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고상한 ‘존재’와 ‘무’가 아니고 흔해빠진 ‘있다’, ‘없다’인가?[철학을다시 쓴다]-28-6

왜 고상한?‘존재’와?‘무’가 아니고 흔해빠진?‘있다’, ‘없다’인가?[철학을다시 쓴다]-28-6

 

 

윤구병(도서출판 보리 대표)

 

*이 글은 보리출판사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자, 여러분, 이제 그림 하나를 더 보고 넘어가기로 할까요?” 이렇게 말하면서 저는 그림을 하나 그렸습니다.

그림8

“보다시피 이것이 가장 단순한 모습으로 드러난 플라톤의 우주입니다. 이 우주 밖에는 무엇이 있느냐고요? 그것은 이데아(idea)라는 두드러기들이 잔뜩 나 있는 있는 것, 곧 하나의 세계입니다. 그러니까 이 그림에서 보듯이 같은 것(같음)의 고리는 있는 것에 맞닿아 있는 것입니다. 이 있는 것(있음)은 파르메니데스의 말 그대로 모든 것이 달라붙어〔syneches〕 하나〔monoeides〕로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는 하나임으로 말미암아 영원불변하며, 시간과 공간의 영향을 받지 않고 저됨(자체성, 自體性)을 지킬 수 있게 됩니다. 하나의 바로 이런 특성으로 말미암아 하나, 곧 있는 것에 맞닿아 있는 것도 하나와 같은 것, 하나로 있는 것에 동참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플라톤의 우주는 하나와 맞닿아 있다는 점에서 하나의 우주, 그 안에서 펼쳐지는 시간과 공간의 파괴적인 영향을 받지 않고 저임(자기 동일성, 自己同一性)을 잃지 않고 영원히 변하지 않고 있는 것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조금 더 덧붙여서 설명한다면, 플라톤의 우주 맨 바깥을 두르고 있는 같은 것(같음)의 고리는 있는 것과 같은 것이고, 바로 이 때문에 플라톤의 우주는 여러 개가 아니라 하나일 수밖에 없으며, 생성도 소멸도 되지 않고 정지해 있는 것입니다. 이 우주 안의 모든 변화와 차별상, 곧 운동과 여럿의 세계는 시간과 공간까지 포함해서 다른 것〔heteron〕에서 나옵니다. 플라톤의 우주 안쪽을 여러 겹으로 감싸는 이 다른 것(다름)의 고리는 있는 것과 다른 것, 하나와 다른 것, 따라서 없는 것이요, 여럿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제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지요? 다른 것이 있는 것과 다른 것이어서 없는 것이라고 하면서 동시에 하나와 다른 것이어서 여럿이라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이런 설명에는 논리의 비약이 있다고 여기지 않습니까? 없는 것과 여럿이 같은 것이라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요? 우리 잠깐 생각을 다시 가다듬어 봅시다. 저는 앞에서 파르메니데스의 말을 빌려 있는 것은 하나로 있다고 했고, 왜 그런지 증명까지 해 보였습니다. 그런데 있는 것만 있고, 그것이 하나이며 없는 것은 없다면, 파르메니데스 주장대로 시간도 공간도 없고, 그에 따라 우주도 삼라만상도, 생성과 소멸도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감각과 이성으로 파악하는 모든 것들은 죄다 마야의 휘장 너머에 펼쳐진 환상의 세계일 뿐입니다. 그런데 이런 결론은 이 땅에 발붙이고 사는 정상적인 모든 사람의 상식에 벗어납니다. 상식에 벗어나지 않는 주장을 하려면 하나뿐만 아니라 여럿이 있다고 말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인 있는 것뿐만 아니라 없는 것도 있다고 말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없는 것이 있다니? 그런 엉터리없는 말이 어디 있어? 없는 것은 그 말 그대로 없는 거야!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없는 것이라는 말을 파르메니데스가 쓴 뜻 그대로 쓰고 있는 셈입니다. 그러니까 없는 것이라는 말을 아예 없는 것, 없음 바로 그것이라는 뜻으로 파악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우리는 생각을 바꾸어 우리가 흔히 쓰는 뜻으로 이 말을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없는 것이 있다는 말은 빠진 것이 있다는 말이 됩니다. 앞에서 우리는 여럿의 가장 작은 수, 곧 여럿의 최소 단위는 둘인데, 있는 것은 하나이므로 여럿이 있다고 하려면, 없는 것도 있다고 보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여럿을 살리기 위해서 없는 것을 있음과 같은 자리에 놓은 것입니다. 그리고 없는 것이 있는 것과 몸을 맞대고 나란히 서 있다는 것이 우연이고 모순이라는 말도 했습니다. 우리는 이처럼 여럿을 요청하는 순간 우연과 모순으로 가득 찬 세계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없는 것이 있는 것과 나란히 서자마자 파르메니데스의 없음 바로 그것은 없어지고, 어려운 말로 ‘존재화(存在化)한 무(無)’ 다시 말해서 없다는 규정 아닌 규정을 받아들인 어떤 것, 곧 빠진 것이 없는 것이라는 이름을 달고 나타납니다. 이렇게 해서 여럿으로 이루어진 이 세계는 구제되고 플라톤의 우주에서 다른 것은 있는 것과는 다른 것, 없는 것, 그러나 없음 바로 그것은 아닌 것으로 재해석되어 있는 것과 관계를 맺게 됩니다. 그러나 아까 이야기했듯이 이 관계는 우발적인 것, 우연이고 모순입니다. 그리고 이 우연과 모순은 우리의 의식 속에 최초의 우연, 원초적 모순으로 드러나고, 이 때문에 운동과 변화의 가능성이 열립니다. 왜냐하면 운동은 모순에서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운동의 문제는 여기에서 함께 다루기는 벅차니까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합시다.”

저는 여기에서 여럿의 문제를 조금 더 자세히 학생들에게 이야기해 주어야 한다는 의무감에 사로잡혔습니다. 모든 것의 최소 단위〔unit〕인 하나를 찾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은 앞에서 이미 이야기해 준 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세히 설명은 못 했지만 이 하나, 곧 있는 것을 찾아내야만 어떤 것을 무엇이라고 규정할 수 있는 근거가 생긴다는 말도 해 주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가 없으면, 다시 말해서 있는 것이 없으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것이나 빠진 것에 대해서는 아무 이름도 붙일 수 없고 따라서 무엇이라고 부를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아예 없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으니 제쳐놓고 말입니다. 제가 이렇게 말하니까 제 말투에 익숙한 어떤 학생이 이렇게 묻더군요. “선생님, 오늘 수업에는 이고운 양이 빠졌는데요. 이렇게 우리는 빠진 것에도 이고운이라고 이름을 붙일 수 있지 않습니까?” “뭐? 이고운 양이 빠졌어? 입덧이 심한가?” “에이, 선생님도. 처녀가 입덧은 무슨 입덧이에요. 괜히 딴전 피우시지 말고 대답해 주세요.” 사실 제가 하는 이야기에는 어려운 낱말이 하나도 없어서 말이야 쉽지만 이 쉬운 말들의 실꾸리를 따라가다 보면 곧잘 미로에서 헤매기 일쑤여서 가끔 엉뚱한 이야기를 꺼내 긴장을 풀어 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느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꽁무니를 뺄 수는 없는 노릇! “어쩌다 이고운 양이 여기에 없어서 졸지에 빠진 것이 되어 버렸는데, 그렇다고 해서 이고운 양이 처음부터 빠진 것, 처음부터 없는 것은 아니었지요? 그리고 지금도 여기에서는 빠졌지만 다른 자리를 채우고 있을 것입니다. 대답이 되었나요?” 잠시 동안 긴장이 풀린 사이에 저는 여럿에 대해서 다시 설명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하나가 없으면 여럿이 있다는 말도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여럿이라는 말로 저마다 다른 하나하나를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이 강의실에 여러 학생들이 있지요? 그런데 하나하나 저마다 다르지요? 이를테면 변강세 군과 이옥녀 양은 각각 한 사람이면서 서로 다릅니다. 그런데 우리는 변강세 군과 이옥녀 양이 다르다는 걸 어떻게 해서 안다고 했지요?” 이 시간이 존재론 시간이라는 것을 잘 기억하고 있는 한 학생이 자신 있게 대답했습니다. “그건 첫 시간에 가르쳐 주셨듯이, 변강세 군에게 있는 어떤 것이 이옥녀 양에게는 없고, 변강세 군에게 없는 어떤 것이 이옥녀 양에게는 있기 때문입니다.” 이 대답이 떨어지자마자 갑자기 폭소가 터져 강의실은 온통 웃음바다가 되었습니다. 이름이 비슷했기 때문에 학생들은 판소리 가루지기타령에 나오는 변강쇠와 옹녀를 연상하고, 뛰어난 정력을 지닌 이 두 남녀를 머리에 떠올리다 보니 생각이 엉뚱한 데로 비약한 모양이었습니다. 어쨌거나 그 학생의 대답이 옳았기 때문에 저는, “맞습니다. 바로 그렇습니다.” 하고 맞장구를 쳤습니다. 그러자 학생들은 다시 책상을 두들기면서 배를 잡고 웃어 대는 게 아니겠습니까? 저는 학생들의 웃음이 그치기를 기다리고 나서 설명을 계속했습니다. “이것과 저것이 다르다고 할 수 있는 까닭은 아까 저 학생이 말했듯이 이것에 있는 (어떤) 것이 저것에는 없고, 이것에 없는 (어떤) 것이 저것에는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여럿의 테두리 안에 있는 하나하나의 것은 저마다 있는 것(있음)과 없는 것(없음)의 요소를 함께 지니고 있습니다. 어떤 것에 있는 것이 다른 것에는 없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에만 있는 것을 바탕으로 해서 사람, 개, 소, 말, …… 빨강, 파랑, 노랑, …… 동그라미, 세모, 네모 …… 이렇게 다른 이름으로 부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까 이야기했듯이 있는 것은 하나입니다. 따라서 이 세상을 이루는 삼라만상의 하나하나는 있는 것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모두 하나에 참여할 수 있고, 바로 이 때문에 어떤 것으로 규정될 수 있습니다. 자, 이제 다른 것이 어떤 것인지를 알기 위해서 그림 8을 다시 한 번 살펴볼까요? 이 그림을 보면 다시 확인할 수 있듯이 같은 것〔tauton〕의 고리는 있는 것과 맞닿아 있습니다. 형식적으로 보면 없는 것과 같은 것도 있을 수 있고, 있는 것과 같은 것도 있을 수 있지만 플라톤이 같은 것의 고리로 하여금 우주의 맨 바깥을 감싸고 있도록 한 것으로 보아 같은 것이 ‘있는 것과 같은 것’이라는 점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문제는 ‘다른 것(다름 바로 그것)’을 둘러싸고 이루어진 해석의 싸움입니다. 이 싸움은 저도 잘 모르니 여기서 덮어두고 다른 것이 지니고 있는 이중의 성질에 대해서만 살펴보기로 하지요. 다른 것은 이 두 마디로 요약해 말할 수 있습니다.

1. 다른 것은 있는 것과 다르다는 점에서 있는 것이 아니다.

2. 다른 것은 없는 것과 다르다는 점에서 없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뭉뚱그려 말하자면 다른 것〔heteron〕은 동시에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인지는 이미 앞에서 말씀드렸지요? 그렇습니다. 바로 있는 것과 없는 것 사이에 들어서 이 둘을 맺어 주면서 동시에 떼어 놓는 무규정적인 것 바로 그것입니다.”

 

 

왜 고상한 ‘존재’와 ‘무’가 아니고 흔해빠진 ‘있다’, ‘없다’인가?[철학을다시 쓴다]-28-5

왜 고상한?‘존재’와?‘무’가 아니고 흔해빠진?‘있다’, ‘없다’인가?[철학을다시 쓴다]-28-5

 

 

윤구병(도서출판 보리 대표)

 

*이 글은 보리출판사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여기에서 이야기가 더 얽히기 전에 저는 파르메니데스가 한 유명한 말로 되돌아가야만 했습니다. ‘없는 것은 아예 없으므로 없는 것에 대해서는 생각할 수도 없고 따라서 말도 할 수 없다.’는 말 말입니다. 파르메니데스는 분명히 ‘없는 것은 없다.’고 말했는데,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없는 것이 있다.’는 말을 할 뿐만 아니라 그 말의 뜻이 ‘빠진 것이 있다.’임을 확인했습니다. 일이 이쯤 되면 파르메니데스의 말이 틀렸거나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쓰는 말이 틀렸거나, 그도 저도 아니면 파르메니데스가 쓴 ‘없는 것’이라는 말과 우리가 쓰는 ‘없는 것’이라는 말이 다르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도대체 이 세 경우 가운데 어느 것이라고 해야 할까요? 이 문제를 따지는 데는 앞에서 우리가 한 말도 염두에 두어야 하겠지요. 없는 것이나 없다는 말이 없으면 우리는 이것과 저것이 다르다거나 이것은 저것이 아니다라는 말을 쓸 수 없고, 따라서 이것과 저것을 갈라 보는 분석뿐만 아니라, 거기에 바탕을 두고 있는 사고와 그 사고의 표현인 언어생활조차 불가능해진다는 이야기 말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저는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파르메니데스가 없는 것은 없다고 했을 때 쓴 ‘없는 것’이라는 말은 말하자면 ‘허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없음 바로 그것’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리고 우리는 없음 바로 그것을 생각할 수도 없고 말할 수도 없다는 점에서 파르메니데스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보통 없는 것이라고 할 때 우리는 없음 바로 그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빠진 것을 가리킵니다. 그림 7을 다시 보아 주십시오. 여기에 최초의 무규정적인 것 ㄱ의 왼쪽과 오른쪽으로 한없이 많은 무규정적인 것들이 줄을 서 있지 않습니까? 당분간 있음 바로 그것인 맨 왼쪽의 있는 것과 없음 바로 그것인 맨 오른쪽의 없는 것을 보지 말고 그 사이에 있는 것들에만 주의를 기울이기로 합시다. 그리고 ㄱ의 왼쪽으로 줄지어 있는 것들을 있음에 참여하는 것으로 보아 있는 것들이라고 하고 ㄱ의 오른쪽으로 줄지어 있는 것들을 없음에 참여하는 것으로 보아 없는 것으로 봅시다. 여기에서 우리는 있는 것 쪽으로 향하는 무규정적인 것들의 움직임이 충만(있는 것은 하나로 있고 없는 것이 그 안에 하나도 없다는 점에서 가득 찬 것이기 때문에)을 지향하고 있고, 없는 것 쪽으로 향하는 무규정적인 것들의 움직임이 결핍(아예 하나도 있는 것이 없고 비어 있는 허무로 향하기 때문에)을 지향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설명 안에 들어 있는 더 깊은 뜻은 나중에 파헤쳐 보기로 하고 우선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없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예 없는 없음 바로 그것이 아니라 무규정적인 것 ㄱ에서 없는 것에 이르는 사이에 들어 있는 무한히 많은 저마다 다른 정도의 빠짐을 지닌 빠진 것들이라고 합시다. 왜 이런 제안을 하느냐 하면 철학의 역사에서 ‘없는 것’을 ‘없음 바로 그것’으로 놓고 벌여 왔던 많은 논쟁이 소모적일 뿐 아무런 생산적인 결론을 이끌어 내지 못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여기에서 성급하게 한 마디 끼워 넣자면, 없음 바로 그것이나 있음 바로 그것은 학문의 대상이 아니고, 따라서 논쟁거리가 못 됩니다. 학문의 대상은 있는 것과 맞닿아 있어서 있는 것과 같은 것에서 없는 것과 맞닿아 있어서 없는 것과 같은 것 사이의 무한히 많은 무규정적인 것들입니다. 말하자면 학문은 규정하는 것[definition : 이것을 정의(定義)라고 합니다. 끝, 한계(peras)를 드러내는 작업이라는 뜻이지요.]인데, 우리가 감각을 통해서나 이성을 통해서 파악하는 것이 이미 다 규정되어 있다면 우리는 따로 머리를 싸매고 이것이 무엇이냐? 이것과 저것은 어떻게 다르냐? 따위의 질문을 할 필요도 없고, 따라서 학문의 탐구는 부질없는 노릇이 되고 맙니다.”

여기까지 말하다 보니, 이야기가 너무 거창해져서 잘못하면 학생들이 허공에 한눈을 팔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지도 모르겠다는 걱정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저는 다시 그 기타 줄을 찾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로 이어져서 50센티미터의 길이를 가지고 있는 강철선 말입니다. 저는 그 기타 줄을 왼쪽에서부터 오른쪽으로 차례로 짚어 튀겨 가면서 말을 이었습니다.

“앞에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이 기타 줄에는 무한히 많은 소리들이 숨어 있습니다. 밖으로 드러나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 소리들은 규정되지 않았고, 따라서 겉으로 보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이 기타 줄 안에 소리가 아예 하나도 없을까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여러분은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제가 이렇게 기타 줄을 차례로 짚어서 튀기면 숨어 있던 소리가 밖으로 나옵니다. 다시 말하면 없던 소리가 생겨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없던 소리가 생겨나게 되었을까요? 줄을 짚어서 튀겼기 때문이 아니냐고요? 그렇습니다. 그런데 줄을 짚어서 튀긴다는 행위는 무엇을 뜻할까요?”

“그만큼 줄을 끊어 냈다는 것 아닙니까? 잘라 버렸다는 뜻은 아니고요.”

한 학생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이 말을 듣고 저는 뛸 듯이 기뻤습니다. 저는 얼른 맞장구를 쳤습니다.

“그렇죠! 이어진 줄을 어느 부분에서 잘라 낸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이어진 것을 잘라 내면 어떤 일이 생길까요?”

“이어진 것, 연속된 것은 한계가 없다는 점에서 무규정적인 것 아니에요? 그것을 끊어 냈으니 그만큼 한정시켰다는 뜻이겠지요.”

다른 학생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저는 그 학생이 몹시 귀여운 나머지 입이라도 맞추어 주고 싶었습니다. 예쁜 여학생이어서 더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도 모르지요.

“한정시켰다? 좋은 말입니다. 그 결과 무엇이 드러났지요?”

제가 물었습니다.

“이제까지 들을 수 없었던 새로운 소리요.”

어느 학생이 곧 대답했지만 그 대답은 제가 바란 대답은 아니었습니다.

“기타 줄이라는 것에 너무 매달리지 말고, 이어져 있는 모든 것, 다시 말해서 길이까지 포함해서 크기를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머리에 떠올려 보세요. 그것들을 끊어 내면 무엇이 나타나지요?”

그제야 학생들은 내가 듣기를 바라는 대답이 무엇인지를 알아챈 듯했습니다.

“아아, 알았습니다. 새로운 끝, 한계, 페라스(peras)요. 맞지요?”

“그렇습니다. 기타 줄을 끊어 내는 순간 이어져 있던 것이 끊어져 숨어 있던 끝이, 한계가 밖으로 드러난 것입니다. 일정한 진폭과 진동수와 음색을 지닌 소리와 함께 말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어떤 것의 끝이, 한계가 무엇이고 어디에 있는지 알면 소리가 되었든 모습이 되었든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이제 문제를 조금 더 단순화시켜서 일차원의 세계에 있는 줄〔line〕을 머릿속에 그려 봅시다. 이 줄을 끊어 내면 거기에서 새로운 끝이 나타나는데, 일차원의 줄이므로 이렇게 해서 얻어 낸 끝〔peras〕은 하나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양쪽에 하나씩 새로운 끝이 생겨났다고 해야 하겠지요. 여기에서 중요한 낱말은 하나라는 낱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앞에서 있는 것은 하나로 있다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있는 것이 왜 하나로 있는지 증명해 보이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하나의 끝이 나타나자마자 이것은 규정된 것(끝, 한계가 보인 것)이고 있는 것과 같은 것이 된 것입니다.”

제가 이렇게 말하자 학생들은,

“어려운데요. 조금만 더 자세히 설명해 주시지요.”

하고 요구했습니다. 그 순간 저는 학생들의 감각에 호소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제 앞에 있는 교탁을 번쩍 들었다가 제자리에 놓으면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여러분, 제가 방금 들어 보인 이 교탁은 한 개지요?”

학생들은 다시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너무나 뻔한 질문을 너무나 진지하게 하는 제 모습이 그렇게 우스웠나 봅니다.

“당연히 하나지요.”

학생들이 대답했습니다.

“정말 하나인 것이 그렇게 당연한가요? 왜 그렇게 당연하지요?”

제가 물었습니다. 학생들은 아무 대답이 없었습니다. 감각적으로 너무나 분명한 사실에 대해서 되물으니 할 말이 없는 모양이었습니다.

“아까 들어 보였던 것처럼 이 교탁은 삼차원 공간에서 다른 어떤 것과도 이어져 있지 않지요? 이 교탁이 놓여 있는 교실 바닥과도 떨어져 있고, 이 교탁을 둘러싸고 있는 공기와도 떨어져 있지요? 다시 말해서 이 교탁은 이 교탁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과 끊어져 있지요? 그래서 우리는 앞 뒤, 아래 위에서 이 교탁의 끝을, 한계를 눈으로 볼 수 있지요? 이렇게 삼차원에서 다른 어떤 것과도 끊어져 독립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 교탁을 하나의 교탁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교탁은 하나로 있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저는 ‘이것은 교탁이다.’ ‘저것은 책이다.’ ‘그것은 연필이다.’와 같이 어떤 것을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으려면 그것의 끝을 보고, 그 끝에서 다른 모든 것과 떨어져 있어서 하나로 있다는 것을 확인해야 한다고 설명했습니다. 하나하나가 서로 떨어져 있지 않으면 여럿이라는 말은 쓸 수 없습니다. 하나가 없으면 여럿도 없습니다. 그런데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최초의 하나는 있는 것뿐입니다. 따라서 어떤 것을 하나라고 말하는 순간, 우리는 그것을 있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말하는 셈입니다. 알다시피 하나는 단위입니다. 단위(單位)라는 한자말은 영어로는 유니트(unit)인데, 이 유니트라는 말은 라틴어의 ‘우누스(unus)’, 곧 하나라는 말에서 나왔습니다. 우리가 물질의 단위, 생명의 단위, 공간의 단위, 시간의 단위, 운동의 단위, 입자의 단위…… 이렇게 모든 것의 최소 단위를 찾아 헤매는 것은 모든 복합체들이 이 단위, 곧 하나로 되어 있어서, 하나만 찾으면 그 하나로부터 전체를 알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곁다리 이야기는 애초에 플라톤이 데미우르고스를 시켜서 만든, 우주를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될까 해서 늘어놓은 것입니다. 그러면 다시 플라톤의 우주로 돌아가기로 하지요. 제가 학생들에게 한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앞에서 플라톤의 데미우르고스가 ‘되는 것’[gignomenon, genesis : 이 말을 흔히 생성(生成)이라고 번역하는데, 독일 말로는 베르덴(werden), 영어로는 비커밍(becoming)으로 흔히 번역하는 것으로 보아 되는 것 또는 됨으로 번역하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을 이리저리 버무려 ‘같은 것[tauton〕’과 ‘다른 것[heteron〕’의 띠를 만들고 같은 것의 띠는 밖에 두르고 다른 것의 띠는 같은 것의 띠와 엇갈리게 해서 안쪽으로 둘러 이 우주를 질서 있는 것으로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하려다가 같은 것과 다른 것이라는 말에 걸려 곁길로 새고 말았는데요, 이제부터 그 이야기를 조금 더 하기로 하지요. 플라톤의 우주론에 관해서는 저보다 훨씬 더 지적인 능력이 뛰어난 많은 학자들, 특히 그 가운데서도 영국의 콘포드나 테일러, 또 프랑스의 브리송 같은 사람이 미주알고주알 자세히 해설해 놓은 터라, 제가 거기에 대해서 중언부언한다면, 그것은 마치 잘 그려 놓은 뱀의 몸뚱이에다가 다리를 그려 넣겠다고 부산을 떠는 꼴이 되기 십상일 겁니다. 그래서 지금부터 말하려는 것은 플라톤의 우주론이 지닌 존재론적인 의미(이렇게 쓰다 보니 정말 뭐 같아 보이는데, 겁먹지 않아도 됩니다.)에 연관된 토막 이야기라는 것을 미리 말씀드려 둡니다. 플라톤의 데미우르고스가 같은 것(또는 같음)의 띠로 둘러싼 이 우주의 밖은 잘 알려져 있다시피 시간과 공간을 벗어난, 따라서 운동(또는 변화)도 여럿〔多〕도 없는 초월적인 이데아(idea)의 세계입니다. 플라톤의 ‘이데아’라는 이 괴물은 천의 얼굴을 지닌 데다가 종잡을 수 없는 구석이 하도 많아서 플라톤 자신도 제대로 그 모습을 그려 내지 못하고, 이 괴물을 연구하는 학자들도 오십 보 백 보인지라, 이제까지 이 괴물을 둘러싸고 수십 권(어쩌면 수백 권이 될지도 모릅니다.)의 책, 수천 편의 논문이 나왔지만 아직까지 이 괴물의 정체를 제대로 알았다거나 이 괴물을 사로잡았다는 말은 들어 보지 못했습니다. 떠도는 풍문에 따르면 이 이데아라는 괴물들의 왕은 ‘좋음’의 이데아라는데, 그 밑에 무수한 괴물들이 이 왕을 떠받들고 있다고 합니다. 어떤 놈들은 ‘사람’, ‘개’, ‘소’, ‘말’, ‘지렁이’, ‘바퀴벌레’, ‘쇠똥구리’…… 같이 천하기 짝이 없는 이름을 지니고 있고, 또 어떤 놈들은 ‘아름다움’, ‘참됨’, ‘용기’, ‘중용’, ‘거룩함’…… 따위의 제법 그럴싸한 이름을 지니고 있고, 또 다른 놈들은 ‘큼’, ‘작음’, ‘많음’, ‘적음’, ‘삼각형’, ‘동그라미’…… 같은 시답잖은 이름을 지니고 있다는데, 그 수가 이 우주의 삼라만상에 붙인 이름보다 더 많아서 이 괴물들을 제대로 먹여 살리자면 ‘좋음’이라는 이데아계의 임금이 아무리 마음씨가 곱다 한들 어디쯤까지 좋은 임금님으로 남을 수 있었겠습니까? 이 와글거리는 이데아라는 괴물들을 하나하나 붙들고 씨름하려 드는 건 마치 산더미처럼 쌓아 놓은 콩더미에서 콩알을 하나하나 골라 내 도끼로 뽀개는 짓과 진배없는지라 그런 일은 다른 할 일이 없는 한가한 분들께 맡겨 두기로 하고, 얼렁뚱땅 ‘이데아라는 놈들은 있는 것(또는 있음)이라는 하나의 괴물 몸에 생긴 두드러기들이다.’ 이렇게 말하고 넘어가기로 합시다. 아무튼 데미우르고스가 이 우주를 만들 때 이 괴물들을 보고, 그놈들을 본떠서 만들었다는데, 이 엉터리없는 이야기 속에 담긴 숨은 뜻이 무엇일까 하는 것이 제 관심을 끄는 문제라는 것만 알고 넘어갑시다.”

세상에! 철학 선생이라는 자가, 그것도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신줏단지처럼 모시고 다니면서 그것으로 밥을 벌어먹는 서양 고대 철학 선생이라는 자가 이렇게 제 쪽박 깨는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으니, 앞으로 하는 이야기가 씨알이 안 먹히면 그야말로 욕을 바가지로 얻어먹어 마땅한 노릇이겠지요.

 

 

 

과학자가 없는 과학 윤리(1)[대안도덕교과서]-7

과학자가 없는 과학 윤리(1)[대안도덕교과서]-7

 

 

강경표(중앙대학교)

 

*이 글은 삼인출판사에서 출판 될 대안도덕교과서(가제)의 일부를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도덕 교과서에는 ‘문화와 도덕’이라는 영역이 있습니다. ‘문화와 도덕’은 ‘진정한 아름다움이 무엇인가’로부터 시작해서 ‘예술이 주는 도덕적 감수성’의 문제를 지나, 갑자기 ‘과학과 도덕’이라는 다소 어울리지 않는 챕터로 마무리됩니다. 과학도 하나의 문화 현상이라고 한다면 이러한 분류도 타당하겠지만 다소 생뚱맞아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혹시 교과서를 만드신 선생님들이 하지 못한 다른 이야기가 있는 것은 아닐까요? 이제부터 우리는 도덕교과서 속에 숨겨진 과학 이야기를 시작해볼까 합니다.

 

도덕, 과학에 활을 겨누다

과학은 가치중립적인가를 묻는다면, 과학 자체는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E=mc²이라는 수식은 그 안에 아무런 도덕적 가치를 포함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수식을 이용해 질량을 에너지로 바꾼다고 할 때, 그 에너지를 만들어 내고 사용하는 과학자의 행위는 가치중립적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 과학자가 살고 있는 시대, 문화, 역사, 환경, 정치, 신념에 따라 과학자의 행위가 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도덕 교과서에 나오는 ‘과학과 도덕’에서는 사실 과학자가 지켜야 하는 도덕을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과학자가 되고 싶은 학생들에게 과학자가 지녀야 할 도덕적 태도를 이야기해 주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과학자는 우리 사회를 파괴할 수 있는 강력한 힘을 만들어 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영화나 만화 속에 등장하는 악당 과학자들은 항상 지구를 파괴하거나 세계를 정복하는 꿈을 갖고 있으면서 무시무시한 무기를 만들어 냅니다. 자신이 가진 과학의 힘을 과시하지만 도덕 능력은 빵점입니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는 영화 속에나 존재하는 이야기이고 현실의 과학계는 매우 복잡한 양상을 보여줍니다. 사실 과학계의 상황을 고려할 때 과학자 개인의 윤리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국가의 과학관, 자본과 과학의 문제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과학과 도덕’은 이런 문제를 외면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도덕 교과서의 출발이 국가가 원하는 인간상을 그려내는 것을 목적으로 출발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과학과 도덕을 이야기하면서도 과학을 반영하지 못하고, 엉뚱한 결론에 빠질 수 있는 생각들이 대안으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도덕 교과서에는 과학 이야기가 등장하는데도, 왜 교과서를 만들 때 과학자 또는 과학을 알고 있는 사람이 한명도 참여하지 않았을까요? 과연 도덕은 모든 학문을 능가하는 것일까요? 정말 과학자가 도덕을 배우지 않는다면 모두 악당이 될까요? 예술은 도덕적 감수성을 키우지만 과학은 도덕에 따라 움직여야만 하는 학문일까요?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 질문들 속에는 우리의 도덕 교과서가 두려워하는 것이 들어 있습니다.

도덕 교과서는 새로운 힘을 가질 수 있는 존재들을 두려워합니다. 프란시스 베이컨(1561-1626)의 말처럼 ‘아는 것은 힘’이고 이때 ‘아는 것’이란 과학 지식을 의미합니다. 과학은 물질을 다루는 새로운 지식을 찾아내고 만들어 내는 능력이 있습니다. 과학자들은 이런 새로운 지식을 발견하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때로는 무모하기도 하고, 목숨을 위협할 정도로 위험하기도 합니다. 아무도 모르는 것을 새롭게 발견하기에 생길 수 있는 문제입니다. 예를 들어 보면, 예전에는 인터넷이 없었습니다. 사이버 공간도 없었지요. 그러나 현재 우리는 이 사이버 공간에서 다양한 활동을 합니다. 또 하나의 사회가 만들어진 것이지요. 사이버 공간도 사회적 성격을 지니기에 많은 도덕적인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발생하는 도덕적인 문제는 우리가 기존에는 경험해 보지 못한 것이 있기 때문에 전통적인 방식으로 해법을 찾아내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이버 윤리’라는 새로운 영역이 탄생을 하게 되는 것이지요.

흥미로운 것은 도덕 교과서에는 과학자들의 행동을 전통적인 도덕 안에서 규제하려고 한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 과학자들의 양심만 올바르면 된다는 식입니다. 그러나 과연 과학자 개인을 겨냥한 도덕의 활만으로 과학을 통제할 수 있을까요? 또한 과학자가 지켜야할 규칙이 과학자의 참여가 없이 만들어진다면 그 규칙을 지켜야만 하는 사람들은 불만이 생기지 않을까요? 이제 이런 문제들을 하나씩 살펴봅시다.

 

‘신과학운동’이 과학 윤리인가?

 

우리의 전통 문화 속에서 과학적 사실을 밝혀내고 가치를 창출하는 것은 과학자에게도 의미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모든 과학적 사실을 전통적 사고에 기초해서 찾아내고 조화를 얘기하는 것은 불가능한 이야기입니다. 한때 전통적인 사유와 과학의 조화를 이야기하는 신과학운동이 현대 사회와 과학 문명의 대안이 될 수 있다는 생각들이 존재했습니다. 그런 생각들을 바탕으로 종교와 과학의 융합, 생태?환경운동이 촉발된 것도 사실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바탕으로 우리의 도덕교과서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습니다.

캐프라는 물리학을 동양사상과 비교하는 강연과 논문을 많이 발표하였는데, 그가 저술한 “현대 물리학과 동양사상”과 “새로운 과학과 문명의 전환”이라는 책은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며, 유럽과 미국에서 급속히 확산되고 있는 새로운 과학 운동, 녹색 운동의 이념적 기반을 마련해 줌.(중학교 도덕1, 미래엔 278쪽)

아직까지 대다수의 과학자들은 캐프라로 대표되는 신과학운동을 과학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신과학운동은 과학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신비주의적이고 초자연적인 현상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덕 교과서에는 신과학운동이 과학의 도덕적 대안 모델인 것처럼 제시되어 있습니다. 캐프라가 뛰어난 과학자는 분명하다고 해도 그 한 사람의 견해가 과학의 도덕적 대안이 될 수는 없습니다. 신과학운동에 대해 다른 교과서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습니다.

신과학운동은 현대 과학에 대해 반성하고, 새로운 의식을 가지고 새로운 세계관을 찾는 과학 사상운동이다. 신과학 운동자들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핵전쟁으로 인한 공포, 자연환경의 오염 등을 비판하면서 우리 삶의 터전이 황폐해진 원인과 책임이 과학 기술에 있음을 지적한다. 이들은 과학 기술의 사회적 책임을 말하거나 과학 자체를 거부하기도 한다. 신과학 운동은 동양사상이나 새로운 철학을 바탕으로 더욱 발전하였다. 과학은 관찰자와 관찰대상이 서로 연관되어 있고, 인간의 의식을 떠나서는 과학의 객관성은 존재할 수 없다고 본다. 신과학운동은 주관적인 것과 객관적인 것을 엄격히 분리시키는데 반대하고, 모든 사물들은 서로 연관되어 있고 모자란 부분을 채워주는 상호보완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고 말한다.(중학교 도덕2, 중앙교육진흥연구소 288쪽)

전통적 사유 속에서 도덕적 진리를 찾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과학을 동양철학적 사유 위에서 이해한다는 것이 매력적일 수 있을지 모르지만, 현장에서 과학 연구를 수행하는 학자들에게는 크게 설득력이 없습니다. 실제적인 과학 윤리는 과학 탐구 행위에 부합되는 내용으로 구성되어야 하는데 과학자들이 참여하지 않고서는 실제적인 과학 탐구 행위가 무엇인가를 알기는 어렵습니다. 또한 과학의 뿌리는 서양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동양의 전통과 과학의 조화가 마치 과학 윤리인양 이야기 하는 것은 현실 과학과 너무나 동떨어진 것은 아닐까요?

인간의 의식을 떠나 객관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사실을 밝혀낸 것도 과학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태양이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지는 것처럼 느끼지만 이는 지구의 자전에 의해 생기는 현상이지 우리의 의식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닙니다. 사실 우주와 자연에 대한 다양한 현상들은 과학에 의해 밝혀졌고, 과학은 그러한 사례들의 연관성을 합리적이고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삶의 근거를 동양철학적 사유에서 찾지 않아도 그 근거를 충분하게 제시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많은 도덕?윤리 선생님들은 (자연적) 사실로부터 당위를 도출하는 행위를 자연주의의 오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진화론이라는 과학이 발전하던 시대에 진화론에 매우 비판적이었던 조지 무어(1873-1958)라는 사람이 그렇게 주장했습니다. 이 주장은 동양과 서양을 막론하고 과학자들이 밝혀낸 사실로부터 당위를 도출하는 것에 반대하는 논리로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습니다. 철학적 당위 위에 놓인 과학은 좋은 과학이고 과학적 사실로부터 철학적 당위를 도출하는 것은 정말 불가능한 문제일까요?

신과학운동은 철학적 당위와 과학적 사실을 결합한 형태의 학문입니다. 그러나 다수의 과학자들은 신과학운동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인간의 행동을 연구하는 과학자들에게는 도덕 또한 인간의 행동을 설명하는 하나의 가설일 뿐입니다. 과학에서 가설은 실험을 통해 검증되어야만 합니다. 단순하게 전통이라는 이유로 도덕을 따르는 것은 과학적인 태도도 아닙니다. 이것은 과학자가 지켜야할 도덕을 만드는데 과학자가 참여해야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실제 과학자들의 생각이 반영되지 못한 우리의 도덕 교과서는 신과학운동을 마치 과학이 걸어가야 하는 모범적인 모습인양 이야기하고 있을 뿐입니다.

(2)에서 계속…

제 7장 노동과정과 가치 증식과정[자본론강독]-15

제7장 노동과정과 가치 증식과정

정리 : 김선이

 
□ 본문 발제(p.235263)
? 제1절 노동과정[또는 사용가치의 생산](p.235~246)
[자본가는 노동력을 사용하기 위해 구매한다] 노동력의 구매자는 노동력의 판매자에게 일을 시킴으로써 노동력을 소비한다. 노동력의 판매자는 실제로 활동하고 있는 노동력이 된다. 노동자가 자기의 노동을 상품에 대상화하기 위해서는 우선 자기의 노동을 사용가치에 대상화해야 한다. 그러므로 자본가가 노동자에게 만들게 하는 것은 어떤 특수한 사용가치(어떤 일정한 물품)이다. 사용가치의 생산이 자본가를 위해 자본가의 감독 하에 수행된다고 해서 그 생산의 일반적 성질이 달라는 것이 아니므로 노동과정은 어떤 특정 사회형태와 관계없이 고찰되어야 한다.

● 노동
노동은 인간과 자연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하나의 과정이다. 인간은 하나의 자연력으로서 자연의 소재를 상대한다. 인간은 자연의 소재를 자신의 생활에 적합한 형태로 획득하기 위해 자기 신체를 운동시킴으로써 외부의 자연에 영향을 미치고 변화시키며 동시에 자신의 자연을 변화시킨다. 이 과정을 통해 자신의 잠재력을 개발하며 이 힘의 작용을 자신의 통제 밑에 둔다.(p.235)

노동은 오로지 인간에게서만 볼 수 있는 형태의 노동이다. 노동과정의 끝에 가서는 그 시초에 이미 노동자의 머리 속에 존재하고 있던 결과가 나오는 것으로 노동자자는 자신의 목적을 자연물에 실현시킨다. 그 목적은 자기의 행동방식을 규정하며 자신의 의지를 이것에 복종시키는데 이 의지는 노동기간 전체에 걸쳐 요구된다. 더욱이 노동의 내용과 그 수행방식이 노동자의 흥미를 끌지 않으면 않을수록 노동자가 노동을 자기 자신의 육체적, 정신적 힘의 자유로운 발휘로서 즐기는 일이 적으면 적을수록 더욱더 치밀한 주의가 요구된다. 노동과정의 단순한 요소들은 ①인간의 합목적적 활동(노동 그 자체), ②노동 대상, ③노동수단이 된다.(p.236~237)

⇒ 노동은 인간의 노동력이 발현된 것, 즉 노동력의 작동인데 ①노동에 앞서 이미 인간의 두뇌 속에 실재하고 있는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의식적인 합목적적인 활동이다. 이 점에 있어서 인간의 노동은 거미나 벌이 그 집을 만들 때의 무의식적 본능적 활동과는 다르다. ②노동은 자연의 형태를 바꾸어 인간의 욕망을 보다 더 잘 충족시킬 수 있도록 하는 활동으로 그것은 무에서 유를 만들어 내는 활동이 아니다. ③인간은 노동에 의해 외부의 자연에 작용하여 자연을 변화시키고 인간의 욕망을 한층 더 잘 충족시킬 수 있는 형태로 바꾸지만 그와 동시에 노동을 함으로써 자신의 육체를 변화시키고 자신의 여러 능력을 발전시킨다. 두뇌를 발전시키고 언어를 만들어 내고 지식을 발전시켜서 유인원을 인간으로 진화시키는 것도 다름 아닌 노동이었다. ④노동은 인간이 살아가기 위한 자연적 필요사이며 없어서는 안 될 조건이다. 노동을 그만둘 때 사회는 멸망한다.

● 노동 대상
토지는 인간노동의 일반적 대상으로 인간의 수고 존재한다. 노동에 의해 자연환경과의 직접적 연결로부터 분리된데 불과한 물건들도 모두 천연적으로 존재하는 노동대상이다. 물고기, 원목, 광석 등이 그러한 것 들이다. 이와 반대로 노동대상 그 자체가 이미 과거의 노동이 스며든 것이라면 그것은 원료라고 부르는데 광석이 그것이며 원료는 모두 노동대상이 된다. 그러나 모든 노동대상이 원료인 것은 아니고 노동대상이 원료로 되는 것은 이미 노동에 의해 어떤 변화를 받은 경우뿐이다.⇒ 원료는 모두 노동대상이지만 노동대상이 모두 원료인 것은 아니다. 노동에 의해서 이미 그 형태가 바뀌어 진 것만이 원료이다.(p.237)

● 노동 수단
노동수단이란 노동자가 자기와 노동대상 사이에 끼워 넣어 이 대상에 대한 자기 활동의 전도체로서 이용하는 물건[여러 가지 물건들의 복합체]이다. 노동자는 여러 물질들의 기계적, 물리적, 화학적 성질들을 이용해 그 물질들을[자기 힘의 도구로서 자기의 목적에 따라] 다른 물질들에 작용하게 한다. 노동자가 직접 손에 넣는 것은 노동수단이다. (p.237)

토지는 그 자체가 하나의 노동수단이기는 하나 그것이 농업에서 노동수단으로 사용되기 위해서는 다른 많은 노동수단과 비교적 고도로 발달한 노동력이 전제되어야 한다. 노동과정이 조금이라도 발전하게 되면 특별히 가공된 노동수단을 필요로 한다. 노동수단의 사용과 제조는 인간 특유의 노동과정을 특징짓는다.(p.238)

? 노동수단표

광의의 노동수단 협의의 노동수단(생산 용기) 생산의 골격, 근육 계통(기계, 도구)
생산의 맥관 계통(관, 통, 바구니, 항아리)
기타, 목축용 토지, 비료제조에 있어서의 가축 등
노동과정에 필요한 일반적인 물적 조건 생산의 장소로서의 토지, 생산용 건물, 도로, 운하, 항만, 창고 등

? 광의의 노동수단
광의의 노동수단 중에는 협의의 노동수단 이외에 노동과정이 진행되기 위해 필요한 모든 물적 조건이 포함된다. 이리하여 노동과정에서는 인간의 노동이 노동수단을 사용, 노동대상에 작용하여 당초에 의도했던 대로의 변화를 노동대상 위에 일으킨다. 노동과정이 낳은 생산물은 인간의 욕망을 더 잘 충족시킬 수 있도록 형태가 바뀌어 진 자연물이다.

? 협의의 노동수단
협의의 노동수단(생산용구)은 노동자가 자신과 노동대상 사이에 개재시키는 그리고 그 대상에 대한 그들의 활동의 전도체로서 그를 위해 역할 하는 하나의 물건 또는 여러 물건의 복합체이다. 인간은 자신의 목적에 따라 하나의 물건을 다른 물건에 작용시키기 위해 물건의 물리적, 물리적?화학적 제 속성을 이용한다. 노동자가 직접 작용하는 것은 노동대상이 아니라 노동수단이다. 협의의 노동수단을 생산용구라 부르고 토지도 하나의 생산용구로 불렀다.

? 생산용구는 경제발전의 정도를 나타내는 지표이다.
협의의 노동수단의 발전수준은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의 정도를 측정하는 척도이며 인간이 달성한 경제발전의 정도를 나타내는 지표이다. 멸망한 경제적 사회구성체를 탐구하는 데 노동수단의 유물이 중요하다. 경제적 시대를 구별하는 것은 무엇이 생산되는가가 아니고 어떻게 어떠한 노동수단으로 생산 되는가이다. 노동수단은 인간의 노동력 발달의 척도일 뿐 아니라 사회적 관계의 지표이기도 하다. 노동수단은 인간의 노동력 발달의 척도일 뿐 아니라[사람들이 그 속에서 노동하는] 사회적 관계의 지표이기도 하다. 그리고 노동수단 중 역학적인 종류의 노동수단은[그 전체를 생산의 골격, 근육계통이라고 부를 수 있다] [예컨대 관, 통, 바구니, 항아리 등과 같이] 노동대상의 용기로 쓰일 뿐이고 생산의 혈관계통 이라 부를 수 있는 노동수단에 비해 하나의 사회적 생산시대를 훨씬 더 결정적으로 특징짓는다. 화학공업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p.238~239)

? 생산수단, 생산적 노동
노동과정의 수행에 필요한 모든 객체적 조건들은 더 넓은 의미의 노동수단에 포함될 수 있다.그것들은 직접적으로는 노동과정에 들어가지 않으나 그것들 없이는 노동과정이 전혀 행해지지 못하거나 불완전하게만 행해진다. 이러한 종류의 보편적인 노동수단은 역시 토지 그 자체이다. 노동과정에서는 인간의 활동이 노동수단을 통해 노동대상에 변화를 일으킨다. 노동과정은 생산물 속에서는 사라진다. 그 생산물은 하나의 사용가치이며 자연의 소재가 형태변화에 의해 인간의 욕망에 적합하게 된 것이다. 노동은 그 대상과 결되어 노동은 대상화되었고 대상은 변형되었다. 이 과정 전체를 그 결과인 생산물의 입장에서 고찰한다면 노동수단과 노동대상은 생산수단으로 나타나며 노동 그 자체는 생산적 노동으로 나타난다.(P.239~240)

어떤 사용가치가 생산물의 형태로 노동과정으로부터 나올 때 그 이전 노동의 생산물인 다른 사용가치는 생산수단으로 노동과정에 들어간다. 동일한 사용가치가 어떤 노동과정의 생산물이면서 동시에 다른 노동과정의 생산수단으로도 된다. 그러므로 생산물은 노동과정의 결과일 뿐 아니라 노동과정의 조건이기도 하다.(P.240)

물건들은 각각 여러 가지 속성을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그 용도가 각양각색일 수 있기 때문에 동일한 생산물이 아주 판이한 여러 가지 노동과정의 원료로 쓰일 수 있다. 동일한 생산물이 동일한 노동과정에서 노동수단으로도 원료로도 쓰일 수 있다. 소비를 위해 완성된 형태로 존재하는 어떤 생산물이 새로운 다른 생산물의 원료로 되는 일도 있다. 또는 노동이 우리에게 생산물을 주는 경우도 있다.(P.241)

요컨대 어떤 사용가치가 원료, 노동수단, 또는 생산물로 되는가는 전적으로 그 사용가치가 노동과정에서 행하는 특정한 기능[그것이 노동과정에서 차지하는 위치]에 의존하는데 이 위
생산물은 생산수단으로서 새로운 노동과정에 들어가면 생산물이라는 성격을 상실하며 다만 살아있는 노동의 대상적 요소로 기능한다. (P.241~243)

우리의 장래의 자본가로 돌아가 보자. 우리의 자본가는 그가 구매한 상품인 노동력의 소비에 착수한다. 다시 말해, 그는 노동력의 담지자인 노동자로 하여금 노동을 통해 생산수단을 소비하게 한다. 노동과정의 일반적 성격은 노동자가 노동과정을 자기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본가를 위해서 수행한다는 사실에 의해서는 물론 변하지 않는다.

노동과정은 자본가에 의한 노동력의 소비과정으로서는 두 가지의 독특한 현상을 보여주고 있다. ①노동자는 자기의 노동을 소유하는 자본가의 감독 하에서 노동한다. ②생산물은 자본가의 소유물이지 직접적 생산자인 노동자의 소유물은 아니다. 상품의 사용은 상품의 구매자에게 속한다. 그리고 노동력의소유자, 즉 노동자는 노동을 함으로써 실제로는 자기가 판매한 사용가치를 제공하고 있을 뿐이다. 자본가의 입장에서 본다면 노동과정은 자기가 구매한 노동력이라는 상품의 소비에 지나지 않지만 그는 노동력에 생산수단을 첨가함으로써만 노동력을 소비할 수 있다. 노동과정은 자본가가 구매한 물건과 물건 사이, 즉 그에게 속하는 물건과 물건 사이의 한 과정이다.
(P.244~246)

“사회의 탄생과 정치 혐오: 나는 왜 정치가 지긋지긋한가?” <광진정보도서관 아주 사소한 물음에서 시작하는 철학> 7

“사회의 탄생과 정치 혐오:?나는 왜 정치가 지긋지긋한가?”? <광진정보도서관 아주 사소한 물음에서 시작하는 철학> 7

 

조배준(한국철학사상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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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세월호 참사’와?‘인사 참사’의 사이에 있는 한국의 정치

*?한국정치의 수준과 사회의 구조적 병폐를 노골적으로 드러낸 한국사회의?‘쌩얼’; ‘수직적 위계사회’에서?‘수평적 자율사회’로 나아가지 못하고 뒷걸음질 치는 퇴행의 역사.

* ‘밀실?수첩 인사’의 참혹한 풍경,?유신잔당들과 국정원의 득세.

▷?세월호 침몰 사건 이후 우리는 슬픔과 분노를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가.

▷?국민의 생명도 지켜내지 못하는 무능력한 시스템과 부정의한 법적 체계에 대해 주권자로서의 자각이 담긴 질문b’국가란 무엇인가’.?그러나 이 질문의 한계.

☞?[물음]?우리가?‘정치’라고 부르는 것은 대체 무엇을 가리키고 있는가?

(일상언어의 용법?: ‘정치력’, ‘정치적인 사람’, ‘정치적 문제’, ‘국익’, ‘국민의 뜻’…)

▷?정치적 무관심,?정치 불신,?냉소주의적 정치 혐오는 어디에서 출발했는가.

▷?‘삼포세대’?젊은이들의 절망과 정치 무관심의 관계, ‘희망 없는’?사회의 도래.

* ‘유병언’만 잡으면,?세월호와 함께 침몰한 우리사회의 전도된 가치들도 회복되는가.

* ‘진보?vs?보수’?프레임의 함정을 더 깊이 파버리는 언론의 폐해.

* ‘세대’, ‘지역주의’, ‘부동산’에 종속된?‘정치 놀음’ :?노년 세대의 결집,영호남의?‘묻지마 투표’, ‘강남?3구’의 계급투표.
*?안철수의?‘새 정치’?담론의 관념성?:?한국정치의 문제 설정,?안철수라는 기표의 몰락,?이미지 정치-인지도 정치의 한계.

☞?[물음]?정치는 우리의 일상-삶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가?


IMG_1916-1▷?정치혐오의 원인?:?투표하는 날에만 주권자(주인)가 되고 평소에는‘구경꾼’이나?‘들러리’가 된 시민.?국민들이 정치에 불신을 가지는 것은 정치 자체를 부정하는 게 아니라,?정치가 민의와 민생을 대표하지 못하는 문제에서 기인함.

▷?‘정치판은 더럽고 치사하고 추잡스러운 곳’이라는 이미지가 대중에게 널리 유포될수록 이익을 얻는 것은 누구인가.

▷?국가 또는 정부와 착종되어 있는 정치.?결국 정치혐오의 끝은 정치에 대한 부정,?전체주의,?독재….?다시 물어보게 되는 질문,?한국에서?‘정치’란 정말 지긋지긋한 것인가.

* “정치꾼은 다음 선거 생각만 하고,?훌륭한 정치인은 다음 세대를 생각한다.”

*?권력투쟁,?정치공학,?선거공학,?권모술수와 음모, ‘차떼기’와 협잡,?이합집산과 줄서기?…?햇갈리는 정치의 속성.

☞?[물음]?정치인(꾼)들의 정치와 다른 우리들(국민?시민?민중?대중?인민……)의 정치는 왜 중요하며 어떻게 달라야 하는가??정치보다 더 중요한‘정치적인 것’의 발견은 어디에?

 

2. ‘정치 불신’의 사상적 기원?:?근대 국민국가 및 계약론 모델의 의의와 한계

(1)?사회계약론의 성과와 법적 권위

▷?근대 계약론이 함유하고 있는 권리 개념의 특징?: ‘주체적 권리’?개념을 전제함.

▷?고전적 자연권 또는 자연법 사상(아리스토텔레스, T.?아퀴나스) :?조화와 균형 추구,?자연과 인간세계의 모든 위계적인 질서를?’자연적인 것’으로 간주함,?사람들 사이의 몫의 비례적 배분으로 자연권(법)을 정의함.?정치란 사회를 구성하는 각 부분들 사이에 존재하는 질서의 표현,?정체공동체의 구성은 이미 존재하는 질서의 반영으로 제시됨(“인간은 정치적?사회적 동물이다’).

-?근대적 자연권 또는 자연법 사상(홉스,?로크,?루소) :?자연에 대한 개체주의적/기계론적 이해에 바탕함,?고립되고 고유한 개인이라는 토대 위에서 대부분의 근대 계약론자들은 자연권을 자신의 생명과 재산을 보존하고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 자신이 가지고 있는 힘을 사용할 수 있는 자유로서 정의함.?즉 개별 주체가 고유하게 갖는 어떤 속성,?특질,?권한,?능력으로서의 권리 개념을 창안함.?→?인간을 모든 사회적 결정들이나 위계질서로부터 독립해서 규정하여 모든 인간이 그 본성에 있어 동등하며 정치에 참여할 권리를 갖는다는 급진성을 띔.

-?근대 계약론의 혁신성?:?에서는 모든 개인들의 근원적 평등을 전제하고 이것이 정치의 토대라는 사실을 자연상태 이론을 매개로 보여주고 있음.?즉 자연상태의 인간이 가진 추상적?‘자연?본성(nature)’은 전-정치적(pre-politic)?단계를 가리키며 이것은 인간이 가진 정치성의 전제가 됨.

-?근대 정치철학의 최대의 성과?:?자연상태의 고립된 개인들이 갖는 비정치성에 관한 이론은 정치적 사유의 지평을 이동시켜,?정치를 근본적으로 새롭게 사유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놓음.?즉 근대 이전에는 정치의 문제가‘통치’나?‘지배’에 관한 이론이었던 반면에 사회계약론을 통해 이제 정치는‘권력의 기원’에 관한 문제로 전위되었던 것.?또한 인간의 본성을 선험적으로 규정(로고스를 지닌 인간은 이미 정치성을 가지고 있음)하지 않고,?그것을?‘구성된 것’으로 위치시킴.?어떤 도덕적 가치나 사회 초월적 가치에 정치적 문제가 종속되는 것을 차단함.

“인간들은 자유롭게,?그리고 평등한 권리를 가지고 태어났으며,?또한 그렇게 존재한다.?……?모든 정치적 연합의 목적은 제한할 수 없는 이 자연권을 보존하는 것에 있다.”

1789년?<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프랑스 국민회의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진리들을 자명한 것으로 간주한다.?즉 모든 사람들은 평등하게 창조되었다는 것,?그들은 양도할 수 없는 어떤 권리들을 창조자로부터 부여받았으며,?그 권리들에는 생명,?자유,?행복추구가 속한다는 것,?그리고 이러한 권리들을 보장하기 위해 통치체들이 인간들 사이에 설립되는데,?그것들의 권력은 피통치자들의 합의로부터 나온다는 것.”

1776년?<독립 선언>,?미국 독립의회

-?두 선언의 공통점?:?모든 인간들에게는 어떤 자연권들이 있으며,?모든 정치체는 이 권리의 보장에 그 목적이 있음을 밝히고 있음.?하늘이 부여한 인간의 권리가 사회적 합의에 의해서도 권리로 인정됨을 천명함.

-?두 선언의 차이점?: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은 주로 루소적 관점에서,?법을?’일반의지’의 표현으로 이해하면서 인민의 정치에의 참여를 정당화함. <독립 선언>은 자유주의적 관점에서,?주권에 저항하는 개인의 권리를 강조하면서 인권을 국가권력의 토대로서가 아니라 그것의 한계들을 지시하는 개념으로 파악함.?그런데 근대적 인권 개념은 근대 사회계약론에서 고유하게 제기되고 이해되고 있음.

– ‘근대 법적 실증주의’의 필연성 도출?:?위에서 설명하나 주체적 권리가 그 자체로,?즉 개념 규정상 개인들 사이의 사회적 관계를 지배하는 법칙들의 토대가 될 수 없는 한에서,?성문화된 시민법은 또 다른 토대,?즉 사회적 질서를 확립하고 그것을 보전하는 어떤?‘권력’을 상정해야 함.?계약론자들은 이 권력을 개인들로 확립된 주체들의 자연권으로부터 이끌어내야 했는데,?그들이 여기서 사용한 개념이 바로?‘합의’-자신이 보유한 자연권을 양도 또는 위임하는데 동의 또는 합의했다는 계약을 한 것으로 가정함-이다.

-?자연권(법)과 실정법의 주객전도?:?이제 새롭게 구성된 이 권력은 형식적으로나 원칙적으로나 자연권들의 응축과 집중으로 나타남.?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응축된 권력,?위임된 권력이 독립적이고 초월적인 지위를 확보하면서 이제 역으로 자연권의 내용과 범위를 규정하게 된다는 것이다.?즉 실정법은 개인들의 권리로부터 독립성을 확보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권리 내용 전체를 구성할 권한을 갖게 됨.?한마디로 말해 애초의 자연권은 이제 실정법 속에서 해소됨.

-?저항권의 범위와 한계?:?물론 근대 계약론 모델에서 주권(sovereignty, sovereign power)에 대한 비판과 저항이 원천적으로 배제된 것은 아니다.?로크의 경우,?자연권(생명,?자유,?재산의 보존과 보장)의 보장을 목표로 하는 법이 그것에서 벗어나게 될 때,?주어진 법에 대한 저항은 개인의 권리(저항권)로서 인정됨.?그러나 법이 원리적으로 자연권의 보장으로서 정의되고,?더 나아가 자연권에 대한 독립성을 가지는 한에서 실제로 저항의 권리는 한갓 허울에 불과할 수 있는 위험을 갖고 있음.

(2)?사회계약론의 한계?: ‘인권’과?‘시민권’?구별의 모호함

-?계약론이 내포하고 있는 법적 실증주의의 영향?:?인간은 한 국가의 국민이 되는 한에서만,?또는 한 사회의 시민이 되는 한에서만 자신의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누릴 수 있게 됨.?즉 인권과 시민권의 구별이 모호해지는 난점을 갖게 됨.

–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을 읽는 두 가지 방식?: ‘인권의 난점들(Perplexities od the Rights of Man)’ (한나 아렌트(H. Arendt),?『전체주의의 기원』)

①?‘인권?=?시민권’ :?인권은 특정 국가의 시민만이 누릴 수 있는 권리가 됨,?단순한 동어반복에 불과함.

②?‘인권?≠?시민권’ :?생물학적 존재로서 인간이 지니는 보장 받지 못하는 권리,?인권은 어떠한 권리도 갖지 못하는 사람들의 고유한 권리가 됨,?빈껍데기.

-?이에 대한 맑스(K. Marx)의 비판?:?여기서의 인간이란 실제로는 부르주아 사회의 구성원으로서의 인간이며,?그러한 한에서 인권이란 부르주아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자유롭게 추구할 권리,?이미 권리를 갖고 있는 자들의 권리일 뿐이라며 인권의 추상성과 허구성을 고발함.(『유태인 문제』)따라서 그에게 정치적 과제란 한갓 이름과 형식일 뿐인 권리와 현실 사이의 이 괴리감을 없애는 것이었음.?물론 그 과제는 바로 사회경제적 현실의 변혁.?맑스에게 인권은 하나의 이데올로기일 뿐.

-?아감벤(G. Agamben)의 비판?: ‘호모 사케르(homo sacer)’?개념을 통해 그는 시민이 되지 못하며 단순한 인간일 뿐인 인간,?주권 영역에서 배제되어 모든 권리를 박탈당한 인간을 설명함.?그에게 정치는 모든 것으로부터 박탈되어 한갓 생명일 뿐인 생명을 증거하는 일이 됨.

-?주권의 절대적 힘?:?주권은 자연권의 연장으로서,?자연권의 보장을 그 목표로 하고 있지만,?국가의 법적 권위가 보장하는 독립성을 획득하는 한에서 이제 주권은 자연권을 오히려 규정하고 제한할 수 밖에 없게 됨.?이성이 현실적으로 국가 이성에 의해 표현되고 독점되는 한에서 자연법은 오직 시민법의 제한 속에서 규정될 수 있을 뿐임.

-?자연권에 이미 내재한 법적 권위?:?이러한 사태는 궁극적으로 계약론자들의 자연권 개념 안에 이미 법적 차원이 내재해 있다는 사실로부터 도출됨.?자연법(natural law)은 이성이 발견한 규칙 또는 명령으로 간주됨으로써 법적 권위와 강제성을 갖게 되는 것.?이처럼 이성에 의해 발견된 자연법이 하나의 명령이듯이,?국가 이성에 의해서 포고되는 시민법 또한 명령의 의미를 지니게 됨.

-?법에 대한 근대적 이해?:?법은 논의되고,?이해되어야 할 대상이 아니라,복종해야 할 명령으로서 나타남.?여기서 자연법과 시민법은 구별되지 않고 결합하지만,?자연법과 달리 시민법은 강제적 힘을 가짐.?결국 자연상태라는 추상적 가정 속에서 고려되는 인간의 권리가 이렇게 이미 법적 강제 속에서 이해되고 있는 한,?인권은 법적 테두리 하에서 규정되는 시민의 권리와 구별될 수 있는 가능성을 상실함.

?(3) ‘인권의 정치’가 가진 전망?:?계약론의 해체를 통한 민주주의 및 정치의 원리에 대한 재정립

-?주권의 소환 불가능성?:?계약에 의해 성립된 것으로 간주하는 주권은 소환불가능한 것이며 그런 차원에서 주권은 독립적인 법적 지위를 갖게 됨.계약론자들은 자연권의 보장이라는 주권의 목적을 강조하며 그것에 합리성을 부여하여 주권의 절대성을 확립하고자 함.?그런데 주권의 절대성은 모든 결정과 판단의 권한을 주권에 종속시킴으로써 가능해짐.

-?계약론은 정치의 해방이 아닌 정치신학으로의 회귀? :?주권의 목적에 부합하는 것이 무엇인지 판단하는 기준은 주권의 외부에 있기 때문에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닫힌 구조가 만들어짐.?결국 실질적으로 주권자는 저항과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없는데,?슈미트(C. Schmitt)는 이 주권자의 절대성을 신의 절대성과 동일한 것으로 보고 홉스에게서 정치와 신학의 분리가 아닌 통합을 발견함.?→?투표로 자신의 모든 정치적 권리를 위임하는 시민 이외에 법적 틀 안에서 새로운 정치적 주체의 생산이 차단됨.

– ‘인도주의적 권리’로서 정의된 인권 개념의 함정?: ‘인도주의적 권리’가 절대적 희생자의 권리,?어떤 일상적인 법적 보호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의 권리인 한에서,?그 권리는 일상적 법질서를 뛰어넘는 절대적 개입의 권리(모든 권리보다 우위에 있는 권리)를 요청하게 됨.?결국 이것은?‘인도주의적 간섭의 권리’로 변질됨.?제3세계에 대한 미국의 제국주의적 개입의 명분이 됨. (인권 개념이 강자?기득권자?가해자의 약자?소수자?피해자 코스프레에 활용되기도 함.)

– ‘인권’을 구조하고 소외된 주체들의 정치를 활성화시키는 전략?:?아렌트나 아감벤에서 보았듯이,?인권을 시민권과 구별하기 위한 유일한 가능성으로서,?인권을 모든 권리를 박탈당한 사람들의 권리,?즉 텅 비어있는 권리로 규정하게 되면 역설적으로 제국주의적 논리에 빠질 수밖에 없다고 비판 받게 됨.?이에 대한 새로운 전략은 인권을 시민권과 구별되면서,?동시에 어떤 실재성을 갖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을 탐색하는 것.?발리바르와 랑시에르는 공통적으로 인권을 민주주의와의 직접적인 연관 속에서 이해함. (둘 모두 스피노자의 먼 제자이자,?알튀세르의 직계 제자)

즉 인권은 인간의 어떤 자연적인 고유한 성질로부터 설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역사적으로 획득되고,?상실되고,?재규정되는 어떤 것으로 바라 봄.그러면서도 동시에 인권은 어떤 특정한 역사적 상태에 국한되지 않는 어떤 초역사적인 것이기도 함.?둘 모두에게 있어 인권은 선언된 형식으로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어떤 물질성을 가지고 있다고 보며 인권을 뜨거운 감자처럼?‘정치적인 것’으로 재사유하며 민주주의 자체에도 균열을 가하려고 함.?결국 근대 사회계약론 모델에 대한 특정한 방식의 해체를 통해서 인권의 정치,?민주주의의 활성화,?정치의 재사유를 시도하고 있는 것.

-?이에 대한 발리바르(?tienne Balibar)의 돌파구?:?시민권과 달리 정식화될 수 없는 것으로 인권을 바라보면 그것은 어떤 실체적인 것이 아님.오히려 이것은 재해석에 대한 끊임없는 요구 그 자체인데,?이런 면에서 민주주의나 정의(Justice)?같은 정치적 개념들은 고정된 의미가 아니라 어떤‘무한성’으로서 시공간에 따라 지속적으로 재사유되어야 함.?이처럼?“민주주의에 특징적인 본질적 무한성”이 표현되고 있기 때문에 발리바르에게 인권은 민주주의나 정치와 동의어가 됨.?그는 민주주의의 원리로서 이 인권을‘평등한 자유’?혹은?‘평등-자유’라는 개념으로 표현한다.?결국 그에게 인권은 인간에 대한 자연적(전-정치적)?규정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시민상태에 내재하고 있는?‘정치적 계기’이자?‘정치의 장소’로서 재규정됨.

-?이에 대한 랑시에르(Jacques Ranci?re)의 돌파구?:?그에게서도 인권은 어떤 자연성이나 어떤 사회 및 경제적 결정들로부터도 정의되지 않는 것(계약론이 상정했던 인권?vs?시민권 그 어느 것으로도 환원되지 않음)임.인권이 정치의 원리,?민주주의의 원리라면 그것은 인권이 실현되어야 하고 달성되어야 할 어떤 목표(목적)나 이념이 아니라?‘원리가 아닌 원리’?혹은‘토대가 아닌 토대’가 됨.?그는 이것을?‘근본적 평등’?또는?‘아무개와 아무개의 평등’이라고 부르는데,?모든 위계적 질서는 모든 사회적 질서에 내재해 있는 이 근원적 평등에 기초해 있다고 봄.?따라서 랑시에르에게 있어 인권은 정치의 근원적 토대인 이 평등을 형식적으로 성문화한 근대적 산물이 되며,?이 인권을 정치적 주체화의 토대로서 이해함.

– ‘인권의 정치’의 의미?:?계약론에 근거한 근대 국가-정치의 현실적 지속과 더불어 새로운 정치적?이론적 상황들의 출현에 따라 여전히 인권의 문제는 중요한 정치적 쟁점이 됨.?인권을 정치적 문제로 사유하는 것의 의미는 단순히 인권의 범위를 넘어서서 주권 개념과 착종된 민주주의와 오늘날의 정치 개념 자체의 재정립을 추동함.

 

3.?교착상태에 빠져?‘죽어가는 민주주의’에서 어떻게 새로운 가능성을 찾을 수 있는가?

-?정치는 경제적 탐욕을 보전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신자유주의와 금융세계화의 심화 이후 국가의 개입이 증대하고 정치의 중요성이 대두되고 있지만,?자본주의의 발전에서 애초부터 국가의 독재적 개입이 중요했다.?사실 오늘날 자유민주주의의 모든 성과들은 하층계급의 투쟁을 통해 쟁취한 것이다.

-?정치는 진리의 영역이 아니다.

→?다양성이 각축하는 조정의 장으로서 설득,?토론,?논쟁,?그리고 제도화될 수 없는 민중의 자각적 참여가 중요하다.?민주정치는 새로운 관점과 입장의 주체를 늘 기다린다.

-?정치는 고착화된 형식적 지배의 영역이 아니다.

→?민주주의는 결코 완성된 체제나 제도가 아니라 끊임없는 재해석과 시험을 요구받는?‘과정’으로서의 정치제도이다.?국가화된 정치가 배제했던 사회의 영역,?즉 민주주의가 국가화된 정치의 외부와 만나는 경계가 바로?‘정치적인 것’의 발생 지점(소외된 자들이 주체화되는 장소)이자 주체화하는 정치가 피어나는 지점이다.?민주주의는 끊임없이 재발명을 요구한다. (우리는 민주주의의 발전을 위해 용산,?강정,?밀양,?진도 앞바다를 쉽게 잊어서는 안 된다.)

-?정치에서 새로운 세상에 대한 희망을 어떻게 찾을 것인가?

(한국적 상황?: ‘87년 체제’의 극복을 위한 과제)

 

마르크스의 물신숭배 이야기 <광진정보도서관 아주 사소한 물음에서 시작하는 철학> 6

마르크스의 물신숭배 이야기??<광진정보도서관 아주 사소한 물음에서 시작하는 철학> 6

 

김광호(한국철학사상연구회)

 

4강-1

 

1.?들어가며

세월호 실종자의 구조를 기대하며,?하염없이?TV를 들여다보는 것은 일상이 되었다. 2014년?5월?15일 한겨레 신문의 톱기사 제목은?‘돈이 곧 매뉴얼이 된 한국사회’다.?기사는 박정희식 개발?30년과 신자유주의?20년의 병폐가 터진 것으로,?시장과 이윤의 논리에 압도된 시대를 반성하고 사람의 가치를 중심으로 공공성을 생각할 때라고 주장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은 사회뿐만 아니라 개인의 삶의 중심이다.?미국연방준비은행의 이자율은 세계경제의 방향타이며,?한국은행의 이자율은 한국경제의 흐름을 보여준다.?대출금이 많은 사람의 경우 이자율이 오른다는 것은 한숨 나오는 뉴스일 것이다.?이처럼 한 사회에서 돈의 흐름을 둘러싼 정책들은 각 경제주체들의 이해와 활동방식에 영향을 준다.?반면에 책상물림인 나에게 일용품을 구매하는 수단일 뿐이다.?나의 욕구와 돈은 반비례하는데,?돈이 없는 경우 나의 검소함을 위로하며 산다.?이처럼 일상생활에서 돈은 나의 욕구와 생활방식을 규정하는 중요한 척도이다.

돈에 환장하는 이유는 자본주의 경제사회뿐만 아니라 일상적 삶의 중심이기 때문이다.?물론 어떠한 행동이 환장하는 것인지는 명료하지 않다.?이집 저집 밀려가는 것이 싫어 집을 사기 위해 수전노처럼 살아가는 것이 그러한 것인지,?대박을 꿈꾸며 주식시세를 하루 종일 들여다보고 있는 것이 그러한 것인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다만 교황의 말처럼 노숙자의 죽음보다 주가하락이 더 큰 뉴스가 되는 것이 일상화된 사회가 환장한 사회는 아닌지 생각해봄직하다.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한참 진행 중이던?19세기 화폐 물신성에 대한 통찰을 보여준 사람이 있었으니 칼 마르크스(1818-1883)다.?근대 공산주의 이론가이자 혁명가로 알려진 그가 말년에 집중했던 문제는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비밀을 파헤치는 것이었다.?그 성과물이 오늘날 [자본]으로 전해진다. [자본]에서 화폐의 물신성이 키워드는 아니다.?그것은 자본을 분석하기 위한 전제로 제시된 개념이다.?그러나 화폐 물신성은 자본분석을 위한 개념틀로만 머물지 않고,?자본주의 가진 화폐에 대한 물신성에 대한 비판적 성격 또한 갖고 있다.

여기서는 마르크스가 [자본]에서 서술하고 있는 화폐물신성의 설명과정을 간략하게 소개하고자 한다.?현대 자본주의가 발달하면서 마르크스의 [자본]은 잊혀진 고전이 된 인상이 든다. [자본]을 둘러싼 수많은 논쟁과 사상가들 또한 오늘날 잊혀져가고 있기 때문이다.?그러나 화폐물신성으로 발생하는 여러 사회 병리적 현상에 대한 진단에는,?자본주의의 구조적 비밀이 포함되어야 하기 때문에,?마르크스의 [자본]을 반추하는 것 또한 의미있는 시간이 될 것이다.

 

2.?자본주의의 세포인 상품:?사용가치,?교환가치,?가치

마르크스가 자본주의를 분석하기 위하여 제시하는 개념은 상품이다.?그는 생물학의 세포개념으로 비유한다.?그 이유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는 상품의 방대한 집적으로 나타나고,?개개의 상품은 이러한 부의 기본 형태이기 때문이다.?일상적으로 다양한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상품을 구매한다.상품은 그 속성을 통해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물적 존재이다.?이러한 물적 유용성을 마르크스는?‘사용가치(Gebrauchwert)’라고 부른다.?이러한 측면에서 상품은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유용물에 불과한 것처럼 보인다.?그러나 상품에는?‘교환가치(Tauschwert)’가 있다.?상품은 교환을 전제한 것으로 하나의 사용가치가 다른 종류의 사용가치와 교환되는 비율이 필수적이다.?이러한 상품이 가진 이중성을 마르크스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사용가치라는 면에서 상품은 일단 질(質)적인 차이를 통해서 구별되지만 교환가치라는 측면에서는 오로지 양(量)적인 차이를 통해서만 서로 구별되며,?이 경우 거기에는 사용가치가 전혀 포함되지 않는다.”

마르크스의 분석은 페티,?스미스,?리카도 등의 노동가치설을 발전시킨 사상가들의 지적 유산을 비판적으로 재구성함으로써 자신의 사상이 가진 고유성을 발전시킨다.?이러한 측면에서 상품을 고찰할 때 발견되는 신비로운 특징들이 부각된다.

마르크스의 고찰에 따르면 상품에서 사용가치를 제외시키면 노동생산물이라는 속성만 남는다.?이에 대한 설명은 다소 낯설다.?상품의 유용성이 사라지면 아무것도 없어야 하는데,?노동생산물이라는 속성을 발견하기 때문이다.?이것은 마르크스가 노동가치론에 근거하면서 동시에 상품분석에 추상적 통찰의 결과로 등장한다.?마르크스의 주장을 따라가면,?이 경우 상품을 생산했던 노동의 유용한 성격과 구체적 내용이 사라지면 상품은 모두가 동등한 인간노동일 뿐인?‘추상적 인간노동’으로 환원된다.?이렇게 노동의 구체적 형태가 사라지고 생산과정에서 인간의 노동력이 지출되었고 인간의 노동이 거기에 쌓여 있는 응결물이?‘가치(Werte)’?즉?‘상품가치(Warenwerte)’이다.?어떤 재화가 가치를 가지는 까닭은 추상적 인간노동이 그 속에 대상화되어(vergegenst?ndlicht)?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가 상품분석에서 추상적 인간노동을 통한 가치개념을 제시하는 이유는 상품의 가치가 교환가치의 분석을 통해서는 착시현상이 지속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노동가치론의 선배인 스미스나 리카도가 자본주의 분석에서 노동가치론라는 공리를 일관되게 발전시키지 못한 것은 상품의 교환가치를 통해서 가치를 규정하려 했기 때문이다.?경험적으로 상품은 다양한 교환관계를 통해 그 가치가 변동한다.?이 변동에 발생하는 오차로부터 상품의 가치를 규정할 경우 상품의 가치는 노동이 아닌 상품이 가진 물적 속성이나 상품교환에 따른 현상으로 규정된다.?마르크스는 이러한 변동과 혼란으로부터 상품을 규정하기 위해서는 상품규정에 노동의 구체적 형태가 사라진 추상적 인간노동으로서의 가치 개념이 필수적임을 발견한다.

이를 구체화하기 위하여 마르크스는 가치의 실체를 이루는 노동이?‘동일한 사회적 평균노동력’임을 주장한다. “한 상품의 가치와 다른 상품의 가치 사이의 비율은 한 상품의 생산에 필요한 노동시간과 다른 상품의 생산에 필요한 노동시간 사이의 비율과 같다.”?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개별 노동력이 아니라는 점이다.?즉?A라는 상품을?x라는 기업이 생산하는 노동력이 아니라는 점이다.

 

3.?노동의 이중성:?노동의 추상성과 구체성

이러한 상품의 이중성과 가치규정으로부터 마르크스는 노동이 가진 이중성을 설명한다.?노동의 이중성은 상품이 가진 비밀뿐만 아니라 아래에서 살펴볼 자본주의가 가진 신비로운 힘을 설명해주는 키워드다.?모든 노동은 한편으로 생리학적 의미에서 인간노동력의 지출이며,?이 동일한 인간노동 또는 추상적 인간노동이라는 속성을 통해서 상품가치를 형성한다.?다른 한편으로 모든 노동은 특수한 목적이 정해진 형태로서의 인간노동력의 지출이고,이 구체적 유용노동이라는 속성을 통해서 사용가치를 생산한다.?도식화하면 노동의 추상성은 상품의 가치를 규정하고,?노동의 구체성은 상품의 사용가치를 규정한다.

 

4.?가치형태 분석

마르크스는 가치를 가치형태분석으로 설명한다.?이 부분은 다소 지루하지만,?왜 상품의 세계에 화폐가 등장하는지를 설명하기에 필수적 장치이다.화폐가 교환의 유용성을 위해서 발생한 것이 아니라 상품의 가치형태의 필연적 결과물임을 설명하기 위한 논리적 장치이다.?마르크스 자신도 가치형태 혹은 교환가치의 분석이 화폐형태의 발생과정을 논증하기 위한 것임을 강조한다.

이 분석은?1.?단순한,?개별적인 또는 우연적인 가치형태, 2.?총체적인 또는 전개된 가치형태, 3.?일반적 가치형태, 4.?화폐형태로 구성되어 전개된다.

이 분석에 주목할 부분은?1.?단순한 가치형태의 분석이다.?왜냐하면 이후에 전개되는 형태들은 단순한 가치형태의 특징을 확장을 통해 전개된 새로운 형태이기 때문이다.?단순한 가치형태의 도식은?‘x량의 상품?A = y량의 상품B’이다.

여기서 전자를?‘상대적 가치형태’라고 부르고,?후자를?‘등가형태’라 부른다.여기서 초점은 좌변과 우변이 동일하다는 것이 아니라,?좌변은 우변을 통해서 표현된다는 점이다.?전자를 상대적 가치형태라 부르고 후자를 등가형태로 이유는 전자의 가치가 후자의 가치로 표현되기 때문이다.?물론?‘y량의 상품?B = x량의 상품?A’와 같이 바꿔서 표현해도 된다.?이 경우 상품?B가 상대적 잉여가치로 규정되며,?상품?A가 등가형태이다.?이 말은 결국 단순한 형태의 경우 수학적 등식은 교환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줄 뿐,?그 기능이 다르다는 점이다.?비유하자면,?상대적 가치형태가 나라면 등가형태는 거울인 것이다.?나의 얼굴은 스스로 볼 수 없는 것처럼,?거울이라는 형태를 통해서 자기자신을 확인한다.

2.?전개된 가치형태는 하나의 상대적 가치형태가 다양한 등가형태로 표현되는 것이다.?내가 여러 거울을 통해 자신의 얼굴을 보듯이,?하나의 상품이 많은 다양한 상품의 교환관계로 표현된다. 3.?일반적 가치형태는 전개된 가치형태를 뒤집은 표현이다.?여러 사람이 하나의 거울 통해 얼굴을 보듯이 다양한 상대적 가치형태들이 하나의 등가형태로 표현된다.?이 경우 등가형태가 하나로 고착되며,?상대적 가치형태를 표현하는 다른 상품과 자신과 구별된다.

화폐형태는 일반적 가치형태의 등가형태인 상품이 화폐로 규정되면서 다른 상품과 구별되는 형태이다.?이러한 화폐형태는 역사적으로 쌀,?철,?은,?금,지폐 등의 다양한 형태를 보인다.?화폐형태에 오면 등가형태가 완전히 독립하여 반대로 상품을 가치형태를 규정하기 시작한다.?우리가 물건을 사면서 이거 몇 킬로그램인가요라고 묻지 않고,?얼마인가요라고 묻는 세계는 이러한 형태의 전개를 전제한다.?커피?1잔과 삼겹살 반근이?5천원이라는 등가물로 규정되는 힘은 화폐형태에 와서 완성되는데,?이를 통하여 화폐는 상품의 다양한 속성을 하나의 교환가치로 환원시키는 힘을 발휘한다.

 

5.?상품의 물신적 성격과 그 비밀

상품의 물신적 성격에 대한 비판은 이러한 상품과 그 형태들의 분석들의 결과물로 소개된다.?마르크스는 상품이 가진 형이상학적인 교활함과 신학적 변덕으로 가득찬 물건이라고 주장한다.?위의 주장을 반추하면 상품의 신비적 성격은 상품의 사용가치나 가치를 규정하는 내용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상품형태는 노동이 갖는 사회적 성격을 노동생산물 그 자체의 대상적 성격인 양적인 관계로 보이게 한다.?이는 상품의 자연적 속성으로 보이게한다.따라서 총노동에 대한 생산자들의 사회적 관계도 생산자들 외부에 존재하는 갖가지 대상의 사회적 관계인 양 보이게 만든다.?이러한 착시현상을 통하여 노동생산물은 상품 즉 감각적이면서 동시에 초감각적이기도 한 물적 존재 또는 사회적 물적 존재가 된다.?그 결과 상품형태는 물체와 물체의 사이의 관계라는 환상적 형태를 취하게 된다.?마르크스는 이러한 현상을?‘물신숭배(Fetischismus)’라고 부른다.

상품의 물신숭배적 성격으로,?상품세계의 완성형태인 화폐형태야말로 사적 노동의 사회적 성격과 개별 노동자의 사회적 관계를 밝혀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은폐한다.?우리가 화폐에 대하여 환장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행위이지만,?우리가 살고 있는 삶의 지평을 알려주는 것은 아니다.

상품의 물신주의적 숭배가 신의 축복이나 악마의 저주나 권력자의 음모나 사상가의 천재적 상상력이 아니라면,?상품생산 및 화폐의 물신성은 인간 역사의 계기를 통해서 설명해야 한다.?이진경은 [자본을 넘어선 자본]에서 화폐의 성격이 근대적 통념과 반대로 시장적 성격이 아니라 국가적 성격에 기인한다고 주장한다. “화폐는 교환수단 내지 유통수단 이전에 지불수단으로 발생했으며,?교환수단으로서의 화폐는 내부시장이 아니라 국가의 대외교역에서 발생했다.?한편 국지적인 범위에서 유통수단으로,?등가물로 기능하던 복수의 화폐들은 국가적인 범위에서 국가가 발행하는 화폐를 통해서 하나로 통합될 수 있었고,?조세는 이러한 통합의 실질적인 조건을 제공했다.”?이러한 의미에서 화폐의 초월성과 권력은 국가의 초월성과 권력에 대응한다.

이러한 물신성으로부터 우리는 굴종하며 살아야할까??마르크스는 사회적 생활과정이 모습이 자유롭게 사회화한 인간의 산물로서 인간의 의식적이고 계획적인 통제 아래 놓일 때 비로소 그 신비의 베일을 벗는다라고 주장한다.?설명이 단편적인 이유는 [자본]의 핵심 주제는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비밀을 푸는 것이었기 때문이다.?그는 자신의 삶과 여러 저작을 통해서 자본주의의 임금노동관계를 철폐하고,?이를 통하여 구성되는 자유로운 개인들의 공동체를 통하여 이러한 물신숭배적 사회관계를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6.?노동과 노동력의 구분

여기까지의 분석은 자본주의를 분석하기 위한 예비적 고찰일 수 있다.?상품과 화폐의 존재 자체가 자본주의는 아니다.?중국 전국시대인 명도전(明刀錢)이 발견되었다고,?중국 전국시대를 자본주의 시대로 규정하지 않는다.유통수단으로서의 화폐는 화폐로서의 화폐일 뿐이다.?화폐가 상품의 신비로운 모습을 완성시키는 계기라면,?화폐가 자본으로 하는 것은 또 다른 사회-역사적 계기들을 경유한다.?자본으로서의 화폐는 자신의 증식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이다.?그것이 상품과 화폐 그리고 교환의 자연적 속성이 아니라면 자본증식의 계기는 따로 고찰되어야 한다.?일상적으로 생필품을 사기 위해 노동하고 저축하는 것은 나의 돈과 그 상품을 교환하기 위한 것이다.그러나 이윤,?이자,?배당,?임대료 등 다양한 형태의 돈을 벌기 위해 저축하는 것은 더 많은 부를 축적하기 위함이다.?이러한 측면에서 근검과 절약이란 도덕은 자기보존을 위한 최소한의 도덕일 수 있지만,?사회경제적 측면에서 그것은 자본증식을 위한 도덕이다.

노동가치론이란 공리로 자본주의 사회의 비밀을 파헤치고자 했던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적 부가 생산과정에서 발생함을 강조한다.?상품의 교환과정은 상품과 화폐의 형태변화에 불과하기 때문이다.?상업의 경우 상업이윤을 갖기 때문에 경험적으로 마르크스의 주장에 동의하기 힘들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상업이윤을 포함한 자본주의의 다양한 이윤형태들이 생산과정에서 발생한?‘잉여가치’의 배분과정으로 설명한다.?마르크스의 공헌은 자신이 말하듯이 노동의 이중성에 대한 통찰이다.?노동자는 노동의 결과물인 상품과 달리 그 자체로는 상품이 아니다.?여기에는 인간을 상품이란 사물로 규정하는 인간학적 거부감도 있겠지만,?무엇보다 자본주의 생산에서 노동력으로 표현되는 노동자의 특수한 존재양식이 그 자체로 가치로 규정하기 어렵기 때문이다.?따라서 자본주의적 생산에서 그것은 상품화 혹은 가치화되어야 한다.?쉽게 얘기해서 노동시장의 존재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필수적이다.?우리가 매일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직장으로 출근하는 이유는 자기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활동이지만,?부활된 노동력을 생산과정에 투여하는 자본주의적 생산활동에 참여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상품의 가치가 사회적 노동시간에 의해 가치규정이 되지만,?노동력은 상품화가 되어도 자신의 사회적 노동시간으로 규정되는 것이 아니다.마르크스는 노동력의 가치가 생물학적 최소치와 사회적 최대치 사이에 정해지는 노동력 재생산 비용으로 규정한다.?즉 노동자는 생산과정에서 발생한 정신적 육체적 피로를 회복하고,?기본적 생계를 위한 여러 가지 상품이 필요하다.?마르크스는 노동력의 가치를 이러한 비용으로 규정한다.?그렇다고 이러한 비용을 자연가격으로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역사적 다양한 조건들로 규정한다.?예를 들어 사회-역사적 생활수준뿐만 아니라 자본과 노동자의 세력관계에 의해 변동에 의해서도 노동력의 가치는 변화하는 것으로 규정한다.?물가가 낮아서 혹은 사회복지가 잘 되어 있어서 노동력 재생산이 비용이 상대적으로 저렴할 경우나 정치적으로 노동자의 힘이 자본의 힘을 견제할 경우 노동력의 재생산비용은 언제나 변화가능하다.

노동에 긍정성은 서양 역사에서 근대의 특징으로 등장한다.?노동가치론을 주장하는 근대사상가들은 부의 기원이 노동임을 주장한다.?철학자인 헤겔의 경우도 노동을 세계를 변화시키는 합목적적 활동으로 규정한다.?그러나 마르크스가 통찰하는 자본주의적 노동은 상품의 사용가치적 측면인 노동력의 사용일 뿐이다.?이러한 노동과 노동력의 구분은 마르크스가 자본주의의 비밀을 밝히는 키워드가 된다.

 

7.?자본주의의 비밀인 잉여가치의 생산

마르크스는 노동과 노동력을 구분한다.?도식화하면 상품의 사용가치와?(교환)가치의 구분은 노동력의 노동과 노동력의 구분과 대응한다.?이러한 구분을 통하여 자본주의적 생산과정을 고찰할 때,?마르크스는 노동력의 가치와 생산과정을 통해 가치화된 노동의 차이가 존재함을 밝힌다.?마르크스는 그 차이를?‘잉여가치’라 부른다.?또는 잉여가치를 착취도라고도 부른다.?그 이유는 노동자가 생산과정에서 가치화에 참여한 가치를 충분하게 보상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이 자본가의 비양심이나 부도덕성에서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임금계약상 사기나 아동노동 등 불법고용이 아니라면,?자본가는 정당하게 노동시장이란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임금을 지불하고 노동자를 고용한 것이기 때문이다.?자본가에게 노동력의 가치는 충분히 지불한 것으로 현상한다. 그러나 마르크스가 보기에,?노동력 가치인 임금과 생산을 통해 발생한 가치의 괴리는 노동자에게 충분하게 가치를 지불하지 않은 것 즉 잉여가치 혹은 착취라고 주장한다.

현상적으로 임금과 이윤은 대립한다.?이윤이 투자가치 대비 증가된 가치로 표상할 때,?비용의 한 측면인 임금은 이윤과 대립하기 때문이다.?현상적으로 동일한 이윤을 벌기 위하여 적은 비용을 지출하는 마법은 오늘날 누구나 선택할 수 있는 합리적(?)?경제행위인 것이다.

오늘날 비정규직의 양산은 노동시장의 유연화라는 정책과 법제도를 통하여 이뤄지고 있다.?동일노동에 대한 동일임금이란 형식적 평등의 규범도 지키지 못하는 비정규직의 양산이 사회적 양극화의 기본축임에도 불구하고 해결되지 못하는 이유는 더 많은 이윤보장을 위하여 생산비용 즉 노동력의 가치를 억제하기 때문이다.?반대로 축적되는 자본의 이윤과 임원진의 높은 연봉은 이러한 억제를 통한 이윤의 분할이다. 20%?대?80%의 사회에서,?이제1%?대?99%라고 사회적 양극화 현상을 비판하는 것은 이러한 현상이 아무리 합법적이더라도 정의롭지 못한 구조적 현상이 심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8.?나가며

물신숭배는 그 대상에 따라 다양하며,?여러 사회적 현상을 이 개념으로 고찰할 수 있다.?서양인들이 볼 때 우리사회의 제사문화 또한 물신숭배로 바라볼 수 있겠다.?개신교가 제사문화를 우상숭배라고 비판했던 것은 가부장적 제도 아래 신음하던 여성에 대한 억압을 비판하고 계몽하였다는 점을 부정하기는 힘들다.?아이러니는 일부 기독교가 자신들이 비판했던 물신숭배적 전통으로 회귀하는 것이다.?거대교회들의 갈등이 보여주는 모습은 교리에 따른 신앙자의 모습이라기 보다는 교회를 둘러싼 여러 이해관계의 투쟁을 보여준다.?이러한 현상을 자본주의적 물신성이 교회와 신앙에 미치는 힘으로 접근할 수 있다.

막스 베버(1864-1920)는 마르크스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지만 근대 사회의 무덤이 관료화와 사물화에 있음을 통찰한다.?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계몽의 변증법]을 통해 근대사회의 계몽적 힘에서 이성이 도구적 이성이 비판적 이성을 억압하는 이유를 설명한다.?한나 아렌트의 경우 [전체주의의 기원]을 통해 이성이 전체주의적 기원을 탐구하면서,?그 물신성을 비판한다.

오늘날 물신화되고 사물화된 인간관계의 모순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는 철학자가 던져야하는 질문이고,?이 극복방안의 실현을 위한 노력 또한 버릴 수 없는 과제이다.?그것이 원래 인간과 사회가 가졌던 고유성의 회복이던 그것이 가져야할 미래에 대한 약속이던 자본주의의 물신성을 넘어서려는 노력은 과거의 고유성이나 미래의 약속만이 아니라 오늘의 삶을 위해서도 멈출 수 없는 것이다.

 

법은 항상 바람직함이 될 수 있는가?(2)[대안도덕교과서]-6

법은 항상 바람직함이 될 수 있는가?(2)[대안도덕교과서]-6

 

 

김종곤(건국대학교)

 

*이 글은 삼인출판사에서 출판 될 대안도덕교과서(가제)의 일부를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3. 법과 습관 그리고 믿음

 

예를 들어 현재 도로교통법 제50조, 제67조, 제156조, 제160조에서는 안전벨트 착용과 그 처벌에 관해 명시하고 있습니다. 사실 1990년(경향신문 1990.09.19.)에 들어서면서 안전벨트 착용은 의무화되었습니다. 그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필자의 기억을 더듬어 보더라도 대부분의 차량 운전자들은 안전벨트가 자동차에 설치되어 있었으나 착용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안전벨트를 착용하지 않는 것은 불법도 아니고 더구나 옳고 그름의 문제도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안전벨트 미착용에 대해 대대적인 집중 단속이 이루어지면서 사람들은 처벌에 대한 두려움, 즉 적발시 벌금을 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불편하고 번거롭지만 안전벨트를 착용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점점 시간이 흐를수록 자동차에 올라타자마자 습관적으로 운전자는 안전벨트를 착용하기 시작하였고, 운전자가 착용하지 않을 경우 동승자가 안전벨트를 착용할 것을 권고하기 시작하였다는 것입니다. 물론 안전벨트를 착용하는 것이 안전을 위한 것이라는 생각하거나 적발시 벌금을 내야한다는 생각에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생각이라는 것은 어떠한 경우에서는 안 할 수도 있으며 의도적으로 거부할 수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 예에서 안전벨트에 관련한 법을 따르는 것이 ‘습관화’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를 설명하기 좋은 개념이 습관(Habit)라는 단어에서 파생된 ‘아비투스’(Habitus)입니다. 부르디외는 아비투스를 사회적인 것이 신체에 내면화되고 그것이 다시 사회화되는 것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친구의 생일파티에 초대를 받았을 때 ‘의례적으로’ 선물을 준비합니다. 이는 어느 날 자연스럽게 생긴 마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어느 때 부터인가 자신의 생일이 되면 부모나 주변사람들이 선물을 주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다보니 생일에는 선물을 주고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믿게 된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선물 증여는 사회적인 관습이 내 신체에 아로새겨진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동시에 자신 역시 친구의 생일에 선물을 주면서, 그 선물을 받는 친구도 자신과 같은 믿음을 가지게 합니다. 즉, 자신의 신체 또한 사회적 믿음을 만드는 것에 참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아비투스는 한편으로는 의식적인 측면에서 또 한편으로는 단지 생각이 아닌 무의식적인 것으로서, 둘 모두를 아우르는 개념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시 안전벨트의 예로 돌아가 봅시다. 그렇다면 법 제정 이후 안전벨트를 습관처럼 착용한다는 것은 사회적으로 그것이 바람직하다는 믿음을 자신도 받아들이고 그럼으로 해서 자신 역시 그것을 사회적 믿음으로 만들거나 강화하는데 동조하고 있다는 것이 됩니다. 이렇게 본다면 법의 내용이 바람직하든 혹은 그 내용이 문제가 있든지 간에 다른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바람직하다고 믿으며 자신도 모르게 따르게 된다는 말이 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의 믿음’이 결정적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이라면 당연히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슬라보예 지젝(Slavoj ?i?ek)이라는 철학자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은 예를 듭니다. 한 정신병자가 있었습니다. 그 정신병자는 자신이 옥수수 알갱이라고 생각해서 닭이 자꾸 자신을 쪼아 먹을 것만 같다는 불안감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몇 달 동안의 치료 후 이 환자는 완치판정을 받고 퇴원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날 이 환자는 자신의 주치의를 다시 방문하였습니다. 깜짝 놀란 의사가 이 환자에게 당신은 완치되었으니 다시 나를 찾아올 필요가 없다고 이야기하자 이 환자는 자신이 옥수수 알갱이가 아닌 것을 알고 있는데, 여전히 닭이 자신을 옥수수 알갱이로 알고 있으면 어떻게 하느냐면서 불안을 호소합니다. 이 이야기가 들려주는 바가 무엇일까요? 자신(정신병자)의 믿음보다 타인(닭)의 믿음이 우선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아무리 부정하려고 할지라도 타인이 믿는 바를 벗어나기가 너무나도 힘든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법을 절대적인 것으로 믿는다는 것은 우리의 ‘신체적인’ 습관에서 더 나아가 사회적 믿음을 나의 믿음 체계로 가지고 있다는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즉, 우리는 우리의 판단과 상관없이 법에서 규정하는 바를 이미 우리의 ‘양심’과 같은 것으로 우린 안에 받아들여 내면화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법을 어겼을 때에도 심리적으로 불편한 생각이 들게 되는 것입니다. 예컨대 아버지가 pc방에 가는 것을 금지시킨다고 가정을 해봅시다. 그것에는 나름의 합리적이 이유가 있을 수 있습니다. 게임을 너무 많이 하게 되면 학업에 영향을 준다던지 어른들의 담배연기 때문에 건강에 해로운 공간이라든지 말입니다. 하지만 pc방에서 게임을 하는 것은 그 어떤 것 보다 큰 즐거움이고, 그곳에 가지 않으면 하루 종일 다른 일에 집중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다 아버지의 금기 사항을 어기고 pc방에 가서 신나게 게임을 합니다. 하지만 게임을 하는 동안에도 아버지에게 발각될까봐 불안하고 집에 돌아와서도 왠지 아버지를 보는 것이 껄끄럽습니다. 이 아버지를 법이라 생각해보세요. 아버지의 금기 사항을 듣고 머릿속에 기억하듯이 법은 우리 안에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법은 단지 ‘나’의 외부에 혹은 법전(法典)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내부에 들어와 ‘나’를 감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법 물신성이라는 측면에서 법을 절대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며 준수하고 또 그것을 위반하였을 경우 왜 불편함을 느끼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이는 다음의 두 가지 결론에 이르게 합니다. 첫째, ‘법=바람직함’이 항상 성립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법은 항상 바람직함이라고 볼 수 없다는 것, 그것은 바람직할 수도 있고 바람직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둘째, 그 어떤 법이 불합리한 ‘법’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을 거부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우리는 법 그 자체를 신뢰하면서 신체적으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중요한 것은 ‘법=바람직함’이라고 여기는 우리의 믿음 체계가 문제가 된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거부되어야 하는 것은 ‘법은 법이니까’와 같이 법 자체를 절대적인 것으로 신뢰하는 것입니다.

 

4. 안티고네의 저항과 민주주의

 

고대 그리스의 비극작가 소포클레스가 쓴 희곡 《오이디푸스왕》에서 안티고네는 종종 법 물신성에 대해 저항한 인물로 해석됩니다. 안티고네는 오이디푸스와 이오카스테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그녀에게는 폴리네이케스와 에테오클레스 두 오빠가 있었습니다. 오이디푸스는 나중에 자기도 몰던 사실이지만, 자신을 버린 아버지 라이오스를 죽이고 어머니 이오카스테와 결혼한 것을 알고 심한 죄책감에 스스로 눈을 찌른 후 테베를 떠납니다. 이 후 폴리네이케스와 에테오클레스는 교대로 테베를 다스리기로 하지만, 에테오클레스가 먼저 약속을 어기고 폴리네이케스를 추방시켜버립니다. 폴리네이케스는 아르고스로 망명해 그곳의 공주와 결혼 한 후 군대를 이끌고 테베를 공격하게 됩니다. 이 전쟁에서 폴리네이케스와 에테오클레스는 일대일 대결을 벌였지만 결국 둘 다 죽게 되고 말지요. 이 과정에서 크레온은 왕이 되고 에테오클레스는 선왕으로서의 예를 갖추고 성대하게 장례를 치루지만 테베의 입장에서 적인 폴리네이케스는 들판에 방치해 짐승이 뜯어먹도록 명령하였으며, 누구든지 그의 시체를 장례치루고자 한다면 사형에 처한다는 포고령을 내렸습니다. 하지만 안티고네는 그것을 어기고 오빠 폴리네이케스의 시신 위에 흙을 뿌려 덮었고, 결국 그녀는 국왕의 명령을 어긴 죄로 크레온 왕 앞에 끌려가게 됩니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리 죄인이라고 할지라도 혈육의 시신을 매장하는 것은 크레온의 명령 보다 우선하는 신의 율법이라고 항거합니다.
 

오빠의 시신을 수습하는 안티고네/ 출처: www.redian.org

오빠의 시신을 수습하는 안티고네/ 출처: www.redian.org


 

이 희곡에서 크레온의 명령과 포고령은 국가의 법에 비유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안티고네가 그것을 위반한다는 것은 죽음을 불사하면서까지 그녀가 지키고자 하는 그 무엇이 있다는 의미가 됩니다. 그녀의 말처럼 죽은 형제의 시신이 처참하게 들판에 버려져 있다는 것은 참을 수 없는 고통이 될 수 있습니다. 더구나 폴리네이케스는 에테오클레스가 배신하는 타국으로 쫒겨가야 했다는 점에서 그녀에게 있어 아픔입니다. 그렇기에 국가의 법이 어떠하든지 간에 그것에 저항하고 오빠의 죽음을 애도하고 매장하는 것은 그녀 내면의 ‘바람직함’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우선 법이 그 국가 속에서 살아가는 구성원들이 바람직하다고 여기는 것과 완전히 일치하지 않을 수 있다는 의미를 지닙니다. 또한 그것은 법 물신성이 완전히 성공하지 못하는 지점이 있다는 것을 말해주기도 합니다. 안티고네가 믿는 바람직함이 법은 항상 바람직하다는 논리를 넘어서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더 중요한 것은 안티고네가 오빠의 장례를 치러야 한다는 욕망이 법은 그 자체로서 바람직하며 반드시 준수되어야 한다는 명제 혹은 그러한 믿음에 대해 저항의 힘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민주주의 문제와도 직결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한 공동체 내에서 살고 있지만 그 어떤 법은 누군가에게는 고통을 안겨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친북행위나 반국가적 활동에 대해 처벌하는 규정들을 담고 있는 ‘국가보안법’이 있습니다. 이 법은 종종 정치적 목적에서 악의적으로 국가권력에 의해 폭력적으로 사용되곤 하였습니다. 물론 법 그 자체는 문제가 없는데 그것을 이용하고 판결하는 사람이 문제라고 반론을 제기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은 법을 해석하거나 적용하는 사람이 완전할 수 없다는 문제점을 스스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람이 문제가 되기에 그러한 실수를 하지 않는 사람으로 바꾸면 문제는 해결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 법이 있고 이를 누군가가 해석, 적용하는 한 이러한 문제는 지속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에 세상 어디에 오판을 하지 않는 법이 있는가라고 또 한번 반론을 제기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러한 오판이나 오용이 발생하지 않도록 법 그 자체를 수정하고 보완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 합당하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않고 그 법의 지속만을 주장하는 것은 법에 대한 숭배에 다름 아닌 것입니다.

이와 관련한 재미있는 논쟁 중 하나를 보도록 하지요. 국가보안법을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입장에서는 그것이 표현의 자유와 권리 등의 기본권을 침해할 우려가 있다는 점을 하나의 이유로 들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반박으로 한 논자는 「국가보안법의 쟁점에 대한 바른 이해…」(www.konas.net)라는 글에서 우리 헌법 제37조 제2항에서 “국민의 모든 자유와 권리는 국가안전보장·질서유지 또는 공공복리를 위하여 필요한 경우에 한하여 법률로써 제한 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기 때문에 걱정하지 말라는 논리를 편고 있습니다.

이는 헌법이 법률 체계 상 가장 상위의 법이기에 그 하위법인 국가보안법이 문제가 되면 통제를 할 수 있다는 의미로 이해하면 됩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인간이 없습니다. 그냥 남아 있는 것은 ‘헌법’이고 그것 보다 힘이 약하다고 말하는 ‘국가보안법’만이 있을 뿐입니다. 지금까지 헌법에서 기본권을 규정하고 있지 않아서 국가보안법이 남용되거나 악용된 것이 아닙니다. 헌법에 기본권을 명시하고 37조와 같은 제한 규정을 두고 있다고 할지라도 법의 집행은 욕망을 지닌 ‘인간’에 의해 이루어져 왔습니다. 그렇기에 위와 같은 주장은 공포스럽게 까지 느껴집니다. 현실적으로 발생하고 있는 살아있는 인간의 고통을 헌법 제37조 제2항이 쓰여 있는 법전의 한 페이지를 찢어서 덮어주면서 조소하는 모습이 떠오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보지 않더라도 이런 식의 주장은 우리 헌법의 기본정신을 무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헌법 전문에는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담고 있는 것으로 명시하고 있습니다. 4·19혁명은 과거 이승만 정권이 정부 집권을 연장할 목적으로 부정개표를 한 것이 알려지면서 정권교체를 위해 전국적으로 일어난 반정부 항쟁입니다. 이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희생을 치러야만 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우리 헌법이 정의(Justice)는 법이나 정권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다수 민중들에게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이는 나아가 헌법이 안티고네와 같은 저항을 인정하는 정신을 담고 있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역설적이게도 우리 헌법의 정신을 그리고 역사를 잘 이해하고 있다면 위와 같이 철저한 법 물신성에 기초한 사고를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민주주의’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많은 이견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가 고통을 주거나 그 고통을 방치하도록 하는 법이 그 자체로 법이기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적어도 민주주의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법이 정의롭지 못하거나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판단될 때는 그것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이 오히려 민주주의입니다. 그렇기에 법을 숭배하는 것에 대한 저항은 곧 민주주의로 향한 걸음이 될 수 있다는 의미에서 매우 중요한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근대적 시민의 애국주의-나는 왜 싸이의 성공을 자랑스러워하는가? <광진정보도서관 아주 사소한 물음에서 시작하는 철학> 5-2

근대적 시민의 애국주의-나는 왜 싸이의 성공을 자랑스러워하는가??<광진정보도서관 아주 사소한 물음에서 시작하는 철학> 5-2

 

김성우(兀人고전학당 연구소장, ⓔ시대와 철학 편집위원장)

 

 

3.?서구의 추상적 보편주의적 윤리적 기획의 문제점

서구의 추상적 보편주의가 구체화된 자유주의적 윤리적 기획은 로크로부터 시작한다.?로크는 처음에는 규범 윤리학의 차원에서는 자연법에 의거한 도덕 규범의 구속력을 자연 신학적 방법으로 세우고자 했다.?그는 이 문제가 인식비판의 필요성을 함축한다고 생각해서?『인간지성론』에서 수학에 모델을 둔 증명 윤리학을 기획한다.?그러면서도 그의 윤리학의 전제는 창조자로서의 신과 신의 작품인 인간이다.5) 다시 말해서 그의 이성 윤리학도 기독교적 세계상 아래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런데 그의 이성 윤리학은 도덕 인식론을 기반으로 하는데 문제는 이 도덕 인식론이 그가 가상디로부터 물려받은 도덕 심리학(쾌락주의)과 갈등과 일으킨다는 데에 있다.?쾌락주의와 도덕 규범의 구속력이 비록 신의 영원한 보상과 처벌에 의해서 매개되지만 이는 처음부터 이질적인 두 요소간의 진정한 매개가 될 수 없다.?인간의 이기심(이해타산=합리성)과 수학과 같이 필연적이고 보편적인 도덕 규범의 구속력과 준수(도덕성)는 애초 쉽게 연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그래서 그는 증명 윤리학적 기획에 합당한 체계를 형성하지 못하고6) 다시 계시 윤리학(예수는 메시아였다)에 호소한다.?그는 철저하게 기독교적 틀 안에서 이성적인 도덕 철학을 기획했지만 이성은 이기심을 조절하고 억제할 수 없었다.?한편 그는 실제 행위(prudence)나 정치 기술의 차원에서는 광신주의자들과 독단주의자들을 비판하면서 지식의 한계를 정하면서 개연성에 기반을 둔 신념의 윤리학(처세술까지도 포함하는 넒은 의미의 윤리학)과 독사의 정치학을 주창한다.?하지만 이때의 이성은 확실한 도덕 규범이나 원칙을 알지 못하므로 이익을 계산하는 도구적 이성에 머물고 만다.

과연 이성이 수학과 같은 필연성과 보편성을 지닌 도덕 규범을 정초할 수 있는가??아니면 현대의 합리성이라는 말이 보여주는 것처럼 쾌락 계산의 수단으로 이성이 전락할 수밖에 없는가??로크는 전자의 물음에 대해서는 긍정하고 후자의 물음에 대해서는 부정한다.?하지만 로크의 자신의 생각대로 도덕 규범을 정초했는가??이에 대해서는 논자는 부정적이다.?로크는 도덕 규범과 관련해서 전형적인 합리론자의 면모를 지니고 있다.?그는 도덕 규범을 수학을 모델로 정초해보고자 한다.

그러나 이 기획은 두 가지 문제를 지닌다.?첫째로 도덕 규범은 수학과 그 성격이 다르다.?대체로 수학은 문화의존적이지 않지만 규범은 문화의존적이다.?따라서 수학의 윤리학에 대한 적용은 내용 없는 공허한 절차적 보편주의로 끝나고 만다.?그리고 수학의 논리적 필연성만으로는 도덕 규범의 구속력을 확보할 수 없다.?논리적 필연성과 윤리적 의무(obligation)는 서로 무관하다.?이런 이유로 로크는 기독교적인 심판하는 신을 그 의무의 원천으로 삼게 된다.?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신을 감성에 기반을 두고서는 이성적으로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이다.?이러한 도덕의 문제는 이성의 영역이 아니라 신앙의 영역에 속하고 만다.?이성은 이해관심(interest)과 신앙 사이에서 머뭇거릴 뿐 도덕 규범을 정초할 수 없다.

계몽주의 윤리학적 기획(이성적 윤리학 정초)이 붕괴된 지금 그 대안이라고 자유주의 윤리학자들이 제시했던 논리 실증주의의 이모티비즘이나 현대화된 칸트주의인 절차주의 윤리학도 문제가 있다.?전자는 윤리학의 이셩적인 형식을 부정하고,?후자는 도덕이란 공허한 형식에 불과하다고 본다.

 

4.?자본=네이션=국가

오늘날 세계화가 이루어지면 국민국가(네이션=스테이트)가 위기에 처하고 궁극적으로는 해체될 것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다.?그러나 기존의 마르크스주의처럼 생산 양식을 중심으로 세계사의 발전 단계를 구분하던 방식에서 벗어나,?가라타니 고진은 교환 양식의 관점에서 세계사를 본다.?이런 관점은 도리어 근대적인 국민국가가 원래 자본주의의 세계화 속에서 형성되었다는 점을 역설한다.?일례로 국민국가는 세계자본주의 안에서 양극화의 모순을 해결하려고 시도한다.?마찬가지로 네이션은 공동체와 평등성을 지향한다.?스테이트는 다양한 규제나 세금에 의한 재분배와 같은 정책을 추구한다.?이런 방향으로 네이션과 스테이트 모두 자본주의적 경제의 문제점을 해결하려고 한다.?이렇듯 자본주의 경제,?네이션,?국가의 세 가지 교환 양식들이 서로 대리보충이라도 하듯이 접합되어 있다.?그는 이를?‘자본=네이션=국가’의 세계체제라고 부른다.7)

그에 의하면?『정치경제학 비판 강요』에서 마르크스가 제시한 다섯 가지 사회구성체의 분류가 여전히 유효하다.?그러나 생산양식에서가 아니라 교환양식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각각의 사회구성체는 세 가지 교환양식(호수reciprocity,?약탈-재분배,?상품교환)의 접합으로 형성된다.?다만 서로 차이가 나는 것은 그 접합의 방식과 정도에 따른 것이다.?다시 말해서 지배적인 교환양식에 따라 사회구성체를 분류하면 다음과 같다.?씨족적 사회구성체는 호수(농업공동체 내부에서의 증여적인 상호시혜)가 지배적이다.?아시아적,?고전 고대적,?봉건적 사회구성체는 약탈-재분배(봉건국가)가 지배적이다.?자본주의적인 사회구성체는 상품교환이 지배적이다.

그런데 시민혁명(부르주아혁명)?이후 국민주권이 성립된 이후에도 절대왕정의 실체인 상비군과 관료기구가 살아남아,?여전히 약탈-재분배라는 교환양식이 근대국가의 핵심이 된다.?또한 비록 농업공동체는 상품경제에 의해 해체되지만 호수적 교환도 계급 대립과 모순을 넘어선 네이션이라는?‘상상의 공동체’(베네딕트 앤더슨)로 살아남는다.?이렇게 자본주의 사회구성체는 자본=네이션=국가라는 결합체(매듭)로 존재한다.8)

이와 같이 생산양식 대신에 교환양식으로 세계사를 본다는 것은 경제결정론처럼 경제를 하부구조(토대)로,?국가나 네이션을 상부구조로 보는 견해를 비판하는 것이다.?화폐나 신용의 세계도 경제적인 차원만이 아니라 종교적이고 환상적인 구조를 지니고 있으며 국가나 네이션이 비록 경제적인 의미의 교환은 아니지만 넓은 의미의 교환에 해당한다.9) 이런 점에서 화폐에 의한 상품교환이 지배적인 자본주의 사회구성체는 실제로 자본=네이션=국가라는 삼위일체(보로메오 매듭)로 이뤄져 있다.

헤겔?『법철학』의 힘은 이 보로메오 매듭을 구조적으로 파악한 데 있다.?그래서 국가주의자도 사회주의자도 내셔널리스트(민족주의자)도 자신의 논거를 헤겔에서 이끌어낼 수도 있었다.?또한 헤겔에 근거해서 각기 서로를 비판할 수도 있었던 것이다.?그러나 헤겔은 이런 매듭이 근본적으로 네이션이라는 형태를 취한 상상력에 의해 형성되고 있다는 점을 잊었다.?그래서 칸트와 마르크스와 달리 헤겔에게서는 이런 매듭이 지양될 가능성을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된 것이다.10) 그래서 가라타니 고진은?“자본=네이션=스테이트의 역사적 필연성을 제시하는 것에 그치면 헤겔적인 작업에 머무는 게”되므로 이 삼위일체의 구조(보로메오 매듭)를 넘어서기 위해 다시?“마르크스의 헤겔비판으로 돌아가 볼”?필요성을 강조한다.11)

마르크스의 작업은 헤겔의『법철학』에 대한 비판에서 시작된다.?그러나『자본론』에서 그는 자본주의 경제 전체를 밝히고 있지만,?국가나 네이션의 고찰을 결여하고 있다.?이런 이유로 마르크주의자들이 국가를 소홀히 여기거나 반대로『자본론』?이전의 국가론으로 회귀하려는 경향이 나타난다.12) 그러나 초기 마르크스로 되돌아갈 것 필요는 없다.?왜냐하면『자본론』에서 헤겔 비판이 진정으로 완성되었기 때문이다.?그런 이유로?『자본론』의 관점에서『법철학』를 재고하는 것이 긴요하다.?즉 자본만이 아니라 국가나 네이션을?‘경제적’인 구조로 파악해야 이러한 삼위일체의 고리로부터 나가는 출구가 발견될 수 있기 때문이다.13)

그런데『법철학』의 이러한 삼위일체에 대한 서술은 영국과 같은 선진국을 제외하면 오히려 앞으로 실현될 것에 대한 예언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오늘날에도 여전히 실현해야 할 과제로 남아있는 국가나 민족도 있다.즉 자본제=네이션=스테이트의 형성은 결코 쉽지 않다.?이 점을 이해할 때 이탈리아에서 그람시가 지도한 레닌주의적 공장 점거 투쟁이 파시스트에 의해 분쇄된 것은 파시스트가 내건 내셔널리즘의 마법 때문이다. 14) 레닌은 원래 네이션은 자본주의 경제의 발전이 통일 시장을 필요로 한 데서 기인한 것이므로 사회주의에서는 소멸된다고 본 것이다.?그러나 동구권이나 제3세계서의 사회주의 혁명이 민족해방운동과 거의 구분되지 않았다.?도리어 사회주의 혁명이 성공한 데는 파시즘과는 다른 의미에서 내셔널리즘에 호소했기 때문이다.?스탈린의 소련이 쉽게 국가주의로 전환되고 소련에 대해 다른 사회주의 국가들이 내셔널리즘으로 대항했다는 역사적인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국가주의나 민족주의가 막연한 인터내셔널주의를 외치는 사회주의의 덫이 된 데는 마르크스주의가 이러한 자본=네이션=국가라는 삼위일체의 존재를 간과했기 때문이다.15)

 

5.?새로운 공동체 윤리의 실마리

유교의 가족주의 윤리는 공적인 영역의 윤리가 발달하는 것을 막고 혈연,지연,?학연에 기초한 우리의 진입금지 사회를 조장하고 유지하는 데 기여하였다.?뿐만 아니라 우리의 배타적 애국심만을 조장하여 사대주의와 졸부주의로 세계화 시대에 걸맞는 윤리적 에토스를 기르는 데 장애가 되었다.?그래서 한때『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책이 화젯거리가 되었던 것이다.?우리의 모든 문제를 유교의 윤리적 기획의 탓으로 돌리는 것은 물론 발생학적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하지만 우리의 사회의 최대의 해악인?三緣주의를 극복하고 사적인 집단 윤리의식 대신에 공공적인 윤리의식을 기르기 위해서는 특정한 집단에 대한 사랑을 강조하는 유교의 윤리의 부활로는 부족하다는 것은 명백하다.?그렇다고 해서 추상적 보편성 즉 자유주의적 인권에 기반을 둔 서구 근대의 자유주의적 윤리적 기획이 성공한 것은 아니다.유교와는 반대로 서구의 근대 윤리는 원자론적인 사고 방식에 기본을 두고 있어서 진정한 의미의 공동체를 이룩하는데 실패했다.

서구의 근대적 자유주의적 인권 개념은 추상적 동일성에 기반을 두고 있다.이 추상적 동일성이 가장 잘 드러난 것이 수다.?수는 모든 것의 질적인 차이를 배제하는 추상화를 통해 기본 단위를 설정하고 이 추상적인 기본 단위(하나)를 기계적으로 결합하여 생겨난 것이다.?유럽의 근대 철학에서는 이 수가 개념의 모델이 된다.?다시 말해서 수를 모방할수록 그 개념은 개념다운 것이 된다.?반면에 수를 모방할 수 없는 개념 즉 추상적 동일성에 기반을 둘 수 없는 개념은 객관성을 결여하여 과학적 영역에 포함되지 않는다.이러한 사정을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는?『계몽의 변증법』에서 극적으로 제시한다. “수로 환원될 수 없는 것,?그리고 결국 하나로 될 수 없는 것은 계몽주의에서는 가상으로 인식된다.?현대 실증주의는 그것을 시의 영역으로 추방한다.?동일성은 파르메니데스로부터 러셀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해결하는 암호이다.?신들과 특성들의 파괴가 계속 주장되고 있는 것이다.”16)

근대적 인권 개념이 전제하고 있는 사회상의 핵심은 수가 마치 추상적으로 동일적 단위(하나)를 전제하듯이 사회도 추상적으로 동일적인 단위인 개인을 전제한다.?개인에 해당하는 라틴어 인디비둠(individuum)은 원자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아톰(atom)과 마찬가지로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것인 기본 단위를 의미한다.?단순 관념의 순열과 조합을 통해 복합 관념이 만들어지듯이 개인들이 합쳐져서 사회가 생성된다.?이 때 개인은 수의 하나와 마찬가지로 동질적인 추상적 동일성을 지닌 것으로 생각된다.?이 개인은 형식적으로 동등한 자유로고 평등한 성격을 부여받는다.?이 자유롭고 평등한 개인들의 세계가 바로 로크가 말하는?‘자연상태’이다.17) ‘자연상태’는 아직 정치사회(로크는 이 정치사회 즉 국가를 시민사회와 동일시한다)를 형성하기 이전의 사회다.?자연상태’와?‘시민사회=정치사회(국가)’라는 개념들은 분명히 개인을 전통과 권위에서 해방시켜?‘자유롭고 평등하고 독립적인’?존재자로 상정한 것은 인류의 보편적 성취의 한 단계를 구성한다.?하지만 변증법적 시각에서 보면 이는 아직 추상적 단계(헤겔)이고 기만적 단계(마르크스)이다.

이러한 서구의 추상적인 인권 개념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개인과 공동체에 대한 새로운 변증법적인 시각이 필요하다.?양적인 사고에서는 특수애인 가족애와 학교애 그리고 지역애 더 나아가서 국가애가 보편애인 인류애에 대립할 뿐 진정한 양자의 통일을 모색할 수 없다.?이는 보편애를 강조하는 서구 근대의 자유주의적 인권 개념뿐만 아니라 특수애를 강조하는 유교의 윤리관에도 해당한다.?유교식의 사적인 윤리와 서구 자유주의식의 공적인 윤리의 진정한 통합을 위해서는 새로운 윤리적 태도가 필요하다.?이러한 윤리를 새롭게 기획하기 위해서는 개인과 공동체를 대립적으로 바라보지 않고 양자의 상호작용과 상호침투를 강조하는 화엄불교의?‘相卽相入’의 관계론적인 존재론이 요구된다.?즉 개인의 실체성과 공동체의 실체성을 부정하고 개인과 공동체가 서로 연관되어 있고 각 단계의 공동체가 서로 중층구조를 이룬다고 보는 화엄의 존재론은 각 계기가 서로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존재의 조건으로 삼는 상호공존을 주장할 수 있다.?이 상호공존의 관계론적 존재론으로부터 배타적인 자기 정체성과 통합성을 극복할 수 있는 윤리적 태도를 도출할 수 있다.

새로운 윤리적 태도는 자아와 타자의 상호 존재가 서로 존재론적인 조건을 구성하므로 자아와 타자의 상호 인정을 요구하게 된다.?이 상호 인정은 상호 관용18)을 반드시 동반해야 한다.?이러한 상호 인정과 상호 관용의 태도를 통해 세계시민의식을 형성해야 유교적인 배타적인 가족애와 국가애를 인류애로 전환시킬 수 있다.?그리고 상호 인정과 관용을 통해서 추상적 동일성에 기반을 서구의 권리 담론의 배타성(권리는 반드시 독점과 배제를 수반한다)을 극복할 수 있다.?이방인의 배제가 아니라 이방인(가족이 아닌 사람,동문이 아닌 사람,?타지역 사람,?외국인,?소외된 사람 등등)에 대한 사랑은 바로 권리 담론의 원자론적 존재론으로도 유교의 가족주의적 공동체적 존재론으로도 확보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역사적으로 입증되었다.이방인에 대한 사랑이라는 기독교적 원칙은 신에 대한 사랑이라는 종교적인 기초를 통해서도 확보될 수 없다.?왜냐하면 현대는?‘탈마법화된 사회’(베버)로서 종교의 서사가 중세처럼 정당화의 권위를 지니지 못하기 때문이다.도리어 화엄의 관계론적인 상즉상입의 변증법적인 존재론이 이 원칙에 대한 가치 형이상학의 기초를 제공할 수 있다.?앞으로 우리는 이방인에 대한 사랑이라는 윤리적 태도와 이의 기초로서의 관계의 존재론을 통해서 고아 수출 일위라는 치욕적 가족중심주의와 선거 때만 횡행하는 지역몰표라는 망국적 지역감정과 학연에 의한?‘서울대 공화국’이라는 지위와 가치의 독점현상을 극복하고 세계시민의식이라는 세련된 매너와 태도를 지닌 윤리적 에토스를 형성하지 않으면 안 된다.?이러한 윤리적인 작업을 하기 위해서 우선적으로 푸코가 지적한 것처럼 전체화와 개별화를 동시에 추구하는 서구의 정치적 합리성과 자본=네이션=국가라는 삼위일체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그러면서 동시에 기존의 유교적인 차별성과 서열성을 극복해야 한다.

 

-주석-

5) 이에 대한 상세한 논의로는?James Tully,?A Discourse on Property(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0), pp. 35~43을 참조.

6)?그런 이유로 로크의『인간지성론』에 나타난 증명 윤리학에 대한 논의는 규범 윤리학으로 나가지 못하고 메타 윤리학적 논의에 머물고 만다.

7)?『세계공화국으로』, 16쪽.

8)?『세계공화국으로』, 49쪽.

9)?『트랜스크리틱』, 459쪽.

10)?『세계공화국으로』, 182쪽.

11) 가타리니 고진,?『세계사의 구조』, 조영일 옮김,?도서출판?b, 2013, 19쪽.

12)?『트랜스크리틱』, 449쪽.

13)?『트랜스크리틱』, 466쪽.

14)?『트랜스크리틱』, 467쪽.

15)?『트랜스크리틱』, 468쪽.

16) ?M. Horkheimer und T. W. Adorno,?Dialektik der Aufkl?rung?(Suhrkamp, 1984), p. 24.

17)?이 자연상태에서 모든 개인은 완전한 자유와 평등을 누리며 독립적인 개체로 존재한다(『통치론』, 4절~6절).?이 자연상태에서는 재판의 권위를 지닌 공동의 우월자(재판관)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정치사회와 구별된다(같은 책, 19절).

18) ?“윤리 주체의 확대와 관련된 덕목으로 말하자면,?단체나 조직의 윤리로의 확대가 국가주의나 민족주의로 변질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상호존중의 덕을 길러 나가야 하며,?새로운 의미의?‘관용’의 형성이 필요합니다. 18세기에는 그것은 남의 종교를 용인하는 것으로 확대되었습니다.우리는 한걸음 더 나가 타인의 이데올로기나 가치관에 대한 용인으로까지 그것을 확대해 가는 것이 공존의 원리로서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비로 여기에서 새로운 덕으로서의?‘이방인에 대한 사랑’이 성립합니다.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인간은 무원칙이 되고,?서로 헐뜯는 정도를 낮추어 일시적으로 타협을 즐길 뿐이며,?머지않아 이해를 달리하여 서로 다투게 될 것입니다.?그렇게 때문에 휴머니티(인간성)에 입각한 보편적 윤리의 가능성의 근거로서,?가치의 형이상학의적 사색을 심화시켜야 합니다.”?이마미치 도모노부,?『에코에티카』,?정명환 역?(솔, 1994), 11-2쪽.

 

니체 : 초인의 삶, 범인의 삶 –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도봉도서관 나이듦의 철학> 6

니체 : 초인의 삶, 범인의 삶 –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도봉도서관 나이듦의 철학> 6

연효숙(연세대)

 

 

1. 니체는 누구인가?

1) 니체, 망치를 든 해체의 철학자

망치를 든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 1844~1900)! 니체를 떠올릴 때 우리에게 가장 강하게 각인되는 말이다. 망치를 든 철학자는 망치를 갖고 무엇을 부수어 버리려고 했을까? 소크라테스 이래 면면히 내려 온 서구 형이상학의 전통, 권위의 위엄으로 무장된 전통 도덕, 구원을 약속한 기독교의 교리 등이 니체가 무너뜨리려고 했던 것일 것이다. 이러한 니체의 이미지는 굉장히 파격적이고 과격해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권위와 위엄의 허황된 그림자를 벗어던지고 자유롭게 살기를 원하는 현대인들에게 니체는 앞서 간 선구자요 해방자임에 틀림없다. 따라서 전통 철학의 중심적인 가치와 권위에 도전하고 해체하려고 했던 니체는 서양 근대까지의 전통 철학의 문을 닫고, 새로운 현대를 열고자 했던 개척자이다.

니체는 1844년 프로이센 제국(지금의 독일)의 뢰켄에서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루터파 목사였다. 어릴 때 아버지가 사망하여, 그는 어머니, 누이 동생, 할머니 등 여성들에 둘러 싸여 성장했다. 나움부르크에서 김나지움을 다닌 후, 1858년 프로테스탄트 학교인 슐포르타에서 고전학, 종교, 독일 문학 등의 엄격한 교육을 받았다. 이 때의 교육이 그의 그리스 이해의 기본 바탕이 되었다. 1864년 본 대학에서 신학과 고전문헌학을 공부했으나 오래다니지 못하고, 고전학과 문헌학에 뛰어난 라이프치히 대학의 리츨 교수 아래로 들어가 학업을 진행하였다. 라이프치히에 머물면서 니체는 우연히 헌책방에서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의 책을 발견하고 큰 충격과 영향을 받게 되었다. 또한 니체는 이 기간 동안에 위대한 오페라 작곡가인 바그너의 음악에도 심취하였으며, 이로 인해 바그너와의 끈질긴 인연이 생겨나게 되었다.

스위스 바젤 대학의 고전 문학학 교수 자리가 비었을 때, 니체는 리츨 교수의 강력한 추천으로 박사학위를 가지지 않은 채, 26세에 스위스 바젤 대학의 고전어 및 고전 문학 원외 교수로 위촉되었고, 1년 후 27세에 바젤 대학의 정교수가 되었다. 이후 라이프치히 대학은 그간 니체가 쓴 몇몇의 뛰어난 논문 등의 학문적 업적을 고려하여 박사학위 취득 시험도 부과하지 않고 박사학위를 수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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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질병과 치유의 철학자

바젤 대학에 재직하면서 니체가 펴낸 최초의 저서인 [비극의 탄생(음악의 정신으로부터 의)](1871년)에서부터 그의 독창적이고 파격적인 사상을 엿볼 수 있다. 1878년부터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을 저술하기 시작한 니체는 1879년 무렵 건강이 악화되고 대학의 임무에 염증을 느끼게 되어, 34세의 나이에 대학을 사직했다. 그 이후 니체는 스위스, 이탈리아, 독일의 휴양지 등을 방랑하면서 건강을 회복하고자 하였다. 니체는 이 방랑 기간에도 여러가지 질병으로 시달렸으며, 지독히 외롭고도 고독한 생활 속에서 병마에 지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그 와중에도 니체는 쉬지 않고 여러 책을 서술하여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명저들이 거의 이 기간에 나오게 되었다. 이 책들이 [아침놀], [즐거운 학문],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선악의 피안], [도덕의 계보] 등이다.

1888년, 여러가지 질병으로 계속 시달림을 받아 오던 니체는 잠시 건강을 회복하게 되자? 믿을 수 없는 놀라운 속도로 여러 권의 책을 연이어 써 냈다. [우상의 황혼], [안티-크리스트], [니체 대 바그너], [이 사람을 보라] 등의 명저들이 이 기간에 쓰여진 책이다. 니체는 1년 후인 1889년 이탈리아의 토리노의 거리에서 발작을 일으켰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달려 오는 마차의 말을 붙들고 니체가 탄식을 했다는 유명한 장면이 바로 이 순간이다. 그는 바젤의 정신 병원에 보내졌고, 1900년 56세로 세상을 뜨기까지 어머니와 누이 동생인 엘리자베스의 간호를 받았으며 11년간 거의 회복 불가능한 정신 착란 증세를 보였다.

니체의 생애 중 그가 시달린 병마와 관련하여 그를 정신분석학적인 관점에서 분석한 흥미로운 책이 있다. 프랑스의 정신과 의사였던 자크 로제는 [니체 신드롬]에서 니체가 평생에 걸쳐 앓아 왔던 병력들을 추적하고 있다. 니체는 지독한 근시였으며 늘상 편두통에 시달렸다고 한다. 유럽의 여러 휴양지들을 돌면서 글을 썼던 니체에게 편두통은 그의 작업을 여지없이 중단시킨 불청객이었다. 게다가 니체는 여러가지 만성적 정신 장애에 시달려, 조울증, 뇌연화증으로 고통을 받아 왔다고 한다. 그 고통 속에서도 수많은 책들을 써 낸 니체의 자신의 병을 초극하고자 하는 결연한 의지의 힘에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2. 모든 사람을 위한, 그러면서도 그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닌 책

1) 니체 사상의 형성 가운데 [차라투스트라]가 차지하는 위치

모든 사람을 위한, 그러면서도 그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닌 책. 이는 [이 사람을 보라](Ecce Homo, 1889)에서 니체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1883~1885년), (이하 [차라투스트라]로 약칭)의 저서에 부친 부제이다. 이 책은 그만큼 니체에게 의미가 있는 책이면서도 또 사람들에게 제대로 이해받을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든 책이기도 하다. [차라투스트라]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전에 쓰여진 두 권의 책, [아침놀](1881), [즐거운 학문](1882)을 같이 참조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 두 책을 읽어 보면 [차라투스트라]가 어떻게 쓰여졌는지에 대한 힌트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예언서인가? 잠언인가? 철학책인가? 우리는 니체! 하면 [차라투스트라] 이 책을 쉽게 떠올릴 만큼 이 책과 니체는 밀착되어 있다. 이 책의 구성은 여느 철학서와는 다르다. 이 책은 크게 4부로 나뉘어져 있고 이 각각에 20개 정도의 독립된 이야기가 있고, 앞에 10개 단락으로 된 긴 머리말이 있다. 이 책은 다양한 주제가 망라되어 있으며, 전혀 논리적이거나 체계적인 철학책과도 거리가 있다.

2) [차라투스트라]의 탄생 배경

[차라투스트라]가 쓰여지게 된 배경은 다음과 같다. 이 내용은 [이 사람을 보라]에서 니체 스스로가 밝힌 내용이다. “이제 나는 차라투스트라의 내력을 이야기하겠다. 이 책의 근본 사상인 영원회귀 사유라는 그 도달될 수 있는 긍정 형식은 – 1881년 8월의 것이다 : 그것은 ‘인간과 시간의 6천 피트 저편’이라고 서명된 채 종이 한 장에 휘갈겨졌다.” 니체는 실바프라나 호수의 숲을 걷고 있었는데, 그 근처에 피라미드 모습으로 우뚝 솟아오른 거대한 바위 옆에 니체는 멈춰 섰으며, 이러한 생각이 떠올랐다고 한다. 마치 번개에 맞은 듯이 이 책은 번뜩이는 영감을 받으며 탄생하게 된 것이다.

또 니체는 이렇게 썼다. “그 때의 오전 오후의 두 산책길에서 [차라투스트라] 1부 전체가 떠올랐다. 특히 차라투스트라 자신이 하나의 유형으로서 떠올랐다 : 정확히는 그가 나를 엄습했다…..” 이 얼마나 극적인가? 니체를 엄습한 차라투스트라, 왜 차라투스트라는 니체를 찾아 왔을까.

이 책의 등장 인물이자 주인공은 물론 단연 차라투스트라이다. 그는 10년간 산 속에서 명상을 마치고 새로운 복음을 전하기 위해 세상으로 내려 온다. 이는 마치 예수가 서른 살에 고향을 떠나 갈릴리 호수로 구도자의 길을 떠난 후 40일 간의 명상을 거친 후 다시 돌아 오는 장면과 겹치는 면이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형식적인 유사성은 중요하지 않다. 차라투스트라가 니체를 왜 찾아 왔는지, 그는 누구인지, 우리에게 무엇을 설파하려고 왔는지가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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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왜 신의 죽음이 선고된 것일까?

1) “신은 죽었다”의 의미는?

우리가 니체에게서 또 하나 자주 듣는 말이 있다. “신은 죽었다!” 이 말의 출처 역시 [차라투스트라]에 있다. 왜 신은 죽었으며, 이 신은 누구인가? 왜 ‘신은 죽었다’라고 선포하는 것일까? 이 신은 분명 서양인들이 우상으로 떠받들고 있는 기독교의 신이기도 하고, 서구 형이상학의 진리의 이름을 지닌 표상이기도 하다. 이 신은 이제 니체가 살았던 근대 말, 서양 문명의 위기에 더 이상 의미의 지표가 되지 못한다. 아니 새로운 가치 창조를 위해서도 니체는 이러한 낡은 가치의 표상의 중심에 있는 신에게 사형 선고를 내린 것이다.

그래서 니체는 우리의 창조 의지를 꺾는 신을 일종의 억측으로 생각하고 신이 새로운 가치 창조를 위해서도 죽어야 함을 말한다. “신은 일종의 억측이다. 나는 이 억측이 너희의 창조 의지를 뛰어 넘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차라투스트라], 행복한 섬에서, 140쪽)

“신은 올곧은 것 모두를 왜곡하고, 서 있는 것 모두를 비틀거리게 만드는 일종의 이념이다. 무슨 이야기냐고?…. 유일자, 완전자, 부동자, 충족자 그리고 불멸자에 대한 이러한 가르침 모두를 나는 악이라고 부르며 인간 적대적이라고 부른다.”([차라투스트라], 행복한 섬에서, 141-142쪽)

2) 영원회귀의 사상

[차라투스트라] 이 책의 핵심 사상은 그가 자신의 저서 [이 사람을 보라]에서 밝혔듯이, ‘영원회귀의 사상’이다.? 이 영원회귀란 무엇을 뜻하는가? 간단히 말하면 삶은 계속 반복해서 살아져야 한다는 뜻이 아닐까?

“네가 지금 살고 있고, 살아 왔던 이 삶을 너는 다시 한번 살아야만 하고, 또 무수히 반복해서 살아야만 할 것이다 : 거기에 새로운 것이란 없으며, 모든 고통, 모든 쾌락, 모든 사상과 탄식, 네 삶에서 이루 말할 수 없이 크고 작은 모든 것들이 네가 다시 찾아 올 것이다.”([이 사람을 보라], 341)

폴란드계 프랑스인으로 화가이자 미술사가인 클로소프스키는 니체의 영원회귀와 관련한 매우 독창적이고도 희귀한 해석을 담은 [니체와 악순환]을 썼다. 클로소프스키는 왜 제목에 ‘악순환’을 넣은 것일까? 클로소프스키는 니체의 영원회귀에서의 반복은 똑같은 반복이 아니라, 항상 다른 것을 가져 오는 순환이라는 맥락에서 ‘악순환’이라고 한 것이다. 그렇다. 우리 현대인의 삶은 흔히 다람쥐쳇바퀴 도는 삶이라 비유되고 그날이 그날인 시큰둥한 날들의 연속이라면, 니체는 우리에게 이러한 낡은 삶을 버리고 매일 달라지는 새로운 반복의 삶을 살 것을 촉구하고 있다.

 

4. 위버멘쉬(초인)1)란 누구인가?

1) 정신의 세가지 변신에 대하여

[차라투스트라]는 제1부에서 ‘세 변화에 대하여’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나 이제 너희에게 정신의 세 변화에 대해 이야기하련다. 정신이 어떻게 낙타가 되고, 낙타가 사자가 되며, 사자가 마침내 어린아이가 되는가를”([차라투스트라], 세 변화에 대하여, 38쪽) 여기서 정신의 세 변신, 즉 낙타, 사자, 어린아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낙타는 스스로가 삶을 견뎌야 할 고통으로 생각하고, ‘삶은 고된 것이다’라고 말하는 착하면서도 인내심이 많은 동물이다. “짐깨나 지는 정신(낙타)은 더없이 무거운 짐 모두를 짊어진다.” 그러나 이 낙타로 정신은 만족할 수 없다. 정신은 다른 변신을 꾀한다. 정신은 사자로 변한다. 사자가 된다는 것은 정신이 자유를 쟁취하여, 그 자신이 사막의 주인이 되고자 한다. 이 사자는 자신이 섬겨온 주인을 찾아 나서며, 마지막 신에게 대적하려 하여, 신의 한 형태인 용과 일전을 벌인다. 마땅히 해야 함을 할 줄 알고, 창조된 모든 가치를 아는 사자, 새로운 창조를 위한 자유의 쟁취를 강탈하는 사자가 모르는 것, 할 수 없는 것이 있다. 사자는 어린 아이의 순진 무구와 망각을 알지 못한다.

“어린 아이는 순진 무구요 망각이며, 새로운 시작, 놀이, 제 힘으로 돌아가는 바퀴이며 최초의 운동이자 거룩한 공경이다. 그렇다 형제들이여, 창조의 놀이를 위해서는 거룩한 긍정이 필요하다. 정신은 이제 자기 자신의 의지를 의욕하며, 세계를 상실한 자는 자신의 세계를 획득한다.”([차라투스트라], 세 변화에 대하여, 40쪽)

그래서 이제 차라투스트라는 다음과 같이 일갈한다. “나 너희에게 정신의 세 변화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노라. 어떻게 정신이 낙타가 되고, 낙타가 사자가 되며, 사자가 마침내 어린아이가 되는가를.”(41쪽) 이렇게 정신의 세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우리는 초인이 되기 위해 무엇이 되어야 하는 것일까.

2) 새로운 가치의 창조자

왜 신이 죽었다고 차라투스트라는 외쳤는가? 이는 낡은 형이상학적 가치와 도덕을 과감히 버리고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가고자 하는 강한 의지를 가진 자가 차라투스트라이기 때문이다. 차라투스트라는 다음과 같이 경고한다. “선하다는 자와 정의롭다는 자들을 조심하라! 그런 자들은 자기 자신의 덕을 창안해 내는 사람들을 즐겨 십자가에 못박아 처단한다. 홀로 있는 자들을 저들은 증오한다.”([차라투스트라], 창조하는 자의 길에 대하여, 105쪽) 이러한 위선자들이 지닌 덕에 대해 차라투스트라는 경멸을 보내고 우리에게 새로운 가치를 창조할 것을 외친다. “고독한 자여, 너는 사랑하는 자의 길을 가고 있다. 너는 너 자신을 사랑하며, 그 때문에 너 자신을 경멸한다. 사랑하는 자만이 할 수 있는 그 같은 경멸을. 사랑하는 자는 창조하려 한다. 경멸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사랑했던 것을 경멸할 까닭이 없었던 자가 어찌 사랑을 알겠는가! …. 형제여, 눈물로 간청하노니 너의 고독 속으로 물러서라. 나는 자기 자신을 뛰어 넘어 창조하려 하며, 그 때문에 파멸의 길을 가는 자를 사랑한다.(106-107쪽)

니체는 우리의 창조 의지를 억누르는 신이 일종의 억측임을 강조하고, 신에 앞서 위버멘쉬를 창조해 낼 것을 말한다. “너희가 세계라고 불러온 것, 그것도 너희에 의해 먼저 창조되어야 한다. 너희의 이성, 너희의 이미지, 너희의 의지, 너희의 사랑이 세계 자체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진정, 너희의 행복을 위해, 깨친 자들이여!”([차라투스트라], 행복한 섬에서, 141쪽)

왜 니체를 망치를 든 철학자로 부르는가? 기존 가치, 우상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하고 이 우상 파괴를 서슴치 않는 사람이 바로 니체이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나의 불과 같은 창조 의지는 언제나 새롭게 나를 사람들에게로 내몬다. 망치를 돌로 내모는 것이다. 아 너희, 사람들이여. 돌 속에 하나의 형상이, 내 머리 속에 있는 많은 형상 가운데 으뜸가는 형상이 잠자고 있구나! 아, 그 형상이 더할 나위 없이 단단하고 보기 흉한 돌 속에 갇혀 잠이나 자야 하다니! 이제 나의 망치는 저 형상을 가두어두고 있는 감옥을 잔인하게 때려 부순다. 돌에서 파편이 흩날리고 있다. 무슨 상관인가”([차라투스트라], 행복한 섬에서, 143쪽)

3) 삶을 사랑하는 자

차라투스트라는 우리에게 가르친다. 생명이 소중하다는 것을 끊임없이 역설한다. [차라투스트라]에서 나타나는 생명과 삶을 소중히 하는 태도는 이 책의 준비격이기도 한 [즐거운 학문]에서는 다음과 같이 표현되어 있다. “생의 한가운데서 – 아니다! 삶은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해가 갈수록 나는 삶이 더 참되고, 더 열망할 가치가 있고, 더 비밀로 가득하다는 것을 발견하고 있다.-위대한 해방자가 내게 찾아온 그날 이후로! ….”

삶을 사랑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이는 삶을 아름답게 재창조하는 것을 말한다. 니체는 삶에 대한 사랑을 ‘운명애’(amor fati)라고 불렀다. 운명을 사랑한다는 것은 운명을 아름답게 창조하는 것이다. 물론 이 창조에는 고통이 따른다. “창조하는 자가 있기 위해서는 고통이 있어야 하며, 많은 변신들이 있어야 한다. 그렇다. 창조하는 자들이여. 너희들의 삶에는 쓰디쓴 죽음이 허다하게 있어야 한다.”([차라투스트라], 행복한 섬에서, 142쪽) 창조하는 삶을 위해 고통을 겪는 자. 우리는 이러한 위버멘쉬가 될 수 있을까? 또 우리 시대는 위버멘쉬를 진정 필요로 하는가? 혹은 나는 위버멘쉬가 되고자 하는가? 위버멘쉬가 될 이유가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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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초인의 삶이란 어떤 것일까?

1) 건강한 삶, 병든 삶

건강하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건강에 유독 집착이 심한 현대인들에게 니체가 들려 주는 건강의 메시지는 무엇일까? 니체는 건강([즐거운 학문], 5부 마지막 장)에 대해 다음과 같이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위대한 건강-우리 새로운 자, 이름없는 자, 이해하기 어려운 자, 아직 증명되지 않은 미래의 조산아인 우리는 하나의 새로운 목적을 위해 하나의 새로운 수단을 필요로 한다. 말하자면 새로운 건강을, 이전의 어떤 건강보다도 더 강하고 더 능란하고 더 질기며 더 대담하고 더 유쾌한 건강을 필요로 한다.” 무슨 뜻일까? 건강은 니체가 늘 소중히 생각하는 생명을 위해 필수적인 조건이다. 이 건강을 니체는 위대한 건강으로 말하고 있다. 위대한 건강이란, 건강을 막연히 지니고 있다는 의미가 아닌, 지속적으로 획득하고 계속 획득해야만 하는 것으로 니체는 힘주어 말하고 있다.

위대한 건강이란 ‘영원회귀의 삶’과 연관되어 있음을 잊지 말자. 왜 그런 것일까? 보통 사람들은 니체가 말한 것처럼 이렇게 말한다. “‘나 이제 죽어 사라지노라, 한순간에 나 무로 돌아가리라. 영혼이란 것도 신체와 마찬가지로 결국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니.’ 그대는 이렇게 말하리라, ‘그러나 나를 얽어 매고 있는 원인의 매듭은 다시 돌아오리라. 돌아와 다시 나를 창조하리라! 나 자신이 영원한 회귀의 여러 원인에 속해 있으니. … 나는 더없이 큰 것에서나 더없이 작은 것에서나 같은, 그리고 동일한 생명으로 영원히 돌아 오는 것이다. 또다시 만물의 영원한 회귀를 가르치기 위해서 말이다.:([차라투스트라], 건강을 되찾고 있는 자, 366쪽)

니체가 말하는 건강은 어떤 하나의 기준에 매어 있는 건강함의 표준을 고집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의 건강 상태에 매이는 것이 아니라, 수백 개의 건강을 찾는 것, 이것이 니체가 말하는 ‘위대한 건강’이다. 영원회귀라는 지속적인 반복을 통해 건강을 찾는다는 것은 ‘인간적인 것’으로 규정된 하나의 정체성으로부터 떠나서, 그 ‘떠남’을 통해 새로운 건강의 신체를 얻는 것을 말한다.

2) 정신보다 신체의 본성을 아는 삶

우리의 삶 속에서는 알게 모르게 신체를 천시하고 정신의 우월성을 믿는 경향이 있다. 물론 이 얘기가 전적으로 틀린 이야기는 아니겠지만, 신체를 경멸하고 정신력을 믿는 것은 정신과 신체의 본성을 잘 모르는 무지에서 나온 이야기이다. 혹은 정신/신체의 이분법적 사유의 극단적인 폐해를 잘 모르는 상태에서 무반성적으로 나온 이야기이기도 하다.

서양 사상의 오랜 전통 속에서 볼 때, 니체는 소크라테스가 델포이의 신전의 경구인 ‘너자신을 알라’에서 따 온 로고스의 강조, 즉 이성의 힘을 실어 주는 전통은 그 이래로 굉장히 불균형적인 전통을 형성해 왔다고 비판한다. 즉 이성의 각성을 통해 신체의 힘과 생명력은 망각되고 억압되었다는 것이다. 정말 신체는 이성에 의해 통제받아야 하는 무력한 근육 덩어리란 말인가. 우리는 신체를 너무 잘 모르고 있는 것이다.

니체는 신체를 경멸하는 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신체를 경멸하는 자들에게 나 나의 말을 하련다. …. ‘나는 신체이자 영혼이다’라는 어린이의 말을 전한다” 니체가 보기에 사람들은 어린이보다도 더 신체와 영혼의 본성에 대해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깨어난 자, 깨달은 자는 말한다. “나는 전적으로 신체일 뿐, 그 밖의 아무 것도 아니며, 영혼이란 것도 신체 속에 있는 그 어떤 것에 붙인 말에 불과하다”([차라투스트라], 신체를 경멸하는 자들에 대하여, 51쪽)라고 말한다. 이러한 니체의 신체와 영혼의 본성에 대한 언급은 소크라테스 이래 서양 사상의 정신과 영혼, 이성 우위의 오래된 전통을 획기적으로 뒤집는 말이다. 우리는 신체가 정신에 마치 딸려 있는 부속물인 것처럼 생각해 왔던 것인데, 니체가 보기에 이것은 전적으로 틀린 말이다. 오히려, “신체가 커다란 이성이며, 하나의 의미를 지닌 다양성이고 전쟁이자 평화, 가축 떼이자 목자”라는 것이다. 이것은 무슨 뜻인가?

신체를 경멸하는 자들에 대해 차라투스트라가 던진 말을 들어 보면 분명히 이 뜻을 이해할 수 있다. “신체를 경멸하는 자들이여, 너희는 너희가 저지르는 어리석음과 너희가 하는 경멸에서조차 이렇듯 너희의 자기를 모시고 있는 것이다. 내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들의 자기, 그가 스스로 죽기를 원하여 생에 등을 돌리고 있는 것이다.”([차라투스트라], 신체를 경멸하는 자들에 대하여, 53쪽). 그렇다. 신체를 경멸하는 자는 신체에 생명의 힘이 있다는 것을, 신체의 일부분이 작은 이성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는, 자신의 생명을 몰락시키는 자라는 것이다. 이렇게 자신의 생명을 몰락시킴으로서, 이성과 정신의 우위를 고집하는 자는 더이상 자신의 이성을 뛰어 넘어 새로운 창조를 할 수가 없고, 위버멘쉬가 되지 못하는 것이다.

3) 위버멘쉬의 삶이란?

그렇다면 위버멘쉬가 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며, 어떻게 해야 위버멘쉬가 될 것인가. 니체는 앞에서 정신의 세 가지 변화에 대하여 이야기했다. 정신이 낙타가 되고, 낙타가 사자가 되고, 이 사자는 어린아이가 된다. 그렇다. 니체에게는 어린아이의 삶 속에서 새로운 창조의 가치를 보았다. 이제 더 이상 얽매이는 규범적 삶이 얼마나 무상한가를 우리는 본다. 유희를 즐길 줄 알고 규범에 목매지 않는 삶은 마치 주사위 놀이를 하는 어린아이를 연상시킨다. 삶에는 어떤 규약과 도덕이 있는 필연성이 없다고 니체는 역설한다.

이제 차라투스트라는 선언한다. “신은 죽었노라”고. 그리고 또 차라투스트라는 군중을 항해 이렇게 말한다. “나 너희에게 위버멘쉬를 가르치노라. 사람은 극복되어야 할 그 무엇이다. 너희는 사람을 극복하기 위해 무엇을 했는가?”([차라투스트라], 16-17쪽) 나는 사람인 나를 극복하고, 나를 새롭게 창조해야 한다. 이 새롭게 창조된 자가 위버멘쉬이다. 차라투스트라는 말하길, “보라, 나는 너희에게 위버멘쉬를 가르치노라! 위버멘쉬가 이 대지의 뜻이다. 너희 의지로 하여금 말하도록 하라. 위버멘쉬가 대지의 뜻이 되어야 한다고!” 그렇다. 새로운 생명이기도 한 대지의 뜻에 충실할 때 위버멘쉬가 된다.

이 위버멘쉬의 이미지는 다양하다. 니체는 차라투스트라의 예언에 힘입어 위버멘쉬를 번갯불로, 광기로, 구름에서 떨어지는 무거운 물방울로, 자유로운 정신과 심장을 가진 자로 그린다. 이 위버멘쉬는 특정한 누구도 아니고, 아무도 아닌 사람이기도 하다. 즉 누구도 위버멘쉬가 될 수 있으며, 어떤 초월자를 의미하는 것은 더 더욱 아니다. 나도 위버멘쉬가 될 수 있을까? 초인의 삶과 범인의 삶은 어떻게 다를까?

 

-주석-

1) 최근 들어 니체 전공자들은 초인(超人)을 독일어 ‘위버멘쉬(?bermensch)’로 그대로 쓰고 있다. 위버멘쉬를 초인이라고 번역하는 것은 일본의 전통을 따른 것인데, 위버멘쉬를 초인으로 번역할 경우, 초인은 ‘인간을 초월한다, 넘어선다’라는 의미를 갖기 쉬워 오해의 소지가 있어 위버멘쉬로 그대로 번역한다고 한다.

 

 

법은 항상 바람직함이 될 수 있는가?(1)[대안도덕교과서]-5

법은 항상 바람직함이 될 수 있는가?(1)[대안도덕교과서]-5

 

 

김종곤(건국대학교)

 

*이 글은 삼인출판사에서 출판 될 대안도덕교과서(가제)의 일부를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1. 법과 바람직함

 
키케로(Marcus Tulliut Cicero)는 “사회가 있는 곳에 법이 있다”(Ubi societas ibi ius)고 했습니다. 인간이 모여 사는 곳이라면 거기에는 어떠한 규범적 질서가 있기 마련이라는 의미입니다. 프로이트(Sigmund Freud)가 쓴 「토템과 터부」라는 책을 보면 그가 미개인이라 부르는 사람들 조차 금기(禁忌)를 가지고 있었으며, 이를 위반하였을 경우 벌을 주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이렇게 본다면 키케로의 말은 오늘날뿐만 아니라 원시부족 사회에까지 적용되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규범적 질서가 있다는 것은 그것을 지탱해주는 힘으로서 ‘바람직함’이라는 것이 늘 따라 다닌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길거리에 쓰레기를 함부로 버려서는 안 된다’는 규범을 우리의 질서로 받아들이고 그러한 행위는 바람직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이유를 달아 그 질서를 정당화합니다. 이렇듯 질서와 바람직함은 하나의 몸처럼 결합되어 있으면서 우리의 일상적인 행위들을 규제합니다.

키케로(BC106~BC42)

키케로(BC106~BC42)

‘규제’는 우리에게 허락되어진 행위와 금지된 행위를 구분시켜주는 역할을 합니다. 하지만 단순히 이 말을 행위에만 해당하는 것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옳고 그름이라는 도덕적 ‘기준’에 대한 우리의 생각(관념)역시 규제한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일상적으로 어떤 것은 바람직하고 또 어떤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머릿속으로 생각하는 바도 자유롭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다음과 같은 물음을 떠올려보고 나름의 답변을 준비해보세요. ‘왜 우리는 길거리에 쓰레기를 함부로 버려서는 안 되는가?’ 어떤 대답을 하였는지요? 대다수의 사람들은 길거리에 쓰레기를 버리는 것보다 환경미화와 위생을 위해 쓰레기통에 버리는 것이 훨씬 낫고, 또 쓰레기를 처리하는데 더 효율적이기 때문이라고 대답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대답 보다는 그래서는 안 된다고 법으로 ‘금지’하고 있기 때문에 즉, 불법(不法)이라고 답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습니다. 물론 전자의 대답이 정답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문제 삼는 것은 후자, 즉 법으로 금지하고 있다는 대답이 나름 타당하게 보이는 다른 대답보다 많은 경우에 있어 ‘우선’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어떤 행위에 대한 이유를 물었을 때 어머니 혹은 아버지가 그렇게 하라고 했다는 식으로 대답하는 것과 유사합니다. 다시 말해 법이 그렇게 시켰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체적으로 행동하지 못하고 어머니나 아버지에게 의존한다는 의미로 쓰이는 마마보이 혹은 파파보이를 연상케 합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놀림감의 대상이 되기도 하는데, 그것은 아마도 자신의 생각이나 의지에 따라 행동하거나 생각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다시 말해 주체성을 상실하였다는 점에서 그럴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왜 바람직한가? 혹은 왜 바람직하지 않은가?’라는 물음에 그 답변을 법에서 ‘규정하고 있다’ 혹은 ‘규정하지 않고 있다’로 대답하는 것은 아버지 혹은 어머니의 말씀이 있으면 그것을 무조건 따른다는 것과 같은 것이 됩니다. 즉, 주체적인 판단을 결여하고 단지 믿는 것을 따르는 것과 같은 결과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법을 항상 절대적으로 옳은 것이라고 ‘믿으며’ 그렇기에 법은 바람직함을 판단함에 있어 최고의 기준이 된다는 말이 됩니다. 조금 어려운 말로 이를 ‘법 물신’이라 한다. 물신(物神, Fetish)이라는 말은 포르투칼어로 ‘가짜의’ 혹은 ‘허위의’, ‘인위의’라는 의미인 feiti?o로부터 파생된 단어입니다. 1700년대 대항해시대에 아프리카 등을 방문한 포르투칼인들이 그곳의 원주민들이 어떤 사물을 숭배하는 풍습을 보고 자신들의 입장에서는 이해할 수 없었기에 미개한 것으로 폄하시켜 이렇게 전한 것 입니다. 어쨌든 물신을 애니미즘이나 토테미즘과 같은 것으로 이해해도 무방하다면, 예컨대 마을 입구의 큰 은행나무가 그 마을 혹은 종족을 수호해주고 있다는 생각에 그것을 신성시하는 것을 떠올리면 됩니다. 오늘날 우리는 일반적으로 나무는 생명이 있을지언정 정신은 없는 것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그 나무에 기도를 하거나 제사를 지내는 행위는 마치 그것이 어떤 정신이 있는 것, 혹은 영적인 힘이 있는 것으로 믿는 미신처럼 보일 것입니다. 따라서 물신은 그 어떤 것이 신(神)과 같은 초자연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 것으로서 원래 그것이 가진 속성들을 뒤집고 전도시키는 힘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법 물신’은 이와 같이 법을 어떤 신성한 것으로 여기고 그 자체를 숭배한다는 의미가 됩니다.

하지만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법이 인간보다 우선시 되고 물신화될 때 그것은 인간을 ‘소외’시킨다는 문제를 낳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인간과 로봇의 관계를 주제로 다루는 SF영화를 생각하면 쉽게 이해됩니다. 이러한 영화에서는 과학기술이 발전하면서 휴먼노이드 처럼 인간과 흡사하거나 구분이 안 되는 외모와 유연한 사고능력을 가지고 있는 로봇이 등자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할지라도 로봇은 인간의 삶을 더욱 편리하고 안전하게 영위하기 위해 인간이 ‘만든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에게 봉사하는 것은 로봇이 존재하는 목적이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로봇이 아무리 인간보다 신체적·연산능력이 뛰어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인간의 통제 하에 있어야 하며 인간 보다 우위에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영화에서는 로봇이 인간을 몰아내기도 하고 심지어는 인간을 지배하기도 합니다. 이는 인간과 로봇의 자리가 바뀐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인간이 자신이 있어야 할 창조주의 자리에 있지 못하고 오히려 인간이 만든 피조물인 로봇이 인간의 세계를 차지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소외’입니다.

다시 우리의 이야기로 돌아봅시다. 법은 로봇과 같이 인간이 만든 인위적인 산물입니다. 한 사회의 구성원들 혹은 국가 간에 접촉하고 교류를 하면서 대다수 때로는 일부가 규범화 시켜야겠다고 필요성을 느낀 다음 나왔다는 의미에서 그러합니다. 한편으로 이것은 인간의 의지에 따라 법의 내용을 언제든지 변화시킬 수 있으며, 때에 따라서는 폐기시킬 수도 있다는 의미가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이 명령하는 바데로 움직이는 것은 로봇이 오히려 인간에게 명령을 하고 인간이 그에 따라 행동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게 되는 ‘소외’의 상태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SF영화에서는 로봇에 대한 공포, 즉 소외에 대한 공포 때문인지 늘 인간들은 로봇에 맞서 싸웁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다루고 있는 법의 문제에 있어서는 그렇지 않아 보입니다. 물론 때로는 국회에서 어떤 법을 제정하거나 개정하려고 할 때 그에 맞서 싸우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은 아주 편안하게 법이 인간을 소외시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마치 그것이 인간 세계의 외부에서 떨어진 것처럼 그리고 절대적인 진리인 것처럼, 다시 말해 항상 옳은 것인 마냥 우리의 몸과 정신을 지배하는 것을 받아들이면서 법 그 자체가 정당한지 아닌지는 묻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오해해서는 안 될 것은 이 논의가 법 그 자체가 폐기되어야 한다거나 모든 법은 바람직한 것이 아니라는 주장을 펴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인간이 사회를 구성하고 함께 살아가는 이상 법은 항상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는 것은 ‘왜 우리는 이처럼 법을 절대적인 것으로 믿을까?’, 나아가 ‘왜 우리는 우리의 삶과 맞지 않거나 우리의 삶을 힘들게 하는 법에 대해 저항하려고 하지 않는가?’라는 물음으로 출발합니다. 그냥 가볍게 생각해보면 어릴 때부터 준법(遵法)정신을 강조하는 의식적인 교육을 받아왔기 때문이라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단지 그러한 문제로 돌리기에는 생각해보아야 할 점이 많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러한 믿음을 가지는 것은 단지 의식이라는 생각의 차원이 아닌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2. 법과 이데올로기

 
몇몇의 맑스주의 법철학자들은 법을 지배층이 그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도구적으로 활용하는 ‘이데올로기(Ideology)적 지배 수단’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주장은 맑스(Karl Marx)의 입장과는 사실상 다릅니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의 생각을 왜곡시켰는지 아닌지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법을 의식적 차원에서 이데올로기의 문제로 가져가는 것이 위에서 우리가 제기한 물음에 대한 답변이 될 수 있는가를 검토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법을 절대적인 바람직함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우리의 의식의 문제인가를 따져보자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선 맑스가 말하는 이데올로기가 무엇인지, 그것을 맑스주의 법철학자들은 어떻게 법과 연과지어 그것을 의식적 차원에서 다루어버렸는지를 살펴보도록 합시다.

맑스는 『독일 이데올로기』라는 책에서 “사회적 존재가 사회적 의식을 규정 한다”고 말합니다. 즉, 어떠한 사람의 사회적 위치를 결정하는 물질적이고 정치적인 조건이 그 사람의 의식을 만들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를 테면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사람은 그렇지 못한 사람에 비해 복지정책을 확대하는 것에 대해 부정적인 경향을 보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신에게는 별 의미가 없을 수도 있고 또 의미가 있다고 할지라도 복지정책은 대체적으로 저소득층을 위한 것이기에 자신은 그 혜택에서 제외되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빈곤한 사람은 대체적으로 반대의 입장을 보입니다.

하지만 같은 책에서 다음과 같이 상반돼 보이는 말을 합니다. “한 시대의 의식은 지배계급의 의식이다.” 이렇게 되면 어떠한 사람이 지니고 있는 의식은 앞서 이야기 한 것처럼 그의 사회적 조건보다는 그 사회에서 힘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의 의식을 따라갈 수밖에 없다는 말이 됩니다. 이는 얼핏 보면 두 말이 모순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즉, 저소득층은 대다수 사회적으로 약자인 경우가 많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이들이 복지정책을 확대하는 것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가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맑스에게 있어 이 둘은 모순된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사회적 강자가 지닌 의식의 힘이 사회적 위치에 의해 형성된 의식보다 더 강해서 장악력을 가진다면 결국 그것을 따르게 되기 때문입니다. 앞선 예를 통해 말하자면, 저소득층은 자신이 물질적으로 풍요롭지 못함으로 인해 삶의 어려움을 겪는 것에 대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문제를 이 사회가 가진 구조적인 문제로 생각하고 강하게 비판하기 보다는 개인의 문제나 가족의 문제로 돌려버립니다. 사회적 강자에게는 그 사회의 구조가 별 문제될 바가 없기에 가난한 것은 곧 개인의 노력부족이나 게으름 탓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은 결과를 놓는 것입니다.

따라서 노동자와 같이 사회에서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은 소수의 사회적 강자의 의식을 마치 자신의 의식인 것처럼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에서 그들의 의식은 ‘가짜 의식’ 혹은 ‘허위 의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맑스에게 있어서 한 사회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하다고 생각하는 이데올로기는 곧 ‘허구’이며 ‘환상’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몇몇 맑스주의 법철학자들은 법을 한 사회의 지배적인 영향력을 가진 강자들이 그들의 부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사람들에게 법은 바람직함이라는 허위적인 의식을 가지게 만든 것으로 이해합니다. 간단히 말해 법은 항상 바람직한 것이라고 생각하도록 머릿속에 주입시켰다는 말이 됩니다. 하지만 이는 ‘법은 누군가가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국가기구를 이용해서 만든 것이기에 결단력 있게 거부하면 그만이야!’라고 선언하면, 다시 말해 의식적으로 거부하면 우리의 행동과 생각을 규제하는 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합니다. 즉, 생각만 고쳐먹으면 법 물신성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그러합니까? 아니 그럴 수 있습니까? 다음과 같이 말해봅시다.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지 말라고 한 것은 국가가 국민들의 위생적인 삶의 환경을 만들어 줌으로 해서 그 의무를 다하고 이를 통해 국민에게 어떠한 의무를 지움으로 해서 국가의 존속을 유지하려는 계획이야! 그러니까 나는 자유롭게 내가 쓰레기를 버리고 싶을 때 아무 곳에서나 버릴거야’ 어떻습니까? 이는 용기나 자신감의 문제가 아닙니다. 물론 의식적으로 법이 바람직함과 상관이 없는 것이므로 언제든지 포기할 수 있다는 생각은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하거나 행동할 때 무엇인가 불편함을 느끼고 그것이 우리를 괴롭힌다면 법물신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것이라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법을 의식적으로 부정할 수 있다 할지라도 의식의 차원을 넘어선 영역에서, 다시 말해 마음 한 구석은 어딘가 모르게 꺼림칙함이 남습니다. 그렇다면 법은 단지 우리의 생각 차원에서만 작동하는 것이 아닌 것처럼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