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음과 없음’의 시간과 공간[철학을다시 쓴다]-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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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음과 없음’의 시간과 공간[철학을다시 쓴다]-⑪

 

윤구병(도서출판 보리 대표)

 

* 이 글은 보리출판사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대체로 마르크스 이래로 서구 스콜라철학을 형이상학으로 보아서 형이상학에 대한 비판이 유행하는데, 형이상학에도 여러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존재론과 우주 삼라만상을 이루는, 가장 작은 것에서부터 가장 큰 것까지 일관해서 꿰뚫어보려고 하는 노력에서부터 원인학(aitiology), 왜 왜 하고 끊임없이 물어보는 학문의 전통이 생기는데 이것도 형이상학의 한 갈래입니다.

제가 전에 ‘테트락티스’(tetraktys)라고 해서 10을 완전수라고 보았던 피타고라스학파의 전통에 대해서 잠깐 언급을 했죠? 피타고라스 전통에 따르면 한계가 하나인 것을 점이라고 보고 한계가 둘이 있는 것을 선이라고 봤죠. 그리고 한계가 세 개가 있는 것을 면이라고 그러고. 가장 작은 수의 한계선을 가지고 구현할 수 있는 면이 삼각형이죠, 그 다음에 네 개가 있는 것은 입체, 정사면체, 이렇게 1+2+3+4=10인데, 우주 삼라만상은 한계가 하나가 있거나, 둘이 있거나, 셋이 있거나, 넷이 있거나 한 것으로 전부 구성이 되어 있다, 이런 이야기를 피타고라스학파들이 했죠.

“여기서 하나 물어보겠습니다. 있는 것은 한계가 몇 개입니까?”

“…….”

“하나입니다. 끝이 하나인 것은 보입니까, 안 보입니까?”

“보여요.”

“보여요? 보이는 것은 면 아니면 안 보입니다. 선도 안 보입니다. 안 보이죠? 가장 큰 하나도 안 보이고 가장 작은 하나도 안 보인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생각을 해 보겠습니다.”

‘있음’은 안 보인다. 왜냐? 한계가 하나이기 때문에. 그러면 없음은 어떻습니까? 한계가 없으니까 안 보입니다. 한계가 하나인 것도 안 보이고, 한계가 없는 것도 안 보입니다.

그래서 헤겔은 <대논리학> 같은 책에서 ‘있음’(임석진이 ‘순수유’로 번역한 das reine Sein을 우리말로 하면 그냥 ‘있음’입니다.)과 ‘없음’(이것도 임석진이 ‘순수무’로 옮긴 das reine Nichts의 우리말 표현이지요.)은 개념으로만 있지, 가시적이지 않고 정의를 받아들이지도 않는 점에서 똑같은 것이다, 차이가 없다라고 이야기했는데, 바로 이런 특성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있음’과 ‘없음’에 대해서는 말하지 말아라, 그러면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냐, ‘있는 것’과 ‘없는 것’인데 그것은 개별화된 존재, 개별화된 무, 이런 것들, 여럿으로 흩어져 있는 ‘존재’와 여럿으로 흩어져 있는 ‘무’를 ‘있는 것’/ ‘없는 것’이라고 부른다, 그렇지만 있는 것도 있음의 성격에 참여하는 한, 하나로 있게 되고, 따라서 그것은 규정할 수 없는 것이 되고, 없는 것은 없음의 성격을 지니고 있는 한, 끝이, 한계가 없기 때문에 규정할 수 없는 측면을 지니게 된다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우리가 보고 만지고 귀로 듣고 오감을 통해서 파악할 수 있는 이 세계는 가시적인, 볼 수 있는 세계인데, 시각정보가 우리에게 전해지는 삶의 정보 가운데 80% 이상을 차지한다, 그러죠? 그런데 우리가 입체를 볼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오성 수준에서는 입체를 인지하고요, 감각 수준에서는 입체를 인지하지 못합니다.”

“그렇죠, 그것입니다. 우리 시각은 감각 기관이니까, 통각의 능력은 따로 빼고 우리 시각은 평면만 볼 수 있을 뿐이다, 겉만. 한계, 갓, 끝만 볼 수 있을 뿐이다,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에서 최소 한계는 셋이다, 끝이 세 개인 경우, 삼각형으로 이 우주를 모두 구성할 수 있다면, 어떤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모든 것이 인식의 영역 속에 들어올 수 있다는 가설이 생기는 겁니다. 알 수 없는 것은 하나도 없게 된다, 모든 걸 알 수 있게 된다, 말하자면 우주 삼라만상에 대한 측정 가능성이 열리는 것입니다. 피타고라스학파한테 큰 재난이 무엇이었습니까? 루트2(√)의 발견이었죠? 피타고라스학파에서 이것은 무규정성이 드러나는 측면인데, 무규정성은 피타고라스학파에서 가장 큰 재난이어서 극구 추방해야 할 것이고, 우주 삼라만상이 수로 이루어졌다는 것은 전부 규정할 수 있다는 것인데, 그것이 실제로 그렇게 될 수 없다는 것이 밝혀지는 것은 기본을 이루고 있는 세계관을 허물어뜨리는 사태였기 때문에 오랫동안 비밀로 감추려고 했다는 설도 있습니다.”

이 동그라미는 제가 엊그제 봤던 달입니다. 요즘 달이 큰데, 이것을 가시적인 원 비슷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가시적인 원이라고 생각하십시오. 우리가 원을 볼 수 있습니까? 못 보죠? 원 비슷한 특수한 형태는 시각화해서 볼 수 있지만 원 그 자체는 볼 수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원을 어떻게 해서 알 수 있을까요? 한 점으로부터 같은 거리에 있는, 서로 무한하게 이어져 있는 점들을 원이라고 합니다. 현대 수학자들이 원주율을 계산을 하는데 몇 조 단위까지 계산을 해냈다, 나는 암산으로 해냈다, 나는 슈퍼컴퓨터로 해냈다, 하는 이런 수치 모음을 책으로 내면 숫자만 계속해서 기록한 책이 수천, 수만 권이 될 것입니다. 왜 이 짓을 하고 있죠? 그리고 그것을 가지고 서로 유명한 수학자라고 뽐내고 그러죠? 미분/적분을 대수학 영역이라 그럽니까? 해석학! 뉴턴이 무한의 영역을 수학적으로 극복하겠다고 나서서 미분/적분을 개발했죠. 그런데 미분/적분은 어떻습니까? 전부 한정된 수치의 영역으로 무한의 영역을 수렴해낼 수 있다는 그런 생각이었죠. 그런데 정작 수렴이 되나요? 수렴이 안 된다는 게 ‘파이(π)’ 계산에서 나타나죠?

실제로 유한의 영역과 무한의 영역은 우리의 삶 속에 끊임없이 공존을 하고 있는데, 무한의 영역을 그대로 방치하다 보면 수리체계에서부터 재는 것과 연관되는, 말하자면 ‘매트릭스’로 표현할 수 있는 영역이 한정되고, 그에 따라 우리의 인지 영역은 그만큼 좁아집니다. (여러분 매트릭스가 어디서 나타났는지 아시죠? 잰다는 말에서 나왔습니다. 좌, 우, 아래, 위로 행렬지어지는 것, 재는 거죠?) 우리는 지금 디지털 시대에 살고 있죠? 그런데 운동은 디지털 세계에서가 아니고, 아날로그 세계에서 일어납니다. 무규정성이 전제되어야 운동이 제대로 이해됩니다. 아까 제가 두 당구알을 가지고 이야기했는데 두 당구알이 접촉을 할 때, 그 사이에 접촉면을 매개하고 있는 점이라는 것은 빨간 당구알에도 속해 있지 않고, 하얀 당구알에도 속해 있지 않고, 늘 왔다갔다 요동치고, 진동한다, 이 ‘바이브레이션’(vibration)이라는 말은 대단히 중요한 개념입니다. 베르그송에서도 중요한 개념이고 들뢰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앙리 베르그송(1859~1941)


 

우선 플라톤 이야기를 다시 합시다. 플라톤에서는 우주를 구성하는 요소가 셋입니다. demiourgos라고 하는 우주를 빚어내는 신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주를 폐쇄된 공간으로 만들 때 본떠야 하는 이데아(idea), ‘형상’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 다음은 ‘기그노메논’(gignomenon), 아리스토텔레스는 이것을 ‘휠레’(hyle), ‘질료’라고 그럽니다만, 이 기그노메논이라는 말은 ‘된다’는 말에서 나온 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 식으로 재해석을 한다면 데미우르고스는 스스로는 움직이지 않으면서 다른 것들은 움직이게 하는 것으로 ‘순수 형상’이라 하기도 하고, ‘움직이지 않으면서 움직이게 하는 것’(kinoun akineton), ‘원동자’(原動者), 그렇게 재정리가 됩니다만, ‘휠레’는 그리스에서 목재를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배도 만들고, 집도 만들려고 켜놓은 나무라는 뜻에서 나왔는데 이것을 우리나라 철학책에서 ‘질료’라고 번역해 놓았습니다.(끔직한 번역이죠.)

이제 우리가 보고 있는 삼라만상은 ‘질료’와 ‘형상’의 결합이고,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표면에 나타난 형상이라는데, 플라톤에 따르면 형상은 우리가 가시적으로 파악할 수가 없습니다. 형상의 세계는 우리가 볼 수 없는 허무로 둘러싸인 다른 곳에 가 있고,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전부 형상을 본뜬 가상들뿐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삼각형 그 자체는 볼 수가 없고,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특수하게 그려진 몇 센티미터, 둔각이라든지 예각이라든지 등변 삼각형이라든지 이런 삼각형의 특수형태인 것과 마찬가지로 형상 그 자체는 볼 수 없고, 형상이 투영된 것들만 볼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데미우르고스가 이 우주를 만들 때 삼각형으로 만듭니다.

근대물리학자나 현대 물리학자들이 계속해서 쪼개고 쪼개서 면으로 나타나는 ‘끝’을 늘리고, 우주 자체를 삼각형으로 분할하여 입체를 평면으로 환원시킬 수 있다면, 우주 삼라만상을 다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해서 끝없는 환원작업에 몰두하고 있는데, 이들로 하여금 이렇게 끊임없는 ‘분석’과 ‘분해’를 하도록 부추긴 사람이 바로 플라톤입니다. 평면으로 우주를 구성했으니까, 해체하면 다시 평면으로 환원될 수 있을 것이다, 정사면체, 정육면체, 정십이면체, 정이십면체 이렇게 점점 원에 가깝게……. 뉴턴에 따르면 미적분을 통해 조그만 삼각형들을 계속해서 무한히 더해감으로써 원주율 계산에 도달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게 한 원동력이 바로 플라톤주의 전통에서 나옵니다.

그렇게 해서 여러 종류의 환원론이 나오는데 데미우르고스가 맡은 역할이 무엇이냐면, 삼각형을 수학적으로, ‘산술중항’과, ‘조화중항’이라는 것을, 어떤 띠는 산술중항을 중심으로 만들고, 어떤 띠는 조화중항을 중심으로 만들어서 밖에는 정지의 띠를 두르고, 안에는 운동하는 띠를 둘러서 이 우주를 구성해 낸다, 우주의 겉은 정지의 띠를 가지고 만들었기 때문에 변하지 않고, 안에는 끊임없이 운동이 이루어지는 천체가 있다, 거기에는 항성이 있고, 행성이 있고, 우주의 바깥 띠에서 가장 먼 중심에는 지구가 있다고 플라톤은 이야기합니다.

이렇게 지구는 불변하는 띠에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우주 중심에 있다는 것은 불변하는 ‘형상’과 불변하는 띠에서 가장 먼 곳에 있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세계 이해와는 완전히 거꾸로입니다. 지구는 플라톤에 따르면, 데미우르고스의 힘이 가장 적게 미치는 곳이다, 그리고 형상의 세계에서부터도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이다, 그러기 때문에 가장 불완전한 곳이다, 가장 변화가 다양하고, 가장 불완전한 천체다라는 가정을 깔고 나갑니다. 인간을 예로 들 때 인간의 신체부위 가운데 가장 완전한 것이 뭡니까? 옛날부터 인도 사람이나 그리스 사람이나 원을 완전한 세계의 시각적인 표현이라고 보았습니다. 입체로 보면 구(球)가 가장 완전한 것이고, 사람에게 구와 가장 닮은 곳이 있다면 머리다, 사람에게 머리만 있으면 그나마 완전한 세계를 더 직관으로 파악할 수 있고, 훨씬 더 좋겠죠. 요즘에도 신체의 다른 부위는 다 절단해 버리고 머리만 남겨서 세계를 지배하는 인물이 영화에 나오고 하죠.

실제로 플라톤은 참 재미있는 예를 듭니다. 머리가 굴러다니면서 운동을 하게 되면 가장 완벽한 운동을 할 수 있을 텐데 왜 머리만 있지 않고 손과 발, 몸 같은 것이 생겨나는가? 플라톤은 이 지구가 불완전하게 생겨먹은 것이어서 완전한 구가 아니고 더러운 구덩이도 있기 때문에, 굴러다니다가 구덩이에 빠지면 다시 나올 길이 없다, 그래서 손발을 달아서 기어 나오도록 만들었는데 이것이 완전한 운동을 방해하는 장애물이 되었다, 그러니까 육체노동, 몸을 움직여서 무엇을 하는 것에 대한 극도의 혐오감이 우화 비슷한 형태로 드러나는 겁니다. 피타고라스학파도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지요?

어쨌든 이렇게 해서 세 개의 요소가 다 있는데 ‘기그노메논’(됨)에 Demiourgos가 숫자들을 부여해서 질서를 줍니다. 질서를 부여하는데 스스로 질서를 주는 게 아니라 ‘이데아’들을 보고, 그 ‘이데아’를 본떠서 ‘됨’의 운동이 아무렇게나 제멋대로 되지 않도록 이끌어 삼라만상을 구성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이렇게 해서 완전히 폐쇄된 세계가 나타납니다. 우주 자체는 ‘하나’이고 불변하는 것인데, 우주 내부에서만 변화들이 있게 되는 세계로 상정하고 맨 위에는 전체로서 ‘하나’로 가장 큰 ‘있음’이 있고, ‘있음’의 중심에는 ‘없음’에 가장 가까운 혼란스럽고 변화무쌍한 지구가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플라톤의 세계관은 대체로 보아 비관적인 세계관입니다.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이 ‘거대이론’이 근대 물리학을 거쳐 현대 물리학으로 오게 되면서, 여러 가지 위장된 형태로 나타납니다. 통일된 우주가 빅뱅에 의해 터지면 무한 공간으로 흩어져나갈 건데 그러지 못하도록 하는 장치로 블랙홀을 상정하는 것입니다. 천체의 순환이 반복되듯이 펑 터지고, 다시 수렴되고 하는 일이 주기적으로 반복된다고 이야기합니다. 전부 가설이지요. 그리고 이 가설체계는 인간 정신의 산물입니다. 인간이 모든 우주 삼라만상의 변화를 두뇌 속에서 단순한 운동, 등질적인 공간운동과 시간운동으로 환원시키면서 드러나는 현상입니다. 인간의 두뇌는 서로 닮는다고 그랬죠? 인간의 두뇌가 이론적으로 그럴 듯한 가설들을 판박이 하기 때문에 어떤 사람이 우주를 그럴 듯하게 머리 속에서 빚어내면 다른 사람들이 그럴싸하게 여겨 그 가설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유클리드 기하학을 대전제로 깔고 나가느냐, 아니면 리만 기하학을 대전제로 깔고 나가느냐, 그 밖의 여러 경우에 따라 인간의 두뇌가 그 쪽으로 쏠릴 수밖에 없는 지점이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 등질적인 공간, 등질적인 시간이 실재하는 공간이고 실재하는 시간이냐? 풀잎한테 물어보고 지렁이에게 물어봐야 할지도 모릅니다.

‘니네 그렇게 어리석니? 사람은 머리가 좋아서 이렇게 모든 것을 등질적인 시공간으로 환원해서 해석하는데 너희들 눈에는 안 보이고 너희들 머리로는 생각할 수 없으니까, 니네들은 지렁이고 니네들은 풀잎이지?’
이렇게 물으면 지렁이나 풀잎의 입에서는 어떤 말이 나올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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