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경공동체와 유목공동체의 비교[철학을다시 쓴다]-20

농경공동체와 유목공동체의 비교[철학을다시 쓴다]-20

 

 

윤구병(도서출판 보리 대표)

 

*이 글은 보리출판사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나 남과 북으로 흩어져 살게 되면서 유목공동체와 농경공동체가 어떻게 갈라졌는지에 대해서 상징적으로 성서의 예를 들어서 설명을 하는 가운데 제가 성서를 제대로 읽지 못했다는 사실이 드러났습니다.?강의를 마치고나서 어느 분께서?‘창세기를 보면 에덴동산에 있는 나무는 두 그루였다고 기억이 된다.?하나는 지혜의 나무고,?하나는 생명의 나무였다고 기억된다.’?이렇게 말씀을 하셔서 그러냐고, ‘하와가 사탄의 꼬임에 빠져서 따 먹은 열매는 생명의 나무 열매가 아니라 지혜의 나무 열매였고,?천사를 시켜서 하느님이 생명의 나무를 지키게 만들었다.’라고 합니다.?그래서 제가 부정확한 정보를 가지고 이야기했기 때문에 다음 시간에 그 문제에 대해 다시 이야기하겠노라고 말했습니다.?그래서 그 이야기를 제가 다른 분한테 여쭤봤더니 그 분도 기억이 잘 안 난다고 해요.

“혹시 여기 성서학에 밝은 분,?계십니까??창세기 에덴동산에 대해서 좀 정확하게 증언을 해주실 분 있으면 이야기해 주세요.”

“구약 성서는 히브리사람들이 행한 신앙이고 우주관이거든요.?그래서 처음에 선생님이 말씀하셨듯이 그것은 하나의 사유이고,?구체적으로 현대인의 관점에서 성서를 해석하면 안 된다는 결론이 나오게 되는 거죠.?그 시대 사람들의 세계관이기 때문에 그거는 큰 문제가 아닌 것 같습니다.”

“혹시 구약성서 읽어 보신 분 있으면 말씀해보세요.?저는 에덴동산 한복판에 서 있는 게 생명의 나무라고 굳게 믿고 있었는데,?그게 생명의 나무가 아니고,?지혜의 나무였다라는 증언이 나오고 또 다른 교회도 다니는 분한테 물어봤더니 그 분도 모른다고 하시고…….(대답 없음.)?아까 제가 말씀드린 것처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리신다면 될 거 같습니다.?제가 자료에 따르는 엄중한 고증에는 자신이 없습니다.?오죽하면 객관성보다도 당파성이 더 중요하다고 말하겠습니까??정말 완전히 비과학적이거든요.?있는 것보다도 있어야 할 것이 더 중요하고 없는 것보다도 없어야 할 것이 더 중요하다고 믿으니까 이런저런 제 믿음의 소산이라고 생각하고…….?어쨌든 에덴동산 이야기는 재미있었습니까?”

“예!”

“그러니까 거짓말을 하면 사람들이 더 재미있다고 합니다.”(일동 웃음.)

계속해서 그런 거짓말을 이어 보도록 하죠.?제가 거짓말의 존재론적인 근거를 이야기하는 첫 시간에는 사람들이 꽤 많아서 이 분들이 내 말에 감격을 했구나,?했는데,?그 다음에?1/3로 수강자가 줄어들었어요.?오늘은 지난 시간보다는 많이 오신 거 같은데 거짓말을 해도 통 크게 하니까 좀 많이 오는 거 같습니다.(일동 웃음.)?지난 시간에는 에덴동산에서 빙하기 때 적도 부근에 모여서 살던 사람들이 간빙기가 되어 적도 지역에 사람이 살기 어려운 열대우림 지역으로 바뀌고,?언제든지 조개를 잡아먹을 수 있었던 갯가가 물이 차올라 실제로 먹고 살기 힘든 상황이 전개되었고,?적도 지역에는 밤낮 온도 차이가 없고 사계절이 없는 철없는 세상이었기 때문에 사람들도 머리 쓸 필요가 조금도 없어서 아담과 이브의 두뇌를 측정했으면 아마?‘새대가리’, ‘아이큐 영’이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손만 내밀면 먹을 것이 있고,?머리 안 써도 의식주 문제가 해결되는 지역에 살았기 때문에 결국은 아담과 이브는 머리 쓸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됐다,?이?<수유너머>처럼 골머리 아프게 공부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에 살아서 얼마나 행복했는지 모른다,?그런 이야기를 했고요.

그 다음에 갑자기 간빙기가 되면서 온대지방까지 잡혀 있던 얼음이 천천히 남극과 북극으로 밀려나면서 남쪽과 북쪽으로 초원과 나무들이 자랄 수 있는 땅이 열리게 됨에 따라서 그쪽으로 인간이나 다른 생명체들도 전부 흩어져 살게 됐는데,?여기에는 지구축이 기울어서 자전을 하는 바람에 결국에 사계절이 뚜렷하게 구별이 되고 가을철을 중심으로 먹을 것이 한꺼번에 많이 나는 철이 있고,?겨울같이 먹을 것이 아예 나지 않는 철이 있기 때문에,?사람들이나 다른 생명체들이 사계절을 나면서 철이 나기도 하고,?봄,?여름,?가을,?겨울철에 접어들기도 하면서 미리 삶에 대해서 예측도 해야 하고 대비도 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지게 됐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아담과 이브의 자손 가운데 카인과 아벨이 생겨났는데,?아담과 이브가 남과 북으로 정처 없이 떠나게 되는 배경이 있었고,?여기에서 카인은 농경민으로 정착을 하게 되고,?아벨은 유목민으로 떠돌게 되는 신세가 됐는데,?실제로 세계관이라든지 가치관,?이런 것들이 유목민들하고도 다르고 오늘 이야기하게 될 해안도시 사회를 형성하고 있었던 도시민들하고도 조금 달랐다는 이야기와 농경민의 경우,?좁은 마을 공동체에서 태어나고,?자라고,?늙어서 죽으면 뒷동산에 묻히는 마을 공동체가 농경민들의 우주였고,옆 마을에 가봐야 똑같은 방법으로 농사짓는 사람들만 있었기 때문에 공간적인 경험의 확장이 지혜의 함수가 되지 못하고 시간적인 경험의 축적이 지혜의 함수가 되었다,?라는 이야기를 하였죠.

그리고 농경민은 오래 살수록 지혜로운 사람이고 자연히 장로들 중심으로 권력이 집중되고,?어른들을 공경하는 의식이 역사관에도 투영이 돼서 상고주의 정신,?우리 아버지보다는 할아버지가 슬기롭고 할아버지보다는 그 할아버지가 더 슬기로웠을 것이다,?그렇게 요순시대에 살던 사람들은 슬기로운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그때는 황금시대였고,?점점 아래로 내려올수록 은의 시대,?동의 시대,?철의 시대라고 하고,?불교식으로 하면 정법시대에서 상법시대,?말법시대로 점점 더 인간의 삶의 조건도 어려워지고,?시간이 지날수록 인간이 더 멍청해진다,?그런 세계관이 농경민들의 의식에 자리 잡게 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노인네들이 하는 말은 무조건 옳아’?하는 생각이 깊이 박혀 있기 때문에 가치관도 대단히 규범적이고 스스로 알아서 하는 것보다는 어른들이 하는 대로 순응해서 살면 살길이 열린다고 생각을 했기 때문에 독자적으로 자유롭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싸가지 없는 젊은 것들이라고 생각해서 마을 공동체에 크게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제가 한 듯싶습니다.

그리고 유목공동체는 짐승들에게 먹일 수 있는 목초가 있는 곳을 찾아서 위도에 따라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면서 인위적으로 한 철을 만들었어야 했기 때문에,?농경민 사이에서 자연의 시간이 지배적이었다면,?유목민들은 인간이 자연의 시간의 일부를 통제할 수 있는 길들을 열어가는 측면이 있습니다.실제로 목초지라는 것이 풀밭인데 기후가 조금만 바뀌게 되면,?그 풀이 곧 메말라서 사막이 생기기 쉬운 조건이고,?사막이 생기게 되면 유목민들 사이에 먹고 살 수 있는 초원을 사이에 두고 싸움이 일어나고,?그 과정 속에서 전체 부족이 죽느냐 사느냐가 달려 있기 때문에 결국은 거기에서 어린 시절부터 목초지를 지키기 위해서 전사들을 길러낼 필요가 있었다,?그래서 농경사회에서는 상사(喪事)와 제사(祭祀),?사람이 죽고 거기에 죽은 사람을 모시는 의식이 중요한 몫을 차지하고 있는 것에 견주어서 유목사회에서는 육체적으로 강인하고 튼튼한 그런 젊은이들이어야만 전쟁에서 이겨낼 수 있으니까 그런 젊은이들을 길러내기 위한 성인식이 아주 가혹하고 가장 중요시되었다는 이야기를 곁들여서 말씀드렸습니다.

또 이 사람들은 상황에 따라서 목초지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해서,?여러 공간을 다니면서 목초지를 찾아야 했기 때문에,?공간적인 경험의 확장이 지혜의 함수였고,?그렇게 공간적인 경험을 제대로 하려면,?위험을 무릅쓰고 말이나 낙타를 길들여서 이리저리 풀이 자라는 곳을 찾아다녀야 했기 때문에 정신적,?육체적인 힘이 강한 청장년층으로 권력의 중심이 옮겨온다는 말씀도 드렸습니다.?그리고 이 사람들의 경우에는 과거에 찾았던 목축지에 다시 가 보아도 누가 이미 차지하고 있거나,?가뭄이 들어서 없어졌을 수가 있으니까 노인들의 말을 무턱대고 따르는 대신에 스스로의 힘으로 찾아나서야 했고,?어른들 말을 귓등으로 흘려듣는 버릇이 생겼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렇듯 농경민들의 윤리가 규범윤리라 하면 유목민들의 윤리는 상황윤리다,?어떤 것을 고집하지 않고,?그때그때 바뀌는 사고의 유연성이 생겼다는 이야기였죠.?이렇게 해서 농경민들의 문화형태와 유목민들의 문화형태가 상당히 큰 차이를 보이는데,?거기에 대해서 제가 깊이 이야기하지는 않았습니다.

저는 여러분들한테 농경민의 문화와 유목민의 문화가 어떻게 다른지에 대한 나머지 부분을 숙제로 남겨두겠습니다.?농경민으로부터 처음으로?‘부동산’의 개념이 생겨났고,?유목민으로부터?‘동산’의 개념이 생겼다는 것만 알아두시면 되겠습니다.?가축은 끊임없이 움직이는 것이기 때문에 동산이죠?농경민들은 자연의 시간에 많은 제약을 받았고,?인간의 시간이라는 것은 크게 가치가 없었다,?왜냐하면 삶을 꾸려가는 데 자연이 지배적인 역할을 했고,?오랜 세월에 걸쳐 자연에 순응하는 지혜를 익힌 노인의 말씀과 자연이 순환하는 질서를 그대로 따르면 삶이 보장되었기 때문에 따로 생명의 시간 일부를 재조직해서 인간만의 시간으로 만들 필요가 없었다,?그런데 유목민이 되면서 상황이 달라진다,?자연의 시간에 순응해서만은 살아남을 길이 없어서 시간을 공간화하고 등질화시킬 필요가 유목민들 사이에서 나타난다,그러나 유목민의 삶도 실제로 자연의 시간과 긴밀하게 연결됐다는 의미에서 생명의 시간 가운데서 자연의 시간과 완전히 분리되는 인간의 시간을 만든다는 것은 유목민 삶에서는 아직 나타나지 않는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유목공동체 지혜의 함수: 공간[철학을다시 쓴다]-19

유목공동체 지혜의 함수: 공간[철학을다시 쓴다]-19

 

 

윤구병(도서출판 보리 대표)

 

*이 글은 보리출판사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 유목공동체 지혜의 함수: 공간

농경공동체에 특유한 관혼상제에서부터 가치관, 역사관, 그리고 사물을 해석하는 여러 가지 틀, 이런 거 하나하나 짚어보면 재미있는 점이 굉장히 많이 있습니다. 이것을 통틀어서 농경문화라고 부르기로 합시다. ‘문화’를 영어로는 ‘컬춰’(culture)라고 하죠. 이 말은 라틴어 cultus에서 나왔습니다. 독일어나 불어나 영어나 어원은 같습니다. cultus는 라틴어 colo라는 동사의 과거분사입니다. colo라는 말에는 논이나 밭을 간다는 뜻이 있습니다. 물론 파생적인 여러 가지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만 농사를 지으면서 농경민들 사이에서 최초로 문화가 나타났다는 의미로 해석하면 되겠습니다.

기독교 창세기에 바탕을 두고 우리가 상상력을 펼쳐 보자면, 이브 계열은 카인을 거쳐 정착민이 되어 공동체를 이루며 농사를 짓고, 아담 계열은 아벨을 본보기 삼아 유목민으로 집단을 이루어서 독특한 삶의 길을 걷게 되는데, 처음부터 유목민은 아니었던 걸로 여겨집니다. 유목민들이 주로 활약했던 공간들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우리 조상들도 유목민이라고 그러죠. 태어날 때 엉덩이에 몽고반점이 찍혀 있는 것으로 봐서 몽고인들이 우리 먼 조상이고, 거기서부터 한반도로 말 타고 이주해 왔다, 이런 식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몽고, 아라비아, 바빌로니아, 아시리아 같은 고대문명, 히타이트 문명이 있었던 곳들, 이런 곳들의 공통점이 있는데 그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지질학적인 공통점?”

“사막이요.”

“그렇지, 사막. 그 사막이 처음부터 사막이었을까요? 처음부터 사막이었다면 들어가서 살지 못했겠죠? 초원에서 사막으로 점점 바뀌었겠죠.”

초원은 사실 목축을 하기에 아주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는 곳입니다. 그런데 기후 변화가 일어나면서 어느 순간 목초지가 점점 사막으로 바뀌는, 비가 내리지 않고 풀이 메마르고 하면서 사막으로 바뀌는 기간들이 지속되어 왔겠죠. 유목민들은 봄, 여름, 가을, 겨울 같은 문제를 어떻게 해결을 하죠? 공간 이동을 통해서 늘 푸른 철을 계속해서 인위적으로 조성하죠. 그렇죠? 그러니까 위도에 따라서 풀이 자라는 철에 따라 차이가 있다, 그러면 짐승들 풀을 뜯기다가, 이를테면 말이나 소를 기르는 제주도 한라산 주민들이 그러듯이 풀이 먼저 자라는 차례에 따라 위쪽으로 위쪽으로 올라갔다가 가을이 와서 점점 풀이 말라가고 먹을 것이 없어지면 다시 아래로 아래로 내려오게 하고, 그 다음 해에 또 위로 위로 거슬러 올라가고 이렇게 해서 위도를 오르내리면서 목축을 합니다. 짐승들에게 가장 알맞은 먹이가 제공되는 지역을 찾아서 공간 이동을 하는데 목초지가 줄어든다면 어떻게 되죠? 생존권이 달린 문제이기 때문에 목초지를 찾아다니고 짐승들을 빠른 시간에 움직이게 해서 남들보다 먼저 목초지를 차지해야 되니까,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짧은 시간에 먼 거리를 누비는 수단을 마련하는 것이죠. 그게 뭐로 나타납니까? 말이나 낙타를 길들이는 걸로 나타나죠. 그런데 말이나 낙타는 여자들이 길들이기 힘든 짐승들입니다. 일정한 체력이 뒷받침돼야 길들일 수 있는 짐승이지요. 소나 돼지나 개 같은 경우에는 쉽사리 길들일 수 있지만 말이나 낙타 같은 것은 아무나 쉽사리 길들일 수 있는 것들이 아니어서 수컷들의 힘이 필요합니다.

이렇게 되니까 공간 이동이 빨라지는 거죠. 빨라진 발로 발 빠른 짐승들을 몰고 다니면서 삶의 길을 찾는데, 농경공동체가 여성이 권력의 중심에 있는 ‘불평등 사회(?)’였다면 이 유목사회는 남성 위주의 불평등 사회로 전환됩니다. 짐승을 길들이는 과정에서만 문제가 생기는 게 아니라 목초지가 줄어들고 서로 알맞은 목초지를 차지하려고 애쓰는 과정에서 싸움이 일어나고……. 다른 유목민이 먼저 목초지를 차지하고 있다고 물러설 수가 없잖아요. 그 많은 짐승 떼를 몰고 겨우 찾아갔는데 다른 데로 가는 중간에 짐승들 대다수를 잃어버릴 수가 있고, 실제로 굶주려 죽을 수도 있으니까 한판 붙을 수밖에 없잖아요. 한판 붙으려면 어떻게 해야 해요? 싸우는 기술을 어렸을 때부터 익혀야 강인한 체력, 정신력을 갖출 수 있죠.

농경민은 우리 나이로 열여섯이면 관례를 행하게 되고, 어른으로 인정받아 시집 장가를 가게 되는데, 농경민의 ‘관례’라는 것은 유목민에 견주어 단순합니다. 이를테면 마을 나무 밑에 들돌이 있어서 누가 그것을 쉽사리 번쩍 들어 올리느냐에 따라 그 사람 힘세다, 소 잘 몰겠다, 일 잘하겠다, 이렇게 관대하게 어른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데, 유목민들은 전쟁터에 내보내야 하고 거기서 강인한 체력을 발휘해야 하고 적에게 붙들려도 굴복하지 말아야 하니까 관례가 굉장히 엄격합니다. 부족에 따라서는 자갈들을 불에 달궈 놓고 거길 지나가게 하기도 하고, 가슴에 꼬챙이를 꽂아서 24시간이나 48시간을 견디게 하기도 하고, 맨손으로 눈 덮인 높은 산에 올라가 며칠 동안 견디고 오라고 시키기도 해서 강인한 체력과 정신력을 가진 젊은이가 되도록 혹독한 훈련을 시킵니다. 농경민 사회에서는 공간적인 경험의 확장이 지혜의 함수가 되지 못하고 시간을 통한 경험의 축적이 지혜의 함수가 된다고 했는데, 유목민의 경우에는 공간적인 경험의 확장이 지혜의 함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육체적으로나 정신력으로나 강인한 힘을 지니고 있어서 사방으로 여기저기 돌아다녀 본 사람이나, 맞닥뜨리는 적을 이겨내고 살아남는 자들이 가장 지혜로운 인간이 된다, 그래서 그 사람들에게 권력이 집중이 된다고 할 수 있겠죠. 북유럽 신화를 보면 여기 살던 사람들은 바다를 목축지로 삼아서 헤매고 다니는 약탈자 무리로 유명합니다. 오딘 신화 같은 경우를 살펴보면 삶의 지혜를 얻기 위해서 자기 눈 하나를 자기가 뽑아서 신에게 바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실제로는 싸우다가 눈알이 빠진 거겠죠.(일동 웃음.) 그걸 신화화하니까 눈알을 바치고 지혜를 얻었다는 이야기가 되는 거지요. 그렇게 해서 강인한 체력과 정신력을 갖추고 있는 청장년을 중심으로 사회 구조가 바뀌게 됩니다.

여기서 노인들이나 여자나 애들은 어떤 대접을 받습니까? 고려장은 워낙 농경민들의 풍습이 아니고 유목민들의 풍습입니다. 체력이 바닥나서 움직일 수 있는 힘이 없어진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늘 빨리 움직여야 살아남을 수 있는 유목공동체에서 짐이 될 뿐이죠. 그래서 버리고 가요. 여러분들, ‘바렌’(The baren world)이라는 영화에 나오는 에스키모(이누이트) 부족 사람들도 유목민입니다. 이 영화에서 나이 많은 할머니를 아들이 버리고 가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할머니는 저 멀리서 흰 곰이 나타나는 걸 보면서 눈을 지그시 감고 이런 상상을 하죠. 저 흰곰이 곧 와서 나를 잡아먹을 텐데 그러면 내 영혼은 흰곰 속에 들어가 있다가 내 자식이나 손자가 저 흰곰을 잡아서 먹게 될 때 다시 내 핏줄과 한 몸이 된다는 그런 꿈을 꾸죠. 그래서 죽음을 아주 평온한 기분으로 맞이하죠. 버리고 가는 사람은 비정해 보이고 버림받은 사람은 비참해 보이지만 그 사람들 삶에서는 이것이 가장 슬기로운 선택이고 그럴 수밖에 없는 선택이죠.

“유목민들 사이에서는 윤리가 규범적이겠습니까? 이런 경우에는 꼭 이렇게 하고 저런 경우에서는 꼭 저렇게 해야 한다고 조상 대대로 물려온 윤리관에 따라서 이 사람들이 행동을 할까요?”

“아니요.”

아니죠. 부딪히는 상황마다 유동적인데 그래서 이때는 이렇게 하고 저때는 저렇게 하라는 상황윤리를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또 강자의 논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어른들을 공경해야 한다는 것보다도 강한 자들을 우러러보아야 한다고 느끼게 되죠. 재물을 분배하는 데 있어서는 어떻습니까? 농경공동체에서는 생산되는 것이 전부 유기물이고 일 년 이상 묵혀 놓으면 다 썩게 되고, 해마다 새로 씨를 뿌려야 거기서 싹이 트고 남새나 낟알이 자라게 됩니다. 씨앗을 2년만 묵혀도 싹이 잘 트지 않기 때문에 해마다 뿌릴 씨앗을 남겨두고는 모두 고루 나눕니다. 떡을 해 먹기도 하고 거지나 가난한 사람들한테 나눠 주기도 하고……. 어쨌든 다 나누죠.

유목민의 경우에도 나눔이 있습니다. 유목민들이 굉장히 너그러운데, 그 너그러움은 생존 조건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삶터를 옮길 때는 많은 것을 버리고 떠나야 하니까요. 양이라든지 기르는 짐승들은 전부 유동자산이죠. 농경민들은 집이나 논밭이나 전부 고정 자산인데, 이건 유동자산입니다. 버리고 떠날 수밖에 없는 고정자산은 가치가 없습니다. 유목민들 사이에서는 고정자산에 관한 관념이 희박하니까 마구 나줘 줘버리고 대부분이 떼 지어 가서, 도중에 만나는 농경공동체나 유목공동체에 조그만 약점이라도 보이면 때려 부수고 물건이나 짐승, 여자를 약탈해서 나눕니다. 농경민들은 하루 세끼 먹을 것만 남기고 나머지는 두루 나눕니다. 더 먹어봐야 배탈만 나죠. 유목민들은 탈취해 온 것들 가운데 비교적 오래 보존할 수 있는 것들만 가지고 와서 분배를 하는데 고루 나누진 않죠. 약탈하는 데 앞장선 사람 중심으로 분배가 이루어지겠죠. 계속해서 목초지는 줄어들고 생존경쟁에 휘말릴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살아가야 되니까 죽느냐 죽이느냐 밖에 길이 없는 경우도 생겨납니다.

문화를 보는 관점도 굉장히 다르죠. 농경 사회는 붙박이 사회이기 때문에 문화들이 다양하게 발달을 하죠. 벽에 걸어놓고 눈을 즐겁게 하는 것들도 필요해서 시골사람들도 집안에 민화를 걸어놓고 낙화나 가구 같은 여러 가지 손재주 부린 것들을 여기저기 남기게 되고, 청승맞은 시집살이 노래에서부터 일할 때 부르는 노래, 풍물치고 놀 때 부르는 노래 같은 여러 가지 노래들이 생겨나고,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어린 손자들을 무릎에 앉히고 옛날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하고, 이렇게 해서 문화유산들이 차곡차곡 쌓이게 됩니다. 유목민들도 문화가 없진 않지만 기억 속에 간직되고 입에서 입으로, 몸에서 몸으로 전승되는 것밖에 따로 간직해야 하는 문화는 많지 않고 지극히 한정되어 있죠. 유목민들이 악기를 만든다고 할 때 어떤 악기를 만들겠습니까? 전쟁을 부추기는 심장소리와 비슷한 타악기나 뿔피리 같은 것이 고작이고, 거문고나 가야금 같은 악기는 뒷전이겠죠. 이렇게 유목생활 하는 사람들의 가치관, 문화관, 역사관, 그리고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를 규정하는 사회적인 모든 규범들이 농경민들하고는 상당히 다르게 됩니다.

사막화가 차츰차츰 진행되면서 목초지를 여기저기 찾아 해매고 다니는 과정 속에서 일부는 먹을 것을 구하러 여기저기 다니다가 모래사막을 가로질러서 서로 부족한 물건을 바꾸는 상업에 종사하는 사람도 나타나고 점점 머리를 쓸 일들이 늘어나죠.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번갈아 드는 온대지방에 살면 사람도 짐승도 머리가 좋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다못해 식물들도 머리가 좋아지죠. 식물들도 겨울에 겨울눈을 마련해서 봄에는 꽃을 피우고 가을에는 완전히 벌거벗어야 살아남는구나 하는 것들을 배우고, 다람쥐나 개미, 이런 온대지방에서 옮아온 동물들이 겨울잠을 자거나 도토리 같은 먹이를 모아서 저장해 놓고 사는 삶의 양식을 새로 배운다든가……. 사람들도 가을철에 집중적으로 먹을 것이 나니까 그것을 어떻게 저장하느냐에 신경을 쓰게 되고 그러다 보니 그릇을 빚게 되고 먹을 물을 담거나 낟알을 간직하는 항아리나 단지 같은 것을 만드는 기술들을 생각해내면서 머리가 굉장히 복잡해집니다.

유목민들도 농경민들만큼 머리 쓰는 일이 많을까요? 농경민들은 저마다 한 철 한 철 접어들면서 철이 들어야 하고, 한마을 공동체에서 자급자족하고 살아야 하기 때문에 봄, 여름, 가을, 겨울, 철이 바뀌는 데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어요. 우리 변산공동체의 경우를 보면 농사짓는 사람들 가운데 대부분이 도시에서 와서 처음으로 농사짓는 법을 익히게 되는데 한 십여 년 지나면 살아남는 데 필요한 기술들을 백여 가지 정도 익힙니다. 우선 콩만 해도 스무 종류 가까운 것들을 언제 심고 언제 거두어야 하는지 알아야 하고, 간장, 된장, 고추장, 김치 담는 것, 집짓는 것, 하우스 놓는 것, 지게 만드는 것, 등등 삶에 필요한 기술을 백여 가지 이상 익히게 되지요. 이와는 달리 유목민들은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대단히 강인한 사람들이 앞장서서 ‘가자!’ 하면 ‘예, 따르겠습니다.’ 하면 되기 때문에 단순하게 살아도 됩니다. 어떻게 보면 농경 공동체가 굉장히 단순하고 인간이 자연의 시간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겉으로 보기에 소박하고 크게 머리를 안 써도 되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어쨌든 사회가 단순화되고 한 사람의 행동양식이나 판단이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되면 사회구조에 불평등이 자리잡게 됩니다. 저는 유목사회에서 최초로 사람과 사람사이에 불평등한 관계가 나타났다고 봅니다. 농경사회에서는 아까 말씀드렸던 대로 누구나 빠짐없이 나이가 들면 어른대접을 받게 되기 때문에 통시적으로 보면 모든 사람들에게 평등성이 확보가 되는데 유목사회에서는 그렇지 않다, 그리고 아까 말씀 드렸듯이, 관혼상제에서 관례가 유목사회에서는 가장 중요시되고 농경사회에서는 제사가 중요시됐다, 이것은 성인식이 유목사회에서 가장 중요시되고, 나이가 많으냐 적으냐에 상관없이 누가 우리 부족들을 곤경에서 빠져 나와 잘 살 수 있게 만드는 데 앞장서느냐가 중요하니까, 그에 따라서 그 부족의 운명이 그 사람에게 맡겨지죠. 이런 과정 속에서 생활양식이 달라짐에 따라 사고방식도 덩달아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 여기서 제 이야기는 끝내고 질문을 받겠는데요. 다음 시간에는 도시 공동체가 이야기의 주제가 되겠습니다. 그리고 상당히 복잡한 이야기인데 기르는 문화와 만드는 문화, 지속과 변화의 변증법, 이것도 곁들여서 설명하겠습니다.

질문 받겠습니다.

“농경사회에서도 불평등은 생기지 않습니까?”

“예를 들어서 어떤 측면에서 그렇다는 거죠?”

“지주와 소작 같은 것은 옛날부터 있었으니까요.”

“제가 이야기한 것은 어려운 서양 학술 용어로 ‘아키티푸스’(archtypus)라는 것인데 ‘원형’을 이야기하는 거고, 실제로 계급사회가 나타나면서 원시 공동체에서부터 고대 노예제사회, 중세 봉건제사회, 그리고 근현대사회로 바뀌어 오는 동안에 평등과 불평등을 가리는 단순한 기준을 찾기 힘듭니다. 복합적인데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원초적인 형태, 아키티푸스라는 거죠. 계급관계의 얽힘에 대해서는 뒤에 이야기할 것이 꽤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농경사회에서는 시간이 매우 중요한데 윤리적으로 고정윤리다, 그리고 유목사회는 어떻게 보면 이동하는 것보다는 악착같이 매달린다는 느낌이 들고 그것을 윤리적으로 상황윤리라고 보고 굉장히 유동적이라던가……. 그래서 고정윤리를 끌어내는 논리를 따지면 맞는데, 고정윤리까지 가면 다시 느낌이 안정화되고 안착화되고 거꾸로 상황윤리 속에서는 권력자가 안정화가 안 되고 다음 힘센 놈이 올라서니까 어찌 보면 계급사회는 잘 안 맞아 보여서 논리적으로 따져보면 다 맞는데 결과적으로 보면 계급사회도 그렇고 시간적으로 보면 약간 충돌한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예, 좋은 질문입니다. 실제로 제가 그 이야기를 여기서 하려고 하다가 뒤로 좀 돌렸는데 우리가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이야기하든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이야기하든 살아 있는 생명체를 중심에 두고 이야기를 하고, 전체로 큰 틀에서 보면 생명의 시간 속에서 이 모든 것들이 진행이 되는데, 이 생명의 시간이 인류가 지구상에 나타나면서 자연의 시간과 인간의 시간으로 나뉘거든요. 자연의 시간이란 것은 대체로 달과 별 같은 천체의 순환에 따라서 계절이 바뀌기도 하기 때문에 농경민처럼 거기에 따라서 사는 사람들은 자연의 시간 속에 매몰됐다고 해야 할까? 순응한다고 해야 할까? 물론 농경민들도, 유목민도 자연의 시간의 통제에서 벗어나는 측면이 있어요. 끊임없이 인간의 시간, 인간의 삶을 위해서 자연의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항구적인 봄철이나 여름철을 나름대로 만들려고 애쓰고, 공간을 이동하는 속도를 조절하는 측면이 있어서 인간의 시간이 실제로 확보되는 측면에서 보면 인간의 자연에 대한 통제력이 그만큼 커지기도 해요. 자연의 시간 속에서 농경민들은 자연의 시간에 순응하는 측면이 크고, 이 측면에서 보는 시간과 공간 문제는 굉장히 어려운 문제 가운데 하나에 속합니다. 좋은 질문인데 여기에서 다 토론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여러분들은 유목민들이 드디어 철이 들거나 철이 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철들지 않고, 철나지 않고도 살 수 있는가 하는 길을 찾는 데에 앞장선 측면이 있다고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자연 원형으로서 농경공동체에서 역사라고 하는 것은 이후에 인간의 시간으로서 역사와는 다소 대비되는 역사라는 말씀이십니까?”

“그렇습니다. 농경민을 지배하고 있는 역사적인 관점은 순환사관입니다. 우리가 멋을 부려 니체 식으로 이야기한다면 영원회귀, 이런 것들이 실제로는 농경민의 의식 속에 꽉 들어차 있지요.”

농경공동체 지혜의 함수: 시간[철학을다시 쓴다]-18

농경공동체 지혜의 함수: 시간[철학을다시 쓴다]-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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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구병(도서출판 보리 대표)

 

*이 글은 보리출판사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 농경공동체 지혜의 함수: 시간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소설 쓰고 있고, 허튼 수작 부리고 있다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많을 거예요. 그렇지 않다는 것을 밝히기 위해서 이제부터 사람과 이웃사촌인 오랑우탄을 예로 들어서 왜 최초의 공동체가 모계사회일 수밖에 없는지 이야기를 하지요.

오랑우탄 연구의 세계적인 권위자는 비루테 갈디카스라는 여자입니다. 비루테 갈디카스는 평생 동안 오랑우탄의 생태를 연구해서 뛰어난 학문적인 성과를 쌓아 왔습니다. 오랑우탄도 암컷들이 공동체를 이룹니다.

“오랑우탄 암컷이 일생 동안 새끼를 몇이나 낳는 거 같아요?”

“10마리요, 50마리.”

“여러분들 머릿속에는 많이 낳을수록 더 원시적이라는 생각이 알게 모르게 편견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보다 오랑우탄이 좀 더 원시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많이 낳을 거라고 생각을 하는데 많이 낳는 오랑우탄 암컷이 일생동안 낳는 새끼는 많아야 세 마리쯤입니다. 왜 그런지 아세요?”

“몇 년을 사는데요?”

“대개 40년에서 50년 정도쯤 삽니다. 오랑우탄 새끼가 태어나면 그 새끼한테 나무꼭대기에다 집 짓는 법,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건너는 법을 포함해서 먹이를 찾고, 나무 타고 오르내리는 법, 그리고 새끼한테 먹을 것과 못 먹을 것을 가르치는 데 칠 년이 걸립니다. 400가지 정도의 먹을 것을 자연에서 얻는 법을 새끼에게 가르쳐줘서 스스로 제 앞가림을 하게 만듭니다. 여러분들 가운데 먹을 것 백 가지쯤 제대로 가릴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 손들어 보세요. 만만치 않죠? 모든 생명체가 생명체인 한은 스스로 제 앞가림을 하는 힘을 길러야 합니다. 그래야 살아남습니다. 그 힘을 길러주는 데 오랑우탄은 칠 년이 걸리는 겁니다. 그 기간 동안에 애를 혼자서 키우기 힘들고 해서 암컷끼리 연대를 해서 공동체를 이루어 삽니다.”

공동체 가운데서 농경공동체는 두 뒷발로 몸 전체의 균형을 유지하고 느릿느릿 돌아다니면서 먹고살 것을 찾을 수밖에 없는 인간들이 이루어 낸 공동체입니다. 여자로 태어나면 여러 가지로 제약이 많아서 애를 낳아야 하고 갓난애를 길러야 하고……. 활동할 수 있는 좁은 공간을 중심으로 해서 삶의 영역이 개척되었고, 자급자족 할 수 있는 생산지가 만들어져 왔고……. 그런데 혼자서는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가 많잖아요. 애를 낳을 때나 갓난애를 안고 젖을 먹일 때는 속수무책이잖아요. 도움이 필요한 수컷은 사냥하러 간다 하고 가 버리고, 그러면 이웃여자에게 같이 도와서 살자고 할 수밖에 없잖아요?

그렇게 해서 초기 공동체는 여성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는데 그 공동체는 유목공동체가 아니라 농경공동체였다, 여러분들은 유목공동체가 먼저 생겨났을 거라고 생각하고 믿는 분들이 있을 거라고 봅니다. 또 농경공동체는 하루라도 먼저 태어난 사람이 권위를 더 갖게 되고 늦게 태어난 사람은 꼼짝 못하게 되는 위계질서가 서열화된 사회라고 보기 쉽습니다. 굉장히 엄격한 위계질서에 따라 나이 어린 사람은 아무리 좋은 생각, 바른 판단을 가지고 있어도 어른들의 억지에 꼼짝 못하는 불평등한 사회로 생각하기 쉬운데, 그렇지 않습니다. 농경공동체는 그 나름으로 엄격하게 평등의 원칙이 지켜지고 있는 사회입니다. 다만 공시적인 측면에서 평등성 확보를 생각하느냐, 통시적인 측면에서 평등성을 보느냐에 따라서 조금 다를 뿐이죠.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현대 민주주의사회라는 것은 어느 연령대 이상이 되면 모두 투표권을 가지고 있어서, 바보가 되었든 미친 사람이 되었든 한 장의 표를 행사하고 그것을 당연한 권리로 여기게 되지요. 그런 점에서 농경공동체는 불평등하기 짝이 없는 공동체입니다. 가장 나이 많은 노인이 꽥! 하면 모두 죽여 주십시오, 하고 복종할 수밖에 없는 공동체거든요.

그런데 여러분들 생각을 해보십시오. 옛날에 한 마을이 농경 공동체를 이루고 사는 사람들의 우주였습니다. 그 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라고, 늙어서, 죽고, 뒷산에 묻힙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백 년 전까지도 대부분이 그렇게 살아 왔습니다. 다만 여자는 한번 거주지를 옮기죠. 옛날에는 남자가 장가를 들어서 거주지를 옮겼는데 지금은 여자가 시집을 가서 거주지를 한번 옮깁니다. 그런데 여자도 거의 마찬가지로 한 울타리 안에서 살아가게 되죠. 농경공동체에서는 공간적인 경험의 확장이 지혜의 함수가 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웃마을로 가봐야 똑같은 방식으로 똑같은 농기구 이용해서 농사를 짓기 때문에 배울 게 없습니다. 어디를 가 보니 다른 삶의 형태가 꾸려져 있고 거기에서 새롭게 눈을 뜨게 되는 게 있더라 하는 일깨움을 얻을 수 없어요. 다시 말하면 농경공동체에서 지혜는 시간의 함수입니다. 오래오래 한마을에 살면서 많은 일을 겪은 사람, 가뭄이 되었든 큰물이 되었든 그 밖의 여러 가지 농작물 정보에 가장 밝은 사람은 오래오래 걸쳐서 경험을 쌓은 노인들입니다. 하다못해 늙으면 관절에 중풍 비슷한 게 있어서 비가 오려면 쑤셔요. 일기예보보다 더 정확합니다. 그러니 자연히 노인네들에게 의논을 하게 됩니다. 무슨 일이 있을 때 찾아가서 이런 일이 있고 상황이 이런데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물으면 대체로 노인들이 하는 이야기가 틀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권력이 노인들에게 집중이 됩니다. 나이가 든 사람일수록 더 슬기로워지지 않습니까? 지혜가 시간의 함수가 되는 마을 공동체 안에서 나이가 들면 들수록 더 슬기로워지니까 규범 윤리가 확립되죠. 웃어른이 하신 말씀 틀리는 게 없다, 그리고 이건 어른들이 오랜 경험들을 통해서 확립해 놓은 윤리관이니까 이걸 벗어나면 안 된다, 다 삶의 경험이 응축돼서 이렇게 우리 잘되라고, 잘 살라고 윤리 도덕을 이런 형태로 만들어 놓은 거다, 그것을 어기면 안 된다 해서 규범 윤리가 거기서 확립이 되고, 역사적으로 보면 상고주의적인 역사관이 자리잡지요.

우리는 시간이 흐를수록 더 문명화되고 더 개명된 좋은 세상이 온다고 생각을 하죠.

그런데 옛날 사람들은 거꾸로 생각했습니다. 농경 사회에 살던 사람들은 옛날이 훨씬 더 살기 좋았다고 생각해요. 서양에서도 마찬가지고 동양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불교에서는 사람이 행동하고 말하는 것마다 옳았던 ‘정법시대’가 있었고, 그 뒤를 이어 임기응변이 생겨난 ‘상법시대’가 있었고, 지금은 ‘말법시대’라고 하죠. 도대체 혼란하기 그지없는 세계라고 봅니다. 유교에서도 과거 요순시대가 제일 좋았다. 과거로 돌아가자는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까? 서양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황금시대(golden age)가 있었고 그다음에 은의 시대(silber age), 동의 시대(copper age)를 거쳐서 지금은 철의 시대(steel age), 인간 가운데 말종들만 살고 있는 그런 시기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한단 말이죠. 이것은 농경민의 독특한 사유방식입니다. 옛날이 좋았다, 노인네들이 하는 말은 틀리지 않다, 우리 아버지가 나보다도 더 슬기롭고 아버지보다도 할아버지가 더 슬기로운데, 그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는 얼마나 더 슬기로웠을까? 그렇게 자꾸 유추해 들어가는 겁니다. 그래서 옛날에는 아주 슬기로운 사람들이 모여 살던 이상적인 공동체가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거꾸로 점점 종말로 다가서고 있는 중이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농경민들의 사유 방식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죽은 자에 대한 애도의 뜻이 마음속에서 우러나오고 제사, 죽은 분들을 추모하는 제사가 관혼상제 가운데서 으뜸이고, 그 다음에 장례, 그다음에 혼례, 그다음에 관례, 이렇게 차례가 지어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규범윤리가 지배를 하고, 역사를 보는 관점에서는 상고주의가, 그리고 계절이 순환하듯이 모든 것이 순환한다는 순환사관이 자리 잡습니다. 한 해가 가면 또 계절이 되풀이되듯이, 달이 차면 기울 듯이 모든 것이 되풀이된다, 해와 달같이 한 해를 주기로, 한 달을 주기로 순환하는 것들이 시간을 규정하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죠. 그래서 농민들이 가지고 있는 평등의식은 현대인들의 평등의식과는 아주 다릅니다. 농경사회가 어떻게 해서 평등한 사회라고 볼 수 있느냐 하면, 노인네들 죽잖아요. 그러면 뒤이어 젊은 사람이 장년이 되고 또 노인이 되잖아요. 그리고 노인네들은 예외 없이 존경받잖아요. 그러니까 농경사회는 공시적인 측면에서 보면 불평등한 사회 구조지만 통시적으로 순환하는 세대의 관점에서 보면 완전한 평등이 이루어지는, 그 나름으로 엄격한 평등 사회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공동체 형성 과정[철학을다시 쓴다]-17

공동체 형성 과정[철학을다시 쓴다]-17

 

윤구병(도서출판 보리 대표)

 

*이 글은 보리출판사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 공동체 형성 과정

 

공동체는 크게 세 유형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회’라고 할 때 큰 틀의 공동체를 가리키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농경사회, 유목사회, 도시사회. 여기서 도시사회도 특성에 따라 두 가지로 갈라질 수 있죠. 서구 마르크시스트들이 따로 구별하는 ‘아시아적인 전제’가 이루어지는 도시사회와 지중해 연안에 장사를 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이룬 해안도시 사회. 성격이 다르죠. 농경사회와 유목사회는 어디에서나 크게 다르지 않고 비슷한 측면이 드러납니다. 저번 시간에 제가 최초 공동체를 형성하고 산 사람들은 여자들이었다고 말씀드린 적 있나요? 충분히 설명을 안 했나요? 그러면, 지금부터 여러분들이 듣는 것은 전혀 객관적인 근거도 없고 누가 책으로 쓴 바도 없는, 저의 상상과 몽상, 때로는 망상까지 곁들여진 이야기라고 여기고, 열심히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시기 바랍니다. 어쩌다가 머릿속에 남는 것이 있으면 담아두셔도 되고요.

저희 집안 이야기이기도 한데, (제 아들에 따르면 저는 사람보다 오랑우탄에 더 가깝다고 하니까.) 저희 집안사정과 곁들여서 이야기를 풀어 볼까 합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지구의 기후변화는 단속적으로 혹은 일정한 주기를 두고 계속적으로 이루어져왔습니다. 지금은 인간의 관점에서 보면 가장 최근의 빙하기가 지나고 나서 간빙기에 해당합니다. 몇만 년 전에 천천히 날씨가 풀리기 시작해서 간빙기가 시작했다고 그랬나요? 고생물학자나 지질학자 같은 사람들 증언을 들으셨을 텐데, 저나 여러분들이나 숫자에 약하기는 마찬가지인 거 같습니다. 한 이만 년 전 정도 됐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하는 이야기는 잘못된 정보일 수도 있으니 꼭 믿지는 마십시오. 독일 사람들은 이런 말을 싫어하죠. 정밀과학, 엄밀 과학 바탕 위에서 실증적인 검증이 이루어지지 않은 이론에 대해서는 질색하는 사람들입니다. 어쨌든 그건 상관이 없는 이야기이고, 간빙기가 시작된 게 이만 년 전 이라고 생각해 봅시다.

“긴 세월 동안에 빙하기와 간빙기가 지구를 번갈아가면서 덮쳤는데, 빙하기가 오게 되면 인류들은 어디에 주로 모여 살았을까요?”

“동굴 속.”

“동굴 속? 뭐, 그렇죠. 그런데 적도 부근에 살았겠죠? 다른 데는 북극에서부터 지금의 한대지방, 온대지방까지 전부 얼음으로 뒤덮이게 되고 오직 적도부근만 말하자면 따뜻한 곳이었을 테니까.”

빙하기 때의 적도 부근을 상상 속에 그려 봅시다. 빙하기 때 적도 부근은 어떤 기온상태고, 어떤 동물과 식물들이 자라고 있었을까요? 지금은 적도가 열대우림지역이 되어 있어서 사람이 살기에 상당히 거북한 곳이고, 지나치게 많은 비와 따가운 햇살이 내리 쬐이고 있지요? 간빙기가 오면서 점점 날씨가 풀림에 따라서 적도 지역에서 생활 조건이 악화되면서 식물들 가운데 꽃피고 열매 맺는 나무들도 점점 온대 지방으로 퍼져 가고, 짐승들의 먹이가 되는 풀들도 온대지방으로 확산되면서 자연환경의 변화에 따라 사람도 적도를 중심으로 남과 북으로 옮아 살게 되었겠죠? 실제로 빙하기에는 적도 지방에 과일나무도 많이 있었고, 짐승들이 풀 뜯어먹고 살기 좋은 초원 상태고 넝쿨식물이 우거지지 않은 아주 살기 좋은 곳이었다고 봅니다. 게다가 적도 지역은 어떻습니까?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나누어지나요? 아니죠? 정말 철없는 곳이었겠죠. 그래서 사람이나 다른 동물이나 풀이나 나무 같은 것도 철없이 살 수 있었고, 철없이 살 수 있는 곳이 낙원이죠. 낙원에서는 먹이를 얻으려고 머리를 쓸 필요가 없죠. 손만 뻗으면 먹을 것이 있고, 낮과 밤의 기온 차이가 없으니까 따로 입고 벗고 할 필요도 없고요.

기독교에서 이야기하는 에덴동산은 아마 빙하기 때의 적도 모습이었을 것이다. 하나님이 이 에덴동산에다가 지혜의 열매가 달린 생명의 나무를 하나 두고 그 생명수 아래서 배꼽 없는 아담과 이브가 살도록 했는데 어느 날 하나님도 경악할 만한 일이 일어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생명수에 열매가 열린 것입니다. 생명수라는 것은 영원히 살 수 있는 나무이기 때문에 생명수이죠. 그런데 그 생명수에 열매가 달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실제로 그 생명수는 언젠가 죽고 그 열매가 간직하고 있는 씨앗이 떨어져서 재생이 될 수 있다는 이야기죠~ 그것은 하나님의 처지에서 살피면 엄청나게 큰 재난이죠. 아담과 이브에게 생명수를 보고 날마다 그 그늘에서 절하고 영생을 누리라고 했는데 갑자기 열매가 맺히니까 (제가 지금 소설을 쓰는 겁니다, 소설을 쓰는 건데…….), 아무튼 열매가 달리니까 하나님이 깜짝 놀라서 절대로 그 열매에 손대지 말라고 이야기를 하죠. 그런데 어디선가 뱀이 나타나서 저 열매를 먹는 게 좋다고 이브를 꼬시죠. 실제로는 하나님도 너희 목숨 영원토록 보장 못하니까 저 열매 먹어라, 이런 식으로 꼬였겠죠. 결국 그 꼬임에 넘어가 아담과 이브는 지혜의 열매를 나누어 먹습니다. 하나님이 이 꼴을 보고 노여워해서 니네들은 이제 이 에덴에선 살 수가 없다 하여 아담과 이브가 쫓겨나죠.

그런데 이 시점이 간빙기하고 겹쳤다고 생각해 봅시다. 간빙기와 겹쳐서 실제로 기온이 높아지니까 그 동안 그렇게 살기 좋았던 적도 부분이 열대우림지역으로 바뀌면서 초원에서 넝쿨이 우거진 밀림지대가 되고 바닷물 수위가 점점 높아져서 전에는 가까이에 있는 바닷가에 가면 늘 조개를 주워 마음껏 배불리 먹고 살아남을 수 있었는데 개펄이 죄다 물속에 잠겨 버리고 점점 살기 어려워집니다. 갖가지 열매가 주렁주렁 달리던 나무들도 남과 북으로 흩어져서, 아까 이야기한 대로, 나무도 그렇고, 낟알이 달린 풀도 그렇고 거기에 따라서 짐승들도 전부 먹이를 찾아서 남과 북으로 퍼져나가고 사람도 그 운명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고 칩시다. 온대 지방이라는 곳이 어떤 곳입니까? 철 있는 곳이죠. 봄, 여름, 가을, 겨울. 한철 한철이 들고 나는 곳, 그래서 온대지방으로 옮겨간 사람들은 한 철 한 철 나면서 철이 나고 한 철 한 철 접어들면서 철이 들어야 살 수 있는 곳으로 바뀌는 것이죠. 그 전까지는 아담과 이브가 하나님이 보장해줘서 영원히 살 수 있었으니까 서로 부둥켜안고 뒹굴고 살아도 먹을 것이 지천으로 널려 있고 몸에 옷을 걸칠 필요도 없었겠죠. 그럴 필요가 뭐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이제 마음 놓고 살 수 있는 생명의 동산인 에덴동산으로부터 쫓겨났으니까 우리가 때맞추어 재생산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배를 맞춰서 배꼽 달린 아이들인 카인과 아벨을 낳았다고 그러죠.

카인과 아벨/ 출처: www.allaboutthebible.net

이렇게 해서 태어난 아이들 가운데, 카인은 농사를 짓고, 아벨은 목축을 하죠. 유목사회와 농경사회가 여기에서 갈라지는 계기가 되죠. 그렇죠? 말하자면 카인은 농사짓기에 알맞은 땅을 찾아내서 씨 뿌리고 짐승 길들이고 하면서 주저앉아 사는데, 아벨은 짐승들을 데리고 초원을 찾아서 멀리멀리 떠나는 운명에 놓인 것이죠. 그런데 성서를 보면 카인이 아벨을 죽였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는 농경 공동체가 유목 공동체보다도 더 지배적인 공동체가 되었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어요. 원시 공동체는 아프리카에서부터 소단위로 이루어진, 농경 공동체라고 보는 것도 가능합니다.

포유류 가운데 제법 기특한 게 인간 수컷입니다. 왜 그러냐면 유인원까지 포함해서 포유류 가운데서 암컷에게 씨만 뿌려놓고 달아나지 않는 수컷이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 수컷은 암컷이 둘러놓은 울타리에서 벗어나지 못해요. 그러니까 사람 암컷들이 얼마나 영악하냐 하면 수컷들을 가두어 놓고 부릴 수 있는 힘을 지녔어요. 여자는 온전한데 남자들은 그에 못 미쳐서 바보라는 뜻으로 ‘반편’이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왜 반편이냐고요? 생물학적으로도 증거가 있습니다. 사람이 더불어 살려면 언어를 통해서 의사소통을 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데 사람 수컷의 두뇌는 말을 주고받을 때 왼쪽 뇌만 작용을 합니다. 그쪽에만 불이 들어와요. 암컷은 왼 뇌 오른 뇌 두 쪽 다에 언어중추가 갖추어져 있습니다. 여자가 온전한 인간이라 하면 남자는 반편이라는 말이 맞아요. 그래서 반편인 남자를 길들이기가 참 쉽기는 쉬웠겠어요.

사정은 이렇습니다. 말하자면 그 동안에는 수컷이 게을러도 먹고 살 수 있었습니다. 적도 부근에서만 살았다면 손만 뻗으면 늘 먹을 것이 주렁주렁 달려 있으니까 일하지 않고 먹고 살 수 있었는데 얼음이 풀리면서 적도를 중심으로 양쪽에 있는 온대 지방으로 옮겨 살면서 널리 풀밭이 펼쳐져 있고 나무들이 듬성듬성 서 있는 곳, 지금 아프리카 나이로비 국립공원같이 온갖 야생동물들이 뛰어다니는 그런 비슷한 곳이 사방에 널려 있으니까 수컷들은 사냥하러 간다 하고 떼 지어서 몰려나갑니다. 요즘 아주 정밀한 조준 망원경이 있는 사냥총 가지고도 짐승사냥하기가 쉽지 않지요? 그런데 꼬챙이 하나 들고 거기에다가 돌멩이 둘둘 감아가지고 무슨 사냥이 되었겠습니까? 그냥 가사노동에서부터 벗어나는 구실로 우르르 떼 지어서 다니는데, 그러다보니 쫄쫄 굶고, 가을이나 겨울이 오면 먹고 살길이 어디 있어요? 동굴에 불 피워 놓고 덜덜덜 떨다가 굶어죽기 직전에 나와서 옛날에 씨만 뿌리고 달아난 암컷들에게 간단 말이죠. 짐승이나 사람이나 애를 배고 갓난애가 생기면 속수무책일 경우가 많습니다. 어디 돌아다니지도 못하고 좁은 지역에 모여 살면서 가까이 있는 풀이나 낟알 같은 것들을 입에 넣고 씹어보면서 먹을 만하다 싶으면 캐다가 주변에 심고, 씨 뿌리고 해서 농작물들을 기르기 시작하고 짐승 새끼가 우연히 발견되면 주워다가 우리 속에 가둬서 기르기 시작하죠. 수컷들이 돌아와 보니까 그동안 다 굶어 죽었을 줄 알았던 암컷들이 살아남았고, 곡식도 저장해 놓고 짐승도 길들이고 해서 겨울날 채비를 다해 놓았단 말이죠. 그러니까 우리도 같이 살자고 궁둥이를 슬그머니 들이민 거죠. 그래서 모계사회가 시작된 거죠. 주권의 출처는 경제권에 있는데 공동체를 형성하고 경제활동을 해서 생산을 하고 재생산을 하는 기초를 닦아놓은 게 여자들이고, 남자들은 여자들이 이루어놓은 공동체에 빌붙어 산 거죠. 여자공동체에. 남자들은 기분 나쁠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사실이 그렇습니다. 실제로 모계 사회가 수십만 년 지속된 데에는 이런 역사적인 배경이 있습니다.

좋음과 나쁨[철학을다시 쓴다]-16

좋음과 나쁨[철학을다시 쓴다]-16

 

윤구병(도서출판 보리 대표)

 

* 이번 주부터는 1부와 2부를 순차적으로 연재합니다. 이 글은 보리출판사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 좋음과 나쁨

 

primum vivere, deinde philosophari.

“이게 라틴어죠. 무슨 말입니까? 혹시라도 배운 분?”

“프리뭄 비베레, 데인데 필로소파리.”

“예, 무슨 뜻이죠?”

“생이 먼저고, 철학은 나중이다.”

“그렇죠! 우선 살고 볼 일이고 철학을 하는 것은 그 다음 일이다.” (일동 웃음.)

뭘 해야 살지, 우리 한번 골 싸매고 덤벼봅시다. 저도 혼자는 못 사니까 살려고 지금 이 짓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혼자 잘 살 수 없는 세상이죠. 그렇지 않습니까? 사람은 스스로 제 앞가림을 해야 살아남을 수 있지만 스스로 제 앞가림을 한다는 게 쉽지 않습니다. 벌이나 개미처럼 여럿이 힘을 합해야 제 앞가림도 할 수 있게 태어난 생명체이기 때문에 더불어 사는 힘을 길러야 합니다.

“‘더불어 사는 세상’ 이것을 뭐라고 부르죠?”

“사회요. 그렇죠. 사회! 더 흔한 말로 시골 노인들은 ‘세상’이라 그러죠. 조금 교육받은 분들, 초등학교 문턱이라도 가본 사람은 사회라고 그러고, 그것도 안 배운 분들은 다 세상이라고 그럽니다. 그러면 우선 살고 보아야 하는데 제대로 살 수 있으려면, 좋은 세상에서 태어나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무리 팔뚝에다가 문신 새겨서 ‘착하게 살자’고 결심해도 소용없지 않습니까? 그렇죠? 요즘에는 또 ‘바르게 살자’는 말도 나옵디다. 우리가 매사에 참되고 정직해라 이런 얘기를 듣게 되는데 참되고 정직해서 뭐해요? 여러분들 안데르센의읽으셨죠? 그 동화에서 임금이 옷을 벗고 나다니는데, ‘정말 옷 멋있습니다.’ 하고 어른들이 거짓말을 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왜 그런 거짓말을 합니까? 살아남으려고 하는 거죠. 임금한테 잘못 보이면 당장 가는 목숨이니까, 살아남으려고 거짓말을 하는 거 아닙니까? 그러면 좋은 세상은 거짓이 발붙이기 힘든 세상, 일부러 거짓말을 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세상, 그래도 살 수 있는 세상,에 나오는 국민들처럼 알몸으로 돌아다니는 권력자에게 옷이 멋있다고 이야기 하지 않아도 살 수 있는 세상, 그게 좋은 세상이겠죠. 실천하고 연관되는 문제이기 때문에 또 여러분들에게 한마디 여쭈어 보겠습니다. 어떤 때 우리는 좋다고 그러고 어떤 때 나쁘다고 합니까?”

“건강, 생명 등에 부합하면 쾌로 느껴지고 그것이 좋은 것인 거 같고요. 죽음, 질병 등에 부합하면 불쾌이고 자기 생명이 단축되는 거니까 불쾌감을 느끼게 되고 그것이 결론적으로 나쁨이 되는…….”

“좋은 대답을 하셨습니다. 플라톤의 대화편에편이 있는데, 바로 거기에서 대화에 참여한 분이 지금 이 자리에서 의사 선생님이 한 대답과 비슷한 대답을 합니다. 그 옆에 계시는 남자 분, 어떤 때 우리는 좋다고 하고, 어떤 때 우리는 나쁘다고 그러죠?”

“내 마음에 들면 좋고, 마음에 안 들면 나쁘고…….”

“그렇죠? 주관의 영역으로 들어오게 되면 그 말도 맞는 말이 될 수 있습니다. 벙거지 쓰신 분, 어떤 때 좋다 그러고 어떤 때 나쁘다고 합니까? 본인의 개인감정을 객관화시키려고 하지 말고 자기가 솔직하게 느끼는 것을 말씀해 보십시오.”

“제가 좋으면 좋고 나쁘면 나쁘고.”

아, 인간이 왜 이렇게 퇴화하는지 모르겠어요. 점점 머리가 나빠지는 게 무슨 법칙인 거 같아. 우리 동네 할아버지 할머니한테 물어보면 적어도 그렇게 대답은 안 합니다. 제가 연모하는 연상의 여인이 있습니다. 저보다 9살밖에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제 칠십대 중반이신데 그 풍천 아주머니한테 제가 묻습니다. “아짐, 어떤 때 우린 좋다 그러고 어떤 때 우린 나쁘다고 그래요?” 하면 그 풍천 아주머니는 저한테 “철학 교수까지 했다는 게 그것도 몰라? 에이, 있을 것이 있고 없을 것이 없으면 좋은 것이고, 없을 것이 있고 있을 것이 없으면 나쁜 것이제.” 하고 딱 부러지게 대답합니다. 이 말 맞아요? 이제 구체적으로 질병을 예로 들었으니까 이야기할게요.

“우리 몸이 건강하려면 질병은 있을 거예요 없을 거예요?”

“없을 거요.”

“‘없을 것’이죠? 있으면 나쁜 것이죠? 그죠? 지금 제가 배가 고픈데 그릇에 밥이 하나도 없다, 텅 비어 있다 그럴 때는 어때요? 나쁘죠? 있을 것이 없어서 그런 거죠?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유, 평등, 평화, 우애, 관용, 이런 것들은 있어야 할 것입니까 없어야 할 것입니까?”

“있어야 해요.”

“그렇죠? 이런 것들이 고루 있어야 좋은 세상이죠? 그 다음에 억압, 착취, 전쟁, 이기심, 탐욕, 이런 것은 어떻습니까?”

“없어야 할 것이요.”

“없어야 할 것이죠? 있으면 나쁜 세상이죠. 우리가 좋은 세상을 앞당기려면 있어야 할 것을 있게 하고 없어야 할 것을 없게 하고 그래야겠죠? 여기에서 말의 생김새를 눈여겨봅시다. 우리 민족은 대단히 예민한 민족이고 철학하는 데 선천적으로 좋은 머리를 타고 났습니다. 여러분들도 일상생활에서는 그 좋은 머리로 이야기를 잘 하는데 갑자기 쉬운 질문을 하면 얼어붙어가지고 온갖 어려운 낱말 다 꾸며내서 대답을 어렵게 합니다. 자기 확신도 없으면서.(일동 웃음.)

*있을 것이 있고 없을 것이 없다 → 좋다.

*있을 것이 없고 없을 것이 있다 → 나쁘다.

동의하십니까?”

“예.”

“여러분들 전부 나중에 속았다고 투덜대지 마세요. 이 강의 내용은 전부 여러분들의 동의를 얻어 진행하고 있습니다. ‘있을 것이 있고 없을 것이 없다’는 좋다는 말이고, ‘있을 것이 없거나 없을 것이 있다’는 ‘나쁘다’는 말이죠?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세요. 참말과 거짓말을 가리는 말에서 딱 한마디가 달라지니까 좋고 나쁜 것을 나타내는 말이 되었습니다. 뭐가 달라졌습니까?”

“을.”

“‘는’에서 ‘을’로 바뀌었다. 그러면 ‘을’은 뭡니까?”

“당위.”

“왜 당위가 미래의 시제로 표현이 될까요? 독일어로는 졸렌(sollen) 이라고 그러죠. 왜 이 ‘당위’가, ‘해야 할 일’이 미래시제로 표현이 될까요? 과거시제나 현재시제로 표현이 되지 않고 왜 미래시제로 표현이 되겠습니까? 미래는 아직 없는 건데 우리는 왜 미래를 두고 이렇게 해야 한다, 저렇게 해서는 안 된다 왈가왈부해야 하죠? 현재에 충실하면 되지. 과거는 이미 없는 거고 미래는 아직 없는 건데.”

“곧 올 거니까.”

“올지 안 올지 어떻게 알아요?”(일동 웃음.)

“현재가 나빠서…….”

“나쁘다는 말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닙니다. 나쁜 것도 질적으로 여러 가지가 있고요, 그러니까 함부로 말해선 안 되고. ‘당위가 미래시제로 표현되는 까닭을 200자 원고지로 100매로 써내시오.’ 이러면 이 수강 신청한 분들 가운데서 절반 이상이 떨어져 나갈 것입니다. 그냥 농담입니다.”(일동 웃음.)

 

앙리 베르그송/ 출처: www.artnstudy.com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에 대한 시론》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우리말로도 번역이 돼 있고요. 거기에서 나온 말을 들뢰즈가 인용합니다. 우리의 기억(기억, 몽상, 회상, 추억 다 연결이 되는 말이죠.)과 그리고 응집, 삶의 에너지가 응집되는 문제, 시간 속에서 우리의 기억, 상상, 추억 이런 것들이 어떻게 이어지는가. 공간 속에서 어떻게 펼쳐지는가, 그리고 그것이 응집되어 우리의 삶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할 때 모든 과거가 하나로, 현재로 모여 미래로 집중되는가를 검토합니다. 들뢰즈가 예를 들면서 한 말 가운데서 이런 게 있습니다.

원뿔을 거꾸로 세워놓는 예를 들어서 설명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한 면 한 면은 확산이 되면 어디에서는 몽상이 펼쳐지고 어디에서는 추억, 어디에서는 기억, 이렇게 전개되는 단면들이 주루룩 나오는데, 현실에서 부딪치는 삶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할 때, 이렇게, 저렇게 펼쳐졌던 그 모든 역사성들이 모두 어떻게 하나로 응집이 되는가, 이것을 설명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제가 간단히 여러분 사고 시험을 또 한 번 하겠습니다. 원뿔이 땅에 바로 서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이 원뿔을 횡단면으로 나란히 자른다고 칩시다.

“수학 선생님! 이 도형은 눈에 익으시죠? 이 도형의 단면을 가로로 잘랐을 때 위쪽과 아래쪽이 같습니까, 다릅니까?”

“달라요.”

“횡단면을 잘랐으니까 연속된 걸 잘랐는데 아래쪽과 위쪽이 크기가 같습니까, 다릅니까?”

“같아요.”

“그러면 아래와 위가 같은 것들이 연속이 되면 주욱 자라서 원기둥이 되는데요?”

“맞아요.”

“그런데 이게 원뿔이잖아요.”

“미분 정도의 차이가 있어요.”

“그런 소리 하지 말고요, ‘미분’, ‘적분’ 하지 말고요. 다 얼버무리는 소리거든요.”

“차이가 있어야 맞는데요. 거의 없어지는…….”

“차이가 없으면 원기둥이 될 것이오. 차이가 있으면 계단이 될 것이오, 그렇지 않습니까? 우둘투둘 할 것 아닙니까? 아래 것이 크고 위에 것이 작으면 우둘투둘 계단식이 될 거 아닙니까? 무한을 둘러싸고 토막 내서 답을 찾자는 게 미분/ 적분이잖아요. 무한 그 자체를 있는 그대로 보면, 무한이 뭐예요? 셀 수 없는 거라고 말할 수도 있는데 헤아릴 수 없는 게 무한이죠. 누가 니 속셈이 뭐냐, 하고 물어봤을 때 우리가 머리 굴려가지고 딱히 이렇다 저렇다 말할 수 없는 것도 무한의 한 속성입니다. 규정할 수 없는 것, ‘무규정성’ 이것도 ‘무한’이라고 하니까요. 한정지을 수 없다는 뜻이니까요. 수학 선생님, 아까 이야기했던 것 빼놓고, 무한에는 수학적으로 두 가지가 있는데 어떤 무한 어떤 무한이 있습니까?”

“수렴, 발산.”

“수렴이란 말도 사실은 이상한 말이기는 합니다. 발산도 수렴도 다 우스운 말인데, 어쨌든 내적 무한, 수렴을 내적인 무한이라고 그러고, 발산을 외적인 무한이라고 그러죠. 그렇죠? 이것을 베르그송은 거꾸로 뒤집어엎습니다. 공간 축에 놓지 않고 시간 축으로 봅니다. 베르그송에 의지해서 들뢰즈는 여러분들이 좋아하는 온갖 개념들을 그럴싸하게 쫘악 정리해 놓았습니다. 그런데 이 도형을 놓고 그리스 철학자 데모크리토스가 같은 문제를 제기를 했습니다. 그리고 꼭 같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 단면을 자르게 될 때 그것이 같다고 하면 원기둥이 될 것이고 다르다고 하면 울퉁불퉁한 계단이 되어버릴 것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돼요? 단면으로 자른 원뿔의 윗면하고 아랫면은 어떻다고 해야 돼요?”

“미세하게 다르다.”

“다르다고 하면 미세하게 다르거나 정밀하게 다르거나 다 계단이 되어버린다니까.”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다.”

“그렇지 바로!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다. 그렇다면 뭐 이지도 않고 아니지도 않고, 이것을 한 단계 더 추상하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것’이 된다고 그랬죠?”

귤은 사과와 다르다. 왜? 귤은 사과가 아니니까. 왜? 귤에 있는 어떤 것이 사과에는 없고 귤에 없는 어떤 것이 사과에는 있으니까. 그렇게 전부 ‘있다/ 없다’로 수렴이 되죠. 그래서 말하자면 원뿔을 단면으로 잘라놨을 때 우리 눈앞에 드러나는 원은, 동그라미는 크기가 같은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라는 말은 크기로 볼 때 아래 있는 것이 위에 있는 것이 아니고 위에 있는 것이 아래에 있는 것도 아닌데 그것을 실제로 그렇게 아니라고만 볼 수 없다. 그러니까 ‘다른 것도 아니고 같은 것도 아니다.’ ‘인 것도 아니고 아닌 것도 아니다.’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 이것이 무규정성이라고 그랬죠. 이렇게 말해도 틀리고 저렇게 말해도 틀린다, 말하자면 불교에서는 용수, 나가르주나의. ‘아닐 비’(非)자를 무한히 읊조리는 그런 이상한 이론이 나타납니다.

‘뭘 할까’ 하는 데서 우리가 왔다 갔다 할 수밖에 없는 지점이 나타났습니다. 이렇게 할 수도 없고 저렇게 할 수도 없는 지점. 그게 실제로 우리의 존재 조건입니다.

“이럴 때 여러분들은 어떻게 해야 해요? 똑같은 거리에 건초더미 두 개가 있고 반대쪽에 굶주린 당나귀가 있다고 칩시다. 건초더미가 색깔도 같고 모양도 같고 다 똑같은데, 이 당나귀가 어떤 것을 고를 것이냐……. 이것은 유명한 딜레마 문제 중 하나인데, 안 좋은 결말이 있습니다. 끝이 안 좋은 이야기. ‘굶어죽었다.’(일동 웃음.) 뭘 골라야 할지 몰라서 눈만 굴리다가 죽었다.”

“설마요.”

“그럼 여러분들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냥 아무거나 고르죠.”

“그렇지! 일단 저지르고 본다. 그렇죠? 머리 굴리지 않고 저지르고 본다.”

도시 사람들은 서로 늘 같이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생각이 비슷해지죠. 그리고 생각이 비슷한 사람끼리 떼거리를 짓죠. 생각이 다르면 실제로 같은 형제라도 천리만리 거리가 느껴지고 등을 돌리면 딱 돌아보지도 않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래서 누가 무슨 말을 하는지 보면 이 사람 어떤 사람이다라고 판단하게 되는데, 촌사람들은 뭐가 닮는지 아세요? 손이 닮습니다. 시골에서는 거짓말 안 통하거든요. 24시간 늘 한마을에서 같이 살기 때문에 말과 행동이 달라져버리면 사람으로 여기지도 않습니다. 같아야 합니다. 도시에서는 어때요? 말로 살죠. 이런 문제를 내는 부류의 인간들이 전부 말로 먹고 사는 인간들이에요. 손은 무언가 하는 연장이죠. 손은 도구죠.

“제가 하고 있는 게 뭡니까? 놀리는 거죠? 손을 놀리는 거죠? 손발을 놀린다. 손, 발을 열심히 놀게 한다는 말이 무슨 말이에요? 부지런히 일한다는 거 아닙니까. 그렇죠? 일과 놀이가 둘이 아니에요. 우리가 실천적인 삶에서는 일과 놀이가 둘이 아닙니다. 그런데 머리는 어떻게 해요?”

“굴려요.”

“그렇죠! 그러니까 이상한 사이비 교주라든지 조직운동가라든지 이런 사람들이 도시에서 우글우글 많이 생겨납니다. 왜 그러냐면 도시라는 삶의 공간 자체가 사람으로만 이루어졌고, 사람끼리 모이면 머리 굴려가지고 다른 사람을 설득하고 설득당하고 그러는 것이 제일 효율적이니까. 그러나 사람과 사람의 문제를 머리 굴리는 것보다 빨리 해결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주먹이요.”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고 그러는데 주먹이 더 반사적이고 더 파괴적이어서 폭력을 쓰는데, 그 형태는 뭐죠? 칼을 든다, 총을 든다……. 우리가 나중에 무엇을 하려면 맨몸으로만 하기 힘드니까 연장을 써서 하게 되죠. 그런데 연장에는 크게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 쓰이는 연장이 있고, 사람과 자연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쓰이는 연장이 있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연장은 칼이고 총이고 대포고 원자탄이고, 이런 것들입니다. 그 연장으로 빨리 효율적으로 사람과 사람의 문제를 해결합니다. 낫이나 호미나 괭이 같은 것은 사람과 자연 사이의 문제를 해결하는 연장입니다. 그러니까 대장간에 가서 같은 ‘연장’이라는 이름을 가진 어떤 것을 벼리더라도 농사꾼이 대장간에서 찾는 거하고 장군이나 영토를 확장하려는 욕심을 지닌 통치자가 대장간을 찾는 거 하고는 다릅니다. 실제로 그리스 사회에서 대장간은 굉장히 큰 역할을 합니다. 대장간이 큰 역할을 한다는 건 무엇이냐면, 전쟁이 역사의 전면에 드러난다는 말입니다. 청동기 시대부터 철기시대를 거쳐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역사 시대를 구석기-신석기-청동기-철기시대 이렇게 나누는 것은 사실 사람과 자연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도구의 발달 역사로 보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사람과 사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무기의 역사입니다. 무기 재료로 역사 시대를 가르는 겁니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사람과 사람의 문제를 해결하는 다양한 양식이 나타나는데, 그 양식이 나타나는 사회 경제적인 배경과 사회 경제적인 배경을 이루는 저마다 다른 공동체의 형성과정에 대해서는 다음 시간에 이야기하겠습니다.

주체성과 자율성[철학을다시 쓴다]-⑮

주체성과 자율성[철학을다시 쓴다]-⑮

 

윤구병(도서출판 보리 대표)

 

* 이 글은 보리출판사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제가 ‘자유’를 이야기하면 ‘사회주의자인 줄 알았는데 자유주의자네?’ 이렇게 생각할 사람들이 있을 거예요. 자유에는 결이 여럿입니다. 노예소유주의 자유 개념이 있고, 부르주아 자유 개념이 있고, 지주들의 자유 개념이 있고, 자본가의 자유 개념이 있고… 저마다 내세우는 자유들이 서로 결이 달라요. 무엇을 ‘자유민주주의’라고 그러죠? 자본주의를 자본민주주의라고 말하는 대신에 이렇게 부르는 것입니다. ‘자유’가 하도 좋으니까, 저마다 자기 체제, 자기가 신봉하는 이념에 ‘민주’도 끌어다 놓고 ‘자유’도 끌어다 쓰고 그래요.

우리 헌법에 보장된 자유가 뭐죠? 신체의 자유, 사상의 자유, 집회의 자유, 언론출판의 자유, 거주이전의 자유, 이런 것들이 다 들어가죠? 추상적인 것 말고 거주이전의 자유, 신체의 자유, 여행의 자유, 이런 소박한 것들을 생각해봅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 없는 사람은 아무 자유도 없어요. 돈이 없으면 거주이전의 자유도 없고, 신체의 자유도 없고, 아무 것도 없어요. 헌법에 보장된 자유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 있는 사람만 누릴 수 있는 자유예요.

여러분들, 추석이나 설 때마다 도시에 붙들려 있는 아들딸이 ‘어머니, 미안해요. 회사일이 너무 바빠서 이번에는 못 내려가요.’ 하는 이야기를 텔레비전 화면을 통해 들어보셨죠? 그러고 철야하죠? 고향에 돈이 없어서 못 가는 거예요. 여행의 자유도 없고 고향 찾아 갈 자유도 없어요. 이 세상에는 두 부류의 인종만 있습니다.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 아주 명쾌하게 갈라지죠. 이건 제가 한 말이 아니라 <셰익스피어 이야기>를 쓴 유명한 찰스 램이 한 이야기입니다. 흑인, 백인, 황인, 이런 인종구별 없다, ‘있는 놈’과 ‘없는 놈’, 딱 두 종류로 구별이 된다. 있는 놈은 다 있고, 없는 놈은 아무것도 없고… 오죽하면 ‘없는 놈’이라 그래요? 재산이 없으면, 돈이 없으면 ‘존재’조차 없는 거예요.

‘스탠포드 엑스페리먼트’(Stanford Experiment) 이야기를 잠깐 떠올려 보지요. 이 이야기는 책으로도 나오고 영화로도 만들어져 있으니까 따로 긴 설명을 하지 않겠습니다. 아홉 명이 죄수 역할을 맡고, 열두 명이 간수 역할을 맡은 가상 감옥에서 벌어지는 실제 이야기입니다. 이 실험에 자원한 20대 젊은이 가운데 12명은 네 명씩 삼교대로 간수 역을 맡게 됩니다. 간수가 되는 사람은 죄수 역을 맡은 사람이 지닌 한 개인으로서의 자기 정체성, 상식적이고 건강한 시민으로서의 자기정체성을 없애야 하고, 등질적인 죄수 집단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지침을 받습니다. 죄수가 된 사람의 자기 정체성을 끊임없이 없애서 비인간화시키는 것이 간수의 임무예요. 감옥 체제에 무조건 복종하도록 하는 것이 임무이기 때문에 자기 역할을 충실히 수행할수록 죄수들을 비인간화시킬 수밖에 없어요. 그리고 그 정체성을 없앨 수밖에 없어요. 거기에서 죄수들에게서 심각한 시간 왜곡 현상이 나타납니다. 보통 사람의 경우 생명의 시간 가운데 자연의 시간이 우리 몸에 그대로 작동을 합니다.

 

영화 ‘The Stanford Prison Experiment’ 출처: http://folksonomy.co/?keyword=15274

 

쥐들에게 실험을 해봤는데, 같은 용량의 인슐린 주사를 시간을 바꾸어서 투여하면 어느 시간대에서는 백퍼센트 죽고, 똑같은 양인데도 어느 시간에 투여하면 한 마리도 죽지 않습니다. 우리 몸 안에 저항이 커지고 줄어드는 생명의 주기들이 있는 거예요. 시계로 측정되는 인간의 시간에는 이런 게 하나도 없는데, 복종을 끌어내기 위해선 생명체가 지닌 자연의 시간, 곧 생명의 시간을 등질화시킬 필요가 있어요.

감옥에서 간수 역을 맡은 사람은 교대시간에 무조건 호루라기를 불어서 죄수 역을 맡은 사람을 일으키고 팔굽혀펴기 등 체제에 순응하고 권위에 순종하도록 온갖 종류의 벌들을 부과하는 거예요. 너희들은 이제부터 사람이 아니다, 너희들은 개성이 없다, 감옥 안에서 일률적으로 밥은 몇 분 안에 먹고 소변보는 시간은 몇 분 만에 끝내라, 이렇게 모든 것을 통제하게 된단 말이죠.

이 상황 속에서 죄수로 자원했던 선량한 중산층 대학생이(처음에는 모두 죄수로 자원하겠다고 하고 간수하기 싫다고 했던 사람들인데), 자기가 돈을 받고 계약을 해서 감옥에 갇혀 있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진짜 감옥에 갇혀서 여기서 벗어날 수 없다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나 이제 그만하고 싶어요.’ 말하면 금방 나올 수 있는데, 못 나와요. 그리고 간수 역을 맡은 사람들은 점점 잔인해지고, 나중에는 취미 삼아서 성적인 학대까지 하게 됩니다.

이라크에서 자기들의 전리품으로 생각해서 붙잡힌 사람들 목에다 줄을 매서 끌고 다니고 성적인 모욕을 주고 그 행위를 사진으로 찍어서 자랑스럽게 공개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슬람 세계에서 성적인 모욕이라는 것은 엄청난 상처를 주는 일입니다. 목숨은 내놓을망정 그런 짓을 당하지는 못하겠다고 하는 사람들인데, 바로 그런 반응이 가장 큰 약점이니까 그 의지를 완전히 꺾어버리려고 그 잔혹한 짓을 태연하게 저지릅니다.

그 미군들이 ‘스탠포드 실험’에서 나오는 20대 초반의 젊은이들과 똑같은 사람이죠. 전혀 죄의식을 느끼지 못하고 ‘시스템’이, ‘매트릭스’가 작동하는 데 따라 그런 일을 태연하게 저지르는 거죠. 그러니까 자유 박탈은 인간에게 비인간화, 몰개성화로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자유 박탈 가운데 가장 광범위로 이루어지는 것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공간도 등질적인 공간으로 바꾸고 시간도 등질적인 시간으로 만들어 생명의 시간 가운데 자연의 시간을 죄다 없애버리고 모두 인공의 시간으로 바꿔 전체 우주 체계, 아주 작은 소립자 단계에서부터 아주 큰 우주까지 전부 등질적인 시공간으로 바꿔서, ‘인간의 의식’ 속에서만 형성되고 합의되는 세계, 수학공식을 통해서 확정된 세계를 진짜 우주로 감쪽같이 바꿔치기 하는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천체물리학이나 수학을 아무리 열심히 공부해도 이 덫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것이 휜 공간이 됐든, 무한히 확산되는 공간이 됐든 날마다 해가 뜨고 지는 시간이 달라지든, 달이 차고 기우는 시간이든, 지구가 해를 중심으로 공전하는 시간이든, 사람의 의식 속에서 가공되는 시간은 잘라내는 기준에 상관없이 내용을 채우는 것들은 다 빼버립니다. 그래야 계산할 수 있고, 측정할 수 있습니다.

‘아날로그’화 된 세계, 이어진 연속체는 늘 무규정성이 들어가 있어서, 이게 이렇다, 저게 저렇다 딱 잘라서 수치화되지 않아 끊어낼 수가 없습니다. 측정 가능한 것, 수치화된 것이 전제되지 않으면 도시사회에서 삶을 통제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도시사회에서는 저마다의 삶을 인간끼리 통제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길이 없습니다. 통제하는 세계에서는 맨 밑바닥에서 맨 위까지 위계질서가 반드시 성립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맨 위에는 ‘빅브라더’가 있고 맨 아래에는 ‘노바디’(아무것도 아닌 사람)로 위계질서가 생기는데 이런 위계질서를 세우는 작업을 우리 왼쪽 뇌가 맡습니다. 분석하고 조직하는 것은 왼쪽 뇌에서 하는데, 인간 수컷들이 ‘반편이’들이거든요, 언어와 추론의 중추가 왼쪽 뇌에만 몰려있어요. 여자들은 이야기할 때 양쪽 뇌가 작동하지만 남자들은 한쪽 뇌밖에 작동하지를 않아요. 그래서 수컷들은 조직하면 주욱 늘어서고, 정치 이야기하면 정신을 못 차립니다.

어쨌거나 자율성이란 것은 생명의 시간 속에서만 싹트고 꽃 피고 열매 맺습니다. 생명의 시간은 자연계의 여러 생명체와 함께 살아갈 때 가장 도드라지게 드러나게 됩니다. 지나가다 우연히 보게 되는 강아지풀도 누가 언제 싹터라, 꽃 피워라, 열매 맺어라 이렇게 명령하고, 간섭하고, 통제하지 않아도 스스로 자연스럽게 싹트고 꽃 피우고 열매 맺고 죽을 때는 알아서 죽고 또 땅에 묻힙니다.

그리스 사람들이 가장 경계했었던 말이 있습니다. 히브리스(hybris), ‘오만’이라는 뜻이죠. 현대 도시에서 ‘디지탈’화한 시간, 시 단위로, 분 단위로, 초 단위로 끊어낸 인간의 시간, 공간화된 시간은 인간의 오만이 극대화된 시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전자 조작을 통해 하느님 흉내를 내죠? 생명체를 자기 마음대로 변형시킬 수 있다고 믿고, 사기도 치죠? 돼지 장기로 사람 장기를 대신해서 프랑켄슈타인처럼 몸 전체를 잘라내고, 잇고, 기워도 끄떡없다고 여깁니다. 돼지 장기를 사람 몸에 꿰맞추면 사람이 돼지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왜 못하는지 몰라요. 물질체계에서는 상호교환이 가능하고 가역성이 성립이 되지만, 생명계에서는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물질과학에 기초를 둔 생명공학자들은 생체조직과 물질조직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생각 못합니다. 장기이식이라든지 유전자 조작이라는 것이 정말 아무 문제가 없는 것이냐 하는 것은 여러 세대를 거쳐서 지켜봐야 합니다.

저한테 누군가가 그런 질문을 합니다. 장기기증 하지 않을 거냐고, 제가 착해 보이는 모양이에요. (일동 웃음.) 저는 자신이 없다고 그랬습니다. 저도 저 자신을 못 믿는데 안구를 기증해서 눈을 번쩍 뜨게 만들면, 그 사람이 어느 순간 누구에게 갑자기 심한 증오심을 느끼게 될 때 칼로 푹 쑤셔 살인죄를 저지를지 어떻게 알아요? 장기 이식을 받은 사람이 꼭 그것을 고맙게 여기고, 착하게만 살라는 법 없잖아요. 제가 보기에는 기증된 장기를 나쁘게 쓰려고 준비하는 사람이 훨씬 더 많아요. 전 세계가 장기이식 시장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있는 나라 있는 사람들은 없는 나라 없는 사람 눈알도 빼고 콩팥도 빼는데 혈안이 돼 있는 세상입니다. 죽을 때 기증한 장기가 꼭 성냥팔이 소녀한테 가라는 법 없잖아요. 그래서 제가 죽어서 장기 기증하겠다고 하면 착하단 말 들을 줄 알고 있지만, 이미 죽은 사람에게 착하다는 칭찬이 무슨 소용 있겠습니까?

안식교 사람들은 수혈과 헌혈을 안 하잖아요. 그것을 이기적인 동기와 종교적인 편견 탓으로만 돌려서는 안 됩니다. 전엔 저도 걸핏하면 수혈하고 헌혈하고 그랬지만 나중에 B형 간염을 걸려서 자꾸 간염 걸린 흔적이 복제되는 게 있어서 헌혈해도 그 피 버리게 된다고 적십자병원에서 하지 말라고 연락이 와서 그 뒤로 그만두었습니다. 어쨌거나 우리가 어떤 일을 했을 때 사회가 전부 그것이 옳다고 해도 다시 한 번 살펴보고 사회가 전부 그르다 하더라도 다시 한 번 살펴보고, 정말 내가 이 일을 받아들이는데 내적인 확신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서 행동을 결정하는 것이 여러분들이 자기 몸과 마음을 자율적으로 이용하고, 상황과 체제에 맞서서 자유로운 공간과 시간을 열어가는 길이라고 믿습니다.

우리는 생명의 시간을 인공의 시간으로 바꿔치기 하려는 모든 통제에 대해서 의심의 눈길을 거두지 말아야 합니다.

‘어떻게 될 것인가’ 걱정 말고 ‘무엇을 할 것인가’ 다시 물읍시다.

삶과 생명체[철학을다시 쓴다]-⑭

삶과 생명체[철학을다시 쓴다]-⑭

 

윤구병(도서출판 보리 대표)

 

* 이 글은 보리출판사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우리가 당면한 문제는 미래가 없는 도시문명이 우리를 이끌어가는 대로, 그야말로 ‘되는’ 대로, ‘될 대로 되라’고 살아갈 것이냐, 그렇지 않으면 지속가능한 미래를 확보하기 위해서 이제부터라도 떨쳐 일어서서 무엇인가 ‘해야 한다’는 결단을 내려야 할 것이냐입니다.

도시에서 봉기해서 혁명이 성공한 예는 역사상 한 번도 없습니다. 의회주의에 기대서 세상을 바꾸어 보려는 시도는 이미 여러 차례 있었습니다. 가장 가까운 예로 전 세계의 주목을 받았던 아옌데 정권을 들 수 있는데 결국엔 미국이 뒷받침한 군부 쿠테타에 의해서 무너졌죠? 지금까지 인류 혁명의 거점은 늘 농촌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생산과 혁명의 거점이던 농촌이 다 무너져버리고 있습니다.

제가 변산에서 십여 년 이상 농사를 짓다 보니까, 이상하게 나무가 하는 말도 알아듣게 되고, 물고기가 하는 말도 알아듣게 되고, 들에 나가서 볍씨들이 수군거리는 말도 알아듣게 됩니다. 제가 사는 변산은 소나무가 많았던 지역입니다.

그런데 요즘에 변산 기후도 아열대성 기후로 바뀌면서 소나무가 급속도로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 자리에 참나무가 자라는데, 가을이 오면 많은 도토리 알을 떨굽니다. 한 해에도 수천 알의 도토리를 땅으로 떨구는데, 제가 참나무에게 물어봤습니다. ‘우리 나라 산지가 70%인데 거기에 모두 네 씨만 뿌리내리게 하려고 그래?’ 그랬더니 아니랍니다. ‘그러면 해마다 뭐하러 그렇게 많이 떨어뜨려?’ 물었더니 자기가 죽을 때쯤 떨어뜨린 씨앗 가운데 한두 그루 건강하게 자라서 자기를 대신해 종이 유지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해요.

 

?한겨레

 

볍씨도 마찬가지죠, 한번 심을 때 두 알 세 알 심으면 스무 포기로 늘어나는데 한 포기당 백 알 넘게 달리고 해서 풍년에는 볍씨 하나가 때로는 천 단위로, 때로는 만 단위로 열매를 맺죠. 그래서 볍씨한테 ‘야 들판 전부를 니 종자로 덮으려 그래?’ 물으니 아니라 그래요. 쥐도 먹고, 새도 먹고, 당신도 먹고 씨앗으로 남긴 것으로 우리 종 유지하면 그만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바다에 사는 숭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수억 개의 알을 낳아서 태평양, 대서양까지 온 바다를 전부 니 새끼로 덮을 생각이냐?’ 했더니 아니라 그러죠. ‘그중에 한두 마리만 남아서 자기 종을 유지시켜 주면 그만이다’ 해요. ‘그럼 나머지는 뭐하려고 그렇게 많은 알이 필요하니?’ 물으면 자기 몸을 던져 다른 생명체를 살리고, 자기 새끼들이 그 생명체에 기대 살기 위해서 그렇게 많은 알들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우리가 삼시 세끼 먹는 반찬들이 전부 다른 생명체가 밥상에 올리는 ‘생체보시’입니다.

유한한 세계에서 무한한 생산력이라는 건 없어요. 그것은 ‘신화’에 지나지 않습니다. 마르크스 시대의 신화죠. 씨 하나 뿌리면 수천수만 알을 얻을 수 있는 유기물의 세계에서도 무한이라는 건 없어요. 도시에서는 5%의 생산력만 늘어나도 ‘라인강의 기적’, ‘한강의 기적’ 이런 소리를 하는데 유기물은 무한축적이 안 돼요. 곡식의 씨앗을 이년만 묵혀버리면 발아율이 현저히 떨어져버려서 곡식 구실을 거의 못 합니다. 유기물이라 오래 두면 썩어버리니까 싫든 좋든 나눠야 해요.
그런데 ‘생산력의 무한한 발전’과 ‘생산물의 무한한 축적’에는 썩는다는 개념이 없어요. ‘무한축적’이 가능한 것도 무기물밖에 없는데 그것은 전부 ‘부동산’, ‘동산’으로, 화폐나 유가증권 같은 것으로 되면서 종이쪽지 하나에 수억, 수십억의 자산도 축적이 가능한 세상이 되었어요. 자본주의 체제가 지속되는 한 자손만대를 물려줄 ‘사유재산’으로 법적인 보호를 받아요. 폭력적인 국가기구가 이 사유재산을 보호해 주죠.

사람이 무엇으로 사는가? 이 질문을 던질 때, 도시 사람들은 답변할 길이 없어요. 도시공간에서는 사람들만 모여 사니까 ‘착취하고 살거나 착취당하면서 살지 뭐~’, ‘주인이나 노예로 살지 뭐~’ 이런 대답밖에 할 수 없어요. 전체 생명의 그물망 속에서 모든 생명체가 서로 도와 그물을 만들어가면서 살아야 하는데, 그렇게 살아갈 길이 없어서 도시사람들은 덫에 갇혀 있는 거예요. 그리고 환상 속의 세계를 실제 세계라고 자기최면을 겁니다. 정신적인 유목민들이 우글거리면서 ‘가상의 초원’, ‘의식의 평원’을 질주하고 있어요. 실재하는 평원이 아니라 등질화된 의식 공간을 질주하면서 나는 지금 말을 타고 달리고 있다고 상상을 해요. 어쨌든 밥상에 아침, 점심, 저녁으로 올라오는 것이 다른 생명체의 생명이다, 살아있는 몸을 나에게 제공하는 거니까 이것을 먹고 뭘 ‘해야 할지’ 성찰해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되는’ 대로 살 수밖에 없어요. ‘하면 된다’는 능동성은 사라지고, ‘되면 한다’는 수동적인 반응만 남아요.

상황에 따른 인간의 의식과 행동 변화[철학을다시 쓴다]-⑬

상황에 따른 인간의 의식과 행동 변화[철학을다시 쓴다]-⑬

 

윤구병(도서출판 보리 대표)

 

* 이 글은 보리출판사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비판은 쉽습니다. 그리고 무엇을 때려 부수는 일은 삽시간에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대안을 제시하는 것, 이렇게 때려 부수고 나서 여기다 무엇을 쌓아올릴 것이냐를 의논하고 실행에 옮기는 데에는 시간이 걸립니다. ‘없을 것이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쉽게 동의할 수 있고 누구든지 민감하게 대응을 하고 없애야 한다고 뜻을 모읍니다. 스스로 행동에 옮기지는 못해도 없애야 할 것이라는 의식은 분명히 갖습니다. 하지만 ‘있어야 할 것’인데 지금 없는 것이 무엇인지를 찾아내는 과정은 쉽지 않습니다. 서로 편안하게 살자, 서로 우애하면서 살자, 전쟁은 안 돼, 이런 빛 좋은 말로 때우는 것을 넘어서서 구체적인 실천과 연관 지어서 이건 없는데 우리가 빚어내야겠어, 길러내야겠어, 만들자고 뜻을 모으고 힘을 길러내는 데에는 창조적 지성의 결집이 필요할 뿐만 아니라, 아주 애 터지고 지루하고 힘든 건설의 과정이 요구됩니다. 그런데 건설은 우리가 머리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지요. 머리를 쓰는 일도 필요하지만 건설은 손과 발, 몸을 놀려서 합니다. 손발이 제대로 움직일 수 있도록 몸이 튼튼해야 건설 사업에 동원이 되죠.

중국에 문화혁명이 있었죠? 문화혁명이 일어나고 십여 년 이상을 마오가 생존해 있었고, ‘사인방’이 전면에 나섰을 때는 세계가 온통 중국의 문화혁명에 열광했습니다. 요즘 젊은이들이 체 게바라를 읽고 다니듯이 그 당시에는 마오가 전 세계 젊은이들에게 최고의 혁명지도자였습니다. 그 후로 사인방이 몰락하고, 급속도로 경제력이 떨어지게 되고, 세계열강의 대열에서 멀어지게 되면서, 또 문화혁명 기간에 피해가 엄청나게 늘어나고, 비판의식과 창조의식을 겸비하고 있는 사람들이 핍박을 받으면서 치르게 된 대가가 만만치 않았습니다. 결국엔 등소평 체제가 등장해서 급속도로 시장경제 쪽으로 경제정책을 바꿔 오늘날 이런 상황에 이르게 되었죠.

1966년 천안문 성루에서 신문을 읽는 마오쩌둥 – 출처: http://blog.hani.co.kr/blog_lib/contents_view.html?BLOG_ID=spider&log_no=26193

중국에서 부정부패는 일상화되어 있습니다. 중국에서 오랫동안 살다가 온 사람에게 직접 들은 말이 있습니다. 다른 나라 같았으면 그 정도로 부정부패가 심하면 나라가 거덜 났을 거라고 합니다. 그러나 ‘사회주의적 시장경제’라는 괴물경제를 유지하면서도 아직 희망이 있는 까닭은 문화혁명 시절에 농촌이나 공작소로 하방되었던 많은 청소년들이 지금 중국 공산당의 중간 간부가 되어 국정을 책임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들이 희망입니다. 이 사람들이 문화혁명 때, 어떤 사람은 자발적으로 지원하고 어떤 사람은 강제로 끌려가서 농촌에서 몇 년, 공장에서 몇 년씩 몸으로 때운 신체적 기억이 방부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이 거의 모두 공산당 당원들이고, 한꺼번에 무너지지 않는 두터운 층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부패가 널리 확산되지 않고도 자본의 본원적 축적이 가능한 체제가 꾸려진 것입니다. 몸으로 겪고 때우는 게 그렇게 중요합니다. 우리의 의식은 별로 믿을 게 못 됩니다.

체제와 상황이 사람을 규정하는 힘이 너무 커서, 책상머리에서는 혁명가이기도하고, 영웅이기도 한 사람들이 현실에서 상황이나 체제의 압력에 짓눌리게 될 때 어떻게 망가지고 변하게 되는지는 도처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설득을 통해서나 토론을 통해서 사람이 변화되는 것만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지요.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변증법, 생산관계가 건강하게 바뀜에 따라서 생산력이 증가하고 그 증가한 생산력은 무한히 다양화되고, 무한히 커가는 욕망을 무한히 충족시키게 되고, 그렇게 되면 ‘쪼는 질서’(pecking order)가 없어진다는 이야기를 들으신 적이 있을 겁니다. ‘페킹 오더(peking order)’는 먹이를 적게 주면 제일 힘 센 닭이 다른 닭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다 쪼아서 쫒아버리고 혼자만 먹이를 독차지해서 마음껏 먹다가 배가 차면 물러나고, 그 다음 힘이 센 놈이 쪼고, 배가 차고, 물러나고, 힘없는 놈은 나중에 비리비리 말라 죽는 힘센 놈 중심의 위계질서를 일컫는 말입니다. 이것을 ‘쪼는 질서’라고 합니다. 마르크스 레닌은 생산관계가 건강해져서 생산력이 무한히 발전하게 되면 쪼는 질서가 없어지고, 자연히 평등한 세상이 올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그런 신화는 믿지 않죠.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에서는 벌써 200년 전부터 그리고 덩달아 우리나라에서는 지난 50년 사이에 온 세상이 도시화의 길로 접어들면서 우선 지구라는 생태 환경 자체가 급속도로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무한한 탐욕에 길들여져 있는 도시인들이 물질 에너지를 펑펑 써서, 과거 삶의 자산, 미래 자손들이 물려받아야 할 생명 자산까지 짧은 시간에 전부 탕진해버리고 지구를 엉망으로 만들었습니다. 후손들이 살 수 없는 곳으로 만들어, 물려줄 것이라곤 전쟁과 굶주림과 증오밖에 없는 상황이죠. 지구라는 한정된 행성에 생명자원이나, 물질자원이나 모두 한정되어 있는데, 이걸 펑펑 써버리면서 온 인류가 모두 무한히 증가하는 생산력에 따라서 무한히 증가하는 욕망을 무한히 충족시킬 수 있다니 이게 말이 됩니까?

지난 수십만 년 동안 인류는 생명에너지, 생체 에너지를 써서 사는 길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불과 200년이 지나지 않은 짧은 기간에 인류의 삶의 양식이 급격히 바뀌어 이제 물질에너지에 기대지 않으면 너도나도 살길이 없는 세상으로 바뀌었습니다.

물질 에너지는 확산에너지로, 폭발시켜서 얻는 에너지인데, 이 폭발 과정에서 80% 이상의 에너지가 낭비되고 그 낭비된 에너지는 모두 대기를 오염시키고 수질을 오염시키고 토양을 오염시키는 산업쓰레기로 바뀝니다.

생체에너지는 응집에너지입니다. 여러분들 ‘확산’(divergent)과 ‘응집’(convergent)이란 말 알고 있죠? 응집 에너지가 사용되는 데는 낭비요소가 최소화되고, 산업쓰레기를 발생시키지 않습니다. 말하자면 에너지가 순조롭게 순환하는 쪽으로 쓰이게 되는데, 현대 도시사회는 응집 에너지, 곧 생체에너지만 써서는 살길이 없는 곳으로 바뀌었습니다. 생체에너지가 응집되어 있는 정상 상태의 유기물은 자연과 인간관계 속에서만 생산되고 분배되고 소비됩니다. 그런데 자급자족을 할 수 있는 생산지가 도시내부에는 없습니다.

인간의 행동 양태와 습관[철학을다시 쓴다]-⑫

인간의 행동 양태와 습관[철학을다시 쓴다]-⑫

 

윤구병(도서출판 보리 대표)

 

* 이 글은 보리출판사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전에 말씀드렸듯이 우리는 보통 때는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묻지 않죠? 상황이 바뀔 때, 또는 긴급한 상황에 맞닥뜨리게 될 때, 미래를 예측하기 힘들고 현재까지 대응해왔던 방식으로 미래의 사태에 대비하기 어려울 때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묻습니다.

농촌의 한 마을 공동체가 우주 전체가 돼서, 거기서 태어나고 자라고 늙어 죽어 뒷산에 묻히는, 시간이 지혜의 함수가 되는 삶 속에서는 이런 질문이 나오지 않습니다. 오랫동안 슬기롭게 살아오면서 가뭄도 겪고 큰물도 겪고 관혼상제 등 여러 다양한 삶의 경험을 통해서 어떤 일에 어떻게 대처를 해야 할지를 아는 어른들이 살길을 일러주고, 구태여 젊은 사람들이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묻지 않아도 되도록 만들어 줍니다.

시간이 지혜의 함수가 되는 농경공동체에서뿐만 아니라, 공간적인 경험 확장이 지혜의 함수가 되는 유목사회에서도 떼 지어 다니면서 목축을 하거나 부족한 목축지를 두고 각축전을 벌이게 될 때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가장 강인한 사람이 앞장서서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해결해 주기 때문에 여기서도 이런 질문이 나오지 않습니다.

이런 질문이 나오는 곳은 도시사회인데, 특히 개개인이 자기 삶에 대해 전적으로 책임을 지고 삶의 문제를 해결할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에 부딪힌 사람들 사이에서 많이 나옵니다.

도시사회라 하더라도 상황과 체제가 안정되어 있을 때는 ‘무엇을 할 것인가’,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질문은 나오지 않습니다. 그것이 독재에 의해 강제된 상황이든 민주적인 합의에 의해서 서로 용인하는 그런 상황에서든 그 상황이 안정되어 있다면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질문은 나오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제가 강당 안을 걷는데, 이 강당 바닥은 평탄하기 때문에 왼팔과 오른팔의 움직이는 각도가 어떤지, 보폭이 어떤지에 대해서 전혀 관심을 쏟지 않습니다. 평탄한 길에서 제 동작은 자동화됩니다. 보폭과 팔이 움직이는 각도가 가장 편하고 효율적인 상태로 조정이 됩니다. 우리 신체 동작의 자동화는 꼭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걸을 때 머리로 어깨 각과 왼팔의 움직이는 각을 몇 도로 하지? 왼손은 이런데 오른손은 몇 도로 하지? 이렇게 계속해서 거기에 집착하면, 강박관념 때문에 우리 두뇌는 아무 구실도 하지 못하기 쉽습니다. 때문에 동작을 자동화시켜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깜깜한 밤길을 걷는다든지 깎아지른 벼랑을 타고 산에 오르게 될 때는 보폭 하나하나, 손동작 하나하나에 일일이 신경을 쓰게 됩니다. ‘주의’(attention)가 이렇게 집중되는데, 이렇게 새로운 사태에 직면해 있을 때만, 우리 몸동작을 어떻게 해야 이 새로운 상황에 제대로 대처해 나갈 수 있을지에 대한 숙고를 하게 되고, 그 때문에 그때 ‘무엇을 할 것인가’,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질문이 자기 내면에서 솟아오르게 됩니다.

대부분의 경우 우리의 의식은 잠들고, 자동화 상태에서 우리의 신체 동작은 기계화됩니다. 외적인 강제가 엄청나게 심해서 도무지 다른 길을 찾을 수 없는 상황이 조성될 때나, 그런 체제에 있을 때도 우리 의식은 짓눌리고 동작은 최소한으로 바뀌면서 자동화가 됩니다. 이 때 자동화되는 의식의 반응과 행동이 가장 무섭습니다. 비극적인 상황이죠. 동작에서 자동화는 개인의 행동에서 습관으로 나타납니다. 어떤 삶에 길들여진다는 말이죠. 상황이나 체제가 완고하게 오랫동안 변하지 않을 때, 사고라든지 우리의 행동양태가 그것에 길들어서 습관이 형성됩니다. 그리고 집단화된 습관은 ‘관습’으로 고착됩니다.

그렇지 않을 때도 있죠. 모든 것이 외부적인 요인으로 해결이 될 때도 거기에 젖어서 길들여지고 우리의 습관이 거기서 형성됩니다. 사회적으로 더 큰 범위에서 보면 관습이 형성되죠. 그리고 그 관습은 윤리나 도덕으로 나타납니다. 법의 형태로도 나타나죠. 그런데 법은 강제화되는 것이기 때문에 관습이나 윤리 도덕보다도 가변성이 더 큽니다. 잘못된 체제에서 우리가 그 체제를 뒷받침하는 도덕률을 익히고 윤리적인 규범을 내면화하는 것이 가장 큰 비극적 상황입니다.

제가 처음에 말씀 드렸죠? 있을 것이 있고, 없을 것이 없는 세상이 좋은 세상이고, 있을 것이 없고, 없을 것이 있는 세상이 나쁜 세상이다. 우리가 없을 것이 있는 세상, 그러니까 억압, 불평등, 증오, 전쟁, 이기심, 탐욕들이 만연된 세상에서 ‘세상은 그럴 수밖에 없는 거니까, 여기에 적응해서 내 살 길을 찾자.’ 이렇게 길들여지고 그 상황이나 체제에서 자기 자신을 순응시켜 행동을 굳혀가서 행동 패턴이라든지 사유방식을 특권화시키고 그것이 한 사회 전체를 지배해 증오와 이기심, 탐욕이 들끓는 사회의 모든 제도와 체제를 받아들이게 될 때, 희망이 없는 거죠? 나쁜 세상에 물든다는 것은 우리의 비판적인 성찰을 마비시킨다는 점에서 대단히 절망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없을 것, 없어야 할 것, 있을 것, 있어야 할 것은 현재의 시제가 아니라 미래의 시제로 표현됩니다. 있는 것을 있다고, 없는 것을 없다고 말하는 것은 ‘참말’이고 정직한 증언이지만, 미래의 삶과 연결되는, ‘당위’라고 하는 것, ‘윤리 규범’, ‘도덕’이라고 하는 것은 미래의 삶에 대한 전망이 바로 서지 않으면 족쇄나 올가미가 되기 십상입니다. 과거의 굳어진 가치관을 기초로 해 그 과거와 현실이 바뀌지 않고 미래도 마찬가지일 거라는 판단 아래에서 없을 것이 분명히 있는데도 그것을 없애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는 마비된 의식이 우리의 행동을 마비시키고, 없어야 할 것이 가득 찬 이 세상에 주저앉히는 것이죠. 이런 점에서 우리 행동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을 때 어떤 식으로 길들여지는가, 그것이 장기적으로 어떤 습관을 형성하게 되고 한 사회에서 관습으로 굳어지는가에 대해서 깊이 성찰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앞서 이야기했던 대로 농경사회에서 어른들이 자연과 관계 속에서 경험을 얻고 그것을 내면화해서 하나의 관습으로, 윤리관이나 가치관, 도덕률로 굳히는 것에는 큰 문제가 없습니다. 유목사회에서도 그 위험은 크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도시사회는 어떻게 보면 흡혈귀들이 대낮에도 설치는 ‘식인사회’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 혹시 <델리카트슨>이라는 영화 본 적 있습니까? 식량을 돈으로 쓰고, 사람고기를 먹죠. 겉으로 드러나지만 않을 뿐이지 모든 도시사회는 ‘식인사회’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고 사는 사회입니다. 여기에 대한 아무런 근본적인 성찰이 없이 자기가 처한 상황과, 어떤 체제 속에 사느냐에 따라서 자기 정체성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지요? 그러죠? 일종의 변형, 변환(Metamorphosis)인데 자동화나, 습관, 윤리, 도덕의 형성 과정을 잘 꿰뚫어보려면 고도의 비판의식과 창조적인 지성이 필요합니다. 비판의식이 왜 필요하냐면, 없어야 할 것이 있을 때, ‘이건 없어야 할 것인데, 없애야 하는데’ 하는 처방을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비판의식은 행동으로 나타날 때는 파괴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기존 질서를 파괴하거나 기존 도덕률, 기존 가치관을 거부하기도 하고, 현실적인 파괴 활동으로 나타나기도 하죠.

출처: rororo.net

9.11테러가 일어난 게 언제였죠? 군산복합체의 상징인 세계무역센터 건물, 미국 국방성 건물을 테러리스트들이 공격했죠. 세계에서 제일 센 나라가 어디지요? 제가 우리 학생들한테 물어봤더니 미국이 제일 세다고 이구동성으로 외쳐요. 그래서 제가 ‘이 바보들아, 미국이 왜 젤 세냐? 아프가니스탄이 제일 세지’라고 말한 뒤에 아프가니스탄이 제일 센 이유를 말했죠. 세계에서 가장 국민소득이 낮은데다가 어찌나 외교 역량이 부족한지 파키스탄 하나와만 국교를 맺고 있고, 미국이 무서워서 나머지 나라들은 모두 국교를 단절한 나라인 아프가니스탄에, 군사가 오만 명 정도밖에 안 되는 탈레반 정권을 무너뜨리려고 미국이 혼자 쳐들어가기 무서워서 예순 여섯 나라를 줄 세워 들어가지 않았습니까? 아프가니스탄은 그 전에 강력한 소련군이 와서 탈레반을 소탕하려고 쑥대밭을 만들었는데도 버텨냈어요. 그렇다고 외교 역량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어서, 한때 미국 돈 받아 소련하고 맞장 떠서 살아남았죠. 그런데 현재 상황은 어떻습니까? 미국을 비롯한 힘센 연합군들이 곤경에 빠져 있지요? 그러니 아프가니스탄이 최고로 센 나라 아닙니까?

제가 아프가니스탄 전쟁이 일어났을 때 삼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고 어디에 썼는데 아무도 믿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지금 세계 삼차대전은 진행 중입니다. 여러분 믿지 않죠? 일차 세계대전과 이차 세계대전이 국경을 사이에 두고 서로 식민지를 뺏으려고 싸운 전쟁이라는 고정관념이 그대로 우리 뇌리에 박혀 있기 때문에 삼차대전도 국가들 사이에서 땅뺏기로 나타날 것이라 생각하겠지만 성격이 달라졌습니다. WTO 체제도 세계대전의 한 형태인데, 이제는 완성된 금융독점자본에게 국경은 의미가 없습니다. 미국은 아직까지 오사마 빈라덴 같은 테러리스트들,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에게 전쟁의 책임을 돌리고 있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보기엔 제삼차대전의 형태는 내란입니다. 저는 전쟁이 내란 형태로 전개되는 것이 인류를 위해서 큰 다행이라고 봅니다. 왜 그러냐면 옛날처럼 국경을 사이에 두고 서로 편갈라서 싸운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럼 인류를 몇 천 번 몰살시키고도 남을 만한 핵무기가 가동될 것입니다. 그런데 나라 안에서 전쟁이 벌어지게 되면 핵무기는 아무런 쓸모가 없게 됩니다. 적과 아군이 뒤섞여 있으니까 자기나라 안에서 핵무기를 터뜨릴 수는 없죠. 그래서 이제 비로소 프롤레타리아트와 부르주아가 국가라는 단위를 중심에 놓고 ‘애국심’을 내세워 서로 결탁해 다른 나라의 자기 형제들에게 총을 겨누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 왔다고 보면 됩니다. 세계 이차대전이 벌어지게 될 때 사해동포주의를 부르짖고 국제 연대를 주장했던 사람들이 결국엔 ‘애국심’에 불타서 동료들의 가슴에다 총을 겨누었죠. 이제는 적어도 그러지 않아도 됩니다. 국내에서 전쟁이 일어나면 자기를 노예화시키고 착취해야 살 수 있는 계급이 누구고 자기가 연대해야 할 계급이 누구냐는 것이 분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에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전선을 넓혀갈 수 있습니다.

그 모범을 9.11테러가 보여줬는데 이 사람들이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이슬람 근본주의자들과 맞장뜨자고 하는데, 그건 뻔하죠. 석유욕심 때문에 그러는 거죠. 제가 이런 말을 하면 곧 잡혀갈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 어쨌든 제 생각은 그렇습니다.

‘있음과 없음’의 시간과 공간[철학을다시 쓴다]-⑪

‘있음과 없음’의 시간과 공간[철학을다시 쓴다]-⑪

 

윤구병(도서출판 보리 대표)

 

* 이 글은 보리출판사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대체로 마르크스 이래로 서구 스콜라철학을 형이상학으로 보아서 형이상학에 대한 비판이 유행하는데, 형이상학에도 여러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존재론과 우주 삼라만상을 이루는, 가장 작은 것에서부터 가장 큰 것까지 일관해서 꿰뚫어보려고 하는 노력에서부터 원인학(aitiology), 왜 왜 하고 끊임없이 물어보는 학문의 전통이 생기는데 이것도 형이상학의 한 갈래입니다.

제가 전에 ‘테트락티스’(tetraktys)라고 해서 10을 완전수라고 보았던 피타고라스학파의 전통에 대해서 잠깐 언급을 했죠? 피타고라스 전통에 따르면 한계가 하나인 것을 점이라고 보고 한계가 둘이 있는 것을 선이라고 봤죠. 그리고 한계가 세 개가 있는 것을 면이라고 그러고. 가장 작은 수의 한계선을 가지고 구현할 수 있는 면이 삼각형이죠, 그 다음에 네 개가 있는 것은 입체, 정사면체, 이렇게 1+2+3+4=10인데, 우주 삼라만상은 한계가 하나가 있거나, 둘이 있거나, 셋이 있거나, 넷이 있거나 한 것으로 전부 구성이 되어 있다, 이런 이야기를 피타고라스학파들이 했죠.

“여기서 하나 물어보겠습니다. 있는 것은 한계가 몇 개입니까?”

“…….”

“하나입니다. 끝이 하나인 것은 보입니까, 안 보입니까?”

“보여요.”

“보여요? 보이는 것은 면 아니면 안 보입니다. 선도 안 보입니다. 안 보이죠? 가장 큰 하나도 안 보이고 가장 작은 하나도 안 보인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생각을 해 보겠습니다.”

‘있음’은 안 보인다. 왜냐? 한계가 하나이기 때문에. 그러면 없음은 어떻습니까? 한계가 없으니까 안 보입니다. 한계가 하나인 것도 안 보이고, 한계가 없는 것도 안 보입니다.

그래서 헤겔은 <대논리학> 같은 책에서 ‘있음’(임석진이 ‘순수유’로 번역한 das reine Sein을 우리말로 하면 그냥 ‘있음’입니다.)과 ‘없음’(이것도 임석진이 ‘순수무’로 옮긴 das reine Nichts의 우리말 표현이지요.)은 개념으로만 있지, 가시적이지 않고 정의를 받아들이지도 않는 점에서 똑같은 것이다, 차이가 없다라고 이야기했는데, 바로 이런 특성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있음’과 ‘없음’에 대해서는 말하지 말아라, 그러면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냐, ‘있는 것’과 ‘없는 것’인데 그것은 개별화된 존재, 개별화된 무, 이런 것들, 여럿으로 흩어져 있는 ‘존재’와 여럿으로 흩어져 있는 ‘무’를 ‘있는 것’/ ‘없는 것’이라고 부른다, 그렇지만 있는 것도 있음의 성격에 참여하는 한, 하나로 있게 되고, 따라서 그것은 규정할 수 없는 것이 되고, 없는 것은 없음의 성격을 지니고 있는 한, 끝이, 한계가 없기 때문에 규정할 수 없는 측면을 지니게 된다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우리가 보고 만지고 귀로 듣고 오감을 통해서 파악할 수 있는 이 세계는 가시적인, 볼 수 있는 세계인데, 시각정보가 우리에게 전해지는 삶의 정보 가운데 80% 이상을 차지한다, 그러죠? 그런데 우리가 입체를 볼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오성 수준에서는 입체를 인지하고요, 감각 수준에서는 입체를 인지하지 못합니다.”

“그렇죠, 그것입니다. 우리 시각은 감각 기관이니까, 통각의 능력은 따로 빼고 우리 시각은 평면만 볼 수 있을 뿐이다, 겉만. 한계, 갓, 끝만 볼 수 있을 뿐이다,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에서 최소 한계는 셋이다, 끝이 세 개인 경우, 삼각형으로 이 우주를 모두 구성할 수 있다면, 어떤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모든 것이 인식의 영역 속에 들어올 수 있다는 가설이 생기는 겁니다. 알 수 없는 것은 하나도 없게 된다, 모든 걸 알 수 있게 된다, 말하자면 우주 삼라만상에 대한 측정 가능성이 열리는 것입니다. 피타고라스학파한테 큰 재난이 무엇이었습니까? 루트2(√)의 발견이었죠? 피타고라스학파에서 이것은 무규정성이 드러나는 측면인데, 무규정성은 피타고라스학파에서 가장 큰 재난이어서 극구 추방해야 할 것이고, 우주 삼라만상이 수로 이루어졌다는 것은 전부 규정할 수 있다는 것인데, 그것이 실제로 그렇게 될 수 없다는 것이 밝혀지는 것은 기본을 이루고 있는 세계관을 허물어뜨리는 사태였기 때문에 오랫동안 비밀로 감추려고 했다는 설도 있습니다.”

이 동그라미는 제가 엊그제 봤던 달입니다. 요즘 달이 큰데, 이것을 가시적인 원 비슷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가시적인 원이라고 생각하십시오. 우리가 원을 볼 수 있습니까? 못 보죠? 원 비슷한 특수한 형태는 시각화해서 볼 수 있지만 원 그 자체는 볼 수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원을 어떻게 해서 알 수 있을까요? 한 점으로부터 같은 거리에 있는, 서로 무한하게 이어져 있는 점들을 원이라고 합니다. 현대 수학자들이 원주율을 계산을 하는데 몇 조 단위까지 계산을 해냈다, 나는 암산으로 해냈다, 나는 슈퍼컴퓨터로 해냈다, 하는 이런 수치 모음을 책으로 내면 숫자만 계속해서 기록한 책이 수천, 수만 권이 될 것입니다. 왜 이 짓을 하고 있죠? 그리고 그것을 가지고 서로 유명한 수학자라고 뽐내고 그러죠? 미분/적분을 대수학 영역이라 그럽니까? 해석학! 뉴턴이 무한의 영역을 수학적으로 극복하겠다고 나서서 미분/적분을 개발했죠. 그런데 미분/적분은 어떻습니까? 전부 한정된 수치의 영역으로 무한의 영역을 수렴해낼 수 있다는 그런 생각이었죠. 그런데 정작 수렴이 되나요? 수렴이 안 된다는 게 ‘파이(π)’ 계산에서 나타나죠?

실제로 유한의 영역과 무한의 영역은 우리의 삶 속에 끊임없이 공존을 하고 있는데, 무한의 영역을 그대로 방치하다 보면 수리체계에서부터 재는 것과 연관되는, 말하자면 ‘매트릭스’로 표현할 수 있는 영역이 한정되고, 그에 따라 우리의 인지 영역은 그만큼 좁아집니다. (여러분 매트릭스가 어디서 나타났는지 아시죠? 잰다는 말에서 나왔습니다. 좌, 우, 아래, 위로 행렬지어지는 것, 재는 거죠?) 우리는 지금 디지털 시대에 살고 있죠? 그런데 운동은 디지털 세계에서가 아니고, 아날로그 세계에서 일어납니다. 무규정성이 전제되어야 운동이 제대로 이해됩니다. 아까 제가 두 당구알을 가지고 이야기했는데 두 당구알이 접촉을 할 때, 그 사이에 접촉면을 매개하고 있는 점이라는 것은 빨간 당구알에도 속해 있지 않고, 하얀 당구알에도 속해 있지 않고, 늘 왔다갔다 요동치고, 진동한다, 이 ‘바이브레이션’(vibration)이라는 말은 대단히 중요한 개념입니다. 베르그송에서도 중요한 개념이고 들뢰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앙리 베르그송(1859~1941)


 

우선 플라톤 이야기를 다시 합시다. 플라톤에서는 우주를 구성하는 요소가 셋입니다. demiourgos라고 하는 우주를 빚어내는 신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주를 폐쇄된 공간으로 만들 때 본떠야 하는 이데아(idea), ‘형상’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 다음은 ‘기그노메논’(gignomenon), 아리스토텔레스는 이것을 ‘휠레’(hyle), ‘질료’라고 그럽니다만, 이 기그노메논이라는 말은 ‘된다’는 말에서 나온 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 식으로 재해석을 한다면 데미우르고스는 스스로는 움직이지 않으면서 다른 것들은 움직이게 하는 것으로 ‘순수 형상’이라 하기도 하고, ‘움직이지 않으면서 움직이게 하는 것’(kinoun akineton), ‘원동자’(原動者), 그렇게 재정리가 됩니다만, ‘휠레’는 그리스에서 목재를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배도 만들고, 집도 만들려고 켜놓은 나무라는 뜻에서 나왔는데 이것을 우리나라 철학책에서 ‘질료’라고 번역해 놓았습니다.(끔직한 번역이죠.)

이제 우리가 보고 있는 삼라만상은 ‘질료’와 ‘형상’의 결합이고,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표면에 나타난 형상이라는데, 플라톤에 따르면 형상은 우리가 가시적으로 파악할 수가 없습니다. 형상의 세계는 우리가 볼 수 없는 허무로 둘러싸인 다른 곳에 가 있고,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전부 형상을 본뜬 가상들뿐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삼각형 그 자체는 볼 수가 없고,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특수하게 그려진 몇 센티미터, 둔각이라든지 예각이라든지 등변 삼각형이라든지 이런 삼각형의 특수형태인 것과 마찬가지로 형상 그 자체는 볼 수 없고, 형상이 투영된 것들만 볼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데미우르고스가 이 우주를 만들 때 삼각형으로 만듭니다.

근대물리학자나 현대 물리학자들이 계속해서 쪼개고 쪼개서 면으로 나타나는 ‘끝’을 늘리고, 우주 자체를 삼각형으로 분할하여 입체를 평면으로 환원시킬 수 있다면, 우주 삼라만상을 다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해서 끝없는 환원작업에 몰두하고 있는데, 이들로 하여금 이렇게 끊임없는 ‘분석’과 ‘분해’를 하도록 부추긴 사람이 바로 플라톤입니다. 평면으로 우주를 구성했으니까, 해체하면 다시 평면으로 환원될 수 있을 것이다, 정사면체, 정육면체, 정십이면체, 정이십면체 이렇게 점점 원에 가깝게……. 뉴턴에 따르면 미적분을 통해 조그만 삼각형들을 계속해서 무한히 더해감으로써 원주율 계산에 도달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게 한 원동력이 바로 플라톤주의 전통에서 나옵니다.

그렇게 해서 여러 종류의 환원론이 나오는데 데미우르고스가 맡은 역할이 무엇이냐면, 삼각형을 수학적으로, ‘산술중항’과, ‘조화중항’이라는 것을, 어떤 띠는 산술중항을 중심으로 만들고, 어떤 띠는 조화중항을 중심으로 만들어서 밖에는 정지의 띠를 두르고, 안에는 운동하는 띠를 둘러서 이 우주를 구성해 낸다, 우주의 겉은 정지의 띠를 가지고 만들었기 때문에 변하지 않고, 안에는 끊임없이 운동이 이루어지는 천체가 있다, 거기에는 항성이 있고, 행성이 있고, 우주의 바깥 띠에서 가장 먼 중심에는 지구가 있다고 플라톤은 이야기합니다.

이렇게 지구는 불변하는 띠에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우주 중심에 있다는 것은 불변하는 ‘형상’과 불변하는 띠에서 가장 먼 곳에 있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세계 이해와는 완전히 거꾸로입니다. 지구는 플라톤에 따르면, 데미우르고스의 힘이 가장 적게 미치는 곳이다, 그리고 형상의 세계에서부터도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이다, 그러기 때문에 가장 불완전한 곳이다, 가장 변화가 다양하고, 가장 불완전한 천체다라는 가정을 깔고 나갑니다. 인간을 예로 들 때 인간의 신체부위 가운데 가장 완전한 것이 뭡니까? 옛날부터 인도 사람이나 그리스 사람이나 원을 완전한 세계의 시각적인 표현이라고 보았습니다. 입체로 보면 구(球)가 가장 완전한 것이고, 사람에게 구와 가장 닮은 곳이 있다면 머리다, 사람에게 머리만 있으면 그나마 완전한 세계를 더 직관으로 파악할 수 있고, 훨씬 더 좋겠죠. 요즘에도 신체의 다른 부위는 다 절단해 버리고 머리만 남겨서 세계를 지배하는 인물이 영화에 나오고 하죠.

실제로 플라톤은 참 재미있는 예를 듭니다. 머리가 굴러다니면서 운동을 하게 되면 가장 완벽한 운동을 할 수 있을 텐데 왜 머리만 있지 않고 손과 발, 몸 같은 것이 생겨나는가? 플라톤은 이 지구가 불완전하게 생겨먹은 것이어서 완전한 구가 아니고 더러운 구덩이도 있기 때문에, 굴러다니다가 구덩이에 빠지면 다시 나올 길이 없다, 그래서 손발을 달아서 기어 나오도록 만들었는데 이것이 완전한 운동을 방해하는 장애물이 되었다, 그러니까 육체노동, 몸을 움직여서 무엇을 하는 것에 대한 극도의 혐오감이 우화 비슷한 형태로 드러나는 겁니다. 피타고라스학파도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지요?

어쨌든 이렇게 해서 세 개의 요소가 다 있는데 ‘기그노메논’(됨)에 Demiourgos가 숫자들을 부여해서 질서를 줍니다. 질서를 부여하는데 스스로 질서를 주는 게 아니라 ‘이데아’들을 보고, 그 ‘이데아’를 본떠서 ‘됨’의 운동이 아무렇게나 제멋대로 되지 않도록 이끌어 삼라만상을 구성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이렇게 해서 완전히 폐쇄된 세계가 나타납니다. 우주 자체는 ‘하나’이고 불변하는 것인데, 우주 내부에서만 변화들이 있게 되는 세계로 상정하고 맨 위에는 전체로서 ‘하나’로 가장 큰 ‘있음’이 있고, ‘있음’의 중심에는 ‘없음’에 가장 가까운 혼란스럽고 변화무쌍한 지구가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플라톤의 세계관은 대체로 보아 비관적인 세계관입니다.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이 ‘거대이론’이 근대 물리학을 거쳐 현대 물리학으로 오게 되면서, 여러 가지 위장된 형태로 나타납니다. 통일된 우주가 빅뱅에 의해 터지면 무한 공간으로 흩어져나갈 건데 그러지 못하도록 하는 장치로 블랙홀을 상정하는 것입니다. 천체의 순환이 반복되듯이 펑 터지고, 다시 수렴되고 하는 일이 주기적으로 반복된다고 이야기합니다. 전부 가설이지요. 그리고 이 가설체계는 인간 정신의 산물입니다. 인간이 모든 우주 삼라만상의 변화를 두뇌 속에서 단순한 운동, 등질적인 공간운동과 시간운동으로 환원시키면서 드러나는 현상입니다. 인간의 두뇌는 서로 닮는다고 그랬죠? 인간의 두뇌가 이론적으로 그럴 듯한 가설들을 판박이 하기 때문에 어떤 사람이 우주를 그럴 듯하게 머리 속에서 빚어내면 다른 사람들이 그럴싸하게 여겨 그 가설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유클리드 기하학을 대전제로 깔고 나가느냐, 아니면 리만 기하학을 대전제로 깔고 나가느냐, 그 밖의 여러 경우에 따라 인간의 두뇌가 그 쪽으로 쏠릴 수밖에 없는 지점이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 등질적인 공간, 등질적인 시간이 실재하는 공간이고 실재하는 시간이냐? 풀잎한테 물어보고 지렁이에게 물어봐야 할지도 모릅니다.

‘니네 그렇게 어리석니? 사람은 머리가 좋아서 이렇게 모든 것을 등질적인 시공간으로 환원해서 해석하는데 너희들 눈에는 안 보이고 너희들 머리로는 생각할 수 없으니까, 니네들은 지렁이고 니네들은 풀잎이지?’
이렇게 물으면 지렁이나 풀잎의 입에서는 어떤 말이 나올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