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철연의 추억 : 나와 한철연’ – 연효숙 편 [나와 한철연] ①
이 코너는 2023년 1월 12일(목) 서교동 소재 한철연 강의실에서 거행된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신년회 2부 행사에서 ‘나의 과거의 한철연, 미래의 한철연’이란 주제로 진행한 발표회를 계기로 구성되었다. 이 코너에 게재되는 글들은 ‘내’가 처음 한철연에 들어오게 된 계기와 활동을 돌아보면서 한 개인이 철학 전공자로서 거친 여정뿐만 아니라 한철연이라는 철학 학회의 지난 활동을 되살피는 내용이 될 것이다. 80년대 이후 한국에서 철학함이 무엇이었는지 그 역사의 일부에 자리했던 옛 한철연과 지금의 한철연, 그리고 앞으로 한철연을 생각하며 지금 철학함이란 무엇인지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면 좋겠다.
한철연의 추억 : 나와 한철연
연효숙(연세대)
나는 2023년 1월 12일(목)에 열리는 한국철학사상연구회(이하 한철연)의 신년회 때 세대별 4인 주자들(70년대 세대, 80년대 세대, 90년대 세대, 2000년 이후 세대)의 릴레이 간담회 기획(각 사람이 10분씩 발표)을 현남숙 연구협력위원장으로부터 부탁받았다. 처음에는 이 신년회 간담회 4인 기획이 노년 세대(60세 이상) 회원들을 중심으로 진행되는 줄 알고 좀 주춤거렸다가, 세대별 기획이라는 말에 망설일 이유가 없었고 흥미로운 기획이라 생각하여 흔쾌히 수락하였다. 주제는 ‘과거의 한철연, 미래의 한철연’. 이 주제야 새로울 것이 없었지만, 세대별로 한다는 것이 새로운 시도였고, 또 간담회 형식이니 자유롭게 생각나는대로 말하면 되는 것이어서 부담이 없었다. 그렇게 한철연 신년회 간담회는 4인의 발표로 끝이 났다. 이어서 송상용 선생님, 김교빈 선생님의 추억담도 있었고 회식이 이어졌다.
집으로 돌아와서 나는 다시 생각해 보았다. 내가 말한 ‘한철연의 나, 나의 한철연’ 내용은 제대로 기억된 것이었을까? 부분부분 끊기는 희미한 그 시절의 기억을 가다듬다 보니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이번 4인 릴레이 간담회를 한철연 웹진 <ⓔ 시대와 철학>에 한번 남겨 보면 어떨까 싶은 마음이 생겼다. 마침 진보성 웹진 편집주간이 4인 간담회를 정리하고 있는데 내용을 확인해 달라고 하였다. 나는 망설이다가 내 계획, 즉 직접 내가 이 기억의 내용을 쓰는 것은 어떨까? 또 이 기획을 4인 기획으로 이어서 쓰고, 더 나아가 자유롭게 이어서 다른 사람들이 쓰면 어떨까? 이렇게 제안했다. 논문 형식의 딱딱한 기록이 아닌, 우리들 각각이 기억하는 그 시절의 기억을 에세이 형식, 르포 형식으로 가볍지만 진솔하게 써 내려 가면 어떨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집단 기억’의 형식으로 한철연 34년의 역사(1989년부터 2023년까지)를 각각의 기억의 편린 속에서 끄집어내어 콜라주 형식으로 갖다 붙인다면, 그렇게 찢어 붙인 조각 조각들이 우리 시대 한철연의 다면적인 기억이자 추억이 될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작정을 하고 나는 신년회 때 했던 이야기들, 기억들에 덧붙여서 1세대 한철연 회원으로서 추억을 회상해 보고자 한다. 이 기억은 온전히 나의 개인적인 기억이며, 그에 대한 감상은 지극히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가끔 그 기억에 대한 사실(팩트)이 다를 수도 있겠다. 그러나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자료적 기억만이 소중하고 중요한 것은 아닐 것이다. 또 이러한 릴레이 기록이 후일에 또 다른 한철연의 기록들로 남아 있기를 바란다.
- 한철연 탄생의 추억
나는 78학번으로 70년대 학번 후반 주자이다. 내가 대학을 다니던 시절은 서슬이 퍼런 박정희 독재 정권의 유신 말기로, 캠퍼스에는 알 수 없는 억압과 침묵의 공기가 무겁게 맴돌았다. 1979년 10월 29일 가을에 역사상 초유의 대통령 저격 사건이 일어났고, 믿을 수 없는 속보는 빨리 퍼져 나갔다. 80년 서울의 봄, 광주 항쟁 등 그때 대학생들은 누구나가 다 반정부 데모에 동참했고, 매캐한 최루 가스의 냄새는 지금도 생생하다. 그러다가 소련의 붕괴와 해체, 그리고 진보 진영의 암흑 시절에 나는 당시 한국헤겔학회의 일원이었다. 1988년 가을쯤 광화문에서 헤겔학회 소장파들(유헌식, 이종철, 나)과 서울대를 중심으로 한 사회철학연구실(사철연)의 소장파들(이상훈, 서도식 등)이 양쪽에 다 참여했던 우기동, 양운덕의 매개로 광화문 계단에서 만났던 기억이 있다. 그때 나는 마르크스 등에 대해서는 거의 무지했고, 칸트, 헤겔 공부를 하면서 어렴풋이 마르크스에 대해 알고 있었을 뿐이었다. 무엇을 논의했는지는 기억이 잘 안 나고, 두 단체 회동 시 장소였던 계단의 모습이 머릿속에 지워지지 않고 비교적 선명하게 남아 있다. 세세한 논의 내용은 기억에 없고 저녁노을을 배경으로 계단에서 오르락내리락하며 얘기했던 그 기억은 나만의 기억일까. 암튼 그 후 두 단체의 통합을 위한 모임은 몇 차례 더 있었다. 그 시절에 대해서는 이병창, 우기동, 이종철, 김교빈 선생님과 전화 통화를 통해 어렴풋이 윤곽을 잡을 수 있었다. 적지 않은 두 단체 회원들이 마석이었던가 어딘가 교외로 나가 통합에 관한 논의를 더 했었는데, 그중 단체의 작명에 관한 기억이 어렴풋하게 남아 있다. 이병창은 ‘사상’이라는 말을 꼭 집어넣어야 한다고 했고(이병창, 나의 기억 동일), 이종철은 ‘실천’이 꼭 들어가야 한다고 했다(우기동 기억).
그렇게 1988년은 흘러가고, 1989년 3월 25일 두 단체는 통합하여 ‘한국철학사상연구회’라는 이름으로 한국방송통신대학교에서 창립총회를 했다. 나도 이 창립총회의 기억은 분명히 있다. 이때 이정호 선생님이 큰 역할을 한 것 아닌가 짐작되며, 선생님과 전화 통화를 해서 확인도 했다. 그리고 창립총회의 사진을 이정호 선생님이 가지고 있으며 내게 보내 준다고 했다. 이렇게 창립총회가 있기까지 두 단체의 통합 과정에 대한 나의 한철연 가장 초기의 장면과 기억이 이제는 아련하고 어렴풋한 ‘한철연의 추억’으로 흐릿하게나마 남아 있다. 아마 내가 더 나이가 든다면 이 장면들은 더욱더 빛바랜 사진인냥 재생도 복원도 어려운 채로 흩어져 버릴지도 모르겠다.
- 학회지의 추억
2023년 올해 따져 보니 내가 한철연과 함께한 세월은 34년째이다. 한철연이 1989년에 공식 출범했는데, 양 단체가 완전히 한철연 속으로 해체되어 융합되어 들어간 것은 아니었다. 한국헤겔학회는 이미 임석진 선생님을 중심으로 몇몇 노장파 회원들(이을호, 이병창, 설헌영 등)이 활동을 하고 있었고, 사회철학연구실은 주로 서울대 철학과 72학번(이규성, 이훈, 이영철, 이정호, 이병창, 김수중 등)이 먼저 활동했다(고 들었다). 통합 이후 사회철학연구실은 한철연에 흡수 통합되었고, 한국헤겔학회는 지금도 여전히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학회지의 경우, 한국헤겔학회는 1984년에 『헤겔연구』제1호가 나왔으며, 사회철학연구실의 학회지에 대한 사정은 내가 잘 모르겠다. 한철연을 중심으로 하자면, 『시대와 철학』이 무크지 형식으로 1988년, 1989년에 천지출판사에서 나왔고, 이 책 두권은 아마 서교동 태복빌딩에 보관되어 있겠지만 나는 갖고 있지 않다. 한철연의 공식 학회지 『시대와 철학』 제1호는 1990년에 천지출판사에서 발간되었고, 이 책은 나도 갖고 있다. 한철연 20여 년간의 『시대와 철학』 그리고 회원들의 학술활동과 관련된 자세한 논의는 2009년 한철연 20주년 기념 학술대회에서 발표되고 『시대와 철학』제20권 3호에 실린 박영균의 「철학 없는 시대 또는 시대 없는 철학」의 논문을 참조하면 될 것이다. 그리고 한철연 회원들의 20년간의 주요 학술활동 성과에 대해서는 이철승의 「‘임중(任重)’의 시대정신 발현과 ‘도원(道遠)’의 ‘우리철학’ 정립 문제」와 이정은의 「사회 변혁을 위한 철학적 논의들」의 논문들을 참조하면 될 것이다.
- 연구실의 추억
한철연의 역사에서 빼 놓을 수 없는 중요한 추억은 연구실에 대한 기억이다. 다른 무수한 학회들과 달리 한철연은 고유의 연구 공간인 연구실이 있었다. 이 연구실에서 분과별로 세미나하고, 기조부(이병수, 박영균, 송석현 활동)의 초청으로 외부 강연을 들었던 기억이 여전히 선명하다. 나는 1989년 당시 과천에 살고 있었는데, 처음 한철연의 연구실인 낙성대 연구실까지는 남태령 고개만 넘으면 되는 가까운 거리였기 때문에, 한층 더 친근감이 갔다. 그러다가 1994년에 ‘논리교육연구실’이 발족되고, 이때부터 신촌, 홍대 연구실 시절이 열리게 되었다. 한철연이 ‘논술 사업’에 참여해야 하느냐 마느냐로 엄청난 논쟁이 있었을 당시 나는 무슨 사정 때문이었는지 참여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1996년 학위를 마친 후에 나는 홍대 산울림 소극장 근처에 있었던 ‘논리연구실’에 조광제, 우기동, 홍건영 선생님과 함께 상근하게 되었다. 학위를 마친 후 딱히 장래가 보장되는 자리가 내게 없었기 때문에 이 제안을 별 망설임 없이 받아들였던 것 같다. 한동안 한철연 회원들은 논술 첨삭 노동에 매진하면서, 자신의 역량을 자의반 타의반 발휘했다. 이때가 아마도 한철연 역사상, 경제적으로는 비교적 여유 있는, 그러나 연구 역량이 거의 발휘되지 못한 시절이 아닌가 기억된다. 그러다가 한샘의 재정난으로 1999년 한철연의 논술시대는 막을 내리게 된다. 이후 제2의 낙성대 연구실로 이사 가면서, 다시 연구실 분위기는 차분해졌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리고 몇 년 후에 윤구병 선생님의 제안으로 현재 서교동의 태복빌딩 3층으로 이사 왔고, 이순웅 당시 연구협력위원장의 열성적 제안으로 한 번의 리모델링을 거쳐 깔끔하게 환골탈태해진 현재의 연구실이 탄생하게 되었다.
- 분과활동의 추억
한철연과 내가 함께한 세월은 다른 초창기 회원들과 마찬가지로 34년이다. 늘 한철연에 내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으나, 한철연은 늘 그 자리에 굳건히 있었다. 나는 한철연에 들락날락하며 밀착했다가 거리를 두었다가 하곤 했었다. 한철연에서 내가 소속감을 가장 잘 느낄 수 있었던 활동은 역시 분과 활동이었다. 창립 초기에 내가 기억하고 참여했던 분과는 대표적으로 ‘변증법 분과’였다. 어느 여름에는 명지산으로 분과 엠티를 당일치기로 갔다 왔던 기억도 있다. 이 분과 소속으로 현재까지 한철연에 열심히 나오는 회원은 이병창 선생님밖에 없는 것 같다. 그 이후에 나는 문화변증법 분과에도 소속이 되었었다. 유감스럽게도 이 두 분과는 현재 사라지고 없다.
그리고 내가 한철연에서 동지들과 함께 만들고 가장 애썼던 분과는 ‘여성과철학 분과’였다. 내가 박사학위를 받은 후 1996년에 만들어졌다. 김세서리아, 이정은 등과 의기투합해서 여성과철학 분과를 만들었고, 이때부터 지금까지 여성과철학 분과는 한철연을 27년 이상 굳건히 지킨 분과라고 자부할 수 있다. 물론 내가 이 분과에 한 번도 결석 없이 참여한 것은 아니었고, ‘여성주의’가 우리 사회에서 큰 효과를 발휘하지 못한다는 어떤 직감 때문에 좀 멀리한 시절도 간혹 있었다. 그러나 여성과철학 분과를 멀리하면 나에게는 특이한 금단 현상이 나타나 얼마간 휴식 후에 다시 복귀하고는 했다. 한철연이 친정집이라면, 여성과철학 분과는 친정엄마와 같은 존재였다. 이후 많은 후배들이 여성과철학 분과에 나처럼 들락날락하며 꽤 적지 않은 성과를 내었다. 지금 나는 여성과철학 분과를 지키는 창립 멤버이자 뒷방 늙은이가 되었지만, 여전히 흐뭇한 기분이다. 최근에는 3-4년 전에 만들어진 ‘근현대 삶 사회 분과’(이른바 복덕방 분과)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김교빈 분과장님과 더불어 한철연 초창기 멤버들의 집합소가 됐지만, 이후 20년은 더 가자 했는데,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건강이 허락하는 한 계속 가는 분과가 되길 희망한다.
- 한철연 속 나의 궤적
나는 한철연의 창립 멤버이자, 은퇴하지 않는 회원이다. 나는 나도 모르게 ‘은퇴하지 않을 결심’을 했었던 것 같다. 아무리 퇴물처럼 보여도 굳건히 지키는 어느 사찰의 은행나무 같은 존재가 되고 싶어 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한철연에서 쓴 감투는 여성과철학 분과의 첫 번째 분과장이다. 이 감투는 꽤 오래갔고 장기집권을 했다. 그러다가 분과장을 김세서리아에게 물려 주고 나는 평회원으로 자유롭게 세미나에 참여했다. 한편 논리교육연구실에 발탁되어 상근연구원(유급)으로 2년여를 지냈고, 그 후 서교동 연구실 시절로 이사 한 후에는 한철연에 잘 나가지 않았다. 어느 토요일 오후 낮잠을 자고 있는데, 느닷없이 이순웅 위원장의 전화가 나를 깨웠다. 걱정 반 불안 반 마음으로 ‘혹시 내가 무슨 잘못을? 실수한 것?’이라고 자기 검열하면서 이순웅 위원장을 만나러 갔다. 그 자리에서 느닷없이 나는 차기 연구협력위원장 자리를 덜컥 제안받았다. 전혀 생각하지도 못한 뜻밖의 제안에 나는 당황했고, 망설임과 거절 사이에서 고민했다. 이순웅 위원장이 두 번째 왔을 때 나는 삼고초려는 아니지만 결국 그 자리를 수락하고 말았다. 나는 연구협력위원회의 부장 감투도 한 번 쓰지 않고 낙하산 위원장이 되고 말았다. 이게 옳은 결정인가? 하는 많은 망설임도 있었지만, 이 2년 동안의 경험은 내 인생에서 한철연과 맺은 두 번째 소중한 인연이었다고 자부할 수 있다. 그 후 편집위원장 그리고 회장까지 나는 감투를 쓰게 되었고, 흥겨운 마음으로 그 직책들을 수행하였다. 어찌 보면 나는 한철연의 고위직 감투에서 여성으로서는 첫 번째라는 수식어를 몰고 다닌 셈이 되어 버린 것 같다. 여기에 여러 가지 함의가 있음은 다들 잘 아실 것 같다.
한철연은 늙어가고 있다. 후배들이 거의 없다시피 하고, 학문 후속 세대 문제는 큰 짐으로 남아 있다. 또 한철연의 끝나지 않은 정체성 논의는 한철연의 건강함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위안 삼아 본다. 21세기 인문학 위기 속에서 한철연은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을까? 앞으로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추신, 이 글을 쓰는 데에는 이정호, 김교빈, 이병창, 서유석, 이종철, 우기동, 문성원, 김세서리아 선생님과의 전화 통화 등 큰 도움이 있었음을 밝혀 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