?곧 정치,?사회,?교육,?문화,?심지어 경제까지 그 밑바탕부터 성찰하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발언도 지식인들의 입을 통해 자주 나온다.?한 마디로,?철학과 사상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그런데 그 반성이 잘 될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지식은 생활에 유용할 뿐 아니라 그것 자체가 잠재적 권력이다. “배워야 사람구실을 할 수 있다.”는 말조차 하나의 권력이다.?그런데?‘사람구실’을 하는 사람은 대체 어떤 사람인가? ‘가방끈’?긴 지식인인가??아무리?‘지성인’으로 어여삐 치장해도?‘전문지식’을 앵벌이 수단으로 먹고사는 사람의 인생은 비루하다.?수입의 많고 적음을 떠나 지식인 스스로 초라한 인생을 살고 있다는 자괴감에 눌려 지내기 마련이다.?이런 자괴감조차 못 느끼는 동업자도 많다.?여기서 다룰 맹자(孟子)라는 인물도 전국시대 그 당시에 자유 직업인으로서 지식인[士]에 속했던 사람이다.?그런데 그는 비루하거나 굴욕적이지 않고?‘대장부’로 살다 죽었다.?어찌 그런 일이…??사람구실에 대한 성찰부터 나라 기초를 다시 놓는 일까지, 2,300년 전 맹가(孟軻)?선생의 호통을 들어보는 것도 도움이 될 듯하다.

 

DSC09050-1

 

유가(儒家)의 원류

유가(儒家)의 학문적 맥락은 은상(殷商)시기 이래의 무(巫)?사(史)?문화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유가는 서주(西周)시기의?‘예악(禮樂)’의 전통을 이어받았고,?하?은(상)?주?3대의 선왕(先王)을 가치의 표준으로 삼았다.?언필칭 요순(堯舜)이요 문왕(文王)?무왕(武王)?주공(周公)을 추존했다.?아울러 혈연에 뿌리를 둔 인륜을 중시하고 현세에서의?‘일의 성취[事功]’를 추구했다.

은상 및 서주시기에?“학술은 왕실에 있었다.[學在官府]”?전적(典籍)과 문헌을 비롯해 천문역학,?의학?약학,?역사,?복서(卜筮)?같은 전문지식이 모두 왕실-관부에 속해 있었다.?전문지식을 도맡은 관원들은 무(巫)?사(史)?축(祝)?복(卜)으로 불린 문화 전문가들이다.?이들은 지위를 세습하면서 전문지식을 백성들에게 알려주지 않고 독점했다.

이후 동주(東周)?시기에 철기문명이 본격적으로 전개하면서 사회경제적 대변동이 일어난다.?이 변동은?“학술이 민간의 전문가에게 있는[學在私門]”?결과를 낳는다.?서주시기 귀족계층의 말단인 사(士)들 가운데 일부는 봉지(封地)가 상징하는 계급질서로부터 일탈해 봉록(俸祿)을 받는 자유직업인이 된다.?이전까지 벼슬아치들[卿,?大夫]의 가신(家臣)이자 식전(食田)에 묶였지만 이제는 여섯 과목의 기예[六藝:?예(禮)?악(樂)?사(射)?어(御)?서(書)?수(數)]를 배워서 무사 또는 문사로 일하며 봉록을 받았다.?예컨대 공자 아버지 숙량흘(叔梁紇)은 무사의 기예를 배워서 하급군관이 되었고,?노담(老聃;?老子)은 문사의 기예를 배워서 주나라 왕실의 도서관 관장[守藏史]을 했다.?공구(孔丘:?孔子)는 회계[委吏]?일을 보았다.

주지하다시피 공자(孔丘:?서기전551-서기전479)는 유가를 창시했고,?그 학설은 제자들과 재전제자들이 정리한『논어』에 기록되어 있다.?공자의 사상은 흔히?‘예(禮)’와?‘인(仁)’으로 요약된다. (지난 시간에 공자를 다루었으니 자세한 내용은 생략.)?맹자(孟軻:?전371?-전238?)는 증자(曾參:전505-전436)?및 자사(子思:?전483-전402)의 사상을 이어받고 공자의 인학(仁學)을 사회적으로 발휘하는 데 주력했다.?또?“선왕을 본보기로 삼기[法先王]”를 힘써 주장하고?“왕도정치(王道政治)”와?“인정(仁政)”의 이상을 부르짖었다.?아울러 인간의 본성은 선(善)하다는 자신의 논지를 인정설의 기초로 삼았다.?맹자는 또?『상서(尙書)』에 보이는?“백성이 나라의 근본이다.(民爲邦本)”라는 말,?그리고?『좌전(左傳)』의 중민경신(重民輕神:백성을 무겁게 여기고 신을 가볍게 여긴다.)의 사상을 자신의 논리로 흡수해서?“백성이 귀하고 군주는 가볍다(民貴君輕)”라는 너무도 유명한 말을 했다.?유학의 민본주의는 맹자로부터 시작되었다.

 

국가가 이익에 몰두한다면

맹자(孟子)가 양혜왕을 만났다.?왕이 말했다. “노인께서 천릿길을 멀다 않고 오셨으니 장차 우리나라를 이롭게 할 만한 것이 있습니까?”?맹자가 대답했다. “왕은 하필 이익(利)을 말씀하십니까??오직 인의(仁義)만이 있을 뿐입니다.?왕께서?‘어떻게 하면 우리나라를 이롭게 할까’?하시면 대부(大夫)들은?‘어떻게 하면 우리 집안을 이롭게 할까’?하고,?선비나 평민들은?‘어떻게 하면 나 자신을 이롭게 할까’?하여,?윗사람과 아랫사람이 서로 이(利)를 취한다면 나라가 위태로울 것입니다.?만승(萬乘)의 나라(역자:?만 대의 전차를 가진 나라.?天子國)에서 그 군주를 시해하는 자는 반드시 천승(千乘)을 가진 제후(諸侯)의 집안이요,?천승의 나라(역자:?諸侯國)에서 그 군주를 시해하는 자는 반드시 백승(百乘)을 가진 대부(大夫)의 집안이니,?만승에 천승을 취하고 천승에 백승을 취하는 것이 적지 않은 것인데,?만일 의(義)를 뒤로 하고 이(利)를 앞세운다면?(군주의 것을)?빼앗지 않으면 만족스럽지 못할 것입니다.?어질면서 어버이를 버리는 자는 없고,?의로우면서 군주를 뒤로 하는 자는 없습니다.?왕께서는 인의(仁義)만을 말씀하실 것이지 하필 이익을 말씀하십니까?”

(孟子見梁惠王 王曰:???不遠千里而來,?亦將有以利吾國乎???孟子對曰:?王何必曰利??亦有仁義而已矣.?王曰『何以利吾國』??大夫曰 『何以利吾家』??士庶人曰 『何以利吾身』??上下交征利而國危矣.?萬乘之國弑其君者,?必千乘之家;?千乘之國弑其君者,?必百乘之家.?萬取千焉,?千取百焉,?不爲不多矣.?苟爲後義而先利,?不奪不?.?未有仁而遺其親者也,?未有義而後其君者也.?王亦曰仁義而已矣,?何必曰利???<梁惠王 上?1>

+++++

송경이 초(楚)나라에 가던 길에 석구(石丘)에서 맹자와 만났다. (…)?송경이 말했다. “내 들으니 진나라와 초나라가 교전을 벌이고 있다네.?초왕을 만나보고 달래어 싸움을 그만두게 하려고 하네. (…) ”?맹자가 말했다. “상세한 내용은 여쭙지 않겠지만 그 취지는 들어보고 싶습니요.?달래기를 장차 어찌하려 하십니까?” “교전의 불리함을 말하려 하네.” “선생의 뜻은 크지만 말씀은 안 될 말입니다..?선생이 이익을 가지고 진?초의 왕을 달래면 진?초의 왕이 이익을 좋아하여 삼군의 군대를 물릴 것인데,?이는 삼군의 군사가 기꺼이 군사를 물리되 이익을 기뻐하는 것입니다.?신하 된 자가 이익을 생각하여 군주를 섬기고 자식 된 자가 이익을 생각하여 부모를 섬기며 아우 된 자가 이익을 생각하여 형을 섬긴다면,?이는 군신과 부자와 형제가 마침내 인의를 버리고 이익을 생각하여 서로 대하는 것이니 이렇게 하고도 망하지 않는 자는 없습니다. (…)?하필 이익을 말씀합니까?”

(宋?將之楚,?孟子遇於石丘. (…)?曰:??吾聞秦楚構兵,?我將見楚王說而罷之. (…)???曰:??軻也請無問其詳,?願聞其指.?說之將何如????曰:??我將言其不利也.???曰:??先生之志則大矣,?先生之號則不可.?先生以利說秦楚之王,?秦楚之王悅於利,?以罷三軍之師,?是三軍之士樂罷而悅於利也.?爲人臣者懷利以事其君,?爲人子者懷利以事其父,?爲人弟者懷利以事其兄.?是君臣??父子??兄弟終去仁義,?懷利以相接,?然而不亡者,?未之有也. (…)?何必曰利????<告子 下?4>

 

민심은 곧 천하다.

맹자가 말했다. “걸주가 천하를 잃은 것은 백성을 잃었기 때문이다.?백성을 잃었다는 것은 그 마음을 잃은 것이다.?천하를 얻는 데는 방도가 있으니 백성을 얻으면 천하를 얻을 것이다.?백성을 얻는 데는 방도가 있으니 그 마음을 얻으면 백성을 얻을 것이다.?마음을 얻는 데는 방도가 있으니 원하는 바를 주어서 모이게 하고,?싫어하는 바를 베풀지 말아야 한다.

(孟子曰:??桀紂之失天下也,?失其民也;?失其民者,?失其心也.?得天下有道:得其民,?斯得天下矣;?得其民有道:?得其心,?斯得民矣;?得其心有道:?所欲與之聚之,?所惡勿施爾也….?) <離婁 上?9>

+++++

(맹자가 양혜왕에게 말했다.) “(…)?산 자를 봉양하고 죽은 자를 장례 지냄에 유감이 없게 하는 것이 왕도의 시작입니다. (…) 70살 먹은 사람이 비단옷을 입고 고기를 먹으며,?젊은이들이 굶주리지 않고 춥지 않게 하고서도 왕 노릇 하지 못할 자는 없습니다. (…)?

(?(…)?養生喪死無憾,?王道之始也. (…)?七十者衣帛食肉,?黎民不飢不寒,然而不王者未之有也. (…)?) <梁惠王 上?3>

 

왕도와 패도

맹자가 말했다. “힘으로 인(仁)을 가장하는 자는 패자(覇者)이니,?패자는 반드시 대국을 소유해야 하고,?덕(德)으로써 인을 실행하는 자는 왕자(王者)이니,?왕자는 대국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탕왕(湯王)은?70리를 가지고 하셨고,?문왕(文王)은?100리를 가지고 하셨다.?힘으로써 사람들을 복종시키는 자는 사람들이 진심으로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힘이 부족해서요,?덕으로써 남을 복종시키는 자는 마음속에서 기뻐하여 진실로 복종하는 것이다. 70명의 제자가 공자(孔子)에게 심복(心腹)한 것과 같은 것이다. (…)”

孟子曰:??以力假仁者?,??必有大國,?以德行仁者王,?王不待大.?湯以七十里,?文王以百里.?以力服人者,?非心服也,?力不贍也;?以德服人者,?中心悅而誠服也,?如七十子之服孔子也. (…)?

<公孫丑 上?3>

 

인정(仁政)의 근거:?성선설

맹자가 말했다. “사람들은 모두 사람을 차마 해치지 못하는 마음(仁心)을 갖고 있다.?선왕들이 사람을 차마 해치지 못하는 마음을 갖고 계셨기에 사람을 차마 해치지 못하는 정치(仁政)를 행하셨으니 사람을 차마 해치지 못하는 마음으로 사람을 차마 해치지 못하는 DSC09068-1정치를 행한다면 천하를 다스림은 손바닥 위에 놓고 움직일 수 있을 것이다.?사람들이 모두 사람을 차마 해치지 못하는 마음을 갖고 있다고 말하는 까닭은,?지금에 사람들이 갑자기 어린아이가 우물로 들어가려는 것을 보고는 모두 깜짝 놀라고 측은해 하는 마음을 가지니,?이는 어린아이의 부모와 교분을 맺으려고 해서도 아니고,마을 사람들과 벗들에게 명예를 구해서도 아니며, (잔인하다는)?소리가 듣기 싫어서 그러한 것도 아니다.?이로 말미암아 보건대 측은지심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며,?수오지심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며,?사양지심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며,?시비지심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다.?측은지심은 인의 단서요,수오지심은 의의 단서요,?사양지심은 예의 단서요,?시비지심은 지의 단서다.?사람이 이 네 단서를 가지고 있음은 사지를 갖고 있음과 같으니 사지를 갖고 있으면서도 스스로 인의를 행할 수 없다고 말하는 자는 자신을 해치는 자요,?자기 군주가 인의를 행할 수 없다고 말하는 자는 군주를 해치는 자이다.?무릇 사단이 나에게 있는 것을 다 넓혀서 채울[擴充]?줄 알면 마치 불이 처음 타오르고 샘물이 처음 나오는 것과 같을 것이니,?만일 능히 이것(=사단)을 채운다면 족히 사해를 보호할 수 있고,?만일 채우지 못한다면 부모도 섬길 수 없을 것이다.

(孟子曰:??人皆有不忍人之心.?先王有不忍人之心,?斯有不忍人之政矣.?以不忍人之心,?行不忍人之政,?治天下可運之掌上.?所以謂人皆有不忍人之心者,今人乍見孺子將入於井,?皆有??惻隱之心.?非所以內交於孺子之父母也,非所以要譽於鄕黨朋友也,?非惡其聲而然也.?由是觀之,?無惻隱之心,?非人也;?無羞惡之心,?非人也;?無辭讓之心,?非人也;?無是非之心,?非人也.?惻隱之心,?仁之端也;?羞惡之心,?義之端也;?辭讓之心,?禮之端也;?是非之心,?智之端也.?人之有是四端也,?猶其有四體也.?有是四端而自謂不能者,?自賊者也;?謂其君不能者,?賊其君者也.?凡有四端於我者,?知皆擴而充之矣,?若火之始然,泉之始達.?苟能充之,?足以保四海;?苟不充之,?不足以事父母.?)

<公孫丑 上?6>

 

군자는 도(道)에 뜻을 둔 사람이다.

맹자가 말했다. “공자께서 노나라 동산(東山)에 올라가시어 노나라를 작게 여기셨고,?태산(泰山)에 올라가시어 천하를 작게 여기셨다.?그러므로 바다를 구경한 사람은 큰 물 되기가 어렵고 성인의 문하에서 공부한 사람은 훌륭한 말 되기가 어려운 것이다.?물을 구경하는 데에 방법이 있으니,?반드시 그 여울목을 보아야 한다.?해와 달이 밝음이 있으니 빛을 받아들이는 곳은 반드시 비추는 것이다.?흐르는 물의 물건 됨은 웅덩이를 채우지 않고는 흘러가지 않는다.?군자가 도에 뜻을 둔 이상 문장(역자:?훌륭한 성취)을 이루지 못하면?(세상에)?나아가지(역자:?벼슬하지)?않는다.

(孟子曰:??孔子登東山而小魯,?登太山而小天下.?故觀於海者難爲水,?遊於聖人之門者難爲言.?觀水有術,?必觀其瀾.?日月有明,?容光必照焉.?流水之爲物也,?不盈科不行;?君子之志於道也,?不成章不達.?) <盡心 上?24>

 

영예와 치욕[榮辱]

맹자가 말했다. “인하면 영화롭고 인하지 못하면 치욕을 받나니,?지금에 치욕을 싫어하면서도 불인에 처함은,?이는 마치 습한 것을 싫어하면서도 낮은 곳에 처함과 같은 것이다.?만일 치욕을 싫어할진댄 덕을 귀히 여기고 선비를 높이는 것만 못하니,?현자가 지위에 있으며,?재능이 있는 자가 직책에 있어서 국가가 한가하거든 이때에 미처 그 정사와 형벌을 밝힌다면,?비록 강대국이라도 반드시 그를 두려워할 것이다…”

孟子曰:??仁則榮,?不仁則辱.?今惡辱而居不仁,?是猶惡?而居下也.?如惡之,莫如貴德而尊士,?賢者在位,?能者在職.?國家閒暇,?及是時明其政刑.?雖大國,必畏之矣…??<公孫丑 上?4>

자포자기(自暴自棄)

맹자가 말했다. “스스로 해치는 자는 더불어 말할 수 없고,?스스로 버리는 자는 더불어 일할 수 없다.?말할 때 예의를 비방하는 것을 자포라 하고,?내 몸은 인에 거하고 의를 따를 수 없다 하는 것을 자기라 한다.?인은 사람의 편안한 집이요 의는 사람의 바른 길이다.?편안한 집을 비워두고 거처하지 않으며,?바른 길을 버려두고 따르지 않으니,?애처롭다.”

(孟子曰:??自暴者,?不可與有言也;?自棄者,?不可與有爲也.?言非禮義,?謂之自暴也;?吾身不能居仁由義,?謂之自棄也.?仁,?人之安宅也;?義,?人之正路也.曠安宅而弗居,?舍正路而不由,?哀哉!??<離婁 上?10>

 

대인과 소인

맹자가 말했다. “대인이란 자는 말은 믿게 하기를 기필하지 않으며,?해설은 과단성 있게 하기를 기필하지 않고,?오직 의가 있는 데로 하는 것이다.”

(孟子曰:??大人者,?言不必信,?行不必果,?惟義所在.??<離婁 下?11>)

맹자가 말했다. “대인이란 적자의 마음을 잃지 않은 자이다.”

孟子曰:??大人者,?不失其赤子之心者也.??<離婁 下?12>

맹자가 말했다. “예가 아닌 예와 의가 아닌 의를 대인은 하지 않는다.”

孟子曰:??非禮之禮,?非義之義,?大人弗爲.???<離婁 下?6>

맹자가 말했다. “(…)?몸에는 귀천이 있고 소대가 있다.?작은 것을 가지고 큰 것을 해치지 말며,?천한 것을 가지고 귀한 것을 해치지 말아야 하니,?작은 것을 기르는 자는 소인이 되고,?큰 것을 기르는 자는 대인이 되는 것이다. (…)”

孟子曰:??…?體有貴賤,?有小大.?無以小害大,?無以賤害貴.?養其小者爲小人,養其大者爲大人. (…)???<告子 上?14>

공도자가 물었다. “똑같이 사람인데 혹은 대인이 되며,?혹은 소인이 되는 것은 어째서입니까?”?맹자께서 말했다. “그 대체를 따르는 사람은 대인이 되고,?그 소체를 따르는 사람은 소인이 되는 것이다.” “똑같이 사람인데,?혹은 그 대체를 따르며 혹은 그 소체를 따름은 어째서입니까?”?맹자가 말했다. “귀와 눈의 기능은 생각하지 못하여 물건에 가리어지니,?물건(外物)이 물건(耳目)과 사귀면 거기에 끌려갈 뿐이요,?마음의 기능은 생각할 수 있으니,?생각하면 얻고,?생각하지 못하면 얻지 못한다.?이것은 하늘이 우리 인간에게 부여해 주신 것이니,?먼저 그 큰 것에 선다면 그 작은 것이 능히 빼앗지 못할 것이니,?이것이 대인이 되는 이유일 뿐이다.”

公都子問曰:??鈞是人也,?或爲大人,?或爲小人,?何也????孟子曰:??從其大體爲大人,?從其小體爲小人.???曰:??鈞是人也,?或從其大體,?或從其小體,?何也???曰:??耳目之官不思,?而蔽於物,?物交物,?則引之而已矣.?心之官則思,?思則得之,?不思則不得也.?此天之所與我者,?先立乎其大者,?則其小者弗能奪也.此爲大人而已矣.???<告子 上?15>

 

호연지기(浩然之氣)

(공손추가 맹자에게 질문한다.) “(…)?감히 묻겠습니다.?선생님께서는 어디에 장점이 있으십니까?”?맹자가 말했다. “나는 말을 알고,?나는 나의 호연지기를 잘 기른다.” “감히 묻겠습니다.?무엇을 호연지기라 합니까?”?맹자가 말했다. “말하기 어렵다.?그 기(氣)?됨이 지극히 크고 지극히 강하니,정직함으로써 잘 기르고 해침이 없으면?(이 호연지기가)?천지(天地)?사이에 꽉 차게 된다.?그 기 됨이 의(義)와 도(道)에 배합하니,?이것이 없으면 굶주리게(역자:?기운이 축소)?된다.?이 호연지기는 의리를 많이 축적하여 생겨나는 것이다.?의DSC09066-1가 하루아침에 갑자기 엄습해 취해지는 것은 아니니 행하고서 마음에 부족하게 여기는 바가 있으면?(호연지기가)?굶주리게 된다.?내 그러므로?‘告子가 의(義)를 알지 못한다.’고 말한 것이니,?이는 의를 밖이라고 하기 때문이다.?반드시 호연지기를 기르는 데 종사하고,?효과를 미리 기대하지 말아서 마음에 잊지도 말며 억지로 조장하지도 말아서 송나라 사람과 같이 하지 말지어다. (…)

(…)??敢問夫子惡乎長????曰:??我知言,?我善養吾浩然之氣.?? ?敢問何謂浩然之氣????曰:??難言也.?其爲氣也,?至大至剛,?以直養而無害,?則塞于天地之閒.?其爲氣也,?配義與道;?無是,??也.?是集義所生者,?非義襲而取之也.?行有不慊於心,?則?矣.?我故曰,?告子未嘗知義,?以其外之也.?必有事焉而勿正,心勿忘,?勿助長也.?無若宋人然?(…) <공손추 상?2>

 

대장부(大丈夫)

(맹자가?景春에게 말했다.) “(…)?천하의 넓은 집(仁)에 거처하며,?천하의 바른 자리(禮)에 서며,?천하의 대도(義)를 행하여,?뜻을 얻으면 백성과 함께 도를 행하고,?뜻을 얻지 못하면 홀로 그 도를 행하며,?부귀가 마음을 방탕하게 하지 못하며,?빈천이 절개를 옮겨놓지 못하며,?위무가 지조를 굽히게 할 수 없는 것,?이를 대장부라 이르는 것이다.”

?(…)?居天下之廣居,?立天下之正位,?行天下之大道.?得志與民由之,?不得志獨行其道.?富貴不能淫,?貧賤不能移,?威武不能屈.?此之謂大丈夫.???<?文公 下?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